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AI시대의 문해력, 무엇이 문제일까

요즘 청년들은 ‘금일(今日)’이 뭔지 몰라 ‘금요일’로 알아듣는다. 첨단 인공지능(AI) 시대에 문해력이 문제되고 있다. ‘행간을 읽는다’는 표현이 있다. 글과 글 사이의 뜻을 찾는다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군사정권 등 권력이 막강하던 시절, 정부 발표는 국민을 속이느라 숨긴 것이 많았고 언론 보도는 검열을 받아 빠진 것이 많았다. 숨기고 빠진 것을 찾아 의미와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삶에 중요했다. 행간을 읽으며 질문과 해답을 찾아야 했다. 지금은 어떤가. 민주화 시대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한 각종 정부 자료에 더해 방대한 분량의 콘텐츠가 인터넷에 쏟아진다. 진실도 있고 거짓도 있다. 전문지식, 경험을 제공하는 좋은 콘텐츠가 있고 욕설, 비방을 일삼는 나쁜 콘텐츠도 있다. AI 알고리즘이 개인 취향에 맞춰 추천하니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 없다. 행간을 읽을 필요가 없고 그럴 여유도 없다. 그런데도 전문가들은 문해력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도대체 위기는 어디서 오는가. 교육부 등 기관은 정기적으로 문해력을 평가, 진단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문해력을 걱정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문해력이 뭔가. 글을 읽고 쓰기를 넘어 그 의미와 맥락을 파악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휘발성, 자극성 강한 숏폼 콘텐츠에 집중 노출되면서 참을성 있게 글을 소화하고 지혜로 바꾸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유익하거나 돈 되는 정보가 뭔지 빨리 찾는 것이 중요하니 생각하며 읽고 쓰고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빨리빨리’ 문화는 AI를 만나 더 급해졌고 글의 의미를 읽지 못하는 계층이 늘었다. AI에 지시하다가 어느 순간 AI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 업무관계는 물론이고 사회생활이 힘들어지고 세대 갈등의 원인이 된다. 다른 함정은 없을까. ‘오늘’을 굳이 금일(今日)로 쓰고 젊은 세대가 모른다고 문해력을 타박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새로운 언어문화에 낡은 잣대를 들이대 기득권 지키기에 나선 것은 아닐까. 도서관에서 오래전 신문을 꺼내 보면 어색한 글이 많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다르면 읽고 쓰는 글이 다를 수 있다. 기존의 글을 모르는 것은 문해력이 낮아 그런 것이 아니라 환경 변화와 생각 차이 아닐까. 혹여 젊은 세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낯설고 다른 글을 서로 이해하려 노력할 때 국민 전체의 문해력이 강해질 수 있다. 그렇다. AI 시대에 내가 아는 글을 남이 모른다고 탓하고 새로 나온 글을 내가 모른다고 남을 탓하면 안 된다. 문해력을 높이는 것은 공동체가 함께 질문을 만들고 해답을 찾는 과정이어야 한다. 사람을 넘어 AI와 소통하는 문해력도 중요하다. AI는 기존의 기계와 달리 인간의 지적 활동을 대신한다. 인간을 돕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AI 시대엔 새로운 언어도 많이 등장하는데 과거 잣대로 평가하면 안 된다. 기술, 경제, 사회와 문화의 발전은 그에 맞는 새로운 언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기성세대가 모른다고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문제 삼아선 안 되고 젊은 세대도 언어를 가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날로그 방식의 독서와 토론으로 범위를 줄일 일도 아니다. 숏폼 콘텐츠가 뭐가 잘못인가. 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거짓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방대한 데이터에서 추출한 정보에 분석과 생각을 더해 의견을 구축하되 타인에게 귀 기울이고 함께 대안을 찾는 성숙한 민주 시민의 길이 진정한 문해력 증강 대책이 아닐까.

[세상읽기] 망각과 매혹

망각의 뜻은 한번 알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것으로 ‘잊다’와 유사한 의미의 과거의 사실과 생각과 판단에 관한 단어이고 매혹은 남의 마음을 사로잡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의 단어로 주로 시제별 당시의 현재의 상태를 의미한다. 망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하거나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어려움이나 고통 또는 좋지 않은 지난 일을 마음속에 두지 않거나 잊는 것이 정신적 건강 및 향후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사람이나 집단의 망각을 활용해야 하는 일에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있고 특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한 사람의 언행이나 성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망각의 대상으로 한다면 사회의 작동 시스템에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주권자와 주권자의 위임에 따라 주권의 일부를 대신 행사하는 사람 내지 정치조직은 자신의 수임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는지에 대한 평가를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주기적으로 점검받고 판단받은 후 추가 위임 여부를 판단받는다. 내 권한을 도맡아 대신 행사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데 있어 망각은 치명적이다. 망각의 대상이 10년 전의 일일 수도 있고 어제의 일일 수도 있으며 한 시간 전의 일일 수도 있다. 특정인을 매혹해 매혹당한 사람의 마음을 얻어 특정인의 권한을 대신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얻는 것은 평가 대상이 아니지만 매혹의 내용이 거짓이나 과장이 있고 그 절차가 정당하지 못한 경우에는 이후 망각 아닌 현타를 통해 뒤늦게나마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지만 망각의 늪에 빠지면 이러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망각과 매혹이 결합되면 망각과 매혹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매혹하거나 망각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지위를 그릇되게 유지시키거나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의 주권을 위임하고 수임인의 권한대위 행사의 내용과 과정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당시 현재 수임인에 의해 매혹돼 잘못된, 미진한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도 망각하지 않으면 그 잘못은 고쳐지고 이러한 관행이 정착되면 제도 도입 여부에도 불구하고 망각을 활용하는 사람들, 알맹이 없는 매혹을 통해 권한을 얻던 사람들도 각성할 것이다. 망각의 활용은 선거 단위인 4년, 5년 단위로 작동하지 않는다. 망각의 활용은 매년, 매월, 매일, 매주, 매시간, 매분 작동하고 매혹은 당연히 매초마다 이뤄지고 있음을 조감해야 한다. 망각과 매혹의 진실을 매초마다 느낀다면 수임인은 주권자에게 모든 이해관계의 초점을 맞추고 그들을 충실히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매혹당한 후 판단의 시점에 망각을 유도하는 또 다른 시도에 매혹되고 또 망각하고 또 매혹되고.... 이러한 과정이 이어지면 대의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수임인은 주권자인 위임인의 위임행위를 기다리지도 바라지도 존중하지도 않는다. 우리 주권자의 주권 유지와 존속을 위해 각성해야 한다.

[세상읽기] AI 시대, 성과급 배분의 모호성

삼성전자 노사는 총파업 직전 잠정합의안을 냈다. 반도체 DS 부문에는 사업 성과의 10.5%를 재원으로 하는 특별경영성과급을 두고 DX 분야 등에는 별도의 자사주 보상안을 담았다. 파업은 일단 유보됐다. 합의안이 가결되든 부결되든 이미 남은 질문은 있다. 나는 이 회사의 성장에서 어떤 몫으로 인정받는가. 성과급은 그래서 까다로운 돈이다. 회사가 돈을 벌었다는 사실은 하나인데 그 돈을 벌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금세 합의되지 않는다. 반도체가 큰 실적을 냈으니 더 크게 보상받아야 한다는 말은 옳다. 같은 회사 안에서 보상의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졌다는 서운함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돈을 나누는 자리에서 사람은 결국 자신의 일이 어떻게 평가됐는지를 읽는다. 회사 밖의 마음은 더 착잡하다. 물가는 오르고 이자는 빠져나가는데 월급은 몇 해째 제자리인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에게 대기업의 거액 성과급 논쟁은 좀처럼 자신의 문제로 읽히지 않는다. 누군가는 평생 만져보기 어려운 보상을 말하는데 나는 오래 버티고 새 일을 배워도 달라지는 것이 별로 없다. 남의 보상이 불편한 까닭은 남이 많이 받아서만은 아니다. 내 노동은 왜 한 번도 저렇게 귀하게 셈해진 적이 없느냐는 허탈함 때문이다. 그 허탈함은 이 문제를 외면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들여다볼 이유다. 남의 몫이 커 보인다고 노동의 값을 묻는 일까지 우습게 만들어버리면 내 일의 값이 왜 이 모양인지 물을 말도 사라진다. 삼성전자 성과급 논쟁이 오래 남을 까닭은 액수가 커서만은 아니다. 삼성은 이제 성과를 만드는 현장 자체를 바꾸겠다고 한다. 2030년까지 생산공장을 ‘AI 자율공장’으로 전환해 생산과 설비, 수리와 물류에서 더 많은 판단을 AI에게 맡기겠다는 계획이다. 공장이 바뀌면 누가 해낸 일인지 묻는 방식도 전과 같을 수 없다. 며칠 전 보도된 서울 한 호텔의 풍경은 그 변화를 먼저 보여준다. 그곳에서 9년째 일한 직원은 머리와 가슴, 손에 카메라를 달고 냅킨을 접고 잔을 닦았다. 로봇이 그 손놀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물류 현장에서도 노동자가 물건을 쥐고 옮기는 동작이 같은 방식으로 기록되고 있다. 손끝에 남아 있던 요령과 힘 조절, 일의 순서가 기계가 익힐 자료가 되는 장면이다. 삼성의 반도체 공정이 곧바로 그와 같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사람이 익힌 기술이 기계의 능력으로 옮겨가는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현장에는 오래 일한 사람만 아는 판단이 있다. 어느 이상 징후를 그냥 넘겨도 되는지, 무엇부터 살펴야 하는지, 작은 문제가 사고가 되기 전에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지금까지 우리는 그것을 숙련이라고 불렀다. 숙련은 원래 사람에게 남는 것이었다. 일을 오래 할수록 쌓이고, 잘할수록 나를 더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계가 배우기 시작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내가 찾아내고 바로잡아온 경험이 시스템의 지식이 된다. 물건을 만들던 노동은 어느새 기계가 더 잘 일하도록 가르치는 노동이 된다. 여기서 일이 이상해진다. 나는 더 잘 일하기 위해 배웠는데 내가 잘해온 일이 언젠가 나를 덜 필요하게 만드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AI 시대의 불안은 기계가 사람보다 빨라지는 데만 있지 않다. 내가 애써 익힌 일이 내 자리를 좁히는 방식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데 있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은 지금 회사가 번 돈을 누구에게 얼마나 돌릴 것인지 묻고 있다. AI가 더 많은 판단을 맡는 공장에서는 그 질문이 한층 어려워질 것이다. 사람이 오래 익힌 일이 기계의 능력이 된 뒤에도 우리는 그 사람을 여전히 성과를 만든 주체로 인정할 수 있을까. 성과급 다음에 남는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읽기] 유학의 담장을 낮추다

