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용의 더클래식] 슈만의 음악평론가, 음악잡지 발행인으로서의 길

슈만은 독일의 추비카우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점의 많은 책은 슈만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책과 벗하며 문학적 소양도 쌓여 갔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슈만은 어머니의 바람으로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다. 그렇지만 결국 음악가의 길로 진로를 바꾸되 된다. 그의 또 다른 재능인 글재주는 음악가로서의 길을 걸으면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작곡가를 겸한 음악평론가로 활동했다. 슈만은 뛰어난 글 솜씨와 날카로운 평으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가 음악평론 일을 하며 이룬 업적은 단지 이런 펜대를 통한 명성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적 선견지명이 뛰어났고, 그런 자신의 눈을 통해 음악계의 숨은 보석들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쇼팽의 천재성, 브람스의 음악적 탁월함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슈만이었다. 1834년에는 직접 음악신보를 발행하여 더 많은 훌륭한 음악가를 소개했다. 이와 함께 당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선배 음악가인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을 올바로 평가하며 그들의 진가를 세상에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다. 사랑으로 충만한 아내 클라라, 그리고 알토란같은 자식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았을 것 같은 슈만. 하지만 슈만은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앞서 클라라의 아버지가 결혼을 결사반대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던 슈만의 정신병 때문이었다. 슈만의 병은 점점 심해져 갔고, 그는 급기야 집 앞 라인 강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어부의 도움으로 살아났지만, 그 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2년여를 지내다가 1856년 4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사랑에 빠진 작곡가 슈만과 그의 아름다운 가곡들

스승인 비크는 제자로서 슈만을 좋아했지만, 슈만이 자신의 딸과 만나는 것은 탐탁지 않아 했다. 슈만의 집안사정도 좋지 않았고, 뒤늦게 음악을 시작했기에 아직 성공하지 못한 남자에게 딸을 맡길 수 없었고, 클라라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졌기에 더욱 둘을 결혼시키기 아까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슈만과 클라라는 비크의 눈을 피해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확인했다. 이때 만들어진 곡이 바로 어린이 정경이다. 클라라가 가끔 당신이 어린아이 같아 보여요라고 쓴 편지에서 착안된 곡으로, 제목과 달리 어린이를 위한 음악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무르익어 클라라가 20살, 슈만이 29살이 될 때 결혼하기로 약속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이자 스승인 비크는 완강히 반대했다. 이에 클라라는 슈만을 데리고 법정으로 갔고, 두 사람과 비크의 법정 다툼이 1년간 이어진다. 비크는 슈만에 대해 좋지 않은 증언을 했지만, 클라라의 어머니, 슈만의 친구였던 프란츠 리스트 등이 슈만에 대한 좋은 증언을 해주어 법정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때가 1840년, 슈만이 무려 140여 곡 이상의 가곡을 쓴 해였다. 슈만과 클라라는 1840년 9월 12일 결혼식을 올리는데, 슈만은 결혼 전날 클라라에게 프러포즈로 곡 하나를 선물했다. 그 곡이 바로 미르테의 꽃 중 헌정이라는 유명한 곡이다. 클라라와의 오랜 사랑의 결실을 이룬 슈만에게 이듬해 1841년은 가곡의 해가 되었다. 슈만은 이 행복한 시절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사랑으로 부푼 가슴은 슈만에게 샘솟는 창작 능력을 주었고, 주옥같은 가곡들이 줄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르테의 꽃,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 등이 그것이다. 클라라! 이 곡을 작곡했을 때 나는 당신의 영혼 속에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없었다면 이러한 곡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칩니다. 슈만은 아름다운 가곡을 가슴 속에서 만들어 낼 때마다 이렇게 사랑하는 클라라에게 편지를 썼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음악사에 길이 빛날 시인의 사랑 - 슈만

슈만의 작품 중 명작으로 꼽히는 연가곡 시인의 사랑. 괴테와 더불어 독일이 낳은 세계적 시인인 하이네(Heinrich Heine)의 아름다운 시를 토대로 모두 16곡으로 구성된 이 곡은 사랑의 고통에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감성을 슈만 특유의 섬세함으로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음악 역사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작품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굴곡 많은 슈만의 인생 중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 만들어진 이 가곡은, 슈만이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해도 좋다는 법원의 허락을 기다리는 동안 쓴 가곡집이다. 이 노래에는 사랑의 빛과 달콤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였기 때문에 가슴을 울리는 곡 중에는 인생의 씁쓸함과 아이러니를 노래하는 것도 있다. 특히, 이 곡 중 제1곡 아름다운 5월에의 절절한 사랑 고백은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향한 노래임이 분명하다. 슈베르트가 정착시킨 예술가곡에 꽃을 피운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그에게 만약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 슈만이 없었다면 과연 이런 아름다운 노래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세기의 사랑이라 불리는 작곡가 슈만과 피아니스트 클라라의 사랑! 이들의 사랑은 슈만의 음악에 화려한 꽃을 피우게 했고 알찬 열매를 맺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830년 파가니니의 뛰어난 연주를 듣고 어렵게 음악의 길을 결심한 슈만은, 라이프치히에서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비크에게는 클라라라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슈만보다는 9살이나 아래였고, 역시 아버지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녀는 이미 전 독일을 누비며 연주여행을 다닐 정도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예쁘장한 외모에 피아노를 잘 치는 소녀 클라라. 슈만은 이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이윽고 둘의 관계는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둘은 빨리 결혼하여 사랑의 결실을 이루고 싶어 하지만 비크의 큰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그렇지만 반대 속에서 둘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졌고, 결국 결혼을 두 아버지와 법정 투쟁까지 하게 된다. 법은 슈만과 클라라의 손을 들어주어, 1840년 슈만의 나이 서른에 스물하나의 클라라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클라라와의 오랜 사랑의 결실을 이룬 슈만에게 이듬해 1841년은 가곡의 해가 되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조국 폴란드를 마음에 품고 살았던 피아노의 시인 쇼팽

