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해동 무렵

해동 무렵 - 김사인 노루목 지나 심학산 넘어가면 조강나루 겨우내 맨살로 버틴 교각 사이를 허옇게 쳐내려오는 얼음조각들 전봉준처럼 도도하게 머리를 세우고 그 우에 올라앉아 죽기 아니면 살기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까맣게 떠내려가는 청둥오리떼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생명은 움직인다. 부딪히고, 폭발하고, 쇄도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생명의 이런 움직임을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은 엘랑비탈(elanvital)이라 했다. 그것은 창조와 진화를 이끈 동력이며, 죽음까지 극복해내는 숭고의 힘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안에 내재한 엘랑비탈을 폭발시켜 삶을 끊임없이 재창조해냈기 때문이다. 생명들의 이런 소란이 곧 숭고함일진대, 요즘엔 그런 소란의 역동을 보기가 어렵다. 위축되고, 작아지고, 소심해진 일상이 삶 전부가 된듯하다. 엘랑비탈이라는 열정을 터뜨리기보다 안락한 생활을 위해 엘랑비탈의 뇌관을 스스로 제거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인 것처럼 보여 씁쓸하다. 초등학생들의 장래 꿈이 건물주나 공무원이라는 충격적 기사를 읽고 나니 그 씁쓸함의 우려가 더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시가 삶의 모든 것을 구원해줄 수는 없지만 뜨거운 위안과 든든한 힘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사인 시인의 시 ?해동 무렵?을 읽으며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까맣게 떠내려가는/청둥오리떼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안과 힘을 얻는다. 해동 무렵 상류로부터 허옇게 처내려오는/얼음조각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장엄의 진풍경이다. 그 장엄에 몸을 얹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떠내려가는 청둥오리떼의 치열한 모습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도도한 모습을 연상해내는 시인의 통찰이 그저 놀랍다. 아는 만큼 보고, 경험한 만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삶이라면, 시인의 저 통찰은 엘랑비탈의 삶에 대한 지극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조강나루의 교각 사이를 넘실대며 흘러가는 얼음조각들과 청둥오리떼는 결국엔 바다에 이를 것이다. 그 바다가 삶의 숭고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우리들의 삶은 필히 전봉준처럼 되어야만 할 것이다. 도도한 자세로, 형형한 눈빛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결기로 격렬히 흘러가는 삶, 그것이 바로 엘랑비탈의 시간이다. 시인이 말하는 해동(解凍) 무렵은 자기 삶의 긍지와 꿈을 녹여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가는 재창조와 도약의 시간일 것이다. 흘러가고 도약하는 자들만이 바다에 이를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떠도는 자의 노래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뿔》, 창비, 2002. 많은 시인들이 인생을 길에 비유하곤 한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길의 의미는 대개 선택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선택은 가야할 곳으로 가는, 즉 목적을 향한 결단의 행보라 할 수 있는데, 대개는 이성(理性)의 판단에 따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유랑(流浪)의 길은 선택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야만 하는 어떤 운명의 부름에 부응하는 것이다. 선택의 길이 정형(定型)이라면, 떠돎의 길은 무정형이다. 떠도는 사람들은 간절한 자들이고, 사랑을 아는 자들이고, 길의 운명을 예감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움으로 사방에 길을 내는 생의 유목민들이고, 세상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들이다. 신경림 시인의 「떠도는 자의 노래」는 정겹고 쓸쓸하고 애틋하다. 어딘가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는 마음에 불쑥 길을 나서는 화자의 심정은 무엇을 향한, 규정할 수 없는 그리움들로 가득해 보인다.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놓고 온 것 같다는 생각에 눈 내리는 좁은 골목과 저잣거리를 기웃대며 놓고 온 것을 찾아 헤매는 화자의 모습은 하염없이 울컥하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내리는 눈발 속 저렇게 헤매 본 적이 있었던가? 합리적 판단이나 선택을 떠나 무작정 길을 떠난 적이 있었던가? 쉽지 않은 물음이기에 궁벽한 답만 입속을 맴돈다. 하물며, 태어나기 전부터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고, 어느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나, 저 세상에 가서도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아 또 헤매게 될 것 같다는 시인의 운명적 예감 앞에서라면, 애써 찾은 궁벽의 답조차 부끄러워진다. 그리움의 여백(餘白)이 없다면 삶은 차갑고 황량할 것이다. 따뜻함이란 여백에서 생겨난다. 살면서, 간절한 그리움 때문에 모든 걸 때려치우고 불쑥 길을 나섰던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면 왜 그랬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Chingiz Khan)이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길을 내며 떠도는 자들만이 놓고 온 것들의 긴 사연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질투는 나의 힘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의지로 희망의 근육을 키워냈던 찬란의 시절들을 우리는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낭만적 수사로 회상한다. 번개처럼 내리 꽂히는 의지로 불가능의 벌판을 내달렸던 청춘의 시간들은 맹렬했다. 좌절도 아름다웠고, 실패도 기꺼웠다. 그래서 더없이 빛나는 시간으로 모두에게 기억된다. 그러나 이제 청춘은 그렇게 빛나지 않는다.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 서울의 한 심야극장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시인 기형도. 스물아홉, 그의 죽음은 어두웠다. 그가 ?장밋빛 인생?이라는 시에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고 말한 순간부터 우리시대의 청춘들은 탄식하고, 질투하며 부조리의 세계를 서성이는 쓸쓸한 이방인의 삶이 되었다. 정녕 그러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다는 낯설고 막연한 두려움의 고백이 시 ?질투는 나의 힘?에 깔린 어두운 탄식일 것이다.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 그것이 부조리다.라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말처럼 넘어설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부조리의 두꺼운 벽 앞에서 시인은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라고 말한다. 그것은 너무도 힘겹고 뼈아픈 고백이어서 질투라는 말이 지닌 부정적 어감을 느낄 겨를조차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또한 묻게 된다. 과연 질투는 힘이 될까? 한때 많은 공장을 세워 뭔가를 기록하려했던 어떤 능동의 시간들이 어리석음으로 되돌아올 때 세계의 실상은 두렵고 낯설어진다. 누구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의 냉정과 그 세계를 개처럼 쏘다니며 공중에서 머뭇거렸던 날들의 수많은 부딪힘이 시인이 말하는 질투였다면, 그로인해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는 짧은 글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우리가 다시 읽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모두의 비극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질투의 힘을 믿는다. 질투란, 부조리를 살아내기 위해서 부조리를 사는 분노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질투하고 분노하며 스스로를 미친 듯이 사랑해봐야겠다. 이것이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비가2-붉은 달?)라고 말한 기형도 시인을 추모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사막

