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성근제 (연세대학교 강사)¶¶지난 6일 토요일 저녁 국내의 한 유명 포털의 메인화면에는 눈길을 끄는 기사가 하나 올라와 있었다. 해당 포털은 ‘이제 단일민족 국가 아니다’ 정도의 제목을 뽑아 제법 눈에 잘 띄도록 배치해 놓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앞에 대통령 영부인 김윤옥 여사의 이름이 발언자로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필자가 느낀 당혹스러움과 어딘지 모를 불편함 그리고 그로 인한 궁금증은 어쩌면 제목을 뽑은 편집 기자가 기대했던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기사를 클릭해 전문을 읽어 보니, 경기도와 안산시가 준비한 ‘모범 외국인 근로자 가족초청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몽골, 태국 등 14개국에서 3박4일 일정으로 방한한 외국인 가족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영부인이 한 발언을 전하고 있는 기사였다. 기사는 “외국인 100만명 시대를 맞았으니 (한국은)그에 맞는 다문화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이제 한국도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라는 영부인의 발언들을 특별한 논평 없이 전하고 있었다. 이 발언을 두고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국은 원래부터 단일민족 국가였다’거나 ‘다민족국가와 다문화사회의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등의 비판과 설왕설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는 이 자리에서는 잠시 접어 두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필자가 느낌 당혹과 불편은 이런 개념에 대한 이해나 어휘 선택에 있어서의 적절성 여부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기도 하거니와, 어떻게 이야기하든 간에 한국 사회가 다문화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거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더 우호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는 분명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긍정적 가치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긍정성’이 필자가 느낀 당혹과 불편함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데에 있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필자는 그러한 발언이 영부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당혹스럽고 불편했던 것인데, 그것은 김윤옥 여사라는 청와대 안주인의 이름 뒤로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구호가 아른거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종적 소수자들에게 친화적인 개방적 다문화사회 건설이라는 과제가 우리 사회(정부를 포함하여)에서 아직 거의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부인의 발언은 어차피 (현실적으로는)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이명박 정부의 핵심 구호에 앞세워질 리 없는 것이라는 점에는 췌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전제로 주어졌을 경우, ‘다문화 사회 건설’이라는 구호는 그 핵심적 내용이 거세된 정치적 미사여구 이상이 될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우리 사회 농업과 공업의 최하층에 배치되어 있는 약소국 출신 노동자들을 향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다문화 사회의 건설이라는 것은 필수적으로 문화집단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평등(핵심적으로 임금 체계에 있어서의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는 이명박 정부가 지향하는 ‘비즈니스’에 대단히 ‘넌프렌들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대단히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시아판 ‘신(新)산업역군’들을 향한 영부인의 파격적(?)인 선언이 그야말로 힘없는 자들을 향한 얄팍한 립서비스가 아니라면 영부인, 아니 청와대는 그들이 한국에서 겪고 있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의 근본 원인에 해당하는 심각한 고용불안과 저임금 문제의 구조적 개선을 위해 다과회나 기도회 외에 어떤 정책적 대안을 가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성근제 인하대 연구교수·중문학자

문화예술위원회는 예술정책의 핵심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참여의 기치를 앞세운 노무현 정부에 의해 탄생한 수많은 준 정부기관 성격의 위원회 중의 하나이다. 본래 독임제로 1973년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설립된 문화예술진흥원을 해산하고 합의제 위원회 기관으로 전환된 사례이다. 노무현 정부의 특성인 전투적 추진력으로 코드인사를 단행하고, 문화예술위원회 전환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추진한 바 있다. 문화예술진흥원의 문화예술위원회로의 전환은 문화예술 현장 중심의 민간 자율과 독립성을 확보함으로써 구시대적 정부 산하기관의 위상을 청산하고, 수요자가 주인이 되는 민간 자율적 정책의제 설정 및 민주적 참여를 보장한다는 의미로 설명되었다. 당시 위원회 전환과정에서의 두드러진 논점은 과거 문화예술진흥원의 예술지원정책을 수구적 행정편의주의와 보수적 기득권에 편향돼 있는 나눠먹기식의 시혜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전문성 있는 다양한 예술인의 민주적 참여를 끌어내는 한편 참여정부의 문화비전을 구현하는 예술지원정책 수립 및 집행기구로의 전환이 강조된 점이었다. 이것은 곧 위원회 전환의 정당성으로 미화되고 향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위원회 존립의 기본 전제로 여겨지고 있다. 지난 8월 25일 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한 제2기 문화예술위원회 운영개선 방안을 위한 토론회와 그보다 앞서 7월 11일에 열린 제1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성과와 과제에 대한 토론회에서 발표된 발제와 토론을 보면 위원회 전환 당시 인식의 바탕 위에서 이명박 정부의 예술지원정책이 논의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두 차례의 토론회는 이명박 정부 예술지원정책의 가닥을 잡고 향후 정부의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현실 인식과 비전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특히 새 정부가 제시한 예술지원정책의 가이드라인인 ‘선택과 집중’, ‘사후지원’, ‘간접지원’, ‘생활 속의 예술사업 확대’ 등에 대한 구체적 논의에 대한 기대 또한 컸다. 그런데 새 정부의 예술지원정책과 관련한 꿈과 희망, 철학과 비전, 시급한 당면 현안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엿볼 수 없음이 유감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지원정책은 우리의 현대사를 떼어 놓고 이해 할 수 없다.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 제정과 문화예술진흥기금 설치, 그리고 1973년 문화예술진흥원의 설립은 독재 권력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되기까지 30여년에 걸쳐 척박하고 가난한 예술현장에 보슬비라도 뿌려, 근대화와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자신감을 키우고 예술나무가 뿌리 내릴 수 있게 한 문예중흥정책마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이같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역사인식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부정의 인식이 아니라 국민통합과 민주발전을 이끌어낼 긍정의 인식을 확대 재생산하는 문화예술환경 조성이 문화예술위원회의 존재이유가 되어야 한다. 정부는 문화예술위원회의 존재이유를 국민 앞에 천명하고 구체적 정책을 제시해야한다. 인적혁신, 구조개편, 사업혁신, 국가차원의 예술지원기금 확충을 위한 획기적 조치를 기대한다. 이진배 의정부예술의전당 사장

