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탓할 것인가

설마, 설마, 했다. 1년 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만 해도 설마, 설마했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임기가 보장된 기관장들의 거취를 압박하고, 주요 언론사의 사장들을 자기 사람으로 갈아 치우려 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작년 봄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거리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소화기와 물대포를 쏘아댈 때까지만 해도, 돌이켜 보면, 내 마음속에 ‘설마’라는 단어는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 같다. 인터넷 댓글들에 대해 이런저런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며 시비를 걸 때만 해도, 얼마 전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논객을 잡아 가둘 때까지만 해도 마음속의 우려와 분노 뒤에는 역시 ‘설마’의 그림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 말마따나 액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아니면 역시 그놈의 ‘설마’ 때문일까? 지난달 20일 오전, 그러니까 용산 참사가 발생한 바로 그날 오전이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지인 몇이 필자의 집을 방문했고, 한 지인의 부탁으로 검토해야 할 원고를 출력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출력해야 할 원고량이 상당했기 때문에 느림보 프린터가 원고를 쏟아내는 동안 자연스레 여기저기 포털과 뉴스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고, 용산 재개발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 소식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올려놓은 댓글 속 주소를 타고 들어가 사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동영상을 분명히 ‘보았다’. 거대한 기중기에 컨테이너가 매달려 있는 기상천외한 작전의 현장과 건물 옥상에서 시커멓게 연기가 치솟는 장면을 ‘보았고’, 화급한 상황을 전하는 이명선 앵커의 흥분한 목소리도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프린터가 원고를 다 쏟아내자, 필자와 지인은 컴퓨터를 끄고 원고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화제는 정치 현안을 둘러싼 문제들로 옮아갔으며, 수다스러운 고담준론은 문학과 사상과 국내외 정치를 넘나들며 하루 해가 다 지도록 계속되었다. 하지만 오전에 보았던 그 장면과 사건은 단 한 차례도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그 뿐이었다. 이튿날 다른 지인의 전화를 받고서야 다시 장면들이 머리에 떠올랐고, 이리저리 기사들을 뒤지면서 점점 이건 뭔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경찰의 잔인한 진압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필자 스스로의 자괴감에 대한 고백일 뿐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설마’ 이렇게 아프게 다가올 줄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설마’, ‘설마’,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잔혹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날 화제의 중심에 놓여 있던 원고 속에 인용되어 있던 먼 나라 독일의 오랜전 시 한 줄이 이렇게 나를 부끄럽게 만들 줄은 몰랐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 그들이 사민주의자를 가두었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체포했을 때 /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 그들이 유태인을 잡아갔을 때 / 나는 방관했다 /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 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는 / 항의할 수 있는 /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성근제 인하대 연구교수·중문학자

한국 민주주의 성숙을 위한 제언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 되자 패자인 매케인 후보는 선거운동기간의 치열한 비난과 공격을 깨끗이 끝내고 모든 국민이 오바마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합 할 것을 호소했다. 매케인이 선거운동기간 중에 보여준 정책 노선은 오바마의 노선과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선택이 확정된 이후 매케인은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이 성공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자유민주주의란 대의정치의 이념과 다수결의 원칙 위에 서 있다. 미국인들은 이같은 민주주의 원칙을 굳건히 지켜내지 못할 때 수습하기 어려운 갈등과 혼란이 온다는 사실을 200여년에 걸친 민주주의 학습을 통해 체질화 하고 있다. 민주주의 학습과정에서 이들이 터득한 가장 두드러진 가치는 주체적 판단과 자유의지에 입각한 건강한 개인주의의 수준 높은 도덕성이다. 주체적 판단과 자유의지는 나와 생각이 다른 타인을 적대시 하거나 투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중시하고 그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에게 투영될 진실을 알리려 노력한다. 법과 질서가 정한 절차와 과정에 따라 사회적 책임과 약속을 얼마나 성실하게 지키고 있는가를 입증하는 것은 정치인에서 지식인과 일반인에 이르기 까지 누구에게나 똑같이 해당하는 민주주의 덕목이다. 법과 질서가 정한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고 물리적 폭력이나 반지성적이고 비열한 세뇌와 선동을 일삼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공공의 적으로 제재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곧 법치주의와 동의어로 이해된다. 최근 타임 잡지는 아시아 민주주의가 왜 실패하고 있는가 하는 요지의 커버스토리 가운데서 한국 민주주의의 후진성을 다루었다. 망치와 전기톱이 난무한 폭력국회의 어지러운 난장판은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족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유일한 성공사례의 주인공, 한국 국민은 참으로 큰 자괴심을 감당해야 했다. 한국기업의 상품 광고판이 세계 중심부 대도시를 뒤덮고 있는 세계 12위권의 경제 대국 한국의 대외 이미지는 먹칠을 당하고 말았다. 국가의 브랜드 가치를 제고 하는데 게으름을 피운다고 호통 치던 바로 그 정치인들이 그나마 아시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그동안 쌓아 올린 소중한 이미지를 스스로 허물어 버렸으니 할 말이 없다. 타임기사 중 일부를 인용해 보자. “한국에서 조사자의 2/3 가까운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정직한 지도자는 법에 위배 된다 할지라도 원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여기서 언급된 도덕성을 문맥으로 짐작컨대, 정치인의 도덕성은 법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소위 정치적 명분 혹은 정치적 정의감에 투철한 정치인은 법과 질서를 무력화 하는 무슨 짓을 해도 용납 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단적인 예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도 검찰의 소환을 코웃음 치며 무시하는 국회의원들과 이들을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국민과 유권자들이 공존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 수준을 타임지 기사는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자유평등의 이름으로, 국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원칙과 도덕성이 집단폭력과 떼거리 욕설의 진흙탕 속에서 유린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더 이상 방치 할 것인가. 주체적 판단과 자유의지의 건강한 개인주의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올바로 세우는 범국민적 자각운동을 점화할 때다. 한국 민주주의의 자존심을 폭력과 욕설로 훼손하는 몰개성의 패거리 정치와 떼 법의 무리를 몰아내는데 힘을 모으자. /이진배 의정부예술의전당 사장

지하벙커와 경제 살리기

새해 들어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작년하고는 완전히 달라 보인다. 신년휴일이 끝나자마자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을 갖고 비상경제정부를 선언하더니, 즉각 청와대 지하벙커에 상황실(비상경제상황실)이 차려지고, 운영조직이 임명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첫 번째 대책회의(비상경제대책회의)가 열렸다. 불과 한 주일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이런 발 빠른 움직임에서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평가를 할 수가 있다. 하나는 정부의 결연한 의지와 속도감이다. 지난 1년 동안을 촛불집회로 시작되어 난장판 국회에 이르기까지 내내 발목 잡혀서 쌓여있는 일들을 처리하려면 시간이 급하다는 의미가 있고, 실용정부답게 ‘경제 살리기’라는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효율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차질 없이 추진하려면 기업처럼 여러 안건과 이견을 종합 조율하는 역할과 기능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경제위기가 매우 심각한 만큼 전시에 준하는 국민과 정부 스스로 경각심과 긴박감을 갖는 대응자세가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도 ‘전쟁’과 ‘속도’를 재촉했을 만하다. 어찌 됐던 지금 밀어닥친 위기를 하루 빨리 극복하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를 바라는 기업과 국민의 입장에선, 이렇게 ‘일하는 정부’로 달라지거나 달라지려는 모습이 사실이라면 그보다 바람직스러운 것은 없다. 이는 불안에 떨며 자꾸 움츠러들기만 하는 요즘의 경제심리를 되살리는 데도 작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보아 정부가 믿음과 공감을 얻어 내려면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비상경제정부를 평가하는 또 다른 견해는 전시행정이다. 내용보다는 포장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이다. 정부가 내놓는 시책들이나 회의 및 서류 등의 표제에 동원되는 비상, 긴급, 전략 등 작전 용어들이 그렇고, 굳이 지하벙커까지 들어가서 본부를 설치하는 일들이 모두 시각을 달리 하면 과잉동작으로 보여질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야당이나 일부 시민단체들이 심지어 쇼를 한다고 혹평을 해도 이것은 자초한 면이 없지 않다. 걱정스러운 것은 국민 다수가 전자보다는 후자의 평가에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사실이라면 이는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신뢰와 협력을 얻지 못하고는 비상경제정부의 경제 살리기가 제대로 성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정부 여당의 지지도가 낮아 비판여론이 훨씬 우세한 지금과 같은 여건에서 꼭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정면 돌파도 필요한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국민의 믿음과 성원이 받쳐 주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민도는 과장된 제스처에 기대를 거는 과거의 그런 수준에서는 훨씬 벗어나 있다. 이제 우리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거나 회복하기 위한 원천은 진실이고 실적이다. 전시상황 등 다른 방법으로는 불신을 잠재울 수도 해소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더 키울 우려가 있다. 4대 강 살리기나 잠실 롯데의 1백20층짜리 공사가 일자리 창출에는 작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대운하와 부자 봐주기로 비판 받는 일도 그러려니와, 지금 연일 매스컴을 달구고 있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에 대한 평가도 모두 정부와 정책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미네르바가 세상의 관심을 끌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 역시 무기력하고 주춤거리는 정부와 거대여당에 대한 반사효과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 역시 반성을 해야 한다. 비상경제정부의 시책들이 발등의 불끄기식 긴급대응 만이 아니라, IT 바이오 등 성장산업을 포함해서 위기를 기회로 삼는 보다 실속 있고 성과 있는 경제 살리기로 되었으면 한다. /조장호 경영학 박사·전 한라대 총장

