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시 ‘2국 7개과’ 조직 개편안 확정

시흥시가 인구 50만 대도시 행정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추진 중인 행정조직 개편안이 시의회 심의과정에서 일부 수정되면서 제동이 걸렸다. 당초 시의 조직개편안은 2국 9개과를 신설하는 방안이 상정됐지만, 시의회 심의에서 2국 7개과로 수정 의결된 것이다. 19일 시흥시와 시의회 등에 따르면 시의회 자치행정위는 이 날 시가 제출한 조직개편안에 대해 당초 2국 신설, 본청 및 사업소에 9개 과를 새로 설치하는 안을 심사해 2국 신설 및 7개 과로 수정했다. 이에 따라 외국인주민과와 예산법무담당관 등 2개 과의 신설은 좌초됐다. 시의회는 또 언론홍보담당관실을 현재 부시장 직속에서 시장 직속으로의 변경하는 안에 대해서도 거부했다. 안선희 시의원은 2개 직속기구에서 3개로 늘리는 안을 올린 것은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려는지, 아니면 욕심이 많은 것인지 시의회를 너무 우습게 보지 말라고 질책했다. 홍원상 시의원도 미래전략담당관실은 사업부서가 아니냐, 고충담당관실을 비롯해 시장 직속기구를 모두 부시장 직속으로 내리라고 요구했다. 상황이 이렇자 앞서 자치행정위원회 송미희 위원장과의 수차례 협의를 통해 2국 9과 신설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던 집행부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송 위원장이 그동안 집행부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해 놓고 상임위 소속 위원들과는 소통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시의 한 공무원은 담당부서에서 수차례에 걸쳐 해당 상임위원장과 협의과정을 거쳤다는데, 상임위원장은 정작 상임위원들과의 협의가 없었다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으며, 또 다른 공직자는 정책이 결정되기도 전에 과장, 국장 보고도 안하고 시의회에 보고부터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대해 송미희 위원장은 집행부가 제출한 안에 대해 확답을 한 것은 아니었으며, 의원들이 개별적인 의견을 내는데 대해 위원장이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시흥=이성남기자

“3기 신도시, 광역교통대책·주민 의견 반영을”

3기 신도시 5개 지방자치단체협의회가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4번째 모임을 갖고 광역교통대책 추진과 주민 의견 반영을 함께 요구하기로 뜻을 모았다. 조광한 남양주시장과 이재준 고양시장, 장덕천 부천시장, 김상호 하남시장, 김종천 과천시장 등 5개 지자체장으로 구성된 협의회는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에서 4차 회의를 가졌다. 이날 회의에는 실무 국ㆍ과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가 입지선정 당시 발표한 광역교통대책의 가시적 추진과 지역주민의 의견이 반영된 개발계획 수립을 정부에 적극 요구키로 결정했다. 또 지난 회의 때 정부와 국회에 요구한 국책사업으로 강제 수용되는 지역주민 토지보상금에 대한 양도소득세 감면 요구 사항에 대한 추진사항을 점검하고, 정기국회에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협의회는 신도시 사업으로 철거되는 주택과 공장에 대한 이주대책을 미리 수립, 재정착 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도 공감하고 정부에 요청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신도시 입지 발표 시 제시된 광역교통 대책에 대한 세부 추진계획을 조속히 마련하고, 2020년도 정부예산에 광역교통 대책 관련 예산이 반영돼 실질적인 선 교통-후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3기 신도시를 연결하는 광역철도망 구축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가 면제돼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협의회는 신도시 개발 광역교통개선 대책으로 추진되는 광역철도망 구축사업을 본 사업의 부대사업으로 보아 예타가 면제되어야 실질적 선 교통-후 개발의 원칙이 될 수 있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정부 관련부서에 건의할 예정이다. 유창재ㆍ김형표기자

