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현역·거대정당에만 돈 몰리는 정치자금법 손봐야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해 정치자금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치권 안팎에선, 현행 정치자금법은 ‘심지어 노회찬도 못 지킬 법’이라며 불합리하다고 지적한다. 정치자금법이 규정하고 있는 정당 국고보조금, 후원금 모집 등이 ‘현역 의원, 거대 정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여서 소수 정당과 정치 신인들, 원외 인사들의 정치권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돈있는 사람만 정치하란 얘기가 된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현실성이 결여돼 편법과 불법을 양산하는 온상이 되고 있다. 정치자금 모금회로 전락한 출판기념회나 쪼개기 후원금 등이 판을 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지금의 정치자금법은 원외 인사, 정치 신인들에게 불리하다. 그래서 현역과 경쟁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렇다고 현역 의원에만 유리한 구조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현행 법에 따르면 국회의원은 1년에 최대 1억5천만원, 선거가 있을 때는 3억원까지 정치후원금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의 세비를 합해 정치활동을 해야한다. 그외 어떤 명목이든 정치자금을 받으면 안 된다. 고비용 정치구조 탓이겠지만, 이것으로는 지역 사무실 운영과 직원 인건비 등 고정비용을 대기가 쉽지 않다. 원외 인사들에게는 이것마저도 어렵다. 정치 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꽉 막혀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당에 배분하는 국고보조금과 기탁금도 거대 정당에 쏠려있다. 현행 국고보조금은 전체 보조금의 절반을 교섭단체(20석 이상)에 우선 배분하고, 나머지 50%를 의석수, 선거 득표율에 따라 여러 단계로 차등 배분한다. 지난해 선관위가 7개 정당에 지급한 보조금 421억원 가운데 더불어민주당ㆍ자유한국당이 각각 126억원씩 받은 반면, 정의당은 27억원을 받았다. 선관위가 교섭단체에 정당보조금 총액의 50%를 우선 지급하는 방식을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정치자금법 개정 의견을 냈지만, 거대 양당에 막혀버렸다. 선관위가 정치자금 기부자의 후원금을 받아 일정 요건이 되는 정당에 나눠주는 ‘기탁금 제도’ 역시 정당보조금 배분 기준과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선관위에 기탁금을 낼 때 원하는 정당에 지급되도록 국민 의사가 반영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지만 관철되지 않고 있다. 불합리한 정치자금법을 개정해야 하는 필요성과 공감대는 형성됐다. ‘입구를 넓히고 출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개정해야 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활발한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문을 넓히되, 대신 정치자금 사용처를 꼼꼼히 감시해 투명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정치자금법 개정을 늦출 이유가 없다.

[지지대] 깡과 소신

어떠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두 종류의 생각을 하게 된다. “에이, 뭘해도 안될거야”, 아니면 “내 생각엔 이건 아니다. 정면 돌파해보자”라는 게 주된 요지일 것이다. 전자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후 ‘후회’라는 악연과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그냥 해볼 걸 그랬나? 너무 후회되는데...시간을 다시 돌릴 수만 있다면...” 이같은 꼬리표는 아마도 그 사람이 죽는 그 순간까지 머리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반면 자기 소신이 맞다고 생각해 일을 실행에 옮긴 사람은 두 가지 달콤한 열매를 얻을 확률이 높다. (여기서 확률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꼭 100% 이렇게 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 하겠다.) “내가 생각할 때 지금의 상황은 잘못됐다. 이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설득이란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내 소신을 명확히 전달할 것이다.” 이 사람은 ‘당당함’이란 1차 열매와 (해본 뒤에 안될 수도 있지만) 어떠한 것을 이루는 ‘성취감’을 얻기 위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얼마 전 출근을 하는데 염태영 수원시장님이 전화를 주셨다. “김 기자, 기사에서 봤지만 난 그 과정과 절차가 맞지 않다고 생각해. 내일 있을 시장군수 간담회에서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할 것이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을 생각이야.” 상황은 이랬다. 염 시장님이 참석하지 못한 당선자 모임에서 3선의 다른 기초단체장이 경기도시장군수협의회장으로 내정됐다는 것이 발단이 됐다. 그 과정과 절차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다음날 오전, 후배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염 시장님이 되셨는데요!”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염 시장님이 그냥 상황을 받아들이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경기도시장군수협의회장 자리는 본인의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보겠다는 깡을 바탕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혔기에 얻은 값진 선물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가슴 속 깊은 곳에 내재된 깡과 소신이 있을 것이다. 특히 정치 또는 광역·기초단체를 이끌어 가는 단체장에게 그 깡과 소신은 정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도민·시민의 삶에 큰 여파를 미치기 때문이다. 염 시장님이 보여준 그 깡과 소신이 수원시민과 더 나아가 경기도민 전체에게 행복이란 귀결점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김규태 정치부 차장