쇼팽을 피아노의 시인이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쇼팽이 파리 사교계에 데뷔할 무렵, 파리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절정기였다. 그래서 당연히 로시니(Gioacchino Rossini)와 벨리니(Vincenzo Bellini) 같은 오페라 작곡가가 스타덤에 올라 있었다. 쇼팽 또한 오페라에 매료되기도 했다. 하지만 쇼팽은 유행에 따르지 않고 묵묵히 피아노 독주만 고집했다. 그가 피아노 한 대로 파리 사교계에 당당히 입성한 것처럼 말이다. 쇼팽이 남긴 작품 중 유난히 피아노 소품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절정기가 있으면 쇠퇴기가 있는 법. 잘 알려진 것처럼 쇼팽은 한창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죽음이 그러했 듯, 쇼팽 역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모차르트와 비교되며 천재라 추앙받던 쇼팽의 삶 또한 그리 길지 않았다. 마요르카 섬에서 쇼팽과 상드는 사랑의 기쁨을 누렸지만, 결핵을 앓던 쇼팽의 병세는 점점 악화 되었다. 그래도 그는 그곳에서의 모든 걸 표현하려는 듯 여기서 많은 주옥같은 명곡을 썼다. 하지만,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너무도 내성적이고 고독에 침잠하는 쇼팽 사이에 갈등이 오기 시작한다. 마요르카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온 쇼팽과 상드는 9년간 이어온 사랑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만다. 상드와의 이별 후 쇼팽의 결핵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빈혈, 후두염 같은 갖가지 병마가 한꺼번에 그를 덮치고 있었다. 이런 병마와 싸우느라 작품은커녕 레슨도 못하게 된 쇼팽은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다 39세이던 1849년 10월, 자신의 심장을 조국 폴란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스무 살에 떠나온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언제나 마음 한편에 품고 살았던 쇼팽. 그래서 그는 화려한 파리에서도 언제나 외로웠고, 그런 정서는 결국 그의 음악에 묻어나는 듯하다. 마치 시인이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쓰듯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아름다움을 그려내려 애쓴 피아노의 시인. 몸과 영혼이 그의 음악에 사로잡혀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쇼팽이 그려내는 음악에 의해 달빛에 빛나는 마음속에서 꿈꾸는 듯한 마음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는 피아노의 시인이었기만 했을까? 고국 폴란드 앞에서는, 고국 폴란드를 생각할 때 쇼팽은 열렬한 애국의 정으로 건반을 피로 물들이는 정렬의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아름답고 고독한 음악은 그리움을 간직한 많은 이들의 마음에 눈물이 되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피아노로 아름다움의 절정을 그려낸 프레드릭 쇼팽

평생을 피아노곡만 작곡했다 말을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쇼팽! 교향곡에서 베토벤, 실내악곡에서 하이든, 가곡에서 슈베르트를 말한다면,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아름다움을 그려내려 애쓴 피아노의 시인 쇼팽(Frederic Francois Chopin)! 그의 아름답고 고독한 음악은 그리움을 간직한 많은 이들의 마음에 눈물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던 스페인 마요르카 섬. 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연인 조르주 상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장대비를 뚫고 사랑하는 쇼팽을 위해 먼 곳까지 약을 구하러 갔는데,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쇼팽은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는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맞춰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은 곧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쇼팽이 남긴 가장 뛰어난 곡이라 평가받는 빗방울 전주곡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쇼팽은 프랑스 파리에서 명성과 사랑을 얻었다. 1832년 쇼팽이 파리 사교계로 진출했을 때, 그곳은 이미 멘델스존, 리스트, 슈만, 바그너, 베르디 등 당시 유럽을 주름잡던 기세등등한 음악가의 발길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폴란드에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줍은 청년 쇼팽의 첫 연주회가 열렸다. 하지만 그는 쟁쟁한 틈바구니에서 단지 서정적인 피아노 소품으로 단번에 그곳을 장악해 버렸다. 쇼팽은 뛰어났으며 독창적이었다. 기교와 표현에서 쇼팽의 피아노는 찬연하게 그 진기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풍부한 시의 정신에서 솟아나는 예술의 삼매경, 그리고도 악상이 대담하고 독창적인 쇼팽은 완전히 독자의 세계를 열고 음악의 세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쇼팽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연인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도 꽃피게 된다. 이름난 소설가였던 상드는 당시 파리 사교계의 핵심 인물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우선 외모부터가 특이했는데, 남장을 하고 다녔고 독한 술을 마시며 시가를 피웠다. 이미 아들과 딸을 둔 이혼녀인데다가 심한 바람둥이기까지 했다. 곱고 아름다운 외모에 섬세하고 내성적인 쇼팽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리스트의 소개로 둘의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병약한 쇼팽은 상드의 보호본능을 자극했고 결국 상드의 적극적인 애정공세로 인해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클래식] 음악가에서 성직자가 되기까지..“프란츠 리스트”