포천 이면도로 ‘불법 주차’ 몸살

포천시 이면도로에 덤프트럭을 비롯한 화물차들의 불법 주ㆍ정차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급증하고 있지만, 단속의 손길은 미치지 못하고 있다. 19일 포천시에 따르면 지난해 개통된 364번 지방도와 대진대 진입로를 연결하는 선단동 도시계획도로(4차선, 400여m) 양 방향에 상시 10여 대의 차들이 불법 주ㆍ정차돼 있다. 일부 화물차와 덤프트럭은 밤샘 불법 주차하며 해당 도로를 차고지처럼 이용하고 있다. 특히 일반 화물차보다 길이가 긴 대형카고차들이 한 차선을 불법점거하고 있어 운전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 같은 불법 주ㆍ정차가 점차 늘어나는 것은 도시계획도로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교적 교통량이 많지 않은 점을 악용한 일부 얌체 차주들이 노골적으로 불법 주ㆍ정차를 일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의 불법 주ㆍ정차 단속은 주로 시내권에서 이뤄져 이곳까지는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어 단속 강화가 요구된다. 도로를 이용하는 한 운전자는 아침 출근길에 보면 상시로 덤프트럭과 대형카고차 여러 대가 한 개 차선을 완전히 점거하고 주차돼 있다. 밤새 주차차량도 점차 더 늘어가는 것같다며 시급한 단속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이면도로라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것 같다. 현장에 나가 불법 주ㆍ정차를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포천=김두현기자

‘9ㆍ19 선언’ 1주년 기념 ' 피스메이커 콘서트(Peacemaker Concert)' 22일 경기북부청사서 개최

남북평화를 염원하는 평화의 하모니가 22일 오후 7시 경기북부청사 평화광장에서 울려 퍼진다. 경기도가 9ㆍ19 평양공동선언 1주년을 기념하고자 기획한 Lets DMZ 행사와 연계한 피스메이커 콘서트(Peacemaker Concert)가 이날 열린다. 경기도, 경기도문화의전당, 경기문화재단 공동주최로 마련된 이 콘서트는 경기필하모닉을 비롯해 그리스 대표 민중가수 마리아 파란투리, 정태춘 밴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등이 무대를 꾸민다. 공연에서는 그리스 대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며 헌정한 교향곡 제3번이 공연된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한국인들에게 기차는 8시에 떠나네나 그리스인 조르바 등의 곡으로 잘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과 이후 냉전시기의 평화운동, 그리스 민주화 운동을 펼쳐왔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벨평화상 후보로 나란히 오를 정도로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음악가이자 평화와 인권의 상징인 인물이다. 평소 한국에서 강의와 방송 출연을 활발히 하는 세계적인 석학 미나스 카파토스 박사를 통해 직접 곡 헌정 의사를 전달해 이번 공연이 성사됐다.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그리스 민중의 음악이자 그리스의 노래 부제를 가진 70분 길이의 합창곡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의 시에 곡을 붙인 교향곡이며 평화를 상징하는 의미가 담겼다. 경기필하모닉, 소프라노 서선영, 의정부시립합창단, 그란데오페라합창단의 합동 공연으로 국내 초연한다. 2부에서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정태춘 밴드 등을 비롯해 그리스의 유명한 가수이자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분신이라 불리며 그의 모든 대표곡을 부른 가수 마리아 파란투리가 감동의 무대를 선사할 예정이다. 그리스 국회의원을 지낸 인권운동가인 마리아 파란투리는 이 콘서트를 위해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곡을 헌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연하기로 했다. 경기도문화의전당 관계자는 렛츠 디엠지(Lets DMZ)의 대미를 장식할 피스메이커 콘서트(Peacemaker Concert)가 한반도 평화를 향한 염원과, DMZ의 평화적 가치를 전 세계로 알리는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자연기자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9.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향한 한평생… 원심창 의사

