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죽음도 아름다운 인생

요즘 유행하는 노래 가운데 ‘100세 인생’ 이라는 노래가 있다. 한 무명 가수가 이 노래로 히트를 쳤다. 가사를 보면 “가서 전해라”가 소절 마다 반복 된다.가사 내용을 보면 “6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7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많아 못 간다고 전해라… 10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몇 년 전에는 유행하던 인사가 ‘99 88 234’라는 신조어도 잇었다. ‘가서 전해라’ 라는 노래 가사나 ‘99 88 234’같은 인사말은 모두 유한한 인간의 내면의 소망을 담고 있는 이야기다. 흔히 복 하면 수. 부. 강녕. 유호덕. 호 종명. 다섯 가지를 말한다. 다섯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 “호 종명”은 죽음에 관 것으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내용이다. 요즘 읽은 세 권의 책 중에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오츠 슈이치)와 ‘죽을 때 후회하지 않고 사는 법 35가지’(한창욱)가 있다. 이 두 권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남는 것은 후회밖에 없다’이다.그러면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위한 처방으로 25가지, 혹은 35가지를 이야기한다. 그런가 하면 책 21세기 영성의 사람 헨리 나웬의 ‘죽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책에서는 앞에서 말한 두 권의 책에서는 죽음 앞에서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인간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는 데 반해 헨리 나웬은 죽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헨리 나웬은 이 책의 결론 부문에서 한 곡예사의 이야기를 예를 든다. “나는 공중 날기를 할 때 나를 붙잡아 주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를 합니다. 대중들은 나를 위대한 스타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짜 스타는 나를 붙잡아 주는 조우입니다. 그는 1초의 몇 분의 몇 까지 맞출 만큼 정확하게 내가 갈 자리에 와 있어야 하고, 내가 그네에서 길게 점프할 때 공중에서 나를 잡아채야만 하니까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 “공중을 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붙잡아 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하지요. 이것이 공중 날기의 비밀입니다. 조우에게 날아갈 때 나는 그저 팔하고 손만 뻗으면 돼요. 그 다음엔 그가 나를 잡아 앞 무대로 안전하게 끌어가 주기를 기다리면 되지요.”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요. 최악의 실수는 공중 나는 사람이 붙잡아주는 사람을 잡으려 드는 거지요. 나는 절대 조우를 잡으려 들면 안됩니다. 나를 붙잡는 것은 조우의 임무예요. 만약 내가 조우의 손목을 잡는다면 그의 손목이 부러지거나 내 손목이 부러지고 말겁니다.그렇게 되면 둘 다 끝장이지요. 공중 날기를 하는 사람은 날기만 하고, 붙잡아주는 사람은 붙잡기만 해야 합니다. 공중 날기를 하는 사람은 붙잡아줄 사람이 자기를 위해 제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믿고 팔을 뻗어야 합니다.” 목사는 비교적 임종을 지켜보는 기회가 많이 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호 종명’이 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준비된 죽음은 아름답다는 것이다.저 천국 문 앞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생의 손을 놓고 평안으로 다음 생을 맞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마지막 순간 까지 세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극도로 불안 해 하는 임종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은 인생은 소풍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누가 소풍 나온 것처럼 인생을 아름답게 살 것인가? 내세가 준비되면 죽음도 아름다운 것이 인생이다.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가지 축

얼마 전 우연히 한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다큐를 보게 되었다. 스웨덴의 정치에 대한 내용이었다.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일상생활이 밀착취재, 방영되었고, 국회의원들에게 지급되는 세비사용에 대한 부분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어졌다. 전직 총리까지 지낸 연세 지긋한 의원이 수수한 차림으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버스기사와 서로 인사도 건넨다.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을 열어보니 서류와 노트북이 들어있다.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 같다. 대부분의 의원들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어느 젊은 여성 의원은 몇 년 사이에 몇 백 건이 넘는 법안을 발의했다고 한다.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계속해서 발의하면 국회에서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은 국민들에게 이로운 법이 실현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의원들이 선거에서 내세운 공약들도 대부분은 실현되었다고 한다. 우리 정치 현실과는 사뭇 다르다. 의원들이 사용하는 경비에 대한 관리도 철저했다. 자세한 사용내역과 영수증 제출은 물론이고 이 영수증은 영구보존한다고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이 자료들을 공개한다는 점이다.총리 후보로 거론되던 장관이 세비를 식료품 구입과 쇼핑 등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제보로 청문회까지 열렸고, 세비 사용내역에 대한 추궁을 당했다. 결국 그는 총리가 물 건너 간 것은 물론이고 장관자리까지 물러나야 했다. 다른 나라의 비리에 비하면 그야말로 푼돈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한국에 출장을 다녀온 한 의원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한참 만에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마 우리가 한국 의원들처럼 고급 리무진을 타고 다닌다면 국민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스웨덴에서 국회의원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철저했다. 국민들이 내는 세금이 한 푼이라도 개인적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법에 명시되어 있을 정도다. 그래서 몇 푼 안되는 돈 때문에 정치생명이 끝나기도 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제도를 누가 만들었느냐고 취재진이 묻자 스웨덴 정치가들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의식수준이 정말 선진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리도 한결같이 선진국을 목이 쉬도록 외치지만, 글쎄다. 이쯤되니 스웨덴의 교육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들의 생각과 국민들의 의식 그 중심에는 교육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양심과 수치심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께서는 양심과 수치심이 세상을 떠받치는 두 축이라 하셨다. 양심은 제 부끄러움이요, 수치심은 남부끄러움이다. 스스로 비추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과 남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금수와도 다를 바 없다. 언젠가 의정활동에 써야 할 세비를 생활비로 사용했다는 지적을 받은 어느 도지사가 인터뷰에서 “내 주머니에 들어오면 내 돈인데, 그걸 집에 갖다 준 게 뭐가 잘못된 것이냐” 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그의 표정에서 일말의 양심이나 수치심도 볼 수 없었다. 의정활동을 위해 지급된 세비가 어찌 내주머니 돈이란 말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런 사람을 지도자로 뽑은 사람들의 속내가 궁금하다. 보지 못한 허물을 버릴 수 없고 알지 못한 이익은 얻을 수 없다.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보지 않는다면 어찌 허물을 볼 수 있을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제법 따뜻하다. 창가에 놓인 화분들이 볕쪼기가 한창이다. 다음 주가 설날인데 벌써 봄이 오려는 걸까? 우리의 정치현실은 언제쯤 그리운 봄이 오려나. 살아가면서 부끄러움을 잃지 않도록 나부터 좀 더 노력해야 겠다. 도문 스님 아리담 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천민자본주의

