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것

앞선 글들에서 필자는 참행복은 ‘존재’에 달려있음을, 그래서 ‘존재의 변화’가 관건임을 종종 언급했다. 한데 막상 ‘무엇이’ 그런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지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오늘은 그것을 다뤄본다. 동화 ‘미운오리새끼’의 주인공은 백조다. 그는 집오리들 틈에서 나고 자라면서 자신을 하늘을 날지 못하는 집오리로 믿고 살게 된다. 그래서 날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이 백조임을 알게 된다. 처음엔 믿지 못했지만 자신이 백조임을 굳게 믿자 비로소 하늘을 날게 된다. 네 발로 기던 아기가 두 발로 걷기까지 2천번 넘게 넘어진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2천번 넘게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는 거다. 아기는 무수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는 부모의 신뢰와 사랑을 보고 ‘저분이 내 부모가 맞구나. 내가 저분의 자식이 맞구나. 그러면 나도 저분들처럼 두 발로 설 수 있겠구나’ 믿게 된다. 자신을 향한 부모의 믿음을 보고 자신이 인간임을, 네 발로 기는 짐승의 자식이 아니라 두 발로 서는 인간의 자식임을 믿게 된다. 이 믿음이 그를 두 발로 걷게 만든다. 필자는 이전 글들에서 천주교에서는 세례 때 결정적인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한데 아무리 세례로 새로 태어나도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미운오리새끼’의 주인공이 큰 날개를 갖고 태어났어도 자신이 백조임을 믿지 않았을 때에는 날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피땀 흘려 노동하고 아이는 그것을 먹고 큰다. 입에 들어가는 것은 밥이지만 실제로 먹는 건 부모의 피땀이다. 아이는 부모의 피땀을 먹으며 ‘내가 정말 저분들의 자녀구나’ 믿게 된다. 부모의 피땀이 그에게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비로소 그를 인간이 ‘되게’ 한다.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들은 미사 때마다 성체를 먹는다. 성체는 예수의 살과 피를 가리키는 것으로 천주교인들은 미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가 참으로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아이가 부모의 피땀을 먹듯 천주교인들은 성체를 먹고 자란다. 이 참된 양식이 새 삶을 가능케 한다. 이 과분한 사랑의 양식(예수의 자기증여)을 먹으며 자신이 틀림없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된다. 이 참된 양식이 믿음을 자라게 하고, 그 믿음이 그를 하늘사람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부모의 피땀을 먹고 자란(기억하는) 자녀가 부모를 닮듯 결국 예수를 닮게 된다. 진심으로 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 자신을 집오리의 자녀라 믿는 이는 땅을 기지만, 자신이 백조의 자녀라 믿는 이는 하늘을 사랑하게 된다. ‘추구’는 ‘존재’에 달렸기 때문이다. 존재가 달라지면 추구하는 바도 달라지는 것이다. 자신 없어 하는 청년 신자에게 필자는 말한다. “내게 성체를 주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기억하자. 하느님이 믿는 나를 믿어라.”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는 건 신이 우릴 믿는다는 것이다. 신이 믿는다면 그건 ‘된다’는 것이다. 남은 건 내가 그것을 믿느냐뿐이다. “중요한 건 자네가 하느님을 믿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아니라네.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느님께서 자네를 믿으신다는 사실이지.”(토마시 할리크)

[삶과 종교] 조금 더 가까이

해마다 명절이 되면 여러 지인으로부터 평소보다 많은 문자를 주고받는다. 주된 내용은 명절(새해) 인사가 담긴 그림과 글들이다. 그런데 해마다 빠지지 않고 오는 문자가 있다. 명절에 해서는 안 되는 말들, 듣기 싫은 말들을 재미있게 꾸며 보내는 것들이다. 올해는 이른바 ‘설 연휴 잔소리 메뉴판’이라는 글이 눈길을 끌었다. 몇 가지를 언급한다면 “어느 대학 갈 거니?”, “아직도 취업 준비하니?”, “회사에서 연봉은 얼마니?”, “살 좀 빼야 인물이 살겠다!”, “애인은? 결혼은 언제?” 등등 이런 말을 하면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어느덧 이런 질문을 받기 싫어하던 시기를 지나 이런 질문을 해버리는 나이가 됐다. 젊은 시절에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절대 이런 질문을 하지 말아야지”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이번 명절에도 무의식 중에 이런 비슷한 질문들을 쏟아내고 말았다. 사실 명절이라고 해서 1년에 몇 번 만나지도 못하는 일가친척들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그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기에, 조금 더 자주 만나지 않았기에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질문 외에는 할 말이 없고, 그런 진정성 없는 질문은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가지 않은 것이다(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제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전설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이 명언을 인간관계에 대입해 보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성찰해 본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마태복음 22장 36절 이하에 예수께서 어떤 율법교사가 던진 질문에 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질문은 당시 유대교에서 경건하다고 여기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 같은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연구와 토론 주제였고, 이에 대한 답변은 곧 그 사람의 영적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여겼다.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인용해 아주 간단하고도 명확한 답을 주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37~40·새번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나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조금 더 가까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을 다해 ‘조금 더 가까이’를 실천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며 기도한다.