14세의 소년, 31운동에 참여하다 평택 안정리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원심창(元心昌, 1906~1971)은 선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의협심이 강하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총명한 소년이었다. 4년제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지내던 원심창은 14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경험은 그를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했고, 고향을 떠나 민족사학의 명문으로 알려진 서울의 중동학교로 진학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2년에 중동학교를 중퇴하고 진로를 모색하던 원심창은 고향에 내려가 지내다가 그해 연말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16세의 소년 원심창은 낯선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2년 동안 노동과 공부를 병행하며 대학입학을 준비했다. 일본생활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일원에 일본역사상 최강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일본인 자경단이 무고한 한국인을 6천명이나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한 9월 3일에는 흑우회를 이끌던 아나키스트 박열이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천황과 황태자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로 검거되었다. 또 그해 말에는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키 사카에가 살해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나키스트 단체가 후쿠다 대장을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원심창은 아나키즘을 주목하게 하였다. 20세가 된 1925년 봄, 원심창은 일본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된 원심창은 당시 세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과 오스키의 정의를 구하는 마음을 비롯한 아나키즘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절대 권위를 배격하고 서로 도우며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아나키즘은 식민지 청년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 무렵 그는 박열이 조직한 아나키스트 단체 흑우회에 가입했다. 흑우회의 기관지 이름을 불령선인이라할 정도로 박열은 일제에 노골적으로 저항했다. 박열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열단과 연결하여 여러 차례 폭탄을 반입하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무장투쟁에 관심을 가졌다. 그해 9월 원심창은 대학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더 이상 학비를 마련한 길이 없었던 것이다. 1927년 원심창은 옥중에서 결혼한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형무소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한편 그의 유골을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으로 보냈다. 투옥 중인 박열의 사업을 계승하기 위해 단체명을 불령사로 개편하고 기관지 흑우를 발행했으며, 일본의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하여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펼쳤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운동에 주력하여 조선자유노동자연합을 결성하고, 일본 최대 노동조직인 동흥노동동맹을 조직했다. 또한 친일단체인 상애회와 맞서며 그들의 진상을 폭로했다. 이 무렵 좌우 합작으로 출범한 신간회를 통해 공산주의를 전파하려는 움직임에도 맞섰다. 1929년 원심창은 몇몇 동지들과 본국의 가뭄피해를 외면하고 운동회 개최에만 열중하는 유학생들의 비민족적 태도에 반성을 촉구하며 신간회 도쿄 지부를 습격하는 학우회 사건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지 7명과 구속되었다가 1930년 4월 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당국의 감시가 심해져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원심창은 항일투쟁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육삼정 거사로 무기징역을 살다 1931년 5월 상해에 도착한 원심창은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연맹에 가입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통제가 크게 강화되었지만 중국 내에 항일 기운도 높았다. 그해 10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한중일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했다. 11월 중순, 원심창은 프랑스 조계 안에 있던 백정기의 집에서 결성한 흑색공포단에 참여했다. 원심창은 백정기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1932년 1월 천진의 일청기선 부두에서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한 기선과 일본영사관, 일본군 부대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의 성능이 약해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이런 과감한 행동을 현지 신문은 항일구국연맹의 활약이라며 대서특필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과 일본은 물론 아시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은 시라카와 대장이 중국군 19로군을 패퇴시키고 상해를 점령하자 일본 군부는 승전을 축하하며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을 겸한 승전축하식을 열었다. 