미래를 위한 역사논쟁을 벌이자

올해가 건국 60주년인가, 아니면 정부수립 60주년인가의 논쟁이 8월 15일을 정점으로 극에 달했다가 이제는 하강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이 난 것이 아니라 일단 소강상태에 든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사회에서 좌파와 우파 사이의 이념논쟁과 정치투쟁은 소재만 바뀔 뿐 계속 이어진다. 촛불집회의 초점은 원칙적으로는 국민건강 문제임에도 정치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도 본질적으로는 역사 논쟁인데, 정치 헤게모니 싸움으로 변질됐다. 우리사회는 모든 문제를 정치화하는 경향이 있다. 역설적인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는 과잉돼 있는데, 제도로서 정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거리정치는 만연돼 있는 반면 실제로 정치적 활동이 이뤄져야 할 국회는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의견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가 있으며, 현재까지 인류가 그런 충돌을 합리적이며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도로 발명한 것이 민주주의다. 하지만 쟁점이 되는 모든 사항을 민주주의로 해결할 수 있으며, 또 해결해야 하는가.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올해가 건국 60년인지 대한민국 정부수립 60년인지를 보통사람들이 다수결로 찬성하는 쪽으로 정할 것인가, 아니면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를 것인가. 민주주의가 만병통치약이라면,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아테네 시민들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여럿이 지혜와 정보를 모으는 집단지성과 익명적 대중이 마녀사냥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집단광기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필자는 8월 15일은 광복절이면서 동시에 건국절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부정하는 모순관계가 아님에도 그렇게 보기 때문에 서로를 적대시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대한민국 국가의 위상이다. 건국절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대한민국은 불완전한 분단국가라는 생각이 있다. 이에 비해 건국절을 주장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을 완전한 국민국가로 보기 때문에 해방은 건국을 위한 전단계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전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후자의 주장은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포용하기 보다는 배제하기 때문에 반공주의 우파 이데올로기에 매몰돼 있다. 이에 반해 후자의 사람들은 전자의 좌파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대한민국 국가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둘 가운데에서 나는 어느 입장을 지지할 것인가. 이 같은 문제제기는 결국 대한민국 국가의 정체성과 미래의 방향 설정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썼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보수우파들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기도를 하고 있다. 이것을 아는 진보좌파들이 저항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역사투쟁을 벌일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과거 해석이 아니라 미래 아젠다다. 역사로부터 미래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를 얻기 위해서는 역사를 정치의 시녀가 아니라 정치의 거울로 삼는다는 자세로 역사 논쟁을 벌여야 한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국민통합을 위한 문화정책의 중요성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온 국민을 한 마음 한 뜻으로 열광케 하는 스포츠의 위대한 힘을 목격하고 있다. 국력의 신장에 걸맞게 성장한 우리나라 체육의 성숙한 모습이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주최국의 온갖 텃세와 악조건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미소 짓는 우리 선수들을 보면서 당사자인 주최국 언론마저도 찬사를 보내고 있다. 세계인이 한국선수와 응원단의 훌륭한 매너를 눈여겨 보고 있다. 이 정도면 우리는 선진문명국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우리 올림픽 대표 선수단이 이국땅에서 금빛 땀방울을 흘리며 분전하고 있는 동안, 국내에선 분열과 갈등의 끝없는 소동에 짜증스러울 정도의 허탈감을 맛보고 있다. 함께 똘똘 뭉쳐서 치러야 마땅할 광복절과 건국 60주년 기념행사를 두동강 내놓았는가 하면, 법과 질서는 안중에도 없고 구시대적 투쟁만이 살길인양 국민을 오도하려는 촛불집회와 이를 저지하려는 공권력의 무기력함 그리고 이로 인해 생업에 피해를 입고도 보복이 두려워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서민들, 북새통 교통대란과 불안감으로 일상을 빼앗긴 시민들이 늦여름 찜통더위 속에 분통을 추스르고 있다. 그나마 베이징에서 들려오는 승전보가 없었더라면 어찌 했을까. 이러고도 우리가 선진문명국의 자부심을 큰 소리로 외쳐댈 수 있을까? 문제는 근본으로 돌아가서 갈등과 분열의 이념으로 찌들어 버린 문화코드를 자유와 책임과 질서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통합과 화해의 문화코드로 선진화하는 일이다. 민주화의 파란만장한 과정에서 잉태한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신종 권위주의와 획일주의, 그 결과로 형성된 비민주적 문화 집단주의를 청산해야 한다. 이들은 각기 특성이 다르기는 하나 공통점은 강력한 통치력으로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수호하고, 문화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국가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 시점에서 정부가 해야 할 급선무는 백화점식 문화정책의 미사여구가 아니라 새로운 각오와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문화정책에 대한 신선한 접근이다. 이명박 정부는 ‘소프트웨어가 강한 창조문화국가’를 문화정책의 비전으로 천명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5일 건국60주년 경축사에서 문화정책과 관련 ‘현대사 박물관’, ‘광화문 숭례문 구간 국가 얼굴 가꾸기’, ‘교육·문화분야 혁신’ 그리고 향후 5대 핵심 키워드의 하나로 ‘국가브랜드 가치 향상’ 등을 언급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제시한 정책 목표나 실천과제는 세계화·정보화 시대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여 나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새로운 출발의 실천정신으로 강조한 ‘기본, 안전, 신뢰, 법치’를 실제에 구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국민정신의 통합과 화해, 민주시민문화의 혁신을 위한 실천적 문화정책의 천명은 찾아 볼 수 없다. 문화정책의 핵심인 예술정책에 대한 열정도 엿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당면한 현 시점에서 국민통합과 민주주의 강화를 위한 문화정책이 올바로 펼쳐져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안보도 함께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국가 경영에서 우선순위의 선택과 집중은 매우 중요하다. 새 시대를 열어 갈 시민정신과 가치를 결집하여 역사의 흐름을 획기적으로 주도할 범국가적 국민통합운동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이를 위한 문화정책의 중요성을 되짚어 주기 바란다. 이진배 의정부예술의전당 사장

시론소회(時論所懷)

시론소회(時論所懷)¶/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언제나 답답했었다. 교정행정을 백안시 하는 편견의 굴레는 모질기만 했고, 터무니 없고 무수한 풍문들이 가공해 낸 일상화된 모함과 누명들은 푸념조차 힘에 벅찬 일선의 피곤한 교도관들에게 깊고 큰 내상(內傷)들을 입혀왔다. 혹여 대중에 의해 임의로 규정되고 도색된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에 길들여져 조직원들이 각자의 삶을 초라하게만 규정지을까봐 두렵기도 했었다. 우군(右軍)이 없었다. 교도소의 실상과 조직원들의 땀흘림을 가감 없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졸업생(?)들은 사회적 명예감의 손상을 우려하여 복역 사실 자체를 감추기 일쑤여서 홍보역할을 기대하기란 무망(無望)하다 보니, 세상을 떠도는 교도소 이야기라는 것들은 전과를 훈장처럼 자랑하는 집단의 똘마니들이나 떠드는 각색되고 허황된 영웅담이 전부였다. 그뿐이랴! 젊은 세대가 가까이 하는 영화, TV 등 영상물은 물론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소통의 매체들은 언제나 교도관들을 악역의 장신구처럼 등장시켜 함부로 조롱하고 매도해 왔다. 교도관이 보아도 재미있을 수 밖에 없을 영화인 ‘쇼생크 탈출’ 등 각종 매체의 교도소 이야기는 각인(刻印) 효과를 통해 대중들에게 치욕과 수모의 교도관 상(傷)을 꾸준히 확장시켜 왔었던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범죄자는 한결같이 누명을 쓰거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범죄할 용기는 결코 지니지 못한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의 일원인 교도관들을 항상 악역으로 존재하게 하는 허구적 구도나, 그 구도가 목표하는 상업적이고 헐리우드적인 카타르시즘의 추구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아직껏 그 식상한 콘텐츠를 반전시키지 못하는 작품관이 안타깝고 씁쓸한 것은 사실이고, 더욱이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혼돈하는 요즈음의 일부 젊은 PC방류 세대들에게는 범죄적 인간에 대한 추종을 부채질하거나 국가 공권력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고착시켜 가리라는 노파심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렇듯 교정 실상이 사회 일반에 오도되고 있는 실태를 개선, 그 인식의 간극(間隙)을 좁히고 교정행정에 대한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이해를 유도하고자 노력해 오던 차에 경기일보사가 망외(望外)의 큰 선물을 필자에게 안겨주어서 지난 1년간 졸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교정행정의 실태와 중요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절치부심 나름대로의 의견들을 이 난(欄)에 개진해 왔었다. 지금도 전국의 교정시설에는 수많은 수형자들이 저마다의 변명과 아쉬움을 간직한 채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의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더운 날이면 가당찮은 꿈일지라도 그들 또한 시원한 바다를 그리고, 좁은 창 너머 하늘의 별자리라도 보이노라면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처럼 설레고 잠을 설치며 후회와 각오의 시간들을 여밀 것이다. 갇힌 자도, 지키는 자도 다 같이 외로운 이 바닥을 두고서도 흔들어 오는 내외의 갖은 오해와 질책이 만만찮아 더러는 부석부석 힘이 빠지지만, 잘 살고 있다는 출소자의 편지 한 통에 아득한 마음의 산을 숨 보채며 다시 오르는 부류가 교도관들이다. 아무쪼록 그동안 지면을 통해 마주한 독자제위 중 어느 한 분에게라도 이 논의의 장이 교정행정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참고될 수 있었기를 소망한다. 끝으로 우리 1만4천여 교도관들은 사회 방위와 수형자 교정교화라는 교정 본연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눈, 비 속에 깃발을 든 철도원처럼 꿋꿋하게 서서 수형자들을 위한 삶의 방향과 건널목을 지켜갈 것임을 약속드린다.

