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아슬아슬' 부여잡는 일상…워킹맘의 고군분투, 영화 ‘풀타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됐고,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최우수 감독상·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석권한 영화 ‘풀타임’(감독 에리크 그라벨)이 18일 개봉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풀타임’은 파리 교외에서 홀로 두 아이를 기르는 워킹맘 쥘리(로르 칼라미)가 위태롭게 마주하는 일상을 꿋꿋하게 부여잡으려는 모습을 담아낸 영화다. 쥘리는 파리 시내의 호텔 룸메이드로 일하며 장거리 출퇴근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규모 교통 파업이 발생하고, 생활비는 바닥을 보이고, 아이들을 맡길 곳을 새로 찾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다.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던 일상이 한순간에 난장판이 될 위기다. ‘풀타임’은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한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제시되는 건 일어나자마자 두 아이를 깨우고 정신없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의 분주한 움직임,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파리 시내의 파업 속보, 놀이 공원은 언제 가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질문들이 뒤섞이는 새벽 풍경이다. 쥘리에겐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것조차도 어쩌면 사치다. 대체 인력을 구하지 못한 채 몰래 이직 면접을 보거나, 카풀이나 히치하이킹에 실패해 지각하는 등의 변수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의지와 상관없이 출근 인파 속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어느새 하루 일과가 시작되고, 내일이 찾아오고, 모레도 변함없이 쳇바퀴처럼 지속될 것이다. ‘풀타임’은 잘 짜인 각본이나 기승전결의 흐름이 담긴 탄탄한 서사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는 그저 쥘리가 위태롭게 떠도는 모습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포착한다. 때로는 바짝 붙어서, 때로는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면서 숨죽여 따라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안하게 반복되는 전자 음악 비트는 시시각각 압박 받고 있는 쥘리의 심리 상태에 관객들이 더욱 생생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쥘리에겐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돌발 상황이 쉴 새 없이 생겨난다. 과연 엔딩 장면에서 관객들은 쥘리가 보여주는 표정과 몸짓을 보고, 쥘리에게 드디어 평안이 찾아오겠다고 쉽사리 예상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쥘리는 그저 일상을 버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일상을 예술로 승화…수원시립미술관 기획전시 '우리가 마주한 찰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거나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몇몇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런 의미 없는 그런 일상을 붙잡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이들이 있다. 지난 9일부터 오는 11월6일까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소장품 교류 기획전 ‘우리가 마주한 찰나’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수원시립미술관을 비롯한 경기도미술관, 오산시립미술관 등 국공립미술관 열 곳의 소장품을 한 데 모았고, 24명(팀)의 작가들을 대표하는 회화·영상·설치·조각 등 79점의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기획 전시다. ‘자연’·‘인간’·‘그 너머’의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먼저 1부 전시장에 들어서면 주변 풍경에 녹아든 자연 요소를 탐구하는 작가들이 기다린다. 이들의 작품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제공해주고 있다. 임선이 작가의 사진 연작 ‘극점 2-1, 2-2, 2-3, 2-4' 시리즈는 자연에 축적된 시간과 인위적으로 변화된 문명의 시간의 간극을 비교한다. 전현선 작가의 ‘나란히 걷는 낮과 밤’은 수채화이면서도 15점의 캔버스를 겹쳐 놓았으므로 디자인 툴로 그린 듯한 컴퓨터 이미지들을 연상시킨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회화로 재조합된 초록빛 숲 속에서 대상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음미할 수 있게 된다. 1부가 일상에 스며든 주변부를 바라보는 방식을 다뤘다면, 2부는 살면서 마주하는 사건과 현상들을 어떻게 대할지 탐색하는 구간이다. 정정엽 작가는 일상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스쳐 갔을 법한 거울들에 의미를 잡아낼 수 없는 단어들인 ‘져’, ‘꾸’, ‘옵’, ‘핍' 등으로 제목을 붙여 완벽히 이해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표현했다. 거울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탈핵-몸’, ‘네 방에 댄스홀을 허하라’ 등에서 사회문화적 맥락을 통해 의미가 확장된다. 이어 듀오 아티스트 ‘뮌(김민선·최문선)’은 잡동사니가 진열된 캐비닛에 조명을 비추는 구조물인 ‘오디토리움 (템플릿 A-Z)’을 선보인다. 벽에 비친 구조물의 그림자가 수시로 바뀌면 관람객들은 자신이 마주해온 일상에 의미 부여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돌아볼 수 있다. 3부 전시장에는 바깥으로 향하던 시선을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돌아오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윤향로 작가의 ‘Drive to the moon and galaxy'와 ‘스크린샷 5.41. 16-001’, ‘스크린샷 5.41. 16-003’이 연달아 나오는 통로를 지나게 되면 삶의 단면과 미술과 매체 등 문화가 어우러진 작가의 소우주를 통과해 본격적인 심연으로 진입한다. 이어지는 김아타 작가의 ‘온 에어 프로젝트 160-13, 인디아 시리즈’는 2002년부터 시작된 ‘온 에어 프로젝트’ 사진 연작 중 하나로, 장시간 노출 후 중첩시킨 인도의 한 도시 전경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뿌연 먼지로 지워내는 듯한 시간의 흔적을 드러낸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의식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전시 기획을 담당한 조은 큐레이터는 “관람객들이 작품 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공간 설계와 작품 배치 등에 특히 주안점을 뒀다”면서 “다양한 연령대의 중진 및 신진 작가들의 인지도 높은 작품을 총망라하는 전시로, 미술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송상호기자

[영화리뷰] 액션으로 채운 역사의 여백…이정재의 '헌트'