[삶과 종교] 매서운 추위 속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봄의 기운

양력 2월4일,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날, 입춘이다. 아직 동장군이 물러가지 않아 추위가 한창이지만 자연의 기운 속에서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입춘은 한자로 ‘설 립(立)’ 자에 ‘봄 춘(春)’ 자를 쓴다. 곧 ‘봄을 세운다’라는 말이기도 한데 사계절의 시작에 입춘, 입하, 입추, 입동처럼 ‘설 립’ 자를 쓴다. 이 글자는 사람이 두 팔을 벌린 채 땅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본뜬 것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그동안 기다렸던 봄이 오니 두 팔 벌리고 일어서서 반갑게 봄을 맞이해 본다는 뜻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그렸다는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그림이 있다. 추운 겨울, 동지에 그리는 이 그림은 9×9=81, 곧 81개의 매화 꽃송이를 말하는데 이 매화 꽃송이들로 추위를 이겨냈다고 한다. 매화 81송이를 그려놓은 다음 매일 하루에 한 송이씩 차례대로 빨갛게 칠한다고 한다. 81일 동안 81송이의 매화의 채색을 완성할 즈음 진짜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하는 봄이 온다. 봄을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마저 이렇게 멋지게 그림을 그리면서 풍류를 즐기는 여유로운 선비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기나긴 겨울, 어둠과 추위 속에서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에 밝고 따뜻한 희망의 계절, 봄이 온 것이다. 고난의 시간이 없었다면 희망의 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기다림이 커질수록 반가움은 더 커진다. 인고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은 더욱 단단해지고 성숙해진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기나긴 겨울도 지나고 새싹이 올라오고, 따스한 봄 기운이 느껴지는 봄이다. 성공만 있는 삶도 없고, 실패만 있는 삶도 없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듯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한 가지라도 있다면 그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귀중한 열쇠가 된다. 길을 가다가 넘어졌다면 넘어진 이유를 알아차리고 다시 털고 일어서면 된다. 다시 일어서는 힘, 그 힘은 바로 자신감과 희망을 잃지 않는 내면의 강인함에서부터 비롯된다.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매화 향기에 비유한 황벽희운 선사의 멋진 게송을 소개해 드리려고 한다. “번뇌를 멀리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승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매서운 추위가 없다면 결코 매화 향기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겨울 없는 봄이 없듯이 고통이 없이는 깨달음도 없는 법이다. 고난과 역경을 묵묵히 견뎌내고서 마침내 피어나는 매화처럼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렇게 은은하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힘들고 지쳐 포기하고 싶다면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고 조금만 더 견디고 이겨냈으면 좋겠다. 빠르고 느림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꽃 피는 희망의 봄은 반드시 찾아온다.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건만 봄은 보지 못하고, 짚신이 닳도록 산 위의 구름만 밟고 다녔네. 돌아와 뜰 안에서 웃고 있는 매화 향기 맡으니, 봄은 이미 가지 끝에 완연한 것을.” 중국 남송 시대에 어느 비구니 스님의 깨달음의 게송이 마음에 와닿는다.

[삶과 종교] 죄에 빠지는 이유

성남에는 김하종 신부님이 운영하는 안나의 집이 있다. 가톨릭 성인 안나의 이름이자 ‘안아주고 나눠주고 의지할 수 있는 집’이라는 뜻의 안나의 집에서는 매일 700여명의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이 운영되고 있고 학교 밖 청소년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여러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성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소임했던 3년 정도는 필자도 월요일(사제들이 쉬는 날)을 이용해 안나의 집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때 깨달은 것 중 하나를 나눠본다. 바로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알수록 죄를 피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흔히 종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종교에서 죄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신이 인간을 감시하기 때문이거나 종교가 죄의식을 자극해 겁을 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한데 그런 식의 교리와 행동양식은 종교가 아니라 정확히 사이비들의 것이다. 오히려 가톨릭은 “당신은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당신에겐 귀한 품위가 있어요. 당신은 아름답고 귀한 존재입니다”를 말하려 하기에 죄와의 투쟁(영적투쟁)을 이야기한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과의 만남에 환상은 버릴 필요가 있다. 처음엔 거칠고 공격적인 모습을 오히려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상처가 있어 그런 것이고 특히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라 여기기 때문에 ‘막’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고 그분들을 귀하게 만나면 어느새 천사 같은 미소를 볼 수 있게 된다.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받고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깊어져 그분들도 스스로를 ‘아, 나도 사랑받는 귀한 존재구나’ 믿게 되면 더 이상 죄 짓지 않으려 애쓰게 된다. 즉, 사람은 믿음과 사랑을 받으면 자신의 품위를 깨닫게 되고, 자기가 받은 것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나의 집은 단순히 밥만 드리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한 분 한 분을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며 섬겼던 것,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돼 줬던 것, 때로는 “아이, 아버지! 새치기 하면 안 돼요. 우리 아버지 그런 분 아니잖아요” 하면서 나무라기도 타이르기도 하며 함께 울고 웃은 그 모든 시간은 결국 “당신은 욕망의 노예가 아니에요. 당신은 그보다 귀한 사람입니다”를 말해온 것들이었다. 오늘날엔 위로, 힐링, 사이다라는 핑계로 사람들을 싸구려 거짓 위로에 붙잡아 두는 말들이 많다. “그냥 욕도 좀 하고 살아, 참지 마 되갚아 줘, 네 기분대로 살아, 안 걸리면 그만이지, 사람도 다 동물이야….”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잘 보면 이런 뉘앙스가 깔린 게 많다. 그러나 그건 결국 “너는 고귀한 존재가 아냐”란 말일 뿐이다. 인간 안엔 신의 품위가 있다. 아무리 가난하고 남 보기에 비천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사람은 사랑을 받고 믿음을 받으면 자신의 품위를 깨닫고 변화될 수 있다. 이것이 필자가 안나의 집에서 봤던 것이며, 가톨릭이 죄와의 투쟁을 말하는 이유이고, 신이 우리를 친구라 부른 이유, 십자가를 진 이유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15,15)

