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주지 않은 것을 취하지 말라

모든 종교는 그 종교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통과의식을 치르도록 한다. 불교의 입문의식은 ‘수계’, 즉 계를 받는 것으로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할례, 유교의 관례, 기독교의 세례 등의 입문의식은 신에게 복종할 것을 약속하거나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의 고백, 또는 속죄의 과정이다. 해당 종교에 입문하려는 사람은 그 요구조건을 먼저 갖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불교에 입문하려는 사람은 과거에 어떤 행동을 저질렀는지 관계없이 불자가 될 수 있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계율을 지키겠다는 약속만 하면 불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입문의식 이전보다 그 후에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재가신도가 되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계율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살아 있는 목숨을 죽이지 말라. 둘째 남이 주지 않은 물건을 취하지 말라. 셋째 올바르지 않은 성생활을 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술 등 중독성이 있는 물질을 취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계’라는 단어가 ‘금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고 강제적인 느낌을 주지만 위의 계목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일반인도 지킬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적 준칙이다. 아니, 대부분 오늘날 법률로서 금지된 행위이다. 다섯 가지 계율 중 다섯 번째 술 마시지 말라는 조항은 그 중에서도 종교적인 금계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상식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술이나 중독성 물질을 먹거나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때문에 실수로 다른 잘못을 행하기 쉽기 때문에 금하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과실로 일어날 사고의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음주운전을 금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법규와 다른 점도 있다. 예를 들어, ‘남이 주지 않은 것을 취하지 말라’는 계목을 살펴보면, 그것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지 않는 것을 가져가는 행위도 금한다. 따라서 이 계목을 지키려면 우리의 행동과 마음가짐에 대해 더 깊이 마음을 써야만 한다. 공용화장실 휴지를 함부로 쓰거나 심지어 집으로 가져가면서, 공원에 핀 꽃이나 화초를 파가면서, 또 금액이 크지 않다고 다른 사람 물건을 허락도 받지 않고 가져가면서 모두 “나 하나쯤 어떠랴”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행하지만, 불교계율에 비추어보면 주지 않은 물건을 취하는 범계행위이다. 최근 대중사우나 시설에서 준 수건을 가지고 가거나 식당이나 찻집에서 식기나 도구, 냅킨 등 크고 작은 물건을 집어가고 PC방에서 마우스, 헤드셋 등을 슬쩍 가져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다 보니 소상공인이 입게 되는 피해도 막대하다. 이런 행동은 상식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일 뿐 아니라 범법행위이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 편하고 보자는 이기심이 우리 사회를 더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고 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많지만 사회가 더 황폐화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들 중 불자는 없었을까? 오계를 받은 불자라면 남에게 베풀고 내 것을 나누어주지는 못할망정 남이 주지 않은 물건을 가져가는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지 말자. 계율은 받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통해 너와 내가 모두 이익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겠다. 명법 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마음을 만져주는 마음으로

사람이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처럼 시원한 일은 없다. 그러나 가려운 데를 한 번에 찾아서 긁어주는 일은 쉽지 않다. 며칠 전 금년 여덟 살 된 손주 녀석에게 등을 좀 긁어 달라 했더니 스마트폰을 들고 한창 게임을 하는 중이라 여간 귀찮아 하질 않는다. 억지로 마지못해 긁어 주는데 손가락 하나를 펴서 “여기” “여기”하면서 묻는다.손가락 다섯 개로 찾아도 어려운 것을 손가락 한 개로 찾아내려는 속셈이야 알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내 쪽이니 참고 인내할 수밖에, 각고의 인내 앞에 가려운 곳은 찾아졌고 거기라고 하니 고사리 같은 손을 펴서 긁어 주는데 얼마나 시원하던지 속으로 ‘자식 키우는 보람이 있구나!’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웃는다. 성경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손으로 짚어가며 “여기, 여기”묻지 않으셔도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마음을 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심 앞에 오늘도 감동을 받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 그리고 지지하시고 세워주시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길목 어귀까지 피를 흘리고 찾아와 끝까지 사랑으로 위로하시고 다시 할 수 있다고 힘주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에는 깨닫는 기쁨이 넘친다. 또한 이 기쁜 소식을 힘들고 어려운 인생길을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쁨은 더욱 큰 것이다. 신앙하는 사람의 제일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스스로 충분히 영화로우신 분이시다. 다만 우리는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빛을 받아 반사체가 되는 것이다. 중심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마음을 만져주시는 하나님, 묵상만 해도 가슴이 녹아내린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망하지 않는다. 마음이 무너져서 망한다. 죄의 세력은 우리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낙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을 만지시고 치유하시며 회복케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개 4가지 정도로 요약해서 가르쳐준다. 하나는 내버려 두시는 마음이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는 마음, 우리는 절대로 이 자리까지 가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진노하시는 마음이다.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때 진노하신다. 세 번째 마음은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다. 어렵고 힘든 세상과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의 마음은 기뻐하시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는 모습에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마음이다. 그중에 하나님 안에는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가장 풍성하다고 생각하고 믿는다. 나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한다. 오늘도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다’라고 가르친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하시고 풍성한 삶을 계획하셨을 뿐이다. 타락하고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일뿐이다. 나는 신앙인으로서 두 가지를 늘 마음에 두려고 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아래서 내 마음을 만지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은혜의 시간이다. 작은 신음까지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은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이고 축복이다. 또 하나는 내게 사랑하라고 주신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때로는 손을 잡아 주기고 하고 어깨를 내 주기도 하고, 함께 울어주기도 하는 행복한 목자이고 싶다.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일어나서, 한가운데로”

신약성서 복음서에는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이 예수로부터 치료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안식일,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에 오른쪽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손’이 무엇이던가. 우리는 손으로 삶을 가꾸고 손으로 삶을 일군다. 어느 수필가의 표현대로 손은 “약속하고, 간청하고, 위협하고, 저주하고, 거부하고, 가리키고, 묻고, 놀라고, 고백하고, 아첨하고, 명령하고 비웃는”, 그야말로 삶을 꾸리는 ‘힘’ 자체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 손을 쓸 수 없다니, 자기 삶을 스스로 가꿀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는 뜻일 테다. 눈치를 보며 자기 손을 움츠리는 사람,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무기력한 사람, 요즘 말로 하자면 사회적 약자요 심리적 약자다. 삶터에서 쫓겨난 사람, 일거리를 못 찾는 사람, 일터를 빼앗긴 사람, 노동력을 상실한 사람, 공동체에서 배제된 사람, 자존감을 잃어버린 사람, 남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 모두 손이 오그라든 환자인 셈이다. 그런 사람이 2000년 전 갈릴리의 한 회당에 앉아 있으며, 오늘 어느 길거리나 광장을 배회하고 있고, ‘지금 이 시간’ 어느 구석진 곳에 앉아 있을 게다.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그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일어나서 한가운데로 오십시오.” 눈치만 보며 변두리를 배회했던 그는 이제 무대 중심으로 나와야 한다. 그도,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적의(敵意)에 찬 눈빛이 그를 가로막는다. 그들은 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자 명령이라며 힘없는 이의 걸음걸이를 헤살짓는다. 약자를 외면하는 것도 모자런지, “안식일에는 치료 행위를 금지한다”는 법 규정을 들어 이참에 아예 예수를 범법자로 옭아매려고 눈을 울부라린다. 바리새인 또한 2천년 전 갈릴리 회당에만 있지 않다. 삶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터를 지키려고 죽살이쳐는 서민들에게 툭하면 법질서 운운하며 윽박지르는 공권력의 모습으로, 일거리를 찾아 애면글면 기를 쓰는 청춘들의 고투마저 기껏해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기에 바쁜 시장권력의 모습으로, 율법과 계명을 무기 삼아 교인들을 옥죄는 종교권력으로 재현되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살벌한 적의에도 굴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은가?”라고 되묻는다. 그러고는 “일어나 한가운데로 나온” 그의 손을 고쳐준다. 마침내 그의 생명력이, 자존감이, 존엄성이 회복된다. 힘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율·법·질서 따위가 사람을 옭아매고 돈과 지위, 지식과 학벌로 사람의 값을 매기는 황폐한 세상 아니던가. 이 거칠고 메마른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꽃피우려면 힘센 이들이 쳐놓은 철조망을 뚫고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삶의 무대 한가운데로 나아가야 한다. 참된 생명으로 살겠다는, 생명을 살리겠다는 따뜻한 마음과 굳센 의지가 있어야겠고, 철조망을 치우는 단호한 행동도 필요하다. 오랜 폐습을 청산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가꾸려는 마음들이 넘실댄다. 그 마음에 예수의 결단과 행동이, “일어나” 한가운데로 “나아간” 그이의 믿음과 투지가 더해지면 ‘그때 그곳’의 기적이 ‘이제 여기’에서도 일어나겠지. 박규환 숭실대 초빙교수·기독교학 박사

