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가 박상미 교수 “‘마음 근육’으로 튼튼해져야” [인터뷰]

인간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관계에서 만난 사람들은 기쁨과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스트레스와 고통의 원인이다. 왜 그럴까.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현대인의 최대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심리상담가 박상미 교수는 “잘 다치는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 근육’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내 인생을 먹어 치우는 걱정’ 박상미 교수는 최근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박상미 라디오’ 구독자를 대상으로 ‘언제 가장 속상한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888명이 참여한 투표 결과 1위는 47%가 선택한 건강(자꾸 아프고 무기력할 때)이 차지했고 뒤이어 돈(고생만 하고 돈이 안 모일 때), 가족(내 마음 몰라주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친구(속마음 털어놓고 위로받을 사람 없을 때) 순으로 나타났다. 압도적으로 건강 걱정이 높게 나온 것에 대해 박 교수는 “건강을 핑계로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현재 몸이 좋지 않아 괴로운 분들도 많으실 거예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내가 큰 병에 걸리면 어떡하지, 늙어서 아프면 가족들 힘들 텐데, 병원비 감당은 어찌하나, 훗날 누가 날 보살펴 줄까, 요양병원도 잘 선택해야 한다던데….’ 끝없이 걱정에 걱정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건강염려증과 더해져 한숨이 늘고, 결국 오늘의 내가 불행해지는 것이죠.” 박 교수는 걱정이 밀려올 때 우선 내가 통제할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을 권한다. 내가 돌봐야 할 집안일, 회사 업무 등은 집중해 해결하면 되는, 큰 걱정이 아닌 일들이다. 반면 자연재해, 사고, 건강 등은 통제 불가능한 걱정으로 분류되는데 이런 걱정들이 밀려올 때 박 교수는 “무시하고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말한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걱정에 몸과 마음이 괴롭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심리연습이고 마음 근육을 키우는 과정인데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걱정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대부분 ‘공상’, 즉 머릿속에서 혼자 그려낸 이미지라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걱정은 집착으로 번져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을 통제하려 들고, 잠재력과 가능성을 잡아먹습니다. 걱정이라는 이불을 덮고 불안 속에서 잠만 자고 있진 않나요? 자유와 성장을 향해 이불을 걷어차고 도망쳐 나오셔야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어니 젤렌스키는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 일, 30%는 이미 일어난 일, 22%는 걱정할 필요 없는 사소한 고민, 4%는 우리의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 그리고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박 교수는 “나이 들면 누구나 아프고, 그럴수록 내 몸을 아끼고 잘 고쳐 쓸 마음을 먹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요. 96%의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내가 온 에너지를 모아 집중해서 해결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4%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내 삶을 잠식하고 먹어 치우는 걱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을 하세요.” 발바닥에 붙어 있는 행복…들여다봐야 보이는 것 한양대 일반대학원 협동과정 교수이자 ‘힐링캠퍼스 더공감’의 학장인 박 교수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 입학을 앞둔 시기에 스스로에게 삶의 행복을 되물었다. 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청소년기부터 우울증을 앓았고 늘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34세의 나이에 더 늦기 전에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고 ‘뭐가 되지 않아도 좋다. 내 마음부터 치료해 보자’는 심정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박 교수는 그저 자신의 삶이 조금만 더 행복하고, 덜 힘들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심리학에 뛰어들었다. 돌이켜보니 학문을 통해 우울증이 치료된 기억은 드물다. 그 시기에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나’를 공부하는 시간을 할애한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전까지는 환경 때문이야, 가족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등 외부에서 원인을 찾고 탓하기 바빴는데 결국 내 마음 때문이더라고요. 나의 마음을 정화하고 돌아보니 행복은 제 발바닥에 붙어 있었습니다. 내가 늘 밟고 다녀 잘 보이지 않았죠. 행복하려면 억지로라도 뒤집어 봐야 보이는 게 행복이에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하고, 연습해서 마음 근육을 키울수록 행복을 찾는 과정도 수월해집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불행조차 남과 비교하며 “저 사람은 저런 고통도 견디는데 너는(혹은 나는) 왜 이것도 이겨내지 못하냐”며 질책하거나 자책하곤 한다. 각자의 생김새가 다르듯 감당할 수 있는 마음 그릇도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는 행동이다. “사람마다 근육량이 다르듯이 마음 그릇의 크기, 재질, 두께도 다 다릅니다. 저는 제 마음을 종이 소주컵이라고 표현해요. 뜨거운 물을 담으면 금방 흐물흐물해지고 얼마 담지 못하고 곧 넘치려고 하죠. 마음 근육을 키운다고 해서 종이컵을 양철 양동이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흐물흐물해지고 넘치려는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뜨거운 물을 피하는 방법, 자주 비우는 지혜를 배우다 보면 마음 근육은 자연스레 생긴답니다.” 끝으로 박 교수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유형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현실적인 팁을 알려줬다. 이름하여 ‘타인 관찰법’.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럴 땐 그 사람을 가만히 관찰해보세요.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오늘은 왜 더 예민할까, 기분이 안 좋은가 보다….’ 가볍고 건조하게 한 발 떨어져 관찰하고 구경하는 태도를 갖다 보면 상대의 나쁜 기분에 젖어 들지 않습니다. 마음 근육을 길러야 에너지를 발산하고 관계를 살리는 기초대사량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사계절 좋지만 여름이라 더 좋은 '경기·인천 수제맥주'

