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며 읽는 동시] 마지막 가족사진

마지막 가족사진 최영재 1950년 1월 1일 아버지는 두 아들을 끌어안고 엄마는 9개월 된 딸 품에 안고 싱긋 웃으신다 단란한 둥지 일곱 달 뒤 터질 시한 폭탄이 우리 집에 장착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부모님은 저렇게 웃기만 하신다 째깍 째깍 째깍 아프지만 소중한 보물 어느 집이고 간에 가족사진 한두 장씩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들여다보고 싶은 사진은 가족사진이 아닐까 싶다. 온 가족이 모여 앉은 그 사진만큼 눈길을 끄는 사진도 없으리라. 헌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가슴 아픈 사진도 있게 마련. 최영재 시인은 6.25 직전에 찍은 가족사진을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신 아버지를 회상하게 하는 가슴 아픈 가족사진이다. 시인의 부친 최영수 옹은 당시 경향신문 출판국장으로 소설가, 수필가, 만화가, 영화인으로 이름을 날리셨던 분. 납북 도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주동자로 처형당하셨다. 최신인의 가슴엔 그 아픈 기억이 대못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이 동시는 그래서 ‘눈물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찌 최시인 한 사람의 사진뿐이겠는가. 전쟁 중에 북으로 끌려간 수없는 이들의 가족사진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오늘의 자유와 평화가 있기까지 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달이다. 상처는 낫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법. 가끔은 덧을 내야만 잊지 않는다. 최시인의 마지막 가족사진이 이를 말하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까치집

까치집 유응교 높다란 나무 위에 사뿐히 지어진 집 태풍이 불어와도 그대로 끄떡없네 목수도 저리 튼튼히 지을 수는 없을걸 너그러움·여유 속 튼튼해지는 관계 까치들은 왜 집을 공중에 지을까? 어렸을 적 하도 궁금해 선생님께 여쭤봤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시더니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 높은 곳에다 짓는다고.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또 질문했다. “선생님, 까치집은 태풍에도 날아가지 않아요” 그러자 선생님은 또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까치들의 조상은 원래 목수였단다.” 이 동시조를 읽으면서 어린 날의 추억을 되새겨 봤다. 맞다! 태풍이 불어와도 끄떡없는 게 까치집이다. 사람들이 지은 집은 무너질지언정 엉성해 보이는 까치집이 무너졌다는 뉴스는 들어본 적이 없다. 시인은 그 엉성해 보이는 까치집에 시선을 줬고, 이를 독자들에게 주목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까치집이 엉성하지 않다면 태풍 같은 센 바람에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엉성한 덕분에 바람이 빠져나갈 틈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비쩍 마른 나뭇가지와 진흙 한 덩이로 짓는 저 까치집! 그건 그 어느 가옥보다도 튼튼한 성채가 되는 것이다. 인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그러움과 여유를 지녔을 때 인간관계가 원만해지는 법. 시인이 까치집을 통해 얘기하고자 한 것도 여기에 있지 싶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길고양이

길고양이 김경은 할머니 시골집에 길고양이 가족 살아요 낮에는 해님 피해 평상 밑에 숨었다가 별님이 찾아오면 달리기 경주해요 작은 바람 소리에도 꾸르륵 꾸르륵! 있는 힘 다해서 가족을 지켜요 온정 가득한 ‘할머니 집’ 길고양이는 길에서 사는 고양이다. 그러니까 길이 집이다. 왜 길에다 집을 마련했을까? 이 동시는 길에서 떠돌던 고양이가 시골 할머니 집에 와서 사는 이야기를 담았다. 여기서 독자들은 할머니의 따듯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길고양이네 가족이 정 붙이고 살 만한 할머니 집을 찾아낸 끝에 보금자리를 틀었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낮에는 해님 피해/평상 밑에 숨었다가/별님이 찾아오면/달리기 경주해요’. 고양이의 일상을 보여주는 이 대목이 숨어 지내는 길고양이의 슬픔을 말해준다. 그와 함께 이런 길고양이를 숨겨주는 할머니의 마음도 짐작하게 해준다. ‘작은 바람 소리에도/꾸르륵 꾸르륵!/있는 힘 다해서/가족을 지켜요’.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같다고 본다. 할머니는 길고양이의 이런 아름다운 가족애를 지켜보다가 길고양이네 가족에게 전세니, 월세니 그런 것 따지지 않고 무상으로 집을 내줬을 것이다. 사는 날까지 맘 편하게 살라는 당부와 함께. 한 세상을 함께 사는 것! 그건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도 그리고 저 푸른 자연과도 같은 얘기가 되는 거 아니겠는가. 시인은 시와 시조를 넘나드는 것도 부족해 얼마 전부터는 시 낭송가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져 줍니다

