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 없었던 ‘정치 승부사’… 문민시대를 열다

최연소 국회의원에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 32년간의 군정을 끝내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주인공, ‘민주화의 승부사’로 불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화려한 이력만큼 파란만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유신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의 깃발을 앞세워 민중의 지지를 받았지만 험난한 군부 정권에 정면 대항하는 과정에서 온갖 정치적 풍파를 겪으며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 한 획을 긋기도 했다향년 88세로 영면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정계의 거목이다.■ 제3대 25세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경남 거제에서 3남 5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영삼은 1945년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948년 서울대학교 문리 대학 철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김영삼은 철학보다는 정치 쪽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레 이승만, 김구 등 정치인의 강연회를 많이 쫓아다녔다고 한다. 1954년 제3대 총선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만 25세의 젊은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그는 이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1990년 제1대 민주자유당 3인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특히 군부 독재 아래 민주화 운동에 나서는가 하면 14대 대통령으로 문민정부를 출범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국회의원 9선, 야당 대표 3번, 원내총무 5번, 대변인 2번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는 거칠 것이 없다’는 의미의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로 뛰어난 ‘승부사’ 기질을 보여줬던 그의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은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금자탑이다.■ 정치인생 가시밭길 연속하지만 이후 정치인생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시위를 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여당 의원으로 국회를 밟은 김 전 대통령이었지만 그의 정치 인생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발해 자유당을 탈당하고 나서 30여년의 야당 정치인 생활은 길고도 추웠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그는 이후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으로 우리 정치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의 3선 개헌 저지에 선봉장으로 나서면서 겪어야만 했던 갖은 고난은 그의 정치 인생사에도 큰 획을 그었다. 1969년 신민당 원내총무 당시 자택 인근에서 당한 ‘초산테러’가 대표적이다. 1979년 신민당 총재 시절에는 유신 정권에 의해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고 가택연금 조치까지 당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명언이 됐다.짧았던 80년 서울의 봄 이후 들어선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무려 23일 동안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먼저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던 그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이철승 전 의원과 함께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며 쓴 고배의 잔을 마시기도 했다.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했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신군부 출신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승리를 내주기도 했다.■ YS의 승부수(3당 합당ㆍ정권창출)김 전 대통령은 여기서 승부수를 던졌다.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 김종필 신 민주 공화당 총재와 손을 잡고 3당 합당을 선언한다. ‘3당 합당’은 그의 승부사 기질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민주화 세력들의 ‘변절자’라는 십자포화 속에서도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를 기반으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32년간의 군정을 끝내고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강해인기자  ‘양김 시대’ 역사속으로때로는 동지로 때론 라이벌로김영삼(YS) 전 대통령이 22일 6년여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뒤를 따르면서 ‘양김 시대’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숙명’과도 같은 라이벌이면서 동반자였던 ‘후광’(後廣) 김대중 전 대통령과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두 사람은 판이한 인생을 살면서 때론 힘을 합치고 때론 치열하게 싸우고 경쟁했다.DJ는 전남 신안의 외딴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한 뒤 네 번 도전끝에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인동초(忍冬草)의 삶을 살아온 반면 YS는 경남 거제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만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등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다.이후 두 사람은 중대한 정치적 고비마다 협력과 경쟁을 이어가며 정치력을 키워갔다. 첫 승부였던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은 YS가 승리했지만 ‘40대 기수론’을 내세우고 야권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맞붙었던 70년 대선 경선은 DJ가 역전승을 거뒀다.군사정부 시절, 함께 정면으로 맞서며 민주화의 동지이자 한국 야당사의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87년 대선 때 야권 후보 단일화의 길목에서 끝내 갈라서면서 군사정부 연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며 야권 진영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이후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는 1990년 1월 당시 여당인 민자당과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고 1992년 먼저 대권을 거머쥐었다.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으로 떠났다가 귀국, 1995년 지방선거 이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제1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고 1997년 대선에서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DJ 집권 후 문민정부 비리청산작업이 본격화되면서 김현철씨 등 YS 측근들이 법적 심판대에 올랐고, 양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DJ가 서거하던 2009년까지 이어졌고 YS가 죽음의 문턱에 선 DJ를 전격 찾아가 문병한 뒤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극적 화해가 이뤄졌다. 김재민기자