[삶과 종교] 방향이 없으면 열심히 뛰어도 방황이다

약 20년 전 ‘부자되세요’란 말이 덕담처럼 쓰인 이래 행복에 대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소위 ‘웰빙, 힐링, 명상, 소확행, 욜로, 자신을 사랑해주렴, 꽃길만 걷자, 경제적 자유 ... 같은 말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행복론에 따라 ‘꽃길을 걷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데 의문스럽다. 그런 ‘세상의 행복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정말 더 행복해졌을까? 더 충만해졌을까?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건지고 ‘좋아요’를 받은 날, 하루 잘 먹고 놀며 ‘소확행’을 느낀 날, 그들은 언뜻 만족을 느끼는 것도 같다. 몸매를 가꾸고 보디프로필을 찍은 날, 명상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한 날,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린 날, 만족스러운 것도 같다. 평화롭고 안락한 그 어느 날, 만족스러운 것도 같다. 한데 그러던 이들이 어느 날 내적 공허함을 고백하고, 어떤 경우엔 갑자기 무너지는 경우까지 보게 된다. 특히 삶에 풍랑이 닥칠 때, 추구하던 자기만족을 느낄 수 없게 됐을 때, 봄은 가고 꽃길은 사라졌을 때, 그들은 당황하고 분노하며 ‘내 삶은 불행하다’고 선언하며 세상을 원망하기도 한다. 자신을 잘 돌봐주는 일은 중요하다. 필자도 자신을 잘 돌보려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내 삶의 이유’,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아니다. 나는 내 일신의 안락과 만족을 위해 이 세상에 보내진 게 아니다. 자신을 잘 돌보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다만 그게 ‘전부’라면, 그게 삶의 목적이라면 그는 대체 어딜 향하고 있는가를 얘기하는 것이다. ‘방향’ 자체가 없거나 모호하면, 혹은 기껏 설정한 방향이 결국 자기 안에 맴도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애초에 ‘방황’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편적인 행복만을 위해 사는 사람, 삶의 목표가 안락함, 자기만족, 힐링, 자신을 아껴주는 것인 사람은 충만함을 알기 어렵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풍랑의 때, 꽃들이 사라진 날, 그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풍랑에도 꺾이지 않는다. 풍랑을 돌파한다. 그에겐 ‘방향’이 있다. 바로 거기서 여유와 유머도 흘러나온다. 그는 자신의 생을 만끽하면서도 자신이 받은 생명을 무언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쓰고자 한다. 그는 ‘자신을 넘어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위해’ 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 하루가 꽃길이 아니어도, 심지어 십자가 길이어도 괜찮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늘 ‘내 기분이 좋았는지’가 아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 신은 왜 나를 이 세상에 보냈는가? 내 소명은 무엇인가? 아니, 그런 것 다 떠나서 나는 정말 어떻게 살고 싶은가? 아니, 애초에 나는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자신을 귀한 품위를 지닌 존재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동물로 여기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그것은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싶은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은가? 질문을 시작했다면 비로소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삶과 종교] 복 있는 사람

2024년 갑진년 새해가 시작됐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한 해의 마지막과 첫날의 시작에서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린다. 송구영신을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옛것은 보내고 새것을 맞아들인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가 이전보다 더 낫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새롭게 다가오는 것에는 언제나 희망과 기대를 가지게 마련이다. 새해가 되면 개인적인 종교의 유무를 떠나 가장 많이 하고,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바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일 것이다. 그런데 ‘받으세요’라는 말에는 분명 누군가 그것을 ‘준다’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즉, ‘복 받으세요’는 그 복을 ‘주는 이’가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새해 첫날 아침에 담임목사로서 송구영신 예배 때 성도들이 적어 낸 새해의 소원을 담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바라는 복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했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에서 ‘복’에 대해 말하는 것 중 세 곳의 말씀을 좋아하고 자주 묵상한다. 시편 1편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복 있는 사람’이 살아갈 길. 마태복음 5장에서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며, 화평하게 하며,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이른바 ‘팔복’의 말씀. 그리고 다윗 시대 찬양대장이었던 아삽이 시편 73편 28절에 고백한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의 구절이다. 그런데 앞 두 곳의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고 받기 원하는 복과는 거리가 있다. 아니 이렇게 세상을 살면 세상에서는 오히려 무시당하고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 말씀들은 주님을 믿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희구하는 복이라 생각하는 것의 차원을 넘어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때로는 나도 남들이 일반적으로 원하고 바라는 복을 구하고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순간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복입니다”라는 아삽의 고백은 참으로 힘과 위로가 된다. 새해 첫 글을 쓰며 잠시 손 모아 기도한다. 새해에는 모두가 행복하길, 모두가 건강하길, 모든 전쟁과 아픔의 소식이 사라지길.... 그리고 모두가 복 받은 사람을 넘어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기원한다.

[삶과 종교] 새해의 시작, 한 걸음부터

2024년, 갑진년 새해가 시작됐다. 새 달력, 첫달을 어떤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까? 시작하는 마음은 늘 설레고 두근거린다. 어떤 인연과 만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더 가슴이 뛴다. 아주 사소한 계획부터 거창한 계획까지,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마음속에 새해 다짐, 약속, 목표 등을 품었으리라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처음 발심이 곧 깨달음이라는 뜻의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법성게의 유명한 구절이 있다. 법성게는 신라 의상 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며 자신이 배우고 수행한 60권 화엄경의 가르침을 일곱 글자로 된 30개의 구절, 총 210자에 담아 668년 완성한 것이다. ‘초발심시변정각’이란 무엇이든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마음을 정하고 그 일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슨 일이든지 성취할 수 있게 하는 비결이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킨 그 지극한 순간이 비로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목표한 지점에 도달해 있다. 하루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한 해가 될 것이다. 시작할 때 중요한 것, 어떤 일에 집중하고 의욕적으로 노력할 것인가? 처음 목표를 정하고 나서 자신의 의지와 결심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도중에 의지가 약해지거나 다른 유혹에 넘어가 다른 곳에 관심이 생기면서 흐지부지될 수 있다. 그것은 처음 마음을 냈을 때의 목적의식이 약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기 어려운 무리한 목표를 세워도 안되고, 너무 쉬운 목표를 세워도 안 된다. 현재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태에서 할 수 있는 한계를 알고 그에 맞춰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소나꼴리위사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부유한 장자의 아들이었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했지만 수행의 결과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으니 자책하면서 수행을 포기하고자 했다. 바로 그때 부처님께서 소나꼴리위사를 찾아와 이야기했다. “그대가 악기를 연주할 때 현을 너무 팽팽히 조이면 소리가 듣기 좋은가?” “좋지 않습니다.” “그럼, 지나치게 느슨하면 듣기 좋던가?” “좋지 않습니다. 부처님, 악기를 연주할 때 현의 완급을 적당히 조율하지 않으면 좋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리의 길을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의욕이 지나쳐 너무 급하면 초조한 마음이 생기고, 열심히 하려는 뜻이 없으면 태만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러니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면 속세의 미혹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너무 조급하고 초조해도 일을 그르치고, 그렇다고 너무 느긋하고 게을러도 일을 그르치게 된다.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지혜로운 중도의 길을 찾아야 한다. 매일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중도 포기하지 않고 실천함으로써 자신감이 생기게 되고, 결국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한 걸음 잘 내딛는 것이 목표를 향해가는 지름길임을 기억하고 하루하루 착실히 살아가면서 실천했으면 좋겠다. 지금 한 걸음부터.