위기의 한국경제 ‘협력’만이 살 길이다

미국의 뉴욕에서부터 시작된 금융위기가 우리 경제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당연히 기축년 새해의 화두는 경제 회복이다. 그런데 제시된 해결책이라고는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정부의 일방적 외침과 ‘위기는 기회다’라는 몇몇 기업인들의 의례적 선언뿐이다. 정부는 열심히 시장으로 흐르도록 돈을 풀었지만 그건 고스란히 은행으로 직행하고, 시장에는 거의 돈이 돌지 않아, 소비는 바닥에 있다. 지난 1997~1998년의 외환 부족으로 인해 우리가 겪었던 경제위기와 작금의 경제 위기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1997년의 위기는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동남아시아 국가에 집중되었던 것인데 비해, 현재의 위기는 그 어느 나라도 피해갈 수 없는 총체적 위기라는 것이고, 우리의 경제가 그때보다 규모도 커졌고, 비교적 안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이 부딪히는 실물경제 상황은 여러 가지 지표가 보여 주듯이, 그때보다 훨씬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차이는 위기를 극복하려는 사회적 결집, 열정 그리고 희망의 강도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1997년의 위기 상황에서는 불과 수개월 만에 20억불이 넘는 금을 모았고, 노조도 지금보다는 훨씬 협조적이었고, 여야를 막론하고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는 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회적 열정과 공감대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지금의 경제 위기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한 상대적 안도감 때문인가 아니면 희망을 접은 포기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매우 높은 지지율로 당선되었지만 출범 전부터 인사문제로 지지율이 떨어졌고, 발단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였지만, 수개월간 갖가지 사회적 불만 표출의 대상이 되어 곤욕을 치렀고 겨우 벗어나려는 시점에서 경제 위기를 맞은 것이다. 경제 대통령을 자임하고 당선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지난 일 년간 경제에 관해 두드러지게 한 일이 없다. 운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고 국민들을 결집하고 이끌 정치력이 없는 것인지. 그런데 지난 1월2일 대통령의 밋밋한 신년 연설문 중 “이제 국회만 도와주면 국민 여러분의 여망인 경제살리기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작금의 경제 문제가 누적된 결과이고,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치적 행보가 영 미숙하기 짝이 없다.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드러눕고 투쟁하는 국회의원들을 전혀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자기반성 없이 국회만 탓하고 있다”는 민주당의 비판은 적절하다. 지금은 대통령이 국회를 탓할 일이 아니고, 어쨌거나 선거를 통해 뽑힌 국민의 대표들에게 읍소하여, 협력을 구하고 사회적 결집을 촉구해야 할 일이었다. 국회가 지금처럼 난장판이 되어버린 것은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대통령 자신도 결코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국가들이 사회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돌아보면 최고결정권자인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정부가 새 사업을 벌이고, 자금을 시장에 부어 넣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위기 극복 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던 우리가 어떻게 경제건설을 했는가를 보자. 오랜 정쟁 끝에 등장한 박정희는 북한과 그 종류는 다를지라도, 국민 총 동원령을 내려 경제를 만들어 냈다. 한국 사회의 현 수준에서, 더 이상의 그런 강제적, 강압적 동원은 가능하지 않으므로,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엎드려 읍소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 대통령이 성공 가도를 걸었던 ‘밀어부치기’ 식의 경제정책과 정치가 통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나는 내일이라도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로 가서 납작 엎드려 협력을 구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21세기 한국사회의 정치력이다.

위기시대일수록 백년대계를

2008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언제나 해가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덕담 삼아 다가올 새해의 안녕을 기원하지만, 그 의례적인 덕담마저도 올해는 더욱 공허하게 느껴진다. 2009년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예비된 첫 번째 단어는 여전히 ‘위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우리 앞에 놓인 ‘위기’의 세부 목록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위기는 국내외적인 차원을 망라하여 가히 ‘총체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이를 키우면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하건대, ‘위기’든 ‘희망’이든 무릇 미래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시간들이었다. 물론 이것은 필자만이 아니라, 모든 어미와 아비들의 자연스럽고, 공통된 반응 방식이 아닐까 싶다. 미래의 시간들은 물론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의 아이,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것임을 아비된 자로서 부정할 도리가 없는 소치이다. 작금의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이 ‘위기’에 대한 대응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위기 이후’의 사회가 우리 아이들의 장래에 어떤 삶의 조건들을 마련해 주게 될 것이냐 하는 점이 아닐까 싶다. 위기에 대한 대응과 처방이 철저히 우리 아이들의 장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아마도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근시안적인 처방이 제시될 리는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근본적이지 못한 단기적 처방은 다만 파국의 도래를 잠시 연장시킬 수 있을 뿐, 오히려 그 파괴력은 몇 곱절로 키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는 점은 둘째로 치더라도, 우선 ‘아비답지 못한’ 일임에 틀림없다. 내년 초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대통령이 앞장서 경고를 하고 나선다. 전세계 경제가 말이 아닌 상황이니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라고 예외일 리는 없겠다. 다만, 이 정부가 틈만 나면 강조해대는 것처럼 작금의 위기가 전세계 경제의 근본적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정권의 안위나 치적의 차원을 한참 넘어선 근본적인 차원에서 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의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전국토를 망치 소리 가득한 공사판으로 만들고, 이 나라 4대 하천에 콘크리트를 14조원어치나 퍼붓겠다는 발상을 가지고 대처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런 식의 발상으로는 행여 경제 위기를 잠시 모면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미래는 없다. 이런 콘크리트 돌격대 식의 낙후한 ‘발상’ 자체가 우리 사회 위기 대응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진짜 위기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상투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위기의 시대일수록 백년대계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일 말이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감하고 근본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시쳇말로 선진국 수준으로 돈을 쏟아 부어야 한다. 하여 기축년 새해에는 우리 사회에 이런 흐뭇한 변화들이 일어나길 덕담 삼아 기원한다. 멀쩡한 강줄기에 쏟아 부을 14조원어치의 콘크리트가 우리 아이들의 교실을 늘리고, 도서관을 신축하기 위한 거푸집에 쏟아 부어지기를, 그리고 그 도서관을 가득 채울 더 많은 양서로 마술처럼 변화되기를…. /성근제 인하大 연구교수·중문학자