져 줍니다 손동연 해가 집니다. 아니, 져 줍니다. 그래야 달이 돋거든요. 별들도 또랑또랑 눈 뜨거든요. 기다림의 미학 ‘어린이가 좋아서/동시를 씁니다./동시가 좋아서/어린이로 삽니다.’ 이는 50년을 동시 하나만 써온 손동연 시인의 인생철학이다. 그는 정말이지 어린이가 되고 싶어서 처음부터 동시를 썼고, 결혼식도 어린이날에 했다. 이쯤 되면 진짜 ‘어린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이 동시다. 그는 해가 지는 것을 ‘져 준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을 과연 어른이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다 져 주는 까닭도 또렷이 밝혔다. 달을 돋게 하기 위해서 져 주는 거라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별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져 주는 거라고 했다. 남을 위해 뭔가 해준다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으리라. 시인은 이를 저 하늘의 해를 통해서 ‘또랑또랑’ 말하고 있는 것이다. 5월은 어린이날이 있는 달이다.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홍성훈 회장)에서는 5월1일을 기해서 5개의 아동문학단체와 함께 제22회 ‘아동문학의 날’ 기념식을 갖는다. ‘어린이 사랑의 마음으로 동심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자’는 귀한 뜻이 담긴 의미 있는 행사다. 바라건대, 이 아름다운 행사가 우리 사회의 정풍(整風) 운동으로 확산되어 어린이들이 보다 밝고 힘차게 자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엉덩이가 불쑥

엉덩이가 불쑥 김흥제 누워있던 아가 어느 결에 획 뒤집었다. 고개 번쩍 들고 둘레둘레 보다가, 두 손에 힘주고 고개를 더 번쩍. 그러다, 머리 숙이더니 엉덩이가 불쑥 하늘로 솟았다. 두 다리로 힘주지만 아직은, 배밀이만 한다. 아기 몸짓·손짓에도 행복 가득 인간이 두 발로 선다는 것! 그것처럼 위대한 일도 없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데에는 바로 ‘직립’의 자세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동시는 아기가 제 힘으로 일어서려는 안간힘의 동작을 담았다. ‘고개를 번쩍 들고/둘레둘레 보다가,/두 손에 힘주고/고개를 더 번쩍’. 한마디로 귀엽다. 아기의 저 안간힘이 읽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자식을 길러본 엄마 들은 이를 잘 보았을 것이다. 제 홀로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러다, 머리 숙이더니/엉덩이가 불쑥/하늘로 솟았다.//두 다리로 힘주지만/아직은, 배밀이만 한다.’ 아기의 배밀이 동작은 그렇게 새롭고 신기하기만 하다. 엄마들은 이를 지켜보며 거기서 삶의 행복을 느낄 것이다. 비록 가난한 살림일지라도, 설혹 걱정거리가 있을지라도. 집사람은 지금도 아이들 키울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흐릿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며 종종 미소를 짓는 것을 본다. 맞다!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 하나하나가 온 집안의 웃음이었고 행복이었으니까. 언제부턴가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게 아이의 울음소리다. 그러니 인구 감소는 너무도 당연한 일.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웃의 아기 배밀이 소식이 자못 기다려진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목련