[삶과 종교] Agere seguiture Esse

“응~ 자기소개.” 수년 전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표현으로, 누군가 타인을 비난할 때 ‘남을 비난하고 있는 그 사람이 정작 그 비난의 내용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며 꼬집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큰 의식 없이 쓰던 이 표현이 필자에게는 퍽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들의 표현처럼 실로 모든 행위는 자기고백이기 때문이다. “행위는 존재에 따른다(Agere seguiture Esse).”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다. 꽃을 찾아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행위를 보고 우리는 그가 나비임을 안다. 똥을 찾고 그것을 제 몸에 묻히며 남에게까지 옮기는 행위는 그가 똥파리임을 드러낸다. 이처럼 모든 행위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이를 알면 내 삶이 어찌 흘러가고 있으며, 그래서 어떤 결말을 맞을지, 심지어 죽은 뒤 어찌될지까지 알 수 있다. 사후에 대해 언급하는 김에 하나 짚고 넘어가 보면 사실 한국 천주교가 대중과의 소통에 게으르고 서툴렀던 탓에 대중들이 천주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다. 그중 ‘개신교는 믿으면 천국 간다던데 천주교는 믿고 선행도 해야 한다더라’는 식의 인식도 있다.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천주교에서 선행을 말하는 이유’가 빠져 있다. 그것은 신이 인간의 행위를 보고 심판하기 때문이거나 선행으로 감히 신과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고 신은 감시자도 아니다. 그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행위와 존재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야고2,17)이기 때문이다. ‘꽃을 사랑하는 존재’인 나비는 결국 꽃밭에 있게 될 수밖에 없다. 꽃을 찾는 행위(선행) 좀 했다고 꽃밭(천국)에 보내지는 게 아니라 꽃을 사랑하는 나비(존재)니까 당연히 꽃을 찾고(행위) 결국 꽃밭에도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한 것(하느님)을 추구(사랑)하는 존재(하느님 자녀)는 당연히 선행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선한 세상(천국·하느님 나라)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의 예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더 쉽다. 흔한 일상의 죄로 뒷담화가 있다. 사실 내가 뒷담화 좀 했다고(행위만 보고) 신이 나를 지옥 보내진 않는다. 그런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 뒷담화를 사랑하는 사람(존재)은 행복할 수도 없고 천국에 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뒷담화를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계속 뒷담화를 하고 싶어(추구) 하는 사람(존재)은 ‘감사하며 겸손한 사람들’ 틈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쟤는 뭔데 저렇게 다 감사하대? 재수 없어” 하며 꼭 자기처럼 뒷담화하길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곳으로 스스로 떠나기 때문이다. 꽃을 싫어하고 똥을 사랑하는 존재는 제 발로 꽃밭을 떠나 뒷간으로 가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내가 대체 뭘 보물처럼 여기며 추구하고 있는지, 즉 내가 자신을 누구라고 고백하며 살고 있는지 살필 일이다. 그게 결국 내 행위로도 드러날 것이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삶과 종교] 이하동문

초·중·고 시절 참으로 하기 싫었던 학교 의무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매월 첫 주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시행하는 ‘애국조회’였다. 애국조회의 순서는 국민의례-애국가 제창–훈화 말씀–상장 수여–교가 제창으로 진행된다. 계절에 상관없이 비와 눈만 오지 않으면 1천명도 넘는 전교생이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부동자세로 듣는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조회 시간에서 훈화 말씀보다 더 싫은 게 있었다. 바로 ‘상장 수여’ 시간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상을 받는 것은 참으로 축하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상장을 받는 이들 중 대표 학생을 호명하고 수여한 후 나머지 수상자들은 ‘이하동문(以下同文)’이라며 끝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시간의 제약과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이하동문’이 필요하겠으나 그 짧은 ‘이하동문’ 한마디에 같은 상의 가치가 퇴색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물론 필자는 학창 시절 단상에 나가서 수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실까” 또는 “주님이 나를 다른 사람만큼 사랑하실까”라는 질문이 생기곤 한다. 마치 하나님이 나를 ‘이하동문’으로 사랑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분 하나님이 80억 인류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말은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다. 또 반대로 종교적 열심이 너무 강해 잘못된 생각으로 빠지기 쉬운 것 중 하나가 ‘믿는 사람들만 사랑하신다’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5절에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새번역)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이하동문’이나 ‘One of them(그중 하나)’으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이를 같은 사랑으로 대하신다는 것이다. 어릴 적 들은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저녁 예배가 끝나고 교인 한 분이 목사님께 질문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우리는 이렇게도 많은데, 하나님이 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이나 있을까요?” 그 말을 들을 목사님은 그 교인을 데리고 논둑으로 향했다고 한다. 때는 마침 모내기를 위해 논마다 물을 채워 놓았고 하늘에는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목사님은 교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성도님. 저 앞의 논들을 보십시오. 하늘에는 달이 하나만 떠 있는데 모든 논에는 달이 다 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이제 곧 성탄절이다. 우리 모두를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기억하고 그분의 사랑이 필요한 모든 곳에 그 사랑을 나누는 계절이 되길 소망한다.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삶과 종교] 한 해를 돌아보면서

2023년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덕담을 나누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새해 시작할 때의 마음처럼 한 해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잘 살았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더 열심히 살았어야 하는데, 더 마음을 넓게 쓰고, 다른 사람을 좀 더 배려하고 이해했어야 하는데... 반성하면서 다시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부처님께서는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법문을 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모든 일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처음은 다 좋을 수 있지만 중간에도 좋고, 마지막까지 좋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결같이 노력하고 정성을 기울여야 후회 없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된다. 좀 더 따뜻하고 행복한 연말을 보내기 위해서는 자비심이 필요하다. 자비란 부처님이 중생을 향해 품는 사랑과 연민이 넘치는 마음이다. 자(慈)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이다. 자애로운 마음을 닦으면 어떤 사람이든지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화내는 생각을 없앨 수 있고, 연민하는 마음을 닦으면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나의 괴로움처럼 느끼고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자비심을 품으면 온갖 성냄, 원망, 원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자비심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보시행이다. 보시란 베푸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시에는 재물의 보시, 법의 보시, 두려움 없음의 보시가 있다. 또 재물이 없이도 베풀 수 있는 보시 7가지가 있다. 무재칠시(無財七施)라고 하는데 눈의 보시, 온화한 얼굴과 즐거운 얼굴빛의 보시, 말씨의 보시, 몸의 보시, 마음의 보시, 자리의 보시, 방이나 집의 보시다. 첫째, 눈의 보시는 좋은 눈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착하고 선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보시다. 둘째, 온화한 얼굴과 즐거운 얼굴빛의 보시인데 찌푸린 얼굴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화나 짜증 날 때 거울을 보면 그 모습은 찌그러진 보기 흉한 모습이다. 찡그린 얼굴이 아닌 환하게 웃는 즐거운 얼굴 표정을 짓는 것도 보시다. 셋째, 말씨의 보시인데 사람들을 대할 때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고 추악한 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항상 바르고 고운 말, 남에게 유익한 말을 쓰는 것도 보시다. 넷째, 몸의 보시란 사람을 보면 일어나서 맞이해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갑게 인사하고 예를 올리는 것도 보시다. 다섯째, 마음의 보시란 착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정성껏 공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섯째, 자리의 보시란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방이나 집의 보시는 사람들에게 방이나 집에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보시할 수도 있지만 재물이 넉넉하지 않다면 이렇게 착한 마음, 밝은 표정, 선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으로도 보시행을 실천할 수 있다. 몸도 마음도 추워지는 요즘 조금만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훈훈한 정을 나누고 베풀면서 따뜻하고 풍요로운 연말을 보냈으면 좋겠다.

