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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여는 역사의 門 해방 70년 京畿] 조국의 광복 위해 한 평생 만주벌에서 싸우다 -시당 여준 선생

시당(時堂) 여준(呂準,1862~1932)은 1862년 용인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익히던 그는 스무 살 무렵인 1880년대에 서울로 유학했다. 사람은 만남을 통해 전혀 다른 삶을 살기도 하는 법이다. 이때 여준은 이웃에 사는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이회영, 이시영 등과 어울리며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1885년에는 이들과 신흥사에서 8개월간 합숙하며 신학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함께 공부했던 이시영은 여준의 재주가 친구들 가운데서도 빼어났다고 감탄했다. 여준은 1898년부터 이상설의 서재를 자주 찾아 이회영 등과 함께 정치 경제 법률 역사 등 신학문에 관한 책들을 강독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여준의 평생 동지가 됐다. ■ 간도지역에 서전서숙을 열다 1906년 10월 무렵 여준과 이상설, 이동녕은 북간도 연길현 용정에서 제일 큰집을 사들여 건물을 고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드디어 민족의 앞날을 열어나갈 교육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상설이 숙장을 맡고 여준은 이동녕 등과 함께 교사로 참여했다. 한인 청소년 22명을 모아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보람된 나날이었다. 그가 가르친 과목은 역사 지리 수학 국제공법 헌법 등이다. 1907년에 4월 이상설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됐다. 여준이 이상설을 대신하여 2대 숙장을 맡았다. 학교는 이미 재정난에 허덕이고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극심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여준은 일제의 눈을 피해 서숙의 학생을 데리고 훈춘현 탑두구로 옮겨 서전서숙을 다시 건립했다. 이곳에서 학생을 더 모집해 3개 반 74명의 학생들을 1년간 단기 속성과정으로 모두 졸업시키고 학교 문을 닫았다. 1907년 8월 무렵이다. 비록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여준에게 소중한 경험이 됐다. ■ 오산학교에서 민족 교육에 힘쓰다 여준이 귀국 후에 찾은 곳은 남대문에 자리한 상동교회였다. 1900년대 초반의 상동교회는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 목사 전덕기가 있는 상동교회는 전국에서 모여든 민족 지사들로 가득했다. 신민회 역시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결성됐다. 여준은 1907년 4월에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최초로 공화정치를 내세운 비밀 조직이다. 이는 물론 국권을 되찾았을 때 나라의 주인이 민(民)이라야 한다는 이념에서 비롯됐다. 여준이 상동교회에서 벌이는 사업 중에서 가장 주목했던 사업은 교육 사업이었다. 전덕기 곁에 늘 이회영과 이동녕이 있었다. 이들은 좌회영, 우동녕으로 불렀을 정도로 전덕기의 사업을 적극 도왔다. 전덕기는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의 좋은 벗이었다. 전염병으로 죽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썩어 가는 시체를 찾아 염을 해주었기에 그는 늘 나막신과 마른 쑥, 널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덕기는 여준에게 교육의 힘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지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던 인물이다. 여준도 상동청년회 교사로 참여했다. 이 무렵 그는 신민회에서 함께 활동을 하고 있던 남강 이승훈과 연결되어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도 참여했다. 1907년 12월 24일 오산학교 개교식이 거행됐다. 교사는 여준과 서진순, 학생은 7명이었다. 여준은 역사 지리 산술을 비롯한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던 서진순은 체육을 맡았다. 얼마 후 19세의 춘원 이광수가 교사로 초빙돼 왔다. 이광수는 당시의 여준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오산학교에 부임하였을 때 교원 중에서 가장 어른 되는 분은 여준이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로서 키는 작고 목소리는 크고 야무졌으며 높은 식견을 가진 애국지사로서 학생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이승훈이 여러 가지 업무로 바빴기 때문에 학교 일은 대부분 여준이 맡아 처리했다. 1910년 7월에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생은 모두 11명이었다. 졸업 축사 자리에서 이승훈은 정직과 성실을 강조하고 여준은 실행을 당부했다. 천만 가지 재주를 배웠더라도 실행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니 우리가 4년 동안에 나라를 사랑하라, 민족을 구하라는 말은 남강 선생 이하 여러 사람이 귀가 아프도록 말한 것이니 그것만 실행하여 준다면 아무 근심이 없겠다 한편, 1908년, 여준도 고향 용인에 삼악학교(三岳學校)를 세웠다. 여준은 학교의 설립을 주도했지만 돌보지는 못했다. 이후 그는 오산학교의 졸업생을 삼악학교의 교사로 보내며 후원했다. 그러나 삼악학교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문을 닫고 말았다. ■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다 1910년 말부터 신민회 간부들이 국경을 건너 1911년 2월 무렵에 목적지인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의 추가가에 도착했다. 서간도에 도착한 동지들은 농업을 장려하고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경학사를 조직했다. 1912년 7월, 추가가 합니하에 중국인에게 빌린 옥수수 창고를 개조한 교사를 미련하고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1912년 말, 여준도 합니하에 도착했다. 여준은 부족한 교사를 충당하기 위해 자신이 오산학교에서 가르친 제자들 중에 교육 경험이 있는 사람을 불러들였다. 1913년부터 여준은 교장에 취임했다. 