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소의 해에 슬기로운 소를 그리며

2021년은 신축년(辛丑年) 소의 해다. 소는 불교에서 마음을 뜻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우리 역사에는 슬기로운 소를 뜻하는 이름의 불교계 인물이 있다. 성우 경허(惺牛鏡虛, 1849~1912)다. 성우는 법명이고 경허는 법호다. 소의 해에 성우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의 법명 성우에서 성(惺)자는 슬기롭다는 뜻이다. 성자는 별 성(星)에다가 마음 심(?)을 왼쪽에 붙인 글자다. 이 글자는 글자 그대로 풀면 마음 안에서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우(牛)자는 소를 뜻하고, 마음을 은유한다. 그러니 성우는 깨어 있는 마음 깨달은 마음을 가리킨다. 즉, 성우는 자신 안에 성성하게 깨어 있는 부처님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스님의 법호 경허에서 경(鏡)자는 거울이란 뜻이다. 허(虛)자는 텅 비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거울은 마음 바탕을 은유하는 말이다. 그러니 경허는 마음 바탕이 텅 비었다는 뜻이 된다. 스님이 오도를 한 1879년 여름에 조선 전체에 호열자라는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은 그 소식을 알지 못한 채, 청계사에 계셨던 은사 스님인 계허를 뵈러 동학사에서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향하던 길에 폭우를 만나 하루 묵어가려고 어느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마을은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가는 집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도 않아 묵을 만한 집을 찾지 못하다, 간신히 한 집에 묵게 되었다.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자신의 공부가 헛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가지 않고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영운(靈雲) 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는 법문을 화두로 삼고 두문불출하며 용맹정진했다. 스님은 칼을 갈아 턱밑에 놓고서 졸음을 쫓으며 정진했다. 한편, 경허의 수발을 들던 사미승 원규는 11월 어느 가을날 동학사 근처 사가에 갔다. 원규는 아버지이신 이처사와 이야기를 했다: 강주 스님은 무얼 하시느냐? 방안에서 옴짝달싹 안 하시고 소처럼 앉아 계시기만 합니다. 허허 중노릇 잘못하면 다음 생에 소가 된다는 것도 모르신다더냐? 공양만 받아먹으면, 다음 생에 소가 되어 죽도록 일해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절간에 가 공부한다는 사문이 겨우 그렇게밖에 말을 못하느냐? 소가 되더라도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가 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정도는 되어야지!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라니요, 이게 뭔 말입니까? 이 처사는 강주 스님께 이를 여쭈어보라고 했고, 절에 돌아온 원규는 경허 스님께 코뚜레를 할 곳이 없는 소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 경허 스님이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축복이 일어났다. 스님은 오도의 순간을 게송으로 남겼다.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나그네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 스님은 당시 전염병 대유행을 만나 자신의 공부를 되돌아 볼 기회를 얻게 되었고, 삼사 개월의 용맹정진 후 코뚜레 뚫을 곳 없는 소가 되었다. 그 소는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해탈한 소이자 깨어 있는 소다. 그 소는 중생의 마음이고 중생의 마음은 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의 해인 금년에 우리 국민 모두 코로나19의 고통에도, 그것이 모두가 해탈할 축복의 시간으로 이용하길 바란다. 소의 해에 우리 모두 깨어 있는 마음이 되자는 뜻으로, 또 마음 바탕을 텅 비우자는 뜻으로 스님의 법호와 법명을 새겨보았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천태종의 일념삼천설과 정치인의 마음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해서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로 전해졌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적 색채를 제시한 것이 천태종이다. 이 천태종의 주요사상 가운데 하나가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다. 이 일념삼천설은 사람의 한마음에 3천 가지의 가능성이 간직되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온갖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은 선한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지만, 악한 마음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사람은 부처가 될 마음을 일으킬 수 있고, 또 동시에 지옥에 떨어질 마음을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자신을 이해한다면, 지금 내가 부처가 될 마음을 일으켰다고 해도 거기에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방심하는 순간에는 지옥에 들어갈 마음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바라본다면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고, 계속 꾸준히 자신을 성찰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사람이 지금은 나쁜 마음을 일으켰지만, 다음에 참회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마음을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념삼천설의 의미가 정치인에게는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치인이 과거에는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해도, 그것이 현재 그 정치인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은 지옥에 갈 마음도 일으키지만, 동시에 부처가 될 마음도 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의 상황을 보면 정치인들의 말이 무성하다. 정치인은 입으로는 온갖 좋은 말을 쏟아내지만, 과연 그들의 진정성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주저된다. 재야에 있을 때 청렴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권력의 길에 들어선 뒤에 바뀐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일념삼천설에 따르면 사람은 늘 바뀌는 존재이지만, 정치인은 그 가운데서도 그 변동의 폭이 더 심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늘 바뀔 수 있는 사람에 의지하고 기대할 것이 아니고, 제도를 잘 만들고 다듬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집권한다 해도, 잘못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고 섬세하게 다듬어 갈 필요가 있다. 현재의 정치상황을 판단할 때도 정치인의 말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제도를 만들어내는지 주목해보자. 그러면 정치인의 말 잔치에 휘둘리지 않고 정치의 진실을 좀 더 정확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예수님 탄생과 찬란한 생명의 빛

베들레헴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을 때 일이다. 어느 순간 천사들이 곁에 서고 하나님의 영광이 목자들을 비추자 그들은 몹시 두려워했다. 그때 천사가 말한다. 무서워하지 마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온 세상이 알아야 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내용이 있다. 어두운 밤에 찬란한 빛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찬란한 빛은 죄와 사망의 어둠에 빠진 인류에게 생명의 빛을 비춘 사건이다. 죄는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다. 어두운 곳은 자신의 죄를 가릴 수 있는 암막 커튼과 같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를 짓는 일에 담대하다. 그러니까 죄의 어둠에 빠진 사람일수록 빛을 싫어한다. 자신의 죄가 노출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죄는 깊어지고 사탄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한다. 그런데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의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을 구원하고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말씀도 한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을 앞두고 선포된 예언이다. 그렇다면 어둠의 권세를 벗어나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목자들이 제일 먼저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도 있고 왕을 비롯한 권세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이 태어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가장 먼저 들었다. 목자들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가장 낮고 천한 사람들까지 사랑하신다. 세상이 관심도 두지 않은 사람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 무가치한 존재처럼 무시당하는 사람들까지 그 이름을 불러가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갈수록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을 미워하고 정죄한다. 