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모든 공덕을 회향하는 보현행원

전국의 수행도량 곳곳에 많은 연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백련, 홍련이 밝고 환희로운 모습과 향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진흙 속에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연꽃을 피우는 뜻은 수행의 정신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서 우리가 일으키는 한 생각이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계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의 세계를 해탈의 정토가 되게 하는 것이 수행의 공덕이요,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의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사정, 청년실업등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맹자』중에 가장 웅장한 기상이 나타나 있는 「고자」편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늘이 사람들에게 거대한 역사의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에 더 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그 육신의 근골을 더없이 수고롭게 하시며 그 몸뚱이를 배고프게 하시며 그 육신의 삶을 궁핍하게 하신다. 인간이란 본시 과실을 범한 후에야 비로소 뉘우치며 고칠 줄을 알고, 그 마음에 고요로움이 끼고 절망감이 찾아올 때 비로소 발분할 줄 알며, 번민과 고통의 심연이 그 처참한 얼굴표정과 애절한 목소리에 나타날 때 비로소 깨달음이 생기는 도다! 이 가르침은 역경에 처한 인간개인과 민족국가의 고난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우리 불교에는 부처님가르침을 실천하는 보현보살이 계신다. 보현보살은 한 사람이라도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 성불의 길로 인도해 주겠다고 하는 서원을 세우셨다. 이 보현보살이 세우신 열 가지 큰 행원은 우리 불교의 뛰어나고 위대한 특징이자 거룩함이라고 하겠다. 첫째는 부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부처님께 경배하는 순간 우리는 정법의 길을 보고 올바르게 나아간다. 둘째는 부처님의 무량한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셋째는 모든 부처님과 존재들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며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다른 이들의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부처님께 법륜을 굴려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해탈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부처님께서 우리 곁에 더 오래 머물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겠다는 것이다. 아홉째는 모든 존재들에게 공양과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이다. 불성이 있는 모든 존재들과 조화를 이루고 보살피겠다는 것이다. 열 번째는 이 깨달음의 실현을 위해 모든 공덕을 일체존재에게 회향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향의 서원은 모든 존재들과 함께 깨달은 생명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생활을 통하여 이 보현보살의 가르침을 깊이 통찰하고 실천해가야 하겠다. 보현보살의 행원을 따라 생각과 말과 행위로써 일체 생명을 이롭게 해야 하겠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바로 대 안락의 세계를 이루는 「유심정토」, 「예토성불」의 수행의 자세이다. 이 법계의 유정 무정의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설법세계 안에 있으며 또한 그 진리의 가르침이 일체존재의 형상에 현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화엄법계의 말 없는 무언설법을 참답게 듣고 배우며 보현보살의 열 가지 거룩한 행원을 찬탄하자. 그리하여 이 무더운 여름을 우리의 수행정진의 향기로 가득 채워 가도록 하자.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이주민들을 위한 비전2

우리나라는 환대와 유대 그리고 연대하는 문화를 잘 이루고 살아왔기에 타국에서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서구의 문화와는 달리 함께 살아가는 세상, 서로를 필요로 하는 세상을 이루면 살아왔습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가톨릭의 정신인 인간 존엄성의 원리와 평등권, 조화의 원리를 생활화한다면 더욱 훌륭한 나라, 이주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동등하게 생각하고, 서로의 다름을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정말 행복한 세상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편에는 구체적으로 전국 가톨릭의 국내이주사목 위원회가 위를 실천하기 위해서 진행하고 있는 노력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인류가족(Human-family)을 만드는 이주사목의 현주소를 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비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담소 : 각 전국의 가톨릭의 교구는 상담소를 상설로 설치하여 각종의 노동 상담을 체계적으로 듣고 해결해나가는 가운데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모든 관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와 비신자들을 넘어서는 서비스를 통하여 더욱 더 가톨릭의 박애정신을 널리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상담의 종류는 임금, 산재, 구직, 등의 상담부터 생활적응을 위한 상담, 나아가서는 무료진료와 무료법률상담까지 다양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상담소에서는 한국말 교실을 통하여 더욱 한국문화에 적응하고, 한국을 알아가는 각종 문화행사까지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화 센터 :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다문화 센터를 위탁받아 생애주기별 서비스를 펼치고 있습니다. 즉 입국에서 자녀들을 낳아 돌보는 일까지 차별화된 단계적인 서비스를 통하여, 결혼이민자들의 정착과 자활에 대한 전반적인 서비스를 감당하고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목센터 : 이민자들을 위한 배려의 장소로서 이들을 위한 복지적 서비스를 넘어 성사적인 서비스를 감당하고 있는 기관입니다. 실제로 교적 관리를 제외한 모든 서비스를 수행하고 있으며, 평일 미사와 축일 미사전례도 거행하는 등의 다양한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고, 나아가 인근본당과 연계하여 주일미사, 교적관리 등의 서비스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국가별 공동체와 지역별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들의 언어로 미사를 거행하거나, 세례 및 각종 전례행사를 서비스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쉼터 : 각 교구별로 단기쉼터와 중장기쉼터 그리고 자립쉼터를 운영하여, 쉼터가 필요한 이들에게 차별화된 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기쉼터는 직장을 잃은 남녀노동자들에게 위한 공간으로 제공되고 있고, 중장기 쉼터는 가정과 성 폭력 등으로 피해를 받는 이들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또한 자립과 자활쉼터는 말 그대로 자립을 필요로 하는 대상들을 위해 제공되어 있다. 아울러 서울 교구는 베다니아의 집이라는 환자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고 제공하고 있습니다. 최병조 이주사목센터 신부

