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는 역사 속에서 사상, 지리, 국방 등 전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실학이 태동하고 발전한 곳이 바로 경기도였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과 도자기 등 화려한 문화유산도 경기도에 집중돼 있다. 이 같은 옛 경기도의 우수성을 되새기며 4차 산업혁명과 통일 등 대한민국이 맞이할 거대한 문명전환에 방향성을 제시해야 할 때다.이에 경기 새천년(2018년)을 앞두고 세계 인류사를 뒤흔든 경기도 문명원류 현장을 돌아봤다.■ 전 세계 구석기 연구에 대전환을 불러일으키다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전곡 선사유적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자 가장 큰 규모의 유적지이다. 현재 국가사적 268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形)의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세계를 뒤흔들었다.유적 발견 과정부터 드라마틱했다. 1978년 미군 병사 그렉 보웬은 풍광이 수려해 지금도 인기 있는 한탄강 유원지에 소풍 갔다. 그는 강변에서 돌 하나를 발견해 당시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이던 고(故) 김원용 교수에게 신고했다.이후 김 교수와 구석기학자인 영남대학교 정영화 교수 등으로 꾸려진 조사단이 지표조사를 하고 전곡리가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전기 구석기 유적임을 확신했다. 이를 저명한 프랑스 구석기 학자인 프랑소와 보르드 등의 국내외 학계에 알렸다. 이듬해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와 자연과학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2011년까지 17회의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긴 유적 조사 기간 동안 세계적인 구석기 고고학자들의 방문이 이어졌다.아프리카 선사 고고학의 태두였던 존 데스몬드 클라크, 유럽 구석기 고고학의 최고봉인 앙리 드 룸리 교수, 러시아 과학원 부원장이자 고고학계의 리더인 아나똘리 떼레비안코 박사, 미국 구석기 고고학의 리더인 잭 해리스 교수, 중국 구석기 고고학의 최고원로인 웨이 치 교수 등이다.저명한 이들의 방문은 전곡 선사유적지의 가치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주먹도끼는 타원형 또는 약간 길쭉한 모양의 돌을 양쪽으로 가공하여 끝이나 측면에 날을 세운 것으로서 이른 시기의 구석기시대에 출현한다. 프랑스 생따슐(St. Acheul) 지방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 석기 공작이다. 약 140만 년 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콘소 가둘라 유적에서 등장해 오랜 시간 지속하다가 약 10만 년 전쯤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타원형 또는 삼각형 모양으로 양쪽 면을 모두 고르게 손질하여 석기의 옆면이 마치 두 손바닥을 모은 모습을 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른 시기의 것들은 거칠게 가공한 것들이 많았지만, 점차 정형화된 것들이 많아졌다.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석기였기 때문에 흔히 ‘맥가이버 칼’로 부르기도 한다. 나무를 다듬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 내고, 고기를 발라내고, 뼈를 부수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에게는 ‘만능’ 석기인 셈이다. 특히 돌을 칼처럼 날카로운 도구로 사용하려고 다이아몬드 형태로 돌의 양쪽을 떼어낸 것으로, 고대 인류의 지능을 입증하는 유물로 유의미하다.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도 초기 아슐리안형이 많이 보이지만 석영 석재에도 불구하고 전면을 가공한 타원형의 주먹도끼가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가로날도끼도 상당수라는 점이다. 주먹도끼 이외에도 잘 다듬은 찍개와 피크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여러면 석기, 긁개, 홈날 등의 석기들이 출됐다. 전곡리 유적에서 이 주먹도끼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선사고고학자였던 모비우스 교수(H. Movius)는 인도의 동쪽 즉, 동아시아에는 양면가공을 하여 잘 만든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서양의 학자들은 그것이 곧 동서양 인종의 근본적 차이를 방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그러나 연천에서 출토된 주먹도끼로 그 주장은 힘을 잃었고, 세계 구석기시대와 주먹도끼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이 주먹도끼가 발견된 이후에 아슐리안 석기 공작을 재평가하는 수많은 논문이 나왔다. 현재까지도 동서양의 아슐리안과 아슐리안형 석기 공작에 대해 논쟁이 진행 중이다. ■ 가려진 시간을 상상하고 다가올 미래를 그려라전곡리 선사유적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밝히는 자료로 한국과 동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연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지역은 한반도의 지질을 남북으로 나누는 추가령 지구대의 남서부에 해당하는데, 한탄강은 이 지구대를 따라 흐르며 한강으로 흘러든다. 한탄강은 한때 계곡의 바닥을 이루었던 현무암 대지를 침식하여 깎은 단애 그 아래를 흐르고 있으며, 현무암 대지는 오랫동안 침식을 받은 낮은 구릉이 있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전곡리 유적은 신생대에 분류된 현무암반 위에 형성된 퇴적물 속에서 발견됐다. 