[삶과 종교] 종교는 여성 노숙자에게 무엇을 할 수 있나

우리나라도 사회의 유동성이 커지면서 끼니를 거르는 노인, 집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노숙자가 점점 더 늘고 있다. 그들 중에는 무책임하고 자립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길거리로 나앉은 사람이 많다. 여성들의 경우, 처음에는 자존심을 지키며 어떻게든 버텨보지만 더이상 오갈 데 없을 때 거리로 나온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돈을 버는 유혹에 빠진다고 하니 자존감을 지키고 살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 언젠가 고학력 젊은 여성이 노숙자가 된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유학을 갔을 때 갑작스럽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학위를 따지 못한 채 귀국했다. 부모님의 재산은 병원비로 다 날아가서 다니던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직장을 구하려고 애써보았지만 학위가 없는 그에게까지 돌아갈 직장은 없었다. 직장을 구하려면 한국에서 학위를 따야겠다고 생각하여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비싼 등록금을 대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그래도 공부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하루하루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다가 더 이상 방값을 내지 못하게 되자 정말 한순간에 노숙자가 되고 말았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내 주변에도 공부나 작품 활동을 하는 젊은 여성들 가운데 말 못 할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아서 그 이야기가 쉽게 납득이 되었다. 그런데 여성노숙자는 건강 문제뿐 아니라 성추행, 성폭력 등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수치심과 자기혐오 등 정신적인 문제까지 겹쳐져 남성노숙자에 비해 훨씬 더 열악한 상황이다. 하지만 여성노숙자를 위한 시설은 많지 않다. 그래서 몇 해 전 불교계 여성학자가 여성노숙자 시설을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간이 되면 꼭 그곳에 찾아가 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드디어 올해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등공양을 올리게 되어 회원들에게 등공양비를 전액 보시하자고 했더니 모두 선뜻 동의해주었다. 적은 금액이지만 노인무료급식소와 여성노숙자 시설에 나누어 기부했다. 특히 여성노숙자시설은 처음 가는 곳이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해 회원들과 함께 갔다. 그곳은 불교단체가 지원하는 유일한 여성노숙자 시설로, 서울 시내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열다섯 명이 살고 있었다. 평일 오후 여서 모두 일터로 나가고 신임 관장님과 직원 한 분이 우리를 반겼다. 작고 오래된 시설이지만 그마저 없었다면 유혹에 빠졌거나 자포자기하여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를 이들이 서로 기대며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열심히 저축해서 2년 뒤에는 시에서 알선한 임대아파트를 마련하여 나간 분도 있고, 또 다른 시설로 이동한 분도 있다고 한다. 정말 몸 하나 누일 공간만 있으면 이렇게 다른 삶을 살 수 있는데, 한 평의 땅이 누군가에겐 호화로운 저택보다 더 소중한 공간인데…. 낡은 시설을 개수할 필요도 있고 운영경비 지원도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정신적인 치유이다. 밤늦게 일터에서 돌아오면 다음날 다시 일터로 나가기 위해 두 발 뻗고 자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처지에 상처 난 마음을 돌볼 여력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존의 절박감이 크더라도 그들이 되돌아와 살게 될 사회는 예전의 어둡고 외로운 세상이 아니라 따뜻하고 밝은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거친 삶을 다독이고 궁지로 몰렸던 마음을 활짝 펴줄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종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이란 경제적인 지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것,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날은 선뜻 약속하지 못했지만 꼭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명법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세월을 아끼라

지난 주간에 건강관리를 잘 못해서 조금 고생을 하였다. 수년 전부터 고혈압과 당뇨가 있어서 식사조절과 운동요법으로 자신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주에는 회의도 많았고 모임도 많아 자연히 식사조절과 운동을 잘하지 못하고 건강관리에 좀 소홀했다. 그래서 후유증으로 며칠 고생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당신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 못하고,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구분 못해요!” ‘이 나이를 먹도록 아직도 몸에 안 좋다는 음식을 탐하고, 몸에 좋다는 운동은 게을리하니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인생이로구나!’ 갑자기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난날 살아온 날들을 모아 압축을 하면 두 단어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감사’ 또 하나는 ‘후회’라는 단어일 것이다. 인생에서 후회스러운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일까? 인생의 가장 큰 낭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월을 생각 없이 살아온 것일 게다. 성경은 말씀한다.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에서 ‘아낀다’는 의미는 길거리에 내다 버린 소중한 것을 다시 찾아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의 가치를 알고 살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왜 인생을 헛되게 세월을 낭비하며 사는 것일까?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 중에 가장 큰 지혜는 시간의 가치를 알고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누군가가 “시간은 금이다”라고 말했지만 이 말은 반드시 진리만은 아니다. 시간은 금이 아니라 금 이상이다. 시간은 생명이다. 금으로 생명을 살 수 있는가? 병실에서 의사 선생님을 붙들고 “선생님 살려만 주십시오.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하면서 애원하는 환자와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가? 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시간이며 세월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지혜일까? 두 가지를 생각하고 싶다. 첫째는 우리 인생의 삶에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자주 깨닫고 사는 것이다. 성서는 세상만사가 때가 있다고 말씀한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것이다. 인생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두 아들을 두었던 어머니의 간증이다. 큰 아들과는 달리 둘째 아들은 오토바이 폭주족 클럽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오토바이 장비를 갖추고 나가는 아들을 향해 어머니는 “얘야 잠깐 엄마하고 이야기 좀 하자” 했는데 아들은 “어머니 내일 얘기해요” 하고 서둘러 집을 나갔다. 그런데 그날 밤 급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아들의 교통사고였고 그 시간은 아들이 집을 나간 지 10분 후의 일이었다. 내일은 있다. 그러나 그날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둘째는 인생에서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육체의 남은 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내 인생의 육체의 때가 일주일 정도 남았다면 그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오늘을 후회 없이 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지혜는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가 다 해야 된다고 덤비는 것처럼 무모한 것은 없다. 오늘을 후회 없이 하늘이 맺어 준 내 삶의 동반자를 사랑하리라. 내게 맡겨주신 가족들과 이웃들을 사랑하리라. 이들이야말로 끝까지 사랑해야 할 내게 맡겨주신 상급이기에….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그래, 그것이 국가다!