사막 -이문재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귀가 싫어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뿐만 아니다. 칭찬도 자주 하면 욕이 된다고들 한다. 욕이든 칭찬이든 반복되는 것들은 지겨움을 준다. 왜 그럴까?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반복은 지겹다. 잔소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대부분이 그렇다. 의미를 생산하는, 즉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은 집중하게 되고 몰입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운동에 중독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역기를 드는 행동의 반복은 근육의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지겹지 않다. 좋은 습관들의 반복이란 이렇듯 차이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만약 반복이 죽음을 가져온다면, 구원과 치유를 가져오는 것, 또 무엇보다 반복을 치유하는 것도 역시 반복(차이와 반복, 민음사)이라는 말로 반복에 내재한 긍정성과 부정성의 계기를 설명했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은 육체와 정신의 근육을 만들어내는 의식의 활동성이다. 차이가 없는 반복은 의식의 정지이며, 죽음이다. 반복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곧 사유의 종언(終焉)을 뜻한다. 단순한 것들의 반복이 화려한 수사보다 더 큰 울림을 줄 때가 있다. 이문재 시인의 「사막」이 그러하다. 그의 시는 사막, 모래, 사이라는 명사와 많다라는 서술어의 반복이 내용 대부분을 구성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반복이지만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시를 처음 읽을 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건 사막에는 모래보다 더 많은 게 모래와 모래의 사이라는 시인의 사유와 성찰이다. 그것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사이, 즉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 독자들의 자연스런 감상이다. 사이라는 것이 갖는 실존적 의미는 여러 층위로 작용한다. 메울 수 없는 차이 일수도 있고, 소통의 통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차이들이 있기 때문에 소통할 수 있다는 역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한 성찰을 시인은 모래와 모래 사이에/사이가 더 많아서/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라는 진술로 드러낸다. 모래들의 합(合)보다 사이가 더 많다는 것은 모든 관계를 수량화하고 계측화하는 근대의 실용주의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다. 사이는 차이를 만들어내고, 차이는 끊임없이 갈라지고 반복되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과정의 반복이 삶의 본질이고, 유구함이다. 그래서 오래된 일이다.라는 마지막 표현이 가슴에 묵직하게 남는다. 우리는 사이를 산(生)다. 사이를 사는 것은 중간에 머무는 게 아니다. 나와 너, 이곳과 저곳 사이를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사이와 사이를 유랑하는 차이와 반복의 시간이 사랑이고, 삶이고, 자유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빗소리

빗소리 - 장옥관 비 오시는데 빗소리는 하염없이 쌓이고 또 쌓이는데 기차도 버스도 타지 않고 어떻게 찾아왔을까, 저 빗소리 몸도 없이 무작정 안기기부터 하는 바람처럼 빗소리 제 자식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어미처럼 소리는 풀죽은, 겁먹은 비를 지상에 서둘러 부려놓고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문학동네, 2013. 세상은 소리로 가득하다. 듣는다는 것은 수많은 소리들 중 어떤 한 소리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Alphonso Lingis)는 물고기는 흐르는 물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새들은 바람 부는 숲의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는 소리들 사이에서 지저귄다. 살아가는 과정은 사물들의 진동에 공명하는 과정이다.(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149쪽.)라고 했다. 그의 말은, 소리와 소리들이 부딪히며 공명하는 것이 곧 삶이라는 뜻일 터이다. 따라서 삶에 있어 절대고요란 없다는 이해도 가능하다. 조용하고 잠잠하다는 것은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여러 소리들 중 어떤 소리에 푹 빠져 다른 소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심리적 몰입 상태를 의미한다. 마음에 안정을 주는 소리를 과학자들은 백색소음(white noise)이라 일컫는다. 바람소리, 빗소리, 새소리 등 자연의 소리 대부분이 백색소음에 속한다 할 수 있는데, 이는 의미로 사람을 얽매고 억압하는 말소리와는 결을 달리 한다. 시인들은 일찌감치 자연의 소리에 민감히 공명해왔다. 시를 문자로 표현된 백색소음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장옥관 시인의 「빗소리」가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들이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는 소리들 사이에서 지저귀듯이 장옥관 시인의 시에 내리는 빗소리는 바람소리 속에서, 도망가는 어미의 소리 속에서 하염없이 쌓이고 또 쌓이며 애절의 소리를 지상에 한 짐 부려 놓는다. 어디서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를 저 빗소리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제 자식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어미의 심정처럼 겁먹은 비만 덩그러니 지상에 남겨놓고 사라지는 소리. 그것은 빗소리도 바람소리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소리이게 하는 삶의 원초적 공명일 것이다. 기쁨과 슬픔이 공명하고, 나와 다른 이가 공명하고, 삶과 죽음이 공명하고, 하늘과 땅이 공명하면서 내는 백색소음이 바로 장옥관 시인의 시에 내리는 빗소리다. 그걸 듣는 나의 귀에 종일토록 비가 내린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울음이 타는 가을江