[삶과 종교] 희망과 행복의 슈퍼 전파자

동남아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 선교사가 있었다. 그 선교사는 그 지역에 이름 모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세균을 넣고 면역체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는 세균을 자신의 몸에 넣고는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 갔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그 세균에 대한 면역체를 개발하게 하였다.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갔다. 결국 그 선교사는 병원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희생의 결과로 질병의 면역체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으로 동남아시아의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게 되었다. 요즘 메르스로 인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중동에서 시작된 이름조차 생소한 전염병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더 강력하게 퍼져나가며,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조금이라도 열이 나거나,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나도 메르스가 아닌가? 불안하기만 하다. 또한 발병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라치면 왠지 거북스럽다. 심지어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한 편의점 점주는 낙타로부터 전염된다는 이 질병의 예방을 위하여 Camel이라는 이름의 담배 판매를 중단했다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도 있다. 신문의 지면이 메르스로 도배되어 한동안 발행되더니, 이젠 한 풀 꺾인 듯하다. 어찌했던 온 나라가 메르스 광풍이다. 그 광풍에 안전과 평화가 깨지고, 불안과 공포가 온 나라 뒤덮고 있다. 그런데 그 메르스의 불안과 공포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음에 생각이 멎는다. 그 누군가 한 사람의 감염으로 인해 정부에서 관리와 대처를 잘하지 못해 온 나라로 퍼졌다고 한다. 그 한 사람만 잘 관리했다면 185명의 확진자의 두려움과 고통, 33명의 안타까운 목숨이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 사람의 부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그러나 반대로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슈퍼 전파자가 온 나라에 질병의 두려움을 안길 수 있듯이, 한 사람의 긍정과 웃음의 슈퍼 전파자가 앞선 동남아시아의 선교사와 같이 온 나라를 따뜻하고 희망적인 나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어떤 매체를 통하여 이 나라가 살만한 나라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질문에 망설이며 대답을 주저하던 필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하는 궁금함이 가득하다. 그 설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살만한 나라이기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살만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행복한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가정, 나 때문에 따뜻한 사회와 나라를 만들어 간다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나로부터 시작된 희망과 행복, 따뜻함을 만들어보자. 그 시작은 미약할지 모르나, 분명 나중은 창대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한 사람의 메르스 감염자가 나 한 사람쯤이야. 하는 자세로 하게 될 때, 그 한 사람이 슈퍼 전파자가 되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불행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 한 사람이라도.라는 사고로 희망과 행복을 심으면 온 사회와 나라가 따뜻함으로 가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매체의 드라마 제목이 멘도롱또이라는 제주 방언으로 삼았다. 그 뜻이 기분 좋게 따뜻한 이란다. 이 멘도롱또의 슈퍼 전파자가 되어보자. 다른 사람을 죽이는 전파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멘도롱또 슈퍼 전파자가 되는 삶을 살기를 다짐해본다.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삶과 종교] 진실한 참회, 진실한 불자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수행의 종교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중생은 어둡고 미혹합니다. 아만이 가득하고 지혜와 공덕이 부족합니다. 그러한 중생업을 지닌 이들이 진실로 참회하고 겸허하게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이들은 진실한 불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할지언정 한 생각 한마디 말로서도 남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수행의 세계는 마치 마음의 거울과 같아서 스스로가 행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마음의 거울에 반사되어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지은 중생업의 칼날을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진실로 참회하고 마음을 열고 보현행원을 일으켜 나와 남을 관세음보살로 존중하며 수행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날 때도 관세음, 헤어질 때도 관세음입니다. 어느 누구를 만나도 관세음보살, 어떤 일을 당해도 관세음보살하는 것입니다. 생사와 열반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의 업인 이 미혹은 인연과 연기법에 따라 잠시 있는 듯이 보이나 본래 공한 것입니다. 본래 주인은 관음의 생명, 곧 해탈의 생명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이 본래의 공덕세계, 완전한 세계가 되도록 깊은 인욕정진심으로 관세음보살! 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 실재의 모습은 무량공덕의 관세음생명이니 우리는 무한히 발전하고 향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맑은 물이 서로 합해지니 어느 것이 더 맑은지 가릴 수 없고, 많은 불이 서로 모여 있으니 똑같이 밝을 뿐이다. 결국에는 반드시 집에 돌아갈 뿐 다른 길이 없으니, 평평한 대로는 모두가 동일하게 평평하다고 옛 고인들은 참 지혜의 깨달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 불자들이 영원히 가야 할 행복의 길은 결국 무량공덕의 길, 진실한 참회와 발원의 길입니다. 이 길은 「모든 중생을 영원한 행복세계로 인도하는 보편적인 지혜와 공덕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성품인 자성불 속에는 수많은 불보살님들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의 자성불 세계처럼 수많은 불보살들이 함께 하십니다. 미혹한 중생업을 지닌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 공덕을 누리지도 못 합니다. 수행과 정진, 육바라밀을 통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의 세계로 인도해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불자들의 발보리심 수행의 가치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성인 이 근본마음은 만법에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법계와 만법이 이 마음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은 이 신묘한 진리를 깨달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예토(고통의땅) 가 곧 정토(해탈의땅)요, 정토가 곧 예토이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세계를 실현하는 것을 자력정토(自力淨土), 유심정토(唯心淨土)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효스님은 모든 중생이 불자인 것은 중생계가 곧 열반계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여래장도 중생계를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불의 실천주체로서의 우리 주인공의 성품은 특정인에게만 불성이 있지 않고 모든 중생에게 똑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광명경에서도「법계에는 분별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래는 일체세계를 실답게 아시고 보시는 분입니다. 모든 부처와 법신심이 성품이 모든 범부 중생들과 같다고 완전히 아시는 분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의 아버지입니다. 모든 중생들을 슬픔과 고통에서 구해내어 해탈의 기쁨을 얻게 해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법의 왕이 십니다. 우리 중생들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존재의 궁극의 실상을 깨닫도록 깊은 자비심으로 우리를 해탈의 언덕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불자로서 부처님을 만나는 한없는 기쁨과 은혜를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심한 가뭄과 메르스의 공포로 고난한 시절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하여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 나누며 겸허한 자세로 정진하여 가야 하겠습니다. 중생의 나와 본래의 참나가 있습니다. 중생의 나의 마음은 끝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본래의 참나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본래의 참나를 만나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진실된 만남이 그립고 그립습니다.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이주민들을 위한 비전 1

환대와 유대와 연대의 원리 등은 이주민들을 위한 정신문화적인 해결책입니다. 만일 우리가 환대의 문화를 이룬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모두가 우리나라 와서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의 문화를 잘 이룬다면 모두가 감동을 받아서 한국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우리들의 정(情)의 문화를 접하고서는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고 길게 체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연대하는 세상을 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문화를 선도하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주민들에게 자주 질문합니다. 우리나라가 어떻습니까? 그들은 답합니다.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뿐인 나쁜 사람이 아닌 좋은 사람, 너를 향한 사람이 되어 모두를 사랑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을 위해 가톨릭의 이주민들을 위한 정신문화적인 사상의 근원에 대해 말씀드리는 가운데 첫 번째 비전에 대해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평등운동입니다. 이는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입니다. 가톨릭은 사회교리를 통하여 만민이 평등하기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도 일상에서 말하는 바이지만 사람 아래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종차별로 인해 일그러진 역사를 체험하고, 알고 있습니다. 나치즘과 파시즘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주민과의 관계 속에서 모두가 평등하며, 어떤 인종의 차별도 편견도 사라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평등권의 실현은 바로 이주민과 함께 하는 첫 단계의 실현입니다. 둘째로 인간존엄성의 실현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존엄성을 지닌 인간존재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수단과 목적에 이용당해서는 안 되는 인격체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수용되어져야 하고, 사랑받기에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서로가 신뢰하고, 존중한다면 아마도 좋은 사람들이 많은 좋은 세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주민들을 대할 때, 그들이 인격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가정과 일터에서 대하는 자세를 구체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노동력과 갑을 관계의 노예로서 대하지 않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는 조화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조화는 세상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르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기에 다름을 서로 인정하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다른 것을 수용하여 우색인종에 대한 차별의식을 없앤다면, 그리고 다른 것을 있는 자체로 수용한다면 좋은 세상이 바로 우리 안에 있을 것입니다. 최병조천주교 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장신부