도내 학교 2천716개교 석면자재 사용

석면 마감재를 사용해 건축한 경기지역 학교가 60% 가까이 되는 가운데 이를 모두 교체하기 위해서는 8천억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22일 경기도교육청이 도의회 교육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최종환 의원(파주1)에게 제출한 행정사무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4월까지 도내 유치원과 초·중·고, 특수학교 4천565개교(분교장 포함)에 대해 전수 조사한 결과 2천716개교(59.5%)가 석면 마감재로 건축돼 위해성이 우려됐다. 이들 학교의 석면 시공 면적은 총 891만㎡로 집계됐다.지역별로는 수원이 237개교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 고양 201개교, 성남 192개교, 부천 167개교, 안양·과천 151개교, 구리·남양주 145개교, 용인 143개교, 안산 135개교, 평택 131개교, 화성·오산 123개교, 파주 105개교 등의 순이었다.그럼에도 최근 3년간 석면 제거 공사는 냉·난방기 공사, 화장실 개선사업 등 학교시설 환경개선사업 공사에 수반되는 공정에서 제한적으로 진행됐다. 이로 인해 지난 2013년부터 올해까지 석면 제거 실적과 투입 예산은 728개교(18만2천269㎡), 56억6천120만원에 불과했다. 연평균 243개교 18억원 정도가 투입된 셈이다.이에 최 의원은 지난 20일 도교육청 행정사무감사에서 “도내 학교의 석면 건축물을 모두 제거하려면 8천300억여원이 들어가는데 현재와 같은 속도로 예산이 투입될 경우 완전히 제거하는데 461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이에 도교육청은 중간 등급으로 판정된 74개교를 우선 개선하는 한편 전문업체에 의뢰한 석면제거를 위한 중·장기계획 용역이 나오는 대로 단계별 개선대책을 추진할 방침이다.한편 2012년부터 시작된 석면안전관리법의 위해성 평가에 따라 석면 위험 등급은 높음, 중간, 낮음 등 3개 등급으로 구분된다. 송우일기자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1927∼2015), 大道無門의 길 떠나다

국가장으로 26일 현충원 안장‘군정 종식에 종지부를 찟고 문민시대를 연 민주화의 별이 사라지다.’민주화 운동의 거목으로 대한민국 격변기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향년 88세로 서거했다.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22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해 결국 영면했다. 암울했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하며 파란만장한 격동기의 삶을 보내온 김 전 대통령은 최연소·최다선 의원으로 서슬이 퍼런 군부정권에 당당히 맞서 대항한 민주화 지도자로서 숱한 정치적 역경을 극복해 왔다.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출생한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돼 제 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최연소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김 전 대통령은 장택상 전 국회부의장의 비서로 발탁돼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 3선 개헌 저지의 선봉에 서면서 30여년의 순탄치 않은 야당 정치역로에 발을 내딛게 된다.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19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면서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야권의 세대교체를 이끌어냈으며 유신체제에 맞서 항거하면서 유신체제의 종식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민주화의 서광이 밝아오기도 전에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체제의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에 처해지는 등 정치적 고난의 길을 걸었다.신민당 총재 시절 유신정권에 맞서다 총재 직무정지와 의원직을 제명당했으며 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정치적 탄압을 받던 자신의 처지와 저항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이후 정치적으로 극심한 부침을 겪다 지난 1992년 대선에서 평생 라이벌인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군정 종식’을 이뤄내며 ‘문민시대’를 열었다.문민정부의 국정 기조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부패척결 등이며 특히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 제기되자 5·18 특별법 제정을 직접 지시, 두 전직 대통령을 단죄한 것이 대표적이다.신군부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함으로써 민주화의 거두로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잘 보여줬고 상해 임시정부 청사와 경복궁을 복원하는 등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국정운영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집권 초반 정치권과 사회지도층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작업을 통해 부도덕한 사회지도층을 단죄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치적을 쌓았고, 군부정권의 잔재인 하나회 척결을 통해 문민정부의 정통성 확보에 공을 들였다.1993년 금융 및 부동산실명제의 전격 도입으로 부정부패 및 부조리 등의 온상을 제거하는 등 경제분야의 투명성 확보와 시스템 개선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고, 1995년 민선 지방자치제 시행으로 중앙집권적 정부 권한을 지자체로 상당 부분 이임하는 등 권력 분점에도 집중했다.다만 집권 후반 불거진 친인척 비리와 경제정책 실패로 외환위기(IMF)사태를 초래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한편 정부는 22일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오는 26일 치르기로 했다. 국가장법에 따라 장례위원회가 설치되며 위원장은 관례대로 황교안 국무총리가 맡는다. 강해인기자

민간 매각 vs 시민공원… 송도석산 개발 ‘동상이몽’