영화 ‘헌트’(감독 이정재)가 지난 10일 개봉했다. 5월 ‘범죄도시2’를 시작으로 예열을 마친 한국 상업 영화계가 7월 말부터 잇따라 출격한 ‘외계+인 1부’, ‘한산:용의 출현’, ‘비상선언’ 등으로 여름을 장악하는가 싶었지만, ‘탑건: 매버릭’의 장기흥행과 최근 불거진 바이럴·역바이럴 등 여러 논란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형국이다. 이에 ‘헌트’가 극장가 반전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가 된다. 영화는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한다. 1980년대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정권의 공고한 권력 유지를 위해 온갖 더러운 범법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핵심 권력자에 대한 암살 시도나 테러의 가능성이 언제든 유효했다. 이런 불안정한 정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안기부의 국내 팀 차장 김정도(정우성)와 해외 팀 차장 박평호(이정재)는 상부의 지시로 조직에 숨어든 스파이(동림)를 찾아내기 위해 각자의 부서를 압박하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수사하고 파헤친다. 아웅산 묘소 테러가 일어났던 1983년이 영화의 주 무대다. 그런데 영화는 그날의 진실 추적이나 현실의 재현 등에 힘을 쏟지 않는다. 1980년 광주를 극으로 불러들이는 모습이나 인물의 몇몇 대사, 독재자 대통령 등이 묘사되는 순간들만 보더라도 분명 현실 요소를 극에 녹여내고 있지만,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적절한 각색과 비워두는 전략을 통해 실존 인물들의 흔적이 아닌 극 중 인물들의 상황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역사에 녹아든 격동의 시대상을 알면 분명 도움이 되지만, 굳이 알고 가지 않아도 감상하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다. ‘헌트’는 이렇게 느껴지는 이야기의 여백을 다양한 액션으로 채워 넣는다. 극 전개의 리듬이 몇몇 결정적인 장면에서 선보이는 액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이때 ‘헌트’가 주요한 액션 신들을 인물들의 처지를 강조하는 데에도 활용하고, 그 자체로 전개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로 녹여내기도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거리를 두면서 서로를 견제하던 박평호와 김정도가 계단을 굴러 내려오며 뒤엉켜 맨몸 액션을 벌이는 장면에 이르면, 서로의 육체가 충돌하는 그 시점부터 두 사람을 둘러싼 갈등 양상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후반부의 결정적인 건물 폭발 신에서 두 사람은 각종 파편과 회색빛 먼지와 재에 뒤덮여 서로 분간이 안 가는 형상이 된 채 만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관객은 사냥꾼이기도 했다가 사냥감이기도 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 변해 왔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어쩌면 ‘헌트’는 움직임으로 인물들을 표현하고, 몸짓으로 시대의 여백을 채운 ‘행위’의 영화가 아닐까. 그래서 ‘헌트’의 무대는 밀도 넘치는 심리 묘사를 진득하게 몰아붙일 수 없는 곳이다. 막다른 길에 내몰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뿐이다.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예술적 도전의 한계 없는 즐거움’…백남준아트센터 ‘바로크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의 90번째 생일을 기념해 특별전 <바로크 백남준>이 개막했다. 경기문화재단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의 대규모 미디어 설치 작업과 레이저 작업을 중심으로 한 이번 특별전을 내년 1월24일까지 진행한다. 이번 전시는 백남준이 비디오와 레이저를 특정한 공간 안에 투사해 만들었던 ‘아날로그 몰입’에 중점을 뒀다. 전시는 백남준이 지난 1995년 독일 뮌스터의 작은 교회에서 연출한 ‘바로크 레이저’를 오마주한 작품 ‘바로크 레이저에 대한 경의’로 시작한다. 백남준은 당시 교회의 모든 창문을 닫아 내부를 어둡게 한 뒤 레이저로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두 손으로 레이저 불빛을 모으다가 피아노 연주를 하듯 레이저에 손가락 끝을 맞추거나, 레이저로 담뱃불을 붙이고 담배연기를 만드는 등 레이저가 공간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특히 백남준은 이 작품에서 3차원 이미지를 영사하는 장치로서 레이저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센터는 이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자 거즈로 된 커튼을 드리우고 레이저 프로젝터로 머스 커닝햄이 춤추는 비디오를 RGB 세 가지 색으로 투사해 작품을 재현했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만한 또 하나의 작품은 ‘시스틴 성당’이다. 백남준은 지난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이 작품으로 독일관 대표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백남준은 건축공사에서 임시가설물로 쓰이는 비계를 쌓아올리고, 40여개의 프로젝터를 곳곳에 매달았다. 센터는 물고기 떼와 성조기 등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영상들의 위치를 계속 바꾸며 사방의 벽에 투사해 작품을 재현했다. 이는 마치 그림이 계속 바뀌는 벽화처럼 보였다. 쏟아지는 영상과 ‘윙~’ 하고 울리는 사운드가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40여개의 프로젝터가 화가의 역할을 대신 하고 있었다. 센터는 작품 주위에 오래된 텔레비전과 모니터 등을 빙 둘러 마치 그 힘이 작품을 지키게끔 하려 했던 백남준의 전시 형태도 그대로 본떴다. 센터는 이 외에도 ‘비디오 샹들리에 No.1’, ‘촛불 하나’, ‘삼원소:원, 삼각형, 사각형’, ‘촛불 TV’ 등의 작품도 선보인다. 전시를 기획한 이수영 학예연구사는 “백남준의 레이저 작업, 대형 미디어 설치 작업 등을 생생하게 재현하려고 노력했다”며 “이를 통해 백남준이 다양한 예술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리고 관객들이 그를 새롭게 볼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김보람기자

[영화리뷰] 무더위도 얼어 붙는 극한의 공포, ‘멘’·‘곡비’…제26회 BIFAN 화제작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가 지난 7일 개막해 어느덧 오는 17일 폐막을 앞두고 있다. 호러, 고어, 스릴러 등 장르 영화 마니아에게 BIFAN은 오랜 기간 단비 같은 존재였고, 이번에도 역시 반응이 뜨거운 작품들이 여럿 있다. 그 중 개막작 <멘>은 지난 13일 정식 개봉을 통해 열기를 이어가고 있으며, <곡비>는 8일 GV회차에 이어 9일과 16일 상영에도 편성돼 그 인기를 입증했다. ■ 외면하고 회피할 때 증폭되는 근원의 공포…<멘> <멘>은 관객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편을 잃은 주인공 하퍼의 심리를 따라가는 일이다. 하지만 <멘>은 관객이 하퍼의 내면에 가까워질 수 없게 한다. 얼굴이 같은 남자들이나 허물을 벗듯 잉태와 출산을 반복하는 남자들을 만나는 하퍼가 마지막에 무엇을 마주하는가? 사실 <멘>은 관객의 입장에선 남자들의 온갖 형태가 지시하는 바를 곱씹어 보아야 하는 영화지만, 하퍼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나타내는 상징적인 면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이때 영화는 하퍼가 직면하는 공포의 형태를 강조할 뿐, 그가 자신의 내면 상태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대신 회피하고 외면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하퍼의 내면을 짓누르던 근원의 공포는 무엇이었나.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또렷해지는 순간이 되면, 하퍼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어야만 한다. 마침내 짓는 그의 엷은 미소가 과연 해방감을 말하고 있는 걸까. ■ 알면서도 통제할 수 없는 처절한 무력감의 공포…<곡비> <곡비>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와 마스크를 쓴 대만 국민들이 나오기 때문에, 팬데믹을 통과하는 현실 속 관객들이 일상의 감각을 다시금 환기할 수 있는 기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곡비>는 시작과 동시에 대만을 최악의 아수라장으로 바꿔버린다. 모든 윤리적 안전장치가 제거된 극단의 상황을 가정한 채 관객을 지옥도로 안내하는 셈이다. 익숙한 감각이 곧바로 낯선 감각으로 바뀔 때, <곡비>는 ‘영화니까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귀를 찢는 듯한 사운드와 피칠갑의 현장을 버무려 금기의 영역을 건드리고 있다. 이성을 잃고 눈이 벌겋게 충혈돼 뒤틀린 욕망을 마음껏 표출하는 존재들이 맥락과 설명이 동반되지 않은 채로 속속들이 출몰한다. 이들은 용납될 수 없는 살육과 고문 등 잔혹 행위를 즐긴다. 이때 <곡비>가 제목 그대로 정말 ‘슬픈’ 영화라면, 이곳의 사람들이 자신이 무슨 행동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성이 마비되거나 정신을 잃은 다른 영화 속 좀비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이들의 잔혹한 행위가 나열되는 것보다도 더 몸서리치게 무서운 건, 알면서도 통제 불가능한 무력감이다.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자연과 인간의 공존'…수원시립미술관, 환경 교육 전시 '휘릭, 뒹굴~ 탁!'

