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전공의 216명 “재계약 안해”… 의료공백 장기화

인천지역 대형병원 의사들이 재계약을 포기하면서 줄줄이 의료 현장을 떠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일 인천시에 따르면 인천의 대형병원에서 근무(수련)하던 전체 전공의 540명 중 1년차 인턴 148명을 비롯한 216명(40%)이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현재 계약을 유지 중인 전공의 324명 등은 출근·진료를 거부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공의 수련 계약은 2월 말 종료하고, 3월엔 계약을 갱신하는 구조로 이뤄진다. 지금까지는 각 병원에서 전공의들의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았지만, 계약 기간이 지나면서 사실상 사직 처리가 이뤄진 셈이다. 한 병원 관계자는 “지금껏 현장에 남아있던 전공의들 대다수가 인턴이나 4년차 레지던트다. 아마 계약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며 “이들은 지난달 말 기준 계약이 끝나 병원을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특히 대형병원에서 근무할 전임의도 줄어들고 있다. 전임의는 교수의 입원환자 관리 및 보좌는 물론 본인의 외래 진료, 수술 등을 집도하는 역할을 하고있다. 이 같은 전공의 등의 재계약 불발 등으로 병원에서의 의료공백은 더욱 확산, 장기화할 전망이다. 이날 응급의료포털 확인 결과, 인하대병원의 경우 소아응급전용중환자실, 심장내과중환자실 등의 여유 병상이 전혀 없어 수술을 연기하거나 입원 환자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가천대 길병원은 흉부외과중환자실, 인천성모병원은 심장내과중환자실의 병상 부족으로 진료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에 따라 시는 인천시의료원(백령병원 포함), 근로복지공단 인천병원, 인천보훈병원, 인천적십자병원, 경인권역재활병원 등 6곳 공공의료기관에 비상 진료를 위한 협조 등을 요청하고 있다. 인천시의료원의 경우 전문의들이 번갈아 당직을 서면서 오후 10시까지 연장 운영 중이다. 시 관계자는 “평균적으로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전임의가 재계약을 해왔다”며 “하지만 이번엔 전임의들의 계약도 원활하지 않아 의료공백이 더욱 커진 상황”이라고 했다. 한편, 정부는 이달부터 전공의 중 업무 미복귀자에 대한 면허정지 및 고발 등을 예고했다. 보건복지부는 이날 인하대병원, 길병원 등의 미출근 전공의들에게 행정처분 사전통지서를 발송했다. 시는 이 같은 정부 지침에 맞춰 인천의료원 등 각 병원을 찾아 행정처분 및 사법절차를 다음주까지 마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지금 계약이 끝난 전공의들 또한 업무개시명령에 불응했기 때문에 면허정지 등의 처분이 이뤄질 예정”이라며 “장기전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비, 의료공백에 따른 대책 마련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경기만평] 목적지가 같기는 한데... 쫌...