[데스크 칼럼] 민선7기 경기도부지사에 바란다

경기도 행정의 ‘맏형’ 이재율 행정1부지사가 오는 30일 명예퇴직한다. 이 부지사에게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하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왠지 아쉬움이 크다. 많은 공무원들의 생각이 그렇다. 경기도 행정부지사로 이백호 부지사(1963년 12월9일~1964년 10월6일)가 첫 부임한 이래 반백년 넘는 동안 32명의 행정부지사와 행정1부지사가 경기도청을 거쳐 갔다. 33번째인 이재율 부지사는 그 어느 부지사보다 인화를 바탕으로 조직 장악력과 업무 추진력이 탁월했다는 평을 받았다. 뒷담화(?)가 무성한 공직사회에서 이 부지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작은 흉도 나돌지 않을 정도로 선후배 공무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경기도 행정의 산 증인이다. 오는 30일 이 부지사가 퇴임하고, 바로 그날 취임하게 될 김희겸 행정1부지사 내정자(현 행정안전부 기획조정실장)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이 부지사의 인품과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후임으로써 부담감이 있을 것이다. 물론 김 부지사 내정자 또한 나름의 장점이 많은 공무원이어서 기대감도 크다. 경기도 본청에는 행정1부지사가, 경기북부를 관할하는 2청에는 행정2부지사가 있다. 또 한 명인 정무부지사는 선출직 도지사가 임명하는데 도지사를 보좌해 정책과 기획 수립에 참여하고 정무적 업무를 수행한다. 이재명호(號)의 첫 평화(정무)부지사로는 이화영 전 국회의원이 지난 10일 취임했다. 이 부지사는 17대 국회의원 시절 ‘한반도 평화경제공동체 구상과 전략’이라는 저서를 발간, 동북아평화공동체 구축 등 한국 외교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했다.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남북현안 전문가로도 통한다. 경기도를 남북교류 협력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진 이재명 지사와 호흡을 맞춰 어떤 성과를 보여줄지 주목된다. 민선 7기가 출범한 지 한달 가까이 돼간다. 경기도청은 16년 만에 진보성향의 이재명 지사가 취임해 도정의 큰 변화가 예고된다. 민선 7기는 광역ㆍ기초단체장뿐 아니라 도의회까지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했다. 이 지사는 “협치를 통해 ‘새로운 경기도’를 만들 것”이라며 ‘협치’를 강조하고 있다. 도의회 의장단도 “견제와 감시, 협력의 기능을 잃지 않겠다”고 하지만 의석의 과도한 편중에 따른 부작용이 우려되는 건 사실이다. 도정 실무를 총괄할 부지사들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급변하는 도정, 대변혁의 시기에 필자는 정치인, 교수, 공무원 등 나름 도정 전문가에게 민선 7기 바람직한 경기부지사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대략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번째는 경기도 조직구성원들이 열린 마음으로 도민 의견을 수렴하고 적극적인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조직문화를 만드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 민생 현장의 도민 목소리를 경청하고 토론하며, 합리적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두번째는, 부지사의 신속한 의사결정과 명확한 업무처리 지침이 중요하다. 새로운 정권 초기에는 현안 과제가 폭주해 조직구성원들 모두 분주하다. 도지사의 철학과 정책 방향을 제대로 읽어내고 이에 따른 판단을 신속하게 해야 업무 효율성이 크다. 갈팡질팡해선 안 된다. 이를 위해 도지사와의 긴밀한 소통은 필수다. 도지사는 도정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역점을 두고 실무는 부지사가 총괄 지휘해야 한다. 세번째는, 도민 의견 수렴에 균형을 맞추는 일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의회 권력이 민주당으로 단일화된 만큼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다양한 도민 의견을 폭넓게 받아들여 정책을 만들고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도지사에 맞추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도정의 핵심은 경기도민이어야 한다. ‘도민을 위한 도정’을 늘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는 도지사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공복 (公僕)의 기본자세다. 이용성 정치부장

