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낙타에게 배우는 지혜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지구가 펄펄 끓는다. 정상이 아니다. 우리 앞집도, 윗집도 줄줄이 에어컨을 달았다. 관악산 아랫자락 동네라 에어컨 없이 살아도 견딜 만했었는데, 올해는 도저히 못 참겠다. 과거에 없었던 여름이라더니, 정말 해도 너무한다. 2008년 우리나라에서 폭염특보제를 시행한 이래, 5월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건 올해가 처음이란다. 작년만 해도 7월에 내려졌다는데, 두 달이나 앞당겨졌다. 역사상 가장 무더운 여름이다. 더 끔찍한 건 이 소리를 매년 듣고 있다는 사실! 여름은 계속 길어질 것이다. 그러면 에어컨을 사는 사람이 더 늘어날 것이다. 더우니까 에어컨을 켜고, 에어컨 때문에 더 더워지고, 그러니까 또 에어컨을 안 틀 수 없고, 그러니까 또 더워지고… 악순환이 꼬리를 문다. 변압기 과부하로 전기가 끊어지는 사고를 연일 접하면서도, 원자력 에너지에 의존하는 삶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문득 낙타를 떠올린다. 드넓은 모래사막을 배경으로 긴 눈썹을 휘날리며 먼 데를 응시하는 모습이 여유만만하다. 그 큰 몸집을 가지고 척박한 사막에서 살아간다는 게 영 신통한데, 비밀은 등에 붙은 혹에 있단다. 그곳에 지방을 가득 저장해 두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몇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 심지어 이 혹도 지역에 따라 개수가 다르다니, 얼마나 알뜰한 동물인지 모른다.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에는 단봉낙타가, 중앙아시아에는 쌍봉낙타가 산다.필요하지 않으면 굳이 더 가질 필요가 없다는, 잉여를 철저히 배제한 삶의 자세랄까.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던 낙타가 왜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옮겨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빙하기 때 삭막한 경쟁을 피해 옮겨간 곳이 사막이었다는 것, 도무지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막에서 살아남으려니 몸이 거기에 맞게 적응했다는 것만이 지금까지 알려진 설이다. 낙타는 오늘도 유목민과 여행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가 되어 사막을 횡단한다. 제 등에 붙은 혹도 무거우련만, 남의 짐까지 나누어진 채 묵묵히 사막을 건넌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에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또 누가 그러던가. 솔직히 낙타만도 못한 게 인간이다. 남의 짐을 나누어지기는커녕 남에게 자기 짐을 떠넘기려고 기를 쓴다. 이대로 살다가는 자기도 남도 다 멸종될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그냥 산다. 인간만큼 생각 없이 사는 동물도 드물다. 성경에도 낙타가 등장한다. 예수 가라사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신 대목이다. 혹자는 ‘낙타’의 헬라어 발음 ‘카멜로스’가 ‘밧줄’을 뜻하는 ‘카밀로스’와 비슷해서 생긴 번역상의 오류라고 말한다. 아무렴 어떤가. 풍요와 편리에 중독된 삶은 하나님 나라와 멀다는 뜻만 헤아리면 족할 것을. 마음은 평화로운 낙타처럼 살고 싶은데, 몸은 자꾸만 세속의 정글을 향하는구나.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편하게 살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구나. 큰 에어컨을 사면 작은 에어컨까지 덤으로 준다는 ‘1+1 행사’는 또 얼마나 유혹적인가. 아무래도 혹을 키워야 하려나 보다. 영리한 상술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마음의 근육 말이다. 뚜벅뚜벅 사막을 걷는 낙타가 내 스승이다. 구미정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삶과 종교] 그놈이 먼저 붙었어요

한 농부가 한 마리의 암소를 기르고 있었다. 가난한 농부에게는 소중한 재산이기에 가족같이 아끼고 소중히 아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이 농부가 수심에 찬 얼굴로 수의사를 찾아왔다.자신의 집에 소가 병이 나서 며칠째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명을 다 들은 수의사는 커다란 알약 하나를 주면서 집에 가서 소에게 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의사가 준 알약이 상당히 커서 거의 탁구공만 했다. 농부는 “이렇게 큰 알약을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하고 먹이는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수의사는 “커다란 호스에다가 이 약을 넣고 그리고 한쪽 끝은 소의 입을 벌리고 목구멍 깊숙이 넣은 후 한쪽 끝을 잡고 힘껏 훅 부세요. 그러면 쉽게 약이 소 목구멍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농부는 알겠다며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저녁 즈음에 이 농부는 아침에 수의사를 찾았을 때 보다 더 심각한 얼굴로 수의사를 찾아왔다. “웬일이십니까? 소가 상태가 더 안 좋아 졌나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약은 먹이셨어요?” “예” “그런데요. 왜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런데요. 저… 그놈이 먼저 불었어요.”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인의 삶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신앙은 믿음이며 믿음은 힘이고 능력이다. 신앙인은 세상을 향해 먼저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할 사람이다. 신앙인의 고유한 능력인 사랑과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사명을 지닌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녹록치 않다. 경제적인 논리의 바람, 세상의 인기의 바람, 세상의 권력과 부의 바람으로 끊임없이 우리네 삶을 비틀거리게 만든다. 여기에 맞설 신앙인이 불어야 할 바람은 무엇인가? 올바른 신앙인의 바람이다. 신앙이란 진리를 추구함이다. 믿음이란 정직과 신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직하고 신실해야 한다. 적어도 신앙인은 세 가지 면에서는 반드시 그리해야 한다. 첫째는 자신과 타인에게 있어서 정직해야 한다. 배우자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에게 정직한 자만이 행복한 가정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정직해야 한다. 정직한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둘째는 자신의 소득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신앙인은 털어서 먼지가 나지 말아야 한다. 먼지가 나지 않도록 스스로 먼저 털어버리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 정직한 신앙인인 되어야 한다. 자식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지 않으려고 하는 부모가 한심하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한심하고 불쌍한 것은 그 부모의 자식이다.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난 자녀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적을 속이고 얻어진 졸업장과 학위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누리려는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세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부모의 부정한 방법으로 국방의 의무를 면제받은 자식에게서 어떻게 이 나라의 안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바람은 도처에서 불어온다.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쓰고 유혹한다. 종교의 탈을 쓴 세상의 바람은 더 음흉하고 무섭다. 부단한 자기 성찰과 함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세상이 나를 향해 불기 전에 내가 세상을 향해 먼저 불어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놓아버림에서 오는 행복

