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가을이라는 계절은 황금 물결이 넘치는 들녘과 여러 빛깔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낙엽이 떠오른다. 낙엽이 떨어져서 도량에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일 년이라는 시간이 바쁘게 나의 곁을 스쳐갔다는 상념이 일어나고 세상이 또한 과거의 흐름을 반복하는 주기에 묵묵히 앉아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본다. 이 시간은 수확을 준비하였던 농부에게는 소중한 결실의 시간이었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분들께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었으며, 사춘기의 청소년에게는 성장의 시간이었고, 학자들에게는 학문의 성취를 쌓아가는 시간이었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인 나에게는 내면을 관조하는 시간이었다. 낙엽으로 자연의 주기를 가르치는 나무들은 다음 세대를 키우고 독립시킨 시간이었고 스스로가 휴식에 들어갔으며 내년의 새싹을 피울 준비하는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인간들이 낙엽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낭만을 즐기는 것과는 오묘한 대조가 일어난다. 이러한 부조화는 또 하나의 커다란 자연의 울타리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고, 인간은 그 질서 속에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우리의 주관에 따른 문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다양성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특유의 문화를 연출시켜 화합을 이끌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인간의 역사는 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서양의 교류를 통한 문화의 혁신이 일어났으나 전쟁과 갈등에 의한 많은 희생도 발생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한 내용으로 연기와 윤회가 자리 잡고 있다. 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는 언어적 표현이고, 윤회는 계속 반복한다는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의미를 인간세계에 비유하여 적용시켜본다면 인간은 인간이 설정하여 놓은 경계 안에서 살아가면서 부딪히고 갈등하면서 내면의 관조와 보편적인 이성을 증가시켜 다른 존재들과의 차별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여섯의 범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꿈꾸는 극락이라는 천상계에서는 환락이 많아서 오히려 중생들이 열망하는 깨달음이라는 대전제가 천상계에서는 크게 중시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서 구법여행을 이어가고 있는데 깨달음을 인도하는 스승으로 뱃사공과 일반인의 거사 및 여인들도 등장하고 있다. 즉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중생들은 모두 부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즈음은 가정에서 애완견이나 반려동물과 많이 생활하는 추세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동물들이 인간의 말을 잘 이해하고 인간의 역할을 실천하기 때문에 증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것에는 일반의 사람들이 가진 사유의 범주에서와 다른 개념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수직에 의한 상하 관계와 나의 중심으로 생각을 펼치려는 이기적인 생각이 합쳐진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생각을 극복하는 방법은 대중을 중심으로 사유의 폭을 확장해야 한다. 이 세상은 인간의 것만도 아니고 신에게 속한 것도 아니며, 결국 육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삶의 무대이다. 가을에 곡식이 익고 나무가 단풍으로 치장하는 것은 시간의 주기에서 치열하게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쳤던 삶의 생생한 장면들이다. 인간들이 우리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에도 다른 존재들은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이제는 치열한 삶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관조하는 나무처럼 나의 내면의 부처를 찾아서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에 이르렀음을 낙엽은 날리면서 나를 일깨우고 있다. 세영 수원사 주지 스님

[삶과 종교] 지구는 중생이 공생하는 공동체

가이아(Gaia) 이론의 창시자인 영국의 대기 화학자 러브록(James Lovelock)은 지구가 일정 대기비율을 유지하는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라고 주장하였다. 지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고,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생존에 최적조건을 유지해 주기 위해 지구는 언제나 스스로 조정ㆍ변화한다는 것이다.미국의 생물학자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 마굴리스는 진핵생물 기원 가설로 생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가설은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의 기원을 진핵 세포(eukryotic cell)로 들어간 외부조직에 에너지를 생산해주고 영양소를 얻는 공생적 관계를 이루다 정착했다고 보는 이론이다. 세포공생설(endosymbiosis) 이 가설은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진핵세포 내의 두 조직은 처음에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렇지만 서로가 자신과 상대를 동시에 살리는 방법이 있었고, 공생하다가 마침내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것일까? 불교적으로 볼 때, 애초에 그들은 별개 존재가 아니라 지구라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 장에서 활동하는 여러 생명인 중생(衆生)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작은 단위의 생명 장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주변에 인연이 있는 것을 먹게 된다. 그것은 그 존재자들의 생명의 장 안에서 타자를 자기화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자기가 타자화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은행잎들과 단풍잎들이 깊게 물들고, 곡물들과 과일들이 다 익었다. 가을에 낙엽과 과일과 곡물들은 미생물과 동식물 그리고 인간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리고 그 미생물과 동식물의 배출물은 역으로 그 나무에게 좋은 영양소가 된다. 나무의 광합성과 동물과 인간의 음식 섭취 및 소화 과정에서, 각각 산소를 생산하고 이산화탄소를 소모한다든가, 거꾸로 산소를 소모하고 이산화탄소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순환과 균형이 유지된다. 이런 순환 속에서 산소 21퍼센트, 질소 78퍼센트 그리고 이런저런 나머지 기체들이 일정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 순환의 연쇄 속에서는 이타적인 것이 이기적인 것이고, 이기적인 것이 다시 이타적인 것이 된다. 내가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운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된다. 나와 남이 구분되지 않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인 것처럼 보이는 공생(共生) 즉 ‘함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구에서의 생존 최적조건이 되는 비율이 깨질 때, 자연생태계는 물론이고 중생들의 ‘함께 삶’이 깨지는 것이다. 우리는 입이 좋아하는 대로만 먹거나 과하게 먹으면 안 된다. 일정한 대기비율이 유지되어야 하듯이, 생태계에서의 생명들 간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듯이, 내 몸의 세포들 간 균형과 조화를 위해 절제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내 몸의 면역계가 몸을 보호하기 위해 과민반응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 신체 일부조차도 내 신체 일부가 아닌 것으로 착각하며 공격을 하게 된다. 이것이 면역성 질환으로, 몸의 균형이 깨지면서 몸 생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신호 보내는 것이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주체와 개인이 강조되면서 인간이 함께 사는 공동체 존재자이며 지구가 공동체 존재자들의 하나의 생명의 장임을 망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급속한 산업화와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지구 전체가 점차 공멸(共滅)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신호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 지금보다 더 귀 기울이고 더 눈을 떠서, 인간 자신과 자연생태계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의 장으로서 지구를 더 가꾸어야 한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분별력

사람의 습관 중에는 ‘후회’(後悔)라는 것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이전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저지르고 난 후나 지난 간 후에 “이렇게 할걸!” “잘할걸!” 하고 푸념하는 단순한 과정이다. 그러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통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후회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고 난 후의 변화이다. 이것을 ‘반성’(反省)이라고 한다. 후회가 지난 일을 뉘우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성은 자기성찰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는 날마다 세 번씩 자기성찰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정성을 다했는가?”(爲人謀而不忠乎) “친구와 사귀면서 믿음을 잃지 않았는가?”(與朋友交而不信乎) “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傳不習乎) 섬김과 신의와 실천에 관한 삶의 전반적인 반성을 하며 살았다는 말이다. 자기중심이 아니라 이웃중심으로 살면서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옳게 살았는지 되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른 성찰을 제공하는 단초를 ‘분별력’(分別力)이라고 할 수 있다. 분별력이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또한 정확한 ‘판단력’(判斷力)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현상을 인식한 후 사회적 또는 도덕적인 합의에 따른 논리적 판정인 판단력이 뒷받침될 때 올바른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고, 자기 성찰이 가능하며 비로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인 분별력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디에 그 기준을 두어야 할까? 사도 바울은 신약성서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그 기준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뜻’이 분별력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전제하고 있다. 무슨 말일까? 바르지 못한 세대를 답습하려 하기보다 마음을 새롭게 다 잡아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선한 행위의 결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선한 행위, 하나님이 기뻐하실 선한 결정이 분별력을 위한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이것은 지구 상에 존재하는 대부분 정상적인 종교의 신들이 바라는 바이기도 할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지구상 인구의 80% 이상, 우리나라 인구의 50% 이상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의 뜻에 따라 바른 판단력의 기준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 최소한 반은 넘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은 예외라는 말은 아니다. 사람은 기본적인 종교의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심성의 소유자라면 선한 행위의 결정을 신의 뜻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별력 없이 거짓 뉴스를 퍼뜨리며 사실을 오도하려는 사람들은 무슨 배짱일까? 가끔 카톡이나 편지로 거짓 뉴스가 배달될 때마다 불쾌한 것은 물론이지만 판단 결정의 결여로 분별하지 못하는 맹신적이고 무조건적인 그들의 행위가 자칫 그들이 믿는 신을 욕되게나 하지 않는지 심히 염려스럽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교황의 평양 방문과 자유통일 행진곡

