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쓴 작품 가운데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러시아 정교 신부에게 교인 두 사람이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했다. 한 명은 자기가 지은 큰 죄를 뉘우치면서 저는 참으로 큰 죄를 범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은 제가 죄인인 것은 분명하나, 저는 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크게 기억할 만한 죄가 없어서, 무슨 죄를 고백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부는 큰 죄를 범했다고 자백한 사람에게는 당신이 들고 올 수 있는 가장 큰 돌을 찾아서 들고 오라.고 했고, 다른 한 명에게는 당신은 자그마한 돌들을 많이 가져오라.고 했다. 한 명은 가장 큰 돌을 가져왔고, 한 명은 치마폭에 작은 돌을 가득 담아 왔다.
그 뒤 신부는 두 사람에게 가져온 돌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큰 돌을 가져온 사람은 즉시 제 자리에 돌을 가져다 놓았지만, 작은 돌을 가득 가져온 사람은 이 많은 돌들을 어디에서 주워 왔는지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며 선뜻 나서지 못 했다.
그때 신부가 말했다. 저 사람은 큰 돌을 하나 주워 왔기 때문에 분명히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주워 온 돌들은 그 양이 저 사람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 주워왔는지조차 알지 못하지 않느냐? 당신의 죄도 그와 같다. 큰 죄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작은 죄이다. 성서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당시에 깨끗하고 부끄럼 없다고 자부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한가운데 세우고는 예수께 묻는다.
우리가 가진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예수의 대답은 간결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드러나지 않은 작은 죄가 있음에도, 드러난 큰 죄를 짊어지고 부끄럽게 서 있는 여인을 향해 돌 던지려 했던 그들에게, 자신을 먼저 보라는 메시지이다. 사회는 서로의 잘못을 논하며 삿대질하기에 바쁜 세상이다. 나의 부끄러움은 뒤로 슬쩍 감추고, 너의 부끄러움은 온 세상에 떠벌리며 돌을 움켜쥔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경우는 많아도,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의 죄를 바라보기는 쉬워도, 자신의 죄를 보는 것은 어려운 듯하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허물을 논하며 비난하기 쉽고, 그들의 실수에 쉽사리 돌을 들어 정죄하려 한다.
그러나 어쩌면 너무 작아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나의 죄에 대하여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색하리만치 정죄함이 마땅한 것이 아닌가?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했던가? 타인의 잘못과 실수가 눈에 띄거든, 나에게는 그런 잘못과 실수가 없는지 자신을 돌아봄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1년 경기일보와 인연을 갖고,「삶과 종교」라는 제하에 종교계 오피니언(religious opinion)이라는 명분으로 기고한 12번의 글을 다시 읽어 본다. 때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적당히 비난하기도 했고 사고의 부당함을 논하기도 했지만, 정작 필자 자신을 되돌아 본 시간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행여나 부족한 글을 통하여 작은 상처라도 받은 이가 있다면 간절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내게 큰 죄가 없으니, 내게 드러난 죄가 없으니 깨끗한 척 했다면 그 또한 용서하시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태복음 7장 2절)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오피니언
이길용
2015-08-04 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