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냐 산업의 핏줄이냐…전문가가 말하는 가상화폐의 진실

‘나는 가상화폐로 3달 만에 3억 벌었다’라는 책의 저자를 봤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로 그 돈을 벌었나?” 저자 빈현우 스피치마스터 대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다짜고짜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빈 대표 말로는 처음 책 제목이 ‘비트코인 이더리움 채굴기 실전투자 전략서’였다. 이것으로는 눈길을 못 끌 거라 판단하고 제목을 고상하진 않지만, 자극적으로 바꿨다. 원 제목을 부제목으로 강등시켰더니 독자들의 관심이 확 쏠렸다. 빈 대표는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이다. 가상화폐가 뭔지, 블록체인이 뭔지 그 개념과 기술에 대해 일반인보다 이해도가 앞섰다. 이게 돈이 될지에 대한 판단은 그의 경험과 감이었다. 빈 대표는 투자로서 가상화폐, 4차 산업의 핏줄로서 가상화폐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Q. 책 반응은 어떤가. A. 반응이 좋다. 제목이 직설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쉽게 쓰려고 많이 노력했다. 고등학생 정도만 돼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다. 왜냐하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도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 투자를 하고 있다. 개념도 없이 ‘묻지마 투자’를 하고 있으니 걱정이다. 2000년대 초반 ‘디지털조선’(조선일보 자회사)을 보고 조선업을 하는 회사로 오해하고 투자한 얘기가 있는데 그저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지금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단 오해와 무지에서 벗어난 다음 투자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Q. 한국에서 가상화폐의 가격이 유독 높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A. 한국인의 국민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좋게 말하면 단결력이자 응집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휩쓸리는 것이다. 지난해 촛불 집회, 2002 월드컵 당시 응원의 힘이 여기서도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생존본능이라고나 할까. 그게 바로 한국의 힘이다. 이 힘을 긍정적으로 보고 잘 활용한다면 오히려 장점이 된다. 가격이 높다면 한국 거래소로 전 세계의 돈이 모일 수 있다.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면 우리의 국민성이 가상화폐 시장을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Q. 가상화폐가 기축통화가 될 수 있다는 예상이 있다. A. 될 수 있다가 아니라 당연히 될 것으로 본다. 요즘 모임에서 밥을 먹고 회비를 걷으면 열에 아홉은 지폐가 없다며 돈을 바로 입금해 준다. 기존 화폐는 실물보다 계좌 속의 숫자로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 동전을 모르는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다. 기축통화는 세계 경제를 쥐고 있다. 그러니 미국의 달러에 대항한 움직임이 얼마나 많았나. 가상화폐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관심이 심상치 않다. 지난 6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을 만나기도 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가상화폐를 법정 화폐로 한다는 소문도 있다. Q. 가상화폐가 통용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A. 조만간 인공지능을 가진 사물들이 스스로 결제를 하는 날이 온다. 예를 들면 자율주행으로 움직이는 전기자동차는 주인을 태우기 전에 미리 전기 충전소로 가서 충전을 마친다. 전기 충전소도 물론 인공지능 컴퓨터가 운영한다. 충전을 마친 자동차는 기존 화폐가 아니라 바로 가상화폐로 결제한다. 사람을 위해 서비스하는 사물들이 사람을 위해 알아서 구매 목록을 정하고 결제도 알아서 한다. 이게 4차 산업의 한 모습이다. 가상화폐는 이 4차 산업을 돌게 하는 피가 될 것이다. Q. 최근 국회에서 가상화폐를 규제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A. 환영할 일이다. 그렇지만 규제만 하지 말고 육성책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예를 들면 가상화폐 특별지역을 만드는 것이다. 그곳에선 가상화폐만 쓴다. 들어가기 전에 가상화폐로 환전하고 모든 물건, 서비스는 오로지 가상화폐로 결제한다. 나갈 때는 다시 기존 화폐로 환전하면 된다. 가상화폐 자율 구역이다. 이런 지역이 전 세계의 가상화폐 허브 역할을 하면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Q. 마지막 질문이다. 가상화폐로 얼마나 벌었나. A. 책이 나오고 시간이 조금 지났다. 제목보다 더 벌었다고 할 수 있다.(웃음) 민현배기자

전농, 농협 매장 수입산 농산물 판매 강력 경고

농민단체가 농협 하나로마트의 수입산 농산물 판매 행위에 대해 집단행동 등의 방법으로 발끈하고 나섰다. 농협 김병원 회장을 상대로 오는 29일까지 전국의 모든 농협판매장에서 수입 농산물을 철수하도록 최후 통첩까지 보냈다. 7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경기도연맹 등에 따르면, 지난 3일 전농은 김병원 농협중앙회장에 하나로마트의 수입 농산물 판매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요구하는 공개요청서를 발송했다.전농은 공개 요청서를 통해 “농협판매장(하나로마트 등)에서 수입 농산물을 판매하는 일들이 일어났고, 이에 농민들이 항의하면 잠시 철수했다가 관심이 떨어지면 다시 진열하면서 기만적 판매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김병원 농협중앙회장은 농협 하나로마트의 수입 농산물 판매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라“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 6월 안성시 농민회와 가톨릭농민회는 지역 내 4개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수입농산물 중단을 촉구하며 매주 항의집회를 전개했다. 당시 안성 하나로마트 4개 매장에서는 ‘다문화가정 코너’라는 이름 아래 수입산 포도와 바나나, 열대과일 등을 판매해 농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농협중앙회가 지난 2014년 마련한 지침은 원형 수입농산물은 일체 판매를 금지하고, 육안으로 원형을 알아볼 수 있는 모든 수입산은 판매를 불가하고 있다. 즉석식품에 사용되는 주원료는 ‘국산’을 사용해야 한다. 이종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부장은 “농협이 자체 규정을 지키면 얼마든지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며 “29일까지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국 하나로마트의 수입농산물을 거둬들여 정부와 김 회장에게 반납하는 강력한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자연기자

