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복음서에는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이 예수로부터 치료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안식일,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에 오른쪽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손’이 무엇이던가. 우리는 손으로 삶을 가꾸고 손으로 삶을 일군다. 어느 수필가의 표현대로 손은 “약속하고, 간청하고, 위협하고, 저주하고, 거부하고, 가리키고, 묻고, 놀라고, 고백하고, 아첨하고, 명령하고 비웃는”, 그야말로 삶을 꾸리는 ‘힘’ 자체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 손을 쓸 수 없다니, 자기 삶을 스스로 가꿀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는 뜻일 테다. 눈치를 보며 자기 손을 움츠리는 사람,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무기력한 사람, 요즘 말로 하자면 사회적 약자요 심리적 약자다. 삶터에서 쫓겨난 사람, 일거리를 못 찾는 사람, 일터를 빼앗긴 사람, 노동력을 상실한 사람, 공동체에서 배제된 사람, 자존감을 잃어버린 사람, 남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 모두 손이 오그라든 환자인 셈이다. 그런 사람이 2000년 전 갈릴리의 한 회당에 앉아 있으며, 오늘 어느 길거리나 광장을 배회하고 있고, ‘지금 이 시간’ 어느 구석진 곳에 앉아 있을 게다.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그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일어나서 한가운데로 오십시오.” 눈치만 보며 변두리를 배회했던 그는 이제 무대 중심으로 나와야 한다. 그도,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적의(敵意)에 찬 눈빛이 그를 가로막는다. 그들은 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자 명령이라며 힘없는 이의 걸음걸이를 헤살짓는다. 약자를 외면하는 것도 모자런지, “안식일에는 치료 행위를 금지한다”는 법 규정을 들어 이참에 아예 예수를 범법자로 옭아매려고 눈을 울부라린다. 바리새인 또한 2천년 전 갈릴리 회당에만 있지 않다. 삶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터를 지키려고 죽살이쳐는 서민들에게 툭하면 법질서 운운하며 윽박지르는 공권력의 모습으로, 일거리를 찾아 애면글면 기를 쓰는 청춘들의 고투마저 기껏해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기에 바쁜 시장권력의 모습으로, 율법과 계명을 무기 삼아 교인들을 옥죄는 종교권력으로 재현되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살벌한 적의에도 굴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은가?”라고 되묻는다. 그러고는 “일어나 한가운데로 나온” 그의 손을 고쳐준다. 마침내 그의 생명력이, 자존감이, 존엄성이 회복된다. 힘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율·법·질서 따위가 사람을 옭아매고 돈과 지위, 지식과 학벌로 사람의 값을 매기는 황폐한 세상 아니던가. 이 거칠고 메마른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꽃피우려면 힘센 이들이 쳐놓은 철조망을 뚫고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삶의 무대 한가운데로 나아가야 한다. 참된 생명으로 살겠다는, 생명을 살리겠다는 따뜻한 마음과 굳센 의지가 있어야겠고, 철조망을 치우는 단호한 행동도 필요하다. 오랜 폐습을 청산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가꾸려는 마음들이 넘실댄다. 그 마음에 예수의 결단과 행동이, “일어나” 한가운데로 “나아간” 그이의 믿음과 투지가 더해지면 ‘그때 그곳’의 기적이 ‘이제 여기’에서도 일어나겠지. 박규환 숭실대 초빙교수·기독교학 박사
오피니언
박규환
2017-06-20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