우리 인간이 사는 세상엔 여러 가지가 필요하겠지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선 무엇보다도 절대적 가치를 지닌 재물이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이 재물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개념과 정비례하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하지를 못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사상가이면서 경제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가 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를 언급하면서 인류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관 하곤 거리가 먼 무서운 악습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에 대한 강력한 뒷받침은 소련 통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추방되어 자유의 땅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 1970년대에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 의해서입니다. 미국 사회가 물질에 의해 퇴폐되어 가는 현상을 직시하면서 천민자본주의가 만연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자본주의가 국민을 행복하게 할 줄 알았지만 실제론 비합리적이고 퇴폐적인 사회 환경을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미국의 천민자본주의의 독소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중소국가들을 더 무섭게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의 기업이요, 사회풍토입니다. 대부분의 우리 기업주들이나 자녀들이 미국에서 학업을 하면서 우리 국가관과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윤리도덕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회사운영 방법만 익히다 옵니다.즉 인간 됨됨이가 없다보니 그것이 사회에 어떤 피해를 주는지 조차 모릅니다. 미국식으로 기업을 경영한다고 하지만 미국의 가장 취약하고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 1천만 관객을 모은 ‘베테랑’이란 영화의 줄거리가 우리나라의 기업행태입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치사한 방법인 천민자본주의적 방법을 우리나라 기업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에선 쓰레기 문화라고 말하고 있는 절대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정치 풍토도 만들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관객 700만을 동원한 ‘내부자들’이란 영화에서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다보니 부정부패라는 무서운 독소를 ‘손때 묻은 유능이 나은가? 청렴결백한 무능이 나은가?’라고 얼버무리면서 슬그머니 면죄부를 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사업가들의 사기를 꺾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한층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갑질이란 무서운 사업 행태입니다. 이 갑질의 행태는 우리 사회의 작은 구석까지 만연되어 있음을 실감합니다. 여기에 현재 방영되고 있는 TV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를 보면 이런 무서운 사건들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며칠 전 우리는 양심의 정신적 지도자 신영복교수를 잃었습니다. 사회를 향한 조용한 외침의 마지막 유작이 된 경기도의회 현판의 ‘사람 중심 민생중심의 의회’란 글을 우리 정치인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렇듯 우리 침묵의 대중은 물질보다 더 행복한 정서적 뭔가가 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비록 천민적 자본주의 환경에서 시달림을 받는다 해도 결코 우리 침묵의 대중은 휘둘리지 않으려고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천민적 자본주의를 부추기는 나라의 일꾼들을 뽑기 위해 오는 4월 투표장에 가서 희망 없는 줄을 서겠지만 우리 국민은 진정한 행복을 향한 큰 꿈을 놓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재용 천주교수원교구 신부

[삶과종교] 빗소리는 비의 소리가 아니다

빗소리를 듣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소리는 비의 소리가 아니다. 비가 천장과 만나서, 창문과 만나서, 나뭇잎과 만나서, 돌멩이와 만나서 내는 소리다.그러니 후두둑후두둑, 주룩주룩, 보슬보슬, 내리는 비는 결코 하나의 소리만 낼 리 없다. 우리 귀가 어두워 들리지 않을 뿐, 그 속에는 무수한 존재가 저마다 비를 만나 만들어낸 다양한 소리들이 들어있을 테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도 그랬다. 전직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보자. 똑같은 어부라도 베드로 형제와 야고보 형제의 계급이 완전 달랐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강이나 호수에서 그물질로 생선을 잡으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생계형 노동자라면,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가지고 바다로 나가 대량 어획을 하는 기업형 노동자였다. 특히 야고보 형제가 종종 ‘세배대의 아들들’로 불린 것으로 보아 그만큼 부친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과장해서 말하면,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고나 할까. 이렇게 서로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예수운동에 함께 참여했다는 것은 예수가 일으킨 혁명의 바람이 그만큼 보편적인 침투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 우주적 혁명을 이루는 길에는 각자 나름의 욕망이 끼어들기 마련. 예수가 맨 처음 십자가를 입에 올리자 ‘수제자’인 베드로가 펄쩍 뛰며 막는다.이 기세라면 예수가 로마제국보다 더 강력한 제국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 되면 자기도 ‘흙수저’ 신세를 면할 수 있을 텐데, 웬 십자가란 말인가. 예수에게 항의하던 그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호된 야단을 맞는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또다시 예수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심을 내비친다. 벌써 삼세번이다. 정말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나보다.이번에는 야고보 형제가 엉뚱한 소리를 한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마가복음은 야고보 형제가 직접 건의한 것으로 나오는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어머니가 청탁한 것처럼 묘사된다) 이 일로 다른 제자들이 ‘분개’했다는 말은 모두 엇비슷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이에 예수는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미련한 제자들을 깨우친다. 복음서에서는 이들 3인방이 예수운동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마다 예수는 꼭 이들을 따로 챙겨서 데려간다. 안드레의 마음이 여간 섭섭하지 않았겠다. 한데도 그런 조짐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한 아이의 도시락을 눈여겨 본 안드레 덕분에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그는 모나게 튀기 좋아하는 성격이라기보다는 숨어서 남을 배려하는 성격인가보다. 이렇게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예수를 만나 빚어내는 삶의 서사도 흥미롭지만, 이들과 만나 점점 자신의 ‘꼴’을 잡아가는 예수의 변화도 신통방통하다. 하기야 어느 생명이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의 꼴로 남아있으랴. 무릇 살아있는 생명은 다른 생명과의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변화와 생성의 춤을 거듭하는 법이 아닌가. 고집부리지 말아야지. 편견을 신념이라 우기며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목에 힘주지 말아야지. 누구 혹은 무엇을 만나든 ‘더불어’ 소리를 내야지. 활짝 열린 새해 첫 마음 위로 바람이 분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바람이.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삶과 종교] 무엇을 바꿀 것인가

