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만평] 신경쓰이는...

[법률플러스] 지역주택조합 지위 상실자의 납입금 반환시기

지역주택조합에 가입해 조속히 ‘내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우선 가입계약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그 의미를 이해한 다음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래야 예기치 않은 손해를 예방할 수 있다. 지역주택조합 가입계약 중 조합원 지위를 상실한 자에게 납입금을 반환할 시기를 ‘대체 계약자 대금이 입금 완료되었을 때’로 제한한 조항을 예로 들어보자. 이 경우 납입금을 반환받을 수 있는 시기가 불확실해 계약자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지위에 서게 된다. 위와 같은 납입금 반환시기 제한 조항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공정을 잃은 약관조항으로서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따라 무효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대법원(2022년 5월 13일 선고 2020다217380 판결)은 아래와 같은 논거를 들어 무효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지역주택조합 사업은 조합 설립 전에 미리 조합원을 모집하면서 그 분담금 등으로 사업부지를 매수하거나 사용승낙을 얻고, 그 후 조합설립인가를 받아 소유권을 확보하고 사업승인을 얻어 아파트를 건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진행과정에서 조합원의 모집, 재정의 확보, 토지매입 작업 등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변수가 많다. 따라서 최초 사업계획이 변경되거나 당초 예정했던 사업의 진행이 지연되는 등의 사정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지역주택조합 사업의 특성상 지역주택조합이 자격을 상실하거나 자격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조합원에 대해 즉시 이미 납부한 분담금을 반환해야 한다면, 예기치 못한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조합의 자금계획에 차질이 발생해 다수의 잔존 조합원들의 이익이 침해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자격을 상실한 조합원 등에 대한 분담금 반환시기를 대체 계약자의 대금이 입금되었을 때로 정한 것은 타당성이 인정된다. 또한 조합가입계약의 반환시기 제한조항은 조합의 분담금 반환의무 자체를 면제하거나 부당하게 경감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 반환시기 등만을 제한하고 있을 뿐이며, 조합원 측의 사정(탈퇴, 조합원 자격의 상실, 제명 등 조합가입계약을 체결한 조합원의 지위 상실)에 기초해 적용된다. 반환시기 제한조항에서 정한 분담금의 환불시기인 ‘대체 계약자 대금이 입금 완료되었을 때’는 일종의 불확정기한이다. 불확정기한은 위 사실이 발생한 때 또는 발생하지 아니한 것으로 확정된 때에 기한이 도래하므로, 조합원은 자신을 대체할 다른 계약자가 입금을 완료한 경우뿐만 아니라 그러한 대체 계약자의 대금 입금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기한의 도래를 이유로 분담금을 반환받을 수 있다. 이상의 근거로 조합원의 지위를 상실한 자에 대해 대체 계약자가 대금 입금을 완료한 때로 반환시기를 정한 반환시기 제한조항이 약관법 제6조 제1항의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반하여 공정성을 잃은 약관조항’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따라서 지역주택조합에 가입하려는 경우 이러한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계약서 문구의 수정을 요구하는 등의 예방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박승득 변호사/법무법인 마당

[지지대] 홈리스 닥터헬기

중증응급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골든타임’ 확보다. 아주대학교병원 경기남부 권역외상센터는 지난 2019년 8월31일 대형헬기 H225를 도입해 운항하다 올해 1월 중형헬기 AW169로 교체해 응급환자를 이송하고 있다. 닥터헬기의 1분기 이송 건수는 47건에 달해 연간 200건가량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같이 수 많은 환자의 생명을 살리고 있는 닥터헬기가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닥터헬기의 집이 없는 것이다. 항공법에 따르면 헬기는 반드시 계류장을 확보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아주대병원에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워 임시 거처인 10전투비행단 내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다.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는 대학교와 병원 부지 내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속앓이를 하고 있다. 현행 항공법상 반드시 지상에 계류장을 설치해야 하는데 물리적으로 가능한 부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외상센터는 옥상 계류장을 검토해 봤지만 이마저도 항공법 개정 등이 필요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2020년 경기도는 25억원을 투입해 제10전투비행단 내 전체 면적 1천250㎡ 규모의 닥터헬기 계류장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제10전투비행단의 이전과 맞물려 공군과의 세부 협의가 쉽지 않아 계류장 건립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중증응급환자의 골든아워는 중증외상 1시간, 심혈관 2시간, 뇌졸중 3시간이다. 아주대병원 외상센터는 연간 2천500건 이상 수술을 하며 수 많은 인명을 살려내고 있다. 이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중심에는 닥터헬기가 있다. 홈리스 닥터헬기의 집을 지어주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대체 부지 마련, 정부와 자치단체의 예산 지원, 법 개정이나 제도 개선 등이다. 고단한 닥터헬기의 안락한 집이 하루 속히 마련되길 기대한다. 최원재 정치부장

