수원역 집창촌 [포토뉴스]

입양가족 [경기포토]

입양가족. 사진=윤원규기자

[경기만평] 정신 번쩍...?!

[사설] 평범한 동굴로 해냈던 ‘관광’ 광명시/‘세계 최고 꿈’ 백지화로 신뢰 잃다

광명시의 꿈 하나가 사라졌다. 목조 전망 타워 건립 사업이 백지화됐다. 세계 최고 높이로 추진되던 건축물이다. 시가 이 사업의 백지화를 공식 발표했다. 사업비로 지원받았던 국비 40억원도 반납한다고 밝혔다. 타워는 광명시가 2018년부터 추진해왔다. 산림청 공모 사업에 선정되면서다. 광명동굴 인근에 높이 90m, 총 면적 690㎡ 크기로 설계됐다. 광명시의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될 거라며 많은 홍보를 했다. 백지화 사유는 개발제한구역 해제 지연인듯싶다. 시 관계자는 개발제한구역 해제 절차에 앞으로 길게는 3년까지 더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전망 타워 건립 사업을 백지화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주장대로면 사업 추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이 막힌 것이다. 관계자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재추진에 대한 미련도 말한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이 사업을 재개할 방침이라고 했다.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런데 처음부터 의구심을 갖게 한 구석이 있었다. 이 전망 타워는 순수 목재로 만드는 건축물이다. 산림청이 함께 머리를 맞댄 것도 그래서다. 그런 만큼 현실화에 여러 제약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여기에 행정 절차까지 처음부터 매끄럽지 않게 갔다. 애초 계획은 2021년 말 완공 및 개관이었다. 이게 2022년 상반기로 연기됐다. 그때 사유도 개발제한구역 해제 절차 지연이었다. 백지화 사유와 같다. 같은 문제를 2년 끌다 포기한 것이다. 백지화로 광명시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동안 투입한 설계비 등 2억여원이 사라졌다. 반환해야 할 국비 40억원도 보이지 않는 손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손실은 시민에 준 실망이다. 산림청과 한 사업이었다며 한 발 뺄 일이 아니다. 개발제한구역 해제라는 국가 사무의 한계라고 변명하면 안 된다. 하겠다고 선언했던 게 광명시다. 두 손 들고 포기한 것도 광명시다. 다 광명시 책임이다. 지방자치 이후 지자체에 생긴 고질병이 있다. 세계 최고에 대한 의미 없는 집착이다. 기네스북 등재에 소진된 행정력이 숱하다. 광명시의 이번 실패에도 그런 과욕이 있지 않았나 자성해야 한다. 현재 세계 최고 80m를 뛰어넘는 높이 90m의 세계 최고 건축물 건립이라는 결과에 매몰된 구상 아니었나 생각해 볼 일이다. 혹여 그런 측면이 있다면 이제라도 잊는 것이 좋다. 추후 재개라며 희망 고문 사서 할 필요 없다. 지상 500m가 넘는 롯데 월드 타워가 있다. 100m 이상을 치고 올라간 건물은 즐비하다. 목조로 지었다는 사실 외 주목할 것 없는 90m 건축물이었다.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렸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공교롭게 예정 부지 옆에 광명 동굴이 있다. 그저 버려진 흔한 탄광 동굴이었다. 그 평범함에 아이디어와 행정력이 투입돼 관광 기적을 이뤘다. 거기엔 세계 최고 목표도, 전국 최대 목표도 없었다.