[삶과 종교] 열심과 열정 사이

두메산골에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나 농사일만 하던 소녀가, 서울에 가정부로 오게 되었다. 소녀는 첫날부터 마당에 가득한 풀을 보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3일째 되던 날, 주인이 외출하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착한 일을 시작하였다. 쇠꼬챙이로 질긴 풀뿌리를 뽑아내느라 온몸이 땀에 젖었고, 손에는 물집이 생겨 아팠지만 멈추지 않았다. 오후 4시쯤 작업이 끝났다. 자기가 한 일을 칭찬해줄 주인을 기다렸다. 집에 돌아온 주인은 그동안 정성들여 가꾼 잔디가 모두 뽑혀진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잔뜩 칭찬을 기대한 소녀에게 돌아온 것은 주인의 심한 꾸중뿐이었다. 힘을 다해 일하고 꾸중을 들은 소녀는 억울해서 울었다. 농촌문화와 도시문화의 충돌이었다. 착한 마음 하나만으로는 좋은 일꾼이 될 수 없다.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는 지식 없는 자의 무분별한 열심은 오히려 일을 망친다. 열심은 내 고집이고, 거만이고, 이기적인 나 중심의 사고이다. 때문에 이러한 열심은 득이 아니라 해가 되기 일쑤이다. 열심과 다른 열정은 무엇일까? 열심은 해야 만하는 당위성과 책임감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 또한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맹목적 부지런함이다. 그러나 열정은 자기중심적이지 않다. 뚜렷한 목적과 방향을 알고 최선을 다한다. 하고자 하는 것의 이유와 의미를 알고 있기에, 그 결과도 아름다울 수 있다. 열정은 내면의 뚜렷한 목적에 대한 깊은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과정이다. 일에 대한 정열, 애착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열정을 통해 성숙한 삶, 보람된 삶을 추구하고 좌절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생긴다. 나와 공동체 속에 있는 정의가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열심은 자기만족만을 위한 최선도 가능하다. 그러기에 나의 열심이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쾌감을 줄 때가 곧잘 있다. 그러나 열정은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때문에 나의 열정으로 다른 사람도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열정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릇된 목적에서 출발한 열심을 열정으로 오해하여, 나의 주장과 방법을 강요하는 아픔이 곳곳에서 들린다. 우선 우리는 나의 애쓰는 땀 흘림이 열심인지 열정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 때론 나의 열심이 유익할 것이라는 오해로, 많은 이들을 아프고 불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팔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아픔과 고통에 처해 있다. 이 고통은 비단 피해를 입은 네팔만이 아니라, 전 지구촌의 아픔이기도 하다. 때문에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고통을 나누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는 손길을 펼치고 있다. 기독교는 사회적 종교이어야 한다. 때문에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을 나누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기독교 단체들이 네팔 지진 피해 돕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여기까지는 좋다. 분명히,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와 구제를 분별하지 못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있는가 보다. 그 현장에서 기독교인들은 선교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한 존재로 있어야 한다.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싸매주며, 굶주림을 배부름으로 바꾸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이 그곳을 선교 현장으로 만들어, 위로가 아닌 전도지로 정신적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이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예수님도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 치유를 나누었다. 그런 후에 그들이 그 위로 속에서 느끼는 사랑을 필요로 할 때, 복음을 전했다. 필자는 그들과 함께 현장에 있을 용기가 없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픔을 공유하며 나눔을 갖는다. 감히 현장에 있는 기독교 구제 단체에 권한다. 진정으로 사랑만을 위하여 지극히 작은 자의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아픔을 어루만져 주기를 제안한다. 앞선 이야기처럼 문화적 충돌로 인하여 또 다른 아픔을 그곳에 심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삶과 종교] 영원한 진리와 지금의 진실성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왔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우리에게 보이시고 알게 하고 또 깨달음의 세계에 들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셨다. 우주의 모든 존재와 우리 인간들이 본래 부처님과 똑같은 진리의 성품, 진리의 본마음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오신 것이다. 일체 만물이 원래 한 뿌리이니 서로 상생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연기법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본성품을 바로 깨닫고 다른 사람들도 깨닫게 하고 이 세상이 깨달음으로 가득하게 하자는 것이 불교적 수행이다. 우리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이 수행심과 원력을 새롭게 다짐하고 17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연등회의 환희를 모든 국민과 함께 맞이해야 하겠다. 전국 어디를 가나 길가에 수놓은 연등의 오색 불빛이 참으로 가슴 저리게 아름답다. 희망의 등, 지혜의 등, 상호 존중의 등, 공덕의 등, 자비의 등이 되기를 발원한다. 그러나 우리 진실한 불자들은 마음의 오색 등을 밝혀야 한다. 그 공덕의 마음을 이 세상과 함께 해야한다. 그것이 참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뜻 깊게 맞이하는 일일 것이다. 믿음, 정진, 참회, 발원, 회향의 마음의 오색 등불을 밝히자. 이 광대무변한 우주에는 거시적인 물리법칙과 미시적인 불확정성의 변화가 오묘하게 융합적 모습을 띠고 존재한다. 큰 법칙 속에 마음따라 무한히 변화하는 작은 세계가 있는 것이다. 최근까지 천체 우주에 대한 과학적 이론은 1940년대 물리학자인 조지 가모프(George Garmow)에 의해 체계화된 빅뱅이론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아주 놀라운 새로운 이론이 발표되었다. 피지컬 레터 B 2월호에 캐나다 리스브리지 대학의 이론 물리학자인 소리야 다스 교수의 특별한 발표가 있었다. 기존의 빅뱅이론과는 다른 내용이다. 우리의 이론은 우주의 나이가 무한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며 우주 구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암흑 물질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하는 것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존의 빅뱅이론은 무한의 밀도를 가진 특이점이 폭발하여 원시 우주를 만들었고 그 우주는 자체의 진화과정을 거쳐 오늘의 우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 특이점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장방정식에서 도출된 것이다. 현대물리학에서는 거시세계를 다루는 상대성이론과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이론을 하나의 양자중력이론으로 통합하는 문제가 큰 숙제로 남아있다. 양자역학에서는 아원자 수준의 소립자 운동이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이라고 보고 있다. 상대성이론의 자연의 법칙성이 합치되지 않는다. 이 대통일이론이라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다스교수의 연구팀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봄 역학이라는 양자역학의 시각화라는 방법을 연구했다. 이 봄 역학에서는 숨은 변수가 아원자 입자들의 기묘한 움직임을 지배하며 다른 방정식과 달리 입자의 궤적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방정식에서는 빅뱅이론에서 말하는 어떠한 특이점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는 영원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 방법론은 양자역학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접목시키는 하나의 융합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빅뱅이론과는 다른 새로운 우주관이 탄생된 것이다. 불교적 가르침에서는 우주세계의 바탕인 이 진리 본성의 마음은 무한히 미묘하고 끝을 알 수 없으며 무한차원의 세계이다. 그 안에 물질세계가 있고 우주세계가 있으므로 진리사실을 찾기 위한 과학의 노력도 다함이 없을 것이다. 진리 자체를 전부 알기 전까지는. 생명존재의 모습은 생각따라 무한히 변화한다. 그리하여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종교 수행자들은 이런 영원한 진리를 지금 있는 이 곳에서 이 한순간에서 실천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에서도, 우리의 몸에서도, 우리의 하는 일에서도 이 진리의 공덕이 나타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부처님 오신 뜻을 이렇게 현실 속에서 살아있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올해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자.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어떻게 이주민을 돌봐야 할 것인가

오원춘, 박춘봉 사건은 우리나라의 사람들에게 제노포비즘(외국인 혐오증)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늑대라고 한 철학자의 말이 연상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사회적인 문제는 이를 넘어 이주민 전체를 혐오하는 의식으로 점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량하게 살고 있는 이주민에게까지 잘못된 시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그리고 단편적으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전체에게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에,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고 사건을 파악하기를 바라고, 또한 근본적인 원인규명과 후속 조치를 통하여 이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위의 문제를 방지하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간략하게 우리나라 제도의 한계를 언급하고, 극복안을 제시해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비자 법은 비교적으로 까다롭습니다. 예를 들면 자국민 보호정책을 쓰는 나라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국적을 취득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5년을 합법적으로 살아도 외국인노동자들은 비자를 받을 길이 아주 희박하고, 결혼이주자도 점차적으로 완화되고 있지만 배우자의 지지를 통해서만 연장되고 이혼 후에도 영향을 받고 있음을 실질적으로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하지만 갑과 을의 관계의 한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삶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또 마음의 한과 분노가 늘 이들에게 머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갑과 을의 한계에서 오는 홀대와 차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울러 같은 동포지만, 한국 사람들과 같아질 수 없는 조선족과 탈북자의 한계, 아무리 기득권으로 가려 해도 갈 수 없는 이주민들의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들을 수용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많은 우수한 문화의 유산이 있습니다. 우선 인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의 개인주의와는 달리 함께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이주민들도 대부분이 앞서 말한 유산을 간직한 나라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포옹하는 문화유산을 전개해야 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 세 가지의 문화적 해법을 제시해보겠습니다. 첫째는 환대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손님을 환대하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청소를 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손님이 오면 최고의 음식을 접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어떠합니까? 차별 없이 우리의 손님과 가족의 일원인 이주민을 환대하고 있습니까? 하느님과 그의 천사들을 잘 환대하여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아브라함이 보여준 신앙의 유산을 지속합시다. 둘째는 유대입니다. 민족주의와 순혈주의를 세상의 분열하는 사조로 비판받게 되었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일상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바로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나눔과 사랑이 바로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준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가장 미소한 이들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일상 중에 손을 내밀어 그들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다문화시대를 열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연대입니다. 공존과 연대는 바로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유산입니다. 전쟁, 테러, 환경, 경제 등의 모든 현대에 제기되는 문제는 함께 연대해서 공존이라는 열쇠로 풀어야 할 것들입니다. 더욱이 다문화시대를 살아가면서 불의와 불균형, 차별화 등의 문제를 함께 연대해서 풀어나가는 가운데 새 하늘, 새 땅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최병조 수원교구 이주사목연구소 신부