팬데믹이 관통한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자연과의 공존, 생태계 파괴 같은 문제들이 여전히 눈에 밟힌다.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수원시립미술관의 <휘릭, 뒹굴~ 탁!>에서 정재희, 이병찬, 최성임, 이수진, 유화수 등 5명의 작가들은 저마다 환경에 대한 관점을 개성 넘치게 풀어 놓았다. 전시는 수원시립아트스페이스광교에서 지난 8일부터 오는 9월12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선 설치, 영상 등 총 38여 점의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휘릭’, ‘뒹굴~’, ‘탁!’은 인류가 팬데믹 시기를 지나면서 겪은 감정들을 표현한 단어들이다. 환경 파괴로 인한 재난과 사회적 위기가 인류의 일상에 ‘휘릭’ 침투해 버렸다. 이를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려면 ‘뒹굴~’ 모여 연대하며 새로운 대안을 ‘탁!’ 찾아내야 한다. 이번 전시는 그만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정재희의 ‘이상한 계절’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은 늘 변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기준을 세워 환경을 조종한다. 온·습도를 조절하는 전자제품들 역시 적정 조건을 맞추는 용도인데, 이 같은 기구들이 한 곳에서 무의미하게 전력을 소모하고 있다. 정 작가는 인간에게 당연한 것이 자연에겐 이상하지 않겠냐고 질문을 던진다. 다음 전시장에선 이병찬의 독특한 구조물이 눈길을 끈다. 그는 폐비닐과 플라스틱, LED 조명과 모터 등으로 '크리처'를 만들었다. 호흡과 움직임을 통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속이 텅 비어 있어 자본사회의 허상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같이 전시되는 ‘파동의 언어’를 통해 이 작가는 보이지 않는 호흡과 거대한 질량으로 이뤄진 도시의 이미지를 공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이어 최성임의 작품들은 5개의 섹션으로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고랑’을 시작으로 ‘맨드라미’와 ‘간격’을 만나고 ‘황금이불’을 지나면 ‘Holes’가 기다린다. 작가는 이질적인 물성의 연결과 충돌에 몰두한다. 다양한 소재와 그에 따른 조명 배치로 인해 각 구조물이 서로 독립되지 않고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사물들이 지닌 변화와 지속의 상태를 짚어볼 수 있다. 이수진의 공간에선 매체를 넘나드는 체험의 장이 열린다. '별의 돌림노래', ‘죽은 새들의 별자리’는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입체 오브제를 통해서 포용해야 하는 가치에 관해 말한다. 12분 남짓의 영상 ‘아울러 프로덕션’은 자연현상의 불협화음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마지막으로 유화수는 긴 복도형 공간에 2010년부터 공사 현장에 버려진 산업폐기물과 각종 자재들을 채워 넣었다. ‘건설’적인 명분으로 자연의 영역을 파괴해 온 ‘건설’ 행위에 주목하는 작가는 터전을 잃거나 방치되는 것들의 이면을 들여다 봄으로써 인간의 노동 가치와 유용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이연주 학예연구사는 “체험형 전시를 통해 일상과 맞닿은 환경 문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며 “작가와 미술관과 관람객의 상호작용을 활성화하는 데에 중점을 뒀다”고 전했다.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한국 채색화의 역할은?’…국립현대 과천관 '생의 찬미'

민화, 궁중회화, 종교화 등 한국의 채색화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이며 교훈을 전하고 역사를 기록하는 등 우리 곁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채색화는 수묵 감상화 위주의 미술사 서술이 주를 이루고 역할을 지닌 회화를 순수예술로 보지 않았던 탓에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소외됐었다. 이제는 한국의 채색화와 그의 역할을 조명하며 기울어진 한국미술사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떨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야심차게 선보이는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에서는 채색화의 전통적인 역할에 주목했다. <생의 찬미>라는 전시 명은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성악가인 윤심덕이 인생의 허무함을 담아 불렀던 ‘사의 찬미’와 반대되는 의미로 지어졌다. 채색화는 새해 첫날, 돌잔치, 결혼식 등 삶의 여러 순간을 축하하는 의미로 쓰였기에 복을 불러일으키고 축복하는 채색화의 역할을 조명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번 전시는 전통회화의 역할을 ‘벽사’, ‘길상’, ‘교훈’, ‘감상’ 등 4가지 주제로 설정해 ▲마중 ▲문앞에서 : 벽사 ▲정원에서 : 십장생과 화조화 ▲오방색 ▲서가에서 : 문자도와 책가도, 기록화 ▲담 너머, 저 산 : 산수화 등 6개의 섹션으로 구성했다. 왕신연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는 채색화의 역할에 방점을 두고 기획한 전시며 ‘이 시대의 채색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이기도 하다”며 “역할 자체를 들여다 봄으로써 한국화의 기능을 확대하고 우리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기획의도에 대해 설명했다. 첫 번째 ‘마중’에선 가장 한국적인 벽사 이미지인 처용을 주제로 한 스톤 존스턴 감독의 영상 ‘승화’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국립무용단이 만든 4명의 처용은 춤으로 역신(疫神)과 인간의 폭력성을 정화시킨다. 춤이 시작되면 공간 가운데 있는 관람객이 중심을 상징하는 노란색 처용이 돼 벽사에 동참할 수 있다. ‘문앞에서 : 벽사’에선 신상호 도예가의 ‘토템상’을 볼 수 있다. 길상과 벽사의 의미가 담긴 장승, 솟대 등 한국의 전통 조형물과 아프리카의 원시적이고 과감한 아름다움을 결부한 작품이다. 또한 ‘오방신도’, ‘호작도’, ‘수기맹호도’ 등 전통적인 도상들이 한애규의 ‘기둥들’, 오윤의 ‘칼노래’ 등과 합을 이룬다.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정원에서 : 십장생과 화조화’다. 전통적인 길상화인 십장생도와 모란도 등 19세기 말 작품부터 길상의 의미와 표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최근의 회화까지 폭넓게 감상할 수 있다. 접시꽃, 모란 등이 화려한 색과 어우러져 한국 채색화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이외에도 오방색을 소재로 한 김신일의 ‘오색사이’, 거대한 4마리의 호랑이가 있는 이정교의 ‘사·방·호’, 8명의 작가들이 선보이는 문자도와 책가도 등 격변의 시기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기록화를 경험하며 채색화의 변주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오는 9월25일까지 진행되는 전시는 강요배, 박대성, 박생광, 송규태, 이종상 등 총 60여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윤범모 관장은 “단청, 불화, 민화 등으로 꾸준히 채색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채색화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동안 미술사에서 채색화가 다뤄지지 않은 것을 반성하고 우리 민족의 회화 역사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은 전통의 채색화를 현대적으로 톺아보고 미래를 논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지점에서 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관람객 박소진씨(42)는 "채색의 전통이 특정한 분야, 민화 등 다양한 형태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데 한국 채색화의 역사와 이야기를 마치 역사책을 읽는 듯 알게 됐다. 전시의 좋은 기획과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며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한국 채색화의 다양한 쓰임을 논하는 일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은진기자