일주일 집중 수행을 다녀왔다. 명상센터가 시골구석에 있는데도 다들 멀다않고 찾아왔다. 출가자지만 도심에 있다 보면 매일 조금씩은 할 수 있어도 온종일 집중해서 수행하기는 어렵다.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 재가자들을 위한 명상수련이라 함께 하면 불편하지 않겠느냐는 선원장 스님 말씀에 같이 하게만 해 달라 부탁드렸다. 참가자들의 직업이 다양했다. 학교 선생님, 대학 교수, 법무사, 무용가, 음악가, 주부, 학생 등. 물론 나이도 20대부터 70대 까지 다양했다. 어쨌든 이렇게 스무 명 남짓 모여 청소 등 각자의 할 일을 정했다. 점심 공양 후 선원장 스님의 수행법문이 있은 뒤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됐다. 명상주제는 아나빠나 사띠, 즉 들숨 날숨을 관찰하는 호흡수행이다. 며칠이 지나고 한참 수행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이었다. 명상 도중 조용히 화장실에 다녀오다 너무 재미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모두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사뭇 진지하게 앉아있는데, 그 표정들이 혼자 보기 아까웠다. 한 사람 한 사람 사진을 찍어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눈을 감고 호흡을 바라보랬더니 망상이 생기는지, 잘 되지 않는지 표정들이 오만상이다. 그런데다 허리를 너무 편 나머지 뒤로 제쳐진 사람,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사람, 졸음에 못이겨 고개를 흔드는 사람 등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호흡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누가 억지로 앉혀놓기라도 한 듯 괴롭기 그지없는 표정들이다. 이쯤되면 수행이 아니라 고행이라 해야겠다. 저녁 수행문답 시간에 선원장 스님께서 웃으시며 긴장을 풀고 인상들을 좀 펴라고 말씀하신다. 다들 웃었다. 너무 애쓰지 말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우면 좋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편해야 집중이 잘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호흡에만 관심을 두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살이에 복잡했던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온갖 생각들이 놓아질 때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것을 번뇌의 소멸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번뇌의 주범이 ‘생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갖 생각으로 골치가 아프니까 말이다.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 삼사일 정도는 수행에 몸과 마음을 익히는 시간이다. 이쯤이 지나야 바깥생활에서 들떴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몸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된다. 비로소 제대로 명상주제에 집중할 준비가 된 것이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마지막 헤어지는 날에 수행을 마치고 다들 차를 마시며 그간의 수행담을 나누었다. 처음 삼사일은 적응하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일주일 동안 계속 호흡 한 가지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더니 지금은 마음이 너무 편안하고 행복하다고들 했다. 모두들 돌아가지 않고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온갖 생각들로부터 벗어나니 마음이 행복할 수밖에. 이런 행복이 일상에 돌아가서도 지속되면 좋은데, 어렵다. 이렇게 온갖 번뇌와 생각들을 놓아버림에서 오는 행복을 맛본 사람은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틈틈이 명상주제를 챙겨서 일상에서도 불필요한 생각을 줄이도록 훈련하면 좋다. 고요한 데서 지혜가 생기듯이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은 매사에 올바른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올 여름 별다른 휴가계획이 없다면 놓아버림에서 오는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명상수행을 권한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도문 아리담 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교회의 미래

여기서 지칭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교에 국한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그리스교의 실태는 성장 하향곡선을 긋고 있습니다. 즉 한국 교회의 미래는 회의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합니다.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많은 전문가들이 좀 더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기성 교회들이 기득권층과 정치 권력층에 치중하고 부의 축적 그리고 건물의 대형화와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있다고 그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가 너무 급속히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침체되어 가는 교회가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은 하나의 박제된 모습의 교회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유럽교회를 방문하다 보면 문화유산이나 관광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은 더 나아가 업종(?)을 변경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휴식공간인 카페나 음악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교회들이 오히려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세속도시’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하버드대의 진보적인 신학자인 하비 콕스(Harvey Cox)가 쓴 ‘종교의 미래’(원제 The Future of Faith, 김창락 한신대 명예교수 번역)를 보면 2천 년 간의 그리스도교가 역사의 변천사 안에서 현재의 세속화된 모습으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인간을 위한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권력과 지배의 논리로 치달아 왔음을 봅니다. 대부분의 혁명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늘 부패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비 교수는 그리스도교가 예수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지 말아야 하며 성령을 교리나 교회 안에 가두어 두지 않도록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예수의 신앙을 세상 밖으로 전하려고 할 때에 신앙의 미래는 밝게 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이 낙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행동이 교회를 신선하게 할 수 있을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는 사랑하지만, 그리스도 신자는 싫어한다.”고 한 말을 교회는 귀담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간디는 마태복음의 ‘참 행복’(5장 3-12절)을 읽고 그리스도 신자가 되려고 마음 먹었다가 영국 유학 중에 유색인종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최고의 다수가 최고의 행복을 위해 형성된 정치구조입니다. 여기에 바로 민주주의의 약점이 있습니다. 이 구조는 자유경쟁사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외계층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정치권에선 여러 방법과 장치를 제시하고 있지만 대부분 정치구호로 끝나 버립니다. 아울러 지구의 생존 문제인 환경을 비롯한 생태론, 여성의 권리, 평화의 문제 등에 대해 종파를 초월해서 함께 적극적인 행동을 하고 있음을 하비 교수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베드로 대 성전에 많은 노숙자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면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밝게 그리고 용기를 갖고 살아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교황님은 바로 이 대성당을 세계 가톨릭의 본산과 함께 노숙자들과 같은 소외된 모든이들과 난민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세계 본부로도 사용되는 것이 아마도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옥시, 성준이, 그리고 모세

티브이에서 성준이를 보았다. 자기 몸무게의 절반도 넘는 산소통을 끌고 다니는 아이. 올해 열네 살이니, 원래대로라면 중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인데 여전히 초등학생이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병원 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에 또래보다 늦어졌다. 성준이는, 그러니까,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다. 가습기 살균제 속에 포함된 독성물질로 인해 폐가 손상되었다. 2014년부터 올해 5월 말까지 성준이와 비슷한 피해를 보았다고 신고한 숫자가 2천336명에 달한다. 그 중 사망자는 462명이나 된다. 이 대형 참사의 중심에 영국계 다국적기업 옥시레킷벤키저가 있다. 영국까지 달려가 회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모습이 언론에도 종종 나왔다. 이쯤 되면 관련자 처벌이나 피해자 보상 등의 법적 절차가 벌써 이루어졌어야 옳다. 한데 어쩐 일인지 본격적인 수사가 미뤄졌다. 어영부영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에, 피해자와 가족들의 가슴만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제일 미웠던 게 누군지 아세요? 정부요? 제조사요? 아니요, 바로 저였어요.” 무심코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내 가슴에 성준이 어머니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그 전까지는 솔직히 남의 문제려니 했다. 테러는 둘째 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자꾸만 죽음에 노출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내성이 생기는 법이다. 남의 아픔과 죽음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진다. ‘나만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복불복 식 사고를 하게 된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모세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집트 왕자라는 유명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다. 고대 이집트 제국의 노예였던 히브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죽을 운명이었다. 노예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이집트 왕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명령하기를, 딸을 낳으면 살려두고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은 집마다 통곡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딸을 낳은 집인들 멀쩡했겠나. 이 딸이 자라서 누구에게 시집을 간단 말인가. 이집트 왕이 히브리 딸들을 살려둔 저의는 분명하다. 말하자면 ‘근로정신대’나 ‘이집트군 위안부’ 등으로 이용할 심산이었다. 제 속으로 낳은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히브리 부모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제 속으로 낳은 딸이 국가권력에 의해 유린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심정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힐까. 대량학살의 땅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수치요 모욕이 아니었을까. 학살의 주체는 따로 있는데, 자기가 죽였다는 엄한 죄책감이 평생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지 않겠나. 모세가 극적으로 구출된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힘이 없어 짓밟힌 사람들의 한 맺힌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일강을 억울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채운 이집트 제국을 심판하시고, 히브리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내기 위해 모세를 살리셨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고난 당하는 사람들 편이다.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말을 곱씹어 본다. 운 좋게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의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살아있음을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불안사회’에 대한 분노가 더 클 테다. 안도감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세상이 바뀌는 건 오직 불의한 세상에 분노하며 더 나은 세상을 열기 위해 부단히 애쓸 때뿐이다. 그러니 분노할 것. 성준이와 그 가족의 고통을 외면한 기업과 정부와 검찰에 대해, 아니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랑할 것. 여전히 고통스럽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연약한 생명들을. 구미정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삶과 종교] 힘써 대장부가 되라

