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모았던 남북당국회담이 결렬되어 상당히 실망스럽다. 지난 8월 25일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의 후속회담 성격으로 개성공단에서 지난 11~12일 열린 제1차 남북차관급 당국회담이 양측의 합의사항이 담긴 공동보도문을 발표하지 못한 것은 물론 다음 회담 일정도 잡지 못한 채 종료되어 혹시나 했던 기대가 무너졌다. 이번 남북당국회담은 과거의 수석대표 격을 가지고 회담 자체가 성사되지 못한 사례와는 달리 수석대표단 선정이 큰 논란 없이 조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틀에 걸쳐 수석대표 회담을 비롯하여 총 다섯 차례나 회담이 열려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북측이 일방적으로 회담장을 떠남으로 사실상 결렬된 것이다. 회담 결렬 후 남측 수석대표인 황 부기 통일부 차관의 브리핑에서와같이 북한이 금강산 관광재개를 이산가족문제와 연계시킴으로써 상호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고 말한 것과 같이 남북 간의 의제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있어 회담은 결렬되었다. 우리는 지난 8·25남북합의 과정에서와같이 이틀간 지속된 회담을 보면서 양측이 전향적인 자세로 남북문제를 풀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으나, 역시 남북회담은 지난한 과제임을 새삼 증명한 것이다. 우리 측에서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이산가족 전면적 생사확인과 상봉 행사 정례화, 서신교환 등 이산가족 문제는 인도적 차원에서 시급히 해결할 과제이다. 이산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못하고 이산가족 신청자의 과반수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있을 정도로 고령인 그들에게 시간이 없음을 남북한은 공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이를 금강산 관광재개와 북측이 연계시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북측이 주장하는 금강산 재개문제는 그동안 남측이 요구한 관광객 신변안전과 재발방지, 재산권 회복 등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 달라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아무런 언급도 없이 이를 요구하는 것은 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와 같다. 더구나 우리 측은 금강산 관광 실무회담을 개최해 먼저 이러한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전향적으로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북측의 회담 자세에 문제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회담 결렬 후 차기 회담 일정도 잡지 못하여 현재로서는 회담이 언제 재개될지 불투명하다. 더구나 북중 관계 개선의 상징으로 베이징에서 공연할 모란봉 악단의 돌연한 철수까지 겹쳐 북측의 의도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25남북합의의 순조로운 이행을 통한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남북은 상호 유연성을 가지고 남북당국회담을 조속히 재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된다. 정부는 북측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 남북당국회담이 재개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추진하기 바란다.
어느 날 카톡에 배꼽을 잡고 웃을 만한 유머가 날아왔다. 함께 읽고 난 후 아내는 속까지 후련하다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왠지 나에게 아내의 콧노래가 거슬리기만 하다.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한 통 속으로 남자를 몰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오만가지 감정에 휘둘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다시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은 웃어넘길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일 텐데.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이 키워야 하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이것을 나는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른다. 회복탄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그냥 웃어버리면 다시 원위치에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보자. 불쌍한 남편의 일기0월0일. 아내가 애를 보라고 해서 열심히 애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아내에게 머리통을 맞았다. 너무 아팠다. 0월0일. 아내가 커튼을 치라고 해서 커튼을 툭툭 계속 치고 있는데 아내가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었다. 왜 할퀴는지 모르지만 아마 사랑의 표현인가 보다. 얼굴에 생채기가 났지만 스치고 지나간 아내의 로션냄새가 참 좋았다. 0월0일. 아내가 분유를 타라고 했다. 그래서 이건 좀 힘든 부탁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부탁이므로 열심히 힘을 다해서 분유통 위에 앉아 끼랴끼랴하고 열심히 탔다. 아내가 내게 걸레를 던졌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때 팬들이 손수건을 던지기도 한다는데. 0월0일. 아침에 일찍 회사를 가는데 아내가 문 닫고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문을 닫은 다음 나가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30분 헤매고 있다가 아내에게 엉덩이를 발로 채여서 밖으로 나왔다. 