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공연, 미리 보고 직접 선택한다

경기문화재단과 의정부예술의전당은 오는 15~18일 의정부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2016 경기공연예술 창작쇼케이스’를 개최한다.문화재단의 ‘2016 전문예술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된 10개 공연예술단체가 신작을 발표하는 자리다. 이번 쇼케이스를 통해 5개 단체를 선정해 ‘2단계 지역초연’과 ‘3단계 초청공연’ 등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에 공연 단체에게 중요한 자리이지만, 일반 관람객에게도 다채로운 장르의 공연의 ‘엑기스’만 모아 관람할 수 있고 직접 평가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무대다. 쇼케이스 첫 날인 15일에는 누구에게나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밖에 없는 죽음이라는 경험의 내면을 다룬 다원예술 강박3-첫 경험(박경미 미디어 공연기획)이 오른다. 이어 기다림의 미학을 표현한 설탕이 녹는데 걸리는 시간에 대한 연구(머리다리)와 비극적인 운명이 빚어낸 한 모자의 슬픈 이야기를 다룬 엄마의 환상곡(극단 아이터), 평생 한 곡만 부른 가수의 갱년기 이야기를 담은 연극 꽃불(극단 불의전차) 등이 잇달아 무대에서 펼쳐진다. 17일에는 음악과 움직임, 설치미술 등을 결합한 작품 청각적 번짐현상(김소은 프로젝트)과 매직큐브 인형극 꽃담(극단 스토리), 전래동화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천지창조(전통연희단 꼭두쇠)를 볼 수 있다. 마지막 날인 18일에는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빈센트 반(같이[가치])과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된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담은 인어할멈(창작그룹 오기), 벽상갈화의 전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룬 전통예술 공연인 벽상갈화(한뫼국악예술단) 등이 첫 선을 보인다. 각 공연 관람 신청은 의정부예술의전당 홈페이지 (www.uac.or.kr )에서 하면 된다. 공연과 함께 15일 의정부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에서 ‘문화예술지원사업이 지역에 미치는 효과’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도 연다. 지역 문화예술지원사업이 지역에 미치는 경제·사회·문화적 효과를 상주단체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장이다. 한국문화경제학회 서우석 교수와 성균관대학교 차민경 겸임교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정상철 교수 등이 발제자로 나서 관람객 대상 설문조사와 도 공연시설 운영현황 통계자료 등을 토대로 상주단체 운영성과 및 관련 지원사업의 방향성을 제안할 예정이다. 문의(031)828-5833

[의학칼럼] 위식도역류질환

위식도역류질환은 흔히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하며, 위액이나 위산이 섞인 위 내용물이 식도로 역류하여 타는 듯한 가슴 쓰림이나 신물 올라오는 증상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과거에는 서양에서 흔한 질환이었으나,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비만 및 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환자 수가 크게 증가하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2008년에 199만명이던 위식도역류질환 환자가 2012년에는 336만명으로 70% 가까이 급증, 40-50대의 중장년층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식도역류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슴 쓰림 외에도 목의 불편함, 기침 등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문가에 의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며, 재발이 잦고 만성적으로 삶의 질을 저하시키므로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위식도역류질환을 진단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이다. 가슴 쓰림과 같은 전형적인 증상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약물 치료를 했을 때 증상이 효과적으로 개선된다면 다른 특별한 검사 없이 위식도역류질환을 진단할 수 있다.하지만 위암과 같은 심각한 위장 질환에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 위내시경 검사를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위내시경 검사를 시행한다. 내시경 검사에서 위와 가까운 식도에 길쭉한 모양으로 점막이 헐어 있으면 위식도역류질환으로 진단할 수 있다. 하지만 위식도역류질환이 있는 사람 중 약 절반 정도는 내시경 검사에서 이러한 소견이 관찰되지 않아, 24시간 식도산도검사라는 특수한 검사를 시행해서 위산의 역류를 직접 확인하기도 한다. 목이 불편하거나 가슴 통증, 오래된 기침 등과 같은 증상이 있다면 폐와 심장, 인후두 부위에 다른 질환이 없는 지 함께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위식도역류질환의 치료 방법은 생활 습관의 교정, 약물 치료, 내시경 및 수술적 치료 등이 있다. 대부분의 환자는 우선 생활 습관을 교정하면서 약물 치료를 하게 된다. 환자가 비만하다면 배의 압력이 높아서 역류가 심해지므로, 체중 감량을 통해 역류를 줄여 증상이 개선될 수 있다.