울음이 타는 가을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나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울음이 타는 가을江》, 미래사, 1991.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마라.는 격언의 출처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시 하프 타는 노인의 노래 2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생을 논하지 마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괴테의 소설에는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하고/근심에 찬 여러 밤을/울면서 지새워 보지 못한 사람은/그대들을 알지 못하리./그대 천상의 힘들이여!라고 되어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천상의 힘으로 비유된 가난한 삶의 숭고한 가치를 모른다는 것이 문맥의 지시내용이다. 그렇기에 그들과 인생을 논하지 마라는 격언의 말미는 적이 과장된 면이 있어 보인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에서 유년을 보내고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한 박재삼 시인의 삶은 가난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말년에는 병마에 시달렸었다. 그의 삶은 가난했지만 비루하지 않았고, 힘들고 아팠지만 고결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 깊다.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처음 읽었을 때의 울컥한 감동은 괴테의 소설에 실린 시의 그대들은 알지 못하리./그대 천상의 힘이여!라는 구절처럼 내가 알지 못할 어떤 지점에서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처럼 내 가슴의 빈곳을 사정없이 파고 들어 늘 아련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는 마음은 무엇이며,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는 무엇일까? 첫사랑 산골 물소리와 소리 죽은 가을江의 이미지에서 뿜어지는 슬픔의 긴긴 사연이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닿는 가을 저녁의 풍경은 눈물의 사연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비쳐질까? 이런 물음으로 읽고 또 읽었던 이 시는 매년 가을이 올 때마다 떠나 온 고향의 언덕처럼 저것 봐, 저것 봐하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빈곤한 해석보다 눈물겨운 다독(多讀)으로 읽어야할 아름다운 시다. 서정이 사라진 세계는 척박하다. 그 척박의 벽을 넘어 설움까지 다 녹여 바다로 흘러가는 시인의 가을江을 찾아가 나도 소리 없이, 까닭 없이 밤새 울어 보고 싶은 그런 계절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황동규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 없이.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0 세상이 시끄럽다. 분노와 시기가 뒤섞여 곳곳마다 삶의 표정이 깨진 병조각처럼 예리하다. 이 위태로움은 비교(比較)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보다 혹은 너보다라는 심중의 잣대는 칼날처럼 날카로워 상처를 내고 만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더 큰 것을 얻고 싶은 욕망의 뒤편에는 비교의 민감한 눈금이 있다. 큰 것을 바라는 일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비교의 촉수가 잘못 뻗치면 인간관계의 원한과 좌절을 가져올 수 있다. 원한과 좌절이 만연하면 세상은 차가워진다. 사랑도 비교의 덫에 걸리면 결점의 무덤이 된다. 과잉된 욕망은 작은 것들이 지닌 섬세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정감의 세계를 나약(懦弱)의 결과처럼 여긴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약한 것은 과잉의 허세일 것이다. 황동규 시인의 시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는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삶의 아름다움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다. 그 간단한 마음이 바로 사랑이다.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사랑이겠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남들보다 더 크고 화려한 것을 해주고 싶은 비교의 욕망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 특별함은 꽃꽂이이나 사랑 얘기 같은 것이 아니라 일상의 설거지처럼 일상의 사소한 것을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사실 설거지는 누구에게나 귀찮은 일이다. 그 귀찮음을 견디게 만드는 힘은 사과 두 알을 식탁에 예쁘게 올려두는 것처럼 일상을 미적(美的)으로 배치하고 정리하는 섬세함에서 나온다. 바다 쪽을 향해 창을 열어 놓고 우리 모르는 새에 유채꽃이 땅의 가슴을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이 일상의 사랑이고 감동일 것이다. 그렇지만 설거지를 한다고 해서 사랑이 다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가꿔가는 미적 섬세함이 있어야만 이국(異國)의 햇빛처럼 사랑이 겁 없이 환해진다. 신종호 시인

[문화/시 읽어주는 남자] 쉬

[문화/시 읽어주는 남자]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쉬』, 문학동네, 2006. 네다섯 살 때쯤이었다. 바지를 올리고 내리는 게 민첩하지 못해 급하게 얼굴만 찡그리며 오주움~이라고 길게 외치면 아버지가 다가와 내 바지를 내리고 쉬하며 소변을 보게 하셨다. 그렇게 하시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를 보면 습관적으로 오줌이라는 말을 자주 남용했다.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고 볼일을 볼 수 있었으니 딴엔 아주 편리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지 내가 알아서 소변을 보게 되었다. 목욕탕에 가서도 두 손으로 그곳을 가리게 되었다. 어디 한번 보자며 손을 내뻗는 아버지를 향해 싫다고 소리치며 울고불고 난리를 떨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다. 빈곤한 추측이지만, 아버지와 나 사이에 뭔지 모를 어색함 같은 게 생긴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 아버지는 늘 불만의 대상이 된듯했고, 그렇게 시작된 심리적 불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문인수 시인의 ?쉬?는 대책이 없을 만큼 울컥하다. 환갑이 지난 아들이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누이는 저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손(不遜)하다. 생의 요긴한 동작이 다 떠난 아버지의 노구는 곧 아들의 몸일 것이다. 어린 아들을 안고 오줌을 누이시던 아버지를 이제는 아들이 안고 오줌을 뉘게 해야 하는 갚음의 필연적 관계,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이고 역사다.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오줌을 뉘여야 하는 아들의 시간은 아버지가 내민 어떤 끈의 결속이다. 애틋함이다. 정신은 아직 초롱하였기에 더 작게, 더 가볍게 몸을 움츠려서라도 아들의 힘겨움을 덜어내고자 애를 쓰는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 바로 길고 긴 뜨신 끈으로 연결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다. 모든 끈들의 맺음이 그렇듯 언젠가는 한쪽으로부터 풀리기 마련이다. 삶과 죽음의 끈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끈들의 역사는 영원하다.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뜨신 끈들의 베품과 갚음의 이어짐. 그 길고 긴 사연들을 문인수 시인은 쉬라는 한 음절의 의성어에 조용히 담아낸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생각하며 쉬!라고 읊조려본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사랑하는 손

사랑하는 손 - 최승자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평화 『이 時代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그의 부인인 엘리자베트 벡(Elisabeth Beck)과 함께 쓴 사랑은 지독한 혼란-그러나 너무 정상적인에서 사랑은 쾌락, 신뢰, 애정이며 이와 동시에 분명히 그와 정반대의 것, 즉 권태, 분노, 습관, 배신, 외로움, 위협, 절망 그리고 쓴 웃음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동시에라는 표현이다. 그 표현의 맥락을 짚어보자면, 사랑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그 결과로 분노가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사랑엔 배신과 외로움과 절망 같은 반대의 것들이 담겨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울리히 벡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의 역설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믿기지 않는 말을 상대에게 진지하게, 나아가 서슴없이 던지게 되는 것 같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에 사랑의 정체(正體)는 알 수 없게 되고, 그로인해 애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프고 쓸쓸해진다. 사랑의 문턱을 넘나들며 신뢰의 끈을 자르려는 돌발의 사태들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사태,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위협하고, 절망하면서도 상대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연민의 애틋함. 그것이 사랑의 역설이고, 믿고 싶지 않는 사랑의 불가능성이다. 최승자 시인의 사랑하는 손은 사랑의 알 수 없음과 지극한 연민의 감정 그 어디쯤에 걸쳐있는 쓸쓸함의 정서를 거기라는 장소에 담아낸다. 시인이 말하는 거기는 가깝지만 먼 곳처럼 느껴진다. 알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비만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거기는 사랑의 불가능성과 연민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즐거움보다 가여운 안식이 압도하고, 서로의 손을 잡아도 열 손가락에 걸리는 쓸쓸함만 느껴지는 거기는 비에 젖어 차갑게만 보인다. 사랑의 열정도 식고, 손의 온기도 식어서 그저 쓸쓸함만 맴도는 가여운 평화의 시간. 그 형용모순의 시간이 바로 우리가 체감하고 마주치는 사랑의 현실일 것이다. 최승자 시인의 사랑하는 손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나는 그 쓸쓸함의 적막에서 사랑의 맥박을 느낀다. 사랑하는 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가여운 안식과 가여운 평화의 반대편에 있을 또 다른 사랑의 맥박을 말이다. 사랑은 정반대의 것들을 품고 있다는 울리히 벡의 주장은 가능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형용모순의 시간이 없는 사랑은 권태의 천국일 뿐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자욱하여라