“우리가 흔히 치킨과 함께 먹는 그런 맥주 말고도 다양한 맥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그걸 크래프트 맥주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된 후, 나는 D와 함께 맥주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유성관, ‘여름 맥주 영화’ 중에서) ■ 4캔에 1만원부터 수제맥주까지 모든 것에 취향이 뚜렷해지는 세상이다. 늘 마시던 맥주도 좋지만 안 먹어본, 좀 더 특별한 맥주를 경험하고 그 맛에 열광하는 사람들. 얼음처럼 차갑고 목이 따가울 정도로 탄산이 강한 맥주만이 아니라 개성 넘치는 맛에, 적절한 온도, 목 넘김도 부드러운 맥주의 세계도 존재한다는 걸 알고 그 맛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우리는 맥덕(맥주 덕후)이라 부른다. 맥덕이라는 말이 나온 계기는 맥주 수입이 늘면서 생겨난 편의점의 마케팅 ‘4캔에 1만원’ 덕이 크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경험도 늘고 소비자들의 입맛도 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생성됐던 수제맥주 시장은 그렇게 다시 한번 조명받았다. 규모는 작지만 더 특별한 맥주를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는 양조장과 펍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국내 수제맥주 시장도 활기를 띠고 있다. 수제맥주(Craft Beer)는 개인 및 소규모 양조업자가 자체 개발한 제조법에 따라 만드는 맥주다. 특정 과일 향이나 홉의 쓴맛이 짙게 배어 나오는 등 각 양조장 맥주 제조자의 개성을 느낄 수 있는 풍미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국내 수제맥주의 역사는 소규모주류면허가 도입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하우스맥주’로 불리던 소규모 맥주 양조장이 처음 등장했으나 생산된 맥주는 외부로 유통될 수 없어 양조장과 맥주 펍이 결합한 ‘브루펍(BrewPub)’ 형태로 자체 생산한 맥주를 자신들의 가게에서만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초창기 국내 수제맥주 시장은 독일식 맥주 스타일이 주를 이뤘다. 당시 국내 기업에서 생산하는 맥주와 완전히 다른 맛인 데다 수입 맥주시장도 활발하지 않던 때였기에 브루펍에서 생산·판매되는 수제맥주는 소비자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소규모주류면허가 도입된 지 3년 만인 2005년 국내 수제맥주가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이와 관련해 (사)한국수제맥주협회 장명재 사무국장은 “대기업을 포함한 맥주제조면허가 118개에 이를 만큼 빠르게 성장했음에도 여전히 외부 유통이 금지된 제도적 환경과 전문 인력 부족 등이 원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010년 국내에 다양한 수입맥주가 소개되기 시작하며 국내 수제맥주 시장에도 새로운 활로가 열리기 시작한다. 벨기에의 수도원 맥주, 독일의 밀맥주, 미국의 페일 에일(Pale Ale)과 IPA(India Pale Ale) 등 대규모로 유통되는 크래프트 비어를 통해 국내 맥주시장의 다양성이 증가했고 이와 맞물려 2014년 주세법이 개정됨에 따라 국내 수제맥주 양조장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장 사무국장은 “개성과 품질을 갖추면서도 전통적인 스타일과 최신 트렌드가 적절히 혼합된 각 양조장의 맥주 맛이 이미 세계 맥주를 경험한 소비자들에게 어필했다”며 “미국의 월드비어컵, 독일의 유로피언 비어스타, 일본의 인터내셔널 비어컵 등 세계 맥주 대회에서 입상한 국내 브루어리들이 등장한 것도 성장의 계기”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5월 30일부터 나흘간 서울 성수동 언더스탠드 에비뉴에서 ‘제1회 K-비어 페스티벌’이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러브 크래프트, 드링크 로컬(Love Craft, Drink Local)’이라는 슬로건 아래 열린 축제에는 한국수제맥주협회 회원사 중 서울, 경기, 인천, 강원, 충청, 부산, 제주 등 각 지역의 22개 양조장이 참가해 총 130여종의 맥주를 소개했다. 특히 이번 축제 기간 이인기 수제맥주협회장은 국내 수제맥주의 새로운 활로로 ‘지역적 특색’을 강조했다. 지역마다 빚어낸 전통주의 맛과 향이 다르듯 전국 각지에 분포된 수제맥주 양조장들이 지역별 색깔을 갖는 것이 국내 수제맥주 시장의 경쟁력이 된다는 취지다. 장 사무국장은 “지역의 특산물을 활용한 맥주뿐 아니라 그 지역 대표 음식과의 페어링을 고려해 맥주맛을 찾는 것도 차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브랜딩하면 또 다른 소구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최고급 이천쌀로 만든 쌀맥주, 더홋브루어리 2018년 이천에 자리 잡은 더홋브루어리(The WhotBrewery)는 이천 프리미엄 쌀을 활용한 쌀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더홋브루어리 김나래 대표는 “쌀맥주라고 하면 다소 생소하게 보는 시각도 있으나 칭다오, 버드와이저 맥주도 쌀이 함유돼 있어 쌀은 자주 쓰이는 맥주 재료”라고 소개한다. 더홋브루어리의 시그니처 제품은 이천 백미로 만든 라거 ‘스노이’. 더홋 직영펍에서는 컵 상단에 쌀가루를 페어링해 서빙하는데 달콤쌉싸름한 매력에 가장 많이 판매된다. 이뿐만 아니라 이천 흑미로 만든 포터 계열의 흑맥주 ‘블랙스노이’, 이천쌀과 양평의 동국(국화)을 이용해 만든 플라워에일 ‘겨울아이 동국맥주’, 이천현미를 발아해 만든 ‘브로이브라운’ 등 다양한 라인업을 개발·판매 중이다. 쌀 외에도 복숭아, 고구마 등 이천 특산물 활용에 적극적인 더홋브루어리는 산수유를 활용한 맥주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산수유 자체가 워낙 비싸고 소량 생산되지만 인근 농가와 협업해 안정적인 공급책을 구축할 예정이다. ■ 인천 개항로의 바이브를 맥주에 담은, 인천맥주 2017년 인천 개항장 부근에 양조장을 설립하며 시작된 ‘인천맥주’ 박지훈 대표는 3대째 인천에 살고 있는 인천 토박이다. 한때 인천의 중심지였던 신포동, 동인천 일대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 대표는 개항로만이 갖고 있는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 인천맥주를 브랜딩했다. 인천맥주는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수제맥주다. 시그니처 제품인 ‘개항로 맥주’는 지역 노포 장인들과의 협업으로 탄생했으며 보리의 풍미와 홉의 싱그러움이 강조돼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라거 계열 맥주다. 골든에일 계열의 ‘파도’는 레몬, 라임 껍질을 갈아 넣은 후 숙성시켜 싱그러운 맛이 도드라진다. 일반적인 IPA와는 달리 쓴맛이 부담스럽지 않은 ‘사브작 IPA’는 2020년 코리아인터내셔널비어어워드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사브작 IPA의 2배 버전인 몽유별 DIPA’는 8%의 높은 도수와 홉에서 기인한 열대과일 향이 매력적인 맥주다. ■ 국내 최초 논알코올 수제맥주 브루어리, 부족한녀석들 ㈜부족한녀석들은 2021년 논알코올 브랜드 ‘어프리데이(Afreeday)’를 론칭하고 2022년 남양주시에 양조장을 설립, 본격적인 제품 생산을 시작했다. 황지혜 대표는 알코올 대체음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데 비해 소비자들의 맛과 다양성을 충족시킬 브랜드가 없다고 판단해 어프리데이를 개발했다. 논알코올 맥주를 만드는 방식은 다양하다. 맥주맛 향료를 섞어 탄산만 주입하거나 맥주를 만든 후 가열해 알코올을 증발시키는 방식 등 맥주맛을 제대로 살리기 어려운 편. 어프리데이는 수제맥주에 쓰이는 독일산 맥아, 미국산 홉을 원재료로 사용하며 논알코올 맥주용 효모를 활용한 발효, 숙성 등 수제맥주와 동일한 양조 과정을 거친다. 부족한녀석들은 남양주에서 많이 나는 딸기, 오디를 활용한 계절 음료와 먹골배를 이용한 ‘마시면서 해장하는 음료’ 등 라인업을 점차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시 전문 큐레이팅... 수원 행궁동 '책방 시요' [우리동네 독립서점]