목련 김명숙 봄비에 목련꽃 눈 떴다. 땅거미 내리는 골목에 하얗게 하얗게 목련꽃등 달았다. 우산도 없이 회사에 간 아빠 돌아오실 골목 어귀에 우산 들고 기다리는 나처럼 꽃등 환히 밝히고 서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목련은 볼수록 귀하고 탐스럽다. 부잣집 도련님 같다고나 할까. 어느 한 군데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넉넉한 꽃이다. 김명숙 시인은 봄비 속의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봄비에/목련꽃 눈 떴다’. 목련꽃을 깨운 건 봄비였다고 첫 연을 시작한다. 그런데 목련에게는 반가운 봄비지만 나에겐 걱정도 하게 하는 봄비다. 왜냐하면, 우산도 없이 회사에 간 아빠 때문이다. 그래서 우산을 들고 골목 어귀로 나가 아빠를 기다린다. 그런데 아빠를 기다리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다. 목련도 꽃등을 환히 밝히고 아빠를 기다린다. 이 동시의 매력이다. 시인이 사물을 보는 눈이 매서우면서도 따듯하다. 기다림은 인생살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삶의 과정 중 하나다. 우린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기다림을 반복하고 있는가. 어릴 적 서울 이모 집에 다니러간 엄마를 하룻밤 내내 울면서 뜬눈으로 지새운 경험을 필자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 동시는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을 통해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우리 모두의 심정을 돌아보게 한다. 때는 바야흐로 목련꽃이 한창이다. 여러분 중에도 목련꽃 그늘 아래서 누구를 기다려본 경험이 있으실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지하철

지하철 김옥애 땅 아래 어두운 길을 달리는 기차 지하철 창문에 군데군데 시가 써져 있다. 글과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이 써져 있다. 기차도 시를 읽으면서 달린다. 소박한 詩의 매력 기차도 시를 읽으면서 달린다. 시를 만나는 일은 즐겁다. 강을 끼고 도는 산책길에서, 등산 입구에서, 시민공원에서,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시도 그 중 하나다. 잠시 전동차를 기다리는 동안 만나게 되는 시 한 편. 길지 않아서 좋고, 어렵지 않아서 좋은 시 한 편. 어린이도 할머니도 함께 읽고 즐길 수 있는 시 한 편. 이는 그 어느 책 한 권 분량의 독서량을 능가할 수도 있다. 시인은 바로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소위 ‘스크린 시’를 작품화했다. 본대로 그냥 적었다. 그 어떤 수식도, 치장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맛이 난다. 맨 마지막 구절 덕분이다. ‘기차도 시를 읽으면서 달린다.’ 이 구절이 없었다면 굳이 여기에 소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시는 이래야 한다. 편하게 읽다가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그 뭔가를 지녀야 한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시라면 더더욱 그렇다. 시를 읽으며 달리는 기차는 얼마나 멋질까? 아니, 향기로울까? 아니아니, 그 기차를 타고 가는 승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시인은 동시뿐 아니라 동화작가로도 이미 일가를 이룬 원로작가다. 그동안 장편동화 9권, 단편동화집 8권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강진군 중저 마을 바닷가에서 오로지 작품을 쓰며 멋진 인생 후반부를 즐기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이름 스티커