2기 예술위원회, 이렇게 구성하자

오는 26일 2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출범한다. 이를 위해 문화체육관광부는 공모와 추천 과정을 거쳐 2배수의 위원 후보 명단을 확정한 상태라고 한다. 1기 예술위원회의 지난 3년 동안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비판은 그 일정한 성과를 인정하는 가운데도 잔뜩 날이 서 있다. 문화부도 6월 27일 개최한 자체 토론회를 통해 완전한 자율성과 독립성의 보장 미흡, 행정·경영 전문가의 불참, 위원회 전환 체제에 대한 경험과 교육의 부족, 위원회 관장 관련 법규의 중첩, 위원회로서의 장점과 통합 리더십의 발휘 미흡, 사무처와의 역할 분담 미흡, 다양한 현장 의견의 반영과 대응 미흡 등을 1기 예술위원회의 한계 또는 부족한 점들로 지적한 바 있다. 예술위원회도 6월 30일부터 7월11일까지 1기 운영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향후 대안 모색을 주제로 한 연속 토론회를 열었고, 예술위원회 노동조합도 최근 발행한 노보에 2기 예술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매우 깊이 있는 특집 기사를 실어 주목을 끌고 있다. 임기를 2년 넘게 남긴 현 위원장을 제외한 10명의 위원들이 문화부 장관에 의해 곧 임명된다. 이들의 선임은 마땅히 1기 예술위원회의 성과보다는 뼈를 깎는 반성의 토대 위에서 행해져야 함이 원칙이리라. 한 사람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독임제가 아닌 합의제 위원회의 위원을 선임하는 일은 ‘사람을 뽑는 일’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영국예술위원회(ACE)의 인적 구성을 참고할 만하다. 현 영국예술위원회의 경우 예술창작자는 37명의 위원들 중 7명(평론가 3인, 작가 2인, 방송작가·소설가 각 1인)으로 19%에 불과하다. 나머지 30명은 경영자 6명, 기관책임자 5명, 관리자 4명, 교수 3명, 경영컨설턴트, 방송인, 연구원, 칼럼니스트 각 2명, 건축사, 저널리스트, 문화컨설턴트, 프로듀서 각 1명이다. 장르별·기능별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구성이 아니므로 예술가 등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로부터 자유롭다. 1기 예술위원회에 대한 반성은 각 위원의 장르별·기능별 대표성 논란으로부터 시작된다. 6개 예술 장르(문학, 시각예술, 음악, 무용, 연극, 전통예술)와 5개 기능영역(문화정책, 예술경영, 지역문화, 문화복지, 기타)을 각 1명의 위원이 대표해서도 대표할 수 없음에도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11명 위원 모두가 문화예술계 인사이다 보니 가치의 선택이어야 할 예산의 배분은 대부분 안배의 성격이 강했다. 결국 장르 대표임을 자임하는 일부 위원에 의해 공공정책이 견지해야 할 공정성과 보편성이라는 두 가치가 상처를 입기도 했다. 예술위원회의 최종 고객은 예술가가 아닌 국민이므로 그 지원 정책과 사업은 무엇보다 예술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문예진흥법시행령 제30조에 따르면 2기 예술위원회도 1기처럼 6개 장르별 예술가와 그 외 전문가로 구성해야 할 듯 보인다. 그러나 2배수의 위원 후보자를 장관에게 추천할 때 장르별로 균형 있게 포함해야 한다는 규정일 뿐 장관이 11명의 위원을 임명할 때 그리해야 한다는 규정은 아니다. 장관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장르별 예술가의 수를 조절할 수 있다. 아울러 그에 못잖게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아닌 국민의 편에서 공공정책의 가치를 균형 있게 구현할 수 있는 교육, 철학, 법률, 경제, 경영, 언론, 시민단체 인사를 고루 포함하는 일이다. 물론 위원회 조직의 경우 구성보다 운영이 더 큰 관건인 만큼 할 말이 더 많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박상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책임전문위원

촛불의 물결이 지나간 이후

모든 일은 끝이 있기 마련이다. 두 달 이상 지속됐던 촛불집회가 이제는 마무리되는 단계에 도달한 것 같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이 만들어낸 촛불집회의 태풍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간 이후, 각자에게 주어진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가’가 아니라 ‘값 싸지만 미심쩍은 미국산 쇠고기를 사먹을 것인가 사먹지 않을 것인가’이다. 헤겔이 “미네르바 부엉이는 밤이 돼서야 나래를 편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냉정하게 사태를 정리해야 한다. 촛불시위는 진보와 보수, 이명박 정부 지지 세력과 반미·반정부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었는가, 아니면 국민경제와 국민건강 사이의 가치투쟁이었는가. 전자는 과거로부터의 싸움이지만, 후자는 미래를 위한 싸움이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는 이 둘은 서로 겹쳐 있다. 과거 없는 현재는 공허하고, 미래 없는 현재는 맹목적이다. 미래가치의 문제의식으로 시작한 촛불집회가 과거이념을 위한 촛불시위로 변질됐을 때 촛불은 약해져 커지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를 분열시켰던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가 어렵게 이루어낸 하나의 사회적 합의는 ‘Health Before Wealth’(부 이전에 건강)라는 그야말로 ‘웰빙’이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미래가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얻은 교훈은 소통 없는 정치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정치권의 화두는 국민과의 소통을 어떻게 하느냐다.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신문과 방송은 연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의 장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른바 ‘끝장 토론’을 벌이면 벌일수록 소통이 되기는커녕 상호 불신만 증폭시켰다. 토론을 통해 수많은 정보가 흘러나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소통장애는 해소되기보다는 치유불가능하게 악화될 뿐이었다. 정보의 과잉은 소통을 돕기보다는 더욱더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왜 이런 모순적 현상이 발생했는가. 문제는 미디어다.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어느 미디어를 통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정보를 얻느냐에 따라 메시지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신문 권력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이 잡고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진보적 성향의 네티즌들이 담론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 우리사회 권력의 견제는 삼권분립이 아니라 매체투쟁으로 이뤄진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앞으로 매체투쟁이 세대갈등의 양상을 띠고 전개됨으로써 인터넷상의 가상현실 권력과 현실정치에서의 실제권력 사이의 싸움은 본격화 될 것이다. 매체투쟁이 집단지성을 확대시킬 것인가, 아니면 집단광기를 유발시킬 것인가? 이 문제가 촛불집회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둘러싼 논쟁의 과정 속에서 드러났듯이, 신문이 지는 해라면 인터넷은 뜨는 해다. 하지만 과거 전통을 무시한 미래 새역사 창조란 불가능하다. 지식 정보 사회에서 신문이 지식을 담당한다면, 인터넷은 정보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역할분담이 일어나야 한다. 정보가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이라면, 지식은 전문가에 의해 가공된 제품에 해당한다. 신문은 정보의 불순물을 걸러서 지식을 생산하는 매체가 돼야 한다. 신문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대중이 집단광기의 노예가 아니라 집단지성의 창조자가 될 수 있도록 지식의 매개자가 돼야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둔 신문업계의 전향적인 변화를 기대한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민주주의 선진화는 최우선 국정과제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치와 공정성의 원칙을 바로 세울 때 가능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래 우리는 지난 정부의 좌 편향적 시책과 코드인사, 아마추어리즘과 포퓨리즘으로 인해 훼손된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과 공정한 사회의 원칙이 복구되기를 기대했다. 더 이상 배타적이며 전투적인 코드문화로 인해 민주주의의 기본인 법치주의가 농락 받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질서가 존중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 믿었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인간존중의 정신을 기본으로 삼으며, 나와 생각이 다른 타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개인주의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한다. 모든 시민은 개개인 각자가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자유로운 자기표현이나 행복추구권은 법치주의의 보호를 받는다. 법과 질서의 보편적 가치와 공정성의 원칙은 그래서 소중하다. 그런데 우리사회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흠집 내려는 친북 반미 종북주의자뿐 아니라 FTA 개방경제를 거부하는 반기업, 반시장주의자까지도 존재한다. 이들은 민중, 민족, 통일의 문화코드로 무장하고 자유민주주의의 개방성을 악용하여 법과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자기들만의 집단적 동질감과 문화정서를 폐쇄적으로 공유한다. 이들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매우 중시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민주시민을 패거리 난동으로 집단공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타적 문화집단주의는 마오쩌둥식 문화대혁명을 연상시킨다. 이를 방치하는 한 우리는 성숙한 개인주의에 입각한 건강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근대화와 민주화의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선진화의 문턱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고 있을까. 성숙한 개인주의가 뿌리 내리기 힘든 권위주의와 집단주의의 부정적 문화 때문이다. 우리는 연이어 불거지는 미숙한 통치행위와 정부 인사논란에서, 방황과 혼란의 정치 현장에서,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서, PD수첩의 진실 공방에서, 퇴영적인 독단과 자만의 권위주의를 본다. 병적인 문화집단주의의 추한 얼굴을 본다. 방송과 인터넷, 그리고 다양한 문화예술미디어를 문화집단주의의 선전선동 도구로 활용할 줄 아는 세력이 온 사회를 불신과 갈등으로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는 동안, 현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우왕좌왕 하고 있다. 현 정부는 예컨대, 당장 시급한 현안인 문화집단주의에 대처하는 근본대책을 국민에게 천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정작 중요한 것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데, 국민들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이명박 정부 스타일의 코드인사에 대한 논란이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한탄이다. 이같은 난맥상은 바로 잡아야 한다.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코드인사나 아마추어리즘과 포퓨리즘 같은 무정견을 털어버리고, 정부 운용의 전 부문에 걸쳐 법치주의와 공정성의 원칙을 바로 세워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야 경제 살리기도 가능해진다. 그동안 국민들에게 비쳐진 독단과 자만의 권위주의를 경계하고, 반민주적인 문화집단주의를 추방하는데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리하여 선진화를 지향하는 이명박 정부의 국가경영의 경륜과 비전이 무엇인가를 국민들에게 분명한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이진배 의정부예술의전당 사장