수원시 행궁동에 위치한 ‘책방 시요’는 시 전문 소규모 큐레이팅 서점이다. 쌓여 가는 시집을 나누고 싶어 서점을 차린 주인장은 독립출판 문예지 A;lone을 발행하며 시집 ‘나의 외로움을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를 출간한 김고요 시인이다. 시요는 시인의 취향이 묻어 있는 책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시가 있다, 시입니다’ 2023년 8월에 문을 연 ‘책방 시요’는 시 전문 독립서점이다. ‘시가 있다’, ‘시입니다’라는 뜻의 시요는 ‘나의 외로움을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를 쓴 김고요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이다. “시 전문 서점으로 다양한 시집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서점에 입고된 시집도 그렇고 시집 외 도서들도 전부 저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고릅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마음으로 큐레이팅하고 있어요.” 수원은 김씨가 유년시절부터 쭉 자란 곳으로 익숙한 지역이다. 가게를 차린다면 당연히 수원에서 열 계획이었고 그중 유동 인구가 많은 행궁동 장안문 근처에 자리 잡았다. “갖고 있는 시집은 자꾸 쌓여 가는데 이 좋은 책들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서점을 열었습니다. 철저히 제가 좋아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그런 로망으로 시작했다는 말이 맞을 것 같아요.” 시요는 분야별로 책장을 꾸리고 있다. 시집을 필두로 에세이, 매거진을 주로 다루고 있으며 시요에서 판매하고 있는 시집들은 주인장이 한 권씩 소유하고 있어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인상 깊은 페이지마다 표시가 돼 있어 한번 더 눈여겨볼 수 있고 때때로 시 추천을 원하는 손님에겐 그에 걸맞은 시를 소개한다. 책, 커피, 사람이 있는 곳 시요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게시물이 많다. 가게 오픈 일정만 고지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관리자의 마음 상태, 좋은 글귀 등을 공유하며 친한 친구의 근황을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저는 제 할 일을 할 테니 편히 들러 주세요” 같은 문구는 한 번쯤 서점에 들르고 싶게 만든다. “저희는 카페도 겸하고 있어 혼자서 조용히 차만 즐기다 가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시가 좋아서, 책에 집중하고 싶어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등 오시는 분들의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시요에 들른 손님들이 뭔가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실 수 있길 바랍니다.” 책 수요가 한정적이고 책 읽는 사람들이 줄고 있음을 느낀다는 김씨는 현실적으로 책방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을 내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 “많이 벌지는 못하더라도 가게를 운영할 정도의 수익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야 책방을 지속할 수 있고 손님들이 오래도록 시를, 책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공간을 오래 유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상상력으로 채운 소리와 울림, 수평선 너머 어부를 그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을 판소리로 재해석한 이자람 작창(作唱)극 ‘노인과 바다’가 제주, 경남 김해, 경기 화성을 거쳐 안양 평촌아트홀을 끝으로 상반기 공연을 마무리했다. 쿠바의 어부 산티아고의 삶을 연기한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의 능수능란한 장단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느끼게 하는 무대였다. 소리꾼 이자람의 판소리 작창극 ‘노인과 바다’가 지난 1일 안양 평촌아트홀 무대에 올랐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로 시작하는 동요 ‘내 이름 예솔아’로 5세에 방송 활동을 시작한 이자람은 1990년 국악과 인연을 맺어 국립국악중·고교, 서울대 국악과를 거쳐 판소리 인간문화재 오정숙, 송순섭, 성우향 명창을 사사했다. 1997년 ‘심청가’를, 1999년 20세의 나이로 최연소 ‘춘향가’ 완창 기록을 세운 이자람은 2007년 ‘수궁가’, 2010년 ‘적벽가’, 2015년 ‘흥보가’까지 주요 판소리 다섯 작품을 모두 완창했다. 한편 이자람은 2008년부터 작창극을 통해 대중을 만났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을 기반으로 한 ‘사천가’, 2011년에는 ‘억척어멈과 자식들’을 모티브로 한 ‘억척가’의 대본, 음악, 연기를 맡으며 젊은 관객을 국악의 세계로 이끄는 성과를 거뒀다. 2019년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신작으로 초연한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소설을 판소리로 재탄생시킨 작품으로 ‘추물/살인’으로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한 박지혜가 연출하고 무대미술가 여신동이 시노그래퍼로 참여했다. 쿠바 어촌에 얹는 판소리 가락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 텅 빈 공간에 등장한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은 암전도 되지 않은 환한 객석을 향해 인사를 대신한 소리 한 자락으로 무대를 열었다. “볼 것도, 할 것도, 갈 곳도 많은 세상에 우리의 공연을 찾아줘 고맙다”며 한순간 판소리의 벽을 허문다. 판소리가 낯선 관객을 위해 틈틈이 해설과 설명을 덧붙이며 추임새를 독려하고 장단을 가르치는 모습은 렉처 콘서트를 연상케 했다. 평생을 바다 위에서 외줄낚시를 하며 살아온 주인공 산티아고는 커다란 고기를 낚는 재주가 있어 타고난 어부 소리를 들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좀처럼 큰 고기가 찾아오지 않아 대물에 대한 염원을 품고 바다에서 버틴다. 80여일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청새치 한 마리가 나타나고 바다 깊은 곳에서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청새치와 수면 위의 산티아고는 꼬박 이틀을 대치한다. 이날 무대를 채운 것은 이자람의 소리와 북소리, 거기에 ‘부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전통 판소리 무대에서도 부채는 소리꾼 신체의 일부분으로 여겨지며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소로 쓰인다. 이자람은 거기에 더해 넘실대는 파도, 팽팽한 낚싯줄, 청새치의 숨통을 끊는 작살 등 그림을 그리듯 부채에 생명을 불어넣어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그렇게 사투 끝에 마침내 청새치 등에 작살을 꽂은 산티아고는 마을로 돌아가 잔치를 벌이고, 연인을 만날 생각에 부풀어 있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고 상어 떼의 습격에 청새치 몸통을 다 뜯기고 뼈와 머리만 갖고 돌아간다. 손이 끊어지는 고통을 이겨내며 지켜낸 청새치가 눈 깜짝할 새 사라져 버리자 산티아고는 밀려 드는 후회를 되뇐다. 좀 더 큰 배를 가져올 걸, 작살을 넉넉히 준비했더라면, 혼자가 아닌 누구와 함께했으면 상어를 물리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이내 육지에 도착하고 며칠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난 산티아고는 다시 바다에 나갈 채비를 한다. 이자람은 노인이 만난 청새치가 특별한 하루가 아닌 일상으로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극을 마무리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하루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허탕치는 하루도 모두 일상 속 하루일 뿐, 특별한 것도 대단할 것 없는 하루는 매일매일 그렇게 계속 됨을 노래했다. 소리꾼 이자람은 여는 소리에 이어 닫는 소리로 무대를 마쳤다. “여러분 엉덩이도 아플 테고, 이자람 몸도 부서질 것 같고.” 웃음으로 마무리했지만 2시간여 바닥에 앉아 있던 고수는 일어나기도, 걷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런 그를 부축하며 퇴장하는 모습을 보며 관객은 더 큰 박수를 보냈다. 이자람은 ‘노인과 바다’ 상반기 일정이 끝나자마자 지난 13, 15일 양일에 걸쳐 ‘적벽가’ 완창을 또 한 번 해냈다. 전통과 작창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이자람의 다음 무대가 기다려진다.