이름 스티커 노은희 반짝반짝 엄마 화장대 위 살짝 붙인 이름 스티커 척척박사 아빠 컴퓨터 뒤 몰래 붙인 이름 스티커 귀여운 동생 짱구 이마에도 꾸욱 눌러 붙인 이름 스티커 모두 다 내꺼! 밉지 않은 욕심쟁이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싶다. 그게 아이들의 마음이다. 소유욕! 그렇다고 그 소유욕이 어른들의 소유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동시는 그런 맑은 소유욕을 보여준다. 엄마의 화장대, 아빠의 컴퓨터에 제 이름 스티커를 몰래 붙여 놓고 좋아한다. 거기서만 멈추지 않고 동생의 이마에도 제 이름 스티커를 꾸욱 눌러 붙였다. 장난기도 보통 장난기가 아니다. 하지만 밉지 않다. 그러니 나무랄 수는 더더욱 없다. ‘모두 다 내꺼!’. 제 이름 스티커를 붙여 놓고 만세를 부르는 아이의 모습이 왜 그리도 귀엽고 어여쁜가.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일 것이다. 어릴 적 이웃에서 함께 뛰놀던 대성이란 친구 생각이 난다. 대성이는 뒷산의 소나무 가운데서 가장 멋들어지게 생긴 소나무에다 제 이름 석자를 붙여 놓고 좋아했다. 자기 소나무라는 것이다. 소나무만이 아니었다. 저녁에 제일 먼저 밤하늘에 나오는 별을 자기 별이라고 우겼다. 심지어 하나뿐인 달도 자기 달이니 함부로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별명이 ‘못 말리는 욕심쟁이’였다. 그 대성이도 살아 있다면 나처럼 80줄의 늙은이가 됐을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억울함

억울함 정두리 우리 식구들은 내가 걸핏하면 울고 떼쓴다고 한다 치, 아니다 툭하면 아무 때고 그러는 거 아니거든 내 말 무시하면 그러는 거지 지금처럼 그렇게 말하면 정말 울게 된다고 부끄럽고 억울해서 그러는 거잖아. 아이를 존중하며 대우하자 아이가 울 적엔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다. 몸이 아파서 울거나, 배가 고파서 우는 경우는 말 못 할 아기일 때지만 조금 커서 운다면 여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동시는 자기를 무시하는 데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네가 뭘 알아?”, “어른들 얘기하는데 왜 끼어드니?”, “넌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 등등. 무시당하는 일처럼 억울한 게 어디 또 있을까.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저 부끄럽고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를 마음 아프게 생각한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란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고 외친 거 아닌가. 그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곤 하나 아직도 우리 주변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어린이 학대’가 사회 문제로까지 등장하는 게 현실 아닌가. 몇 해 전, 이 지면을 통해 발표한 동시를 한 출판사에서 책으로 펴낸 바 있다. 그 책 제목이 ‘아이의 마음이 길이다’였다. 때 묻지 않은 아이 마음만이 행복한 세상을 가져온다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그 첫걸음은 바로 각 가정에서 아이를 울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이를 존중하며 대우하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옷을 개면서

옷을 개면서 최영재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서 다 마른 옷 저녁이 되어 내가 갠다. 여러 옷 중에 가장 오래 되어 만지면 엄마 살 같은 엄마 집 바지 집안일이 많아 쉬지 못하는 엄마의 다리와 허리 잠시나마 쉬라고 토닥토닥 잘 접어놓는다. 오직 가족을 위한 삶 어릴 적, 우리 집 옷 가운데서 가장 헌 옷은 엄마 옷이었다. 엄마는 당신의 옷을 살 줄 몰랐다. 그러다 보니 늘 헌 옷이었고, 제일 낡은 옷이었다. 최영재 시인의 집안도 그랬던 모양이다. ‘여러 옷 중에 가장 오래 되어/만지면 엄마 살 같은 엄마 집 바지’. ‘엄마 살 같은’이 가슴을 울린다. 이 동시의 가장 빛나는 구절이다. 비바람에 튼 나무 등걸 같은 엄마의 살결 그리고 엄마의 옷. 지난날의 엄마들은 대체로 그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옷이었다. 어디 옷뿐인가. 온갖 것들이 오직 가족을 위한 삶이었다. 한마디로 바보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았기에, 아니 그렇게 견뎠기에 오늘의 우리들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집안일이 많아 쉬지 못하는/엄마의 다리와 허리/잠시나마 쉬라고/토닥토닥 잘 접어놓는다.’ 엄마를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이 그지없이 기특하다. 효란 이런 것이다. 결코 거대하거나 화려한 것만이 아니다. 마음보다 더 큰 효도가 어디 있을까. 지난날에 비하면 요즘엔 엄마의 할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밥하는 것도 그렇고, 빨래하는 것도 그렇고.... 참으로 다행스럽다. 여자가 떠안았던 저 바윗돌 같은 세월을 다시는 안겨주지 않아야 한다. 이 동시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넥타이