평화통일은 평화적인 수단과 방법을 전제로 하는 통일이다. 종교계가 늘 외치는 소리다. 중국이나 일본의 영토확장이나, 중동의 종교분파통합, 또는, 유럽연합의 화폐통일이나, 모택동의 문화혁명 같은 명분상의 국민정신통일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자유와 정의와 진실이 통일의 본질과 내용이 되는, ‘자유통일’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가 없고, 정의가 죽어서 진실도 없는 사회의 통일은 분단만도 못한, 사이비 통일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은 지구를 40번 파괴하고도 남는다고 했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주도에 소련이 공감하여, 인류는 핵무기 축소와 생산 통제에 U.N.의 이름으로 착수하였으니, 북한 비핵화는 남북통일과 무관한 차원의 온 人類와 神의 절대 명령권역이다. 겨레의 소원 남북통일과, 종교계가 외치는 평화통일 행진곡에, 최근에는 남북한이 대국들과 직간접으로라도 북핵 타령을 합창하지는 말아야 한다. 1세기 전부터 온 겨레가 함께 부르던 현 애국가나, 나라꽃 노래를 부른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불바다’나 ‘잿더미’ 거론으로 대재앙의 전주곡 같은 북핵 타령은 저승사자들이나 뻐기며 부르는 인류의 장송곡이나 다름이 없다. 남북통일에는 백해무익하며, 주변국들의 핵 무장화의 핑계가 될뿐더러 국제 전쟁 전문가들만 결집시키는 핵보유를 남북은 아직도 아쉬워하거나 흥겨워하며, 제정신을 잃지 말자. 평화의 사도 로마 교황의 평양 방문을 방해하며, 통일을 훼방하는 북핵 타령으로는 한반도에 신무기 대목장 개업이나, 신무기 종합시험장 개장의 전주곡이 될 뿐이다. 양쪽이 모두 지니고 있는 핵무기 사용의 전쟁으로는 남북통일이 더욱 멀어지고, 중동전처럼, 또다시 휴전선의 이동으로 끝나는, 종전 전주곡만 반복할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미 10여 차례나 U.N.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속이고, 속았으니, 또 속이고, 또 속아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제, 이번만은 북한도 핵 타령 가설무대를 거두어치고, 로마 교황과 함께 평화통일 행진곡을 불러야 할 것이다. 서독은 남한처럼 핵무기가 없었기에 경제발전이 가능하였고, 동독과 통일하였다. 핵무기는 고비용의 경제파괴 무기며, 더 큰 핵무장 갈증의 증폭제가 될 뿐이다. 미ㆍ소가 핵무장 하던 노력으로, 비핵화에 주력했다면, 지금쯤 국민소득이 10만불을 넘어, 세계 빈민국들 지원으로 인류평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대만, 남한, 이태리, 서독, 등, 미국과 U.N.이 점령하여 민주화시킨 나라들은 지금 모두 선진국 대열에 올라 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이 무력과 공산주의 사상으로 점령했던 북한, 티벳, 위그루, 내몽고,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알바니아, 동독, 폴란드, 등을 살펴보면, 공산주의 종주국답지 않게 가난을 겪고 있다. 이제는 북한도, 또, 남한의 이른바, 좌경인사들도, 아닌 척하며 겉 꾸미느라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각국의 진솔한 손익계산서를 따라, 용감히 공산주의 사상 포기는 물론이고, 종주국 소련이나 중국도 과감히 멀리해야 한다. 또한 몽골이나 폴란드처럼, 북한도 미국과 국교 정상화에 힘쓰게 도와야 한다. 북한이 몽고의 징기스칸이나 당나라의 이세민처럼, 점령지마다 종교의 자유만이라도 보장하였다면, 지금쯤 북한은, 중국이나 남한보다 훨씬 더 잘 사는 아시아 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신앙의 자유는 인권신장의 척도다. 로마 교황의 내년 평양 방문 예정 손익계산 개관을 보면, 남한 국민들과 전 세계에서 모이는 관광객들로부터, 평양시는 내년에 적어도 2천억 불(한화 2백억 원) 이상의 관광수입이 예상된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새로워지는 대한민국을 기대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아주 신비하고 경이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세계 많은 곳을 가 보아도 이렇게 아기 자기하게 아름다운 나라가 있을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지구촌 어느 나라를 가도 한국의 주요 브랜드 회사들이 유명하게 자리를 잡았고 한국 젊은이 들의 한류열풍과 세계를 들썩이는 K-POP 열풍이 젊은이 들을 춤추게 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국인이라고 소개를 하면 엄지 척을 보인다. 전 세계의 수 많은 유명 예언가들이 한반도의 21세기 미래를 세계의 최고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지난날의 우리나라 발전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 질듯보이기도 하다. 요즘의 한반도에 흐르는 정세를 보더라도 정말 남북 통일이 곧 될 것 같은 기대의 분위기들이 피어오르고 있다. 한 나라가 선진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문화의식 수준일 것이다. 한 개인이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diet)를 잘 하려면 우선적으로 무엇을 안 먹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보다 먼저 삶의 시간표를 조절해야 한다. 야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과식을 피해야 하듯이 다이어트에 성공하려면 삶의 바른 목적을 가지고 바른 생활방식을 먼저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에게도 이 계획이 중요하듯이 한 나라가 선진국가로서 다른 나라에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들의 국민적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우리 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 우선 모든 국민마음속에 ‘비움’의 마음이 시작되어야 한다. 개인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비움으로부터 시작되듯이 한 나라의 새로운 시작도 비움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한 나라의 비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학연, 지연, 혈연, 폐쇄성, 경직성들이 아닐까? 아직도 선거때를 보면 뿌리 깊은 이 모든 옛 구습들이 벗어져 버려지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비움이 없이는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다. 한 개인의 신앙이라는 것도 비움은 새것을 받아 드리는 가장 기초적 단계이다. 후회나 자기부정은 비움이 될 수 없다. 비움은 현실을 똑 바로 보고 내가 변하기 위하여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을 내려놓는 결단에서 시작된다. 그 비움이 가능해지면 그곳에 ‘채움’이 일어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반도에 전쟁폐허만 남았을때 우리 부모 세대는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이를 악물로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맸다. 시골농가의 전 재산인 소를 팔아 대학비를 내었고 노후대책도 없이 자녀 뒷바라지의 교육열의 결과로 대한민국은 세계사에 유래 없는 단시간의 경제부흥을 이루었다. 그 혜택으로 오늘을 누리는 우리는 무엇으로 이 땅을 채워야 할까? 이젠 정신문화를 채워야 한다. 무너진 교육의 결과는 어린아이들이 무례함과 무개념과 무목적성을 만들어 미래를 답답하게 한다.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던 이 나라는 이제 어린아이들을 무서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정신적 채움이 없이는 우리를 향한 어떤 찬란한 미래의 예언적 찬사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그 채움이 일어나면 그 때는 ‘나눔’으로 번성하게 되어야 한다. 나눔은 강자의 미덕이며 앞선자의 배려다. 우리가 그렇게 나눔을 받아서 살아 봤듯이 우리도 이제는 나누어 줄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에 주변과의 나눔이 일어날 때 존경을 받듯이 한 국가 또한 나눔이 일어날 때 세계속에서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될 것이다. 전 세계속에 어려움이 나라들을 신속하게 도와주고 국내의 약자를 돌아보며 동시에 열심히 살아온 분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올리며 상생하는 민족, 그 민족이 바로 동방의 현자의 나라 대한민국이 되어지기를 가을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 땅을 위해 기도해 본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대한민국이여 이제는 일어나 지구촌을 보듬고 가꾸고 보존하는 새로운 글로벌 리더가 되라.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며