자욱하여라 - 백무산 ​ 삽 한 자루 들고 들판 나섰다가 소낙비 만났다 ​ 나무처럼 젖어 자욱한 빗속 걸으니 웃음이 난다 머물 곳 없어 그칠 수 없이 웃음이 난다 ​ 난데없어라 삶이 문득 난데없어라 ​ 트인 들판에 나의 생도 감출 곳 없어 툭 트여 난데없어라 ​ 난데없는 것 난 곳 없어라 자욱하여라 들판인가 나인가 난데없이 자욱하여라 웹진 《시인광장》, 2007년 가을호 기개와 결기가 없는 시대는 옹색하다. 비좁고 답답하다. 대의(大義)는 뒷전에 두고 생활의 염려만을 앞세우다보니 단 한번뿐인 삶이 온통 궁핍의 얼룩이다. 그래서 뭘 해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흐린 생각만 안개처럼 자욱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패배의 빛깔을 띤 듯한 물음이지만 궁핍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품어야 마땅할 질문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확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애꿎게 속만 상하던 즈음에 백무산 시인의 시 자욱하여라를 난데없이 만나게 되었다. 그 난데없음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까마득한 물음의 출처를 알 수 있게 만들어 주었기에 반갑고, 또 반가웠다. 갑자기 불쑥 나타나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음을 뜻하는 난데없음과 연기나 안개 따위가 잔뜩 끼어 흐릿함을 뜻하는 자욱함의 정조(情操)가 짙게 깔린 시는 일견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불확실함의 불안 심리를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시를 두세 번 거듭거듭 읽다보면 마음 안쪽에서부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확연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기운이란 바로 단단하고 힘찬 기개(氣槪)일 것이다. 삽 한 자루를 들고 들판을 나서는 화자의 모습에서 나는 이육사 시인의 시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무처럼 젖어 자욱한 빗속을 거닐면서 그칠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사방이 트인 들판에서 나의 생도 감출 곳 없어/툭 트여 난데없어라라고 외치는 모습은 너무도 결연하다. 내가 들판인지 들판이 나인지 모를 혼연일체의 고양된 감정을 난데없이 자욱하여라는 말로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궁핍과 왜소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확고히 천명하는 백무산의 자욱하여라는 사소함의 감정에 매몰된 작금의 이런저런 시들과는 분명한 차별을 보인다. 그래서 마음에 깊게 남는다. 왜소함은 긍지의 결핍이다. 긍지는 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당당함이다. 사방이 툭 트여 난데없음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당당함의 기개일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 이승희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시간은 흘러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켜켜이 누적된다. 오래된 가죽점퍼의 소매 끝이 반들반들해져 윤이 나는 건 시간이 쌓여서 그렇다. 고택의 대문 손잡이가 손때로 매끄러워 것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윤기에는 사연이 묻어있다. 대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과 까닭으로 오가기 마련이다. 그 사연들의 누적을 묵묵히 증명하는 것이 대문의 손때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시간의 손때가 많이 묻어 자기만의 윤기를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던 삶의 사연들에서 문득 어떤 순간을 되돌아보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함일 것이다. 그 돌아봄은 늘 애틋하고 또 거짓말 같다. 그땐 그랬었지!라고 옛일을 회상(回想)하는 것은 청춘의 한 시절을 지나 완숙함의 길목에 접어들 때쯤일 것이다. 이승희 시인의 시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는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붉게 핀 맨드라미 같았던 어떤 시절의 격렬함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에게나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의 찬란한 방황들. 한 생을 다 바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던 때의 꿈과 사랑과 좌절의 지독한 시절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 있었지라는 말로 압축되는 게 삶의 순리인 듯하다. 폐인처럼 중얼거리며 오전과 오후의 거리를 이승과 저승의 거리처럼, 딱 죽기 좋은 시간처럼 배회하던 맨드라미 같은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완숙함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최선을 다해 울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최선의 울음으로 맨드라미의 붉은 꽃을 피워 올렸던 옛날, 그 때는 참 아름다웠다. 쓸데없어 보이는 일로 때로는 무모한 일로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을 건너왔던 맨드라미꽃 같은 청춘의 표정. 그것이 낭만이고 사랑이었다. 방황을 삶의 낭비로 생각하는 실용(實用)의 시대는 건조하고 삭막하다. 그 사막에 꽃을 피워줄 환장의 낭만이 절실한 시절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우리는 사실과 느낌 사이를 산다. 사실과 느낌의 경계는 생각처럼 명확하지 않다. 사실은 느낌을 토해내고, 느낌은 사실을 집어삼킨다. 장미꽃이 피었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어떤 느낌을 불러낸다. 그 느낌이 마음의 안쪽을 향할 때 정념이 생겨난다. 장미꽃을 피 맺힌 울음으로, 혹은 뜨거운 사랑으로 비유하여 바라보는 각기의 정념들은 사실과 느낌이 겹쳐지면서 만들어낸 틈의 효과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의 틈,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틈, 삶과 죽음의 틈 등등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이것과 저것의 틈을 산다. 절대적 사실이라거나 절대적 느낌이라는 것은 없다. 사실과 느낌을 반죽해 시간의 항아리에다 발효시킨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사실의 고루한 뼈에 느낌의 충만한 살을 입히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살기 위해 성찰을 하고, 시를 쓰고, 변화를 추구한다. 오규원 시인의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시는 제목부터 난관(難關)이다. 사실과 느낌이 섞여서 그렇다. 잘못이라는 단어 앞에서 당당할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왠지 잘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잘못이 원죄처럼 군림하기 때문이다. 잘못을 원죄처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무력해진다. 잘못의 느닷없는 쇄도가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잘못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외부적 강압, 즉 이데올로기화된 윤리 때문일 것이다. 이데올로기화된 윤리의 강제는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틈이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다. 틈이 있기에 빛이 있고 어둠이 있다. 빛과 어둠이 섞여 다양한 농도의 명암(明暗)을 만들어내는 것이 삶의 고유함일진대 우리 사회는 그런 경계나 틈에 무척 인색하다. 숨 돌릴 틈이 없다. 그래서 늘 일상이 초초하고 불안하다.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찬물처럼 몸을 적시는 틈의 시공간에서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화자의 모습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 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강압에 대한 불안의 표현이자 항의로 읽혀진다. 그렇기에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는 표현은 포기나 우격다짐을 의미한다기보다 악마 같은 밤을 이겨내려는, 속지 않으려는 성찰의 의지로 가다온다. 잘못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뻔뻔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들에게 오규원의 시가 어떻게 읽혀질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진실이란 사실과 느낌의 틈에서 성찰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벽돌을 찍으며