리스트의 파리 입성은 파리 사교계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시는 피아노란 악기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더불어 피아노 음악에 대한 관심과 가치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 절묘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헝가리 출신의 순박한 청년인 리스트가 그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소문은 소문을 만들고, 그의 연주회장은 연신 북새통을 이루었다. 특히 여자들은 그이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목했고, 돈 많은 부유한 여자들의 유혹은 음악보다 진했다. 그리하여 리스트는 여자들과의 구설수로 얼룩진 삶을 시작한다. 리스트가 아무리 훌륭한 예술가였다 하더라도, 도덕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의 젊은 날은 올바른 삶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방황하던 삶을 깨끗이 정리하고 1863년 52세의 나이에 지금까지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가톨릭 사제로 귀의하여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사제의 옷을 입은 메피스토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리스트는 마치 방탕한 젊은 날에 대해 속죄하듯 이때부터 수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하며 새 삶을 꾸려나갔다. 리스트는 28세이던 1839년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1886녀까지 47년간 빈, 마드리드, 아일랜드, 러시아 등 전 유럽을 돌며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비록 헝가리 출신이었지만 빈에서 클래식을, 파리에서 새로운 기교를, 이탈리아에서 문학과 그림을, 스위스에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맛본 그는 그야말로 세계인의 문화를 몸소 체험했고, 이는 음악으로 하나하나 나타나게 됐다.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레데리크 쇼팽, 펠릭스 멘델스존, 로베르트 슈만이 가지고 있던 음악적 장점들을 모조리 갖추고 음악적 최고점에 도달했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 로베르트 슈만, 프레데리크 쇼팽, 펠릭스 멘델스존 등처럼 요절한 동년배 천재 음악가들과 달리, 별다른 잔병치레도 없이 대단히 건강하게 장수해서 동기 중 몇 안 되게 초, 중~후기 낭만파 일대를 전부 풍미할 수 있었던 음악가이기도 했던 프란츠 리스트. 그는 어떤 명예나 칭찬도 중요하지 않지만 단지 내가 가진 창을 미래의 공간 속으로 던질 수 있다면 음악가로서 더는 바랄 것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1886년 7월 30일 세상 밖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리스트가 던진 창은 그가 죽은 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강하게 박혀 있다. 당할 자 없는 화려한 연주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킨 리스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원곡보다 더 멋진 편곡, 마법의 편곡자 리스트

리스트는 또한 편곡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기 스타였기 때문에 그가 연주하면 모든 곡은 그야말로 대히트를 쳤다. 그래서 그는 바흐, 파가니니, 베를리오즈, 베토벤, 슈만 등 음악 동료가 만든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했다. 특히 리스트가 피아노로 편곡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들은 어떤 음악평론가는 원곡보다 훨씬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교향곡 또한 리스트에 의해 편곡되지 않았다면 들을 수 없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다. 이처럼 리스트의 뛰어난 연 주력과 훌륭한 편곡 덕분에 잊힐 뻔한 많은 명곡이 사람들에게 널리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리스트는 은퇴하고 나서도 편곡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약 200곡이나 되는 피아노 편곡을 남기게 된다. 그는 전통적인 피아노 편곡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통찰력으로 전통적 편곡이 가지는 단점들을 극복한 최초의 음악가였다. 이후에도 그의 편곡은 후세의 편곡자뿐만 아니라 많은 피아니스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리스트는 낭비와 방황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앞서 말했듯이 리스트는 피아노를 잘 치고 외모도 뛰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람둥이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 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그에게 여자를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811년 헝가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리스트는 어린 나이에 음악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고, 이를 깨달은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아들을 위해 음악의 도시 빈으로 이사한다, 그리고 체르니에 리스트의 음악 교육을 맡겼다. 이때부터 리스트의 전설적인 연주 기교의 기초가 형성된다. 그가 열도 살 되던 무렵 집안은 다시 파리로 옮겨 가고, 그는 소년 피아니스트가 되어 전 유럽을 돌며 순회연주를 가지고 큰돈을 벌게 된다. 리스트의 연주여행에 매니저 역할을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아담이었는데, 아버지는 이 신동 피아니스트를 데리고 무리한 연주여행을 하다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27년 리스트의 나이 16세,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심한 낭비와 격렬한 방황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화려한 파리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던 것이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남기지 않았지만 파가니니로 인해 남은 것