역시 우리 아내는 못하는 게 없다. 이글을 보여주면 남녀가 각각 다르게 반응을 한다. 여성이라면 박수치며 웃는다. 공감 백배인 것이다. 거기다가 통쾌 상쾌 유쾌하단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 유머가 10년 묶은 증까지 가시게 한단다. 그런데 남성은 다르게 반응한다. 나처럼 씁쓸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단다. 나이 들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아내에게 체 듣는 것이 더 서럽단다. 한낱 우스갯소리지만 이처럼 한 글을 읽고서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은 다른 것이다. 감정에 옳고 그름이 어디 있겠는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삐걱거리지 않는 감정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힘들고 약해질수록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에 휘청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 헨리 와이드비처는 말한다. ‘유머가 없는 사람은 스프링 없는 마차와 같다. 길 위의 모든 돌멩이들을 스칠 때마다 삐걱거린다’. 참으로 공감가는 말이다.2015년을 잘 보내고 2016년은 활기차게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은 웃어버릴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첫째 일어나자마자 웃어라. 아침에 웃는 웃음은 10첩의 보약과 같다. 둘째 한 번 웃고 또 웃어라. 지속적인 습관이 인생을 만들어 낸다. 셋째 시간을 정해 좋고 웃어라. 무릇 지킬 만한 것은 생각과 마음이다. 오늘도 행복하게 오늘도 건강하게 유머로 이겨내자. 이요셉한국웃음연구소 소장
한ㆍ중 FTA 시대가 열리면서 대한민국 경제가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특히 FTA 시대를 맞이하는 중소기업들은 위기이자 기회가 될 FTA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져 있다.지난 8월 경기도가 발표한 경기도정 주요지표를 보면 전국 중소기업의 수는 341만여개이며 이중 경기도는 72만5천여개로 서울시(74만1천여개)와 함께 전국에서 가장 많은 중소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중심인 중소기업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경기도.이러한 경기도 중소기업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기업의 발전은 물론 지역사회의 발전까지 도모하고 있는 단체가 바로 사단법인 경기도중소기업CEO연합회이다. 올해 경기도 중소기업은 메르스 여파로 내수경기가 침체되면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메르스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 상황인 가운데 오는 20일 한ㆍ중 FTA 발효가 예정돼 있어 도내 중소기업인들이 적지 않은 긴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해부터 사단법인 경기도중소기업CEO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윤여찬 회장을 만나 보았다. 윤 회장은 FTA 시대에 중소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키워드로 ‘판로’를 꼽으면서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Q (사)경기도중소기업CEO연합회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달라.A 경기도청 소관 비영리 사단법인이자 중소기업 경제단체인 연합회는 경기도내 회원기업 간 교류증진 및 정보공유를 통한 중소기업의 발전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을 목적으로 지난 2012년 8월28일 설립됐다. 법인설립은 2012년에 이뤄졌으나 실질적인 활동은 14년 전인 2001년 8월로 역사가 오래된 경제단체이다.전체적인 조직은 수원에 소재한 본회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의 권역과 경기도 전역 19개 시ㆍ군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19개 지회와 특수업종인 농생명기술, 창조기술 영위 기업이 조직화된 2개 지회를 포함해 총 21개 지회로 구성돼 있다. 현재 회원사는 약 1만2천개사에 달하며 업종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첨단산업, 도소매 및 유통업, 서비스업 등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Q 연합회의 주요활동은 무엇인가.A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해 경기도 및 경기도의회 등과 정책간담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의 지속 성장을 위한 성장모델 연구, 판로개척 및 매출증대를 위한 국내ㆍ외 마케팅 활동, 창업활성화를 위한 성공사례의 전파 및 성공창업 노하우 전수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또 국내ㆍ외 주요기관과의 MOU 체결 등 파트너십과 네트워크 활성화를 통해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도 펼치고 있다.이와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활동으로 각각의 지회를 중심으로 시ㆍ군의 취약계층 후원을 실시하고 있으며 본회 차원에서는 다문화 가정 및 통일단체 후원 등 공동체 회복과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업인으로써 책임을 다하고 있다.Q 올해 내수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한ㆍ중 FTA 시대가 열릴 예정이다. 중소기업의 생존 전략은 무엇이라고 보는가.A FTA에서 중소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판로’가 중요하지 않겠나 싶다. 국내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인데 한ㆍ중 FTA 시대가 열리면 중소기업들은 중국 기업의 한국 시장 진출로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새로운 시장, 해외시장 판로개척이 중소기업의 생존을 결정할 키워드가 될 것이다. 