중간처우의 집

출소자들이 새로운 삶의 토대를 마련하고 안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치열한 반성과 통회(痛悔)로 죄의 냄새를 지우고, 설레는 가슴으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능·기술을 연마하고 나서지만 세상과의 범접은 녹록지 않고 바람은 다만 또 다른 마음의 짐으로 무게를 더할 뿐이다. 형사정책학자들은 출소자가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첫째로 출소 후 현실사회와의 괴리를 짚고 있다. 출소자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사회와 격리돼 있기 때문에 현실의 사정과 부합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생활계획을 구상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구금 중 급변한 사회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갖지 못하기 마련이고 장기간 수용될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6년 실시한 ‘출소자 차별에 관한 연구’에서도 출소자들은 취업이 사회생활 적응에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꼽긴 했지만(70.6%) 바뀐 생활 환경에 대한 적응(47.6%) 또한 어려운 문제라고 답했다. 구미 행형선진국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시설생활에서 사회생활로의 원활한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시설로서 이른바 중간처우의 집 (Halfway House)을 만들어 대응해 왔다. 중간처우라는 이름은 교정시설과 사회의 사이, 즉 ‘구금’과 ‘자유’의 중간단계라는 장소적 개념에서 유래한다. 이 제도는 1788년 초에 영국에서 절도나 구걸을 하던 소년범들을 교도소가 아닌 여러 작은 오두막에 수용하면서 구금에 대한 대안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 효시이나 오늘날 형사정책적인 측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미국의 경우와 같이 출소직전이나 직후 단계에서 행해지는 반 구금상태의 중간처우의 집이다. 미국에서는 1845년에 퀘이커교도가 뉴욕에 중간처우의 집을 처음 세운데 이어 1864년에는 보스톤에 여성출소자를 위한 감시보호수용소가 문을 열었고, 사회 재통합이론이 유행이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지역사회 교정 분야에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어 800여개의 중간처우의 집이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주거형 복귀시설이나 지역사회주거처우센터로 발전하는 등 그 기능과 대상이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중간처우의 집은 수용자로 하여금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지역사회자원을 알게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사회 자원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지역사회의 치유와 재통합을 이끈다. 또한 이들에게 음식과 주거를 제공하고 직업을 알선하거나 취업을 지도하여 재활을 돕고 교정시설 과밀수용 해소에도 기여하고 있다. 중간처우의 집은 약 25명 정도를 수용하는 소규모시설이 가장 일반적이며, 지역사회의 소규모 시설을 임차하거나 기부를 받아 사용하고, 가족 또는 종교인 등 자원봉사자를 적극 활용하기 때문에 재정문제 면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이러한 여러 장점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이 제도가 재범방지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미국내 55개 중간처우의 집에 대한 종합 평가보고서인 1977년의 NEP(National Evaluation Program)에 따르면 중간처우의 집 출소자의 재범율이 일반 가석방자의 재범률보다 낮았다고 밝힌 바 있다. 법무부가 지난해 말에 교정국을 교정본부로 승격시키고 행형법을 전면 개정한데 이어 최근에는 천주교와 함께 ‘기쁨과 희망은행’을 설립하는 등 회복적 정의를 바탕으로 수형자의 사회복귀 지원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스템을 전개·정착시켜 나가는 만큼 중간처우의 집 또한 지역사회와 함께 시도해 보아야 할 중요한 과제라 생각된다. 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

기초예술인가, 순수예술인가

혁신이란 말은 이제 초등학생도 쓸 만큼 보편화했다. 자기 혁신, 기술 혁신, 경영 혁신, 기업 혁신, 정부 혁신에서 보듯 요즘의 혁신은 주로 전 지구적인 통합 시장경제체제에 적응하기 위한 행동 방침으로 신봉된다. 대부분의 명사 앞뒤로 붙여 써도 그리 생소하지 않은 접사의 자격까지 얻은 듯하다. 개선에서 개혁으로, 개혁에서 다시 혁신으로 진화했으니 혁신은 개선의 손자뻘 쯤 된다. 현 정부도 역시 혁신을 뜻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맨 앞에 내세웠다. 그러나 혁신이라는 말 자체부터 혁신하고 싶은 모양이다. 혁신도시라는 말에서 나는 노무현 냄새, 참여정부 냄새 때문인지 혁신을 대체할 다른 단어를 여태껏 찾는 중이라는 소문이 들리니 말이다. 지난 참여정부의 문화관광부에는 기초예술진흥과가 있었다. 2006년 10월 공연예술팀과 전통예술팀으로 분리되면서 부서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기초예술은 그 언어적 공민권을 더욱 확장해 갔다. 그러나 지난 이른 봄 새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는 도무지 이 기초예술이란 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인지적, 실천적 예술 개념의 재구조화를 꿈꾸면서 대체로 순수예술의 자리를 대신하던 기초예술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다시 순수예술에게 밀려났다. 순수예술에서 진화한 기초예술이 원래의 순수예술로 고스란히 회귀한 것이다. 기초예술이, 또 순수예술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 이름을 두고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일까. 기초예술은 이제 무효인가. 순수의 건너편에 존재하는 비순수와 불순은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것이 들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순수예술은 오랫동안 대중예술, 상업예술, 응용예술의 상대 개념으로 쓰여 왔고, 한때는 이념적 편가르기의 희생물로서 민중예술의 대척점에 놓여지기도 하였다. ‘대중’, ‘상업’, ‘응용’, ‘민중’의 함의를 추상해 보자면 상업성과 정치성이다. 이 상업성과 정치성이 바로 바람직하지 않은 그 어떤 것인 셈이다. 그래서 지금도 국어사전은 순수예술을 ‘예술의 절대적 독립성을 주장하는, 예술 지상주의적인 예술’이라 풀이하고 있다. 우리 머리에서든 사전에서든 순수예술을 두고 내리는 이러한 정의는 요즘의 시대적 가치를 담아내지 못한다. 기초학문, 기초사회, 기초과학, 기초생활 등에서처럼 기초는 사물의 밑바탕을 이른다. 순수가 온실 속 화초처럼 그 자체로서 보호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면 기초는 뿌리뿐 아니라 그 지향하는 바가 있어 끊임없이 확장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순수예술이 가치중립적, 자기완결적, 중심고정적인 데 반해 기초예술은 가치지향적, 자기출발적, 중심이동적이다. 순수예술이라 말하는 순간 예술은 별나디 별난 수요·공급 체계로 편입되어 버림으로써 예술가는 사회무능력자로, 예술 감상자는 여유작작한 호사가로 전락할 위험성이 농후하다. 순수예술은 ‘그들만의 예술’일 공산이 크고, 기초예술은 ‘우리들의 예술’일 가능성이 열려 있다. 예술이 그냥 좋은 것일 뿐이라는 단순한 믿음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 기초예술이다. 존재가치는 물론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로도 숭상될 수 있다. 예술가들과 예술 애호가들은 이를 알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일반인들은 예술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잘 모른다. 바로 여기에 기초예술이라는 말의 자기정당성이 있다. 자신이 싫어하는 이가 즐겨 썼다고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는 어리석다. 기초예술은 그 언명만으로도 예술, 또는 이전의 순수예술에 대한 강력한 정책 의지를 담고 있다. 예술을 고갱이로 하는 문화콘텐츠 산업의 창구효과를 엄지로 꼽는 이명박 정부에 더 어울리는 말은 순수예술이 아니라 기초예술이다. 박상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책임전문위원