이 행사장에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 핵심 요인들을 처단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 지령자임을 밝힌 백범 김구의 목에 거금 6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윤봉길의거에 고무된 원심창과 백정기를 비롯한 남화연맹 흑색공포단 동지들은 제2의 홍구공원의거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 무렵 통신사에 근무하는 야타베 유지라는 일본인 아나키스트가 원심창에게 접근해왔다. 대단한 친화력을 가진 야타베는 이내 동지들과 친밀해졌다. 1933년 2월초, 오오끼가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육삼정 회합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일본의 군부대신의 지원을 받은 아리요시가 중국 장개석 군대를 거금으로 매수하여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무력화시키는 비밀회합을 고급요정 육삼정에서 가진다는 특급정보였다. 원심창은 정화암, 유자명과 함께 야타베를 만나 다시 한 번 정보의 내용을 검토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진실하다는 동지들의 판단에 따라 아리요시 암살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동지들을 소집했다. 리더인 정화암이 모임의 배경을 설명하자 10명의 동지들 모두가 자기가 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결정하지 못하고 다시 모여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제비뽑기에서 백정기와 이강훈이 함께 하기로 결정되었다. 원심창은 야타베를 통해 아리요시의 사진과 자동차 번호를 알아내고 현장 안내를 맡기로 했다. 이날 원심창은 백정기, 이강훈을 비롯한 동지들과 제2의 윤봉길의사가 되어 대한 남아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치자며 배갈을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정화암은 윤봉길 의거 뒤 백범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가흥으로 피신을 갈 때 주고 간 폭탄 두 개와 중국인 동지로부터 받은 권총 두 자루와 탄환 20발, 수류탄을 세 사람에게 분배했다. 육삼정 회합은 밤 9시부터 11시까지였다. 거사일인 3월 17일 오후 8시, 원심창은 이강훈, 백정기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현장 부근에서 내렸다. 이들은 육삼정에서 2백 미터 쯤 떨어진 중국음식점 송강춘으로 향했다. 거사에 사용할 폭탄은 윤봉길의사가 던진 폭탄과 성능이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일본인 동지 야타베를 만나 당일 육삼정의 정세를 파악하기로 약속했으나 야타베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종업원들의 수상한 거동을 보고 함정에 빠진 것을 눈치 챈 백정기가 품안의 폭탄을 빼드는 순간 종업원과 손님으로 위장한 일본 형사들이 덮쳤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이강훈, 원심창도 인력거꾼과 행인으로 변장한 여러 명의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3인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그 해 11월 15일 일본 나가사키 지방 재판소는 원심창과 백정기에게 무기징역을, 이강훈에게 15년 형을 구형하였고, 11월 24일 최종 재판에서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대로 선고하였다. 거사 직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국내외의 여러 신문에 크게 실려 일제의 대륙침략 음모가 폭로되었다. 실패한 거사였으나 중국인들을 항일전쟁에 나서도록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후반생은 통일조국을 위해 1945년 10월 10일, 원심창은 13년 만에 일제의 형무소에서 출소했다. 원심창과 이강훈은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가 아직도 투옥 중인 박열을 석방시켰다. 원심창은 이강훈, 박열 등 동지들과 함께 옥중에서 순국한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찾아내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에 봉환하여 1946년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모셨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원심창은 재일교포의 단결을 위해 동지들과 민단을 조직하여 사무국장, 단장으로 활동하며 재일동포의 권익 옹호에 힘을 쏟았다. 원심창의 후반생은 남북의 화합과 협력을 바탕으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는 숭고한 과업에 바쳐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신음하며 통일운동에 헌신하던 원심창 선생은 1971년 7월 4일 65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한국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투사 원심창 선생의 생애를 살피면서 지금까지 비판 없이 사용되고 있는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를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스어의 아나르코anarchos에서 나온 아나키즘은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옮기면서 아나키즘을 정부 조직이 없는 혼란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곡해하게 되었다.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도 아나키스트였다. 우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를 배격하지, 자율정부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원심창 의사가 아나키즘을 선택한 것은 조국의 광복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또 하나의 길이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교육청 제공(글·그림_키므네)