중소기업이 해외시장을 성공적으로 개척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을 정확히 파악한 후 그에 맞는 자사만의 핵심역량을 보유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정분야에서 고도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모든 직원을 사업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경영한다면 좋은 결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이와 함께 전략적 제휴를 통한 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기업은 R&D에 집중하고 판매 및 마케팅은 전략적 제휴 또는 아웃소싱을, 인력과 기술력 확보는 학교와 협업해 확보하는 것이다. Q 정부나 경기도에 바라는 지원정책도 많은 것 같은데.A 앞서 말한 중소기업의 해외시장 개척을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중소기업이 자신만의 역량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서 경기도가 해외 거점 지원센터를 더욱 확대했으면 좋겠다. 현재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가 인도 뭄바이, 러시아 모스크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미국 LA, 중국 상해, 심양 등에 GBC를 설치ㆍ운영하면서 도내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는데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최근 경기도에서 중국 GBC를 확대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는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었으면 한다.또 FTA 관련 지원조직 및 전담인력, 예산 등이 확보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FTA 관련 정보를 빠르게 접하기 어려운데 경기도와 지자체에서 FTA 전담조직이 마련돼 관련 정보 및 지원정책 제공, FTA를 활용한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및 소개 등을 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으로 본다.이밖에 오래된 문제이지만 정부와 지자체가 지속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Q 향후 활동계획 및 비전에 대해 말해달라.A 지난해 회장으로 취임한 후 만 2년이 되었다. 또 회원분들이 많이 응원해 주어서 앞으로 2년 동안 회장직을 더 할 수 있게 됐다.이러한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 무엇보다 연합회 회원사의 매출증대와 경쟁력 향상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나갈 계획이다.먼저 내년부터는 경기도 전역에 거점화돼 있는 21개 지회를 중심으로 경기도 및 중앙정부에 기업정책 전달은 물론 중소기업 간 정보공유와 협업을 통해 신사업이 창출될 수 있도록 더욱더 세밀한 거미줄망 네트워크 체계를 확립할 계획이다. 또 회원사의 직접적 매출증대와 공공구매 활성화를 위한 플랫폼사업을 추진할 것이다.회원사의 매출증대는 곧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고 경기도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당면한 문제인 청년실업 및 취약계층 실업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정책방안이라고 생각하고 활발히 활동하겠다.세 번째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 위상에 걸맞게 ‘기업하기 좋은 경기도’를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경기도 및 관계기관과의 정책제안, 정책 간담회 등을 추진해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전달하고 실효성 있는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이밖에 따뜻하고 함께 사는 경기도를 만들기 위해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할 방침이다. 취약계층에 대한 후원뿐만 아니라 장학사업, 인재 채용지원 등 경기도민의 생활향상을 위한 다양한 사회사업을 펼칠 것이다.경기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중소기업이 소재해 있으며 국가산업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이다. 연합회 역시 사명감을 갖고 도내 중소기업,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이호준기자 사진=전형민기자 PROFILE 1966년 3월6일 출생유신고등학교 졸업아주대 U-SOC 최고위과정 수료고려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졸업아주대 교통ㆍITS 대학원 졸업1999년 2월~현재 (주)뉴플러스 대표이사 2008년 중소기업청장 표창 2007년 경기도 중소기업협의회 공로상 수상 2007년 안양시 우수기업 인증2006년 대통령직속 중소기업특별위원회 표창2006년 경기도지사 표창 2005년 경기신용보증재단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 수상
