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새해를 맞아, 새 시대를 갈망하며

신약성서의 첫 장, 그러니까 마태복음 1장은 예수의 족보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는 구절을 첫머리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이런 투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1800년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낳고…낳고…낳는” 끝없는 삶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사건이 얽혀 마침내 ‘새 시대’ 곧 ‘예수 시대’가 열린다.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숱한 사람들이 종횡으로 얽혀 서로 관계를 맺고, 앞선 사람들의 삶에 잇대어 새로운 삶을 더해 온 기나긴 역사의 결실이었다. 예수 시대를 알리는 족보에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땅을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때로는 돕고 때로는 다투면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의미를 지향하며 소망을 키워 온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조(始祖) 아브라함이 안정된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나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사건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시작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족보는 과거와 단절하고 관계를 혁신하는 것, 그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밝혀 준다. 어디 그뿐인가. 족보에는 아브라함 가문과 다윗 왕조의 남자들이 제 구실을 못하거나 불의를 저질렀을 때, 새롭게 그 가문과 민족을 일으킨 사람들, 통상의 경우라면 결코 족보에 오를 수 없는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나온다. 그 가문과 민족이 무너져 갈 때, 불가사의하게도 새로운 피가 수혈됨으로써 예수 시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압권은 족보의 마지막 대목일 테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마태복음 1장 16절).” 요셉이 마리아로부터 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라, 볼품없는 갈릴리의 여인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단다. 그마저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아무런 육체관계도 없이, ‘하느님의 성령(聖靈)’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아니잖은가. 말 그대로 단절이고 절연이다! 하여 예수 시대는 더이상 과거에, 옛 언약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 시대는 역사 안으로 직접 들어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온갖 굴레와 인습들, 바로 그 낡은 과거를 송두리째 끊어내시는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성서는 말한다.그러므로 단절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불의한 질서를 뒤집고 하늘의 뜻(天命)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행동이며, 옛 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한 길이자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변화의 시작이고 성장과 성취의 과정이다. 2017년 새해를 맞아, 낡은 어제와 ‘단절’함으로써 협잡과 불의가 없는 진실하고 정의로운 역사를 맞이하기를, 새 시대가 열리기를 바라고 빈다. 박규환 숭실대 외래교수·기독교학 박사

[삶과 종교] 마음이 좋은 사람

우리 교회 교우 가운데 ‘한우정통정육점’이란 상호로 정육점 가게를 운영하는 성도님이 계신다. 불신자 때 전도해서 온 가족이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고 교회봉사도 많이 하는 충성스러운 집사님이시다. 원래는 설비가게를 하셨는데 교회출석을 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육점으로 업종을 바꾸어서 운영하게 되었다. 성격이 온순하고 매사에 신중하고 진실하신 분이다.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아 가게를 운영하면서 항상 기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경영하려고 애를 쓴다. 그중 하나가 ‘한우쇠고기’만 판매한다는 원칙이다. 돼지고기는 ‘암퇘지’, 쇠고기는 ‘한우’만 고집하는 분인데 꾸준하게 그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사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 소문이 좋아서 단골 고객들도 꽤 많은 편이다. 하루는 지나는 길에 가게에 들러서 이야기하는 중에 벽에 붙어 있는 소와 돼지의 부위별 이름이 다른 것을 보았다. 한우면 무조건 다 좋은 고기인 줄 알았는데, 암퇘지면 다 좋은 것으로 알았는데 각 부위 부위가 고기 이름이 다르고 맛도 다르고 용도도 다르고 값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는 10가지 부위로 나누는데 그중 제일 비싼 부위가 ‘제비추리’ ‘안창살’이라고 한다. 돼지는 6가지 부위로 나누는데 그중 제일 비싼 부위는 ‘갈매기살’이라고 한다. 쇠고기 ‘안창살’의 경우는 500kg 소 한 마리에 1~2㎏정도 나온다는 참으로 귀한 부위이다. 돼지고기 갈매기살은 70kg 돼지 한 마리에 600g 정도 나온다니 얼마나 귀한 고기인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쇠고기도 등급이 있고 값이 다르고 돼지고기도 부위마다 맛이 다르고 쓰이는 용도가 있는데 사람에게는 어느 부위가 가장 귀할까? 우리 몸 어디인들 귀하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굳이 말한다면 아마도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 사람은 누구일까? 마음이 좋아야 좋은 사람이다. 누가 큰 사람인가? 마음이 커야 큰 사람이다. 외모가 반듯해도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 마음이 삐딱한 사람은 바른 사람이 아니다. 마음이 반듯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마음이 진실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성경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했다고 말씀한다. 다윗의 그 무엇이 하나님 마음에 그렇게 꼭 드셨을까? 하나님은 다윗을 기름 부으시던 날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사람의 신체와 용모를 보지 말라.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마음을 귀하게 여기신다.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누가 좋은 목자인가 마음이 좋아야 좋은 목자일께다. 은혜를 받으면 무엇이 좋아지는가?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마음에 맞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 즐겁고 마음에 꼭 맞는 사람, 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도 찾으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찾아 사역을 맡기기를 원하신다. 주여! 주의 마음에 합한 자 되게 하소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한 해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분주했지만 보람 있는 한 해였다. 상반기에는 불교계간지에 불교문헌 번역에 관한 특집을 맡아 진행했고 6월에 개최한 달라이라마 방한추진회 주최 국제포럼을 기획하여 총괄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여름 이후로는 지난 몇 년간 연구했던 과제들을 몇 편의 논문으로 정리해서 발표하면서 문화원을 개원했고, 지난 12월 초 은유스토리텔링에 관한 이론과 사례를 정리한 은유와 마음을 발간했다. 책을 마무리할 즈음에 세웠던 계획들은 한 달이 지난 지금, 늘 그렇듯이 계획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12월에는 한가하게 미뤄둔 글도 쓰고 독서도 하면서 신년설계를 하려고 했건만 그 시간들은 누적된 피로와 감기, 그리고 연속되는 위원회 회의로 채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고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오듯이 연구도 하나의 과제를 마무리하면 거기서 발견된 새로운 과제를 가지고 새로운 연구가 시작된다. 출판과 교육은 지식의 보급과 확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내 경우에는 상담과 법회도 중요한 통로가 된다. 내 인식의 확장이 곧바로 내가 만나는 평범한 불자들의 고민 및 현실적인 고통과 연결되어 전환의 계기가 될 때 기쁨은 배가된다. 그런데 개인의 삶에서 보면 반복되는 실수와 잘못이 많다. 늘 하던 패턴대로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거나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최근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늘 하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깨닫고 크게 뉘우친 바가 있다. 불교에서는 번뇌를 없애는 것보다 오랜 세월 묵은 습관을 바꾸는 일이 더 어렵다고 한다. 개인만 아니라 한 사회, 나아가 한 문명도 반복되는 습관이 있다. 나쁜 습관은 결국 그 사회, 그 문명이 파멸하는 원인이 된다. 좋은 습관조차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현실에 맞지 않으면 문제가 되고, 그 역시 파멸의 원인이 된다. 하나의 고비를 통하여 문제의 원인에 대한 이해와 그 해결 방식의 터득, 그리고 인식의 확장이 일어나야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는 민족에게는 현상의 유지는 고사하고 퇴보와 굴종만 있을 뿐이다. 동시에 반복되는 실수와 문제들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도 필요하다. 원천적인 혁신을 위해 환골탈태하는 노력이 우리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필요한 때이다. 명법 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2016년, 어떻게 살았는가?