과천 경마장서 3억원 '구매권' 외상 발급받아 꿀꺽한 50대 영장

과천경찰서는 경마장에서 3억 원 상당의 경마 구매권을 외상으로 발급받은 뒤 이를 현금으로 바꿔 달아난 혐의(사기)로 A씨(55)를 구속,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7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달 14일 오후 2시께 과천시 경마장 5층 발매창구에서 한국마사회 여성 직원 B씨로부터 10만 원짜리 구매권 3천 장(3억 원 상당)을 외상으로 발급받아 600만 원만 베팅하고, 1층의 여러 창구를 돌며 나머지를 모두 현금으로 바꿔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구매권은 경마장 내 발매창구나 장외발매소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일종의 유가증권이다. 마권 구매, 즉 경마 베팅 시 현금처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고액 경마가 이뤄지는 경마장 5층을 자주 오가면서 알게 된 B씨와 친분을 쌓은 뒤 구매권을 외상으로 손에 넣은 것으로 밝혀졌다. A씨는 사건 발생 1주일 전 B씨로부터 1억 원어치의 구매권을 외상으로 받았다가 서너 시간 만에 갚으면서 신뢰를 쌓기도 했다. B씨는 사건 당일 A씨가 구매권 대금을 갚지 않고 사라진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상부에 보고했고, 한국마사회는 폐장 이후인 같은 날 오후 9시 30분께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열흘 만인 지난달 24일 수원의 한 모텔에서 A씨를 붙잡았다. 과천=김형표기자

삼성 이재용 부회장 ‘12년 구형’… 재계 당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징역 12년을 구형하자 삼성그룹 내부를 비롯해 경제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이 급변하는 가운데 대외 신인도 하락과 반기업 정서 확산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영수 특검팀은 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부회장 등의 결심 공판에서 구형량을 밝혔다. 삼성 미래전략실 최지성 전 실장(부회장), 장충기 전 차장(사장), 삼성전자 박상진 전 사장에게 각각 징역 10년, 황성수 전 전무에게는 징역 7년을 구형했다. 특검팀은 이번 사건을 “전형적인 정경유착에 따른 부패범죄로 국민 주권의 원칙과 경제 민주화라는 헌법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구형이 발표되자 경제계에서는 ‘삼성’이라는 브랜드 가치와 대외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경제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 가운데 해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브랜드가 삼성인데, 재판 결과나 나온 것은 아니지만 높은 형량이 구형돼 브랜드 가치에 악영향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5월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브랜드’에 삼성전자가 브랜드 가치 382억달러(약 43조 552억 원)로 10위를 차지했다. 국내 기업 가운데는 유일하게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신용등급 하락과 같은 직접적인 피해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지만, 오너 장기공백으로 인한 유무형의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 세계시장이 급변하는 가운데 오너의 부재로 신성장동력 발굴이 사실상 멈춰선 상태라는 게 내부의 판단이다. 제2의 투자와 미래를 구상할 오너가 없다 보니 이후의 투자 계획도 아직 확정된 게 없다. 경제계에서는 반기업 정서가 확산할 것으로 걱정하고 있다. 경기권 경제계 관계자는 “총수에 대한 특혜는 사회 분위기상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법이 아닌 반기업 정서 확산으로 여론몰이식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자연기자

중기중앙회, 백화점 ‘상생관’ 입점 68개 중소기업 1차 선발

중소기업중앙회는 롯데·현대·신세계·갤러리아·AK플라자 등 5대 백화점의 중소기업 상생관에 입점할 68개 중소기업을 1차 선발했다고 7일 밝혔다. 중기중앙회는 지난 7월 한국백화점협회와 상생협약을 체결하고 현대, 롯데, 신세계, 갤러리아 AK플라자 등 5대 백화점에 ‘중소기업 상생관’을 설치해 우수 제품을 개발한 중소기업의 판로를 지원하기로 했다. 상생관 입점 업체 선정을 위한 통합 품평회에는 116개 업체가 참여했다. 5대 백화점 상품군별 전문 MD가 직접 심사해 이 중 68개 중소기업이 선발됐다. 선정업체는 편집매장의 특성상 리빙, 화장품, 패션잡화 업체가 다수를 차지했으며 가전, 의류, 식품, 쥬얼리 등 다양한 분야의 중소기업이 포함된다. 백화점들은 내년 중소기업 상생관의 본격적인 운영에 앞서 해당 업체들을 코리아세일페스타 등 백화점 가을 기획행사에 참여토록 해 소비자평가가 포함된 2차 선발 과정을 진행할 예정이다. 중소기업 상생관 입점 시 수수료(20%), 마케팅, 판촉비, 인테리어 비용을 백화점이 지원한다. 최윤규 중기중앙회 산업지원본부장은 “향후 최소 연 2회 이상의 통합품평회를 통해 최대한 많은 중소기업이 백화점 평가 및 입점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며 “중소기업의 백화점 입점 기회 확대, 입점 업체의 애로 해결을 위한 협력과제 발굴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정자연기자

[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22. 대동법의 완성자, 잠곡 김육