[공연 리뷰] 용기내면, 상처는 봉합된다...연극 '해피버스데이'

모든 딸의 이야기이자 모든 엄마의 이야기인 연극 <해피버스데이>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수원시립공연단이 수원SK아트리움 소공연장에서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선보인 이 공연은 일본의 원로 작가 아오키 가즈오가 쓴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극화한 작품이다. <해피버스데이>가 지금 이 시점에 관객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팬데믹 기간 동안 타인과의 교류는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가까운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해 크고 작은 마찰을 겪었던 시기를 지나 왔다. 엔데믹으로 향하는 대면 전환기를 통과하는 지금, 연극<해피버스데이>는 모두에게 숨겨온 비밀을 용기 내서 직면하는 방법, 오랜 시간 쌓여 왔던 갈등의 벽이 허물어지는 과정, 대면과 접촉의 필요성에 관해 말한다. 이 공연만큼 이 시기에 관객과 만나기에 적절한 연극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해피버스데이>는 엄마 성희로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존재를 부정당한 딸 유아의 고군분투지만, 한편으로는 엄마(할머니)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성희의 고백록이기도 하다. 엄마는 딸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없었고, 유아도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관객은 그들의 내면이 변화되는 과정을 같은 무대 위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교차 연출로 생생하게 만나게 된다. 성희가 상담실에서, 유아가 엄마의 예전 방에서 각자 내뱉는 속마음이 교차되면서 관객의 마음을 자극한다. 음악 역시 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면서 이들의 상처가 극복돼 가는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 마침내 성희는 딸 유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딸 유아 역시 엄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할머니 역시 응어리진 마음을 밖으로 꺼내서 진솔한 고백을 늘어놓는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만난 윤경란씨(60)는 입구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윤 씨는 “할머니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잘못을 유아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볼 때 울컥했다”면서 “더 늦기 전에 할머니, 그리고 엄마와 유아가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전했다. 이처럼 <해피 버스데이>는 세대에 걸쳐 반복되는 아픔의 굴레를 끊어내려고 한다. 극의 초반부에 유아가 상담 선생님께 질문을 던지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질문이다. 유아의 질문이 후반부에 이르러 ‘내가 먼저 엄마를 사랑해야겠다’는 행동으로 바뀔 때,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던 상처가 봉합될 수 있겠다는 자그마한 희망이 생겨난다. 송상호기자

[영화리뷰] '브로커', 햇살과 그늘을 함께 잡는 고레에다의 시선

배우 송강호에게 제75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브로커>(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난 8일 개봉했다. <어느 가족>(2018)으로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일본의 거장과 한국 영화계의 만남으로 개봉 전부터 전 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 온 작품이다. <브로커>에는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한 아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이 담겼다. <브로커>는 관객에게 난감한 질문을 펼쳐놓는다. 엄마가 아이를 버리는 이유에 대해 관객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의 행위도 입양 알선, 아동 유괴와 인신매매로 얽혀 있으며, 심지어 이들을 쫓는 형사들마저도 함정수사와 범죄 유도가 뒤섞인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처럼 <브로커>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생명 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쟁점을 다루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늘 사회의 주변부를 맴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왔다. <브로커>도 이 같은 소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를 민감하게 끄집어낸 뒤 어려움에 처한 인물들 각자의 사연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이때 영화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여정을 함께 하는 이들이 뜻하지 않게 서로를 가족처럼 받아들이는 순간들도 놓치지 않는다. <브로커>는 한없이 어두운 길을 택하지도 않고, 애써 밝아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가 고레에다 감독의 연출작이라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감정 묘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소영(이지은)과 상현이 기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선 햇살이 비치는 곳과 그늘이 드리우는 곳을 동시에 잡아내려고 하는 감독 특유의 연출 방식도 엿볼 수 있다. <브로커>에서도 역시 그의 시선은 예사롭지 않다. 사람 사이의 갈등을 바라볼 때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의지의 표출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은 늘 빛과 어둠이 혼재하는 곳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송상호기자

[공연 리뷰] 백마디 말보다 빛난 노부부의 사랑

“말은 저렇게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현시대를 살아가는 ‘애증의 부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공감을 느낄 대사다. 서로가 사랑하는지, 소중한 가족인지 말로 표현하지 않아 평생을 모르고 살지만 ‘내 남편이니까’, ‘내 아내이니까’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마음을 드러낸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한 노부부의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눈가를 적시며 공감을 산 연극이 3일간의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 27일부터 29일까지 수원SK아트리움에서 진행된 수원시립공연단의 가족극 <바람, 다녀가셔요>다. 공연은 시골 장터를 배경으로 각자의 진심을 가슴에 묻고 살았던 노부부의 이야기를 담았다. 젊은 시절 자신을 구하다 불구가 된 ‘김씨’를 마음에 품고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아온 ‘순자(손숙)’과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 번 해준 적 없는 남편 ‘박씨(이순재)’가 ‘사는 방식’을 보여준다. <바람, 다녀가셔요>의 순자는 ‘가정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모습을 박씨는 ‘무뚝뚝하고 괴팍한 남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노부부지만 한 번도 자신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말한 적이 없다. 그저 짜증 섞인 걱정과 무심한 듯 챙겨주는 말이 전부다. 특히 순자는 첫사랑인 김씨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알고 있는 박씨는 김씨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공연 속 둘은 평생을 싸워온 사람들처럼 짧은 대화를 하는 것이 전부다. 더욱이 과거에는 사랑의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결혼하는 부부들이 많았다. 이혼도 흔치 않아 의무적으로 살곤 했다. 그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참고 사는 것’이다. 이는 순자가 남편과 못살겠다며 집을 뛰쳐나온 딸에게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이 착해서 그런 거야, 너가 조금만 더 참으면 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더 참으면 가정을 지킬 수 있다는 막연한 심정을 표현했다. 또한, 순자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박씨의 걱정뿐이다. “우리 영감 바지만 널고 갈게요, 닭 사료 주는 것을 잊었어요”라고 말하며 쉽게 떠나지 못하는 순자의 모습에서 가족을 생각하는 엄마, 아내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다. <바람, 다녀가셔요>는 특별한 명대사, 명장면이 없다. 그저 묵묵히 관객 깊은 곳에 있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진심을 느끼게 한다. ‘애증의 부부’의 정 많은 말과 행동을 통해 큰 울림을 안겨준다. 남편과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는 박진수씨(57)는 “공연 내내 울컥하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공연 속 부부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부부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배우들의 대사 하나 하나가 마음에 와닿아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공연이었다”고 말했다. 김은진기자