“이것이 국가인가?” 세월호 참사 이래 대한민국의 국가성에 대한 물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정부’에는 반대하더라도 ‘국가’에 대해서만큼은 무한대의 믿음을 지켜왔던 이 나라 사람들이 “과연 이 땅에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따지기 시작했고, ‘박근혜-최순실 비리 사건’에 이르러는 이건 도무지 “나라도 아니다”고 최종 진단한다. 그리고 바로 그 나라를 바로잡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국가다움’을 실현하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들고 투표장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질문과 비판에는 국가다움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담겨 있다. 뭇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국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복지를 실현하는 그런 국가 말이다. 국가는 그러려고 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국가의 본질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곰곰이 헤아려 보건대, 나라답지 못하다던 그 모습이야말로 외려 역사에 늘 있어왔던 그 ‘국가’ 아니던가. 그래, 그것이 국가다! 국가는 처음부터 그러했다. 국가는 본디 불의하다. 폭력을 행사하고 지배를 관철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데는 한없이 무능하다. 지배 권력에 대해서는 무한 책임을 지지만 피지배 대중에게는 철저히 무책임하다. 국가는 한 번도 권력을 공공의 손에 넘긴 적이 없다. 권력은 늘 소수 힘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제껏 대한민국이야말로 참으로 국가다운 국가 아니던가! 성서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국가 또한 그러하다. 성서는 곳곳에서 국가를 인간 타락의 산물로 묘사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출애굽’의 해방 경험에서 시작하였고 이스라엘 국가 체제의 출현을 하느님에 대한 배반으로 규정하였으며, 예언자들은 바로 그 국가 체제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였다. 신약성서,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국가는 자신의 권세와 번영만을 탐닉하는 ‘짐승’으로, 하느님의 으뜸가는 원수로 묘사된다. 예수의 눈에 비친 국가의 실상 또한 “집권자들이 제멋대로 주인 노릇을 하고, 고관들이 횡포를 부리는” 사악한 ‘칼’의 체제일 뿐이었다. 성서를 통틀어 국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의 집적물일 뿐 그 어떤 신성도 지니지 않는다. 국가는 창조 질서도, 구원 질서도 아니다. 그저 인간 타락의 산물인 폭력, 그 폭력에 기대어 지배를 관철하는 정치 체계요, 사람이 만든 제도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국가를 신성시하거나 절대시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오늘 많은 사람이 희망하는 그 ‘국가다움’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되레 국가의 ‘마성’(魔性), 국가의 ‘민낯’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정의를 추구하는 국가, 구성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는 우리 시대가 설정한 ‘당위’일 뿐 결코 ‘사실’이 아니기에 국가를 낙관하기보다는 의심하고, 추종하기보다는 견제하는 마음가짐, 맡겨 놓기보다는 스스로 나서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사람이 만든 제도니 사람이 뜯어고치되 사랑·평화·정의와 같은 더 높은 가치, 기독교 투로 이야기하자면 ‘하느님의 뜻’에 기대어 국가의 마성을 통제하고 길들이려는 노력 말이다. 더이상 당하지 않으려면, “이것이 국가인가?” 아우성치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박규환 숭실대 초빙교수·기독교학박사

[삶과 종교] 빨리빨리 문화 속 잃어버린 은근과 끈기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근대화에 성공한 원인을 ‘빨리빨리’ 문화에서 찾는다. 그들의 주장처럼 모든 것을 더 빠르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한국을 세계 최고의 인터넷 강국으로 만들었고 해마다 새로 출시되는 신상품으로 넘쳐나는 첨단국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글로벌 기업들마저 신상품을 출시하면 한국에서 먼저 시장 반응을 시험한다는 이야기마저 들린다. 국제적 평판에 귀가 얇은 한국인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이 자부심을 심어주기도 했지만, 정말 ‘빨리빨리’가 단군 이래로 우리 민족의 DNA에 유전된 것일까? 80년대까지만 해도 교과서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특징은 ‘은근과 끈기’였다. 그러던 우리가 언제부터 ‘빨리빨리’ 민족이 되었을까? 어쩌면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면서 빠르게 변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불안이 우리들의 DNA 속에 ‘빨리빨리’를 새로 장착시켰는지도 모른다. 중국 대륙의 ‘만만디’ 문화를 생각해보면 ‘빨리빨리’ 문화는 지정학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DNA가 모든 분야에서 잘 작동되지 않는 것 같다. 최근의 정치문화를 지켜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는데, 변화된 국민의 인식과 현실을 감조차 잡지 못하는 기성 정치의 구태의연함 속에 ‘빨리빨리’ DNA는 보이지 않는다. 종교계를 되돌아봐도 그렇다. 서구 것을 가져왔든 그렇지 않든 그 방식에 큰 변화는 없다. 한국사회 전반이 근대적인 체제로 변화했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여전히 인맥과 학맥으로 얽혀 있다 보니 빠르게 성과를 내야 살아남는 성과사회에서 오히려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듯 싶다. 그러한 불협화음이 가장 도드라지는 곳이 세대 간의 갈등이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동료 학자의 말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그는 심지어 “인종이 다르다”고 말하는데, 대학원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고작인 나 같은 사람은 그런 말을 들으면 젊은이들이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긴, 사회 전체가 ‘빨리빨리’에 적응하며 민첩하게 현실의 변화에 반응해왔지만,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체질과 달리, 그 새로움을 몸으로 익힌 젊은 세대의 속도를 기성세대가 어찌 따라잡을 수 있을까? 세대 간의 갈등은 영원히 극복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늙은 사람들이 죽어야 끝난다”는 말이 우스게 소리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젊은이 역시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에 밀려 언젠가 그들의 시대에서 후퇴하게 될 것이다. 바우만의 지적처럼 현대사회란 모든 구성원들을 영원히 뒤처지게 만드는 사회이므로.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정말 필요한 것은 날마다 변화하는 속도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니체가 말했듯이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아닐까? 천천히 반응하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고 자칭했던 우리들이 가장 잘 해왔던 것이 아닌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오르고 있다. 권력의 오랜 공백을 메울 기민한 대응도 필요하지만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며 ‘빨리빨리’ 속에서 잃어버렸던 끈기와 느리게 반응하는 현명함을 회복해야겠다. 진짜 변화는 끝까지 끈기있게 추구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명법 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공원사용 지침서

