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자지껄한 소래포구를 빠져나와 월곶으로 들어서면 활처럼 휜 해변길이 시원스레 뻗어 있다.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명명된 월곶포구는 소래포구에 비해 매우 정적(靜的)이다. 낚시꾼들이 긴 낚싯대를 드리우고 여기저기 망중한에 젖어 있다. 갑자기 호객꾼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그의 손은 즐비한 횟집 중에서 자기네 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포구엔 크고 작은 고깃배들이 출정을 기다리는 전함처럼 삶을 낚기 위해 도열해 있다. 낯선 사람이라도 좋다. 해변이 바라보이는 횟집에 마주 앉아 한적히 낮술 한잔 마시고픈 황사 낀 사월 같은 곳이다.
수인선 협괘열차가 낭만을 싣고 떠나던 곳. 수년 전만 해도 꼬불꼬불 따라가던 시골 길이 정겨웠는데 어느새 그 길은 사라지고 고가도로 위에 수많은 차들이 경주하듯 달리고 있다. 드넓은 갯벌은 습지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하여 다행이었지만 비릿한 고깃배가 들락대던 포구는 거대한 아파트 숲에 포위된 채 그 명맥이 위태로울 지경이다. 하지만 북적대는 시장안의 진지한 모습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시들한 일상에 충분한 활기를 불어넣어 줬다. 꽃게를 파는 아주머니들의 거친 목소리도 힘차고, 새우가 가을 시장을 장악한 채 다가올 김장철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는 게 버거울 땐 시장을 찾는다. 치열한 삶의 현장을 체험하기엔 이보다 좋은 게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리던 성남의 모란시장을 찾았을 땐 공교롭게도 비오는 밤이었다.파시한 장터는 열기가 식었고 나는 숯불에 구워낸 청어 구이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무르익은 취기를 일으켜 동행한 후배의 차에 올랐으나 한참을 내달리던 차 안에서 나는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고 못내 아쉬웠다. 아뿔싸! 식품점에서 산 클로렐라 칼국수를 (국밥집에) 두고 온 게 아닌가.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의 왕 소나무는 산등성이 나무들 속에 묻혀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커다란 상수리나무에 가려져 스케치 자체가 어려웠지만 굵은 가지가 좌우 대칭을 이뤄 마치 여러 개의 팔을 벌리고 서 있는 형상이다. 수성 최씨(隋城 崔氏) 마을의 상징처럼 꼿꼿한 이 왕 소나무의 나이는 230년, 허리둘레만 3.1m에 달하지만 무엇보다 건장한 청년처럼 힘 있고 푸르다.
용인시 수지구에서 고기리쪽으로 가는 길은 호젓해서 좋다. 들깨 향기 풍겨오는 가을 문턱에 동행자가 있다면 더욱 좋을 드라이브 코스다. 깨끗한 물이 계곡에 넘쳐흐르고 분위기 있는 카페가 있던 곳, 아직도 길가의 논두렁엔 방아깨비 날고 낚시꾼이 있는 저수지엔 매운탕 냄새가 풍겨올까? 궁금해진다.
1990년대 후반 안산시 대부도 갯벌엔 바지락 칼국수와 가을 전어, 그리고 왕새우 양식장이 연상되는 섬 아닌 섬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명물인 소금 창고가 있었다. 은빛 바닷물을 가둬 천일염을 만드는 낡은 삶의 방식, 힘든 세월의 무게에도 향수가 묻어나는 그 섬에 나는 지금도 노모(老母)를 모시고 칼국수를 먹으러 간다.
효행로 따라 용주사(화성시 태안읍) 가는 길은 중년의 벚나무 터널이 가을빛에 익은 하늬바람처럼 싱그럽다. 성황산(화산)자락에 내려앉아 솔향기에 파묻힌 사원을 무심히 산책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대웅전아래 꿋꿋하던 회양목이 고사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2002년 열반에 들어 천연기념물 246호의 명예까지 해제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정조가 심었다니 향년 200여세, 그를 살려내려 부목을 대고 새끼줄로 동여맨 흔적이 안타깝지만 천수를 다한 것이다.
화성시 봉담면 내리는 내시들이 살았다고 전해오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시골마을의 모양이다. 온양의 외암리 민속마을 보다 더 순수한 이 곳의 오월은 찔레꽃 향 가득하고 돌담길 따라 수국이 촌색시처럼 훤하게 밝히고 있다. 조금만 나가면 도시의 아파트 숲인데 이런 마을이 있다니, 발길이 저절로 멈춰진다.
결코 웅장하지 않은 이 소박한 자태에 미학적 묘미가 더해진다. 화홍문을 지나 장안문으로 향하는 당나귀가 먼 시절을 당겨 올 때, 용지(龍池)의 은빛 버들잎은 낙화유수(落花流水)인 양 덧없이 휘날리며, 여름 끝에 반항하는 소나기같이 왈칵 가슴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