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②

잠시 대기실에서 비를 피한 후 역사 지구에 예약한 숙소로 가려고 했으나 비가 그치지 않는다. 체크인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해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버스를 탄다. 한 청년에게 예약한 숙소를 이야기했더니 친절하게도 내릴 곳을 알려줘 쉽게 정류장에서 내린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줄기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역사 지구에 들어서자 그쳤다. 중세 콜로니얼 건물을 개조한 호텔에 여장을 푼다. 한 달여간 쿠바와 멕시코 여행길에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과나후아토에 5박6일간 머물 계획이다. 호텔에 부탁해 별도로 책상을 침실에 들여놓고, 여행지에서 얻은 자료 정리와 글을 쓰면서 쉬엄쉬엄 주변 명소를 돌아보기로 한다. 과나후아토는 주도(州都)로, 멕시코시티와 과달라하라 중간 지점 산악지대에 있고, 약 5만명이 살고 있다. 과나후아토의 명칭은 타라스코족 언어에서 연유한 것으로 ‘개구리 언덕(Quanax-juato)’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에스파냐 식민 지배를 당하기 이전에는 오토미, 치치메카, 타라스코족이 거주했다. 이곳은 예전부터 원주민 광부들이 소규모 채광을 이어가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손재주가 뛰어난 아즈텍족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채굴된 금과 은 등 귀금속으로 지배층의 장신구를 만들며 살았다. 1548년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초기 이곳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자 누에바 에스파냐 지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본국에서도 수천명의 채굴꾼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18세기에는 세계 최대 은 생산지로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렸고, 역사 지구에는 그 당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식민 지배를 당하던 초기 전반적으로 도시는 커지고 경제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와 하층민은 가난에 허덕이며 삶은 날로 팍팍해져 갔다. 18세기 말에는 과도한 세금 부과에 저항한 시민들이 생산된 은 중 에스파냐 왕에게 바칠 은 저장고인 카하 레알을 습격하는 일도 발생했다. 과나후아토는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민중 지향적 가톨릭 사제인 미겔 이달고가 1810년 9월에 정부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치렀던 혁명 투쟁의 발원지고, 콜로니얼시대 아픈 역사를 간직한 식민도시로 도시 전체가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멕시코 근대사의 중요한 명소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①

흥미로운 중세 건축과 마리아치 음악의 고향 과달라하라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해발 2천50m에 있는 과나후아토(Guanajuato)로 가기 위해 프리메라 플러스 버스 터미널로 간다. 멕시코 시외버스는 등급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고, 터미널 시설과 버스 수준의 차이가 심하다. 출근 시간이 지난 터라 터미널은 한산하고, 주변은 비교적 깨끗하며, 대기실에는 현지인보다 외국 여행객이 더 많은 것 같다. 현지인들은 1등급인 프리메라 플러스 버스를 이용하는데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 2∼3등급을 주로 탄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안내 방송을 듣고 승차장으로 이동한다. 승차권을 확인한 승무원은 버스 승차장 번호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짐칸에 가방을 싣고 번호표를 받아 버스에 오를 때 점심으로 음료수와 거친 곡물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를 준다. 버스 내부는 국제선 항공기 비즈니스 좌석처럼 넓고 편의 장치가 잘 갖춰져 있다. 과달라하라에서 란초 카데나와 레온을 거쳐 과나후아토까지는 약 280km다. 도로 사정은 우리나라 고속도로와 비교할 수 없는 일반 국도 수준으로 왕복 2차선이 대부분이라 주행속도를 높이기 어렵고, 교통법규도 엄격해 규정 속도를 지키며 정숙 운행한다. 어제 예약하고 받은 승차권에 ‘프리메라 플러스 버스는 과속 주행을 하지 않으며 평균 시속 70∼80km로 운행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버스가 과달라하라 시가지를 벗어나 구불구불한 산등성이 길에 오르자 광활한 사막 지형이 끝없이 이어지고, 키 큰 선인장을 재배하는 농장과 자생하는 선인장 군락도 군데군데 보인다. 창밖에 펼친 자연경관을 살피다 보니 왜 할리스코 주가 테킬라의 본고장이 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버스가 빨리 달리지 않아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좋고, 색다른 자연환경이 눈에 들어오면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하여 먼 도시 간 이동할 때보다 버스 이동도 괜찮은 것 같다. 과달라하라를 떠난 버스는 4시간 반 정도 지나 과나후아토 신시가지 터미널에 도착한다. 떠날 때 맑았던 하늘이 란초 카데나를 지날 때쯤 잔뜩 찌푸리더니 레온을 지나 과나후아토에 도착하자 굵은 빗줄기가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⑥