오늘도 연숙이 엄마는 귤을 따러 갔다. 비 온 날 하루 반짝 얼굴을 내밀고는 도대체 나타나지 않는다. 제주도 감귤 밭의 귤을 다 따야 오려나 보다. 얼마 전 제주도에 있는 도반에게 연락이 왔다. 주지스님이 서울에서 입원하셨으니 자기가 내려 올 때 까지만 절에 있어 달라 부탁했다. 급한데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단다. “좀 도와줘” 라는 말과 함께 비행기 타야한다며 거절 못하게 전화를 탁 끊어버린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다. 난감했다. 그니도 사정이 급하지만 나도 맘 편히 내려갈 상황이 아니다. 남의 어려움에 매몰차지 못한 나는 하는 수 없이 짐을 꾸려 제주도로 내려갔다. 절에 도착하니 절을 지키고 있어야 할 공양주가 안보인다. 귤 따러 갔단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도착한 날부터 남의 부엌에서 밥을 챙겨먹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비가 온 날, 드디어 공양주가 왔다. 그니가 연숙이 엄마다. 국도 끓이고 이것 저것 밑반찬도 꺼내놓은 것이 제법 밥상이 그럴듯하다. 한창 수확 철인데 비가 와서 당도도 떨어지고 귤도 딸 수가 없다며 계속 투덜거린다. 다음날, 날이 개자 연숙엄마는 새벽같이 밥상을 차려놓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또 귤 밭으로 달려갔다.그래도 혼자 있을 때는 내 끼니만 챙겨 먹으면 되니 별 불만이 없었다. 수확 철인데 마음이 오죽 급하면 그러겠나 싶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주지스님이 퇴원해서 절에 돌아오시니 사정이 달라졌다. 이만저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도반은 학교일이 끝나지 않아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다시 서울로 가버렸다. 새벽부터 기도하랴, 편찮으신 어른스님 세끼 공양 준비하랴, 잠깐이라도 살펴드리랴 하루가 어찌 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3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하고 돌아서면 밥해야 하고, 잠시 숨 돌리고 나면 또 기도시간이고, 마치면 또 점심해야하고, 치우고 잠시 쉬고 소화시키기 위해 산책 한 바퀴 돌고나면 또 저녁 공양과 기도시간이 돌아오는 게 아닌가. 처음 며칠간은 할 만하더니 날이 갈수록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주지스님도 내게 미안해서 연숙엄마에게 빨리 오라고 전화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하루 10시간 정도 앉아 있는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다 보니 몸에 근력이 거의 없다.그런데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점심 한 끼만 제대로 먹는데, 편찮으신 어른 혼자 드시게 할 수 없어서 세끼를 같이 챙겨 먹으니 속이 부담되는지 계속 배도 아프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면 시체마냥 뻗어버린다.나는 원래 어깨가 취약해서 기도를 잘 맡아하지 않는데, 안치던 목탁을 치니 어깨도 내려앉는다. 저녁마다 누워서 끙끙 앓는다. 신음소리가 절로 난다. 마음과는 달리 몸은 야속하게도 체력이 바닥난 것 같다. 게다가 오늘 연숙이 엄마가 남의 밭에 품팔이 갔단 말도 들었다. 갈수록 태산이다. 처음 너그러웠던 마음과는 달리 사태가 이쯤 되니 슬그머니 화가 난다. ‘아니, 도대체 너무 하지 않나. 직장인 절을 팽개치고 자기 밭의 귤을 따는 것도 모자라 남의 밭에 품을 팔러 가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이월에 중요한 시험이 있어 책도 봐야 하는데, 책상 위에 펼쳐 진 채로 먼지만 쌓여간다. 한참을 누워서 속으로 궁싯거리다가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속을 끓인다 한들 서로에게 무슨 이득이 있으랴. 불교 수행은 나를 힘들게 하는 세상이나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대하는 내 마음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마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연숙이 엄마가 귤을 가득 싣고 웃으면서 나타났다. 방금 따온 것이라며 맛을 보라고 하나를 내민다. 귤이 달다. 저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도문 스님 수원 아리담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어떤 실종사건

어릴 적 교회생활의 하이라이트는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몇 주 전부터 교회에 모여 연극연습을 하는 것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나 역시 무대 중앙에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채 우아하게 미소 짓는 마리아 역할을 욕심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일찍 ‘분수’를 안 까닭에, 목자 3이라도 감지덕지였다. 맞은편에 서 있는 동방박사들에 비해 한없이 누추한 옷차림이라도 무대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동방박사와 목자를 한꺼번에 등장시키는 게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걸 그 때는 몰랐다. 동방박사는 『마태복음』에 나오고, 목자는 『누가복음』에 나오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아예 예수 탄생 이야기를 싣지 않았다는 걸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교회 안에서는 좀체 ‘왜’라는 질문이 허용되지 않기에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목자가 연극에서처럼 그럴듯한 직업이 아니라 천직이요 죄인이었다는 발견은 내 신앙의 역사에서 거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당시의 목자를 상상할 때 대관령 목장 같은 낭만적인 풍경을 떠올리면 안 된다. 그보다는 주인 소유의 양떼를 몰고 다니며 풀을 먹이는 일종의 하청직업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남의 땅에 들어갔다가 도둑으로 몰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행여 양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주인에게 손해배상의 책임을 져야 했다. 양떼를 몰고 멀리 갈 때는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니, 목자라는 직업군은 언제나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천사로부터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이도, 듣고서 아기 예수를 찾아가 가장 먼저 경배한 이도 목자들이라고 전한다. 이들에 앞서 ‘가이사 아구스도’, 곧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언급되기도 하지만, 그 이름은 어디까지나 엑스트라일 뿐, 주인공이 아니다.이름조차 알 수 없는 목자들, 곧 무명의 죄인들이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가난하고 힘없고 버림받고 눌린 자들이 신탁(神託)을 받아 이루는 존재들이지, 다른 이들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의 부모도 로마 황실 소속의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다. 오죽 가난하고 무력하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는단 말인가. 백화점에서 고르고 고른 근사한 요람이 아니라 더러운 말구유에 누운 아기는 또 얼마나 불쌍해 보이는가.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탄생치고는 너무나 소박하다 못해 차라리 비천하지 않은가. 『누가복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대놓고 아우구스투스와 맞장을 뜬다. 희랍세계의 최고신 제우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은 요란하고 벅적했다. 이에 반해 히브리세계의 유일신 야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은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어찌나 미미한지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선뜻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그 예수가 해마다 아기로 세상에 오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이겠다. 마구간에 익숙한 아기가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낯설어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백화점과 거리의 상점들에서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 울음보를 터뜨릴 테다.‘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마구간을 가득 채우던 천사의 노래는 어디로 갔을까. 아우구스투스의 불의한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이들만 득실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실종된 이 땅에서 하늘의 평화는 과연 어디로 임할까.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삶과 종교] 종교를 넘어

