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봄과 함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면서

인류가 집단을 이루면서 은밀하고 개인적인 관계가 등장하였고 이후에 고대 왕조에서도 특권층에 의한 권력과 기타의 재화에 독점적인 지배가 중요하게 인식되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투명하고 객관적인 기회의 제공이 요구된다. 몇 년을 계속하여 진행되고 있는 채용비리에 대한 수사는 언론의 주요 기사로 등장하고 있고 사회와 문화의 적폐라는 용어도 정치권의 여야를 가리지 않고 회자되는 단어이다. 조선시대에는 신의에 바탕을 둔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사회적인 시스템도 자연스럽게 인간의 심성에 바탕을 삼고 진행되어 도덕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된 기록은 많지 않았었다. 우리는 이러한 선조들의 우수한 정신적인 문화를 이어받아 외세의 침략에서 해방을 맞이하여 고도의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요즘은 양극화에 의한 사회적인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고 사회와 문화의 여러 부분을 금전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으며 관련한 여러 기사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씁쓸한 현실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서 중생을 교화하실 때에도 이와 같은 환락과 유흥의 문화도 발전하였던 같다. 오락(娛樂), 환락(歡樂), 희희(嬉) 등의 여러 단어가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고 피해야 하는 장소로 유흥이 이루어지는 곳을 언급하다. 또한 지금의 베이살리라는 농촌의 지역을 밤낮의 환락이 멈추지 않는 뜻으로 광엄성(廣嚴城)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에는 가장 번창하였고 생기가 넘쳤으나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옛날의 영광은 사라지고 역사적 기억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역사는 인간의 사회활동에 따른 문화의 연속성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그 이면에는 서로가 믿고 의지하는 신뢰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중국의 한시에 산이 아름다워서 명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산에 사람이 머물러서 산이 유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므로 많은 힘과 역량을 가진 존재이다. 이러한 힘과 능력은 정직하고 합당하게 집행되어야 사회가 맑고 향기로워진다. 우리들은 이러한 능력을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선조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은 밝은 미래가 펼쳐지리라고 기대하여 본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3·1운동과 용성 그리고 태극기

3월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면서 생명이 솟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걱정 속에서도 산에서 솟아나는 푸릇푸릇한 생명의 색깔들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아직은 으스스할 때가 있는데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뜨겁게 느껴지는 3월에는 생각나는 사람들이 더욱 많다. 나는 그 가운데 용성(龍城) 백상규(白相奎, 1864-1940)를 생각한다. 용성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시작시기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용성은 불경번역에 관심이 깊었다. 용성은 3.1운동 후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천도교 교전이 한글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출옥 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어 불교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역경초조(譯經初祖)라고 불릴 만하다. 또 직접 농사를 지으며 선수행을 실천한 선농초조(禪農初祖)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경초선(勁草禪)과 같은 동아시아 선의 전통과도 연관해 생각해 수도 있을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지금 식으로 말하면 평소 자기 일 자체가 바로 선인 그런 생활불교, 실천불교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또 용성은 당시에 어린이들을 위해 현대음악 형식으로 직접 작사ㆍ작곡한 찬불가를 풍금을 연주하면서 보급했다고 한다. 또 여성 불자들이 참선 수행할 수 있도록 사찰에 부인선원을 개설해 운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시대를 앞서간 분이었다. 특히 나의 이목을 끈 것은 그가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1861-1922)와 3ㆍ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국가 이름과 태극기라는 국기 이름을 주창했고, 민족대표들의 동의를 얻어 3ㆍ1운동에 이것들이 쓰였다는 것이다. 용성은 스님이었다. 또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였다. 민족대표 대부분은 천도교와 기독교계 인사였다. 그들은 태극기를 국기로 삼자고 주창한 스님인 용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민족대표들은 당시 한국인들의 심상 속에서 유교와 도교적 진리를 상징하는 태극이 민족의 보편적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여겼던 것일까? 이런 점들은 앞으로 더 살펴보아야 할 과제로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태극은 그렇게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자랑스럽게 만드는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기 태극기는 욕된 20세기 시작시기에 3ㆍ1운동과 함께 우리의 상징으로 태어나서 우리의 영광된 미래의 역사를 만들며 세계사에서 우뚝 솟아오른 대한민국의 상징이 됐다. 태극은 고대 동아시아의 공통 유산인 주역에도 등장한다. 태극은 아주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다. 태극은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가지 원리인 음양이 뭉쳐져 있는 진리의 상징이다. 태극기가 국기로 사용되게 된 경위나 역사에 대해서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적이 없는 것 같다. 태극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아마도 3ㆍ1독립운동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가 태극기를 국기로 삼은 데서 유래하는 것 같다. 그가 대한민국이란 이름과 태극기란 국기의 이름을 사용하게 한 분들 중 아주 초기의 가장 중요한 분들 중 한 분인 것은 내 가슴에 새기고 싶다. 용성의 무미(無味)스럽고 무사(無事)한 오도송(悟道頌)도 함께! 용성은 용맹결사 정진 끝에 보리도를 깨치고 낙동강을 건너면서 오도송을 읊었다고 한다.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그는 깨달은 이후 금오산에 걸린 달이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경치를 즐기며 강에서 고기 잡고 갈대꽃을 즐겼다. 그는 편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선각자로서 그 시대의 할 일을 하였고, 그리고 자기 길을 담담히 그렇게 갔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인격(人格)의 몫

3ㆍ1운동 100주년의 해이다. 그해 4월11일 상해에서 탄생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헌장(憲章)과 조각(組閣)으로 조직된 기억의 실체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해에 남겨진 그 기억의 터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 했다는 헌법 전문을 애써 부정하면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어떤 인격의 소유자들일까? 심지어 을사오적이었던 이완용은 이 운동을 가리켜 삶 중에 죽음을 구하는 허설(虛說)과 망동(妄動)이라 치부하였고, 민족대표자 서명을 거부했던 윤치호는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같은 시대 같은 삶의 상황에서 살았던 각기 다른 인격의 모습들이다. 인격은 타고나지만 교육과 학습을 통해 개발된다. 사람은 저마다의 판단대로 옳은 듯이 살아가지만 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수시로 평가되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을 매개로 나 자신을 인식한다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처럼 사람은 제멋대로 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살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당한다고 했던 옛 로마 사람들의 인식은 틀린 말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자기만 옳다하고, 다수의 의지와 판단과 결정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대책 없이 정제되지 못한 선동적인 발언을 하고, 가짜 뉴스를 퍼뜨리면서 공공성(公共性)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인격의 소유자들일까? 타고난 원죄의 본성 때문에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돌진하는 괴물성의 발현은 아닐까?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롬 7:15)고 한 것은 이런 악행을 일삼는 인격을 두고 한 탄식이 아닐까? 사회가 공공성을 담보로 형성하고 경영되는 인격의 집합체라고 할 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그 공적 사회에 동의하고 동참하는 개인으로서 인격의 몫이다. 그러므로 사회가 평안하기를 원한다면 지독한 비민주적 독재가 행해지지 않는 한 신뢰하며 지켜보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인격의 역할이라 하겠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인생이란 서로 숨은 척하는 숨바꼭질이라 하더라도 나는 인격적인 접촉을 촉구하기를 그만두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인격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친 감정은 인격을 상하게 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멍들게 할 수 있지만, 신뢰를 동반한 감정은 인격을 성숙하게 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100%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공적으로 밝혀지고 결정된 사실을 아니라 하고, 터무니없는 거짓을 조작하면서까지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보호받아야 할 그 인격이 버려질 쓰레기처럼 취급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봄날의 따스한 여운을 생각하며