한국판 문화예술 뉴딜정책에 거는 기대

최근 문화부는 2012년까지 4년 간 3조3천억원을 투입한다는 내용의 지역문화발전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전국 방방곡곡 문화활동지원 확대, 문화체육 기반시설 확충을 통한 삶의 질 제고, 지역 특성에 맞는 관광자원 개발과 지역경제 활성화, 문화 창조 거점지역 조성을 위한 지역 경쟁력 제고 등 4대 중점과제를 추진한다고 한다. 문화부는 문화·체육·관광 분야의 공공 서비스 확대, 신 성장 동력 발굴, 규제 완화, 전문인력 양성을 통한 신규 일자리 창출 방안도 발표 했다. 발표에 의하면 내년도에만 총 1만5천여 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는 5년간 100조원 규모의 지방 살리기 사업, 14조원 규모의 4대강 정비사업과 같은 맥락에서 당면한 경제위기를 한국판 뉴딜정책으로 돌파 하겠다는 범정부적 의지로 이해된다. 문화예술분야의 뉴딜 정책은 이미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성공을 거둔 전례가 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 대공황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뉴딜정책 일환으로 생계가 막연해진 예술가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한편으로 문화예술을 통한 국민적 사기 재창출 을 공익 차원에서 접근하고 사업추진에 탄력을 부여하는 지도력을 발휘 했다. 루즈벨트 정부는 문화예술 분야 뉴딜정책 담당기관으로 재무성 공공사업촉진국을 제도화 하고, 미술, 연극, 음악, 작가지원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했다. 법률가이면서 경영자의 이력을 가진 화가, 에드워드 브루스(Edward Bruce)를 재무성 미술 분과 과장에 임명, 생계 위협에 직면한 미술가들이 공공사업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토록하고 1천400개가 넘는 공공예술 지원사업을 수행케 했다. 신축 공공건물 장식을 위해 3천750명의 화가와 조각가가 일자리를 얻어 1만5천600점이 넘는 벽화와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연방 연극 프로젝트 일환으로 연극단체의 전국적인 순회공연에 1만2천700여명을 고용하여 경제적 어려움과 실업의 고통에 빠져 있는 국민들을 위로하고 위기 극복의 희망을 전파 했다. 음악인들은 공교육 음악프로그램으로 진행한 공연과 예술교육에 종사토록 했다. 현재에도 활발한 연주활동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오클라호마 심포니 오케스트라, 유타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당시 연방 음악 프로젝트의 성공사례들이다. 루즈벨트의 문화예술 분야 뉴딜정책은 예술인의 고용 창출로 시작 된 것이나, 그 성과는 80년이 지난 지금 엄청난 가액으로 평가 되는 공공 건축물의 예술작품으로 남아 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전국적으로 확장, 지방 소도시 주민들까지 문화예술의 능동적인 수요자로 변화 시켰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오늘날의 공공교육, 공공 레크리에이션, 그리고 공공예술지원이 뉴딜정책의 문화예술분야 프로그램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에 이르러 뉴욕예술위원회(NYAC), 연방예술기금(NEA)이 창설되어 문화 예술의 공공재적 가치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도 뉴딜정책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그래서 루즈벨트의 문화예술 분야 뉴딜 정책은 단순한 예술인 고용 창출이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가치 제고’라는 미국식 문화예술지원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 된다. 공공문화예술 인프라를 건설하고, 여가시간 선용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 개발과 레크리에이션 전문 인력양성을 중시한 루즈벨트의 문화예술분야 뉴딜정책이 한층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바로 ‘예술의 사회적 가치 제고’라는 철학에 있다. 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문화예술 분야 뉴딜정책은 외환위기시의 수익성 논리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바란다. 문화예술의 공익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공공극장, 박물관, 미술관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는 등,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확산 시키는 획기적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명박 정부의 뉴딜

이른바 검은 목요일로 일컬어지는 1929년 10월24일, 미국 뉴욕의 증권가(월스트리트)에선 하루 동안에 무려 열 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이들은 모두 증권에 투자했던 사람들이고 그 동안 치솟기만 하던 주식이 일거에 대폭락하면서 시장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데 대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공황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10년 동안 지속되면서 모두 9천개를 헤아리는 파산은행을 비롯해서 막대한 수의 기업도산과 두 자리 수(미국25%)의 실업률, 반 토막 난 국민총생산(GNP) 등,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기록했다. 미국의 루즈벨트대통령은 정부가 시장에 적극개입해서 고용을 안정시키고 적자재정으로 유효수요를 만들어 내는 등의 이른바 케인즈 이론에 입각한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미국 발 금융위기를 80년 전의 이 대공황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발의 유사성 등에도 불구하고 불황의 정도나 현재의 경제시스템으로 보아 성급하고 무리한 점이 없지도 않지만, 어찌됐던 지금의 경제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임엔 틀림이 없다. 정부가 마침내 새해 예산의 국회통과를 계기로 경제 살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일요일 귀국하자마자 장관들을 불러서 확대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예산을 신속하게 집행할 것과, 꼭 필요한 분야를 선별해서 이에 집중적으로 투자 할 것을 지시했다. 공무원들이 예산사업을 붙잡고 늘어지는 종래의 관료적 사고와 행태에서 빨리 벗어나서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으며, 어제부터는 각 부처의 업무보고를 앞당겨서 필요한 사업과 정책을 서둘러 점검하고 독려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이 같은 자세는 지금 점차 심각한 상태로 진행되고 있는 경제위기의 긴박성으로 볼 때 잘 된 선택이라고 여겨진다. 경제는 심리라고 한다. 국민이 불안해하면 할수록 경제는 더욱 나빠지게 된다. 또한 적기를 놓친 시책은 효력이 떨어지거나 사후약방문이 되고 만다. 정부가, 그리고 대통령이 발 벗고 나서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런 불안을 덜고 나아가 희망을 심어주는 데 크건 작건 역할을 할 것이다. 불황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기업부도와 대량실업이고, 이에 따르는 서민경제의 몰락이다. 정부가 감세 등 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금융지원을 확대하며, 서민들에 대한 고용을 늘리고, 절대빈곤층 대책을 마련하는 등 대공황 때의 뉴딜정책을 원용한 시책들을 이따라서 내어놓고 있다. 기업을 살리고 고용을 늘리고 서민생활을 안정시키는 데는 달리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런 정책들이 위기극복에 기여할 것이란 기대를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회의적인 부문도 못지않다. 첫째는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한 국민신뢰가 지극히 낮은 상황에서 관련 투자사업들이 제대로 진척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대표적 SOC(사회간접자본)사업인 4대강 개발이 대운하의 속셈으로 비춰지고 있고, 많은 토목사업들이 특정지역에 집중됨으로서 이른바 ‘형님예산’으로 지탄 받는 등 국민의혹을 오히려 더 증폭시킬 요소들이 적지 않다. 기업들에 대한 정부의 거듭된 자금지원 약속에도 아랑곳없는 은행들의 몸사림 현상 역시도 지나쳐 볼 문제가 아니다. 두 번째는 경기관련 예산의 GDP(국내총생산)대비 규모가 미국 중국 일본 등에 비해 크게 적다는 점이다. 내년에 1%로 예측되는 경기가 이 정도 가지고 부양될 수 있을 런지를 모르겠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선 이를 떠받칠 충분한 부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 없다. 이 점 대공황을 극복한 장본인이 뉴딜이 아닌, 제2차 세계대전 이었다는 논란이 아직도 계속 중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제자에게 배운 사랑의 힘