현무암은 현재의 한탄강 상류인 북한 평강 지역에 있는 화산인 오리산에서 넘쳐흘러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강바닥을 덮었던 것이다.이 현무암은 신생대의 플라이스토세 후반인 50만 년 전에서 15만 년 전 사이에 몇 차례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곡리 유적의 바닥을 이루는 현무암은 50만 년 전의 것으로 연대가 확인됐다.현무암 위의 퇴적물도 옛날의 한탄강이 흘렀을 때 형성된 것이며, 이 퇴적물의 상부 점토층에서 석기가 집중되고 있다. 퇴적물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현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홍수가 범람했을 때 이뤄졌다는 학설, 멀리서 바람에 불려온 것이라는 설, 부근 지역에서 쓸려 내려 왔다는 설 등이 있다. 최근에는 시베리아나 중국의 북부 건조지역에서 날아온 뢰스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중 화산재는 화산이 폭발할 때 연기나 먼지처럼 나오는 작은 유리질의 물질이다. 성층권 이상으로 분출해 제트기류를 타면 바람에 날려 넓게 퍼져 나가 멀게는 수천㎞까지 떨어진 지점에 쌓이기도 한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세 가지 화산재도 일본 큐슈 지방의 화산에서 불어온 것이다. 화산재는 모양이나 성분을 가지고 기원 화산을 판단, 그 분출연대도 알 수 있다.전곡리의 최상층부에서 발견된 아이라 탄자와(AT) 화산재는 대체로 2만5천년 전에서 2만9천년 전 무렵이다. 지표하 1m 지점에서 발견된 키카이 토주라하라(K- tz) 화산재는 9만년 전에서 9만5천 년 전으로 알려졌다. 한반도의 백두산 화산재 중에도 45만 년 전으로 알려진 것이 있으며 전곡리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도 전곡리 유적의 점토층의 아랫부분에서 발견된 석기 공작은 35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조사를 통해 전곡리 유적은 적어도 10만 년 전보다도 훨씬 오래된 어느 시점에서 고인류가 서식했을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전곡리의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전문가들이 그리는 생활상은 이렇다. 전곡리를 비롯한 한탄강과 임진강 일대에 고인류들이 살고 있었을 때의 한탄강은 지금보다 넓었다. 물을 먹으려고 강에 내려오는 동물들을 사냥하고, 산과 들 그리고 강가에 자라는 식물들과 열매로 먹이를 구했다.겨울에는 추위를 막으려고 바람막이 움막도 지었다. 먹이를 따라 이동성 생활을 했다. 전곡리나 다른 유적에서 나오는 석기들은 모두 이들의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면서 남긴 것이다. 오늘날의 DMZ 안의 자연환경은 당시 고인류들의 생활환경을 짐작게 한다. 전곡리 유적의 어떤 지점에서는 수백 점의 석기가 나온다. 이를 두고 해당 지점은 분명히 동물을 도살하거나 사냥과 채집에 필요한 석기들 만들었던 장소로 본다. 일부 지점에서는 큼직한 자연 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냇가에서 여러 사람이 합동으로 옮긴 것으로 당시의 노동방식을 보여준다.그러나 왜 큰 돌이 필요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무한한 상상을 펼치게 한다. 경기도의 연천 전곡유적지는 세계구석기 연구의 대전환을 가져온 동시에 그 땅 위에서 이뤄진 구석기 인류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그 원류에서 새로운 대전환을 그려본다. 류설아기자 자료 제공 : 전곡선사박물관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우리나라가 위기를 극복하고 한 단계 도약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국민 모두가 갈등을 떨쳐내고 평창 올림픽을 위해 하나로 뭉쳐야 할 때입니다.”지난 2016년을 누구보다 바쁘게 보낸 스포츠 스타가 있다. 서른 다섯의 많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호령한 탁구 스타에서 지도자로 변신한 뒤 불과 2년 만에 모든 체육인의 꿈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인생의 3막을 살아가고 있는 유승민(35) IOC 선수위원이 바로 주인공이다.2004 아테네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출신으로, 지난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IOC 선수위원 선거에서 당당히 2위로 IOC 멤버가 된 유승민 위원을 지난달 30일 용인 삼성트레이닝센터에서 만났다.사실상 한국 유일의 IOC 위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유승민 위원으로부터 지난 4개월 간 IOC 위원으로 보낸 시간과 느낀 점, 평창 올림픽과 관련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유 위원은 IOC 활동에서는 ‘열정과 배움’을 평창올림픽에 대해서는 ‘희망과 도약’을 강조했다.- IOC 선수위원 당선후 IOC와 평창 동계올림픽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얘기했는데. 어떤 기술적인 부분은 내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조직위원회가 구성돼 많은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국민들이나 전 세계인들, 스포츠인들에게 IOC위원으로서 평창을 알리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지난달 평창 테스트이벤트인 ISU 쇼트트랙 월드컵이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처음 열렸는데, 그때 국내 하계올림픽 前 메달리스트와 올림픽위원 등 9명과 함께 현장을 방문했다. 동계올림픽이지만 하계종목 선수들도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함께 간 것이다. 앞으로도 평창의 현장을 더욱 자주 찾아서 격려하고 응원할 생각이다. - IOC 선수위원으로 4개월째 활동하고 있는데 다른 선수위원들과 어떻게 교류하고 있는지. 