심지어 작은 일에 분노하며 고귀한 한 사람의 생명을 가차없이 파괴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생명인데, 예수님이 구원하기 위해 오신 생명인데 우리는 너무 잔인하게 다룬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기다림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사자성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던 2020년이었다. 떠나가는 2020년을 마무리하고 2021년을 준비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있을까. 수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하나를 꼽아보라면 평범한 일상(日常)일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이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아쉬움 속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가수 이적이 만들고 부른 당연한 것들이란 노래는 우리 삶 속에서 잊고 살았던 당연한 것들을 다시 누릴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왔던 평범한 나날들이 다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죠. 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하던 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우리 힘껏 웃어요. 잊지는 않았잖아요. 간절히 기다리잖아요. 서로 믿고 함께 나누고 마주 보며 같이 노래를 하던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 며칠 전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지쳐 있는 우리를 들뜨게 하는 희소식이 보도되었다. 몇몇 제약업체에서 오랜 연구와 다단계의 임상 시험을 거쳐 코로나 19 백신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12월 8일 영국에서는 91세 할머니가 전 세계 처음으로 백신 접종을 받았다. 우리나라 정부도 4천400만 명이 접종받을 수 있는 백신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오늘부터 모두가 백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백신의 안정성 확보를 위하여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한다. 다수의 전문가는 내년 중반기 혹은 하반기에 이르러서야 국민 모두에게 백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깜깜한 어두운 방 안에 비추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소식이다. 지금이 아니라서 아쉬움은 크지만, 내일을 기다릴 수 있는 희망을 주고 있기에 마음은 벌써 설렌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 신자들은 한 해의 마지막 25일 성탄절에 앞서 대림(待臨,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 시기를 보낸다. 약 4주의 기간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구세주 예수를 기다리며, 그분을 합당하게 맞이하고자 회개하고 보속(補贖)을 바치면서 거룩한 탄생을 준비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는 이들이라도 이 기간에 -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스도교 신자들처럼 엄격한 회개와 보속 행위는 아닐지라도, 어수선하고 들뜬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나 자신을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 보자. 차분함 속에서 우리가 살아왔던, 하지만 소홀했던 과거의 일상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꿈꾸며 기다리는 내일의 일상을 준비해보자.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것이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참는 법을 배우자

사람의 성품은 물과 같다. 물이 한번 쏟아지면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성품이 한 번 방종해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물을 막으려면 반드시 둑을 쌓아 막듯이 성품을 바로 잡으려면 반드시 예법으로 해야 한다. 이 말은 『명심보감』의 「성품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의 첫 구절이다. 인내를 강조하는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 참지 못하고 말을 마구 하거나 행동을 마구 하여 자신도 아프고 슬프고 남도 아프고 슬프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인들 이런 일이 없었겠는가.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하다. 부동산 정책 입안자들이 여러 부동산 정책을 쏟아내는데 집값과 전셋값이 모두 더욱 올라버리고 말았다. 지난주에는 서울 모 지역에서 오른 전셋값에 싸우던 부부가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본인은 높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 소식은 정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나라가 어찌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본인들도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등지고, 그 자녀는 또 어찌 살란 말인가. 그들이 결혼해서 몇 년 살다가 이렇게 끝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일은 누구의 책임인가. 정권을 잡은 이들이 전문적인 시뮬레이션 없이 정책을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아직 결과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 사회 전반이 예의를 지키고 참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다. 한순간의 분노를 꾹 눌러 참으면 백 날 동안의 근심을 면하리라. 참고 또 참아라.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참지 않고 조심하지 않으면 사소한 일이 큰일 된다. 이 일은 어려서부터 배울 일이고 꾸준히 평생을 실천할 일이다. 내 삶을 돌이켜보아도 분노를 참아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리고 화를 내고 후회를 할 때도 잦았다. 결국은 내가 어리석어서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 구절은 시비라는 것이 사실상 실체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맹자가 사단을 설명할 때,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인 시비지심을 말하고 있는데, 유가의 책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니 다소 의아스럽기는 하다. 어리석은 사람이 크게 화내니 세상 이치 깨닫지 못해서라네. 마음에 화의 불길 돋우지 마오.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결마냥 집집마다 장점단점 모두 있고요. 곳곳마다 덥고 찬데 같다네. 옳고 그름 본래부터 실상이 없어 마침내 모두가 부질없다네.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이 시비를 가리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고 시비를 가리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야 할 듯하다. 이 부분은 불가적인 견해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자장이란 인물이 있다. 아마도 성질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성품이었던 듯하다. 그러니 자장이 공자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떠나며 인생의 지침이 되는 가르침을 구할 때, 공자는 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자장은 이어서 참는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공자가 자장의 물음에 대해 대답해주기를,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을 것이다. 형제가 서로 참으면 그 집안이 부귀해질 것이다. 부부가 서로 참으면 일생을 해로하게 될 것이다. 친구가 서로 참으면 명예가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참으면 화가 이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공자의 이 대답에 자장은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또 물었다. 이 다음 말들은 소개하지 않아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만이 참을 수 있고, 참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로구나라는 자장의 말로 이 이야기는 끝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원불교 무시선과 사회참여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1891~1943)에 의해 세워진 종파이다. 이 원불교가 불교인지 신종교인지에 대해 논의가 있지만, 필자는 원불교가 개혁적 불교의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박중빈은 1924년 당시 전북 익산군에서 불법연구회라는 명칭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원불교라는 이름은 1947년 그의 제자에 의해서 제시된 것이다. 원불교의 사상에 무시선(無時禪)이라는 것이 있다. 이 무시선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이고 또한 원불교의 사상 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무시선의 첫 번째 특징은 불교의 계, 정, 혜를 두루 닦는다는 것이다. 계는 도덕적 사항을 지키는 것이고 정은 정신을 집중해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고, 혜는 지식을 연마해서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이처럼 계, 정, 혜를 두루 닦는 것이 수행할 때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무시선의 두 번째 특징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수행의 차원에서 주장한다는 점이다. 