넥타이 박재성 매일 아침 엄마가 아빠의 목을 끈으로 묶는 것을 보며 나는 아빠가 오늘도 무사하기만을 바란다 아빠의 출근, 엄마의 손길, 아이의 시선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이 동시의 매력이다. 엄마가 아빠의 목에 넥타이를 매주는 것을 요렇게 썼다. 동심이란 이런 것일까? 그런데 아이의 마음이 조금은 수상스럽다. 어떻게 끈으로 목을 묶는다는 끔찍한 생각을 다 했을까? 이건 시인이 아이를 내세워 ‘웃음’을 자아내고자 꾸민 일종의 연극(?)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어른인 시인이 아이의 동심을 슬쩍 훔친 것이다. ‘나는/아빠가/오늘도 무사하기만을/바란다’. 아이는 이미 아빠의 ‘무사함’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무사하기를 바란다? 이 능청스런 구석을 나무라야 할지 어떨지. 넥타이는 병사들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 천을 목에 두르면서 시작됐다 한다. 이를 예쁘게 본 누군가가 패션용으로 착용하면서 오늘날의 넥타이가 됐다고. 창고 안에 들어 있던 옥수수들이 포탄 세례를 받아 일제히 팝콘이 되어 하늘로 치솟는 저 ‘웰컴 투 동막골’ 영화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아침마다 아빠의 출근을 도와주는 엄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이를 통해 이 가정의 화목을 보여주는 재미난 동시다. 이 동시를 읽은 뒤부터 나는 넥타이를 맨 이들을 보면 혼자 슬며시 웃는다. 저 집 아이도 저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첫 눈

첫 눈 김구슬 첫 눈 내린 아침 마음 설레 들판을 향하니 눈 길 얼어붙을까 어느새 들판엔 눈 사라졌네 고개 들어 먼 산에 눈길 보내니 산등성이 하얗게 눈부시네 아기가 처음 바라본 첫 세상처럼 ‘처음’은 한없이 설레고 신기한 것 나뭇가지에 숨어 있던 솜털 눈꽃 세상 향한 아기의 첫 눈짓처럼 바람 스치자 놀란 듯 인사하네 첫 눈은 참 신기하고 참 따뜻하네 나부터 새롭게 태어나자 첫 눈은 첫 사랑만큼이나 가슴이 설렌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보았을 때처럼, 푸른 바다를 가르며 치솟는 해를 보았을 때처럼, 산사의 종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가슴이 설레면 눈빛부터 달라지고 온몸 또한 떨린다.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동시는 첫 눈을 통해 ‘처음’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아기가 처음 바라본 첫 세상처럼/‘처음’은 한없이 설레고 신기한 것”. 세상에 나온 아기의 눈에 비친 첫 세상. 그건 물에서 금방 건져 올린 거울이거나 달 같은 게 아닐까. 신이 처음 세상을 만들어 내보냈을 땐 이처럼 티 없이 맑고, 티 없이 깨끗한 ‘신기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그 깨끗함을 더럽히다 보니 오늘의 이 탁한 세상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나뭇가지에 숨어 있던 솜털 눈꽃/세상 향한 아기의 첫 눈짓처럼/바람 스치자 놀란 듯 인사하네’. 며칠 후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새해엔 우리 모두 ‘아기의 첫 눈짓’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한다. 그러면 세상의 온갖 것들은 새롭게, 신기하게 깨어나리라. 새벽에 깃을 터는 새들처럼. 중요한 건 나 자신에 달려 있다는 것. 나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새해가 아니겠는가.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화난 양말