[사설] 경과원의 청렴 캠페인에서 배울 기관들 있다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의 캠페인이 눈에 들어왔다. 4일 개최한 ‘GBSA 임직원 청렴 캠페인’이다. 청렴 조직 달성을 위한 직원 서약식 행사다. 강성천 원장을 포함해 임직원들이 참여했다. 원격지 근무자들은 전자 서명으로 동참했다. 투명, 공정, 인권, 이해충돌방지 등을 약속했다. 구조적인 시스템도 마련해 시행한다고 밝혔다. 내부감시시스템, 청렴마일리지, 반부패교육, 청렴간담회, 시민감사관, 내부신고센터 등이다. 강 원장이 ‘도민 신뢰’를 강조했다. 유관 기관 청렴 캠페인이 특별할 건 없다. 경기도가 감사 평가를 통해 권하고 있다. 청렴노력도가 청렴도 종합 평가에 중요한 항목인데, 여기에 청렴도 제고를 위한 캠페인이 가점을 받는다. 청렴 1등을 향한 경쟁적인 행사일 수 있다. 대부분의 기관이 비슷한 프로그램을 개최하고 있다. 그럼에도 경과원을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경과원은 현재 청렴도 우수 기관이다. 2월에 발표된 ‘2023 청렴도 평가’에서 1그룹 2등급이다. 1등급이 없으니 사실상 최우수다 그런 경과원이 개최한 청렴 캠페인이다.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짐작된다. ‘사실상 1등’이 아닌 ‘실질적 1등’에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평가할 만한 일이다. 기관 청렴도는 평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상시적이어야 하고 항구적이어야 한다. 작은 부패와 실수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최우수 청렴 기관에서 부패 기관으로 추락하는 기관도 있다. 어떤 기관은 만년 꼴찌에서 맴돌기도 한다. 노력이 있어야 얻어지는 결과다. 자연스레 비교될 도내 청렴 논란이 있다. 부끄러움 모르는 경기도의회 청렴도 꼴찌다. 16개 광역의회에서 꼴찌였다. 도민은 분노했는데 책임진 사람이 없다. 국회출장컨설팅, 청렴옴부즈만이란 걸 대책이라며 내놨다. 진정성을 인정하는 도민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온통 ‘얼굴 없는 사과’ 뿐이다. 의원 캠페인도, 의원 서약식도 없었다. 슬그머니 의정비 인상으로 실속까지 챙겼다. ‘갑질 사무관 구하기’로 비난도 샀다. 이래놓고 경과원을 감사할 건가. 경기도 산하 공직유관단체만 28개다. 도가 2015년부터 청렴도 평가를 하고 있다. 매년 1등급부터 5등급까지 점수가 매겨진다. 그때마다 1등급·2등급의 청렴 우수 기관은 나온다. 하지만 이 성적에 만족할 일이 아니다. 행안부 등의 전국 단위 평가가 있다. 거기서의 경기도 유관기관 평가는 좋지 않다. 경기도 지역 유관기관 전체의 청렴도 기준이 한참 높아져야 한다. 이런 경기도 평가에서조차 꼴등을 단골 삼는 기관들은 뭔가. 꼴등 단체의 기관명을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경기도 보도자료(2월7일자)에 다 열거돼 있다. 그 ‘꼴등’ 기관들이 보고 배워야 할 경과원이다.

[사설] 가짜 신분증 기승, 범죄•사기 악용 가능성 높다

가짜가 넘쳐나는 세상, 신분증도 가짜가 많다. 신분증을 위조하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짜 신분증으로 인한 피해다. 가짜 신분증이 각종 범죄에 악용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판매한다는 글이 수두룩하다. ‘신분증 위조’를 검색하면 수백 개의 위조업자 계정이 나온다. 이들은 수수료와 개인정보를 받은 뒤 가상의 명의를 만들어 가짜 신분증을 판매하고 있다. 당일 배송까지 가능하다. 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공무원증 등 신분증 종류도 다양하다. 각종 자격증과 시험 합격증도 변조한다. 가격은 20만원부터 100만원까지 천차만별인데 금액에 따라 위조 품질에 차이가 있다. 경기남·북부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4년간 경기도에서 신분증 등 공문서를 위조해 경찰에 적발된 건수가 총 1천414건이다. 2019년 419건, 2020년 358건, 2021년 286건, 2022년 341건으로 매년 300~400건씩 된다. 신분증 위조는 당연히 불법이다. 신분증을 위조·변조할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부정하게 사용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그럼에도 가짜 신분증은 줄지 않는다. 온라인상에서 암암리에 교묘하게 거래가 이뤄져 단속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은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 거래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거나 명의 도용, 개인정보 유출 등 2차 피해가 발생해야 적발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청소년들은 위조된 신분증으로 주로 술집 등 유흥업소를 이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았다는 이유로 피해를 당하는 업주들이 속출하고 있다. 신분 위조는 청소년들이 하는데 영업정지 등의 처분은 자영업자가 떠안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신분 위조에 대한 단속과 처벌이 강화돼야 한다고 토로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금융사기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타인 명의의 위조 신분증과 휴대전화로 비대면 계좌를 개설한 뒤 오픈뱅킹에 접속해 자산을 탈취하는 금융 사기가 벌어지고 있다. 하나의 은행 앱에 모든 금융 계좌를 등록해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는 오픈뱅킹 가입자가 3천564만명이나 된다. 편리하지만 금융 사고와 사기 범죄 위험이 있다. 위조 신분증과 이를 이용해 가짜로 개설한 알뜰폰만 있으면 오픈뱅킹을 통해 금융 자산 전부를 털어갈 수도 있다. 신분증 위·변조 및 거래를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선제 대응하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금융사도 신분증 도용 여부를 확인하는 방안을 강화해야 한다.