교수를 지칭하는 영어의 ‘professor’라는 말은 라틴어 어원으로 ‘pro(before)’와 ‘fateri(to avow)’의 합성어에서 유래한다. 즉 교수란 사람들 앞에서 공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축적된 지식이나 진실을 많은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교수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동안 나는 많은 학생들에게 수없이 많은 고백을 해온 셈이다. 훌륭한 선생은 학생들의 삶과 영혼을 뒤흔들어 놓을 훌륭한 고백들을 하겠지만, 나는 단지 나를 찾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주는 선생으로 기억되도록 노력해 왔다. 지난주에 15년 전에 졸업한 한 여학생이 내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남편과 함께 찾아뵙고 싶다는 간단한 글이었는데 간혹 주례를 부탁하는 제자들이 부부동반으로 오기는 해도 도무지 이유를 짐작 할 수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났기는 했지만 이름만으로도 그 학생을 떠올리기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여학생은 사물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책을 읽고 공부할까 늘 안쓰럽게 생각했었다. 성적도 결코 보통 학생들과 견주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노력의 결과였을 것이다. 더욱이 졸업 즈음에 어떤 훌륭한 청년과 사랑에 빠졌는데 양쪽 집안에서 심하게 반대를 했다는 것과 그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해서 한 아이까지 둔 엄마가 됐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15년 만에 본 그 여학생은 여전했다. 비록 서로 눈을 맞추고 이야기 할 수는 없어도, 밝게 웃는 것이나 씩씩한 목소리가 얼마나 열심히 삶을 살아 왔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 제자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이번 학기가 마지막으로 내년에 석사학위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책을 읽을 수도 차를 탈 수도 없어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가족이 함께 수업에 들어가고 아이가 보채면 데리고 나오기도 하고 참으로 어려운 일을 이루어 낸 훌륭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함께 온 듬직한 남편이 내 제자의 실제 눈이 되어준 것이다. 이제 졸업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나누어 주고, ‘고백’할 기회를 갖고자 나 같은 선생들을 적극적으로 함께 찾아다니자고 조언을 하는 미래를 보는 예지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15년이라는 시간은 참 많은 고통을 그들에게 주었겠지만 그 긴 시간을 관통하며 지켜낸 그들의 힘은 자기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제자에게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거꾸로 그 제자는 15년 만에 내 앞에 서서 진정한 선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돌이켜 생각할 수 있도록 나의 선생이 돼어 주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나를 그렇게 믿거나, 사람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다. 아주 자주 내가 가진 것보다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과 남이 가진 것 때문에 상처 받고 우울해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무엇하나 뚜렷하게 이루거나 잘 된 일 도 없이 12월이 되고 또 한해가 가버린다. 제자에게 배운 사랑의 힘으로 2009년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할 만큼 2009년의 경제 전망이 결코 밝지는 않지만 극한의 어려움에서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고, 그 경험을 주변 사람들에게 되 돌려주려는 내 제자의 마음과 같다면 그까짓 경제위기는 쉽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공 유 식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통미봉남의 추억

연일 폭락과 폭등을 거듭하던 환율과 증시 소식이 겨우 며칠 좀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대북정책을 둘러싼 설전이 또 마음 한구석을 답답하게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최근 심화된 남북 관계 경색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른바 ‘통미봉남’의 외교적 고립 사태의 재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문제를 케케묵은 보혁의 구도로 몰고 가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우리가 살길은 북측으로 가는 것이다. 지하자원, 관광, 노동력 등에서 북한은 노다지와 같다. ……. 북한에 퍼주기라고 하는데 ‘퍼오기’가 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적어도 정치인으로서는 작심을 하지 않고서는 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발언이다. 그러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다지’라는 표현을 문제 삼아 “이북이 노다지 나오는 곳,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북에 가서 살도록 하는 게 최선”이라고 이야기하며 예의 색깔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수준과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운 전형적인 단장취의이다. 이런 식의 질 낮은 발언이 국가의 명운과 관련되어 있는 이 중요한 정책 방향과 관련된 무슨 토론이라도 되는 듯이 대서특필되고 각종 포털의 메인을 장식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그저 놀랍고 답답하다. 사실 김대중 전대통령이 사용한 ‘노다지’라는 표현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노다지’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도 어감이려니와 무엇보다도 남북의 문제를 순전히 현실적 이익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작금의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오히려 그의 현실론은 사태의 본질을 궤뚫고 있는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한반도 문제를 둘러싸고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 중국의 기본적인 태도가 바로 그러한 현실적 이익에 대한 관심에 철저히 기반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현실적 이익’, 이것이 바로 우리 주변 6자 회담 참가국들의 외교적 방향을 결정하는 궁극적 동인이며,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와 오바마 당선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새롭게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외교전의 본질이다. 바야흐로 본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개성을 폐쇄하는 조치와 동시에 김정일의 신의주 공단 방문 소식을 공개하는 북한의 의도와 메시지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재임 중 북미수교를 추진하던 클린턴의 부인 힐러리를 국무장관으로 지명하려는 것은 또 어떤 외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겠는가? 이러한 사태 전개를 뻔히 눈 앞에 두고도, 여당의 대표는 “남한에는 개성 공단 같은 공단이 수백 개 있다”는 한가하고 아둔한 발언으로 배짱을 과시하고, 대통령은 굳건한 한미공조가 깨어질 리 없으므로 통미봉남이라는 단어는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는 순진하다 못해 앞날이 걱정스러운 수준의 ‘소망의 언어’로 위험천만한 외교적 역주행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 거기에 전직대통령이라는 분까지 나서 유행이 지나도 한참을 지난 뻘건 뼁끼질까지 마다하지 않으시니, 그야말로 걱정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 이유이다. 이럴 때일수록 부디 우리 국민들만이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사태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문화예산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자

정부를 비롯한 지자체의 내년도 예산안이 편성되고 이에 대한 심의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예산 1조6천174억원, 기금 1조1천498원 등 2008년도 재정 대비 5%를 증액한 2조7천672억원의 예산안을 제시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예산안의 규모가 2009년도 총재정안 273조8천억원의 1.01%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예산안 내역을 보면 문화예술진흥, 체육, 관광사업의 3대 부문 정책 수행을 위한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총재정 대비 문화예산 1%를 편성하고, 이를 크게 홍보한바 있다. 물론 예산의 내역은 문화예술진흥, 체육, 관광으로 되어 있었다. 국민들은 그때 프랑스의 문화부 예산이 쟈크 랑 문화부 장관 때 정부예산 1% 편성 목표를 달성했던 사실을 떠 올리며, 우리나라의 문화예산도 선진국 모형을 닮아 간다고 환영했었다. 그러나 프랑스 문화부 예산은 거의 전액이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의 정부나 현 정부의 총예산 대비 문화예산 규모 1%는 실제로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정부의 예산이 프랑스 수준에 도달했다는 의미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정부 예산 규모가 프랑스와 같은 비중에 이르렀으면 하는 것이다. 금년 들어 어려워진 경제가 내년에 좋아질 것인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우선 경제를 살리고 민생을 보살피는 것이 당면한 최대의 국가적 과제가 되어 있는 판국에 문화예술 예산에 대한 언급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개인 가계의 경우, 살림이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문화비 지출을 줄이게 된다. 정부 역시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면 문화예술 예산을 우선 삭감하고 본다. 그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 예산을 언급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의 경제적 어려움의 본질이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새롭게 생성되고 있는 세계질서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의 석학들이 이미 예견한 바와 같이 군사와 경제를 축으로 삼는 구시대 패러다임이 물러가고, 지식 정보와 창의성의 원천인 문화예술의 우열에 따라 국가의 경쟁력이 서열화 되는 신 세계질서 형성의 소용돌이 속으로 한 발 더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처한 나라의 경제 사정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 각국 경제의 큰 흐름과 함께하고 있다. 정부는 마땅히 당면한 위기를 잘 관리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나라의 미래 비전과 국가 경쟁력을 반석 위에 올리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이 같은 맥락 위에서 정부는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2009년도 문화예술예산을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의 어려움을 이유로 미래를 준비하는 문화예술 예산을 삭감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가계의 문화비가 줄어드는 만큼 정부는 그 부족함을 보전해 주는 책무를 질 각오에 차 있어야 한다. 문화예술의 활력을 유지함으로써, 문화예술의 힘이 곧 국력인 21세기를 대한민국의 시대로 만들겠다는 국가경영의 의지를 펼쳐야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9월 제시한 새 정부 문화정책의 목표는 ‘품격 있는 문화국가, 대한민국’이다. 새 정부 문화정책은 국민 모두가 생활 속에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문화를 통해 국가브랜드 가치를 제고한다는 정책의지를 담고 있다. 이 정도의 정책의지는 평상시의 기본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사적 전환의 시대에 대처하는 중대한 시점이다. 문화예술정책에 관한 보다 적극적이고 담대한 경륜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경륜이 정부의 내년도 문화예술예산에 반영되기를 바란다. 지자체의 문화예술예산에 대해서도 같은 차원에서의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을 기대한다.