한해를 맞이하고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명절인 설과 정월대보름도 지나갔다. 고도화된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매우 중요시되고 설렘에 기대가 되었던 기다림의 미학의 여운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옛스러운 정취의 느낌도 낯설게 느껴진다. 희망을 안고 시작한 새해에도 이전의 몇 년처럼 희망과 활력이 넘치는 국가적인 이미지가 아닌 갈등과 대립으로 얼룩진 현실의 문제를 성토하는 기사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역사를 발전시키면서 갈등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렇지만 호모사피엔스인 인류의 하나의 종이 다른 종처럼 도태되지 않고 지금처럼 발전하고 번성하면서 위대한 존재로 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덕목에는 양보와 화합이라는 무언의 합의를 존중하는 인륜이 존재하고 있다. 요즘에 나타나는 난제로서 환경의 재앙인 미세먼지의 출몰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전에도 이러한 문제가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데 『고려사절요』에서는 5, 6월에도 황토비가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흙먼지에 의하여 일어난 황사는 이전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계속되는 자연 흐름의 일부이다. 이러한 반복되는 자연현상에서 문제로 심각해진 상태는 인간의 탐욕이 과도하게 작용하고 있고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따른 국가 간의 갈등도 발생하고 있으나 국내에서도 갈등이 이어지고 있고, 계층 사이에서도 환경과 관련되어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기도 힘든 현실이다. 역사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 국가 간에 일어났던 가장 큰 갈등은 전쟁이다. 부처님께서도 이러한 갈등을 목격하셨으며 여러 가르침을 남기셨는데 해결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먼저 자신을 살펴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세상의 이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을 따르는 윤회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자기가 지은 업이 다시 돌아오며 이것을 스스로가 되돌려서 받는다는 것이다. 요즘 언론을 통해 현실을 살펴보면 사회의 현상을 긍정보다는 부정을, 화합보다는 갈등을, 원칙과 타협보다는 나의 이익이 우선시되어 갈등을 부추기는 형태가 많이 목격된다. 물론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어 많은 정보가 자유롭게 전파되는 현실적인 영향이 크다고 생각되더라도 이기주의적인 사유와 모든 문제를 인간성에 먼저 비추어보고 해결하려는 인성이 아닌 법과 같은 편리한 제도에 의존하려는 기계적인 생활방식이 몸에 익혀진 문화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과 자연과의 상호관계에서도 인간과 인간의 상호 연관성에서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극대화된 이기적인 사유와 행동은 예측이 가능한 현실을 혼란시켜 긍정적인 질서를 창조하는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된다. 우리는 자연의 이치를 알아차리고 우리가 함께 화합하고 서로가 조화되어 자연에서 배운 친화적인 생활방식을 더욱 발전시키고 나와 남의 갈등을 조화롭게 풀어가는 삶의 모습을 봄의 향기에 담았으면 한다. 세영 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천천히 그리고 다 함께

세상은 속도의 시대로 접어든지 오래다. 빠른 것이 좋은 것이며 빠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바쁘게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빠르고 빈틈없는 현대 사회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소외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시간 없이 바쁘게 사는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몇 해 전, 바쁜 우리들에게 마치 선지자같은 신선한 메시지를 던진 한 책이 있었다. 그 책은 바쁜 우리들에게 충고하듯이 새로운 가치를 던졌는데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라는 피에르 쌍소의 글이었다. 행복은 빠름에 있지 않고 느림에 있으며 성공은 이김에 있지 않고 함께 함에 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했었다. 그 느림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생각나는 분들이 우리의 부모님 세대분들이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힘들어 포기하신 어머님을 위로하며 2G폴더폰을 사드리던 마음에서 나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곧 내가 만나게 될 시대임을 인정해야 했다. 오늘을 바쁘게 사는 우리들도 곧 다가올 다음 세대에게 느리다고 힘들어하는 따가운 눈총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밀림의 빌딩숲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은 다 같이 함께 하는 삶이 아닐까? 속도와 상관없이 느림의 미학을 존경하며 빠름의 패기를 격려하는 여러 가치관들이 만나서 서로들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삶 말이다. 예루살렘 안에는 베데스다라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주변에는 신비한 신화를 믿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 작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병이 깨끗이 낫는다는 전설이었다. 38년을 걷지 못하는 사람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려는 절실함이 있었다. 누구도 병자로서 소외당하지 않고 온전한 몸으로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간절함에 그들은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바라며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몸을 던질 준비를 하는 긴장속에서 살았다. 빨라야 한다. 어느 누구 보다도 빨라야 한다. 1등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도 이상한 사실은 연못을 바라보던 그들 뒤쪽에 거대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성전에는 미신보다 훨씬 더 자신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절대자를 향한 신앙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 신앙을 의지하여 성전으로 가지 않고 미신적인 신화의 베데스다 연못에 자신의 삶을 걸어야 했을까? 이유는 종교를 자신들의 도그마(Dogma)로 바꾸어 병든자들을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종교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병자는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 깨끗하지 못한 자들은 거룩한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는 지도자들의 편견과 오만함이 성전에 높은 울타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잘못된 종교적인 신념이 바른 믿음을 떠나 어리석은 미신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모습을 만들어 냈다. 빠르게 그리고 더 빠르게 달려서 제일 먼저 연못에 몸을 담가야 한다. 그래야 나는 인정받으며 그래야 나는 성공한 인생이 된다는 자기모순이 진리가 된 것이다. 이 베데스다의 신앙 속에서 우리는 불행한 과거의 실수를 바라보듯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념과 지역과 세대로 갈라지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적폐라는 단어가 진리와 정의의 잣대가 되어 소수의 느린 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기를 바라며, 그 적폐라는 칼날이 두려워서 과거만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편 가르기 극단이 없기를 소망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자유와 평등, 정의, 인권 등의 가치는 많은 이들의 희생의 결과이고, 이러한 가치의 참된 실현은 한 국가와 국민의 성숙도를 드러낸다. 다양한 가치관, 생각, 주장, 삶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 요구들이 조화를 이루고 사회 통합에 기여 하는 면도 있지만, 현실은 갈등과 충돌을 겪기도 한다. 요즘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은 국민적 분노와 실망감을 안겨줬다. 이제 곧 낙태죄 폐지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앞두고 있다. 교회는 낙태를 고민하고 경험한 여성들의 현실에 함께 아파하며, 우리 모두가 생명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길로 함께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무엇보다 남성들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깊어지고, 여성들이 차별과 편견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법과 제도, 생명존중 문화가 확산되기를 기도한다. 생명 출산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주장은 모든 권리에 우선하는 천부적 기본권인 생명권에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다. 우리 각자 자문해 본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자유가 나를 진리로 이끄는가? 생명이 우선하는가? 생명보다 행복한 삶이 우선하는가? 진리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상대적인가? 아니면 종교의 차이를 넘어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진리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는 진리에 대하여 하느님을 아는 것과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을 깊이 알면 나 자신을 알게 되고, 나 자신을 깊이 알면 하느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38년간 앓아 온 사람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시며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율법을 폐지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마태 5, 17)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법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명확히 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의 규정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 안에 자유로운 분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요한 8, 32)이라 말씀하셨다. 자유는 그 누구의 강제나 구속이 없는 상태에서의 선택과 결정의 행위의 측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선을 향한 자신의 원초적인 정향성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자유가 아니겠는가. 이 세상이 부러워하는 명예와 권력, 엄청난 지식과 부를 소유했다 하더라도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 반면 군부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위해 감옥에서도 진정 자유로웠던 분들, 경제적인 어려움과 육체적인 질병과 장애를 딛고 묵묵히 성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분들이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예수님과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순교자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친 독립 유공자분들, 그분들은 고문과 협박,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자유로우셨다. 삶과 신앙도 마찬가지겠다. 어렵고 힘겨운 일들을 접하고,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 같은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빛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분들! 그분들이 진정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요,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삶을 맛깔나게 하는 소금이 아니겠는가. 유주성 천주교 수원교구 해외 선교 실장 신부