2016년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며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은 모두 시작이 있으며, 언젠가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생명도 시작이 있었다면 죽음의 시간이 있다. 곱고, 예쁘며, 튼튼하고, 아름다우며, 능력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몸, 언젠가는 흙속에 묻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누가 먼저 가느냐, 나중에 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죽어야 함에는 똑같으며, 그 어떤 사람도 이 죽음의 길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삶에서 여러 번 속아도 보고, 때로는 속이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속지도 않고, 속일 수도 없는 죽음은 이 세상에 쌓아 올린 부귀, 명예, 재물 그리고 소중히 여겼던 것들과 자녀, 아내, 남편, 부모, 형제, 친구 등을 남겨 둔 채 떠나야 한다. 설령 주위에 호위병을 두고 우리 자신을 지킨다 하더라도 혹은 어딘가에 몰래 몸을 숨기고 있다 해도 인생의 마지막에는 예외 없이 찾아와서 끌어간다. 피하려 해도 도저히 피할 수 없고, 아무리 사정을 해보며, 마음을 써 봐도 통하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 이렇게 죽음은 우리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가장 가깝게 있으며, 가깝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라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해, 앞으로 20년, 30년, 50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보장은 없다. 내일 잠에서 깨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시간은 계속 지나가는 것이지 누구에게도 잡아 매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끝 날을 위해 사람들과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총결산의 시간을 맞이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사람의 생애는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 미완성 작품이다. 그래서 마무리 손질이 필요하다. 삶의 작품이 조각 작품과 다른 점은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만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60, 70, 80세 또는 그 이상이 되어야 마무리 손질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마무리 손질은 매일, 언제나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진지하게 맞이해야 함이 바로 구원이고, 자신의 완성이며, 삶 전체를 마무리하는 정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의로운 삶, 정직한 삶, 진실한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노력해야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도 있다. 이름을 남기는 삶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시간의 가치를 살려 유용하게 사용한다면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죽음의 시간에 영원이라는 문 앞에 위로가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불안과 허탈감에 빠질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을 향해가는 삶의 법칙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활기찬 생을 꾸리며, 성숙해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과 더불어 살아오면서 보살펴주고, 이끌어 주었으며, 도움을 주셨던 모든 이들을 되새기고, 감사와 축복을 기원하며 삶을 잘 마무리 하였으면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고 하였다. 박현배 천주교 성 라자로마을 원장

[삶과 종교] 갇힌 성전에서 열린 거리로

눈에 보이는 것 너머 의미 세계를 추구하고, 내가 처한 삶의 바탕 너머 보편 세계를 바라보도록 이끄는 것이 본디 종교 일진대, 종교야말로 품도 넓고 부드러우며 자유로워야겠지만, 정작 종교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고정된 격식이나 예법에 얽매여 막상 진리를 놓치기가 십상이고, 좁아터진 교리로 세상을 재단하거나 딱딱한 계율로 사람을 묶기 또한 예사다. 위아래를 나누는 데도 익숙하고 물질에도 약삭빠르다. 게다가 정치권력과 짝하여 위세 부리기까지 좋아하니, 이쯤 되면 가히 권력종교요 종교권력이라고 할 만하다. 그때 그네들도 그랬다. 성전과 율법으로 뭇사람을 꽁꽁 묶어두고 로마 제국의 식민 질서를 떠받치는 데만 골몰하던 1세기의 ‘예루살렘’ 말이다. 체제의 중심이자 율법의 본산인 예루살렘에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갇힌 이들과 같은 변두리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갈릴리 예수’의 자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아니나 다를까.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끝내 죽인다. 예수야말로 바로 그 예루살렘의 영광, 예루살렘의 번영과 성장을 무너뜨리는 파괴자이고 불순분자인 탓이다. 예루살렘의 영광은 하느님의 성전(聖殿)을 독점한 데 따른 것이며, 예루살렘의 번영은 갈릴리 농촌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유지되고, 예루살렘의 성장은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가치와 논리를 수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에 “그늘진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던 갈릴리의 무지렁이들을 예루살렘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하느님은 오직 그네들의 하느님이지, 만인의 하느님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음모와 부조리가 가득한 그곳으로 자꾸 사람들이 모여든다. 예루살렘을 거룩한 곳으로 여기고, 성전이 자기들을 성결케 해주리라고 믿었던 까닭에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꾸역꾸역 모여든다.이 맹목스런 믿음이 예루살렘을 지탱하는 버팀돌이 되었을 테다. 이 헛된 믿음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거룩함으로 포장된 예루살렘의 추악한 실상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가 까마득하기에 예수는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올랐고, 예루살렘은 그 예수를 죽임으로써 반인간성과 가학의 본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오늘도 ‘예루살렘’은 곳곳에 건재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지식권력과 종교권력이 손 맞잡고 자기네 성채를 굳건히 쌓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의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예루살렘’을 신성시하는 이념의 포로가 되어 그 질서를 내면에 새기고 있다.언제까지 현존 질서를 떠받들고 공글리는 가치와 규범들에 매여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그네들 옆에서 알랑대며 용춤이나 추고 있을 것인가? 하여, 예수는 예루살렘의 허상에서 벗어나라고, 그 질서에 맞서기 위해 함께 예루살렘에 오르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갇힌 성전이 아니라 열린 거리와 광장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하자고 말이다. 박규환 숭실대학교 외래교수·기독교학 박사