단체 채팅방도 있고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 선수위원회 및 분과위원회 7명을 포함해 총 21명의 위원들이 활동하고 있다.지난 주에도 화상회의를 했으며 필요할 때마다 스텝들에게 메시지가 많이 오는데 그럴 경우 전화로 직접 얘기하기도 한다. 독일의 하이데만 선수위원과 선거운동을 같이하면서 개인적으로 제일 친하다. 그 친구도 굉장히 열의가 있어 선거유세를 함께 다니며 자주 만나게 됐다. 선거기간 서로 격려도 하고 대화도 나누면서 결국 1, 2위로 함께 선수위원이 됐다. - 선수위원을 언제부터 꿈꿨고, 도전을 준비한 시기는 언제인가. 문대성 前 선수위원이 활동했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2011년도에 ‘피스앤스포츠컵’에 참가하면서 스포츠의 힘을 제대로 느끼게 됐다. 대회 취지가 스포츠를 통한 세계평화 증진으로 당시 나랑 북한 선수와 복식조를 맺어 우승했다.시합이 끝나고 나서 북측 임원들도 관심을 보였고, 역시 스포츠가 사람한테 주는 감동이나 메시지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드에서 후배를 양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IOC와 같은 큰 국제기구에서 선수로서의 경험을 살려 스포츠인과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하게 됐다. - 선수위원이 된 후 최근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스포츠 분야는. 현재 여러 커미션중 ‘마케팅’하고 ‘엔트라지’라는 커미션에서 활동하고 있고, 선수위원회가 갖고 있는 프로그램 중에서는 ‘Athletic Running-Gateway’라는 온라인 학습프로그램을 나와 이신바예바(러시아) 선수가 맡았다. 사실 서양의 스포츠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아시아, 특히 한국은 시스템 자체가 워낙 달랐기 때문에 저 때만해도 수업보다는 운동, 시합에 집중하는 세대였다.최근 우리나라도 공부하는 선수를 육성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데 IOC 내 선수들의 교육과 관련된 부분들을 우리 선수들이 활용할수 있게끔 노력할 계획이다. 특히 IOC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많이 갖고 있어 이 부분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또한 도핑이 현재 세계적인 이슈인데 우리나라는 아직 청정국가지만 앞으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은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이지만 스포츠 외교분야에서는 다소 뒤떨어져 있다는 평가가 많다. 스포츠 외교는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외교력이 떨어지는 측면보다는 스포츠 외교 전문가가 부족한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필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스포츠 외교 전문가와 행정 전문가의 인재들이 많아 나와야 한다. 내가 IOC위원이 됐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스포츠 외교력이 확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IOC위원 98명중 한 명일 뿐이다.아직 IOC위원이 한 명도 없는 국가도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스포츠 강국으로서 스포츠 외교분야도 충분히 잘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보고 우리 후배들이 스포츠 외교, 스포츠 행정에 관심을 가져 다양한 분야로 뻗어 나갈수 있게끔 기회를 마련해주는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최순실 사태에 평창 올림픽이 연루되면서 국민들이 많이 우려하고 있는데 준비에 차질은 없는지. 악조건인 것은 맞다. 현재 경기장이라든가 기반시설 등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문제가 없다. 내부의 준비상황은 조직위와 정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국민의 무관심이다.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 그 문제의 중심에 체육이 있다보니 체육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국민들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나부터 앞장서서 역할을 할 생각이다. 사실 국가적으로 이런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국제 스포츠 행사를 통해 국민들이 하나가 되고 단결이 된적이 많지 않나. 동계올림픽은 희소성이 있는 국제 대회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좀 더 평창올림픽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단결된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IOC 위원이자 평창 집행위원으로서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남은 1년동안 어떻게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정치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서로가 좋은 방향으로 함께 갈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정부와 정치권, 기업, 체육계, 국민이 모두 합심해서 치러야 한다. 우리 스포츠가 발전하려면 모든 분야가 함께 가야한다고 생각한다.우리나라 체육계가 변화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바로 평창 올림픽이 돼야 한다. 평창 올림픽이 잘 치러지면 세계인의 인식도 바뀐다. 