[삶과 종교] 봄비를 기다리며

바쁘고 역사적인 2월이 지나가고 있다. 2월4일은 봄이 시작됐다는 입춘(立春)이었고, 2월5일은 설이었고, 2월8일은 2ㆍ8독립선언 100주년이었고, 2월19일은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우수(雨水)다. 27~28일에는 2차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내가 가야할 길,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찾아다니다가 문득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1515~1565)가 생각났다. 그는 선교회통(禪敎會通), 유불회통(儒佛會通), 원융무애(圓融無碍) 사상가로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상호 공존을 이야기한 분이다. 상호존중과 공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보통 대립하는 것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共感)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때가 많다. 서로 이해와 공감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립과 갈등은 해소되지 못하고 그 골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가 정말 문제다. 나는 그럴 때, 서로 이해하라거나 공감하라거나 존중해주라고 하기보다, 마음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다시 보라고 하고 싶다. 봄비가 시작되는 우수(雨水) 앞에서 고루 내리는 비를 뜻하는 보우(普雨)의 시를 하나 소개하겠다. 참 오묘한 작용을 알고 싶다면(欲知眞妙用), 매일 일어나는 일이 그것이네(日用事天然). 물 받아 차를 달여 마시고(汲水烹茶飮), 자리에 올라 다리 뻗고 잠드네(登床展脚眠). 솔개가 푸른 은하수를 가르며 날고(鳶飛橫碧漢), 물고기가 유유히 깊은 연못에서 노니네(魚躍入深淵). 자연은 힘차게 약동하며 끊어짐이 없으니(潑潑無間斷), 푸른 구름도 먼 산줄기에 뭉게뭉게 일어나네(靑雲起遠嶺). 선(禪)은 분별과 조작, 시비(是非)를 넘어서되 그것에 몽매(蒙昧)하지 않은 평상심(平常心)을 갖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삶의 신비는 바로 자연스러운 일상생활 그 자체다. 목마르면 물 받아 차 달여 마시고, 졸리면 침상에 올라 다리 뻗고 누워 잠드는 것이다. 그것은 숲이 우거지고 들판이 널려 있던 시절, 눈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의 솔개가 나는 것이고, 연못의 물고기가 유유히 노닐며 부단히 그렇지만 여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이런 일상 속에서 일상이 곧 진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4절기 중 봄이 시작되는 입춘(立春)이 지나가고 봄비가 시작되는 우수(雨水)를 기다리고 있다. 옛 시절에는 이 시기에 날도 풀리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집집마다 각 가정에서 좋은 뜻의 글귀들을 써서 집안 천장, 대들보, 기둥 등 여기저기 붙이기도 했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분별하고 조작하고 시비를 따지지 말고 그냥 집안 어른들과 아이들이 오순도순 무슨 좋은 글귀를 써붙일 지 의논하고 각자 하나씩 써보자. 그것이 별것 아니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그것이 참 별것이었고, 그것들이 약동하고 있는 진리 자체였음을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 100년 전의 2월8일, 100년 전의 3월1일을 기점으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소원인 독립을 위한 운동을 펼쳤고, 그것들의 고귀함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당시 그들이 독립을 간절히 원하던 이유가 바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 삶과 평범한 일상 말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괴물

새해의 첫 달이 훌쩍 지나갔다. 앞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을 만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세속의 괴물이 되어져 가는 것 같아 두렵다. 10년도 더 지난 2006년에 봉준호 감독이 쏘아 올렸던 영화 괴물의 캐릭터가 남도의 친숙한 어종 짱뚱어였다고 할 때 그 두려움이 더해진다. 괴물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겼다고 보는 생명체로서 정상이 아닌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친숙했던 짱뚱어가 괴물로 변형될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그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기에 당연히 두려움이 커지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최근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SKY 캐슬은 그런 우려를 더해주고 있다. 스카이(SKY)는 대한민국의 상위 서열에 배치된 대학의 머리글자이기도 하겠지만 하늘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이기도 하다. 즉 하늘처럼 구별되어진 특별한 곳에 살면서 최고의 명성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 드라마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괴물을 사육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드라마 방영 중에 의미 있는 장면이 살짝 비치고 지나갔었다. 이 스카이 캐슬을 고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동화작가의 손에 쥐고 있었던 신자유주의 인격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은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라는 책이다. 저자인 파울 페르하에허(Paul Verhaeghe)는 이 책의 서문에서 현대인의 일탈을 소개하면서 그 이유를 규범과 가치의 실종, 적대적 반항장애로 지적한다. 특히 정신의학에서는 우리 안에 숨은 짐승이 그 원인이라고 본다고 말하고 그 내재된 짐승이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문화를 지배하는 동안에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형돼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변형된 것을 신자유주의적 인격이라 지적하면서 그렇게 상속된 경제 능력을 물려받은 자는 사다리의 높은 곳에 머물지만 빚을 물려받은 자는 낮은 곳을 떠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고 교육을 많이 받은 부모는 자식들이 태어날 때부터 호기심과 지식을 전달하여 그들의 아이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공부를 잘할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은 이 두 가지 형태의 유전이 결합되어진 돈과 학위를 중시하는 새로운 정적 사회를 가동하면서 소수의 상류층은 중산층이 자취를 감춘 사회에서 다수의 하류층을 디딤판으로 삼아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 설명하고 이로 인해 공격적으로 변하는 사회관계에서 현대 사회의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성경이 처음 다루는 괴물은 네피림이다. 번성하는 사람이 낳은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를 삼아 낳은 아들이다. 비록 성경은 이들이 고대에 명성을 얻은 용사라고는 하지만 문제는 여호와께서 사람 지었음을 후회할 정도로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고 한다(창세기 6:1-6). 심지어 그들의 괴물성(怪物性)은 하늘에 도전할 정도였다고 하니(창세기 11장) 마치 현대의 과학기술이 신의 창조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물론 신은 그들의 사악함을 홍수로 쓸어버리시거나 다시는 악을 꾸미지 못하도록 지면에서 흩어버림으로 대응하시지만 말이다. 신은 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었지 괴물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교만한 사람이 자기를 뽐내려고 괴물을 만들어 갈 뿐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언 16:18)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굳이 괴물이 되어 혼자 살 인생이 아니라면 겸손히 주변을 돌아보며 여유 있게 살아가는 법도 배워둬야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바보들의 콧노래 ‘바보 타령’