“종교는 과거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양화된 세계화 시대에는 종교가 인간의 모든 고민과 문제들에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이제 종교를 초월한 삶의 방식과 행복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 의미 있는 말은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란 책의 내용입니다. (김영사 출판 이 현 옮김)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러 비결들을 제시해 주었던 달라이 라마가 인류의 시작부터 형성된 수많은 종교에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의 가르침에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지금 세계는 IS의 끔찍한 테러로 격분돼 있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 집단이 왜 그렇게 악랄해졌을까를 신중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가 경악한 사건들이 발생한 후엔 이것은 우리 IS(자칭 이슬람 국가)가 한 것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칩니다. 이슬람교 코란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알라는 자비하시다는 중심 교리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서운 테러의 집단으로 변질되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계의 강력한 여러 국가들의 이권과 이를 보기 좋게 포장한 종교의 행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슬람 민족은 소위 크리스천 나라들에 오래전부터 시달림을 받아왔습니다. 근세에 와서 중동의 나라들은 석유의 발견으로 상상할 수 없는 부를 누리지만 결국 지배층에 의해서 일반 서민들은 점점 더 곤경에 빠지게 되고 지배층은 크리스천 강대국들과 은밀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사실 이라크 전쟁만 하더라도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석유 등 이권을 유지하기 위한 주도권 싸움이었습니다.여기에 자연스레 파생된 것이 바로 IS이고 미국은 중동지역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 필요로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도왔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강대국들은 중동지역의 불안정이 바로 이들 강대국들이 바라는 바임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래서 세상의 정세를 잘 보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현대에 기성 종교의 차원을 넘는 새로운 물결, 바로 ‘자비의 세상’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황은 내년(2016년)을 ‘자비의 희년’으로 선포하면서 부드러운 정신혁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근본 원리는 인류를 영원(저승)한 세상을 향해 가도록 이끌어 주고 있지만 현실(이승)에서는 아름다운 평화를 품은 행복한 세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원죄의 탓인지 인간 존재는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쇄신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국 티베트를 떠나서 외국에서 전전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큰 외침을 가톨릭 사제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공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수백수천의 종교와 종파가 있지만 각자의 집단의 팽창과 재산권을 불려가는 결코 용납하기 어려운 볼 상 사나운 행태가 빚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교황과 나’라는 책을 펴낸 가톨릭 신자인 김근수 작가는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 누린 특권을 내려놓고 가난한 자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낮추라는 교황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진정한 종교는 이기적 종교를 넘어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게서 그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욕망에는 위험과 재난이 따른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성지순례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기차를 탔다. 예약된 자리를 찾아가니 열차 칸은 거의 비었건만 어째 내 옆자리에는 벌써 손님이 앉아있다. 50대 중반쯤 돼보이는 남자인데, 미처 자리에 앉기도 전에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다. 열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자신의 이런저런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한동안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서 “사실은 말입니다. 스님, 제가…”라고 슬며시 고민을 털어놓는다. 지금 세 집 살림을 하고 있는데 이제 그만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니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다. 누구한테 털어놓고 의논도 못하는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다. 둘 중 한 여인은 마음이 맞고 말이 잘 통해서 친구로 지내다가 서로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당신 없이는 안된다며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이 나도 단단히 났다. 만남이 깊어지면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는 법, 이로부터 고통과 근심걱정이 생긴다. 믿고 싶지 않은, 그야말로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다. 그래서 남자가 생각해낸 방법은 이렇다. 한 여인은 관계를 정리하고, 좋아하는 여인은 나중에 아내와 시골에 내려가 살면서 가까이에 집을 마련해 주어 서로 왕래하면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내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한다. 쭉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조용히 물었다. “가족들을 사랑하십니까?” 남자는 당연히 가족들을 너무 사랑한다고 말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아내를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도 했다. 다시 물었다. “과연 아내와 아이들이 이해해줄까요?” 남자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당신에 대한 그 여인의 집착은 날로 더해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나중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이쯤에서 어느 쪽이든 서로 상처를 적게 받는 쪽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들의 달콤함에 빠져 다가올 위험과 재난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러니 앞으로는 욕망을 잘 단속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남자는 괴로운 듯 이내 눈을 감았다. 참으로 이 세상의 욕망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롭다. 또 화려하고 달콤하고 매혹적이어서 여러 형태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이루면 기뻐한다. 하지만 욕망을 이루지 못하면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괴로워하고 번민한다. 온갖 번뇌가 스며들고 위험과 재난이 그를 덮친다. 마치 부서진 배에 물이 새어들듯이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 때문에 항상 바른 생각을 지키고 모든 욕망들로부터 스스로를 잘 단속해야 한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그 순간의 달콤함은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만, 그러나 그 열매는 참으로 쓰디쓰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이 근심거리인지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사물의 본질을 확실히 알고 자기의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좁은 생각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진리를 등지고 또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잠시 스쳐간 인연이지만 그의 번민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안쓰러웠다. 이제라도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랄 뿐이다. 그도 행복하고 싶은 한 사람이지 않은가. 며칠째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마치 그 남자의 마음처럼. 도문 스님 수원 아리담 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감사 기도

지난 10월 13일 오전 11시 28분 휴대폰 문자 알림 신호가 왔다. “아빠 아기를 잘 낳았어요. 3.25㎏ 이고 아들이에요.” 아들이 둘째를 낳고 보낸 문자이다. 감사기도를 드리고 나니 감회가 새롭다. 어느새 아들이 두 아이에 아빠가 되었구나!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에 그렇게도 아빠의 가슴 조리게 하던 녀석이 잘 자라주고 좋은 배우자 만나 가정을 이루고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아들이 대견스럽고 감회가 새롭다. 아버지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장가를 안 간다고 근심을 하던 지인이 미국에 가서 아들 결혼식을 시키고 와서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초청해서 저녁식사로 답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아드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좋으시죠?” “네 아주 좋습니다.” 내가 한마디 더 했다. “첫 손 주를 보면 더 좋습니다. 둘 째 손 주를 보면 더, 더 좋고요.”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열어 아들이 근무하는 대학의 사이트에 들어가 아들의 설교를 보았다. 둘째를 낳은 그 다음 주 수요일 채플인 것 같았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짧은 편지 한통을 읽는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무엇이 옳고 그름은 너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나이가 되었기에 네가 알아서 잘 하리라고 생각한다만 그러나 아빠의 간절한 기대와 소원은 네가 한번뿐인 인생을 후회 없는 일생을 살아주길 바란다.아들아! 네가 이렇게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내가 왜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해 지는지 모르겠구나. 아들아 너는 나의 기둥이고 소망이다. 사랑한다. 믿음을,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는 아들이 되지 말아다오. 성실하고 정직한 아들을 둔 아빠가 되고 싶구나. 1996년 8월 12일 새벽 1시15분. 아들을 사랑하는 아빠가.”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를 보내며 부모의 가슴 조리게 하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새벽이 되도록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며 기도하가다 마땅히 편지지가 없어 헌금 봉투를 대충 찢어 만든 편지지에 마음가는대로 적은 짧은 편지다. 아들 책상위에 올려놓았는데 19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편지는 아들의 성경책 갈피에 끼워있다고 한다.짧은 그 편지가 자신의 인생을 붙들어 주었는데 그 편지 글자 한자 한자 속에 담긴 아버지의 눈물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메시지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눈물자국과 마음을 읽어보자고 하는 내용으로 설교했다. 인생은 일생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폭을 버리고 다시 그릴 수가 있다. 작가는 글을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쓸 수도 있다. 수험생은 재수 삼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일생이다. 그래서 소중하다. 아무렇게나 살기에는 구원의 가치가 너무 아깝다. 후회하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빠르다. 19년 전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힘들게 하던 아들은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철이 든 아들이 되었다. 그 아들의 아버지는 불혹의 나이를 넘어 이순의 인생을 살고 있다. 19년 전의 아들은 제법 철이든 것 같은데 나는 아직 하늘 아버지 앞에 철이 덜 든 아들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든다. 19년 후에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은 첫째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소원과 되어야지 하는 소원을 적어본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이 더 많아지지 말아야지. 또한 말수가 더 많아 지지 말아야지. 자리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지. 권위적인 고집스런 사람으로 변질 되어 가지는 말아야지.가슴의 온기를 잃지 말아야지 하는 것과 둘째는 되어야지 하는 소원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뜨거운 가슴과 마음이 되어야지. 철이 든 인생, 어른이 되어야지. 마음의 빗장을 활 짝 열고 살아야지. 반종원 목사

[삶과 종교]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

우리의 현 사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혼돈의 시대라고 할 만큼 갖가지 문제들이 우리 주변을 휘감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량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마저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 세상을 더욱 살기 좋게 그리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앞장서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사건들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교회도 물질지상주의에 자연스럽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도 교회 확장의 틀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찾다 보니 마치 사회기업의 성장 방법과 동등한 논리를 적용하는 경우를 봅니다. 사회가 물량주의 공식 안에서 기업성장을 계획하듯이 우리 교회도 똑같은 잣대로 교회를 키워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의식전환을 하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닌 용서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큰 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세워주신 가장 중요한 틀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사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려주신 이런 큰 사명을 이 시대 교회가 어떻게 이루어내고 있는가 하는 데서는 사회인들이 머리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교회가 발전하는 곳엔 나눔과 소통이 성장해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가 각자 대형교회를 향해서 무섭게 치닫고 있습니다. 물량주의가 만연되어가는 현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빚어지는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되면서 절망감이 사회를 비틀게 하고 때론 극단적인 행위가 자행되는 사건들이 여러 보도 매체에서 기사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무서운 현실에 직면해 있는 사회에서는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성장에만 급급해하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우리나라 인구의 무려 3분의 1이 되고 더구나 지도급에 있는 수는 반이 넘습니다. 예수님의 사상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교회가 오히려 역행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회가 교회를 위해서 걱정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회는 냉엄합니다. 결코 흐지부지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사회의 편임을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증상은 무신론주의 팽배와 신자수의 둔화 현상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나는 예수님은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증오한다.”라고 한 말은 현재도 진행형입니다. 진행형이라는 것은 현대 교회가 정치권력과 야합도 불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정치가들을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년 총선엔 수많은 출마자들이 교회를 찾을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것을 교회성장이랍시고 악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원로사제