[여담] 고봉산성의 ‘안장왕과 한주’의 러브 스토리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에 있는 고봉산성은 고구려 22대 안장왕(安臧王)과 백제의 토호인 딸 한주(韓珠)의 로맨스가 전설로 내려온다. 우리 민족 최고 고전인 춘향전의 스토리 구성과 너무 닮았다. 안장왕은 문자왕의 장남이고 본명은 흥안(興安)이다. 그는 태자 시절에 상인 행색을 하고 개백현(皆伯縣·지금의 고양)을 염탐했다. 백제 정보원의 눈에 띄어 한씨 집에 숨어 있던 안장왕은 한주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한주와 은밀히 정을 통하고 부부의 언약을 맺은 그는 “나는 고구려의 태자다. 고구려로 돌아가 대군을 이끌고 이 땅을 취한 뒤 그대를 맞이하리다” 하며 고구려로 돌아갔다. 고구려로 돌아와 519년 문자왕이 죽고 안장왕이 21세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다. 안장왕은 장군을 자주 보내 백제를 쳤지만 항상 패배했다. 한편 한주의 미모를 들은 개백현의 태수는 한주의 부모에게 한주와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한주는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했다. 한주 부모의 압박과 태수의 진노가 대단했다. 한주가 갇힌 사실을 은밀히 알아낸 안장왕은 초조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었으나 한주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안장왕의 여동생 중에 고안학이 있었다. 그도 절세미인이었다. 그는 늘 을밀이라는 장군에게 시집가고 싶어 했고 을밀도 고안학에게 장가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왕은 을밀의 가문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을밀도 부름을 받고 왕을 알현했다. 그는 왕에게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신이 안학을 사랑하는 것은 대왕이 한주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하게 해주시면 신도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찾아서 올리겠습니다”라고 했다. 한편 계백현 태수는 한주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 사람을 보내 회유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 너를 죽일 계획이지만 네가 마음을 돌리면 살려줄 것이다.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 되지 않겠느냐?” 한주는 대답했다. “태수가 제 뜻을 꺾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이 저의 죽는 날이 될 겁니다. 만약 저의 생일이 된다면 태수에게는 죽음의 날이겠지요.” 태수는 대로해 빨리 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초청 무사를 가장해 연회장에 들어간 을미 장수가 “고구려 병사 10만명이 성에 들어왔다”고 외치자 성 안이 크게 동요했다. 이 틈을 타 을밀은 병사들과 함께 성을 넘어 감옥을 부수고 한주를 구했다. 을미가 고을을 쳐 항복을 받아내는 틈을 타 한주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봉화를 올렸다. 봉화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안장왕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백제 고을들을 지나 개백현에 가서 한주를 만났다. 고봉산 봉수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용됐다. 본래는 백제에서 봉화를 올렸겠지만 나중에는 한씨 미녀가 안장왕과 고구려군을 불러오는 신호로 이용된 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覺) 봉수조에 고봉산 봉수가 기록돼 있으며 고봉산성은 안장왕과 한주의 애틋한 사랑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고봉산성은 고양시의 주산이다. 지금의 고봉산은 나무들이 많아 잘 보이지 않지만 1980년 전까지만 해도 고봉산은 해발고도가 높지 않아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주변 일대와 대곡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고양시 고봉산성에는 ‘안장왕과 한주미녀’의 사랑이야기가 흘러 내려오고 있으며 이 설화는 고양시뿐만이 아닌 경기도의 역사문화이자 역사유적지다.