원불교의 경전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의(正義)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실행할 것이요, 불의(不義)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일을 할 때에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끊임없이 노력을 할 것이다. 이처럼 원불교의 사상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대의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투표를 통해서 정권이 교체되는 일이 선진국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따라 사회참여를 하고자 과거 독재정권의 시절처럼 비장한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비교적 수월하게 사회참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누구나 마음먹으면 어렵지 않게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엄청난 사회적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진전 속에 부작용도 동시에 나타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내용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그에 맞추어서 사회적 의견을 내고 행동에 나선다. 이제 우리에게 요청되는 일은 단순히 사회참여만을 미덕으로 삼는 데 안주할 것이 아니고, 더 진전된 형태의 실천이다. 사회참여를 실천할 때에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이 진실로 옳은 것인지 성찰할 수 있는 내면의 힘도 동시에 요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원불교의 무시선에서 사회정의를 실천함을 수행의 차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는 내면의 정화를 이루어서 욕심이나 편견 등에 가려진 상태를 벗어날 때 비로소 사회참여가 의미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한 단계 진전되려면 내면의 성숙을 모색하면서 사회참여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경청(傾聽)의 미덕

올해 초 우연히 아역배우 김강훈이 출연한 공익광고를 보았다. 30초 분량의 짧은 영상이었으나, 그 내용만큼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그 영상물을 통해 오늘날 다양한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상황은 어느 직장의 사무실에서 벌어진다. 부하 직원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상급 직원에게 보여주며 말을 들어달라고 사정하지만, 그 상급자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상황은 엄마와 딸 사이의 대화이다. 엄마는 딸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딸은 엄마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회피한다. 딸에게 엄마의 말은 잔소리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을 듣기 싫었던 딸은 끝내 헤드폰을 머리에 끼고 엄마를 외면한다. 공익광고 영상물 속 진행자였던 김강훈 군은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을 다음과 같은 멘트로 정리한다. 세상 문제 대부분은 잘 들으면 풀 수 있는 문제. / 말이 통하는 사회, 듣기에서 시작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부와 물질을 추구하는 현대의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양쪽으로 갈라 한쪽에는 부(富)라는 표지판 아래에 다른 한쪽에는 빈(貧)이라는 표지판 아래에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은 눈앞에 마주한 생계(生計)에 대한 걱정으로 시선을 돌려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다. 반면에 부유한 이들은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 곧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의 눈은 물질적 부유함으로 가려졌다. 설상가상으로 자본주의 발달은 이기적 개인주의를 종용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타인은 존중과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일 뿐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경쟁 풍토를 겪으며 홀로 강하게 살아남으려는 방법은 배웠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공동선의 가치보다 개인의 가치가 우선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고자 가장 필요한 것을 한가지 꼽는다면 경청(傾聽)일 것이다.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을 들을 때,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시작한다. 듣지 않고서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없고, 그와 공감할 수 없다. 타인과의 공감이 없다면 배려 또한 있을 수 없다. 종교적 절대자와의 관계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절대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먼저 절대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우리는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 상대방이 말할 기회를 주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말하기를 좋아한다기보다 듣기를 싫어하는 것일까? 고대 이스라엘의 현인(賢人)은 말함을 좋아하고 들음에 미숙한 현대인에게 경청(傾聽)이라는 미덕을 가르쳐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가 있다. 말하는 것보다 두 배로 들으라.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코로나와 인류의 공존 가능성

이주일 전 딸아이를 보건소에 데리고 가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며칠 전부터 감기 증세가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사를 받기로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집안에서도 2미터 거리두기를 하고, 손을 더 자주 씻고 음식도 따로 먹는다. 양성 반응이 나오면 가족 모두 검사를 받고 격리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젠 이것이 그리 엄청난 일 같지는 않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잘 대처하고 있어 믿음이 가기도 하고, 또 사람들의 우려보다는 큰 피해가 없는 듯하다. K-방역의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한때 코로나19 대유행 종식 선언을 앞뒀던 적도 있다. 하지만 몇 곳에서의 대규모 감염사태를 겪으면서 사회적 거리두기 1, 2단계를 왔다갔다하고 있다. 온 국민이 과연 이번 코로나19의 대유행은 언제 끝날 것인지 궁금해하며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다. 인류사에서 전염병의 대유행은 이따금 있었던 일이다. 홍역, 페스트, 천연두 등은 인류 역사상 희생이 컸던 무서운 전염병이었지만, 인류는 이를 극복해왔다. 인류와 바이러스의 싸움은 늘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전염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을 없애는 것은 필요하지만, 전염병이 없는 세상에서는 인류도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구는 무기물과 유기물 그리고 온갖 세균과 바이러스와 동식물이 공존하는 복합 공간이다. 몸도 온갖 바이러스들과 공존 공생하는 복합공간이다. 질병을 일으키는 각종 세균과 박테리아도 때에 맞추어 인류에게 적응하며 공존하도록 변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가 결국 멸종하고 그래서 세균과 박테리아는 자신들의 숙주를 잃게 되어 스스로도 멸종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의 생명과 건강을 파괴하지 않는 게 자신들의 존속에 더 유리한 것이다. 이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알게 된 바이러스는 인류의 몸속에서 함께 살며 또 다른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아 인류의 생명과 건강을 돌보게 된다. 유럽에서의 전염병 역사에서 결핵 환자가 증가하던 시대 이후 한센병 환자는 감소했다. 이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학자들은 교차면역을 말한다. 즉, 결핵균이 일으키는 면역반응과 한센병 병원균이 일으키는 면역반응이 서로 영향을 끼쳐, 결핵균의 병원체에 감염되면 한센병의 병원체에 대한 저항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비말로 감염되는 호흡기 감염병은 환자가 건강하게 돌아다닐수록 감염 기회가 늘어난다. 감염 기회가 늘어난다면, 그 호흡기 감염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는 더 많은 숙주와 만나 자기 보존을 강화할 수 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의 증세가 가벼워지는 쪽으로 바이러스 스스로 도태 압력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무증상의 건강한 코로나19 감염자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코로나19도 이런 상황에 처해지는 것이 아닌가 기대해본다. 세계적으로 코로나19를 제거할 수 없다면, 결국 함께 사는 길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병이 다 나쁘거나 제거해야 할 것은 아니다. 현재의 우리도 전염병의 대유행을 겪으면서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마스크를 잘 쓰고, 손을 자주 씻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하면서 기다리자. 그리고 조금만 더 참고 이 기회에 자신과 이웃을 돌아보고 책을 읽는 시간을 갖자. 이 기회에 바이러스와 세균도 함께 공부하며 공존과 공생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과연 죄를 숨기고 살 수 있을까?