사냥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있다.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먹는다는 뜻이다. 옛날 중국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의 싸움에서 이겨 천하를 통일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창업공신인 한신(韓信)을 내친 사실에서 유래된 교토사후구팽(狡兎死後狗烹)을 줄인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냥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냥개다. 몸이 가볍고 민첩해서 목표물을 추적하고 잡아내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어찌나 용맹스러운지 구약성경에서는 사냥개를 사자와 함께 짐승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자라고 꼽고 있다. 그런데 민첩하고 용감하다고만 해서 사냥개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사냥개가 될 수 있는 힘은 개만이 가진 절대적인 충직성에서 나온다. 만약에 사냥개가 사자처럼 자신이 잡은 사냥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만다면, 그리고 자신보다 강한 자 앞에서 머뭇거리다 놓치고 만다면, 그건 그냥 개일 뿐 사냥개는 될 수가 없다. 결코 용맹스럽다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사냥개의 용맹은 사자의 용맹과는 달라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에서 만들어진다. 주인의 지시가 없이는 사냥에 나서지도 않으며, 주인의 응원이 없이는 강자에 덤벼들지도 못하는 것이 사냥개다. 다시 말해 사냥개의 용맹은 복종심과 충성심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복종과 충성심이 때때로 사냥개에 있어선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뻔히 죽을 줄을 알면서도 주인에게 자신의 생사를 맡기게 만든다. 토사구팽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면서, 맹목적인 복종을 뜻하기도 한다. 주인의 명령이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여느 사람들이 사냥개란 말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가 않다. 요즘 갑자기 사냥개 논쟁이 거대 여당인 한나라당을 달구고 있다. 당의 한 중진인사가 가진 방송 인터뷰가 그 불씨다. 지지도가 추락하고 반신불수 정당이라고 까지 불리게 된 한나라당이 해야 할 일은 분열을 멈추고 화합하는 일이지 사냥개가 필요한 시기는 아니라는 말이 발단이 됐다. 사냥개로 지칭된 측의 반발은 예상보다도 훨씬 거세다. 정권교체만 성공했을 뿐,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이 요원한 이 마당에 사냥을 끝낼 수 없다면서 무리지어 행동에 나서려는 위협까지도 보여준다. 왜 하필 이미지도 별로인 사냥개에 비유한 것인가 싶지만, 양측의 주장만을 놓고 본다면 굳이 시비를 가리거나 크게 나무랄 것은 없어 보인다.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다. 해법이 다를 뿐 목적은 하나라고 보는 까닭이다. 지금 우리는 10년 전 IMF사태를 연상하리만큼이나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다. 주식과 부동산이 곤두박질치고 환율이 치솟는 가운데, 기업도산과 대량실업이 줄을 잇고 있다. 마땅히 정권을 맡은 정부여당의 고민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사냥개가 필요 없다는 주장은 당과 정부 그리고 국민이 힘을 합해 총력으로 이 위기를 이겨내자는 것이고, 사냥을 지금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은 강력한 리더의 지휘아래 위기극복을 위한 보다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의지와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더라도 발언자에게 가서 탈당을 강요하거나 집단으로 위협하는 행동은 좋은 일도 아니고 올바른 일도 못된다. 가뜩이나 불안한 민심에 그것이 바로 ‘사냥’을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조장호 경영학 박사·前 한라대 총장

美 첫 흑인대통령 탄생을 보며

232년 미국역사에 첫 흑인대통령, 더 정확하게 표현 하자면 흑백 혼혈 대통령이 탄생했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필시 오바마는 50%흑인이기도 하고 50% 백인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그를 백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흑인의 피가 선대에 한번이라도 유입되면 피부색에 관계없이 '흑인' 이라고 기어이 여권에 표기시키고야 마는, 유색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편견이 여전히 작동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흑인 대통령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첫 여성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던, 힐러리 클린턴과의 치열한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후 각 종 여론조사에서 끊임없이 오바마의 승리를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여전히 ‘설마 흑인’이라는 것이었고, 그의 정책이나 변화에 대한 열정 등은 논외에 붙여졌고, 단지 그의 피부색만 이야기 거리가 되었던 것 같다. 백인중심의 미국사회는 어떻게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AP통신은 역사의 장을 연 주역들로 95%의 표를 몰아준 흑인, 중남미계 등 사회적 소수자와 젊은 백인들 그리고 미혼여성들을 꼽고 있다. 30세 이하 젊은 층의 오바마 지지율이 66%로 메케인의 두배를 넘었고 전체 미혼여성의 70%, 백인 미혼여성의 60%가 오바마를 지지 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 하고 있다. 차별의 역사를 종식시킨 것은 소수자들의 단결도 있지만 아직 기득권의 중독에 빠지지 않은 젊은 세대가 순수함과 열정으로 먼저 관용을 보이고 변화에 앞장서야 함을 깨우친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흑인인 오바마가 백인인 메케인을 누르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고 해서 또 그가 시카고에 있는 한인 소유 세탁소의 단골이고, 점심으로 불고기를 즐겨 먹는다 해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므로 한국의 내일이 달라질 것도 크게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의 백악관 입성에서 나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 우리 에게도 비출 수 있게 됨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편견과 차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일말의 반성과 자각이다. 특히 우리의 젊은이들이 미국의 흑인대통령 선출에서 세계가 보여주는 열광에 동참해서 변화를 추구 하도록 바뀌었으면 하는 희망이다. 한국사회에는 과도한 단일 민족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이 흑인이 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갖는 이들이 많을 만큼 인종에 관한한 너무나 많은 편견과 차별이 있다. 메케인의 패배 인정 연설을 들으면서 나는 뜬금없이 ‘라이 따이한’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를 지칭하는 ‘라이 따이한’은 존재 하기는 하지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상한 혼혈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정부에서 추정하듯이 적게는 1천~2천명, 많게는 1만 여명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7천만 한국 인구에 비하면 그야말로 미미한 존재 일지도 모르나, 미군과 ‘양공주’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을 ‘튀기’라고 경멸했듯이 ‘라이 따이한’ 역시 극심한 차별과 빈곤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50%로 한국인이고 50% 베트남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베트남인이라고 치부하고 잊고 싶어 한다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듯이 ‘라이 따이한’이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것은 불가능한 꿈처럼 보인다. 오늘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힘겨운 삶들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차별과 편견의 벽을 높이 쌓아 놓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인권위의 권고안을 받아들인 법무부는 작년 10월에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성별, 나이, 인종 등 20여개의 차별 금지 항목을 담은 이 법안은 그러나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도 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한 미국의 혁명적 변화를 보면서, 한국 사회의 변화를 꿈꾸어 본다.

국제중 설립 신중히 접근해야

국제중의 설립을 둘러싼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설립이 보류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밀어붙이기로 모양새가 달라지고 있다. 설립을 강행하는 명분은 역시 세계화 시대를 대비할 국제적 안목을 갖춘 학생들을 길러 내야 한다는 것이다. 좋다. 세계화 시대를 대비하는 것도 좋고, 국제적 안목을 갖춘 학생들을 길러내겠다니 더더욱 좋다. 그러나 명분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다. 현실을 좀 돌아보자. 필자 역시 학생들에게 중국어와 중국문학을 가르치는 일로 업을 삼고 있으니 말하자면 국제적 안목을 갖춘 학생들을 길러내기 위한 외국어 교육 현장에 몸을 담고 있는 셈인데, 그 때문인지 국제중 설립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사실을 좀 이야기하자면 국제중을 설립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필자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국제중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외국어 고등학교’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꽤 오래전의 일이라 정확한 내용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외국어 고등학교를 처음 설립할 때에도 설립 목적, 그러니까 설립의 명분은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이른바 잘 나가는 대학의 문과에는 바로 그 외국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그야말로 넘쳐난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의 경험에 근거하여 이야기하면 이 학생들이 외국에 대한 (심지어 자기가 전공한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대해서조차도) 차별화된 안목을 갖추고 있다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이 똑같다. 그렇다면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외고를 나온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외국어는 확실히 더 잘하지 않느냐고. 그게 어디냐고.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정이 그렇지도 못하다. 적어도 비슷한 수능 성적을 받고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진학한 비외고 출신 학생들의 외국어 실력보다 그리 더 나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낫다고 해도 아쉬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예의 ‘국제적 안목’이라는 것인데, 현장에서 지켜본 바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거창한 국제적 안목씩은 바라지도 않거니와, 최소한 자기가 전공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기본적 역사에 대한 이해나 관심의 정도에서조차도 비외고 학생들과 의미를 둘 만한 차이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외고를 나온 학생이나 일반고를 나온 학생이나 별 차이가 없다. 똑같다. 똑같다면? 실패한 거다. 외국어 고등학교는 적어도 그 설립 목적에 비추어 이야기하자면 분명히 실패한 학교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외고의 사례를 냉정히 돌아보지는 못할지언정, 이제는 체급을 낮춰 중학교에서 다시 한 번 재기전이라도 해보겠다는 말인가? 그러나 혹자는 또 반문할지 모른다. 외고가 실패한 학교라고? 외고가 이른바 sky 합격자를 얼마나 많이 배출하는데? 원래 외고가 일류대학 집어넣기 위한 일종의 관문이었다는 걸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정말로, 누군가가 질문한다면, 정말로 이렇게 딱 까놓고 솔직하게 질문한다면, ……. 그렇다면, ……. 뭐 할 말이 별로 없다. 다만, 그렇다면, 국제중을 설립할 때는 외고를 만들 때처럼 적당히 둘러대지 말고, ‘나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국제중이라도 만들어서 첨단 사교육 시장이라는 21세기 신성장 동력을 창출하는 데에 확실히 기여하겠노라’고 화끈하게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낫겠다. 적어도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자라나는 미래 세대를 위한 인성 교육에 더 이로워 보인다.