해방 정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좌우합작을 주도한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양평~1947)과 민세 안재홍(安在鴻, 1891.평택~1965),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가 국회로 진출한 소앙 조용은(趙鏞殷, 1887.파주~1957)과 대한민국 수립에 앞장 선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광주~1956)는 경기도가 낳은 위대한 독립투사이자 걸출한 정치가이다.네 사람은 모두 31운동에 깊숙이 관계했다. 여운형은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조소앙은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했으며, 신익희는 민족대표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때부터 행동을 같이했던 조소앙과 신익희는 1944년 2월 좌우합작 연립내각을 설립했을 때 외무부장과 내무부장을 맡아 ‘내외간’으로 불렸던 사이였다.안재홍이 정립한 ‘신민주주의론’은 ‘다사리운동’으로도 불리는 상생의 정치철학이며, 임정 최고의 이론가였던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임시정부의 정치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이들은 해방 후 어떤 길을 걸었을까? 정치가 아무런 비전도 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 분들이 걸었던 여정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분단을 잉태한 불완전한 해방 1945년 8월15일, 심훈의 노래처럼 해방의 그날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싶은 만큼 기쁜 날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국인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 참여한 미영중소의 정상들은 “한민족이 노예 상태에 처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자유롭고 독립된 상태로 회복시켜 줄 것”을 결정했다. 이 같은 연합국의 의지는 얄타회담(1945.2), 포츠담 회담(1945.7)에서도 유효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연합국의 합의와 이행은 미국 때문에 무산되었다. 1945년 7월 하순, 핵실험에 성공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이제까지의 대소협력 정책을 폐기하고 소련에 사전 양해도 없이 히로시마(8.6)와 나가사키(8.9)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대일본전에 소련이 참전 못하게 해 극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이었다. 그러자 소련은 즉시 참전을 선언하고 한반도로 군대를 진주시켰다. 놀란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38도선을 경계로 군사작전지역을 분할할 것을 제의했고, 소련은 이를 받아들였다.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인 38선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살길이다 1944년부터 몽양 여운형은 온전한 해방을 맞이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12월 상순, 몽양은 안재홍과 총독부 고위 간부를 만났다. 전세가 기울고 있음을 일제가 드러내며 ‘전후’를 상의하기 위해 두 사람을 초청한 것이다. 몽양은 안재홍과 수시로 연락 협의하면서 일제에 대응했다. 본인의 뜻과 달리 일제에 이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14일 밤,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은 자신의 관저로 여운형을 초대해 사후 협력을 요청했다. 15일 새벽 6시 반에야 협의를 끝냈다.몽양은 전국의 모든 정치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3개월간의 식량 확보를 보장할 것 등 5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여 수락을 받아냈다. 몽양은 이를 바탕으로 안재홍과 15일 밤부터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에 착수했다. 몽양과 민세는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할 유일한 방법은 민족의 대동단결뿐이라고 확신했다. 1927년에 신간회를 주도했던 안재홍은 35년 동안 무려 9번 체포되어 7년3개월 동안 투옥되었을 만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다. 1944년 총독부가 안재홍에게 사태수습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그는 민족대회 소집안을 제안하고 패전 후를 대비할 것을 권고했다.이후 일본 헌병들은 “안재홍만은 꼭 죽여 버리고 가겠다”며 벼르고 다녔는데, 자객이 지명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아 고향에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서울에서 숙소를 옮겨 다녀야 했다. 1945년 8월16일, 안재홍의 ‘해내외의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이 중앙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 -정세가 급변하는 이때에 조선민족으로서 대처할 방침도 매우 긴급 중대하므로 각계를 대표한 동지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구체적인 조직공작을 진행키로 했다.-조선민족은 지금 민족의 성패가 달린 기로에 서 있으므로 총명하게 인민을 통제 파악하지 않으면, 최대의 광명에서 최악의 범과를 저질러 막대한 해악을 끼칠 것이므로 정신을 가다듬어 나가야 할 것이다.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의 지역조직이 만들어졌다. 안재홍은 미소의 군대에 분할 점령된 상태에서 통일된 민족국가를 설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좌우가 연합하고 협동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남로당 박헌영에게 “지금은 민주주의 민족독립국가의 완성이 요청되는 때이니…공산주의자는 제2선으로 후퇴하도록 하라”며 민족진영이 주도하는 국가건설 작업에 협동할 것을 권유했다.안재홍 역시 반탁투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세밀히 살펴 국제정세를 파악한 다음, 결정사항을 일단 모두 받아들이자고 호소했다. 