[삶과 종교] 절망에 빠진 사회… 괴로움 원인부터 찾아야

최근 수년간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였다. ‘헬조선’, ‘N포시대’와 같이 자조적이고 절망적인 말들이 횡행하고,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절망감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어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발적으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자신의 괴로움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여 전가하는 현상 또한 증가하고 있다. 왕따와 집단 폭력, 묻지마 살인, 총기난사와 같은 폭력은 자신들의 고통과 불만을 타자에게 전가하려는 또 다른 선택으로, 더 큰 사회적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 한국 사회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절망 어린 탄식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얼마 전 끝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타난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자국 중심주의, 시리아 난민, IS의 테러, 끝나지 않는 중동 사태는 절망의 서로 다른 모습이다. 보편적 가치를 믿을 수 없는 후기 근대에 절망은 시대적 증상이 되어 버렸다. 절망이 문제인 까닭은 문제의 원인을 성찰하는 노력을 장려하기보다 괴로움이 제거될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좋다는 비이성과 폭력을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삶의 진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괴로움은 변경할 수 없는 사태가 아니다. 괴로움은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므로 그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다. 나는 이 말씀이 희망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인이 있어서 발생한 것이라면 원인을 제거하는 순간, 그 결과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괴로움의 해결은 자살과 왕따, 악의와 사적 폭력 같은 개인적 방식에 기대어 왔다. 그런 방법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결코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했다. 절망의 표현만으로는 고통의 해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괴로움은 원인이 있어 발생한 것이고 그 원인은 없앨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극단적 선택보다 문제 해결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괴로움의 원인이 있고 해결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야말로 단순하지만 삶이 얼마나 고귀한지 깨우쳐주는 가르침이 아닌가! 지난 한 달 간 우리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언론은 연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새로운 사태를 보도하고 있고 광화문 거리를 채우는 집회 인원은 날마다 역사적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최순실 사태를 통해 그동안 억눌려왔던 대중의 절망감이 한꺼번에 표출되고 있다. 그동안 그랬듯이 절망은 좀 더 쉬운 해결, 눈에 보이는 화끈한 변화를 선호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해결보다 증상의 완화만 목표로 한다.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괴로움을 곰곰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를 들여다 볼 용기와 문제의 본질이 아닌 곁가지들을 쳐낼 판단력이 필요하다. 한 사람 한 사람 희망의 등불을 켜고 괴로움을 직시해 그 원인을 성찰하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때이다. 명법 스님 은유와 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용서의 길

용서.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살면서 정서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 관계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치유하려면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참으로 어렵기도 하다. 그것은 상대방이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아예 안 믿거나, 조금밖에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의 논리를 안 믿고, 서로 화해됨을 안 믿으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이 가능함을 안 믿기 때문이다. 아니면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지만 자기만 손해 본다는 느낌을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용서한다고 하면 그저 잊어버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체한다. 벌을 주거나, 감해준다. 약자의 입장이 되거나, 도량이 넓은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발적이고, 소극적인 체험이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화해를 주고받는 일이고, 우연히 발생하는 지엽적인 사건이지 사람의 내면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상대방이 한 행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라 잘못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어리석게도 상대방이 저지른 잘못이 큰 잘못이 아니라는 뜻을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상대방의 잘못을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는 잘못이나 죄의 성격과는 관계가 없다. 용서는 분노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축복하고, 그 잘못을 사랑의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에게 초라함보다 더 큰 것을 넣어준다. 그렇지만 그 초라함을 무시하고, 멸시하거나, 짓밟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소생시키고, 살려준다. 그것이 전에는 폐품이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인간을 건설하는 재료가 된다. 전에는 수치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는 모체가 된다. 전에는 죽음이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용서에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어야지 뾰로통한 얼굴과 지친 심정과 포기의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형태의 모순된 감정과 일들로 서로 상처와 아픔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모순된 감정과 일들에 의하여 밀려드는 ‘충돌의 문화’가 ‘화해의 문화’로 바뀔 수 있도록 용서의 영성을 키워갔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 안에 상처와 아픔이 있지만 동시에 이웃과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자들이 되었으면 한다. 아픔과 상처의 책임을 서로 덮어씌우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용서의 길이고, 화해의 길이기 때문이다.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물으신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 21). 박현배 천주교 성 라자로마을 원장

[삶과 종교] 미래와 희망을 주노라

수석채집이 취미인 교우 한 분이 멀리 가서 구해온 것이라면서 까맣게 생긴 돌덩이 하나를 받침대와 함께 가져오셨다. 너무 아름다운 것이어서 목사인 나에게 선물하고 싶어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저 평범한 돌덩이로 보일 뿐인데 그분은 연신 감탄을 하면서 아름답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수석에는 문외한이라서 별 느낌이 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분은 더욱 열심히 설명을 한다. 움푹 파인 쪽을 가리키면서 이쪽의 기암절벽과 절벽 끝에 고고히 서 있는 소나무를 보라는 등, 실선 하나를 가리키면서 이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는 등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지만 나에게는 별로 느낌이 오지를 않는다.한참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럴 듯도 해 보이고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역시 나에게는 수석을 보는 심미안은 부족하다. 사람은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단면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처럼 둥글게 만들어져 있다. 또한 둥글게 만들어진 세상은 쉼 없이 자전과 공전을 하며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 때문에 세상의 구조는 이중적이며 또한 복합적이다. 이 세상은 낮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밤이 있고 아침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저녁이 있는 것이다.계절의 변화도 이중적이며 동시에 복합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 한 편에서는 한겨울을 지내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한여름을 지내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한낮을 살아가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한밤중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단면으로 생각하기보다 이중적으로, 아니 복합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상을 광야라 했던가? 아니 고해라고도 했다. 세상은 여러 가지 일로 가득 차 있다. 보이는 것마다 어려운 일이고 들리는 소식마다 마음을 어둡게 하는 답답한 소식들이다. 국가적으로도 남북은 대치 국면이고 정치·경제·사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 없고 연일 크고 작은 재난과 사건, 사고의 소식들은 우리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근심하게 한다. 며칠 전 교우 한 분이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남의 빚보증 잘못 서 큰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 집까지 다 없애고 부부가 아들 하나 데리고 트럭으로 생선 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는 가정의 가장이다. 날씨는 추운데 감기 몸살이 겹쳐 장사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목사님! 온몸이 쑤시고 곧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잘 버틸 수 있도록 목사님 기도 좀 해 주십시오.”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 코끝이 찡하다. 세상은 복합적이고 인간의 사고구조도 복합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절망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밤은 더 큰 절망일 것이다. 두려움과 근심을 안고 사는 사람에게 새 아침, 새해, 새날은 더 큰 고통일 뿐이다. 그러나 소망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오늘은 내일을 위한 쉼의 은총이다.그 사람에게 오늘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디딤돌일 것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까워 옴을 느끼며 한겨울은 만삭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을 바르게 인식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삶의 지혜이다. 성경에는 희망을 잃고 비통해하는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외치는 말씀이 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29:11) 믿음으로 소망의 주님 앞에 서서 희망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내자.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지천명에서 이순으로 가는 길