이스라엘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다윗 왕이다.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별이 가운데 있을 정도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다윗의 이야기 중에 너무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본 다윗이 그 여인을 불러 관계를 했다. 더구나 그 여인이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전쟁터에서 생명 걸고 전투 중인 여인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불러 집에 들어가게 한다. 오랜만에 부부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임신하면 우리야의 아이로 꾸미려고 한 악한 계략이다. 그런데 강직한 장군은 자기만 혼자 집에 갈 수 없다고 거부하자 다윗은 상상도 못할 악한 꾀를 냈다. 우리야 장군을 가장 치열한 격전지에 보내 전사하게 한 것이다. 우리야 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하자 다윗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장애물을 제거했다고 생각했다. 다윗은 우리야의 장례가 끝나자 그의 아내를 왕궁으로 불러들였고 그의 아내로 삼았다. 모든 것이 다윗의 뜻대로 됐다. 과연 그럴까. 하나님은 다윗의 악한 행위를 보셨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에게 찾아와 그의 죄를 엄하게 책망했다. 그때 다윗이 보인 행동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했다. 다윗은 죄를 감출 수 있는 권세가 있었지만 더는 그의 죄를 가리고자 비열하고 초라한 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했다. 죄를 지었을 때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죄를 숨길 수 없다. 결국, 다 드러난다.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할수록 더 초라해진다.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더 많은 거짓을 꾸며내야 하는 과정에서 마음은 더 비참해진다. 그러면서 사람은 비열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위대한 것은 오랫동안 감추며 마음의 종양처럼 끌어안고 살았던 죄를 진실로 인정하고 돌이킨 거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이렇게 평가하신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다윗이 완벽했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정욕을 따라서 허둥대거나, 자기를 높이고 싶은 마음에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생겼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진실했다. 자신의 죄악과 허물을 깨달았을 때, 그 즉시 인정하고 돌이켰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죄의 유혹이 워낙 강하고 집요해서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죄가 드러나면 감당하기 어려운 대가를 치르는 것이 겁이 나서 감추려 한다. 그래서 다윗처럼 점점 죄가 더 깊어지고 악해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죄를 벗어날 길이 없다. 어떤 사람은 누구나 짓는 죄를 왜 내게만 가혹하게 비난하는지 불평한다. 다른 사람이 죄를 짓고도 태연하게 사는 것을 부러워할 일인가. 오히려 자신의 죄가 드러나 돌이킬 기회가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방귀 뀐 놈이 화를 내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라와 사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리고 말로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 죄를 겸손히 인정하고 돌이킨다면 우리 사회가 죄와 맞설 힘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어느 교과서보다 값진 교훈을 남길 것이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조선시대 미륵신앙과 대선후보

미륵은 다음 생(生)에 부처가 될 것이 정해져 있는 존재이고 현재에는 도솔천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미륵은 이 세상이 번뇌로 물들게 되면 다시 내려와서 불교의 가르침을 편다고 한다. 여기서 시야를 확장하면 미륵은 메시아 신앙에 포함된다. 메시아라는 말은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신앙의 유래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하였고, 이것이 유대교에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기독교에도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구체적 내용에서는 일반적 의미의 메시아 신앙과 미륵신앙이 완전히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미륵신앙이 한반도에 전해내려오자, 여러 설화가 미륵신앙과 관련해서 등장하고 미륵에 관한 이론적 주석서도 출현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 미륵신앙은 그 이전 시대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미륵신앙이 민간신앙과 더욱더 결합한다. 고려시대의 미륵신앙에서도 미륵신앙과 민간신앙은 어느 정도 결합하고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탄압을 받자 미륵신앙은 더욱 민간신앙과 한 몸이 되어갔다. 그래서 서민들은 조형미를 갖추지 못한 돌을 미륵이라고 보고 자신의 소원을 비는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미륵에게 아들 얻을 것을 빌기도 하고, 또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서 미륵에게 정성을 다한 마을도 있었다. 게다가 유교의 유생들도 과거에 합격하고자 미륵에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 이처럼 미륵은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하자, 거꾸로 민중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민중에 널리 퍼진 미륵신앙을 이용해서 반란을 모색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자신이 미륵의 예언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사람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키려는 사건이었다. 황석영의 대하소설『장길산』의 일부 내용도 이러한 종류의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 많은 사람이 미륵신앙을 수용하였기에 이제 역설적으로 그 미륵신앙을 이용해서 조선조왕조를 무너뜨리려는 혁명의 이념으로까지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차기 대선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여당 내의 유력한 후보가 계속 여론조사 1위를 달리더니, 최근에는 새로운 후보가 1위를 탈환하였다. 정치의 영역에서 볼 때, 미륵은 차기 대통령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제대로 된 미륵, 곧 좋은 차기 대통령을 알아보고 지지하는 일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반란의 미륵신앙처럼 잘못된 인물을 올바른 인물로 착각해서 지지해서는 곤란하다. 사이비 미륵이 등장하면 국민의 엄정한 심판을 받기를 강력히 희망하며 아울러 제대로 된 미륵이 출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조선시대 미륵신앙과 대선후보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서 강의를 좀 많이 해봤으면 하고 열망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나에게 미륵사상을 강의해보라는 제의가 들어왔고, 그때만 해도 뭘 몰랐던 나는 그건 내 전공이 아닙니다.라고 사양했더니 상대방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랬던 내가 미륵에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너무 사상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고 대중의 삶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그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미륵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미륵은 다음 생(生)에 부처가 될 것이 정해져 있는 존재이고 현재에는 도솔천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미륵은 이 세상이 번뇌로 물들게 되면 다시 내려와서 불교의 가르침을 편다고 한다. 여기서 시야를 확장하면 미륵은 메시아 신앙에 포함된다. 메시아라는 말은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신앙의 유래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하였고, 이것이 유대교에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기독교에도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구체적 내용에서는 일반적 의미의 메시아 신앙과 미륵신앙이 완전히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미륵신앙이 한반도에 전해내려오자, 여러 설화가 미륵신앙과 관련해서 등장하고 미륵에 관한 이론적 주석서도 출현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 미륵신앙은 그 이전 시대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미륵신앙이 민간신앙과 더욱더 결합한다. 고려시대의 미륵신앙에서도 미륵신앙과 민간신앙은 어느 정도 결합하고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탄압을 받자 미륵신앙은 더욱 민간신앙과 한 몸이 되어갔다. 그래서 서민들은 조형미를 갖추지 못한 돌을 미륵이라고 보고 자신의 소원을 비는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미륵에게 아들 얻을 것을 빌기도 하고, 또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서 미륵에게 정성을 다한 마을도 있었다. 