[전시 리뷰] 선조 지혜로 살펴 본 기후위기…실학박물관 '인류세, 기후 변화의 시대'展

지금은 더위가 문제지만, 예전엔 추위가 문제였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따뜻한 미래’를 이뤄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그리고 크고 작은 기후 위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텨왔을까.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추구하며 현재의 이상 기후를 짚어보는 전시 <인류세, 기후 변화의 시대>가 오는 9월12일까지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위험에 빠진 지구를 살리기 위해선 성장 위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주장했던 자연친화적 사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메시지에서 시작됐다. 세계 최초의 강수량 측정기인 측우기, 대기근(大飢饉) 속 춥고 배고픈 백성을 구제하려던 대동법 등을 통해 오늘과 내일을 진단해보자는 취지다. 전시는 ▲1부 ‘하늘을 살피다’ ▲2부 ‘기후변화에 대처하다’ ▲3부 ‘기후온난화와 기후행동’ 등으로 구성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기후 변화를 짧은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7~18세기 소빙기가 조선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자세히 서술돼 있다. 추운 날씨를 이겨내려 온돌의 설치가 늘면서 땔감의 수요가 증가했고, 이것이 다시 산림의 황폐화를 가져왔다는 등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또 지구온난화 시대에 들면서 유명해진 기후변화 그래프 ‘하키스틱 커브’를 전시장 끝에 크게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끝이 더 오를지 내릴지’ 생각하게 한다. 무형(無形)의 실학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의 기후 위기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교육적이고 특별한 전시였다. 무엇보다 전시장 내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와 ‘송시열 초구’가 인상깊다. 국보로 지정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경우, 조선후기 때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 측우기다. 경기관찰사가 정조에게 보고했던 강우량 기록 등을 통해 국가 주도로 기상관측체계가 운영됨을 보여주고, 재해를 대비하며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어 송시열 초구의 경우, 왕이 하사한 의복이자 19세기 이전 털옷으로 유일하게 남은 자료다. 실학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복식사와 함께 옷을 재현해냈다. 추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담비털로 만들어진 저고리를 입은 시점으로 점쳐진다. 이 밖에도 날씨 변화에 따라 전염병이 번져나갔을 때의 이야기, 가뭄·홍수 등 재해로 농경 문화가 변화한 이야기 등을 배워볼 수 있다. 정성희 실학박물관장은 “이번 전시로 우리 선조들이 기후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적응하려 했는지 살펴보고, 인류가 맞닥뜨린 기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관람객들과 고민해 보고 싶다”고 전했다. 이연우기자

[전시리뷰] 사상 첫 ‘친일’ 전시…경기도박물관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개막

근대 이후 한국은 수십년간 ‘식민지’라는 암울한 터널을 지났다. 그런데 이 터널이 마냥 캄캄하지만은 않았던, 오히려 대대손손 부(富)를 구축하는 계기가 됐던 이들이 있다.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이다. 국내에서 이완용·송병준·홍사익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초점을 맞춘 첫 번째 전시가 시작됐다. 지난 4월27일부터 오는 9월12일까지 경기도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선보이는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이다. 그간 역사·독립운동 기관에서 친일을 일부 코너로 담아 소개한 전시는 있었지만 전시의 대표 주제로 선정한 건 이번이 최초다. 경기도박물관은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소위 ‘이완용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얻는 게 뭐냐’는 고민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주변 만류도 컸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친일파들의 행적을 짚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이 얼마나 숭고했는지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경기도박물관은 전시를 구성하게 됐다. 아울러 이번 전시는 경기도의회가 지난해 5월20일 제정한 ‘경기도 일제 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에 따라 기획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경기문화재연구원·지역문화교육본부 등 다양한 기관과 단체의 후원을 받아 진행했다. 전시는 ▲제1부 ‘대한제국의 비극, 그들의 선택’ ▲제2부 ‘항쟁과 학살, 그날 그곳을 기리다’ ▲제3부 ‘친일과 일제잔재’ ▲제4부 ‘유물로 만나는 경기도의 독립운동가’로 구성됐다.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서화, 판화, 사진, 영상물 등 200여 점을 볼 수 있다. <임오군란 다색판화>(35x71㎝)에선 일본군이 위풍당당하게 지시하는 듯한 모습이, <안성 마츠자키 대위 전투 그림>(35x900㎝)에선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군이 비겁하게 도망가는 모습이 보여 일본의 역사 미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경기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만세운동(총 367회)을 전개하며 격렬하게 싸워온 만큼 그 모습 역시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대한 유화 <제암리 뒷동산 만세소리>(200x255㎝)는 물론 청사 조성환이 쓴 가방(17x25x8.3㎝), 류근 선생의 건국공로 훈장증(38.2x51㎝) 등이 전시됐다. 경기지역의 항일운동유적 120곳의 분포 지도 및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전국 4천857명 중 경기도 약 320명)를 한 눈에 볼 수 있기도 하다. 메인은 제3부다. 경기도의 주요 항일독립운동가와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못 박으며 을사조약·정미조약·병합조약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 명단’도 내걸었다. 에필로그는 김구의 ‘나의 소원’(1947)이다. 김기섭 경기도박물관장은 “유사 이래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애국심을 가질만한 시기가 있었을까 싶다. 김구 선생의 희망대로 ‘문화 강국’의 길에 들어서면서 지금 서있는 우리가 100년 전 그때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메시지를 던진다”며 “그간 우리나라에 ‘친일’을 다룬 전시는 없었는데 이번 전시가 일종의 마중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앞으로의 역사적 방향도 짚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연우기자

