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14. 백성을 사랑하고 시대를 걱정한 ‘율곡이이’

금강산에 올라 느꼈던 감회를 노래한 ‘비로봉에 올라’란 시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쓴 모자로 동해바다를 한 손에 쳐든 술잔으로 표현할 정도로 율곡의 기상이 드높다. 율곡이 여덟 살 때 지은 ‘화석정’을 살펴보자. “산은 외로이 둥근 달을 토해내고[山吐孤輪月], 강은 만 리의 바람을 품었네[江含萬里風]” 파주 고향의 밤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한 소년 율곡의 재주가 놀랍다. 율곡은 평생 50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정언묘선이라는 시선집도 편찬한 빼어난 시인이다. 율곡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시가 …가슴속의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낸다”고 했다.■ 어머니 신사임당 이이(李珥, 1536~1584)의 호 율곡(栗谷)은 이황의 호 퇴계와 더불어 우리에게 친숙한 호다. 율곡은 자신이 살았던 파주 고향 마을 ‘밤골’의 지명이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은 아버지 이원수보다 훨씬 널리 알려져 있다. 신사임당은 율곡에게 사서삼경을 가르칠 정도로 높은 학식과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춘 여성 선비였다. 소년시절 율곡에게 어머니 신사임당은 하늘이자 바다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16세 어린 나이에 그런 어머니를 잃었다. 삼년상을 마친 율곡은 아버지는 물론 가족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출해 금강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여기서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과 어머니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심각한 불화를 짐작할 수 있다. 비록 한 해 뒤에 환속했으나 율곡이 한때 승려로 지냈던 사실은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됐다. 하산 이후 율곡은 학문에 전념했다. 1559년 봄, 율곡은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상주 목사인 장인을 찾았다가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상도 예안의 퇴계 이황(1501~1570)을 방문해 사흘을 머물렀다. 이때 퇴계는 “후생가외(後生可畏: 후배가 두려움)라는 성인의 말씀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라며 율곡을 격려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찰을 통해 이기설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율곡보다 35세 연상인 퇴계는 사대부들은 물론 국왕 선조의 존경을 받았던 대학자였으나 율곡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이 지은 ‘성학십도’의 순서를 바꿨을 정도로 율곡을 존중해줬다. 율곡은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사숙했다. 평생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살며 제자를 길렀던 화담의 인품과 학식을 깊이 사모했던 것이다. 율곡은 화담의 제자 박순과 정치와 학문의 든든한 동지로 지냈다. 화담이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했고, 퇴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는데, 율곡은 이 둘을 뛰어넘어 이와 기가 하나로 통합돼 있다는 이기이원적 일원론을 정립해 조선철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율곡의 이기론은 선악을 둘로 구분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성선설을 더욱 강조하여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신뢰를 확대했다. 노비와 서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율곡의 시선은 따뜻했다. 서얼 허통과 노비의 속량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첩에게서 얻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대를 잇도록 했던 것도 이런 신념의 실천이었다. 율곡은 선조의 당부를 받고 사서(四書)를 한글로 풀이했다. 이때 완성된 율곡의 사서언해본은 교서관 활자본으로 간행돼 한자를 모르는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읽혔다. 율곡이 해주에서 형제와 조카 등 가까운 종족을 모아 함께 살 때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 ‘동거계사’라는 생활 규칙도 한글로 기록했다. 이들 통해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율곡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평생의 화두, 안민 율곡의 평생 화두는 ‘안민(安民)’이었다. 임금의 임무 역시 안민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율곡이 마흔 살이 되던 1575년에 선비사회가 동서로 나뉘어 싸우는 붕당 정치가 시작됐다. 화합과 조정에 힘을 쏟던 율곡은 그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파주로 내려갔다. 1577년 5월, 선조는 율곡에게 대사간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율곡은 이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시사에 대해 물을 것이 있으시면 하문하시고, 그 말이 채용될 수 없다면 다시 부르지 마십시오.” 차가운 대답이지만 선조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대가 품은 생각이 있으면 글로 써서 올리라” 일말의 희망을 품은 율곡은 파주 고향집에서 현재의 폐단을 진술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글의 분량이 1만 자에 이르렀기에 ‘만언봉사’로 불리는 글이다. “오늘의 나라 형세는 마치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큰 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대들보에서 작게는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는 것이 없어, 겨우겨우 날만 넘기며 지탱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동쪽을 수리하면 서쪽이 따라 기울고, 남쪽을 뜯어 고치면 북쪽이 휘어 넘어져서, 어떤 장인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날로 더 썩어 붕괴할 날만 기다리는 그 집과 오늘의 나라꼴이 무엇이 다르다하겠습니까?” 조선왕조를 ‘썩은 집’이라니 무서운 비유였다. 보통 신하 같으면 열 번은 귀양을 가고도 남을 불경한 소리였다. 그러나 율곡을 깊이 존경했던 선조는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벼슬길에 나선 지난 10년 동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임금에게 경장을 거듭 건의했으나 단 하나도 실천하지 않았다. 크게 실망한 율곡은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매섭게 질책하며 거듭 결단을 촉구했다.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약하며 창고의 양곡마저 고갈되었는데,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신의도 여지없이 사라졌습니다. 혹시라도 외적이 변방을 침범하거나 도적이 국내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방어할 만한 병력도 없고, 먹을 만한 곡식도 없고, 신의로 유지할 수도 없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 점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시려고 하십니까?” 이에 대한 해답이었을까. 1582년 말, 선조는 율곡에게 병조판서를 맡겼다. 군정을 개혁하는 세부 방안을 제시했으나 반대여론이 일어나자 선조는 이번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10년 뒤 임진왜란을 겪으며 선조는 율곡의 선견지명을 탄식했다. 이이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선비사회를 화합시키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성혼, 정철과의 교우관계 때문에 서인의 지지를 받았으나 동인의 배척을 받아야 했다. 이이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서인으로 지목됐을 뿐 아니라 서인의 종장으로 추대됐다. 율곡의 이러한 처지를 오리 이원익(1547~1634)은 이렇게 평했다.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언덕 아래서 싸움을 하고 있다. 그 때 한 사람이 언덕 위에서 타일러 말리다가 두 사람이 듣지 않자 언덕에서 내려와 싸우는 두 사람을 뜯어 말리려 했는데, 결국 같이 끌리고 밀리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1583년 늦가을, 선조는 율곡을 이조판서에, 성혼을 이조참의에 임명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 이후로는 나를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고 해도 좋다. 만일 이이와 성혼을 훼방하고 배척하는 자라면 반드시 죄주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모처럼 선조가 율곡의 개혁 정책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이듬해 정월 16일, 율곡은 서울 대사동 집에서 쓸쓸하게 운명했다. 쉰도 채우지 못한 나이였다. 잘난 벼슬아치들과 달리 일반 백성들은 율곡을 제대로 보았다. 아래는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율곡의 졸기(卒記)의 일부분이다. “궁벽한 마을의 일반 백성들도 더러는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했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집결해 전송하였는데,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 리에 끊이지 않았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우들이 수의와 부의를 거두어 염해 장례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김동연 특별기고] ‘경기 꿈의 대학’을 통한 유쾌한 반란