“예순에 이르니 귀가 부드러워졌다(耳順).” 굳이 생각지 않아도 뜻을 알고 아무리 고까운 얘기라도 거슬리지 않는 경지를 일컫는 말일 테다. 요즘 말로 ‘소통’이겠다. 경청하는 태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말이다. 잘 들어주고 잘 알아차리니 막히는 데가 없고 답답하지도 않다. 이야기가 흐를수록 헤아림이 깊어가고 깨달음이 늘어난다.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며, 서로 살리고 서로 키우는 이야기 한마당,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네 삶이 얼마나 즐겁고 후련할까. 소통하자면 앎이 필요한 듯도 하다. 지식을 갖추어야 하고 정보도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귀 막고 눈 감은 채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야멸스레 내치는 지식인, 전문가가 얼마나 많은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야고보서 1장 19절)고 하였건만, 알량한 지식과 정보로 남의 입을 틀어막고 애오라지 자기 말만 쏟아내는 선생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앎이 귀를 부드럽게 하지는 못하나 보다. 예순이 곧 이순(耳順)이면 좋으련만, 나이가 들수록 외려 작은 일에도 앵돌아지고 배틀어지기 십상이다. 노여움도 잘 타고, 어린 사람 얕보고 뭉개기가 예사다. 그러니 예순이라고 곧 이순일 수는 없다. 이름이 알려지고 자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더욱이 없다. 그 무슨 벼슬이라도 할작시면 소통은커녕 교시(敎示)하고 위세 부리기 바쁘다. 사정이 이럴진대, 배울 만치 배운 데다 나이 많고 높은 자리까지 꿰차고 있는 사람일라치면 어떨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오로지 자기 생각, 자기 말만 고집하고 거기에 터럭만큼이라도 토를 달라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악패듯 짓밟던 사람들, 이제는 ‘불통’의 표상이 되어 온 나라의 비웃음을 사며 이 나라 사람들을 죄다 부끄럽게 만든 이들, 그들에게 알랑거리며 언구럭스레 ‘아랫것’들의 무지를 꾸짖어 온 사람들, ‘이순’은 좀체 보이지 않고 표독스런 ‘예순’들만 여기저기 수두룩하다. 이야말로 이 나라, 이 사회의 비극 아닌가. 정보화로 지식이 넘치고 고령화 탓에 나이든 사람 또한 넘쳐나지만, 정작 고까운 얘기 마다않고 귀 기울여 주는 이순은 드물다. 짐작컨대 이순의 세계는 나이 들고 지식 쌓인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뜻’을 알 때 열린다. 그래서 성인은 “쉰에 이르러 하늘의 뜻을 알았다(知天命)”고 하였나 보다.이제껏 살아오면서 만들어 온 ‘나’를 포기하고 눈길을 ‘하늘’로 돌리라는 뜻일 테다. 하늘이 또한 내 안에 있으니(누가복음 17장 21절), 나를 깊이 들여다보고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말이기도 하리라. 하여 지천명(知天命)은 하늘에 비추어 자기를 알아가고, 하늘의 뜻에 오롯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참상은 ‘나’를 찾기보다 ‘내 것’에 매달리고 천명을 묻기보다 자기를 내세우는 데만 몰두해온 ‘나잇값 못하는 5·60대’ 탓이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현실에 들붙지 말며 도망치지도 말고, ‘나’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하늘 소리에 귀 기울여야겠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 의미 세계를 그리며, 내가 터한 삶의 바탕 너머 보편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본디 종교 아니던가. 여태껏 내가 지키고 쌓아온 울을 허물어 더 넓은 세계를 품고, 개별의 ‘나’에 머물던 관심을 보편의 ‘우리’로 넓히는, 그리하여 ‘이제, 여기’에서 ‘그 너머’를 살도록 이끄는 것이 종교일진대, 종교야말로 지천명의 열쇠인 성싶다. 박규환 숭실대 외래교수·기독교학박사

[삶과 종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종교를 믿는다고 할 때 사람들이 믿는 것은 무엇일까? 보통 특정 종교의 교주 또는 숭배 대상인 신을 믿거나 그 종교의 교의 또는 표방하는 이념을 믿는다. 그러나 속을 뒤집어보면 초월적인 신이나 추상적인 교의가 아니라 그 종교가 제공하는 초월적인 힘이나 현실적인 힘을 믿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중 신비체험이나 합일의 경험에서 오는 충만감 때문에 믿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원하는 것을 얻게 해주는 힘을 믿으면서 그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정치, 사회, 경제 등 현실적인 삶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종교의 힘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마음을 모으고 바꾸는 데 종교만큼 강력한 조직이 없기 때문에 정치는 종교의 힘을 이용하거나 억누르기도 했다. 세속화 이후, 사교적인 것에서 발휘되는 종교의 힘에 대한 선호가 뚜렷해졌는데, 사업을 위해, 배우자-경제적 이유만 아니라 같은 종교를 믿는 배우자를 얻고 싶다는 이유에서-를 구하기 위해, 종교인으로부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가족 때문에, 친구 때문에, 아는 사람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 사람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람 때문에 종교를 떠나기도 한다. 드문 일이지만, 종교인의 인격과 행동 때문에 종교를 믿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에 대한 신뢰를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치환하는데, 비교적 합리적이지만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그 지도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심지어 신격화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종교제도를 믿는 이들도 많다. 큰 절, 큰 교회를 선호하고 건축물이 크고 장엄한 곳을 좋아하는데, 종교지도자의 명예가 높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면 신뢰도는 더 커진다.다종교시대에 우후죽순 만들어지는 종교 중에서 어떤 종교를 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제도는 옥석을 구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제도는 형식적 요건만 충족하면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내실까지 보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종교기관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종교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많지만 믿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무엇이 올바른 믿음일까? 불교에서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를 하면 불자가 된다. 다시 말해, 깨달은 존재인 부처님을 통해 내가 깨달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그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믿고, 스승으로부터 수행의 방법을 배울 수 있음을 믿는 것이 불교인의 기본 요건이다. 성철스님은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서 “각 종교의 절대적인 권위인 교조들의 말씀은 본마음에 가장 큰 장애와 병폐가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금가루가 눈에 끼이면 눈병을 야기하듯 교조들의 말씀도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각 종교의 경전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믿는 종교근본주의자들에게 불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로 비판해왔다. 제도와 사람마저도 달이 아니라 손가락이다. 불법승 삼보를 믿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역설을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익히 들어온 불자들 중에는 심지어 이 이야기마저 손가락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성철스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브라운관에서 매일 보는 연기자들을 이웃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너무 익숙해서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진정 믿는 것이 무엇인지 각자 돌아보았으면 한다. 명법 스님 미르문화원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오늘의 삶에 성실하라

‘한 번에 하루씩 살아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나간 시간에 얽매이거나 다가올 내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며, 지금, 오늘의 삶에 성실하라는 뜻이다. 오늘도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 해가 떠오르고, 다시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을 알리는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진다. 하루의 이러한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또 하루가 지났구나!’하는 마음을 하게 된다. 그리고 후회하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조심해야 함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이라는 생각 속에서 단단한 행복과 만족, 평화의 하루를 쌓아갔으면 한다. 하루하루 우리 자신의 삶의 충족함을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날이면 날마다 그 나름의 의미가 있고,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날이건 일하고, 여가를 보내며, 창조적인 노력을 통하여 그리고 사랑을 주고받는 봉사, 선과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인생의 감미로운 맛을 맛볼 기회를 얻게 된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 이 인생의 감미로운 맛을 맛볼 기회는 지는 해와 함께 사라질 것이며, 그때는 불러 봐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지금, 오늘 하루의 삶에 좋은 결과를 거두도록 성실히 살았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행복을 바라고 있다. 그 행복을 위해 오늘의 수확할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하루살이가 커피 잔에 빠졌다 나와 ‘인생에 쓴맛 단맛 다 보았다’고 말하였다. 하루의 삶에서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본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알을 낳으며, 그것을 부화시켜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킨다. 단 스물 네 시간 만에 이루어지는 삶이다. 하루살이처럼 되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우리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부터 직시하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스스로가 정직하지 못할 때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수 없다. 자신의 처지와 능력, 소양, 성격, 개성과 현재의 열정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인생은 끊임없이 뒷걸음치는 목적지를 향해 여행한다. 우리는 달성하고자 했던 것을 붙잡는데 성공하더라도 곧 또 다른 어떤 것이 먼 지평선에서 손짓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코 ‘이제 인생의 경주는 끝났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원하던 것을 발견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끝없는 좌절을 맛볼 것이다. 따라서 지금, 오늘 우리의 삶이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오늘의 삶을 행복한 가운데 성실하게 살았으면 한다. 후회 없는 충만한 날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영원한 삶에 이르는 진정한 순례자가 되었으면 한다. 예수께서도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 34)라며 지금, 오늘을 충실히 살 것을 말하고 있다. 박현배 천주교 성 라자로마을 원장