광주시, 교통 요충지로 도약

광주시가 경강선, 제2영동고속도로, 성남~장호원간 자동차전용도로(일부) 등의 개통으로 사통발달의 교통 요충지로 떠오르며 지역발전이 한층 빨라질 전망이다.지난 9월 24일 성남에서 광주를 거쳐 여주까지 잊는 경강선 개통은 광주시 교통 인프라 발전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광주지역 4개 역사에서 하루 평균 2만~2만 2천명이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경강선은 분당, 서울을 빠르고 편리하게 오갈 수 있어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아울러 지난 11일에는 원주로 연결되는 제2영동고속도로와 성남~장호원간 자동차 전용도로 초월읍 구간 2.8km가 추가 개통됐다.이번 개통으로 영동권과의 교류가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되며, 특히 1개 차로만 개통됐던 성남~장호원간 자동차 전용도로 백마터널의 3차로가 전면 개통됨에 따라 교통정체를 겪고 있는 국도 3호선과 쌍동IC의 극심한 정체가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조억동 광주시장은 “성남 ~장호원간 자동차 전용도로가 내년 말 완전히 개통되는 등 광역 교통망에 발맞춘 대중교통의 합리적 노선개편, 관내 전역을 아우르는 지역도로망 구축, 역세권 개발 사업 등 체계적인 도시개발사업으로 광주시가 수도권 교통 중심 요충지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엄태익 수원 하이유외과 원장의 여성공감] 갑상선에 결절이 있다고 하네요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발견된 목에 튀어 나온 혹 이것이 무엇이지 하면서도 통증이 없어 검사를 미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에 있는 갑상선에서 생긴 혹을 갑상선 결절이라고 합니다. 목에 만져지는 혹이 딱딱하고 잘 움직이지 않으면 꼭 검사를 받아보셔야 합니다. 목소리가 쉰다거나 이물감이 느껴지고 기침이 잦게 나온다면 증상이 더욱 심해지기 전에 상담을 받아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갑상선 결절은 크게 양성결절과 암으로 구분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갑상선 초음파를 시행하게 됩니다. 초음파 검사에서 혹의 모양을 판단하고, 좀 더 정밀하게 검사할 필요가 있을 때는 미세세침흡입검사를 시행하게 됩니다. 갑상선암으로 진단되었을 경우 갑상선전문의와 상담을 통해서 치료방침을 정하셔야 합니다. 환자의 나이, 암의 위치, 크기, 암의 종류에 따라서 치료방침이 달라지게 됩니다. 양성 혹일 경우는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대부분 증상이 없고, 몸에 영향을 주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부위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진다면 주위 조직에 압박할 수 있고 외형적으로 튀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럴 경우에는 해결을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갑상선 양성 혹의 개선을 위한 방법으로 고주파 치료가 있는데 갑상선 혹의 크기와 상태와 따라서 치료 방침을 정하게 됩니다. 갑상선고주파 치료는 바늘 끝을 혹 안에 넣고 고주파를 흘려 보내서 혹을 파괴시키는 방법입니다. 국소 마취로 시술하고 시간은 20분 정도 걸립니다. 갑상선 혹은 혹의 모양, 위치, 성격에 따라서 치료법이 다르게 됩니다. 혹이 괜찮은 양성 혹인지 치료가 필요한 것인지를 알고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갑상선전문의의 진료를 받아보시길 바랍니다. 엄태익 수원 하이유외과 원장

[역사를 지켜낸 경기도 산성을 가다] 36. 수원고읍성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을 아는가.놀랍게도 수원고읍성은 사도세자와 정조가 잠들어 있는 화산 융건릉 주변이다. 사실 ‘수원고읍성’이란 용어는 최근에 생겨난 것이다. 수원읍성이란 이름 사이에 ‘고(古)’라는 글자를 덧붙인 것은 현재 통용되는 행정구역상의 명칭과 구분하기 위함이다.“화성시에 화성이 없고 수원시에 수원이 없다”는 말에서 짐작하겠지만, 1949년 8월 행정구역 명칭을 제정할 때 당시 담당자들이 수원이 돼야 할 곳을 화성이라 하고 화성이라 불러야 할 곳을 수원이라 이름 붙이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저질렀다.조금만 깊이 생각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것이 혼란을 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이 터무니없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다.수원고읍성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그 역사는 오래됐다. 