벽돌을 찍으며 - 김명인 눈물을 닦으며 벽돌을 찍었다 빈틈없는 일과를 햇빛 아래 누이며 저것들이 잘 말라 단단해지는 동안 또한 설치며 지나가는 가을 한나절을 나는 외로운 협력, 내가 찍어내는 세상 속으로 5:3:2 모래와 흐린 저녁으로 뒤섞어주었다 동행하는 죄가 푸른 알몸으로 비벼 서는 하늘 저편까지 진종일 땀방울을 퍼 올리시고 하나님 몇 할의 어둠뿐으로 하루를 찍어내시는지요? 빈 공사장 구석마다 구덕살처럼 아픔이 캄캄하게 박히고 있다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 어떤 일은 즐겁고, 어떤 일은 힘겹다. 모든 게 즐거울 수는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알지만, 그렇게 살고 싶은 게 우리의 욕망이다. 한번뿐인 삶의 여정을 마구 훼손하고 싶은 사람은 결코 없다. 잘 산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노력한 만큼 얻고, 얻은 만큼 즐기는 것이다. 어떤 일이 힘들다 해도 그것을 감내하는 이유는 그 대가로 누리는 각자만의 즐거움 때문이다. 이 간단명료한 이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삐걱대고 우당탕거린다.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는 격언은 이제 울림이 없다. 인내도 쓰고 그 열매는 더더욱 쓴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조리의 세계를 산다. 그 불편한 단정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묻기도 한다. 본인의 노력이 부족한 거를 그렇게까지 비약하면 되느냐고. 여기에 우리들 삶의 복잡함이 얽혀있다. 그것은 동행(同行)의 어려움이고, 인간의 어려움이다. 김명인 시인의 시 벽돌을 찍으며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세계의 어려움을 고독하게, 아프게 말하고 있다. 눈물을 닦으며 벽돌을 찍었다는 첫 행부터 아픔이 캄캄하게 박히고 있다는 마지막 행까지 고독과 슬픔이 벽돌처럼 층층이 쌓여있어 먹먹하다. 그 먹먹함이란 눈물 흘리며 벽돌을 찍는 시간이 아니라 눈물을 닦으며 벽돌을 찍는 시간에서 나온다. 닦는다는 의지는 살아봐야겠다는 숭고함의 개진(改進)일 것이다. 벽돌을 찍어내는 노동의 반복은 지루하고 힘들다. 그것은 즐거움의 행위라기보다는 해야만 하는 고통의 순간이고, 어떤 여유도 허락지 않는 빈틈없는 일과다. 화자가 찍어내는 벽돌은 화자를 세상 속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족쇄일지도 모른다.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찍어내는 벽돌의 시간 속에서 화자는 나는 외로운 협력이라 말한다. 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닌 노동, 그것이 외로운 협력이다. 인내도 쓰고, 열매도 쓴 혹독의 시간을 내팽개칠 수 없는 이유는 타인 때문이다. 그들이 가족이든 혹은 민중이든 내가 지켜내야 하는 존재들이기에 힘들지만 벽돌을 찍어내야 한다. 그래서 삶은 동행하는 죄가 된다. 세상은 부조리다. 그러나 우리는 부조리를 살아내야 한다. 타인과 동행하는 죄로, 그들을 사랑하는 죄로 눈물 닦으며 벽돌을 찍어야 한다. 눈물과 사랑과 아픔의 비율이 잘 맞아 빚어진 단단한 벽돌들, 그것들이 튼튼한 집의 기반이 될 때까지 우리는 동행의 어려움을 살아야 한다. 김명인의 시를 읽으며 인간의 숭고함은 희생의 윤리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무화과 숲

무화과 숲 - 황인찬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무화과(無花果)는 꽃받침이 항아리처럼 급속히 비대해져 열매가 되는 바람에 꽃이 그 안에 갇혀 마치 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잎이 변해 만들어진 꽃받침은 꽃을 받쳐주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무화과의 꽃받침은 꽃을 받쳐주지 않고 열매가 되어 어린 꽃을 꿀꺽 삼켜버린다 하니 참으로 낯설다. 그 사정을 알게 되니 문득 갇힌 꽃의 심정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런 마음의 갈피를 김지하 시인은 이봐/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그게 무화과 아닌가/어떤가/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이것 봐/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그게 무화과 아닌가/어떤가(무화과)라고 헤아린다. 그의 헤아림은 삶이란 겉꽃의 화려함이 아니라 조용히 속꽃을 피우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넌지시 일러준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일상의 면면들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속꽃일 것이다. 황인찬의 무화과 숲은 김지하 시인의 시에 표현된 속꽃의 삶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쌀을 씻어 밥을 먹는 일,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저녁에는 저녁을 먹는 것,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 한 폭의 단 꿈을 꾸는 일상의 순환은 화려해보이지 않지만 진실하다. 타인을 짓밟고 얻은 명성과 성공은 화려하지만 덧없다. 그런 시간은 겉꽃처럼 쉽게 진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보는 망연함의 순간은 일견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고급차를 타고 가정부를 부리며 사는 화려한 순간과 종종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망연의 시간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일상의 귀중한 것들을 돌아보게 만들고, 너무 단순해서 생각해보지 못한 주변의 것들의 의미를 새로이 생각해보게 하기 때문이다. 아침과 저녁을 먹고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꾸는 일상의 흐름들. 우리는 그런 자잘한 흐름들을 산다. 소소하지만 아름답고, 반복되는 듯하지만 내밀한 시간들이 속꽃처럼 피어있는 곳, 그곳이 바로 무화과 숲이며 황인찬 시인이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유토피아는 숲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다시 나오지 않는 옛날의 시간을 떠올리기보다는 쌀 씻어 밥을 먹는 현재의 일상에 있어 보인다. 그래서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저녁에는 저녁을 먹는다는 시인의 단순한 진술이 큰 울림을 준다. 길을 걷다가 줄장미 늘어선 어느 골목의 담벼락을 망연히 바라보는 작은 시간들이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행복의 꽃은 무화과 속꽃처럼 그렇게 일상의 안쪽에서 조용히 핀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오렌지