촛불과 광우병 그리고 축산위생연구소

최근의 광우병 보도와 관련, 경기도의 축산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정부의 현안이자 난관인 ‘한·미 쇠고기 협정’에 대한 나의 할 일이 광우병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관리·감독을 통해 광우병의 정체를 명확히 규명하고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일임을 명심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 속에서 어느덧 ‘미국산 쇠고기=광우병 위험’이라는 공식이 생성되면서 정부를 곤경에 빠뜨리고 수많은 학생들을 시위 현장으로 내몰았다. 쇠고기 수입개방이 한미 FTA의 선결 조건인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만일 이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한미 FTA는 물꼬조차 트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게 미국이 크고 매력적인 시장이듯이 미국에게 한국의 쇠고기시장은 먹음직스런 파이임이 틀림없다. 결국 쇠고기 시장의 개방은 선택이 아닌 필수의 문제일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문을 열기 전에 ‘광우병’과 ‘국민식탁 안전’이라는 문제에 대해 사전에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했지만, 국민의 눈높이와 차이가 있는 쇠고기 협상 결과로 인하여 국민들에게 광우병에 대한 위험성을 증폭시킨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추가협상 등 검역강화 조치로 30개월 이상의 쇠고기 및 30개월 미만의 소 뇌, 두개골, 눈, 척수 등 주요 SRM부위 수입 제한 등의 결과는 정부가 광우병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고자 하는 최선의 노력인 것으로 생각된다. 광우병은 원인체 분리와 진단이 어려운 질병이기 때문에 발생국 조차도 그 유입을 막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명시해두고 있다. 이 질병은 사후 부검에 의한 조직검사만으로 진단이 가능하고 그 원인체로 알려진 SRM의 차단을 통해 예방할 수 있다. 결국 베일에 쌓인 광우병의 공포와 프리온의 존재에 정부 정책이 발목을 잡히고 있는 것이다. 정말 촛불이 국민건강을 생각하는 분명한 논제라면 미국 쇠고기문제 이전에 국내 쇠고기 시장의 유통구조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한다. 현재 한우에 대한 국민의 선호도가 높은데 반해 유통과정에 대한 신뢰도는 매우 낮다. 이는 일부 부도덕한 상인에 국한된 문제점만은 아니다. 정부는 개체인식시스템이나 쇠고기이력증명제 등 소비자에게 한우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다양한 유통구조의 보완도 시급히 필요하며, 소비자의 선호를 고려해 어린 학생 및 학부모가 안심할 수 있도록 경기도처럼 학교급식을 한우고기로 대체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다 금번 국민들에게 알려진 광우병에 대한 정보는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으나 광우병은 아직도 많은 부분에 있어 더 연구 되어야 할 질병이다. 또한 인간 광우병 환자 수는 다른 중대 질병에 비해 낮기 때문에 과장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세계화 시장과 국가경제에 관한 거시적 안목과 올바른 정보를 통해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한다. 국민의 건강이 국제 시장논리와 맞바꿀 수 없는 중대한 사안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국가 경제에 필요한 국제협상에서 쇠고기 시장 개방이 선결조건이라면 무조건 반대하기보다는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각도의 문제점에 든든한 잠금장치를 해두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철저한 검역·검사와 단속, 음식점의 원산지 표시 및 수입업체의 금지규정 준수 등을 통해 국가 경제발전과 국민건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함께 잡아보자. 이제 광우병 문제는 촛불과 말 잘하는 논객이 아닌 전문가인 우리 경기도 축산위생연구소에서 할 일이다.

촛불집회의 진정한 의미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될 때만 해도 대다수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결실로 성립한 ‘87년 체제’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한다면 한반도 대운하건설을 포기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회견은 마치 ‘87년 체제’의 성립을 가져왔던 6·29 선언을 연상시켰다. 촛불집회가 이명박 정권을 무너트리는 촛불혁명으로는 발전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치로 내걸었던 실용주의 정책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해진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상황에서 ‘2008년 체제’의 성립에 대한 기대도 생겨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가 일으킨 나비효과가 이렇게 클 줄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FTA의 조속한 체결을 위해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이라는 선물을 부시 대통령에게 주었다. 아마 그는 자동차라는 공산품을 팔고 쇠고기라는 농산물을 사는 것은 남는 장사라는 생각으로 그런 거래를 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자동차라는 공산품이 쇠고기라는 농산물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가치를 매기는 방식은 수요와 공급에 의거한 시장가격으로 산정되는 교환가치와 사물 그 자체가 가지는 유용성으로 환산하는 사용가치가 있다. 예컨대 물과 공기의 교환가치는 아주 낮지만 사용가치는 매우 높다. 자동차와 쇠고기의 경우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린다. 환경정책의 세계적 권위자 레스터 브라운은 “지구 환경이 이 지경이 된 원인은 시장 가격이 ‘진실’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각종 석유 제품이나 양고기의 시장가격에는 지구온난화나 사막화 등 간접적인 비용이 반영돼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자원고갈과 과잉개발은 계속되어 환경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는 교환가치에 입각한 사회다. 하지만 광우병에 걸린 사람에게 물질적인 부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로 성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성공 신화가 발목을 잡고 있다. 모든 성공의 빛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성공의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를 보지 못하고 하늘 높이 오르기만 하면 그리스 신화의 아카루스처럼 날개 없는 추락을 하고 만다. 이제 우리의 염려는 이명박 대통령의 추락은 그만의 실패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손실이고 우리 국민 대다수의 불행이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광우병 사태로 촉발된 촛불시위가 보수와 진보의 이념투쟁으로 변질되어 계속해서 사회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태로 나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촛불집회의 위대한 힘은 정치운동이 아닌 문화운동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광화문과 청계광장에서 외쳐지는 대다수 구호가 어느 한 방향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촛불의 상징성을 위배하는 것이다. 촛불은 작은 불이다. 작은 것이 큰 것보다 위대할 수 있는 힘은 하나가 아닌 여럿, 곧 다양성에서 비롯한다. ‘이명박 OUT’라는 팻말을 밝히는 여러 개의 촛불로 이뤄진 횃불에 의해 “소를 생명으로 존중할 때 광우병은 사라진다”의 작은 촛불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 광우병 사태의 본질적인 문제는 검역주권과 국민건강이 아니라 인간이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임으로써 생태계 질서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촛불집회를 통해 양적으로 국민소득을 높이는 성장지상주의가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생태정치로 문명사적인 방향전환을 하는 등불이 켜지길 바란다. 인간만이 아니라 소에게도 지구상에서 살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류는 광우병으로 멸종하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한나라, 단독 개원 시사

국회 공전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여야는 27일 미국 쇠고기 장관고시를 둘러싸고 한치의 양보없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한나라당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국회 단독 개원 가능성을 내비쳤고, 반면 통합민주당 등 야3당은 고시 철회를 거듭 촉구하며 경찰의 촛불집회 강경대응을 비난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열린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입법부가 파업을 함에 따라 헌법정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국회 공전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개원 문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면서 “오는 30일 의원 총회를 열어 단독 개원 여부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홍 원내대표는 “국회 파업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며 “가축법에 대한 크로스보팅 검토 등 야당에 줄 것은 다 줬는데도 계속 엉뚱한 요구만 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개원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 법정 사항”이라며 “일단 개원한 뒤 원구성이 협상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30일 의총에서 단독 개원 방침을 확정한 뒤, 이후 원구성을 놓고 야당과 협상에 들어가는 ‘강공법’을 선택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통합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이명박 정부가 장관고시를 강행하고 이에 저항하는 국민들에게 물대포로 응수하는 것은 공안정국으로 돌아가려는 자세”라고 비난했다. 손학규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는 국민을 억지로 누르거나 속이려 하지 말고, 일부 보수세력을 앞세워 좌우 갈등으로 사태를 발전시키지도 말라”고 경고했다. 원혜영 원내대표도 “검역주권을 지키지 못하고 행정절차법을 위반한 쇠고기 장관고시는 원천무효”라면서 “앞으로 법적·제도적 투쟁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서갑원 원내수석부대표는 “국회에 들어가 적극적인 입법활동을 하고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만 가축법 개정안에 대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며 “약속을 받고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이명박 정부 불신임을 선언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과 출하, 유통을 막겠다”며 투쟁 수위를 더욱 높였다. 이런 가운데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기자회견을 열고 “촛불집회가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다”면서 “경찰에 집단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이미 시위군중이 아니라 폭도”라고 비난했다. 이 총재는 또한 “촛불집회로 문제를 풀 수 없고 국회에서 풀어야 한다”며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등원을 촉구했다. /강해인·김재민기자 hikang@kgib.co.kr