[사설] ‘우리 잘못이다’고 공개 사과한 정장선 시장 / 남 탓 세태에 보게 되는 흔치 않은 교훈이다

정장선 평택시장이 시민에 사과했다. 일부 지역의 수돗물 단수와 관련해서다. 그는 “축소 은폐 사실이 확인됐다”며 “큰 불편을 겪은 시민들께 깊은 사죄를 드린다”며 머리를 숙였다. 잘못한 부분에 대한 설명도 구체적으로 했다. “담당자들이 보고 과정에서 사실을 은폐하고 물 부족 사태를 예견하고도 물 공급을 연명하고 돌려막기 식으로 해온 것이 원인이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축소 은폐에 대한 감사를 벌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엄중 문책하겠다”고 했다. 발단이 된 수돗물 단수 사태는 폭염이 한창이던 18~19일 발생했다. 청북ㆍ안중ㆍ포승 등 평택 서부 지역 3개 읍이 피해지역이다. 이번 단수로 1만1천450가구 주민들이 고통을 겪었다. 사고 원인을 두고 평택시와 수자원 공사는 서로 네 탓 공방만 했다. 시는 ‘수자원 공사가 물 공급량을 충분히 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라고 했고, 수자원공사는 ‘평택시가 가압장 운영을 하지 않거나 제대로 가동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나온 정 시장의 사과다. 취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긴급 기자회견은 이번이 처음이다. 결과적으로 첫 회견이 사과회견이 된 셈이다. 부담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공보실의 입을 빌려 사과할 수도 있었고, 간부회의 발언 형식으로 사과할 수도 있었고, 입장문 발표 형식으로 사과할 수도 있었다. 많은 지자체가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정 시장은 달랐다. 직접 시민 앞에 섰고 모든 걸 밝히고 사과했다. 사과 회견 한번이 뭐 대단하냐고 여길 수도 있다. 지자체 수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절차라고 볼 수도 있다. 맞는 소리다. 그런데 우리 주변이 그렇지 않다. 그 당연한 절차에 인색한 정치ㆍ행정가들 투성이다. 명백히 드러난 책임도 잡아떼는 시장들이 숱하다. 사과할 발표는 공보실에 맡기고, 자신들은 폼 나는 회견만 하려 든다. 누구라도 딱히 지목할 필요도 없다. 여기저기서 발에 치이는 흔한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인사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눈에 띄고 달라 보인 것이다. 정장선 시장은 의원 시절 대표적인 합리주의자로 통했다. 이념에 매몰된 정치판에서도 실리와 상식을 늘 강조했다. 난장판 파벌 싸움 와중엔 스스로 정계를 떠나기도 했었다. 이번 사과를 보면서 과거의 모습이 평택 행정에도 이어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건 누구에게나 고역이다. 그런 사과 회견을 두 번 세 번 하길 원하는 시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통렬한 반성 행정’이 ‘올바른 성공 행정’의 출발인 이유도 그래서다.