[인천시론]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몹시 고집스럽고 끈질긴 것’을 일컬어 ‘집요하다’라고 표현한다. 일상에서는 주로 특정 사안이나 사람에 대한 그릇된 집착을 가리킬 정도로 부정적 어감이 강하지만, ‘집요함’이 개인의 투철한 직업정신과 결합된다면, 그땐 판이 달라진다. 맡은 일에 대해서는 완벽한 성과를 내겠다는 집념이 그것이다.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의 집요함, 진실을 알리기 위한 기자의 집요함. 최상의 상품을 만드는 장인의 집요함 등 알고 보면 ‘집요함’이 주는 감동은 어느 것보다도 더욱 극적이다. 하지만 그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의사의 집요함일 것이다. 아픈 환자를 살리고자 집요하게 매달리는 의사의 모습은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대중매체 속 의사의 이상향은 출세가 아닌 오직 사람 살리기에 숭고한 사명감을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굳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공익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인지 최근 의사들이 사직서를 내며 환자 곁을 떠나는 모습은 너무도 안쓰럽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대 증원의 시기와 규모 등이 과연 적정한지는 제쳐두고라도, 의사가 환자 곁을 떠나는 건 심각한 자기모순이다. 의료법 위반을 피하고자 파업이 아닌 동시다발적인 사직서 제출을 택하고, 어떻게든 업무복귀명령을 송달받지 않고자 애쓰는 모습은 불편하다. 그래서인지 단지 ‘환자를 치료하지 않는’ 부작위만으로도 사회를 초토화시키는 의사들의 권력(?)을 두고, 국민들의 비판여론이 상당하다. ‘정부는 결코 의사들을 이길수 없다’는 한 의사의 발언에 ‘의사들은 결코 국민을 이길 수 없다’는 우문현답이 나온 것도 같은 이유이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라고 준 의사면허가 정부 정책에 대한 투쟁수단으로 변질됨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건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의사들이 병원을 지키며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할 때 오히려 대중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환자 곁을 떠난 의사들의 주장은 결코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오늘날, 의과대학 졸업식에서 낭독되는 것은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아닌, 이를 현재에 맞게 변형한 ‘제네바 선언’이다.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마칠 것을 엄숙히 선약하노라’로 시작되는 제네바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지금 이 순간 의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직서를 낼 용기가 아닌 생명에 대한 집요함일 것이다.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낙수 소리-선교장 열화당

겨울 바다로 갔다. 평창의 후배 전시 관람 때문이지만 나선 김에 동해로 향한 것이다. 혼자 여행은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웅장한 설산을 바라보며 작가들과 동행하니 흥이 오른다. 오죽헌에서 초충도를 본 후 바로크 시대에 등장하는 최초의 서양 여성화가 젠틸레스키보다 신사임당이 앞선 시대에 활동한 사실에 놀랐다. 선교장 사랑채 열화당은 출판사 열화당의 모태로 경운궁의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던 고종의 카페를 연상케 하는 테라스가 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하는데 녹색 지붕을 서양식 기둥이 받치고 있다. 선교장은 효령대군 11대손 이내번이 지은 99칸 사대부의 살림집으로 300년을 이어 온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 유형문화재이다. 우람한 소나무가 도열한 뒷동산과 입구의 활래정은 크되 넘치지 않는 소박함이 묻어난다. 성실한 이내번은 소금을 판 돈으로 영동지방을 개간해 농토를 농민에게 제공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길게 늘어선 행랑채 추녀에서 흘러내리는 낙수의 영롱한 파열음을 듣는다. 낙수는 먼 세월을 거슬러 오르기도 하고 멍하니 생각과 시간을 멎게도 한다. 고드름 타고 흐르는 밤의 낙수 소리는 행랑채 묵객의 하룻밤 시조일까. 거친 겨울 바다를 바라본다. 밀려오는 파도는 가슴과 시각을 심호흡처럼 열어준다. 유리창을 통과한 바다를 투명한 소주잔에 담았다. 젊은 날의 꿈은 사라진다 해도 영광의 추억은 자라고 있다.