외국여행을 할 때마다 부러운 것 중 하나가 공원이다. 요즘은 대형 쇼핑몰이나 테마파크 등이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했지만 공원은 여전히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가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크고 작은 공원은 잠시 쉬어가거나 사람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 좋아서 여행 중 즐겨찾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이나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에서 여유 있게 거니는 행락객들과 조깅이나 산책, 가벼운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 나온 가족의 모습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의 그림에서 보듯이 근대적 풍경 중 하나이다.그 모습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지만 뉴욕의 센트럴 파크나 뮌헨의 잉글리시 가르텐 같이 도심의 절반을 차지하는 공원이 주는 여유는 없다. 울창한 숲과 맑은 하늘, 그리고 역사적인 기념물과 건축물, 공원 곳곳에 펼쳐지는 크고 작은 공연, 그리고 특별한 날이나 계절에 따라 벌어지는 축제와 행사들은 우리나라 공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여러 도시에 공원들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관 주도의 행사나 상업적 축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자발적인 문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 연구를 위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 일정 중 명상 워크숍에 참가했는데, 이번 워크숍은 명상센터가 아니라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식물원에서 개최되었다. 종교행사지만 공원이나 대학 캠퍼스, 공공시설을 활용한 경우가 흔히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특별하지 않았지만, 모처럼 햇볕도 따뜻하고 꽃들도 활짝 펴서 불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참가하여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행사를 주최한 스님들에게 물어보니 임대한 식물원 부속건물은 일반 시민들에게도 대여하는데, 비영리행사라고 할인을 받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내가 참여한 모임에서 시민들을 위한 공개 행사를 하려고 관할 구청에 공원 이용에 대해 문의했더니 일체 행사를 허가해주지 않으며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잔디밭 사용이 제한될 수 있다는 답신을 받았다. 행사를 허가하지도 금지하지도 않지만 만약 임의로 행사를 진행하다가 민원이 발생하면 바로 철거시킨다는 것이었다. 해당 관청의 입장은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어떤 행사를 치러도 상관하지 않지만 문제가 발생할 경우 관청에서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아무 제약이 없는 듯하지만 행사를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일로 민원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행사를 진행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곤란에 빠지게 된다. 결국 우리나라 공원에서는 소음을 발생하거나 잔디를 훼손하는 행동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산책이나 가벼운 운동 외에 문화행사를 열기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훌륭한 공간이 있어도 그 공간을 편안하게 즐길 수 없다면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하지 않는가. 공원은 시민들의 삶과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녹지도 중요하고 주변 건물에 거주하는 분들의 편리도 중요하지만 공원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문화활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부기관은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무사안일한 태도를 지양하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공원시설을 활용하는 방법과 사용하는 기관들을 위한 지침, 그리고 민원에 대한 대책들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공원이 시민들이 어우러져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명법 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내가 아껴둔 은퇴설교

나는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서 평생을 설교하면서 설교와 함께 살아왔다. 그러한 나에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껴두고 묵상하는 성경이 한곳 있다. 삼상12의 사무엘 선지자의 은퇴설교하는 내용이다.이 본문은 내가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게 될 때 설교하려고 아껴두는 본문이다. 그러다가 지난해 지역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 이 취임식 설교 부탁을 받고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 본문은 나의 은퇴 설교로 유효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사시대 말기에 선지자겸 사사이며 제사장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통치자였다.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쓰임 받아서 이스라엘을 모욕하며 침략해온 암몬의 침략을 물리치고 위대한 승리를 가져온다. 그러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통치보다는 이방 나라들의 왕정을 보면서 사무엘에게 가시적 왕을 요구하는 신정 통치를 거부하는 불신앙의 길에 들어선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하심으로 베냐민 지파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게 된다. 그 자리에서 사무엘은 은퇴를 선언하며 고별설교를 하게 된다. 물론 선지자나 사사의 직은 은퇴를 할 성질은 아니지만,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리더십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때문에 통치자로서의 리더십은 사울에게 이양을 해야만 했다. 그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면 이제 사무엘 자신은 머리가 허옇게 된 노인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장성한 그의 아들들이 서있다. 새로 기름 부어 세워진 왕 사울도 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에게 외친다. “나는 어려서부터 여러분 앞에 출입한 사람입니다. 오늘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기름부음을 받은 새로운 왕 앞에서 증거 하십시오. 내가 뉘 소를 취한 적이 있습니까? 뉘 나귀를 취한 적이 있습니까? 누굴 속인 적이 있습니까? 누구를 압제 했습니까? 누구의 뇌물을 받고 눈이 흐려져서 잘못된 결정을 내린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말씀하십시오. 내가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이 일제히 외친다.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를 속이지도 아니하였고 압제하지도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것도 불의하게 취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왕 앞에서 증거할 수 있습니까?” “네 우리가 하나님과 왕 앞에서 증거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사무엘은 자신의 사역의 평가를 그가 이룬 업적으로 평가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룬 공적으로 평가 받으려 하면 자타가 인정하는 엄청난 치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역을 업적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 자신의 흰머리 앞에 부끄럽지 않은 깨끗한 삶으로 평가받는 모습은 이 땅에 모든 지도자들이 교훈으로 가슴에 담아야 할 삶이 아니겠는가. 나는 신학생 시절부터 이 본문이 맘에 들어서 나의 은퇴 설교 본문으로 일찌감치 정해 놓고 목회를 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이 본문으로 설교해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어느새 불혹을 넘어 이순의 나이를 살고 있다. 머리도 희어졌고 아이들도 장성해서 내 설교를 듣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것뿐이다. 흰머리는 염색으로 감추었고 깨끗한 삶보다는 ‘내가 누구인데’하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 자신을 보고는 한다. 오늘도 모세의 기도를 빌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알게 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바른 생각 연습하기

나의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 디자이너 한 사람이 있다. 불교수행에도 열심이지만 자기 일도 즐겁게 하고 있다. 사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뇌종양을 앓고 있다. 하지만 항상 밝고 낙천적이어서 가까운 지인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그가 중병에 걸린 환자라고 짐작하지 못한다. 며칠 전 그를 흥분시킨 사건이 있었다. 그가 잘 아는 어르신 중 한 분이 인품도 훌륭하고 매너도 좋은데, 정치적 견해를 달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묻지도 않은 나에게 그 분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설명했다. 며칠 후 그는 어르신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왜 만나냐고 물었더니 그분을 위로하러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소외당해서 의기소침해 계실 것이 분명하다면서 만나서 마음을 풀어 드리겠다고 했다. 그 어르신의 정치적 입장이 순수한 애국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추호도 그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나와 의견이 다르면, 더구나 그것이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문제라면, 곧장 화를 내고 상대를 부정하는 데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지난 겨울 이후로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다.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지만 아직 상처받은 마음들이 아물지 못하고 다시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통으로 곪아 터지고 생채기를 내면서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며칠 전 내 유발 상좌인 고등학생이 작곡한 곡의 음원이 발표되었다. 캐나다에서 다니는 학교에서 과제물로 제출한 곡인데, 캐나다 선생님이 듣고 크게 감동해서 녹음을 권했다고 한다. 그 중 세월호 참사를 기린 노래가 있다. 여리고 맑은 영혼의 목소리로 세월호 아이들의 넋과 유가족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음원 수익금 전액을 세월호 유가족에게 전달하겠다고 하니, 단지 금전이 아니라 그 갸륵한 마음이 반목하는 어른들보다 더 낫다. 불교에서 마음을 맑히는 여덟 가지 수행방법 중 하나가 정사(正思), 즉 바른 생각이다. 욕심 내지 말고, 화내지 말고, 남을 해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나 수긍하지만 매일 잊지 않고 행하기 어려운 수행이다. 나를 욕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화를 내고,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해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거의 자연적인 본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피부색이 달라도, 피붙이가 달라도, 사는 곳이 달라도, 서로 속한 문화가 달라도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 남을 감싸 안는 자비의 마음으로 그 모든 차별과 차이를 넘어설 수 있다. 연민의 마음, 맑은 마음은 연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차별과 악의를 극복하는 강한 마음이다. 순수하고 맑은 영혼만 가질 수 있고, 강한 인내심을 가진 자만 보듬어 안을 수 있다. 그리고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평등한 마음이 모든 관용과 자비의 근본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쩌다 한번,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바른 생각을 하기는 쉬어도 하루에 한 번 하기도 어렵다. 날마다 연습하자. 명법 스님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종교] 어느 봄날의 기도