오렌지 - 김상미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예요》, 문학동네, 2017. 시인이자 박물학자이자 정원사인 다이앤 에커먼(Diane Ackerman)이 쓴 감각의 박물학은 세상은 얼마나 황홀하고 감각적인가라는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해 오감(五感)의 드넓은 세계를 박학(博學)으로 종횡한다. 그녀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책이 작은 축제가 될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 축제의 서막은 후각에서 시작해 촉각,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을 거쳐 공감각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러한 순서와 배치는 상당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냄새의 뇌관을 건드리면 모든 추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는 그녀의 진술은 후각이 지닌 위력을 잘 설명해준다. 냄새는 아주 깊은 밀도를 지니고 있으며, 물리칠 수 없는 유혹들을 내뿜는 감각의 샘이다. 냄새 맡는 자는 대상을 만지게 되고 결국엔 맛보게 된다. 세상의 모든 유혹과 사랑의 서사는 이러한 감각의 농밀한 과정을 거치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감각의 황홀도 시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시간은 모든 감각을 낡고 시들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과거의 황홀을 회고하는 현재의 향수(鄕愁)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김상미 시인의 시 오렌지는 떠나는 것과 떠나가려는 모든 것들이 내뿜는 아쉬움의 정서를 흔쾌히 맞닥뜨리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재구성하려는 의지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 것에서 느껴지는 미각의 세계는 모든 추억이 입안에서 일시에 터지는 회고의 아득함일 것이다. 화자가 맛보는 오렌지의 맛은 시고, 달고, 과즙이 넘쳐나 온 몸을 상쾌히 떨게 하는 그런 맛이 아니라 코끝을 찡 울리는 심금의 맛과 향기로 표현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모든 것들은 이미 시들었거나 시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예견된 것이자 피할 수 없는 실존의 운명일 것이다. 그러한 실존의 가혹을 시인은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남아 있는 법이라는 지극한 성찰을 통해 극복하려한다. 시간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는 어떤 기억들은 마지막으로 표현된 시간의 단절을 영속화함으로써 실존의 허무를 극복하는 새로운 발판이 된다. 오렌지 향기가 바람에 다 날아가도 나는 내 사랑의 이로 오렌지 속에 남아있는 한줌의 삶을 흔쾌히 맛보겠다는 화자의 의지는 그 모든 것들이 내 곁을 떠난다 해도 나는 나의 감각과 기억으로 떠나간 모든 것들의 맛과 향기를 간직하겠다는 실존적 결단일 것이다. 황홀의 감각을 기억함으로써 시간은 충일해지고 사랑의 흔적은 숭고해진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하모니카 부는 참새

하모니카 부는 참새 - 함기석 무더운 여름 오후다 참새가 교무실 창가로 날아와 하모니카를 분다 유리창은 조용조용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하모니카 속에서 아주 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나온다 물고기들은 빛으로 짠 예쁜 남방을 입고 살랑살랑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교무실을 유영하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선생들 귓속으로 들어간다 선생들이 간지러워 웃는다 책상도 의자도 책들도 간질간질 웃으며 소리 없이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선생들도 흘러내린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하고 시원한 물소리에 복도를 지나던 땀에 젖은 아이들이 뒤꿈치를 들고 목을 길게 빼고 들여다 본다 수학 선생도 사회 선생도 국사 선생도 보이지 않고 교무실은 온통 수영장이다 《뽈랑 공원》,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학창시절의 추억에는 체벌 이야기가 단골로 등장한다. 교탁에 걸터앉아 교과서를 읽는 선생님의 손에는 통통하고 작달막한 몽둥이가 악몽처럼 쥐어져 있었다. 그 몽둥이의 이름은 훈육봉이었다. 선생님은 그걸로 학생들의 까까머리를 목탁 치듯 연달아 두들겼다. 다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는 했지만 학생들에게는 꼭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품성이나 도덕을 가르쳐 기른다는 것이 훈육의 뜻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규율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폭력을 가해서라도 처벌을 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이 담겨있는 듯하다. 더군다나 규율이라는 것이 내가 동의하지 않은 일방적 강제에 의한 것이라면 맞는 이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맞는 게 싫어 복종하게 된다. 훈육하는 자의 처벌과 훈육당하는 자의 복종이 악순환을 이룰 때 학교는 감옥이 된다. 그곳의 생활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 언급한 것처럼 배제한다, 처벌한다, 억누른다, 검열한다, 고립시킨다, 은폐한다, 감춘다. 등의 부정적 표현에 의해 유지된다. 함기석 시인의 시 〈하모니카 부는 참새〉에 묘사된 교실 풍경은 동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참새가 하모니카를 불고, 유리창이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하모니카에서 나온 물고기들이 교실과 교무실을 헤엄치다 선생님의 귓속으로 들어가 웃음을 유발하고, 마침내 책과 책상과 선생님이 물이 되는 난리법석의 흥겨운 소동. 언뜻 보기에는 활달하고 유쾌해 보이지만 꼭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의 교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처벌하고, 검열하고, 억누르는 것이 교실을 지배하는 동사(動詞)들이다. 함기석 시인은 그런 동사들의 횡포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가차 없이 녹여버린다. 유리창, 책상과 의자, 선생님으로 표상된 딱딱한 것들을 물처럼 녹여 하나로 흐르게 만든다. 그리하여 교실은 어떤 경계도 없는, 모두가 더위를 잊고 시원하게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자유의 쾌적한 장소가 된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하고 시원한 물소리란 경직된 것들을 녹여버리는 부드러운 혁명의 소리일 것이다. 시인이란 그 소리를 이끌어내는 사람들, 즉 무더운 여름날 지친 일상의 창가로 날아와 하모니카를 불어주는 참새들은 아닐까.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찔레