‘마리아치’의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그중 ‘결혼’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마리아즈(Mariage)’가 마리아치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1860년대에 프랑스군이 멕시코를 통치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성대한 결혼식에 불려 간 악사들이 축하객들이 말하는 마리아즈가 자신들과 같은 악단을 의미하는 말인 줄 알고 그 후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치’는 기본적인 악단 형태를 의미하지만 음악 장르로도 분류하고, 때로는 멕시코 민속 음악 전반에 걸친 상징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마리아치 음악은 오랜 세월 동안 멕시코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 전통의 볼레로와 더불어 가장 멕시코다운 음악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르에 속하고, 멕시코 전통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라틴 음악을 형성하는 인디오·흑인·백인 음악이라는 세 가지 요소 중 멕시코에서는 흑인 요소는 거의 볼 수 없고, 에스파냐와 원주민계의 두 요소가 섞여 멕시코 음악이 형성됐다. 마리아치 악단은 일반적으로 2개의 바이올린, 1개의 기타와 1개의 울림통이 큰 기타, 하프와 트럼펫 등으로 이뤄진다. 과달라하라에서는 매년 9월 국제 마리아치-차레리아 축제의 차로 챔피언십 대회가 열리는데, 이때는 최고의 마리아치와 차로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과달라하라 중심 역사 지구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퍼레이드에 멕시코 사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이 열광한다.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과달라하라는 유서 깊은 중세 건축물이 즐비하고, 침샘을 자극하는 다양한 음식과 감미롭고 낭만적인 마리아치의 매력은 발길을 옮기지 못하게 한다. 여행은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하며 도전하는 것이자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멕시코 최고의 신고딕 양식의 교회를 만났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은 관리인의 도움으로 세기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감상하는 행운이 따랐다. 삶의 시간은 한정돼 있다. 타인을 의식하는 삶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가슴에 품은 영감을 따라 자신의 꿈을 쫓는 용기가 중요하고, 발로 실천하여 그 꿈을 움켜쥐자. 마리아치 거리에서 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아름다운 선율을 흥얼거리며 한 여행객 노부부의 사랑스러운 길거리 춤사위가 뇌리에 아른거린다. 마리아치의 휘파람 소리를 흉내 내며 발걸음을 옮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⑤

역사지구를 벗어나 30여분 걸어 지도에 표시된 마리아치의 고향인 ‘플라자 데 로스 마리아치’에 도착한다.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 한가한 때라 그런지 띄엄띄엄 마리아치 악단이 눈에 띄나 관광객들이 그들을 찾지 않아 악기 튜닝을 하고 손님의 이목을 끌려고 귀에 익은 곡을 연주한다. 마리아치 거리엔 이곳이 ‘마리아치의 고향’이라는 표지와 상징물이 여기저기 있고, 그들을 상징하는 대형 장식과 예술작품이 길거리 곳곳에 설치돼 있다. 여행객은 기념삼아 장식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려 사진 찍기에 바쁘다. 한 현지인이 다가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해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김치” 하며 환영한다. 그리고 “멕시코 어디를 여행했고 다음 행선지가 어디냐”고 묻는다. 여행한 지역을 말하자 “원더풀”을 연발한다. “다음 행선지는 과나후아토”라고 하자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그곳은 과달라하라보다 작은 도시지만 멋진 곳이고, 그곳에서도 마리아치의 활동을 볼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는 친절하게도 이 거리에서 마리아치 활동을 제대로 보려면 어둠이 찾아든 오후 7시 이후가 돼야 한다고 알려준다. 내일 과나후아토로 떠나야 하기에 마리아치 거리에서 화려한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미국 노인 단체 여행객 앞에서 마리아치가 멕시코 출신 3인조 트리오 ‘로스 트레스 디아멘데스’가 발표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라틴음악의 고전 ‘보름달(Luna Llene)’을 연주해 잠시나마 그들의 음률과 화음에 혼을 빼앗겼다가 발길을 돌린다. 마리아치 거리에서 만난 그들의 복장은 통일성을 갖췄으나 그들의 다양한 얼굴 모습은 마치 멕시코 역사와 문화의 근간이 되는 ‘혼성’을 보는 듯하다. 그들은 지배와 피지배의 숙명으로 탄생한 유사성을 가졌지만 일찍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함께 마리아치라는 문화예술을 개척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④