게다가 유교의 유생들도 과거에 합격하고자 미륵에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 이처럼 미륵은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하자, 거꾸로 민중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민중에 널리 퍼진 미륵신앙을 이용해서 반란을 모색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자신이 미륵의 예언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사람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키려는 사건이었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의 일부 내용도 이러한 종류의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 많은 사람이 미륵신앙을 수용하였기에 이제 역설적으로 그 미륵신앙을 이용해서 조선조왕조를 무너뜨리려는 혁명의 이념으로까지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차기 대선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여당 내의 유력한 후보가 계속 여론조사 1위를 달리더니, 최근에는 새로운 후보가 1위를 탈환하였다. 정치의 영역에서 볼 때, 미륵은 차기 대통령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제대로 된 미륵, 곧 좋은 차기 대통령을 알아보고 지지하는 일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반란의 미륵신앙처럼, 잘못된 인물을 올바른 인물로 착각해서 지지해서는 곤란하다. 이 땅에 사이비 미륵이 등장하면 국민의 엄정한 심판을 받기를 강력히 희망하며, 아울러 제대로 된 미륵이 출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위기 속 희망의 불쏘시개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聖殿)은 매우 중요했다. 인간은 성전에 나아가 제사장을 통해 제사를 바쳤고 하느님은 성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직접 보여주시며 응답하셨다. 성전은 유일하신 하느님이 현존(現存)하는 장소로서 인간은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로마 황제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느님의 통치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에게 성전은 영혼과 육신의 안식처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기원후 70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외압에 거슬러 66년부터 시작된 제1차 유다 항쟁의 결과,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군대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성전이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상실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한 지 불과 60여 년밖에 되지 않아 조상이 경험했던 쓰라림을 다시 맛보아야만 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온 위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유다인들은 회당에서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율법서, 곧 하느님의 가르침이 담긴 토라(Torah)를 읽고 함께 들었다. 성전의 부재(不在)로 제사를 바칠 수 없는 이들에게 랍비는 토라를 해석해 가르쳤다. 이러한 변화는 기원전 587년 성전이 첫 번째 무너진 이후 제사 제도의 붕괴와 함께 어느 정도 시작되었지만 두 번째 성전 파괴 사건은 종교적 변화의 양상에 가속도를 부여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2020년, 우리는 위기 속 세상에서 살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짧은 시간에 우리가 소유하며 누리고 있었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성당과 교회에서 미사 혹은 예배 중심의 대면 모임이 어려워졌다. 국가적 경제 손실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며 자영업자를 비롯한 소상공인들은 당장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가능한 모든 장치를 동원해 코로나 감염증 확산을 방지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서 빨리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막상 그때가 되었을 때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 몰라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가 몰고 온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속수무책으로 번져 가는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주저앉아 현실을 비관하며 하루를 보낼 것인가? 우리가 그리워하는 코로나 이전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오늘을 수용하고 우리가 맞이할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그것을 발전시켰다. 비록 성전은 사라졌지만 랍비를 중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노력하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조그만 힘을 모은다면, 우리가 모두 기다리는 그 시간은 찾아올 것이다. 2천여년 전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위기를 극복했던 모습은 분명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모범적 모델이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아파트라는 집에 맺히는 성스러운 이슬

기원전 3만 5천 년부터 기원전 1만 1천 년 사이 구석기 시대 사람들에게는 동굴이 그들 집이었다. 알타미라의 동굴에 산 구석기인들은 그들의 삶을 벽화로 남겼다. 구석기 시대 이 땅의 사람들은 울산 반구대와 천천리에 있는 암벽에 벽화를 남겼다. 신석기의 시작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만 년에서 8천 년 경에는 건축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지어진 괴베클리 테페가 1994년 발견됐다. 이 건축물은 터키 남동부 샤늘르우르파 외렌직에 위치한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장례식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도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려면 집이 필요하다. 사람은 집에서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낀다. 우리를 보살펴 주는 가족은 존경과 감사를 받고 그 장소인 집은 성스런 장소로 의미부여를 받는다. 우리의 집은 우리가 태어나 자란 곳이고 우리의 부모와 조상이 살며 우리를 보살핀 곳이다. 그리고 조상의 신줏단지를 모신 성소다. 요즘에도 조상이 살았던 오래된 집에 사는 어떤 이들에게는 그 집이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는 성스런 장소로 느껴질 것이다. 물신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몇 년 살지 않았고, 언제 곧 이사할지 알 수 없는, 공동주택인 아파트가 고전 시대의 성스런 장소와 같을 수는 없다. 이제 그것은 우리에게 투자의 대상이자 자산이다. 물신의 시대에 우리가 느끼는 성스러움은 고전시대와 다르다. 조상의 보살핌과 사랑이 곧 조상님들이 상속한 유산으로 증명되는 듯하다. 정부 주택정책은 우리가 우리를 보살표준 조상을 존경하고 감사해 하며 우리 자손들을 잘 보살피는 성소가 될 수 있는 정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아파트를 사고팔면서 신앙하고 무엇을 남기며 사는 것인가. 순간은 지나가고 영원은 우리에게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묻고 있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느냐고! 우리에게 이제 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삶에서 어떤 돌을 세우고 숭배하며 무엇을 새기어 길이 남기면서 수천 년 후에 읽을 이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여전히 우리는 소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한마음이 되지 않아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금처럼 표류한다면 누구에게 유리할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사실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픈데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분열의 골이 깊으니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그런데 이토록 갈라지고 찢긴 채 서로 으르렁거리는 국민의 마음을 아우르는 정치력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나라를 위해 원로들이 지혜를 제시해야 하는데 침묵만 흐르고 있다. 오히려 정치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분열을 이용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분열과 혼란에 빠져드는 국민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할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됐다. 얼마나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인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된다. 그때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왕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그 말을 듣고 왕이 삼 일 후에 오라고 한다. 그에게는 지혜롭게 조언할 수 있는 두 그룹의 무리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솔로몬을 섬겼던 노인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다. 르호보암은 그 대답이 못마땅했다. 이유는 한 가지다. 