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자성참회 그리고 무한 희망

올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마음으로 화성시에 있는 31운동 유적지인 제암리를 다녀왔다.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발안 지역민들과 31운동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석호필, 1889~1970)를 생각했다. 그 분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주체적 자존의 정신을 다짐하였다. 근래에 건설된 향남신도시 지역은 정조대왕의 꿈이 깃든 고장으로서 제암리 정신을 이어받아 자존심 있는 문화도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많은 제약과 어려움 속에서도, 제암리 운동에 관련한 여러 참혹했던 사실들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 분은 봉사와 나눔을 실천했던 분이고 지금은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계신다. 특별히 한국을 사랑하셨던 분이다. 화성시에서는 문화재청의 동의를 받아 제암리에 박사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마음 속에 이미 박사의 동상을 세우고 돌아왔다. 그 분과 한 뜻이 되는 것이 진정 참다운 동상을 세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동행한 분들이 나의 얘기를 듣더니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제암리를 다녀와서 참선 정진하는 구들방에 장작불을 넉넉히 때고 편히 누워 초발심의 수행정진을 되새겨 본다. 구들방의 따뜻한 온기가 심신에 가득 전해온다. 참으로 온전히 환희롭다. 우리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의 지혜와 공덕에 하나 되어 그 큰 가피를 가득 받으면 우리의 생명도 이와 같이 편안하고 환희로워 진다. 우리 관세음보살은 일체중생이 바로 내 몸과 같다고 하시는, 둘이 없는 불이(不二)의 대자비의 화현이요 진리적 모성애의 화신이시다. 나는 더하여 올 한 해를 보내는 성찰의 뜻으로 불교수행의 가르침을 다시 깊이 사유해 본다. 먼저 일중일체다중일(一 中一切多中一)이고,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하나 속에 일체가 들어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들어 있으며, 한 티끌 속에 무한 우주가 들어 있다는 물리적이며 존재론적인 진리철학이다. 작은 미시적 존재와 무한히 광대한 우주 존재와의 완전한 조화와 합일의 가르침이다. 또한 현재의 무상한 현상으로써의 존재 속에서도 참 본래의 성품을 깨달으면 영원한 해탈을 얻고 바로 그 자리가 열반정토라고 하는 금강경과 법화경의 가르침이다. 무상한 현실과 영원한 해탈의 초월적 진리가 한량없이 미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참선수행의 대승의 가르침으로써 정진하여 자성불을 확철하게 깨달으면 취지무궁(取之無窮), 용지불갈(用之不竭)의 경지가 된다. 취해도 취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써도 다함이 없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애자재한 대용심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집착되거나 고정된 생각없이 본래의 진리성으로 그 마음을 쓰는 것이다. 본래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고 쓰는 것이다 우리 발보리심한 불자들은 이런 가르침과 수행방향으로 가야만 한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일체의 어리석음을 보면 모두 내 마음의 반영이고 그림자이니 스스로 깊은 자성참회를 하고 이 현재의 순간에 무한한 꿈과 희망을 담아 우리의 본성에 있는 성불생명을 향하여 진실하게 가야만 한다. 한 순간 한 순간 초발심을 되새기며 쉼 없이 그렇게 가야만 한다. 이 것은 수고스런 인욕이 아니라 도리어 환희 충만한 큰 행복이다. 다함없는 성불의 공덕이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 불자들은 이렇게 관세음보살과 하나가 되자. 남겨두는 이 없고 둘도 없는 그 완전한 부처님의 자비와 공덕심으로 이 한 해를 보내고 또 새해를 맞이하자. 우리 불자들은 한 생각 속에 영원한 해탈을 머금고 마음과 몸으로 정성 다한 수행의 땀을 내면서 뜻 깊게 한 해를 마무리 하자.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누가 이들의 친정 엄마가 되어주겠는가?

노동자들이 1988년 올림픽을 기준점으로 하여 유입되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결혼이주자들은 2002년에 월드컵을 기준으로 하여 유입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공감하듯이 2002년부터 우리나라는 많은 이주여성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결혼의 요소 중에 꼭 필요한 것이 부재한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를테면 사회학에서 말하는 결혼의 요소는 사랑과 서로간의 동의, 그리고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데, 그들의 결혼에는 이들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화의 차이도 있습니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A는 소통의 부재로 집을 나왔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혼을 하고 살아가야 할 그녀의 처지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참고적으로 필리핀 사람들은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결혼을 하면, 정식으로 재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혼녀라는 딱지가 평생을 붙어 다니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저의 권유에 그녀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신부님! 하인으로 살아갈 바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그렇습니다. 평등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행복한 결혼이 보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B는 매우 활발한 여성이고 정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그녀에게 남편에게 어떤 요리를 해주냐고 물었고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남편 생일에 필리핀 잡채요리(빤싯) 해주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화를 내면서 안 먹고 회사에 갔어요. 웃기지만 갈등의 요소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다름은 간격을 만들고 서로의 관계를 멀게 합니다. 이들을 돕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이들을 갈등요소를 줄이는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스스로 이들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고, 우리가 인류가족이라는 의식을 고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녀의 차별이나 인종의 차별, 남녀노소의 구분을 없애고 기득권을 버리고,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이주자들을 위한 요리교실과 문화교실을 운영하여 자연스럽게 한국문화를 알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진정성이 있는 결혼이 성립될 수 있도록 정부와 결혼중개업체들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글로벌 시대에서 우리는 시대를 역행할 수 없기에 국제결혼을 반대할 수는 없지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서로의 동의를 통한 가약을 맺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결혼이주자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충분한 노력을 정부와 종교, 남편 등 다양한 이들이 다방면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최병조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장

[삶과 종교] 고통 뒤에 있는 희망을 소망하며…

유명한 강철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 가운데 벽에는 낡은 커다란 그림 하나가 그의 일생 동안 걸려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거나,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은 아니었다. 그림 내용은 커다란 나룻배 하나와 배를 젓는 노가 썰물 때에 밀려서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는 것으로, 무척 절망스럽고 처절하게까지 보이는 그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가 씌어있었다고 한다. 어느 사람이 카네기에게 어째서 이 그림을 그렇게 사랑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가 청년 시절에 세일즈맨으로 이 집 저 집을 방문하며 물건을 팔았는데, 어느 노인 댁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 그림이 퍽 인상적이었고, 특히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는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28세 되던 해에 기어코 그 노인을 찾아가 용기를 내어 청했던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이 그림을 자기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드린 것이다. 노인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카네기는 이 그림을 일생 동안 소중하게 보관했고,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말을 그의 생활신조로 삼았다는 것이다. 닭과 독수리는 위험 앞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폭풍이 몰려오면 닭은 몸을 날개에 묻은 채 숨을 곳을 찾는다. 그러나 독수리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편다. 그리고 태풍에 몸을 싣고 유유히 날아올라 안전지대로 향한다.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사람도 두 유형으로 나뉜다. 고통스러운 일, 억울한 일, 괴로운 일이 닥치면 몸을 숨기고, 그저 아무 일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닭형 사람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담대하게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독수리형 사람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항상 독수리형 사람이다. 시련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의 인생 여정에는 고난의 가시밭길이 그치질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담대하게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 2014년 한 해는 참으로 끔찍한 기억들이 아롱지는 한 해였다. 안타까운 죽음과 터무니없는 사고가 많았고, 헛된 욕망으로 패망에 이르는 수많은 경고들을 보며 지나왔다. 참으로 다사다난이란 말이 실감이 되는 시대를 보낸 듯하다. 이제 그 끝에 다다랐는데 우리는 이 고통 속에서 무엇을 남겼을까? 고통의 얼룩 속에서 그렇게 주저앉아 있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잊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 곳에 붙들려있어서도 안될 것이다. 서양 속담에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전했다. 모진 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며 자란 나무는 좋은 목재가 된다. 고통을 디딤돌 삼아 전진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인 듯하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직면한 고통과 실패의 모진 바람 속에서 삶의 지혜를 배워, 두 번 다시는 그 고통과 실패에 직면하지 않기를 애써야 할 시기이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의 고통과 실패를 이겨낼 수 있는 독수리형의 사람이 되자. 우리에게는 살아온 2014년도 보다 더욱 중요한, 2015년도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내일의 태양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이 되도록, 오늘을 다잡아가자. 오늘 겪은 고통과 실패는 두 번 다시는 당하지 말자는 각오를 되새기며,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시기이다. 내일 내게 주실 하나님의 선물을 대망하며 오늘의 문제와 실수를 되짚고, 내일을 기대하며 마무리 하자. 내일에는 희망과 기쁨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삶과 종교] 문화재 환수와 한민족 미래가치 창조