교회 밖으로 나와 성당과 연결된 회랑과 부속건물을 감상하는데, 관리인은 아쉽게도 오늘은 성당 내부만 개방하고 이곳을 개방하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교회 건축물들의 조화와 일체성을 이룰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관리인의 설명을 듣고 보니 한층 교회 건물의 미학적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처럼 예기치 않은 만남과 도움은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풍미가 배가되는 경험을 한다. 친절하게 교회 내·외부를 안내해 준 관리인과 기념사진 한 컷을 찍고 역사지구로 발길을 옮긴다. 지도를 보며 과달라하라대학을 거쳐 중세 건축물과 현지인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며 기억의 고리를 엮는다. 가는 길에 왜 이렇게 가톨릭교회가 많은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콜로니얼 시대 신앙심의 발로로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지배를 위한 착취로 봐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이것 또한 혼성 문화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몇 년 전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순례길을 걸을 때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교회를 만났고, 폐허가 된 중세 교회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는데, 이곳에서는 폐쇄된 교회는 볼 수 없다. 아직도 멕시코 가톨릭은 남유럽과 달리 그 단계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멕시코는 인구 감소 국가가 아니라 성장하는 나라이기에 모태신앙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호텔에서 아침식사 때 먹었던 여운이 남아 있는 퀘사디아로 점심을 해결하고, 어제 돌아보지 못한 역사지구 서쪽 구역에서 동쪽 구역으로 돌아본다. 반경 2km 안에는 주 정부 청사, 카바냐스 문화연구소, 데고야도 극장, 할리스코의 예술가·음악가·역사적인 지도자를 기리는 기념물, 역사박물관 등 고건축물이 있다. 종교 건축으로는 성 자포판 대성당, 성 이시드로 성당, 성 베드로 성당, 나자렛 예수 성당 등 오래된 중세 교회가 여럿 있다. 교회를 둘러볼 때 콜로니얼 시대 가톨릭 교세를 짐작하기에 충분하고, 규모도 규모지만 역사성이 있는 교회 건물이 즐비한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란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③

교회 첨탑 4면에 조명을 밝히는 뮤지컬 시계와 차임이 설치돼 있다. 독일에서 제작한 이 시계는 하루 세 번 오전 9시, 정오, 오후 6시에 25개 카리용으로 곡을 연주하고 십이사도와 가톨릭교회 성인 순례자 미니어처 조각상이 등장한다. 카리용의 연주곡은 ‘Ave Maria’와 ‘National Anthem’ 등 종교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이다. 조각된 돌을 벽돌처럼 쌓아 지은 교회 내부는 천정을 바치는 돌기둥과 스테인드글라스의 환상적인 조화가 매혹적이다. 교회 전면의 장미 문양을 포함한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프랑스 Orléans의 Jacques와 Gerard Degusseau가 제작하고 시공에 참여해 1966년에 완성했으며, 스테인드글라스 화가로서 마지막 작품이 됐다고 한다. 평일 오전 이른 시간이라 기도하러 온 몇 사람밖에 없어 호젓하게 성당 내부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데, 교회 관리인이 낯선 이방인을 보고 인사를 건넨다. 한국에서 온 가톨릭 신자라고 하자 ‘성체성사 속죄교회’의 내력을 설명해 주고, 2004년 세계 성체대회 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이곳을 찾았으며, 기념으로 성당 밖에 방문 기념 조각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중앙 제대 옆 계단 아래로 따라오라고 손짓해 내려가자 지하 묘소를 둘러보게 했고, 그곳에는 이 교회 건축에 참여한 성직자와 건축설계·시공에 참여한 사람들의 무덤이 엄숙하면서도 가지런하게 묻혀 있다. 밖으로 나와 중앙 제대 뒤편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촬영하자 우측 아래쪽 한구석을 가리키며 사진 찍으라고 하여 줌으로 당겨 그에게 보여주자 바로 그 사람이 이 작품을 만든 작가라고 이야기해준다. 오래전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바티칸 미술관 스텐차 델라 세나투라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감상한 적이 있다. 그 작품에서도 오른쪽 하단에 화가인 소도마와 그 옆에 검은 모자를 쓴 라파엘로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그런 특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②

지도 한 장을 손에 들고 호텔을 나서자 어제 보았던 과달라하라 대성당의 뾰족 종탑의 황금색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현지인처럼 성당을 향하여 성호를 그으며 눈인사하고,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거리를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멕시코 제2의 도시답게 일터로 향하는 출근 시간이라 번잡하고, 비좁은 플라자 유니베르시다드 지하철역 입구는 각기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로 분주하다. 멕시코에서 지하철만큼 역사와 혼성(mestizale)을 잘 드러내는 장소는 없는 것 같다. 과달라하라대학을 스쳐 지나 걷다가 제법 규모가 큰 ‘성체성사 속죄교회’를 만나 발걸음을 멈춘다. 입구 한편에는 눈에 익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조각상이 눈길을 빼앗는다. 이 교회는 19세기 초부터 급격하게 퍼진 고딕의 복고풍인 신고딕 양식으로 지은 교회로 멕시코에서 유명하다. 1897년 8월15일에 초석을 놓았으나 종교박해와 자금 부족, 국가가 직면한 경제 위기로 인해 혁명 기간 중단됐다가 75년 후인 1972년에 완공됐다. 교회 출입문은 중앙과 좌·우 3개가 있고, 중앙 출입문이 가장 크며 좌·우 출입문은 크기가 같아 가톨릭교회의 정형적인 삼위일체 형상이다. 출입문 위에는 왕관을 상징하듯 뾰족한 삼각 형상의 외형 구조가 있고 그 위에는 각각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교회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그라나딜라 나무로 헤수스 고메즈 벨라스코가 조각했고, 목재 문 중앙에 베니토 카스타네다가 만든 청동 부조가 장식돼 있어 웅장함을 넘어 미학적 아름다움이 넘친다. 전면에서 바라본 교회 외관은 정형적인 신고딕 양식으로 3개의 출입문과 옆에 높은 첨탑이 세워져 있다. 제대 위는 과달라하라 대성당의 원형 돔과 달리 신고딕 양식의 높은 뾰족 첨탑이 세워졌다. 교회 앞 3개의 고막은 바티칸 박물관 전속 디자이너이자 화가인 프란시스코 벤시벤가가 디자인하고 바티칸의 모자이크 장인들이 만들었다. 중앙 고막은 ‘하느님의 어린 양(파스칼 램)’을 나타내고, 동쪽(좌)은 ‘성 타르시시우스’ 서쪽(우)은 ‘성 비오 10세 교황’을 의미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①