물건을 사다 할 때 사용하는 한자 살 ‘매(買)’는 그물 ‘망(罔)’과 조개 ‘패(貝)’가 모여 만들어진 합자(合字)이다. 즉 조개를 그물로 떠내듯이 물건(物件)을 사 모으다 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반면 반대로 물건을 팔다 할 때 사용하는 한자 팔 ‘매(賣)’는 살 ‘매(買)’에 선비 ‘사(士)’가 붙여진 단어이다.무슨 말일까? 물건을 사는 사람은 정성 들여 그물로 조개를 거두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며, 반대로 파는 사람은 그 모은 정성을 선비의 마음과 자세로 물건을 팔아야 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선비의 마음으로 물건을 파는 팔 ‘매(賣)’에 삼수변(水)이 붙으면 어떤 단어가 될까? 도랑 ‘독(瀆)’이 된다. 농경사회에서 작은 도랑을 만드는 일은 생명을 주는 일과 같은데, 도랑을 만들어 타인에게 유익과 도움을 주는 사람 역시 선비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다시 팔 ‘매(賣)’에 말씀 ‘언(言)’이 붙으면 읽을 ‘독(讀)’이 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글을 읽도록 쓰고 말하는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파는 사람이며 이 역시 선비의 마음으로 해야 함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런데 ‘매(賣)’에 계집 ‘여(女)’가 붙으면 과연 어떤 단어가 될까? 놀랍게도 더럽힐 ‘독()’이 된다. 자신의 욕망과 욕정을 위해 사람을 사고파는 일은 결코 더러운 독이 됨을 발견한다. 사람은 결코 사고파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점점 사회가 무섭다고 말한다. 이는 어쩌면 선비의 마음을 점차 잃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침식된 우리사회와 병든 생각을 치료하는 길이 무엇일까? 우리의 병든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 선비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스라엘 통일 왕국을 이끌었던 다윗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그의 노년,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 옴을 알고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유언하기를 “나는 모든 인생이 가는 길로 간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그리하면 네 삶이 형통하리라”는 것이다. 다윗은 장차 자신을 이어 한 나라를 이끌어 갈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장부의 덕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외유내강”이 아닌가? 반대로 소인배는 ‘내유외강’한 사람이다. 인생은 일생이다.인간은 그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모든 인생은 역사의 지평에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 할지라도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 영향력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냐, 죽이는 것이냐 하는 것일 뿐이다. 성서의 표현을 하나 더 빌리자면 다윗의 유언을 받들어 왕이 된 솔로몬의 지혜서에서 인용하고 싶다. 그는 지혜의 책에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여기에서 난다”고 말씀한다. 또한 “마음이 어떠한즉 그 사람됨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마음이 좋으면 좋은 사람이요, 마음이 크면 큰 사람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마음이 필요하다. 이 마음으로 회복되고 치유되어야 한다. 겸손하게 자신의 완악함을 인정하고 깊은 성찰과 함께 소원을 마음에 담아보자. 선비의 마음을 넘어 대장부의 마음을 품기 시작할 때 우리 사회는 더 아름다운 사회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생각이 그 사람의 성향이 된다

짧은 봄이 지나고 어느덧 초여름 장마에 접어들었다. 간밤에도 시원하게 비가 내렸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소리 없는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비가 반가운 건 서너 시간씩 절 마당 나무들에게 물을 줘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나무들에게는 생명수를 주기 때문이다. 낮 동안 축 처져있던 잎들에 밤새 생명의 물이 올라 그 싱그러움이 보기에도 눈부시다. 작년처럼 가뭄이 들면 목마른 나무들도, 물주는 우리도 고생이라 올 여름에는 비가 적당히 왔으면 좋겠다. 시멘트로 덮인 공간이 많아서인지 도시 마당은 시골보다 가뭄을 더 타는 듯하다. 마당을 가로지르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우후죽순이라더니, 요사채 앞 대나무 숲에 어느새 새순들이 제법 올라 와 있다. 키가 이층 높이만 하다. 언제 이리 컸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 넓을 것도 없는 마당이라 오며가며 볼만도 한데 이제야 눈에 들어오다니! 나도 참 무심하다. 아래를 살펴보니 갓 올라온 듯한 죽순도 몇 개 보인다.일층 높이로 가지런히 잘라 놓은 대숲 사이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대순을 보며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관심이 없는 것은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도량을 둘러보니 비온 뒤라 그런지 여기 저기 잡초들도 무성하다. 예전 같았으면 별 생각 없이 뽑아버렸을 터인데 요즘은 선뜻 그러지 못한다. 아무리 잡초라도 하나의 생명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유심히 살펴보면 조그마한 잡초 하나하나 꽃이 다 예쁘다. 햇살을 받으려고 빛이 드는 쪽으로 온 몸을 기울여 열심히 잎을 열고 꽃을 피우려 애를 쓴다.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그들을 보노라면 경외심마저 든다. 그러니 차마 뽑지 못하는 것이다. 원래 화초를 좋아하는지라 잡초 꽃들도 예외일 순 없다. 하지만 마음이 이렇게까지 세심해진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자애경을 독송하면서 마음속에 자애심이 예전보다 크게 자라난 때문이다.‘살아있는 생명이면 그 어떤 것이든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남김없이…모든 생명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깊이 인식하지 못했던, 그들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삼여 년 동안 자애경을 조석으로 외우는 사이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이 생명에 대한 자애심이 소리 없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누군가는 그러면 채소도 먹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음식은 필수불가결이다. 만약 외딴 곳에서 혼자 살게 된다면 채소를 가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비록 초목이라 해도 생명유지와 상관없이 불필요하게 생명을 해치는 것은 안하면 좋을 일이다. 특히 불교 수행자라면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마당의 잡초들은 언젠가는 도량 청소하는 이에게 뽑혀나갈 운명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굳이 내손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행복하게 놔두고 싶으니까. 이다음 언젠가 조그만 오두막의 주인이 된다면 이름 모를 잡초들도 주어진 제 삶을 온전히 영위할 수 있게 놔두리라. 사람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성향이 달라진다. 붓다께서는 어떤 것을 계속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그 사람의 성향이 된다 하셨다. 좋은 성향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제부터 우리도 나와 모든 생명들이 함께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그러면 나의 삶도 뭇 생명과 더불어 행복해지리라. 도문 스님 아리담 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길상사의 관음보살상

길상사는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절입니다. 제3공화국 시절 국내 3대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 일대 약 7천여 평을 주인인 길상화 김영한이 청정도량으로 쓰이도록 법정스님에게 바친 뜻깊은 절입니다. 그런데 이 절에 좀 특이한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습니다.당시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스님이 함께 영적 교류를 하고 있을 때 종교 간 화해의 염원의 상징을 만들고 싶다는 법정스님의 제의로 조각가인 가톨릭 신자 최종태 서울대 교수에 의해서 2000년에 제작된 관음상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한편으로는 자비의 부처님 상이고 한편으론 가톨릭에서 깊은 공경을 드리고 있는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불상 혹은 성모님 상을 통해서 불자나 신자나 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신앙으로 지내고 싶은 염원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길상보탑이란 4사자 7층 석탑이 있습니다. 이 탑은 길상사를 무주상보시한 길상화 보살님과 법정스님의 고귀한 뜻을 새기고 성북동 성당과 덕수교회가 함께 정성과 종교 간 교류의 염원을 모아서 2012년에 제작 봉안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종교의 갈등에 의해서 선량한 사람들이 상처를 받으며 살고 있음을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수 없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 일각에선 나름대로 종교의 교의를 뛰어넘어 함께 어울리고 싶은 염원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봅니다. 40여 년 전만 해도 불교와 개신교와 가톨릭이 이단이니 열교니 하면서 마치 상대 종교를 구원받을 수 없는 이단의 교로 신자들에게 가르쳐 왔었는데 이젠 조심스럽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봅니다. 저도 40여 년 전에 평소 존경하던 목사님과 교류를 하면서 틈틈이 그분 예배당에 가서 설교와 예배를 주관하고 그 목사님은 우리 성당에 오셔서 비록 미사는 드리지 못하여도 함께 기도하고 감명 깊은 강론도 하였는데 웃어른들에게 야단을 맞곤 우리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강제로 헤어지듯 결별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어떤 신부는 불교학을 전공하다 불교의 깊은 현의를 깨우치면서 자기가 운영하는 양로시설에 좀 특별한 반가좌상을 제작하여 놓았습니다. 즉 불교에서는 자주 보는 반가사유상입니다. 예수님을 반가좌상으로 제작하여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못 3개를 손에 얹어 놓은 상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처상이고 또 한편으론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의 상입니다. 이 특별한 상은 교황청에 보내져서 거기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0여 년 전부터 그 신부가 느닷없이 자기 성당에 ‘부처님의 탄신 기념일을 함께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플래카드를 성당 정문에 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신자들도 그리고 우리 교회의 어른들도 의아해하며 뗄 거냐 말 거냐 하고 옥신각신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절의 주지스님이 자기 절에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플래카드를 절 정문에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세월이 흘러 불교와 가톨릭의 어른들께서 서로의 경축일에 함께 축하를 교류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창출되고 있습니다. 힘겹지만 우리는 이 화합의 길을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습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알파고와 포스트잇