[삶과 종교] 상식 뒤에 있는 진실

보슬보슬 봄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 서늘한 기운을 지우고자 따뜻한 찻잔을 데운다. 찻주전자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찻잔을 넘어 튀어 오르는 모습에서, 필자가 가지고 있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진다. 필자가 알고 있는 상식은 위치 에너지의 성질상 처음의 위치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인데, 찻잔을 넘어 튀는 물방울은 찻주전자를 넘어 간다. 왜일까? 이리저리 생각하다 필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떨어지는 물의 질량과 튀는 물방울의 질량이 다르다는 사실! 다량의 질량이 소량의 질량을 원래의 위치보다 더 높이 올릴 수 있다는 역학관계를 잊은 것이다. 세월호가 바다 속에 잠기며 수많은 젊고 어린 영혼들을 바다 속에 수장했던 끔찍한 일이 벌어진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몸서리칠 수밖에 없고,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참혹한 사건이다. 얼마 전, 잘 아는 후배 하나가 세월호 이야기를 꺼낸다. 많은 사람들이 유가족들의 아픔에 동참하며 거리로 뛰어나가 함께 울부짖고 소리치는 현장에 자신도 있었단다. 뿌듯함을 내포한 자랑스러운 어투로 이야기하며, 이 시대의 많은 무감각한 기성세대들이 함께 동참하지 않음을 개탄한다. 진실을 밝히고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정의라고 목소리 높이며,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겁함과 몰인정함을 얼굴 붉히며 매도(?)한다. 필자는 그 광화문의 현장에 동참하지 않았기에 무언지 모를 의기소침함이 억누른다.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과연 나는 비겁하고 몰인정한, 그리고 사회적 관심에 별반 반응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가? 나의 아픔이 아닌 그들의 아픔이기에 점점 망각하며 살아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시대적 사회 양심을 선언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전념해야하는 목사로서 직무유기의 삶이 아닌가? 정말 아프지 않은가? 그러나 필자도 분명히 아프다. 그것도 너무 많이 아프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리치며 고통을 호소하는 방법이 아픔과 괴로움을 표현하는 방법이겠지만,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가슴에 묻으며 찢어지는 고통을 삼키는 것도 또 다른 아픔과 괴로움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아들 녀석이 대학교 합격통지서를 가지고 왔을 때, 필자는 조용히 한 마디만 말했다. 수고했다. 그 옛날 필자가 대학 합격 통지서를 아버지에게 건넬 때 들었던 그대로이다. 이제야 내 아버지의 기쁨을 가늠하게 된다. 무뚝뚝하고 정감 없이 내뱉은 그 한 마디의 말에는 무한한 기쁨과 뿌듯함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세월호의 아픔을 절절히 표현을 하지 않지만, 필자의 가슴 속에는 고통과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 이제 다시 그 후배와 동일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속에도 너희들과 다를 바 없는 고통과 슬픔이 존재한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방법을 비겁하다고 매도하지 말아달라고. 유족들이 갈망하고 정부가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을 보니, 세월호의 인양이 점점 가시화 되는 듯하다. 그런데 필자는 염려가 된다. 인양의 과정과 절차가 너무 힘들고 위험한 과정이란다. 그 과정과 절차 속에서 또 다른 누구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자녀가 다른 고통과 슬픔에 노출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이다. 너의 아픔을 위해 또 다른 누구의 아픔이 재생산된다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삶과 종교] 천년의 미소, 영원의 미소