멕시코를 대표하는 문화 중 하나가 마리아치(Mariachi)다. 대도시 곳곳에서 멕시코 전통곡을 연주하는 유랑 악사 마리아치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멕시코시티 가리발디 광장에서 마리아치 연주단의 길거리 공연을 체험했는데, 그들의 고향은 과달라하라(Guadalajara)라고 한다. 여행자의 눈에 비치는 마리아치 악단의 연주는 단순한 관광 상품처럼 느낄 수 있으나, 멕시코 사람들에게 마리아치는 삶과 함께하는 의미 있는 존재다. 아이의 생일잔치에서부터 연인들에게는 사랑의 세레나데 음악이고, 결혼식 축하 행사에도 마리아치의 연주는 빠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비(La Golondrina)’는 장례식 노래로 멕시코 사람들에게 마리아치 음악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며 삶과 함께한다. 이처럼 마리아치 문화는 대가족제도가 뿌리 깊은 멕시코에서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울타리이자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멕시코는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가진 나라였으나 에스파냐에 의해 파괴됐고, 그 자리에는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가톨릭교회가 세워졌다. 침략자에 의해 인종적 문화적 혼혈이 이뤄졌고, 태양신을 믿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갈색의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종교적 변화도 맞았다. 멕시코 사람들에게 혼혈 문화와 종교적 변화는 새로운 정체성을 세웠고, 지금은 그 속에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낙천적인 삶을 산다. 이런 사회문화적 변화에서 탄생한 멕시코 음악에는 그들이 빚어낸 사랑·낭만·열정의 가치가 마리아치의 음악 속에 녹아있다. 따라서 마리아치 음악은 멕시코 사람들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렸고,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후대로 이어지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0-⑥

멕시코는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거리가 멀어 문화적 교류가 부족하지만, 여행하며 무지갯빛처럼 아름다운 광장 문화를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이어 이곳에서도 접한다. 기독교 문화가 뿌리 깊은 멕시코는 신과 소통을 위해 성가를 부르고, 일상에서도 서로 간의 인간관계는 음악으로 소통하는 듯하다. 메소아메리카 광활한 대지에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 멕시코는 인디오의 고대문명과 콜로니얼 문화를 만날 수 있는 역사와 문화의 현장이다. 여행 중에 멕시코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내 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아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귀에 익은 라틴 음악을 접하다 보니 어느새 거리감이 사라지고 그들의 리듬에 빠져 흥에 취한다. 누군가는 ‘발걸음 옮길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멕시코’라고 했다. 이렇듯 멕시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 못지않게 정열적이고 춤과 음악을 사랑하는 낭만적인 사람이 사는 나라다. 오늘도 컬러풀한 매력을 만끽하며 파노라마 같은 밤을 즐긴다. 세월의 실타래가 뒤얽혀 흘러간 시간은 추억 한 조각이 됐고, 가슴 한구석에 애틋함으로 채워진 그 순간은 이제 뇌리에 맴돌다 언젠가는 영겁의 시간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시간은 인생에서 자유를 갖게 되는 특별한 순간이므로 지금까지 누리며 살았던 인식·습관·통념의 편안함에서 벗어나 흥미진진한 새로운 경험을 찾는 여행을 즐기고 싶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여행에서 새로운 문화 예술을 만나고, 현지인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일상을 보고 느끼며 공감하는 경험이 얼마나 좋을까. 내일은 마리아치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0-⑤

