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버킷 챌린지 혹은 ALS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사회 운동으로,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른바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 사람이 머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2014년 여름에 시작된 이 운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급격히 퍼져나가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이 운동의 방식은 참가자가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시작된다. 참가자는 우선 동영상을 통해 이 도전을 받을 세 명의 사람을 지목하고, 24시간 내에 이 도전을 받아 얼음물을 뒤집어쓰던지, 100달러를 미국 ALS 협회에 기부하든지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그 후 참가자가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간단한 방식이다. 그러나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것이 하나의 사회 유행으로 퍼져, 기부를 하면서도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사람들도 상당수이다. 덕분에 필자에게도 두 번이나 얼음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기회가 온 것을 보면, 지구촌 모두에게 사회 유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횟수가 더해가고 참가인원이 늘어가면서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점점 잊혀져가고, 하나의 이벤트가 되어가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가짜 얼음물 사건, 급기야는 도를 넘은 누드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유투브를 통하여 회자되기까지 한다.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사라지고, 단지 얼음물만 뒤집어쓰는 이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이스 버킷 챌린지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자기 과시의 수단과 재미로 전락하고 있어 마음이 씁쓸하다. 이런 시대에 우리 사회가 의미를 회복하기를 희망한다.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얼마나, 또는 어떠한 것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과연 어떤 마음과 정신 속에서 이루어졌느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가운 얼음물을 몇 번을 어떻게 뒤집어썼는냐가 아니라, 진정한 고통에 동참하며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행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벤트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심지어 종교까지 이벤트를 중요시한다. 보여주기 위한 행사에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보이는 것이 자신의 삶의 능력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실정이 이러하다보니 삶의 의미는 점점 사라져 가고, 의식만 남은 이벤트 중심의 사회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집회를 해도 보이기 위한 집회를 하고, 예배를 드려도 보이기 위한 예배에 전념한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고 살다보니,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에 투자한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각 같은 단단한 육체를 자랑하고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보이기 위한 운동이 과연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하여 좀 더 큰 차를 선호하며, 명품에 투자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와 명품의 정도가 나의 척도가 되는 듯이 치장에 전념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실상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역할을 할 터인데,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살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속사람이 건강한지, 나의 정신은 건강한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건강하고 튼튼한 조각 같은 몸뚱이만큼, 내 정신과 사고도 건강한지 말이다. 건강한 정신에서 삶의 방향을 정하고 아이스 버킷 챌린지와 같은 의미 있는 의식을 수행한다면, 이 사회는 건강해지리라 믿는다. /이길용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오피니언
이길용
2014-09-23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