우리동네 독립서점_열다책방

서점이건 도서관이건 책보다는 사진이 잘 나오는 공간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다. 그렇게라도 대중이 책에 관심을 갖고 독자로 유입되는 과정도 유의미한 일이지만 ‘열다책방’은 공간을 소비하기보다는 ‘책’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책방 주인은 ‘책’이라는 믿음으로 손님들과 소통한다. 공간보다 ‘책’에 집중한 서점 인천 연수구에 위치한 열다책방은 2022년 4월 동춘동 상가건물 3층에 문을 열었다. 눈에 잘 띄는 1층에 비해 다소 접근성은 떨어질 수 있어도 방문객들은 생각지 못한 곳에 있어 더 귀하고 책에 집중할 수 있어 오히려 좋다는 반응을 보인다. 책방지기 김은철씨도 손님들이 열다책방이라는 공간보다는 책 자체에 관심을 갖고 집중하기를 바란다. “독립서점을 ‘공간’으로 소비하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커피도 마시고,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서점을 찾는 것도 유의미하지만 아쉽게도 저희 열다책방은 그런 공간이 아니에요. 그저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상점에 가깝고 저도 그런 곳이 되길 바랍니다. 손님들이 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좋은 책을 많이 소개하려고 노력합니다.” 서점의 본질인 책을 앞세우는 열다책방답게 서점에 들어서면 아담한 규모에 꼼꼼하게 채워 넣은 책들이 보기 좋게 진열돼 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내가 읽고 싶은 책’입니다. 유튜브, 팟캐스트, 출판계 소식지 등을 통해 다양한 책 정보를 수집하고 그중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읽을 만한 책’을 선별하고요. 문학, 비문학, 독립출판물의 비율이 대략 4 대 4 대 2 정도 되는데요. 이 비율이 크게 달라지지 않도록 신경 써서 유지하는 편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들어온 책들은 특정 주제에 맞게 묶어 평대를 구성한다. 시의성 있는 정보들을 고려해 책방지기의 주관이 더해져 주로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내용을 선정한다. 사회과학 분야가 주를 이루고 자연과학 및 예술 분야도 비중을 맞추려 노력한다. ‘K공대생 열다, 책방’ 많은 독립서점이 그렇듯 열다책방도 독서모임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한 달에 8~9회의 독서모임이 열리고 책방지기뿐만 아니라 책과 사람을 사랑하는 단골 몇 명을 각 모임의 리더로 위촉해 함께 진행하고 있다. “‘열다 북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학, 한국소설, 인문학, 과학 도서 읽는 모임을 각각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여 책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은 무척 즐겁습니다. 독서모임 참가자들도 가치 있는 시간이 되도록 A4용지 5~6장 분량의 발제문을 제공하는 등 철저히 준비하는 편입니다.” 책방지기 김은철씨는 2010년 송도 소재 건설회사에 취업하면서 연수구에 살게 됐다. 2022년 3월 퇴직 후 같은 해 4월 지금의 자리에 열다책방을 오픈했다. 그리고 퇴사를 결심하게 된 순간부터 책방을 열기로 마음먹은 계기, 책방을 열면서 계획하고 실행한 과정 등을 담은 책 ‘K공대생 열다, 책방’을 독립출판물로 출간했다. “일해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면 저는 보다 정신적인 가치에 비중을 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조직은 ‘주인의식’을 강조하지만 진짜 ‘내 일’이 하고 싶기도 했고요. 아파트를 짓는 일도 분명 사회에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물질적 가치를 위해 정신적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대부분의 책은 인간의 정서와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저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만족스럽습니다.”