지난 주간 근 10여 년 병마와 씨름하시던 사랑하는 교우 한분을 하나님 품으로 보내 드렸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고인이 그렇게 긴 세월을 거동을 못하시고 자리에 누워서 투병하셨는데 긴 병마와 싸우는 동안에도 늘 즐겨 부르던 찬송가 410장이다. 최근에는 목을 수술하셔서 말씀도 못하고 의사소통은 눈빛으로만 했는데도 이 찬송을 불러 드리면 좋아하시고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하셨다. 긴 고통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소망 중에 찬양 할 수 있는 것, 은혜 받은 믿음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 일게다. 고통 중에서도 찾아와 주는 사람들에게 해 맑은 미소를 보내 주고 마음 불편하지 않게 해 주려고 애쓰던 모습이 선하다. 고인은 언젠가는 병마에서 놓여 건강이 회복되어 이 땅에서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살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남은 날은 계수 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준비하면서 지냈다. 돌이켜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고인의 얼굴은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성도의 죽는 것을 하나님이 귀중히 보시는 도다(시116:15)라고 하신 것을 아닐까? 은혜 받은 성도는 죽음을 알고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삶이다.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성도의 삶은 아름답다. 왜 인생을 아무렇게 사는가? 왜 죄를 무서워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는가? 두 가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인생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또 하나는 죽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을 모른다. 호스피스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친구 목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제 생을 몇 개월 남겨 놓지 않은 말기환자들이 입원해 있으면서도 유한한 인생을 모르고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에 호스를 끼운 채로 장부책을 들여다보면서 돈을 세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병동에 근무하는 얼굴 예쁜 간호사에게 마음을 두고 추군 거리는 환자도 있다고 한다. 양로원 사역을 하는 친구목사의 말을 빌리면 그곳에 계신 노인들도 어린아이처럼 싸움을 한다고 한다. 믿음의 은혜를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하며 서로 미움과 갈등을 빚는다는 것이다. 믿음의 은혜는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구원의 은혜는 마치 숙제를 다 해놓고 나가서 노는 것 같아서 기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다음날 학교 가는 길이 발걸음이 가볍다. 봄아, 봄아 오너라/ 봄이 되면 나는, 나는 새로 사학년/ 유리창을 호 호 /썼다가는 지우고 또 써보는 글자들/ 봄. 꽃. 나비. 내 어린 시절 초등학교 삼학년 이 학기 국어 교과서 끝 부분에 나왔던 글이다. 이제 해도 바뀌고 계절도 바뀌어 새 봄이 왔다. 따듯한 기운이 대지위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계절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길이가 아니라 깊이이다. 봄 햇살이 곱게 비취는 창가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새 생명의 은총이 임하시길 기도드린다.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더는 부끄럽지 않으려고

지난 3월1일 열린 ‘3·1만세운동 구국기도회’의 설교 가운데 한 대목이다. “흑암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될지어다. 악성 유언비어 등 흑암의 권세는 떠나갈지어다.주님께서 모든 거짓과 불의, 공산주의를 이 땅에서 떠나가게 할지어다.” 1월 22일,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전한 설교의 일부다. “우리나라가 이 난국과 위기를 극복하려면 거짓과 불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애국하는 국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서서 외치고 있습니다.이 일에 그리스도인이 앞서야 합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는 “다윗은 하나님께 ‘나의 원통함을 굽어살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왕으로 다시 세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다시 복귀시켜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설교했다.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계를 되돌려 보자. 1973년 5월1일, ‘제6회 대통령 조찬 기도회’에서 한국대학생선교회 김준곤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겠습니다.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우리 코앞에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이미 우리의 문제가 아닐 수 없는 세계의 망령인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됩니다.” 5·16 이듬해인 1962년 12월25일, 한경직 목사의 성탄절 설교다. “학생 혁명 이후에 온 사회가 어지러워졌습니다. 곳곳에 데모와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사회가 싸움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군사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거슬러 일제강점기로 가본다. 1941년 장로교 목사 김종대의 글이다. “이 시국 하에 종교도 국가 운동의 일익으로 활동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의 국가관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는 국법에 순종하고 통치자를 신성시하지 않았는가? 그런고로 기독교는 국가사업에 가장 중요 역할을 하여야겠다. 기독교도는 국가(일본)의 충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감리교의 신흥우가 1939년에 쓴 논설이다. “예수도 우선 첫째로 ‘그 나라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우리나라는 대일본제국이다.우리 조선 기독교인도 우선 첫째로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금일의 우리는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우선 첫째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제국의 국책에 충실히 순응, 협력, 돌진하라. 이것이 조선 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이다.” 어떤 종교이든 국가권력과 긴장이나 협력, 또는 분리 관계를 맺기 마련이며, 대개는 대립이나 충돌을 피하고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띤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협력과 유착이 지나치다 보면 신앙의 정체성을 잃기 십상이다. 본디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가치나 제도, 권력이나 권위 따위를 절대시 하거나 신성시하지 않는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기독교 신앙은 외려 ‘모든 것 위에, 모든 것밖에 계신’ 하느님을 통하여 현존 질서를 비판·변혁한다. 하여 오늘 기독교는 어느 자리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묻고 또 묻는다. 더는 부끄럽지 않으려고. 박규환 숭실대 외래교수·기독교학 박사

