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공감능력

리더의 7가지 언어 라는 글에 실린 내용입니다. 2011년 12월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연구 결과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두 마리의 쥐를 2주 동안 함께 생활하게 한 뒤에 한 마리는 우리 안에 가둬두고, 한 마리는 자유롭게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잠금 장치를 걸어두었는데 안에서는 열 수 없고, 밖에서만 풀 수 있도록 해 놓았답니다. 그랬더니 자유롭게 풀어놓은 쥐가 우리에 갇힌 쥐를 꺼내주려고 사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자유로운 쥐 옆으로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떨어뜨려 주었더니 실험한 쥐의 48%가 동료를 포기하고 먹이를 택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갇혔던 쥐를 풀어주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쥐를 가둬놓고 실험을 했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먹이가 떨어졌는데도 먹이를 택하는 쥐는 20%에 지나지 않았고, 80%가 먹이를 포기하고 동료를 구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공감능력! 우리 주변에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동료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엄청난 재물과 명예가 떨어졌을 때 무엇을 선택할까요? 어려움에 빠진 동료를 구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나를 구하기 위해 엄청난 재물과 명예를 포기할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 인생은 참 행복한 인생일 겁니다. 인간의 전두엽에는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거울뉴런이 설계되어 있는데 계속해서 반응하는 습관을 가져야만 퇴화하지 않는답니다. 만일 타인과 공감하지 않는 시간이 계속되면 공감 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공감하는 것도 훈련이고 습관입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무엇 때문에 행복해 하는지 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내치신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더라도 그들 한명 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시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주시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먹이시며,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처럼 공감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를 보면서 참 마음이 아픈 것이 있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우리들 살아가는 삶을 그대로 반영하기 마련인데, 요즘 정치를 보면 누군가의 허물을 들춰내고 끝까지 물어 뜯고, 끌어내리고 하는 모습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누가 잘 되는 꼴을 못 봅니다. 이상적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공감해 줄 수 있는 정치가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정치인이라면 그가 이 사회와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바꿀 수도 있다는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치 이야기는 잘 안하려고 하는데 요즘은 그런 기대를 자꾸만 하게 됩니다. 요즘 경기도 불황이고 젊은이들이 직업을 갖고 결혼하는 것도 너무나 어려운 현실입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함께 아파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겨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열흘 넘게 요로결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진통제도 맞아보고, 물 먹고 운동도 해 보았지만 돌이 나오지를 않아서 병원에서 돌 깨는 시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돌이 나오지 않아 고생하다가 오늘 아침에야 돌이 나왔습니다. 아마 혼자라면 견디지 못했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픈 내내 옆에 붙어서 밥을 해주고 함께 해주는 아내가 있어 힘이 났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오늘도 누군가를 공감해 주고, 공감 받으며 현실보다 큰 행복을 맛보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신앙인의 행복

신앙인도 여느 인간과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위해 지금도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인의 영적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삶의 의미를 귀담아 듣습니다.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습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또는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 모두는 삶에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삶의 모든 행위가 행복을 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성자께서 제시하는 행복이란 어떤 형태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마음의 상태입니다. 한 예를 들어서 우리는 보통 탐욕의 반대를 무욕이라 하는데 이 분은 이것을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즉 탐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만족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현대는 돈과 같은 재물들이 인간이 꿈꾸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경제 발전을 제일의 정책으로 내세우면서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경제가 발전되고 결국은 여기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점에 다다를 수 있다고 기대하는 유물사관적 집단들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은 유물사관적 사고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산업발전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도록 제시하신 분이 무소유의 법정스님과 무저항주의를 내세운 인도의 성인 간디입니다. 즉 소박함과 우직한 삶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오히려 경제발전에 따른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인간의 감성적인 면에서 볼 때 더 나은 것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달라이 라마가 제시하는 행복의 개념입니다. 그러면 친절함과 자비심이 쉽게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구성요소가 평화로움과 고요함인데 이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랑과 자비심에서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대형 종교 집단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물질만능에 빠져 있는 사회보다도 더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을 누리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거기엔 인간의 욕망을 채우려는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독버섯이 도사려 있음을 우리 가톨릭교회는 과거에 중세기를 통해서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대형 종교 집단에선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재산분쟁과 자리다툼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더 가관인 것은 신께서 자기 쪽 편을 들어 축복해 준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목불인견입니다. 요새 대형 금융부정 사건들은 대부분 대형 종교 집단에 소속된 신자들이 연루돼 있습니다. 허긴 유태인의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게다가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참 행복의 조건인 마태오 복음 5장 1절-12절과 루카 복음 6장 20절-23절을 악용해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들 편에 서 있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우리 종교집단도 유물사관에 젖어서 신도들이 간절히 바라는 예수님의 참다운 행복을 세속적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얻어지는 여러 기기들과 방법들, 그리고 재물들을 사용하면서도 그와 함께 따라오는 무서운 독소들에 빠지지 않고 예수님이 제시하는 진정한 행복과 달라이 라마가 전하는 행복을 향해 조심조심 이웃과 함께 재물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