[전시리뷰] 수원 111CM '특색 : 타인의 영역' 展

세상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색이 있다. 우리는 다양한 색을 일상에서 마주한다. 같은 색이어도 누가 보고,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색의 표현이 달라진다. 형형색색 봄꽃이 만개한 오늘날 지금 여기 ‘색의 특성’으로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지난 12일 수원 111CM에서 포문을 연 <특색 : 타인의 영역>이다. 오는 6월19일까지 진행되는 이 전시는 김원화·김양희·조윤진·싸비노 등 4명의 작가가 참여해 영상, 조각, 회화 등 총 5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특색 : 타인의 영역> 관람 포인트는 색의 특색이다. 작가들은 색을 통해 어떠한 대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형태와 성질과는 다르게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관람객의 시각적 자극에서 오는 감성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며 관람객들은 작품을 통해 색을 본질에 접근하고 색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이 있다.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을 채도 높은 색으로 표현한 싸비노 작가의 작품이다. 싸비노 작가는 우연히 얻는 색감을 이용해 건물, 카세트테이프, 연필 등 주변이나 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낯익은 대상을 색다른 모습으로 담아냈다. 특히, 그는 파랑-빨강, 주황-검정 등 보색대비가 되는 색을 사용해 사물을 명료화했으며 사물의 형태 역시 각진 부분을 생략해 단순화시켰다. 다양한 물성과 질감은 담은 ‘돌출 회화’를 작업하는 김양희 작가는 우레탄 폼, 물감 등을 이용해 촉각적 경험을 극대화했다. 김양희 작가는 ‘자주빛 숲’, ‘핑크빛 숲 No.3’, ‘푸른 협곡’ 등 작품으로 숲, 바다 등 다양한 자연에 주목했으며 분홍, 자주, 파랑, 노랑 등 비슷한 계역의 색을 조합해 각각의 질감과 색을 구분했다. 관람객들은 각각의 색을 인지하며 시각적인 훈련을 할 수도 있다. 김양희 작가 작품 반대편엔 낯선 세상을 탐색한 김원화 작가의 작품 ‘표류-발견-이야기 레이어드룸’이 펼쳐져 있다. 김원화 작가는 가상공간을 만들어 내 인공지능이 가상공간을 탐색하게 한다. 이어 인공지능이 가상공간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들에 색과 관련한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붙인 소재로 문장을 생성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전시장 끝자락에 위치한 조윤진 작가의 작품은 화려한 색감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조윤진 작가는 열두 가지 테이프를 조합해 수백 가지의 색을 만들고 인물과 동물의 다양한 표정을 그려냈다. 조 작가의 작품은 있는 그대로의 표정을 담아냈지만 다양한 색이 어우러져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시장을 찾은 김미현씨(35)는 "화려한 색감과 독특한 표현으로 보는 내내 작품에 빠져들게 됐다"며 "색다르면서도 독특한 작품들을 보며 그동안 가졌던 여러 고정관념도 깨진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수원문화재단 111CM 관계자는 “전시는 ‘특색(特色)’이라는 단어로 대상이 갖추고 있는 보통의 것과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 “관람객들은 작가들의 각기 다른 영역에서 특색 있는 작품과 관람객의 예술적 소통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전시리뷰] "고립된 예술인의 고민"…'땅은 잠든 적 없이展'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혼자인 생활을 즐긴 이들이 있다. 혼자인 생활은 사회와 단절을 만들기도 했지만, 예술적 역량을 더 강화시키기도 했다. 고립된 레지던시와 단절된 사회 안에서 예술인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보여주는 전시가 열렸다. 지난 4일까지 아트스페이스 광교에서 진행된 수원아트스튜디오 푸른지대창작샘터 입주작가 기획전 땅은 잠든 적 없이다. 이번 기획전을 시작으로 오는 13일부터 9월까지 푸른지대창작샘터에서 릴레이 개인전을 이어나간다. 수원문화재단은 코로나19가 시작된 지난해 지역예술인들이 활발한 교류와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 수원아트스튜디오 푸른지대창작샘터를 마련했다. 이곳에 입주한 1기 작가들은 조용해 보이지만 잠들지 않고 계속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땅의 활동을 예술인들에 빗대었다. 1기 입주 선정작가는 고창선, 곽지수, 레레, 박영학, 박지현, 박형진, 박혜원, 봄로야, 송영준, 아웃스톨러, 이지현, 정진, 채효진, 한유진 등 14팀의 작가들이며 회화, 설치, 영상, 사진 등 총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아크릴 페인팅, 도자, 숯, 쇼핑백 등 이들이 작품에 활용한 재료는 제각각이며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지만 각기 다른 매력을 선보이며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은 조화를 이뤄나갔다. 박영학 작가는 같은 한국화를 하더라도 어떤 재료를 사용하고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에 따라 다른 한국화 작품이 나온다며 개성 넘치는 예술인들과 소통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루는 주제 역시 다양하다. 일회성으로 소모되고 쉽게 교체되는 약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작품부터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인 이동을 조명하기도 하며 공간의 한계를 넘어 소통이 가능한 것을 실험하기도 하는 등 삶과 사회적인 이슈를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들의 작업은 코로나19로 무기력함이 계속되는 가운데 타인 간의 관계, 정체성과 공동체 등 동시대 주제를 탐구하고 불안과 무기력, 우울을 호소하며 팬데믹 시대를 차분히 바라보고 관람객들에게 다가올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전시관을 찾은 윤선희씨(29)는 "제각각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예술작품들이 작가들만의 개성이 넘치게 표현돼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게 흥미로웠다"면서 "무의식에 자리잡아 당연하게 생각했던 어떤 것들로 약자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는지, 생각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은진기자

[공연리뷰]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 꺼낸, 수원시립공연단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수원시립공연단 정기공연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 공연 장면 학교폭력, 동성애, 노부모 부양.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이지만 선뜻 나서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이 쏟아져나온다. 단순히 이들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왜 말할 수 없었는지, 말하지 못했던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하며 자연스럽게 위로를 준다. 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 올랐던 수원시립공연단 제15회 정기공연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이다. 공연은 도시개발로 폐관을 앞둔 영화관 레인보우 씨네마를 배경으로 한다. 폐관을 앞뒀지만 등장인물들은 마냥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영화관을 나가 무엇을 할지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무덤덤하게 영화관 정리에 나선다. 폐관을 계기로 영화관 주인 조한수와 초대 주인 조병식, 한수의 아들 조원우 3대가 모이고 폐관을 도우러 온 태호, 희원, 수영, 정숙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학교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한수, 병식, 원우와 서로 사귀고 있지만 동성애자라는 것을 숨겨야 하는 태호와 원우, 치매를 앓는 부모를 홀로 모시며 힘들어하는 정숙,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이 무서워 인형 탈을 쓰고 지내는 수영 등 각자가 가진 고민을 서서히 공유한다. 서로의 아픔을 말하지만 활기찬 분위기가 계속된다. 단순히 폐관을 앞둔 동네의 작은 영화관 속의 이야기를 다루는 줄 알았던 공연은 한수의 죽은 둘째 아들 원식의 언급으로 분위기가 전환된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원식의 아픔을 알아주지 못해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 한수,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으로 동생의 아픔이 왜곡될까 봐, 또 자신이 외면당할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산 원우가 대립하면서 이들이 그동안 묻혀둔 속마음을 쏟아낸다. 등장인물들이 울음을 터트리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동안 관객들 역시 외면당하거나 외면했던 문제에 공감하며 같이 눈물을 보였다. 20대의 젊은층부터 50대의 눈물을 훔치는 한 남성까지. 지난 3월 수원시립공연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후 첫 정기공연을 선보인 구태환 예술감독은 정의신 작가와 관객에게 진한 여운과 감동을 선사했다.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에 등장하는 인물과 그들의 대사와 몸짓은 거창하지 않다. 대단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선뜻 말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무거울 수 있는 것들을 등장인물들만의 농담으로 풀어나가 아픔을 위로하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관객들의 반응은다양했다. 모처럼만에 위로 받는 인생극을 한 편 봤다는 반응부터 작지만 따뜻한 이야기로 가슴이 뭉클하다는 반응이었다. 20대 자녀와 함께 연극을 관람한 이지현씨(56)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잔잔한 감동이 남아 특별한 시간이었다"면서 "지쳐있는 요즘, 이런 따뜻한 공연을 만나게 돼 좋았다"고 밝혔다. 김은진기자