함께 원력을 세우고 수행정진하는 좋은 인연을 지닌 분들과 내포지방 제일의 명당을 찾았다. 고려부터 조선 후기까지 가야사라는 사찰이 있던 터이다. 가야산 석문봉을 주봉으로 옥양봉을 비롯한 서너 봉우리의 능선과 좌우의 능선들이 가야사 터를 향해 모여져 있다. 가야사 왼쪽 좌청룡능선은 손가락을 펼친 듯 여러 작은 능선들이 겹겹으로 가야사 터를 에워싸고 있다. 굉장한 자연의 에너지(氣)가 모여 있다. 땅의 풍수는 그렇다 하자. 그 가야사 터에서 진정한 마음의 풍수를 생각하였다. 성현에 대한 믿음과 참회, 그리고 성불을 위한 정진과 회향의 뜻을 하나로 모은 가장 아름다운 마음인 이 보리심은 어떤 마음일까? 이 보리심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나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고 내가 있는 이 세상이, 이 법계가 해탈세계가 되게 하는 일이다. 이 내포지방은 백제불교가 융성했던 곳으로 덕숭산, 가야산, 상왕산에 걸쳐 수덕사, 개심사, 보원사터, 가야사터, 서산마애삼존불 등의 뛰어난 유적이 펼쳐있다. 우리 일행은 인간미 넘치는 천년의 미소가 그리워 용현리 마애삼존불을 찾았다. 이 삼존불은 산 속 깊이 있어 찾아오는 이도 없었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부여 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지를 발굴하던 중 마을의 나무꾼들을 통해 마애불에 대해 알게 되었다. 1959년의 일이다. 용현리 마을에는 마애불과 관련한 소박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웃고 있는 산신령이 가운데 있고 그 산신령 오른쪽에 있는 한 부인이 다리를 포개고 앉아 볼에 손을 대고 다른 부인을 놀리자 왼쪽에 있는 다른 부인이 약이 올라 손에 돌을 쥐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가운데 부처님과 좌우의 보살상의 모습을 시골마을 나무꾼들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쾌하고 넉넉한 미소를 머금은 부처님상과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의 왼쪽의 보살입상, 그리고 천진난만한 소년의 미소를 머금은 미륵반가상은 백제 특유의 온화함과 여유를 느끼게 해준다. 이 마애불은 동동남 방향으로 모셔져 있는데 아침 해가 비칠 때가 가장 밝고 평화로운 미소를 느끼기에 좋은 시간이다 한 낮에는 근엄하며 저녁에는 은은한 미소를 띤다. 백제인들은 독특한 불교문화를 창조하고자 했으며 좀 더 대중적이며 친근한 종교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 백제불교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이 마애불상이다. 누구든지 쉽게 다가가서 의지하고 친숙할 수 있는 부처님상이다. 사실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의 불상은 우리의 삶과 가까이 존재하는 살아 있는 종교의 의미를 되새겨 준다. 이제 이 미소가 천년을 넘어 만년의 미소가 되고 영원의 미소가 되어 미래에도 살아 있는 우리 민족의 미소가 되기를 염원한다. 우리 불교에서는 일체 존재의 근본이며 주인인 이 진여불성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차원의 진리근본 마음세계라고 한다. 참 진리는 영원하고 그 운영의 법칙은 언제나 공평하며 일체의 억지가 없는 자연스런 것이다. 그것이 이치이며 순리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무량한 행복의 길을 함께 가야 한다. 우리는 외롭지 않아야 한다. 원래 모든 생명은 이 무시무종의 영원한 우주의 본래 진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중생제도의 원력을 세우셨고 진리의 화신이신 성현에 의지하여 우리는 현재의 이 한순간이 곧 영원의 진리와 하나가 되게 하여야 한다. 그것이 종교의 진실성이고 참다운 기도이며 정진수행이다. 우리 일행이 마래삼존불을 향해 갈 때 구름이 끼어 흐린 날씨였다. 마애삼존불에 도착할 무렵 밝고 따스한 햇볕이 마애불을 향해 잠깐 비추었다. 그때 우리는 분명 역력히 보았다. 천년을 간직한 백제의 미소를! 영원하여야 할 우리민족의 자존적 미소를!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어떻게 다문화가정의 자녀를 잘 돌 볼 것인가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당연히 한국 사회가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속지 중심의 사회이기에 이들에 대한 시선이나 인식이 긍정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넘어야 할 벽이 많이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들을 잘 돌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적으로 이들의 문제를 알고, 이들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체질을 개선해야 할 것인가를 제안하겠습니다. 문제해결1) 여러 가지의 원인으로 인한 부부 간의 불화입니다. 잘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의 결혼은 부부끼리의 혼인이 아니라 가족혼입이다. 가족 혼이기에 행사가 많습니다. 제사, 시부모와의 갈등 등의 많은 문제들이 둘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문화에서 살던 이들도 부부로 잘 살아가기 힘이 드는데, 다른 문화에서 살던 이들이 잘 사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부부의 문제는 바로 자녀들에게 이어집니다. 부부 간에 잘 살도록 도와주는 문화를 형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가족혼으로 오는 갈등을 최소화하는 문화를 형성해나가면 좋을 것입니다. 즉 간섭하는 문화가 아닌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문화를 형성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고집하며 간섭하는 것이 아닌 상대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관심을 쓰는 가족문화를 형성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문제해결2) 비싼 사교육비입니다. 일본 결혼이주자가 자신을 애를 갖고 싶지 않다고 저에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었더니, 한국은 사교육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의 전문기술을 원하는 시대에서 많은 자격증과 시대가 요구하는 경험을 쌓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 참으로 갈 길이 멀리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현실 속에서 체험하는 바는, 직장생활을 잘 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애정과 무엇이든지 해보려고 하는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두 가지가 뒷받침이 된다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채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습득을 위한 교육보다는 정서적인 만족을 위한 교육, 다양한 자격증을 습득하기 위한 교육보다는 어떤 일이든지 마음으로 선택하고 기쁘게 하는 교육을 지향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세상은 그리고 다문화 자녀들의 세상은 더욱 행복하게 펼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해결3) 이지메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행복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다문화는 다른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풍요로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세상인데, 그렇지 못한 현실로 인하여 이들은 제안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엄마의 나라로 보내지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이지메의 극복은 우리가 인종과 국가를 넘어서는 의식을 지니는 것입니다. 인류애와 사해동포의식, 인류가족이라는 의식을 널리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결혼이주자는 제게 아이를 낳아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어린이집이 없다고, 어린이집을 세워 편견과 차별 없이 우리들을 돌보아달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나라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개방으로 더욱 큰 세상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최병조 천주교 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장신부

[삶과 종교] 시야암전증(視野暗箭症)

안과 질환에 시야암전증이라는 눈병이 있다고 한다. 기다란 두루마리 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일정한 초점만 보이고 주변의 시야가 보이지 않는 증상이다. 따라서 부분적 식별만 가능하고 전체적 판단이 불가능한 눈병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야에도 이 시야암전증을 앓는 이가 적지 않다는 임상보고를 하고 있다. 그러하듯이 의식구조 측면에서도 시야암전증이 있는데, 바로 우리 한국 사람에게 이 증상이 유별나게 강한 편이다. 사람 사는 공간을 친밀공간과 적대공간으로 나눈다면, 우리 한국 사람의 친밀공간은 자기 사는 환경의 안쪽에 국한되며, 그 밖은 무한대의 적대공간이다. 서양 사람들의 친밀공간은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에 비해, 한국인의 친밀공간이 너무 좁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자기 집안을 쓸고 닦고 하면서, 도로변이나 강물 속에 쓰레기 버리는 것에 눈곱만 한 가책도 느끼지 않는 것은 바로 친밀감의 시야암전증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몸이 시야암전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 마음도 시야암전증에 걸린 사람도 있다. 어린아이들은 장난감에 한번 꽂히면 떼를 쓰면서 그걸 사 달라고 한다. 부모님의 사정이나 주변상황을 돌아볼 마음이 안 된다. 그런데 만약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다면 어떨까? 게임중독에 빠진 사람은 게임을 하기 위해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산다. 학생인데 학교 공부보다 게임을 하기 위해 시간을 더 쓰게 되고, 심지어는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우고 학교에서는 피곤해서 잠만 잔다. 이런 이유로 얼마 전에는 휴가 나온 군인이 게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를 죽인 일도 발생한 것이다. 마약에 빠진 사람은 마약을 사서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뭐든지 하게 된다.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의 삶도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나아가 자신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도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명예나 권력에 빠진 정치인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불법을 행하고, 이것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는 나중에 청문회에서 말할 수없는 부끄러움을 당하곤 한다. 문제는 그 어떤 곳에 빠져 있는 동안 주변은 안 보인다는 것이다. 나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도, 친구가 멀어져도, 심지어는 자녀들이 더 이상 부모를 부모로서 존중하지 않게 된다. 결국 외롭고 쓸쓸한 삶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얼마 전 일명 세월호 어묵 사건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변명은 그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였단다. 이 역시 그의 시야암전증 때문일 것이다. 내가 관심을 받으므로 행복할 수 있다면, 자식을 잃고 형제와 친구를 잃은 사람들의 아픔은 아무렇지 않다. 한센병 환자들의 성인으로 추대 받는, 하와이 몰로카이의 복자 다미안 신부를 아는가? 그는 한센병 환우들을 섬기기 위하여 그들에게 다가갔지만 환영받지 못한다. 건강한 그가 한센병의 고통을 알 수 없으며,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진정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하여 다미안은 자신이 한센병 환자로 살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비로소 그들의 마음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 다미안과 같은 이들이 필요하다. 시야암전증으로 자신의 삶과 행복만 추구하는 시대에, 타인의 행복과 유익을 위하여 나를 희생할 수 있는 정신이 필요하다. 그것은 네가 아니다. 나로 나로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시야암전증의 삶의 정신은 먼저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나아가 이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삶과 종교] 과연 그날이 올 것인가