며칠 전 보통리 저수지 산책로 인근에 있는 농연재(弄然齋)에서 차회(茶會)가 있었다. 농연재에는 조각 예술가 한 분이 예술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정조의 개혁과 효심에 대해 자주 담론을 나누는 교수님 한 분과 용주사에 계시는 사숙 스님, 그리고 지인 몇 분과 정성스레 준비한 공양을 나누고, 여러 가지 귀한 차도 함께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화재 환수와 미래가치 창조에 관해서였다. 나는 그동안 본연의 수행정진과 함께 역사문화예술 그리고 우리 민족의 철학적 가치를 탐구하고 사유해 왔다. 그리고 정조대왕의 후예를 육성하는 리더십교육을 해왔다. 또한 지역인근의 정치인들에게 오래 전부터 역사의식을 갖고 역사문화교육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다. 10여 년에 걸쳐 이러한 활동을 해오고 있던 터에 한 가지 큰 성과와 감동을 받는 일이 있었다. 10월 29일,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사단법인 문화재 찾기 한민족네트워크 창립식이 있었다. 여야 국회의원, 하정웅 수림문화재단이사장, 그리고 종교인들을 대표로 여러 전문가와 문화재를 사랑하는 분들이 모였다. 하정웅 선생은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와 예술품들을 고국과 아버지 고향에 기증한, 참으로 뜻이 훌륭한 분으로 문화재 환수운동에 보배로운 분이다. 이천시에서도 일본에 있는 5층석탑환수운동 관계자들이 참여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단체에서 일본과 미국에 있던 문화재를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큰 성과가 있었는데, 일본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미국에 있던 문정왕후어보 환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운동을 이제 더욱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연속성이 있도록 하기 위해 이 단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정계, 학계, 문화계, 종교계 인사들이 합심하여 전 세계 우리 한민족 동포들과 힘을 모아 문화재 환수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활동보다 한층 더 확장되고 발전된 모습을 갖춘 것이다. 이 운동은 다음세대 또 그 다음세대까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문화재는 그 민족의 역사이다. 그리고 역사는 곧 미래이다. 이 환수운동은 우리 민족의 주체성회복운동이기도 하고 미래를 밝게 해주는 희망의 공동체 운동이기도 하다. 나는 이 운동이 21세기에 우리가 문화강국으로 재도약하는 특별하고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임을 확신하다. 현재 우리사회와 민족은 역사문화운동과 통일운동이 아니면 어떠한 일로도 진정으로 화합을 이루고 단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환수운동에 해외동포의 참여는 이런 면에서 참으로 뜻 깊고 좋은 일이다. 나에게는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꼭 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염원이 있다. 바로 국내외 동포의 자녀들이 함께하는 한민족 역사문화 아카데미캠프를 여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문화와 미래가치를 함께 공부하고 글로벌리더십을 갖추게 하는 운동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한다. 진정으로 그렇다. 우리의 마음은 끝이 없고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것이다. 무한의 분열과 투쟁, 그리고 고통을 만들 수도 있고 무궁한 지혜와 발전, 그리고 창조를 이룰 수도 있다. 정조대왕은 창조와 개혁정신, 그리고 열린 마음을 갖춘 뛰어난 리더십을 우리역사에 남겼다. 우리는 그 정조대왕의 후예들이다. 이러한 운동을 정조대왕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정조대왕이 계시는 융건릉을 틈틈이 찾아 뜻을 다짐하는 일이 나에게는 아름다운 산책이요, 사유이며 지혜를 얻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또한 나와 모든 이들을 함께 이롭게 하는 보살행의 다짐이요, 뜻과 원력을 널리 회향하고자 하는 보현행원의 실천이기도 하다. 푸른 가을하늘이 더욱 뜻깊게 나의 가슴깊이 스며든다.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누가 이들을 소통하게 하겠는가?

이주노동자들은 가족을 떠났다는 이유로 마음의 갈등을 그리고 휴일이 보장되지 못하는 문제로 인한 고용주와의 갈등을 겪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바로 소통을 하고 싶어도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을 노동력으로 보기에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만을 원하는 사장님들의 의식에도 원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배우려고 하지 않는 그래서 스스로를 노예화시키는 이주노동자의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산 원곡동이 본당의 주임신부로 제직 중에 이들을 위해서 2001년부터 언어소통에 도움이 되고자 한국어 교실을 운영하였습니다. 제 자신부터 외국 생활을 하면서 많은 소통의 어려움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현지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가끔은 어린이 취급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언어장애인이 되는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도와주자는 생각으로 한국어 교실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매번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50명~100명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현격하게 출석하는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이들이 출석률이 저조한가를 봉사자들과 함께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원인분석을 해보니, 근본적인 원인은 노동환경과 구조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업을 보면, 모두가 공감하듯이 우리나라의 기업은 일감이 주어지면 주저함이 없이 시간 안에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주노동자들은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 받지 못한 채, 주어진 일감을 야근과 주일근무를 통해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주노동자들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도무지 시간을 내어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의 비전을 위해서 노동자는 한국말을 배워야 하고, 기업도 한국말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어떤 노동자가 산재를 당했다고 합니다. 사연인 즉 켜와 꺼의 차이를 숙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공장장이 그 노동자에게 꺼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노동자는 켜라는 말로 알아들어 그 결과 손이 잘리는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의 상담소에는 무료진료소가 있습니다. 1998년도부터 운영해오고 있는데, 이주노동자들은 고된 일로 인하여 외상으로 인해 진료를 받는 이들이 많고, 또한 손이나 신체의 일부가 잘려 정형외과에 입원하는 환자가 많이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는 바로 소통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우선은 찾아가는 한국어 교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즉 노동자들이 모이기 쉬운 곳으로 교사를 파견하여 한국어를 돕도록 해야겠습니다. 둘째는 이주노동자들의 휴일을 보장해주고, 시간을 배려하여 그들이 한국어를 공부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들을 노동력으로 보지 말고 가족으로 보는 눈을 지녀, 이들을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머무는 나라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곳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동기부여로 한국말을 잘 배워 소통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최병조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장