한국 스포츠의 위상이 제고됨은 물론, 대한민국이 다시한번 국제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이번 평창 올림픽이다. IOC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나도 선수위원으로서 한국의 작은 도시인 평창이 올림픽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는지 당당하게 알릴 계획이다. - 유 위원을 롤모델로 삼고 꿈을 키우는 후배들이 많은데 당부하고 싶은 말은. 나도 해냈다. IOC 선수위원 선거에 나가기전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고, 선거하는 동안에도 될 확률이 없다고 주변에서 다 그랬다. 그러나 결국 만들어 냈다.나는 외국에서 학교를 나온 것도, 선수생활을 오래한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에 대한 도전ㆍ열정과 선수로서의 경험을 후배들과 체육인을 위해 써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 누구든지 선수위원에 대한 꿈이 있다면 꾸준히 관심과 열정을 갖고 노력해라. 반드시 이룰수 있을 것이다. 1982년 8월 5일부천 오정초·내동중-포천 동남종고-경기대1997년 최연소 탁구 국가대표 선발1999년 아시아청소년탁구선수권 단ㆍ복식 우승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복식 금메달2004년 아테네올림픽 단식 금메달(한국인 두번째)2006년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 은메달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단체전 동메달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단체전 은메달2016년 8월 IOC 선수위원 당선황선학ㆍ김광호기자 사진=전형민기자
의과대학교에 입학한 후 의학 교육의 진수를 경험하게 하고 미래에 의사가 될 것이라는 자부심을 처음 느끼게 된다는 해부학 실습 첫 시간, 조교 선생님의 지시로 포르말린으로 처리되어 비닐에 덮힌 시신 12구가 해부학 실습실로 옮겨졌다. 시신을 직접 다루는 해부학 실습에 대한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수다를 떨며 모여있던 학생들 모두가 시신을 처음 보는 순간 이내 충격에 휩싸였고 일부 여학생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곧이어 실습실로 들어오신 우리나라 해부학의 최고 권위자 권흥식 교수님은 칠판에 하얀 분필로 ‘생자필사 (生者必死) 사자필생 (死者必生)’을 적으시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여기에 죽어서 누워 계신 이 분들은 여러분의 해부학 지식으로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며 강의를 이어가셨다. 교수님의 추상과 같은 냉철함에 실습실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학생들은 시신 해부에 집중하게 되었다. 본과 3학년 내과학 강의 시간, 강의 시작전 병원 내과의 전공의 1년차 주치의 선배가 급히 강의실로 들어와 ‘여기 학생들 중 A형 혈액형을 가진 학생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신다. 이내 약 20명 정도의 학생들의 명단과 연락처를 받아 가신 후, 두 달 넘게 A형 혈액형인 의대생들은 병원으로 호출되어 헌혈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수이식을 받는 급성림프구성백혈병 환자를 살리기 위한 혈소판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이후 이 환자의 이식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동종골수이식 성공이라는 우리나라 의학사에 새로운 기록을 만들게 되었다. 백혈병을 연구하는 교수로서 어느 덧 2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죽음을 보아 오면서 젊은 교수 시절 죽어가는 수 많은 환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흘렸던 눈물도 점점 메말라 백혈병 환자의 치료, 삶,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무덤덤한 일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얼마 전, 모든 치료에도 불응하여 죽음을 앞두고 있는 한 환자가 ‘교수님, 제가 죽은 후에 시신을 기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가족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엄마의 임종을 준비한 것 같았다.남편과 어린 두 딸과의 이별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자신의 시신을 의학 발전을 위해 쓰일 수 있는지를 물을 수 있을까? 불현듯 해부학 실습 첫 시간의 교수님 말씀과 환자의 치료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전공의 선배의 모습이 다시 떠 올랐다.처음 의사가 되면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칠 때 모든 환자 생명에 대한 외경을 실천해야겠다는 열정적인 각오가 시간이 흐르면서 똑 같은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서서히 무뎌져 너무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백혈병 발병 후 삶의 많은 부분이 뒤틀어져 가족과 환자 모두 힘든 투병 생활을 해 오면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의연하게 말할 수 있는 모습은 우리가 고결한 인격을 갖춘 인간이기 때문 일 것이다. 권 교수님이 후학들에게 남긴 교훈, 한 명의 환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병원 밖으로 뛰어 나와 도움을 요청하던 선배, 그리고 임종을 앞둔 우리 환자의 마지막 소원은 지금 나에게 인간 생명에 대한 완벽한 경외와 끊임없는 연구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촌철 같은 교훈이 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다. 