진정한 생활공감 공연예술정책

문화체육관광부는 10월23일 장관기자간담회를 갖고 ‘생활공감 공연예술정책’을 발표했다. ‘공연계에 활력을, 국민에게 감동을!’ 부제로 달고 있는 이 정책은 “경기침체, 금융위기등 공연환경악화로 인해 티켓 판매율이 떨어지고 적자공연이 속출하고 있다”는 현실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까지를 공연예술 활력 창출기로 정하고 총 125억원의 예산을 소외계층 문화향수 확대와 공연계 활력 창출에 집중 투입한다. 이번정책으로 500여개의 공연단체가 직접적인 도움을 받고, 60만여 명의 국민이 공연예술을 즐기게 된다고 문화부 관계자는 설명하고 있다. 소외계층의 문화예술 향유기회확대, 청소년 공연접촉기회 대폭 확충, 중소기업 및 지방단위 공연지원 강화 등 세 가지 사업이 정책의 주요 내용이다. 소외계층 문화예술 향수기회 확대를 위해 소외계층에게 무료관람권을 주는 40억원 예산의 문화 바우처 제도가 시행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악보 개발 등 장애인 예술창작 지원과 체험 프로그램에 26억원을 책정하여 장애인의 예술 활동도 적극 지원한다. 청소년을 위한 ‘미판매 공연티켓 통합 할인제도’와 ‘겨울철 청소년 문화공감 프로그램’ 지원이 청소년 공연접촉 기회 확충을 위해 마련됐다. 청소년은 미판매 공연티켓 통합할인제를 이용해서 정상가의 20% 내지 30% 수준의 가격으로 관람권을 구입 할 수 있게 된다. 금년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 시행할 겨울철 청소년 문화공감 프로그램은 소외지역을 중심으로 ‘수능후 문화공감’,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우수연극·뮤지컬 관람’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중소기업 및 지방단위 공연지원 강화 계획에 따라서 올해 말까지 우수 공연예술단체가 산업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중소기업 근로자를 위한 공연을 하게 된다. 지역 문화예술센터 등과 연계해서, 문화예술 동아리 활동을 지원하는 ‘우리동네 사랑방 만들기’ 사업에 12억원을 투입, 지역주민들의 문화예술 활동 참여를 지원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문화비 지출을 줄이고, 문화비 지출 감소로 인해 제일 먼저 타격받는 부문 중의 하나가 공연예술임을 감안할 때, 이번 생활공감 공연예술정책은 시의 적절한 정책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미 연극, 무용, 음악 공연장 관객 감소와 극장 매표 수입 부진현상은 금년 들어 눈에 띄게 커지고 있고, 공연예술단체와 공연장들의 경영압박이 당면 과제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정책에 투입하는 예산규모의 영세성이나, 125억의 예산 중 절반 이상인 66억원을 소외계층과 장애인 문화향수확대에 할당한 이 정책이 과연 어느 정도의 실효를 거둘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차라리 생활공감 공연예술정책이란 명칭 대신, 소외계층을 위한 공연예술정책으로 발표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공연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국민에게 감동과 삶의 활기를 북 돋아 주는 정책이 성과를 거두려면 무엇보다도 공연예술단체와 지역별 공연예술 공간이 일반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활성화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소외계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공연예술가와 일반국민이 서로를 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공연장을 채우는 절대 다수는 일반국민이고, 일반국민의 공연예술 향수기회 확대 정책의 내실이 다져져야 한다. 청소년과 교사들이 공연을 자발적으로 감상하는 교육현장의 분위기와 사회적 문화연대를 조성해야 한다. 정부는 진정한 생활공감 공연예술정책이 될 수 있도록 한층 더 고뇌해야 할 것이다.

지도층의 모럴헤저드

쌀 직불금 문제로 나라 안이 온통 시끄럽다. 직불금은 논농사를 실제로 짓는 경작농민에게 주는 돈이다. WTO(세계무역기구)의 정책에 따라 수매제도를 폐지하고, 또 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대처해서 정부가 차액을 보전해 주기로 한 돈이다. 불과 몇 년 전, 쌀 시장을 개방한다고 했을 때 국내는 물론 홍콩으로 남미로 원정까지 하면서 벌인 농민들의 반대가 얼마나 격렬했던 지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직불제는 어떤 의미에서 시장개방에 불안해하고 분노하는 농민들을 달래려고 도입한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돈을 엉뚱하게도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의 부재지주들이 가로챘고, 올해도 역시 신청자가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불법으로 받아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공무원 등 공직자거나 의사, 변호사 등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며, 바로 이 때문에 정부는 조사를 해 놓고도 그 파장을 염려해서 없었던 일로 덮기로 했다는 얘기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지도층의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방만한 경영으로 엄청난 손실을 내면서도 거액의 성과급을 나누어 갖는 이른바 신의 직장인 공기업들의 행태라든지, 직무상 얻은 정보를 악용해서 큰돈을 챙기는 공직자들이라든지, 정권과의 유착을 위해 엄청난 비자금을 마련하는 졸부들의 이야기가 연일 지면을 장식한다. 심지어는 지금 전 세계를 제2공황의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는 금융대란에 대처하기 위해서 정부가 외환보유고까지 헐어 내놓고 있는 달러를 이때다 하고 사재기 하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과 정부의 몇 차례 경고성 발언을 미루어보아도 아마 이는 사실일 개연성이 크다. 이들이 누구일까? 자금에 여유가 있는 부유층 사람들에다 환율방어를 구실로 내세운 기업들의 차익을 노린 투기도 있을 것이다. 극히 이기적인 일부의 행태이겠지만 도덕적 허무주의니, 모럴 리스크(도덕적 위기)니 하는 자조적인 개탄들이 전혀 근거 없는 걱정으로 들리지를 않는다. 지도층이 도덕성을 잃으면 사회정의와 질서는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영국을 신사의 나라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1%정도인 지도층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들 지도층의 엄격한 도덕성(노블레스 오블레주)이 그 원천이라는 것이다. 한참 된 이야기지만, 잘나가던 촉망받는 영국의 젊은 국방장관이 희대의 창녀스캔들에 휘말려 의원직도 작위도 모두 내놓은 채 홀연히 정치무대서 사라진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그가 기사작위를 다시 받을 때 신문들은 2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서 거리의 청소부와 각종 불우시설의 자원 봉사자로 일해 온 그를 진정한 신사라고 추켜세웠다. 킬러스캔들의 프로퓨모 자작이다. 이것이 바로 불문율의 나라 영국의 힘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도 지도층의 모럴헤저드에 더 이상 방관하거나 관용을 베풀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지금 터진 직불금 가로채기는 어쩜 일벌백계의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공연히 이를 정쟁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정략적이고 소모적인 공방일랑 걷어치우고, 불법, 부당한 수령자들에게 응분의 벌을 주는 단호한 의지와 노력을 정부가 보여줬으면 한다.