어느 안식일, 예수가 회당에 들어갔다. 그의 눈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들어왔다. 누가복음 6장의 증언에 따르면, 하필 ‘오른손’이 오그라들어 있었단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면 왼손을 쓰면 되지, 라고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유대문화는 왼손 사용을 금기시한다. 왼손은 부정과 불결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건 사형언도나 다름없다.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없음은 물론,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가기도 불가능하다. 아니 손이 하는 일은 더 있다. 악수하는 손, 쓰다듬는 손, 흔드는 손, 주먹 쥔 손, 엄지 척! 상황마다 사람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실어 나른다. 이런 손이 오그라들어 있었다니, 그는 아마도 감정 표현마저 거세당했으리라. 하기야 한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 이른바 ‘을’의 습성이 대충 그렇다. 괜스레 위축되는 것도 서러운데, 그 느낌을 솔직히 표현했다가는 더더욱 설 자리가 없어질까 두려워 그냥 참는다. 그런 그에게 예수의 시선이 닿는다. 이 시선은 각별하다. 그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언어조차 무용지물로 만드는 시선! 이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눈으로 예수가 말한다. “일어나라. 한가운데 서라.” 항상 중심에만 있던 사람들의 심기가 엄청 불편했겠다. 아닌 게 아니라, 오른손이 오그라든 그 사내의 손이 활짝 펴지자, ‘그들’은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예수를 어떻게 손봐줄까, 모의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다. 종교와 법과 질서가 한 몸처럼 돌아가던 당시 사회의 중심은 언제나 그들이었다. 마가복음 3장은 그들이 화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마음이 너무나 굳어있었기 때문이라고. 얼마 전, 세계 30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교수가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그는 알파고의 등장으로 불안감에 휩싸인 우리를 이렇게 위로했다. 아무리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다고 해도, 확실히 인간지능보다 인공지능이 우위를 점한다고 해도, 그래봤자 인공지능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마음 덕분이다. 마음이 있기에 사람은 남의 불행을 보고 공감할 수 있으며, 남의 불행을 막기 위해 협력할 수 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마태복음 11:17) 불감증의 시대에, 강남역과 구의역을 물들인 포스트잇의 행렬을 보라. 그것은 깃발이다. 타인을 향해 마음을 닫은 시대를 향한 짱돌이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여는 만장이다. 예수라는 사내는 그랬다. 마음이 아기속살보다 더 연했다. 힘들고 아픈 사람을 보면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복음서 저자의 표현대로,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예수의 전매특허였다. 애간장이 녹아내리고 창자가 끊어질 만큼 고통스러운 마음. 그 마음이 기적의 원천이었다. 그 마음이 예수를 참 사람으로 만들었다. 한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집단행동을 할 때 보면 무섭기 짝이 없다. 대화니 소통이니 다 필요 없고, 오로지 진리만 수호하면 그뿐이라는 강인한 태도 어디에서도 예수의 마음을 찾기 어렵다. 율법과 교리를 엄격히 준수하는 일은 알파고가 훨씬 더 잘할 테다. 알파고의 자가 발전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오늘, 인간이 살 길은 여전히 옥토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아닐지. 지금 구의역에서 인간의 마음이 펄럭인다. 스플랑크니조마이! 구미정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삶과 종교] 행복한 삶을 향하여

저는 신앙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인지라 많은 경우에 물질과 감각에서 인간적 행복을 찾곤 합니다. 보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라든지 살기 좋은 환경에서 행복을 찾곤 합니다. 그리고 원초적인 육감에서도 많은 기대를 합니다.그런데 여기에선 자주 허무감을 느끼거나 다른 것을 향해 더욱 정신적으로 많은 갈증을 느끼게 됨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극에 더 큰 자극을 요구받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자극적인 환각을 향해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음을 여러 보도를 통해 봅니다. 그러다 보니 마약 제조자들은 일확천금을 얻으려고 생사를 걸고 있습니다. 나라에선 인간적 욕망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익 창출을 내도록 하여 국가에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중독성이 무서운 주식이나 로또 그리고 카지노와 끽연 등을 통해 회사의 발전과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여 보다 좋은 복지환경을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평범한 많은 소시민들이 휘말려 들어가 갖가지 중독으로 힘들어하고 있음을 봅니다.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참 행복(마태 5장 3절-12절, 루카 6장 20절-23절)에서 찾고자 노력하면서도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어 예수님의 행복선언에는 수긍을 하면서도 이를 따르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께서도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임을 평생을 통해서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조계종 승단의 대표적인 율사 월서 스님이 ‘행복하려면 놓아라’라는 글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버리고 내려놓음’만이 행복을 안겨줌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하면 법정스님은 구체적으로 당신의 생애를 통해서 ‘무소유’의 행복을 제시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물질만능에 젖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없는 욕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선이 무엇인가를 많은 전문가들이 그리고 사상가들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화와 예술에 맛을 들이는 것입니다. 지금도 고전 음악을 듣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봅니다. 얼마 전 지방의 공연장에서 본 아름답고 흐뭇한 광경에 제 마음이 따뜻해 옴을 느꼈습니다. 재래시장 근처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중년의 몇몇 부인들이 허름한 옷을 입고 무언가 보따리를 들고 연주홀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연주를 한 성악가는 그곳이 고향이었나 봅니다. 그들은 서슴없이 서로 말하더군요. 우리 고향에 저런 큰 음악가가 탄생하였다니 하면서 한편 부러워하고 한편 대견해하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 행복이로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국가나 정치인들은 평범한 현대인들이 어디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경제발전만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돈만을 제시하면 우리 국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상상할 수 없는 욕망의 덫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문화와 예술 창달을 위해 더 많은 정책을 펼쳐가야 할 것입니다.지도자 개개인은 적어도 여러 문화 공연장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자주자주 각종의 공연장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이 초대장으로 그 공연장을 빛(?) 내주러 오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초대장은 평범한 것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값진 행복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1 데나리온의 경제학