수많은 의혹, 갈등, 정도를 걷는 것에 대한 회의, 그리고 수많은 비정상적인 상황들….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 라는 말이 간단해 보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만큼 중요한 교훈은 없을 것이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고결함을 끄집어 낸다면 이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려 놓고 열정적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배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정도를 걷고 기본에 충실하며 주위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말이다. 김동욱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혈액내과 교수
얼마전부터인가 전국지자체들은 도시를 성장시키는 고민에 빠진 듯하다. 떠올리는 것은 인재양성과 육성이다. 지역의 중장기 계획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정리해본다. 인천은 항만과 공항이 함께 공존한다. 정부가 인천항을 세계적인 물류·해양관광 거점 항만으로 육성하는 ‘인천항 종합발전계획 2030’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9조원을 투입해 항만물류 강화와 인천항 주변거점지역을 연결하는 해양관광벨트를 구축한다는 내용이다. 해수부는 지난해 국립인천해양박물관 건립을 약속하고 인천시 역시 해양박물관건립 유치에 발 벗고 나섰지만 IPA와 부지제공 문제로 서로의 입장차이로 법정소송 진행중이다. 하지만 최근 IPA와 인천은 함께갈 고민들을 논의중인듯 하다. 인천시는 첫번째로 중구·동구 일대에서 추진하는 인천개항창조도시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인천내항 8부두와 개항장을 가로지르는 우회고가교를 철거(중구 우회고가교는 파라다이스호텔인천에서 인천내항 8부두를 끼고 경인전철·수인선 인천역 옆을 지나 북항을 연결하는 1.2km 길이의 고가도로) 하기로 했다. 이사업으로 인천역·차이나타운·개항장일대와 내항간 보행축 단절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이다. 이렇듯 인천은 여러 가지 계획과 발표와 논의들이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300만도시의 인천이 성장하는 길에 대해 신중히 고민할 시기다. 학생들을 위한 ‘실습선 도입 추진위원회’에 인천항도선사회, 인천항발전협의회등 인천지역 해양항만 관련 업계의 협력 계획하고 해양·항만·물류 등 해양 관련 분야의 국제해사대학 학사·석사과정을 제공하는 해기사 고등교육기관 설립이 바람직하다고 전석산 인천해사고 전문연구원이 제언하였다. 인천은 최초·최고·처음·시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하는지 잊고 있었던것은 아니었을까? 해양·항만이라는 좋은 자산을 잘 사용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시민들의 접근이 어려워 해양·항만이 남의 것이라 인식해서일까? 아니면 무관심일까? 인천의 성장을 위해서 일시적인 성과를 바라보는 랜드마크가 필요한지, 일시적인 경제성장을 바라볼 것인지, 지속가능성을 담고 시민의 삶의 질을 담는 계획을 만들 것인지 등은 향후 도시 성장의 밑거름이라 생각한다. 그 성장의 중심에 서두에서 거론했던 인재양성과 육성이 기반이 되어야함을 잊지말기를…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답에 가까이 가는 길은 우리는 알고 있다. 서로의 요구사항을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성장의 길이다. 상생을 위한 협업 속에서 정답을 찾아가길 바래본다. 전경희 인천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의. 파주시 진동면에 묘가 있다. 허준은 우리나라가 낳은 대표적인 명의·의학자로서 한의학 중흥의 거봉이자 동양의 의성으로 이름이 높았다.선생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내의원에 들어간 후 혜민서 봉사를 거쳐 전의로 발탁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어의로서 왕을 의주까지 모셨으며 1604년 호성공신3등에 1606년 양평군에 봉해졌다.또한 사후에 숭록대부에 올라 의인으로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복직되었다. 저서로는 동의보감, 언해두창집요 등이 전한다.16년의 연구 끝에 간행된 동의보감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청나라 등에서도 간행 보급돼 동양의학의 성전이 됐다. 그 동안 선생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 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됐다. 파주시 제공
현대인은 하루도 미디어 매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만큼 미디어의 역할과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 중 ‘권력의 제4부’라 일컬어지는 언론, 특히 방송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이 때문에 ‘방송법’ 제1조는 방송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방송의 공적 책임, 시청자의 권익보호와 공공복리의 증진을 선언하고 있다. 과연 우리나라 방송의 실태는 어떠한가? 최근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사태와 관련하여 방송사의 불공정하고 선정적, 편파방송은 그 도를 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사실인 양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여 혼돈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최순실 씨 등의 국정농단사태는 그 실체를 파헤쳐야 함은 당연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 소재도 철저히 규명되어야 마땅하다. 