[의정단상] 관행이라는 이름의 특수활동비

“국회 정보위원장 특수활동비를 받지 않겠습니다.” 필자는 지난 19일 정보위원장으로서 정보위원회 특수활동비를 받지 않겠다는 공문을 직접 작성해 국회 운영지원과로 발송했다. 이미 바른미래당 의원들 앞에서 정보위원장이 되면 특수활동비를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정부의 예산을 편성하고 감독하는 국회가 마땅히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기획재정부가 발간하는 ‘예산 및 기금 운영계획 지침’에 따르면, 특수활동비란 정보 및 사건수사와 그밖에 이에 준하는 국정 수행활동에 직접 소요되는 경비를 말한다. 이 특수활동비는 수령자가 서명만 하면 사용처를 보고하지 않아도 되고 영수증 없이도 사용할 수 있어 ‘눈 먼 돈’으로 비판받아 왔다. 지난 정부에서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를 청와대가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특수활동비가 ‘권력자의 쌈짓돈’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했다. 청와대와 정부의 각 부처에서 매년 약 8천억원 이상의 특수활동비를 집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회도 80억원 이상의 특수활동비를 사용했다고 한다. 국회부터 이 오래된 나쁜 관행인 특수활동비를 없애야 한다. 국회 업무 중 공개되면 안 되는 ‘특수한’ 업무가 있는가? 필자는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국회의 특수활동비 문제가 어제오늘 거론된 것이 아닌데도 국회는 사용처를 전혀 알 수 없는 특수활동비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이러하니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눈길이 따가울 수밖에 없다. 지난 3월 한국갤럽이 공개한 ‘2017 사회통합실태조사’에서 국회는 의료기관과 교육기관, 중앙부처와 지자체, 사법계, 대기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장 낮은 신뢰도를 받았다. 통계청의 ‘2017년 한국의 사회지표’에서도 국회에 대한 신뢰도는 4점 만점의 1.8점을 받았는데, 1점대로는 전체 기관 중 유일했다. 국회가 권위적이고 폐쇄적이며, 특권을 누리는 집단으로 비춰지고 또 그렇게 행세해 왔기 때문에 국민들은 국회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국회가 영수증도 없이 특수활동비를 편의대로 집행하는데, 행정부의 예산 오남용을 제대로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겠는가? 특수활동비 논란이 불붙고 있는 지금, 국회의 과감하고도 선제적인 결심과 행동이 필요한 때다. 국회가 먼저 잘못된 관행, 특수활동비 악습을 단칼에 잘라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회가 영원히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특수활동비 수령을 거부한 것은 나 하나 생색내고, 튀어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먼저 해야 하는 일인데, 마침 칼자루가 내게 주어졌기에 실천했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기밀 유지가 요구되는 사항을 많이 다루는 정보위원회에서 특수활동비를 받지 않으면 활동이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국회 정보위원회는 국가 정보기관이 특수한 비밀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곳이지 직접 기밀 업무를 하는 곳은 아니다. 국회의 특수활동비는 폐지가 정답이다. 국회가 지금까지 특수활동비로 실시해 온 사업이나 활동 중 필요한 예산은 업무추진비 형식으로 증빙자료를 남기고 국민에게 공개하며 투명하게 집행하도록 운영 방식을 바꾸면 문제될 것이 없다. 이미 국회 내에서도 공감대가 충분히 만들어지고 있고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도 느껴진다. 필자가 시작한 상임위원회 특수활동비 수령 거부가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와 투명한 예산운용 나아가 국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 이학재 국회의원(바른미래당·인천 서구갑)

[천자춘추] 지역경제 활성화와 도시공사의 역할

우리나라는 독일, 일본과 함께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뤄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높은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6·25 전쟁 후 65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경제성장 지표는 국내총생산 세계 12위, 1인당 국민소득 세계 27위, 무역규모 세계 9위다. 그 배경에는 경제개발을 위한 국가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 정부의 견실한 경제산업정책과 실행 노력, 경제적 풍요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 국민들의 의지와 천성적인 부지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경제란 무엇인가? 국민경제 내부의 지역적 구성부분이다. 경제활동은 공간적 제약과 환경적 조건에 따라 지역적 분업과 생산ㆍ소비의 지역적 순환을 낳게 되고, 그 결과 개성을 가진 지역경제가 생긴다. 각 지역은 경쟁을 통해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국가는 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으로서의 지역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역경제의 핵심은 산업이다. 조선업 불황에 따른 거제, 울산지역의 침체와 GM공장 폐쇄로 인한 군산지역의 어려움은 산업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방증한다. 일자리 감소로 인구가 줄고, 빈집 증가, 상거래 및 세수 감소 등 그 여파가 심각하다. 지방자치단체를 포함한 다양한 경제주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업단지는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필수적인 요소다. 산업단지는 목적과 시행주체에 따라 국가산업단지, 일반산업단지, 도시첨단산업단지, 농공단지 등으로 분류되는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산업입지의 원활한 공급과 산업의 합리적 배치를 위해 비용을 보조하거나 기반시설을 지원한다. 입주기업을 위해 산업단지를 조성원가로 공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지원 사례다.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외국인전용단지를 조성해 저렴한 임대료로 장기적으로 부지를 제공해 사업을 안정적으로 영위하도록 하기도 한다. 경기도시공사는 설립목적으로 택지, 산업단지, 주택 및 도시개발 사업 등을 통해 살기 좋은 지역사회 건설과 도민복지 향상이라고 정관에 명시되어 있다. 경기도시공사는 설립 초창기부터 산업단지 조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지금까지 총 22개 단지 1천900만㎡, 총사업비 7조 3천억 원 규모의 산업단지를 조성해 오고 있다. 준공산업단지 기준으로 경기도 전체의 약 32%에 이르는 수준이다. 이제 산업구조는 제조업 중심에서 지식산업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환경문제는 점점 첨예화되고 있다. 앞으로도 경기도시공사는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경기 남부와 북부의 균형발전을 위해 고부가가치의 첨단산업단지를 지속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사명과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김용학 경기도시공사 사장