찔레 - 김언희 내 기다림의 지뢰를 밟은 내 그리움의 뇌관을 건드린 보라, 가청권 밖의 이 폭음 수습할 길 없는 이 참사를 슬로 비디오로 찢어지고 있는 당신 넋의 눈부신 사지를 《트렁크》, 세계사, 1995 모든 풍경은 마음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재구성된다. 같은 꽃을 봐도 느낌이 다른 건 각자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풍경은 모두의 풍경이 아니라 나의 풍경이 된다. 마음이란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다. 정념과 충동을 뜻하는 파토스(pathos)와 분별과 이성(理性)을 뜻하는 로고스(logos)는 우리 마음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다. 풍경을 로고스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 따분하다. 파토스의 심장으로 바라보는 풍경이래야 마음이 흔들린다. 파토스의 세계는 뜨겁다. 그렇기 때문에 일견 위험해 보인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이 파토스를 병(病)으로 진단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매력적이다. 파토스로 인해 우리의 삶은 정화되고 고양(高揚)된다. 지독한 독감을 앓고 난 후에 느껴지는 몸과 정신의 가벼움처럼 파토스는 우리에게 모종의 변화를 가져다준다. 김언희 시인의 시 찔레는 다분히 파토스적이다. 찔레꽃 핀 풍경에서 느껴지는 봄날의 일반적이고 보편적 서정, 이를테면 무더기로 핀 찔레꽃의 아름다움이나 아찔한 향기 또는 찔레의 새순을 따먹으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런저런 감정의 여림이란 거의 없다. 시인이 바라본 찔레꽃 풍경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점점이 끓어올라 터지기 일보직전에 놓인 기다림과 그리움. 그것은 파토스라는 지뢰일 것이다. 마음에 묻어둔 기다림의 지뢰를 밟고 그리움의 뇌관을 건드려 마침내 가청권 밖의 폭음으로 시인의 파토스를 폭발시킨 매개물이 바로 찔레다. 너무도 큰 소리로 터졌기에 자기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폭음의 격정. 그것이 바로 시인의 내면을 통해 재구성된 찔레꽃 핀 풍경의 참사이고, 비등점(沸騰點)을 넘어선 그리움과 기다림의 폭발이다. 누군가를 참혹하리만큼 그리워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참사의 풍경을 오롯이 이해할 것이다. 무더기로 피어있는 찔레들이 어떻게 당신 넋의 눈부신 사지로 찢어져 슬로 비디오로 흩날리는지를. 수습할 수 없는 이 참사의 풍경과 상처, 그리고 눈부신 영혼의 날들. 향기와 가시를 함께 지닌 찔레처럼 한 마음의 두 곳에서 격전을 벌이는 애증(愛憎)의 서사, 그것이 바로 로고스로는 감당되지 않는 사랑의 파토스라는 것을 김언희 시인은 말하고 있다. 아프기에 애절하고, 애절하기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게 사랑이다. 사랑은 파토스다. 사랑의 지리멸렬과 눈부심을 함께 품고 있는 내면의 프리즘이 파토스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사흘

사흘 - 박지웅 문상객 사이에 사흘이 앉아 있다 누구도 고인과의 관계를 묻지 않는다 누구 피붙이 살붙이 같은 사흘이 있는 듯 없는 듯 떨어져 있다 눈코입귀가 눌린 사람들이 거울에 납작하게 붙어 편육을 먹는다 사흘이 빈소 돌며 잔을 채운다 국과 밥을 받아놓고 먹는 듯 마는 듯 상주가 사흘을 붙잡고 흐느낀다 사흘은 가만히 사흘 밤낮을 안아준다 죽은 뒤에 생기는 사흘이라는 품 사흘 뒤 종이신 신고 불속으로 걸어가는 사흘이 있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있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이다. 크로노스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개인의 노력이 투여된 특별한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운명적 시간이라며, 카이로스는 그 운명에 수(繡)를 놓는 정념의 순간이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두 시간의 양상을 의인화해 신(神)으로 섬겼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식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막기 위해 자식들을 낳자마자 삼켜버린다. 시간에 의해 삼켜지는 것, 그것이 크로노스적 운명이다. 기회의 신으로 불리는 카이로스는 앞머리는 길고 뒷머리는 민머리다. 긴 앞머리는 기회를 뜻한다. 민머리는 기회를 못 알아보고 지나칠 경우 다시는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회로 의미화된 카이로스는 한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 희로애락의 특별한 시간이다. 하여 어떤 이에 대한 애도(哀悼)란 그 사람이 살았던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한 정념의 표출이다. 시간의 의인화에는 친숙함과 두려움의 감정이 함께 담겨있다. 애도의 시간도 그렇다. 박지웅 시인의 시 사흘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의인화된 시간의 두 속성을 넘어서는 어떤 특별함이 감지된다. 시간을 인물로 의인화하지 않고 시간을 시간으로 의인화함으로써 얻어진 사흘의 특별한 시간은 크로노스적 운명과 카이로스적 정념의 세계에 애도의 시공간을 새로이 생기(生起)시킨다. 문상객 사이에 앉아있는 사흘은 시간의 동양적 의인화가 지닌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진 사흘의 시간은 망자(亡者)와 산 자들의 정념이 뒤섞인 교집합의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사흘이 빈소를 돌며 잔을 채우고, 상주가 그 사흘의 말미를 붙잡고 흐느끼는 빈소의 삼일은 먹고, 안아주고, 흐느끼는 감정들의 북받침이 뒤섞여 하나의 품을 만든다. 그 품은 망자의 품이며 또한 산자들의 품이다. 그래서 두 품이 서로를 붙잡고 흐느끼는 사흘의 시공간은 깊고 애절하다. 죽은 뒤에 생긴 사흘의 품에는 설명할 수 없고 크기를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일기에서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 했다. 박지웅 시인은 그 측정불가능의 슬픔을 사흘의 시간에 담아낸다. 그래서 그의 시 사흘은 읽는 이의 심정을 하염없이 울컥거리게 한다. 애도란 끝을 맺을 수 없는 감정의 흐느낌이다. 애도함으로써 죽음의 시간들은 깊고 따뜻해진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봄 향기