그 또한 언론의 역할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작금의 방송사 행태는 여러 측면에서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매일 같이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은 몇몇 평론가를 패널로 참여시켜 녹음테이프 틀 듯하고 있고, 국정조사 청문회가 있는 날이면 국회방송은 차치하고 모든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온 종일 생중계를 하고 있다. 물론 국민의 알권리 차원이라는 상투적인 이유로 말이다. 여과 없이 보여주는 생중계는 저질 국회의원들의 막말과 증인들의 불성실한 답변으로 오히려 국민들을 화나게 한다. 남 헐뜯기에 여념이 없고 사실을 왜곡하여 국론을 분열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게 방송의 민낯이다. 종편까지 가세하여 점입가경이다. 앞으로는 청문회 생중계는 지양하고 핵심사안만 정리해서 뉴스시간에 해설을 곁들여 알권리를 충족시켜 주는 방법은 어떨까. 열심히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조명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제시와 화난 민심에 위안을 주는 방송편성에 비중을 두는 것은 어떤가 말이다. 시류에 편승하여 시청률에 급급하다 보면 ‘공기(公器)’로서의 사명감을 망각하고 오히려 국민 여론을 호도하여 판단을 그르치게 할 우려가 크다. 대한민국 언론은 미국의 정치커뮤니케이션 학자 티모시 쿡(Timothy E. Cook)의 “지적처럼 공적 책임을 다하기 보다는 이벤트적이고 대중이 선호하는 뉴스를 좇아온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아야 할때다. 공정하고 균형 있는 방송을 기대한다.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서. 장기현 한세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 교수
전국의 건설현장에서 수십 차례에 걸쳐 일용근로자들의 임금을 떼먹은 악덕 건설업자가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됐다.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은 근로자의 임금을 체불한 혐의(근로기준법 위반)로 J씨(54)를 구속했다고 2일 밝혔다. 개인건설업자인 J씨는 지난 2012년부터 최근까지 서울과 경기, 충남 천안 등의 건설현장에서 50여 차례에 걸쳐 일용근로자의 임금을 지급기한보다 늦게 지급하거나 일부만 지급한 뒤 연락을 두절하는 등의 수법으로 근로자 13명의 임금 2천800여만 원을 체불한 혐의다. 조사 결과 J씨는 지난 2000년부터 임금체불을 일삼다 2005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이후 또다시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주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J씨는 대포폰을 사용했고, 경찰의 불심검문에서는 제3자의 신분증을 제출하는 등 고용노동부의 추적을 따돌린 것으로 확인됐다.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은 지난달 말 통신영장과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위치추적을 통해 평택에서 은신하며 지내던 J씨를 검거했다. 검거 당시 J씨는 사기 및 근로기준법 위반 등 8건의 혐의로 지명수배돼 고용노동부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조익환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장은 “피의자의 도피행태 및 고의적인 임금체불 등에 비춰볼 때 죄질이 매우 불량한데다 반성의 기미가 없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며 “앞으로도 고의적인 임금체불 사업주에 대해서는 엄정한 법집행을 통해 근로자의 근로조건이 보호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구재원ㆍ권혁준기자
자신이 교수로 있던 대학의 여성 조교를 추행한 혐의로 피소된 손태규 전 국회 윤리심사자문위원장(61)이 조건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수원지검 형사2부(이선봉 부장검사)는 강제추행 혐의를 받는 손 전 위원장에게 재범방지 교육 이수를 조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고 2일 밝혔다. 기소유예란 죄는 인정되나 범행 동기 및 범행 후 정황 등을 참작해 검찰이 기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손 전 위원장은 지난해 7월6일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던 경기도내 대학의 여자 조교 A씨를 강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등 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사건 발생 이틀 뒤 손 전 위원장을 경찰에 고소했고, 경찰은 같은 해 8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사건이 불거지자 손 전 위원장은 해당 대학에서 직위 해제됐고, 국회 윤리심사자문위원장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수원지검 관계자는 “손 전 위원장이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와 합의를 한 점 등을 고려해 재범방지 교육을 이수하는 조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관주기자