인천 송도석산 개발을 두고 인천도시공사와 인천관광공사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인천도시공사는 연수구 옥련동 76의 9 일대(13만 9천㎡) 송도석산에 대한 매각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고 22일 밝혔다. 공사는 중장기 재무관리계획에 내년도 자산매각 대상으로도 송도석산(420억 원)을 포함했다. 공사는 송도 석산 내부 도로를 비관리청 도로공사로 정비, 주변 토지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조만간 용역을 발주할 계획이다. 이는 민간 사업자의 구미가 당기도록 석산의 형태를 바꿔 사업성을 높이려는 것이다.그러나 정작 송도석산 개발 업무를 이관받게 될 인천관광공사는 다른 계획을 갖고 있다. 관광공사의 내년도 사업 추진계획을 보면 송도석산을 관광자원, 시민휴식공간(공원)으로 활용한다고 명시돼 있다. 특히 관광공사는 ‘송도석산 주변 인프라 구축 사업비’ 명목으로 내년도 본예산에 1억 5천만 원을 편성했다.인천시의회 건설교통위원회 손철운 의원(새누리·부평 3)은 최근 도시공사 행정사무감사에서 “도시공사는 부채를 감축하고자 송도석산을 매각할 계획인데, 다른 한쪽에선 추가 예산을 투입해 정비한다는 계획을 내놨다”면서 “송도석산을 어찌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질타했다. 시의회는 오는 24일 열리는 두 번째 관광공사 행감에서도 송도석산 중복계획이나 불확실한 전망을 집중적으로 추궁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김우식 인천도시공사 사장은 “시나 연수구에서 석산을 매입해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는 게 가장 좋은 방식이지만, 현 재정상황상 불가능하다”면서 “전체를 매각하던지, 일부만 매각할지 다방면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황준기 인천관광공사 사장은 “현재 송도석산에는 중국 등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며 “매각을 하던, 공원화를 하던 개발방식이 결정되기 전까지 최소한의 관광 환경 및 편의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동민기자

금융실명제 도입·하나회 청산… IMF 사태는 오점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정책은 금융실명제 도입이다. 반면 기업들의 줄도산 등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사태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경제분야에서의 공과가 가장 뚜렷하게 대비된다. 지방자치제도 부활에 앞장섰으며 문민정부를 열어 부정부패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했던 개혁을 적극 추진했다.■ 비리ㆍ부패 차단 위한 금융실명제 도입·OECD 가입취임 초반 김 전 대통령은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로 경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런 의지를 바탕으로 금융·부동산의 양대 실명제를 달성해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8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발판 삼아 금융·부동산 실명제를 도입하며 부패 차단과 과세 형평성 확보에 나섰다.금융실명제는 김 전 대통령의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전격 시행됐다. 가명과 차명으로 진행되던 금융거래가 각종 비리·부패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되던 시기였다.김 전 대통령은 당시 담화문에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고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영삼 정부의 경제개혁 정책은 금융에 이어 부동산 거래 실명제로 이어졌다.금융실명제법 도입으로 부동산에 자금이 집중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투기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1995년 1월6일 부동산 실명제 실시 계획이 발표됐다.■ 준비되지 않은 개방으로 인한 IMF 위기김영삼 정부는 한국의 경제 규모가 확대되고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정부의 규제가 민간부문의 발목을 잡는다는 인식으로 규제개혁에도 나서 기업창업·공장입지, 자금조달, 시장진입 관련 행정 절차 문턱이 크게 낮아졌다. 대외적으로는 임기 전반기 빠른 경제 성장과 적극적 시장개방을 바탕으로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점도 큰 업적으로 꼽힌다.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을 계기로 경제개혁·개방 정책에 열을 올렸지만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계기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를 맞아 위기에 봉착했다. 같은 해 4월 삼미그룹이 부도를 낸 데 이어 7월 기아자동차 도산 사태가 터졌다.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았고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차례로 문을 내렸다. 1997년 한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원을 넘어서면서 연이은 신용 경색과 금융시장 혼란은 한국을 금융위기로 몰아 세웠다.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자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OECD 가입으로 예상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충분한 사전 준비를 하지 못한 채 급속하게 시장개방과 자본 유출입을 허용해 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재임 5년간 경제부총리를 6번이나 바꿔 일관성 있는 경제정책이 수립·집행되지 못했다는 점과 무리하게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하다가 외환위기를 맞은 점은 김 전 대통령의 과(過)로 지적된다.■ 칼국수 정치로 불러오려한 투명한 사회고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정치에서 만연했던 부정부패 척결과 투명한 사회로의 반전을 꾀했던 대통령이다. 1993년 2월27일 취임 사흘째를 맞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며 17억7천822만6천70원이던 자신의 일가 재산을 공개했다.취임 후 대통령으로서 내딛은 첫발은 자신의 재산을 숨김없이 공개하면서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의 투명성 제고에 개혁의 칼을 빼든 것이다.청와대 주 메뉴로 칼국수가 애용되는 것이 알려지면서 김영삼 정부의 ‘칼국수 정치’는 개혁의 상징이자, 부패 군부정치의 종료를 의미했다.김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강력한 사정(司正) 태세를 구축했다.김 전 대통령은 ‘성역없는 사정’과 ‘중단없는 개혁’을 천명하면서 당시 한국 사회가 “썩어도 너무 썩었다”는 판단 아래 ‘신(新) 한국 건설’을 기치로 내걸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취임 즉시 ‘사정 한파’가 몰아칠 것을 예고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공직자 재산공개로, 현재까지 입법·사법·행정부 고위공직자들의 재산변동 내역이 매년 공개되는 시발점이 됐다.김 전 대통령은 공직자 재산공개를 시작으로 감사원을 동원해 청와대,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검찰 등 사정기관에 대한 사정에 나섰으며 이들 사정기관을 동원해 사회 지도층 비리를 포함한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총체적 사정’도 벌였다.하지만 정권 말기들어 정작 자신의 차남인 현철씨가 알선수재·조세포탈 혐의로 구속수감되면서 김 전 대통령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일도 나타났다. 또 자신의 최측근이자 ‘개혁 실세’로 지칭되던 최형우 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이 아들의 대입 부정으로 물러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정진욱기자