▲ 김동연 아주대학교 총장 개인적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살면서 가장 지독했던 회의가 30대 초반 찾아왔습니다.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힘들게 기회를 얻어 미국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그럴 듯한 유학생활이었는데도 스스로를 다잡을 수 없는 캄캄한 시간이 제법 계속됐습니다. 처음에는 회의의 정체도 몰랐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깊은 고민의 출발점은 ‘왜 공부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니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제 딴에는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남이 하고 싶은 일, 주위에서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이라는 것을 제가 하고 싶은 일로 착각하고 살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동안 나를 형성해 왔던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필요로 했습니다. 힘든 일이었습니다. 남들이 요구하는 ‘정답’이 아니라 ‘내 답’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총장으로 취임해서 ‘파란학기제’를 만들었습니다. 학생들이 직접 하고 싶은 공부나 활동을 제안하면, 학교는 심사를 거쳐 과목으로 만들어 학점까지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도전과 모험을 하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틀을 깨는, 새 세계로 나아가는 ‘파란(破卵)’을 하자는 것입니다. 3학기째 이어지고 있는 파란학기를 통해 100개가 넘는 과목이 만들어졌고 350여명의 학생이 참가했습니다. 도전에 실패한 학생들에게 ‘황금실패상’이란 것을 만들어 격려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나 실패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참가한 학생들은 입을 모아 ‘힘들지만 즐거웠다’라고 말합니다. 정규 과목 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소중한 경험을 많이 했다고들 합니다. ‘남이 낸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낸 문제’를 스스로 푸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얻는 과실입니다. 붕어빵처럼 같은 길을 가게 하는 정형화된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 ‘유쾌한 반란’을 일으켰기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이제 ‘경기 꿈의 대학’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경기도교육청에서 지난 4월 시행한 사업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스스로 꿈을 찾게끔, 스스로 체험하게끔 하는 의미 있는 시도입니다. 이 역시 학교 현장에서 만드는 유쾌한 반란입니다. 아주대학교는 취지에 찬성하여 적극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번 1학기 10개의 강좌가 마련되어 260명의 학생들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마련된 자리보다 참여를 원하는 학생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다음 학기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 저녁 시간임에도 열정을 가지고 아주 캠퍼스를 찾아오는 학생들을 위해 앞으로 더 좋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겠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학생들이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의미 있는 시간을 지내며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이 훗날을 위해 고통스럽게 희생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즐겁게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자기의 꿈을 세우거나 바꾸고, 자기 자신에 던지는 질문을 만드는 체험을 하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프로그램 운영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정책이나 제도의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당초 의도한 결과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기존의 프레임을 깨는 새로운 시도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새 제도의 취지가 잘 살아날 수 있도록 교육당국과 학교에서 늘 깨어 있으면서 운영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교사, 학생, 학부모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의 이해와 협조가 꼭 필요할 것입니다. 다함께 관심을 갖고 성원을 보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경기도교육청이 첫발을 성공적으로 뗀 데 축하와 응원을 보냅니다. 앞으로도 우리 학생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힘을 모아갑시다. 김동연 아주대학교 총장