좋은 정치란 어떤 것일까. 국가가 탄생한 이래 언제나 던지는 정치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질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조선의 정치가 김육은 이렇게 단언했다. “왕자(임금)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후에야 나라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누구나 ‘민본’(民本)을 주문처럼 외고 ‘위민’(爲民)을 입버릇처럼 말했으나 백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관료는 흔치 않다. 더군다나 제도를 개선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정치가는 아주 드물었다. 투표로 정치인을 직접 선출하는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 성균관 유생이 숯장수가 되다 잠곡 김육(潛谷 金堉1580~1658)은 30대에 경기도 가평의 잠곡에 들어가 무려 10년 동안 손수 농사를 짓고 숯을 구워 팔며 생계를 꾸렸던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훈구파에게 탄압을 받은 ‘기묘팔현’의 한 사람인 김식의 증손자이고 어머니는 조광조의 아우 조숭조의 손녀이다. 명문가의 후손인 그가 무엇 때문에 산골에 은거하며 밑바닥 생활을 했던 것일까. 임진왜란은 김육의 소년시절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강원도와 평안도를 거쳐 황해도를 떠돌아야 했는데 피난살이 중에 부친이 별세하여 열다섯에 가장이 됐다. 김육은 결혼한 이듬해인 1605년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대과를 준비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친의 유언대로 집안을 일으키려는 뜻을 세우고 공부에 전념했던 결과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육은 명분을 앞세우는 괄괄한 선비였다. 이처럼 격정적인 성품은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림들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성균관 문묘에 모시자는 운동을 벌였다. 김육도 이에 적극 호응했다. 마침내 ‘오현종사’가 실현되었으나 광해군 정권의 실세였던 북인의 영수 정인홍이 자신의 스승 조식이 오현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 분개해 이황과 이언적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이때 성균관 유생들의 대표였던 김육은 유학자들의 학적부인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며 맞섰다. 이 일로 김육은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항복 같은 대신들의 변호로 자격은 겨우 되찾았으나 벼슬길에 나가기는 어려운 처지가 됐다. 게다가 정국은 더욱 경색됐다. 1613년에 광해군 정권의 기반인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비롯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계축옥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김육은 자신과 가까웠던 많은 인사들이 유배를 떠나고 관직에서 쫓겨나는 현실에 분노했다. 이때 김육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과거를 포기하고 성균관에서 나왔던 것이다. 김육은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가평으로 들어갔다. 귀거래를 단행한 대가는 혹독했다. 터를 잡은 잠곡에는 자기 소유의 토지는 물론 거처할 집조차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은거를 시작한 김육은 10년 동안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숯을 구워 팔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새벽에 파루를 치면 동대문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숯장수가 김육이었다고 한다. ■ 대동법에 정치 생명을 걸다 인조반정(1623)은 김육의 운명을 역전시켰다. 그도 반정공신들의 추천으로 6품의 벼슬을 받았던 것이다. 잠곡 생활을 청산한 그해, 김육은 문과에서 장원을 차지해 뒤늦게 시작한 벼슬길이지만 탄탄대로였다.평안도 안변도호부사로 재직하던 1636년 봄, 김육은 진하사에 임명됐다. 명나라로 보내는 마지막 사행의 책임자가 된 김육은 대륙의 질서가 바뀌고 있는 현장을 목도했다. 북경에서 병자호란에 패배하여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비보를 들으며 조선의 국가개혁을 생각하게 됐다. 김육은 이때부터 개혁의 방향과 목적을 안민으로 설정하면서 조세제도의 폐단에 주목했다. 조선의 기본 세법은 조용조(租庸調)였다. 조는 농지세인 전세이고, 용은 군역과 부역처럼 노동력을 제공하는 신역이며, 조는 그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을 말한다.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시작된 공납은 국가 세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지방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산물을 부과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러한 경우에는 어쩔 수없이 생산지에 가서 해당 산물을 사다가 납부해야 했다.그러자 이를 대행하는 방납이 이루어지게 됐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시작된 방납은 시간이 흐르면서 백성을 못살게 하는 제도로 굳어졌다. 방납업자들이 공납을 받아들이는 관리들과 짜고 농민들이 직접 납부하는 공물을 퇴짜 놓게 하고 자신들이 마련한 물건을 사서 납부하도록 농간을 부렸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김육이 제시한 세제개혁의 방안이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조용조 중에서 조, 즉 공납을 쌀로 통일해서 납부하도록 하자는 방안이다. 김육은 충청감사로 재직하던 1638년에 공납의 폐단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던 적이 있다. 그가 제시한 대동법의 논리는 간단한 것인데, 세금을 매기는 단위를 가호에서 농지 단위로 바꾸어서 모두 쌀로 납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은 김육 이전에도 있었다. 율곡 이이가 주장한 ‘대공수미법’과 유성룡이 임란 중에 실시한 ‘작미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작미법은 양반사대부들의 거센 저항을 불렀다. 가호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면 지주나 소작인이 비슷한 액수의 세금을 내지만, 농지 크기로 세금을 부과할 경우에는 대지주들이 세금을 많이 내야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자 작미법은 곧바로 폐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제도를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노력은 이어졌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영의정 이원익의 주장으로 경기도에서 대동법이 시작됐다. 