시민단체의 주인은 누구?

사회문제도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우리의 시야에서 생사를 거듭한다. 연일 신문방송에 오르내리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수면에 잠시 가라앉아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도록 누군가에 의해 또는 어떤 집단에 의해 인위적으로 덮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들 사회문제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문제를 예방하고 발굴하고 치료하려고 애쓰는 데 크게 기여하는 것은 일단 언론, 시민사회단체, 국회, 정당 학계 등이라는 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정부, 기업의 활동은 물론 다수의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들을 열심히 조명하여 감시하고 비판하고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는 사회적 책임을 갖고 있으며 또 이들 간에도 서로 감시하고 때로는 협력하여 사회문제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문제를 밝혀내 사회문제라 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이를 잠재우려는 시도가 항상 어디에선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신문이나 방송이 어떤 특정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입장을 달리해서 뉴스비중을 크게 하거나 또는 취급조차 안하는 것을 보면 때로는 언론기관도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그런데 최근 더욱 자괴감을 갖게 하는 것은 몇몇 시민사회단체가 신문 방송의 도마에 올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자발적 단체들도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생활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 단체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까지 온전히 단체를 업으로 삼아 생존을 유지하려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정부와 정치가들이 연루된 사회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단체들이 정부나 정치가들의 돈과 권력에 대해 자유로워야 한다는 전제가 되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하는 자생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정부가 시민단체에 보조금을 준 것은 최근 시작된 형태는 물론 아니다.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면서 자유총연맹을 등을 비롯해서 박정희 정권 때는 새마을운동중앙회 등 시민사회가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단체에 보조금을 집중적으로 주기 시작했고 그 후의 정권에서는 대통령을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보이는 단체나 또는 입을 다물게 하고 싶은 단체에 보조금으로 주는 형태로 길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0년대 자생적으로 출발한 단체들조차, 2000년 김대중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기 시작했고, 여기에 편승해서 기업까지도 이해관계를 가진 참여연대, 환경연합 등의 시민단체에 줄지어 돈을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래저래 시민사회단체들이 받는 돈이 연간 수천억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 단체가 정부 또는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설사 시작은 위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도 아래에 뿌리를 내리는 노력이 미약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밑으로부터 생긴 단체 역시 탄탄히 뿌리내리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결국 이 모든 비판의 핵심에는 시민이 시민단체의 주인이 아니라는데 있다. 자원봉사자 수나 기부금 문화 수준이 OECD 국가 중 최하위라는 사실이 이를 대변한다. 정치나 권력이나 재벌에 손가락질 하기에 앞서 시민이 시민단체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우리들의 의식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너무 무책임하게 주인되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표현의 자유

중국의 역사를 연 하(夏)나라의 첫 번째 제왕 우(禹) 임금은 물길을 다스려낸 치수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가 오랫동안 중국과 유가 문명을 상징하는 한 축으로 떠받들어진 이유는 ‘치수’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의 치수 ‘방법’에 있다. 그의 아버지 ‘곤(?)’은 하느님의 신기한 보물인 식양(息壤:저절로 불어나 산을 이루고 벽을 세우는 흙이다)을 훔쳐와 둑을 쌓고 물을 막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물길을 막는 그의 치수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 더 큰 물난리를 불러왔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았다. 땅을 살피고 물을 살펴, 물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물길을 뚫어주었다. 이 물이 바로 황하다. 우의 방법이 바른 정치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진 뜻은 결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며칠 전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여배우의 안타까운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엉뚱하게도 여의도를 달구고 있는 모양이다. 정부 여당은 그 동안 소원하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기다렸다는 듯이 고인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일명 ‘최진실법’이란다. 고인이 쌓아 올린 명성과 인기를 ‘식양’으로 삼으려 하는 모양이다. 날렵하게 식양을 훔쳐 내는 데에 성공한 이상 아마도 그들의 시도는 성공을 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보다 더 당혹스럽고 가슴이 아팠던 것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영화감독’이라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지난 2일 ‘영화감독 네트워크’ 명의로 발표된 성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성명에서 “대한민국 영화감독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지만, “이은주에 이어 최진실마저 보내게 된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이 과연 진정한 언론의 자유이자 표현의 자유인가 되묻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화권력”이 “거의 일방적으로 (익명의) 네티즌의 파워에 쏠려 있는 불균형 상태”에 처해 있다고 엄살을 부리더니, 기어코 “이번 사태가… 인터넷 공간이 정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은근한 엄포를 기대인 양 늘어놓는다.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더구나 이은주를 들먹이다니. 적어도 고인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감독’들이라면, 적어도 이 시대를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래서는 안 되지 싶다. ‘익명의 네티즌’이라는 정치화된 유행어 뒤에 숨어서 이 여배우들의 죽음에 대한 ‘감독’으로서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먼저 간 이 배우들과 살아 있는 이 나라의 모든 배우들이 감당해야 할, 그리고 감당했어야 할 하중이 그 놈의 ‘악플’들 뿐이라고 여론을 몰아가는 저 낯 두꺼운 정치인들과 기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인가? 여배우들의 몸뚱이와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벗기려 혈안이 되어 있는 제작사와 일부 언론사 기자들에게는 감히 책임을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인가? 지금 진정으로 ‘익명’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여배우의 죽음을 이용하고, 대중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앗아가려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당신들 감독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성명 속의 질문 그대로 “우리가 그토록 지키려고 싸워온 ‘표현의 자유’”에 이 시대 대중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사회적 매체인 ‘댓글’이 포함이 되지 않는다면, 과연 당신들이 이야기하려는 표현의 자유란 어떤 것인가? 역시 “정화”된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속으로 뒤돌아 들어가라. 거기에 그 ‘정화된 사회’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지 않은가. 성근제 인하대 연구교수·중문학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대한 예우

대한민국예술원은 1954년 문화보호법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를 승계해 1988년 제정한 대한민국예술원법에 근거하여 존립하고 있는 국가기관이다. 회원 정원을 100명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현재 회원수는 문학, 미술, 음악, 연극·영화·무용 4개 분과에 84명이다. 예술원 회원이 되려면 문화예술계에서 최소 30년 이상 기여한 공적이 있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자격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회원 선정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엄격하다. 회원과 문화예술 기관장, 80개 대학 총장이 후보자를 추천하고 예술원 내부에 심사위원회가 구성돼 후보자들의 자격을 심사하고 순위를 정한다. 이를 다시 분과회에서 심의하고 최종적으로 총회에서 선정한다. 김수용 회장을 비롯 회원 개개인의 존함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예술원이야말로 진정한 대한민국 명예의 전당임을 알 수 있다. 건국 60주년이 다 지나기 전에 새삼 예술원을 거론하는 이유는 예술원 회원 개개인의 업적이 바로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모습이며, 국민적 자부심임에도 정치·경제 지도자는 물론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질적 욕구와 정치권력의 단맛에 세상이 요동치며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 분주했던 60 성상의 시류 속에서 돈과 권력과는 거리가 먼 예술세계에 일생을 걸고 예술을 통해 우리 삶의 영혼과 영광을 추구하는 외길을 걸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들은 충분히 존경 받아 마땅하다. 위대한 국가의 초석은 위대한 예술의 창조에 있음을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역경을 헤치며 진력해 온 예술가들이 있기에 오늘 이 나라에 명예의 정신과 문화예술의 향기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문화대국 프랑스에는 프랑수아1세가 학자와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1530년에 세운 콜라주 드 프랑스가 있고, 1634년에 설립된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재상 리슐리에 추기경이 문인과 예술인들을 지원함으로써 프랑스의 자존심을 고양하기 위해 설립했다. 40명의 아카데미 회원은 프랑스인에게 더 할 나위 없는 최고의 명예이다. 우리와 프랑스의 차이는 단절의 경험이다. 프랑스가 훌륭한 제도와 역사를 유지 발전시킨 반면 우리는 끝없는 단절의 연속이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에 다시 회생한 예술원의 소중함을 깊이 유념하고, 예술원이 21세기 문화예술대국, 대한민국을 견인하는 권위와 표상이 되도록 국가적 관심과 국민적 호응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 해야 할 일 중의 첫째는 예술원 회원에 대한 예우를 격상하여 대한민국예술원을 아카데미 프랑세즈와 같은 국가적 자존심의 상징으로 삼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국격과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적은 액수의 연금이나 영세한 활동지원에 대해 예술원 회원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아니하다. 주어진 형편 가운데 각자 나름대로 열정을 다해 이바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부와 국민이 먼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1천300명의 기업인들이 인천국제공항 기업인 전용 귀빈실에서 우대 서비스를 받는 동안 우리의 존경하는 예술원 회원들이 공항대기실에서 받고 있는 예우가 과연 합당한지 반성해야 한다. 공항예우는 하나의 대표 사례일 뿐이다. 나라의 품위와 사회적 명예심의 차원에서 예술원의 위상을 높이는 구체적 예우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는 한편으로 대통령이 예술원 회원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는 기회를 자주 가질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일자리 확대가 우선이다