시간의 주기적인 흐름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고 올해에도 한가위가 다시 한번 우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과거에도 존재하였고 미래에도 지속할 우리의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예법들은 시대를 따라서 변천되었어도 내면에 간직한 사상적 근원은 번잡한 현대인에게도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부모와 조상의 공덕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뿌리에 대한 성찰을 하는 시간이다. 윤리적으로 동서양을 관통하는 질서라는 개념에서 강조되었던 요소는 가정에서의 교육이 중심이고 이것을 통하여 개인과 여러 사회조직의 가치관과 관계를 정립하는 기초가 성립된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나무에 비유한다면 조상은 뿌리이고 부모는 줄기이며 자식은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무의 일상적인 생의 주기에서 가을에 이르면 몇 년에 걸친 결과물을 열매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휴식에 들어가며, 열매를 통하여 더욱 발전된 미래를 준비하게 된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인간은 우주의 진리를 합리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다른 존재들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나 여러 제약으로 인하여 인간과 비슷한 뛰어난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에서 부모에 의한 역할은 영향이 매우 크다. 체계적인 교육과 지속적인 학습을 통한 지식과 지혜가 끊임없이 전달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진보적인 존재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으나 윤리의 토대에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이러한 윤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부모의 은혜이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어느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얹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얹고 다니면서, 천만 년을 의복과 음식 및 의약품 등으로 봉양하는 때에 그 부모가 설령 어깨 위에서 오물을 쏟아도 오히려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으시다. 이와 같은 크신 부모의 은혜를 우리들은 일상 속에서 얼마나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고 나아가 보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가를 스스로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현대사회는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나 다른 인격체인 상대방을 얼마나 배려하고 살아왔던가. 불교의 가르침은 연기의 법칙에 있다고 설해지고 있다. 연기의 실체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따라서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라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진리의 가르침을 먼 곳에 또는 더 깊은 곳에 있다고 스스로가 가상의 현실 속에 살아가는 측면도 있다. 요즈음은 사회에서 명상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명상을 통하여 부모에 대한 은혜를 자세히 관찰하는 기회가 있다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꿈꾸는 천상의 세계에도 인류와 같은 사회가 존재하고 그 시대에 알맞은 문화를 꽃피운다고 말한다. 이 세계에서 특이한 점의 하나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 육아의 문제에 있어서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후에 예닐곱 살에 이르면 가정집으로 데려가게 되는데 인간세계의 가정과 같이 생활로 돌아가는 점이다. 이제 다시 번잡한 일상으로 돌아왔고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할 시간이다. 그렇지만 오천년의 역사를 지탱할 수 있었던 내면에는 효와 예라는 뿌리깊은 문화가 있었다. 효를 존중하는 전통적인 예법을 통해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우리는 부처를 이룬다는 진리에 한걸음 더욱 다가갈 것이다. 세영 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추석 제사와 가족 간의 사랑

가을이 점점 익어간다. 누런 황금 들판의 저녁과 붉은 노을이 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가을 저녁을 조상님들께 감사드리는 날로 삼고, 음력 8월 보름을 추석(秋夕)이라 했을까?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결실의 계절이다. 현재의 이 풍성한 가을을 감사하면서, 집집마다 가족들이 모여서 나와 우리 형제·자매들을 낳고 기르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 어머니와 아버지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그리워하며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곧 다가올 겨울에는 무서운 추위가 찾아오고, 온갖 작물들은 스스로 생명의 기운을 감추고 깊게 잠들어 쉬기를 요청받는다. 그래서 가을에서 가을만을 느끼는 것은 가을을 온전히 다 느끼는 것이 아니다. 가을에서 지난 여름과 다가올 겨울과 봄 그리고 새로운 여름을 함께 느끼는 것이 이 가을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곡물 하나하나에서 지난 여름의 뙤약볕과 불타는 땅의 목마름과 또 그 속에서 이따금씩 내리는 하늘의 빗줄기와 농부의 땀방울이 아로 새겨진 것을 모두 볼 수 있는가? 우리가 보는 그 곡물 안에 이와 같이 우주적 연기법(緣起法)에 따른 전체 우주가 수렴되어 있는 것이다. 수많은 그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각각 각자의 인생을 살아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아들들과 딸들이 또 각자 살아갈 것이다. 그 각자들은 각자들이면서 과거의 조상과 미래의 후손들이 모두 함께 수렴되어 있는 것이다. 제사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을 기리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자신과 자녀들을 그리워하고 기리고 살리는 것이다. 내 안에는 조상님들의 흔적과 유전자들을 담고 있고, 또 후손들에게 그것들이 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조상에게 지내는 것으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과 후손들을 함께 돌보는 것이다. 나의 흔적과 유전자들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들과 아버지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공통 유산이다. 제사를 그만두자거나 생략하자거나 하는 어떤 가족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지를 드러내는 외침이다. 그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가족들 사이에 있는 어색함과 불편함 그래서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더욱 필요한 것은 가족 간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배려다. 풍요로운 가을이 메마른 가을로 변해가는 것은 가을이 풍요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족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배려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뜻이다. 제사지내기를 꺼리는 것은 거기 행복과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소리다. 가을에는 주위의 가족들을 더욱 사랑하고 배려하며 감사하자. 그것이 조상을 기리는 제사다. 그것이 자녀를 잘 기르는 교육이다.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자기 사랑이다. 자기 사랑이, 가족 사랑이고, 조상 사랑이고, 자녀 사랑이다. 가을 한계절에 사계절을 모두 보고 온전히 느끼는 것처럼, 주변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 속에서 곧 조상을 기리며 자신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다 보아야 할 것이다. 가족의 행복이 곧 조상을 기리는 제사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비싼 수업료