[기고] 공항버스의 오해와 진실

경기도지사 인수위에서 한정면허인 수원-인천공항 등의 공항버스를 시외면허로 전환하는 것을 놓고 불법과 특혜, 재량권 남용 등의 문제가 있다면서 공정성과 공익성을 상실, 시외면허를 다시 한정면허로 원복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대하여 오해와 진실을 짚어보자. 용남공항리무진은 경기도의 공항버스운행노선 시외버스업체 공모에 신청해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선정됐다. 이 과정에서 불법이나 특혜가 전혀 없었음을 먼저 밝히고 싶다. 사업자 선정조건인 신차확보 미이행은 기존에 운행하던 경기공항리무진 측이 경기도와 소송중이니 소송이 끝날 때까지 기존 운행차량을 임대차계약을 체결하여 운행하자는 제안을 해 경기공항리무진과 용남공항리무진이 경기도와 협의를 거쳐 경기도로부터 ‘공모과정에서 기존 공항노선을 운행하던 한정면허업체들이 소송을 제기하여 소송결과에 따라 자칫 시외버스 업체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어 신차구매로 우려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사용 가능하다’는 승인을 받았다. 이에 용남공항리무진은 공동운수협정(차량임대차계약)을 체결했지만 경기공항리무진에서 지난 6월3일 운송개시 전날 갑작스럽게 차량임대를 못해주겠다고 통보해왔다. 이에 용남공항리무진 측은 승객들의 대란을 막기 위해 불야불 전세버스를 구해 공동운수협정을 체결하고 부득히 투입하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 28석 리무진 차량을 순차적으로 투입해 운행하고 있다. 오는 7월 말까지는 전체대수가 리무진 버스로 교체될 예정이다. 또 인수위가 지적한 용남공항리무진이라는 신규법인에 대한 진실도 밝히고 싶다. 경기도의 공항버스노선 시외버스 사업자모집 신청은 용남고속버스라인이 신청, 선정돼 면허를 발급받았다. 이후 기존 경기공항리무진 근로자들이 경기도를 방문하여 현노조 존속, 전별금 해결, 기존 근로조건과 차별없는 고용승계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경기도에서 ‘용남고속버스라인이 경기공항리무진 소속 근로자들을 자사 소속으로 고용을 승계하면 임금격차문제, 전별금문제, 현노동조합 유지 등의 문제점이 있으니 별도 법인을 신설’하여 고용승계를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용남고속은 용남공항리무진이라는 법인을 신설해 경기도로부터 기존 용남고속버스라인에 발급됐던 면허는 취소하고 신규법인인 용남공항리무진에 면허를 발급했다. 이후 용남공항리무진과 경기공항리무진 근로자와 고용승계 합의했고 법인을 신설해 고용승계를 하다보니 공항버스 요금이 대폭 인하되었음에도 이를 전혀 반영치 못하고 용남고속버스라인보다 개인당 수십만 원씩을 더주는 고용승계가 이뤄졌다. 이와 함께 법인신설에 따라 현 노조 존속, 전별금 해결, 전체근로자 고용승계로 고용안정을 이루는 등 근로자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회사로서는 큰 부담을 안게 됐지만 마치 신규법인 용남공항리무진이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만에 하나 면허취소 등 최악의 경우가 발생될 경우 리무진차량 74대 구입비 147억 원, 전세버스임차료 20억 원, 운송부대시설 임대료와 기타 비용 15억 원 등 총 182억 원의 손실은 과연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지 묻지 않을수가 없다. 또 기존 경기공항리무진 근로자들을 거리로 내 몰아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악순환이 또다시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정면허인 공항버스가 시외면허로 전환되면서 기존 운행하던 차량과 동일한 28석 리무진 버스가 운행됨에도 거리비례요금제가 적용돼 요금은 최대 4천800원 인하돼 이용 승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 그런데 도 정책의 번복으로 사업자와 근로자 및 시민들이 큰 혼란과 손실을 본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정책변화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신뢰행정의 원칙에 따라 공정한 절차와 법률에 의하여 선정된 운송사업자의 면허를 취소한다거나 물리적인 힘으로 내 몰아친다면 이야말로 갑질행정이 아닌가 싶다. 아무쪼록 신중한 정책으로 운송사업자나 근로자, 시민들이 선의의 피해를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박명원 용남공항리무진 전무이사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산책] 명리학으로 본 故 노회찬 의원 죽음과 천기