[김종구 칼럼] 曺 개혁 장관의 反 개혁 작품-공보준칙 강화

토요일인데 뭐해. 박 계장의 전화였다. 시간 있으면 법원 영장계 가 봐. 뭔가 있다는 귀띔이다. 서둘러 법원으로 갔다. 담당 직원 옆에서 미적댔다. 판사실 올려야 하니까 빨리 보세요. 문제의 영장을 찾아냈다. 무직이라고 적힌 표지를 넘겼다. 가슴 떨리는 단어들이 보였다. 대통령청와대서울시 부시장사기. 반은 눈에, 반은 머리에 담아왔다. 다음날 1면에 큼직하게 썼다. 대통령 친 동서, 사기 혐의 구속. 1998년 YS 동서 사건이다. 몇 번 없는 단독보도였다. 방송, 신문이 불을 뿜었다. 대통령 동서가 사기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청와대를 드나든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현직 서울 부시장 연루 의혹도 있습니다. 감추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박 계장이 어긴 것이다. 검찰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오후에 특수부장실을 들렀다. 항의를 각오했다. 그런데 노상균 부장이 웃는다. 잘 썼어. 미친놈들. 이런 게 감춘다고 감춰지느냐고. 법(法)으로 보자. 딱 떨어지는 위법이다. 피의사실을 무단히 공표했다. 무단 공표의 행위자가 검찰이다. 피의자는 인권을 침해당했다. 세상천지에 다 공개됐다. 당연히 처벌이 따를 일이다. 박 계장은 징계감이었고, 검찰은 배상 책임을 져야 했다. 나도 불법 유출된 피의 사실을 썼다. 수많은 기자들은 그 기사를 받아썼다. 나도, 그 기자들도 모조리 불법 행위자다. 하지만, 넘어갔다. 부장검사는 되레 잘했어라며 웃었다. 현실(現實)로 보자. 피의자는 대통령 동서다. 드나든 곳은 청와대다. 서울시 부시장과도 어울렸다. 이 모든 게 사기의 수단이었다. 대통령 청와대 서울 부시장. 범인(凡人)의 눈엔 모든 게 권력의 단어다. 문민정부의 도덕성을 따져 물어야 할 범죄다. 이런 사건을 두고 누가 슬그머니 넘어가자 하겠나. 청와대와 서울시, 가족들이라면 몰라도. 공개한 검찰의 잘못이 아니다. 공개하지 말라고 한 권력의 잘못이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에 대한 오해가 있다. 하나는 잘 지켜져 왔다는 믿음이다. 많은 경우 지켜지지 않는다. 관심을 끄는 사건일수록 더 그렇다. 노무현정부 많은 사건, 이명박ㆍ박근혜정부 많은 사건에서 지켜지지 않았다. 또 다른 오해는 피의사실 비공개가 곧 선(善)이다란 믿음이다. 굵직한 사건일수록 숨기고 싶어 한다. 부패한 권력은 더욱 그런다. 이걸 덮어줘야 하나. 그들에겐 선일 게 맞다. 하지만, 국민에까지 선일까. 흉악범 얼굴 공개도 원래는 금지였다. 그러다 2010년부터 바뀌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계기였다. 국민이 들고일어났다. 내 아들은 어떻게 하라고란 강호순 주장에 공분이 일었다. 오원춘부터 고유정이 그래서 다 공개됐다. 알 권리에 대한 국민 요구가 바꿔 온 흐름이다. 권력형 비리 사건에 대한 민심도 똑같다. 국민은 알고 싶어한다. 그러면 알도록 해야 한다. 정답은 없겠지만, 이것이 지금 형법이 가는 방향이다. 다들 조국 장관을 개혁 장관이라 한다. 논란 속에 취임했다. 그를 택한 대통령의 워딩도 검찰 개혁 적임자였다. 취임 이후 행보도 그렇게 간다. 고(故) 김홍영 검사 묘를 찾았다. 검찰 개혁단 구성을 마쳤다. 조만간 개혁안들이 쏟아져 나올 태세다. 그런데 불쑥 튀어나온 게 있다. 검찰 공보준칙 개정안이다. 피의사실 공표를 막는 개정이다. 피의자 사진 촬영을 막는 개정이다. 왜 하필 이런 게 개혁 장관의 1호 작품일까. 전임 장관이 시작한 작업이라 한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때였을 거다. 말 안 듣는 동부 지검 때문에 고민한 듯하다. 엄밀히 조국 표(標)는 아닐 수 있다. 그렇더라도, 완성자가 조 장관이다. 시행을 결재한 서명자도 조 장관이다. 시행을 얼마간 미뤘다지만, 달라질 건 없다. 개혁 장관 조국의 첫 번째 개혁은 공보준칙 개정이 됐다. 높은 사람 소환할 때 사진 못 찍게 하고, 수사내용 공개한 검사를 엄벌하는 개혁 말이다. 뭐가 급하다고 이런 것부터 내놓나. 여론에 밀려날 걸 뭐하러 시작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조화롭지 않은 두 단어-개혁 장관과 공보준칙 강화-다. 1998년, 박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어렵게 정보 따서 해보려는데, 위에서 덮으라니까. 그런 게 검찰이다. 안 하는 수사는 없다. 못하는 수사가 있을 뿐이다. 개혁으로 뚫어줘야 할 구멍도 이런 거다. 못하는 사건 없애주고, 못하게 하는 권력 막아주는 거다. 그러려면 필요한 게 투명성 확보다. 국민 앞에 더 당당한 수사 과정 공개다. 그런데 개혁장관의 1호 개혁은 이런 기대와 거리가 한참 먼 틀어 잠그기였다. 主筆