민선 지방자치 전면 시행… ‘분권시대’ 부활...전두환·노태우 구속… ‘신군부 쿠데타’ 단죄

우리나라의 민선 지방자치가 부활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요 업적 중 하나다.지방자치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시작했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 1960년 선거를 끝으로 지방의회가 폐지됐다.김대중·김영삼 두 정치지도자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지방자치 부활을 줄기차게 정부에 요구했으며 1990년 3당 합당 후 여당 지도부가 된 YS는 야권과 협상을 통해 민선 지방자치 부활 로드맵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이에 따라 1991년 3월과 6월에 지방의회선거가 실시, 지방자치시대가 부활을 알렸다.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당 총재 시절 약속대로 지방자치 전면 시행을 준비했다.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됐다. 김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검찰에는 재수사를 명령했다. 검찰은 같은해 11월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고강도 수사에 들어갔다. 수사 착수 22일 만인 1995년 12월21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신군부 핵심 관련자들과 함께 구속기소됐다. 12·12와 5·18에 대한 책임 규명은 물론, 두 전직 대통령의 부정 축재까지 드러났다.12·12 사태는 명백한 내란이었으며 5·18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사안에 대해서도 두 전직 대통령의 내란 목적 살인죄가 인정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한 것 도 김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정진욱기자

‘야구의 제왕’ 대장정 마무리… 모두가 빛났다

동호인 야구 최강을 가리는 제1회 수원컵 전국사회인야구대회가 30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22일 폐막했다.국민생활체육 수원시야구연합회와 경기일보가 공동 주최하고, 수원시와 수원시의회, 수원시생활체육회, 프로야구 kt wiz가 후원한 이번 대회는 메이저 32개 팀과 마이너 32개 팀 등 총 64개 팀이 참가해 지난달 24일부터 토너먼트 형식으로 기량을 겨뤘다. 22일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에서 치러진 메이저리그 결승에서는 ‘트위스터’가 ‘매니아’를 8대4로 따돌리고 원년 챔피언이 됐다. 결승전에서 3타수 1안타 1득점을 올린 이원춘(트위스터)은 대회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했다. 또 앞서 열린 마이너리그 결승에서는 ‘수원 창공’이 ‘생각연구소’를 12대4로 누르고 초대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결승서 선발로 등판해 4이닝 3실점으로 승리를 따내고, 타격에서 5타수 2안타 3타점을 기록한 임봉춘(수원 창공)은 대회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KT&G 야구장에서 열린 3·4위전에서는 마이너리그 ‘타이거즈’가 ‘푸름이사회야구단’을 10대7로, 메이저리그 ‘제임스모터스’가 ‘카사노바’를 7대5로 각각 제압하고 3위를 차지했다. 메이저리그 ‘굿프렌즈’와 마이너리그 ‘푸름이사회야구단’은 페어플레이상을 받았다. 개인 부문서는 마이너리그 수원 창공 손형백이 타격왕(0.857), 변대수가 홈런왕(2개), 임봉춘이 방어율왕(2.03)에 올랐으며, 생각연구소 이충현이 다승왕(4승)을 차지했다. 메이저리그에선 매니아 김민엽이 타격왕(0.700), 트위스터 김현중이 홈런왕(2개), 매니아 김민엽이 방어율왕(0.62), ‘제임스 모터스’ 김익준이 다승왕(3승)에 올랐다. 이번 대회 각 리그 우승팀과 준우승팀에게 트로피와 함께 각각 350만원, 200만원의 상금이 주어졌으며, MVP와 타격왕, 다승왕, 방어율왕, 홈런왕에게도 트로피와 함께 30만~50만원의 상금이 수여됐다. 이순국 경기일보 사장은 시상식에서 “64개팀이 참가해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4주간의 열띤 경기를 펼치는 동안 안전사고 없이 막을 내리게 된 데 대해 참가팀 모든 선수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대회 기간에 함께해 주신 동호인과 가족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조성필기자