[삶과종교] 아직은 먼 종교평화의 길

지난달 이웃 종교인들과 함께 “불교와 기독교,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라는 주제로 끝장 토론을 가졌다. 오후 2시에 시작된 토론은 저녁 9시 정해진 시간이 지나서 11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못다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그날 정오에 이틀간의 끝장 토론을 마무리했지만 참석자들 모두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크게 아쉬움을 느끼며 여름에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만남은 즐거웠고 대화는 진지했다. 서로에게 배울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진실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최근 들어 학자들과 밤을 새며 치열하게 토론한 기억이 드물다. 서로 갈등을 빚고 있는 두 종교, 불교와 기독교 전공학자들의 대화라면 귀를 의심할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진실로 깊은 학문적 사색과 종교인으로서의 고민을 함께한 자리였다. 다종교사회인 한국에서도 종교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모임들이 있지만 이처럼 진지하게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은 레페스 심포지엄이 시작된 계기의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2016년 1월 한 기독교인에 의해 김천 개운사 불상이 모두 파손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한 기독교인 한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과의 글을 올렸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목사들을 양성하는 교육자로서 그는 사죄에 진정성을 더하기 위해 개운사 불상복원을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성금은 개운사에 전달되었으나 종교평화를 위한 활동에 써달라는 개운사 측의 간곡한 고사로 레페스 포럼에 기부되었다. 페이스북에서 시작된 작은 모금활동으로 과격한 기독교인에 의한 훼불사건으로 기록되었을 이 사건은 새로운 종교평화운동의 계기가 된 것이다. 개운사 주지인 진원스님이 다른 급한 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뒤늦게 내가 그를 대신하여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 모임의 진정성이 불교계 안의 문제로 고심하던 나를 종교평화 모임으로 이끌어낸 진짜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종교평화는 아직 요원한 것 같다. 그 운동을 시작한 서울기독교대학의 손원영 교수가 지난주 그의 대학에서 파면을 당했다. 사유는 ‘성실의무 위반’. 학교 측의 논리는 개운사 불당복원모금이 우상숭배 행위고 따라서 학교의 설립취지에 어긋난 행동이라는 것이다. 손원영 교수야말로 수많은 훼불사건에도 침묵을 지켰던 목회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기독교인이 아닌가. 서로 다른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사회에서 법질서를 존중하는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닌가. 나는 비록 자신이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사죄하는 그의 모습에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는 그의 자세에서, 심포지엄 당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했던 그의 태도에서 동료로서의 연대의식과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상을 주어도 모자랄 판에 그것이 파면의 사유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덕분에 기독교인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불식되고 종교평화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정녕 종교평화는 서울기독교대학의 총장과 이사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는 말인가. 오해와 차이를 넘어서는 힘은 서로에 대한 신뢰이다. 종교인들이 그들이 속한 종교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 바깥에서도 신뢰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이제 나는 안다. 우리에게도 훌륭한 기독교인이 있음을. 그러므로 이 땅에 종교평화가 실현되리라는 것을. 손원영 교수의 용기 있는 행동을 지지하며 대학 측의 부당한 처분이 하루빨리 철회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명법 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요즘 많이 듣는 단어 가운데 ‘열 받는다’는 말이다. 어떤 이는 한 수 더 떠서 ‘뚜껑이 열린다’고 표현을 한다. 힘든 세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결코 만만한 세상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세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열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비밀과 능력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 비밀을 마28:19-20절에서 찾고 싶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약속을 붙잡을 수 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처럼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머리는 차갑게 그러나 가슴은 뜨겁게’ 사는 것이다. 우리 한번 외쳐 보자.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첫째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말씀인가?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열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링컨은 남북전쟁 시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 속에서 불안해진 한 참모가 “과연 하나님이 우리 편이실까요?”라고 묻는 질문에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 아닌가는 걱정할 것 없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편이냐 하는 것일세”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를 비방하는 많은 정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그의 얼굴을 가지고 비하하는 어느 상원의원은 ‘고릴라 같이 생겼다’ ‘두 얼굴을 가진 못 믿을 사람’이라고 비하하기도 했다고 한다.그럴 때 그는 그의 특이의 여유를 가지고 “내가 두 얼굴을 가졌으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왜 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라고 해서 상대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상원은 “내가 당신의 아버지를 잘 아는데 당신 아버지는 구두직공이었소. 이 구두도 당신 아버지가 지은 것이요”라고 말하면서 구두를 벗어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도 그는 “네 그렇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구두 직공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아버지처럼 구두를 잘 만들지는 못하지만 어깨너머로 조금 배운 실력이 있습니다. 혹 의원님들의 구두가 고장 났거든 제가 손을 봐 드리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열받지 여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둘째는 사명이다.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머리는 차지만 가슴은 뜨겁게 살아갈 수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사명에서 나온다. 사람은 사명으로 산다. 사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사명은 용기를 준다. 사명을 받은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 한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 했다.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다윗의 사명을 받으니 그의 손에 있는 물매 돌 다섯은 적장 골리앗을 물리치기에 충분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이 사신 생애는 언제나 뜨거운 가슴이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다. 뜨거운 가슴으로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그런 교회’는 없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은 기독교회의 처음 모습을 담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필요한 대로 나누어 쓰는 공동체를 꾸렸고, 교제와 기도에 충실하며 이웃 사람들로부터도 호감을 얻었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이 전하는 아름다운 초대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6장에 이르러 이내 불평과 갈등, 다툼으로 바뀐다.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는 본토박이 유대인과 해외파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는데, 과부를 원조하는 사업에서 본토박이 과부를 우대하고 해외파 과부를 홀대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해외파 교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교회를 이끌던 사도(使徒)들이 모두 본토박이인 만큼 이 사건은 사도들의 지도력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는 본토박이 교인과 해외파 교인이 서로 다투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앞서 사도행전 2장이 전하고 있는 아름다운 초대 교회, 이상적인 교회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를 지척에서 모셨던 사도들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도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가 분쟁에 휩싸였다는 사실은, 자칫 이상화하기 쉬운 초대 교회가 실상에서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불완전한 모임이었음을 알려 준다. 초대 교회라고 해서 결함도 과오도 없고, 따라서 참회도 회개도 필요 없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다는 말이다.예루살렘 교회 또한 자기를 두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았다. 문제 있는 현실을 두고 이러저런 변명으로 대충 얼버무리며 감추려 들지 않았고, 좋은 교회라는 이미지가 깨지더라도 들추어내고 고쳐갔다. 공동체 회의를 열어 토론을 벌였으며, 사도들은 책임을 통감하고 행정 일선에서 물러났고, 공동체는 원조 사업을 맡을 새로운 일꾼을 뽑는다. 아무 오류나 죄악도 없는 완벽한 교회, ‘그런’ 교회는 없었다. 초대 교회 역시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 있는 교회일진대, 그런데도 그 초대 교회를 바라보는 것은 그곳에는 회개와 쇄신의 ‘교회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어떤 질서도 어떤 의견도 절대시하지 않되, 어떤 사람, 어떤 구조, 어떤 의견에도 열려 있는 겸손함, 하느님께서 반드시 일치를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는 까닭이다. 회개보다는 변명을, 쇄신보다는 안주를 좋아하는 우리네 성품을 볼진대 비틀거리면서도 회개하고 힘겹지만 쇄신하며 거룩함을 추구했던 그들의 신앙과 삶이야말로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어디 교회뿐일까. ‘그런’ 종교, ‘그런’ 정치 또한 없다. 그것이 인간 삶의 현실일진데 그 ‘없음’을 탓할 까닭이야 있을까. 얼룩을 드러내고 책임지고 쇄신하려는 자세가 없으니 참담할 뿐이지. 개신교회, 개혁교회를 자임했던 교회들이 ‘교회’라고 이름 붙이기 조차 민망할 정도로 타락해버린 현실에 대하여 내로라하는 종교인 가운데 누구 하나 책임지고 물러나는 사람이 없고, 민의와 헌정을 짓밟아 놓고서도 외려 똘똘 뭉쳐 되술래잡기에 바쁜 부라퀴들만 넘치니 말이다. 문제없다는 자만도 문제지만, 문제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문제를 들추어내고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자폐의 늪에 빠진 종교요 정치일 테니, 아무쪼록 이 자만과 자폐를 경계하면서 쉼 없이 회개하고 쇄신해야겠다. 나부터, 우리부터. 박규환 숭실대학교 외래교수·기독교학 박사

[삶과 종교] 지구촌 증오 키울 ‘미국 우선주의’