무척 지루한 8월을 보냈었다. 하루하루 역대급 폭염으로 지쳐 허덕이는 중에 “제발 비 좀 오게 해 달라!” “제발 이 뜨거운 열기를 식혀 달라!”고 하늘의 자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났었다. 그런 와중에 애태우듯 피해 달아나는 태풍의 뒤를 보며 “제발 태풍 하나만 지나가게 해 달라!”는 울부짖음을 하나 더하게 하였었다.그러다가 반갑게 하나 지나가던 태풍이 삶의 터전을 할퀴듯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하늘이 진노한 듯 이내 비구름이 날개 달고 여기저기 물 폭탄을 쏟아붓는 탓에 원망할 여유도 없이 인간의 나약함을 다시 한 번 배워 깨닫게 하였다.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수업료는 수업에 어울리는 가치가 있다. 어울리지 않게 터무니없이 비싼 수업료는 외면받을 수도 있다. 대학의 수업료가 학교에 따라 다른 것이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가끔 학교 등록금을 비교하면서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도 그런 의미이겠다.음악도들이 수준 높은 연주가에게 높은 수업료를 내면서 짧은 시간의 현장 레슨이나 정기적 레슨을 받으며 스스로 만족하는 것도 그렇고, 특별한 자격증을 취득하려거나 또는 필요에 의한 외국어를 배우려고 평균 이상의 수업료를 드리면서 만족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예측한다면서 태풍이 지나가는 길조차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대비한다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심한 피해를 겪을 수밖에 없을 때, 그제야 인간 문명의 오만함과 인간 존재의 무능함을 깨달아 하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게 하니 그 수업료가 보통 비싼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올해 초에 일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리메이크하여 만든 한국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내용 중에 추수를 앞둔 들판의 벼가 비바람에 쓰러진 것을 바라보던 주인공 혜원(김태리)의 고모(전국향)가 “하늘도 참 무심타!”고 하다가도 “하늘이 하는 일을 우리가 뭔 수로 어떻게 하겠어!” 내뱉듯이 한마디 하는 말도 그런 의미이겠다. 더구나 영화의 전개 내용을 볼 때 뭘 해도 되는 것이 없어 고향으로 내려와 사나흘만 머물다 가겠다는 것이 겨울로부터 봄, 여름, 가을을 거쳐 다시 겨울로 들어서면서 자연에 순화(純化)되어 가는 이야기를 통해 하늘 아래 사는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원래 인간은 존재 자체가 그렇다. 흙 속의 티끌인 ‘아다마’로 만들어진 ‘아담’이 사람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신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생령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신의 간섭이나 도움, 하늘의 섭리를 거슬러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 잠언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하였다. 그러니 하늘에 닿아 자기 이름을 내려고 돌 대신 벽돌로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하면서까지 문화와 과학의 업적을 과시하는 성과 탑을 쌓으려다 신의 진노로 무너지고 흩어져 버렸다는 바벨탑 사건은 어리석은 인간의 표본이라 하겠다. 이왕 비싼 수업료를 치렀으니 배우고 깨달은 대로 살아야겠다. 매 맞고 후회하는 인생이 아니라 신을 경외하듯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살아야겠다. 더 겸손히 하늘의 뜻을 행하는 마음으로 신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살피고 나라를 걱정하고 인류를 위해 마음을 순화하며 살아야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나가사키 수녀원 지붕 위에 떨어진 원자탄

1945년 8월 11일 오전 11시 30분,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탄은 수녀원 지붕 바로 위의 300여 m 상공에서 터졌는데, 일본인들은 그 지점을 ‘폭심지(爆心地)’라고 부른다. 그러나 폭발순간 지상에서는 시속 1천 km 이상의 강력한 화풍(火風)과, 2천도 이상의 고열로 건축물들이, 심지어, 탱크나 대포를 제작하던 대규모 군사시설의 대들보를 받치고 있던 직경 1m 내외 굵기의 철골 기둥들도 엿처럼 녹아서 구불구불하게 휘어져 쓰러져 있는 것을, 1985년 1월 초, 필자와 김남수 주교의 방문 시에도 보게 하고 있었다. 원자탄이 폭발하던 순간 10만여 명에 가까운 나가사키 시민들이 원자 화염으로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폭심지에 있던 수련원에는 16세 전후의 수련 수녀들 10여 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과 세계 인류가 범하는 죄악을 보상하기 위하여 거룩한 번제물(燔祭物)로 하느님께 봉헌되었으니, 마치 베들레헴에 예수 아기 탄생 후, 헤로데 왕의 근위병들이 예수 아기 대신으로, 무죄한 3살 아래 아기들 약 20여 명이 제물로 참살되었듯이! 천주교회는 이 순결한 어린 아기들을 지난 2천 년 동안, [어린 순교자들]로 공경하고 있다. 하느님께 바치는 번제물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처럼, 천주 성자께서 바치던 어린양같이 무죄하고 순결한 제물이어야 할 것이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폭발하는 동안, 나이 어린 지원 수녀들 7명은 선배 수녀 2명과 함께 점심 도시락 벤또를 받아 가지고, 정부에서 시키는 소나무 죽은 가지 꺾으러, 일찍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내륙으로 약 12km 떨어진 미쯔야마(三峰山)에 가서 나무하는 바람에 원폭을 면하였다. 그러나 폭심지 본원에서 선배 수녀들과 함께 원자탄 화염에 싸여 하느님께 바치는 인류의 번제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음을 한하였다. 불행히도 지금 핵전쟁이 나면, 우리 신부 수녀들은 성당과 수도원 지붕에만은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들이 사는 주택과 학교와 병원과 시장거리와 장병들의 군부대에는 핵폭탄이 떨어지지 말고, 그 대신 성당과 수도원 지붕에 떨어지도록, 진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자청하며 대기해야 할 것이다. 1945년 4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 아시아에서 최악의 최대 규모 전투는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일본 육·해·공군에서 선발된 특전사는 물론, 가미가제 자살특공 전투기도 2천여 대를 동원하여, 밀고, 밀리기를 거듭하였다. 양국 군의 전사자가 섬 민간인들을 포함하여 30여만 명이나 되었다. 마침내 일본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일부 생존자들은 포로가 되었으며, 미군이 승리함으로써, 임시 군용비행장을 해변에 마련하였다. 비핵화는 정치, 경제, 외교, 무기, 등의 문제 이전에, 핵보유 집단의 사상 문제며, 국제외교 간 신뢰 문제다. 남한에 설치했던 전략 핵무기는 1975도에 이미 260여기(?) 모두 철거하여, 비핵화 약속을 지키고, 핵을 버렸으나, 아프리카와 북한을 포함한 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다’, ‘천체 위성 제작, 실험이다’, 하는 발표로, 지난 25년간 10여 차례 이상 U.N.과 미국은 거짓에 속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설마 전쟁까지야 하랴? 하며, 군사적 대응을 피하고 미루는 동안 일부 국가의 핵무기 증강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세계를 속이며, 약속을 어기고, 승리할 수는 없다. 무엇을, 얼마큼,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서로가 다 잘 알고 있다. 다만 여기에 고의적인 약속 이행 미달이나, 의도적인 이탈은, 현대화한 나가사키 비극의 처참한 현상이 우리들 앞에 전개되는 것을 어느 편도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8월25일 백중을 생각하며