[삶과 종교] 다름을 인정하면 다툼이 사라진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바라보기만 해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마음이 순화되는 것이 마냥 좋다. 좋아하는 것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조그만 화분을 몇 개 들여놓았다. 분홍이, 연두, 초록이, 빨강이, 색깔따라 이름도 지어주었다. 이 녀석들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곁을 지키며 나를 위로해준다. 나에게 있어 꽃이란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기쁨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는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꽃은 관심 밖의 존재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정원을 봐도 그저 무심할 뿐이다. 내가 좋다고 해서 남들도 다 좋으란 법은 없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지난 어느날 공원으로 산책을 갔을때의 일이다. 한바퀴 돌고 나오는데 전도를 나온 젊은 목사님과 그 일행을 만났다. 무척 열심이다. 그 앞을 지나가려니 나에게도 목사님이 말을 건넨다. “스님,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예.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목사님은 할말을 잃은듯 “아!” 라는 짧은 감탄사만 내뱉았을 뿐 달리 말이 없었다. 한참을 걸어오는 동안 젊은 목사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연륜이 쌓이면 목사님도 나의 대답을 이해하리라.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이 실재로 존재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줄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훨씬 더 매력을 느낀다.불교가 내 성향에 더 맞아서이다. 그렇다고해서 모든 사람이 불교를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종교적 성향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목사님이 된 어릴적 친구가 있다. 우리는 서로의 길을 존중한다. 종교는 인간의 내면에서 삶과 죽음을 떠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험난한 세상살이에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 주고 그 안에서 행복과 평온을 찾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내가 믿는 종교만이 최고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어떤 사람은 카톨릭이, 또 어떤 사람은 불교가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종교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누군가 특정한 종교에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위안을 얻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이런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종교가 인간의 영혼에 자양분을 주기 위해 있는 것이지 갈등과 고통을 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남의 행복도 소중하게 생각할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개개인이 가진 견해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의 종교에 대해 마음을 연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태와 같은 종교간의 비극은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종교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왜 종교를 위해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세상사람들이 조금만 더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를, 모든 존재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밤이 깊었다. 가을빛 내려앉은 세상 위로 소리 없는 달빛이 흐른다. 도문스님 수원 아리담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이미와 아직 사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에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실컷 두드려 팼다. 그의 신분을 말해줄 단서는 아무것도 없다. 거의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이 피투성이가 된 그는 쓰레기처럼 길가에 버려졌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조금 있다가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가까이 다가가 보살펴 주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다. 등장인물은 모두 5명. 강도와 강도 만난 자, 그리고 강도 만난 자를 보게 된 세 명의 여행자가 전부다. 아니 강도도 처음부터 강도짓을 할 생각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저 여행 중에 돈이 떨어져 우발적으로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다. 강도 만난 자 역시 처음에는 단순 여행자였다. 그러니까 등장인물의 정체는 모두 여행자라고 해야 맞겠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지구별에 온 여행자라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야말로 인생의 축소판일 것이다. 험한 인생길을 걷다 보면 더러는 강도가 되기도 하고, 또 더러는 강도 만난 자가 되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다. 저마다 바라기는, 자본의 힘을 빌리든 신의 은총에 기대든, 아무쪼록 고난을 요리조리 피하고 싶어 할 테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렇게 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관장하는 거룩한 일을 한다는 핑계로 고난의 현장에 눈을 감았다. 그들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간 것은 얼마든지 율법으로 정당화될 만한 일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피를 만지거나 시신을 만지는 행위는 사람을 부정(不淨) 타게 만드는 금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 금기를 어기고 부정의 멍에를 뒤집어썼다. 무슨 영웅심 때문이 아니다. 단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마음에 홀려, 강도 만난 자가 동족인지 아닌지조차 따지지 않은 채 무조건 자비를 베풀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예수에게서 ‘선함’의 표본으로 칭송받은 데 반해, 예수의 청중인 유대인들에게는 분노를 자아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뒤를 잇는 제3의 인물은 당연히 유대인 평신도여야 할 텐데, 뜬금없이 사마리아인이 웬 말인가.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만큼이나 멀다. 한데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의 구원자로 등장하고 있으니, 듣는 유대인의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겠는가 말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자는 선동에 유대인들이 우르르 몰린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다시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을 생각한다. 세 사람 모두 강도 만난 자를 보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돌본 사람은 사마리아인밖에 없다. 나머지는 ‘거의’ 죽은 사람을 ‘이미’ 죽었다고 판정한 반면, 사마리아인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판정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난민들이 산송장처럼 지구촌을 헤맨다.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이미’ 죽었다는 사형선고가 속속 내려지고 있다. 그러한 판결에는 나름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쩔 텐가. 선(善)의 언어는 명백히 ‘아직’인 것을!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사랑해야지. 아직 살아있을 때, 행동해야지. 내 눈은 무엇을 보는가. 제대로 보기는 하는가. 행동하지 않는 ‘봄’은 봄이 아니다.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삶과 종교] 소중한 친구 만들기