[문화카페] 추억팔이는 이렇게

‘그래, 영화는 역시 로망이지!’ 보는 내내 이렇게 생각했다. <탑건: 매버릭> 이야기다. 워낙 인기 있는 작품인 만큼 영화에 대해선 특별히 보탤 말이 없다. 다만 톰 크루즈 예찬만큼은 몇 자 얹어야겠다. 그는 전성기를 지나 원숙기로 접어들던 시기의 마라도나와 메시 같았다. 정상급 실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자신의 나이든 면모를 긍정적으로 발현해 팀을 특별한 경지로 끌어올린 이들. 톰 크루즈도 그랬다. 이런 속편 성격의 작품은 조금만 삐끗하면 ‘추억팔이’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한때 멋지고 탁월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고루하고 식상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로맨틱하다며 젖어들었다. 예전에 열광한 대목은 더욱 두근두근해졌고, 세월과 나이듦을 녹여낸 서사도 뭉클했다. 시대상을 반영해 젠더 등 여러 감수성을 업데이트한 것도 세련되게 다가왔다. ‘고스트 버스터즈’ 시리즈와 비교된다. ‘탑건’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를 상징하는 메가 히트작이다. 역시 30여 년이 지난 2016년에 부활해 극장에 걸렸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 원작 내용을 잇지 않고 새로 시작하는 ‘리부트’ 방식을 택했다는 것. 괴짜 집단이 유령을 사냥한다는 큰 줄기 외엔 싹 갈아엎었다. 주인공 네 명 역시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고, 심지어 과거 주인공 역의 배우들은 별다른 비중 없는 카메오로 등장했다. 등장한 지 1분 만에 죽거나, 지나가던 택시기사로 잠깐 나오거나... 이러면 추억을 팔기보다는 오히려 배신하는 쪽에 가깝다. 결과는 ‘폭망’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심지어 괜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주인공의 성별이 바뀐 점에 집착해 영화를 페미니즘과 엮으며 소모적인 감정싸움을 벌인 것이다. 실제 영화는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수준이었지만 과도하게 추앙하거나 매도하는 이가 많았다. 평론가들마저 이를 부추겼다. 결국 소니는 이 2016년 버전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아예 없었던 것으로 간주하고 1980년대 원작의 내용을 잇는 진짜 속편을 만들었다. 원작 주인공의 손녀와 친구들을 새로운 주인공으로 삼아 세대를 교체했고, 70대가 된 예전 배우들 역시 큰 비중으로 등장해서 활약했다. 그러자 비로소 대중이 호응했다. 추억을 환기하며 즐겼고 팬데믹 와중에도 흥행에 성공했다. 작품성이 아쉽다는 평론가들의 지적은 다들 그냥 흘려들었다. 속편을 만드는 데에 뚜렷한 공식은 없다. 다만 하나는 확실해 보인다. 사람들은 한때 좋아했던 무언가를 추억으로 이름 붙여 기억하고, 가급적 그걸 지키며 소중히 여기길 바란다는 것. 사랑받은 속편, 나아가 프랜차이즈를 구축한 시리즈는 대체로 이 점을 존중해왔다. 사람들은 추억팔이를 손가락질하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추억팔이를 갈망한다. 어쩔 수 없다. 추억 또한 인간의 핵심 동력이니까. <탑건: 매버릭>은 훌륭한 추억팔이의 사례로 오래 기억될 만하다. 추억팔이는 이렇게 해야 한다. 홍형진 작가