벤치에 앉아 한 시간 동안 멕시코 음악을 감상한다. 경쾌한 멕시코 민요 라쿠카라차와 시엘리토 린도, 북부 텍스멕스 지역 농장의 노래 칸시온 란체라 등 몇 곡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낯익은 곡이라 따라 흥얼거린다. 멕시코 민요는 인디오와 콜로니얼 문화가 융합됐고, 대부분 매우 빠른 3박자 형식 곡이라 정겹고 흥겨운 리듬의 특성이 있다.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삼삼오오 모여 잔디밭에 앉아 연주를 관람한다. 흥을 참지 못한 관객은 정자 아래서 흥겨운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아르마스 광장은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만큼 규모가 크지 않으나 오랜 역사를 가진 과달라하라 대성당과 함께 중세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주변에는 고풍스러운 중세 건물이 즐비하다. 공연 관람을 마치고 경쾌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광장에 어둠이 드리우자 멕시코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은 불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린다. 주변에는 마리아치의 고향답게 현란한 전통 복장을 한 그들의 라이브 연주가 공원에 울려 퍼지고, 그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객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연주를 이어간다. 레스토랑에서 연인들은 이곳 할리스코 출신인 콘수엘로 벨라스케스가 1941년에 작곡한 마리아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세레나데 곡인 베사메 무초(Besame Mucho, Kiss Me Much)를 들으며 연정을 나눈다. 다른 한쪽에는 결혼식을 마친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멕시코 토속주 뿔케와 테킬라를 마시며 결혼식 축가이자 베라크루스 지역 민요 라밤바를 경쾌한 리듬으로 연주하자 모두가 춤추는 광란의 분위기가 연출된다. 광장 곳곳에는 마리아치와 거리 악사들이 서로 다른 곡을 연주하며 목청 높여 노래 부르지만, 소란하거나 불협화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처럼 음악은 감정이 서로 다를지라도 음의 장단이나 강약이 반복되는 리듬을 타고 있어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경쾌한 리듬은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들뜨게 한다. 음악의 마력에 빠진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0-④

대성당을 둘러보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한다. 주변은 잘 가꾼 잔디밭과 관목이 있어 도심에서 평온함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다. 광장은 콜로니얼시대 명소를 둘러볼 수 있는 구시가지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블록만 지나면 레스토랑과 전통시장이 있어 현지인이나 여행자가 즐겨 찾는 곳이다. 저녁노을이 드리우자 광장 맞은편에 있는 대성당 첨탑과 돔이 붉게 물들고, 때마침 저녁 삼종이 울리자 길 가던 사람들이 성당을 향해 저녁기도를 한다. 밀레의 만종 풍경처럼 들판은 아니어도 목가적인 신앙심의 표상을 먼발치에서 본다. 아르마스 광장은 역사 지구 중심지로 19세기 후반 지역민들의 회합 장소로 조성했다. 그리고 멕시코를 30년이나 철권 통치한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00ED〉az) 대통령이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910년에 연철로 지은 프랑스식 작은 공연 무대가 있다. 이 무대의 각 기둥에는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여성상이 장식돼 있고, 광장 주변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다. 아늑한 저녁 시간을 즐기려는 시민과 여행객이 벤치에 앉아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어둠이 내리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광장으로 모여들고, 무대 주변을 전등불로 밝히자 연주자들이 다양한 악기를 가지고 무대에 오른다. 20명 남짓한 작은 오케스트라다. 제1 바이올린 연주자가 튜닝하고 있을 때, 중후한 중년의 지휘자가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오르자 곧바로 경쾌한 리듬의 라틴곡 연주가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 과달라하라 음악 단체별로 돌아가며 무료 공연이 열린다. 오늘은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날이다. 첫 곡 연주를 마치고 지휘자는 오늘 이 공연을 위해 지원한 단체의 이름을 알리고 고맙다는 오프닝멘트를 한다. 이웃 나라 회사 이름이 귀에 들려 귀를 쫑긋 세웠으나 우리나라 기업은 없다. 기업은 후원하며 간접 홍보 효과를 기대하는 듯하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0-③

대성당은 종교적 의미를 떠나 오랜 세월이 응축된 중세 건축물로서의 변함없는 기풍을 갖추고 있고, 오랜 시간의 흔적과 함께 예술적 가치도 간직하고 있으며, 여전히 과달라하라 역사 지구 최고의 유물로서 현지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콜로니얼 시대 에스파냐 가톨릭 대성당에는 성물(聖物)을 보관하는 별도의 성막인 예배당을 봉헌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과달라하라 대교구도 1808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별당을 건축했고 성막에는 성물이 보관돼 있다. 성막 공사는 건축가 호세 구티에레즈(José Gutiérrez)가 1808년에 시작해 몇 차례 중단되다가 1843년에야 완성됐다. 성막 전면 중앙에는 믿음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고, 양쪽에 희망과 자선을 상징하는 조각상을 볼 수 있으며, 도리스양식으로 지은 현관은 미적 아름다움을 넘어 예술적 가치가 돋보인다. 성막에는 성가정 성모, 과달루페 성모, 슬픔의 성모와 과달라하라의 수호성인인 자포판(Zapopan) 성모상이 있고, 이 외에도 성 도미니크, 성 니콜라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크리스토퍼의 성물이 제단 아래 보관돼 있다. 특히 자포판 성모는 높이 30㎝ 정도의 작은 성모상이지만 멕시코 사람들에게 자포판 성모는 과달루페 성모와 함께 가톨릭 신앙의 표징으로 숭배된다. 과달라하라에서는 도시의 수호성인을 받드는 연례행사로 매년 10월12일 자포판 성모상 행렬이 축제 행사로 이어지는데, 새천년 들어 처음 열린 2004년 세계 성체대회 때는 멕시코와 주변 라틴 아메리카지역 순례객 350여만 명이 참가하여 ‘성체성사의 신비’를 받드는 행렬 길이가 7km가량 이어지며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0-②