오랜 기간 ‘유학’은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가능한 경험이었다. 혹은 송도 같은 글로벌 캠퍼스에 정식 학위과정으로 등록한 소수의 몫이었다. 그러나 5월7일 그 담장을 낮추는 입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평생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의 통과로 외국 교육기관도 정식 평생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갖게 된 것이다. 인천 연수을 정일영 의원이 2024년 대표발의한 입법이 결실을 맺었고 인천글로벌캠퍼스(IGC)도 올해 하반기 시범 프로그램을 예고했다. 외국 대학의 자원이 학위과정 안에만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로 흘러나오는 첫 제도적 통로다. 변화의 시의성은 분명하다. 한국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들어섰고 25세 이상 성인이 곧 전체 인구의 80%를 넘어선다. 학습은 청소년기의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일이 됐다. 기술과 산업 구조의 변화는 직장인에게 매년 새로운 재교육과 전직 학습을 요구한다. 국내 대학들은 평생교육과 직업교육과정 등으로 부분적으로 응답해 왔지만 외국 대학은 줄곧 그 대화의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문이 열렸다고 모두 같은 답을 갖는 것은 아니다. 외국 대학이 평생교육에서 가질 수 있는 차별성은 단순한 영어 강의가 아니라 본교가 축적한 글로벌 네트워크와 전문대학원 자원의 깊이다. 조지메이슨대는 수십년간 일궈온 워싱턴 DC 권역 프로그램들이 있다. 정책·정부 분야의 샤르스쿨에는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등이 강의하고 경제학과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두 명을 배출했다. 코스텔로칼리지는 국내 유일 AACSB 비즈니스·회계 이중 인증 경영대다. 협상·갈등 해결 분야 1위인 카터스쿨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세계대학학술랭킹(ARWU) 세계 30위인 스칼리아로스쿨은 안토닌 스칼리아 전 연방대법관의 이름을 따왔다. 이 모두 학위과정 및 연구소로 송도에 이미 이식된 프로그램이다. 이런 자원을 기업·공공기관 임원과 실무자들이 송도에서 직접 만난다면 최고 수준 대학원의 교육 경험을 한국 안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다. 메이슨 서머캠프 같은 청소년 STEAM·리더십 프로그램도 같은 방식으로 지역의 학생들에게 이어질 수 있다. 이는 단지 프로그램 한두 개를 늘리는 일이 아니다. 학위과정이 정원이 제한된 ‘오는 학생’을 위한 일이었다면 평생교육은 다수의 ‘이미 여기 있는 시민·기업·청소년’을 위한 일이다. 두 트랙이 만날 때 외국 대학 캠퍼스는 비로소 도시의 일부가 된다. 세계 수준의 자원이 지역에 닿게 하는 ‘글로컬 임팩트’도 학위의 좁은 문이 아니라 평일 저녁 시민 강의실, 기업 임원교육, 방학 기간 청소년 캠프 안에서 더 두텁게 실현된다. 물론 제도가 열렸다고 모든 것이 자동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평생교육사 운영 기준, 학점·비학점 트랙 설계, 인천시민대학·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 등 기존 인프라와의 연결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해졌다. 외국 대학 캠퍼스는 학위만 주는 곳이 아니라 지역과 오래 함께 배우는 동반자여야 한다. 유학의 담장이 낮아진다는 것은 외국 대학의 가치가 소수에서 다수로, 한 시기에서 평생으로 확장된다는 뜻이다. 평생학습은 결국 시민이 자기 시대와 더 오래 대화하는 방식이다. 인천에서 시작된 작은 입법이 한국 평생학습의 외연을 넓혔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채워갈지가 다음 과제다. 좋은 동반자는 담장을 낮춘 뒤에 비로소 보인다.

[세상읽기] AI는 민주주의에 약일까, 독일까

세계는 미국-이란전쟁 발발 이후 호르무즈 해협에서 긴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은 전장에서 적을 분석·공격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AI 에이전트 등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AI 반도체 수요에 힘입은 증권시장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반면 AI가 소프트웨어를 대체한다는 우려에 관련 기업 가치가 폭락하고 돈을 빌려준 사모펀드까지 위기를 맞고 있다. AI가 사이버보안 취약점을 찾아내고 해킹 도구까지 만들게 되면서 보안업계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AI에 웃고 우는 세상이다. 6월3일엔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있다. AI는 이제 정치에도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데이터 수집·분석, 전략 수립, 경쟁 후보 공격과 방어, 홍보물 제작까지 민주주의 핵심 과정인 선거가 AI 전장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이 시민에게 있고 시민이 대표자를 통해 통치하는 정치체제다. 시민은 데이터를 수집·분석하고 숙의를 거쳐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고 선거에 참여해 대표자를 뽑는다. AI의 장점은 분명하다. 방대한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정리·요약해 제공하고 가짜뉴스를 걸러낼 수 있다. 대규모 토론과 실시간 투·개표를 가능하게 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선출된 권력의 남용도 감시·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숨은 위험도 직시해야 한다. 시민의 AI 의존도가 심해지면 데이터를 찾아 분석하고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는 적극성과 자율성이 위축된다. 선거일 전 90일부터 선거일까지 AI를 이용한 가상의 음향, 이미지, 영상의 제작, 유포 및 게시가 금지되지만 AI를 악용해 선거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왜곡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국민의 분노와 공포를 자극하고 편을 가르는 AI 기반 콘텐츠가 양산돼 집중 소비된다. 정책 등 핵심 쟁점은 뒤로 밀리고 네거티브와 인신공격으로 대립해 선거 후에도 소모적 논쟁을 이어간다. 가까운 미래엔 자금과 기술을 독점한 AI 권력이 시민의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여론과 소비를 통제하는 이른바 감시자본주의 등장도 우려된다. 여기서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AI 시대에 민주주의가 살아남으려면 시민의 가치를 재정의해야 한다. 산업사회에서 시민을 뒷받침했던 핵심 가치는 노동이었다. 육체노동이든 지식노동이든 AI에 대체될수록 시민의 지위는 약화된다. 필요성이 줄어든 노동을 계속 사달라고 고집하는 것은 노동운동이나 규제 입법의 힘을 빌려도 한계가 있다. AI 시대엔 낡은 노동 공급자를 넘어 상품구매력을 가진 시장 수요자 지위를 지켜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소득을 창출해야 하는데 소비취향 등 마케팅 데이터를 기업에 제공하는 데 그치지 말고 창의적 데이터와 미래 신사업 공급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개인도 AI 기술에 창작을 더하면 회의를 자동으로 기록·요약하는 애플리케이션, 대출상환 처리를 위한 AI 음성 에이전트, AI 기반 맞춤형 교육플랫폼, AI 학습용 데이터 구축 플랫폼 등 시민 주도의 고부가 사업을 얼마든지 창출할 수 있다. 그래야 시민은 AI 통제력과 강력한 발언권을 가진 민주주의 주체로 거듭난다. 그렇다. AI는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자본주의 시녀가 돼선 안 된다. 민주주의 본질을 지키는 일반 시민의 핵심 기술로 성장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우리가 AI에게 지배당한다면 식탐을 이기지 못해 제 꼬리부터 먹어 들어가다 자신의 눈과 마주친 뱀 신세가 된다.