[삶과 종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저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누구나 알 만한 아름답고 유명한 노래다. 한데 필자는 이 노래를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고 권하고 싶다. 이 노래 자체를 문제 삼자는 게 아니라 이 가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받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에서도 ‘나는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설정해둔 채 타인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약 10년 전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갑질이란 표현이 크게 회자됐다. 돈과 지위를 앞세워 타인을 무시하려 드는 천박한 행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실제로 천민자본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오염시켰다. 그래서 꼭 대단한 사회적 지위를 갖지 않은 사람이라도, 심지어 갑질을 당하던 사람조차도 기회만 되면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갑질하려 드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근래에는 교육 관련 이슈에서 학부모들의 갑질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수는 말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7,12) 이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같은 처세 수준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조건 없는 사랑을 ‘받길’ 바란다. 그런데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유치환 ‘행복’)하다는 것을. 예수의 가르침은 ‘너는 받길 바라는 존재’가 되지 말고 ‘나누고 싶어 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그게 진짜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너는 받으려고 애써 급급해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너는 이미 있는 그대로 무한한 사랑 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하면, 이미 그 말 자체에 ‘있는 그대로의 상태(탄생 이전 포함)에서는 사랑 속에 있지 않은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버린다. 연재 내내 언급하고 있듯 관건은 ‘존재’고 이는 믿음과 연관된다.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과 ‘나누려고 태어난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믿는 이가 더 행복할까. 사제로 살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왔는데 그 가운데 어르신들, 특히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게 많았다. 어르신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나누고 싶어 하는 어르신, 받고만 싶어 하는 어르신. 어떤 어르신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늘 감사하며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싶어 하고 그런 순간들을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그러니 누구나 그분을 좋아했다. 반면 어떤 어르신들은 가계 사정도 괜찮고 자식들한테 용돈도 받고 사시면서도 늘 불평을 입에 달고 왕년의 영광만 노래하면서 만날 ‘누가 나 밥 안 사주나’ 하며 자기 것은 꼭 움켜쥔 채 받기만 바라셨다. 그런 어르신의 장례 때엔 자식들의 불화도 흔했다. 누가 잘했다 못했다, 좋다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어떤 사람(존재)이 더 행복할 수밖에 없는지가 한눈에 보이더라는 것이다.

[삶과 종교] Who am I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작품은 ‘레미제라블’이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참함’ 또는 ‘비참한 것(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여러 미디어로 재창작됐고 특히 1980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대표적인 뮤지컬이다. 작품 1부에서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미혼모(팡틴)를 시기와 질투 속에 일하는 공장에서 쫓아낸 것은 다름 아닌 같은 공장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는 우리가 너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쫓겨난 여인은 결국 사회의 어두운 바닥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이 작품을 읽고 보고 들으며 필자가 느낀 가장 비참함은 작품의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투쟁이 더 비참한 것은 이른바 ‘갑’(甲)과 ’을’(乙)의 싸움이 아닌 ‘을’끼리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1부의 끝에 나오는 곡의 제목이 “Who am I?”(나는 누구인가?)라는 곡이다. 가석방 기간 이름과 신분을 속이고 성공한 사업가이자 시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주인공 장발장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한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며 부르는 노래다. 정직함과 자신이 지금까지 거짓 신분으로 이뤄 온 삶의 성과들 사이에서 장발장은 고뇌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How can I ever face myself again? My soul belongs to God, I know. I made that bargain long ago. He gave me hope, when hope was gone He gave me strength to journey on. (어떻게 내가 다시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을까? 내 영혼은 신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오래전에 다짐을 했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희망을 주셨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분은 나에게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재판정에 나가 자신이 장발장이고 죄수번호 ‘24601’이라고 외치며 자백한다. 장발장이 이렇게 정직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19년간이나 가둔 감옥과 무거운 세상의 법이 아닌 그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따뜻한 마음을 베푼 미리엘 주교의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아홉 가지의 덕성을 열매에 비유해 말했다. 그러고는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다”고 결론짓는다. 존재 투쟁의 장이 돼 버린 세상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하고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삶과 종교]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항상 밖에서 구하려고 한다. 남과 비교하고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속상해하기도 하고 자기를 헛된 욕망으로 치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지위, 신분, 재물 등으로 과시하기도 하고 부와 명예만을 좇다가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백유경’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부인은 매우 아름다웠으나 코가 못생겼다. 그는 밖에 나가 다른 사람 부인의 얼굴이 아름답고 특히 코가 매우 예쁜 것을 보고 생각했다. ‘지금 저 코를 베어다 내 아내의 얼굴에 붙이면 얼마가 좋을까?’ 그래서 그는 곧 남의 부인의 코를 베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급히 부인을 불렀다. “빨리 나와 보세요. 당신한테 좋은 코를 주겠어요.” 부인이 나오자 그는 곧 부인의 코를 베어 내고 남의 코를 그 자리에 붙이려 했으나 코는 붙지 않았다. 그는 부인의 코를 잃어버리고 큰 고통만 주게 됐다. 이 이야기는 ‘부인의 코를 자른 남편’이라는 이야기인데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한 내용이다. 끊임없이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이 담긴 글이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며 아름다움을 좇는다면 틀림없이 낭패를 볼 것이다.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주름을 없애고 예쁘게 보이려고 성형을 하더라도 내면이 아름답지 못하면 끝내 아름다울 수 없다. 외면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흐를수록 변화하기 때문에 지속되기 어렵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아름답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가꿀 수 있을까? 맑고 청정한 마음, 이익되고 참된 말, 바르고 선한 행위를 통해 단련할 수 있다. 마음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은 밖으로 드러나는 말씨와 행위도 아름답지 못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음이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밖으로 드러나는 말씨와 행위도 아름답다. 지금 거울을 한번 보자. 얼굴 표정이 어떤지, 어떤 주름이 많이 생겼는지, 화내고 찡그리는 모습인지 밝게 웃는 모습인지, 슬프고 우울한 모습인지.... 스스로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외면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진짜 모습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약간의 두려움도 느낀다. 남에게는 즐거운 척, 아닌 척하면서 자신을 감추고 속일 수 있지만 진짜 나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밖으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만 아름답게 치장하지 말고 내면의 거울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내면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점점 키워 나가는 사람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솔직하고 당당하다.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아름다운 매력과 개성이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가는 길을 뚜벅뚜벅 가보자.