대성당 외형은 전면과 좌우에 각각 큰 문이 있고, 중앙 파사드 아래 주 출입문이 있으며, 정면에는 동정 마리아의 승천을 기리는 부조가 있다. 조명을 밝힌 성당 내부는 거대한 돔과 아치의 조화로 더욱 미려해 포근함을 느끼고, 현관 앞 분수대에서 내뿜는 물줄기는 저물녘 노을까지 깃들어 정취에 취한다. 대성당에는 소수의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에 보물급 성물이 있는데, 일반인은 관람할 수 없어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과달라하라 대교구의 추기경과 대주교의 유해가 안치된 지하 묘소에는 일반인도 들어갈 수 있어 조용히 둘러보며 자료 속 그들의 삶을 살펴본다. 대성당은 멕시코시티 카테드랄에 비견될 만큼 규모가 크고, 성당 좌우 첨탑과 돔은 주변 스카이라인을 압도하듯 웅장하며, 도리스 양식의 현관과 천장을 바치는 기둥은 미려하게 아름답다. 내부에는 상아로 만든 그리스도 십자가 조각상, 카를 5세 황제의 선물인 장미의 성모상(Virgen de la Rosa), 멕시코 예술가들의 성화 등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즐비하다. 대성당은 화재와 지진으로 여러 차례 피해를 본 비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에스파냐 침략 지배 초기에 성당을 세웠으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574년 억새 불씨가 지붕에 옮겨 붙어 시작된 화재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오랜 기간 복구를 거쳐 1618년에 복원을 마쳤으나, 200년 후인 1818년 지진으로 첨탑과 건물 중심 돔이 무너져 다시 한번 대규모 복원 공사를 했다. 그 후 1849년 지진으로 보수한 부분이 또 무너져 내려 복구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지진으로 여러 차례 피해와 복구를 반복했으나, 북쪽 첨탑은 현재도 약간 기울어졌지만, 여전히 중후하면서도 파격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0-①

멕시코시티 여행을 마치고 국내선을 타고 멕시코 중서부에 있는 할리스코(Jalisco)주의 주도이자 차레리아(Charreria)와 마리아치(Mariachi)의 고향 과달라하라(Guadalajara)로 간다. 이곳은 아열대 습윤 기후지대지만, 해발 1천567m의 고원 지대라 쾌적하고, 해가 지면 선선해 여행하기 좋다. 멕시코 제2의 도시이자 과달라하라를 품고 있는 할리스코주는 ‘멕시코가 할리스코(Jallisco is Mexico)’라고 할 정도로 멕시코 다운 도시이고, 멕시코 로데오인 차레리아와 함께 마리아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곳이며, 용설란 수액으로 만든 풀케(Pulque)와 테킬라(tequila)의 깊은 주향(酒香)을 맛볼 수 있는 본고장이다. 과달라하라는 침략자 에스파냐가 1531년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해 콜로니얼 시대 중요한 거점지역으로 발전했다. 1810년에 일어난 멕시코 독립 전쟁 때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였고,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공업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지금은 멕시코의 실리콘밸리로 정보통신산업 분야 중심지다. 과달라하라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역사 지구(Centro Histórico) 중심에 있는 아르마스 광장으로 간다. 19세기에 지은 콜로니얼 건물을 개조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서둘러 광장으로 향한다. 원래 무기를 의미하는 ‘아르마스’였으나 현지인은 ‘마요르’라고도 부른다. 광장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 과달라하라 대성당(Catedral de Guadalajara)이 먼저 시야를 사로잡는다. 대성당은 도시의 대표적인 고건축물로 1560년 공사가 시작됐고, 여러 차례 복원공사를 했다. 건물의 건축 양식은 겪었던 변화만큼, 복원한 시대의 다양한 형태가 혼재돼 있다. 신고딕 양식의 상징적인 첨탑, 아름다운 프랑스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다양한 유물과 예술 작품은 대성당의 보물이다. 제대는 대리석과 은으로 만들었고, 파이프 오르간은 멕시코에서 가장 크다. 내부에 작은 예배당 3곳이 있어 조용히 기도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9-⑦