신약성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하루 일당으로 1데나리온(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주기로 하고, 이른 아침에 인력시장에 나가 일꾼들을 고용했다. 한데 이들이 일하고 있는 사이에, 9시쯤 주인은 다시 인력시장으로 나가 일꾼들을 더 데려온 것이다. 그러더니 12시에도, 오후 3시에도, 심지어 5시에도 또 데려온다. 저녁 6시, 드디어 정산할 시간이 되었다. 주인은 5시에 와서 일한 일꾼들부터 차례대로 1데나리온을 주었다. 새벽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은 내심 좀 더 받겠거니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한데 야속하게도 주인이 똑같이 1데나리온을 주는 거라.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투덜거리며 따졌다. 그러자 주인이 타일렀다. 당신들도 애초에 1데나리온을 받기로 하지 않았는가, 약속대로 주었는데 뭐가 잘못인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내가 후한 것이 그리도 비위에 거슬리는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당시 영국사회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에 ‘성공’한 만큼 골고루 잘 사는 사회가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가난한 사람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 문제에 책임지기는커녕, 가난의 원인을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으로 돌리는 비겁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상류층이건 빈곤층이건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 부를 쌓는 데만 골몰하는 사회가 그의 눈에는 참으로 추악하게만 보였다. 그이보다 한 해 앞에 태어난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영국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답을 구했다. 그러나 러스킨은 그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생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려면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자기를 매혹시킨 성경 이야기, 곧 마태복음 20장에서 영감을 받아 대안경제학을 제시했다. 그의 생각이 담긴 책이 바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다. 그에 따르면, 이웃이 가난 속에 방치되어 있는데도 자신의 이윤추구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근대경제학은 ‘암흑의 학문’이다. 이 불의한 경제학을 구원하는 길은 도덕과 영성밖에 없는데, 이를테면 포도원 주인이 보여준 대로 ‘자진해서 손해 보기’를 기쁘게 감내하는 것이 진정한 경제활동이란다. 포도원 주인, 곧 자본가로서는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사람에게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엄청난 손해임에 틀림없다. 꼭두새벽부터 와서 12시간 일한 노동자에게 1데나리온을 주기로 했으니, 그 이후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는 차등지급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그런 자본주의 원리에 반기를 든다. 나중에 온 사람도 삶의 존엄성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똑같이 대우를 받아야 한단다. 포도원 주인은 자기도 기쁘게 손해를 끌어안겠으니, 더 많이 일한 노동자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너그럽게 먹으라고 충고한다. ‘국제시장’ 세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저성장 시대에 태어난 죄로, 잉여니 비정규직이니 알바니 온갖 굴레에 매여 제대로 일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 들으면 환호하겠다. 우리 사회의 러스킨들은 다 어디로 갔나. 푸르른 5월,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기엔 청춘의 상처가 너무 깊다. 구미정 숭실대 초빙교수

[삶과 종교] 예술, 종교 그리고 삶

인사동 그림손 갤러리에서 석경전시회가 열렸다. 서예가 의암 김정호 선생이 한문 법화경을 돌 판에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 4년에 걸쳐 새겼다고 한다. 목판이나 석판을 새길 때 원본을 판에 붙여 새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놀랍게도 밑판을 붙이지 않고 바로 판을 새겼다고 한다. 이미 당신의 머릿속에 경전의 내용과 글자의 획수가 다 입력되어 있으니 밑판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판각기술자가 아니라 서예가인데 붓보다 칼로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재미있는 말도 한다. 가로세로 20×30 정도의 석판 509장에 경전을 새기고, 석판의 보존을 위해 낱낱이 바람에 잘 마른 홍송으로 틀을 짜서 옻칠을 입혀 석경을 안치했다. 윗부분을 장엄해 석경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무형문화재 입사장 이경자 선생의 금속공예 작품이다. 나무틀을 아래위로 나누어 각각 그 윗부분에 가로세로 20×5 정도 크기의 쇳덩이에 금과 은으로 문양을 넣어 장엄을 더했다. 맨 앞장과 뒷장은 금속공예로 법화경의 상징인 하얀 연꽃을 주제로 화려하게 수를 놓아 표지를 삼았다. 이렇게 모두 7만자 511장의 법화석경이 전시되었다. 여기에 돈황미술의 대가인 서울대 서용 교수의 불화가 세 점 같이 전시되었고, 경판이 처음 시작되는 곳에 세계적인 종이공예가 김정순 선생의 한지 등을 배치해 마치 사바세계에 오신 부처님을 맞이하듯 전시장을 등불 공양으로 환하게 밝혔다. 당대 최고 예술가 네 명의 작품으로 시현된 불국토다. 김정호 선생은 매일 석경을 새기기 전 백팔배로 자신을 내려놓으며 부처님 전에 향을 사루고, 보이차로 관절의 통증을 달래가며 오전 오후 다섯 시간씩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새겼다고 한다. 최고의 각자법으로 최선을 다해 새겨가는 그 환희의 기쁨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했다. 석경을 완성해 갈 즈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심오한 뜻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남은 생은 십조구만오천이십팔자에 달하는 화엄경을 석판에 새기는 것이 목표라 한다. 대략 20년정도 걸릴 듯하다고. 석경 윗부분을 장엄한 금속공예판은 머리카락 보다 세 배나 더 가는 선을 하나하나 그어가며 천 번 이상의 칼질로 밑판을 만들고, 그 위에 금과 은으로 무늬를 그려 넣어 석경을 장엄했다. 돌 보다 더 딱딱한 쇠판에 가늘고 연약한 여인의 손으로 한 줄 한 줄 정성을 다해 그었으리라. 이경자 선생은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작품을 부탁했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촉박해 무리하게 작업을 하다보니 병이 났다 한다. 밤낮없이 어어지는 작업에 고장난 온 몸의 관절을 위해, 매일 침을 맞고 잠깐씩 뜨거운 물에 몸을 담궈 마디마디 쑤시는 온 몸의 관절을 달래가며, 2년짜리 작업을 전수자인 딸과 제자 한 명, 이 셋이 각 석판 위를 장엄할 509개의 작품과 앞 뒤 표지 작품을 8개월 만에 해냈다 한다.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지만 의사에게 어떻게든 전시회 오픈 당일 까지만 견딜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해 겨우 마무리를 하고, 오픈행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입원해야만 했다고 한다. 약속된 부귀영화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이들에게 이토록 혼신의 힘을 다하게 했을까? 이들에게 종교는 삶과 예술 그 자체인 것이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자신의 삶과 종교를 녹여내는 진지한 작업이리라. 이들에게 작업시간은 이 셋이 하나 되는 합일의 순간이요, 작품은 이러한 인생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각자 내 삶에 있어서 종교는 어떤 의미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절 앞 공원에 철쭉이 한창이다. 전시회 관람하기 좋은 날이다. 도문스님 아리담 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종교와 문화예술

종교와 문화예술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예술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분류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이슬람 문화, 크리스천 문화, 불교문화, 힌두교 문화, 그리고 중국에서 시작된 도교와 유교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 각기의 문화의 모습은 대부분 예술로서 표현됩니다. 시(詩)라든지 미술품이라든지 노래로 각자 절대자에 대한 공경의 예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의 틀은 기원전 약 천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을 통일한 다윗이 쓴 일명 ‘시편(詩篇=Psalm=찬미가)’입니다. 지금도 특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매일같이 바치는 ‘성무일도’는 대부분 이 시편에서 따온 내용들입니다. 이 시편은 노래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왕은 자기가 쓴 시를 비파를 연주하면서 읊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은 바로 절대자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고 아울러 자기 민족의 간절한 원의를 호소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종류의 절대자에 대한 찬송은 모든 종교예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불경을 그냥 소리가 아니라 음률을 넣어서 바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절대자를 향한 경건한 행위에서 인간은 보다 높은 경지를 바라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비록 인간은 정해진 공간과 시간 속에서 자기의 삶을 꾸려가다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종교적 문화와 예술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정해진 영역을 뛰어넘으려 합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지 예배 장소에 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다양한 미술품들입니다. 당신 외에 누가 하느님을 보았다는 말인가?(요한복음 6장 46절 참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우리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서 절대자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화와 예술은 인간 각자가 보이지 않는 분야와 인간의 복잡한 영역을 함께 묘사하고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작업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바로 ‘사랑’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글에서 하느님의 사자인 천사 미하일의 입을 빌려 ‘사랑’이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톨스토이가 제시하는 사랑의 개념을 통해서 하느님인 절대자를 감지하거나 느끼게 됩니다.또한 주변의 여러 교회나 성당 그리고 절에 모셔져 있는 미술품들이나 탱화 등의 작품들을 보면서 나 자신의 좀 더 진지하고 성스러운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레고리안 성가와 모짜르트를 비롯한 유명한 작곡가들이 작곡한 레퀴엠(requiem 위령, 진혼, 쉼)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는 삶의 종착역을 넘어 절대자에로의 귀의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시편 129)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옴 마니 반메 훔!”(불경) 불자도 아닌 주제에 외람되이 두손을 모읍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얼음물이 당기는 계절