[삶과 종교]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일 “남의 걸로 생색내기”

천주교에는 세례명이라는 게 있다. 이는 천주교의 구원관과도 관련된 것인데 천주교의 구원관은 ‘절대자가 인간을 감시하고 있어 마치 마일리지처럼 선업을 쌓아 그것으로 특정 기준을 통과해야만 벌을 면하고 보상받는다는 식’의 팍팍한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도리어 그와 정반대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런 ‘외적 업적’보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가 더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래서 가톨릭 신학에서는 근본적인 ‘존재의 변화’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그것이 세례 때 결정적으로 일어난다고 본다. 세례를 통해 이전의 자신에서 죽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결합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 사람의 새로운 정체성을 나타내는 새 이름을 받는 게 세례명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세례명은 하늘에 있음을 확신하는 성인들의 이름에서 따온다. 그리하여 단순히 새 정체성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세례명으로 정한 그 성인을 자신을 위한 ‘전담마크’로 세우게 된다. 즉, 내가 성인의 모범을 닮고자 그 이름을 받았으니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이를 주보성인이라 한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마치 생일처럼, 자신의 세례명이자 기도 후원자인 주보성인의 천상탄일(순교사망일)을 자신의 영명축일로 지낸다. 요컨대 생일에는 내가 축하받기보다 나를 낳아주시고 돌보시느라 애쓰신 부모님을 위해 뭐라도 해드리는 게 마땅한 것처럼 영명축일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신 가톨릭교회,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주보성인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영명축일에 맞춰 특별히 더 자선하고 봉사하는 신자들이 많다. 그런데 천주교인들이 그리하는 것은 누가 그렇게 시켜서가 아니다.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필자 식으론 그게 ‘재밌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에서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일이 “남의 걸로 생색내기”라 했다. 법인카드로 식사라도 해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아니다. 천주교 식으로는 “모든 것이 다 그분 것”이다. 내 생명부터 시작해서 재물, 물질 같은 것 뿐만 아니라 지식, 따뜻한 마음, 재능, 모든 게 다 받은 것이다. 모든 것이 선물로 받은 것이다. 흔히 우리는 내가 잘해서 뭘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마저 그럴 수 있도록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제 것도 아닌 것으로 나누면서 사랑의 기쁨까지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신은 우리가 ‘제일 재밌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걸 보면 앞서 슬쩍 지나친 천주교의 구원관도 실은 참 간단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 믿고, 감사하며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미 천국을 맛보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믿으며 그러니 조금도 나눌 수 없다는 사람’은 이미 스스로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에 따른 자기존재 규정이 관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과 종교] 사랑하기 때문에

수년 전 동네 곳곳마다 고양이를 찾는다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전단지를 유심히 볼 이유가 있었다. 고양이를 찾아주는 사례금이 무려 수백만 원이나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이 고양이 정상이 아니다. 뒷다리가 없는 장애를 가졌고 11년 된 나이 든 고양이다. 그런데 주인은 이 고양이를 찾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걸었다. 나이도 많고 장애도 있는 고양이를 거금을 걸고 찾는 일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이 고양이가 주인에게는 소중하다는 얘기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는 호기심과 일시적인 기분으로 잠시 키우다 그냥 버림받는 유기견과 유기묘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그 고양이 주인은 거금을 걸었다. 수백만 원이면 저 고양이보다 훨씬 어리고, 예쁘고, 장애 없는 고양이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일까? 바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고양이를 향한 주인의 사랑은 수백만 원을 줘도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인의 경제적 여력이 허락한다면 더 큰 사례금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즉, 액수로는 측정할 수 없는 그 주인의 사랑이 더 큰 것이다. 예전에 산자락 아랫동네에 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버려진 유기견들이 들개가 돼 떼로 몰려다니며 사람을 습격하고 광견병의 매개가 되는 위협적인 존재로 문제시되는 상황이었다. 그 들개들도 처음엔 들개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집에서 키워지고 사랑받던 반려동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에게 버려지든지 혹은 호기심에 스스로 길을 나섰다가 유기견 혹은 들개가 됐을 것이다. 반려동물은 주인에게서 버려지고, 주인을 떠나는 순간 그 존재 가치는 사라진다. 아무리 볼품없고 장애가 있고 늙고 병들어도 주인이 사랑하고 인정하면 그 고양이처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과 윤리는 ‘인간의 타락성’을 전제로 한다. 그 타락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깨버리고 죄의 유혹에 넘어가며 시작됐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 타락성을 회복하지 못하며, 그 타락성에서 창조의 본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그 근본적인 회복을 위해 하나님 자신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직접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보이심으로 확증하셨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강변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가지의 말씀 중 여섯 번째 말씀은 “테텔레스타이(Τετ·λεσται)”. “다 이루었다”였다. 이 말에는 ‘다 치렀다, 빚을 다 갚았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늘 마이너스 같은 내 인생을 위해 다 갚아 주신 것이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것 중에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값을 매길 수 있는 것은 결국 ‘싸구려’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가장 귀한 가치 중 하나가 ‘사랑’이다. 점점 각박해지고 메말라 가는 현실 속에서 이런 귀한 가치들을 기억해 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부터 그 가치들을 실천해 나가길 소망한다.