대동법을 시행하는 관아를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이라 불렀듯이 대동법은 일반 백성들에게 두루 혜택이 미쳤다. 김육은 효종에게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피력했다. 중국인 화가가 그려준 송하한유도 “대동법은 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 진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에 두루 행하지는 못했지만 기전(경기도)과 관동(강원도)에서 이미 시행해서 힘을 얻었습니다. 만약 또 양호(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시행한다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에도 이익이 되는 도로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중심에 김장생의 아들 김집과 송시열 같은 서인 명망가들이 있었다. 김육은 서인에 속했지만 당론보다 백성들의 생활안정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인은 대동법을 찬성하는 김육의 한당과 이를 반대하는 김집의 산당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반대파들은 김육을 왕안석이라며 비난했다.신법을 통해 송나라를 뿌리부터 개혁하려 했던 왕안석(王安石)은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에게 나쁜 정치가의 대명사였다. 왕안석의 반대편에는 자치통감을 지은 사마광을 비롯해 당송팔대가로 유명한 소동파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왕안석의 개혁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김육이 “안석과 같다”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대동법에 집중했던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안민(安民)이 정치의 목적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한 치도 흔들리지 않다 김육은 백성들의 살림을 넉넉히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시헌력이라는 서양의 역법을 도입하고, 수레의 사용을 힘써 주장한 것도 나라 경제와 백성들의 살림을 튼튼히 하기 위함이었다. 대부분의 관료들이 화폐 유통에 반대했으나 김육은 선혜청과 상평청을 주관하는 책임을 맡게 되자 실무에 밝은 역관과 서리를 발탁하여 화폐의 유통을 실험했다. 그 결과 이들이 많은 이윤을 남겨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 죽음 앞두고도 오직 대동법 걱정 김육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대동법의 차질 없는 시행을 효종에게 당부했다. “호남의 일(대동법)은 신이 이미 서필원을 천거해서 부탁했는데, 신이 만약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서 일이 심지어 중도에 폐지될까 염려됩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 힘쓰라고 격려하고 보내셔서 신이 하려고 하던 것을 마치게 하소서” 1658년 9월, 김육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은 이렇게 탄식했다. “국사를 맡아서 김육처럼 굳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김육의 간절한 바람은 사후에 이루어졌다. 1608년 경기도에서 시작된 대동법은 1708년 황해도를 마지막으로 전국에 시행되었으니, 실로 100년 만에 완성된 조선 최고의 민생정책이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21. 조선 사상계의 대표 지성, 서계 박세당

사드를 설치하느냐 마느냐.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긴장수위가 심상치 않다.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부상하는 신흥국과 기존 패권국간의 충돌로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패턴을 보여 왔다. 17세기 역시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동아시아 질서의 패자로 부상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서계(西溪) 박세당(1629~1703)은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병자호란(1636)을 겪는다. 인조반정 공신이었던 아버지(박정)와는 4살 때 사별하고 난리가 나자 어머니를 따라 원주, 청풍, 안동 등으로 이리저리 피난했고 호란이 끝난 후에도 청주와 천안 등지를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13살이 되어서야 고모부 정사무(鄭思武)로부터 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나약한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관직에 진출(33세)하는 듯했으나 주자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주자학적 중화주의와 정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수락산 기슭으로 낙향한다. 불과 8년여 만이었다. ■ 망해버린 명나라 숭배 ‘이상한 나라 조선’ 서계는 낙향한 뒤 청나라의 황금기가 시작되는 강희 7년(1668)에 서장관으로 연경을 방문해 청나라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돌아온다. 이때 사행길의 책임자였던 동지정사 이경억은 현종에게 청나라에서 듣고 본 것을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번 저들의 사치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이미 전쟁도 없고 땅을 남쪽 끝까지 얻어서 물화(物貨)가 집중돼 편안히 부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기물은 화려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망할 조짐이 아닙니다”(현종실록) 라고.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춘추대의를 앞세우고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해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숭배하는 명분론적 역사인식에 매달려 있었다. 