몇 년 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책 중에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中 ‘소중한 친구 만들기’라는 제하의 글이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에서 ‘피아시스’라는 사람이 교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효자였던 그가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청하자 왕은 허락지 않는다. 그런데 왕은 뜻밖에도 너를 대신할 보증을 세우고 다녀오라고 명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친구 ‘다몬’이 기꺼이 보증을 서서 대신 감옥에 수감되고 피아시스는 고향에 부모님을 뵈러 간다. 그런데 그는 약속된 시간에 오지 않았다. 다몬은 친구 대신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다. 형장에서 드디어 왕이 수신호만 하면 그는 교수형으로 이슬처럼 사라질 순간이다. 그때 저 멀리에서 말을 타고 오면서 소리를 치는 피아시스를 발견한다. 왕은 “피아시스를 사면하노라” 그리고 독백처럼 “내 모든 것을 내어 주고라도 이런 친구를 사귀고 싶구나”라고 고뇌한다. 내 모든 것을 내어 주고라도 사귀고 싶은 친구. 세상에 진정 그런 친구는 있는 것인가? 그런데 기독교의 성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친구라고 소개한다. 예수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믿는 자의 친구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우리의 친구가 된단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예수 내 친구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첫 번째 예수는 조건 없이 나를 선택한 친구다. 지연, 학연, 취미, 나이 등 서로에 조건이 부합될 때 친구의 연을 맺는다. 조건이 사라지면 친구의 연도 사라진다. 그런데 예수는 그렇지 않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라고 말한다. 두 번째 성서의 예수는 비밀이 없는 친구다. 당시의 고대 근동사회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주ㆍ종과의 관계만큼이나 엄격했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는 내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다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다. 비밀 없는 소중한 친구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인간이 성숙해 가는 단계를 보면 대개는 비밀이 있어도 지킬 수 없는 아동기가 있다. 그리고 나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은 사춘기 단계, 그래서 그때는 혼자만의 일기장과 비밀의 방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나이 들어가면서 비밀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을 찾는 단계가 된다. 사랑의 대상을 찾고 서로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고 싶은 단계가 있다. 그러나 세상에 참으로 내개 그런 친구가 있는가, 성서는 예수는 비밀이 없는 친구라고 소개한다. 세 번째, 대신 죽어준 친구이다. 예수는 나를 대신에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면서 나의 명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고 했다. 예수는 아주 오랜 나의 친구다. 물론 세상에 좋은 친구들이 많다. 오래된 친구도 있고 마음 변하고 떠나간 친구도 있다. 그러나 예수 내 친구는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실망시킨 적도 없다. 마음이 아플 때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오는 친구. 인생의 검은 파도가 일고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도 폭풍우를 뚫고 나를 찾아와 안심하라고 위안을 주는 친구다. 오늘도 삶이 버거운 모는 이들이 예수를 친구 삼아 마음에 평안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반종원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종교에 의한 인류의 피해

요즘 유럽 전체가 난민에 대한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 각 나라마다 정치적인 문제로 국민들의 평안은 뒷전인 채 오로지 자기 쪽의 정당성만을 위해 복수까지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잔인한 행위가 때론 각자 믿고 있는 신을 위한 성스러운 행위로 자행되는가 하면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까지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무슬림(신자)들은 알라만을 유일한 신으로 믿는 절대적 신앙을 지킵니다. 즉 6신 5행이라 해서 알라, 천사, 코란, 예언자(무함마드), 내세, 예정론을 믿는 6신과, 신앙고백, 예배, 단식, 희사, 순례를 해야 하는 5행의 엄한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이 6신과 5행의 의무를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투쟁적으로 임해야 하기 때문에 지하드를 행합니다. 지하드는 우리말로 성전(聖戰)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외부의 침략과 여기서 발생된 내전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무슬림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강한 민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극단적인 원인은 오래전 가톨릭에서 자행했던 십자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가톨릭의 십자군 시작은 교세 확장과 영토 확장이란 미명아래 때론 잔인하게 강행되어 왔음을 역사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동의 아랍 문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로 믿기는 하지만 최후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믿는 교리를 지켜가면서 더욱 기세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와의 마찰이 계속되어 오면서 예수와 무함마드의 인연이 깊은 이스라엘 등의 성지를 장악하려고 무서운 전쟁을 끝없이 일으켜 왔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성지를 가보면 유태인과 아랍인과 그리스도 교회들이 서로 자기 성지로 장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슬람교는 세계 인구의 20%인 15억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이 이슬람 신도를 은연중 압박하고 있는 범 그리스도 신도는 세계 인구의 40%인 약 30억이 됩니다. 이렇게 십자군 의 침범을 시작으로 그리스도 종교 집단에 의해서 어마어마한 압박을 받으면서 무슬림들은 강해질 대로 강해졌습니다. 물론 지난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약탈행위에 대해 정식으로 사죄했지만, 이슬람의 여러 종파끼리의 갈등은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습니다. 십자군이라는 외부의 침략이 이들 민족끼리의 분쟁으로 비화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공격적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종교가 세상 속 많은 악의 근원 중 하나라며 만일 종교가 없었다면 자살 폭파범, 911테러, 런던 폭탄 테러, 십자군 등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같은 민족이 일제 강점기에 받은 상처로 인해 친일이니 반일이니 하는 정치적 갈등, 그리고 625 전쟁의 상흔으로 지금까지도 사상적이나 이념적으로 갈등을 겪는 아픔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톨릭(천주교)과 신교라고 하는 기독교와의 갈등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종파 안에서도 여러 갈등을 보게 됩니다. 우리 가톨릭 안에서도 진보적인 사제들이라든지 보수적인 사제들안에서 열심인 신자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신앙생활인지 갈피를 못 잡거나 분개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이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받은 상처를 종교 집단이 앞장서서 더 부추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OECD 34개 회원국 중에 우리 나라의 국민 행복지수는 33위요 복지 충족지수는 31위라는 딱한 현실을 우리 종교 지도자들은 강 건너 불을 보듯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종교인들의 책임으로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원로사제

[삶과 종교] 최고의 의지처

인간은 길을 떠나는 존재다. 마치 사막을 걷는 여행자처럼. 저 편에 있을 행복이라는 오아시스를 찾아 한걸음 한걸음 사막의 뜨거운 모랫길을 걷는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가다 때때로 멈춰 서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나는 신기루에 홀리지 않고 정확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혹시 잘못 가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일어나면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온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최선이어야 하는데. 아니면 어쩌지? 이렇게 시작된 불안한 마음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의지처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요즘 마흔이 넘어가면서 어떤 일을 할 때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데 분명한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삼십대에는 쉽게 결정되던 일들이 점점 어렵게 느껴지고, 이제 모험을 하기에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크다고 입을 모은다. 너무 지치고 힘이 들 때면, 가족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줘야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나도 든든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듣고보니 나도 예외는 아닌 듯 했다. 산책길에 스님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흔이 넘어가면서 결정장애가 생겼다고 모두들 인정하고 격하게 공감했다. 우리들도 수행자이기는 하지만 아직 수행이 완성된 성인이 아닌 수행단계에 있는 사람인지라 살면서 때로는 힘들고 지치기도 한다. 그럴때면 수행에 진척이 없어 힘들다는 솔직한 고민도 이야기하고, 약간의 푸념도 적당히 받아주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때로는 내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그런 든든한 의지처가 되줄 누군가가 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한마디로 참 꿈도 크다. 명상 집중수행을 하던 어느 날,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날따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한참을 생각이 이어지다가 번쩍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지. 나 자신보다 더 든든한 의지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누구도 나 보다 더 든든한 의지처가 될 수는 없다.라고부처님께서 마지막 유훈으로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나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을 왜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날 밤 나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내가 의지해야 할 가장 믿을만한 대상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가장 든든한 의지처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는 참으로 오랜만에 어릴 적 느꼈던 어머니 품속에서처럼 편안하게 잠들었다. 다음날 같이 수행하던 삼남매를 둔 워킹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가 줄곧 이런 문제로 고민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렇군요. 여태 왜 그걸 몰랐을까요! 이제 제게도 그 누구보다 든든한 의지처가 생겼습니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 우리는 그날 전에 없던 든든함에 행복을 느꼈다. 다시 힘차게 살아갈 에너지의 근원을 찾은 것이다. 힘들어하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기를 바람에게 부탁해본다. 우리에겐 언제나 내 편인,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의지처인 우리들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힘 내요.라고. 도문 스님 아리담 문화원 지도법사