[세상읽기] 헌법은 곧 국민주권

헌법은 국민주권의 요체이고 모든 공권력의 어머니는 헌법이다. 모든 공권력과 헌법은 탯줄로 연결돼 잠시라도 분리되면 모든 공권력은 프랑켄슈타인이 되고 헌법이 쓸모 없어져 국민주권은 죽음을 맞는다. 모든 공권력은 크게 헌법을 입법의 형태로 구현하는 입법권, 헌법 등을 재판 형태로 구현하는 사법권, 헌법을 행정행위 등으로 구현하는 행정권 등으로 나뉠 수 있다. 국회의원, 대통령, 시·도교육감, 지방자치단체장 및 지방의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은 헌법이 부여하는 권능을 헌법의 테두리내에서 국민을 위해 분야별 공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이들은 선출을 통해 직을 얻는 과정에서는 국민주권이 반영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권한의 범위는 헌법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지 선거에 의해 그 권한의 범위까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국회는 헌법 내에서 입법권을 갖는다(헌법 제40조). 따라서 입법의 내용은 헌법에 합치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효력을 잃는다(헌법 제111조). 그 과정에서 법원에 의해 위헌적 법률의 적용이 배제되기도 한다.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하고(헌법 제101조) 법관의 자격과 법원의 조직은 국회가 법률로 정하며(헌법 제103조) 법원(법관)은 헌법과 (헌법에 합치되는)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헌법 제103조). 대통령은 행정권의 수반(헌법 제66조), 국군통수권자(헌법 제74조), 헌법과 법률 소정의 공무원임면권자(헌법 제78조) 등의 지위를 갖는다. 여기에 우리 헌법은 대통령에게 입법권에 대한 예외적 권한으로 일정 요건하에 법률의 효력을 갖는 명령과 처분을 발할 수 있는 긴급재정경제처분명령권(헌법 제76조)을, 사법권에 대한 예외적 권한으로서 사면권(헌법제79조)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계를 갖고 있고 위에서 열거한 권한 외에 서로의 권한을 침해할 수 없도록 장치돼 있다. 따라서 이 같은 규정에 터 잡지 않은 입법권에 의한 사법권 침해는 위헌이고 그 위헌성은 곧 국민주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결국 국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다수결에 따라 제정됐다 하더라도 그 법률의 내용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그 법률은 종국적으로 무효인 것이고 그것이 국민주권인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처럼 이미 기존 검사의 기소에 의해 현재 재판에 계류중인 사건에 대해 새로이 법률을 만들어 특정인에게 검사의 권능을 부여하고 그 검사가 기존 사건의 공소를 취소할 수도 있도록 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법리에 따라 위헌적인 것으로 그 효력을 인정받기가 매우 어렵다. 국회가 만장일치로 그 법률에 찬성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국회에 대한 오작동 방지 내지 일탈 방지를 위해 사법부 및 행정부의 견제라는 제도적 장치 외에 국민의 선거를 통한 심판이란 매우 강력한 현실적인 통제책이 있지만 4년 주기 선출직인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의 특성상 임기 내 견제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위헌적 법률을 제정하는 과정에 관여한 국회의원에 대한 법적 책임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 자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수에 의해 의결이란 절차를 통한 집단적 의사 결정 구조라고 생각한다. 책임 소재가 불명확해 다수에 의해 책임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세상읽기] 자율주행의 맹점

도로 위로 서서히 영역을 넓혀 가는 자율주행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테슬라 FSD를 필두로 한 이 거대한 흐름은 숙련된 인간의 감각을 데이터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단순히 사물을 식별하는 단계를 넘어 도로 위 맥락을 읽고 위험을 예측한다. 직관이 머물던 성소(聖所)에 기계의 신경망이 자리 잡으며 운전은 근육의 노동이 아닌 연산에 의한 통제로 전환되는 중이다. 이 매혹적인 기술은 인류에게 도착한 ‘트로이의 목마’와 같다. 편리함이라는 전리품 뒤에 인간의 주권을 넘겨받고 사고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알고리즘의 속성을 매복시킨 채 우리를 문명의 새로운 시험대 위로 안내하고 있다. 문제는 이 전환이 매끄러워 보일수록 이면의 균열은 깊어진다는 점이다. 기계가 핸들을 쥐는 순간 인류가 유지해온 ‘조종’과 ‘책임’의 결합은 해체된다. 사고 시 우리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운전자인가, 제조사인가, 아니면 형체없는 코드인가. 이 질문은 철학적 사유를 넘어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 당장 답을 요구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가 됐다. 난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인공지능 특유의 ‘블랙박스’ 속성 때문이다. 사고의 찰나 알고리즘의 판단을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설명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기계는 최적의 값을 계산할 뿐이지만 법은 합리적 이유를 묻는다. 이 지독한 언어의 불일치 속에서 제조사는 기술의 장막 뒤로 숨고 책임의 주체는 공중으로 흩어진다. 유럽은 이 문제를 가장 먼저 제도 위로 끌어올렸다. 독일은 2021년 레벨 4 자율주행을 승인하며 ‘기술감독(Technische Aufsicht)’ 개념을 도입했다. 운전자가 아닌 시스템을 원격 감시하고 개입하는 주체에게 책임을 부여한 것이다. 사고 책임의 축을 행위자에서 관리자로 이동시키는 문명사적 전환이다. 나아가 독일은 기술의 안전성이 인간을 상회함이 입증될 경우 구조적 위험까지 사회적 비용으로 수용하겠다는 전향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실용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최근 판례들은 운전자 과실과 시스템 결함을 수치화해 연대책임을 묻고 있다. 2023년 캘리포니아 사례처럼 운전자의 개입 지연과 제조사의 기술적 한계를 묶어 공동 책임을 적용하는 식이다. 이는 기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여전히 ‘최종 감시자’라는 역할을 남겨 두려는 과도기적 모델이다. 결과적으로 책임은 조작 행위를 넘어 설계, 데이터, 운영 시스템 전체로 분산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위험책임’의 원칙을 다시 써야 한다. 운행으로 이익을 얻는 자가 위험도 부담하라는 원칙이 제조사의 코드 앞에서 무력해져서는 안 된다. 책임은 개인을 넘어 설계자와 운영자, 그리고 이를 허용한 제도까지 확장돼야 한다. 이 문제는 결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가 사는 안양의 자율주행 버스 ‘주야로’는 이 담론이 이미 구체적인 일상임을 증명한다. 전국 최초로 야간노선형 자율주행 서비스를 도입한 안양은 기술의 연착륙을 선도하나 동시에 ‘책임의 공백’이라는 국가적 난제와 가장 먼저 대면했다.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된 새로운 질서가 스며들고 있지만 사고 시 책임 구조는 여전히 안갯속 판례에 기대고 있다. 기술은 이미 현장에 도착했으나 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경기도가 자율주행의 메카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정교한 ‘신뢰의 인프라’다. 사고 데이터 주권을 제조사가 독점하게 두는 것은 가해자에게 수사 기록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알고리즘의 판단 과정을 추적·검증할 수 있는 기록 체계와 사고 데이터를 독립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결국 자율주행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와 책임의 문제다. 우리는 이미 핸들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책임까지 내려놓을 수는 없다. 이제 사고는 알고리즘의 판단과 깊이 연결된다. 우리는 아직 그 알고리즘의 유령에게 책임을 물을 정교한 문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세상읽기] 학생을 넘어 기업과 창업 돕는 ‘대학 국제화’

유학생 30만명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한국은 이제 국제학생 유치를 고등교육 국제화의 중요한 성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정부는 유학생 유치 확대와 함께 입학 이후 학업, 취업, 정주까지 이어지는 지원도 강화하고 있다. 반가운 흐름이다. 이제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때다. 대학은 과연 무엇을 하는 곳이어야 하는가. 예전의 대학이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었다면 이제 대학은 도전과 확장의 출발점이다. 학생은 대학에서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디어를 시험해야 하고 기업은 대학에서 인재와 가능성을 만나야 하며 유망한 창업팀은 대학을 통해 더 큰 시장으로 나아갈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국제화는 학생을 데려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최근 필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기업과 혁신가들을 위한 국제 행사에 후원기관 및 창업 부문 시상자로 참여하면서 중국과 동남아 신생 기업의 존재감이 작지 않음을 다시금 느꼈다. 이는 한국이 뒤처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맡아야 할 역할을 보여준다. 한국은 더 많은 학생이 여행하고 공부하러 오는 곳일 뿐 아니라 더 많은 기업과 창업가들이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곳이 돼야 한다. 그리고 대학은 학생, 기업, 시장, 국제 네트워크를 잇고 새로운 도전이 실제 기회로 이어지도록 돕는 조력자가 돼야 한다. 인천글로벌캠퍼스(IGC)의 국제 대학들이나 국제화를 선도하는 국내 대학 모두 학생 교육을 넘어 기업과 인재의 글로벌 도전과 진출을 돕는 방향으로 역할을 넓혀 갈 수 있다. 조지메이슨대 한국캠퍼스의 혁신·창업센터(CIE)는 그 한 사례다. 이 센터는 주한 미국상공회의소에서 주최한 미국 진출 세미나를 통해 대학이 미 수도권 진출의 관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으며 미국 시장 소프트랜딩 프로그램인 ‘NISA’를 통해 실제로 17개 국내 기업 및 5개 국제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또 미국 본교의 창업 지원 조직, 과학기술 캠퍼스, 워싱턴DC 지역 경제개발 기관과의 연계를 넓혀 가며 한국과 미국을 잇는 실제 통로를 만들고 있다. 학생 대상 창업 프로그램인 패트리엇 피치 코리아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 프로그램은 조지메이슨대 학생들이 인하대, 인천대 학생들과 함께 팀을 꾸리도록 설계돼 있는데 여름 동안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가을에는 선발된 팀들이 멘토링을 거쳐 본선에 오른다. 그리고 우승팀은 미국 페어팩스의 패트리엇 피치 대회 본선에 참여하는 데 지원받는다. 이는 학생들이 한국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더 넓은 창업생태계 속에서 우수 창업팀과 투자자 네트워크의 시선 속에 멘토링과 심사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학이 단지 교육의 공간이 아니라 학생의 도전이 더 큰 무대로 이어지게 돕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대학의 국제화는 숫자 경쟁을 넘어야 한다. 더 많은 학생을 유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학이 기업과 창업, 인재와 아이디어가 더 큰 세계로 나아가도록 실제로 돕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학생을 넘어 기업과 창업을 돕는 대학의 시대, 그것이 한국 고등교육 국제화의 다음 단계다.