병자호란으로 강토가 유린되고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三拜九叩頭) 치욕을 겪으면서 60여만 명의 백성들이 심양으로 끌려가 노예시장에 팔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가의 존망과 백성의 안위보다는 공자-맹자-주자-정몽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의 역사만을 중요시했다. ■ 민생에 이롭다면… 사상의 장벽을 허물다 서계는 “날로 퇴폐되어 가는 세상을 가히 바로 잡아 구할 수 없어” 석촌동으로 은거는 하였지만 ‘먼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여기에서부터’(行遠必自邇) 시작해야 한다고 자각했다. 그리고 몸소 땀 흘려 농사를 지으며 색경穡經을 짓는다.색경 서문에는 “누구든 곡식과 채소 가꾸기를 배우려면 스승을 찾아야 하는데 경험 많은 농부를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하에서 농사의 최고 스승이 바로 경험 많은 농부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주자학적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직업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도는 같다고(異業同道) 외쳤던 양명학적 사유가 짙게 배어 있다. 그만큼 서계는 민생에 이로운 것이라면 그 어떤 사상에도 개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단시하고 있던 노자 도덕경과 장자(莊子)까지도 정사(政事)에 쓸모가 있다고 판단하여 과감히 주해한 것이 이를 잘 드러낸다. ■ 청나라와 싸울 것인가 화의할 것인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울 것인가 화의(和議)할 것인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할 때 지천 최명길(1586~1647)은 화의를 주장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청음, 동계와 삼학사 등은 절의(節義)를 주장하고 최명길은 화의를 주장했는데… 최명길은 이(利)를 취해 의(義)를 저버린 사람임을 면하기 어렵다”(宋子大全)고 평가한다.우암의 시각으로는 사직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절의를 주장한 청음 김상헌과 삼학사 등은 의(義)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조선과 조선 백성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한 최명길은 ‘명나라에 대한 대의’를 배신한 인물일 뿐이다. 서계의 입장은 우암과는 정반대이다.서계는 “무너지는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위태로운 생민(生民)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또 누구의 공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잠자리를 편안히 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도리어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그에게 힘 입었으면서도 그 사람을 헐뜯으니 너무도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西溪全書) 최명길의 화의는 그저 그럴듯한 ‘명분’이나 ‘말’이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국가와 백성을 위한 ‘실질적인 공업(功業)’이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 공도 모르고 우암이 그를 헐뜯는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 삼전도비문 쓴 백헌 이경석 ‘구사일생’ 백헌 이경석(1595~1671)은 인조의 부탁으로 삼전도비문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이 행위 역시 도통론적 시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서계가 낙향한 바로 그 해 1668년 백헌이 현종으로부터 궤장(원로대신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왕이 의자와 지팡이 하사)을 받을 때 우암은 ‘수이강(壽而康)’ 즉 오래 살며 강건하다는 글로 백헌을 축하한다.하지만 이 글은 송나라 흠종과 함께 금나라에 잡혀가 항복문서를 쓰고 그들에게 아첨하며 부귀를 누렸던 중국의 역적으로 악명 높은 손적(孫)에 비유한 말이었다. 우암은 백헌이 ‘조선판 손적’이 아니고 누구냐 라고 비꼬았던 것이다.이뿐만이 아니었다. 효종 때 김자점이 조선이 성곽을 보수하는 등 북벌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청나라에 밀고하자 청나라에서 북벌계획의 전말을 조사차 사문사(査問使)를 파견한 적이 있었다. 조정이 큰 위기를 맞았다.이때 백헌은 “이 모든 일은 내가 주관한 일이오” “우리 임금은 전혀 모르는 일이며 모두 영의정인 내가 시킨 것이오” 하며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청나라는 “대국을 속인 죄”라고 하며 백헌을 극형에 처하려 한다.백헌은 효종의 구명운동 덕분에 겨우 목숨만은 부지하지만 백마산성에 구금됐다 영구히 재임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년 만에 석방된다. 우암은 “경인년의 일(백마산성에 구금된 일)이 아니면 개도 그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모욕적인 말도 서슴치 않았다. ■ “올빼미는 봉황과 성품이 달라서…” 우암에 직격탄 서계는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며 우암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백헌의 신도비문에서 “나라를 위해 그 집안을 잊었고 임금을 위해 그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결코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다.그리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노성한 사람(老成人)은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으니 노성한 사람의 중요함은 이와 같다… 감히 상서롭지 못한 자가 되는 것에는 역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보복이 있을 것이니 이는 하늘의 도리다. 가히 두렵지 아니하랴” 그리고 마침내 직격탄을 날린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품이 달라서 이에 노하고 이에 성내네. 착하지 않는 자는 미워할 뿐 군자가 어찌 염려하리오”(西溪全書) 이는 우암을 올빼미에 견주고 백헌을 군자와 봉황에 비유한 것이다.노론은 서계가 우암을 우롱했다고 분노했다. 이로 인해 논어, 맹자 등 사서삼경에 대한 주자의 주석이 곳곳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 사변록은 결국 이단서로 규정되고 말았다. 