[천자춘추] 소통과 실천의 단비

생명의 기운이 넘쳐나는 신록의 계절 새 정부 출범에 이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행사를 보면서 치유와 화합 그리고 소통의 기쁨과 설렘이 가득한 오월을 보내고 있다. 요 며칠은 쾌청한 날씨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어 행복감이 더해지는 느낌이다. 국정농단에서 비롯된 촛불 저항과 사상 첫 현직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직무수행과 동시에 광폭소통행보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과 ‘세월호 참사 기간제 교사의 순직 인정’ 등 주요 정책을 과감하게 수행해 나가면서 그동안 짓눌렸던 불통의 통치를 통합과 소통의 정치로 탈바꿈 시키고 있다. 또한 영부인 김정숙 여사도 청와대 입주를 위하여 이삿짐을 싸던 중 집 앞에 찾아온 민원인에게 라면을 대접하며 억울함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 민원인은 만사가 해결한 듯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갔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영부인으로서의 소통리더십을 예견해 볼 수 있었다. 이렇듯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문재인정부의 소통리더십 실천은 그동안 불통으로 상처받은 많은 국민들이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소통리더십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마술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소통은 나와 너 라는 개인을 하나로 통합하여 우리라는 개념을 형성시켜준다. 물론 상호간의 올바른 의사소통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되었을 때 그 힘은 개인의 힘보다 몇 배 더 크게 다가온다. 소통은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관점, 더 많은 지식을 얻고 그를 바탕으로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일찍이 위대한 성군이신 세종대왕의 애민정책 중 제일먼저 떠오르게 하는 것이 ‘한글창제’다. 한글이 있기에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으니, 이는 민족 언어의 혁명이며 누구나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문자 생활을 향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문재인대통령도 후보시절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세종대왕이라고 말한 것처럼 요즘 과감한 소통행보를 보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엿 볼 수 있다. 또한 필자가 속한 LX공사도 올해 초 박명식 사장이 부임하면서 소통경영을 몸소 실천하고 있어 직장생활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 특히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일일이 직원의 남편 또는 부인 앞으로 격려 편지를 발송함으로써 직원과 가족들로부터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새 대통령의 소통 통치가 전 기관으로 확산되어 우리사회가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김기승 한국국토정보공사 경기지역본부장