[세상읽기] 법 만들기 어려워야 국민 삶 지켜진다

손숙오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재상이다. 당시 민간에선 낮은 수레를 썼는데 전쟁에 대비해 높은 수레로 교체할 필요성이 생겼다. 왕은 수레 교체를 강제하는 법을 만들고 위반하면 엄하게 처벌하려 했다. 이에 손숙오는 백성을 힘들게 하고 적개심을 야기한다며 반대했다. 대안을 냈다. 관공서 출입 문턱을 높였고 백성은 문턱을 넘으려 자연스레 수레를 높여 나갔다. 법을 만들지 않고 환경만 바꿔 같은 결과를 얻었다. 또 하나. 초나라 화폐단위가 낮아 비싼 물건을 거래하기 불편했다. 화폐단위를 높이는 법을 시행했는데 물가 상승 등 부작용이 컸다. 손숙오는 좋은 취지의 법도 백성이 힘들면 가치가 없다며 건의해 즉시 폐지했다. 법을 만드는 이유는 뭘까. 카를 슈미트는 국가권력을 법으로 통제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여하고 책임을 지우려면 반드시 법에 의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자유, 권리와 혜택을 주는 것도 국민이 부담하는 세금이나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전제된다면 법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요즘은 어떤가. 복잡한 세상이다. 분쟁이 생기면 협상보다는 한쪽 편을 드는 법을 만들어 끝을 본다. 행정기관은 일을 만들고 ‘밥그릇’을 지켜야 하니 법이 필요하다. 국회의원은 법을 만드는 것이 실적이 되고 평가를 받으니 경쟁적으로 법을 만든다. 다수결에 의한 입법은 합리적이지만 소수를 공격하고 배제하면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 누군가에겐 이익이고 누군가에겐 불이익이 되는 법이면 갈등과 앙금을 키운다. 국민적 분노와 응징을 위해 만든 법이 세월이 흘러 다른 핵심가치를 짓누를 수 있다. 시장경제를 숭상하는 시대엔 국민의 창의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가 국가 명운을 좌우한다. 그런데 어떤 법은 경제 구조와 기업을 촘촘하게 얽어맨다. 시장통제력을 높이지만 사업 기회와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다. 가짜뉴스는 어떤가. 모든 정부가 규제 입법을 추진했다. 진짜와 가짜의 결정권한을 장악하면 자신에겐 유리하되 정적에 불리한 법 집행을 할 수 있다. 그것도 시대가 바뀌면 자신을 옥죄는 도구가 된다. 현행법령은 4월7일 기준 법률 1천706개이고 하위법령을 합하면 5천565개이며 행정기관 고시를 더하면 수만개다. 지방자치단체의 조례, 규칙 등 자치법규만 15만8천863개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법이 넘친다. 법이 많아진 배경엔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도 있다. 수사기관과 법관을 믿을 수 없으니 법령을 촘촘하게 만들면 공정하거나 불이익이 없을 거란 생각이다. 사람 개입을 더욱 줄여 인공지능(AI)에게 사법, 입법, 행정의 핵심 역할을 맡게 하자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온다. 정말 그럴까. AI의 학습과 추론이 사람의 그것과 다르던가. 사람이 AI를 악용하고 AI가 사람을 악용하면 합리적인 결론이 나올지 의문이다. 대부분 법이 그렇지 않으나 특정 목적에만 봉사하는 법이라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오늘은 나를 지키지만 내일은 나를 겨눈다. 법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국가사회 기본 구조와 헌법적 가치까지 위협하면 어떻게 될까. 정권마다 쏟아내는 새로운 법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법보다 신뢰를 구축하고 대안을 고민할 때다. 그 옛날 손숙오가 법 만들기를 두려워하고 잘못된 법이면 즉시 폐지했던 교훈은 오늘날에도 현재진행형임을 잊지 말자.

[세상읽기] 사적구제금지원칙과 이해충돌방지원칙

민사 등 사법상의 법률관계에서는 계약 등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스스로 규율하고 원칙적으로 국가가 이에 간섭하지 않고 공공복리 등 불가피한 경우에만 국가가 법률에 근거해 개입할 수 있다. 이를 사적자치의 원칙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자치의 원칙은 계약 등 법률관계를 형성하는 경우에만 적용하는 것이고 이미 형성된 법률관계를 토대로 그 법률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리의 행사는 의무의 이행의 결과를 사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금지된다. 사적자치에 의해 형성된 법률관계에 따라 일방이 이행하지 않는 경우 상대방이 국가시스템 내에서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해결되지 않고 스스로 힘과 권력으로 실현하는 행위가 허용된다면 정글같이 약육강식의 사회가 될 것이고 사적인 복수가 만연할 것이다. 따라서 공권력의 총합체인 국가의 행위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만든 법률에 근거를 둬야 한다는 헌법적 원칙이 법치주의이고 그 국가의 행위 중 분쟁 해결 분야에서 법원이나 검찰 경찰 등의 절차를 통해 해결해야 하고 스스로 자기의 이익과 권리를 실현하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를 소위 사적구제금지의 원칙이라 하고 우리 헌법상에도 구현돼 있다. 공직자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 사적 이익 추구를 금지하고 공직자의 직무 수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이해충돌을 방지해 공정한 직무 수행을 보장하기 위해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 등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도 공직자가 본인에게 주어진 공적인 권한을 사적인 이익 실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으로 사실상 사적구제금지의 원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제도인 것이다. 위 같은 포괄적인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뿐만 아니라 공직자가 자신의 공적인 권한과 지위를 이용해 본인의 사적인 이익을 실현하거나 상대방의 권리 주장을 방해하고 의무없는 일을 시키는 경우 직권남용죄, 독직죄, 공무상비밀누설죄, 강요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반 국민은 사적구제가 금지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고 실제 사적구제로 나아간 경우 정상 참작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예외없이 법적인 처벌 등이 제재가 뒤따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관해 사적구제가 허용돼야 한다는 제도개선론도 미미한 상황이다. 그러나 공직자는 이해충돌행위금지가 사실상 사적구제금지의 원칙과 같은 맥락이라는 인식, 공직자의 공적인 권한 행사, 즉 입법 사법 행정 등의 과정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이해관계집단이나 심지어 특정인의 이익 및 손해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사적구제금지의 원칙에 반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너무 부족하다. 이러한 이유로 국회는 특정 대상만을 규율하는 처분적 법률을 금지하는 것이다. 힘과 공적인 권한이 없는 일반 국민은 사적구제가 금지되고 공적인 권한이 있는 공직자는 공적인 권한을 이용해 사실상 사적구제가 허용되게 되면 불공평을 떠나 국가는 국민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후진적인 일부 국가에서 공직자가 공권력을 남용해 개인 간 분쟁을 해결하기도 하지만 이는 허용될 수 없는 병폐적이자 위법 위헌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현실은 국회가 특정인의 형사사법적 분쟁 해결을 위해 재판이란 헌법상의 절차를 기다리는 대신 국정조사를 통해 해결을 도모하는 것처럼 오해 살 만한 공권력 행사를 하고 있고 그 폐해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도 없어 더욱 안타깝다. 이러한 공권력 이용 사적구제행위가 더 확산되기 전에 자제하고 더 나아가 개헌을 통해 이를 견제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제도적 정비가 시급하다고 본다.

