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방송되는 KBS 1TV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봄김치가 소개된다. # 정읍의 흰민들레김치 포근한 봄 햇볕에 완연하게 피어 얼굴을 뽐내는 꽃들. 오혜숙(58), 홍금식(63) 부부는 꽃밭에서 흰민들레를 뜯는 일에 한창이다. 흰민들레는 예전에는 흔했지만, 지금은 보기 힘든 토종 꽃으로 아삭한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약초인지라 혜숙 씨는 이맘때가 되면 꼭 무쳐 먹곤 한단다. 흰민들레에 머위, 부추를 뜯어 넣고 직접 만든 산야초효소를 더해 후다닥 무쳐낸 흰민들레벼락지를 먹으면 그제야 제대로 봄을 맛보는 것 같다고. 앞뜰에서 뜯은 토종 뒤안마늘에 담백한 가자미 액젓을 넣고 무쳐낸 뒤안마늘김치, 상큼한 앵두식초와 코가 뻥 뚫리는 갓 씨앗을 넣어 만든 새콤한 콩나물잡채 또한 혜숙씨 부부가 즐겨 먹는 봄김치란다. 여기에 빻아 넣는 보석모양의 소금 덩어리는 34년이 된 씨간장 항아리 밑바닥에 생긴 귀중한 소금으로 혜숙씨가 애지중지하는 천연 조미료라고.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겨운 풍경, 그 속속들이 숨겨져 있는 혜숙씨의 보물, 천연 조미료를 더한 혜숙씨 부부의 향긋한 봄김치 밥상을 만나러 간다. # 무안 홍갓김치 밥상 시원하게 펼쳐진 함평만을 끼고 있는 전라남도 무안. 청갓에 비해 붉은빛을 띠는 홍갓은 과거 무안지역에서 많이 재배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재배하는 곳이 많지 않아 잊혀가지만, 다른 갓에 비해 특유의 톡 쏘는 향이 강해 홍갓을 먹고 자란 사람들은 그 매운맛을 그리워한다고. 김호(76)씨는 이런 홍갓의 맛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 맛을 지키고자 며느리에게 홍갓김치 담는 법을 전수하려 한단다. 특히 홍갓은 무안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숭어와 궁합이 좋아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숭어회에 고추냉이 대신 홍갓잎을 싸먹으면 그 맛이 최고라고 한다. 확독에 간 생굴과 풋마늘을 넣은 홍갓김치, 홍갓잎을 넣은 얼큰한 숭어매운탕 등 어렸을 적 친정어머니가 봄이 되면 담아주던 홍갓김치와 숭어요리의 그리운 맛을 재현한다. # 부여 참죽나무순 김치 밥상 충청남도 부여, 밤나무가 흐드러진 야산. 김석자(57)씨는 양지바른 곳에 하나둘 얼굴을 내민 참죽나무 순을 뜯느라 손이 바쁘다. 이맘때쯤이면 산에 두릅, 엄나무 순 등이 한꺼번에 올라와 마음이 급하다고 한다. 막내인 석자씨를 돕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와 준 언니들을 위해 석자씨는 예전부터 즐겨 먹었던 참죽나무순 김치를 담는다. 몸에 좋고 귀해 보약나무라고 불리는 참죽나무 순은 특유의 고소한 향과 쌉싸름한 맛이 중독성 있어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봄채소란다. 참죽나무 순에 무말랭이와 건오징어채를 넣고 무쳐낸 참죽나무 순 김치는 숙성될수록 깊은 맛이 난다. 또 이른 봄 수확을 끝낸 달달한 알밤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쌉싸름한 엉겅퀴를 뜯어 함께 무쳐낸 엉겅퀴알밤깍두기는 입맛 사로잡는 별미음식이란다. 고된 일상을 보내고 맛보는 봄기운이 가득한 밥상, 쌉싸름하지만 꿀처럼 달콤하게 느껴질 시간. 다섯 자매의 봄김치 밥상을 만나러 간다. # 과일김치 밥상 충청북도 괴산 각연사. 풍경이 아름다워 천년고찰이라 불리는 이곳을 찾은 표복숙(64)씨는 겨우내 힘겨운 수행에 지친 스님을 위해 기운을 복돋워 줄 봄김치 공양을 준비한다. 각연사 뒷마당, 바위 사이사이 고개를 내민 돌나물은 석상채(石上菜)라고도 불리며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식감이 좋아 물김치를 담으면 맛이 좋단다. 절에서 저장해두고 먹는 각종 과일에 고춧물과 생강, 연근을 넣어 만드는 과일김치는 과일의 달콤하고 시원함에 생강의 따뜻한 기운이 더해져 봄철 떨어진 기력을 보강해주는 음식이라고 한다. 여기에 각연사 앞마당에 심어진 화살나무 새순으로 만든 홑잎버무리는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나는 떡으로 시원한 물김치와는 최고의 궁합이란다. 겨우내 저장해놓은 김장 김치가 떨어지는 김치 춘궁기, 스님들에게 생기를 더해줄 사찰의 봄김치를 찾아간다. '한국인의 밥상'은 오늘(2일) 오후 7시 40분 방송된다. 장건 기자