노회찬 전의원은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대중성있는 인기정치인이었다. 그의 “불판 갈자” “먼지 보복”같은 풍자와 유머의 촌철살인의 언어는 국민들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청량제였다. 깨끗한 정치인으로 촉망받던 그는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약 4천만원의 불법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의 수사망이 좁혀져오던 중에 2018년 7월23일 오전 9시 38분경 신당동 모친이 거주하던 아파트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 사망하여 온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56년 8월31일 부산에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시는 알 수가 없으나 그의 행적을 볼 때 임의적으로 오시로 보았다. 그의 타고난 천기를 보면 신월(申月,원숭이달)의 가을의 서늘한 기상을 가진 경금일간으로 태어났다. 경금은 가을의 한랭하고 엄숙한 가을의 기상으로, 보통 쇠로 만든 물체에 비유된다. 매우 강직하고 의리를 소중한 덕목으로 하는 인물로 또한 수치심이 매우 강하다. 그는 동지를 나타내는 금이 3개나 된다. 이러한 무쇠를 녹이는 불이 그에게는 관운을 상징하는 편관이나 정관이다. 그의 사주에서는 이러한 불이 너무 많아 과유불급의 상태에 있다. 그가 재수를 하여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전공한 이유는 권력의지를 상징하는 태양불 같은 병화(丙火)와 오화(午火)가 많기 때문이다. 경금(庚金)일간에게 있어서 병화는 엄격성과 의협심이 강한 위엄지상의 위풍이 당당한 편관이다. 편관은 총명하고 판단력과 결단력이 강하고 모험심과 의협심이 남다르다. 또한 개척정신이 강하고 타협을 싫어하고 투쟁심과 야성의 기질이 강한 인물에 많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이런 천기의 영향이 매우 크다. 매우 혼탁한 정치판에서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휴머니티가 강한 강직하고 청렴했던 그는 드루킹의 정치공작에 걸려들어 결국 정치인생을 빨리 마감하고 말았다. 참 안타까운 정치현실이다. 그의 사망시점의 천운은 임인(壬寅)대운의 무술년(개띠) 기미월(양달) 병진일(용날) 계사시였다. 올해는 삶의 회의감과 번뇌가 강하게 밀려오는 속세를 벗어나고 싶은 무술년 편인운이었다. 그의 사주의 음양오행은 금3개-수(1개, 표현력과 창의성)-목(없음, 재물창고)-화(4개,명예와 권력)-토(없음)의 순서이다. 이 사주는 너무 많은 오행인 화를 조절하는 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사주에서 임수(壬水)식신을 말한다. 식신은 예술가적인 심미안과 평화적인 소통능력이 좋은 인자이다. 이러한 임수의 식신은 무술년에 편인운에 의해서 막히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편인을 식신을 잡아먹는다는 도식이라 부른다. 그가 국민들의 사람을 많이 받은 천기적인 영향은 바로 임수 식신의 영향이 크다. 소위 식신제살의 형국의 사주이다. 그가 불의에 항거한 정신은 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되어 노동운동가로 활동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회찬은 8번의 비례대표로 출마해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2012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2013년 ‘삼성X파일’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2014년 보궐선거에 나경원에게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 2016년 총선에 창원 성산에 출마해 3선의원이 되어 진보정치인 최초의 3선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드루킹이 쏜 유탄에 맞아 그의 정치적인 꿈과 이상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기없는 정치판에서 드물게 수만명의 조문객들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슬퍼하는 것을 볼 때 그의 삶의 지향점은 국민들의 행복을 위한 헌신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혜명학술원 원장 겸 동양학칼럼니스트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3. 성혼선생묘