파가니니가 연주를 통해 본의 아니게 영향을 주게 된 음악가는 많았지만 실제로 그는 단 한 명의 제자밖에 두지 않았다. 그는 형식과 구속을 싫어했으며, 연주회에서도 즉흥적인 연주를 즐겼다. 이러한 이유로 정작 파가니니가 훗날에 남긴 음악은 많지 않지만, 그의 작품을 토대로 다른 위대한 음악가들이 새롭게 만들어 낸 작품들이 많다. 리스트의 파가니니의 캄파넬라 주제에 의한 화려한 대환상곡,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라흐마니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연주를 잘하면 할수록 파가니니에게는 이상하게도 난봉꾼, 수전노, 도박꾼 등등 나쁜 소문들이 하나 둘 늘어만 갔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무시무시한 소문은 바로 그가 살인자라는 것이었다. 소문의 내용은, 파가니니의 그 현란한 기교가 애인을 살해하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완성되었다는 것이었다. 파가니니는 일찍부터 흉흉한 소문에 시달려 왔던 터라, 오히려 그런 소문이 자신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여 그저 웃어 넘겼다 한다. 그러나 이내 소문은 이탈리아를 넘어 빈, 파리, 런던 등 그가 순회하는 유럽의 많은 도시로까지 번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해명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사실 파가니니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거나 혹은 살인을 하고 음악성을 얻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혹독한 가르침과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다. 그의 이런 아름다운 노력의 결실을 사람들이 해괴한 소문으로 엮어서 참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40대로 접어들 무렵부터 온갖 병이 파가니니의 몸을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니스에서 58년 생을 마감한다. 악마라는 이미지 때문에 니스에서도, 그의 고향인 제노바에서조차도 그의 시신 매장을 반대했다.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 그의 시신은 오랫동안 떠돌다 이탈리아 파르마 묘지에 겨우 묻힐 수 있게 되었다. 1954년부터 파가니니의 고향 제노바에서 열리는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를 통해 사람들은 그를 추억하며 또 다른 파가니니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1위 입상자들에게는 그와 늘 함께 했던 캐논(대포)란 별명이 붙은 바이올린 과리넬리 델 제수로 연주할 수 있는 특전을 주고 있다. 바이올린이 가진 갖가지 아름다운 비밀들을 사람들에게 꺼내 보여주고자 했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이런 진실 때문에 헛된 소문의 전설 속에서도 파가니니는 빛나는 연주자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악마의 기교! 파가니니를 가르칠 스승은 없었다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제노바에서 태어난 파가니니는 아버지 안토니오로부터 다섯 살 때 만돌린을, 일곱 살 때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아침부터 밤까지 어린 아들에게 혹독하게 음악을 가르친 그의 아버지에게는 나름의 큰 야망이 있었다. 당시 북이탈리아에는 어린이에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 발견되는 것은 가문을 일으킬 만큼 커다란 희망이었다. 국민이 가지는 관심과 존경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아들 파가니니를 통해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얻으려 했던 아버지 안토니오는 그의 아들 파가니니를 다그칠 수밖에 없었고 파가니니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며 음악적으로 나날이 성장하였다. 파가니니는 여덟 살에 직접 소나타를 작곡했고 아홉 살에는 공개 무대에서 자신이 작곡한 캄파넬라 변주곡을 연주했다. 쇼팽, 슈만, 리스트 등 당대를 주름잡은 많은 음악가에게 연주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파가니니, 물론 그도 큰 영향을 받은 연주자가 있었다. 바로 아우구스트 두라노프스키라는 바이올리니스트다. 너무도 급속도로 음악적 성장을 이뤄나가던 파가니니. 그는 어디서나 반년이면 스승의 실력을 따라잡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다. 그에게 어떤 뛰어난 스승의 연주법조차도 시시하게 느껴질 무렵, 순회 연주 중이던 두라노프스키가 제노바에 들렀는데 그의 연주에 파가니니는 깊은 감동을 하였다 한다. 비르투오소의 전혀 새로운 연주법, 그의 눈부신 연주는 파가니니가 한 단계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훗날 파가니니가 사람들을 열광시킨 연주 효과는 대부분 이 두라노프스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파가니니에게 영향을 주었던 두라노프스키에게는 비르투오소(Virtuoso)라는 명칭이 주어졌는데, 비르투오소는 덕이 있는, 고결한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17세기에 예술이나 도덕에 대해서 특별한 지식을 갖춘 탁월한 예술가나 학자에게 붙여진 말이다. 그러다 점차 기교가 매우 뛰어난 음악가, 그중에서도 피아니스트를 비롯한 기악 연주자를 대상으로 사용 된 명칭이다. 불과 열네 살에 어떤 스승의 가르침도 받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났던 소년 파가니니는, 독자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력을 쌓기 시작한다. 열아홉이던 1901년에는 국립 오케스트라 악장으로 임명되어 4년 동안 활동했으며 궁정 오케스트라의 독주 바이올리니스트로도 3년 동안 활동한다. 1809년부터 평생을 자유 예술가로의 삶을 살게 된 파가니니는 그때부터 전 유럽 방방곡곡을 돌며 비로소 그의 빛나는 연주를 선보이게 된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악마의 모습을 한 천재 음악가 ‘파가니니’

그를 향해 아무리 세상이 냉혹하게 굴더라도, 언제나 묵묵히 바이올린이 가진 그 아름다운 비밀들을 꺼내 보여주고자 했던 니콜로 파가니니(Nicolo Paganini)! 그래서 그의 연주는 오늘날도 이토록 전설 속에서 빛나는 듯하다. 슈만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직접 들었다. 그 당시 연주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슈만은,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확고한 마음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파가니니와 같은 대 연주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3개월 후 이러한 자신의 뜻을 그의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한다. 리스트 또한 비슷한 시기에 파가니니의 믿을 수 없는 연주력과 마주하게 된다. 파가니니의 연주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감동을 받은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에 맞서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굳게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쇼팽은 니콜라스 1세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바르샤바를 방문했다가 바이올린리스트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게 된다. 악마적인 영광을 안고 있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은 쇼팽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영향으로 연습곡 작품10을 작곡했다. 슈만, 리스트, 쇼팽 등 당대를 주름잡은 음악가들에게 단지 연주 한 방으로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바이올린리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그는 악마의 모습을 한 천재 음악가였다. 오늘날 그의 연주는 수많은 뒷이야기를 남기며 전설로 남아 있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에도 파가니니는 기괴한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무수한 소문을 몰고 다니곤 했다. 화려하고도 초월적인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솜씨를 두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얻어낸 악마적 기교라는 말들을 한다. 피아노의 파가니니라 불리며 파가니니에 버금가는 연주를 보여 주었던 리스트에게서는 결코 찾을 수 없었던 표현이다. 아마도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는 그의 외모 때문인지도 모른다. 파가니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몹쓸 병마로 인한 고통에 괴로워 보이는 그의 몸은 점점 더 말라 가는 것 같았습니다. 움푹 팬 눈과 창백한 얼굴은 검푸른 안경으로 인해 더욱 괴기스럽게 보였습니다. 마치 굶주린 악마처럼 말입니다. 파가니니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매번 이러하다. 연주에 있어서는 기가 막힐 정도로 뛰어났지만, 외모는 혹시라도 어두운 뒷골목에서 마주칠까 두려운 그런 비호감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 파가니니(Paganini)는 작은 이교도란 뜻이다. 어쩌면 그의 삶은 이름과도 닮았을지도 모른다. 너무 연주를 잘해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외모가 흉악해서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늘 나쁜 소문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 죽어서조차 제 몸 뉠 작은 공간 하나 허락받지 못해 그의 유해는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더 클래식] ‘빈’에서 시작해 ‘빈’에서 끝난 슈베르트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있다. 소리를 알아듣다라는 뜻으로, 말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이르는 말이다. 무척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수줍음까지 많았던 슈베르트에게도 다행히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 친구들의 이해와 헌신적인 사랑은 슈베르트를 지탱해 주는 튼튼한 울타리가 됐다. 또한 그의 천재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지음의 본래의 뜻 그대로 슈베르트의 음악을 알아주는 친구들이었다. 슈베르트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 친구들과 거의 매일 밤 만나 함께 연주하고 감상했고 슈베르트는 이 음악회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신작을 발표했다. 이 모임은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고 불리는데 구성원들은 법률가, 화가, 시인, 음악가 등 다양한 직종에 있던 예술적 취향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자신의 생각과 지식을 나누었는데 이를테면 스스로 시를 짓고 낭송하고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유럽의 정치와 사회적 현실을 논했다. 비록 가난한 생활을 했지만 이런 친구들로 인해 슈베르트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매우 충만했다. 무명의 작곡가 슈베르트가 만든 마왕을 들고 유명 악보 출판사에 찾아가 부탁을 한 것도 그 부탁이 거절되자 자신들의 돈을 모아 인쇄를 하고 그 악보를 팔아 번 돈으로 슈베르트의 밀린 방세와 각종 외상값을 해결해 준 것도 모두 이 친구들이었다. 결국 슈베르트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이 친구들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었다.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빈의 깊은 속내와 문화적 향기가 물씬 풍긴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모든 예술가들이 동경해 마지않던 꿈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고 성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음악가들은 음악의 도시 빈에서 인정받기를 원했고 일정 나이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터전을 떠나 빈에서 음악을 펼쳤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이미 생의 시작을 빈에서 했기 때문에 빈의 문화가 참으로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비록 방랑자였지만, 결코 빈을 두고 먼 곳으로 떠나지 않았던 슈베르트! 그의 삶과 음악은 빈에서 시작해 빈에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빈의 집에는 슈베르트를 상징하는 동그란 안경과 늘 들고 다니며 많은 곡을 작곡했던 작은 기타가 그를 대신해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떠난 빈자리는 수백 곡의 가곡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채워 주고 있다. 지금 빈의 중앙묘지에 있는 슈베르트의 묘는 그가 생전에 존경했던 베토벤의 묘 옆에 자리하고 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죽음의 그림자가 낳은 걸작 ‘겨울 나그네’