일면 스님 음력 7월 보름인 오는 양력 8월25일은 아주 중요한 우리나라 전통 명절이다. 보통 백중(百衆)이라고 하는데 많은 대중에게 공양하는 날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불교에서 나왔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목련존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 깨달음을 얻은 뒤 자신을 길러준 부모를 제도하려 신통을 발휘해서 온 세상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런데 죽은 어머니가 아귀가 돼 음식은 먹지도 못하고 피골이 상접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아귀는 살아있을 때 욕심을 부리거나 남을 돕는데 인색했던 사람이 죽어서 굶주리는 과보를 받은 결과다. 목련존자가 슬피 울며 어머니에게 발우에 밥을 담아 건넸으나, 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밥이 불덩이로 변해 먹을 수가 없었다. 목련존자는 슬피 울며 부처님께 어찌해야 하는지를 여쭸다. 부처님은 “너의 어머니는 죄가 깊어서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신들도 어찌하지 못하니, 여러 스님의 힘을 얻어야 해탈할 수 있을 것”이라며 “7월15일에 스님들이 자자(自恣,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고 대중 앞에 참회하는 불교 의식) 할 때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을 여러 대덕 스님에게 공양하라”고 일러주었다. 이 내용이 실린 경전이 ‘우란분경’인데 ‘우란’은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라는 뜻의 옛 인도 말이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바는 두 가지다. 하나는 스님들을 극진히 대접하면 지옥에 떨어진 부모도 구제할 수 있을 정도의 좋은 일이 생긴다는 승보공경 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자식의 지극한 효심은 지옥에 빠진 부모도 구제하는 감동을 준다는 교훈이다. 음력 7월15일은 또 스님들이 선방에서 결제를 풀고 해제하는 날이다. 스님들은 여름 3개월, 겨울 3개월을 선원에서 참선 정진한다. 이를 안거(安居)라고 하는데 시작하는 음력 4월15일을 결제(結制), 끝나는 음력 7월15일을 해제(解制)라고 한다. 그래서 해제하는 스님들에게 3개월간 고생했다며 음식을 베풀고 극진히 대접한다. 안거를 마친 스님을 대접하면 지옥에 빠진 중생도 구제하는 큰 힘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유래한 우란분절은 농사와 결합한 백중이 되어 국가적 명절로 자리 잡았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소를 치는 목동들은 백중날이 다가오면 산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돋우고 당일에는 농사일을 쉬고 장만한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 날은 한여름 쟁기 가느라 수고한 소도 쉬게 하고 배불리 먹였다. 이처럼 백중은 봄부터 모종, 보리타작, 모심기, 김매기 등 쉴 틈 없이 바빴던 농사일을 하루 쉬면서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고 곧 시작할 추수를 준비하는 농경사회의 중요한 명절이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수행자는 물론 머슴 소까지 두루 음식을 나누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웠던, 한여름의 명절은 이제 절에서나 볼 수 있다. 농경 사회가 사라지면서 그 시절 풍속도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백중이 갖는 소중한 의미마저 잊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효, 죽은 목숨도 살리고자 하는 생명의 고귀함, 살아서 악업을 저지르면 죽어서 그 과보를 받는다는 인과의 엄중함, 소와 일꾼도 두루 챙기는 나누고 베푸는 마음은 더 새기고 퍼뜨려야 할 소중한 가치다. 올해 8월25일에도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들의 기도소리가 전국 사찰에 가득할 것이다. 비록 절에 가지 않는다 해도 이 날 하루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정의(正義)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어김없이 외쳐대는 ‘정의사회구현’은 인류역사상 보편 사회의 지표이다. 그래서 개인이든 국가이든 목표와 목적은 달라도 ‘정의’에 초점을 맞추고 달려간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바르고(正).’ ‘옳은(義)’ 것이라고 이해하는 정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원래 정의란 개인의 가치관에서 출발했다. 옳음을 의미하는 한자 ‘義’는 양 ‘양(羊)’자와 나 ‘아(我)’자로 조합된 글자이다. 여기서 양이란 하늘에 드리는 제물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하늘에 제사 드리는 의미로서의 ‘의’는 하늘의 뜻을 받든 상태이고 이것은 옮음을 말하는 ‘의’이다. 결국 정의란 하늘의 뜻을 받든 개인의 의지를 말한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개인과 개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정의는 점점 사회적 성격을 띤 용어로 자리 잡아 가게 됐다. 그래서 그런지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와 강연으로 선풍적 인기를 얻었던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델(Micharl Sandel) 교수도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정의라고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마치 정치, 경제, 사회의 주체인 개인마저도 그런 사회체계의 영향을 받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 이래로 인간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왜냐하면 정의란 그러한 사회보편 개념에 얽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것은 원죄로 얼룩진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준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너를 통해 저 사람이, 너를 통해 내가, 저 사람을 통해 내가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의는 종종 이기심과 폭력의 발단이 되어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는 협박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선구자 중의 한 분이었던 윤치호는 그런 폭력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다. 개화기 사회진화론 논리의 약육강식이라는 밥상 위에 있었던 조국의 존망 앞에서 ‘정의가 힘인지 아니면 힘이 정의인지’에 고민하다가 힘에 눌려 친일하였고, 결국 해방된 조국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개인의 도덕적 의지와 그 의지에 군림하려는 사회적 힘의 대립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그분만의 고민이 아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살아가려는 대부분 사람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성경이 요구하는 정의는 그렇지 않다. 나의 이기심을 발동하거나 내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고 죽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정의란 남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는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39-44)고 하였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마태복음 5:6, 10)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란 하늘의 뜻을 받든 나의 책임 있는 태도이며, 그것은 누가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며 사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고 강요하는 힘이 아니라 나를 따라올 수 있도록 자발적 동기를 제공하는 배려가 정의인 것이다. 구호로만 정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구호대로 나부터 바르게(正) 정 옳음(義)을 실천해가는 것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회담으로 非核化와 無償 평화통일이?

인류 역사상 나라와 민족들 간의 무역충돌이나 영토분쟁, 전쟁예방 등 때로는 강대국들의 생트집이나 작전수단으로도 종종 상대국 기만 회담이나 강요된 합의도 없지 않았다. 지난 1,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개전(開戰)의 전주곡처럼 명분 쌓기 회담도 없지 않았다. 더구나 일당독재의 권력으로도 종교와 외교와 경제는 힘으로 되지 않으므로, 각종 회의와 합의 형식으로 국민 기만이나 상대국 무력화의 선전이 요란한 회담일수록 합의서는 일찍 破棄되어 휴짓조각이 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초, 미국 키싱저 국무장관이 주도한 동남아 10년 전쟁 종전의 [파리 평화회담]이, 미소중영불 세계 5대 강국들 공동참여로 기대 속에 내놓은 [평화선언]은 3년도 안 가서 사이공 함락으로 휴짓조각이 됐다. 그래서 회담 내용에 현실을 도외시한 논리적 합리성이나 윤리적 정당성이 결여되면 강국들도 합의사항 이행을 소홀히 해 의도적으로 파기되고 만다. 약소국들도 당면한 어려움만을 우선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반복하며 명분 쌓기 회담의 합의사항 이행회피는 물론 끝내는 새로운 전쟁의 씨앗을 싹 틔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논리가 없고 윤리도 없는 회의나 합의가 무의미하고 무효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어떤 문학가는 문학 이상의 정치회담 각론이 될 교훈을 담아 다음과 같은 우화(寓話)를 쓰기도 하였다(이솦 우화 참조). 굶은 사자가 어린양을 만나자 “네 이놈, 너는 작년에 내게 욕을 하였지?” 하자 어린양은 “저는 작년에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었는데요!”하고 답하였다. 말문이 막힌 사자는 생트집하려고 궁리 끝에 다른 핑계를 내놨다. “너는 지난달 내 굴 앞의 풀을 내 허락도 없이 뜯어 먹었지?” 어린양은 답하였다. “저는 태어난 지 겨우 2주일도 채 안 되어, 아직 이빨이 나지 않아 엄마 젖만 빨아먹고 살아요. 풀은 아직 뜯어 먹지 못하는데요!” 이에 사자는 억지로 ‘에헴!’ 큰기침을 하며 최후통첩을 하였다. “사실은 내가 지금 시장하여 너를 잡아먹어야 하겠다” 하며 불합리한 非論理와 부당한 非倫理의 포식자는 마침내 어린양을 잡아먹었다. 양심과 理性을 무시한 회의나 진실과 정의를 포기한 합의서의 法理를 떠난 비핵화나 [평화통일] 거론은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무효이므로 전쟁 방지력은 고사하고 오늘의 경우 核大戰으로 전쟁확대 위험 제거력도 없으며 인류를 기만하는 선전 깃발 아래 숨어서 아침이 다 가도록 늦잠에서 덜 깬 잠꾸러기의 잠꼬대 같은 헛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1945년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조선 신탁통치 연장을 거론하자 온 겨레가 찬반양론으로 분열하여 갈등과 폭력까지 불사할 때 누군가가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에 써 붙였다는 요사이 표현의 ‘大字報’ 내용은 오늘도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갖게 한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한테 속지 말고, 日本은 일어난다. 조선아 조심해라!” 이 대자보 필자가 중국 거론을 피한 것은 당시 중국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 공산당의 대장정 게릴라 내전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대만으로 천도 중일뿐더러(?) 옛 明, 淸, 제국처럼 조선에 기웃거릴 여유도 없었겠지만 항일 공동투쟁의 대한독립군 지원국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도 500여년 간 기대던 明과 淸이 사라져서 大國없는 孤兒 小國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깥 “中原의 모랫바람 突風”에 눈도 뜨기 힘든 터에 집안의 野壇法席에 앉은 소경들은 狂風이 휩쓸고 있으니 洪水로 범람한 국내외 정치회담의 暴雨 속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듯 무죄한 약소민족들만이 집단 溺死의 위기를 피할 수가 없게 될까 걱정이다. 思想家 부재사회의 이 광란(狂亂)의 시국에 오늘도 모두가 하느님께 眞率한 기도의 노래를 부르자. “하느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 “大韓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날마다 휴가 가는 방법