공간의 재발견_인천 연수구 ‘공원 속 작은도서관’

인천 연수구가 주민들의 독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공립작은도서관. 연수구 내 행정복지센터 다섯 곳과 공원 네 곳에 작은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중 문화공원, 솔안공원, 해찬솔공원, 누리공원 내에 마련된 도서관을 통해 대형도서관과 차별화된 최대 60여평(214㎡) 남짓의 작은도서관이 갖는 특징과 장점을 알아본다. 아지트처럼 친근한 도서관 생활권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집 가까이 도서관이 있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주민 생활과 밀접한 모든 곳에 대규모 공공도서관이 들어설 수 없는 노릇이다. 인천 연수구는 이런 아쉬움을 타개하기 위해 행정복지센터 다섯 곳과 공원 네 곳에 9개의 작은도서관을 조성해 운영 중이다. 옥련1동, 옥련2동, 송도2동, 송도3동, 연수1동 등 행정복지센터 내 작은도서관 외 공원에 마련된 작은도서관 네 곳은 도서관이 주는 무게감이나 부담감, 허물없이 들를 수 있어 가족단위 방문객이 많이 찾는다. 지역주민들의 생활밀착형 도서관이 되기 위해 2021년 연수동 소재 문화공원과 솔안공원에 작은도서관을, 2022년 송도동 소재 해찬솔공원과 누리공원에 작은도서관을 개관했다. 각 도서관은 작지만 차별성 있는 운영을 위해 특화 주제를 갖고 운영하고 있다. 문화공원 내 작은도서관은 지상 1층, 연면적 198㎡로 어린이 특화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적한 서재 느낌을 살린 솔안공원 도서관은 지상 2층, 연면적 210㎡ 규모로 문학 특화도서관으로 조성됐다. 해찬솔공원 내 도서관은 지상 1층, 연면적 214.59㎡로 자연·환경 분야를 특화해 운영 중이고 2022년 3월 개관한 누리공원 작은도서관은 지상 1층, 연면적 176.4㎡ 규모로 한옥으로 조성된 건물과 어울리는 한국사 특화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공원 내 위치한 작은도서관은 산책 및 나들이를 나온 인근 주민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족단위 방문객들이 타 도서관에 비해 많은 편인데 젊은 부부와 어린 자녀들의 방문이 주를 이룬다. 상대적으로 청소년 및 노년층의 방문이 적은 편이어서 연수구도서관 관계자는 “청소년과 노년층이 도서관을 격의 없이 방문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풍부해진 도서관 인프라만큼 이용객도 늘어 일반적으로 규모가 큰 도서관은 형식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영되는 반면 작은도서관은 사서와 이용자가 한데 어우러져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적 특성이 강하다. 실제로 작은도서관에 가보면 사서들이 동네 아이들 이름을 꿰고 있고 아이들도 스스럼없이 도서관에 들어와 노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연수구도서관 관계자도 이 점을 작은도서관의 특징이자 장점으로 꼽는다. “작은도서관은 이용자들에겐 동네 아지트처럼 활용되기도 하고 근무하는 사서들은 주민들과 소통하며 도서관을 함께 가꿔가기에 또 다른 면에서 공공도서관의 성격이 극대화됐다고 볼 수 있으며 그 때문에 이용객과 직원 간의 유대감도 큰 편입니다.” 대형도서관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문화·복지 측면을 강조하는 것처럼 작은도서관 네 곳도 특화 주제에 맞는 프로그램과 행사를 소규모로 운영해 이용자들의 참여와 방문을 독려하고 있다. 어린이 특화도서관인 문화공원 작은도서관은 초등 저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그림책으로 키우는 문해력’ 및 ‘진짜 진짜 재밌는 그림책 읽기 놀이’ 행사를 진행했으며 누리공원 작은도서관에서는 ‘신나는 한국사’, ‘고려에서 읽고·걷기·쓰기’ 등 한국사 특화 주제에 맞는 프로그램을 어린이뿐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발굴해 운영하고 있다. 한편 공원 내 작은도서관의 장서가 다소 적은 것처럼 보여도 상호 대차를 이용해 원하는 도서가 비치돼 있는 연수구립공공도서관에서 원하는 도서관으로 신청해 대출할 수 있다. 연수구의 경우 2023년 6월 기준 20개 도서관이 상호 대차에 참여하고 있으며 공립작은도서관 네 곳도 이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다. 연수구도서관 관계자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연수구 주민들은 120만권의 책을 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관계자는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고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도서관이 지역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증거”라며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많은 도서자료가 이용되길 바라고 앞으로도 책을 통해 지역주민들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도서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나라 공공도서관 인프라에 대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해진 편”이라며 각자 거주지, 근무지 등 생활권의 도서관에 부담 없이 들러볼 것을 권했다. “꼭 책을 읽지 않아도 도서관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주변의 도서관을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 냉전의 흔적을 기록하다 [인터뷰]

1984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11년간 사진기자로 일한 박종우 작가는 우연히 히말라야에 다녀온 후 ‘이곳이 평생 작업의 바탕으로 삼아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티베트의 차마고도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 민간인으로서는 최초로 비무장지대(DMZ)를 촬영한 그의 이력은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자신이 주체가 돼 기록하는 행운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평생 기록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다음 기록은 무엇이 될까. 민간인 최초로 DMZ를 담다 6·25전쟁 정전 70주년인 지난해 7월 경기도박물관과 독일에서 박종우 작가의 DMZ 사진이 전시됐다. 분단이 만들어낸 현실과 미래를 담았다는 점에서 두 전시는 큰 의미를 가졌다. 독일 전시는 올해 3월까지 이어졌으며 이미 몇 년 전 독일 사진집 전문출판사 슈타이들을 통해 DMZ 사진집이 출판된 바 있다. 여전히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에 있는 남한과 북한 사이엔 휴전선을 기준으로 서해에서 동해까지 38도선을 따라 248㎞에 걸쳐 폭 4㎞의 DMZ가 설정돼 있다. 박종우 작가는 이 냉전의 흔적을 민간인 최초로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2009년 국방부 6·25전쟁 제60주년 사업단과 조선일보가 협약을 맺은 사업에 박 작가가 합류하면서 DMZ 촬영은 가속화됐다. “오랜 세월 인간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고 첨예한 군사적 대립이 있어 날이 서 있을 것 같지만 막상 DMZ에 들어가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냥 우리나라의 산과 들, 자연 그 자체였지요. 드문드문 부대와 초소가 있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2009년 10월 촬영 제안을 받아 답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그해 12월부터 DMZ를 찍기 시작한 박종우 작가는 DMZ 작업 중 GP(Guard Post·최전방 감시초소)를 기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GP 개수 자체는 군사기밀인데 2009~2010년 당시엔 80~90개로 추정되는 상황이었어요. 