[삶과 종교] 암살 그리고 회개

빈센트 반 고흐는 살아있을 때 지지리도 불운했다. 무명화가에다가 정신병자라는 꼬리표마저 달려있으니, 어딜 가나 찬밥 신세였다. 1890년 7월 29일, 서둘러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 마을사람들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1990년 7월 29일, <르몽드>지는 이 마을에서 다시 치러진 반 고흐의 장례식을 소개했다. 5백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미사와 행진을 곁들인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신문은 그 장례식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과거의 무관심에 대한 속죄라고. 영화 <암살>의 열기가 대단하다. 현대인이 영화관을 찾는 이유야 다양할 테지만, 변영주 감독의 분류체계로는 두 가지로 나뉜단다. 하나는 스트레스를 풀러 가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스트레스를 먹으러 가는 유형이다. <암살>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 그리고 후자의 영화들은 관객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암살>이 인기몰이에 성공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차지하는 좌표가 범상치 않다는 뜻이다. <암살>의 시대 배경은 1933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한 뒤 만주국을 성립한 직후다. 이 전쟁은 바야흐로 태평양전쟁의 서막이었으므로, 조선 식민지 백성에게는 일제의 무소불위한 힘을 절감케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안옥윤(전지현 역) 일행이 만주를 떠나 경성역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순간, 6시 시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안내방송에 따라 일장기 하강식이 이루어지는데, 구내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장기를 향해 묵념을 한다. 3ㆍ1운동 때까지만 해도 하늘을 찌르던 반일ㆍ항일 정신은 다 어디로 갔나. 완전히 백기를 든 모습에 안옥윤 일행은 아연실색한다. 안의 눈에는 한없이 익숙한 행태가 바깥의 눈에는 도무지 생경하게만 보인다. 내가 속한 문화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는 행동이 남의 문화에서는 금기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인간을 구원하는 건 바깥인가 싶기도 하다. 귀 닫고 눈 가리고 안에만 갇혀 있으면 염석진(이정재 역)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을 테다.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그의 말은 바깥을 부정한 데서 나온 오판이었다. 일제의 조선 침략에 끝내 항의하고 저항하면서 독립전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그 바깥을. <암살>은 우리 역사에서 슬그머니 밀쳐두었던 바깥의 경험을 안으로 소환한다. 해방과 전쟁, 분단으로 이어진 숨 가쁜 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어떻게 만주가, 만주를 수놓았던 무수한 그들의 이야기들이 암살 당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여 이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일종의 속죄의식인 것이다. 광복 70년이 되도록 그들에게 정당한 자리를 찾아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 죄악을 회개하는 일이다. 회개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한다. 의식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로마제국의 질서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바깥과 접속하고 나니 순 거짓말이다. 이 깨달음으로 과거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내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다. 그러니까 <암살>을 보며 그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수준의 감상에 머문다면, 그건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를 곧추세우려는 의식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역사와 유리된 영혼구원이란 종교적 허상일 뿐이라는 것, 광복 70년에 <암살>이 주는 또 하나의 깨우침이다. 구미정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삶과 종교] 왜 교회는 사회교리를 중시하는가

우리 교회는 요즘 들어서 사회교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자 노력합니다. 특히 신앙을 갖고자 성당의 문을 두드리는 예비신자들에게 교리 공부의 필수 과목으로 넣고 있습니다. 사회교리란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인간사회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는 공동선이란 제목으로 사회에 특히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는 이들에게 동참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지도자들에겐 버거운 정신 자세이고 때론 불가능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요즘 영화가에서 한창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 베테랑이란 영화를 보면 대기업주들에게는 사회를 향한 도덕이나 윤리 등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고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 보니 재벌 2세들에게 와서는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 윤리 도덕도 없어서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행동을 하는가 하면 기업 밑에서 종사하는 협력자들에게는 글로서도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짓거리를 대놓고 하는 장면을 지겹도록 보게 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통해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인간이 가야 할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책(안기순 옮김)에 기고된 2012년 강의 중에, 특히 시장은 어떻게 도덕을 밀어 내는가라는 항목에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것 중 인간 생명과 같은 신장(腎臟)과 아름다움의 표징인 성(性), 그 세대를 이끌어 가는 지도그룹에게 필요한 학위(學位)까지도 돈으로 거래가 되는 세상이 도덕적으로 불미스럽지 않은가 라고 반문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물질 만능사회에 우리 교회도 크고 작게 오염되었음을 봅니다. 지난 해 우리 교회의 큰 어른이신 프란치스코교황이 오신 것은 우리나라를 위해서라기보다 바로 우리 교회가 가야 할 자세를 올바르게 제시하기 위해서임을 봅니다. 즉 자기 혁신이 없는 교회는 병든 육체와 같다고 하시면서 성직자는 정신적 영적 동맥경화에 걸렸다고 개탄하셨습니다. 우리나라가 마침 세월호의 아픔을 겪고 있던 때라서 그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바로 이것이 경제지상주의에 빠져있는 한 사건임을 직시하시고 이들과 함께 방문 중에 어디서나 아픔을 나누셨음을 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영원한 세상을 향한 신앙 여정을 가는 것이 가장 큰 삶의 목표이지만 또한 함께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가 인간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가에 대한 초점을 맞춰 가는 길이 바로 사회교리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학자는 미래 세상을 위해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실 앞으로 우리 인간은 인조인간의 무리 속에서 살게 될 것이 자명하기에 이에 따르는 도덕의 원칙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라고 고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회교리란 인간됨됨이를 향한 외침입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원로사제

