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화시대 실용주의가 팔달문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장안문 밖 처참했던 화재를 가슴에 묻은 ‘행복한 사람들’이 오늘 이 거리 한 귀퉁이 ‘대장금’에서 다시금 얼굴들을 맞댄다. 우리는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생활사를 이야기하고, 그리고 안양 초등학생의 실종 사건을 조금 더 길게 토론한다. 하늘의 명령을 알아차려야 할 나이를 훌쩍 넘겨버렸으니 쉽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당연할텐데 그 이야기를 씹고 또 씹는다.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물증을 둘러싼 실증주의에 대해 논하고, 소아에 대한 심리학이 어쩌고, 도덕이 어쩌고, 그러면서 마주보는 선량한 얼굴도 의심스러워지고, 그 논리도 목소리도 점차 공허해져 간다. 마침내 그런 험한 일을 용하게도 당하지 않고 너무 많은 날들을 살아왔고, 거기다가 바람에 흘러가는 홀씨처럼 또 피붙이까지 모질게 붙들고 있는 화상이 홀로 서서 헐떡거린다. 예전 같았으면 권력이니 자본이니 체제니 구조니 하며 벌써 이야기를 끝냈어야 할 터이다. 그런 것을 잘 설명해 놓은 텍스트도 있었고, 그런 ‘썰’을 풀면 넋 놓고 들어주던 얼간이도 곁에 있었고, 그 허술한 처방을 실험해 볼 수 있는 노동현장도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런데 이게 영 아니다. 늘 보던 마누라 얼굴도, 하루 종일 얼굴 맞대고 있는 동료의 얼굴도, 골목집에서 막걸리잔 기울이는 술친구도, 거리를 나서기만 하면 보이는 모든 낯선 얼굴들도 대하기가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리하여 오늘 다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처음처럼 되돌아본다. 우리가 신념처럼 붙들었던 과학이 허망하게 무너졌던 바로 그 지점에서, 그리고 그 근대 과학이 회유하고 짓밟았기에 다시 주어 털어보는 공자의 그 궁상스런 행동거지에서. 가장 먼저 배우라고 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워왔다.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분류하고, 분석해 왔다. 그것을 자산으로 해서 그 무수한 시험도 통과했고, 밥벌이도 하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와 있다. 그러나 그뿐, 작금의 이 실종사건에 대해서 조차 나는 너무 무력하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바로 그것이다.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배우려면 배우려는 자세를 먼저 갖춰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자기를 낮춰야 한다. 곱씹고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다음은 자기의 적성을 발견하라 했다. 자기를 한껏 낮춰 세상의 모든 편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행위할 수 있는 주체가 없으면 말짱 헛 것이란 낮은 목소리다.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태어나면서 어떤 유전자를 받았는지, 그것을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잘 키워왔는지 등등 이런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고 나야 드디어 자기 발로 설 수 있게 된다고 공자는 말한다. 입장을 갖는다. 세계관을 확립한다는 등의 흔한 이야기 말이다. 이제 자기 개성을 갖고 타자들과 아울러 보편적인 세계라는 장소에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고 일침을 놓고 있다. 그 타자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훈련이 남았다고 준엄하게 가르쳐준다. 하나의 잣대로 휘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낮은 곳에 있기에 그들을 높일 수 있고, 그래야 다 볼 수 있고, 자기도 볼 수 있고, 그들의 개성을 낱낱이 보아 제대로 대접할 수 있다는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런 날 아침에 보는 팔달문 거리는 덜 민망한 사람의 향기로 마주할 수 있으리라.
오피니언
윤한택 기전문화재연구원 전통문화실장
2008-03-2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