그는 좌우합작을 성사시켜 통일임시정부를 만든 다음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안 설명하는 과정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민족의 단결되고 강력한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안재홍은 좌우합작의 정치적 의의라는 글에서 “친일 반동적 극우세력과 공산독재정치를 지향하는 극좌세력의 득세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좌우합작이 성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의 정치세력이 단합하고 균형외교노선을 실천하여 통일된 독립 국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후 미군정의 치하에서 더 이상의 노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미군정의 요구를 받아들여 민정장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여운형과 안재홍의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안재홍과 함께 활동했던 여운형이 1947년 7월19일, 극우 청년이 쏜 총탄에 숨졌다. 소앙(素昻) 조용은, 단정에 반대하다1948년 봄 조소앙은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합동회의’에 참석했다. 남북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등 15명이 참여한 해방 후 최대의 좌우합작 연석회의였으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는 위칙만 합의했을 뿐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다. 1948년 8월15일, 서울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는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9월9일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조소앙은 10월에 대한민국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회당을 창당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그는 조병옥과 겨루어 2만표 이상으로 압승했다. 전국 최다 득표였다. 국회에 진출한 조소앙은 신익희, 안재홍 등과 정당통합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한국동란이 일어나 유엔군의 반격이 성공할 무렵인 9월 초순에 안재홍과 함께 납북되었다. 전국으로 확산된 신탁통치 반대 시위 해공 신익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다 1945년 12월 말, 신익희는 임정 내무장관 자격으로 포고령 1~2호를 거리에 붙이면서 반탁운동을 지휘했다. 미군정 하지가 김구의 정치활동 중지를 명령하면서 신익희를 구속했다. 이때 미군정은 임정의 활동발판으로 그가 조직한 정치공작대도 해체해 버렸다.이러한 미군정의 강압적인 태도는 이승만이 줄기차게 벌인 대미외교의 실패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신익희는 단독 정부 수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국회의장으로 활약했던 신익희의 입장은 아래의 발언에서 추측할 수 있다. “해방 3년째 우리는 여전히 이민족 군인의 통치하에 있다. …개인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전체주의 독재주의 소수특권계급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만민평등의 민주국가 건설함이 우리의 목표다.”신익희는 1956년 5월 이승만과 자유당에 맞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선풍을 일으켰으나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운명했다. 호(號)를 통해 본 네 사람의 비전과 민족의 활로여운형의 호 몽양(夢陽)은 ‘태양을 꿈꾸다’라는 뜻이다.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광복을 준비했으며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조국 건설을 위해 온 정성을 다 쏟았으니 몽양은 여운형의 생애와 썩 잘 어울리는 호다. 안재홍의 호 민세(民世)는 ‘민중의 세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민세는 민족혼을 일깨운 투철한 학자이자 일제 치하에서 아홉 번 구속되어 8년을 옥살이했던 꼿꼿한 선비였다. 조용은의 이름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호 소앙(素昻)은 ‘흰색을 숭배한다’는 뜻이다. 흰색은 곧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우리 민족보다 더 단결이 강한 민족도 다시없는 것을 나는 31운동에서 발견하고 교훈 받았다”라는 그의 고백을 통해 호에 담긴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신익희의 호 해공(海公)은 ‘마음의 나’라는 뜻을 담은 것인데, 국가를 최상으로 내세우는 것을 보고 “개인 때문에 국가가 필요하지, 국가 때문에 개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서 호를 이해할 수 있다. 몽양과 민세, 소앙과 해공이 걸었던 길을 통해 민족화해와 분단극복의 지혜를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과천시 종합자원봉사센터(센터장 강현구)는 지난 11일 과천시민회관 소극장에서 ‘2015 과천시 자원봉사대축제’ 행사를 가졌다. 올해로 열일곱 번째를 맞은 이번 행사는 신계용 과천시장과 시의원, 자원봉사자 400여 명이 참여했으며, 기념식과 축하공연, 인증서 수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신계용 시장은 “자원봉사자 여러분의 숨은 활동으로 인해 과천지역에 자원봉사 문화가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과천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랑의 바이러스 널리 확산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자원봉사 유공자로 선정된 회원 등 10여 명이 표창과 인증서를 받았다. 강현구 센터장은 “과천시는 전체 시민의 45%가 자원봉사자로 등록돼 있을 정도로 자원봉사 문화가 정착돼 있다”며 “내년부터는 봉사단체들이 상호 교류를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중앙공원 등에 소규모 자원봉사센터를 건립, 운영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과천=김형표기자
안철수 새정치 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