장자의 인간세편에 보면 춘추시대 초나라 정치가 섭공(葉公) 이야기가 나온다. 본명은 심제량(沈梁)이요 자는 자고(子高)인데, 섭현(葉縣)이라는 변방지역의 태수인지라 ‘섭공’이라 불렸다. 한미한 관직에 있던 그에게 어느 날 임금이 특명을 내렸다. 외교사절이 되어 제나라에 다녀오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초고속 승진을 한 셈이다. 한데 기쁨도 잠시, 점점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거라. 그도 그럴 것이 제나라로 말하면, 외국의 사신에게 접대는 기가 막히게 잘하지만, 정작 협상은 질질 끄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냉정히 평가해 보건대, 보통사람을 움직일 그릇도 못되는 주제에 하물며 제후를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만약 실패하기라도 하면 얼마나 큰 처벌을 받을 것인가. 평소 그의 식습관은 소박한 편이었다. 반찬의 가짓수가 적은 것은 물론, 조리과정이 복잡한 음식보다는 담백한 자연식을 선호하는 편이라, 찬모가 불을 땐답시고 고생할 일도 없었다. 한데 아침에 왕명을 받은 다음부터 온종일 속에서 열이 올라, 저녁이 되자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킬 정도가 되더란다.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생병이 날 것만 같다. 나랏일을 한다는 게 그렇다. 실패하면 ‘사람의 화’(처벌 따위)를 입기 마련이요, 성공해도 ‘자연의 화’(질병 따위)가 미친다. 정치인의 숙명이란 이 두 가지 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하나도 피하면 안 된다. 섭공은 과연 자기가 그럴만한 그릇이 되는가 고민한다.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큰일을 하는 자리는 변방에서 한 고을을 다스리는 자리와 차원이 다를 테다. 장자는 이렇게 번뇌하는 섭공의 보기를 들어 나랏일 하는 사람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한다. 뽑혔을 때는 좋지만, 이 기쁨의 유효기간은 하루도 채 되지 않는다. 막중한 책임감에 속이 타 이내 얼음물을 들이킬 지경에 이른다. 한말 이 땅의 지식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끈 사상가로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가 있다. ‘중국(청나라)의 볼테르’라 불리는 그는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와 더불어 쓰러져가는 청나라를 일으켜 세우고자 변법자강(變法自强)운동을 펼쳤다. 그가 저술한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은 당시 동아시아 전역의 베스트셀러로, 백암 박은식ㆍ석주 이상룡ㆍ도산 안창호 등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필독서였다. 양계초는 사실 실패한 정치가다. 광서제의 신임 아래 개혁운동을 펼쳤으나 서태후의 방해로 좌절되어, 강유위는 홍콩으로, 양계초 자신은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러다가 만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천진에 기거하면서 집필한 책이 음빙실문집이다. 책 제목의 ‘음빙실’은 그의 서재 이름으로, ‘얼음물을 마시는 방’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정치활동이 섭공의 마음가짐이었듯이, 글 쓰는 행위도 같은 마음으로 하겠다는 결의가 배어 있다. 실패조차 아름다우려면 그런 마음이어야 하리라. 실패가 금기어가 된 시대를 구원하는 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예수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고난의 십자가이지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다. 고난의 쓴맛은 외면한 채 영광의 단맛만 좇는 ‘단맛 중독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아침에 명을 받고서 저녁에 얼음물을 들이키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성공하기 위해 온갖 편법과 술수가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름다운 실패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 실패의 대가를 알면서도 역사의 십자가 위에 당당히 오른 그이들이 그리운 계절이다. 구미정 숭실대 초빙교수

