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모든 것은 숨을 쉰다. 사람만 숨을 쉬는 게 아니다. 꽃도, 나무도, 새도, 짐승도, 지구도, 별도, 우주도 저마다 숨쉬기 하는 생명이다. 숨을 ‘쉰다’는 건 멈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작 숨을 멈추면, 생명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 이럴 때는 ‘숨졌다’고 표현한다. 꽃이 지다, 별이 지다, 할 때와 똑같이 사람도 진다. 천하가 한 리듬 안에서 율동한다. 한데 쉰다는 말을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한다는 말로 여긴다. 쉬면서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은 없는데 말이다. 잠을 잔 것도 무언가를 한 것이고,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떤 것도 무언가를 한 것이고, 꽃에 물을 주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한 것도 무언가를 한 것이다. 다만 이런 종류의 ‘함’은 돈을 벌기 위한 ‘함’과 다르기 때문에 ‘쉼’이라 여긴다. 돈을 벌기 위한 ‘함’은 죄다 ‘일’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것도 공부가 일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의 아이들은 누가 딱히 지시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안다.자신들이 공부하는 이유가 이른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함이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때의 ‘좋음’과 ‘나쁨’은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기준이 아니다. 성공이니 출세니 하는 잣대로 어른들이 미리 만들어놓고서 아이들에게 강제 주입한 것이다. 어른들이 일을 ‘밥벌이의 지겨움’으로 인식하듯이, 아이들도 공부를 지겹게 여긴다. 돈벌이를 위한 일이란 그 본성이 지겨운 법이다. 아무리 더럽고 치사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돈이 나오지, 못 참고 뛰쳐나가면 망(亡)한다. 말 그대로 사망선고다. 하여 무조건 견디고 버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가 낙오하든, 일일이 돌아볼 겨를이 없다. 생존경쟁은 이른바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전쟁터라는 것 아닌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엄습하는 순간, 양심이니 법이니 도덕이니 따위가 들어설 자리도 사라진다. 아이들더러 공부를 즐겁게 하라고 말하려면, 어른들도 일을 즐겁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돈교(敎)에서 해방되는 게 필수조건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돈으로 안 될 일이 없다는 세속적 구원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데 이게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오죽하면 예수 가라사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했겠는가. 하지만 돈신(神)이 아무리 전능해도 허술한 구멍은 있기 마련이다. 가난한데 행복한 사람들, 불편한데 즐거워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도무지 맥을 못 춘다.이들은 쉼이 허용되지 않는 일을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죽지 못해 억지로 하는 일에 더 이상 노예처럼 매여 있지 않기로 선언한 사람들이다. 남이 만들어놓은 ‘잘 사는’ 기준에 따라 자기를 맞추다가는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쉼’없는 일이 노예노동이라면, ‘쉼’없는 숨은 ‘좀비’스러운 숨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 쉴 것이다. 누가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이다. “숨 쉰다, 숨을 쉰다. 아침은 아침 숨을 쉬고 저녁은 저녁 숨을 쉰다. 나는 내 숨을 쉰다, 내 숨을” 가수 홍순관의 노래다.똑같은 뜻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명제로 담아냈다. 올해는 단재가 만주 땅 뤼순감옥에서 숨진 지 80주기다. 모든 사람이, 모든 민족이 저마다 자기 숨을 쉬는 게 평화라던 그의 외침이 새삼 그립다.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오피니언
구미정
2016-02-23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