봄 향기 - 박노식 장독대에 햇볕이 가득 차서 눈이 따갑다 수분이 달아난 독아지 뚜껑은 한결 가볍고 그 위에 몇 줌 호박씨를 말리는 사이에 산새들이 수없이 다녀가서 여기저기 콩알만큼 비었다 고무신 속엔 봄이 가득 들어와 걸음마다 발바닥이 간지럽다 지나가는 바람보다 이웃 노부부의 두엄 더미가 더 들떠서 구린내가 봄 향기같이 올라온다 《고개 숙인 모든 것》, 푸른 사상, 2017 신라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새들이 부딪힌 사연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세월이 지나 단청(丹靑)을 하였더니 날아드는 새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화는 서양에도 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Zeuxis)와 파라시우스(Parlasios)가 자존심을 건 그림 대결을 벌였다고 한다. 제욱시스가 포도를 그리자 새들이 쪼아 먹으려 날아들었다고 한다. 우쭐한 제욱시스가 이제 네가 그린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하자 파라시우스는 커튼 뒤에 그림이 있으니 직접 보라했다. 커튼을 걷으려 손을 내뻗는 순간 제욱시스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건 커튼이 아니라 커튼을 그린 그림이었다. 사물이나 풍경의 재현(再現)이 치밀하고 뛰어나면 새나 파라시우스처럼 선뜩 대상에 다가서게 되는 것 같다. 그림의 재현과는 다른 차원이겠지만 시의 묘사도 그런 충동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박노식 시인의 시 봄 향기는 따스한 봄날 시골집의 고즈넉한 풍경이 시각, 촉각, 후각, 청각을 통해 전달하고 있어 내가 그곳에 서있는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을 전한다. 봄 햇살이 가득한 장독대의 풍경과 독아지 뚜껑에 널린 호박씨를 쪼아 먹으려 분주히 날아오고 날아가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눈과 귀에 선연하다. 언어로 묘사된 풍경의 매력은 그림이 주는 느낌과 사뭇 다르다. 시로 묘사된 자연은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내밀함과 친숙함을 더 느끼게 만든다. 그 내밀함의 반경을 박노식 시인은 촉각과 후각을 통해 확대하고 있어 매력적이다. 고무신 속엔 봄이 가득 들어와 걸음마다 발바닥이 간지럽다는 표현은 정말 놀랍다. 봄이 주는 가벼움과 생명력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 시는 드물 것이다. 신발 안에 봄이 들어왔다는 기발한 상상력과 그 봄이 발바닥을 간질인다는 시인의 생각이 나의 발바닥까지 간지럽게 만드는 것 같아 몸이 움찔한다. 여기에 두엄 더미의 친숙한 구린내가 더해져 봄의 향기가 물씬하게 느껴진다.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이 후각이다. 구린내가 불쾌한 감정을 주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잊고 있던 고향의 냄새를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쟁의 치열함이 생존의 절박이 되어가는 시대에 고향이라는 단어는 이방인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고향의 소리와 냄새를 잊어간다는 것은 삶의 아늑함을 잊어간다는 것이리라.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일렁여 눈 밑이 아득해지는 3월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샤갈의 닭

샤갈의 닭 - 조현석 날갯짓 한 번에 바람 타고 머문 곳 늘 밝은 하루가 펼쳐지는 하이티 무지개 구름이 피어나는 아침 알록달록 말로 변신한 닭의 울음소리 처음 듣는 하늘을 찢을 듯한 소리 상서로운 소리여야 더욱더 좋지 황홀한 천국의 불안은 늘 곁에 있어 『검은 눈 자작나무』, 문학수첩, 2018 그림의 제목을 모르더라도 그것이 누구의 작품인지를 단박에 알아맞힐 수 있는 게 샤갈의 그림일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딱 보면 그의 그림이라는 걸 쉽사리 알 수 있다. 이렇듯 어떤 그림들이 작가 특유의 분위기와 정취를 고유하게 드러내 감상자의 인상에 깊이 박힐 때 우리는 그것을 풍(風)이라 말한다. 샤갈 풍이는 말은 동화적이고 신비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샤갈의 그림은 무중력의 세계를 보는듯하다. 사람과 말과 수탉이 푸른빛의 화폭 속에서 붕붕 떠다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절로 아늑해진다. 메마르고 척박한 세계일수록 샤갈의 그림에서 따뜻한 위안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조현석 시인의 시 샤갈의 닭은 샤갈의 그림 여러 편을 한 번에 보는 듯하다. 그의 시에 깔린 분위기를 샤갈 풍이라 해도 무방하겠지만 뭔가 다른 상상의 고유한 결이 느껴져 곱씹어 읽게 된다. 풍이라는 것이 흉내 수준에 머물게 된다면 진부한 인상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보다 한발 앞선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상상력의 밀도와 스케일일 것이다. 상상력은 과장(誇張)이 아니다. 큰 것 속에서 작은 것을,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발견해내는 절묘한 시선이 상상력이다. 작은 날갯짓 한번으로 바람을 타고 오르는 상상의 도약이 없다면 샤갈의 닭은 밋밋했을 것이다. 여기에 알록달록 말로 변신한 닭의 울음소리라는 공감각적 표현이 신비감과 입체감을 부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동화적인 세계를 꿈꾸게 만든다. 처음 듣는 하늘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우리 앞에 상서롭게 나타난 그곳은 다름 아닌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곳을 황홀한 천국의 불안이라는 역설로 설명한다. 조현석 시인의 시가 갖는 모종의 울림은 이 역설에 있다. 시어(詩語)의 역설이 억지가 아닌 감동으로 불쑥 다가올 때 시의 매력이 생긴다. 황홀만 있는 천국은 무료하다. 그 무료함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이 불안이다. 불안은 부정적 느낌이 아니다. 황홀을 더욱 황홀답게 만드는 실존의 활기와 기분이 불안이다. 하이데거는 어떤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는 실존의 유일무이한 기분을 불안이라고 했다. 천국은 불안이 만든 황홀이고, 황홀이 거느리는 불안이다. 하여 우리는 불안의 기분으로 일상의 남루(襤褸)를 도약해야 한다. 삶도, 사랑도 모두 황홀한 천국의 불안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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