[경제프리즘] 순서를 건너뛰는 봄은 없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오랜 기간 주변에 기승하는 동안 라이브 스트리밍 플랫폼과 같이 활성화된 것도 많지만, 세계적으로 전염병 유행이 장기화함에 따라 통제받는 게 더 많아진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러나 코로나19도 벤처기업의 확산은 막지 못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최근 발표한 20년도 벤처투자 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코로나19발(發) 경제 불황 속에도 벤처투자가 4조3천45억원, 벤처투자 결성액은 6조원으로 역대 최고 실적을 경신했으며, 투자 건수도 4천231건으로 지난해 대비 13.9% 증가했다. 더 나아가 1분기 투자, 펀드 모두 1조원 이상 돌파하는 등 벤처 붐이 조성됨에 따라 장기간 사그라져 있던 한국 경제의 불을 지펴 주었다. 벤처기업의 활약은 90년도 IMF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적 암흑기에도 빛났다. 신생 IT기업을 중심으로 이른바 제1벤처붐이 조성되면서 이 시기 벤처기업의 성장은 일자리 창출 등 한국 경제의 판도를 뒤바꿨는데, 이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카카오도 만들어졌다. (주)카카오는 벤처붐 이후에도 꾸준히 국내세계적 입지를 넓히고 있으며, 더 나아가 65개 스타트업에 투자를 유치하는 등 현재에도 눈부신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앞서 말한 사례를 보면 갑작스러운 경제적 위험요인이 발생하는 상황에 재빠르게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는 기업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다양한 사업아이템을 보유하고 도전정신이 무궁한 기업, 바로 벤처스타트업이 현 시기 경제 활성화를 책임지는 중대한 핵심요소가 됐다는 것을 체감하며 지속적인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과 확산이 필요하다고 본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벤처스타트업의 열기를 확산하고 경제 재도약을 응원하고자 제2벤처붐 챌린지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의 참여는 단순한 이벤트를 떠나 벤처스타트업에게 마음의 투자를 한다는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아울러 인천지방중소벤처기업청도 인천지역 창업벤처 유관기관 정책설명회를 통해 벤처스타트업의 중요성을 알리는 등 제2벤처붐 열기 가속에 동참하였다. 또한 인천병무지청과의 업무 협약을 필두로 여러 기관과 협력하여 창업벤처 희망자들의 저변 확대는 물론, I-COMEUP 등 여러 행사를 개최하여 인천지역 벤처스타트업 창업 생태계를 활발히 조성할 계획이다. 할 볼란드의 겨울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봄이 순서를 건너뛰는 법도 결코 없다라는 명언은 힘든 시기의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또 제2벤처붐으로 대한민국 경제에 다시 봄이 오고 있는 현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어렵게 다가온 한국경제의 봄이 저물지 않도록 우리 경제의 회복과 도약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벤처스타트업이 대성하길 희망한다. 유동준 인천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사설] 제물포고 이전 갈등 해결 인천시가 나서야

지난 3월부터 시작한 제물포고등학교의 송도 이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지역 내 주요 갈등요인으로 지속되고 있다. 인천시교육청과 제물포고등학교가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기존 학교를 재배치하는 것을 그 타당성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지역민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제물포고의 학생 수 감소를 이유로 신도시로 이전하는 것에 대해 쉽게 납득할 수 없고, 대안으로 제시하는 교육복합단지의 명분과 실효성에도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민들의 우려에 대해서 해당 자치구인 중구와 동구의 의회도 나서 주민설명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주민 의사를 확인하면서 공식적으로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시교육청이 제시한 대안에 대해 동의할 수 없고 앞으로 재건축과 재개발에 따른 인구유입 등 학령인구 증가요인과 공교육 정상화 노력 등이 반영되지 않아 이전은 철회돼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는 입장이다. 제물포고 이전에 대해 시교육청과 지자체 그리고 주민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모습으로 조속한 갈등해결 방안의 모색이 절실하다. 갈등해결 방안의 모색을 위해서는 제물포고 이전의 지역적 특성을 공감하는 데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1954년 동인천에 설립된 제물포고는 인천지역의 명문고로 줄곧 자리 잡아 왔다. 1960~70년대에 서울 명문대에 무더기로 합격자를 배출하는 등 명성을 날려 인천을 대표하는 고등학교다. 인천의 유명인사 다수가 제물포고 출신이며 한때는 제물포고 출신이 아니면 인천에서 행세하기가 어렵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따라서 유명인사들로 구성된 제물포고등학교 총동창회가 이전을 촉구하고 지원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주민들의 우려를 자극하기도 한다. 지역의 명문 고등학교는 단순한 교육의 경제적 논리만의 역할보다 보이지 않는 사회경제적 기여가 훨씬 크다. 우리나라는 교육의 열정이 높아서 교육인프라가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은 단순한 수치로 설명하기 어렵다. 과거 서울 강북의 명문 고등학교가 강남개발에 따른 이전으로 형성된 강남 8학군이라는 명성 때문에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는 모습이 그 대표적이다. 인천은 원도심과 신도시의 양극화는 날로 심화 되가는 모습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도심의 재생을 시정의 핵심과제로 설정하고 행정과 재정적으로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제물포고 이전으로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해 있는 현실을 인천시는 직시해야 한다. 원도심 재생을 통한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제물포고 이전에 대해 인천시가 앞장서서 해결을 모색하는 진정성을 보일 때이다. 시교육청과 지자체 그리고 주민들 간의 대립을 더 이상 지켜만 보지 말고 크고 먼 시야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는데 인천시는 적극 나서야 한다.