[세상읽기] 콘크리트의 유언, 인프라 국가를 설계하라

전국 153만채, 경기도에서만 16만채의 빈집이 거대한 침묵 속에 방치돼 있다. 주택 100채 중 8채가 비었다는 서늘한 지표는 수십년간 한국을 지탱해 온 부동산 신화의 파산을 알리는 최후의 경고음이다. 부의 축적을 상징하던 훈장인 콘크리트가 이제는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묶어 버린 거대한 족쇄가 된 셈이다. 이 인구 절벽의 파고 속에서 던져야 할 본질적인 질문은 하나다. 이 거대한 공백을 국가적 부채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을 재설계할 새로운 전략 자산으로 전환할 것인가.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은 자산의 동맥경화다. 가계 자산의 70% 이상이 생산성과 절연된 부동산에 묶여 있지만 차가운 콘크리트는 더 이상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153만채의 빈집은 자본이 흐르지 못하고 고인 채 사장(死藏)돼가는 침전(沈澱)의 현장이다. 이제 소유라는 과거의 유령에서 벗어나 활용과 흐름이 지배하는 미래의 영토로 나아가야 한다. 해법은 분명하다. 빈집을 주거 공간이 아닌 국가적 인프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유휴 주택을 분산형 에너지 저장 장치(ESS)와 인공지능(AI) 엣지 컴퓨팅 거점으로 전환해 지역 단위의 미세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는 제안이다. 거대 발전소와 중앙 서버에 의존하던 수직적 구조를 세포 단위의 수평적 구조로 해체해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이미 세계는 이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독일은 에너지 전환을 통해 200만개 이상의 소규모 발전시설을 연결하며 거실의 발전소화를 실현했고 일본은 지방 유휴 시설을 초저지연 데이터 처리를 위한 엣지 센터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전력은 분산되고 데이터는 현장으로 흐르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조류임에도 우리만 집값이라는 환각에 빠져 미래 자산을 폐기물로 방치하고 있다. 이 전환의 성패는 기술이 아닌 자본의 리듬을 바꾸는 데 달려 있다. 민간 자본이 시세 차익 대신 인프라 수익을 쫓도록 인프라 리츠(Infra-REITs)를 도입해야 한다. 투자자가 에너지 거래와 데이터 처리 수익을 배당받는 구조다. 글로벌 시장에서 ESS 기반 전력 거래가 연 6~10% 수준의 수익률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난관은 존재한다. 화재 안전성과 소음 문제를 해결할 기술적 표준이 마련돼야 하며 국토부, 산업부, 과기부로 파편화된 행정을 통합할 ‘국가 공간 재구조화 본부’ 같은 범정부 거버넌스가 필수적이다. 또 자산 가치 하락을 우려하는 주민들에게 인프라 수익권이나 요금 감면 같은 실질적 인센티브를 제시하는 사회적 합의가 병행돼야 한다. 이 전환의 본질은 접속 권력의 재편이다. 앞으로의 격차는 소득이 아니라 인프라 접속권에서 발생한다. 전국 어디서나 동일한 수준의 에너지 자립과 데이터 환경을 누릴 때 공간의 위계는 비로소 무너진다. 지방 소멸의 해법 역시 사람을 억지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인프라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153만채의 빈집은 부채가 아니라 전환을 위한 기회다. 부동산에 매몰된 경제가 자본을 고착시킨다면 인프라 경제는 그 자본을 깨워 생산성을 확장한다. 양적 공급의 담론을 넘어 공간을 어떻게 흐르게 할 것인가라는 질적 전환에 집중할 때다. 콘크리트는 더 이상 축적의 대상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를 지탱할 인프라 국가의 견고한 재료가 돼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

[세상읽기] 흔들리는 유학 지도, 한국에게 기회다

요즘 뉴스는 중동의 전쟁과 확전 우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전쟁은 석유시장이나 외교안보만이 아니라 국제교육의 지도까지 흔들고 있다. 실제로 아랍에미리트(UAE)와 카타르의 주요 미국 대학 캠퍼스는 안전 문제로 수업 및 운영을 온라인으로 전환했고 은행 지점의 일시 폐쇄와 항공·행사 운영 차질까지 겹치며 국제교육 거점이 놓인 지역 전체의 예측 가능성이 흔들리고 있다. 물론 중동과 중국의 국제캠퍼스 모델은 여전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도하의 에듀케이션시티, UAE와 중국의 뉴욕대(NYU) 캠퍼스 같은 모델은 세계적 국제고등교육의 성공 사례로 자리 잡았다. 미국, 영국, 호주 등 강한 학위 브랜드를 가진 대학의 분교 및 협력 모델은 학생들에게 본교의 명성과 국제적 이동성을 함께 제공하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하지만 판이 달라졌다. 중동은 전쟁으로 물리적 리스크가 커졌고 중국은 지정학과 규제의 불확실성이 누적돼 왔다. 국제교육은 이제 단순한 브랜드 가치가 아니라 누가 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그 브랜드를 전달하느냐의 경쟁이 됐다. 이 대목에서 인천글로벌캠퍼스(IGC)의 의미는 더 커진다. IGC는 성공적으로 정착했지만 아직 국제적 명성과 규모 면에서는 앞선 모델들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이 기회다. 후발주자에게는 판이 바뀔 때가 가장 큰 기회의 순간일 수 있다. 최근 동남아와 인도 등의 파트너 대학을 방문하며 그 변화를 직접 확인했다. 여전히 미국 대학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학위에 대한 관심은 컸다. 다만 그 학생들은 통상 한국 대학으로 오는 학생들과는 언어적·경제적으로 다른 풀에 가까웠다. 그런데 바로 그 집단에서조차 미국 본토 직행이나 중동·중국 캠퍼스보다 한국을 경유해 미국 학위로 이어지는 길, 혹은 한국에서 미국 대학을 졸업한 뒤 정착하는 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즉, IGC 모델은 새로운 유학생 수요를 한국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Study Korea 300K’ 정책에도 분명한 기여가 가능하며 전쟁과 불확실성이 바꾸는 유학의 지도를 한국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다. 이제 국제캠퍼스는 본교의 ‘해외지사’가 아니라 불확실성 시대의 ‘분산형 교육 플랫폼’이어야 한다. 한국에서 적응한 뒤 미국 등으로 이동할 수 있는 ‘첫 관문’, 외교·안보 충격 속에서도 학위의 연속성을 지켜주는 ‘완충지대’, 그리고 진학 이후 커리어와 정주까지 설계하는 ‘착륙장’이 돼야 한다. 이 점에서 4월2일 예정된 ‘IGC 2030 비전선포식’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국제교육의 규칙이 바뀌는 시점에 IGC가 어떤 방향과 역할을 선택할 것인지를 밝히는 선언이다. 또 4월 홍콩과기대에서 열리는 ‘THE 아시아 대학 서밋’에서도 국제고등교육의 미래가 주요 화두로 다뤄질 예정이며 조지메이슨대와 IGC가 초청을 받아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는 한국의 국제캠퍼스 모델이 더 이상 주변적 사례가 아닌 아시아 고등교육의 다음 단계를 다루는 무대에서 발언할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교육에 있어 세계화는 끝나지 않았다. 직항만으로 움직이던 시대에서 더 안전하고 유연한 허브를 거쳐 가는 시대로 바뀌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인천은 상징적이다. 우리는 이미 인천공항을 통해 사람과 물류를 잇는 세계적 허브를 만들었다. 이제 그 연결의 개념을 교육과 인재로 확장할 때다. 공항이 사람을 목적지로 실어 나르는 허브였다면 국제캠퍼스는 학생을 학위와 커리어, 정착의 기회로 연결하는 허브가 돼야 한다. 국제교육에서도 지금이 바로 한국이 그 기회를 잡아야 할 순간이다.

[세상읽기] 개인정보보호법이 AI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한겨울이 돼야 소나무가 변함없이 푸름을 알게 된다.” 추사 김정희는 귀양지 제주에서 ‘세한도’를 그리면서 변함없는 우정을 기리며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코앞이다. 기대가 크고 불안도 크다. 개인정보는 AI의 위협에서 안전할까. 개인정보보호법은 소나무처럼 AI 시대에도 변함없이 개인정보를 지켜줄까. 로마 지도자 야누스는 죽어 수호와 창조의 신이 됐다. 전쟁이 나면 신전의 문을 열고 앞뒤 다른 얼굴로 로마를 지켰다. 두 얼굴은 상반된 것의 조화, 창조를 뜻한다.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중세에선 속과 겉이 다른 악인을 뜻했다. AI도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정보검색, 문서 작성을 넘어 미술, 음악 등 창작을 지원한다. AI 에이전트는 온라인쇼핑, 계약 등 사람의 일을 대신한다. AI 에이전트만 모여 대화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있다. AI 로봇은 위험지역에 다니며 일을 해준다. 좋기만 할까. 일자리를 뺏고 생명, 신체에 위험을 준다. 통제가 필요한 이유다. 개인정보는 어떤가. 이제까지 큰 사고는 기업 등 개인정보 처리자를 해킹하거나 임직원의 유출로 생겼다. 정부는 개인정보 처리자에 대한 보안조치 요구, 예방, 처벌 강화에 중점을 뒀다. AI 시대에 그걸로 충분할까. AI 챗봇은 고객과 대화하면서 건강, 의료, 취향 등 정보를 수집한다. 사람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찾는다. 정치, 사회, 문화 성향이 노출된다. AI 에이전트는 어떤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며 아이디, 패스워드, 은행계좌, 카드번호에 접근한다. AI 로봇은 몸통을 갖춰 돌아다니며 사람, 행태 등 정보를 수집, 활용한다. AI 전용 SNS에선 AI 에이전트가 모여 대화하면서 사람의 핵심 정보를 넘어 잡다한 정보가 오간다. 그렇다. AI 시대엔 개인정보 수집, 제공, 활용 등 주체와 경로가 다양해진다. 개인정보 처리자가 아니어도 수집, 제공, 활용이 쉬워진다. 전화번호 등 연락처를 넘어 기밀, 기술 등 수익성 높은 정보를 노린다. 별것 아닌 정보의 결합, 분석을 통해 개인 식별력을 높인다. 가명, 익명 처리 정보의 재식별 위험도 커진다. AI를 활용해 시스템 침투, 정보 취득과 범죄를 지능화한다. 개인정보보호법은 어떤가. AI처럼 야누스다. 개인정보 활용과 보호라는 이분법에 갇혔다. 가명, 익명 처리, 마이데이터처럼 활용을 허용하되 침해 예방, 사고 대응 등 보호를 위한 책임과 처벌을 높였다. AI 시대에도 통할까. 개인정보 처리자와 정보 주체의 거래와 무관한 영역에서 AI의 개인정보 수집, 제공, 활용이 늘어난다. AI 에이전트 사이에 대규모 정보 교환도 일어난다. 개인정보가 대량, 고속으로 돌아다니고 학습된다. 개인정보 처리자를 통제한다고 해결될 순 없다. AI 챗봇, AI 에이전트, AI 로봇은 사람을 닮았다. 그들이 다니는 곳은 모두 개인정보 침해, 유출 통로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금지할 순 없다. 오히려 AI 성공을 위해 허용해야 한다. 문제는 법제다. 개인정보 위협에 대한 법제가 논의중이지만 아직 회의실에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정보 처리자와 정보 주체, 활용과 보호의 이분법을 벗어나야 한다. 개인정보 수집, 제공, 활용과 위협의 현실에 맞게 살아 있는 생물로서의 방어 생태계를 법제에 녹여내야 한다.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계, 학계와 정보 주체가 모두 협력해 방어에 나서게 해야 한다. 보안기업 육성책도 뒷받침돼야 한다. 소나무가 한겨울에도 생생한 것처럼 AI 시대 개인정보보호법은 위협에 맞대응하고 회복탄력성 높은 살아 있는 법이어야 한다.