국방부의 특별 허가에 따라 그곳을 다 찍을 예정이었고 물론 촬영 후 국방부 확인을 받기로 돼 있었죠. 2009년 12월부터 석 달 동안 GP 10개 정도를 방문했는데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GP에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가을까지 6개월여 DMZ 철책 밖을 찍으며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상황이 좀 누그러져 국방부에서 GP에 대한 재허가가 났는데 다시 GP에 들어가기로 한 사흘 전인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09년 10월부터 준비한 DMZ 촬영은 그렇게 끝났다. 작업을 아예 못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 작업도 포기하고 매달린 프로젝트 치곤 미진한 1년이었다. 군 헬기를 타고 DMZ를 왕복하며 사계절을 담기로 한 계획도 가을 촬영 한 번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쟁의 흔적과 삶의 흔적 박종우 작가가 기록하는 전쟁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땅에서는 보이지 않던, DMZ 상공에서 발견한 어떤 구조물을 최근까지 사진으로 담고 있다. “군 헬기에서 DMZ 풍경을 담을 때 처음 보는 구조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군인들에게 물어보니 ‘대전차 장애물’이라고 하더군요.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탱크로 서울까지 밀고 들어왔죠. 우리 군은 탱크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수밖에 없고, 탱크를 막는 것이 국방의 주요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서울 북부에 있는 웬만한 국도와 하천변, 해안에 탱크 저지선인 용치 등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해 놨습니다.” 세월이 흘러 전쟁의 모습도 바뀌었고 대전차 장애물도 무용지물이 됐다. 도로 건설 때마다 걸림돌이 되고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기도 하는 대전차 장애물은 우리 시대 흉물 취급을 받고 있다. “지자체에서는 없애고 싶고, 군에서는 쉽사리 없애지 못하는 현실인 거죠. 최근 독일에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사실인데 이런 전쟁의 흔적은 독일을 비롯한 영국, 네덜란드, 폴란드, 이탈리아, 스위스 등 전쟁을 겪었거나 위협이 있던 유럽 대부분 나라에 산재합니다. 나라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형태고 다른데 영국은 탱크를 막겠다고 몇천 ㎞에 달하는 해안선에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했어요. 지금 보면 어리석은 생각이기도 하지만 전쟁과 침략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습니다.” 신문기자 출신인 그가 회사를 나와 다큐멘터리스트로 전환한 후 세계 오지를 탐사하며 사진과 영상을 남기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서울, 부산 등 국내 도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기록하며 지금은 지나치는 것들을 훗날의 사람들에게 남기고자 한다. “중학교 때 처음 사진을 배웠는데 그땐 처음이니까 창경궁도 찍고 석조전도 찍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어요. 당시 우리 집이 서대문 근처였는데 집 앞에 서울의 마지막 대장간이 있었어요. 기둥에 말과 소를 묶어두고 말굽을 갈거나 박는 작업을 서울 한복판에서 볼 수 있었는데 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않은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그땐 너무 익숙했고 그런 일상이 영원할 줄 알았어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훗날 후회하지 않게,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시리뷰]

세월호 참사 당시 합동분향소가 있던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경기도미술관. 단원고를 마주하고 있는 이곳에서 참사 10주기 추념전 ‘우리가, 바다’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세월호 참사를 포함해 우리나라와 외국에서 벌어진 사회적 참사에 대해 예술이 전하는 기억, 위로, 바람의 작품 40여 점이 전시돼 있다.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가 10년이 되는 봄을 맞아 경기도미술관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추념전 ‘우리가, 바다’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4월 12일부터 진행된 이번 전시는 예술을 통해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동시에 여전히 각종 재난을 겪는 우리 사회에 위로를 전하고 함께 나아가야 할 사회적 상생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안산에 위치한 경기도미술관은 참사 당시 합동분향소가 있던 화랑유원지에 위치해 있으며 단원고를 마주하고 있다. 예술을 통해 안산의 공동체로 함께해 온 미술관은 10주기를 추념하며 재난의 상흔에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 있다. 전시 제목인 ‘우리가, 바다’는 세 가지 ‘바다’로 구성돼 있다. 첫째는 재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억해야 함을 의미하는 ‘우리가, 바(로보)다’, 둘째는 재난을 겪는 사회에서 주변을 바라보면서 전해야 할 위로를 담은 ‘우리가, 바(라보)다’, 마지막은 재난에 대해 모두가 고민하고 함께 이뤄야 할 바람을 담은 ‘우리가, 바(라)다’이다. ‘우리가, 바다’는 세월호 참사 이후 슬픔과 고통을 내포한 ‘바다’가 이전과 같은 바다가 될 수는 없지만 생명과 순환을 상징하는 ‘바다’의 의미를 소환해 사회적 재난을 비춰 보고 있다. 이번 전시에 ‘내 마음의 수평선’으로 참여한 안규철 작가는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를 근본적으로 묻게 된 사건이었다”며 “‘우리가 어떻게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안 작가의 작품 ‘내 마음의 수평선’은 누구나 예술작품 창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마련된 관객 참여형 작품으로 작은 조각에 담긴 관객의 마음이 윤슬이 되고 수평선이 된다. 이는 그림을 완성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사회구성원 모두 아픔을 함께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공동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듯하다. 한편 전시장 한가운데 재생되고 있는 댄스필름 ‘내 이름을 불러줘’는 안무가 송주원이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몸짓으로 하나하나 새겨 추모하고 애도하는 작품이다. 여백의 공간에서 오직 무용수의 몸짓만이 드러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공간 전체를 아우르며 관람객이 바라보는 장면에 공간과 작품을 덧입힐 수 있도록 설치했다. ‘우리가, 바다’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포함해 우리나라와 외국에서 벌어진 사회적 참사에 대해 예술이 전하는 기억, 위로, 바람의 작품 4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그중 김지영 작가의 ‘파랑 연작’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등 과거에 발생한 32개의 서로 다른 재난 상황을 신문 보도 사진을 바탕으로 표현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작업한 32개의 그림을 채운 각각의 파란색은 재난에 대한 서슬푸른, 빛바랜, 차가운, 잊혀진, 아득한 우리의 시선을 대변하는 듯하다. 전승보 경기도미술관장은 “전시를 통해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재난을 대비해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공동체로서 함께 고민해야 하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7월 14일까지.