봄이 그냥 쉽게 오지 않는다. 꽃샘추위가 있었고 며칠 동안 봄바람이 사나웠다. 본래 종교의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그 진리 속에 있다. 그러니 지금 이 한순간도 그 진리와 하나여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안으로 잡드리하여 이 본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종교인의 진실성이고 참다운 기도이며 정진수행이다. 작년 7월 용주사 교구 신도회 임원들과 함께 「주어사 원형 복원 발원」을 위한 기도에 참여하기 위해 여주시 산북면 하품 2리(주어리)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지를 찾았다. 주어사는 출토유물로 볼 때 고려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존립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1779년(정조3년) 성호학파의 문인이며 남인계통인 녹암 권철신을 중심으로 정약전, 이벽 등의 6인이 유학과 서학(천주교)을 강학하였던 곳이다. 권철신의 고향은 양근(양평)인데 주어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정조대왕은 당시 열린 마음으로 서학을 받아들였고 실학 사상가들을 비호하였다. 당시 서학의 강학 장소를 제공하고 서학자들을 보호해준 주어사를 비롯한 불교계의 움직임은 정조대왕의 개혁과 포용정신에도 맞닿아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정조대왕이 일찍 세상의 인연을 다하고 나니 노론벽파에 의한 신유박해(1801년, 순조 1년)가 일어난다. 깊은 산속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했던 남인 시파의 서학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또 그들을 조정에 신고하지 않고 끝까지 보호했다하여 주어사 스님 10여 분도 함께 희생을 당하여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사찰도 폐사를 맞이한다. 분명 10여 분의 스님들은 진정한 종교인의 길을 간 것이다. 정조대왕의 개혁정신과 열린 마음에 뜻을 같이 했던 스님들이었을 것이다. 1794년 청국의 주문모신부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서학이 교세확장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정조대왕의 서학에 대한 관대한 정책이 중요한 계기였음이 분명하다. 2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주어사지 안내판에는 「천주교 강학회 장소」가 중점적으로 소개되어 있고 불교의 보호아래 천주학자들이 주어사와 인근의 천진암에서 강학했다는 내용이 없다. 또한 천주학자들을 끝까지 보호하여 10여분의 스님들이 목숨까지 희생당했다는 사실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천진암의 현실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 천진암 대웅전 터에 「조선 교구 설립자 선조묘」가 있으며 절 암(庵)자도 초막 암(菴 )자로 바뀌어져 있고, 스님들의 비호아래 천주강학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대저 종교적 가르침에서 은혜와 사랑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강학자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원해 주며 생명까지 희생했던 그 은혜를 어떻게 대해야 온당한 것인가? 주어사지를 제2의 천진암같이 하려는 여러 가지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적 일방주의, 배타주의를 용인하고는 국민의 화합과 상생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어사지 복원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무던히도 영원의 진리를 생각하였다. 주어사지와 천진암에 대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과 지료들을 모아보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러 움직임을 살펴보니 이런 외침이 끝없이 마음 안으로부터 솟아난다. 천주교 발상지 성역화 사업으로 불교의 흔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한 천진암에 대한 재조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주어사 문제에 대한 종교적 해법은 공간의 복원뿐만 아니라 역사의 사실과 가치의 복원이 중요한 문제이다. 주어사를 역사 사실 그대로 복원하여 후대의 사람들에게 종교화합의 교육의 장이 되게 하자. 이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상생의 금자탑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그날이 우리에게 올 것인가?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행복한가

1990년 전후를 이주노동자들을 돌보는 시대라고 한다면, 2000년도 전후를 결혼이주자들을 돌보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10년을 중심으로 지금의 강조점은 바로 한국의 배우자와 결혼이주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리고 노동자들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리고 결혼이주자들의 전 혼인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위한 배려에 힘을 써야 할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을 보면, 이들은 모두가 한국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살아가기에 많은 어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우선 한국사회의 사회적인 현실입니다. 한국사회는 현실적으로 이들을 한국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한국의 국적도 취득할 수 없고, 고등학교의 졸업장도 취득할 수 없다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기에 더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본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한국이라는 나라와 부모님의 나라 그 어디서도 살아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도입국자도 비슷합니다. 우선 이들은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학교에서 지진아로 살아가는 현실이고, 사전에 준비 없이 한국에서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살길이 막막함을 느끼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고향으로 갈 수 없기에 첩첩산중에서 살아가야 할 처지입니다. 그러면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사면초가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중도 탈락률을 보이고 있는데, 최근 학계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다문화가정 자녀의 여러 종류의 어려움으로 중도 탈락 비율이 15.4%, 39.7%, 69.6%로 점차적으로 2배 정도씩 증가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러면 현장의 사례를 통하여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를 제안해보겠습니다. 사례 1) 2012년 11월 공부방을 열어, 주변의 결혼이주자들에게 홍보하여 다문화 가정들에게 홍보하여 자녀들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측한 자녀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유인 즉슨 바로 이혼을 하였는데도 남편이 술만 마시면 자녀들을 찾고 괴롭혀서 한국에서 교육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의 고향으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사례 2) A 양은 저희 공부방의 중도입국자녀입니다. 어느 날 저는 공부방을 방문하여 자신의 다리를 때리면서 한숨을 쉬고 있는 A 양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녀의 대답인 즉슨 선생님께서 내주시는 숙제를 못 알아들어서 벌로 오리걸음을 해서 다리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례 3) 어느 날 시무룩하고, 의욕이 없어 보이는 학생이 있어 그림치료를 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그림에서 검은색으로 학교를 지운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사연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다문화 나와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그녀는 학교가 싫어졌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행복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최병조 천주교 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장신부

[삶과 종교] 정신의 부재

후한시대에 관서공자로 불렸던 양진이 태수 벼슬에 있었을 때, 금 열 근을 뇌물로 바친 자가 있었다. 이를 거절하자 한밤중에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러십니까? 하면서 재삼 받기를 권하였다. 이에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자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니 그게 웬 말인가?라고 했다던 장본인이 양진인 것이다. 양진은 벼슬아치가 가져야 할 청렴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군인에게는 군인 정신이 중요하다. 이러한 군인 정신을 망각하면 위험도 무릅쓰고 별짓을 다하게 된다. 정치가에게는 애국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 애국을 망각하게 되면 별별 부정을 다 저지르고, 결국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된다. 종교인에게는 종교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종교 정신을 망각하면 구린내 나는 사리사욕에 빠지게 되고, 결국 그와 종교에 먹칠하게 된다. 대한 불교 조계종 행정 총책임자인 자승 스님이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 깨달음을 구함)만 있지,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래로 중생을 교화함)은 없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 또한 진정 종교가 가져야 정신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리라. 이 시대는 진정한 정신의 부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의 정신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사업자는 사업자로서의 정신을 가지고, 기업과 속한 근로자들의 복지에 최선을 다해야 바른 기업과 사업자가 될 것이며, 근로자는 근로자로서 자신이 이 기업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정진해야 한다. 또한 교사는 교사로서의 정신을 가지고 사명적 자세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며,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정신을 가지고 맡은 바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이 나라의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요사이 기독교가 폄하되며, 그토록 모질게 매를 맞는 이유가 뭘까? 그 역시 정신의 부재이다. 기독교가 가져야 할 근본적인 정신의 부재가 독선과 이기에 빠지며 사회에 실망을 던져, 이 사회가 아우성치며 정신 차리라는 외침일 것이다. 옛날 어떤 검객이 집에다 칼을 놔둔 채 밖으로 나왔다가 강도를 만났다. 칼을 든 강도가 있는 것을 다 내놓으라.고 하자, 검객은 네 이놈! 내가 누군 줄 아느냐?고 소리쳤다. 강도는 웃으면서 잘 모르지만, 내게 귀중품을 바칠 사람으로 안다.고 조롱했다. 검객은 우리 집에 칼이 있다. 나는 검객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강도는 칼도 없는 검객이 입만 살았구나.라면서 달려들어 검객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빼앗았단다. 지금 나의 칼은 어디에 있는가? 집에 두고 큰 소리만 치는 검객과 같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빈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자. 칼이 없는 검객은 검술을 펼칠 수가 없다. 때문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조롱을 당하듯이, 이 사회가 정신을 잃고 살아가면 삶의 진가를 발휘할 수 없다. 너의 정신을 논하지 말자. 나의 정신을 생각하자. 나는 나의 가치에 맞는 정신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삶과 종교] 봉황리 마애불의 침묵