[삶과 종교]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거짓말의 발명(The Invention of Lying) 또는 그곳에선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리키 저베이스와 매슈 로빈슨이 감독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있다. 인류가 거짓말을 하는 법을 터득하지 않은 사회라는 독특한 가상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전 재산이 300달러밖에 남지 않은 주인공은 아파트 월세를 갚지 못해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사를 가기 위해 돈을 인출하려던 주인공은 은행 시스템이 다운되어 은행 직원이 자신의 잔고가 얼마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은행 계좌에 800달러가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바로 다음에 은행 시스템이 복원되어 300달러 밖에 없다는 데이터가 나타나게 되지만, 은행 직원은 기계 측의 실수라고 생각하고 주인공에게 800달러를 준다. 그는 거짓말이라는 매력을 깨닫게 된다. 거짓말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인공의 거짓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거짓말로 카지노에서 큰 돈을 벌고, 거짓 시나리오로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살을 시도하는 이웃에게 희망을 주고, 집을 잃은 사람에게 돈을 주는 등 타인의 인생 역시 변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거짓말이 주는 희망과 위로가 진정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갈등한다. 이 영화의 끝 부분은 주인공의 결혼과 그와 같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를 낳는 것으로 맺는다. 이제 세상에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둘이 된 것이다. 실수 없는 완벽한 삶의 영역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은 아니다. 실수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실수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무형의 기생충이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실수를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다. 어떻게 하든 자신의 잘못을 미화하려 하고, 감추려 하고,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이렇게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며 도망가면서, 자신은 마치 실수와 잘못이 없는 사람인 듯한 얼굴로 살아간다. 내겐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네게 있는 문제들로 이 사회가 고통당하며, 우리가 아픔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실수와 잘못해 자유 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현대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세월호로부터 시작하여, 얼마 전 환풍구 사건까지. 그런데 우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만 하면 너의 문제를 끄집어내기에 바쁘다. 그 사고에서 나는 언제나 뒷전에 있다. 늘 너의 문제만 내 앞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에는 너의 실수와 잘못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는 너와 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우리로 하나 되어야 할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면한 사건 사고들도 너의 실수와 잘못이 아닌, 우리의 실수와 잘못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의 실수를 인정해 보자. 나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할 것이다. 나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자. 너의 실수와 잘못은 그의 몫이다. 그것에서부터 내일의 실수와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고통은 너로부터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되어 바로 잡아야 할 실수인 것이다. 나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새워가노라면 분명 우리의 미래 사회의 전망은 밝을 것이다.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삶과 종교] 정조대왕의 ‘효심’과 용주사 ‘부모은중경’

효(孝)의 본찰 용주사는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용주사라는 이름 자체에서도 정조대왕의 애틋한 효심을 읽을 수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궁인 용주사라는 이름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용주사의 대웅전 주위에는 여의주를 문 용들이 10수 이상 조성돼 있다. 조선불교통사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대왕과 보경대사의 만남은 용주사를 개창하기 전에 부모은중경을 매개로 이뤄졌다고 한다. 정조대왕은 본래 성리학에 밝은 대유학자인데, 보경대사로부터 불설부모은중경이라는 책을 받아 크게 감촉받았다. 이 은중경에서의 효(孝)는 보은(報恩)이라는 개념이 중시된다. 지금까지 조선의삼강행실도 등에서 강조하는 효는 아래로부터위로 향하는 효를 강조한다. 그러나 은중경에서의 이 보은은 필연적으로 쌍방적, 상호적 성격을띠고 있다. 보(報)가 있기 전에 반드시 은(恩)이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恩)이란 위로부터 아래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무량한 은혜이다. 따라서 부모은중경의 훌륭한 의미는 관습적으로 강요하는 복종의 효의 윤리를, 크고 넓은 자비의 윤리로 바꾸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동안의 효의 대상이 모두 아버지 중심이었음에 반해 이 은중경에서는 어머니의 무한한 은혜에 대한 효가 강조되어 있다.부처님께서 수많은 대중들과 함께 구도수행을하시다가 한 무더기의 뼈 무덤을 보고 오체투지하여 절을 올린다. 이에 놀란 아난존자는 부처님이야 말로 삼계의 큰 스승이요, 중생의 자비로운 아버지로서 모든 사람들이 귀의하는 큰 스승이온데 어찌하여 저 뼈 무덤에 절을 하시느냐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저 마른 뼈들이 전생의 나의 부모들이 아니라고 어찌 말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신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아기를 가진 후 고생하시는모습을 설하시는 것이다.정조 때의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은 부모은중경을 읽고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힌다. 은중경을 읽기 시작하여 채 반도 나가기 전에 감격하여 눈물이 저절로 가득하게 되었다. 부모의 은혜가 중함을 설파하였는데, 그 묘사가 너무도 진솔하고 간절하였다. 은중경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진귀하게 여겨 아끼고 애호하고 있다.그동안 강조되어 온 아버지에 대한 효의 감정은 위압적이고 권위적인데 반해 은중경에서의 어머니에 대한 효는 자연적이고 감성적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는 부드럽고 자연적인 감성이어서그냥 스스로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은중경의 특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은중경을 규장각의 주자소에서 목판으로 만들어 용주사에 보관하였고 책으로 찍어내어 전국에 보급하였다. 용주사 은중경은 변상도의 그림이 워낙 섬세하고 탁월하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은중경은 정조대왕의 특별한 후원에 힘입어 조선말기에까지 다양한 판본이 유통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부모와 자식 간의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제 21세기의 지금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효의개념과 철학을 새롭게 정립해 가야할 때이다. 생활철학으로써, 삶의 가치로써 또 장구한 노년의 인생문제해결을 위해서도 새로운 효의 개념이 정립되어야 하겠다. 세계사에 빛날 진정한 한류의 근원으로써 우리민족의 독특하고 뛰어난 효의 정신을 되살리고 무한히 실천방안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주체성 있는 문화국가의 토대를 분명 우리는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이주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

저는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이들에게 몇 가지의 질문을 하곤 합니다. 이들이 한국에 왜 들어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한국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그리고 과연 그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고 돌아가는 지? 등등.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은 큰 매력을 지닌 나라입니다. 우선 단편적으로 보면 동남아의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없으며, 일을 해도 상대적으로 임금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임금은 택시기사들이 20여만원 정도를 받고 있고, 생활비는 4인 가족 기준 한달 30만원으로 빠듯한 생활이고, 다수가 생활고를 겪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기에 치안이 안정되고, 임금이 5배나 되는 우리나라에 와서 새로운 미래의 꿈을 꾸고 살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의 희생을 감수하고 입국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갈등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방인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보고 싶은 가족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 무엇보다도 지지해줄 사람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들은 참으로 많은 정서적인 갈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어떤 이주노동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였으며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옮기겠다고 찾아왔고, 원인을 물어본 즉 사장님이 주일에도 일을 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주일에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했더니, 옮기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장을 설득하여 고용 알선장을 받아오게 해서 그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었고, 그는 행복하게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노동자입니다. 그는 5년 고용허가제의 일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이 되었을 때 갑자기 찾아와서 자기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고, 이에 저와 수녀님과 함께 가족이 있는 품으로 돌아가라고 설득을 하던 중 그에게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난 것이었습니다. 수습을 하면서 그의 사정을 들어보니, 그의 아내가 그가 보낸 재산을 탕진해 5년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간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를 돌보아주고 그의 미래의 행복을 빌며 놓아주었습니다. 이방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알고 있듯이, 그리고 경험이 없이도 짐작되듯이 이주노동자들은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원인 중에 하나는 적잖은 사장들이 이주노동자들을 노동력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의 정서적인 삶의 욕구를 무시하고 강요해서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종교의 자유도 말살하는 당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하기에 그들의 원초적인 욕구인 찬양에 대한 갈망도 묵살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일인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가족과의 분리입니다. 가족은 함께 살아갈 의무를 지닌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러했듯이 사우디와 독일로 가족을 위한 이민으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우리는 이들을 같은 인류가족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시간, 종교를 위한 시간 할애, 쉬는 시간과 휴일을 제공하는 등의 실질적인 필요에 대응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의미와 가치에의 욕구에 더욱 열린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최병조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장

[삶과 종교] 의식(儀式)과 의미(意味)