아이돌 굿즈만 있나? 지역과 문화를 품은 '굿즈의 세계'

굿즈 마케팅은 브랜드를 알리고 소비를 늘리는데 더 없이 좋은 마케팅이다. 최근 늘어난 기획전과 무분별한 굿즈 출시로 소비자들의 피로감이 늘어났다는 시선도 있지만 경기문화재단의 ‘지뮤지엄샵’과 인천 강화군 ‘진달래섬’은 각자 예술과 지역 공동체를 상품에 녹여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특이점을 찾아라 몇 년 전 BTS 멤버 RM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를 관람한 후 올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진 한 장에 해당 전시는 물론 굿즈까지 유행이 된 사건이 있다. RM이 방문한 전시는 반가사유상 두 점이 상설 전시 중인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이었다. 그는 전시 관람 사진과 더불어 작업실 사진을 게재했는데,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반가사유상 굿즈가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순식간에 완판되며 ‘뮷즈(뮤지엄+굿즈)’에 대한 관심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사실 국립중앙박물관의 문화상품은 2010년대 후반부터 품절대란을 일으키며 ‘국립 굿즈’라는 평을 들었다. 한글을 테마로 한 문구·사무용품을 비롯해 패션소품 등 소장가치 높은 상품을 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판매하며 ‘굿즈 맛집’으로 통했다. 굿즈 마케팅은 브랜드를 가장 쉽게 각인시키는 방법이다. 해당 브랜드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팬심과 소비심리를 공략하는 것으로 대부분 해외에선 특정 브랜드나 연예인의 기획 및 홍보상품을 머천다이즈(merchandise·MD)로 부르나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굿즈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굿즈 시장은 굿즈를 생산하거나 판매하지 않는 분야를 찾기 힘들 정도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굿즈 마케팅을 선보이고 있다. 굿즈의 시작점은 1990년대 소위 ‘기념품’으로 불리던 연예인 포스터나 사진이었다. 별다른 가공 없이 가수의 음반을 사면 끼워주던 포스터는 이제는 음반마다 다른 포토카드가 들어있어 팬들로 하여금 같은 음반을 여러 장 사게 만드는 마케팅으로 진화했다. 아이돌 시장이 커지면서 공식 굿즈 외에도 팬들이 직접 아이돌의 사진을 가공해 스티커, 파우치, 휴대폰 케이스 등을 만드는 문화도 형성돼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홍보와 기획을 더해 본격적인 굿즈 마케팅을 펼쳐온 스타벅스커피코리아는 매년 연말 음료 17잔을 마셔야 얻을 수 있는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선보였다. 이 마케팅은 ‘스벅 덕후’를 양산하며 컵, 텀블러, 원두 등 기존의 MD상품의 판매를 동시에 끌어올렸으며 연말에만 해오던 굿즈 마케팅은 이젠 썸머 레디백, 썸머 체어 등 시즌별 행사로 확산됐다. 굿즈 마케팅은 출판시장에서도 활발하다. 2014년 도서정가제 시행 후 책값에 대한 가격 경쟁이 사라지면서 알라딘을 필두로 교보문고, 예스24 등 모든 인터넷 서점에서 굿즈 증정 및 판매를 시작했다. 알라딘은 2015년 홈페이지에 ‘굿즈 샵’을 오픈해 상품 가치가 있는 판매 제품이라는 인식을 정착시켰다. ‘굿즈’를 넘어 ‘뮷즈’ 경기문화재단은 경기도박물관, 경기도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실학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 경기도어린이박물관,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등 일곱 곳의 각 뮤지업숍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해 오던 상품 개발을 2012년부터 ‘지뮤지엄숍’이라는 브랜드를 론칭해 통합 운영, 관리하고 있다. 뮤지엄마다 관람객을 대상으로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해 오던 방식은 코로나19 이후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관람객이 방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온라인스토어 운영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졌고 2021년 지뮤지엄숍 온라인스토어가 탄생한 것. 경기문화재단 홍보마케팅팀 김진아 대리는 온라인스토어 운영에 대해 “뮤지엄을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상품 구매가 이뤄질 수 있도록 다양한 세대의 취향과 요구에 맞추는 것이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문화재단 산하 일곱 곳의 뮤지엄에서 내놓는 굿즈의 차별점은 각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과 작품을 활용해 상품을 개발한다는 점이다. 경기도박물관은 서화, 도자기를 활용한 상품 개발이 많고 경기도미술관은 미술관 로고를 디자인화해 ‘문양’을 개발한 후 문양을 입힌 에코백, 문구류, 텀블러 등을 개발하는 식이다. 백남준 선생의 TV 브라운관을 본떠 만든 백남준아트센터의 ‘색동가방’ 제품은 국내는 물론 외국인 관람객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김 대리는 “소장품이 많은 박물관일수록 상품화할 콘텐츠가 많아 유리하다”며 “기관의 특성과 작품에 담긴 뜻을 고루 살려 상품 가치로 표현 바로 소비로 이어지게끔 살피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설명했다. 뮤지엄 굿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점차 높아지는 것과 관련해 김 대리는 “소비를 이끄는 힘은 ‘필요성’보다는 ‘소장 욕구’가 더 크다는 것을 느꼈다”며 “유물이나 작품의 본질을 굿즈에 담아내는 정성보다는 소비를 끌어낼 수 있는 특이점과 당위성을 찾는 것이 과제”라고 덧붙였다. 인천 강화군의 ‘진달래섬’은 2013년부터 약 10년간 지역 문화기획, 로컬 콘텐츠 제작, 로컬 공간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해온 협동조합 청풍이 강화도의 좋은 물건을 선보이고자 문을 연 로컬 소품숍이다. 2020년부터 운영 중인 진달래섬에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관광기념품보다는 강화도의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로컬 상점, 창작자, 장인이 만든 물건을 소개하고 협업하며 강화도를 소개하고 있다. 진달래섬 관계자는 가장 인기가 많은 굿즈로 강화도의 천연 작물인 ‘소창’을 꼽았다. “소창은 목화솜에서 뽑은 실로 건강하게 짜는 천연 작물로 만든 손수건, 행주, 패브릭 포스터 등 무형광 소창 제품들을 제작·판매하고 있다”며 “강화도 특산물 ‘순무’로 만든 순무차 등 다양한 먹거리 제품도 사랑받고 있다”고 말했다. 진달래섬에서 생산·판매되는 상품의 가장 큰 특징은 ‘강화도를 담아내고 있는 상품’이라는 점이다. 진달래섬 관계자는 “강화도 주변을 감싼 서해는 동해의 넘실거림과는 거리가 먼 잿빛의 갯벌과 낙조에 가까운 만큼 강화도만의 풍경과 특색, 아름다움을 담긴 물건을 소개하겠다”고 전했다.