[삶과 종교] 번뇌와 꽃다발

드디어 행사가 끝이 났다. 정리를 하다보니 꽃다발 두 개가 남아있다. 뒷정리를 하는 내내 장미가 한아름 묶인 꽃다발에 눈길이 갔다. 내심 탐이 났다. 원래 꽃을 좋아하는지라 방에 꽂아두고서 보고 싶어서이다. 꽃다발을 얻어서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마치 날개가 달린 것 같다. 입가엔 연신 미소가 흐른다. 기쁨은 잠시, 번뇌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 등산복 차림의 할머니 몇 분이 타셨다. 꽃다발을 보더니 그 중 한 분이 꽃이 너무 예쁘다며 한참을 이야기하신다. ‘이렇게 꽃을 좋아하시는데 그냥 드릴까? 어쩔까?’ 그렇게 마음속으로 갈등하는 사이 내려야 할 곳에 도착해버렸다. 결국 꽃다발을 들고 내렸다. 숙소로 돌아와 장미가 다치지 않게 잘 꽂아서 햇빛이 비치지 않는 시원한 곳에 두었다. 빨리 피어버리면 너무 아쉬우니까. 그렇게 장미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시골 절에서 불사회향이 있으니 며칠 뒤에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나! 일주일 후에나 돌아올텐데 놔두고 가면 그새 다 시들테고, 그렇다고 들고 가자니 그것도 그렇고, 이 꽃들을 어쩌지? 고민 끝에 지나는 길에 지인에게 들러 선물하기로 했다. 며칠이 지나고 내려갈 날이 되었다. 이것저것 짐을 챙기고 나니 꽃다발이 문제였다. 햇볕을 받으면 차안이 뜨거운데 먼 길에 시들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또 가져가지니 짐이다. 중간에 들러서 갖다 주자니 긴 운전길에 너무 번거럽고…, 참 곤란이다. 그래서 꽃을 좋아하는 스님에게 주고 가기로 했다. 꽃다발을 들고 옆 건물에 있는 스님 숙소로 향했다. 가다가 꽃을 쳐다보는 순간 문득 마음이 바뀌었다. 경전에 마음처럼 빨리 변하는게 없다 하시더니 정말이다. 도로 발길을 돌렸다. 몇 발자국 걷다가 ‘아니야’ 또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이렇게 오분도 채 안걸리는 거리인 그 스님 숙소와 내 방 사이를 왔다갔다하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아, 정말 미치겠군!’ 번뇌가 정점을 찍는 순간이다. ‘내가 이 꽃다발을 왜 갖고 왔을까?’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마음이 이미 번뇌에 휩사여버린 것이다. 꽃에 눈이 멀어 욕심을 낸 자신을 자책하면서 꽃다발을 차에 던져넣고 출발했다. 하지만 번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가져왔으니 잠시 들러서 꽃다발을 지인에게 주고 갈까, 그냥 갈까, 가는 내내 갈등을 반복하는 동안 어느새 절에 도착했다. 설상가상 여기 오니 꽃다발이 천덕꾸러기 신세다. 법당에 꽃이 지천이요, 숙소는 행사 준비물로 빈틈이 없어 도대체 놓을 자리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들통에 꽃아 샘물 근처에 두었다. 온실에서 곱게만 자란 꽃이라 거친 바깥바람에 며칠 지나지 않아 희나리가 돼버렸다. 결국 이리 되고 말것을! 나에게는 그다지 값나가는 물건이 없다. 남이 봐서 탐낼만한 물건은 가지지 않고, 누가 달라고 해도 그리 아까워할 것 없는 정도만 소유한다는 것이 나만의 원칙이다. 그런데 조그만 꽃다발 하나로 이렇게 많은 번뇌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가진 만큼 행복이 아니라, 가진 만큼 집착과 번뇌가 생긴다는 가르침을 이번 일을 겪고서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후로는 꽃은 물론이고 사소한 것에도 탐하는 마음을 자제하게 되었다. 탐심을 버리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뜰에 나서니 온 도량에 매화향기가 가득하다. 무소유의 행복을 강조하시던 법정스님이 새삼 그리운 봄날 오후다. 오늘도 아침 일찍 산책을 나섰다. 빽빽하게 들어 선 도시의 콘크리트 숲 사이로 붉은해가 얼굴을 내민다. 매일 아침 보는 광경이지만 언제나 감동적이다. 참으로 경이롭다. 도심 한가운데서 일출을 보는게 기적같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이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왜 절에 올까? 절이 왜 발전해야 할까? 신도들은 한결같이 절이 발전했다고 한다. 혹은 발전해야 된다고 한다. 왜 절은 그들 말대로 발전되어야만 할까.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두려워한다. 우리는 온전하게 오늘을 살지 못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도문 스님 수원 아리담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종교와 인공지능(AI)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이라 일컫는 알파고와의 대결을 보면서 기계의 고도 발전이 우리 인간에게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의 발돋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재앙이 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100년 이내에 인류가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에 종속되고 결국엔 이에 의해서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인류발전의 역사를 보면 이런 재앙에 대한 우려를 여러 번 겪어 왔습니다. 19세기 노벨이 폭약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면서 인간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하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상상을 초월한 재앙이 인류에게 닥치기 시작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인슈타인이 물질의 원리를 발견하면서 핵에너지의 발명이 인류에게 각 방면으로 다양하게 도움을 주고 있지만 한편으론 인류에게 무서운 재앙을 던져주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직접적으로 북한의 핵폭탄에 대해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독립과 동시에 하느님을 보호자로 모시게 됨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것이 건국이념입니다. 그래서 미국 국가의 끝 소절이 “우리의 모토는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입니다. 성경 창세기에서 인간이 바벨이란 탑을 쌓으면서 인간의 위대함을 넘어 기고만장 함을 하늘 위까지 치솟게 함을 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여러 언어를 뒤섞어 놓는 벌을 내립니다. 미국의 지폐나 동전(페니)엔 꼭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건국이념의 모토를 넣습니다. 또한 1달러 지폐 왼편에 있는 탑은 13개 주를 의미하지만 내용상으론 인간의 오만방자함의 상징인 바벨탑 위에 하느님을 표현하는 삼각형 안의 현란한 눈을 모셔 놓았습니다.아래쪽에는 라틴어로 ‘자손만대의 새로운 질서=novus ordo seclorum’란 글을 새겨 놓았고 위쪽에는 ‘annuit coeptis=우리가 하느님을 모시니 인정하시고 보살펴 주소서’란 글을 써넣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라의 공식 행사에서는 꼭 기도를 합니다.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이렇게 미국의 지도자들은 인간의 무한대라 할 수 있는 능력 앞에 바벨탑의 만용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느님의 위엄을 제시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 인간은 우리가 만든 인공지능 앞에 맞섰습니다. 현재 기술적으론 인간도 복제를 할 수 있는 지경에 까지 도달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 인간이 Android(인조인간=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니 cyborg((신체 일부가 기계로 개조된 인간)와 함께 공존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미 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과 뒤섞여 살 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종교가 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 불교의 자타불이(自他不二), 유교의 수기치인(修己治人)입니다. 이것은 결코 기계가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을 수 없습니다. 영혼은 영원한 세상을 향한 존재임을 우리 예수님께서 제시하셨습니다. 기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도구의 역할은 할 수 있어도 주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기계를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재앙이 될 수도 있고 행복의 도구가 될 수도 있음을 종교의 틀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어느 날치기 재판의 사정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를 에워쌌다. 무슨 강도를 잡으러 온 것도 아니고, 조용히 말로 해도 될 일을 칼과 몽둥이가 웬 말인가, 그가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날 밤, 예수는 그렇게 개처럼 끌려 법정에 서게 되었다. 야간법정이라! 흔한 일은 아니었다. 파행의 기미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이 정도의 사안이라면 원래는 71명의 공회원이 모인 대(大)산헤드린에서 다루어야 할 텐데, 23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어차피 한밤중에 졸속으로 처리하려던 재판이라, 일부러 소(小)산헤드린을 꾸린 모양이다.일차 혐의는 예수가 거짓예언자라는 것이었다. 순진한 사람들을 현혹해서 진리로부터 벌어지게 한 사이비. 그러나 진짜 혐의는 따로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의 불손한 태도가 문제였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도권 종교인들의 자존심에 심각한 흠집을 냈기 때문이다. 예수가 갈릴리 같은 변방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인기몰이를 한 것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일이지만, 성전을 모독한 것은 차원이 달랐다. 성전이야말로 자기들의 기득권을 뒷받침하는 보증수표이니까 말이다.법정은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예수를 집중 추궁했다. 결과는 무혐의였다. 이럴 때는 꼼수를 써야 한다. 대제사장이 물었다. 네가 왕이냐. 침묵으로 일관하던 예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니라! 유대법정에서 누군가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고 사형을 언도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로마법정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죄에 해당한다. 신성모독 혐의로 붙잡힌 예수는 졸지에 정치범으로 둔갑했다.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 땅에서 로마가 파견한 총독에게 붙어 권력을 보존해온 유대 지도자들의 정치공작이 통했다. 그렇게 예수는 역사상 가장 음흉한 날치기 재판의 첫 번째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렸다.공생애(公生涯) 초기부터 예수가 제도권 종교인들에게 눈엣가시였던 사실을 떠올리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요컨대 ‘의사 면허’도 없는 주제에 예수가 명의(名醫)로 소문난 것이 제도권 종교인들에게는 굴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런 갈등은 우리네 삶에서도 늘 관찰된다. ‘주변인’이나 ‘재야’ 따위의 딱지가 붙으면 제도권과 대립각이 세워진다. 물론 제도권도 나름 체면이 있어서 아무나 잡아들이지는 않는다. 막강한 대중적 인지도를 발판으로 자기네가 세운 진리의 정설에 위협을 가해야 칼을 들이댄다. 예수는 실로 왕 같은 권위를 행사했다. 그의 말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언제나 진리였다. 그러니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리는 제도권 안에서만 안전하게 통용되어야지, 밖으로 내돌리면 통제하기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래서 예수를 반역자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다시는 그를 믿는 사람이 나오지 못하게끔 완전히 매장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데 놀라운 반전이 있다. 그는 다시 부활했고, 그를 믿는 사람의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사화(史禍)를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이른바 재야학자 대 제도권학자의 학문 논쟁에 사법부가 끼어들어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실형을 얻도 받은 재야학자는 졸지에 사이비로까지 몰려 제도권학자들의 융단폭격을 받고 있다. 50여권의 저서를 통해 대중역사가로 명성을 쌓아온 이덕일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십자가에 못 박은 시대로부터 누군들 자유로울까. 사순절의 묵상이 저절로 한숨이다.구미정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삶과 종교] 생명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기를