지난달 내가 잘 아는 젊은 여성이 국제결혼을 했다. 수년 전 해외 연수를 갔을 때 만난 터키 청년과 오랜 연애 끝에 이루어진 결혼이었는데, 요즘 흔해진 국제결혼이지만 부모의 반대와 종교의 차이, 그리고 장거리 연애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한 결혼이었기에 그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것이었다. 그들이 만난 장소가 내가 추천한 인터내셔널 센터였기 때문에 나 역시 그들의 결혼과 연관된 한 사람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취임과 함께 멕시코와 접한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첫 행정명령을 발표했는데, 선거공약이었지만 엉뚱하고 실현 가능성이 작아 보였기 때문에 설마 했던 일을 취임 즉시 현실화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며칠 뒤 아랍 7개국 국민을 입국 금지하는 반(反)이민 행정명령으로 세계가 다시 발칵 뒤집혔다. 인터넷으로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바로 갓 결혼한 그 신혼부부가 떠올랐다. 내년 방학 때 터키에 돌아가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치르겠다고 했는데 그들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런 다음, 미국으로 무사히 귀국을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온갖 난관을 이기고 결혼한 그들이기에 더 걱정이 되었다. 국제학회에서 만나 친구가 된 싱가포르 출신 비구니스님도 놀라고 당황하여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자신이 비록 미국대학의 교수 신분이지만 만약 출국했다면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미국 입국을 거부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글을 보면서 그가 느낀 위기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내일 당장 가족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일하던 일터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국제 정치에서 자국 중심주의는 동맹과 연대의 구호 아래서도 엄연하게 작용했던 원리였으므로 ‘미국 우선주의’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실행하고 있는 ‘미국 우선주의’는 세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19세기 이래 세계는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한 지역의 문제가 다른 지역의 문제로 이전되고 있다. 식량문제가 그렇고 기후변화가 그렇다. 다국적기업과 국제 무역 역시 단일한 것으로서의 세계라는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와 달리 한 지역의 문제일지라도 지역 정치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아졌다. 불교가 말하는 연기적 관계가 이처럼 뚜렷해진 세상에서 한 국가의, 그것도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국가의 자국 중심주의는 결국 그들의 이익마저 지키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혐오와 증오가 이제 아무 제약 없이 노골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난 테러와 무차별 총기 난사는 개인적 차원에서든 국가적 차원에서든 억압과 증오의 결과들이지만, 국지적으로,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던 일들이 만약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문화와 인종, 종교의 차이가 차별과 억압, 증오를 만든다면 파국은 불가피하지 않은가. 우리 안에도 차별과 억압, 증오가 해소되지 못하고 더욱 이기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짙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과 억압, 증오를 사랑과 자비로 바꾸는 일은 이 시대의 종교에 맡긴 사명이지만 한국종교 역시 종교 내부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차별과 억압, 증오를 키우는 데 더 기여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볼 일이다. 명법 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종교] 어머니 품 같은 교회

나는 교육전도사 시절 강원도에서 서울로 통학하면서 신학교를 다녔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바로 서둘러 아침 첫차를 타고 상봉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와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길고도 먼 훈련 기간이었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을 자동차 안에서 보내야 했기에 그 시간을 공부시간으로 이용해야만 했다. 하루는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으며 묵상 중에 갑자기 뒷자리에서 콜라병 따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내 뒷머리에다가 쏟아 붓는 뜨끈한 것이 있었다. 확인할 겨를도 없이 밀려오는 냄새와 함께 온통 버스 안에는 소동이 벌어졌다. 내 뒤에 탄 시골처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 가는 길이었는데 차멀미가 나서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내 머리에다가 토악질해 놓은 것이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처녀는 울기만 하고 그 옆자리에 어머니는 딸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얼굴을 닦아주느라고 열심인 것 아닌가? 그 당시는 시외버스에 안내양이 있을 때라 달려온 안내양이 보기에 딱했던지 수건을 가져다가 얼굴을 닦아주는데 나중에 보지 유리창 닦는 걸레였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주님은 내 마음에 은혜를 주셨으니 참으로 찬양받으실 좋으신 분이시다. 그 처녀에게 그때보다 더 황당하고 난처한 상황이 있었을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곁에서 그녀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큰 위로자요, 산성이며, 요새이다. 그녀는 어머니를 믿고 울기만 했는데 나머지는 어머니가 모두 알아서 수습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눈물이 핑 돌면서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골도 보통 시골이 아니라 자동차는 물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산간벽지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게다. 6·25때에도 우리 고향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인민군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전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었다. 읍내로 시집간 이웃집 딸네가 피난 와 있다가 사위가 집이 궁금해서 잠깐 다니러 가다가 인민군한테 붙들려 그 마을로 불러 드리게 되어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지금처럼 한여름에 먹을 만한 과일이 흔하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돼도 개울에 가서 멱 감고 놀다 보면 배는 출출한데 먹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지금은 참외, 수박도 많이 있고 복숭아 자두도 흔한데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동네 전체에 자두나무 두어 그루 있었다. 나는 6남매 중 다섯 번째이다. 우리 형제들은 여름이면 아직 익지도 않은 아니 자라지도 않은, 아니 겨우 꽃잎이 떨어진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자두를 따 먹곤 했다. 그런 여름밤이면 여지없이 한밤중이면 토사 광란이 나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배 아파 죽는다”고 데굴데굴 구르면 어머니는 벌써 알아차리고 “너 낮에 무얼 먹었느냐?”라고 하신다. 어머니는 강제로 손가락을 입에 넣으셔서 토하게 하셨다. “토해라. 토해야 산다.” “억”하고 엄마 치마폭에 토해놓으면 엄마는 등을 두드리면서 “이젠 좀 괜찮으냐?” 시며 등을 두드려 주시곤 하셨다. 치마폭에 토해 놓은 것 보시고 더럽다고 야단치시는 것이 아니라 등을 다독이면서 토하게 하시고 토종꿀 한 술 물에 타서 먹여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는 교회를 어머니라고 한 바울과 종교개혁자 칼빈의 표현을 좋아한다. 그렇다. 교회는 어머니의 품이다. 답답하고 힘든 이야기를 어디 가서 토해 놓을 것인가? 누구에게 토해 놓을 것인가? 어머니는 더럽고 냄새 나는 것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도 상처 나고 아픈 것도 치우시고 가리시고 싸매시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교회는 어머니 품이다. 어머니 앞에 모두 토설하자. 억울해도 답답해도 어머니 앞에 토설하자. 그리고 어머니가 주시는 순수한 말씀의 꿀 한잔으로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자.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종교] 빛과 소금? 소금과 빛!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부패를 막고, 맛을 내며, 주변 세계를 정화하여 뭇 생명에게 살맛을 더해주는 삶, 모름지기 예수 제자라면 그렇게들 살 테지. 세상을 이롭게 하며 말이다. 그것이 제자다움이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등불을 켜고 어둠을 가시는 삶, 무릇 종교라면 그래야겠지. 세상을 환히 밝히는 종교 말이다. 그것이 또한 교회다움이리라.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삶!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가. 그런데 왜 굳이 ‘소금’과 ‘빛’일까? 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소금과 빛’일까? 정작 많은 사람들이 ‘빛과 소금’으로 기억하고, 기독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투로 새기는 까닭은 무얼까? 그래서 묻는다. 나는 빛이고 싶은가, 소금이고 싶은가? 하나를 꼽는다면 어느 쪽인가? 질문해놓고 보니 빛이 주는 느낌과 소금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리고 경험에 따르자면, 많은 기독인들이 소금보다는 빛을 선호한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기보다 세상의 빛이고자 한다. 빛은 자신을 드러내며 어둠을 물리친다. 확실히 빛이 주는 이미지는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성과 전투성, 심지어 배타성마저 띤다. 빛은 말 그대로 빛이 난다. 반면에 소금은 드러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오롯이 내놓는다. 자취를 남기려 들지 않고 외려 자신을 없이함으로써 맛을 더한다. 그래서 소금의 이미지에서는 수용과 포용, 희생이 묻어난다. 녹아 없어지면서 남을 돕는 것이 소금 아니던가. 이런 탓인지 교회는 대개 세상의 소금이기보다는 빛이 되고자 하였고, 빛이라 자만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소금을 뺀 빛의 이미지가 자칫 종교를 자폐와 독선에 사로잡힌 무서운 권력집단으로 내몰 수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진대, 빛을 자임하고 나선 교회는 이교(異敎)라는 어둠을 몰아낸다는 핑계로 순교자에서 박해자로 돌변하였고, 십자가의 희생정신을 십자군의 정복정신으로 바꿔치고 말았다. 스스로 빛이라고 자만하는 종교, 소금이기를 마다하고 오로지 빛이 되려던 교회가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그래서일까. 예수는 ‘소금’과 ‘빛’을 이야기한다. 빛의 은유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빛의 이미지, 그 한쪽만을 보고서 독선과 배타의 자폐집단으로 떨어질 것을 헤아려 소금을 말씀하셨을 테다. 스스로 빛이고자 하는 오만, 맘대로 빛과 어둠을 가르는 독선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소금과 빛의 다름이 자아내는 긴장을 통해 아무런 편벽됨 없이 곧추서도록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소금과 빛’을 이야기했나 보다. 종교가 종교답고,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먼저 소금이어야 한다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없이함으로써 세상을 밝히고 살맛을 더하자고 말이다. 어디 종교뿐일까. 정치가 그러하고 일상이 또한 그러할 테다. 빛이 되겠다는, 내가 빛이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네들 빛에 홀려 되레 어둠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것이 우리네 역사 아니던가. 그러니 함부로 추앙하지도, 어벙하게 속지도 말지니, 세상을 이로이 하는 소금으로 살았는지 그 내력부터 곰곰이 톺아볼 일이다. 저마다 소금으로 살고, 죽어, 어둔 곳에도 살맛이 생겨난다면 우리네 삶은 얼마나 환하고 포근할까.박규환 숭실대 기독교역사학 박사