얼마 전 한신대의 한 교수님으로부터 교직원에 대한 도올선생의 특강에 참석해 달라는 청이 있어 참석하였다. 도올선생은 지난 일년동안 연변에 있는 대학에서 <노자>를 강의 했는데 좋은 호응이 있었다고 한다. 한신대에서 선생은 고구려의 역사, 유적, 그리고 그 기상과 중국과의 관계 등에 관해 열정적으로 강의하였다. 나는 점심공양을 함께 하면서 고구려의 도읍지, 광개토대왕비, 연변지역의 풍토와 농산물, 고구려의 세계관, 신채호 선생 등에 대해 많은 담론을 나누었다. 나는 항상 우리 민족의 남다른 강한 정신력 속에 고구려 기상의 DNA가 숨어 있음을 느껴왔다. 도올선생은 그것을 우리민족 특유의 <깡다구>라고 표현하였다. 우리에게는 5천년을 이어온 모진 생명력과 결코 그냥 물러설 수만은 없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나는 뜻을 함께 하는 분들과 고구려의 유적을 살펴보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봉황리 마애불을 참배하기 위해 삼국문화융합지역인 충주로 향했다. 이 마애불은 불교가 고구려에서 남한강을 따라 신라로 전파되는 경로를 보여주며, 600년경에 조성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조성시기를 약간 달리하여 두 군데에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 8분이 모셔져 있는 마애불상군 중에 팽이모양의 대좌나 갸름한 얼굴의 상호는 고구려 양식의 특색을 보여준다. 조금 위쪽에 있는 두 번째의 큰 마애불은 머리 위의 두광안에 5분의 아주 작고 천진한 부처님들이 함께 모셔져 있다. 법화경에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 타방세계의 부처님들이 화현하셔서 증명하고 찬탄하시는 모습이 나오는데, 마치 그 모습을 보는 듯하여 새로운 감동을 받는다. 이 큰 마애불의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표정은 수수하며 미소를 띠지 않고 묵연한 침묵을 머금은 상호이다. 왜 천년이 넘도록 이렇게 굳게 입을 닫고 계실까? 나는 이 마애불의 오래된 침묵에서 깊은 전율과 웅변을 느낀다. 그리고 이 땅의 불자들의 간절했던 마음과 정성을 되새겨보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금의 종교현실을 성찰한다. 우리 불자들의 마음이 초발심의 순수한 보리심으로 가득할 때, 또한 우리 민족이 본래의 한민족 정신을 회복할 때 저 봉황리에 있는 큰 마애부처님은 그 무거운 침묵을 놓고 대 환희의 미소를 띠게 되리라! 우리 일행은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과 8천의 군사들이 순절한 탄금대를 마주하고 있는 남한강변의 창동마애불을 친견하고 중원 고구려비와 통일신라의 유일한 7층 석탑인 중앙탑도 찾아보았다. 또한 삼국시대 3대 철산지의 하나인 이 지역에는 유명한 철불이 계시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백운암 철불(보물 제 1527호)을 특별히 친견하였다. 상호가 완벽하도록 아름답다. 특히 그 자애롭고 부드러운 눈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과 말을 멎게 했다. 백운암에서 따뜻한 차 몇 잔을 머금고 나서 탄금대로 향했다. 탄금대 열두대에서 나는 깊은 사유에 들었다. 중국 길림성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북부여 수사인 모두루 묘지에는 하백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인 추모성왕(동명성왕,고구려의 개국시조군주)이 북부여에서 태어 나셨으니, 천하사방이 이 나라가 가장 성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글 속에는 고구려중심의 천하관이 들어있다. 이 고구려 땅은 현재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만 우리는 그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근본정신을 굳건히 해야 할 것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울렸던 노을진 남한강 탄금대에서 나는 신립장군과 하나 되어 고구려 자존의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돌부처님도 녹아내리도록, 그렇게 정성스럽게 기도해 왔던 이 땅의 불자들을 기리며 나는 어쩔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을 오래도록 머금고 있었다.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사랑의 마음으로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다. 목사님 제 이웃에는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하여서 벌써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남자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은 오랜 영양실조로 얼굴에 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이나 불행 같은 표정은 없었다. 단지 배고픔의 깊은 고통만이 있을 뿐이었다. 목사님은 그 집 어머니에게 쌀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쌀을 두 몫으로 나누더니 절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목사님께서 물었다. 어딜 갔다 오셨습니까? 그녀는 이웃집에요. 그 집도 배가 고프거든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그녀가 쌀을 나누어 준 것에 대하여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은 실제로 더 많이 나눌 줄 아니까. 하지만 목사님이 놀란 것은 그녀가 이웃집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개 사람은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은 처절하게 기억하고 느끼지만,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은 무관심하기 마련이다. 혹은 말하기를, 나의 아픔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고도 말한다. 정말 그럴까? 나의 고통은 모두가 함께 느끼고 공유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은 무관심한 이기적인 사고와 삶의 방법 때문이 아닐까? 요사이 삶이 참 퍽퍽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불황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수많은 사건과 사고로 가슴 아프고 고통당하는 사람들, 또는 가정의 평화가 망가져 신음하는 사람들! 때문에 매체들의 소식의 서두는 경제적, 가정적, 사회적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건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들을 통해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단호히 정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어쩌면 그들의 이웃인 나와 우리의 무관심 때문은 아닌지 돌아본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라는 구절이 있다. 필자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구절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복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사회가, 이 나라가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게 복이 될 것을 기대하기 이전에, 내가 나를 사람의 복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런 말들이 곳곳에서 들리는 사회를 만들어보자. 누군가가 나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 나 역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내게 있는 작은 행복이라도 두 몫으로 가르고,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이웃에게 나누어보자. 내 일에 대한 나의 욕심 때문에 움켜쥐었던 주먹을 펼쳐, 오늘을 이웃과 함께 서로 웃으며 살아보자.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떤 향기를 갖고 있는가? 분노와 노여움은 우리를 향기롭게 하지 못한다. 이제 분노와 노여움을 접고, 맑은 사랑만으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진정 마음의 행복을 느끼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삶과 종교]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관세음!