“……슬기로운 이가 나무랄 일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며 안락하고 평화로워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살아있는 생명이면 그 어떤 것이든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남김없이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니 비대하거나 보이거나 안보이거나, 가깝거나 멀거나 이미 있는 것, 앞으로 태어날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자애경 외움을 마지막으로 새벽 기도가 끝났다. 법당 문을 나서니 저 멀리서 아침을 여는 성당 종소리가 들려온다. 천상의 음악 같다. 6시다. 여명이 조금씩 어둠을 걷어간다. 입춘이 지난 지 한참이지만 아직 새벽 공기는 제법 차갑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초를 꺼내려 공양간 밖에 놓인 도구함 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고양이 한 마리가 후다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뜻하지 않은 사람의 출현에 그만 밤새 추운 몸을 녹여주던 따뜻한 보금자리를 들켜버린 것이다. 함께 있던 대중 막내 명진스님이 고양이를 향해 호통을 친다. “야 이 녀석아, 여기 들어가면 안돼. 어서 저리가!” 목소리에 성냄이 묻어난다. 위험하다. 도망친 고양이를 야단하는 그니에게 너무 나무라지 말고 좋은 말로 타이르라고 했다. 비록 우리가 원치 않는 행동을 했지만, 일체 생명에 대해 자애심을 가져야 한다는 완곡한 충고다. 저도 살기 위해 제 살 도리를 하는 것을. 얼마나 추웠으면 쫓겨날 줄 알면서도 거기 들어갔을까. 명진스님은 고양이를 두둔하는 나에게 항변하듯 저 녀석이 도량 여기저기 똥도 막 싸놓는다고 일러준다. 하긴 얼마 전 화단 앞에서 고양이 똥을 밟아 신발을 더럽히긴 했다. 명진스님 말대로 녀석의 소행인지도 모른다. 도량에서 가끔 마주치는 길 고양이들이 몇 있다. 내 보기엔 패션이 다 한결같이 노란 줄무늬라 구별이 잘 안가는데, 명진스님은 기가 막히게 구별한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녀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라본다. 마치 낯선 얼굴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살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일전에는 법당에 올려 진 화분을 보면서 정범스님이 이런 말을 했다. ‘조경 전문가가 그러는데 이 애들은 따뜻한 온실에서 자랐기 때문에 지금 여기가 추워서 벌벌 떨고 있다더라’고 말이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도처 유상수라더니, 스승 아닌 이가 없다. 화초들이 얼마나 추울까. 기도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스님들의 거처로 화분들을 몽땅 옮겼다. 따뜻하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행여 그 사이 꽃봉오리가 얼어버릴까 노심초사했다. 화초들이 포근하고 따뜻한 공기에 행복해하는 듯하다. 며칠이 지나자 양란이 주황색 꽃봉오리를 활짝 열었다. 참으로 생명은 신비롭다. 움직이지 못하는 이 생명들도 살아있을 때 까지는 늘 행복하기를! 모든 생명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거룩하다. 나비의 조그만 날개 짓 하나가 날씨를 변화시키듯, 생명을 향한 나의 작은 실천 하나가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고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법당으로 향하는 길에 또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 원한 없고 적의 없는 따뜻한 눈길을 보낸다. 길 위의 삶이 고달플텐데도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은 아침 햇살처럼 말갛다. 둘 사이에 소리 없는 편안함이 봄 공기를 타고 흐른다.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자애심이 꽃처럼 피어난다. 도문 스님 아리담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종교가 지녀야 할 기본자세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를 영어로 relig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라틴어 religo라는 동사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동사는 ligo(리고=매다, 묶다)에서 시작됩니다. re(다시, 반복, 도로 한다) 자를 붙이는 것은 무언가 다시 매다, 다시 묶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는 무언가 다시 연결한다는 뜻입니다. 옛날 옛적에 세상이 시작되던 때 하느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피조물을 잘 다스리도록 명하셨지만 인간이 하느님의 명을 어기면서 하느님에게서 영영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원죄(原罪)라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구약시대가 가고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신약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구원(救援)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선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드리는 제사 즉 미사야 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자 의무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십자가의 죽음이야 말로 우리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가장 극적인 행위입니다. 이것을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가톨릭교회는 제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미사(missa)라고 합니다. 파견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파견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고자 하셨던 뜻을 우리 교회가 세상 끝까지 대를 이어가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교회가 중심으로 하고자 하는 미션이 바로 사회교리입니다. 사회교리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정의라고 하는 것은 함께 잘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함께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자주 표현한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영원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신앙 여정을 계속하면서 이 평화로운 세상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이것을 때로는 과감히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무서운 약점이 바로 욕망에 욕망을 더 하는 것입니다. 대기업의 자녀들이 재산 싸움을 하는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상을 찡그리며 실망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구성원인 신자들과 특히 지도자들은 빈부 사이, 보수와 진보 때론 우익과 좌익 사이에서 화합의 장을 만들어 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에 의해서 서로 떨어져 나간 사이의 새로운 연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religion 즉 종교가 해야 할 기본자세라고 봅니다. 우리 교회의 수도자들은 재산을 공동 소유하고 있습니다. 도시와 시골은 수입이 천차만별이지만 이 수입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큰 성당이나 시골의 작은 성당이나 성당 운영을 위한 공적 수입은 차이가 나도 각자 개인 수입은 공유(共有)하기 때문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힘을 얻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힘차게 외치는 것입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내 숨은 내가 쉬어야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숨을 쉰다. 사람만 숨을 쉬는 게 아니다. 꽃도, 나무도, 새도, 짐승도, 지구도, 별도, 우주도 저마다 숨쉬기 하는 생명이다. 숨을 ‘쉰다’는 건 멈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작 숨을 멈추면, 생명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 이럴 때는 ‘숨졌다’고 표현한다. 꽃이 지다, 별이 지다, 할 때와 똑같이 사람도 진다. 천하가 한 리듬 안에서 율동한다. 한데 쉰다는 말을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한다는 말로 여긴다. 쉬면서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은 없는데 말이다. 잠을 잔 것도 무언가를 한 것이고,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떤 것도 무언가를 한 것이고, 꽃에 물을 주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한 것도 무언가를 한 것이다. 다만 이런 종류의 ‘함’은 돈을 벌기 위한 ‘함’과 다르기 때문에 ‘쉼’이라 여긴다. 돈을 벌기 위한 ‘함’은 죄다 ‘일’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것도 공부가 일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의 아이들은 누가 딱히 지시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안다.자신들이 공부하는 이유가 이른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함이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때의 ‘좋음’과 ‘나쁨’은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기준이 아니다. 성공이니 출세니 하는 잣대로 어른들이 미리 만들어놓고서 아이들에게 강제 주입한 것이다. 어른들이 일을 ‘밥벌이의 지겨움’으로 인식하듯이, 아이들도 공부를 지겹게 여긴다. 돈벌이를 위한 일이란 그 본성이 지겨운 법이다. 아무리 더럽고 치사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돈이 나오지, 못 참고 뛰쳐나가면 망(亡)한다. 말 그대로 사망선고다. 하여 무조건 견디고 버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가 낙오하든, 일일이 돌아볼 겨를이 없다. 생존경쟁은 이른바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전쟁터라는 것 아닌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엄습하는 순간, 양심이니 법이니 도덕이니 따위가 들어설 자리도 사라진다. 아이들더러 공부를 즐겁게 하라고 말하려면, 어른들도 일을 즐겁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돈교(敎)에서 해방되는 게 필수조건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돈으로 안 될 일이 없다는 세속적 구원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데 이게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오죽하면 예수 가라사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했겠는가. 하지만 돈신(神)이 아무리 전능해도 허술한 구멍은 있기 마련이다. 가난한데 행복한 사람들, 불편한데 즐거워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도무지 맥을 못 춘다.이들은 쉼이 허용되지 않는 일을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죽지 못해 억지로 하는 일에 더 이상 노예처럼 매여 있지 않기로 선언한 사람들이다. 남이 만들어놓은 ‘잘 사는’ 기준에 따라 자기를 맞추다가는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쉼’없는 일이 노예노동이라면, ‘쉼’없는 숨은 ‘좀비’스러운 숨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 쉴 것이다. 누가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이다. “숨 쉰다, 숨을 쉰다. 아침은 아침 숨을 쉬고 저녁은 저녁 숨을 쉰다. 나는 내 숨을 쉰다, 내 숨을” 가수 홍순관의 노래다.똑같은 뜻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명제로 담아냈다. 올해는 단재가 만주 땅 뤼순감옥에서 숨진 지 80주기다. 모든 사람이, 모든 민족이 저마다 자기 숨을 쉬는 게 평화라던 그의 외침이 새삼 그립다.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