선거과정에서 후보가 내건 공약이 모두 그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사실 그리 되어서도 아니 된다. 타당성이 분명하지 않은 대규모 투자 사업이나 국민정서에 민감한 정책일수록 신중을 기해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 지금은 잠복상태에 있는 대운하 건설도 충분한 의사소통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앞서져야 한다. 지난 일이지만 광우병사태 역시 그렇다. 국민소통의 과정만 먼저 거쳤어도 그렇게 혹독한 시련과 국론분열, 국력손실을 가져 왔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크다. 하지만 약속은 분명히 약속이다. 특히 대통령이 국민에게 한 약속은 가능한 한 지켜나가야 한다. 그래야 정부에 대한 국민의 믿음이 튼튼해지고 기대가 커진다. 요즘 들어 정부가 많은 경제 및 민생시책들을 내어 놓고 있다. ‘촛불정국’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비로소 일하려 노력하는 일단이 엿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발표된 정책들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헤아려지지가 않는다. 당초 내건 ‘창조와 개혁’의 방향과도 거리가 있고, 시장중시에도 어긋나며 간혹은 시책간의 상충현상도 나타난다. 수출을 늘리기 위한 환율인상이 물가를 자극하고, 촛불을 잠재우려 서둘러 선포한 위기론이 경제의 침체를 재촉한 일들에서도 그렇거니와 최근 발표한 일련의 부동산 정책들도 그러하다. 정부는 지난 주말, 수도권의 그린벨트나 산지, 구릉지 등을 개발해 중소형 분양 및 임대아파트를 크게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9.19대책이다. 투기재연 등의 위험이 없진 않지만 집 없는 서민들에게 내 집(보금자리)을 마련해 주고 집값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란 점에서 관련시장의 반응만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정책의 일관성 면에선 문제가 있다. 새 정부는 공약사항인 수도권 규제완화 정책을 포기하고, 대신에 선 지방육성 후 수도권 규제완화란 새로운 시책을 채택했다. 사실상 전 정부의 핵심정책인 지방균형발전을 승계키로 한 셈이다. 기업도시, 혁신도시, 행복도시 등 각종 지방개발을 계속 추진해서 수도권의 기업과 과잉인구를 데려다가 지방경제를 활성화 시키겠다는 것이다. 9.19대책의 예상되는 결과는 이와 반대다. 의도했건 아니건 수도권으로부터의 유입 대상자들을 수도권에 그대로 묶어두겠다는 시책이다. 얼핏 보아도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런 정책 상충이 자주 일어나는 것일까. 혹시라도 지금의 정부 여당이 그토록 비난해 오던 포퓰리즘, 이른바 인기영합주의에 스스로 빠져든 것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경제정책에 있어서 포퓰리즘은 독약과 같은 것(Populism clouds economic polices)이기 때문이다. 독자정책 추진의 소신을 잃고 대중적 인기만을 좇기 때문에 정책간의 모순도, 생각지 못했던 문제도 피하기 어려워진다. 이래서는 과거 10년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 할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이젠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 세계시장이 하나로 통합돼 가는 글로벌시대다. 무한경쟁의 전쟁터에서 이겨내도록 하는 것이 산업정책의 최우선이며, 그것이 정부가 내세우는 실용의 핵심이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곳에서 기업이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 영세서민들의 주거문제를 수도권에서 해결하겠다고 나섰다면, 이들이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도 수도권에서 확보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수도권 규제정책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장호 前 한라대 총장

규제감옥 경기도?

역대 정부 중 가장 힘든 초기를 보낸 이명박 정부가 이제 겨우 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대선기간 중 전면에 내세웠던 공약 몇 가지를 포기하는 것 같다. 하나는 말 많았던 대운하 건설이고 또 하나는 시장주의에 맞지 않는 인위적 균형발전 정책대신 수도권 규제 완화를 하겠다는 공약도 포기하고 ‘선 지방, 후 수도권 발전’이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이에 당사지인 경기도와 김문수지사가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난 몇 개월간 정치인 중 대통령 다음으로 신문지상과 방송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사람이 아마도 김문수 경기도 지사일 것이다. 그런데 신문에 난 것을 보면 ‘배은망덕한 정부·공산당 보다 못한 정부’라는 등 사면초가에 빠진 정부를 몰아세우는 것이고, 가뜩이나 험악해진 사회 분위기에 기름을 붓는 격한 용어를 동원한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물론 그런 발언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는 간다. 오랫동안 안보논리에 가려있던 경기도 북부지역의 기다림을 해소해 달라는 주문이고, 수도권 규제로 우리 기업이 문을 닫고 중국으로 이전해 가는 안타까움을 호소한 것이라지만 언론 보도의 거두절미함을 감안했어야 했고, 부정적 호소가 아닌 좀 더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용어 선택이 필요했다. 김문수지사가 주장하듯 경기도가 규제에 묶여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못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지난 40여년의 개발 과정에서 가장 혜택 받은 지역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세기 전 초기 산업화 시대의 계급간, 지역간 긴장을 덮어버리고 정당화 시키려 했던 기능론적 처방을 21세기에 다시 등장시킨 무감각에 실망이 크다. 정치적 설득에 흔히 이용되는 이해하기 쉬운 비유이기는 하지만 규제에 묶인 소수는 무척 좋아할 것이고, 더 많은 다수는 매우 화날 일이다. 많이 먹은 사람이 더 먹겠다는 논리로 받아들일 것은 뻔하다. 분명 경기도에 국한된 많은 규제는 완화 내지 폐지해야 한다. 그러나 미시안적으로 행정구역 경기도에 얽매여 서울을 포함한 다른 지역 잘 먹자고 경기도 규제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규제 완화와 폐지의 결과가 경기도로 혜택이 집중되는 것이라면 더욱 안 되며, 주변의 서울, 인천, 충청, 강원이 함께 발전하고 오히려 경기도의 몫이 작고 다른 지역에 더 큰 이익이 가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나눔의 프로젝트’라면 더욱 환영한다. 경기, 서울, 강원, 충청, 인천하는 것이 행정편의상 그어놓은 구획이지, 보통 사람들의 삶은 그런 경계선 없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점을 강조하여 주변 지역과 협력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경기도 북부, 소위 접경지역의 발전 방향은 다르겠지만 규제를 완화하고 철폐한다면 그 우선순위는 인근 지자체와 마주하는 지역일 것이다. 또한 중소기업들이 다른 도가 아닌 중국으로, 동남아로 옮겨가는 것은 반드시 수도권 규제 때문만은 아니며 그런 논리는 설득력이 약하므로 버려야 한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정치인들 중에서 김문수 지사는 아마도 가장 결점이 없는 차세대 리더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을 관철 시키는데 꼭 그리 미시안적 시각으로 날을 세우고 여기저기 부딪혀야 할까? 지난 몇 달간의 행보를 보면 뜻대로 안되니까 자리 깔고 시위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민주주의의 선거 양태가 변질되어 죽느냐 사느냐의 네거티브 게임이 돼 버렸지만, 옳은 정책의 추진은 분명히 포지티브 캠페인의 방식이 있다. 공유식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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