거짓인 줄 알면서도 따라가고, 속이는 줄 알면서도 속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바보나, 천치라고도 한다. 남들이 자신을 바보라고 하면 화를 낼 텐데, 불쾌하게 여길 줄도 모르면 정말 바보가 아닐까? 몇 년 전 모 일간지의 대기자 한 분이, 비록 교육적인 좋은 뜻에서지만, 필자를 전직 모 대통령과 김추기경과 함께 바보라고 부르며 쓴 글이 있었다. 바보라는 소리에 우선 못마땅하게 느꼈지만, 유명한 분들과 같은 바보반열에 올리면서도(?) 좀 차별화하여, 과분한 영예로 여기려는 자신이 진짜 바보라는 확증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바보 신부의 말을 듣고, 성당에 다니며,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에 성금을 바치는 신자들도, 혹시 바보 신자들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이런 바보 신부와 바보 신자들이 있는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도 바보 신자들의 천주교회가 아닐까. 특히 103위 성인들 추모 대성당 없이, 아직도 100여 년 전 프랑스신자들이 지어 준, 1천500여 명 수용하는 420여 건평의 구호물자(?) 대성당뿐이라, 우리 손으로 우리식 큰 성당 하나 짓는 일에도 무관심한 이들은, 저런 구호물자 성당조차도 과만한 바보 신자들이 아니랴! 바보의 특징 중에는 반성을 모른다는 것인데, 이 어찌 정치적 선거 마당에서만 보는 바보 현상이랴? 김추기경님이 자화상과 함께 자신은 바보라고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모 대통령 역시, 스스로 자신을 바보라고 공언한 적이 있다지만, 필자는 스스로를 바보라고 말하거나 글로 쓴 적이 없음을 되새기며 생각하는 자체가 마치 술에 만취할수록 자신은 절대로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우겨대듯, 스스로가 바보인 줄도 모르고 자신은 바보가 아닌 체하며 사는 것이 바로 자신이 진짜 바보라는 실증이 아니랴?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와서, 주책을 바가지로 떨면서 떼 지어 몰려다니는 뻔돌이들의 마당이 어찌 정치계의 선거 현장이나 돈주머니 흔드는 투전판에서 뿐이랴? 속고 속으면서도 으스대는 바보 배우들 간의 억지웃음과 악수는 바보회 종신회원으로 추대되는 것이 아니랴? 남들이 그어놓은 38선으로 고희를 넘기는 분단의 바보 나라, 바보 국민들이 이제 또, 국내외에서 영수회담 추진이다!, 남북통일 추구다!, 북한 비핵화 담판이다!, 하지만, 문명의 격차가 사상으로 격돌하는 소리가 혹시라도 전란의 포성으로 급변하지 않길 빌면서, 바보들의 가냘픈 메아리 저 너머에서 펄럭이는 깃발 사이의 야단(野壇)과 법석(法席) 가설무대만을 바라볼 뿐이지만, 무력하고 무능한, 우리 바보 나라 民草들도 이제는 죽을 힘 다하여 한마디 기도만은 바칠 수 있어야 하지 아니하랴!?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런 회담에 모이는 바보 나라 쌍방 대표들 생각대로 아무것도 되지 말고, 이들을 불러 모으시는 하느님의 뜻이 온 인류가 바라는 합당한 소원과 함께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이 시대를 아름답게 살아내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후기현대사회라고 말한다.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우리에겐 미지의 불안감으로 다가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3가지가 없다. 첫째가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 17~18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를 통해서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며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눈을 뜬 것은 참으로 중요했으나 그 결과로 절대적인 가치관들이 무너져 버린 것은 인간의 본연의 신분을 망각하게 된 것이다. 인간 내면 속에 있는 이 종교적인 심원은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본질이기에 종교적인 갈등은 심각해졌다. 절대적인 신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인간이 택한 것은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 되었고 모든 것은 다 신의 형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모두가 옳다, 우리는 모두가 다 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자연과 하나라는 사상을 갖게 되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아야 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둘째는 이제는 포괄적인 세계관이 없어져 간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원주의가 생겨난다. 문제는 그 중심에 나라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함께라는 단어가 사라져 간다. 이 무서운 나만의 시대는 느낌과 체험의 세상이 될 것이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만이 인정되는 정신문화를 갖게 되어 진다. 이 시대에 우리는 이미 깊이 접어들고 있다. 셋째는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관심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관점이다. 즉 자율적 자아관은 모든 가정과 혈연의 관계까지도 파괴해 간다는 말이 된다. 이런 시대 속에서 정답은 하나다. 의미 있는, 소중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삶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자아가 질서 속에 있어야 하며 배려 속에 존재해야 하며 상대를 아낄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극도로 불안해 질 것이다. 인간과 애완짐승들의 구분이 사라질 것이며 그 중심에는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공허하고 외로운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봉사하라, 섬기라 그리고 겸손하라 이것이 우리를 이 시대 속에서도 밝게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함께라는 단어를 의미 있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값진 인생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오늘, 지금 바로 내 주변을 돌아보며 격려의 문자 한 통을 보낼 사람을 찾으라. 전화 한 통을 통하여 마음을 전달할 사람을 찾으라.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꼭 의미 있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정하라. 세월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리고 곧 우리의 삶은 결산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날에 후회 없이 한 세상 잘 살았다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이 될 것이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새해를 맞이하는 상념