[지지대] 광교산 개구리와 도롱뇽 떼죽음

사람으로 치면 사촌간이다. 물과 뭍에서 모두 살 수 있는 양서류 족속이다. 개구리와 도롱뇽 얘기다. 피부가 투과성이 있어 독소가 쉽게 흡수된다. 생존을 위해선 깨끗한 물이 꼭 필요하다. 먹이를 구하고 숨을 쉬고 번식할 땅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연못, 호수 및 개울 등지에서 서식한다. 녀석들이 생존을 시작하는 공간도 물이다. 이후 녀석들은 물 근처 잎이나 기타 식물 등지에 알을 낳는다. 도롱뇽 중 일부 종은 알이 부화할 준비가 될 때까지 등에 알을 싣고 다닌다. 다양한 기후와 서식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체온도 규제한다. 외부 온식 동물이다. 독특한 생식 전략도 눈길을 끈다. 개구리는 알을 덩어리로 낳는다. 포식자들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서다. 도롱뇽은 물 근처 잎이나 기타 식물 옆에 알을 낳는다. 역시 포식자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꼼수다. 이런 가운데 최근 수원 광교산에서 개구리와 도롱뇽이 떼죽음 위기(경기일보 4일자 6면)에 처했다. 광교산 통신대길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설치된 콘크리트 배수로에 갇혀서다. 녀석들은 본격적인 산란기를 맞아 알을 낳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가 콘크리트 수로에 빠져 나오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수백 마리가 젖은 낙엽 속에 파묻혀 죽은 채로 발견됐다. 콘크리트 배수로 안에는 인근 습지로 가지 못한 채 갇힌 개구리와 도롱뇽이 급하게 산란한 알들로 가득했다. 이곳은 개구리와 도롱뇽이 매년 2, 3월 찾아와 알을 낳는 공간이다. 지난해도 광교산 통신대길에 설치된 콘크리트 배수로에 양서류 수십 마리가 빠져 죽는 일(경기일보 2023년 9월25일자 6면)이 발생했다. 시는 양서류가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구조물을 설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경칩을 맞아 들리는 소식이 우울하다. 개구리와 도롱뇽과 더불어 살아야 할 까닭은 차고 넘친다. 이 녀석들과의 공존 여부가 곧 환경오염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지금] 영국의 여성 인권운동과 여성 참정권의 의미

오는 8일은 1975년 유엔이 공식적으로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여성의 날은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들이 용감하게 쟁취한 정치, 경제, 사회적 업적을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1909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국 여성의 날이 선포된 것에 고무돼 1910년 독일의 여성운동가 클라라 체트킨이 코펜하겐에서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한 것으로 유럽에도 여성의 날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여성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여성이 얻어낸 아주 최소한의 평등한 권리를 상징할 수 있는 대표적 예는 바로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의 인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의 참정권이 최초로 주어진 것은 약 130년 전인 1893년 뉴질랜드에서였다. 대한민국에서는 광복 이후인 1948년에, 다른 선진국들 또한 20세기가 넘어서야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당연한 권리인 참정권이 여성에게 주어진 것이 이제 겨우 100년 넘었다는 것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매우 긴 시간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워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중에서도 영국은 여성 참정권 운동의 대표 국가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1850년대부터 시작됐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20세기 초 이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맹(WSPU)을 조직해 온몸으로 투쟁했는데 그 당시 이런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참정권’이라는 뜻의 ‘suffrage’ 와 여성형 접미사 ‘-tte’를 합친 ‘suffragette(서프러제트)’라 불렀다. 수많은 서프러제트들이 싸웠지만 그중에서도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여성은 1913년 더비 경마대회에서 당시 국왕인 조지 5세의 경주마에 몸을 던져 사망함으로써 여성 참정권 운동에 가장 강렬한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장례 행렬이 자연스럽게 시위 행렬이 되면서 세계적으로 여성의 참정권 운동이 언론화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28년 긴 시간 끝에 영국 의회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승인했다. 대한민국의 여성 인권운동과 참정권운동이 영국 같은 나라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바로 이전까지 여성들은 뿌리 깊은 유교문화로 인해 인권운동은커녕 최소한의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교육은 소혜왕후가 엮어 만든 여성의 행실에 대해 다룬 ‘내훈(內訓)’이라는 교양서를 읽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식민지 시절 그 누구보다도 나라의 독립과 여성의 인권을 위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한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기에 현재 대한민국 여성의 인권과 민주주의는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 여성이 오늘날 당연하게 누리는 여성의 권리는 이렇듯 전 세계 여성들이 목숨을 건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구조적으로 남성 중심인 사회에서 내재된 성차별을 겪고 있으며 특히 이슬람 문화권에서의 여성 인권은 지금도 처참하다. 우리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여성의 권리와 참정권을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한 여성들의 노력을 기리고, 그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앞으로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투쟁을 멈춰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