불볕 더위가 기승이다. 우리나라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웠다는 1994년 여름 폭염을 갱신할지 모른다고 한다. 더위를 피해 바다로 산으로 해외로 떠난다. 익숙한 집을 떠나 낯선 곳을 찾아가니 여행이고, 번잡한 일상에서 탈피해서 몸과 마음을 쉬니 ‘휴식’이며, 더위를 피해 떠나는 것이니 피서(避暑)다. 명칭이 무엇이든 즐거운 시간이다. 휴식을 갈망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힘들고 괴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로운 원인을 두고 잠시 잊거나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온갖 짜증이 밀려오고 화가 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야단치는 직장 상사, 깐죽거리는 동료,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 집이라고 해서 편하지 않다.늘 돈이 부족하다며 짜증내는 아내, 같이 돈 버는데 집안 일은 손도 되지 않는 남편. 불만은 끝이 없다. 휴식은 괴롭고 힘든 일상에서 탈피이지만 잠시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끝없이 꿈꾼다. 로또가 당첨되거나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이 남긴 유산이 굴러들어와 벼락부자가 되어 호기롭게 떠나는 날을…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설령 온다 해도 또 다른 괴로움이 기다린다. 절대 변하지 않을 현실을 늘 불평하고 괴로워하며 살 것인가? 현실을 받아들이되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은 정녕 없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있다” 그것도 아주 쉽다. 매일 평안하고 휴가 같은 날을 보내는 길이 있다. 중국의 무문 선사가 그 길을 시(詩)로 읊었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달이 뜨고 (春有百花秋有月)/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 불고 겨울에는 눈 내리네.(夏有凉風冬有雪)/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若無閑事掛心頭)/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이라네(便是人間好時節)” 봄에는 꽃피고 새 울며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절대 변하지 않는 법칙이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부대끼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며 죽을 듯이 좋아하다가 죽일 듯이 싸우는 등 희노애락 속에 살다 간다. 어느 인간도 이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인간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위에 몸을 실었다. 다음 항구 까지가 나에게 주어진 인생이다. 배에서 뛰어 내릴 수 없다면 그 속에서 잘사는 법을 익히는 수 밖에 없다. 무문선사가 말한 것처럼 ‘쓸 데 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 즉 ‘날마다 좋은 날’이다.‘쓸 데 없는 생각’이 무엇인가? 계율을 잘 지키는 어느 율사가 ‘대주선사’를 찾아와 “선사님도 도를 닦을 때 공력을 드리십니까?” 하고 묻자 대주선사는 그렇다며 나는 “배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 잔다”고 했다. 율사가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재차 묻자 대주선사가 이렇게 일갈했다. “그들은 밥 먹을 때 밥만 먹지 않고 온갖 삿된 것을 따지며 잠 잘 때도 잠만 자지 않고 꿈속에서 온갖 삿된 생각을 일으킨다.” 일할 때 오직 일만 생각하고 즐겁게 임하면 그것이 즐거움이다. 밥 먹을 때는 밥 열심히 먹고, 일할 때 딴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그 것이 잘사는 방법이다. 따로 별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좋은 특효약이 있는 줄 알고 찾는데 헛 수고다. 자신이 살아가는 괴롭다는 그 일상에 즐거움과 희망이 있지 달리 없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직 있는 것은 현재다. 지금 이 순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즐겁게 임하면 날마다 좋은 날이요, 날마다 좋은 날이니 어디를 떠나 쉴 것도, 피할 것도 없다. 이 쉬운 이치를 어린 아이들은 저절로 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생각이 많아지는 어른들이 가장 못한다. 그래도 날마다 휴식 같은 날을 보낼 좋은 방법 하나 알고 싶다면 특별히 일러준다.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하라.’ 인류의 보배 법구경에 적힌 말이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미국 독립기념일과 국가

지난 2주간 나의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북 버지니아를 다녀왔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숲 보존을 위해 예산을 많이 사용하는 훼어팩스 카운티의 숲 속을 운전하며 다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미국은 애초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건설한 나라다. 천재 스노보더 클로이 킴,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 모두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1620년 첫 이민자들이 도착한 이래 18세기 초에는 동부에 영국령 13주가 성립되었다. 그 후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미국의 독립혁명 투쟁이 시작됐다. 1783년 파리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이 승인되는데 미국은 이미 1776년 7월4일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7월8일 필라델피아에서 최초로 공표했다. 지금 미국은 국가로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를 부르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법률가요 시인인 프랜시스 스콧키가 작사하고 ‘천국의 아나크레온에게(To Anacreon of Heaven)’라는 노래의 곡을 사용했다. 영국과 미국이 전쟁을 하던 1814년에 9월13일 영국 함대는 볼티모어 항구에 있는 맥헨리 요새에 밤새도록 포격을 퍼부었다. 당시 34세의 변호사 프랜시스 스콧키는 협상을 위해 영국 함정에 올랐다가 일시적으로 구금되었는데 달도 등불도 필요 없이 영국군이 퍼붓는 포격으로 요새가 낮과 같이 밝았다. 새벽이 되어 스콧키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맥헨리 요새를 바라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에 성조기가 아직도 펄럭이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한 편의 시를 쓰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의 국가가 됐다. “오, 나는 외치리라. 이른 새벽의 빛이 전하는 이 감격의 광경을… 우리의 긍지를 보라! 밤새 쏟아진 포탄의 섬광 속에서 펄럭였다. 줄무늬와 반짝이는 별들의 휘날림은 처참한 전투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외치노라! 반짝이는 별을 품고 휘날리는 이 깃발은 자유의 땅이며 용맹의 고향 위에서 여전히 물결치고 있다고…” 이번 8월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되는 아시안게임에 남한과 북한은 동시입장과 일부 종목은 단일팀을 만든다고 한다. 입장식에서 깃발은 푸른색 한반도기를, 그리고 국가는 아리랑을 연주한다고 들었다. 당장은 아리랑을 연주한다고 하지만 언제일지 모를 통일 한국을 위한 바라만 봐도 가슴 뜨겁게 하는 깃발을 세우며, 온누리에 흩어져 있는 코리아 디아스포라들과 한민족이 함께 목청 높여 부를 노래를 지어주는 시인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주님께서, 뭇 나라가 볼 수 있도록 깃발을 세우시고,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깃발을 보고 찾아오게 하시며, 흩어진 유다 사람들이 땅의 사방에서 그 깃발을 찾아오도록 하실 것이다. 이사야서 11장 12절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쉼