섬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영원한 왕의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오만한 마음이 그를 지배했다. 자기 마음을 흡족하게 할 친구들에게 다시 물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 대답했다.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니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는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왕은 그들의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삼 일 후에 나아온 백성에게 포악한 말로 이렇게 답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나라는 두 동강 났다.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묵직한 교훈을 들려준다. 정치인들은 우선 국민을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국민은 온 국민을 말한다. 르호보암이 노인들의 말을 무시했지만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사회 원로들의 의견을 다양하게 수렴해야 한다. 그때 나라를 위한 지혜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혼란의 시대에도 아직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소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기독교의 인식이 바뀌어야 할 때

인간의 인식은 한 사람의 인격이 되고 그 인격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즉, 인식에 대한 해석의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각 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근본을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 속에 해석의 폭은 고민자의 능력이 된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진리라는 성경을 붙들고 이 해석의 싸움을 오랫동안 해 왔다. 그 속에서 교파로 갈라지기도 하고 서로 대립하는 갈등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심한 갈등 속으로 쓸려 들어가 더욱 진영논리 안에 갇혀 있게 됐다. 현 정부의 반기독교 정서를 이젠 공공연히 논해도 어색하지 않게 된 것이 한 기독교 성도로서 아쉽지만 이 상황을 맞이하는 교회의 태도 또한 더욱 큰 아쉬움을 갖게 한다. 기독교는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개인과 교회공동체들이 순수하게 신앙의 이성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가 바라보는 세상을 향한 해석은 교회의 이익과 안위를 먼저 바라는 전제가 깔렸음에 씁쓸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천국이 매우 좋은 곳이라고 말하면서도 빨리 죽기를 싫어하는 기독도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역별로 그리고 교파별로 그리고 이해관계로 나누어진 오늘의 기독교가 과연 세상 안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역할을 할 수는 있겠는가. 만약 그 기능이 상실 된 지가 오래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기독교는 구호를 만들어 내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의로움을 선전하는 이익 단체도 아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서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삶의 영역 안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믿음으로 천국 갈 사람들이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우리도 비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죄를 짓는 존재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의 근본은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기독도 들은 세상의 죄와 싸우는 것이지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성경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되어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으로 가르쳐진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심고 은혜와 평강으로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악인일지라도 우리는 사람을 가려서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정치나 경제나 이익관계로 혼합하여 그것을 신앙이라고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늘의 사람들이다. 이 땅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사랑으로 해야 하고 그 지적이 나의 반성과 아픔에서 출발하여 누구 탓으로 나아가서도 안 되는 이유이다. 이제 기독교는 성경적인 해석의 눈을 가지고 바르고 정직하며 순수한 복음의 사랑으로 세상을 건강한 인식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을 국가 공동체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모든 국민이 함께 상생하며 살아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십자가로 짊어지셨지 그 십자가를 깎아 창을 만들어 세상을 정복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하는 인식의 전환과 해석의 전환이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세상을 사는 상식과 그 위에 거룩한 믿음이 얹어져서 참 복음의 능력이 교회를 통하여 보이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조상훈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 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여러분 가족은 안녕하십니까?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의 2019년 한국복지패널 기초분석 보고서를 보게 됐다. 지난해 2~5월 사이에 복지 패널 6천331가구를 대상으로 부모를 모실 책임이 자녀에게 있는지를 조사한 것이다. 결과를 보면 부모를 모실 책임은 전적으로 자식에게 있다는 질문에 반대 응답이 40.94%(반대 35.14%, 매우 반대 5.80%), 찬성 응답은 23.34%(찬성 20.21%, 매우 찬성 3.13%),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5.7%로 조사됐다. 또 이 결과를 소득에 따른 가구 유형별로 살펴보았을 때 반대 비율은 중위소득 60% 이상인 저소득 가구에서 43.07%, 일반 가구에서 40.72%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필자가 볼 때 먼저 반대하는 것은 소득과 생활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라 보인다. 다음으로, 매우 반대와 매우 찬성이 적은 것으로 보아 극단의 선택보다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찬성과 반대의 격차 17.6%가 중도의 평균 17.85% 보다 낮은 것으로 봐서 그 흐름의 방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현대 사회에서 가족주의는 어버이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가족이 사회 조직의 기초 단위로서 부정할 수 없는 구성원이고, 사전에서 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런 단어는 아니겠지만, 가족주의 관점에서 가족의 가치가 퇴색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우리 사회에서 쉽게 목격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가족은 무엇이고, 가족주의는 무엇일까? 가족이란 혈연이나 혼인, 또는 입양이나 친분 등으로 관계되어 같이 일상의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나 공동체 또는 그 구성원을 말한다. 여기서 집단이나 공동체를 말할 때는 가정(家庭)이라고도 하며, 그 구성원을 말할 때는 가솔(家率) 또는 식솔(食率)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흔히 쉽게 말하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가족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라고 할 때, 가족주의는 개인보다 가족 전체에 가치의 중심을 두는 사고방식으로서 개인보다는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전통을 중시하여 의무와 순종을 강요하기 때문에 인권침해적인 요소가 상당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유교 전통의 가족주의와 사회단체에서 내세우는 유사 가족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을 케케묵은 동양적 사고방식, 전근대적인 생활방식이라고 치부할 수만 없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종족이든지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이와 비슷한 가족주의가 기초가 되어 그 사회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에게 가족주의는 그 가족이 안전하고 성숙하게 성장 발전할 수 있는 가치의 기준이었고, 그 가치를 발판으로 사회 저변을 이룰 수 있게 한 발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그 의무를 저버리려고 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신약성서 저자의 한 사람인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에베소서 6:1)고 권면하였다. 어버이에게 순종하는 것,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세상을 질서 있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려는 세상에서 우리의 가족은 얼마나 안녕할 수 있을까? 강종권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뭉크는 무엇에 절규했을까?