1911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재학 중이던 21세의 안재홍은 자신의 호를 민세(民世)로 정했다. 민세란 민중의 세상이란 뜻이다. 그의 하숙방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도의 밤노래란 시가 걸려있었다. 바다에 가을빛 저무니추위에 놀란 기러기떼 높이 날아가네.근심 속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밤기우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고 있네 ■ 민중의 세상을 열기 위하여 충무공을 존경했던 민세 안재홍(1891~1965)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 두릉리이다. 예닐곱 살부터 향리의 가숙에서 한문을 배웠던 소년 안재홍은 사기를 읽고 내가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다고 다짐했을 만큼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을 구독하는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조숙한 아이였다. 한학에 열중하던 안재홍은 17세가 되던 1907년에 단발하고 평택의 진흥의숙을 거쳐 수원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했다. 정치, 지리, 철학 등 신학문을 배우고 미국독립전사, 월남망국사 같은 책을 독파하며 열렬한 애국청년으로 성장했다. 이곳에서 월남 이상재와 한서 남궁억 같은 애국지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1910년 8월 조선이 망했다. 안재홍은 이상재를 찾아가 미국으로 유학하려는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월남은 그에게 먼저 일본에 갈 것을 권하고 부친도 같은 입장을 밝히자 안재홍은 일본에 유학하기로 결정했다. 9월에 일본에 도착한 그는 1년 동안 청산학원에서 어학을 공부해 1911년 9월에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소식을 들은 안재홍은 벗조소앙과 함께 중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때부터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1913년 여름, 안재홍은 밀항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두 달 동안 북경과 심양을 비롯한 대도시를 둘러보며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채호, 김두봉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1914년 여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안재홍은 이듬 해 5월 중앙학교 학감으로 취직했다. 교장은 30년 연상인 유근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과 함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쓴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다. 기독교인이던 안재홍은 유근의 권유로 단군을 숭모하는 대종교 신도가 됐다. 1917년에 그는 학생들에게 불온한 언동을 자주 한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의 압력을 받아 학감을 사직했다. 1919년 겨울, 안재홍은 3ㆍ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에서 활동한 것이 발각되어 징역 3년을 살았다. 1922년에 출옥했으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2년 동안 고향에서 요양했다. 3ㆍ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대우를 크게 개선한 것처럼 선전했다. 그러나 1919년에 약 6천 명이던 경찰을 1920년에는 2만여 명으로 늘여 항일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밀정을 양성해 사생활까지 감시했다. ■ 민족단일전선 신간회를 만들다 1924년 봄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언론활동을 시작한 안재홍은 가을에 조선일보 주필로 자리를 옮겼다. 친일파 송병준이 운영하던 조선일보를 신석우가 사들여 월남 이상재를 사장으로, 안재홍을 주필로 영입한 것이다. 안재홍은 논설을 통해 일제가 선전하는 문화정치의 실상이 무단정치와 다를 바 없음을 비판했다. 보석 지연의 희생이란 논설로 일제의 감옥제도와 고문, 감옥 안에서의 비인도적 처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가 금고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3ㆍ1운동 이후 민족운동 내부에서 자치운동론이 등장했다. 조선은 독립할 능력이나 실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으니 일본으로부터 기술과 학문을 배워 실력과 자본을 축적한 다음 독립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재홍은 이러한 자치운동을 타협운동으로 규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1926년 겨울, 안재홍은 자신의 집에서 신간회를 결성하기 위한 비밀모임을 가졌다. 