'지구'가 남긴 발자국을 쫓는 ‘지구프로파일러’ [인터뷰]

과학커뮤니케이션은 1980년대 유럽에서 시작했다. 1986년 영국에서 처음 발견된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대중은 과학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그 즈음 유럽의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과학 이슈를 대중에게 더 쉽게 전달할지 고민했고 이러한 배경에서 ‘과학커뮤니케이터’라는 직업이 탄생했다. 국내에서 과학커뮤니케이터를 발굴한 지 10년, 최근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과커 지구씨는 “과학에 대한 관심은 깊이를 떠나 자주 회자되고 대화의 소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 영국의 첼튼엄에서는 매년 6월 과학 축제가 열린다. 2002년 시작된 ‘첼튼엄 과학축제’는 과학·수학·공학 분야를 주제로 한 강연 위주로 진행되는데 일주일 남짓한 축제 기간 매일 수십 개의 강연이 열리며, 대중과 과학자 간 소통의 장이 마련된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 세계 최대 과학커뮤니케이터 발굴 대회 페임랩(FameLab)이 열린다. 우리나라에서도 2014년부터 페임랩코리아를 개최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하는 이 대회는 매년 본선 진출자 10명을 과학커뮤니케이터로 위촉하고 수상자에겐 영국 페임랩 국제대회 참가 및 참관 기회를 제공한다. 과학커뮤니케이터 지구씨도 2021년 페임랩코리아를 통해 과학커뮤니케이터가 됐다. 과학커뮤니케이터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설문을 통해 정해진 활동명 ‘지구’는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구씨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과학탐구 선택과목 중 물리·화학·생물 등 세 과목만 가르쳤다. 그러던 중 지구씨는 우연히 EBS 인강을 통해 지구과학에 빠졌다. “공부가 너무 하기 싫은데 하는 척은 해야겠고, EBS 인강을 뒤적이다가 지구과학은 뭘 배우나 보다가 빠져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성향이 아주 강한 편인데, 그날부터 정말 지구과학만 공부했어요. 혼자 문제집 사다가 풀고 모의고사 때도 전교생 500여명 중 저만 지구과학을 선택해 맨날 1등이었죠(웃음).” 그렇게 지구과학에 스며든 지구씨는 대입을 앞두고 하고 싶은 공부와 취업이 잘되는 전공 사이에서 고민했고 후자를 택해 수도권에 있는 공대 토목환경공학과에 진학했다. “한 학기도 다니지 못하고 자퇴했지만 잠깐 경험한 토목공학은 인간 중심의 학문으로 느껴졌어요. 어떻게 하면 인간이 편한 대로 자연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지를 연구하는 학문 같았죠. 이걸 전공해 평생 직업으로 삼고 싶진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구씨는 원래 하고 싶었던 공부, 지질학을 택해 강원대에 입학했다. 멀쩡히 잘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지질학을 공부하러 가겠다고 하자 주변의 만류는 컸지만 지구씨는 학부 시절 4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통상적으로 지질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은 사실 지구물리학, 지구화학, 지구생물학 등 여러 학문으로 세분화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중 암석지구화학을 전공했는데요. 암석의 구성 성분을 통해 그 암석이 있던 지역의 역사와 땅을 이해하는 연구를 합니다. 암석을 분석하면 우리가 일기장에 날짜를 적듯이 암석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작용에 의해 변화를 겪었는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기후변화가 만들어 낸 ‘돌’ 지구씨의 충남대 대학원 석사 시절 쓰시마섬에 있는 화강암류 및 휘록암 등 암석을 분석, 동해 형성 과정을 연구했다. 돌 연구는 우선 돌을 망치로 깨 샘플을 확보한 다음 두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 샘플은 얇게 저며 현미경으로 보고, 두 번째 샘플은 완전히 갈아 가루로 만들어 최대한 균질한 평균값에 맞춘 후 산(acid)에 여러 과정을 거쳐 녹인다. 납, 아연 등 원소별로 분리해 질량분석기에 넣고 암석을 구성하고 있는 각 원소의 비율을 알아낸다. 이 비율을 알면 암석이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졌는지 파악할 수 있다. “질량분석기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암석 연구 시 얇게 저민 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기초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지구를 연구할 수 있는 폭이 더 넓어지고 지구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아진 거죠. 지질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을 알아가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꼭 필요한,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학문입니다.” 지구가 쌓아온 흔적을 통해 지구를 알아가는 학문 지질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가 ‘기후변화’다. 지구씨도 암석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본 돌 사진 한 장을 계기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저는 웬만한 암석 사진을 보면 무슨 돌인지 이름을 댈 수 있다고 자부하거든요. 나름대로의 재주인데(웃음). 사진 속 돌은 아무리 봐도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알고 보니 플라스틱이 햇빛에 녹았다 굳었다를 반복한 결과물이었어요. 장한나 작가가 진행한 ‘new rock’ 프로젝트 작품이었는데 지질학적으로도 맞는 말이에요. 200년 전에는 있을 수 없는, 현대의 새로운 유형의 돌인 거죠. 이 사진을 계기로 지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내가 그동안 기후변화에 대해 소홀했던 걸 반성했어요. 이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는 일이라는 판단에 강연 주제로 기후변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구씨는 기후변화 대응에 대해 “늦었다 혹은 늦지 않았다고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노력하면 나아질지, 해결될 일일지 고민하기보다는 무조건 해야 하는 행동이라는 것. “지구 역사에서 생물들이 대량으로 빠른 시간 안에 사라진 것을 ‘대멸종’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었는데 지구의 생명체들은 본인이 살던 최적의 환경이 변하면 생존이 힘들어져요. 우리는 지구의 역사를 통해 그 위험성을 알고 있고 더 큰 위기가 오기 전에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해결이 개인의 실천 없이 과학 기술만으로는 불가능해요. 개개인의 텀블러 사용이 당장은 큰 영향력이 없어 보여도 거의 모든 사람이 텀블러를 사용하면 정치인들에겐 환경을 외면할 수 없는 무언의 압박, 상징이 될 겁니다.” ‘실패해도 괜찮은’ 과학 지구씨는 대학원 졸업쯤 천문연구원 홍보팀에 입사했다. 얼핏 행정직으로 과학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지구씨는 연구원 홍보팀이 하는 일이 과학커뮤니케이터 역할이라고 말한다. “천문연구원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쉽게 알리기 위한 굿즈 개발, 유튜브 제작 등이 저의 주요 업무였는데 정말 열심히 했어요. 연구원의 연구 내용을 활용해 2주간 직접 기획하고 밤도 새워 가며 보드게임을 만들었고 지금도 천문연구원 굿즈로 쓰이고 있습니다. 천문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천문학으로 발을 넓히는 계기가 된 점도 저에겐 큰 수확입니다.” 한편, 지구씨는 우리나라 헌법 127조 1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언급하며 “‘과학=경제발전’으로 귀결되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발전을 전제로 과학에 접근한다면 ‘블랙홀 연구해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좋아지냐’는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관측이 어려운 블랙홀을 연구하려다 보니 잡음은 제거하고 신호는 강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와이파이를 개발하게 됐고 MRI를 만들게 된겁니다. ‘첨단(尖端)’, 즉 지식의 끝에 있는 분야들은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미리 가치를 논할 순 없어요. ‘실패해도 괜찮은’ 경제 너머 과학의 가치가 존중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