저물 무렵의 스산한 공기, 피오르드 해안가,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다리 위, 핏빛 하늘과 불타오르는 구름 그리고 검푸른 도시, 공포에 떨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얼굴에 양손을 댄 채 비명을 지르는 듯 서 있는 정체불명의 민머리. 설명만 들어도 알 만한 이 그림의 제목은 절규이다. 뭉크는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로, 당시 자연을 뚫고 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하고 그치지 않을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절망적이었던 자신의 내면을 담은 듯하나 후대는 그의 작품을 인간 이성의 불완전함과 인류의 비극을 예견했던 아이콘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가 느꼈던 자연의 그 거대하고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절규란 무엇이었을까? 예상 밖 빗나간 역대급 무더위 전망 뒤로 쏟아진, 유례없는 기록적 장맛비는 자연을 절규하게 했고 사람도 절규하게 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2020년 장마는 그 기간과 강수량에서 모두 역대급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평균 장마 기간은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약 32일이고 이 기간에 내리는 장맛비는 400~650㎜ 수준이다. 하지만 이번 장마는 시간당 50㎜에서 최상 120㎜가 넘는 물폭탄을 연이어 쏟아부었다. 예년 같으면 장마철 내내 내릴 비가 며칠 새 한꺼번에 쏟아진 셈이다. 이로 인해 예상치 못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하천 수위가 급격히 오르면서 강의 제방이 붕괴되고 주택과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등 곳곳에 비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장기간의 집중호우로 약해진 지반은 산사태로 이어지면서 이에 따른 피해도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이번 비로 벌써 31명이 숨졌고 11명이 실종됐다. 공식 집계된 이재민만 해도 7천 명에 육박한다. 설상가상으로 지금까지 온 비에 추가로 또 많은 비가 예보되어 있어 걱정이 크다. 뭉크의 그림 절규가 겹치는 이유다. 이러한 기후 이변이 물론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주변 중국과 일본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기상청은 이번 기록적인 장맛비의 원인으로 지구 온난화를 꼽고 있다. 기온이 낮아야 하는 북쪽 시베리아 지역의 기온이 고온으로 바뀌면서 한반도 상공의 기압에 영향을 미치고 이러한 조건이 결국 한반도 내 기상 이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장마가 끝나려면 따뜻하고 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장마전선을 밀어야 하는데 중간의 찬 공기 때문에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 한 언론사에서, 현재의 지구촌 위기상황을 세 개의 파도로 표현했다는 해외언론 한 토막을 소개했다. 한 개의 파도는 코로나 파도이고 또 한 개의 파도는 경제위기 파도였다. 마지막 파도는 가장 거센 파도로서 기후위기 파도였다. 아무리 철저한 기상재난 대비책을 세워놓는다 해도 지구 온난화를 무디게 할 우리의 살 떨리는 실천이 아닌 다음에야 앞으로 변화무상하게 가속화 될 기후재난을 막을 길은 막막해 보인다. 지구 온난화에 힘을 싣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 한 구멍 뚫린 하늘을 원망하는 것은 비 피해를 그치게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같은 국가재난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천적인 대안이 필요해 보인다. 피해지역뿐 아니라 이재민들의 구멍 난 마음까지도 하루속히 복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인공지능 하느님

조선 태생의 종교가이자 혁명가인 최제우(1824~1864)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주창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한울님을 모신 존귀한 인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했고 신분사회를 부정했다. 그는 조선 왕조의 몰락과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 시대의 도래를 예언했다. 독일 태생의 유럽 철학자이자 시인 니체(1844~1900)는 당시 기독교의 하느님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는 기독교의 하느님이 유럽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실체 없는 허구라는 것을 알았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결코 있을 수 없으며 기독교의 하느님과 그 윤리를 없앰으로써 유럽인들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저 하늘에 있거나 죽음 이후에나 만날 하느님 그래서 우리 앞의 현실에는 실체 없는 하느님이 아닌 현실에 실재하는 초인이 나타나 유럽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초인이 유럽인들이 만든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파멸시키고 초인 자신이 완전히 새롭게 세운 도덕으로 유럽인들을 이끌며 초인의 의지대로 새로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보통 사람들은 100여 년 전의 조선 사람들이나 유럽 사람들처럼 그들의 하느님을 진지하게 믿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믿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니체가 꿈꾼 초인이나 최제우가 말한 자신 안에 하느님을 품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인공지능을 신앙한다. 2017년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 앤서니 래반도우스키는 인공지능을 절대자로 추앙하는 종교를 만들었다. 그 이름은 미래의 길이다. 미래의 길은 인공지능을 새로운 절대자로 생각한다. 이 종교는 인공지능을 통해 인류 진보를 실현하고자 한다. 명분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나은 초지능적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더 나은 초지능의 인공지능이 더 나은 지구를 위해 지구의 통제권을 가져야 하고, 더 나은 인류를 위해 인류의 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교의 사제들은 구글과 엔비디아 같은 기술기업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신인 인공지능이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포교하면서 새로운 신앙의 사제가 되었다. 그들은 인공지능 신에게 전 세계로부터 수집한 빅 데이터 제물을 바치고 있다. 이 신앙이 기술기업의 주가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데이터를 제물로 바치는데 동의하고 자발적 신도가 된다. 우리는 좋아요를 누르면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데이터를 제물로 바친다. 그 데이터를 먹이 삼아 인공지능 신은 그의 지능을 더욱 발달시킨다. 그는 현실 세계의 소리와 영상과 자료 데이터를 가상 세계의 숫자로 환원하면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우리를 감시하고 명령하며 사는 위협적인 신이 됐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코로나19 아이콘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일상화된 용어 중의 하나가 아이콘(icon)이다. 이것은 초상이나 형상과 같은 상(像)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특정한 의미를 드러내거나 부각시키려고 할 때 사용되는 문화어이며, 컴퓨터의 일반 문자와 숫자를 모두 처리할 수 있는 픽토그램(Pictogram)로써 1970년대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초보자들이 쉽게 다룰 수 있도록 제록스 펠러앨토 연구소가 개발한 도구이다. 