무세오 소우마야(Museo Soumaya)를 둘러보고 이곳을 미술관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박물관이라 해야 할지 고민하다 이곳의 에스파냐어 고유 명칭에 따라 박물관이라 칭한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처럼 전문가가 아니면 두 단어의 의미를 경계 짓기가 쉽지 않다. 박물관이면 어떻고 미술관이면 어떤가. 단지 그곳에 전시하고 있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그 가치와 의미를 가슴으로 느끼면 되지 않겠는가. 여행지에서 다양한 예술 작품을 관람할 때 느끼는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감성의 벽을 넘어서는 데 어려울 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보고 느낀 감정이나 영감을 또 다른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예술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여행의 기술’의 저자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프로방스에서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작품 속 올리브 나무와 사이프러스를 자신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고흐 그림에서 느낀 감정을 자기 작품 속에 또 다른 문학적 시각으로 형상화해 교술함으로써 독자를 작품 속으로 인도했다. 이처럼 여행지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 새로운 호기심을 가지고 아름다운 예술의 가치를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면, 이것 또한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묘미가 아니겠는가. 이렇듯 글을 쓰는 문학과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서로의 사상과 사유를 함께 교유(交遊)할 수 있는 다정한 친구이자 연인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9-⑥

이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인 6층 전시실은 조각 예술품의 전용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은 로댕의 열렬한 애호가로 알려진 슬림 회장이 심혈을 기울인 곳이라 보안 요원들의 감시도 한층 엄격하다. 그는 로댕의 작품 380여 점을 소유하고 있어 개인으로는 단연 세계 최대의 로댕 작품 소장자 반열에 올라 있다고 한다. 6층 전시실은 로댕의 작품 외에도 여러 조각가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있어 조각 예술의 극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3차원의 현실 공간에서 시각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조형 작업을 통하여 2차원적인 화면을 재구성하는 미술 작품과 달리 입체적 형상 속에 현실과 내면 세계를 함께 표출시킨 조각 작품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 이곳에 있는 많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모두 진품일까 하며 순간적으로 한 번쯤 의심해 본다. 하지만 진품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미술 작품과 달리 조각 작품은 하나의 형틀에서 찍어낸 조형물에 제작 순서대로 에디션 번호를 붙이는 작품이 다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여러 곳의 로댕 전문 갤러리에서 같은 작품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같은 사실 때문이다. 삼성문화재단이 한때 운영했던 갤러리 플라토(Plateau)에도 로댕의 ‘지옥의 문’ 7번째 에디션 작품과 ‘칼레의 시민(The Burghers of Calais)’ 12번째 에디션 작품을 전시한 적이 있다. 현재 이 작품은 호암미술관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어 관람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9-⑤

2층에는 단아하면서도 예쁜 생활 집기와 섬세하면서도 정교한 펜던트 초상화 작품이 있고, 회중시계와 여러 시대의 옛 동전이 전시돼 있다. 또한 멕시코에서 사용됐던 과거 지폐도 전시돼 있으나 발행 지역명이 다른 것이 이색적이다. 아마도 당시 연방마다 서로 다른 지폐를 발행한 듯하다. 3층에는 동양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 소품들이 전시돼 있는데, 중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공예품이 있다. 특히 상아를 정교하게 세공해 섬세함이 돋보이는 작품이 많고, 이것들은 아름다움을 넘어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나 보인다. 4층과 5층에는 수많은 미술작품이 전시돼 있다. 엘 그레코, 틴토레토, 고흐, 마티스, 모네, 르누아르, 미로, 달리, 피카소의 작품을 비롯해 작품 하나하나가 당대 최고 작가들의 작품이라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황홀감에 빠진다. 이처럼 당대 세계 최고 화가들의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강렬한 색감과 더불어 강인함을 느낄 수 있는 멕시코 작가의 작품은 색다른 미술 세계로 인도하고, 낯설지만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방대한 컬렉션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고통스러운 민중의 삶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화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과 그녀의 남편이자 남미 벽화 운동의 선구자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 ‘교차로에 서 있는 남자(Man at the Crossroads)’에서는 더욱 강렬함을 느낀다. 당시 이들의 작품은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대중의 호소력이 뛰어나고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정부 박해로부터 해방됐다는 후문이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9-④