[기고 ] 되살아나는 역사 속 그 길, 한양 삼십리 누리길

자연을 벗 삼아 가볍게 걷기 좋은 계절이다. 걷기는 몸에 큰 무리를 주지 않고도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운동이다. 광주에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며 걸을 곳이 많지만 그 중 한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두 다리가 최고의 교통수단이던 조선시대!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들이 꼭 지나쳐 가야 했던 고을 ‘광주’. 과거 이웃 마을 친구를 만나려 해도 고개 넘어 십리, 이십 리를 걸어야 했고, 지금의 수능만큼이나 큰 시험이었던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몇 달 전에 출발해 무려 백 리, 이 백리를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당시에는 목현동을 지나 남한산성을 넘어야 비로소 한양에 입성 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길이 잘 닦이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그야말로 울퉁불퉁한 숲길을 걷고 또 걷고, 짚신이 몇 켤레나 닳아 없어지도록 걸어야만 했다. 선비들이 울고 웃으며 넘었을 이 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이 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광주시는 옛날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지나야 했던 남한산성 주변의 숲길을 복원하는 ‘한양 삼십 리 누리길’ 조성 사업을 시작했다. 광주시를 가로지르는 ‘한양 삼십 리 누리길’은 목현동 한옥마을 부근 새오고개에서 시작해 오전리, 불당리, 산성리를 거쳐 남한산성 제1남옹성으로 이어진다. 먼저 시는, 불당리까지 6㎞ 구간을 올해 12월까지 1단계로 정비한 뒤 불당리∼산성리 6㎞ 구간을 내년에 추가로 정비할 계획이다. 시작점이 되는 목현동 새오개길은 벌써 벽화 작업이 완성됐다. 벽에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도기로 만든 벽화로, 색을 넣은 도기를 타일처럼 구워내 조각조각 붙이거나 그림 그대로를 도기로 만들어, 한양으로 향하는 비장한 옛 선비들의 모습을 광주의 상징인 도기로 표현했다. 이어지는 다음 구간도 산림 생태계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목각 장승 등 광주시의 특징을 담은 다양한 테마로 꾸며질 예정이다. 단순히 사라진 길을 정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길 안에 볼거리와 먹을거리, 즐길 거리까지 모두 담을 예정이다. 게다가 마을 내 주택을 활용한 게스트 하우스 마련 방안도 모색 중에 있다. 숲길 주변은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1만4천㎡)으로 묶인 상태에서 4개 마을에 1천271가구 2천945명이 거주하고 있다. 전 구간을 걷는데 7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선비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운치를 느낄 수 있는 ‘한양 삼십 리 누리길’. 과거로 여행하듯 걷는 호젓한 숲길, 광주시에 또 하나의 명품 역사 여행지가 늘어난 셈이다. 남한산성의 환경 문화자원과 자연마을이 연계된 숲길을 조성해 양질의 산림휴양 서비스를 제공하고 건강한 자연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추진하는 한양 삼십 리 누리길 조성사업에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이 있기를 기대한다. 박해광 광주시의회 의원