‘창령성공휘혼지묘(昌寧成公諱渾之墓)’ 묘비에 새겨진 글은 간략했다.시호라든가 관직이라든가 하는 화려한 수식이 없다. 그냥 본관과 성명이 전부다. 성혼(成渾)의 본관은 묘비에 적은 대로 창녕(昌寧)이다.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관직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묘비는 간략했다. 간략한 묘비는 성혼 스스로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성혼은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이 쓴 묘지(墓誌)를 남겼다.묘지는 무덤에 넣는 글이다. 여기서 자신의 묘비에는 오직 다섯 자만 적으라고 했다. 묘 앞에 ‘창녕성모묘(昌寧成某墓)’라는 다섯 글자만을 비석에 새겨 넣어, 자손들이 무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의 성품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바로 겸손함이다. 성혼의 묘 아래쪽에는 아버지 성수침(成守琛)의 묘이다.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 묘도 나란히 있다. 아버지 성수침은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있다. 청송선생(聽松先生)이라 불린다는 내용의 졸기는 그의 아버지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의 졸기 말미에 성혼도 소개하고 있다. “아들 성혼은 가훈을 받아 선친의 뜻을 잘 이었고 학문에 힘써 게을리하지 않았다. 효행도 있어 바야흐로 행의(行義)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성혼은 1535년(중종 30)에 태어나,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대에 활동하다, 1598년(선조 31)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원래 서울 순화방(順和坊: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다. 파주에는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와 거주하게 되었다. 성혼은 여기서 성장하고, 우계라는 호도 얻었다. 강릉에서 태어난 율곡 이이(1536~1584)도 한 고을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살 차이로 한 동네 친구였던 것이다. 성혼과 이이는 모두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백인걸과 아버지 성수침은 모두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성혼과 이이 두 사람은 모두 퇴계 이황을 존경했다. 이이는 이황을 찾아가 한번 만난 후 스승으로 여겼다. 성혼 또한 이황을 존경했다. 그의 문집 우계집의 첫 내용이 바로 퇴계 이황에 관한 것이었다. 기사년(1569)에 이황이 벼슬을 버리고 도산(陶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애석해 하는 시였다. 어려서 출중했던 두 사람은 이기론, 인심도심론, 사단칠정론 등 성리학의 주요 문제에 대해 학술토론을 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을 잇는 것이었다. 경상도에 사는 이황은 전라도에 사는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성리학 이론을 발전시켰다.이황은 나이가 훨씬 적은 기대승과 진지한 학술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었던 것이다.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성혼이 묻고 이이가 답하면서, 이이는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었다. 성혼은 이황의 편에서 이황과 이이의 이론을 절충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을 이어 조선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성혼은 벼슬에 나가는 것을 썩 즐기진 않았다. 관직에 나아갔다가도 오래 머물지 않고 곧 돌아오곤 했다. 오히려 후진을 양성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조헌과 김덕령, 인조반정의 주역인 이귀와 김자점 등도 성혼의 제자였다. 제자이자 사위였던 윤황의 아들·손자가 바로 윤선거·윤증 부자이다. 그밖에 황신, 신흠, 정엽, 안방준, 강항, 최기남 등의 제자가 있다. 제자 가운데는 이이의 제자와 중복되기도 했다. 우계학파를 넓게 잡으면, 장유, 최명길, 박세당, 조익 등도 포함된다. 조선 유학 사상사에서 퇴계학, 율곡학이 뚜렷하고, 또 한쪽에 남명학이 있는 데 비해, 우계학은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약해 보인다. 그러나 성혼의 제자들을 살펴보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성혼과 이이는 모두 서인의 학문적 지도자로 추앙을 받게 되는데, 나중에 서인에서 갈라진 소론의 인물들을 보면, 모두 성혼과 연결된다. 그리고 박세당과 같이 사문난적으로 몰린 사람이나 양명학자들은 모두 성혼과 연결된다. 이러한 결과는 성혼의 학문이 절충적이고 개방적인 데서 연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계학을 다시 볼 대목이다. 실록에는 평생의 벗이자 학문 파트너였던 이이가 성혼을 평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만약 견해(見解)의 우월을 논하자면 내가 약간 나을 것이나, 행실의 돈독함과 확고함은 내가 따르지 못한다.” 