새해를 맞이하는 감정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지나쳐온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삶이 펼쳐진다는 발전적인 사유를 지니게 된다. 인간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익혀온 습관에 의하여 펼쳐지는 삶은 다양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모두가 지난 공통성도 우리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는 한국에 겨울의 환경이라는 특성을 지속시켜 우리들의 뇌리에 연상으로 남아있다. 신년을 맞이한 며칠간의 시간에는 지구환경이 변화된 영향으로 겨울의 이미지인 하얗게 쌓인 눈보다는 미세먼지라는 환경의 영향이 매일 뉴스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고 국가 사이에 갈등도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환경에 대한 역습으로 개인주의적 경향이 심화되는 사회현상은 점차 특정한 공간으로의 폐쇄성을 심화시킨다. 인간은 서로에게 공감하고 화합하는 존재인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이러한 현상은 점차 멀어져가는 신기루와 같이 인식된다. 석가모니가 인간사회에 강조한 덕목 가운데의 하나가 화합이다. 화합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환경 속에서 서로가 조화를 맞추어 각자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바라보면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단순히 인간과 축생 및 환경의 요소가 어울려져 있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삼라만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나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이다. 여러 복합적인 영향으로 작년부터 이어진 겨울에 눈이 부족한 탓인지 사람들의 정서도 메말라가는 것으로 착시되어 보이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상념이 흐트러진 것인가. 주위를 뒤돌아보아도 아름답고 화합하는 이야기보다는 갈등과 사고의 현상들이 많이 들려오고 미래의 희망보다는 우울한 현실을 염려하는 여러 전망들이 더욱 많이 생산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새해에 설계되어야 할 도덕과 인륜의 보편적인 문제보다는 탐욕과 갈등의 지엽적인 문제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를 발전시킨 이면에는 인간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과학문명의 발전이 적었던 시대에는 인간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강하였고 이러한 사유는 인간사회의 제도와 규범에 많은 영향을 끼쳐서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범주로 구체화된 화합하는 삶이 존재하였고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현상계를 살아가는 중생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변증법적인 사유가 존재하고 있고 호기심으로 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가 돌아가면 사람들도 바뀌고 발생하는 사례들도 변화지만 반드시 옳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님을 인류의 큰 사건에서 확인되지 않는가. 역사서인 고려사를 살펴보면 56월에도 흙비가 내리는 사실을 경계하고 있다. 오늘에 많은 문제로 인식되는 미세먼지라고 불리는 주성분은 흙으로서 인간이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근원적인 터전이고 우리에게 많은 자원을 제공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었다. 이러한 의지처가 지금같이 문제아로 전락한 이유는 인간에 의하여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인 지구가 인간들의 오만과 독선에 심하게 훼손된 까닭일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환경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강하고 위험한 존재들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위험이 아닌 화합을 통한 개인과 인류의 발전을 발원해 본다. 세영 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새해 ‘손가락 하나’를 세워 올리며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무엇을 결심하고 계획하는지를 생각하고 또 말들을 한다. 나는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지난해에 이어 이 생에서 내게 주어진 길은 과연 무엇인지 물어본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답답했다. 왜인지는 모르는데, 답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또 더 나이가 들면서 그 답답함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희미하게나마 알아는 것 같다. 길을 잃은 것 같으면서도 어찌어찌 길을 찾아가는 듯했다. 전등록(傳燈錄) 권11에 따르면, 9세기 무렵 무주(州) 사람인 구지(俱) 선사가 살았다. 구지가 젊은 날 좌선으로 일관하면서 용맹정진(勇猛精進)하던 시절 한 비구니가 그를 찾아와 세 바퀴를 돈 다음 한 마디를 제대로 한다면 갓을 벗겠다고 했다. 그러나 구지 선사는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다. 그 한 마디가 무엇인지 구지에게는 화두가 되었다. 천룡 선사를 만나 깨닫기까지 그의 수행이나 고뇌에 찬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는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역시 어둡고 희미한 길을 가면서 잘 가고 있는지 회의에 빠졌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천룡(天龍) 선사를 만나 깨달았다고 한다. 구지는 입적할 때까지 천룡 선사의 손가락 하나를 세워 올리는 것을 통해 깨달았고, 그것을 평생동안 써도 다 못썼다고 하고 입적했다. 무문관(無門關) 3칙 구지수지(俱指竪指) 이야기는 구지가 자신을 따라하는 한 사미승을 깨우친 이야기다. 구지 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도 항상 손가락 하나만을 세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방문객이 한 사미승에게 선사는 어떤 법요(法要)를 가르쳐주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사미승은 역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나중에 선사는 이 말을 듣고 그 사미승에게 물었고, 사미승이 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그 순간 선사는 이 사미승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이 사미승은 너무 놀랐고 너무 아팠다. 통곡을 하며 달아났다. 그때 선사가 그 사미승을 불렀다. 이 사미승이 머리를 돌리자, 그때 선사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 순간 그 사미승은 바로 깨쳤다. 보통 이 이야기를 들으면 구지의 행동이 괴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미승이 구지 선사의 손가락을 따라한 것은, 구지 선사의 손가락만 보았기 때문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 달을 보라 가리켰더니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쳐다보는 꼴이다. 사미승의 손가락을 잘라낸 것은 손가락에 대한 집착을 놓고 달을 보라는 구지의 극약처방이었다. 사미승이 고개를 돌려 선사가 세운 손가락을 보았을 때, 사미승은 더 이상 없는 손가락이 아닌 손가락 너머의 달을 마주한 것이다. 깨친 후 나와 세상은 무엇이 달라질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 완전히 다른 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다.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전히 똑같이 일어난다. 배도 고프고, 졸리기도 하다. 그런데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것이 일상의 권태로운 일이 아니라, 늘 새로운 일이 된다. 일상(日常)이 곧 비상(非常)이 된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 학기를 시작하며 작정하고 윤치호의 일기와 그에 관한 연구 논문들을 읽었었다. 유교 조선의 암흑기에 태어나 열강의 탐욕에 노출되어 있던 개화기를 거쳐 일제 식민지와 우울한 해방 초기에 살았던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풍운아의 삶이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에 동의하여 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동화되어 간 듯한 그의 일생을 두고 연구자마다 시각의 차이가 있어서 논란과 비판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그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던 한 인간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세계와 국가와 사회와 주변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끝없이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고민하는 존재이다. 그 대상의 여부에 따라 성찰의 범위와 고민의 한계가 결정될 수는 있겠지만, 매사에 자신의 삶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깊이 고민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라 하겠다. 특히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시작할 때는 마치 철학자의 심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대표적 작품인 지옥의 문에는 절규하는 온갖 영혼과 군상들의 고통스러운 형상이 부조되어 있다. 로댕은 스스로 이 작품을 자신만의 방주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할 때 그의 이 작품은 어떻게 살아야 지옥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그의 몸부림의 표현이라고도 하겠다. 그것을 결정적으로 확인시켜준 것이 그 문 상단 아래 고통스러운 태도로 고뇌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멀쩡한 사람도 취하기 어려운 불편한 자세로 구부린 채 고민하며 생각하는 그 사람은 어쩌면 로댕 자신이었을 것이고 시대의 풍운아 윤치호였을 것이며 화살같이 빠른 일생을 수고하다가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평범한 우리 자신을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해는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올해만큼은 더 잘 살고 싶은 것이 보편적 인간의 생각이라고 할 때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숙제이겠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의 고민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어떤 청년이 예수께 나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16)고 질문하였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의 대답은 먼저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계명은 약속이다. 그것은 먼저 신과 인간의 약속이고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다. 또한 그것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의무사항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질문하는 인간의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게 사회 관습적 의무 이행으로 끝나는 무감각적이고 무감동적인 계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자기희생이고 헌신이다. 의무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헤아림이 절대 필요하겠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가진 재물이 많아 고민하며 쓸쓸히 돌아가 버렸던 청년처럼 애써 고민하고 계획한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면 좋을까? 하나 더 가지려고 계획하기 전에 자신을 한 번 더 살펴보면 좋겠다. 그리고 세계와 국가와 사회와 가까운 이웃을 돌아보면서 유익을 주는 빛이 되고 필요한 소금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태풍에 아수라장 된 유럽의 성탄 대목장들