[삶과 종교] 당신은 뒷모습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예배가 한창 진행 중에 안내위원이 연세가 높은 할머니 한 분을 교회 앞자리로 모시고 나온다. 보기에도 몸이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 연세가 드신 것뿐만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옆에 앉은 젊은 여 집사님이 성경도 찾아드리고 열심히 예배를 도와 드렸다.예배 시간 내내 열심히 따라 하신다. 찬송 부르는 시간에도 열심히 입술로 읊조리면서 따라 부르시고 설교시간에도 고개를 끄떡 끄떡 하시면서 아멘도 하신다.예배 후에 새 신자 접견실에서 상담을 했다. 교회에 나오시게 된 동기는 손자가 교회 앞 현관까지 데려다주어서 나오시게 되었다고 하신다. 성함을 물으니 “김달자” 연세를 물으니 “몰라요” 주소는 “몰라요” 글자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신단다. 그저 아는 것은 성함 석자와 큰길 건너 빌라 3층에 살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예수 믿고 천국 가려고 해서 왔다고 하신다. 할머니는 그다음 주에도, 또 그다음 주에도 꼬박꼬박 나오셨다. 그저 성함만 ‘김 달자’ 성도님으로 2년 남짓 교회에 출석하셨다. 거의 매주일 빠지지 않으시고 출석하셨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 시간이 넘는 예배시간 앉아 계시려면 힘도 드실 텐데 전혀 불편한 내색 안 하시고 꾸준히 출석하셨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예배드리고 가시는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이셨는데 그다음 월요일 전에 왔던 뇌경색이 다시 재발하여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한 달여 계시다가 지난 주간에 급기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장례를 치러 드렸다.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 석자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뿐, 지방에서 도시로 나와 직장 생활하는 손자에게 밥해주시기 위해 와 계시는 동안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셨던 것이다. 인생은 살아가는 동안 하루해가 지면 돌아갈 내 집이 있어야 한다. 크든 적든 내 한 몸 편히 하룻밤 안식할 가정이 있어야 한다. 한 평생 일생을 다 살고 난 후에는 돌아갈 본향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인생은 나그네요, 거류민일 수밖에 없다. 하늘에 태양을 우리 육안으로 자세히 볼 수 있는 시간은 하루 두 번이다.아침에 동녘 하늘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과 저녁에 서산으로 붉게 물들이며 지는 시간이다. 한낮에는 너무 밝아 육안으로 자세히 볼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일생 동안 그 사람을 정확히 볼 수 있는 때는 어머니 자궁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날 때요, 또 한 번은 이 세상에서의 생을 다하고 떠나갈 때이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사람을 가리고 있고 치장하고 있는 것들이 많아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머물다 간 자리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떠나가는 뒷모습이 더 아름다워야 한다. 요즘은 성형 기술이 발달해 나이를 감추고 젊게 보이게 하는 기술이 놀랄만하다. 그러나 성형을 해서 앞에선 모습이 아무리 아름답고 젊게 보이도록 꾸며도 돌아서서 걸어가는 모습은 속일 수 없다. 뒷모습은 성형이 안 된다. 하루해가 져서 돌아갈 집이 없는 이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외롭고 적막함이란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일생을 다하고 돌아갈 본향이 없는 인생을 생각해 보라. 그 망망한 길을 누가 동무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라’ (히 9:27)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 세상에서는 그저 이름 석 자만 기억하고 사셨던 김달자 할머니, 중환자실 침상에서 긴 호흡 몰아쉬며 희미한 정신 가다듬고 몇 번이고 두 손 꼭 잡으시고 어서 천국가고 싶다고 하셨던 김·달·자 할머니 “당신은 뒷모습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불혹, 그리고 지천명

“마흔 살에는 무엇에도 홀리지 않았고(불혹·不惑) 쉰 살에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지천명·知天命)” 삶이 참 깔끔하고 정갈하지 않은가.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불혹이 오고, 지천명이 되겠거니 여겼다. 그래서 마흔쯤 되면 그 무슨 꾐에도 빠지지 않고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바위 같은 사람이 되어 있겠지. 그려 보곤 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마흔이고 보니 웬 유혹이 그리도 많던지…. 확실히 인생의 전반기는 뜻을 품고 다듬고 세우는 과정이다. ‘나’를 세우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시기다. 그 싸움터에서 저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젊은 날을 보내야 했고, 보내고 있다.총성만 없지 실제로 전쟁 같은 삶이 아니던가. 그 싸움의 끝자락에서 공자처럼 “더는 어떤 삿된 길(邪道)에도 흔들림이 없다”는 ‘주체 선언’이 나올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우리네 현실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마흔을 넘기면서, 싸움에서 이겨 전공(戰功)을 세우고 전리품도 웬만큼 획득하면서 인생의 절정기에 이르면 외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내 것’이 많아져 이젠 제법 살만도 한데 여전히 모자라고 무언가 공허하다. ‘정오(正午)의 목마름’이라고나 할까. 그 틈을 비집고 별별 것들이 ‘나’를 넘본다. 술, 놀음, 성(性).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증과 허기. 하여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오르려고 자기를 볶아치는 사이에 ‘나’와 ‘내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내 것’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질 것처럼 여기다가 이윽고 ‘내 것’의 노예가 되고 만다. 요즘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키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저 높은 곳의 40~50대들이 모두 그 짝 아닌가. 어렵다는 ‘고시’를 패스하고 한때는 호기로운 시절도 있었으련만,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돈 되고 힘 될 만한 곳이면 걸신이라도 들린 듯 쫓아다니며 게걸스레 집어삼키다 가시에 걸려 마침내 그 먹은 것을 토해내야 하는 이들. 시샘하고 부러워하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손가락질하며 언죽번죽 윤리·도덕을 들먹이는 사람들, ‘불혹’과 멀기는 매한가지다. ‘마흔이 불혹’이라는 명제를 우리네 인생살이에 적용할진대 그것은 결코 ‘사실’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당위이자 지향성이다. 사실로 치자면 인생의 정점이랄 수 있는 40대야말로 되레 ‘불혹 해야’ 할 만큼 유혹이 넘쳐나지 않는가.그러므로 불혹이 되려면 성취니 성공이니 하는 것들에 홀려 애오라지 ‘내 것’에만 매달린 삶, 끊임없이 무엇이 ‘되려’ 하고 무엇을 ‘하려’했던 오랜 삶의 방식을 찬찬히 돌아보며, 참된 ‘나’를 찾아 나서야 한다. ‘정오의 목마름’은 생명으로, 생명답게 살라는 영혼의 갈망일 테니 말이다. 살아 내려고, 이기기 위해 써야만 했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밖으로만 향하던 눈길을 안으로, 내면으로 돌릴 일이다. ‘내 안에 하늘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천성(天性)이나 불성(佛性) 또는 시천주(侍天主)가 그러하고, 성서의 하느님께서도 “나의 법을 그들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 마음 판에 새겨” 두었다고 하셨으니 나의 본성을 찾는 여정이야말로 ‘지천명’의 길이 아닐까. 내 안에서 잠자는 ‘하늘’이 깨어날 때 평화로운 ‘은총의 오후’가 열릴 터이니. 박규환 숭실대 기독교역사학박사

[삶과 종교] 불편한 날이 된 추석?