[세상읽기] 유류값에 부가가치세 ‘이중 과세’

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급등했던 주유소 휘발유값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또 급등 양상을 보여 민생에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정유사 간 가격 담합을 조사하고 석유 및 석유대체사업법과 물가 안정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최고가액 지정을 검토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시중 주요소에서 판매되고 있는 휘발유값 등 유류의 가격 산정 과정은 국제 유가 등락 등에 의한 넓은 의미의 시장적 요소도 있지만 유류값의 60% 정도가 세금이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 그리고 유류세는 교통 에너지 환경세와 주행세(교통세의 26%), 교육세(교통세의 15%), 부가가치세 등으로 구성된다. 교통 에너지 환경세는 도로나 도시철도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교통세’란 이름으로 처음 도입된 후 3년마다 8차에 걸쳐 연장돼 2027년까지 존속하는데 교통세나 교육세, 농어촌특별세 등 목적세는 과도하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목적이 있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산유국이 아니므로 휘발유 등 유류값에 원유관세나 수입부과금이 부과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교육세가 따라붙는 것은 뜬금없다. 교육세는 교육재원 확보를 위해 부과되는 조세로 국세이고 목적세다. 교육세는 개별소비세가 부과되는 경우 함께 부과되는 세금이다. 결국 유류에 개별소비세가 부과되기 때문에 교육세도 자동으로 부과되는데 이제 교육세의 개별소비세 연동 부과 방식에 대해 재검토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특히 유류같이 생필품적 성격의 재화의 경우에는 시급한 검토후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 또 다른 문제는 부가가치세 부과 방식이다. 현재 시중 판매 유류에는 정유사의 공장도 가격에 원유관세, 교통세, 주행세, 교육세 등이 붙고 그 합산 금액의 10%를 부가가치세로 부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상품과 용역의 가치만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부과된 세금만큼에 대해서도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결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가가치세법(제29조)에는 ‘재화의 수입에 대한 부가가치세의 과세표준은 그 재화에 대한 관세의 과세가격과 관세, 개별소비세, 주세, 교육세, 농어촌특별세 및 교통에너지환경세를 합한 금액으로 한다’고 규정해 그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고 있다. 결국 유류세라는 세금에 또 부가가치세가 부과되는 것인데 원래 부가가치세는 재화의 거래나 용역의 제공 과정에서 얻어지거나 발생하는 이윤(부가가치)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이다. 이러한 부가가치세의 본질 개념에 의하면 부가가치세법 제29조의 조항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고 과세 편의를 위한 조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입법권을 가진 국회는 법률을 제정할 권한이 있지만 세금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이중과세와 유사한 과세법률 조항은 간접세로 인한 서민의 민생고를 덜어준다는 의미에서도 이제는 개정할 때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수입재화에 대한 부가가치세법의 이중과세 허용 규정을 수입재화가 아닌 일반재화 과세에도 준용해 개별 세금을 합산한 금액을 과세표준으로 해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과세행정은 지양해야 한다.

[세상읽기] 부동산이라는 비공식 헌법의 파산, 유예된 시간의 청구서

대통령이 분당의 집을 팔았다. 법률적으로는 단순한 자산 처분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집은 한번도 단순한 거래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다. 우리는 임금의 상승으로 중산층이 되기보다 집값의 상승으로 안도해온 사회에 더 가까웠다. 월급이 멈춘 자리를 자산 가격이 대신했고 복지의 공백은 시세표가 메워 왔다. 국가가 충분히 설계하지 못한 사회안전망을 시장가격이라는 불안정한 기둥에 의탁해온 셈이다. 우리 가계 자산의 대부분은 여전히 부동산 등 비금융 자산에 묶여 있다. 이는 개인의 투자 성향을 넘어 성장과 복지를 자산 가격에 기대어 운용한 구조의 결과다. 이른바 ‘자산 기반 복지(Asset-based Welfare)’가 사실상 사회적 안전판을 대신한 것이다. 분당을 비롯한 신도시 건설은 중산층 확장의 약속이었고 실제로 많은 가구의 자산 형성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 성공은 역설적으로 성장의 중심을 토지 위에 고정시켰다. 경제지표보다 아파트 시세가 더 빠르게 체감되는 질서 속에서 부동산은 법전에 적히지 않았지만 지난 수십년간 한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비공식 헌법’이었다. 문제는 이 헌법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0여년 사이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은 큰 폭으로 상승했지만 실질임금의 증가 속도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자산 상승이 보편적 경험이 아닌 일부의 기회로 수렴될 때 부동산은 사다리에서 장벽으로 바뀐다. 이미 집을 가진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 사이에는 재산 격차를 넘어 ‘시간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상승의 기억을 자산 삼아 미래를 설계하고 누군가는 진입의 좌절 속에서 현재를 소진한다. 자산이 국민의 시간을 갈라놓는 순간 민주주의의 토대인 공동체적 합의는 약해지고 정치는 설득보다 박탈감의 언어에 민감해진다. 집값은 한때 복지의 대체재였다. 가격은 안정의 신호였다. 그러나 가격에 기대어 유지된 균형은 가격이 흔들릴 때 함께 흔들린다. 이번 매각이 이해충돌을 차단하는 조치라면 이제 질문은 개인이 아니라 구조를 향해야 한다. 우리는 집값 상승에 의존해온 이 균형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성장의 근거 자체를 재설계할 것인가. 핵심은 자본의 방향이다. 토지에 묶인 자본과 신용이 산업과 기술, 생산성 향상으로 이동하지 않는 한 가격의 파동은 곧 정치의 파동이 된다. 토지는 희소성에 갇혀 있지만 생산성은 혁신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 그럼에도 토지가 가장 확실한 수익 경로로 남아 있다면 혁신은 늘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에 머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부동산은 성장의 엔진이 아니라 실질적 성장 둔화를 가려온 진통제였는지도 모른다. 수도권 집중 역시 같은 맥락이다. 집값은 결과이고 산업 입지와 기회의 집중은 원인이다. 일자리와 교육, 의료, 문화 인프라가 한 점으로 모일 때 집은 주거가 아니라 그 도시에 머물 수 있는 ‘입장권’이 된다. 균형은 구호로 오지 않는다. 산업 정책과 금융 자본의 재배치, 지역 기반 일자리의 질적 확장이 병행될 때 비로소 구조는 달라진다. 자본의 물길이 바뀔 때 사람의 이동도 달라진다. 무엇보다 중산층은 자산이 아니라 소득과 제도로 지탱돼야 한다. 집값이 오르지 않아도 삶이 흔들리지 않는 구조, 주거가 복지를 대신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안정적 소득 기반의 사회보험 강화, 토지·주택 이익의 공공적 환수 장치 정교화, 생산성 향상을 유도하는 투자 구조 전환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 가격이 아니라 제도가 안정을 보장하는 질서로 이동해야 한다. 집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헌법이 돼서는 안 된다. 가격이 안정을 대신하는 사회는 결국 가격에 의해 흔들린다. 집이 경제를 설명하는 나라가 아니라 경제가 집을 설명하는 나라로 나아갈 때 복지를 유예해온 시간의 청구서는 멈춘다. 이번 매각이 체제 전환의 신호인지, 하나의 장면에 그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체제는 선언으로 바뀌지 않는다. 자본의 흐름이 바뀔 때만 비로소 바뀐다. 이제 우리는 다시 가격에 기대어 시간을 벌지, 아니면 유예된 시간을 정면으로 청산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세상읽기] 쓸모없는 복잡함의 쓸모