수원이라는 고을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271년(고려 원종12년)이다.1789년 정조가 팔달산 자락으로 수원읍치를 옮기기 전인 220년 전만해도 융릉과 건릉이 자리한 화산이 수원고읍성의 중심이었다.수원에 관한 최초의 종합보고서라 할 세종실록지리지 ‘수원도호부’를 보면 “본래 수원은 고구려의 매홀군인데 △신라가 수성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가 수주(水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13년 계사(1413)에 수원도호부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일찍부터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한강유역을 백제가 가장 먼저 차지했던 역사를 미루어보면 수원은 백제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수원읍성의 축성된 시기도 백제 초기(온조왕 11년 7월)에 독산책(독산성)을 설치했던 무렵으로 짐작된다. 지리지에서 주목할 것은 “읍토성(邑土城) 둘레가 270보요, 안에 우물 두 개가 있다”라는 기록이다. 읍성의 규모치고는 너무나 작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모두 “읍성은 토축이며 둘레가 4천035척이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지리지의 기록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판각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글자를 하나 빠트렸을 가능성이 크다. 수원고읍성의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변 지리를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꼽을 점은 수원고읍성이 독산성과 서로 ‘기각지세(角之勢)’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원이 중국과 직접 문물을 교류할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수원고읍성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투쟁이 벌어졌을 것이다.따라서 독산성을 비롯해 주변에 있는 수기리성, 요리성, 당성을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수원은 고려시대에 4개 역(驛)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으며, 염불산 해운산 흥천산으로 연결되는 봉수, 즉 통신망도 갖추고 있었던 곳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는 수원이 전략상으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수원은 강무하고 매사냥을 하기 좋은 장소였다. 예컨대 세종이 왕세자와 종친을 거느리고 수원에서 강무(講武)를 벌였던 것을 비롯해 매사냥을 했던 사실도 여러 차례 실려 있다. 책만 보았던 학자 세종이 아니라 수원 들판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말을 달리며 멧돼지를 사냥했던 문무겸전의 세종을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수원이 조선의 역사에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다. 선조실록을 보면 1593년 겨울, 왕세자(광해군)가 저녁에 수원부에서 머물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수원을 거론할 때면 “수원은 경기의 큰 고을로 양호(兩湖)의 요충지이자 서울의 보장지”라거나 “실로 우리나라의 정예로운 군병이 있는 곳”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임진왜란의 전개과정을 기록한 난중잡록 1592년 7월에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에 이르러 5일간을 머물렀다”고 했고 10월에는 “전라감사 권율이 수원 독성에 있으면서”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수원고읍성은 독산성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중요하게 활용됐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수원산성(水原山城)’이라는 원문이 네 차례 나온다. 수원부의 독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수원산성으로 표현된 고읍성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임진왜란 이후 수원고읍성에서 십리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독산성은 더욱 주목되는 군사요새로 발전됐다.1610년 1월, 비변사가 “경기 지방의 산성이 무려 열일곱 곳이나 되는데 적이 물러간 뒤로 점점 폐지되고 오직 수원의 독성만이 꾸준히 수리되어 왔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광해군은 왕세자 시절부터 수원의 지리적 여건과 상무적 풍토를 주목했다.