민족의 명절, 추석이 지나갔다. 나에게는 어제와 다름없는 날들이었지만 올해도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은 서둘러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는 하루 종일 길 위에 있었거나 고향에 도착해서 분주하게 성묘를 하고 차례를 지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아예 서울을 떠나지 않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추석은 수험생과 비혼자, 취준생에게는 너무 많은 관심 때문에 부담스럽고, 노인과 노숙자, 이주민에게는 너무 적은 관심 때문에 외로운 날이 되어버렸다. 세상의 모든 며느리와 어머니와 딸들에게 바쁘고 고단한 날이, 사위와 아버지와 아들들에게는 책임감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날이 되어버렸다. 연휴가 끝나고 대중 매체에 하루도 빠짐없이 기사화되는 불화와 살해, 이혼 소식을 들으면서 어느새 명절이 사람들이 만나서 반가운 날이 아니라 오히려 만나서 귀찮고 불편해지는 날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추석은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만신창이가 된, 쓸모없고 불편한 날이 된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친절하게도 ‘비혼자에게 결혼 여부를 묻지 말 것’, ‘취준생에게 취업 여부를 묻지 말 것’ 등등 명절에 해야 할 말보다 하지 말아야 할 말들에 대한 정보가 대중 매체와 SNS를 타고 돌아다녔다. 뿐만 아니라 차례음식을 마련하는 일 때문에 가족 간의 불화가 일어난다고 해서 애초에 그 소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차례문화를 폐지하자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들려온다.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미개한’ 풍습이라는 논리를 내세워서 말이다. 차례를 지내고말고는 개인의 선택사항일 수 있지만 ‘미개하다’고 말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언뜻 합리적인 비판인 듯 보이지만 문화의 기저에 존재하는 상징체계의 위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편의와 편리를 내세워 귀찮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얄팍한 발상이다. 종교의례든 세시풍속이든 의례는 인간이 더 큰 질서 속의 일부임을 일깨움으로써 유한한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적 장치이다. 언제부턴가 이런 것들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가 부끄럼 없이 횡행하고 있다. 그들 존재의 뿌리를 확인하고 일상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기에 명절이면 막힌 길에서 경적을 빵빵거리며 기를 쓰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 아닌가! 서양에서도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에 가족을 만나려고 귀성하는 인파 때문에 비행장이 북새통이 되고 비행기가 연착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추석은 차례음식 만드는 일이 전부가 아니다. 오래 떨어져 있었던 가족들이 마주 앉아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구분 없이 송편을 빚고 달맞이 하고 집안 어른들에게 문안인사를 하며 서로 공유하는 기억을 되새기고 공유할 기억을 만드는 날이다. 서로에게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던 관계가 차례상을 차리지 않고 관광지로 달려간다고 해서 달라지겠는가? 여성들에게 의무와 강제를 상징하는 날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피하겠다고 놀이동산과 백화점을 기웃거리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봐야 한다. 각자도생하는 이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다시 일상을 시작할 힘과 용기를, 늘 가까이 있지만 소홀했던 사람들을 배려하는 넉넉함을,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외로운 사람들을 기억하고 작은 정성이나마 보태는 날이 되기를, 그래서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 날”이기를 기원해본다. 명법 스님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본성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러한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정말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는가? 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철학적 물음에 대한 과학적 근거로 진화론과 빅뱅 이론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 자체도 역시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 논리가 수학 공식처럼 답을 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역시 가설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는 신앙으로 귀결된다. 일부 과학자들은 자기 나름의 신관을 갖고 있으면서 종교와 과학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장님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만큼 종교는 삶과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한한 절대자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자신을 맡기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일상에 걸쳐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확실하다고 하는 것(神)에 대한 믿음은 전쟁터에서 적이 나타났을 때 싸우거나, 도망치는 본능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이다. 이러한 본성이 신앙으로 이어진다. 신앙은 절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절대자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그 절대자에게 내어맡김이다. 젖먹이 아이에게 있어 어머니 품은 절대적인 사랑과 힘의 장소이다. 그래서 젖먹이가 그 품 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밝게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자기를 따뜻이 감싸주고 있는 어머니의 확실한 사랑을 무의식 중에 믿고 있기 때문이다. 5층짜리 아파트 1층에서 불이 났다. 5층의 한 집에 어머니와 어린 자녀 셋이 있었다. 그리고 불길이 1층에서 계단을 타고 그 집으로 올라왔다. 놀란 어머니는 창밖으로 구조해 달라고 소리쳤다. 이때 아파트 근처에서 이불 가게를 하던 주인이 이불을 잔뜩 들고 왔다. 주변 사람들도 이것을 보고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가져온 이불을 펼쳐 들고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불을 펼쳐들고 있을 테니 아래로 아이들을 던지세요. 그리고 당신도 뛰어내리세요” 어머니는 망설였다. 과연 ‘아이들과 자신이 뛰어내렸을 때 이불 위에 안전하게 떨어져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길은 더 거세게 올라왔고,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결심한 끝에 아이들을 하나씩 이불 위로 던졌다. 이어서 자신도 뛰어내렸고 모두 살았다. 믿는다는 것은 젖먹이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온전히 의지하고, 불길에 싸여있던 그녀가 이불을 받쳐 들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하였듯이, 절대 확실하다고 하는 것(하느님)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모든 선의 원천이신 절대자를 발견해보기 바란다. 더없이 기쁘고도, 흐뭇한 체험이 될 것이다. 박현배 천주교 성 라자로마을 원장