[삶과 종교] ‘초전도 내면’의 레시피

지난 글에서 초전도 밈을 소개하면서 거기서 떠오른 내적 자유에 대한 영감을 나눠봤다. 그것은 요컨대 ‘저항 없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다. 그렇다면 이어질 수 있는 질문은 “어찌해야 그런 내면을 지닐 수 있는가”이다. 그 탐색은 이렇게 시작할 수도 있다. “우리가 ‘초전도 내면’에 이르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간혹 밤에 전등을 끄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불이 꺼지면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방이 인지·통제할 수 없는 ‘모르는’ 공간이 되고 그렇게 자신의 연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의 어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전등을 켜놓고서야 겨우 잠에 든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마치 초전도체처럼 그런 저항값 없이 어둠의 시공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애써 내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하고 통제해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방에 불이 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자신은 안전할 것이며 실제로 옆방엔 자신을 지켜줄 부모님도 계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내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고, 언제나 나를 보호해줄 능력이 있으며, 그래서 내가 미처 이해할 수 없고 바라지 않는 상황들(예컨대 밤에 자기 싫어도 자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과 그 상황)조차도 결국엔 내게 유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두렵게 여기는 어둠을 그는 도리어 편안히 여기며 숙면에 든다. 때로는 부모님의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날도 있지만 ‘감각보다 앞선 신뢰’ 속에서 그런 ‘완전한 어둠’까지도 받아들인다. 가톨릭의 전통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렇게 “‘어두운 밤’의 순간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참된 휴식을 즐긴다. 그렇게 삶의 미지와 자신의 연약함과 더불어 살 줄 안다. 현대 신학자 토마스 할리크 신부는 말한다. “신앙은 신비와 함께 살 줄 아는 능력이다.” 현대인은 마치 ‘부모와 화해하지 못한 아이’처럼 “신의 죽음”, “신의 쓸모없음”을 선언하고서는 삶의 신비와 인간 자신의 연약함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치 어둠(미지·신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급히 불을 켜려는 아이처럼, 인간의 ‘현재의 앎의 수준’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려 들며 그것으로 재빨리 결론짓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두려움과 오만으로 눈이 가려 신비 그 자체인 삶의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과학만능주의, 확증편향, 배타적 부족주의… 현대인의 정신을 진단하는 여러 내용들도 이와 연관된다. 그러므로 삶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저항값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즉 초전도 내면에 이르고 싶다면 다음의 레시피를 참고할 수 있다. 첫째, “무지의 지”는 오만의 장애물을 치우고 개방성의 문을 연다. 둘째, “신(삶)과의 화해”는 최후의 장애물인 근원적인 두려움을 부수고 참된 자유를 가능케 한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4,18)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5,20)

[삶과 종교] 홍익인간의 정신

10월3일은 우리 민족에게 처음 하늘이 열린 개천절이다. 개천절이라는 이름은 1909년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선생이 정했다. 음력 10월3일을 단군이 나라를 세운 개천절로 삼아 매년 기념행사를 지내다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경일로 제정됐다. 이후 1949년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뀌게 됐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이 땅에 최초로 단군왕검이 오셔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선포했다고 한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인데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가르침과 유사하다. 우리는 서로 연결돼 공생하는 연기적 존재다. ‘자타불이(自他不二) ’, 나와 네가 둘이 아닌 존재인 것이다. 고정된 나의 몸과 마음, 느낌에 집착하고 당장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기 때문에 세상을 넓게 바라볼 수 없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이익, 집착,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 연결돼 있으며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 존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알게 모르게 받았는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감사한 마음 없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온 것은 아닌지 한 번 돌아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번 돈은 우리 자신만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고 우리의 이웃을 위해 값지게 쓰여야 한다. 물질에만 집착한다면 물질의 지배를 당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치우쳐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부처님의 경전 ‘숫타니파타’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엄청난 부와 황금이 있고 먹을 것이 많은 사람이 다만 혼자서 누리고 먹는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지금 당장 눈앞의 이익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분에 넘치는 이익을 혼자 취하려고 하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부자로 잘 살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고 함께 나누면서 살아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베풀고 나누다 보면 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생명은 나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는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다. 남을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이 마침내 나를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더불어 함께 잘 살도록 노력하는 일이 결국 나 자신을 이롭게 하고 잘 살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지금 어느 곳에 있든 있는 그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고,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도리어 그 선행 덕분에 나의 일이 잘 풀리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홍익인간의 정신을 가슴속에 새기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공존하면서 드넓은 하늘같이 텅 비고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따뜻하게 품고,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삶과 종교] ‘초전도 내면’ 온전한 받아들임이 주는 자유

최근 누리꾼들 사이에서 이른바 ‘초전도○○’ 밈이 유행했다. 이는 올해 7월 말 이석배 연구팀이 연구 중인 LK-99가 상온상압 초전도체일 수도 있다는 소식에서 시작된 인터넷 밈이다. 이 밈과 관련한 단상을 나누기 이전에 우선 초전도 밈의 소재인 초전도체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간단히 말해 전기 저항이 0이면서 마이스너(반자성) 효과를 보이는 물질을 가리킨다. 통상의 전도체는 어느 정도의 저항 값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전력 전달 시 저항에 의한 에너지 손실과 발열이 발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발열 해소를 위한 추가적인 설비와 에너지까지 소요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초전도체를 연구해 왔고 미국 로체스터대 연구팀이 -82도, 약 89만기압에서 구현해 낸 고압 초전도체가 현재까지의 진행 단계였다. 그런데 이석배팀은 상온상압에서도 전류 조절에 따라 초전도 현상을 ON&OFF까지 할 수 있는 물질의 구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거기다 해당 물질의 구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경우의 수까지 이미 파악해 뒀다는 것이다. 학계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이것이 기존 초전도체 개념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유의미한 연구일 수 있다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검증에 6개월 이상은 걸린다고 하니 차분히 지켜볼 일이다. 어쨌건 이러한 소식에 누리꾼들은 초전도체를 밈화했다. 예를 들면 귀엽거나 웃긴 고양이 사진 등을 업로드하고 이를 ‘초전도 고양이’라 부르는 식이다. 이런 게시물에는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귀여우니 초전도 고양이가 맞습니다”라는 식의 댓글이 달린다. 즉, 저항값이 없는 초전도체의 특성으로 농담하는 것이 초전도 밈인 것이다. 필자는 누리꾼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세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우리가 이토록 좋은 소식에 목말랐구나’ 하는 것이다. 초전도 밈은 LK-99의 초전도체 여부를 떠나 좋은 소식 자체를 반가워하며 ‘그 자체로 노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최근 우리의 현실이 암울하고 희망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필자는 연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둘째로 ‘그러면 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 밈이 한창 유행할 때는 혐오·갈라치기 유형 게시물의 유의미한 감소세가 나타났다. 즉, 사람들이 정말 나누고 싶었던 것은 증오의 소식이 아니라 희망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과연 부정적 의식의 전파자였는지, 화합과 희망의 전파자였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로 내적 자유에 대한 영감이 있었다. 초전도체가 인류사의 분기점이 될 만큼 중요한 물질이라면 이는 우리의 영적 여정에도 영감을 줄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초전도체처럼 저항 없이, 즉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만날 수 있다면 저항(선입견. 두려움 등)에서 비롯되는 손실과 발열(증오, 혐오, 계산 등)에서 벗어나 참자유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린 어떻게 그런 ‘초전도 내면’에 이를 수 있을까. 이는 다음 글에서.