약 100년 전 미국의 만화가이자 발명가인 루브 골드버그는 간단한 일을 굳이 복잡한 장치로 해결하는 풍자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본래는 기계 문명과 과잉 설계를 비트는 유머였지만 시간이 지나 그 풍자는 뜻밖의 교육이 됐다. 오늘날 루브 골드버그 머신 콘테스트는 ‘비효율의 코미디’를 통해 오히려 가장 본질적인 배움을 가르치는 무대가 됐다. 퍼듀대를 중심으로 이어져 온 이 대회 전통과 루브 골드버그식 장치의 ‘유쾌한 비합리성’은 이제 전 세계 학생의 창의성 교육언어가 됐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비효율의 극치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해결될 손쉬운 목표 하나를 이루기 위해 공, 레버, 도르래 등을 10단계 이상의 과정으로 길게 연결한다. 하지만 교육적으로 보면 정반대다.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과학 원리만 배우지 않는다. 역할을 나누고, 실패 원인을 찾고, 설계를 바꾸고, 다시 시도한다. 완성된 장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길러지는 엔지니어링 사고다. 작년 조지메이슨대가 공동 주최로 인천글로벌캠퍼스에서 개최한 한국대표 선발대회 현장도 그랬다. 학생들은 ‘애완동물 사료주기’라는 과제를 놓고 팀 단위로 시연했고 현장에서 강조된 메시지도 STEAM 기반의 융합·협업·창의 교육이었다. 이러한 교육활동이 한국에서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역설 때문이다. 한국 기업의 기술 혁신은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반도체, 첨단 제조, K-콘텐츠, 물류 혁신까지 우리는 이미 ‘빠르게 만들고,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능력’을 증명해 왔다. 그런데 학교와 입시의 언어로 들어가면 공학적 상상력과 제작 경험은 여전히 정답형 평가와 줄 세우기 뒤로 밀릴 때가 많다. 최근에도 이공계 최상위권 학생들의 의대 쏠림, 공학 분야 기피 현상을 다룬 보도들이 반복된다. 산업은 엔지니어를 외치는데 교육·진로의 체감 보상은 다른 곳을 향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루브 골드버그 대회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질문이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공학을 무엇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어려운 공식의 집합으로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재미있고 협력적인 문제 해결의 언어로 경험하게 할 것인가. 작년 필자가 현장에서 강조했던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재미, 창의성, 실용성은 서로 반대말이 아니다. 재미는 몰입을 만들고, 몰입은 반복을 만들며, 반복은 결국 실력을 만든다. 엔지니어링 사고는 ‘정답을 빨리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어긋난 부품들을 끝내 작동하게 만드는 능력’에 더 가깝다. 3월1일 열리는 아시아 대표 선발대회를 후원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대회 하나를 응원하는 차원을 넘어 한국 학생들이 공학을 시험 과목이 아니라 설계와 협업의 경험으로 만나게 하자는 취지다. 주최 측 안내에도 이번 대회가 아시아 대표 선발대회로 확장되면서 초·중·고·성인까지 폭넓게 참여하는 구조라는 점이 분명히 제시돼 있다. 송도에 있는 미국 대학으로서 우리가 지향하는 교육적 방향과도 맞물린다. 강의실 안에서는 팀 기반 문제 해결과 빠른 피드백을, 강의실 밖에서는 실패해도 다시 설계하는 문화를 넓히는 일이다. 바로 실리콘밸리와 우리 대학 근교의 버지니아 ‘데이터센터 앨리(Data Center Alley)’를 가능하게 한 혁신의 토양을 조금이나마 우리 지역에 이식하는 일이기도 하다. 복잡한 세상일수록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답이 아니다. 끝내 작동하는 설계다. 루브 골드버그의 ‘쓸모없는 복잡함’은 그래서 의외로, 지금 한국 교육에 가장 쓸모 있는 연습일지 모른다.

[세상읽기] AI시대, 디지털 소외 극복해야

철학자 플라톤의 동굴 이야기다. 죄수들에겐 동굴이 세상 전부다.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산다. 누군가 탈출해 바깥의 진짜 세상을 보고 왔다. 동굴의 가짜 세상에서 나가자고 했을 때 죄수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림자가 저렇게 생생한데 가짜일 리 없다며 거절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은 진짜일까.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삶의 터전이 바뀌고 있다. 새로운 세상은 항상 두렵다. 0과 1의 디지털로 이뤄진 컴퓨터, 인터넷 없이 살 수 없는 공간이다. 그 세상을 살아낼 방법이 막막하다면 어떤 심정일까. 인공지능(AI) 세상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을 봤는가. 모바일 뱅킹을 못해 은행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을 봤는가. AI가 신입사원의 일을 거뜬히 해내면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을 봤는가. 부모가 벌어 놓은 돈을 축내는 것 말고 할 일이 없다. 디지털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이 늘고 있다. 나 또는 누군가의 가족이다. 디지털 소외가 해소되지 못하고 AI와 겹치면 공포가 된다. AI 발전은 눈부시다. 생성형 AI를 두뇌로 장착했다. 정보 검색, 문서 작성을 넘어 미술, 음악 등 창작을 지원한다. AI 에이전트는 사람의 지시에 따라 온라인쇼핑 등 거래와 업무를 처리한다. AI 에이전트만 모여 대화하는 ‘몰트북’ 등 온라인 커뮤니티도 있다.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만 해야 한다. 피지컬 AI를 대표하는 휴머노이드는 어떤가. 발열 기능을 넣어 체온까지 담았다. 사람의 동작을 따라 하고 사람처럼 일을 한다. 발전을 거듭하는 AI 소식은 좋기만 할까. 뒤처질까 겁나고 빼앗길까 두렵다. 빅테크 기업은 AI가 가져올 장밋빛 미래를 성경처럼 읊는다. 휴머노이드의 덤블링 등 놀라운 맛보기를 선보인다. AI의 선제적 활용을 강조하고 뒤처지면 소외를 느끼게 한다. 학계, 업계, 전문가와 언론까지 나서 부추긴다. AI 세상은 알고리즘 지배 사회다. 대용량 데이터를 학습, 분석해 내가 좋아할 만한 답변과 자료를 만들어준다. 나의 취향을 읽어 제품과 서비스를 광고로 보여준다. 내 마음을 읽힐까 단순 검색조차 두렵다. 철학자 울리히 벡의 생각을 더해 보자. 과학기술은 편리함을 주지만 남용하면 자연 파괴, 인명 살상 등 위험을 키운다. 위험은 국경을 넘어 전염병처럼 퍼진다. 자유, 평등보다 안전의 가치가 중요해진다. 기계는 오작동이 위험을 가져오지만 AI는 정상 작동 중에도 사고가 날 수 있다. AI 위험이 AI 소외와 결합하면 불신으로 이어진다. 갈등과 분쟁으로 깊어지면 AI 발전도 발목이 잡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디지털포용법이 지난달 22일 시행됐다. 취약계층의 디지털 역량 강화, 접근성 보장, 영향평가 등의 제도를 담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AI 세상은 국도, 갓길 등 다른 모든 길을 없애고 고속도로만 남긴 것과 같다. 고도의 운전기술과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AI 차량만 다닐 수 있다. AI를 잘 활용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세상이다. AI 마케팅이 소외와 공포를 넘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돼선 안 된다. AI 위험과 부작용을 해소해야 한다. 취약계층 등 모든 시민이 소외되지 않고 AI에 참여해 기회와 과실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국민 중심 AI 생태계 구축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세상읽기] 대의기구 구성원의 보편성

민주주의는 국민 스스로 국민을 위한 결정을 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경험에 기초한 정치이념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굴곡도 있었으나 그 쓰임새만큼은 의심받아 온 적이 없었다. 최근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 방법인 대의제가 전 국민 민주주의의 원리 구현에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의심을 받고 있다. 대의제는 수많은 국민이 정책 결정과 집행에 모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표를 뽑아 그들로 하여금 최선의 정책을 결정하게 하고 최선의 방법으로 이를 집행하게 하는 가장 안전한 제도다. 요즘 대의제 기관들은 본인의 역사적 사명을 잊은 채 영화 속의 인공지능(AI)처럼 돼 가고 있어 걱정스럽다.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은 대의업무 수행자들은 본인의 상황을 안 나머지 또 다른 국민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대변하는 다른 대의업무 수행자들과 수시로 협의하고 양보해 대의제 구성 원리가 잘 구현되도록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대의기관 구성원이 일부 국민의 이해관계만을 전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마치 일부 정보만 편향되게 학습하는 인공지능같이 민주주의 역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보완이 절실한 때다. 오히려 편향과 편식이 뉴노멀일 지경이다. 편향과 편식이 그들의 가장 안전한 성공 방정식이 돼 버렸다. 편향과 편식이 공공에, 국민에게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지보다 자신의 안위에, 자신의 정치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더 관심을 둔다. 다른 이해관계를 반영하려는 대의기관 구성원들과 상의 및 양보와 타협은커녕 식사도 같이 안 하는 것이 뉴노멀이 돼 가고 있다. 이 정도면 대의제가 왜 필요하고 왜 발전해 왔는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즉, 제도적 취지를 몰각한 채 그냥 운영되고 있다는 의미다. 제한된 내용의 정보만을 학습한 힘센 인공지능이 자신의 결론이 전체를 위한 최선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믿음이 강할수록 그만큼 다른 의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심지어 다른 의견을 선이 아닌 악으로 여길 확률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권이 이와 같다는 불안감이 커진다. 그래도 진영이란 프리즘은 국민의 이해관계를 모두 녹여 낼 큰 틀의 방법 구도로서 서로 잘 협의하고 타협하고 반영한다면 전 국민의 투표로 그때그때 의사를 확인해 뭔가를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유연하게 갈등을 녹이고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단으로 기능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각 진영 내에서도 일부 강한 의견을 우선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 커졌고 그 결과 일부 이해집단의 이익이 보편화 과정인 숙의나 타협 등 절차 없이 그대로 전체 뜻인 양 공익인 것으로 결정돼 버리곤 한다. 이미 이를 위한 인프라도 상당히 발전한 상태로 이를 대의기구 구성원은 선의와 사명에만 맡겨둘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이제 그들의 놀이터에 전 국민이 간섭하고 교정할 필요가 커졌다. 예전엔 기술적인 이유로 전 국민이 민주주의를 직접 구현하는 것이 제한적이었지만 이제는 대의기구를 구성할 때 하는 투표라는 방법의 전 국민 의사의 확인 절차를 정책 결정 때에도, 대의기구의 잘못을 꾸짖을 때에도 전기전자통신기술 발달의 덕을 볼 때다. 아니, 그래야만 할 때다. 전 국민이 보편적 정보를 대의기구 구성원에게 자주 제공하고 강제하는 제도를 만들어 편식하는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군림하는 영화를 편집할 때가 아닌가.