[삶과 종교] 당신 바지가 왜 이렇게 짧아요!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는 ‘중히 여기어 정성과 힘을 다하는 일, 또는 그런 마음, 또는 그런 관계나 대상, 일정한 사물을 즐기거나 좋아하는 마음’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한 평생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첫째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5년간 사랑에 눈먼 아내! 아내 자랑을 하는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하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아내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와 내 아내와의 만남은 사랑에 눈먼 사람들의 만남이었다. 나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아내를 따라다녔지만 내 아내도 나에 대해서 눈이 멀었던 게 분명하다. 아내는 나보다 키가 5㎝나 더 크다. 성격도 활발하고 일 처리도 시원시원하게 한다. 반면에 나는 키도 작을 뿐 아니라 결혼 당시에는 몸도 왜소하고 매사에 소심한 편이었다. 결혼식 날 키를 맞추려고 굽 높은 구두를 맞추어 신을 정도로 신경을 썼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사진을 찍을 때 친구들이 발판을 가져다주면서 짓궂게 장난을 했던 것을 보면 누가 보아도 키가 확연하게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아내와 만나 결혼하고 살아온 세월이 어언 35년. 하나님의 은혜로 삼 남매 낳아 잘 자라게 하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나에게 키가 작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내를 나는 사랑하고 좋아한다. 그런데 며칠 전 궂은 비가 내리던 날. 세탁소에 다녀온 아내가 짜증을 내고 중얼거린다. 몇 년째 다니는 단골 세탁소에서 옷을 바꾸어 주었다는 것이다. 세탁소 아줌마를 들먹이면서 비는 오는데 세탁소에 어떻게 또 갔다 와야 하느냐면서 세탁소에 전화를 걸어서 가져다 달래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무슨 옷이 바뀌었느냐고 물으니 내 바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들고 있는 바지는 분명히 내 바지가 맞았다. “그 옷 내 바지 맞는데?” 그때 아내가 충격적인 말을 한다. “당신 바지가 왜 이렇게 짧아요?”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 여자가 이제 눈이 떴구나. 지금까지 사랑에 눈멀어 안 보이던 작은 키가 보이는걸 보니 멀었던 사랑의 눈이 떠진 것이 분명하다. 그날 나는 솔직히 금식하며 기도했다. “오, 주여, 아내의 눈을 멀게 하소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순적이 들어주셔서 지금껏 무탈하게 살고 있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의 눈먼 분이다.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다는 말인가! 세상에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못난 것을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셔서 주님의 자녀 삼아 주셨으니 사랑에 눈머신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키 작은 것만 못 보신 것이 아니다. 수백수천 가지 결점과 흠을 못 보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용납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깊어지고 은혜가 많아지면 눈물이 많아진다. 아니 주님 사랑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러나 내가 주님 사랑하는 그 사랑이 주께서 나를 향해 쏟으신 눈먼 사랑에 비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유난히도 하늘이 높고 푸르다.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옴란의 옆자리

전 세계가 리우 올림픽에 열광하던 때, 시리아는 여전히 생지옥이었다. 우리의 눈과 귀가 온통 김소희 선수의 태권도와 박인비 선수의 골프 1라운드 경기에 쏠려 있던 날, 시리아 내전의 격전지인 알레포에서는 러시아군의 공습이 이어졌다. 그리고 날아든 사진 한 장.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틈에서 구조된 한 아이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피를 흘리며 멍하니 앉아 있다. 아이의 이름은 옴란 다크니시. 나이는 다섯 살. 그 날의 공습이 있기 사흘 전인 8월14일에 시리아인권관측소가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지난 보름간 행해진 공습으로 알레포에서만 무려 327명이 숨졌는데, 그 가운데 어린이가 76명이라고 한다. 그러니 극적으로 구조된 옴란의 경우는 운이 좋은 걸까. 설령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한들, 그 운의 유효기간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시리아에 남아 있으면 죽음이 코앞인데,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다. 목숨을 걸고 떠난들, 어디서 순순히 받아줄까. 1년쯤 전에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이 세계인을 분노와 슬픔에 몰아넣었던 것도 ‘약발’이 다했다. 전 세계가 약속이나 한 듯이 시리아 난민을 ‘투명인간’ 취급한다. 주홍글씨가 된 사람들, 어딜 가나 환대받기는커녕 홀대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시리아 난민들이다. 난민을 가장한 테러분자일지 모른다는 의심, 사회치안을 어지럽히고 국가경제를 갉아먹을 것이라는 우려, 여기에 이들의 종교인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증오까지 더해져 아무도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 결과, 떠나지 못하고 시리아에 발이 묶인 애꿎은 민간인들만 전쟁의 광기에 희생당하고 있다. 불교의 법화경에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독화살을 맞았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누가 화살을 쏘았는가, 왜 쏘았는가, 화살촉에 묻은 독의 성분은 무엇인가, 얼른 독화살을 뽑아내고 치료부터 하는 게 마땅한 순서일 텐데, 엉뚱하게도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시간만 허비한다. 기독교의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다. 이를테면 마가복음에 나오는 귀신 들린 아이의 경우다.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을 때마다 아이는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면서 몸이 뻣뻣해진다. 이 귀신을 몰아내 달라고 아이 아버지가 간절히 요청하는데도, 예수의 제자들은 율법학자들과 논쟁하기에 여념이 없다. 어느 종교인들 시리아 난민 문제에 무고할까. 나는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는 즉시,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욕을 혼자 다 먹는 본디오 빌라도가 되리라. 게다가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가 공히 추앙하는 아브라함 역시 난민이지 않았나. 하여 ‘떠돌이를 환대하라’는 윤리를 발전시킨 것이 세 종교가 인류 문화에 남긴 위대한 유산이 아니던가. 종교의 본령은 사랑이다. 사랑은 곁을 내주는 행위다. 곁을 내주는 일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따른다.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도 한다. 그래도 사랑하라! 마침내 사랑이 이긴다! 이 믿음이 참 종교다. 사랑 대신에 증오를 가르치는 종교는 그저 종교를 가장한 정치에 불과하다. 다시 옴란의 사진을 본다. 누가 이 아이에게 곁을 내줄까. 누가 이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전쟁귀신을 내몰 수 있을까. 정치로는 못 한다. 오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사랑이 답이다. 그 사랑이 꽃처럼 피어날 때 비로소 전쟁귀신이 물러날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건 총이 아니라 꽃이다. 구미정 숭실대 초빙교수