[공연 리뷰] 우리가 몰랐던 ‘꼰대’ 이야기…수원SK아트리움 ‘행궁동 사람들’

보다가 울컥하더군요, 50대라면 충분히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꼰대, 나 때는~ 20, 30대가 50대를 생각하는 이미지다. 조언과 충고를 일삼으며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꼰대들에게도 고충이 있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 뒤처지는 것 같고 젊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지만 소통의 방식이 변해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꼰대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이 있다. 지난 11일부터 수원SK아트리움 소공연장에 오른 창작뮤지컬 행궁동 사람들이다. 행궁동 사람들은 어르신들이 살았지만 ~리단길이 붙어 카페거리로 변한 행궁동의 옛 모습을 보여주며 신세대와 기성세대의 입장을 이야기한다. 행궁동의 터줏대감 정씨의 오래된 세탁소 인근에 프랜차이즈 세탁소 크림토피아가 문을 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세탁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정씨는 젊은 사장인 홍재가 돈만 벌어서 혼자 잘 살려고 한다, 애송이라고 생각하며 견제를 하게 된다. 홍재는 정씨를 사사건건 참견 부리는 꼰대라고 생각하며 대화조차 하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한다. 공연은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가 대화하는 모습을 통해 소통의 방식을 깨닫게 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오해를 풀어준다. 동네사람들이 서로 돕는 모습을 본 홍재는 따뜻한 정을 느끼고 꼰대라고 외면하던 정씨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정씨 역시 지킬 것은 지키고 버릴 것은 버리며 젊은 세대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뮤지컬 넘버 역시 이야기를 더 몰입하게 한다. 행궁동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넘버와 젊은 세대의 열정을 느낄 수 있으며 홀로 딸을 키우면서 희생한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공연을 본 50대 남성 관객은 공연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한 넘버를 듣고 울컥해 눈물이 나올뻔 했다며 그동안 말못했던 것들을 위로받고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공연이었다고 말했다. 공연은 오는 19일까지. 김은진기자

[공연리뷰] 공연으로 다시 태어난 교과서 문학, 수원시립공연단 '북어대가리'

글자로만 읽히던 문학 작품이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되살아났다. 지난 21일 오후 7시30분께 수원SK아트리움 소공연장에서 열린 수원시립공연단의 기획공연 북어대가리다. 이번 공연은 수원시립공연단이 수원교육지원청과 함께 한 청소년 영상예술 교육사업으로 교과서로만 읽던 희곡 작품을 영상화해 청소년들의 학습효과를 극대화 시키려고 마련됐다. 공연은 영상으로 제작돼 2학기가 시작하면 수원시 내 여러 학교로 전달, 학생들의 교육자료로 쓰일 예정이다. 이강백 작가의 북어대가리는 이정민 수원시립공연단 극단 상임연출의 손에서 다시 탄생했다. 이 상임연출은 이번 공연에서는 탐색과 발견, 떠남과 머묾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대조적인 관계를 표현하고자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대로 북어대가리는 창고 속에서 발생하는 두 주인공의 갈등으로 성실하게 사는 것이 꼭 옳은 것인가?, 인간의 가치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미 여러 번 연극으로 각색돼 무대에 오른 북어대가리는 관객들과 만나 왔다. 많이 알려진 만큼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코로나19로 공연장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학생을 위한 교육과 문화를 접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4명의 배우는 기존에 어떤 얼굴과 성격을 가졌는지 모를 정도로 기임, 자앙, 다링, 트럭운전수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배우들은 작은 무대를 창고로 만들었고 2시간 동안 빈틈없이 가득 채웠다. 특히 공연은 학생들의 문학 작품이라는 특성을 그대로 녹여냈다. 배우들은 학생의 관점에서 쉽고 정확하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담담하지만 강렬한 배우들의 연기로 따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을 찾아보지 않아도 북어대가리가 가진 의미를 쉽게 해석할 수 있었다. 글자로만 읽히고 문장 하나하나씩 분석해야 하는 것과는 다르게 배우의 움직임과 감정선이 변화하는 모습, 표정, 무대의 구성, 음악 등을 통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공연은 뒤통수를 한 대 친 것과 같은 충격을 준다. 머리만 덜렁 남은 북어와 같이 혼자 남겨진 자앙을 통해 여전히 소모품처럼 소비되는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무엇인지, 그저 성실하면 옳은 삶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답은 명확하게 나오진 않지만 관객들에게 사색의 시간을 가지게 한다. 그저 연극으로 각색된 문학 작품이 아닌, 현대인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두 시간이었다. 김은진기자