로댕은 ‘지옥의 문’을 만들 때 피렌체 출신의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가 산 조반니 광장에 남긴 ‘세례당의 청동문’이라는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로댕은 1880년부터 1917년에 죽을 때까지 이 작품을 위해 기나긴 시간을 바쳤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로댕 박물관 수석학예관이 ‘지옥의 문’을 짜 맞춰 완성한 것은 로댕의 사후 9년이 지난 1926년에서야 이뤄졌다. 단테의 ‘신곡 - 지옥’ 편 33번째에 나오는 ‘우골리노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지옥의 문’에는 여러 인물상이 등장한다. ‘생각하는 사람’을 포함해 ‘세 망령’, ‘웅크린 여인’, ‘아담’과 ‘이브’ 등은 독립된 작품 그 자체만으로도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지옥의 문’에 등장한 인물들은 로댕의 인생 말년까지 그에게 풍부한 예술적 영감을 줬다. 비선형 원형 공간에 전시된 걸작을 뒤로 하고 자연스럽게 다음 층의 전시 공간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마치 커다란 소라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층고가 높아 계단 수가 많아도 지루하지 않게 벽면에 다양한 작품을 사진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어 느릿느릿 감상하다 보면 위층에 다다른다. 올라가는 계단 중간 한가운데서 미켈란젤로의 대작 ‘피에타(The Pieta)’를 만난다. 피에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비통해 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기독교 예술의 상징적인 대표작이다. 피에타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서 원작을 볼 수 있고, 수많은 예술가가 이 작품을 만들었기에 유럽 대성당에서는 여러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조각이나 유화, 목각 작품 등으로 만날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9-③

찬란했던 멕시코의 다양한 고대 문명 시대 석조 유물은 다수 전시돼 있으나 국립인류사박물관에 비할 바 못 되고, 콜로니얼 시대 종교 예술품은 가톨릭 성화와 성물이 전시돼 있다. 이 밖에도 콜로니얼 시대 작성된 역사적인 기록 문서, 주화와 지폐도 소장하고 있는데, 식민 지배를 받던 시대 동전은 세계 최대 컬렉션을 자랑하며, 그 외에도 메소아메리카 지역 예술 작품도 다수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1층에는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전시돼 있다. 이 작품은 원래 ‘지옥의 문’이라는 작품 중 한 부분으로 만들어졌는데, 지옥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기 전 자기 삶과 운명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는 인간 내면 세계의 팽팽한 긴장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일명 ‘쉬고 있는 헤라클레스’라고도 한다. 로댕의 전기를 쓴 릴케는 이 작품에 대해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그는 행위를 하는 인간의 모든 힘을 기울여 사유하고 있다. 그의 온몸이 머리가 되었고,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뇌가 되었다”고 했다. 이처럼 거친 질감과 인물의 본질적 묘사에 탁월했던 로댕의 대표작을 만나는 행운을 이곳에서 찾았다. 로댕의 원작은 파리에 있는 로댕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니, 이곳의 작품은 후순위 에디션 작품처럼 느껴진다. 같은 공간에서 ‘지옥의 문’을 감상한다. 밝은 갈색의 청동 작품으로 단단하고 차가운 질감이 뒤틀린 인체를 거칠게 물결치는 파도처럼 표현해 생동감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면과 굴곡이 있어 박물관의 조명 불빛의 반사로 다양함을 느낀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9-②

박물관 앞에 다다르자 입장하기 전부터 건물 형상이 신비로움을 자아내어 멕시코가 가진 혼성의 예술 문화 사조가 설계에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장품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도 커진다. 박물관은 세계 10대 거부이자 멕시코 최대 기업군 카르소 그룹과 텔멕스 텔레콤의 회장인 카를로스 슬림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 소우마야를 위해 세웠고, 일명 플라자 까르소(Plaza Carso)라고도 한다. 카를로스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그의 그룹 명칭에서 알 수 있다. ‘Carlos’와 ‘Soumaya’의 첫 글자를 조합해 ‘Grupo Carso’라고 지었을 정도였으니, 아내를 위해 세운 ‘무세오 소우마야’에 소장된 예술품의 가치도 짐작할 수 있다. 카를로스는 26세 때 17세인 레바논 이민자인 소우마야를 만나 결혼했다. 소우마야는 서른 살에 신부전으로 어머니 콩팥 한쪽을 이식 받았으나 1991년 51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고, 카를로스는 예술 애호가였던 아내를 위해 박물관을 짓기로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멕시코시티 옛 공업지대 재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무세오 소우마야’를 건립했다. 박물관은 1만6천여 개의 육각형 알루미늄 모듈을 사용해 지었다. 건물 외장과 전면 파사드에 불투명한 마감재를 사용해 노출을 최소화함으로써 건물의 수명을 최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건축적 특징이 돋보인다. 검색대를 거친 후 안으로 들어서자 높은 층고와 전시된 대작의 예술품이 관람자를 압도한다. 이곳에는 대규모 전시실 6곳과 강당, 도서관, 수장고를 포함한 여러 부대시설이 갖춰져 있다. 박물관은 기원전 400년대 고대 유물을 포함해 수십 세기에 걸친 6만6천여 점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럽 작가들의 다양한 회화와 조각 작품을 전시하는 기간도 있다. 그리고 멕시코를 포함한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근·현대 예술가 작품과 가구 및 금·은 세공품을 비롯한 장신구 등 많은 공예품도 전시돼 있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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