2000년 성년 맞이는 프랑스 파리에서라는 홍보물이 거의 1년 전부터 세계 주요 매스컴에 광고를 거듭하면서, 프랑스 파리 시의 중심가 대로변 양쪽의 가로수 마로니에 나무들도 온통 황금색 반짝이로 장식하여, 그 황홀 찬란한 풍경이 지상 천국으로 착각할 정도라고 하였으며, 시내 유명 호텔들은 예약 만원 사례 라는 소리가 오히려 새 경쟁 선전 광고가 될 정도였다니! 그도 그럴 것이 천주교회가 2천년 역사를 마치면서 제3천년대로 접어드는 해가 마침 성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이 되므로, 로마 교황은 그 해를 대성년(大聖年)으로 선포했고, 유럽 각국에서는 대목장을 보려고, 앞다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중에도 프랑스 파리 시내는 우리 돈 수백억 이상의 예산으로 예술적인 실력을 발휘해, 대성년에 전 세계에서 오는 유명인사들 손님맞이에 최상의 정성을 다하였다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1년 후, 백과사전에까지 기록된 통계를 보니, 천주교회 대성년 2천년에 로마의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 참배 차 로마를 찾은 외국 순례객들은 3천500여만 명이 넘었다고 하였으나, 파리는 태풍피해 복구사업으로, 아예 대성년 맞이 흥행은 통계조차 없었다. 그 이유는 2000년 대성년 맞이 직전, 1999년도 성탄절, 즉 12월 22일(?) 경, 뜻밖에도 최악의 태풍급 회오리바람이 파리 지역에 약 3일간 불어 닥쳐 휩쓸고 가는 바람에, 노트르담 대성당 지붕의 오른쪽 첨단 십자가 받침 돌축대까지 한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파리의 성탄절은 전무후무한 성탄 아닌, 성난 아수라장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던 때이었다. 심지어 파리에서 100㎞ 이상 떨어진 베르사유 고궁 마당에 서 있던 오래된 큰 참나무와 미루나무들도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성년 사순절에 로마를 가다가 파리에 들러, 일부러 베르사유를 둘러본 필자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잘 알던 노인 신부님은 저녁을 함께하시면서, 돈벌이 위한 손님맞이에만 정신이 팔려서, 성탄 하시는 아기 예수님 맞이는 아주 잊어버렸어! 하느님이 노하셨지! 하고 말씀하셨다. 성탄의 의미와 가치와 정신과 교훈을 망각하고, 환락의 돈벌이에만 환장한 세대가 성탄절을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의 인류가 전쟁을 버리고, 특히 핵전쟁을 피하려면 성탄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주의나 경제제일주의에만 집중하지 말고, 아기 예수를 본받아 온 인류가 성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약소국들과 동맹이니, 혈맹이니, 하는 강대국들은 자기네 나라 경제발전만이 약소국들이 존립해야 하는 유일한 목적으로 삼도록 강요하지 말고, 약소민족들과의 약속을 한 신짝처럼 내버리지도 말며, 광란의 칼춤으로 대국 황제로 뽐내는, 이 시대 골목대장 뻔돌이 행세를 그쳐야만, 다가오는 핵전쟁을 인류가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아기 예수를 본받아 모두 성탄 하러 가자! 주막집 마구간 말구유는 가정마다 직장마다 마을마다 우리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다. 성탄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마을이 곧 베들레헴이고, 성탄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가정이 곧 주막집 마구간이며, 성탄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곳에 바로 아기 예수가 성탄 하여 계시며, 전란이 사라지게 하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 높은 지위보다도 필요한 역할이 더 중요하다. 크고 넓은 집, 좋은 안방은 쳐다보지도 말자. 누구나 즐기는 그런 곳은 아무나 가서 앉을 수 있지만, 마구간 말구유에는 아무나 와서 눕지 못한다. 마음이 아기 예수를 닮은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만이 차지하는 자리다. 온 인류와 특히 신앙인들의 성탄하는 생활만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민족 속에 성탄의 평화를 깃들게 함으로써, 핵전운(劾戰雲)도 영구히 사라지게 하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될 것이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소통과 화합의 자기애를 바라보며