[경기인터뷰] 변봉덕 코맥스 대표이사 회장

50여 년 전 수학과를 졸업한 청년은 학교 선생님이라는 안정된 길 대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했다. 당시 생소했던 ‘인터폰’ 사업이다. 청년은 직접 가방을 둘러매고 미국과 영국을 다니며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한국 최초로 인터폰을 생산한 회사는 신뢰와 인재경영을 내세우며 홈 IoT기업으로 성장했고, 이제 대(代)를 이은 경영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민국 1호 명문장수기업으로 선정된 코맥스 변봉덕 대표이사 회장(77) 이야기다. 존경받는 기업인과 장수기업인이 드문 시대에 변 회장은 존경받는 기업문화를 확산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는다. 지난 17일 코맥스에서 변 회장을 만나 기업의 바람직한 롤모델과 기업인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동안 기업인으로서 걸어온 길을 회상할 때는 물론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모습에서 노장의 노련함과 통찰력이 느껴졌다. ‘최초의 인터폰 생산업체’, ‘제1호 명문장수기업’의 타이틀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Q 50여 년 전만 해도 인터폰이 생소했다. 어떻게 사업에 뛰어들게 됐는지 궁금하다. A 맞다. 당시만 해도 공장에서 가발이나 신발을 생산하는 노동집약 산업이 중심이었다. 청년 시절, 정보통신의 중심지인 세운상가에 자주 놀러 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정보통신 산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언젠가는 정보통신 산업이 국가산업을 선도할 거란 생각을 했다. 전자기기 개발과 제조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인터폰 사업을 구상했다. 기존에 없던 거니 오히려 기회가 될 거란 자신도 있었다. 전화기와 달리 인터폰 같은 구내통신 사업은 국가의 제약이 없었고, 해외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란 판단이 들었다. 그러던 중 1968년 ‘중앙전자공업사’로 시작해 도어폰을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 1970년대에는 주택붐이 일면서 1970~80년대의 웬만한 고급주택에는 거의 우리 제품이 사용됐다. 2000년대부터는 인터넷 기술이 접목된 홈네트워크 제품을 개발해 시대를 이끌어나고 있다. Q 정보통신 시장은 변화가 워낙 빠르지 않나. 패러다임을 선도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A 코맥스는 창업 초기부터 해외시장에 눈을 돌려 1970년대 이미 세계 전자박람회에 참가했다. 또 해외광고 등 적극적인 글로벌 마케팅 전략을 펼쳐 시장을 전 세계로 확대했다. 이처럼 미래전망을 볼 수 있는 식견을 갖고자 전문지식과 새로운 기술, 시장을 항상 공부하고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오면서 정보통신 기술이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지 않나.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리면 금세 경쟁자들에게 뒤처지는 경쟁사회가 됐다. 이런 때일수록,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창조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아무리 규모가 큰 회사라고 해도 미래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면 그 회사는 몇 년 안에 큰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Q 코맥스 역시 위기가 많았을 텐데, 역경을 이겨나간 과정을 알려달라. A 사업 초반에는 개발한 제품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는데도 제품이 팔리지 않아 파산 직전까지 간 적도 많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결방안을 찾는데 애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탈출구가 보였다. 한번은 납품했던 제품에 불량신고가 빗발쳤다. 인터폰에 들어가는 스위치가 불량이었다. 당시 판매했던 제품을 모두 새 제품으로 교환하면 회사 경영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불량품으로 고객을 속일 수는 없었다. 기업은 신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제품을 산 고객을 일일이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새 제품으로 교체했다. 현재의 ‘리콜’ 제도인 셈이다. 당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질 거라 생각했는데 고객들이 오히려 감동하면서 우리 제품을 홍보해 줬다. 신뢰가 쌓이다 보니 결국 주문량이 더욱 늘어났다. 위기가 이뿐이었겠는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왜 이런 위기가 왔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잘못한 부분을 고치며 새롭게 성장하자는 마음으로 위기를 이겨내 왔던 것 같다. Q 대한민국 제1호 명문장수기업이 됐다. 비결은 무엇인가. A 명문기업으로 선정돼 회사로서는 큰 영광이긴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아 부끄럽다. (웃음) 우리나라 산업의 역사가 짧은데, 장수 중소기업을 독려하려고 준 게 아닌가 싶다. 다만, 한 가지 분야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건 비결이라 생각한다. 또 기업이 오랫동안 사업을 영위하려면 ‘관계’가 중요하다. 협력사, 고객사들과 신뢰를 구축했던 것이 오랜 기간 기업을 운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관계를 맺은 지 40여 년 이상 되는 해외 고객사들도 있는데 이들 회사는 자식·손자까지 우리 회사와 관계를 이어간다. 고객뿐만 아니라 내부 직원에게도 같은 관점으로 접근한다. 회사의 미래는 직원에게 달렸다. 회사 내에서는 인재를 육성하고, 내부에서는 신뢰 관계를 구축한 게 반세기 동안 성장한 힘이었다. Q 100년 기업으로 성장하고자 경영권을 2세에게 승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A 10여 년 전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우리 회사를 거액에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기업을 매각할 것인지, 장수기업으로 끌고 갈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아들에게 가업 승계에 대한 결정권을 줬다. 대기업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이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지만, 중견ㆍ중소기업은 이런 것들이 부족하지 않나. 장수기업으로 가기 쉽지 않다. 아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들이 이탈리아에 살면서 100년 넘는 중소기업을 많이 봐서인지 아버지가 창업한 회사를 명문 장수기업으로 만드는 것도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하더라. 과거 50년을 넘어 코맥스가 유럽의 존경받는 강소(强小) 제조기업처럼 미래 50년에도 더욱 성장한다면 창업자로서 매우 보람될 것 같다. Q 최근 사회적으로 재벌개혁이 화두가 되면서 반(反)기업 정서도 확대되는 것 같다. A 안타까운 일이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정치권과 정부는 큰 차원에서 기업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4차산업 시대가 된 만큼 새로운 혁신과 기술, 발전이 이뤄지고 있다. 기업들이 새로운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길 바란다. Q 어려움 속에서도 수출 시장을 개척하며 고군분투하는 중소 기업인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 A 도전정신과 성실함이 중요하다고 조언하고 싶다. 1970년대 초반, 해외로 진출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우리나라 대부분 기업들은 수출을 생각하지 않았다. 기반이 없었고 자금도 부족했지만, 우리 회사의 제품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또 앞으로는 해외 수출이 회사의 미래 먹거리라고 생각해 세계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첫 시장이 미국이었다. 초창기에는 물론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전쟁’, ‘분단’ 국가일 뿐이었다. 해외 바이어들은 잘 알지 못하는 국가의 제품이다 보니 신뢰할 수 없다며 퇴짜를 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 바이어들을 만나려고 열심히 뛰어다녔고 현재는 120여 개의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감회가 새롭다. 꾸준히 확신을 하고 개척해 나가면, 언젠가 빛을 볼 수 있을 거다. 정자연기자 사진=전형민기자