시대 조류에 타협하지 않았던 서계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이 찍혀 유배형에 처해 진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출 불가 상소를 올려 장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가는 도중 장독으로 노량진에서 죽은 아들 박태보의 충절 때문에 충신의 아버지를 유배 보낼 수 없다하여 유배만은 면한다. 이경석의 신도비는 죽은 지 84년이 지난 영조 30년(1754)에서야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워지게 된다.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죽은 후에도 핍박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 아홉 길 산을 쌓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 서계 박세당의 정치적 행위와 사상 속에는 청나라, 도통론과 사공(事功), 명분과 실리, 절의와 화의, 책임윤리와 신념윤리, 역사인식 등의 문제들에 대한 고민과 질문들이 내장되어 있다. 서계는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거냐고 묻는다.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절의가 중요한가 화의가 중요한가. 국가경영에 있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차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 원칙(經)이 중요한가 아니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시의적절한 우회전략(權道)이 필요한가. 명분과 힘이 충돌할 때 명분을 따를 것인가.아니면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면서 실리를 택할 것인가. 국가의 이익과 의리가 충돌할 때 국가와 백성을 위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가. 국가적인 난제와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는데 위정자들의 책임윤리가 중요한가 아니면 개인의 신념윤리를 더 앞세워야 하는가. 서계가 궤산정에 올라 “아홉 길 산을 쌓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書經 여오편) 그간 쌓은 공이 모두 허사가 되는 일이 없도록 지금 여기 내 땅을 호미질로 일궈라 ! 라고 외치는 듯하다.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에서 길을 찾다_특별좌담회]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 횡단열차 탐사를 말하다

경기도ㆍ경기문화재단 주최, 경기일보ㆍ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이 주관한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대륙 열차횡단 프로젝트가 지난 3일 32일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대한민국과 경기도의 미래 비전을 찾기 위해 지난달 3일 평택항을 출발한 유라시아 열차 탐사단이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일까. 열차 탐사단이 현장에서 보고 체험한 내용을 좌담회를 통해 들어봤다.이번 좌담회는 이선호 경기일보 문화부장의 사회로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최종식 경기일보 기획관리실장,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신춘호 방송대학TV 감독, 조창완 차이나리뷰 편집장, 이승영 청년기업가(SERCUS 대표), 성형모 경기문화재단 주임 등이 패널로 참여해 유라시아 프로젝트의 성과와 과제에 대해 토론했다. 사회 이선호 경기일보 문화부장 ■ 이선호 부장 : 32일간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중국부터 카자흐스탄, 유럽을 둘러보고 왔는데 소감이 어떤가. 강진갑 원장 : 이번 탐사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문명의 대 전환기 차원에서 봐야 한다. 평택에서 출발해서 롄윈강까지 배를 타고 가고, 12개국을 거쳐 철도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전체적으로 1만4천 여 ㎞를 지났다. 핵심은 실크로드를 지났다는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가 교류하던 실크로드가 18세기 말에 막혔다. 이후 실크로드가 교통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15세기 대항해 시대 배를 통해 교류가 시작됐다. 21세기 중국이 실크로드 활성화에 나섰다. 유럽과 아시아 간의 교류가 그동안 배를 통해 이뤄졌는데 다시 육로를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목적을 얼마나 달성했는지 좌담회에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신춘호 감독 : 기록 사진과 영상을 담당했는데, 현실에서 동선을 따라 이동해야 하는 일이 있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은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전체 일정을 기록 사진으로 남겨 유라시아 탐사 지역에 대한 기본적인 아카이브를 구성할 정도로 자료를 확보했다. 이 측면에서 의미 있었던 탐사였다. 이승영 대표 : 이번 탐사에서 경기도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조사를 하고 싶었다. 정책, 경제, 청년 분야 등 경기도가 유라시아 대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해외 정책과 어울릴 수 있는 경기도 정책, 외국 정책 중 경기도에 접목가능한 것을 찾아 개인적으로 정리해보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김상헌 교수 : 사실 이번 코스 중 7할 정도는 다녀왔던 적이 있다. 관심있게 본 것은 중국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연결되는 경로다. 특히 9월까지 호르고스부터 알마티까지 임시로 여객열차가 운행되고 있는데 국내에 소개된 적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경로는 원래 자동차로 넘어가는 코스다. 열차로 연결되면 하루 반 정도 시간을 벌 수 있다. 이번 탐사에서 중국과 카자흐스탄 국경이 바뀌는 현장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향후 이 지역이 허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최종식 실장 : 유럽에 만들어진 철로가 다른 교통 수단에 대해 기본적으로 시작 단계에 있다. 열차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새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라 생각한다. 