아이스 버킷 챌린지 혹은 ALS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사회 운동으로,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른바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 사람이 머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2014년 여름에 시작된 이 운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급격히 퍼져나가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이 운동의 방식은 참가자가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시작된다. 참가자는 우선 동영상을 통해 이 도전을 받을 세 명의 사람을 지목하고, 24시간 내에 이 도전을 받아 얼음물을 뒤집어쓰던지, 100달러를 미국 ALS 협회에 기부하든지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그 후 참가자가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간단한 방식이다. 그러나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것이 하나의 사회 유행으로 퍼져, 기부를 하면서도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사람들도 상당수이다. 덕분에 필자에게도 두 번이나 얼음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기회가 온 것을 보면, 지구촌 모두에게 사회 유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횟수가 더해가고 참가인원이 늘어가면서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점점 잊혀져가고, 하나의 이벤트가 되어가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가짜 얼음물 사건, 급기야는 도를 넘은 누드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유투브를 통하여 회자되기까지 한다.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사라지고, 단지 얼음물만 뒤집어쓰는 이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이스 버킷 챌린지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자기 과시의 수단과 재미로 전락하고 있어 마음이 씁쓸하다. 이런 시대에 우리 사회가 의미를 회복하기를 희망한다.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얼마나, 또는 어떠한 것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과연 어떤 마음과 정신 속에서 이루어졌느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가운 얼음물을 몇 번을 어떻게 뒤집어썼는냐가 아니라, 진정한 고통에 동참하며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행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벤트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심지어 종교까지 이벤트를 중요시한다. 보여주기 위한 행사에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보이는 것이 자신의 삶의 능력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실정이 이러하다보니 삶의 의미는 점점 사라져 가고, 의식만 남은 이벤트 중심의 사회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집회를 해도 보이기 위한 집회를 하고, 예배를 드려도 보이기 위한 예배에 전념한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고 살다보니,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에 투자한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각 같은 단단한 육체를 자랑하고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보이기 위한 운동이 과연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하여 좀 더 큰 차를 선호하며, 명품에 투자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와 명품의 정도가 나의 척도가 되는 듯이 치장에 전념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실상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역할을 할 터인데,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살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속사람이 건강한지, 나의 정신은 건강한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건강하고 튼튼한 조각 같은 몸뚱이만큼, 내 정신과 사고도 건강한지 말이다. 건강한 정신에서 삶의 방향을 정하고 아이스 버킷 챌린지와 같은 의미 있는 의식을 수행한다면, 이 사회는 건강해지리라 믿는다. /이길용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삶과 종교] 21세기 정조의 꿈

용주사의 조실로 모시고 있는 전강 대선사께서는 법문 중에 우리 인간은 전부가 이별뿐이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관계는 이별을 전제로 만나게 된다. 명예와 재산과 인간의 오욕도 역시 언젠가는 우리로 부터 떠나고 만다. 그러한 것을 우리는 무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무상 속에서 몸을 받아서 태어나고 무상을 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사를 해탈하는 법, 참 나를 찾는 법을 설해 주셨다. 이런 진리의 법을 설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무상 속에 살다가 완전히 무상하게 마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우리 불자들은 숙세(宿世)의 인연과 공덕이 있어서 금생에 이렇게 진리의 해탈법을 만나 영원한 행복과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전에 나는 융건릉 앞, 독산성에 있는 도량에서 몇 년간 수행 정진한 인연이 있었다. 독산성은 사도세자가 유숙했던 곳이기에 정조에게도 매우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사도세자와 정조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사도세자는 1760년 온양행차시에 수원부 읍치에 이르러 읍치의 객사에서 머물지 않고 임진왜란 당시의 승전지인 독산성 운주당에서 유숙하였다. 왜 그랬을까? 사도세자는 자주적 국방강화와 북벌을 주장했던 효종을 존숭하였고 효종처럼 군복을 즐겨 입고 다녔다. 독산성은 외세에 대한 자주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는 곳이며 세마작전으로 왜군을 물리친 곳이기에 유숙하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효종이 사용하던 청룡도를 자유롭게 쏠 정도로 뛰어난 무예실력이 있었다. 그래서 세자 책봉 시에는 세자가 효종을 닮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인연의 일은 참으로 묘하다. 풍수의 대가이기도 했던 고산 윤선도가 화산에 효종의 릉을 모시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후에 사도세자가 효종을 모시려던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에게 제왕학을 제대로 교육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영조의 의도는 실패했고 관심은 세손인 정조에게로 향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정조는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훌륭한 국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영조는 세손만이 삼백년 사직의 희망이라고 칭찬하였고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조선 제일의 개혁군주와 효의 군주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이들을 품어 안고 공정한 사회로 나가려 했던 포부가 큰 군주였다. 정조는 맹자의 사상도 깊이 받아들였다. 맹자는 공손추장에서 공자의 제자 자로는 타인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잘 못을 타일러 주면 너무도 기뻐하였다. 하나라를 개창한 우임금은 남에게서 선한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엎드려 절하여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순임금은 이들보다도 더 훌륭한 덕성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 혼자 실천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실천하였다. 타인이 나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면 그 훌륭한 점을 사심없이 따랐으며 타인의 훌륭함을 나의 훌륭함으로 만드는 것을 인생의 가장 고귀한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맹자의 뜻은 참으로 웅장하고 진실하다고 하겠다. 또한 소박하고 크게 열린 마음이다. 우리 부처님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부처님 성품의 생명으로 본성의 가치를 존중한다. 일체의 생명에 무한의 존중과 화해를 이루며, 그리고 우리에게 현상 속의 주인인 영원한 실상 생명을 바르게 깨달아 성불하라고 설하신다. 우리나라의 각 분야의 모든 지도자들은 이런 가르침을 본받아 국민 모두를 스스로와 똑 같이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21세기 정조의 꿈을 이루는 것이 될 것이다. 인해 스님 진불선원 주지

[삶과 종교] 저는 이주사목을 하는 천주교 신부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주사목을 하는 천주교 신부입니다. 저는 가끔 모호한 질문을 듣습니다. 이주사목이 무엇이지요? 이주 만 사목하나요? 왜 곱상한? 신부님께서 그러한 험한 일을 하나요? 등등입니다. 저는 오늘 간단하게 제가 하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하여 늘어나고 있는 이주민들을 사목하는 천주교 신부입니다. 우선, 저는 그들을 위해 9개의 지역 공동체(수원, 안양, 광주, 발안, 평택, 안산, 시흥, 이천)와 언어별 공동체(베트남)를 세워 현지 신부님들과 함께 이주민들을 위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7개의 상담소와 10쉼터와 다문화센터, 어린이 집 등의 시설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부임했을 때, 저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많은 이주민들이 저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줄 수 가 없었습니다. 제가 줄 수 있는 것은 미사를 통한 주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일인데, 아픈 자가 와서 병원을 그리고 직장을 잃은 이들이 와서 쉼터와 직장을 얻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심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것을 하자고 말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위안이 되는 말입니다.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으니 주님과 이웃의 도움을 얻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적을 체험하고 살아갑니다.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 가능케 됩니다. 지난 2006년 어떤 노동자부부가 어린아이와 함께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보이기에 단순히 구개순파열(언챙이)로 단순하게 수술을 도우면 되는 줄 알고, 도움을 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여러 어려움 경로를 거쳐 치료를 돕게 되었습니다. 과정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을 2천500만원이나 되는 수술비였는데, 저의 도움을 구하는 의사와 부모의 전화를 받고 밤새 기도하면서 주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에 들려주신 음성은 재가 생명의 주인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날 신문사에 사연을 보내고, 바로 다음날 놀랍게도 1천만원을 받고, 여러 모금 경로를 거쳐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와서 의료적인 도움을 청했는데, 유방암에 걸린 사람, 골수암에 걸린 사람 등등 많은 이들이 찾아 왔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청했고, 그 결과 모두가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얻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참으로 다행인 것이 병중에 있는 어려운 이주민들을 돌보는 다양한 기관과 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들을 처지를 적은 소견서를 가톨릭 이주민센터에서 적어 환자를 보내면, 가톨릭병원에서 그들을 돌보아 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드릴 일입니다. 또한 놀라운 것은 교구의 시설이 점차적으로 늘어나 현 30여 개의 시설이 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섭리의 놀라움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관심이라는 키워드입니다. 무심이 아닌 관심이 바로 기적을 일으키는 길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리의 마음을 오늘도 기적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동참이라는 키워드입니다. 우리의 작은 동참이 물방울이 강물을 이루듯이 새로운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인과 이웃을 위한 열린 마음을 바로 오늘의 새로운 기적을 가능하게 합니다. 작은 것이 위대하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오늘도 동참을 위한 걸음을 옮겨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박애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사람들만을 좋아하고 나누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보편적인 사랑의 실천을 바로 우리와 상관이 없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지나친 개인주의과 극단적인 싸이코 패스가 출범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인류애라는 보편적인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길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최병조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장