새로운 천년 미래와 마주서다

“경기도를 전체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새로운 천년에 대한 비전을 종합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2018년 경기 천년을 앞두고 50여 명의 석학과 전문가들이 참가하는 학술대회를 주최한 강진갑사진 경기학회장의 자평이다. 강 학회장은 수 년 전부터 경기지역 사회문제 연구하는 학회 구성을 추진, 지난 4월 교수와 전문가 15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경기(京畿)학회’를 출범시켰다. 초대 학회장으로서 학회 창립과 동시에 수 차례의 학술회의를 치른 강 회장은 최근 본보와 함께 ‘2015 경기천년 학술대회’를 진행하면서 불과 1년 만에 학회를 널리 알리고 향후 운영 방침을 공고히 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어떤 고민에서 출발했을까. 이와 관련 강 회장은 “‘경기’라는 제도가 한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018년(현종 9)으로 불과 3년 후에 경기 천년을 맞이하는데 경기도의 정체성조차 확립하지 못한 분위기였다”면서 “이를 정리하고 미래 비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경기학회의 한 책임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에 학술대회는 경기도를 크게 2개의 축으로 구분해 진단하는 것으로 구성했다.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적으로 지난 역사를 살피고 미래를 제시했고, 공간적으로는 시민사회와 문화유산 등 내부를 살피고 남북관계와 세계 등 외부를 동시에 고려했다. 강 회장은 “학술대회가 열린 파주는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경기도에 속한 땅으로 장소적 의의가 있다”면서 “참가자들이 함께 도라산 전망대에 올라 북한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조선시대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내던 사당인 연천 숭의전에서 미래 비전을 고민하는 등 탁상공론에서 벗어난 학술대회로 치를 수 있어 기뻤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또 “앞으로도 교수, 연구원, 공직자, 도민 등 경기도의 사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함께 행복한 지역을 만들기 위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류설아기자

“경기남부법무타운 조성 반드시 이행을”

범시민 경기남부법무타운 조성촉구 및 안양교도소 재건축 반대 추진위원회는 지난 20일 오후 안양교도소 앞에서 재건축을 시도하는 법무부를 상대로 궐기대회를 가졌다.이날 궐기대회에는 이상호ㆍ전규중ㆍ조용덕 범추위 상임공동대표단을 포함해 이필운 안양시장, 천진철 안양시의회의장, 강득구 경기도의회의장, 이석현ㆍ심재철ㆍ이종걸 국회의원을 비롯한 지역정치인들과 시민단체 및 시민 500여명이 참석했다.전규중ㆍ조용덕 상임공동대표의 대회사 및 규탄사로 시작된 궐기대회에서 이필운 시장은 “국책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 창조경제모델 사업인 경기남부 법무타운 조성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천진철 시의회의장, 강득구 도의장의 인사말 및 결의문 낭독이 계속됐고 국회의원들도 안양교도소는 반드시 이전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범추위 공동대표 허현미 안양시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회장은 촉구결의문을 통해 “지역 주민의 염원을 짓밟는 법무부의 이기적인 행태를 규탄한다”며 “법무부 장관은 경기남부 법무타운 건설에 적극 협조하라”고 요구했다. 또 범추위 공동대표단은 청와대를 향해 이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기획재정부와 법무부의 갈등지역의 염원을 외면하는 법무부의 행태를 조정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대통령 밖에 없다”며 “의왕ㆍ안양시민들의 염원을 해결해 달라”고 밝혔다.한편 범추위는 오는 27일 오후 과천 정부청사 법무부 앞에서 1천여명의 시민들과 함께 제2의 궐기대회를 개최할 방침이다. 안양=양휘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