그런 공간을 직접 다녀온 것에 의미가 있었다. 중국 서부, 카자흐스탄, 러시아로 이어지는 새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공간에 경기도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을 확인한 과정이었다. 조창완 편집장 : 이번 여정을 준비하며 놀랐다. 중국 구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유럽 구간은 잘 알지 못해 도움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보니, 기차로 유럽을 여행하는 것에 대해 전혀 무리가 없었다. 젊은 사람들이 이 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다. 이번 탐사는 사람들이 관심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 이선호 부장 : 지역마다 다른 특성을 느끼고 왔을 것 같다. 경기도 정책에 반영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철도로 횡단한 이번 프로젝트의 성과와 의의는 무엇인가. 강진갑 원장 : 한반도에 갇혀 산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프로젝트는 갇혀 있는 생각을 터버리며 유라시아대륙 전체로 시야를 넓히는 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중국이다. 경기새천년 또한 중국과 분리시킬 수 없다. 짧은 시간 넓은 세상을 봤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전문가, 공무원 집단이 이 코스를 직접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학교 프로그램, 직장 연수 프로그램과 연결시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신춘호 감독 : 투루판 역 광장에 모택동이 이슬람권 노인들과 악수하는 장면이 걸려 있다. 맞은편에는 시진핑이 위구르 어린이들과 사진찍은 것이 붙어 있다. 과거에는 민심을 얻기 위해 노인과 찍은 사진을, 지금은 중국이 미래 세대 이 지역까지 포용해나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봤다. 이런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청년 층에 확대돼야 한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 역할을 찾아 나가야 하는 시점이다. 재계나 재단, 언론, 학자 등 각자 역할에 대해 앞으로 고민이 필요하다. 이승영 대표 : 친환경 에너지, 미래 에너지가 이슈다. 경기도에서도 친환경 자동차를 구입하면 주차장 이용을 무료로 할 수 있다든지, 세를 감면해준다든지 하는 지원책이 있다. 중국에서는 전기 오토바이가 이미 보편화됐다. 황무지를 풍력 발전하는 데 이용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유럽에서도 전기차가 활성화돼 있었다. 카자흐스탄은 신재생에너지를 주제로 한 엑스포를 치르고 있다. 우리 경기도가 중국, 카자흐스탄, 유럽을 보고 적용할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김상헌 교수 : 카자흐스탄은 바다가 없어 항구 확보에 노력 중이다. 중국 롄윈강에 투자한 것이 그런 차원이다. 중국 입장에서 봤을 때 한국이 들어갈 여지가 적은 건 맞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인과 연결해 카자흐스탄 수요를 타고 중국에 연결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현재 중앙아시아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철도밖에 없다. 그 경로를 확보하면 시장을 확대할 수 있어 유리하다. 경기도를 보면 롄윈강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모두 우루무치로 가고, 고속철은 호르고스를 향한다. 평택에서 연결할 수 있어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신춘호 감독 : 기차로 향하며 본 풍경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한 중국 서부 지역이 아니였다.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풍력, 태양열, 전통 지하자원, 석유 등을 생각할 때 두려운 느낌마저 들었다. 중국의 일대일로 중 한반도를 거쳐 북극항로까지 가는 노선이 있다. 이것이 실현되려면 북한문제와 연계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풀리지 않으면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조창완 편집장 : 32일간 다양한 기차를 탔다. 중국에서도 가장 낮은 급부터 고속철도까지 거쳤다. 고속철도 첫 개통은 2008년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가는 구간이었다. 지난해까지 2만2천km가 연결됐으며 2035년까지 4만5천km를 완성할 계획이다.시안에서 만난 물류 담당자들은 운송시간이 확고하게 단축됐다고 말했다. 이미 물류 혁명이 이뤄진 것이라 본다. 경기도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대일로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소외된다. 결국 중국이 서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가 소외되지 않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선호 부장 : 현지 사람들과 교류한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가 외국에서 어떻게 느껴지는 것 같나.신춘호 감독 : 기본적으로 한류 열풍이 저변에 확산돼 있다고 느꼈다. 카자흐스탄에서도 젊은 층이 한국 연예인 이름을 분명하게 얘기할 정도였다. 50대인 열차 차장이나 40대 중국 가이드도 한국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화하는 데 한류가 주요 소재였다.이승영 대표 : 외국 어디에서도 한국인, 한국 제품을 볼 수 있었다. 88올림픽 이후 해외에 나가는 게 자유로워졌는데 단시간 큰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직접 눈으로 본 결과, 한국 위상이 어느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유럽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에는 우리나라 대기업 광고판이 꼭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광고를 보고 그 브랜드가 한국의 브랜드라는 것을 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조창완 편집장 : 렌윈강에서 택시 탔을 때 조롱하는 어투로 “미국 때문에 꼼짝 못하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루무치에서는 현대자동차를 많이 봤다. 중국에서는 중국기업보다 한국기업을 가깝게 느끼는 몇 지역이 있다. 