병고의 나날을 보내던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그는 친구들에게 무언가 깜짝 발표라도 할 모양이었을까? 1827년 10월 어느 날, 슈베르트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자신조차도 감동하고 말았다는 자작 가곡을 불러 주었다. 우울하고 호소력 짙은, 사랑에 실패한 한 청년의 괴로움이 진하게 고여 있는 이 곡을 듣고 친구들은 모두 큰 감동을 받았다 한다. 이 곡이 바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고 민중의 마음이 담긴 많은 낭만적인 시를 남긴 독일의 유명한 시인 빌헬름 뮐러(Wilhelm Mueller)의 시에 곡을 붙인, 그가 남긴 최대의 걸작인 연가곡 겨울 나그네: Die Winterreise이다. 여기서 연가곡이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완결적 구성체를 가진 가곡 모음을 뜻한다. 자신의 몸 하나 편히 쉴 안락한 공간조차 갖지 못하고, 영양 섭취마저 부실한 가운데 많은 창작품을 만들어내느라 에너지를 소진해 버렸던 슈베르트는 마침내 몹쓸 병을 않게 되고 만다. 하지만 병으로 인하여 자신의 생이 죽음을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의 창작욕은 더욱 불타올랐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마치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가난 속에서의 시달림과 고독한 삶 그리고 몹쓸 병 속에서도 창작의 펜을 놓지 않았던 그는 1827년 몇 개의 걸작을 내놓게 되는데,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겨울 나그네 이다. 겨울 나그네은 어떤 곡일까? 청춘의 서정과 아름다움이 듬뿍 담긴 아름다운 물방앗간 집 아가씨와는 달리 겨울 나그네는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가득한 24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 비극적인 노래의 연가곡이다. 이 연가곡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추운 겨울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한 청년이 방랑의 길을 떠난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들판을 헤매던 청년은 어느덧 까마귀, 숙소, 환상, 도깨비불, 백발과 같은 죽음의 상념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고, 마을 어귀에서 라이어를 돌리는 늙은 악사에게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며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이 곡이 완성된 1827년, 슈베르트에게 충격적이고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가 그처럼 존경하고 우러러보았던 악성 베토벤과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뮐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병마로 인한 괴로움과 존경하고 의지하던 지인들을 잃은 상실감은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그토록 아름다운 창작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사랑을 잃은 아픈 가슴을 안고 한겨울 눈 덮인 들판을 어슬렁대는 겨울 나그네의 주인공은, 이 곡을 탄생시킨 이듬해인 1828년 11월 19일 31세의 젊은 나이에 가난과 병 속에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긴긴 겨울 여행을 떠나게 되는 슈베르트의 슬픈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음악만을 사랑한 방랑자 ‘슈베르트’

기타 하나 달랑 메고 정처 없는 떠돌이 음악가로 서른한 해를 살다가 훌쩍 세상을 떠난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그가 떠난 빈자리는 수백 곡의 아름다운 가곡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채우고 있다. 슈베르트의 친구였던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의 작곡 과정을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1815년 어는 날 우리는 슈베르트를 만나러 갔다. 그 무렵 슈베르트는 마치 들뜬 사람처럼 괴테의 시를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시를 읽었고 펜을 든 채 잠시 서성거리다가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기막힌 노래 한 곡을 만들었다. 바로 그날 밤, 그 곡은 연주되었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제 겨우 18세의 슈베르트는 단숨에 걸작 하나를 만들어 냈고 이 마왕은 그 후 600여 곡이 넘는 가곡을 남길 슈베르트의 작품 중 당당히 작품번호 1번을 달게 됐다. 필자는 슈베르트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며 그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그는 음악만을 사랑한 방랑자였다고. 가곡의 왕 슈베르트. 그는 작곡을 시작한 13세부터 생을 끝낸 31세까지의 짧은 기간에 650여 곡의 가곡을 비롯해 교향곡, 실내악 소나타 등 무려 1천여 곡의 작품을 남겼다. 이는 웬만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음악 천재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결과임이 분명하다. 탁월한 화성 감각과 모차르트에 견줄만한 선율 창조의 재능을 슈베르트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1797년 1월31일 오스트리아 빈의 엄격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변두리 초등학교 교장이던 그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음악을 좋아했고 그래서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가까이할 수 있었다. 남다른 음악성을 가졌던 슈베르트는 여덟 살 무렵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에게서 다양한 음악 기초를 배우고 열한 살 때는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인정받아 빈 궁정 예배당의 소년 합창단원이 된다. 그리고 열세 살 무렵부터 작곡을 시작해 5년 동안 무려 140곡의 가곡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곤궁한 가정은 안타깝게도 그에게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형성해 주지 못했다. 생계수단으로 아버지의 학교에서 임시교사로 3년간 일했던 슈베르트는 끝내 그 생활을 버리고 음악을 위한 삶을 꿈꾸며 방황을 시작한다. 그는 밤마다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들과 더불어 거리를 쏘다녔다. 기타 하나만 어깨에 달랑 메고는 어젯밤은 이 친구네, 오늘 밤은 저 친구네, 내일 밤은 또 다른 친구의 집으로 향하며 정처 없는 나날을 보낸다. 비로소 제대로 된 떠돌이 음악가가 된 것이다. 마치 그가 남긴 역작, 연가곡 겨울 나그네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도전과 투쟁! 베토벤의 위대한 예술 인생