[사설] 개 식용 종식 사회적 논의 또 연장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개 식용 문제 논의를 위한 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위원회가 있다. 농식품부 주관으로 지난해 말 출범한 민관합동의 사회적 논의기구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개 식용 금지 검토’ 발언에 대한 후속 조치였다. 정부와 동물보호단체, 육견협회를 대변하는 사람들로 구성했다. 당초 지난 4월 말까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목표였지만 한 차례 연장돼 지난 4일 다시 열렸다. 이 날 회의도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끝났다고 한다. 앞으로는 별도의 기한을 두지 않고 개 식용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그간 위원회는 개 사육 등 관련 업계 현황조사, 개 식용 국민인식조사 등을 진행했다. 개 식용 종식이 시대적 흐름이라는 인식에는 이론이 없는 공감대도 이뤘다. 다만 개 식용 종식 시기와 종식을 위한 구체적 실행방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시한에 구애 받지 않고 보다 깊이 있게 논의해 나갈 것이라는 방침만 내놓았다. 개 식용 문제 논의를 위한 위원회는 대만식 모델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대만은 20여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단계별로 개 식용을 종식했다. 먼저 1998년 동물보호법을 제정해 공공장소에서의 개 도살을 금지했다. 3년 뒤에는 경제적 목적의 반려동물 도살행위를 금지했다. 2007년에는 개·고양이를 도살하지 못하게 했다. 다시 10년 뒤 동물보호법을 개정해 최종적으로 개 식용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즉각적인 개 식용 금지를 촉구해 온 단체 등의 입장은 다르다. 대만은 우리와 상황이 달라 그런 식으로는 종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개 식용 시장과 관련 산업이 형성돼 있어 점진적 모델의 적용이 힘들다는 것이다. 개 식용 관련업계의 생계를 어디까지 보장하는가 등의 논의에 끌려다니지 말고 정부가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 식용 금지법을 바로 만들자는 주문인 셈이다. 개 식용 식문화는 하루 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만 둘 때도 됐다는 인식 또한 시대적 흐름이 돼 있다. 그렇다고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에 대해서까지 국가가 과도하게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지나치다. 어떤 식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감옥 보내겠다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은 사회적 비용만 초래했다. 안 그래도 개 식용은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여기 인천만 해도 과거 흔했던 보신탕집들이 거의 문을 닫았다. 수요 공급이 작동하는 시장의 힘이다. 대만이 앞서 간 점진적 모델은 충분히 검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사설] 반도체 메카 경기도, 사업 속도내야 민생 도움된다

김동연 경기지사가 본격적인 경제 행보에 나섰다. 5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현장을 방문한데 이어 6일에는 글로벌 반도체장비 제조기업과 차세대 메모리반도체 연구개발센터 설립을 위한 투자협약을 맺었다. 7일에도 비메모리 신소재 개발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가진 기업과 차세대 전력반도체 연구소 설립 투자협약을 체결한다. 김 지사는 취임 후 민생을 챙기는데 주력하고 있다. 사흘 연속 반도체 산업 현장을 찾는 것도 “반도체 산업이 주요한 미래 먹거리 산업”이기 때문이다. 김 지사는 5일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상생 협력 공동합의문’에 서명했다. 용인·이천·안성·여주시장과 관련기업 대표, 대학·산하기관 관계자들이 함께 했다. 합의문에는 정부의 ‘K-반도체 벨트’ 완성을 위한 반도체 산업 핵심기반 확충, 규제·행정절차 간소화, 지역 상생협력 체계 구축, 기업-지역 동반성장을 위한 소통, 지역문제 해결을 위한 긴밀한 협조 등의 내용이 담겼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122조원을 투입해 죽능리 일원 415만㎡에 조성된다. 오는 14일 착공을 앞두고 있다. 경기도는 이곳을 차세대 반도체 산업거점으로 키우기 위해 반도체 공유대학 추진, 특화단지 기술개발, 테스트베드 구축 등을 추진해 인력·공급망·인프라 등 다방면의 혁신을 꾀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경기 동남부 8개 시가 참여하는 ‘미래형 스마트벨트 연합체’와 소통하며 대·중·소 상생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전문인력 양성, 테스트베드 운영 등의 협력을 도모할 방침이다. 문제는 얼마만큼 빠른 시간내 추진하느냐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주도하는 SK하이닉스는 반도체 공장 4개를 세운다고 2019년 2월 발표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첫 삽을 뜨지 못했다. 수도권 공장총량제의 예외로 인정받고 환경영향평가를 거치는데 2년 반이 걸렸다. 토지 보상을 둘러싼 주민 반발에 땅 사는 것도 힘들었다. 3월 말에야 가까스로 국공유지를 포함해 65.6%를 매입했다. 여주보에서 물을 끌어오는 용수 문제도 난제였다. 세계 반도체 산업이 요동치고 있다. K반도체는 사면초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위기는 국내외에서 동시다발적이다. 대만 TSMC를 비롯해 세계 반도체 산업의 내부 경쟁이 격화하고, 세계 주요국이 반도체 자체 생산에 나서면서 K반도체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이에 대응해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를 확장하고,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에 나섰지만 정부 규제와 토지 보상에 발목이 잡혀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미국·중국의 한국 반도체 공장은 허가에서 완공 후 가동까지 약 2년이 걸렸다. 우리나라는 규제와 복잡한 행정절차, 각종 갈등으로 훨씬 오래 걸린다. 이로 인해 투자를 적기에 못해 경쟁력을 잃게 된다. 현장 간담회, 업무협약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신속한 실행이다.