화난 양말 윤영훈 아무렇게나 던지지 말아줘 네가 가는 곳이면 네 발을 안고 감싸고 다녔잖아 집에만 오면 왜 모른 척 시침을 떼지 너, 정말 미워 죽겠어 양말처럼 내팽개쳐지는 서러움 양말이 화를 낸다? 이럴 수가!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런데 말이 안 되는 이게 왜 마음을 자꾸 잡아당기는지 모르겠다. 이 동시는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이 되게 만들었다. 시인의 놀라운 시안(詩眼) 덕분이다. 발은 손과는 달리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신체의 일부다. 그런데 알고 보면 발처럼 수고하는 것도 없다. 발이 없으면 육신을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양말은 그 발을 안고 감싸는 이를테면 ‘보호막’이다. 그런데 발조차 양말을 업신여긴다. 집에만 오면 다시는 안 볼 듯이 내팽개친다. 이러니 양말이 화를 낼 수밖에. 우리 사회에도 양말 같은 사람들이 있다. 실컷 할 일을 해주고도 대우는커녕 언제 그랬냐는 듯 내팽개쳐지는 사람들. 그들 입장에서는 화가 나도 보통 나는 게 아니다. 이 동시는 양말을 통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준다. ‘아무렇게나 던지지 말아줘’. 저들의 목소리를 잊지 말자. 저들의 서러움을 모른 척하지 말자. 어려운 일을 보면 서로 돕고 기쁜 일은 서로 나눠 가지자. 나 혼자만 잘 사는 게 행복은 아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거다. ‘우리’라는 말처럼 좋은 말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족, 우리마을, 우리사회, 우리나라.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풀꽃

풀꽃 박병철 아무도 없는 들길을 홀로 걸으며 마른 풀숲에 겨자씨만한 눈을 뜨고 혼자서 피어있는 아주 조그마한 풀꽃을 보면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고 싶어요. 작디작은 풀꽃… 더 강인하여라 11월은 모든 초목이 시드는 계절이다. 여름내 기세등등하던 활기찬 모습은 간 데없고 쓸쓸하다 못해 초라해진다. 들녘이라고 다를 리 없다. 아니, 오히려 황량하기 짝이 없는 게 들판이다. 황금빛이던 너른 들이 바짝 말라가는 그 퇴화를 어찌 평상심으로 바라볼 것인가. 허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겨자씨만한’ 풀꽃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작은 생명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평소엔 잘 눈에 띄지도 않았던 풀꽃. 그러나 남들이 다 시든 마당에서야 자신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저 작은 풀꽃. 그래서 넙죽 큰절을 하고 싶다는 것. 그 작디작은 풀꽃 한 송이로 하여 들녘은 오히려 따뜻한 안마당일 수도 있다. 강정규의 동화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목발의 소녀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건물 꼭대기에 올랐을 때 달빛 아래 딱딱한 시멘트 바닥 사이에서 고개를 쳐든 민들레를 보고 마음을 바꾸는 장면이다. 세상에는 작은 존재들이 엄청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이 겨자씨만한 풀꽃을 보고 큰절을 하고 싶다고 한 것 역시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시인은 얼마 전부터 노래와 가요 연주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세월 속에서도 나이를 잊은 청바지 청년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엽서

엽서 김대규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열차를 타고 오렴. 간편하지만 묵직한 엽서 김대규 시인(1942-2018)의 고향은 안양이었다. 시인은 고향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그가 펴낸 회갑 기념 시선집 뒷면에는 고향에 대한 시 「엽서」가 인쇄돼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엽서’였을까? 엽서는 우체국에서 파는 가장 적은 금액의 편지인데다가 규모도 가장 작다. 무엇보다도 우표까지 인쇄돼 있어 글만 적어서 우체통에 넣기만 하면 되는 간편하기 그지없는 통신수단이다. 따라서 시인은 삼등열차가 서는 안양을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엽서에 비유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나의 고향은/급행열차가/서지 않는 곳.’ 안양은 서민의 열차인 삼등열차만 선다는 것이다. 그게 고향이라는 것이다. ‘친구야,//놀러 오려거든/삼등열차를/타고 오렴.’ 왜 하필이면 삼등열차를 타고 오라고 했을까? 안양이 시골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다! 안양은 그리 작은 시골이 아니다. 거기에는 ‘고향’의 의미가 더 있었을 것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작은 곳이다. 나지막한 산 아래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시냇물이 흐르고, 느티나무가 서 있는...거기 어린 날의 친구들이 모여 한밤중까지 뛰노는...필자의 동화집을 받고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줬을 때도 시인은 엽서를 사용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아기의 새벽