[지지대] 백신 지식재산권 면제

지인이 6월 첫 주에 미국으로 40일간 트레킹을 간다. 코로나 시국이라 많은 이들이 걱정을 하니, 미국 앵커리지 공항에서 관광객 모두에게 무료로 백신 접종을 해준단다. 알래스카주는 지난 4월 이미 모든 주민이 맞을 백신을 확보하고 있다면서 나머지 여유분은 관광객에게 제공해 침체됐던 여행업을 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에선 백신관광이 시작됐다. 미국에선 코로나 백신이 넘쳐 각 주(州)에서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하는데, 또 다른 국가에선 백신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백신 개발과 확보, 접종에 국가간 기술과 힘이 작용하면서 백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하다. 포스트 코로나19를 대비하고 선도하기 위한 국가간 기싸움도 치열하다. 화이자와 모더나, 얀센, 노바백스 등 코로나19 주요 백신 개발과 생산을 주도하는 미국이 백신 지식재산권을 풀겠다고 한다. 지재권을 주장하지 않을테니 알아서 개발하라는 식이다. 백신 특허를 공개하고 복제 생산을 허용하면 세계 곳곳에서 백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미국의 지재권 면제 이면에는 백신이 남아 도는데다, 인도의 심각한 상황 등 글로벌 압박이 있었다. 중국러시아가 개발도상국 등에서 백신외교를 펼치는 상황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백신 지재권 면제를 발표했으나 넘어야 할 장벽이 높다. 백신 개발과 접종에 기술력과 돈, 안정적 수급과 배송, 의료기술 등의 능력이 갖춰져야 한다. 백신 레시피를 줘도 못 만드는 나라가 많다. 때문에 지재권 면제보다 백신 수출 제한을 푸는게 더 현실적이란 지적이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특허권 제공이 더 많은 사람이 백신을 사용할 수 있는 해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수출과 생산을 늘리는 것이 위기를 해결하는 해법이라고 했다. 코로나 재앙을 빨리 끝내려면 백신 지재권도 면제하고 생산수출도 늘려야 한다. 자국민만의 백신 접종으로는 코로나 종식이 어렵다. 변이 바이러스도 번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처럼 백신의 보편적 접근권과 지재권의 한시적 유예가 필요하다. 미국과 EU가 백신 증산과 공평한 배분을 위한 최적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2. 대한민국 임시정부 살림꾼 연미당·파수꾼 엄항섭