을미년 첫날 오랫동안 나의 산책로이고, 명상의 장소인 황구지천에서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수없이 무리지은 청둥오리와 함께 새아침을 맞이하였다. 황구지천은 의왕에서 시작하여 수원, 화성, 오산을 거쳐 평택의 진위천으로 향하며 일년내내 많은 철새들이 날아 오고, 겨울철에는 특히 청둥오리들이 작게 혹은 크게 무리를 지어 씩씩하고 정겹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선원으로 돌아와 참선수행 방에서 면벽 정진하였다. 우리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법을 전하기 위해 오셔서 소림굴에서 부동심으로 9년 동안 면벽 수행하였다. 오직 한 마음뿐으로 스스로의 마음 바탕을 투철하게 꿰뚫었다. 나도 또한 달마대사처럼 마음의 본성을 찾는다. 생명의 고향, 진리의 고향을 찾고 또 찾는다. 일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그 진리 본성과 하나가 된다. 작은 나를 놓고 부처님의 원력에 바친다. 그리하여 부처님과 하나가 되어 스스로 거룩하고 장엄하여진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부처님 생명으로 존중한다. 눈앞의 세계를 무량공덕의 세계로 만든다. 일체의 탓함도 나 중심적인 치우침도 없다. 눈앞에는 오직 부처님의 원력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떨리운 가슴으로 합장하고 이렇게 새해인사를 세상을 향하여 보낸다. 나도 관세음! 당신도 관세음! 우리 모두 관세음! 일체생명관세음보살! 평상시 나는 항상 우리 민족의 미래와 주체적 자존을 위해 기도 발원해 왔다. 그리고 정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깊은 사유를 해 왔다. 특히 정조대왕이 계시는 곳을 정조시로 이름하고 과학문화철학산업이 조화를 이루는 21세기 한국최고의 미래 도시가 되게 하는 염원을 간직하여 왔다. 훌륭한 인성을 갖춘 정조의 후예를 육성하고 실학 사상가들의 뒤를 잇는 창의적 과학인재를 많이 배출하자는 것이다. 우리 정조시가 수학 철학의 도시가 되어 유소년부터 초중고까지 부모와 함께 참여하는 한국 최고의 수학 철학 캠프를 상시 운영하는 미래 과학도시가 되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모든 일에는 뿌리와 가지가 있고 처음과 끝이 있다. 그 선후를 잘 가릴 줄 알아야만 큰 성취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큰 틀을 잘 세워야 지엽적인 부족함을 넘어 설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대입을 향한 기는 교육현실과 투쟁적 정치현실로 민족의 미래를 생각 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고뇌스럽다. 수백년의 우리역사를 되짚어 보아도 우리에게는 정조대왕과 실학 사상가들을 능가하는 지도자와 인물이 없었다. 정조대왕의 애민 사상이 깃들어 있고 문화유산이 전해져오는 지자체에서는 정조대왕의 개혁 사상을 계승하는 이런 시대적, 역사적, 책무를 깊이 자각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는 자연이 숨을 들이 쉬고 내 쉬는 과정의 산물이고 잎이 지고 꽃이 피는 것은 대지가 한번 잠들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현상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작은 관념의 틀에 얽매이지 말고 보다 크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새해를 맞이하자. 우리 동양의 성현들은 백성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사직이다고 하였다. 국민들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정조대왕이 꿈꾸었던 대동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 경기도와 정조시가 웅장한 기상으로 가장 앞선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 바란다. 내가 있는 곳을 지혜와 공덕이 가득한 행복한 세계가 되게 하는 것이 나의 수행의 회향이기에 나는 이 외로운 뜻을 을미년 새 해 아침에 새롭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이다.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누가 이들의 친정부모가 될 것인가?

우리나라에 결혼하여 들어오는 이들은 대부분 아주 젊은 여성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결혼생활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는 이들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하듯이 결혼에 대한 선 이해가 없는 여성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잘 안내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게다가 국제결혼입니다. 본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결혼한 이들이기에 더욱 한국과 결혼생활이라는 두 가지의 현상을 잘 안내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같은 나라에서의 결혼도 참으로 쉽지 않은데, 국제결혼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저는 이들에게 친정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주어야 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함도 느낍니다. C양은 어느 날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신부님! 남편이 자주 술을 마시는데 어떻게 하지요? 저는 그녀의 질문에 결혼생활의 경험도 없는 저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지만 분명 무엇이라고 해답을 주어야만 했고, 그래서 보통 한국 남자들은 사업상으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고 또한 관계에 대한 갈등으로 술을 마시기도 하니까 잔소리만 하지 말고 역으로 잘 대해주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전화가 왔는데, 잘해주어도 술을 계속마신다고 필자는 다시금 그녀에게 제안하였습니다. 한국의 현명한 아내는 자기의 일을 찾으면서, 남편에서 크게 의존하고 집착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녀는 현재 유치원의 교사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D양은 집을 나와 쉼터로 왔습니다. 사연인 즉 남편이 마마보이고, 벌고자 하지 않는 의존형의 남자이기 때문이었고, 자녀를 3명이나 낳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런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살림을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권한도 없기에 시어머니로부터의 독립과 분가를 선언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집에서 나와 구직활동을 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혼은 새로운 삶의 도전입니다. 그리고 수수께끼는 아무도 결혼에 대한 사전 이해와 배우자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결혼이주자들은 이민국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끊임없는 노력하여 잘 살아가는 법을 앞서 살아간 이들이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고부간의 문화는 변화되어야 하는데,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차지하려면 그 자체가 전투이기 때문에 차라리 좋은 관계를 맺을 자신이 없다면 분가해서 잘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심한 갈등으로 사는 부부에게 처방으로 분가하라 했고, 분가해서 잘사는 결혼이주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병조 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장신부

[삶과 종교] 비판하지 말라

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장을 받고 있었다. 순서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는 한 축하객에게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학생이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고, 총장에게 악수도 받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축하객은 세상도 많이 변했군, 저렇게 건방진 학생도 있으니.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다니 이 학교는 4년 동안 무얼 가르쳤단 말인가?라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재학생이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저 분은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수를 하고 4년 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학생입니다 그러자 보이는 대로 비난했던 축하객은 얼굴을 붉히며 함부로 말을 한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빙산의 일각이라고 하던가? 진실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보이지 않는 대부분의 상황을 무시하고, 보이는 몇 가지의 현상으로 비판하고 비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언젠가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 한 개그맨이 즐겨 쓰던 말이 있다. 해 보셨어요? 해 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세요 느끼고 경험해 봤느냐는 말일 것이다. 순간 나타나는 현상으로만 평가하지 말고, 그 과정 속에 녹아 있는 진실을 알고 있는냐는 물음일 것이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자신,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비방 당하는 사람이다 비판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비판은 순환성이 있다. 비판받은 사람은, 비판하는 사람의 비판거리를 찾아 다시 비판한다. 비판은 비난과 저주를 낳는다. 그 결과 순식간에 공동체의 행복이 깨지는 것이다. 비판은 중독성이 있다. 비판하다보면 부정적인 시각이 발달하여, 숱한 아름다운 것은 보지 못하고 비판할 것만 보게 된다. 결국 비판에 중독되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비판은 저주성이 있다. 비판하면 무엇보다 나의 행복이 깨지고 만다. 비판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기에 더욱 마음이 황폐해지고, 행복을 떠나 불행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 강조한다. 불행하게 살고 싶지 않거든 비판하지 말라! 요사이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고 비방하는 시대인 듯하다. 비판, 비방하는 사람도 결코 남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면서도, 우리는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때문에 비판이 순환하여 나에게로 돌아와 불행한 삶을 지속하게 되며, 비판에 중독되어 부정적인 사고와 언어로 다른 이들과 나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나아가 비판의 저주를 쏟아내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헤아리는 것은 도로 나도 헤아림을 받게 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생활을 비판하지 말고, 나 자신은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실수와 실패를 통하여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담습하지 않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비판하더라도 그 실수는 되돌릴 수 없다. 또한 비판 받는 당사자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필자는 세상이 흔한 말로 비판하는 개독인이다. 거기에 더하여 그토록 폄하 당하는 먹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 모든 기독교인들을 폄하하지 마시라. 이 나라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세상이 알고 있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며, 그런 삶도 살지 않는다. 그 중의 일부가 부끄러운 삶을 살고 행동을 일삼지만,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아가 일생을 진리를 위하여 몸 바치며 희생하기로 결단한 목사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심지어는 자녀들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며 이 땅에 사랑이 뿌려지고, 정의가 바르게 세워지며, 진리가 널리 전파되기를 소원하며 살아간다. 나름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을 추구하며, 그것을 세상에 심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이 목사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며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성탄시즌이다. 사랑이 회복되고, 분쟁이 가라않고, 분열이 화합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분 내며 비판하고 평가하던 소리가 가라않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Merry Christmas가 되기를 소원한다. 이즘에 목사인 필자는 이렇게 기도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와 진리를 주셨듯이, 목사인 나도 평화를 진리를 나누는 삶을 살게 하소서!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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