우루무치, 호르고스, 베트남과 가까운 도시 등은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한 반감이 적다. 경기도가 경제무역특구가 조성된 도시를 노리면 가능성이 있다.■ 이선호 부장 : 유럽에서는 일대일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강진갑 원장 : 중국이 주도적으로 철길을 연결하는 데 이에 대한 유럽의 반응이 궁금했다. 15~16세기 대항해시대 유럽이 식민지를 만들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아시아 경제가 발전하며 유럽으로 진출하는 변화가 일어났다.표면적으로는 유럽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화물열차가 100번 와야 화물선 한 대 분량이라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독일 함부르크 박물관에서는 일대일로를 주제로 기획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포르투갈 대사관 관계자한테서도 포르투갈이 일대일로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중국이 대외적으로 투자를 많이 해 포르투갈도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김상헌 교수 : 덧붙이자면 중국이 어느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고 보는 것보다 그 지역에 뻗는 네트워크에 의미가 있다. 포르투갈은 EU 중 경제력이 열세인 국가다. 두 번의 IMF를 브라질 때문에 버텼다. 브라질이 독립했지만 포르투갈을 정신적인 모국이라 생각한다. 안 좋은 관계가 아니라 아직 네트워크가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관심 있게 봐야 한다.조창완 편집장 : 벨라루스에도 경제특구가 있다. 카스피해와 흑해 지나 그리스에도 항구와 같은 인프라를 개발했다. 산, 바다, 서구로 다 연결하고 있어 유라시아 대륙 끝인 포르투갈도 관심 가질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스에 투자했으니 포르투갈도 가능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다각도로 일대일로를 봐야한다.■ 이선호 부장 : 일대일로로 급변하는 정세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경기도의 역할은 무엇인가.강진갑 원장 : 핵심은 일대일로를 통해 중국과 유럽이 연결되는 것이었다. 새로운 철의 실크로드가 아시아와 유럽 관계에 끼치는 영향에 관심 있었다. 이 이야기가 3~4년 전에 나와 현장에서는 아직 잘 느껴지지 않는 단계다. 시안에서 만난 기업인들도 시장 진출에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봤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형이 바뀌는 곳에 가봤다.아시아에서 중국이 중심이 돼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이 패권국가가 됐을 때 우리에게 좋은 것만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사드 배치한다니까 중국 이해관계가 배치돼 경제적 제재를 가하고 있지 않나. 예민한 관심으로 중국의 힘이 커졌을 때 대책을 세워야 한다.최종식 실장 : 카자흐스탄과 중국 서부 지역에 중국 정부가 나서 새 공간을 만들고 있다. 경기도가 접근할 수 있다. 철도라는 선에 국한되지 않고 공간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또 공간과 열차를 얘기했지만 결국 사람 문제다. 기업과 청년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분할해서 생각해야 한다.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는 상해와 광저우에서 중소기업을 위한 박람회를 하고 있다. 이것처럼 기업 초창기에 도움줄 수 있다. 카자흐스탄이나 시안에 중소기업 제품 가져가서 보여주는 식으로 후속내용을 만들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확인한 공간에 젊은 청년들이 가서 연구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후속 프로젝트가 필요하다.조창완 편집장 : 한중 관계를 계속 지켜봤다. 우리나라 대중국 수출이 재작년과 작년에 많이 떨어졌다. 올해 상반기는 괜찮았지만 하반기 수지는 나빠지고 있다. 자동차와 전자제품 중심으로 중국에 수출했지만 상황이 변하고 있다. 4차산업혁명에 대한 준비도 중국에 비하면 부족할 것이다. 쉽게 볼 문제 아니다. 경기도, 한국이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면 곧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나라 미래 먹거리를 고민해야 한다.신춘호 감독 : 독일 함부르크, 네덜란드 로테르담, 프랑스 파리를 열차로 내려왔다. 서유럽에서 느낀 것은 전기자동차가 눈에 띄게 활성화된 것이다. 우리도 4차 산업혁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성형모 주임 : 유라시아 열차 탐방단이 찾은 거점 지역 곳곳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 서안의 삼성전자, 호르고스 지역의 한국상품 면세점, 카자흐스탄에서 활동 중인 교수, 고려인 등 여러 사람과 뜻깊은 만남을 가졌다. 향후 유라시아에 이미 나가 있는 다방면의 인적 자원을 활용한다면 우리나라가 유라시아 횡단 기찻길을 효과적이고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이승영 대표 : 중국은 강한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중국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뜻을 품었다 기지개를 켰다. 한국 뿐만 아니라 주변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미래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느꼈다. 우리만의 특별함이 없으면 미래 세대가 살아남을 수 없다. 특별한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것을 예로 들자면 ‘통일’이다.김상헌 교수 : 지역과 지역을 잇는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지역 단위 전문가는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 지역이 주변 국가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관심 갖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앞으로 미래 세대가 전체를 꿸 수 있는 공부를 하도록 해야 한다.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혜안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정리=손의연기자후원: 경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