의원이 죽어야 지방의회가 산다

의원이 죽어야 지방의회가 산다.¶/정병기 주민칼럼리스트 ¶¶“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지방의원 밥값은 제대로 하고 있나?” 지방의회는 놀고 먹고 쉬며 안주하는 곳이 아니라, 지역과 주민을 위해 봉사하고 노력하는 민의의 전당이다. 유권자인 지역주민이 놀고 먹는 의원들에게 혈세를 투자하는 지방의회의 봉(鳳)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방자치가 실시된 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처음 많은 기대도 걸고 희망도 품어 보았지만 막상 실시하고 보니 실망과 걱정이 앞선다. 달라지는 것도 별로 없거니와 주민의 세 부담은 날이 갈수록 가중돼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주민의 혈세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원 자신들이 혈세 낭비에 앞장서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니 서글픈 현실이다. 의회와 의원 본연의 활동은 적은 반면에 비용 증가나 지출은 많고, 지역발전과 주민을 위한 지방의회 조례 제정이나 발의는 전무한 실정으로 유권자인 주민들의 한탄소리가 높아만 가고 있다. 의원 유급제로 의원 연봉은 높게 책정됐지만 생산성 있는 의정활동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들 간에는 지방의회 무용론까지 제기한다. 지방자치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지방의회란 말인가. 이런 저런 명목과 명분으로 해외여행과 외유는 잦지만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정책에 반영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런 추세로 지방의회가 전문성 없이 지속된다면 차라리 기초의원 보다 광역의원을 선출하는 광역자치제만 제대로 실시하는 것이 국익이나 주민이익에도 부합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는 현실이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낭비되는 국고나 주민의 혈세가 적지 않다. 자신들의 권익과 대우만 바라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보아야 하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의원의 권세만 내세워 자신의 세비와 연봉만 인상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생산성 있는 의정활동을 했는지 스스로 평가해보기 바란다. 한번 지방의회 의원직에 당선되었다고 인생의 전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4년 뒤에 의정활동에 대한 주민의 심판을 받는 입장을 고려한다면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번 의원은 영원한 의원이 아니다. 선거철 특수한 분위기나 여론몰이에 따른 여러 가지 여건에 당락이 뒤바뀌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보아오고 겪어 왔기에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의 귀중함과 주권에 따른 권리행사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오늘날의 지방의회 사태나 무능함에 대한 책임의 절반이 선거에서 ‘어중이 떠중이’를 가려 내지 못한 유권자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 싶다. 의원은 유권자인 주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고 봉사하는 자리임을 다시한번 깊이 깨닫고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며, 유급제가 실시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받은 만큼 생산성 있는 의정활동으로 주민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방만한 지방행정에 관한 철저한 감시와 감사를 통해 주민의 혈세가 헛되지 않게 적절하게 적재적소에 사용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이 있다. 선거에서 당선됐다고 지식이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과 전문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학습활동이 뒷받침 돼야만 가능하다. 지역과 주민을 위해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으로 보다 알찬 지방의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는 능력있고 떳떳하고 현명한 지방의원이 되기를 바란다. 정병기 주민칼럼리스트

문화예술교육 전문 인력 꼭 필요하다

문화예술교육은 문화시민을 만들고, 문화도시는 문화시민으로 완성된다. 주5일 근무제에 따른 여가생활의 확장,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문화 수요 증대, 고령인구 증가와 라이프스타일의 다양화에 따른 자아실현 욕구 분출, 수준 높은 문화도시 생활환경 조성 등과 관련해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본래 문화예술교육은 가정에서 유아기부터 시작해서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심화되고, 체질화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선진국에서 이 같은 문화예술교육은 근대화와 도시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변화하는 생활환경에의 적응능력을 강화시켜 주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교육활동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특히 민주시민사회의 성숙 과정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민주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질과 교양을 함양하는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화예술교육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기회균등’이라든가, ‘행복추구권의 신장’ 등과 같은 가치관의 대두와 더불어 학교교육에 머물지 않고 평생교육, 사회교육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가정, 학교, 사회를 연결하는 문화예술교육의 순환 구조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문화예술교육은 정규 학교 교과과정에서 별로 중요하게 취급받지 못했고, 그나마도 입시위주 교육의 그늘 아래서 건강한 사회와 건전한 민주시민을 육성하는 인성계발의 전인교육은 학교교육 현장에서 푸대접 받고 있다. 따라서 가정과 학교, 사회를 연결하는 문화예술교육 순환 구조의 한 고리인 사회문화예술교육의 평생학습 중요성이 더욱 더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교육의 평생학습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상당히 낮다. 교육프로그램을 수립하고 운영할 전문인력도 절대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사회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높이고, 질 높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할 전문인력의 양성은 당면한 과제이다. 다행히 2004년 이래 정부 차원의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이 시행되고 있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도 설립되어 전문인력 연수 등을 실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이 문제를 범국민적 관심사로 끌어 올리지 못하고 있고, 지역단위 문화예술교육 활성화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매우 미흡하다. 문예회관, 문화예술의전당 등 문화기반시설은 각 지역 사회문화예술교육의 중심역할을 수행해야 할 위치에 있다. 그러한 중심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진제도로 정착돼 있는 문화예술교육 전담 ‘에듀케이터’의 채용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전문성에 입각한 효과적인 프로그램이 주민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가운데 시행될 수 있다 예술교육의 평생학습 프로그램은 지역사회와 지역주민의 삶을 활기차게 하고 개개인의 정신적 풍요로움과 창의성을 가꾸어 줄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향기로 가득한 지역사회의 문화도시 이미지와 브랜드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사회문화예술교육 전문력을 지역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인 각 지역 문예회관과 예술의 전당에 배치할 수 있도록 각급 정부차원의 행정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사업이나 경기문화재단의 문화예술교육지원 사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도 각 지역 문예회관의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은 시급히 충원되어야 한다. 관계 당국의 적극적 관심과 획기적인 지원을 갈망한다.