논리는 접어두고, 선비로서의 면모를 인정해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혼의 글을 보면 매우 겸손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색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선조실록에 보면, 죽었다는 사실만 기재한 후 부정적 평가를 약간 덧붙였다. 첫째, 일찍이 은사(隱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공명(功名)에 빠졌다는 지적이다. 지적이 다분히 악의적이다. 둘째, 기축옥사의 일을 거론하고 있다. 여러 사람을 구하지 않았으며, 특히 최영경(崔永慶)의 죽음도 그대로 보기만 하고 구해주지 않았다며 정철과 함께 나쁜 짓을 하여 모두 미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축년(1589) 정여립의 옥사 때 정철이 주동이 되어 많은 동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때 정인홍은 동문수학한 최영경을 구원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에 미온적인 성혼에 대해 감정이 나빠졌다. 실제로는 성혼이 최영경을 구원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효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성혼에게 공격의 화살이 쏟아졌다. 이후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은 동인의 한 갈래였는데, 성혼을 적대시했다. 그리고 이는 이귀와 같은 성혼의 제자가 정인홍을 적대시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선조실록에서 성혼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은 실록을 북인이 중심이 되어 편찬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러한 실록에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성혼의 졸기를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기술해 놓았다. 고매한 성품을 지녔다는 점, 이황을 존경하고 사숙했다는 점, 이이와의 학술토론을 통해 성리학에 관해 밝힌 바가 많았다는 점 등을 소개했다. 그런데 여기에 선조 임금의 후대가 두터웠으나 임진왜란 때 이홍로의 모함으로 시들해졌다는 점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일생에서 두 가지가 문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기축옥사 때의 처신과 임진왜란 때의 처신이다. 성혼선생 묘 옆에는 우계사당이 있다. 좀 내려가면 우계기념관이 있다. 큰길로 나아가면 우계로이다. 우계로는 옛 의주로(한양-신의주)에 해당한다. 필자가 이곳을 찾아오면서 일부러 옛 의주로의 자취를 밟아 왔다. 찌는 여름 무더위에 자동차를 몰고서였다. 폐쇄된 벽제역부터 옛 의주로의 노선을 따라 혜음로로 접어들었다. 혜음로는 78번도로였는데, 중간에 56번 도로로 바뀌었다. 좀더 넓고 새로 포장된 도로로 나왔다가 계속 가니 어느새 다시 78번 도로이며 도로명은 우계로였다. 혜음로 길가에 쌍미륵불 용암사가 있었다. 잠시 주차하고 절에 들어가보았다. 그 안에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었다. 불상을 거대한 바위에 자연스럽게 조각해 놓았다. 특이한 게 불상이 둘이었다. 두 불상이 나란히 있는 게 정겹다는 느낌도 들었다. 78번 도로를 따라 좀더 놀라가니 윤관 장군의 묘역이 나왔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도 고려시대 불상이요, 윤관도 고려시대의 인물이다. 서울에서 의주로를 따라 가면 먼저 고려의 도읍인 개성을 지나게 된다. 두 왕조의 도읍 사이에 있는 도로인데도 실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남북 분단의 접경지역에 가까워서일 것이다. 성혼묘역에서 우계로로 나와 북쪽으로 더 나아가니 임진각이 나왔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갈 때 이 길을 갔을 것이다. 선조가 파주를 지나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성혼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옆에 있던 이홍로가 가까운 마을을 가리켰다. 선조가 나와보지도 않는 성혼에 대해 괘씸하게 생각해서, 이후로 그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나중에 후대 문인들이 그를 문묘에 배향하려 했을 때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이때 반대 명분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 당시 성혼의 마을은 좀더 떨어진 곳이었고, 성혼은 집에 없었다고 한다. 사실관계에 따라 매우 억울한 누명일 수 있는 것이다. 임진각에서 북쪽을 바라보다 자유로를 통해 한강을 바라보며 귀가했다. 분단의 상황이 개성과 서울 사이의 오랜 역사를 압도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분단의 상황은 잠깐이요, 개성과 서울 사이의 역사는 언제 그랬느냐 하는 거처럼 복원되리라 기대해 본다. 그렇게 되면 성호선생 묘역의 주변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다. 성혼에 대한 평가는 당쟁에 휘둘린 경향이 있다. 그는 학문적으로 성실하고 독선적이지 않았다. 관리로 나아가서도 권력욕에 빠지지 않고, 늘 처사로서의 겸덕을 갖추었다. 성혼은 조선 중기 선비의 전형이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소장

[경기만평] 사법계엄 농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