여준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회 시간에 애국가와 교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학생들 앞에서 자주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무관학교였지만 제대로 군사시설과 무기를 갖추지 못해 목총을 들고 훈련에 임했다. 철저한 정신교육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음식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좀 먹고 냄새나는 좁쌀 밥에 반찬은 콩기름에 절인 콩장 한 가지 뿐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중국인의 야산을 빌려 만든 밭에 나가 곡물을 가꾸었다. 겨울이면 학생들은 허리까지 차는 눈을 헤치며 땔감을 마련해야 했다. 이토록 어려운 환경이지만 교사나 학생은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한 몸처럼 움직였다. 여준은 1917년 무렵에 신흥무관학교 교장에서 물러나 길림(吉林)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운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하다 1919년 2월 27일 여준은 자신의 집에서 박찬익 황상규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정령에 추대된 그는 다음날 긴급회의를 열고 구미에 독립선언서를 보낼 것을 결의했다. 여준은 대한독립의군부 정령의 자격으로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을 비롯한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 38인의 이름으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1운동보다 앞서 해외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3ㆍ1운동 이후 서간도의 독립투사들은 한족회를 결성하고 일제와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정부 건립을 서둘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한족회는 임정 산하에서 군정부의 역할을 담당하기로 결의하고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었다. 여준은 서로군정서 부독판으로 임명됐다. 그는 독판 이상룡, 정무청장 이탁,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 등과 함께 항일투쟁에 나섰다. ■ 우리의 곁으로 모셔야할 독립운동의 영웅 여준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활동에 다시 희망을 걸었다. 1922년 여준은 액목현 대갱지에 검성중학교를 세워 교장을 맡아 신흥무관학교의 뒤를 잇고자 했다. 그는 이곳을 서로군정서의 산실로 생각하고 농장을 운영하여 경비를 마련하는 전통적인 농병일치의 둔전제를 실시해 장기 항일 투쟁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준은 교하를 떠나 서란현 화수천 농장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여준은 정의부와 관계하면서 동포들의 교육을 위한 만주 농민교과서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정성을 기울여 교과서를 편찬했다. 1930년에는 북만주 위하현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도 참여했다. 그 사이 여준의 나이는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면에 나서기에 너무 많은 나이였기에 고문으로 물러났다. 이 무렵 여준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 20년이면 무엇인가 전망이 보여야 하는데 전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의 독립군 기지조차 본토로 옮겨야 할 상황에 이르자 더 살고 싶은 의욕조차 사라졌다. 더욱이 절친한 벗들도 하나 둘 곁에서 사라져갔다. 여준이 별세한 해는 1932년이다. 여준의 평생 동지였던 이회영, 이상룡, 그리고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던 남자현도 같은 해에 운명했다. 70 평생을 이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준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다. 더욱이 외아들의 죽음으로 후손도 끊어졌으며, 그의 곁에는 따르는 사람조차 없어 시신과 유품조차 거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준 선생의 이름은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1968년에야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국내에는 가까운 후손을 찾을 수 없어 이 훈장조차 선생이 교사로 일했던 오산중고등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상하수도 설비 납품 비리’ 전 원주시청 공무원 영장

인천지역 건설업체와 공무원의 검은커넥션을 수사 중인 검찰(본보 7월 22일 자 7면)은 남동공단 내 상하수도 설비업체의 브로커와 뇌물을 받은 전직 공무원 등을 구속했다. 인천지검 외사부(최용훈 부장검사)는 상하수도 설비 납품을 도와주고 금품을 챙긴 혐의(뇌물수수)로 전 강원도 원주시청 소속 공무원 A씨를 구속했다. 검찰은 또 A씨 등 전현직 원주시청 공무원에게 돈을 건넨 혐의(알선수재)로 B씨 등 브로커 2명을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2013년 원주시청에 근무할 당시 인천시 남동구의 한 상하수도설비 전문건설업체가 강원도 모 공공하수처리장에 필터를 납품하도록 도와주는 대가로 수천만 원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브로커 B씨는 상하수도 설비업체로부터 수억 원을 받아 챙긴 다른 브로커로부터 1억여원을 받아 중간에서 납품 수주를 도와주고 이 중 일부를 A씨에게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검찰은 A씨와 같은 혐의로 원주시 상하수도사업소 소속 C 과장(5급)을 구속했다. 인천지역 상하수도설비 전문업체는 대통령장관 표창과 10여 개 각종 국내 특허를 받은 상하수도 설비 분야의 유망업체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업체가 지난 2002년부터 전국의 공공 하폐수처리장에 필터나 농축기 등을 납품한 사실을 파악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민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