[삶과 종교] 현실을 이기는 영성

스티븐 코비는 그의 책 원칙중심의 리더십에서 자기 딸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책을 시작한다. 어느 날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면서 바쁘게 사는 딸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푸념을 늘어놓는다. ‘아이 키우랴, 직장 생활하랴 몸이 열 개라도 시간이 부족하겠다’는 것이다. 그때 스티븐 코비는 사랑하는 딸에게 한마디 해준다. “아가야 그러면 이제는 시계를 보지 말고 나침반을 보도록 해라” 신앙의 딜레마는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민이다. 어떤 때는 신앙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너무 먼 갈등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성공적인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면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신앙생활의 매력은 현실을 이기는 영성을 지니는데 있다. 성서는 그 답을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제시해 주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르치신 기독교의 산상수훈이다. 그리스도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제자도 즉 영적 지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첫째,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는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향을 잃어버려서 혹은 잘못 잡아서 나갔다가 되돌아오는데 반평생, 혹은 어떤 이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방향이 치지하는 인생의 무게는 실로 중요하다.육하원칙의 질문은 인생을 풀어 가는 데는 육하원칙의 질문이 중요하다 그 가운데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바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왜?’의 담이 있어야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방향이 맞는다고 잡았는데, 그 방향을 잘못 잡은 경우 그에 대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인생 전체를 허비한 것이 된다. 차라리 방향이 없으면 인생을 설렁설렁이라도 살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달렸는데 그 결론이 꽝일 때, 배신감을 느낄 만큼 허무로 끝나는 것이 인생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현실을 이길 수 있는 비방 즉 영적 무기의 역할을 한다. 사람은 운명론자이든 아니든 누구나 운명을 믿고 산다. 인생은 내 힘이 아닌 어떤 타자의 절대적 힘에 의해서 이끌려 살아간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 절대 힘의 능력인 타자를 누구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 그래서 미래의 운명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절대 타자를 잘 안다.그리고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그분은 나와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요. 지금도 살아서 다스리시는 섭리의 주시다. 십자가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함께 하시는 분이다. 그분이 말씀하신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먹고살기 위한 생존경쟁일 뿐만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영적 싸움이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인생의 나침반과 영적 비방을 가지고 현실 위에 우뚝 서는 영성의 신앙으로 내공을 다져야 한다.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삶은 변한다

오늘도 더위를 피해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벌써 보름 가까이 열대야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 당분간 학교 밑 연구실에서 지내야 하는데, 좁은 연구실은 뜨거운 열기에 숨을 쉴 수가 없다. 밤에도 그렇거니와 낮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날이 밝으면 에어컨이 나오는 도서관으로 출근도장을 찍는다. 입추가 지나면 밤잠이라도 잘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이제 절기도 소용없게 돼버린 건지 낮의 열기가 밤이 되어도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게다가 매미들은 밤낮없이 시끄럽게 울어댄다.밤에도 불빛 환하니 낮인줄 착각해서 그런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는 가히 환경의 역습이라 할만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여름에도 밤이 추웠던 명봉사가 생각난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명봉사의 여름은 극락이다. 몇 해 전 복잡한 도시살이에 지친 나는 모든 것을 접어두고 도반이 있는 예천 명봉사로 내려갔다. 주지인 도반에게 ‘휴식이 필요하니 아무것도 시키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행장을 풀었다. 읽고 싶었던 책들도 양껏 챙겨갔다. 도반은 내가 머무는 몇 달 동안 정말로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그날부터 먹고, 자고, 여유 있게 차도 마셨다. 나무 그늘 아래 풀밭에 앉아 한가하게 책도 읽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그야말로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그저 자연에 감탄할 뿐이었다. 전에 없던 호사를 맘껏 누렸다. 명봉사를 끼고 흐르는 시내에 발도 담갔다. 발이 시릴 정도로 시원했다. 밤에는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차서 보일러를 켜야 할 정도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 너머 처마에서 떨어지는 비를 감상하는 맛도 그만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어찌나 시원한지 영상을 찍어 가까운 이들에게 보냈다. 법당 맞은편 누각에서 계곡을 바라보는 것도 아주 운치가 있었다. 그야말로 극락이 따로 없었다. 명봉사는 예천에서도 아주 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인적이 드문데다 농사철이라 법회 날 이외에는 방문객도 거의 없다. 인파의 홍수 속에 피곤했던 나는 무엇보다도 이런 한가로움이 주는 기쁨이 너무 좋았다.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조용히 명상하는 즐거움도 그만이었다. 도시 생활 십여 년이 되어도 아직 소음이 적응이 안 되는 나로서는 산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천상의 음악처럼 들렸다. 절을 지키는 청삽살이 남순이와의 산책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녀석은 겁이 많아 곁을 멀리 떠나지 않는다. 순해서 데리고 산책하기가 좋았다. 참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인생에서 또 있을까 싶은 시간들이었다. 이렇듯 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면 이런 것들이 곧 행복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의 상황이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이 ‘느낌’으로써 행복을 경험한다.그러나 이런 행복이 슬프게도 오래 머물러 주지는 않는다. 명봉사에서의 행복도 겨울이 오면서 막을 내렸다. 그 좋던 시원함이 추위로 바뀌면서 감당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추위에 약한 나는 가난한 절 살림에 난방비를 많이 쓸 수가 없어 다시 수원으로 올라와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 삶은 늘 변화한다. 견딜 수 없는 이 더위도 언젠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속절없이 물러날 것이다.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은 것은 분명 괴로움이지만, 한편으로는 삶에 변화라는 속성 있어 우리의 삶은 희망적이다. 이제 처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가는 세월은 야속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더위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은 떠나간 님 그리듯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올가을을 기다린다. 도문 아리담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가톨릭 교회의 自省

며칠 전 프랑스의 한 성당에서 미사 중에 있는 노 사제가 무슬림 테러범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나 가톨릭 교회는 물론 온 세상이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가톨릭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황의 말씀은 “이슬람과 폭력을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거의 모든 종교에는 항상 소수의 근본주의자 집단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 가톨릭 교회도 그렇다”라고 조심스럽게 이 테러가 더 확대될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대부분의 성당에서는 미사를 통해서 “모두에게 증오 대신 사랑을”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종교 간 화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IS(이슬람 국가) 무장단체는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테러가 종교전쟁으로 확전되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는 가톨릭 교회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엔 십자군 전쟁이라는 참혹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중동과 유럽에서 일어난 이슬람교와 가톨릭이 주도해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성지 장악 및 탈환으로 시작된 종교전쟁입니다. 이슬람교는 아라비아의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서 7세기 초에 시작됩니다. 그런데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창세기 인류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의 하녀인 하가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이슬람의 조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교에 이어 모든 인류는 아브라함의 본부인인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사악에서 시작된 것으로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가톨릭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신도는 물론 이슬람도 성경에서 제시한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조상을 모시는 한 핏줄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세계의 참극을 빚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비극의 역사가 있습니다. 11세기 당시 유럽에서는 가톨릭의 위세가 정치 사회 경제 등을 장악하면서 이교도인 이슬람교를 말살하려고 시도합니다. 여기서 생겨난 것이 이름하여 십자군입니다. 십자군이 시작될 때는 외적으로는 성지를 보존하고 장악하려는 의도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천인공노할 사건들이 이들에게서 저질러집니다. 현재까지도 특히 이슬람교의 극단주의자 IS는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향한 테러에 더욱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번 가톨릭 사제를 살해하게 된 사건은 바로 과거 십자군에 의해서 엄청난 비극을 겪었던 이슬람인들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보복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바라는 것은 여러모로 전쟁의 불씨를 피워 세계전쟁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 가톨릭 교회는 발 빠르게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태리 등의 가톨릭 교회에서 “증오 대신 사랑”이란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미사 등 여러 가지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여러 나라의 성당에서는 이슬람의 무슬림 지도자들과 함께 종교 간 화합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IS가 꾀하고 있는 세계 전쟁으로 크게 비화되는 것을 막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톨릭 교회는 이 기회를 통해 과거에 저지른 십자군의 만행에 대해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성의 방법을 찾아서 이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극단주의자들과의 소통의 길은 아마도 가톨릭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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