6월의 교도관, 우학종

나라마다 그 안에는 제복을 입고 총을 휴대하는 세 부류의 집단이 존재한다. 군인, 경찰관, 교도관이다. 군인이 국경선을 접해 국가방위라는 대외적 규찰을 임무로 한다면 경찰관, 교도관은 사회방위라는 대내적 전선, 즉 대범죄진압을 위한 수사와 형집행 업무를 각각 나누어 관장하고 있다. 긴요하고 위험한 임무를 상징하듯 그들에게는 제복과 총이 주어져 존재감의 고취와 직무에 대한 정려(精勵)를 독촉한다. 그리하여 일반인이라면 젊은 한 때 병영시절의 추억으로나 간직되는 긴장의 무게들을 언제나 일상(日常)의 어깨에 등짐처럼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나 평시에는 이렇게 구분되는 듯한 집단별 임무도 전시(戰時)가 되면 하나가 되어진다. 모두의 총구는 침입자를 향해 급박하게 돌려지고 집중되어야 한다. 전쟁은, 총을 지닌 자의 의무는 전사(戰士)여야 하고, 그 권리는 무한하고 장엄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스스로 일깨워 준다. 6.25때도 그랬다. 전방지역에 위치했던 모든 경찰관, 교도관은 군인이었고, 전투병이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주저항선이 일시에 무너져 버린 혼란의 와중에서도 적을 맞아 물러서지 않고 군인처럼 싸웠고 무수한 제복의 사나이들이 전사로서 삶을 마감했었다. 후방에서도 교도관은 이미 군인이었다. 도처에서 준동하던 빨치산들은 경찰서, 교도소를 1차적 표적으로 삼아 기습을 일삼았고, 이들을 퇴치하고자 특별경비대를 조직 전투함으로써 또 많은 제복의 사나이들이 다치고 산화해야 했다. 제복의 영광이라면 마음이 아리고, 무기의 그늘이라면 더욱 아픈 역사이리라. 역사의 폭력과 야만은 전장(戰場)을 펼쳐 평범했고, 또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많은 사람들을 영웅으로 또는 비겁자로 재단하는 만용을 거듭해 왔었다. 그러나 그 오만한 역사의 행간을 누비면서도 고개를 들어 기어코 영웅으로 남겨지는 사람들은 있고, 남다른 그 기개(氣槪)로 인해 오래도록 후대에 기려지고 기억된다. 개성출신 우학종이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휴전선이 그어지기 전 개성은 남한 땅이었고, 거기에 개성소년형무소가 있었는 바 우학종은 형무소장이었다. 소개(疏開) 지시를 받지 못한 그가 형무소를 공격하는 북한 정규군을 맞아 휘하 형무관들에게 전투명령을 하달할 때 쯤 개성시내는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고, 적의 선봉은 이미 포천과 동두천에까지 진출한 시점이었다. 그는 80명의 형무관 및 자원하여 탄약을 나르던 소년 재소자들과 함께 장장 10시간을 버티며 싸워,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침입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전투로 화력이 바닥나고 사상자가 급증하자 이길 수 없는 그의 전쟁을 마감하고 부하들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나라를 위해 우리는 열심히 싸웠다. 훗날의 승리를 기약하며 이곳을 포기하자. 후퇴의 책임추궁이 있으면 소장의 명령에 따랐다고 전해라.” 그때 우학종의 비감했던 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냐마는 그는 부하들의 퇴각을 명령한 뒤 스스로의 몸에 총을 겨누어 자결함으로써 장렬히 산화했다. 훌훌 털고 떠날 줄 아는 그 용기로 영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돌아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있다. 청계산 자락 아래 비록 작은 흉상으로 앉았으나 제복을 입고 영웅을 이야기 한다. 큰 바위 얼굴이다.

예술진흥 정책과 예술교육 정책의 선순환을 위하여

국가 문화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정부의 첫 번째 역할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다음 세대를 위한’ 지원과 관리를 꼽는다. 인류 상호간, 그리고 인류를 둘러싼 세계와의 소통이 누대에 걸쳐 적층된 것이 문화이므로 이는 당연하다. 문화정책의 효과 또한 그 회임 기간이 매우 길다. 이렇게 느려 터진 정책 효과 가운데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문화와 예술이 주는 창의성과 상상력일 것이며, 이에 문화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줄 믿는다. 문화정책은 앞 세대와 다음 세대를 잇는 정책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모든 역사는 결국 문화사이다. 문화정책의 대상은 크게 창조(창작, 생산), 전달(계승, 촉매), 수용(향수, 참여) 활동으로 나뉘며, 이 모든 과정에 두루 기능하는 것이 교육이다. 특히 문화의 고갱이인 예술에 대한 교육을 통해 동시대 국민들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발현된다. 이는 다시 정치, 경제 등 사회의 다른 분야를 발전시키는 원천이 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인다. 예술교육 정책이 문화정책의 핵심인 까닭이다. 미국 국립예술기금(NEA)은 일찌감치 예술교육을 5대 목표에 포함하였으며, ‘1986~1990년 5개년 계획’에서는 예술인, 예술단체, 관객·청중과 함께 정책대상의 4대 기본요소로 설정하였다. 또한 ‘전략계획 1999~2004’는 세 번째 목표로, ‘전략계획 2003~2008’은 두 번째 목표로 예술교육을 두고 있다. 이 예술교육에 있어서는 연방정부의 교육부보다 국립예술기금이 더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프랑스, 스웨덴, 영국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예술교육 정책을 꾸준하게 강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2006년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이 시행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설립됨으로써 법적, 제도적 문화예술교육 지원 토대가 마련되었다.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가동되었던, 당시 문화부와 교육부의 업무 공동 추진 체계는 우리 중앙 부처들의 생리상 그리 흔하지 않은 모범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법무부, 국방부, 서울시교육청 등 직접적인 관련 기관들과의 업무 협조도 아주 잘 이루어졌다.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던 교육진흥원이 요즘 구조조정 소문에 휩싸여 있다. 그 향방을 두고는 확인되지 않는 말들만 무성하다. 하지만 우려의 소리보다는 이번 기회에 예술교육 정책의 기틀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서 문화정책의 핵심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훨씬 많아 참으로 다행이다. 그 가운데 예술진흥 정책의 최일선 기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의 통합이 어떠냐는 의견에 우리는 주목하고 있다. 예술의 창조, 전달, 수용 등 예술진흥 정책의 전 과정에서 교육은 필수적인 수단이다. 예술은 어린 시절부터 즐겨 체험하지 않고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잘 찾지 않게 되는 경험재이자 가치재이므로 이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술진흥 정책과 예술교육 정책이 결코 별개로 수립되거나 분절적으로 실행되어서는 아니 된다. 미국, 영국 등 다른 모든 나라들이 예술교육 정책을 관장하는 별도의 독립기구를 두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은 국립예술기금이, 영국은 예술위원회(ACE)가 예술교육 정책을 총괄한다. 이들 두 기관이 우리나라로 치면 바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아닌가. 교육진흥원이 어떻게든 모습을 바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다 예술위원회도 조직과 사업의 대폭적인 개선을 모색하고 있으므로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예술위원회의 예술 창조, 전달, 수용 지원 정책과 교육진흥원의 예술교육 지원 정책이 체계적·통합적 관점에서 선순환적으로 추진되기를 진정으로 기대한다. 박상언 문화예술위원회 책임전문위원

청계광장에 모인 십대는 ‘쿨(cool)하다’

요즘 십대들이 잘 쓰는 말로 ‘쿨 하다’는 표현이 있다. 예컨대 “그녀는 쿨 하다”는 말은 “그녀는 재미있다”, “그녀는 패션 감각이 있다”, “그녀는 재주가 있다” 등 상황에 따라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쿨’이라는 단어에 이 많은 의미가 붙게 됐을까?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박정규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에서 이런 설명을 했다. 누가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희 젊은이들은 핫(hot)이라는 말 대신에 쿨(cool)이라는 말을 쓰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가 핫이라는 말을 쿨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이유는 우리가 핫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 당신들 기성세대가 그 단어들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지요”라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열띤 논쟁(hot argument)’이란 온몸을 던져 논쟁에 관여하는 것을 뜻했다. 반면에 ‘냉정한 태도(cool attitude)’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태도를 지칭했다. 하지만 우리시대 십대는 ‘쿨’이라는 말을 예전의 ‘핫’의 의미로 쓰는 경향이 있다. 기성세대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십대의 반항이 이 같은 ‘쿨’과 ‘핫’ 사이의 의미의 전도를 초래한 것일까. 정부의 어법대로라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문제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기 전에 ‘냉정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여기서 ‘냉정한’이란 ‘공정한’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청계광장의 촛불문화제에 참여하고 있는 십대들이 보기에 그런 ‘공정한’이란 정부, 대기업, 보수언론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이에 반대하는 십대들은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문제를 그야말로 ‘쿨’ 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십대들은 “사람의 전능력(全能力)에 관여하는 상황에 있어서의 참여나 연루를 뜻한다”는 의미로 ‘쿨’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 맥루한의 설명이다. 어떤 계기로 ‘쿨’이 ‘핫’의 의미를 함축하게 됐을까. 무엇보다도 우리의 지식기반이 디지털 환경으로 바뀐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서기 2000년 이후에는 인류가 보유한 모든 지식의 양이 73일 마다 계속 두 배씩 가속도가 붙어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시대 초등학생은 이전 시대 할아버지가 한평생 습득했던 지식의 양의 몇 곱절을 접한다. 농부가 씨 뿌리고 추수하듯이 직접 정보를 생산해야 하는 시대에서는 ‘노하우(know-how)’가 중요했지만, 이전 수렵시대의 사냥꾼처럼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헤매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노웨어(know-where)’로 강조점이 바뀌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우리는 정보의 홍수에 빠진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정보의 과잉이 문제가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요청되는 마음가짐이 ‘쿨’이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정보를 소통할 때는 인간관계가 중요했다. 그의 표정과 말투가 그가 말하는 내용의 진실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오프라인에서의 미디어는 메시지 전달의 도구였을 뿐이다. 하지만 온라인상에서는 맥루한의 유명한 말처럼, “미디어가 메시지다”. 본래 인간의 입과 귀의 확장으로 생겨난 미디어가 컴퓨터를 매개로 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가상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상황으로 우리 현실이 점점 바뀌고 있다. 이같은 현실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비디오 키드’나 ‘컴퓨터 키드’와 같은 일종의 기계인간으로 전락할 것인가. 필자는 청계광장에 모인 십대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어른이 저지른 실수를 냉정하게 따지고 열정적으로 항의하는 촛불문화제를 벌이는 그들은 ‘쿨하다’.