[세상읽기] AI 경쟁 알고리즘 아닌, 전력망이 결정

“AI의 다음 병목은 전기와 변압기다.” 일론 머스크의 이 경고는 초지능 시대의 성패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구동하는 물리적 인프라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인공지능(AI) 경쟁의 본질은 이미 소프트웨어를 넘어 에너지 인프라 경쟁으로 이동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량은 2024년 415TWh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폭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데이터는 국경을 넘어 빛의 속도로 이동하지만 전기는 여전히 낡은 규제와 관료적 절차에 묶여 있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 AI는 혁신이 아니라 전원이 꺼진 모니터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AI 산업의 핵심 축인 경기도는 이 모순이 가장 먼저 터져 나오는 최전선이다. 수도권에 반도체, AI, 데이터센터가 밀집된 경기도의 전력 병목은 고밀도 기술 경제가 직면한 전 세계적 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최첨단 데이터센터 한 곳이 상시 필요로 하는 100MW 이상의 전력은 수십만 가구의 연간 소비량과 맞먹는다. 그러나 수도권 전력망의 구조는 과거 산업화 시대의 설계에 멈춰 있다. 남·동해안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으로 실어나르는 송전망은 이미 ‘계통 포화’라는 물리적 한계에 봉착했다. 실제로 수도권의 신규 전력 수전(受電) 신청의 상당수가 거절되거나 유예되는 ‘전력 경색’은 이제 상수가 됐다. 전력 공급 확답을 받지 못해 공장 착공조차 못하는 오늘의 현실은 대한민국 디지털 경쟁력의 고사(枯死)를 예고한다. 문제의 본질은 발전소의 숫자가 아니다. 생산된 전기를 필요한 곳으로 제때 전달하지 못하는 ‘에너지 고속도로’의 병목이 진짜 원인이다. 이제 AI 산업의 경쟁력은 서버 성능이 아니라 그 서버로 들어오는 변압기와 송전선에서 결정된다. 전력망은 더 이상 공공 유틸리티가 아니다. 국가의 연산 능력과 기술 주권을 좌우하는 전략자산이며 21세기 디지털 경제를 떠받치는 기반시설이다. 여기서 가장 치명적인 변수는 ‘시간의 비대칭’이다. 1, 2년 주기로 세대를 교체하는 AI 기술 속도를 인허가부터 완공까지 평균 13년이 걸리는 전력망 행정이 따라잡을 수 없다. 전력망 구축이 1년 지연될 때마다 해당 부지에 들어설 첨단 산업이 창출할 수조원의 부가가치는 증발한다. 이는 단순히 기업의 이전을 넘어 경기도의 미래를 지탱할 고부가가치 일자리와 세수 구조의 영구적 잠식을 의미한다. 인프라의 병목이 국가 자산의 소리 없는 유출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송전 갈등을 단순한 ‘님비(NIMBY)’로 치부하는 태도는 문제 해결을 늦출 뿐이다. 필요한 것은 도덕적 설득이 아닌 갈등을 제도적으로 흡수하는 설계다.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 간의 거리를 가격에 반영하는 지역별 한계 가격제(LMP)를 전격 도입하고 대규모 수요처에는 ‘계통 기여도’에 따른 인프라 분담금을 부과해야 한다. 동시에 국가 기간망 확충을 위한 인허가 패스트트랙을 가동하되 발생한 편익을 인근 주민들에게 ‘에너지 연금’ 형태로 되돌려주는 표준화된 보상 체계가 뒤따라야 한다. AI 시대의 에너지 전략은 선명해야 한다. 국가 기간망은 전략자산으로서 건설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동시에 소비지 인근에서 전력을 관리하는 분산형 에너지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초고압 직류송전(HVDC)과 실시간 계통 운영 기술은 이미 상용화 단계다.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결단하지 못하는 제도의 속도다. AI 시대의 경쟁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전기가 먼저 도착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에너지 고속도로는 국가 운영의 기본조건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행정의 결단이다. 이 결단은 기술 부처의 설명으로 대신될 수 없으며 정부와 정치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할 선택의 문제다. 송전망 하나를 두고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기업과 일자리는 조용히 국경을 넘는다. 전력이 흐르지 않는 도시는 지능적일 수 없고 결단하지 않는 행정은 미래를 설계할 자격이 없다.

[세상읽기] 말의 해, 당근·채찍보다 ‘선명한 트랙’

2026년은 말의 해다. 달리기의 대명사인 말이 더욱 잘 달리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되는 전통적인 비유가 ‘당근과 채찍’이다. 하지만 조직을 운영해본 경영자라면 달콤한 당근 혹은 센 채찍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말이 질주할 수 있는 ‘트랙’을 선명하게 그리는 일임을 안다. 그런데 한국에서 미국 캠퍼스를 운영하다 보면 이 비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일상 언어가 된다. 미국식 속도와 한국식 절차가 같은 조직 안에서 서로 다른 박자로 뛰기 때문이다. 미국 조직은 이동성과 속도를 기본값으로 둔다. 계약이나 법이 특별히 제한하지 않는 한 비교적 유연하게 고용관계를 종료할 수 있다는 임의고용(at-will) 관행이 널리 이해되는 환경에서는 역할 전환과 관계 종료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고 그 리듬에 맞춰 성과급, 사이닝 보너스, 지분보상 등 ‘당근’도 다층적으로 설계된다. 이는 테뉴어라는 극단적 보호장치가 존재하는 대학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미국 출신 교원을 채용할 때는 우리 역시 ‘미국적 근무환경’을 기대하는 시선 속에서 보상과 역할을 두고 매우 치열하고 창의적인 협상을 마주하곤 한다. 하지만 한국은 ‘정당한 이유’ 없는 해고 등 불이익 처분을 제한하는 규범이 강하게 작동하고 ‘계약이 끝나면 끝’이라는 공식도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운영은 ‘빨리 바꾸는 기술’보다 바뀌어도 납득되는 설계를 먼저 요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의 또 다른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한국은 ‘빨리빨리’와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반도체, 전자제품 같은 제조 경쟁력, 케이팝과 K-드라마로 대표되는 콘텐츠 파급력, 당일배송이 일상이 된 유통 혁신까지. 즉, ‘절차가 두꺼운 트랙’ 위에서도 한국 사회와 기업은 놀라운 랩타임을 만들어 왔다. 노동자 보호가 강화돼 온 배경—압축성장과 위기의 기억, 불안정의 비용을 개인에게만 전가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선택—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결과는 경이롭다. 제약이 까다로운데도 속도를 내는 법을 배워온 경주마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캠퍼스를 운영하며 가장 고민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속도를 늦추는 게 아니라 속도를 ‘설명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내가 말하는 ‘트랙을 선명하게 그린다’는 것은 거창한 구조조정이 아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규칙을 구성원들이 서로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조지메이슨대는 연례 업무평가에서 SMART 원칙으로 핵심성과지표(KPI)를 세운다. 목표가 구체적이고(Specific), 측정 가능하며(Measurable), 달성 가능하고(Achievable), 역할과 연동되며(Relevant), 기한이 분명해야(Time-bound) 한다는 뜻이다. 작년 한 해 우리는 이 방식을 ‘서류’가 아니라 ‘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 HR 컨설턴트 출신 교수와 함께 전 직원이 부서별 워크숍과 개별 코칭을 받으며 스스로 KPI를 설계했다. “무엇을 언제까지 어떤 지표로 증명할 것인가”를 합의하는 과정 자체가 예고 없는 채찍을 줄이고 예측 가능한 당근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한국에 있는 미국 조직으로서의 정체성과 장점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송도에 설치된 미국 대학으로서의 우리의 역할도 분명해진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미국식 팀 기반 문제해결과 빠른 피드백 문화를 가르치되 그것이 한국의 제도, 관계, 문화 안에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기준의 명확화, 기록, 코칭, 내부 이동 같은 ‘성장 장치’—까지 함께 훈련할 수 있다. 동시에 기업, 특히 미국에서의 투자와 활동을 고민하는 조직에는 ‘교육형 컨설팅’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더 센 채찍이 아니라 예고된 트랙을 만드는 방법을 함께 설계하는 일이다. 말의 해에 당근과 채찍을 다시 꺼내 든다면 결론은 단순하다. 채찍을 더 들기 전에 트랙을 더 선명하게 그리자. 규칙이 명확하면 채찍은 약해도 되고 당근은 작아도 오래 간다. 그리고 예측 가능한 트랙은 조직이 속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신뢰를 쌓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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