역사 속 인물 중 시대를 이끌며 널리 알려진 여성은 남성보다 적다.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규제했던 차별이 만연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성역(性域)을 뛰어넘은 여성은 언제나 존재했다. 전세계가 그 가치를 인정한 태교신기의 저자 사주당 이씨, 개혁 정신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실천했던 민회빈 강씨, 농촌계몽가였던 최용신 등이다.경기도의 지난 1천년 역사 속에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기고 시대 변화를 선도했던 여성들이다. ‘여성혐오’가 논란이 된 21세기, 그보다 더 성차별이 심했던 시대에 자신의 역량을 꽃피운 그녀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편집자주여성의 주체적 삶 제시한, 사주당 이씨조선시대 육아교육학자… 태교 지침서 ‘태교신기’ 펴내‘태교는 여성의 일’ 편견, 부부공동 참여 개념으로 확장사주당 이씨(師朱堂 李氏, 1739 ~ 1821)는 조선시대 ‘의학전문가’이자 ‘육아교육학자’로 불린다. 자신의 육아 경험에 옛 성현들의 유교 사상과 교리를 담은 경서(經書), 한의서, 교양서 등을 집대성해 동서양을 아우르는 최고의 태교 지침서를 펴냈다. 태교신기가 그것이다.삶은 녹록지 않았다. 관직이 없는 한미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후원 아래 여성 교양서부터 유교 경전까지 공부하며 학문을 익혔다.19세가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하고, 당시 적정한 혼인 연령을 훌쩍 넘긴 25세에 유한규(柳漢奎, 1719~1783)의 네 번째 부인이 된다. 양반 가문에서 ‘사취부인’이 된 사례는 찾기 쉽지 않은데, 이를 두고 사주당이 자신의 지적 욕망에 부응하는 선비를 배우자감으로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남편 유한규는 아내와 학문을 토론하는 삶을 살았다. 그 사주당 이씨 ‘태교신기’ 리고 1783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 자녀들과 함께 남편의 묘소가 보이는 용인시 모현면 매산리로 이사했다. 이후로도 학문에 정진하며 곧은 삶을 살았다. 그의 나이 62세인 1800년에 한문으로 지은 태교 지침서 ‘태교신기’가 방증한다. 1801년에 대학자로 기록된 아들 유희가 우리말로 음과 해석을 덧붙였다.책은 사주당이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였음을 드러내는 유물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강조한 태교는 미래 세대를 위한 가르침의 출발점이자 임산부가 사명감으로 임해야 할 도덕적인 개인 수양 ‘수신(修身)’이었다. 태교를 성리학적 가치를 실천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통해 여성이 도덕질서 속에 한층 발을 들여놓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한 것이다.또 태교가 여성의 일이라는 편견을 깨고 부부와 가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프로젝트 개념으로 확장시켰다. 특히 “스승이 10년 가르침이 어미가 잉태하여 열 달 기름만 같지 못하고, 어미 열 달 기름이 아비 하루 낳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기록, 남편의 역할을 중시했다. 공적 영역에서 남성들의 공식 표기 수단이었던 한자로 쓴 것도 유의미하다. 남성과 한문 교양을 갖춘 여성을 1차 독자로 설정해 성별 구도를 넘어 보편적 지식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이 책 외에도 사주당은 규합총서를 저술한 빙허각 이씨 등 주변 여성들이 주체적 삶을 살도록 이끌고 사대부 남성도 지도하는 등 조선시대 지식인층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사주당의 묘는 남편의 묘와 합장 돼 용인시 모현면 왕산리 산85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67호로 지정돼 있다.고난 속에서 백성 구한 여성리더, 민회빈 강씨청나라 볼모 속 탁월한 사업능력으로 막대한 부 축적조선 발전·백성 위해 힘써…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년~1646년)는 ‘탁월한 사업가’이자 ‘뛰어난 외교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여걸’ 등으로 불린다. 역사학자들은 그녀가 억울하게 사약을 받지 않고 살았다면 조선 제일의 국모가 됐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 능력을 인정한다.광명시 노온사동 아방리(능촌)에서 태어난 강빈은 1627년 9월 세자빈으로 간택돼 12월에 가래를 올렸다. 10년 후인 1637년, 병자호란으로 치욕의 항복을 겪은 후 국왕 인조를 대신해 소현세자와 온 가족이 인질로 청나라 심양에 간다. 식량난을 겪고 있던 청 조정은 세자관에 공급하던 식량을 끊고 농토를 내주며 자급자족하라고 지시한다. 암담한 상황에서 강빈은 실의에 빠지는 대신 본국에서 씨앗과 농사 전문가를 들여 오는 등 직접 나섰다. 심양의 시장에서 노예로 거래되던 조선인을 사서 농장을 일궜다. 쌀, 목화, 채소 등을 수확했고 남는 식량을 판매할 정도로 큰 이윤을 남겼다. 청 군대에 쌀을 판매하고 귀국 시 많은 쌀을 세자관에 남겨둘 정도였다. 민회빈 강씨 관련 발간 책자 담배, 종이, 인삼, 곶감 등 청에 귀한 품목을 들여와 판매하는 등 무역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재산을 불려 나갔다. 이와 관련 실록에는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이 막대한 부를 개인의 안위가 아닌, 조선의 발전과 억울한 백성을 위해 썼다.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을 속환(贖還, 노예에서 벗어나게 함)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그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불리는 이유다. 강빈은 또 청나라와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한편, 독일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Johanne Adam Schall)과 교류하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이 같은 활약은 인조를 불안케 했다. 