[삶과 종교]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불교에서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모든 생명존재가 본래 부처님과 똑 같은 무량한 지혜와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겉모습은 스스로의 업에 의해 나타난 잠시의 모습이고 참 주인은 불성생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 보고 깨달아 영원한 해탈을 얻으라는 것이다. 작은 풀 한 포기에서 광대무량한 대우주세계에 이 진리성이 가득 차 있다고 설한 경전이 「법화경」이다. 이 법화경의 핵심적인 특징은 위대한 포용과 긍정, 그리고 찬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부처님은 진리광명의 영원한 성불생명이시다. 무량억겁 이전에 성불하셨고, 그 수명과 광명의 위신력은 가히 측량할 수 없으며 무량하시다. 현재도 시방세계에 상주 불멸하신다. 불교에서의 부처님에 대한 변치 않는 깊은 믿음은 여기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영원한 해탈을 구하고자 정진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불자들은 나를 깨닫고 모든 이들을 깨닫게 하고 이 세계가 깨달음으로 가득하도록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원하건대 나와 일체중생이 다 함께 성불 하여 지이다. 하는 발원의 삶으로 불자들은 미혹을 소멸하고 공덕을 닦아 스스로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불자들은 「여래(부처님)와 같은 사람」이 되고 「여래가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실천해 가는 것이다. 이 법화경의 뜻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대명사는 「상불경보살」이시다. 보는 사람마다 당신들은 훌륭한 수행을 통하여 모두 완전한 해탈자인 깨달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경멸하지 않고 불성을 존중하고 찬탄해 주는 수행을 하셨다. 상불경보살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다. 이런 행원을 실천하면 누구나 상불경보살인 것이다. 여래의 수명이 무량한 것처럼 우리 불자들의 보리심을 닦는 수행은 다함이 없다고 하겠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훌륭한 겸손과 소탈함으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여 감동의 울림을 줬다. 세계적으로 훌륭한 종교지도자의 또 한 분은 달라이라마이시다. 한 평생의 인욕정진으로 보리심의 수행을 하셨고 인류 평화와 문화적 주체성을 역설하시는 분이다. 많은 세계의 지성들이 존경하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크게 의미 있는 분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리더십으로 세계평화와 구호를 위한 유엔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인으로서의 서정적이고 조화로운 심성으로 새로운 리더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세분의 심성과 리더십은 새로운 감동을 준다, 과거의 거칠고 험했던 강한 권력추구의 리더십에서 새로운 시대, 미래시대 리더십의 한 발전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면 우리의 본성은 무한의 생명이고 무한의 창조를 이룰 수 있고 무한의 변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우리국민들도 본래 무한의 발전과 창조를 이룰 수 있다. 맹자는 「그 마음을 다하는 이는(盡心者) 자기의 본래 성性을 알 수 있다.」 「구하면 얻어지고 방치하면 사라진다」고 하였다. 21세기 문화주체성의 시대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지켜왔다. 이제 우리는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 맞는 훌륭한 대한민국의 주체적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겠다. 정조대왕의 열린 마음, 창조정신을 계승하는 정조의 후예를 육성하여 우리나라에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달라이라마처럼, 그리고 반기문 사무총장처럼 세계인을 감동시킬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하늘과 이땅은 말없이 이 위대한 대 한국인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인 해 스님 용주사 문화원장

[삶과 종교] 교황 프란치스코

평화의 사도로 일컫어 지는 교황은 온 인류의 아버지로서 세상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시다. 265번째 교황이신 베네딕도 16세께서 건강상의 이유로 교황의 직무를 내려놓으시며 266대 교황으로 남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의 교구장이셨던 베르골리오 추기경께서 선출되시면서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새 이름으로 가지셨다. 종신제인 교황직을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 나시면서 우리는 같은 시대에 두 분의 교황을 보게 되는 역사적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직 교황인 베네딕도 16세를 명예 교황이라고 칭하며 예우하고 남미 최초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다. 고(故)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전직 교황이신 요한23세 교황과 바오로6세 교황의 뜻을 받들고자 두 분의 이름을 따서 요한 바오로라는 이름을 가지셨고, 다음 교황이신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로서 이름을 날리시던 라칭거 추기경은 이름을 베네딕도로 정하신 것은 가톨릭교회의 원칙과 정통을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으셨던 것이다. 원래 베네딕도 성인(480-547)은 유럽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분으로 수도회의 기본 규칙서를 마련하시고 엄격한 생활과 규칙적인 기도를 바탕으로 수도생활의 기초를 다지신 분이시다. 이런 이름을 선택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며 기본에 충실하신 분이셨다. 그런데 266대 교황으로 뽑히신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역대 어느 교황도 쓰지 않으셨던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선택하셨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시기 위해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S.Francesco)의 이름을 택하셨는가? 성 프란치스코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듯이 13세기 초 청빈한 삶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신으로 평생을 살았던 성인이시다. 교황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과 청빈함을 본받아 교회의 기본 정신을 깨우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교황궁에 머무르지 않으시며 게스트 하우스인 마르타의 집에 머무르시고 지난 78세 생신 때는 로마 근교의 노숙자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검소한 차림과 격식없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며 이시대의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복음의 기쁨이라는 책을 통해 역설하고 계신다. 검소하고 겸손하시며 몸소 이웃사랑을 실천하시는 교황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 들고 있다. 이런 훌륭한 평화의 사도이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우리나라에 오신다. 나는 가톨릭 교회의 사제로서 같은 시대에 이런 훌륭한 교황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휴가로 내어 놓은 일정을 뒤로하고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아픔을 치유하시기 위해 교황께서 8월 14일에서 18일까지 방한 하신다. 교황님이 즉위 이후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아시아 대륙에 수많은 지역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제일 먼저 방문하심은 한국교회에 대한 큰 관심과 배려가 전제되어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굳이 한국교회가 아시아의 다른 나라 교회보다 특별한 자격을 갖추었거나 많은 복음적 열매를 맺었기 때문은 아니다. 마치 자녀가 여럿인 부모에게는 같은 자녀라도 어려움에 처한 자녀나 위기를 겪는 자녀에게 먼저 마음이 가는 것처럼, 한국교회가 걸어온 고난의 역사, 그리고 오늘의 한국이 세계적 분쟁과 갈등의 중심에 있는 지정학적 표징과 상황이 교황께서 더 마음 쓰시는 이유일 것이다. 교황께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어루만져 주실 것이고 세월호 참사로 아파하는 가족들을 위로하시며 분단의 아픔으로 신음하는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다. 또한 급변하는 한, 미, 일, 중의 정세속에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고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Viva Papa! Viva Papa! 송영오 신부ㆍ천주교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소장