세계인류 문화도시로 가는 길

서울시는 2006년 7월부터 서울을 세계적인 디자인 도시로 만들기 위한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서울의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으로 삼아 경제, 사회, 문화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디자인서울총괄본부를 설치하고, 서울대학교 미대학장을 지낸 인사를 본부장으로 영입했다. 본부장은 부시장 급이다. 도시 디자인은 창의성을 구현하는 과정이다. 창의성을 행정적으로 실행하려면 수많은 갈등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간판 정비 하나만 보더라도 그 어려움은 매우 크다. 간판 정비 당사자들을 설득하고, 예산, 행정, 제도 혁신을 동시에 이루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식과 제도를 동시에 바꾸는 창의성의 실험이므로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전문성과 행정능력을 겸비한 인사로 하여금 관련 업무를 총괄 지휘토록 하고 있다. 그동안 총괄본부는 공공건축물은 물론, 아파트와 같은 민간 건물의 외관 디자인에 대해 사전 자문을 받도록 ‘도시 디자인 조례’ 등 각종 법규를 마련하고 있고, 작년부터 디자인 심의를 한층 강화해 성냥갑 모양의 건물은 건축허가를 아예 내 주지 않고 있다. 서울 거리의 미관을 가꾸는 도시 갤러리 프로젝트를 통해 거리의 미술화작업도 벌이고 있다. 강남대로, 이태원로, 대학로 등 10곳을 ‘디자인 거리’로 선정해 디자인, 감성, 자연이 어우러지는 ‘토털 디자인’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문화와 예술의 향취가 흠뻑 묻어나는 고품격 문화거리를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런데 간판을 정비하고, 미술거리를 조성하고, 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이 될 공공 시설물을 세워 물질적, 감성적 환경을 조화롭게 꾸미는 것만으로 과연 서울의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가 창출될 수 있을까. 꼭 한 가지 유념하고, 당장 착수해야 할 것은 그러한 조화로운 물질적 환경을 일상으로 이용하고, 생활 속에서 만나는 일반 시민의 의식과 수준을 고품격 문화시민으로 한 차원 더 높게 끌어 올리는 일이다. 호화롭고 세련된 극장을 짓는 일은 공연장 에티켓을 지키는 관객으로 만석일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사업으로 완성된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시민의식이 결여된 도시는 문화도시가 될 수 없다.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을 즐기는 교양과 품격이 미흡한 도시는 일류문화도시가 될 수 없다. 거리를 꾸미는 일과 함께 시민의식을 새롭게 디자인 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세계일류 문화도시의 주인으로 존경받는 시민이 되기 위한 ‘21세기 문화시민운동’을 평생학습 차원의 사회교육운동으로 전개시켜야 한다. 이와 같은 문화도시 토털 디자인의 중심에 문화예술이 있음은 물론이다. 서울의 사례를 이제까지 살펴 본 이유는 서울의 사례가 우리나라 도시발전의 본보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경기도의 경우는 수도권의 위상으로 인해 한발 앞서 생각하고 실행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세계일류 경기도의 토털디자인을 추구함으로써 경기도환경도시포럼이 표방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된 도시의 구현이 촉진될 것이다. 도가 추진하고 있는 뉴타운사업 역시 부동산 가격 폭등이나 전세난 등의 서울에서의 뉴타운 사업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을 타산지석으로 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일류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큰 그림을 디자인하고, 그 다음 단계로 접근한다는 미래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천의 차 없는 문화거리 사업이라든지, 매 주말 예술의 거리로 변모하고 있는 의정부 중앙로의 선진형 문화도시 사업을 비롯해서 이미 시군 단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적만 보더라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제 디자인을 통해 세계일류 문화도시로 가는 길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해 보자.

교정위원(矯正委員)

수형자에 대한 교육·교화 및 출소 대상자의 자활·갱생을 지원하는 교정위원제도는 그 오랜 연륜과 역할의 중요성 및 다대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반에는 크게 알려져 있지 못하다. 또한 허명(虛名)의 윤택에 집착하는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살아서인지 권력기관 쪽의 위원회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지 못해 안달하면서도 교정위원 쪽은 자원하는 사람들이 그리 흔치 못하다. 그러나 세속의 명함에 집착하지 않고도 행복의 공식을 풀어갈 줄 아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은 언제나 따로 있어 세상의 들숨 날숨이 아직은 쉴만하고, 그런 사람들의 참여와 열정이 모여 교정위원제도는 존속되고 또 발전한다. 교정위원제도의 연원은 18세기 말 자연법사상과 계몽주의 및 기독교 박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미국에서 민간단체가 자선적 활동에 나선 것이 그 효시라 할 것인 바, 미국의 위스터(R. Wister)가 1776년 ‘불행한 수형자를 돕는 필라델피아 협회’를 창설함으로써 본격적인 태동을 보였다. 이후 1870년 창립대회를 가진 미국 교정협회가 신행형학에 기반하여 행형제도의 개선을 주창한 이른바 신시내티 선언이 채택된 뒤로 각 주(州)의 교정시설에서 민간참여의 자원봉사 재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접목·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교정에 대한 민간참여는 1945년 광복 이후 소수의 종교인과 독지민간인이 개인적 자격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교화대책협의회, 1970년 독지방문위원회, 1983년 교화협의회 등으로 공식적인 민간참여제도의 설립 및 명칭의 변경을 거듭하다가 1992년 지방교정청연합회, 1998년 법무부 교정위원 중앙협의회가 각각 창설됨으로써 비로소 전국적 규모를 가진 민간교정참여기구가 발족될 수 있었다. 현재 전국의 교정시설에는 수형자에 교화에 뜻을 함께 한 많은 이들이 교정위원으로 참여, 교화위원회, 종교위원회, 교육위원회 등으로 분야를 나누고 소속되어 수형자들의 교화, 상담, 신앙지도 및 취업안내 등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다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우리사회 내 다양하게 이름 지어진 일부 모임들의 행태가 그러하듯 얼굴 내미는 것으로 봉사를 치부하는 낭만적(?) 행보가 교정위원에게는 허용되지 아니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기의 소명을 깨우치고 묵묵히 땀 흘리며 그 땀에 보람을 가질 줄 아는 고집스런 사람들만 여기에 모인다. 더러는 자신이 돌보고 지원한 출소자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어도 개의치 않고 꿋꿋이 헌신하는 모습들을 볼 때, 인생에서 하나씩의 떳떳한 목표가 주어지고 그에 몰입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라면, 그런 행복은 가슴 따뜻한 사람만이 누려가는 특권이겠다는 생각을 쉽사리 떨칠 수 없다. 현직 장관으로 재임 중인 한 분이 과거 공직을 떠나 있던 오랜 기간 교정위원으로 봉사해 온 것이 화제가 되는 것도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선택과 따뜻한 가슴을 소유했음에 기인하였으리라 싶다. 법무부에서는 교정위원들의 숨은 공적과 헌신에 대해 해마다 교정대상 시상식을 마련함으로써 그들의 수고를 기리고 격려하는 자리를 갖는다. 올해도 지난 5월 16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제26회 교정대상 시상식을 가졌다. 그 날의 수상자는 물론 전국 교정위원 모두의 열정이 같이 하면서 수형자 교정·교화 업무가 부디 크고 지속적인 성과들을 거둘 수 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태희 서울지방교정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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