청나라를 뒤에 업은 강력한 정적으로 본 것이다. 세자빈 내외는 1645년에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꿈꾸며 귀국했지만 ‘볼모’ 시절보다 더 끔찍한 시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귀국 두달 후, 멀쩡했던 소현세자는 횡사했다. 강빈 역시 1646년 인조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탔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았다. 1718년에서야 그 억울한 혐의를 벗고 세자빈에 복위됐다. 현재 광명시 노온사동 산자락에 자리 잡은 영회원(永懷園, 사적 제357호)에 누워 있다.농촌계몽운동에 청춘 바친 독립운동가, 최용신 농촌계몽운동 활약… 심훈作 ‘상록수’ 여주인공 실제모델문맹퇴치·농촌생활개선 앞장… 日 수탈에 교육으로 대항최용신(1909 ~ 1935)은 자신의 묘비명에 쓰인 ‘농촌계몽운동가’를 뛰어넘어 청춘을 오롯이 바친 ‘독립운동가’로 불린다. 심훈이 1936년에 발표한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으로 더 유명하다. 저자는 실제로 농촌 계몽 운동 현장에서 만난 최용신과 그녀의 활약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썼다.그녀는 원산 루씨여자보통학교 진학, 졸업 후 협성여자신학교를 다니며 농촌계몽운동의 뜻을 확고하게 굳혔다. 1928년 신문에 기고한 ‘교문에서 농촌으로’를 보면 그 의지가 드러난다. “중등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각각 자기의 이상을 향하여 각자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도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중략…)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泉谷)에 YWCA 농촌지도원으로 파견돼 농촌교육을 시작했다. 샘골은 현재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이다. 최용신은 부임하자마자 마을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샘골학원 인가부터 샘골예배당 부설 샘골강습소를 확대 개편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듬해 5월경에는 강습생이 점점 늘어나 110명에 달할 정도였다. 최용신의 모습 오전, 오후, 야간반으로 분반해도 지원자를 수용할 수 없는 형편에 달하자 강습소 증축계획을 세웠다. 그 해 8월 학부형 위로회를 열어 그동안 학생들이 익힌 솜씨를 보여주면서 증축계획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뜻을 모았다. 이후 마을 주민과 함께 샘골 뒷동산 솔밭 주인 박용덕이 기증한 1천52평에 증축 공사를 벌였고, 이듬해 1월 낙성식을 가졌다.아동은 물론 청년, 부녀자 등 모든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문맹 퇴치와 농촌생활개선 운동을 벌였다.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 농촌 사람들의 주체적인 의식을 일깨우며 일제의 수탈에 교육으로 대항하고자 한 것이다. 1934년 일본으로 가 고베여자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각기병에 걸려 6개월 만에 귀국, 다시 샘골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가 25살에 장중첩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수십 년이 흘러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1964년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한편 2007년 11월 최용신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그녀가 샘골강습소에서 가르쳤던 홍석필이 1억 5천만 원을 쾌척한 것으로 건립된 기념관이다. 류설아기자 / 자료제공 : 경기학연구센터, 용인문화유적전시관, 광명문화원
한국GM은 2016년 한 해 동안 내수시장에서 총 18만275대를 판매하며 2002년 회사 출범 이래 연간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고 2일 밝혔다. 한국GM은 지난 2015년 최대 내수 판매 기록인 15만8천404대에서 113.8%의 판매 신장을 기록하며 최대 실적을 갱신했다. 특히 지난달 내수 판매량은 총 1만8천313대로, 올해 최대 판매량과 회사 출범 이래 최대 월간 판매 기록을 동시에 달성했다. 한국GM의 이같은 성과는 스파크, 말리부, 트랙스 등이 이끌었다. 말리부는 지난달 내수시장에서 4천154대가 팔리며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44.7%나 늘었다. 말리부는 지난해 6월 판매를 시작한 이후 중형 가솔린 시장에서 꾸준히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2016 올해의 안전한 차’에 선정되기도 했다. 트랙스의 신형 모델 ‘더 뉴 트랙스’는 지난달 2천603대가 팔리며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3.5% 증가했다. 지난 2013년 2월 출시 이후 최대 월간 판매량을 달성한 더 뉴 트랙스는 디자인 변화와 상품성 향상에도 공격적인 가격 정책으로 자동차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우수한 성능과 디자인, 첨단 기능을 갖춘 카마로SS는 올해 총 666대가 팔려 국내 스포츠카 시장에서 전례 없는 성과를 기록했다. 스파크는 지난달 총 7천78대가 팔리며 국내 경차 시장 1위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데일 설리번 한국GM 영업·A/S·마케팅 부문 부사장은 “한 해 동안 한국GM 제품을 응원해 주신 고객들에게 감사하다”며 “새해에도 신차 출시와 함께 우수한 고객 서비스를 이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덕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