[천자춘추] 오케스트라 안에 숨겨진 배려

후배가 연주하는 어느 작은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카운터 테너가 넬라판타지아(Nella Fantasia)를 아름답고 맛깔스럽게 하는 연주를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이 음악을 들으면 대학생 때 봤던 영화가 생각난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미션(The Mission) 이 영화에서 신부가 원주민들에게 다가가 강가에 앉아서 오보에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들리는 음악이 안니오 모리코네 작곡의 가브리엘의 오보에, 훗날 이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곡이 넬라판타지아이다. 슬픔에 잠긴 듯 청아한 소리를 내는 악기인 오보에 연주로 원주민의 경계심을 푸는 것으로 설정한 것 같다. 이 설정은 이 영화에 기막힌 오보에의 선율을 탄생시키게 됐고 또한 이 음악 때문에 영화는 유명해졌으며 전 세계 오보에 주자들은 서로 경쟁하듯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연주하게 된다. 필자가 영화를 통해 장황하게 오보에라는 악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오케스트라 안에 숨겨진 배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회를 가보면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악장이 먼저 나와 기준 음(A)을 어떤 악기에게 불어달라고 지시하고 그 악기가 부는 음에 맞추어 목관ㆍ금관 악기 그리고 현악기 차례로 튜닝을 한다. 이때 기준 음을 불어주는 악기가 바로 오보에다. 오보에가 여러 가지 악기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서 기준 음을 부는 이유는 이 악기의 음정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오보에는 음정 조절 폭이 좁은 악기다. 왜 오케스트라의 많은 악기가 음정이 쉽게 변하고 음정 조절 폭이 좁은 악기에 음정을 맞춰 조율하는 것일까? 이유는 배려이다. 음정 조절 폭이 좁은 악기에게 조절 폭이 넓은 악기가 음정을 맞추는 일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려 때문에 음정 조절 폭이 좁은 오보에 주자가 혜택을 받았다. 그렇다면,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할 때는 어느 악기에 맞출까? 이 역시 오보에가 아닌 조율이 힘든 피아노의 기준 음에 온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음을 맞춘다. 이것이 오케스트라 연주장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이유 있는 배려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있으면 현악기, 목관 악기, 금관 악기, 타악기가 함께 어우러져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엮어나가는 음의 스토리가 삶의 축소판과도 같다. 서로 조화와 대비를 이루며 상대 악기를 위해 한쪽 귀를 열어놓고 지휘자와 악보를 번갈아가며 마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또 하나의 배려를 통한 따뜻한 세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둥지가 됐으면 좋겠다. 약자를 배려해주고 배려받은 사람들이 노력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면 더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조요한오산문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