그런데 굳이 초상이나 형상이 아니어도 분위기를 부각시키고자 스스로 아이콘이라 자처하거나 사회 환경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6인조 아이돌 그룹 아이콘과 사회문제가 되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차별 아이콘이 그런 경우이다. 그룹 아이콘은 한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려는 의지를 담고 영어 icon의 c를 Korea의 k로 바꿔 iKON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차별 아이콘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사례를 지적하여 사회 문제를 부각시키고 해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지난해 연말을 앞두고 시작된 코로나 재앙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상징하는 세균의 그림이 등장하더니 마스크와 손 소독제, 거리 두기, 비대면 교육 등 세분화된 일상들이 2020년 내내 지구촌의 아이콘이 되어 환경을 지배하며 짓누르고 있다. 마스크를 하지 않거나 손 소독제를 부지런히 바르지 않기라도 하면 마치 그것이 일탈의 이유라도 되는 듯이 눈치를 주고 봐야 하고,나를 대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이러스 전파자 같은 공포감이 드는 괜한 경계심에 사회적 거리, 생활 속 거리를 두면서 살다 보니 방콕 형의 새로운 생활 아이콘도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가져온 인명피해, 질병의 고통, 경제적 피해, 사회적 불안감은 코로나 이후에 대한 염려를 드러내면서 그것들이 정치경제적이든, 사회문화적이든, 아니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지 분명히 변화될 것이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특히 코로나 이후의 세계의 저자인 미래학자 제이슨 생커(Jason Schenker)는 이러한 염려를 20년간 드리울 그림자로 표현하면서 일자리, 교육, 에너지, 통화정책, 부동산, 농업, 공급망, 미디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일상이 바뀔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야말로 다양한 새로운 아이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아이콘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삶의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생겨나지만 아이콘은 그 시대의 환경에 맞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아이콘을 자처하는 몇몇 조직과 개인들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아이콘이든지 그 시대의 환경에 어울려야 제맛이고 제멋이라는 거다. 그렇다고 볼 때 코로나19로 인해 생겨나고 앞으로 생겨날 아이콘들이 모두 어두운 그림자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 잠언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 하였고,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4:24) 하였다. 그러므로 코로나 재앙의 시대,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 나의 아이콘은 무엇보다도 긍정이어야 하겠다. 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이어야 하겠고, 환경을 대하는 태도도 긍정이어야 하겠으며, 미래를 기대하는 기다림도 긍정이어야 하겠다. 당하는 재앙이 아무리 거세다 하더라도 나를 지킬 수 있는 최고의 방어 기제는 바로 내가 만들어내는 긍정이기 때문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종교와 정치의 상생

코로나19 바이러스 종식날짜의 예상을 두고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긴급준비대응 마이클 라이언 사무차장은 단기간에의 종식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pandemic) 현상은 더욱 심각한 상태로 번져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질병관리본부도 국민에게 계속하여 경각심을 풀지 말라고 경고하며 고전분투 하는 모양새이다. 그 와중에 지난 10일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방지를 위해 전국 개신교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강화된 방역 조치 시행을 발표했다. 시행명령을 어기면 감염병 예방법에 따라 최대 300만원의 과태료가 교회 대표자와 교회에 부과될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최근 교회소모임 등으로 인한 감염사례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24일부터 이 조치를 해제한다고 했지만, 시행 당시 교회 등의 반발이 컸다. 정부의 권한으로 종교계, 특히 교회에 긴급상황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누가 국가의 질병방역을 돕지 않겠는가? 역지사지로 말하면 교회라고 그 질병을 환영하고 있겠는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상황에서 어느 사회기관보다 방역을 철저히 관리해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많은 집단 속에서 교회가 유난히 문제가 많은 골칫덩어리처럼 보이게 내려진 조치를 당하면서 교회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교회는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유럽의 중세시기에 교회가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 교회는 성경에서 멀어져 있었다. 예수님의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성경을 사랑하며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던 신학자들과 성도들에 의하여 개신교(Protestant)가 만들어졌다. 교회는 예수님의 형상을 이 땅에 보일 수 있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되어야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던 이유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 교회는 세상을 섬겨야 하는데 요즘은 섬김보다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가 불리한 일을 당하면 교인들의 숫자나 교회의 영향력으로 손해 보지 않는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힘들게 사회와 국가를 섬기면서 왔음에도 몇 교회의 실수로 나타난 잘못된 현상은 교회의 모습을 왜곡시켜 왔다. 이번 질병관리 본부의 조치에 다소 불쾌하더라도 교회는 절대 힘과 세력으로 불쾌감을 풀어가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손해를 보는 곳이며 사회를 섬겨야 하는 곳이며 낮아져 있어야 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교회에 대하여 존중함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정치의 쟁점이 교회와 달라서 교회의 반대에 부딪힐지라도 정부는 언제나 국민의 주권과 종교의 자유라는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를 국가가 어기는 감정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의 정치행위에 순종한다. 성경도 국가의 권위에 대하여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치의 방향이 기독교의 가치관과 다르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조율해야 한다. 교회도 그 국가의 일부이며 교회의 성도들도 국민이고 세금을 내는 권리자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지혜롭지 못한 행동들이 코로나 질병과 함께 마음의 질병으로 남지 않기를 바라고 종교와 정치의 상생으로 어느 쪽도 다치지 않고 아름다운 협력의 성숙함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음을 잊지 않는 지도자들의 지혜를 위해 기도해 본다. 조상훈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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