[삶과 종교] 명상으로 보는 성(性)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원인 인도 카주라호의 외벽에는 온갖 성애의 장면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에는 성애의 조각은 물론 신성을 상징하는 그 어떤 대상조차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는 바깥쪽에 표현된 욕망의 모습과 달리 안쪽은 내면의 신성을 찾고 확인하는 장소이며 명상을 위한 공간임을 말하고 있다. 프로이드의 관점에 의하면 표면에서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이 성적인 상태에 있다고 하겠으나 명상이나 내면 수련의 체계에서는 이와 달리 자신의 중심에는 평화와 고요 그리고 초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원은 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한 상대에 대한 존경과 이해가 바탕 된 사랑의 한 표현이었을 때 우리는 수평 이동이 아니라 수직 상승을 이루고 자신과 상대의 신성을 대면할 수 있음을 카주라호의 외부 장식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나와 타자를 향한 근본에너지의 흐름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성은 자연이 마련해준 문이다. 따라서 동물도 이를 가진다. 새도 이를 가지고, 식물도 이를 가지며 인간도 역시 이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연 에너지에서 진화를 이루었고 신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극단적인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의 가치를 생물학적 욕구의 자연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인간은 동물 이상이 아니며 동물을 넘어설 수 없다. 언급하였듯이 동물에게도 그 문은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 자연의 에너지를 살펴서 새로운 문을 발견할 때에 비로소 인간다움이라는 격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지는 우리의 중심이 동물의 중심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겉보기에만 인간이다. 우리 안의 동물이 기회가 생기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재한 채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장치들이 얼마나 소용없는 것이었는지는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 전자발찌로 그를 구속하고 통제할 수는 있어도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지는 못한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치가 특정 입장에 전도되어 이를 이용한다면 결과는 더욱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화가가 양치기 소년의 순수한 눈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그 초상화를 그렸고, 이후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를 그리기 위해서 모델을 찾아 다시 그 모습을 그렸으나 결국 동일인이었음을 알게 된 우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동일한 화학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듯이 사람 마다의 삶에는 신과 악마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며 두 개의 초상화를 그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신성의 반영으로 삶을 지고한 낙처(樂處)로 만들 수 있으며, 그 삶을 향기롭고 조화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선, 위빠사나, 명상, 기도 등으로 불리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김종구칼럼] 엄마의 아이스케끼