신태용호, 30일 포르투갈과 16강 맞대결…역대전적 3무4패 ‘깬다’

34년 만에 안방에서 ‘4강 신화’에 도전하는 한국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이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난적’ 포르투갈을 상대로 8강 진출을 노린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오는 30일 오후 8시 천안종합운동장에서 포르투갈과 2017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16강전을 벌인다. A조 조별리그 1, 2차전에서 2연승을 거두고 일찌감치 16강 진출을 확정한 한국은 지난 26일 잉글랜드와의 3차전에서 0대1로 아쉽게 패하며 조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16강 상대인 포르투갈은 조별리그에서 잠비아(1-2)에 패하고 코스타리카(1-1)와 비겨 탈락 위기에 놓였었으나, 최종전서 이란에 2대1 신승을 거두고 조 2위로 힘겹게 16강 티켓을 획득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U-20 월드컵에서 통산 두 차례(1989년·1991년)나 우승하고, 한 차례 준우승(2011년)과 한 차례 3위(1995년)에 오른 전통의 강호다. 공교롭게도 한국은 U-20 대표팀의 맞대결에서 포르투갈을 이겨본 적이 없다. 지난 38년 동안 7차례 만나 3무 4패에 그쳤다. 한국이 8강에 오르려면 이승우(바르셀로나 후베닐A)-백승호(바르셀로나B) ‘바르사 듀오’와 원톱 스트라이커 조영욱(고려대)의 삼각편대가 최전방에서 화끈한 득점쇼를 펼쳐야 한다. 이승우와 백승호는 조별리그를 치르는 동안 나란히 2골씩을 기록했고, 조영욱은 한 차례 페널티킥 유도를 비롯해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수들을 괴롭혔다. 조영욱은 지난 1월 포르투갈과의 평가전에서 득점포까지 터트렸던 터라 이번 16강전 활약을 기대케 하고있다.홍완식기자

'안전은 하청업체 책임'…4개 대기업 SW 계열사 갑질 적발

하도급대금을 늦게 지급하고 안전관리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긴 4개 대기업 소프트웨어 개발 계열사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다. 공정위는 서면발급의무를 위반하고 부당한 특약을 설정한 소프트웨어 개발·구축 및 유지보수업체 한솔인티큐브, 한화에스앤씨, 시큐아이 등 4개 사업자에 과징금 7천800만원을 부과했다고 28일 밝혔다. 한솔인티큐브는 한솔, 한화에스앤씨는 한화 소속 회사이며 시큐아이는 삼성 소속이다. 이번 제재는 공정위가 지난해 6월부터 시행한 소프트웨어 업종 하도급거래 직권조사에 따른 후속 조치다. 이들 4개사는 용역을 시작하기 전에 발급해야 할 계약서면을 수급사업자에게 발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솔인티큐브가 총 133건의 계약서를 발급하지 않아 위반 건수가 가장 많았고 시큐아이(56건), 한화에스앤씨(8건)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은 또 수급사업자에게 하도급 대금 등을 법정 기일보다 늦게 주면서 지연이자와 어음대체결제수단 수수료 등 총 1억4천여만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한화에스앤씨, 시큐아이 등은 수급사업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계약 조건을 설정하기도 했다. 한화에스앤씨는 원사업자의 과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공사 중 발생하는 재해·안전사고 관련 민·형사상 책임을 수급사업자에게 일괄적으로 떠넘겼다. 시큐아이는 원사업자의 요구로 잔업을 하더라도 원사업자에게 별도 비용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감시활동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