신간은 고목에서 나온 새로운 줄기라는 고목신간(古木新幹)에서 나온 것이다. 1927년 1월, 안재홍은 사설을 통해 신간회는 대일 타협의 우익노선에 대항해 비타협노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상해에 있는 신채호에게 편지를 보내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화요회, 북풍회, 서울청년회 등 공산주의자들과 자치운동론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을 규합해 창설된 민족합동전 신간회의 초대 회장은 이상재가 맡았다. 안재홍은 총무간사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민족대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유학생들에게도 신간회 참여를 권유했다. 1928년 5월, 일본의 중국침략을 비판하는 사설로 신문은 정간되고 안재홍은 8개월 간 징역을 살았다. 1929년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지도자들과 12월에 진상보고 회대회를 준비하던 중 다시 구속됐다. 야심차게 출발한 신간회도 위기를 맞았다. 신간회를 분열시키려는 일제의 공작과 주도권을 민족주의자들에게 뺏긴 공산주의자들이 신간회 해소를 주장했던 것이다. 안재홍은 어떠한 정치이념이나 정치운동도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1년 신간회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 감옥 드나들며 조선역사조선철학을 연구하다 1930년 1월부터 안재홍은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관견을 연재했다. 고대사를 주목한 것은 일제가 조선역사에서 가장 왜곡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듬해 6월, 여순감옥에 복역 중이던 단재 신채호에게 연락해 한국사 관련 원고를 신문에 연재하도록 주선했다. 잦은 옥살이로 건강을 해친 안재홍은 틈나는 대로 등산을 다녔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단군 유적이 전해지는 구월산에 오른 후 백두산 등척기와 구월산 등람기를 남겼다. 백두산에 올라 지은 시의 1절이다. 이 몸이 울어 울어 우레같이 크게 울어 망천 후 사자되어 온누리 놀래고저, 지치다가 덜 깬 넋이 행여나 다시 잠들리. 다산 정약용의 서거 100주년에 즈음한 1934년부터 안재홍은 정인보와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해 신조선사에서 출판했다. 1936년에는 민족혁명당의 김두봉과 연락해 청년 두 명을 중국 항주의 군관학교에 밀파하려다가 발각돼 종로경찰서에 구속됐다. 1937년에 보석으로 석방된 후 고향에 칩거하며 조선역사와 철학 및 문화를 아우르는 조선상고사감을 집필했다. 불행하게도 이때 부인이 별세하고, 장남 결혼을 며칠 앞두고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다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혔다. 형기를 마친 1940년에 고향집에서 집필에 힘을 쏟아 불함철학대전을 완성했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일경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발에 커다란 족쇄를 채워 영하 20도의 감방에 가두고 대소변을 볼 때나 잠시 족쇄를 풀어주는 혹독한 체벌을 가했다. 이때 대장에 냉상을 입고 코에 동상이 걸려 죽는 날까지 고생했다. 같은 사건으로 수감된 이윤재와 한징 두 분은 끝내 옥사했다. 1943년 3월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됐으나 절명시를 쓸 정도로 건강이 크게 나빠진 상태였다. ■ 해방, 미완의 다사리 공동체 1944년,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안재홍은 여운형을 만나고, 다시 송진우를 찾아가 민족진영을 강화해 좌익과 합동전선을 펴자고 제안했으나 송진우는 이를 사양했다. 12월 초, 안재홍은 총독부 고위관리를 만나 전후 치안유지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민족자주, 호양협력, 마찰방지의 3원칙을 제시하고 자신과 여운형에게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허용해 달라고 제의하여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1945년 1월에 총독부의 태도가 돌변해 3원칙 중 민족자주를 제외하지 않으면 폭력조직을 동원해 암살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8ㆍ15 해방을 맞았다. 16일 오후 안재홍은 휘문중학에서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했다. 민중들은 일제 치하에서 9차에 걸쳐 7년 3개월을 옥중에서 보낸 불굴의 지사의 구상에 공감했다. 안재홍은 중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여운형, 김규식 같은 지도자들과 함께 좌우를 아우른 통합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분투노력했다. 그러나 미소 강대국의 이해와 정치집단의 분열로 끝내 분단이 확정되고 말았다. 안재홍은 민족상잔인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다가 1965년 3월 1일에 서거했다. 민세 안재홍 선생이 우리 역사를 연구하며 정립한 다사리 이념은 분단시대를 극복할 정치철학이다. 곧 다사리란 모든 사람을 말하게 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살 수 있도록 해 건강한 복지사회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치철학이기 때문이다. 현충사 앞에서 벽초 홍명희와 함께한 안재홍. 김산 홍재연구소