베토벤의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보면서 어떤 인상을 받을까. 필자에게는 꽉 다문 입매와 곱슬 거리다 못해 마구 헝클어진 머리칼이 매우 인상적이다. 곱슬머리가 고집이 세다는 말이 있듯 그의 고집은 무척 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아집이 아니라 음악적 고집이었다. 베토벤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음악적 혁명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을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작곡한 작품으로 정식 출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음악인들은 왕이나 귀족에게 고용되어 그들이 요구하는 음악을 만드는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에 작품 출판은 음악가로서의 자립을 의미했다. 베토벤은 더 이상 귀족의 구미에 맞춰서 음악을 만드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자기 주관대로 작곡하기 시작했다. 작품 출판은 음악가들을 더욱 더 능동적으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베토벤의 뛰어난 음악성 덕분에 그를 후원하는 귀족들이 많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들 앞에 당당했고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지독한 가난이라는 환경적 제약도 모자라 그에게 다시금 신체적 제약이 찾아온다. 20대 후반부터 서서히 시작된 청각이상은 30대 초반에 이르러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만다. 그때 그는 마침내 유서를 쓰게 된다. 절망 끝에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 하지만 예술이 나를 붙잡는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이다. 베토벤은 이런 어려움을 딛고 작곡을 하고 연주를 하지만 49세에 완전히 청력을 상실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말했다. 인간의 소리를 잃은 대신 신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진정 신의 소리가 무엇인지 들려주고자 자신을 희생한 살신성인의 악성, 바로 음악의 성인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에 영화로운 조물주의 오묘하신 솜씨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이것은 바로 그가 전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신의 소리를 담은 그의 작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신과 음악적으로 소통했던 베토벤은 1827년 57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여전히 궁핍했고, 조카에게까지 배신을 당하고 귓병은 악화되고 결핵까지 걸렸던 베토벤. 생의 마지막까지도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닌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장례에는 애도를 표하려 모여든 군중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한다. 한평생 삶에 도전하고 투쟁하며 전쟁과도 같은 예술 인생을 살다 간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 필자는 오스트리아 유학시절 빈(Wien)의 중앙 묘지에 있는 그의 묘 앞에 언제나 싱싱한 생화가 수북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베토벤의 음악이 영원하듯 그를 향한 우리의 존경심도 영원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가난도 막을 수 없었던 베토벤의 학구열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는 고작 여섯 살의 베토벤을 제2의 모차르트라 칭하며 아들을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전략을 짜고 베토벤을 상품화해 보지만, 너무나 탁월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이미 목격한 사람들에게 베토벤은 그저 우수한 재능을 가진 어린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에 상심한 베토벤의 아버지는 더욱 술만 마셔 댔고, 베토벤은 어린 나이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집안의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열한 살 무렵 베토벤은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불타는 학구열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궁정 예배당에서 스승의 보조 연주자로 일했고, 2년 만에 정식 연주자가 된다. 그리고 5년 후 드디어 음악의 중심지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입성하게 된다. 그곳에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와 만나지만 안타깝게도 짧은 만남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을 이미 예견한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만남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필자의 욕심으로는, 무르익을 대로 익은 모차르트의 음악성이 열 몇 살의 베토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더 위대한 음악을 우리에게 남겼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지금 들을 수 있는 음악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벅찬 가슴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보다 더한 욕심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베토벤은 또 한 번 커다란 시련을 맞게 된다. 주정뱅이 아버지와는 달리 그토록 따뜻하고 다정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소년 가장이라는 십자가까지 지게 된 것이다. 어린 동생을 돌보고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독학으로 꾸준히 지식과 교양을 넓혀간 베토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즉흥 연주에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높아지게 된다. 그 결과 이십 대 초반에 드디어 십 대 때 잠시 머물렀던 빈에 정식으로 입성하게 되고, 그의 모든 음악은 이곳 빈에서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연주자로서 이미 굳건한 명성을 확립한 베토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작곡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하이든이 요청으로 그의 제자가 되기도 했지만, 유난히 배움의 욕구가 강했던 베토벤은 하이든의 가르침만으로는 만족지 못하고, 몰래 다른 레슨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클래식] 인간 승리의 표상 베토벤-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한평생 삶에 도전하고 투쟁하며 전쟁과도 같은 예술 인생을 살다간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운명 앞에 당당했던 그는 인간 승리의 표상이었다. 베토벤은 사색에 빠져 길을 걷던 어느 날 교회당 종소리가 점점 멀어짐을 느꼈다.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종소리가 더 이상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도, 세상의 어떤 소리도 그에게만은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그저 고요해진 세상. 두렵고 가혹한 운명은 벌써 한 음악가의 삶을 통째로 삼켜 버렸고, 이미 그를 절망 속으로 빠뜨렸을지도 모른다. 과연, 더 이상 귀로 들을 수 없는 이 작곡가 베토벤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베토벤은 완전히 청력을 상실해 버렸지만, 그는 이 엄청난 운명의 시련 앞에 당당히 도전장을 던졌다. 그리고 그 유명한 대작 교향곡 5번 운명, 교향곡 6번 전원, 피아노 협주곡 황제 등을 세상에 내 놓으며 운명 앞에 보란 듯이 승리의 깃발을 꽂았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인간승리의 표상으로 남아있다. 엘리제를 위하여, 베토벤의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라면 연주해 보았을 것이고, 이 아름다운 선율은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머물러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곡의 작곡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고, 더 어려운 곡까지도 연주하고픈 욕망에 피아노를 더 열심히 배웠을 것이다. 베토벤의 작품이 주는 중독성은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늪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어린 베토벤은 결코 모차르트가 될 수 없었다. 베토벤은 독일의 본(Bonn)에서 음악가 집안의 장남으로 1770년 12월 17일 태어났다. 궁정의 테너 가수였던 아버지, 궁정악단 단원으로 시작하여 음악감독 지위까지 오른 할아버지, 그 덕분에 제법 부유했던 집안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이제 겨우 세 살이었을 때 아버지 요한 주정뱅이가 되어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그때부터 가난은 베토벤을 지독하게 따라다녔다. 어려운 가정 형편도 문제였지만, 주정뱅이가 된 아버지가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단지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이용해 돈벌이에 이용하려 했다. 당시 베토벤보다 14살 많았던 신동 음악가 출신 모차르트를 모델로 전략을 짜고, 고작 여섯 살의 베토벤을 제2의 모차르트라 칭하며 상품화해 보지만, 너무나 탁월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이미 목격한 사람들에게 베토벤은 그저 우수한 재능을 가진 어린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에 상심한 베토벤의 아버지는 더욱 술만 마셔 댔고, 어린 베토벤은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당연히 집안은 더 형편없이 변해갔고 베토벤은 열한 살 때 결국 학업마저 중단하게 된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일찍 시작한 만큼 일찍 마감된 음악 인생