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종묘나 성균관에 거둥할 때 수원에서 병사를 뽑아 호위를 맡겼을 정도로 의지했다. 덕분에 수원은 무향으로 발전했다. 효종은 수원의 군병이 훈련도감보다 많고 실력도 낫다는 신하의 평가를 듣고 “수원은 본디 무향(武鄕)”이라고 하였다.실록을 보면 이때부터 수원의 군병이 7천 혹은 8천이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 무렵 수원고읍성 안에 왕이 거처할 수 있는 별당을 마련했는데, 시설이 확장돼 숙종시대에는 ‘행궁’으로 승격했다.이 무렵 행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읍성이 보수됐을 것이다. 숙종이 노량사장에서 군병을 친열하면서 “수원의 군병은 가장 정예하다”라고 했던 칭찬이나 “수원의 7천 병마는 본래 날래고 사납다”라는 대신의 말은 ‘무향’ 수원의 실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760년 초가을, 사도세자가 수원고읍성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때 사도세자는 화산에 올라 효종이 묻히려 했던 곳을 둘러보고 독산성을 방문해 무예를 시험하고 활을 쏘았다. 이러한 사도세자와 수원고읍성의 인연은 아들 정조에게도 이어졌다.1789년 초가을,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 강무당이 있던 화산으로 옮기면서 수원읍성에 살던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유천마을(현재의 세류동)로 이주시켰다.관아와 강무당을 비롯하여 수원읍성에 즐비하게 서 있던 건물도 팔달산 아래로 옮겨졌다. 10월6일에 천장을 마치고 정자각에서 하룻밤을 지낸 정조는 다음날 아침 일찍 화산에 올랐다. 산을 내려온 정조가 신하들을 둘러보며 했던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산은 화산이니 꽃을 많이 심으면 좋겠다” 정조는 명에 따라 화산을 비롯하여 화성과 독산성 주위에도 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었다. 관아와 민가의 이전으로 훤하게 된 빈터에는 소나무와 꽃나무가 자랐다.이때 화산과 성황산 자락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원찰 용주사를 중창하면서 수원고읍성은 역사의 뒤란으로 묻히게 됐다. 고려시대부터 500년 이상 번영을 누리던 수원고읍성은 순식간에 소나무와 꽃나무로 둘러싸인 한적한 곳이 되었던 것이다. 현재 수원고읍성은 물론 성벽도 허물어져 원형을 간직한 곳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성벽이 서 있던 자리만 몇 군데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잊혔던 수원고읍성 주변이 최근 택지지구로 개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수원고읍성은 경기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25,000의 1과 50,000의 1 지도에도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에 수원고읍성의 일부가 표시돼 있다.융건릉매표소 부근을 공사할 때 관청건물지로 보이는 초석들이 발굴됐다. 이를 통해 수원고읍성의 주요 시설물들이 융릉 주변에 서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원대학교 도서관 건물 쪽에도 성터가 남아 있다.현지 주민들이 ‘고수문(古守門)’이라 부르는 곳인데 수원고읍성의 서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지점이다. 성벽의 흔적은 수원대 도서관 건물부터 수기리까지 연결되어 있다. 치리고개에 북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남문터는 융릉 건릉의 건너편 도로변에 남아 있다.치리고개에서 화산을 오르면 산허리 중간쯤에 융릉경내를 알리는 입산금지 표식이 있고, 건릉 경내를 표시하는 철조망이 쳐 있는 곳에 성터가 남아 있다. 따라서 수원고읍성은 성황산과 화산을 연결하는 능선과 골짜기를 포함하여 축조된 포곡식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수원고읍성을 둘러보며 스스로 다짐했다. “설령 한 줄의 기록이나 한 점의 유물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역사는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빈 곳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채워내는 작업도 인정하는 풍토라야 우리의 역사가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김상돈 만평] 하야하라! 퇴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