어스름 저녁노을이 내려앉던 어느 봄날 퇴근길에 “저녁은 하루를 수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FM 음악방송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가 들려왔다. 오전 오후의 강의로 피곤한데다 밀려드는 퇴근 차량으로 짜증나던 도로를 막 빠져나올 찰나에 도심의 노을에 어울린 이 멘트가 얼마나 감동이었던지 이후로도 혹시 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지 기대하며 귀 기울이게 하는 매력이 되었다. ‘쉼’이란 휴식(休息)이다. 숨 고르는 시간이고, 재충전의 기회다. 그래서 모든 일에는 쉼이 필요하다. 세상에 쉼이 필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 심지어 노래 부르는 사람도 더 나은 음악의 효과를 위해 악보에 표시된 쉼표를 잘 활용해 짧은 숨을 쉬어야 할 정도다. 그래서 쉼은 삶을 보다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하는 필수 요건이라 하겠다. 성경은 창조주 신이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들고 이레째 되는 날 안식(安息)하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날은 신의 날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반드시 쉬라고 하셨다. 일주일의 묘미가 바로 신이 특별히 정하신 그 날의 쉼에 있다. 그래서 쉼은 신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고 특권이다. 또한 성경은 일주일만의 쉼뿐만 아니라 칠년의 안식년과 그 칠년이 일곱 번 반복된 후의 해를 희년(禧年)이라고 정해 놓았다. 사람만 쉴 것이 아니라 사람(아담)의 근원인 땅(아다마)도 쉬게 하고, 사람에 의해 구속되었던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쉼은 경사(慶事)이며. 수고하지 않은 자는 결코 누릴 수 없는 희열(喜悅)의 기쁨이며 신의 선물이다. 예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29-30) 하셨다.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수고한 사람에게 쉽고 가벼운 쉼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전문직 목수였던 예수가 보장하시는 평안의 선물이다.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하는 자는 누릴 수 없고 미련하게 일만 하는 사람은 결코 맛볼 수 없는 선물이다. 그러니 “노동은 매일을 풍부하게 하며, 쉼은 피곤한 날을 더욱 값있게 할 뿐만 아니라 노동 뒤의 쉼은 높은 환희 속에 감사를 불러일으킨다”고 했던 프랑스 시인 샤를 보를레르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쉼이 없는 인생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다고 했다. 쉼을 모르는 위험한 인생에 대한 경고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고 적절히 쉬는 것은 위험 인자(因子)를 최소화하고 신이 보장한 더 나은 축복의 미래를 누릴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7, 8월 휴가철이 시작되었다. 여느 해보다 일찍 시작된 무더위로 삶의 현장에서 지쳐 있을 모든 분들에게 FM 음악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처럼 “휴가는 일 년 동안 수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라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전해졌으면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나를 찾아서

관음전 맞은편으로 펼쳐진 산등성이 짙은 녹음에서 평화와 안락의 기운이 느껴진다. 불볕더위에 잎새들이 더 새파랗게 보이는 색채의 대비가 선명한 것처럼 바야흐로 한반도가 평화의 계절을 맞고 있는 분위기다. 순간, 한 마디 말실수로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역사적 사건이 연상된다고 하면 너무 나간 걸까. 산사도 계절이 바뀌느라 스산하다. 계절의 바뀜을 이 곳에서는 곤충이나 새들의 지저귐으로 알 수 있고, 도심의 빌딩숲 속에서는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식별할 수가 있다. 회색빛 고층 빌딩 사이 대로변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획일화된 건물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30층, 40층짜리 건물은 흔하게 볼 수 있다. 대도시에는 100층을 훌쩍 넘는 초고층 빌딩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환경만 그런 게 아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업무에 대해 피로해 하며 정서적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적인 여유마저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공공장소 어느 곳을 가든 시끄러운 음악 소리나 자동차 소리, 밤새 눈부신 빛 조명에 미세먼지까지 더해져 생활 속 공해의 심각성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최근 들어 사찰 경내에서도 무엇에 쫓기듯 안절부절 불안해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다. 그들은 내면의 고요함을 찾아 산에 올랐으면서도 혼잡스러움과 소음에 노출되어 자연 그대로의 고요를 감내하지 못하고 연신 스마트폰을 통해 눈과 귀를 현혹시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우리 청소년들은 틀에 박힌 교육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공부를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가르치는 교육, 어떤 틀을 만들어 놓고 무한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획일화된 인간으로 만드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든 사람들은 개성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은 멈춰야 한다. 몇 주 뒤면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직장인들은 휴가를 떠나게 될 것이다. 방학이나 휴가를 그저 휴식을 취하는 시기나 환경의 변화로만 받아들여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규제 속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의 생활을 돌아보고,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이정표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가,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로 변해가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 주제는 과연 무엇인가 등 이런 물음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나’를 찾아나서는 방학을 맞았으면 한다. 몇 해 전 유난히 무덥던 여름 방학 무렵, 20대 젊은이를 설악산 봉정암 가는 길에서 만났다. 그들은 이직을 앞두고 인생 경로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봉정암으로 간다고 했다. 젊은 친구들이 구상하는 미래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인생의 중대기로에 서서 산을 오르는 것 하나만으로도 밝은 인생이 열릴 것이라고 덕담을 건넸다. 여름휴가가 끝날 무렵 우리는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실개천을 따라 들어선 허름한 집들의 작고 조용한 마을 풍경은 마음의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다시 이러한 자연에 안겨서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세대가 안타까워진다. 나를 찾아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때 도심의 소음이나 일상의 스트레스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중심을 지킬 수 있어야 ‘참 나’를 찾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진정한 사랑, 이것이 ‘참 나’를 찾는 길이다. 그래서 사홍서원(四弘誓願, 보살행의 목표)의 첫 번째가 바로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오리다. 번뇌가 다함없지만 기어이 끊으오리다. 법문이 한량없지만 기어이 배우오리다. 불도가 위없지만 기어이 이루오리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현미경

나의 판단은 현미경인가 망원경인가. 우리는 13일 지자체장과 국회의원 몇을 뽑는 선거를 치렀다. 온 국민이 뭔가를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다. 올바른 눈을 가져야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세계관을 갖게 된다. 성서에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마태복음 6장 22~23절에 판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람의 평균 시력은 1.5 정도다. 이 시력으로 아주 작은 것이나 아주 큰 것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창조주의 피조물에 대한 세밀한 배려의 결과다. 우리는 육안으로 안 보이면 명왕성 너머에 뭔가가 있는지 모른다가 아니고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만일 사람의 눈이 현미경이라면 세균공포증으로, 망원경이라면 바로 앞을 보지 못해서 항상 넘어질 것이다. 광학혁명 덕분에 망원경과 현미경이 발명되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태양계 바깥까지 볼 수 있게 되었고 세포와 바이러스, 백신 영구까지 앞당기게 되었다. 인류는 렌즈를 이용해 우주를 보았고 분자를 보았고 우주의 극대점과 인체의 극소점을 모두 확인했다. 현미경은 네덜란드의 안경사 얀센이 1590년 어느 날 렌즈 두 개가 겹쳐진 상태에서 밑에 있던 글자가 커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두 개의 볼록렌즈로 만든 최초의 현미경은 사물을 10배까지 확대해 보였고, 물 한 방울 속에도 무수한 미생물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망원경도 네덜란드의 안경사가 현미경보다 18년 뒤에 발명했고 2년 뒤 갈릴레이가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조합한 망원경으로 달과 목성을 관찰했다. 1990년에 지구 밖에서 별을 관측하는 허블망원경이 우주로 떠났고 2009년 태양계 외부의 생명체를 찾기 위해 케플러, 테스, 제임스 웹 망원경이 장도에 오른다. 볼록렌즈만을 활용한 케플러식 망원경과 렌즈 대신 거울을 사용한 뉴턴식 반사망원경이 잇달아 등장했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렌즈를 생각하며 ‘곤충의 눈’으로 발밑을 보고 ‘새의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세상을 현미경으로 보면 다 힘들게 사는 것 같고 망원경으로 보면 다 잘 사는 것 같아 보인다. 존 맥스웰은 “남을 판단할 때는 그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으며, 그 기준이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에 자신을 판단할 때는 ‘의도’를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가 잘못을 범하더라도 우리 의도가 훌륭했다면 쉽게 용서한다. 따라서 우리는 변화를 요구받을 때까지 실수와 용서를 반복한다”고 말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4~5절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는 말씀이 있다. 자신에 대하여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타인에게는 관용의 잣대를 적용하는 사람이 진정한 인격자다.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미안하고 죄송해서