[삶과 종교] 집으로

우리 집 가훈(家訓)은 좀 독특했다. 바로 ‘잠은 집에서’였다. 어릴 적엔 ‘뭐 이런 가훈이 다 있냐’라고 생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그 가훈을 주신 부모님의 연세를 넘어선 지금, 이 가훈이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의(衣), 식(食), 주(住). 이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기본조건들이다. 일반적으로 의식주에서 ‘주’를 집(宙)으로 알고 있지만 본래 한자어는 ‘거하다’, ‘살다’라는 뜻이다. 물론 안전하고 편안하게 거하고 살기 위해 좋은 집은 삶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십수년 전에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은 적이 있었다. 바쁜 일상을 사는 현대인에게 보장된 저녁, 즉 편안한 안식은 어려운 현실이었고 작금에도 많은 이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에는 집 나간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음에도 자신의 몫(유산)을 요구하는 뻔뻔한 아들이다. 그러고는 그 재산을 다른 나라에서 자신의 만족을 위해 탕진해 버리고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신세가 바닥을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 가지 결단을 내린다.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를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종으로 여겨 달라고 한다. 오매불망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들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추고 집으로 온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는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이 돌아갈 집이 있었고, 아들을 맞아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의 끝에는 반전의 요소가 있다. 그동안 아버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일한 큰아들이 그동안 쌓인 불만을 쏟아내는 장면이다. 민족의 대명절 추석이 다가온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무색하게 명절이 되면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또 명절에 외로움과 소외감만 더하는 이들도 주변에 있다. 예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라는 질문(마태복음 22장)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단언하셨다. 즉,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이라는 것이다. 올 추석에는 많은 이들이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집 나갔던 아들을 너그러이 받아준 아버지의 사랑이 있기를. 큰아들 같은 반전의 인물이 되지 않기를. 집으로 향하는 길이 행복하기를.

[삶과 종교] 한가위 보름달처럼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을 갖자

‘오월농부 팔월신선’이라는 말이 있다. 농사일로 바쁜 계절이 지나고 나면 오곡이 무르익는 때가 와서 신선처럼 여유롭다는 뜻이다. 무더위가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벼가 익어가는 가을이 왔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참 좋은 계절이다. 들판에는 황금빛 벼가 출렁이고 과실이 탐스럽게 익어간다. 팔월 보름 추석은 고대 신라 때부터 대표적인 명절이었다. 서기 32년 신라 유리왕 때 육부(六部)에 속한 여인들이 두 패로 나뉘어 한 달간 길쌈대회를 열었다. 마지막 날이 팔월 보름이었고 이날 승패를 가려 진 쪽에서 음식을 장만해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이 풍습이 ‘가배’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가운데 날’이라는 뜻이고 가배가 변해 ‘가위’가 되고 ‘크다’는 뜻의 ‘한’이 붙어 ‘한가위’가 됐다고 전해진다. 추석(秋夕)은 ‘가을 저녁’이라는 한자어로 수확의 명절, 달의 명절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예부터 팔월 보름을 중추(仲秋)라고도 불렀다. 한가윗날 사찰에서도 합동 차례를 지내면서 분주하게 보낸다. 선망 부모와 조상의 영가를 위해 비린내가 나는 고기, 생선을 제외하고 간소하게 상차림을 하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의 의미는 정성껏 끓인 차를 부처님께 올리고 절 안의 스님 및 불자들과 함께 나눠 마신다는 뜻이다. 이렇듯 한가위는 조상의 은혜, 부모님의 은혜, 천지의 은혜를 생각하는 날이다.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상차림을 하고 온 가족이 모여 넉넉하고 풍성한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날이다. 부처님 경전인 ‘구잡비유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재물을 많이 쌓아 두고 먹지도 않고 베풀지도 않으면, 죽어서는 아귀가 돼 언제나 옷과 먹을 것이 모자랄 것이요, 혹 아귀를 벗어나 사람이 되더라도 하천한 곳에 떨어질 것이다. 너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부자이면서도 인색해 먹지도 않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는가?” 살아있는 동안 무엇이든지 움켜쥐기만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 베풀지 않으면 언제나 굶주리고 목마른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많이 베풀고 선행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항상 넉넉하고 여유롭고 따뜻한 반면 탐욕스럽고 인색해 악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좁고 각박하고 차갑다. 모가 나서 뾰족하고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으로는 무슨 일이든지 원만하게 성취되기 어렵다. 모난 마음을 잘 갈고 다듬어 둥글둥글하게 만들어야 무슨 일이든지 술술 풀리게 된다. 지금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한 번 돌아봐야 한다. 인색한 마음으로 나만의 이익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돌아볼 일이다. 이왕이면 선한 마음으로 물질이든 마음이든 많이 베풀면 주변에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지 않을까? 그렇게 온기가 있는 사람의 주변은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고 뜻하지 않은 행운도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같기만 바라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절,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을 보면서 나의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모두 다 이렇게 보름달처럼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 좀 더 넉넉하고 여유로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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