[삶과 종교] 독이 될 수 있는 작은 거짓말

지난해 연말의 일이다. 토요일 오전이었다. 택배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마침 그날은 외출할 일이 없어 오후쯤이면 택배를 전달받게 되리라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택배기사님은 오지 않았다. 늦은 저녁까지 초인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다음 월요일이 되자 문자메시지에 남아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택배기사님이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문화원’이라는 이름의 기관들은 대부분 토요일 휴무이기 때문에 사무실이 닫혀 있는 경우가 많아 아예 방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사님은 토요일 오후 내내 기다렸다는 내 이야기에도 아랑곳없이 당일 오후 배송하겠다며 말씀을 남기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세상이 편리해져서 앉은 자리에서 원하는 물건을 받게 되었지만 편리한 만큼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택배기사는 이직률이 가장 높은 직종 중 하나다. 성수기면 물량이 많아 밤늦게까지 배송하느라 끼니를 거르고, 무거운 짐을 나르다가 건강을 상하는 등 열악한 환경 때문이다. 그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택배기사님의 설명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배송이 하루 이틀 늦어진다고 문제가 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방문할 계획이 없었다면 거짓말이 될 메시지를 왜 보낸 걸까? 남에게 큰 피해가 되지 않으면 거짓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사회가 특히 그렇다. 잠깐 미국에 있었을 때 경험을 돌아보면, 미국사회는 작은 거짓에도 매우 엄격하다. 미국사회를 선진사회라고 하는 이유는 사회 시스템을 신뢰할만한 것으로 만드는 그런 윤리의식 때문이다. 요즘 뉴스가 TV 드라마보다 재미있다는 말이 있지만 청문회에 출두하는 몇몇 사람들의 비상식과 몰염치에 충격을 넘어 좌절과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고단하게 아등거리며 사는 삶이 농락당하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무관함을 주장하면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태도는 가라앉는 배 속의 승객들을 내버려 둔 채 배를 버리고 떠난 세월호 선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무책임과 도덕적 무감각이 그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우리에게도 조금쯤 책임이 없을까? 어쩌면 남에게 큰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작은 거짓말쯤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무감함이 큰 거짓을 자라게 한 원인이 된 것이 아닐까? 작은 일이지만 신뢰가 모여 사회가 이루어진다. 비단 택배기사님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택배이야기로 돌아가면 물건이 늦게 도착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택배기사님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것이 문제이다. 악의의 거짓말이든 선의의 거짓말이든, 너무 느슨해진 윤리의식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남에게 큰 피해가 되지 않더라도 거짓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선의의 거짓이라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열악한 환경에서 오늘도 성실하게 일하는 모든 택배기사님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 자신의 작은 거짓들을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명법 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모두를 사랑하자

사랑하는 것이 ‘도리’라는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사랑의 ‘의무’라는 것이 있으며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의무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을 받아들인다. 하루하루의 현실생활은 사랑이 아니라 법률과 완력, 처벌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리하여 사랑의 가능성은 처벌과 앙갚음의 윤리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며, 사랑은 하나의 이상화된 추상적 관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서 사랑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사랑의 부재 현상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 그들을 욕하고, 헐뜯는다. 우리는 때로 말만으로 사랑을 이야기할 뿐 미움으로 생활하며, 사랑의 이름으로 미움을 행한다. 그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갈등, 증오, 분열, 불안, 혼란, 폭력 등으로 얼룩진 시대에 ‘삼라만상은 서로를 사랑한다’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는 사랑을 더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랑이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힘차게 선언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만이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의 덕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 존재에 채워 놓으신 넘쳐흐르는 무한한 생명에 자유롭게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주도록 창조된 세상 만물이 지켜야 할 기본법칙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창조 운동의 핵심이요, 중심이 바로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겠다는 가슴 속 깊은 곳의 사랑이 자신을 향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가슴 속 깊은 곳 사랑이 자신을 향한 것이 되어버리면 스스로의 내부에 감금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또한 자신의 본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에서 분리되어 나와 헛도는 것이고, 자신의 행동은 완전한 사랑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랑은 자신의 마음을 억압적 감정으로 다스리게 된다. 이러한 사랑에는 쓰디씀, 불안, 갈등, 증오, 혼란, 억압, 폭력 그리고 심지어 죽음조차 깃들어 있다. 왜냐하면 완전히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내주지 못하는 사랑에는 모두 죽음의 맛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삶이 사랑이다’는 지극히 자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면 사랑은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4)고 하셨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고 하였다. 따라서 2017년 새해 사랑으로 살았으면 한다. 그리고 서로 평화 속에 머무르는 축복된 삶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박현배 천주교 성 라자로마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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