그가 연주하는 곳이라면 언제나 환호와 박수가 끊이지 않았던 모차르트의 천재성. 수많은 음악가를 좌절하게 하고 또 모든 음악가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 천재성. 하지만 그 천재성이 모차르트에게 큰 불행을 가져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세계를 무대로 연주력을 뽐냈던 모차르트는, 청년기를 맞으며 많은 고민과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스무 살 이후부터 그의 삶은 불행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그 불행은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이어졌다. 모차르트에 대한 세간의 주목도 그가 나이를 먹자 함께 사그라졌다. 청년 모차르트는 사랑했던 여인과 아버지의 반대로 이별해야만 했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여인과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또 생계를 위해 소나타, 실내악, 교향곡, 협주곡, 심지어 종교음악까지 닥치는 대로 작곡을 했지만 늘 가난했다. 곤궁한 생활은 그의 몸을 약하게 만들었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지게 됐다. 미완성으로 남겨진 레퀴엠을 작곡하던 어느 날 모차르트는 과로와 병마에 시달리다 마침내 1791년 12월 5일, 서른다섯의 나이로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꽃같이 젊은 천재 음악가의 시신은 제대로 된 묘지에 묻히기는커녕 거의 버려지다시피 매장됐다. 훗날 사람들은 그에게 제대로 된 묘를 만들어 주려 하였지만, 이미 사간이 많이 흘러 도대체 그가 어디에 버려졌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버려졌다고 짐작되는 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렇게나마 모차르트를 기념하고 있다. 하이든과 더불어 빈 고전파 양식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작품의 폭과 깊이에서 다른 사람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이룩했던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그의 생가가 있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가면 모차르트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열쇠고리, 옷, 인형, 심지어 초콜릿 상자에도 모차르트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매년 모차르트 음악 페스티벌이 열려 세계의 쟁쟁한 음악가들과 음악 애호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고 있다. 마치 도시 전체가 그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모차르트가 우리에게 남겨 준 음악 선물에 비한다면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음악의 아름다움과 음악이 간직하는 따뜻한 메시지를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눈다면 결국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는 오늘도 우리를 향해 노래하고, 진한 감동과 위안을 선사하고 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유럽을 돌며 최고 음악가로 성장한 모차르트