[삶과 종교] 약왕보살 삼매의 빛이여

우리 부처님의 수많은 경전의 가르침 중에 약왕보살 삼매의 빛에 대한 것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 제23장에서 약왕보살에 대하여 설법하셨다. 약왕보살은 지나간 한량없는 항하사겁 전에 일체중생희견보살이었으며 당시의 부처님인 일월정명덕여래로부터 법화경을 듣고 정진하여 부처님 되기를 발원하였다. 희견보살은 수행에 큰 진전을 이루어 모든 색신을 드러내 보이는 삼매인 현일체색신삼매 現一切色身三昧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다양한 화신을 나타내어 근기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였다. 희견보살은 신통력에 의지하여 부처님께 많은 공양을 올렸지만 나의 몸 전체를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며 몸에 향유를 붓고 큰 서원으로 스스로의 몸을 사르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 그 몸에서 나오는 빛은 180억 항하사만큼 무수한 세계를 비추었고 그 몸이 다 타서 없어지기 까지 1200년이나 걸렸다. 저 희견보살이 지금의 약왕보살이며 그 몸을 바쳐 공양한 것이 백천만억 나유타이니 한량없는 세월동안이었다. 이 약왕보살로 부터 불교수행에서 소신공양이라는 수행의 역사가 비롯된 것이다. 많은 소신공양의 역사가 있지만, 현대불교사에 전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일은 1963년 베트남에서 있었던 틱광둑스님의 소신공양이다. 당대의 원로 고승이었던 65세의 틱광둑 스님은 독재와 부정부패 그리고 불교탄압에 대해 전 세계에 알리고 항거하기 위하여 소신공양을 서원하였다. 스님은 소신공양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유언하였다. 소신공양할 때 내가 앞으로 넘어지면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을 것이니 해외로 피신하고 뒤로 넘어지면 독재정권의 투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1963년 6월 11일 베트남 호치민시에 있는 큰 대로의 한 가운데에서 수십명의 제자와 많은 신도와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자에게 스님의 몸에 기름을 붓게 하고 스스로 불을 붙였다. 스님은 불이 타오르는 동안 가부좌자세를 유지 하였으며 끝까지 앞으로 넘어지지 않았고 결국에는 뒤로 넘어졌다. 오랜 수행으로 생사해탈의 자재를 얻은 삼매의 경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자들과 대중들은 스님을 향해 엎드려 절했고 군중을 제지하던 군인과 경찰들도 받들어 총 자세와 거수경례자세를 취하였다. 법구는 4천도가 넘는 고열로 6시간동안 화장하였으나 스님의 심장은 녹지 않고 원형의 모습을 유지한 채 까만 숯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영원의 심장이라고 불렀다. 틱광둑스님의 뒤를 이어 36명의 스님과 한분의 여신도의 소신공양이 뒤를 이었다. 그리하여 그 지극한 발원대로 결국 독재정권은 몰락되었고 독재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수행 삼매의 빛을 밝혀 자신의 육신을 멸하고 열반에 든 것이다. 그것은 동양의 종교적 정신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경외감울 불러 일으켰다. 전 세계인들에게 참으로 놀랍고 가슴아프고 또한 감명깊은 일이었다. 불교가 이 땅에 온지 어언 1600여년이다. 한국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 본래 불교는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며 언제나 깨어있음의 종교이다, 영원한 진리는 지금 여기에서 현실화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종교와 종교인이 훌륭한 가치로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완전한 행복을 추구한다. 우리존재의 깊은 불성을 깨닫고 그 본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종교적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함께 약왕보살의 서원의 빛이 나와 모두에게 사라지지 않고 영원토록 머물기를 발원하자. 우리함께 틱광둑스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서원의 빛이 우리 사는 곳과 지구곳곳에 가득하게 머물기를 발원하자. 이 발원으로 「삶과 종교」의 인연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삼으니 깊은 혜량 있으시기 바란다.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이민자들을 위한 비전 3

이주민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리고 진정성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웃을 만나길 원합니다. 제가 만나는 이주민들은 내국인과 함께 이웃이 되어 살아가길 간절히 원하고, 차별이 없는 행복한 오늘과 내일의 희망을 갈망합니다. 저는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한 이주민들과 함께 하는 세상을 위한 이들의 제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자조모임을 강화하는 일입니다. 저희 이주사목위원회는 이주민 중심의 모임을 강화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귀국한 이주민들은 선주민인 한국인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더욱 그들에게 중요한 안내자는 이미 살고 있는 고향사람입니다. 즉 먼저 정착한 이들과 바로 귀국한 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이들 중심의 모임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들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복지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주민을 돌보아주는 일은 바로 집이 없는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실제로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어버리면 곧 집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결혼이민자들도 시댁을 나오는 순간 갈 곳이 없게 됩니다. 교구의 이주사목은 이들에게 맞춤형 쉼터(단기, 중장기, 자립)등을 세워 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셋째로 교육으로 인종차별을 없애는 일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계급화, 차별화된 눈으로 인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원초적으로는 인류의 구분이 없었다고 말하고, 우리 교회는 인류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정신적 근간이 되는 유가는 사해동포를 말하고, 가톨릭은 만민평등사상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늘 아래 하나입니다. 넷째로 다문화공동체를 형성하여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250여개소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열어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한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이민자들을 포함하고 속지를 넘는 다양한 통합적 모델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로 다문화 홍보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글로벌 한국을 말하면서 우리가 정말로 세계화라는 이슈에 걸맞는 국민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목격하게 되고, 실제로 현장에서 바라보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끼리도 서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개인주의와 싸이코패스 등의 심각한 이기적인 현상들을 접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다름을 낯설게 생각하고 우리 식대로의 사고방식을 답습하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이에 우리는 이주민과 함께 하는 음악회등의 행사나, 방송매체를 통한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홍보하는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다양한 노력으로 우리는 함께 인종과 국가의 구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병조 천주교 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장ㆍ신부

[삶과 종교] 큰 죄와 작은 죄

톨스토이가 쓴 작품 가운데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러시아 정교 신부에게 교인 두 사람이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했다. 한 명은 자기가 지은 큰 죄를 뉘우치면서 저는 참으로 큰 죄를 범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은 제가 죄인인 것은 분명하나, 저는 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크게 기억할 만한 죄가 없어서, 무슨 죄를 고백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부는 큰 죄를 범했다고 자백한 사람에게는 당신이 들고 올 수 있는 가장 큰 돌을 찾아서 들고 오라.고 했고, 다른 한 명에게는 당신은 자그마한 돌들을 많이 가져오라.고 했다. 한 명은 가장 큰 돌을 가져왔고, 한 명은 치마폭에 작은 돌을 가득 담아 왔다. 그 뒤 신부는 두 사람에게 가져온 돌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큰 돌을 가져온 사람은 즉시 제 자리에 돌을 가져다 놓았지만, 작은 돌을 가득 가져온 사람은 이 많은 돌들을 어디에서 주워 왔는지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며 선뜻 나서지 못 했다. 그때 신부가 말했다. 저 사람은 큰 돌을 하나 주워 왔기 때문에 분명히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주워 온 돌들은 그 양이 저 사람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 주워왔는지조차 알지 못하지 않느냐? 당신의 죄도 그와 같다. 큰 죄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작은 죄이다. 성서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당시에 깨끗하고 부끄럼 없다고 자부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한가운데 세우고는 예수께 묻는다. 우리가 가진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예수의 대답은 간결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드러나지 않은 작은 죄가 있음에도, 드러난 큰 죄를 짊어지고 부끄럽게 서 있는 여인을 향해 돌 던지려 했던 그들에게, 자신을 먼저 보라는 메시지이다. 사회는 서로의 잘못을 논하며 삿대질하기에 바쁜 세상이다. 나의 부끄러움은 뒤로 슬쩍 감추고, 너의 부끄러움은 온 세상에 떠벌리며 돌을 움켜쥔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경우는 많아도,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의 죄를 바라보기는 쉬워도, 자신의 죄를 보는 것은 어려운 듯하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허물을 논하며 비난하기 쉽고, 그들의 실수에 쉽사리 돌을 들어 정죄하려 한다. 그러나 어쩌면 너무 작아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나의 죄에 대하여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색하리만치 정죄함이 마땅한 것이 아닌가?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했던가? 타인의 잘못과 실수가 눈에 띄거든, 나에게는 그런 잘못과 실수가 없는지 자신을 돌아봄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1년 경기일보와 인연을 갖고,「삶과 종교」라는 제하에 종교계 오피니언(religious opinion)이라는 명분으로 기고한 12번의 글을 다시 읽어 본다. 때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적당히 비난하기도 했고 사고의 부당함을 논하기도 했지만, 정작 필자 자신을 되돌아 본 시간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행여나 부족한 글을 통하여 작은 상처라도 받은 이가 있다면 간절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내게 큰 죄가 없으니, 내게 드러난 죄가 없으니 깨끗한 척 했다면 그 또한 용서하시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태복음 7장 2절)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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