어느덧 한해의 끝자락에 이르렀고 바쁜 현대 생활에 쫓기던 일상을 반짝이는 추위에 다시 느끼게 된다. 연말이라는 시간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주위의 힘들었던 이웃을 살펴보게 하는 시간이고 일 년의 숨 가빴던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며 우리들의 문화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적으로 변화가 많이 일어났는데 세계에 한류라는 문화가 확산되는 점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특유한 정서가 있는데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미움이다.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사랑이 없는 미움도 없다는 뜻이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는 고통을 여덟 가지의 범주로 나누고 있는데 생로병사를 제외하고 그다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과 싫은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이 있다.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은 일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눈을 뜨고 활동을 시작하며 남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즐거움과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과 갈등은 과거의 어디에서와 어느 시간에서나 존재하였고 미래에도 존재하겠으나 인간은 특유의 활동적인 방법으로 이것을 극복하여 왔다. 종교와 문학 및 예술이 대표적인 장르인데 모두가 인간의 성숙된 문화로 이끌었던 방편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련되고 고도화된 문화가 때로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크게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사회는 아주 가깝고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세계의 어느 지역이라도 하루 안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발전하였고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정보는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지구촌의 일상을 눈앞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빠른 현실에서도 인간의 사유 방식은 어찌 빠르게 발전하지 않는가? 이것의 이면에는 자기애라는 이기적인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기애가 없다면 남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은 부모가 교육을 시작하면서 남과의 관계인 소통을 가르치고 또한 뒤에 성장하면서 양보와 절제를 요구받게 된다. 배려와 헌신이 없었다면 인간이 만물의 주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또한 과학의 힘으로 신의 영역까지 접근할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여러 과정에는 자기애를 발전시켜 남까지도 포용하는 확대된 자기애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여러 부분에서 자신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여 남을 경시하는 문화가 많이 눈에 띈다. 정치적인 갈등과 경제적인 갈등은 사회의 여러 부분을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고 대중들은 각자의 이익을 찾아서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러면서 양보와 타협이라는 단어는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이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나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주었던 공동체의 삶의 모습은 어느 때인가부터 찾기 어렵고 학창시절부터 갈등과 무질서가 눈에 많이 목격되는 우리들의 현실은 언제나 성숙되는 것인가. 연말이 다가오면서 이전의 모습보다는 많이 성숙되었으리라고 기대하였던 정치와 경제는 많이 개선되지 않았다. 이 땅에 살아왔던 조상들이 오천 년의 역사를 이어왔던 것은 강인한 생명력도 있었겠으나 근원적으로 소통을 통한 배려와 화합이 자기애를 넘어서 사회로 승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땅에 살아왔던 조상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와 소통과 화합을 일상에서 실천하였던 행동가였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때는 추위와 외로움을 더욱 느끼는 때이다. 나를 우선시하는 것이 이기적인 삶이 아닌 남과 조화로운 삶을 통하여 사랑과 미움을 잘 조화시키는 삶의 방식을 되돌아 볼 때이다. 세영 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힘들 때 쉬어가는 용기와 지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 대상이 유형(有形)이던 무형(無刑)이던 말이다. 그래서 자연(自然) 앞에 제사를 드리고 짐승에게도 의지함을 보이고 고등종교에 깊게 심취해 가는 것이다. 그 종교성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지금보다 더 위험한 욕망의 결과를 스스로 초래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종교적 쉼마저도 종교의 비본질적 분주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신앙 안에서 조차 진정한 쉼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치열하게 뛰어야만 하는 세상살이 삶 속에서 우리는 인생을 즐거워하기 보다는 그 인생을 살아내기마저 바쁘다. 잠시라도 그 모든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고 주위를 살펴볼 여유도 없이 우리는 많은 사람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다 함께 뛰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왜 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여유도 없다. 나는 어디로 뛰고 있는가?의 방향성을 잡을 시간도 없다. 일단 뛰면서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우리는 지친다. 견디다 지친 삶들이 하나 둘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이미 망가진 나의 마음과 몸을 보게 될 때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지만 마음과 육체로부터 돌려받는 것은 병든 고통 일 때도 있다. 그때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잘못 살아온 낙오자로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 우리는 인생의 가치를 잃어 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극단의 선택도 하게 된다. 모든 종교는 진리를 찾고 고상한 삶을 살아가는 데 목적이 있다. 인생의 답을 찾고 싶은 욕망이 절대자를 향한 구도적인 자세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대자는 우리에게 나침판을 내어주지 지도를 선물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은 그 나침판을 가지고 방향을 잡으며 내 자신을 돌아봄으로 믿음의 감격과 기쁨을 얻는다.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연약함을 고백할 때 유한자의 자세를 갖게 되고 자신의 옳음이 아닌 절대자의 옳음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절대자는 우리의 인생을 급하게 설계하지 않으셨다. 인생을 빠르게, 빠르게로 외친 것은 유한한 우리의 어리석은 경쟁의 심리였을 뿐이었다. 힘들면 쉬어가자.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실수를 줄이고 내 인생의 의미를 맛보면서 살아가 보자. 인생 살아내기가 고달플 땐 나를 먼저 사랑하고 자신의 인생 타임라인에 쉼표를 찍고 잠시 들숨과 날숨을 들이키며 멈추어서 쉬어보자. 한 해도 열심히 뛴 내 자신에게 수고의 감사와 애씀의 칭찬을 해 준다면 우리 인생은 자신으로부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깊은 호흡하고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는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주변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리고 괜스레 주변에 분노를 쏟아 내지도 않는 절제된 자신의 인생속도를 얻게 될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이 깊게 물들어지는 21C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서 인생의 진정한 승부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의 싸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서 만족하는 인생의 삶을 살아오신 좋은 선배들의 인생은 먼저 열심히 뛰기 시작한 삶이 아니라 천천히 자신이 뛰어야 할 방향과 목적의 이유를 결정하고 자신만의 길을 뛰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준비된 인생의 삶은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그들의 기쁨과 아픔도 함께 나누어 가는 다 함께 잘사는 삶이 되어져야 한다. 지쳤다면 쉬어가자. 힘들다면 모든 것을 멈추고 잠시 멈춤의 쉼을 가져보자. 그 쉼의 여유가 참 내 인생의 중요함을 알게 해줄 스승이 될 것이며 지친 나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위로자가 될 것이다. 잘 사는 인생은 경쟁자를 앞지를 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인생을 동행할 때 얻어지는 상급이다. 그래서 인생의 쉼표는 인생에 용기와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다 힘들 때 쉬어가는 용기와 지혜를 만나보길 기도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대학입시와 첫눈, 그리고 깨달음

지난 11월 24일과 25일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등 여러 대학의 수시 논술전형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그중 24일은 첫눈이 내렸다. 이날의 첫눈은 전에 없는 폭설이었다. 많은 학부모들과 수험생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여러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나도 30여 년 전에는 수험생이었고, 4년 전과 7년 전에 아들과 딸이 수험생인 학부모였다. 수험생으로서 또 수험생을 둔 부모로서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그 심정을 잘 이해한다. 온 세상이 새하얀 아름다운 첫눈이었다. 그런데 대학 수시 논술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그 아름답고 풍성하게 내리는 새하얀 첫눈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그것은 수험장으로 가는 길에 장애물일 뿐일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80퍼센트 이상이 대학에 들어가는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대학입시는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대학을 왜 이렇게 많이 들어가려고 하고, 또 들어가는가? 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출세를 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대학에 가지 않은 많은 사람 가운데도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많다.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어른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또 대학에 들어간다고 출세가 보장되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세속적인 바람과 뜻 외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바라고 뜻하는 것은 대학의 본래 뜻과 연관되는 것은 아닐까? 대학(大學)의 본래 뜻은 큰 배움이다. 무엇이 큰 배움인가? 그것은 유가 전통에서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을 제일강령으로 한다. 그런데 밝은 덕이란 무엇인가? 여러 이야기가 있겠지만, 종교적으로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이다. 큰 배움이란 자신의 신성과 존엄을 밝히는 것이다. 결국 내 안의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는 내 안의 불성을 밝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은 1905년 인제 백담사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었고, 1907년 4월 건봉사(乾鳳寺)에서 수선안거(首先安居)를 성취한 후 10년 하고도 8월이 지나 추운 겨울 12월 3일 눈발이 유난히도 흩날리는 강원도 설악산 산골의 오세암에서 오도를 하여 사나이가 된 것이다. 만해는 오도한 자기 면목을 눈 속의 복숭아꽃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38세가 되던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선 중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이 깨달음의 시(悟道頌)를 지었다. 사나이 가는 곳은 어디나 고향인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나그네의 시름 속에 있었나? 한 마디 소리에 삼천 세계가 부서지니, 눈 속의 복숭아꽃 산산이 흩날리네. 한용운의 오도송은 한문으로 지어졌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天界) 설리도화편편비(雪裡桃花片片飛) 그리고 끝의 세 글자를 만공(滿空, 1871-1946)이 편편홍(片片紅)으로 고쳐주었다. 즉, 눈 속의 복숭아 꽃 조각조각 붉더라. 만공은 만해에게 날으는 조각은 어느 곳에 떨어졌는고?라고 물었다. 만해는 거북털과 토끼 뿔이로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만공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복숭아꽃은 4월에 일주일가량 만개하는 봄꽃이다. 만해는 12월 3일 추운 겨울 오세암에서 수행 중 바람에 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그의 의심덩어리가 떨어졌다. 그리고 흩날리는 눈발 속에 봄에 만개하는 복숭아꽃이 그대로 있음을 알았다. 진리는 어디에나 곳곳에 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폭설이고,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고 풍성한 첫눈이다.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이 아니다. 올 대학 입시 수험생들이 첫눈 속에서 그들 안의 고귀함과 신성을 발견하는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대학에서 그것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배우미가 되길 바란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감사