프랑스에서는 국왕 루이 15세 앞에서 연주하며 극찬을 받았고, 오스트리아 빈 궁전에서 어린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 앞에서 연주했을 때는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13~15세 무렵까지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여행을 했는데 이때 교황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인 음악 이론의 권위자 마르티니(Giambattista Martini, Padre)로부터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으며, 이탈리아의 기악과 성악을 직접 접하는 등 새로운 음악 지식과 기교를 연마하며 유럽 제1의 음악가로 성장해 나갔다. 그 후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이름을 날렸던 하이든(Franz Joseph Haydn)과의 만남을 통해 음악적인 성장에 또 한 번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 아이는 세상에서 최고로 뛰어난 작곡가가 틀림없네. 지금까지 나는 이런 천재적인 작곡가는 본 적이 없다네. 모차르트를 지도한 하이든이 친구인 레오폴트에게 고백한 이 말은, 어린 모차르트의 음악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를 대번 알려주는 듯하다. ■ 불행한 천재가 일궈낸 눈부신 음악!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이끌어 냈던 모차르트의 천재성. 많은 음악가를 좌절시키고 모든 음악가의 부러움을 샀던 모차르트의 그 천재성. 그러나 한편으로 바로 그 천재성은 모차르트 개인에 있어서는 커다란 불행의 씨앗이었다. 멋모르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세계를 누비며 연주력을 뽐냈던 모차르트는, 자아가 형성되던 청년기를 맞으며 많은 고민과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험한 세상과 마주해야 했는데, 그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스무 살 이후부터 모차르트의 삶은 불행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그 길은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이어져 있었다. 신동이 나이를 먹자 그에 대한 세간의 주목도 함께 사그라졌다. 청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했던 여인과 이별해야만 했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여인과의 결혼생활은 끝끝내 불행했다. 또 생계를 위해 소나타, 실내악, 교향곡, 협주곡, 심지어 종교음악까지 닥치는 대로 작곡을 했지만 늘 가난했다. 그이 3대 걸작 오페라이자 인류가 만든 최고의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오페라 돈 조반니, 마술피리, 교향곡 주피터, 수많은 피아노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레퀴엠에서 가곡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모차르트의 명곡은 한 끼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던 비참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더 클래식] 세상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안겨 준 외로웠던 천재 모차르트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이룩했던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음악으로 진한 감동과 위안을 선사하고 있다. 아이의 손가락은 도에서 라까지 겨우 닿을 만큼 작았다. 그런 아이에게 누군가가 요청했다. 얘야, 지금 바로 사랑의 노래를 만들어 들려줄 수 있겠니 아이는 히죽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가 싶더니 금세 건반을 두드리며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 한 곡을 연주해 주었다. 너무도 신기하고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며, 누군가 다시금 아이에게 요청했다. 이번에는 분노의 노래를 만들어 줄 수 있겠니 말하기가 무섭게 아이는 또 하나의 아주 멋진 즉흥곡을 만들어 냈다. 이처럼 여덟 살의 모차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그들의 음악 요청을 들어주었다. 어린 모차르트는 마치 동전을 넣으면 듣고 싶은 음악을 바로바로 들려주는 오늘날의 주크박스처럼, 아니 그보다 더 멋지고 근사한, 생생한 음악을 당시 사람들에게 선사해 주었던 것이다. 사실 위대한 음악가는 너무 많고, 그 중에게는 타고난 음악 천재라 불리는 이들도 꽤 많다. 그런데 이 타고난 천재 중 누가 더 천재인가를 놓고 경합을 벌인다면? 솔직히 그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꼭 경합을 벌여서 천재 중의 천재를 가려야 한다면, 바로 그 최고 음악 천재의 자리에는 당연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앉아야 할 것이다. 서른다섯 해, 그 짧은 삶에서 녹여 낸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야말로 '천재'가 아니고서는, 아니 천재 모차르트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던 것들이다. 음악적 초능력을 가진 신동.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음악 신동이란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들으며 자랐다. 그의 천재성을 뒷받침하는 일화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알레그리의 비제레레란 11분짜리 합창곡을 단 한 번 듣고 정확히 악보에 옮긴 일일 것이다. 과연 얼마나 머리가 좋으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의 두뇌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아이큐는 230이 넘을 거라고 한다. 이미 어린 나이에 너무도 돋보인 모차르트의 천재성!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그런 아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바이올린리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레오폴트는 아들의 천재성이 사라질까 두려워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도드라지면 질수록 더욱 무섭게 연습실로 내몰았다. 나중에는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을 돌며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펼쳐보이려 안간힘을 쏟았다. 모차르트의 나이 일곱 살에 이루어진 아버지와의 길고 긴 연주 여행, 무리한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극기 훈련에 가까웠다 할 수 있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따뜻한 음악가 ‘파파 하이든’

하이든은 오스트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 로라우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로라우란 지역은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인접한 곳으로, 이들 지역은 각각 독특한 자신만의 민요를 지니고 있었다. 하이든은 이런 다양한 민요들을 접하면서 자랐는데, 이는 후일 그의 음악에 크나큰 원천으로 작용했다.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하이든은 다섯 살 때 음악을 시작했다. 노래 실력도 뛰어나 8세 무렵 성슈테판 성당 소년합창단 단원이 된다. 그러나 17세 즈음 변성기로 인해 합창단을 나오게 된다. 그때부터 10년간 무한한 자유와 함께 불안정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가난했던 하이든의 부모는 아들이 음악가가 아닌 성직자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미 음악가로 진로를 확고히 정한 하이든은 독학으로 작곡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 피아노 교사, 성악 반주자, 귀족 집안 실내연주자 등 닥치는 대로 수많은 일을 하며 고생스럽게 지낸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틀지지 않았다. 10여 년의 고생 끝에 드디어 하이든에게도 행복한 시절이 열리게 된다.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니콜라우스 후작이 하이든의 교향곡에 매료된 나머지 하이든을 그의 가문에서 운영하는 악단의 부악장으로 임용하게 된 것이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가의 부악장으로 취임하게 되고 5년 뒤부터는 악장으로 승진, 이후 1790년까지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악장으로 지낸다. 하이든은 귀족 집안의 충실한 음악가로 지내며 밝고 명쾌한 수많은 곡을 썼는데, 거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 있었다. 많은 곡을 남긴 것은 귀족을 위해 일주일에 두 편의 교향곡을 무조건 제출해야 하는 의무 때문이었고, 밝고 명쾌한 곡을 쓴 것은 귀족을 무조건 기쁘게 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는 에스테르하지가의 음악가로 지내는 30년 동안 교향곡, 현악 4중주, 피아노 소나타, 오페라, 칸타타 등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후작이 사망한 후 다시 빈으로 돌아온 하이든은 1791년 런던으로 돌아가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한다. 런던에서 그의 교향곡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영국 왕실에서도 무척이나 총애하여, 그가 런던을 떠나 다시 빈으로 돌아올 때 수많은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말년의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그의 일생에 다시없는 대작을 남기게 된다. 그것은 바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듣고 그 감동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이다. 대부분 음악가가 괴팍하고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하이든은 이와 달리 온화하고 재치가 넘쳤다. 늘 사람들을 배려하고 감싸 주었던 따뜻한 음악가 하이든은 파파 하이든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77세로 생을 마감하던 순간까지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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