[삶과 종교] 리더의 진심은 기적을 낳는다

여름방학과 휴가철을 맞은 우리나라의 극장가는 최근 사극열풍에 휩싸였다. 영화 군도와 명량이 그 열풍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얼핏 보면 사극이라는 장르의 공통점 외에는 특별한 유사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들의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도 다를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신분 또한 하늘과 땅 차이다. 한쪽은 백정 출신의 의적 두목이고, 한쪽은 우리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위인들 중에 한 분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는 한 가지 주제를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라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리더십이다. 비록 국가의 존망이 달린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주인공들이 죽음의 벼랑 끝에 내몰린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진심만은 사실상 동일하다. 그래서 영화 명량 속의 이순신 장군은 부질없는 전투를 포기하라고 간청하는 그의 아들에게 충(忠)이라는 유교의 핵심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따라야 하고, 그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에게 있다. 최근 우리사회를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던 다양한 사건사고들의 핵심문제는 바로 리더십의 부재였다. 직책상의 리더는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막상 문제가 터졌을 때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낸 리더는 많지 않았다. 단순히 재정, 인력, 장비 등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두 영화의 기록적인 흥행에는 우리사회의 이러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 험난한 시대를 앞장 서서 뚫고 나아갈 리더들을 찾고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사회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자천타천 리더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언론들이 앞장 서서 해당인물들에게 국민OO, 멘토 등의 수식어를 붙여주며 우리사회의 리더가 되어 보라고 부추긴다. 한마디로 우리는 리더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리더들 중에 정작 국민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리더, 그래서 국민들이 믿고 따르기를 원하는 리더는 많지 않다. 즉 우리는 리더의 가뭄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 리더의 홍수와 가뭄의 공존. 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가? 우리사회 리더들의 스펙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인가? 아니다. 외적 스펙에 있어서는, 현재 우리사회의 리더들이 과거의 리더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리더들에게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사회의 리더들이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진심이 심각하게 의심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능한 리더라도 항상 성공만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처참한 실패와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진심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한, 그 리더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오히려 현재의 실패는 미래의 성공을 위한 훌륭한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 역사 중에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왕이 되기 전뿐만 아니라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심각한 위기들을 맞이하곤 했다. 전임자 사울 왕의 시기와 박해를 피해 오랜 시간 황량한 들판을 떠돌아다녀야만 했고, 자신의 친아들에게 쫓겨 다니며 온갖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윗 왕을 따르던 무리들은 그의 진심을 변함없이 믿어주었고, 마침내 다윗 왕은 그들과 함께 또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다. 12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구를 대파시킨 명량대첩의 기적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리더는 진심으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따르는 자들은 리더의 진심을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보자. 김학중 안산 꿈의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

우리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한 브라만의 질문에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고 세상에서 자랐지만 세상을 극복하였으며 세상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는다. 초기 경전에서 나오는 부처님의 뜻은 이렇다. 완전히 깨달은 분이며, 지혜와 공덕행을 모두 다 갖춘 분이다. 그 분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을 그 의미와 표현을 갖추어서 설(說)하신다. 그 분은 완전하며, 더 뛰어난 지혜와 행(行)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무한하고 완전한 생명 그리고 영원하고 진리적인 성불생명이라고 하겠다. 이 부처님과 우리가 근본생명으로는 하나다.는 가르침이 불교의 핵심이다. 이것을 자성불, 진여불성이라고 한다. 우리 불자들은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 수행하여 완전한 행복세계인 성불(成佛)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무한한 희망과 용기로 발전과 향상을 위해 정진하는 것이다. 근본 바로 서는 나라 만들어야 용주사에서는 얼마 전에 생명존중 사회를 지향하는 뜻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제가 있었다. 경기종교인평화회의와 용주사 그리고 정조대왕문화진흥원이 주관하였다. 종교평화와 상호존중의 가치로 훌륭한 분들이 함께 뜻을 모아서 소박하지만 아름답고 의미 있는 추모제를 봉행하였다. 이번 추모제를 준비하며 안산에 있는 합동분향소를 여러 번 다녀왔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정조대왕의 후예들이 많이 나와서 근본이 바로 서는 문화복지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느꼈다. 안산은 특히 성호 이익(1681~1763) 선생의 고장이다. 그는 영조대의 남인 실학자이며 또한 철학자이다. 제자인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 등은 실용적 가치를 추구한 분들이다. 성호선생도 현실주의적이며 자주적인 학문연구와 세계관을 구축하였다. 정조대왕시절의 학자요 재상인 채제공은 경기감사 시절에 첨성리에 있는 선생을 방문하고는 처마가 낮은 왜소한 집에 정좌하고 계시는 모습은 눈빛이 날카로워 사람을 꿰뚫는 것 같았고 경전을 논하는데 고금을 두루 통하였다.고 하였다. 성호선생은 이처럼 농촌에 은거하며 어려운 살림을 살았고 직접 양봉하고 닭을 기르며 현실에 충실한 분이었다. 안산이 산업의 도시가 되고 이공계열에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한양대학교가 있는 것도 이런 실학 정신의 뿌리가 나타나고 이어진 것이다. 경기도에는 네 개의 큰 사상과 철학의 산이 있다. 정조대왕과 반계, 성호, 다산의 산이다. 이 큰 네 산의 정기를 받아 경기도에 많은 훌륭한 정조의 후예들이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성호선생은 논속사론(論束史論)에서 자아(自我)의 자각을 통한 민족주체성을 외쳤다.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이고 창의적으로 이끌어가는 그런 훌륭한 정조의 후예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진흥원에서는 작년에 처음으로 정조후예상을 실시하였다. 정조대왕 후예 많이 나타나길 기원 올 가을에는 경기도교육청과 함께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 3명씩을 선발할 예정이다. 정조대왕과 실학정신, 성호와 다산, 수학의 천재인 금대 이가환, 그리고 단원 김홍도를 계승하는 의미로 효행 리더십부문, 창의과학부문, 예술부문의 수상자를 선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경기도 인재육성의 한 소중한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안산의 슬픔이 성호의 꿈으로 다시 일어서고 과학 미래도시로 새롭게 발전하기를 바란다. 더하여 다문화사회를 포함한 문화융합도시로 실학정신을 계승하는 훌륭한 도시가 되기를 기원한다. 또한 우리 경기도도 정조대왕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분야에서 보다 더 역동적이고 개혁적이며 창조적 융합을 이루는 지자체가 되기를 염원한다. 정조대왕이 마음에 그리던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의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인 해 스님 용주사 문화원장