6월의 첫 주간을 살면서 나라를 생각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또 6월의 마지막 한 주간을 살아갈 때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더 죄송스런 마음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도 같다. 왜냐하면 이 나라가 수많은 분의 피와 희생과 헌신의 터 위에 세워졌는데 그분들의 피와 희생과 헌신이 무색할 정도의 정치적 횡포를 자행하는 무뢰한들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한 국민에게 한 대 맞았다고 깁스하며 떼 지어 농성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있어서 호출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휠체어를 탄 중환자가 되어 엄살 부리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면서도 이때만 되면 호국의 영령들을 볼모로 마치 자신들만이 이 나라의 수호자가 된 것처럼 으스대는 꼴을 볼라 치면 주권을 가진 국민 노릇 못한 게 미안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한마디로 단국의 개국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린다는 이 나라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무색하다고 할 뿐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할 민주주의 정치의 근본이 사라지고 당파와 계파의 이익에 몰두하는 것이 마치 유교 조선의 망조를 보는 듯하다. ‘백성’(民)을 위해 세워졌다던 그 조선이 사대부(士大夫)만 위하고,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몰두하면서 인의예지염치(仁義禮智廉恥)의 근간을 잃어버렸을 때 나라를 통째로 늑탈당하는 국치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국민의 분노를 애써 기만할 뿐만 아니라, 당리당략을 위해서 억지 부리고, 겨레의 소원인 통일 모색마저 부정하려는 졸렬함을 목격하면서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와 슬기로움과 청렴함에 더하여 부끄러움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금방이라도 닥쳐올 망조를 보는 것 같아 호국영령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요즘 유행어로 ‘뭐가 중한지!’도 모르고 까불어대는 게 물가에 노는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아 앞선 선각의 선열들 보기에 민망하기 그지없다. 구약성서 잠언에 보면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언 6:16-19)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데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잠언 6:27-28)라고도 하였다. 한마디로 부끄럼 당할 나쁜 짓 하지 말라는 말이다. 신(神)이 극도로 미워하고 싫어할 정도의 교만, 거짓, 음해, 모략, 음모는 사람도 반발하고 거부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할진대, 그것을 살피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안하무인(眼下無人), 인면수심(人面獸心), 자고(自顧)하며 까불대기만 하니 불을 품은 옷이 타 버리고, 숯불을 밟은 발이 데어 버리듯 자중지란(自中之亂)하다가 부끄럼 당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염치가 없다. 기꺼이 목숨 버려 이 나라를 지켰던 분들의 희생과 헌신 앞에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이 부끄러움을 어떻게 해소할 수는 없을까?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다. 바른 표심으로 정의도 수호하고 양심을 회복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국제외교와 남북관계도 正道 위에서

세계 도처의 지진과 화산 폭발로 인류는 불안과 공포를 잊을 날이 없다. 북한핵은 차원 다른 위험을 전 인류에게 확대시키고 있다. 남북 당국자 대화나 회담이 통일의 희망도 키우지만, 일부 국민들 마음을 들뜨게도 하며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72년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종종 파도처럼 분단벽이 내는 파열음이다. 북한핵은 인류자멸의 핵대전으로 확대될 수도 없지 않으나, 남북통일이나 체제유지에 백해무익한 핵보유 주장은 오히려 더 큰 핵의 결집을 강요하는 전쟁의 위험만 부를 뿐이니, 구 소련 공산당 정권이 핵무기가 없어서 무너지지 않았고, 구 동서독에 핵무기가 있어서 통일이 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북핵문제 앞에서는 南北이나 與野나, 中日이나 美蘇 역시 어떤 논리로라도 다른 소리를 낼 수가 없으니 세계 인류의 공동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진보니 자주니 종북이니 보수니 하는 이름으로 찢어진 깃발들을 올리고 내리며, 특히 義理에 얽혀서 道理를 망각하고 國民 道義를 사장(死藏)시키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정계도 걸핏하면 창당이니 탈당이니 하는 분파로 국민을 실망시킨다. 진보든 보수든 中道든 그 과정에서 義理도 지켜야 하지만, 道理에 어긋나지는 말아야 한다. 공산주의 사상과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美中의 영향으로 격돌하는 현장, 한반도가 保守와 進步와 中道 같은 말로 위장되고 포장된 큰 마당처럼 망나니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계나 사법계, 특히 언론계나 종교계도 아니, 노동계와 기업계도 正道를 지키며 정도를 걸어야 국가사회가 바르게 되고 국제관계가 정당하게 된다. “일찍이 대국 진나라 사람들은 늘 명분이나 논리로, 난세정화를 외쳤으나 덕조, 그대는 늘 상하 좌우 선후와 두루 상의하며 正道를 걸었는데도, 어찌 이렇듯 일찍 이승을 떠난단 말인가? 소리 없이 통곡하는 백성들과 上께서도 함께하시니, 하늘과 땅도 한쌍이 되어 속으로 눈물지며 한없이 울고 있네!” -박제가의 이벽 만사- 진보가 正道를 버리면 모험과 위험에 빠지고, 보수가 正道를 어기면 퇴보와 부패로 망국을 부른다. 양심과 상식이 알려주는 만인의 正道는 國民 良識이다. 애국심과 신앙심과 함께 국가와 민족과 가정의 생존바탕이 되는 힘이다. 국력이란 무력이나 경제력에 앞서, 正道를 걷는 국민들의 역량과 의식수준이 전제된 저력이다. 그 수위가 장개석 군대나 월남 공무원들 세계처럼 바닥까지 내려가면 나라도 망할 수밖에 없다. 흔히 中道는 타협과 거래의 산물로서 책임을 모면하려는 자들의 술수이며 지도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결코 아니다. 中道를 버리고, 正道의 외롭고 괴로운 길을 걷다가 생을 마친 우리 聖賢 義人들 중에 일찍이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말년의 詩文을 보자. 1827년 늦봄,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어려서 형들과 10여 년 간이나 종종 찾아가 天學과 서양학문을 듣던 母校, 天眞菴을 최후로 방문하여, 자신이 걸어온 고달픈 일생을 회고하며 남긴 서글픈 추억의 시에서 “그때나 이때나 한평생 나는 항상 괴로운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조각 배 한척의 신세로다(猶然苦海一孤舟 - 정약용의 遊天眞菴記)”하고 있다. 힘들어도 다같이 正道를 걸어야 한다. 특히 自由가 없는 사회와의 통일을 외치며, 正義가 죽은 세상과의 평화를 선전하는 소리는 正道로 들리지 않는다. 自由가 숨쉬지 않는 사회와의 통일은 민족의 집단 감금(監禁)이고, 正義가 살지 못하는 세상의 평화로 간다는 길은 국민들의 단체연금(軟禁)을 위한 自由不在 사회주의자들의 新作路일 따름이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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