당면 떡볶이가 2TV '생생정보'를 통해 소개되면서 시청자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2일 방송된 KBS 2TV '생생정보'에서는 '기다려야 제맛' 코너를 통해 당면 떡볶이가 소개됐다. '생생정보'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당면 떡볶이는 경기도 평택시에 소재한 분식집에서 판매 중이다. 자세한 위치는 '생생정보'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날 방송에서는 모둠 소 곱창구이와 볏짚 청국장, 연탄 돼지 불고기 등이 소개돼 시청자들의 입맛을 자극했다. 온라인뉴스팀
3ㆍ1운동이 일어난지 올해로 100년이 되었다. 안성에서 일어난 3ㆍ1운동은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4월 1일부터 2일까지 2일간 일제를 몰아내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2일간의 해방을 이뤄어 낸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안성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은 1919년 3월 11일이다. 이날 오전 11시경에 양성공립보통학교(현 양성초등학교)의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당시 양성면 덕봉리 출신으로 서울에서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다니던 남진우 학생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다니던 고원근 학생과 함께 양성공립보통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서울에서 3ㆍ1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회시간에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이후 안성장터와 안성공립보통학교로 번졌고, 4월 1일 원곡면, 양성면 독립 만세시위의 시작점이 되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양성초등학교에서는 함께 기억하는 100년 전 그날 기념식을 열고, 태극기 만들기 체험프로그램, 만세재현 행사, 독립선언서 낭독을 3월 11일 진행했다. 특히 양성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이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3ㆍ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르는 뜻깊은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작년 겨울에는 현매초등학교 학생들이 직접 탐방해 양성초등학교에서 만세운동 흔적을 찾기도 하였다. 현재 양성초등학교에는 비석만 세워져 있을 뿐 만세운동 항쟁지였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남진우 학생의 기록도 마을에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 지도교사였던 허영훈(안성 광덕초 교사)은 지역사회와 연계해 나가면서 잊혀져 있고 망각된 기억들을 함께 콘텐츠화 해나가는 작업을 통해 독립운동의 마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용한 화성 고정초 교사
평택교육지원청(교육장 양미자)은 4월 24일 평택시청소년문화센터에서 2019 평택 학교문화예술교육 진흥협의회를 개최했다. 이번 협의회는 평택시청 문화예술교육 관계자 및 평택시 문화예술단체 대표들을 위원으로 위촉해 △학교문화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한 각계의 지원 방안 △마을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진흥 방안 △혁신교육지구 사업과의 연계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며, 마을 문화예술교육 공동체 구축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진행됐다. 캠프에 참여한 한 위원은 문화예술교육은 학교와 학교 밖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기에 온 마을이 함께 교육을 한다면 보다 훌륭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며, 학생들의 문화예술교육이 보다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미디어경청종합