[삶과 종교] 봉사자 -국민의 일꾼-

봉사자(Servant)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Servus(종)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로 주인을 섬기는 종(下人)의 자세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온 단어가 서비스(Service) 라는 말로 손님에게 조건 없이 제공되는 무상행위를 말한다. 결국 봉사란 상대방을 주인처럼 떠받드는 행위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종처럼 겸손한 행위를 말한다. 가톨릭 교회는 세계의 모든 주교(主敎)들을 하느님의 종이라고 칭하고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한국말로 번역할 때 교황이라고 해야 할지 교종이라고 해야 할지 의견들이 분분(紛紛)하였다. 비정상이 당연해진 우리 사회 주님의 일꾼인 성직자와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착한 목자요,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참된 봉사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국민의 봉사자인 일꾼들을 가리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무총리후보자나 장관후보자가 국회 청문회에 나가 보지도 못하고 윤리적인 문제와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 가치관과 불투명한 재산증식등으로 자진 사퇴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아들 병역문제, 논문표절, 전관예우, 역사인식등 국민정서간의 괴리들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정말 우리나라 엘리트층 중에는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고, 아들은 군대에 보내고,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돈을 벌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인물이 없는 것일까? 과거 김대중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발탁되었던 장상 이화여대총장이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였는데, 지금은 위장전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관행처럼 이해하고 있고, 부동산투기나 전관예우 정도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처럼 생각하는 현실에서 청렴결백한 국민의 일꾼을 찾기란 참으로 쉽지가 않다.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봉사자로서 일꾼이 되기 위해 좋은 평판과 덕을 갖춘 일꾼이어야 하는데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갈수록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극성을 부리면서 그런 일꾼을 찾기란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사회가 그만큼 도덕적 해이(解弛)속에 정상적인 방법보다 비정상적인 관행으로 썩고 병들어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국민을 주인처럼 생각해야 파고들면 들수록 연결 고리처럼 비슷하게 얽겨져 있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의 자화상(自畵像)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같이 부정부패속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 지도자들이 새롭게 뽑겠다는 그들 역시 초록은 동색이 아닐까 싶고 그 나물에 그 밥 같아 별로 기대가 없다. 공자께서는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 하셨으니 무엇보다 사람은 인(仁)을 바탕으로 자신을 닦고 화목한 가정을 이룬 뒤에 나랏일을 할수 있음을 말씀하시듯이, 어찌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 국민들을 위한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있겠는가? 국민을 위한 봉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첫째, 올바른 가치관과 가정에 충실하고 정직하고 온유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녀들에게 존경과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는 일꾼이어야 한다. 둘째,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궁휼이 여길줄 아는 사람으로 덕(德)이 있이 있어야 하며 좋은 평판을 가지 사람으로 절제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에 입맛에 맞는 일꾼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참된 봉사자가 나타나길 희망한다. 송영오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소장

[삶과 종교] 신뢰가 참 이익을 낳는다

지난 7월 3일부터 4일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인물은 국내의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 하다못해 브라질 월드컵의 축구스타도 아니었다. 바로 1박2일 동안 한국을 방문했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내외였다. 전통적인 혈맹 북한을 제치고 대한민국부터 찾은 중국 최고지도자의 파격행보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공개된 중국 유명 여배우와 한국 영화감독의 결혼발표가 맞물리며 대한민국과 중국의 전략적 협력관계는 국내외 언론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실리중심 사회, 갈등ㆍ분노만 남아 게다가 시 주석의 방한시점이 매우 절묘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극단적 우경화와 북한과의 돌발적 협력관계 추진으로 한-미-일 공조체제가 흔들리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계속되는 대형 사건사고들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브라질 월드컵 특수까지 무산되며 국민정서가 바닥을 치는 시점이었다. 바로 이때 별에서 온 그대처럼 찾아온 시 주석 내외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 주석의 한국방문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에게 상당히 큰 숙제를 남겼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와 중국의 밀월관계는 미국-대한민국-일본 vs. 중국-북한-러시아라는 틀 속에서 유지되어 왔던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세력균형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동북아시아의 각 나라는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외교-군사적 계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신뢰가 아닌 실리에 따라 끊임없이 요동치게 되는, 즉 우방, 혈맹 등을 외치던 의리시대는 지나가고 각자의 이익을 냉철하게 계산하며 행동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주석이 한국 언론에게 전달한 특별기고문 風好正揚帆(순풍에 돛을 달자)에는 『논어』에 나오는 無信不立(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이라는 고사성어가 등장한다. 얄팍한 실리주의가 장기적인 상호협력 및 동반성장의 관계를 떠받치는 기초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실리를 추구하더라고 그 밑바닥에는 굳건한 신뢰가 자리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같은 글에서 호혜협력을 견지하고 이익의 융합을 강화하여 이익의 파이를 더 크게 만들자고 주장한 것도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즉 굳은 신뢰가 진정한 실리를 만드는 것이다. 신뢰는 한번 내 편은 영원한 내 편 식의 맹목적인 의리 지키기가 아니다. 그런 의리의 결과는 편가르기가 될 뿐이다. 올바른 신뢰는 서로를 향한 아름다운 진심을 믿어주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언행이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라도, 상대방의 진심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확신이 신뢰이다. 그래서 성경의 잠언은 친구의 책망은 아파도 진심에서 나오지만, 원수의 입맞춤은 거짓에서 나온다(27:6)라고 가르친다. 편가르기 아닌 동반자 정신 필요 현재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상당수의 문제들은 바로 신뢰가 빠진 실리중심의 관계, 즉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태도에서 시작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할 부부 및 부모자녀의 관계에서도 신뢰가 빠지면 갈등과 분노만 남게 된다. 한국의 높은 이혼율과 반인륜적 가정폭력이 급증하는 현상은 우리의 가정들 속에서 신뢰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치, 경제, 교육 등의 사회 각 분야에서 화합과 상생보다는 충돌과 다툼의 소리가 훨씬 더 커지는 이유도 각 사회주체들 사이에서 신뢰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고 노력하는 사회 속에서는 모두가 실패와 절망의 아픔을 겪게 된다. 이제 각자의 손익장부를 내려놓고 서로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자.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길을 함께 찾아보자.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내무실덕(內無實德) 외의무익(外儀無益)

청매선사(靑梅禪師)는 1548년에서 1623년까지 이 땅에 인연하셨고 임진왜란 때에는 3년간 의병활동을 하신 분이다. 십무익송(十無益頌)이라는 뛰어난 가르침을 남기셨는데, 그 여섯 번째에 내무실덕(內無實德)이면 외의무익(外儀無益)이라 하신 부분이 있다. 안으로 실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보기 좋은 위의를 나타내도 참다운 이익이 없다는 뜻이다. 이번 6ㆍ4지방선거 후 경기도에서는 여야의 정치인들이 상호 장점을 인정하고 함께 협력적으로 도정을 운영해 보자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고 느끼는,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먼저 마음 안으로부터 진실한 상호존중과 상생의 가치를 지녀야 할 것이다. 여야 협력적 도정 시도 반가워 외형적으로 겉모습에만 치중하면 경기도 발전을 이루는 좋은 결과는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청매선사의 가르침처럼 실답고 진실한 덕목으로 안과 밖이 하나 되는 훌륭한 정치발전을 이루기 바란다. 18세기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 시대에 참으로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교유를 이룬 분들이 있었다. 바로 다산 정약용과 강진 백련사의 혜장선사이다. 다산은 두 해 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 인물에 지정됐다. 그의 뛰어난 안목 그리고 많은 분야의 훌륭한 저술 활동과 통섭의 삶이 세계 문화사적으로 뛰어난 평가를 받은 것이다. 또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우리 공직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지도자상에 대한 다산의 철학과 가르침은 더욱 필요하게 되었고 새롭게 빛을 발하고 있다. 다산은 정조대왕께서 안타깝게도 일찍 승하한 후에 강진에 유배를 가게 되는데, 유배 초기에 매우 많은 고생을 하였다. 주막뒷방에 겨우 몸을 의탁하여 병고 속에서 지냈다. 몇 년 후 다산은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백련사 뒷산에 있는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 곳에서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며 많은 개혁적 저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강진 백련사에 있는 혜장선사를 만나게 된다. 혜장선사는 여러 면에서 다산을 도와주고 함께 공부하고 친하게 교유하게 된다. 다산은 불교 서적을 읽고 배우며 혜장선사는 주역을 새롭게 공부한다. 다산은 백련사 녹차를 알게 되고 차를 즐겨 마시고 앓고 있던 속병도 차츰 낫는다. 두 사람은 뒷산을 오가며 자주 만나서 함께 공부하고 세상사를 논하곤 했다. 백련사 뒷산에 초당이 있었고 두 사람은 친근한 형제처럼 10여년의 세월을 함께 한다. 그 아름다운 교유의 산책로가 있는 산을 차가 많이 난다하여 다산(茶山)이라 한다. 얼마나 차를 좋아 했으면 그 호를 다산이라 하였겠는가? 초당에서 안정된 생활이 되면서 다산은 활발한 저술활동을 한다. 유학자와 불교수행자가 서로 배우고 도와주며 녹차를 함께하며 아름다운 사상과 문화의 교유를 이룬 것이다. 다산의 열린 통섭의 철학과 교유의 한 단면이라고 하겠다. 다산은 해배된 후 남양주 고향집에서도 노론의 학자들과도 폭넓은 정치적 교유를 한다. 본래 다산은 남인이다. 다산은 또한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 등과도 깊은 친분을 가지고 있다.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 선생도 다산과 다른 정파에 속해 있었다. 초의 선사는 다산에게 좋은 녹차를 많이 보내준다. 다산은 이를 귀한 약으로 여겼다. 다산과 혜장선사 이미 모범 보여 조선 후기의 수준 높은 차 문화가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다. 다산의 이러한 폭 넓은 교유는 그 시대에서도 상당히 앞서고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 중심에 혜장 선사도 있었던 것이다. 다산과 혜장선사처럼 이번에 우리 경기도의 여야 정치지도자들이 참으로 실답고 아름다운 협력과 존중의 가치를 실현하기 바란다. 진정 정조대왕과 다산의 꿈을 실현하는 진실한 토대를 이루기를 모든 경기도민들은 지켜보고 있고 기다리고 있다. 꼭 이루기를 바란다. 인해 스님 용주사 문화원장