아들이 국민학생이었다. 마을엔 어쩌다 아이스케끼 장수가 왔다. 큼직한 짐 자전거에 나무 궤짝을 얹었다. 궤짝 안에 노란 비닐 주머니가 있었다. 얼음을 채운 나름 냉동 장치였다. 그때는 쉽게 못 사 먹을 사치품이었다. 모처럼 그걸 사주고 싶으셨나보다. ‘부엌에 아이스케끼 사놨어.’ 한달음에 부엌으로 달려갔다. 양은 그릇 두 개가 포개져 있었다. 그러나 아이스케끼는 없었다. 노란 설탕물에 막대기만 꽃혀 있었다. 아들은 엄마에 ‘다 녹았잖아’라며 성질을 냈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었다. ‘수원’에서 학교를 다녔다. 엄마는 농사를 지으며 ‘동막골’에 계셨다. 그 시골 집에 기타가 있었다. 어쩌다 가면 하루 종일 뚱땅거렸다. 엄마가 그게 걸렸던 모양이다. 어느 날 쉽지 않은 결행을 했다. 기타를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다. 동네 버스로 ‘머내’까지, 시외 버스로 ‘매향동’까지, 걸어서 ‘지동’까지 오셨다. 누런 한복 차림이었다. 양 손에는 짐도 있었다. 젊은이들이 놀렸다. ‘아줌마, 치면서 가세요.’ 아들은 ‘창피하잖아’라며 화를 냈다.’ 엄마가 또 ‘미안하다’고 했다. 아들이 이등병이었다. 권사이신 엄마의 신앙은 독실했다. 담배는 스무살 아들에도 용서 안됐다. 그 아들이 군대 갔고 첫 면회날이 왔다. 기억도 안 나는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 오셨다. 정신 없이 먹고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섰다. 엄마가 고쟁이 속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누나에게 줬다. 따라온 누나가 슬쩍 건넸다. 빨간색 ‘솔’ 담배였다. 아들이 담배 피우고 싶어 할 거라면서 수원에서부터 사 오셨단다. 아들은 ‘여기도 담배 나옵니다’며 타박을 했다. 엄마가 또 ‘미안하다’고 했다. 아들이 서른을 넘겼다. 차 할부금이 밀렸다. 해결할 길이 없었다. 누나가 빌려줬다. 꼭 갚겠다고 했는데 누나가 말했다. “그 돈 니꺼야. 갚을 필요 없어.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 큰 돈 필요할 때 주라고 맡기고 가신거야.” ‘아들이 돈을 펑펑 쓰니까 꼭 나중에 주라’는 당부까지 하셨단다. 마지막 몇 년은 치매로 정신을 놓으셨다. 아마 ‘정신이 있던 어느 날’ 맡기셨던 모양이다. 백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이다. 이제 아들도 어른이었다. 감사인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없었다. 그게 우리 시대 엄마다. 떠나 보낸지 30년쯤 됐다. 엄마 얼굴은 이제 기억에도 없다. 사진 속 모습은 그 얼굴이 아니다. 따뜻함이 표현 안된 그림일 뿐이다. 대신 뭔지 모를 냄새가 가끔씩 온다. 때 묻은 옷 속에서, 검게 그을은 손 끝에서 풍겨 나던 땀 냄새, ‘가난의 냄새’다. 아이스케끼 사주기도 버거웠던 가난의 냄새다. 그래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아들, 그리고 자식은 그 시절 엄마들이 버티는 이유였다. 온 인생이 자식을 가난에서 떼어 놓으려는 투쟁이었다. 참혹함에 할 말이 없다. 체험학습 간다며 설레였을 아이다. 그 아이가 엄마에게 업혀 나온다. 등 뒤로 축 늘어진 아이의 팔이 보인다. 모두가 짐작했지만 애써 말 안했다. 언론도 ‘섬 밖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썼다. 일부러 잘못 쓴 오보였다. 그 오보의 희망이 무너졌다. 바닷속 차 안에서 아이가 발견됐다. 아빠가 빚이 많았다고 한다. 생활고의 흔적도 확인됐다. 그래서 그랬단다.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의 선택이었을 리도 없다. 한줌의 재가 된 1일, 거기 아무도 없었단다. 형사정책연구원 자료다. 가족을 살해한 뒤 자살을 택한 범죄 통계다. 2000년부터 2019년까지 20년치다. 무려 426건이다. 자녀가 피해자가 된 경우도 247건이다. 절반을 넘는다. ‘부모·자녀 동반자살’로 불리는 ‘자녀 살해 후 극단선택’도 있다. 이건 통계로도 남지 않았다. 이 참담한 세상에 무슨 결론을 말하겠나. 이런 데 붙일 인간의 언어는 없다. 主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