아기의 새벽 윤동주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아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아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주권 잃은 나라 독립 향한 열망 윤동주 시인(1917-1945)의 작품 속에서 골라본 새벽을 노래한 동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시인은 일제 치하의 어려운 시절을 살면서도 맑고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이 동시는 새벽과 아기를 하나로 연결 지은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한 동심을 노래한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팡파르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새벽은 어떻게 오는가? 시인은 묻고 있다. 아기가 젖 달라고 울어서 온다고 했다. 여기서 아기는 누군가? 필자는 이 아기가 단순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곧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니었을까? 온 나라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라는 메시지를 준 것은 아닐까? 잃어버린 나라를 도로 찾아야 한다고 외친 것은 아닐까? 일제의 삼엄한 눈을 피하려면 마음속의 하고 싶은 말을 꼭꼭 숨겨야 했을 것이다. 그 시가 바로 이 동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닭도 없고 시계도 없는 집은 곧 빼앗긴 나라를 의미한 것. 그래서 언제 새벽(광복)이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아기의 울음만이 새벽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 시인은 이 동시를 통해서 주권 잃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우리 민족의 궐기를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동시인가!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팔 하나로도

팔 하나로도 -우크라이나 전쟁 박두순 한 쪽 팔을 빼앗겨버린 소녀에게 물었다 얼마나 괴롭고 불편하냐고. 아니요 한 팔로도 별을 가리킬 수 있고 한 팔로도 엄마를 꼭 안을 수 있어요. 한쪽 팔로 가리킨 전쟁 참상 고발 지난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7개월이 지난 현재에도 멈출 줄 모른 채 계속되고 있다. 전쟁은 한마디로 끔찍하기 짝이 없다. 아무 죄 없는 어린이들까지도 전쟁의 화마에 희생당한다. 그 어린 것들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이 동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 쪽 팔을 잃은 어린 소녀를 모델로 삼았다. ‘한 쪽 팔을 빼앗겨버린/소녀에게 물었다/얼마나 괴롭냐고.’ 그러자 소녀가 대답했다. ‘아니요/한 팔로도/별을 가리킬 수 있고//한 팔로도/엄마를 꼭 안을 수 있어요.’ 아, 맞다! 한 팔로도 뭐든 할 수 있다. 두 팔을 가지고도 제대로 사람노릇 못 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별을 가리키기는커녕 별을 못 보는 불쌍한 이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끌어안아야 할 사람을 끌어안기는커녕 등지거나 밀어내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한 쪽 팔을 잃은 이 소녀는 두 팔을 가진 어른들을 향해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서운 동시를 본 적이 있는가? 전쟁의 참혹함을 이렇게 고발한 작품을 본 적이 있는가? 이건 어린이들이 읽어야 할 시가 아니라 어른들인 우리가 무릎을 꿇고 앉아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할 뉘우침인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엄마와 아기