[공연 리뷰]국악과 전자 음악의 만남... 색다름 선물

낯선 음악과 낯선 음악의 합. 지난 10일 오후 4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 시즌 2021 공연 시나위 일렉트로니카는 완벽하게 서로 다른 음악이 만나 색다른 익숙함을 선사했다. 조금은 이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악과 일렉트로닉 음악의 합은 보기 드물 뿐만 아니라 아직 낯설다. 영상과 조명 또한 아울렀다. 공연은 지루하고 이상할 것이라는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다. 1장부터 5장까지 진행될 동안 대극장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가득 채워졌다. 막이 오르고 하임(haihm)과의 아미고가 시작됐다. 웅장한 전자 음악이 진동하고 대금과 소금, 아쟁과 해금 등이 전자 음악에 맞춰 연주하기 시작했다. 다른 장르의 음악이지만 합을 맞추어 가며 서로 음악을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과정을 담아냈다. 두 번째 아킴보(Akimbo)의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박수를 치고 몸을 움직이는 등 더 여유롭고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무대였다. 전자 드럼 소리와 북과 장구 등의 타악기가 어울려 빠른 박자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해금과 대금의 청량한 소리와 거문고와 가야금이 중심을 잡아 한 층 더 경쾌하고 밝은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선보였다. 여노(YeoNo)와 함께 한 화에서는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붉은 레이저 조명과 함께 전반적으로 어둡지만 높은 소리를 내며 우리가 가진 화와 한, 대화를 표현해냈다. 낮은 일렉트로닉 음악과 함께 피리, 아쟁 등 시나위만의 소리가 쌓여가면서 화에서 한, 한에서 대화로 화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120여분간의 연주는 합이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두 음악이 하나가 돼 완벽한 합을 보였다. 1장의 시작에선 차츰 시나위와 일렉트로닉 음악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2ㆍ3장에서는 관객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4ㆍ5장에선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완벽하게 표현돼 하나의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다. 공연은 이질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두 장르의 음악이 익숙해졌고 곧 색다름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국악과 일렉트로닉 각각이 가진 본래의 특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국악에 맞춰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 것도 아니었으며 일렉트로닉 음악에 맞게 국악을 끼워 맞춘 것도 아니었다. 서로 음악에 맞추며 현대 악기와 우리 전통의 악기가 만들어낸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만의 음악이었다. 김은진기자

[전시 리뷰] 유머는 진중함 보다 강하다, 백남준아트센터 '웃어'

예술은 인간의 모든 창조적인 행위를 일컫는다.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요리하는 것도, 머리를 물감 통에 집어넣어 흰 종이에 그려내는 것도 모두 예술이다. 고급 예술과 사회 통념에 반기를 들고 자유로운 연대를 지향했던 1960~70년대 전위예술 플럭서스는 예술을 일상으로 확장하고 변화시켰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지난 1일 개막한 2021 백남준전 웃어는 플럭서스를 통해 백남준을 바라본다. 재치와 유머, 그 안의 해학은 플럭서스 운동과 백남준 세계의 핵심이다. 백남준과 플럭서스 작가들의 작품과 아카이브 200여점을 통해 플럭서스의 당시 활동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전시의 출발점은 장피에르에게다. 플럭서스를 적극 후원했던 장피에르 빌헬름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평범한 일상의 행동을 통해 장피에르를 추모한 백남준의 사진이 걸렸다. 걷고, 뛰고, 행인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고 웃는 일상의 행동으로 예술과 삶의 경계를 흐리고 예술매체에 질문을 던진 장피에르를 추모한다. 고스기 다케히사의 사우스 2번 (백남준에게)(1964) 영상은 일상 행위의 원래 목적을 상실하고 새로운 예술적 의미를 부여할 가능성을 탐구하게 한다. 작품은 백남준의 이름자 중 하나인 남(南)과 영어단어를 교차해 만든 헌정곡이다. 15분간 사우스 발음을 최대한 늘려 여기서 파생하는 새로운 예술적 의미를 부여한다. 최초의 휴대용 TV(1975), 컬러의자, 흑백의자(1984), 냄비(한국 조리법)(1985) 등 일상성을 구현한 백남준의 작품도 전시됐다. 전시는 관객에게 보면 볼수록 색다른 재미와 의미를 부여한다. 작품을 제작하려고 신체를 매치로 활용하고,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선문답과 같은 지시문으로 질문을 던진 백남준의 유머를 깨알같이 발견할 수 있다. 제도, 규범, 통념을 받아치는 백남준식 웃음의 반격을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문제에 대입해 보면 좋지 않을까. 유머는 때론 진중함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리투아니아 출신인 조지 머추너스의 작품을 대여하기 위해 요나스 메카스 비주얼아트센터, 빌뉴스 시, 리투아니아 문화원, 리투아니아 대사관과 2018년부터 협력해 대규모 플럭서스 컬렉션을 선보였다. 박상애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실장은 백남준은 짜인 틀이나 규칙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새로움을 도전하고 실험했다며 백남준식 웃음의 반격을 일상에 비춰보는 재미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일까지. 정자연기자

[공연리뷰] 수원의 독립운동가 김향화를 조명, 경기아트센터 창작가무극 [향화]

일제강점기, 잊힌 독립운동가가 있다. 수원에서 32명의 기생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 열사다. 기생이라는 이유로 김향화 열사에 대한 자료와 기록이 충분하지 않으며 32명 기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다. 삼일절을 앞두고 경기아트센터가 서울예술단과 함께 19일부터 21일까지 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 김향화 열사의 삶을 되살렸다. 창작 뮤지컬 향화다. 적막이 흐르는 무대 위, 매일신보 퇴역 기자(강상준)는 오랜 수소문 끝에 만나고 싶던 그녀를 만난다. 기자는 그녀의 오래전 소식을 묻고 여러 번 거절하던 그녀가 입을 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순이(송문선ㆍ김나니)는 일제강점기, 아버지 김인영이 앓아눕게 되자 곤궁한 집안 사정으로 15세 어린 나이에 수원까지 시집을 간다. 이 장면에서 #5. 내 나이 열다섯을 통해 어린 나이 집안 사정으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어린 순이를 표현했다. 배우의 애절한 목소리와 조명을 거의 쓰지 않은 어두운 무대로 연출했으며 어린 순이와 혼례복을 입은 순이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줘 서글픈 그녀의 마음을 잘 나타냈다. 3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수원으로 야반도주하자 순이는 남편과 이혼하고 가족의 부양을 위해 인력거를 몰던 나승현(신상언)의 도움으로 수원 권번에 들어간다. 순이는 고된 수련으로 향화(香花)라는 이름으로 수원 일패기생으로 거듭나며 #14. 내 이름은 향화를 부르기 시작한다. 북과 장구를 연주하고 검무로 수련한 향화가 마침내 수원 일패 기생으로 다시 태어난 장면을 보여준다. 기생인 만큼 진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배우들이 일렬로 북을 치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줬다. 장구춤과 검무 역시 화려하지만 절제된 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향화는 32명의 기생과 함께 1919년 3월29일 수원경찰서와 화성 봉수당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된다. 공연은 #25. 우리의 이름은 그리고 너의 이름은을 부르며 33명의 기생 이름과 얼굴을 담은 조선미인도감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이번 공연은 모처럼만에 열린 뮤지컬 공연으로 코로나19 속 침체된 공연예술계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뮤지컬의 넘버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은 환호 대신 큰 박수를 보냈다. 경기아트센터는 철저한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50% 좌석 허용인 현재의 방역 지침보다 더 강화해 관객석의 30%만 열었다. 본격적인 시즌제 공연을 앞두고 열린 이번 무대는 코로나19 속 도민들이 안전하게 다양한 문화 공연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주인공 향화역을 맡은 김나니 소리꾼은 곧 봄이 와서 꽃이 필 것이다라며 이번 공연을 통해 모두가 조금만 더 희망을 가지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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