엄항섭이 1922년 졸업과 동시에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에 임시정부는 내분으로 지리멸렬하는 분위기였다. 수립 초기에는 지사들이 몰려들어 북적됐으나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가 독단적인 행보를 걷었다. ■ 임시정부 파수꾼임을 자임하다 그런 이승만에 불만을 품은 국무총리 이동휘마저도 임시정부를 떠났다. 더욱이 항일투쟁 방법론을 둘러싸고 극심한 반목과 갈등은 수습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그야말로 임시정부는 유지하기 어려운 형국으로 내몰렸다. 특히 경제적인 곤궁으로 청사 집세는 물론 임시정부 요인들은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극한 상황이었다. 반드시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고 굳게 결심한 그는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해 요인들 끼니 해결에 앞장섰다. 나아가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는 단순한 생계 해결에만 그치지 않고 일본영사관 정보를 수집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백범일기에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엄항섭군은 뜻있는 청년으로 지강대학을 졸업 후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프랑스 공무국에 취직했다. 그가 프랑스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倭)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해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엄항섭은 임시정부가 1920년대 중반에 당면한 극심한 고난을 극복하는 윤활유와 같은 청년이었다. 백범은 엄항섭에게 아버지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한 백범은 임시정부를 활성화 방안으로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헌법개정기초위원으로 참여해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 채택은 파격적인 행보였다. 연미당 엄항섭 큰 아들 엄기동 큰 딸 엄기선 모습. ■ 엄항섭 헌신적인 활동, 임시정부 존립 밑거름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에야 충칭에 안착했다. 우선적인 과업은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 창설이었다. 가릉빈관에서 성대한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이 9월17일에 거행됐다. 중국국민당을 비롯해 외국사절 등 200여명이나 참석하는 등 항일투쟁 의지는 엄청나게 고조됐다. 행사를 주관한 주인공은 바로 엄항섭이었다. 그는 창설된 광복군의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미주 교포들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할 때도 앞장섰다. 미국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군사적인 활동상을 교민사회에 자세하게 보도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맡아 이념을 초월해 항일무장 대오를 견결하게 만들었다. 임시정부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존립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엄항섭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다. 열정적인 활동은 임시정부를 유지ㆍ존립시키는 원천이었다.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으나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정파나 이념을 초월한 진지한 태도는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밑거름이었다. 그에 대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나 젊은 일꾼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미사여구가 아니다. 해방 후 엄항섭은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환국했다. 국내에서도 이전처럼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백범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 이름으로 활동할 공간은 너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동참했다. 남북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정부가 수립됨으로 결국 한민족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고 말았다. 더욱이 스승처럼 모시던 백범이 흉탄에 서거하면서 통일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김구는 흉탄에 의해 서거했고, 김구의 평생 동반자였던 엄항섭은 장례식 때 추모사를 읽고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가슴 깊숙이 용솟음치는 슬픔을 느낀 사람은 바로 엄항섭이었다. ■ 부부 얼룩진 삶에서 남북분단을 실감한다 임정 요인 환국한 엄항섭은 조완구와 함께 김구의 측근으로 보좌했다. 문장에 뛰어나서 김구 명의로 발표하는 성명서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을 대부분 기초했다. 엄항섭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북측의 모시기 공작 대상으로 납북됐다. 이후 엄항섭 등 재북 인사들은 1954년 제네바 회담을 계기로 자신들의 통일 방안을 설명하기 위해 북측 대표 외에 자신들의 대표단 파견을 북측 당국에 요구했다. 그 결과 엄항섭과 권태양이 대표로 선발돼 모스크바로 파견됐으나 스위스 당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1956년 7월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됐다. 이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돼 1962년 7월30일 숨을 거둬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연미당 가족은 월북가족으로 오해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연미당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를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경제적 어려움과 과로로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오랜 세월을 병마와 싸우다가 사망했다. 이들 가족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과 괴로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들 부부와 같이 통일된 조국 땅에 유해를 모시는 일이야말로 남겨진 또 다른 숙제임이 분명하다. 부부 만남을 바라는 이유는 평화적인 남북통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애국지사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