연천교육지원청(교육장 홍성순)은 4월 25일 연천군종합복지관 소강당에서 2019 연천 학부모 아카데미 개강식 갖고 회복적 의사소통을 주제로 한 첫 번째 강좌가 열렸다. 사단법인 갈등해결과 대화 상임대표 전상희 대표의 협력적 갈등해결에 대한 이해를 주제로 한 첫 번째 강좌는 부모와 자녀간, 가정 내 또는 공동체 간의 갈등 원인, 다양한 갈등의 접근방법 등의 내용으로 강의와 소그룹 나눔이 진행됐다. 2019 연천 학부모아카데미는 5주간 총 15차시로 4월 25일부터 매주 목요일 3시간씩 운영된다. 올해는 부모의 역량을 강화하는데서 한발 나아가 부모의 건전한 교육관을 정립하고 가정의 교육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소통의 기술, 공동체 관계 형성, 공감능력 키우기 등 실천형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가정 내 공감과 소통은 물론 교육공동체 울타리 안에서의 의사소통 역량을 강화하는데 교육의 초점을 두었다. 홍성순 교육장은 이번 학부모아카데미를 통해 부모로서 아이들이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어떻게 지지하고 응원할 것인가를 배우고 생각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가정의 관계와 소통 회복을 위해, 더 나아가 교육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협력적 해결을 위해 다양한 실천내용으로 구성돼 있어 기대된다고 말했다. 미디어경청종합
안성교육지원청(교육장 최기옥)은 4월 24일 대회의실에서 제25회 정민재단 장학증서 수여식을 개최했다. 정민장학재단은 1922년 안성시 고삼면에서 출생한 윤석헌 이사장이 설립한 재단이다. 윤 이사장은 안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 법과 및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 했으며, 필리핀 대사, 외무부 차관, 프랑스 대사, 유엔대사 등을 역임했다. 지난 1995년부터 안성교육발전을 위해 정민장학금을 수여해왔으며, 현재까지 2천17명의 학생들에게 5억 2천여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윤석헌 이사장은 젊은이라면,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말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인재가 되길 바란다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장학금 수여식에 참가한 한 중학생은 자신만의 목표를 위해 살아가던 제가 나중에 더 넓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들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미디어경청종합
의정부교육지원청(교육장 유종만) Wee센터는 4월 25일부터 관내 중ㆍ고등학생 15명을 대상으로 학업중단 예방을 위한 힐링 향기 아로마테라피를 실시하고 있다. 오는 6월 5일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되는 힐링 향기 아로마테라피는 학업중단 위기 학생에게 일정 기간 (1주~7주까지) 숙려 기간을 부여하고 상담 등 프로그램을 지원해 신중한 고민 없이 이뤄지는 학업중단을 예방하는 제도인 학업중단숙려제 예방 사업의 하나로 추진하고 있다. 순수한 식물성 오일을 매개체로 비누, 화장품, 디퓨져 등을 만드는 활동으로 구성된 가운데 식물에서 추출된 향기를 통해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고, 생활 속 용품들을 완성함으로써 성취감을 경험하게 한다. 한편, 의정부교육지원청은 △우리만의 리듬찾기 난타(음악치료) △제과제빵 진로 체험, 꽃이 들려주는 이야기(플라워 테라피) △한땀한땀 자수의 매력(프랑스자수) △바리스타 직업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학업중단 위기 학생의 학업 복귀를 도울 예정이다. 미디어경청종합
수원교육지원청(교육장 최순옥)은 4월 25일~5월 31일까지 2019 체험 중심 연극과 미디어 리터러시 직무연수를 실시한다. 이번 연수는 2015 개정교육과정의 현장 안착을 위한 체험 중심 연극과 미디어 리터러시 직무연수를 실시함으로써 교사의 교육과정 문해력과 재구성 능력을 향상시키고, 학생과 함께 만들어가는 수업 적용으로 학생들의 삶의 역량을 함양하고자 마련됐다. 수원 관내 초등교사 60명이 참석하는 가운데 학교 현장 교사들의 접근성을 고려해 북부(경기도교육복지종합센터)와 남부(선행초등학교)로 나눠 두 군데에서 연수가 진행된다. 연수 교육과정은 2015 개정교육과정의 이해, 체험 중심 연극의 이해와 실제, 미디어 리터러시의 이해와 실제, 사례 발표 및 적용 방안 등으로 구성됐다. 현장 교사들이 체험 중심 연극과 미디어 리터러시의 이론을 통해 충분히 이해하고, 직접 체험하며 다른 교사들과 수업에서의 사례를 나누고 자신의 수업에 실제 적용 가능하도록 15시간으로 편성했다. 미디어경청종합