11월은 감사의 달이다. 한 해를 살아오면서 겪었던 신의 은총이나 이웃의 후의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특히 한해의 마지막 한 달을 앞두고 지나간 열한 달의 삶을 성찰하면서 감사를 다질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특권이다. 미국에서는 11월 네 번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킨다. 1621년 가을 영국의 급진개혁파였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정착했던 메사추세츠의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가지고 인디언 부족과 함께 나누어 먹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식적인 교회의 절기가 된 것은 1623년 그곳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이다. 어쨌든 추수감사절의 정신은 나눔에 두고 있다. 특히 그것은 단순한 나눔이 아니라 낯선 대륙에 도착한 사람들이 질병과 추위로 인해 죽어갈 때 도움을 주었던 원주민 인디언 왐파노아그 부족에 대한 보은의 나눔이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있다. 남에게 받았던 은혜를 저버린 행위를 말한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서는 안 된다는 속언이 있다. 보은하기보다 상황을 이용하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아냥이겠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람과 함께 살아가게 창조되었다. 이것은 창조주의 의도이다. 그래서 사람을 의미하는 한자의 人은 서로 의지하는 작대기로 형상화된 글씨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도 하나 된 존재이다. 아다마인 흙을 재료로 만들어진 아담인 사람은 그 자체로는 토기 인형에 불과하지만 창조주가 그 코에 창조주의 숨인 생기(生氣)를 불어 넣음으로 비로소 살아 있는 생령(生靈)이 되게 했다는 것은 사람을 생령 되게 하신 창조주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자기중심으로 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창조주에게도 불성실하고 사람에게도 불성실하다. 신뢰를 주고 얻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속설이 별로 낯설지 않다. 왜 그럴까? 배신을 생활화하고 체질화 시켰기 때문이다. 철새란 계절에 따라 서식지를 이동하는 새를 말한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기 때문에 다양한 철새를 볼 수 있다. 그것들 중에는 여름에 우리나라로 날아오는 여름 철새도 있고, 여름에는 시베리아나 만주 등에서 번식하다가 겨울에 중위도 지방에서 월동하는 새와 저위도의 따뜻한 지방에서 월동하는 새도 있다. 일반적으로 철새는 정해진 코스와 장소를 찾는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 철새는 새만도 못한 것 같다. 이익이 된다면 이것저것 구분하지도 않고 아무것이나 덥석 물고, 아무 자리나 덥석 주저 않으려 하기에 원성과 질타가 끊이지 않는다. 창조주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의미가 무색할 만한 배은의 역사를 새롭게 더할 뿐이다. 감사의 달 마지막 주간이다. 며칠 남지 않은 오늘 창조주와 이웃을 중심으로 자신을 한 번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후회하지 않게 받은 은혜 감사하고, 덕분에 누린 은혜 보은하면서 원래 사람의 모습을 회복해갔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친할수록 도울 땐 거리를 둬야 한다

좀 잘 사는 형이 집도 없이 고생하는 동생과 그 가족들이 불쌍해서, 동생과 그 식구들을 모두 형네 자기 집으로 오게 하려 한 집에서, 더욱이 안방에까지 들어와서 함께 지내도록 내주며 함께 살기 시작하면, 그러한 두 가족 통합의 기쁨은 오래가기 어렵다. 동생과 그 가족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패턴과 취미와 보람과 희망과 포부가 형네 집 기존 식구들과는 전혀 다를 수도 없지 않기 때문에, 두 집 가족들을 통합하여 동거시키는 과단성이 비록 용감한 결정일지는 모르나 현명한 처사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형네 집안의 풍요로움과 행복이 동생네 가정의 궁핍과 불행으로 서로 상쇄되고 융합하여, 기대했던 평준화는 예상과 달리, 두 가정이 모두가 불만과 불행이 전보다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함께 사는 것도, 또 도와주는 것도, 거리를 두고 살면서 도와주어야 한다. 통합 살림의 기쁨이 불만과 불화와 불행으로 발전하면 마침내 다시 두 집 가족들은 이별이 불가피하게 된다. 결국 두 형제 가족들은 좀 거리를 두고(不可近 不可遠), 서로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노라면 차차 자력, 자립, 자치 정신으로 두 집의 생활도 점진적으로 모두 나아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급하게 할 일이라도 오히려 천천히 하고, 천천히 해도 될 일일수록 급히 서둘러 해야 한다(急之緩, 緩之急 -孔子). 빠른 통일을 원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랴? 아마, 우리와 국경이 인접한 일본이나 중국이나 소련의 일부 정치인들 외에는 전 세계 인류가 자유와 정의가 살아 숨쉬는 오늘의 대한민국과 같은 한민족의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를 모두 바라고 원하며 기원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간, 우리 남북한은 너무나 이질적인 사상적 적대 관계뿐 아니라, 찬물에 기름처럼, 도저히 쉽게 융합될 수 없는 관계가 고착, 강화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산주의 사회로의 점령통일을 위하여 대륙세력의 중ㆍ소 강대국들의 북한군 지원과 실전 참여로 3년간이나 계속된 민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에, 해양세력의 미국을 위시한 자유세계의 16개국이 실전에 파병하는 참전으로 과거의 분단 38도 분단선은 오늘의 휴전선으로 겨우 이동되어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공산주의 사상과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충돌하고 있다. 특히 휴전조약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최근 서해 포격이나 종종 일어나는 휴전선의 총성과 유혈사태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전 세계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위하여 국제연합이 만장일치로 강력제재하고 축소하며 완전폐기에 전력을 다하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북한이 제조하고 보유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어, 마침내 한반도에는 휴전 이전보다 더 무서운 핵 전운이 가시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핵무기 사용 확전의 필연성이 강화되는 우려를 전 세계가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최근 남북한 지도자들은 목이 쉬도록 평화와 통일을 외치면서, 황홀하게 내걸린 깃발들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회담과 협상을 계속하고 있으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1950년 625 사변을 완전히 망각하게 하는, 태평성대의 평화무드 조성에는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시국에,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다는 갖가지 경제협력 프로젝트는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으나, 북한의 핵무장 포기와 제거에 보다도, U.N.의 북한 제재 철회를 거듭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편이다. 기차 철로 같은 양편 주장이 칼자루 잡은 손과 합류하는 연착륙에 성공하기를 두 손 모아 하느님께 기도하자.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어머니께 보낸 어느 학도병의 편지

이세봉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불볕더위가 지속되고 있는 8월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 무덥고 무서운 여름을 보낸 가슴 아픈 사연이 있어 함께 나누려고 한다. 1950년 8월11일 학도병 71명은 포항전투에 투입되어 포항여중 앞에서 북한군과 접전 중 48명이 전사했다. 그들 가운데 당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우근 학도병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가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 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71명 뿐입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이!하고 부르며 어머님 품에 덜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가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제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재검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히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다소 긴 내용의 편지를 중략하면서 인용했다. 포항시 용흥동 전몰학도 충혼탑 광장에 이우근 학도병의 이 편지가 검은 오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건립되었다. 광복절이 있는 8월에 다시 한 번 지금의 대한민국이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과 6.25 동란의 아픔을 극복하고 열방 가운데 우뚝 서게 된 이면에는 이렇게 조국을 지키고 세우기 위해 피 흘려 산화한 어린 학도병에서부터 수많은 참전용사들과 16개국에서 참전한 고마운 손길들이 있었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구약성서 시편 127편 1절 이세봉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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