엄마와 아기 김재수 까만 눈동자가 서로 만난다 엄마 눈 아기 눈 엄마와 아기 사이의 보이지 않는 무선 통신. 눈빛으로 전하는 사랑 세상에는 여러 말을 해야만 통하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대화가 있다. 바로 눈이다. 그 좋은 예를 우린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볼 수 있다. 이 동시는 엄마와 아기의 눈을 소재로 삼았다. 사랑스러운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만나는 엄마의 눈. 여기에 더 이상의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무선 통신’, 그렇다! 이보다 더 훌륭한 통신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성능 좋은 최신식 통신기라도 엄마와 아기 사이의 저 무선 통신을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건 성능 이전의 아름다움이요, 최상의 그림이다. ‘눈빛 대화’란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귀머거리인 아내에게 하루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는 남편이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동네 사람들이 물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그리 하느냐고.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집사람은 눈으로 다 알아듣는다”고. 눈은 언어가 다른 외국에 나가서도 통한다. 가벼운 인사에서부터 간단한 용무에까지도. 어디 인사뿐인가. 감사의 표시에도, 사랑의 마음까지에도. 엄마와 아기가 마주하는 저 눈을 ‘무선 통신’으로 본 시인의 눈이야말로 놀라운 성능의 눈이 아닐 수 없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반성

반성 함민복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강아지에 대한 사랑의 마음 요즘처럼 반려견이 흔하다 못해 발에 채이던 때가 있었나 싶다. 뭣한 말로 한 집 건너 반려견을 키운다. 아침 산책길에 나서면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이들로 길이 좁을 정도다. 어느 땐 반려견 때문에 산책로를 벗어나 딴 길을 택할 때도 있다. 가히 반려견 천국이다. 허나 이렇게 애지중지 여기는 반려견을 거리에 내다버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동시는 강아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았다. 강아지를 사랑하면서도 무슨 병균이 묻지 않았을까 싶어 손을 씻었던 그 마음을 반성하고 있다. ‘늘/강아지 만지고/손을 씻었다//내일부터는/손을 씻고/강아지를 만져야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이 이 동시의 매력이다. 여기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동시는 이래야 한다. 예쁘게 보이려고 이런저런 설명이나 치장은 금물이다. 함민복 시인의 작품은 어느 것이고 핵심만 찌르는 게 매력이다. 마치 주먹만 한 쇠뭉치로 거대한 종을 치는 것과 같다. 사방으로 퍼지는 종의 울림은 그 단순함에서 나온다. 그의 시 한 편, 한 편이 독자들의 심금을 오래도록 울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 울타리를 둘렀다//울타리가 가장 낮다//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그의 「섬」 또한 읽을수록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추석

추석 허정예 올 추석에도 엄마 혼자만 바쁘다 내가 좋아하는 깨송편 찜통에서 익어가고 고소한 기름 냄새 침이 꼴깍 게임하다 보면 어느새 아파트 지붕에 떠오른 둥근달 환하게 웃고 있다 할머니도 벽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환한 둥근달처럼… 엄마의 얼굴도 밝았으면 엄마는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존재였다. 예전엔 그랬다. 밥하고 빨래하고, 여기에다 청소까지. 하루 종일 종종걸음으로 집안을 누볐다. 어디 그뿐인가. 명절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이것 해놓으면 저것이 기다리고, 저것 해놓으면 어느새 식사 때가 되고. 오죽했으면 호랑이더러 명절 좀 깨물어가라는 말이 다 나왔을까. 이 동시는 추석 준비에 한창 바쁜 엄마를, 아파트 지붕에 떠오른 둥근달을 그리고 벽사진 속의 웃는 할머니를 하나로 연결하는 재미난 작품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다. 무엇보다도 둥근달을 내세워 추석의 의미를 되새겨주고 있다.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둥근달! 그 달은 어느 한 집 위에만 뜨는 게 아니다. 돌이네 집에도 뜨고, 순이네 집에도 뜨고, 억수네 집에도 뜬다. 달은 한 개지만 세상의 달은 수천, 수만 개인 것이다. 그 많은 달은 각자의 사연을 담고 있을 것이다.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명절이 오히려 슬픈 날이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할머니도 벽사진 속에서/환하게 웃고 있다.’ 시인의 이 구절은 세상의 모든 가정에 평화와 안식, 희망이 고루 내려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로 보였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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