[삶과 종교] 성모 마리아 (AVE MARIA)

성모 마리아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를 낳으신 어머니로서 순명과 사랑으로 한 생을 하느님께 바치신 분이시기에 가톨릭교회에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공경의 예(禮)를 드린다. 이런 마리아의 공경을 개신교(Protestant)에서는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가톨릭교회를 마리아의 교회라고 일컬으며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보면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모습으로 한국천주교회가 발전되어 왔다. 한국에 있는 성당들을 보면 대부분의 성당입구에 성모상(聖母像)이 모셔져 있다. 오래된 성당이나 설립된 지 얼마 안 되는 성당 모두에 똑같은 성모상이 세워져 있다. 그래서 성당 앞을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 눈에 비춰진 가톨릭교회의 모습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모습인 것이다. 원래 성당은 로마의 베드로와 바오로성당처럼 순교자의 무덤위에 세워져 왔고 설립된 성당에서는 묻혀진 순교자를 공경하는 신심의 일환으로 성당입구에 순교성인의 성상을 세워 놓았고 성당이름을 그 성인의 이름으로 봉헌 해 왔었다. 그러나 점점 신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많은 성당들이 무덤 위가 아닌 광장이나 교통이 좋은 곳에 설립했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따로 모시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진 박해 속에 순교자들의 무덤은 산속 깊이 숨겨져 있고 그런 곳들은 성지로 개발이 됐다. 성당은 신자들의 모임이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에 세워졌고 점점 도시화되면서 교통이 좋은 곳이나 도시계획상 종교부지에 성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성당이 세워지면서 성당의 주보(主保)성인을 모시지만 외국처럼 성당입구에 주보성상은 따로 세우지 않고 성모상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한국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한 것에 기인할 수 있겠지만 한국인들의 종교 심성 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스한 하느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동일시하면서 성모 어머니의 보호하심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한국 신자들로 하여금 성모신심이 발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성모신심의 일환으로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교회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래서 가톨릭신자하면 외적인 표시로 대표되는 것이 묵주(珠)이고 올림픽의 영웅 김연아 선수를 통해 묵주반지가 널리 매스컴을 타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만 특이하게도 주보성인의 성상이 아닌 성모상을 성당입구에 세우고 공경하게 되어 마리아의 교회라고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한국천주교 역시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교인 것이다. 가톨릭신자들은 마리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가녀린 처녀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며 세상에 낳아 주신 성모님을 공경하며 우리도 그분의 신앙을 모범으로 삼아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하고 중재의 역할을 부탁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마치 손주가 아버지께 애원하면서 할머니께 도움을 청하는 인간적인 사랑과 간절함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성당마다 성모상이 모셔져 있는 것은 전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교회만의 특별한 모습이며, 이는 어쩌면 모진 고난 속에서 자식들을 품으며 키워낸 한국의 어머니들의 애원이 서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많은 어머니들은 성모상 앞에 기도하며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자식 때문에 겪어낸 고통과 피눈물을 생각하며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주님께 전구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우리 어머니들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로 사랑받는 것이다. 사랑하올 성모 마리아님! 세월호 참사로 아파하는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여 주소서 /송영오 신부ㆍ천주교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소장

[삶과 종교] 서로를 승리자로 만들어보자

아빠는 나를 좋아합니다. 말 잘 들을 때만. 엄마는 나를 사랑합니다. 기분 좋을 때만. 엄마 아빠는 나를 예뻐합니다. 남이 볼 때만. 이 침울한 고백은 KOBACO(공익광고협의회)의 최근 TV광고 문구다. 이처럼 조건적인 사랑은 가장 친밀해야 할 관계 속에서도 오히려 불신만 키우는 핵심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비단 가정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이 경우 사랑은 신뢰라는 단어로 바꿀 수가 있다. 서로에 대하여 굳은 신뢰를 갖지 못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자신의 귀에는 부당한 시비나 도전으로 인식되고, 상대방이 유화적인 반응을 보인다 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헐뜯지 말고 예를 들어, 국민들이 사회지도층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각종 특혜시비, 음모론, 계층갈등 등의 문제가 끊이질 않고, 정권이 국민을 신뢰하지 못하면 국민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최근 우리사회도 매우 심각한 상호불신과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각계각층이 대외 및 대내적으로 심각한 분쟁에 휘말려 있고, 특히 사회지도층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불신과 분노가 극에 달해 있다. 과연 이 답답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타개할 방법은 없을까? 성경은 상호불신과 갈등을 해결하는 첫 단계로서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즉 각자가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과감히 넘어서서 상대방의 성공과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첫걸음이다. 오늘(64)은 전국적으로 지방선거가 열리는 날이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라는 법조계의 격언처럼, 국민은 투표로 말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권은 국민들의 가장 강력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강력한 권리에는 이에 상응하는 책임도 따라 붙는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뽑은 지도자들을 최대한 신뢰하고 격려해주는 것이다. 비판을 하더라도 예의를 갖춘, 건설적인 비판을 해야 한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이상)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가 당선되었다 할지라도, 사사건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비판하거나 헐뜯지 말고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해당 지도자에게 최대한 협조해주어야 한다. 당파와 이념을 넘어, 선출된 지도자들이 잘했을 때에는 칭찬을 아끼지 말고, 잘못했을 때에는 감정적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선출된 지도자들에게도 무거운 책임이 생긴다. 그들은 자신이 더 이상 특정 당파와 이념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거나 거부했던 사람들까지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만 배타적인 호의를 베풀거나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은 이미 선출직 지도자가 될 자격을 잃은 것이다. 선출된 지도자 신뢰하고 격려해야 그러므로 오늘 지방선거가 끝나면, 지금까지 열심히 뛴 낙선 후보자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쳐주고, 당선자들에게는 당파와 이념을 떠나 진심 어린 축하를 해주자. 그리고 당선자들이 지역주민들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칭찬하고 협조해주자. 당선자들은 자신의 공약뿐만 아니라 자신을 반대했던 지역주민들의 생각과 마음도 꼼꼼하게 헤아려 보며, 모든 지역주민들을 함께 품을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갖도록 부단히 노력하자. 오늘의 지방선거를 통하여, 우리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과 갈등이 해소되고, 국민들은 지도자들을,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위대한 승리자로 만드는 행복한 꿈이 싹트기를 기도해본다.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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