경쟁사회에서 소외되는 농촌 학생들의 순수 예술 잠재성을 도자문화로 진로 역량 강화라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10명의 사람들이 포곡중학교를 중심으로 뜻을 모아 함께 하고자 한자리에 모였다. 사람들은 용인 지역에서도 가장 취약한 처인구를 처진구라고 불렀을 만큼 난개발과 취약계층이 많이 거주해 문화를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포곡중학교(교장 류성림)과 지역아동센터, 도자공방, 마을 이장, 어머니방범대장 등 지역 주민 10명이 마을과 함께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은 3년 전, 전대6리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포곡중학생과 전대리 거주 학생 30명을 인솔해서 2017 광주디자인비엔날래 견학을 가게 되었다. 마을과 처음 하는 사업이고 일주일이라는 촉박한 기간이지만 그간의 노하우가 있어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밤늦은 시각에 이장님이 학생들 체험활동 보험 가입을 못했다고 전화를 하셔서 그 밤 내내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치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고 우리가 모이면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되어 꿈의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2018년 사전 면접을 통해 대상자를 선정하였고 4월 23일 개교식을 시작으로 초등생 7명, 중학생 13명, 고등학생 7명이 꿈꾸는 도자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만났다. 처음부터 수월하고 잘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매월 포곡마을교육복지협의체 회의와 꿈의학교 운영위원회를 통해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배우면서 학생이 찾아가는 경기꿈의학교 2년차를 맞이하게 되었다. 꿈의학교를 시작하기 위해 사업 설명회를 협의체 위원들이 두차례나 모두 참여해 들었지만 생소하고 낯설었다. 그동안 마을의 굳게 닫힌 문을 열려고 수년간 노력했지만 허사였는데 포곡중학교 근무 7년 만에 교장선생님의 제의에 마을에서 함께하겠다는 대답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조건 하겠다고 겁 없이 달려들었었다. 꿈꾸는 도자 예술가는 단순히 도예를 배우는 꿈의학교가 아니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교육과정에 참여하며 도예수업을 통해 문화와 예술, 환경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체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 어른이 되어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실천하는 학교다. 근무지가 변경되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를 잘 닦아 놓으면 누구라도 수월하게 꿈의학교를 운영해 학생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포곡중학교를 졸업하고 꿈꾸는 도자 예술가 꿈의학교에 참여한 고교생 7명 중 5명이 포곡중 졸업생으로 학생들이 찾아와서 꿈의학교를 만들면서 지난 1년이 즐겁고 행복했다. 도자 화분을 만들어 식물심기 바자회 수익금 43만 원으로 전대리 독거노인 11가정에 생필품 전달, 도자 벽화를 포곡읍사무소 전경에 설치해 그곳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격스럽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컸다는 대견함과 자랑스러움에 매주 늦은 시각까지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힘든 줄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올해는 26명의 학생들이 꿈꾸는 도자 예술가에 참여한다. 우리 꿈꾸는 도자 예술가가 한두 해 운영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속성을 갖고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협의체에서도 비영리법인 등록을 추진 중이며 주민 참여를 위한 방안 모색을 위해 올해 하반기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꿈의학교에서는 각 가정에 도자 문패 달아주기, 도자 바자회 등을 통해 주민과 소통하고 실천하는 꿈의학교가 되려고 기획하고 있다. 현재도 마을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기획 중에 있으므로 지자체와 교육청에서도 지속적인 지원을 이뤄지길 희망한다. 포곡마을교육복지협의체 사무국장 김귀엽(포곡중 교육복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