[삶과 종교] 불공은 성불의 씨앗

8월 24일은 칠석이며, 9월 1일은 우란분절(백중)이다. 칠석과 우란분절은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모두를 부처님과 인연 맺도록 하는 날이다. 많은 종류의 불공이 있지만 크게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불공과 망인을 위하는 천도불공으로 나눌 수 있다. 다가오는 칠월칠석과 우란분절은 우리 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주일을 사이에 두고 자연스럽게 정해진 불공을 올리는 날이다. 특히 7월 칠석은 동쪽의 소 기르는 견우와 서쪽의 비단을 짜는 직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는 날이다. 그 사랑이 너무나 애절해 칠석날 저녁에는 견우와 직녀가 흘리는 눈물이 구름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비가 되어 땅으로 내린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백중은 목련존자인 나복이가 아버지 부상 장자와 어머니 청제부인을 위해 지극 정성을 다해 무간지옥에 빠져 있던 어머니를 왕생극락 시키고, 그 인연법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사람들이 목련존자의 효심을 배우도록 한 불공일이다. 금년 윤3월이 들어 있어 각 사찰과 불제자들은 영산대재라든가, 수륙대재 등 불공준비에 그 어느 해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냈었다. 이러한 불공들을 깊이 생각해 보면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불공이든, 죽은 사람을 위한 불공이든 모두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공은 이렇게 믿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믿음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욱 더 신뢰하게 만들고 근본 도리를 지키고 행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불공을 올릴 때는 선량한 마음을 바탕으로 거짓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으로 행하고 몸과 마음에 모든 정성을 다해야 한다. 형식에 치우친다거나 남을 의식해서 마지 못해서 올린다거나 하는 마음 바탕은 불공의 참뜻이 아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을 해야 한다. 불공을 크게 생자와 망자를 위한 불공으로 나눈다면 말과 행동은 불공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달라서는 안 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말과 행동이 하나로 화합이 되고 실천이 되었을 때 그 정성이 불공으로 나타날 수가 있고 소원성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하고 거룩한 재산과 보배는 따뜻한 말 한 마디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만법이 말에서 시작되고 말에서 끝이 나게 되어 있다. 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행동이 없는 것은 불공이 아니라 오히려 업장만 짓게 되는 것이다. 천수경의 첫머리가 정구업 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로 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이 말이고 길이길이 닦고 또 닦으며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말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진실한 마음과 선량한 말 거룩한 행동은 바로 불공의 초석이다.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야기와 목련존자의 효 사상 모두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 속담과 같이 불공은 지극한 정성과 노력, 말과 행동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 또한 말과 행동 노력과 정성에 달려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면 남에게 존경을 받을 수가 없고 업신여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성행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속지 마십시오!”

만나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후 참 바쁘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몸에 조금씩 무리가 오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올해 여름은 건강을 회복하는 충전의 시간으로 계획했습니다.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말씀 준비도 하고,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또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바이올린 연습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는데 바이올린 조율부터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겨울에는 그렇게 잘 풀어지는 줄이 여름에는 습기와 온도 탓에 꽉 조여져서 풀리지가 않는 겁니다. 덕분에 조율하는데에만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바이올린은 매일 관리해 주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습도와 온도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악기입니다. 물론 바이올린을 매일 매일 관리하고 연주하면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고 묵혀두면 바이올린은 조금씩 조금씩 망가져 버립니다. 비단 악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이올린 연주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연습해야만 기량이 녹슬지 않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클래식 음악계를 이끈 지휘자이자 작곡가, 연주자였던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연습하지 않아도 내 실력은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을 연습을 쉬더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이전처럼 뛰어난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까지도 속이려 합니다. 성경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전 마지막 지하 감옥에서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내용을 적은 편지입니다. 그 책 가운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와 교회를 미혹케 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니 그것들에 속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속아서도 안 되지만,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는 죄도 아니야. 나보다 훨씬 큰 죄 짓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잘 살고 있어, 이 정도는 나쁜 것도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다보면 회복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고 맙니다. 매일 영적으로 점검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에 침식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적이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배가 가라앉는 이유는 배가 물 위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금 괜찮다고 속으면 안 됩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늘게 조금씩 내리는 비는 조금씩 젖어들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옷이 젖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랑비라도 계속 맞다보면 속옷까지 흠뻑 젖게 됩니다. 오늘도 영적 조율과 민감함이 필요합니다. 악한 세력에 자신도 모르게 침식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고 교정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가을은 쉬기에도 좋지만 영적 삶을 조율하기에도 참 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이 가을에 영적 민감함을 가지고 스스로를 조율하며 올바른 길로 걸어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그리스도교 삼위일체론과 불교의 체상용론

<體相用>저는 1960년대 신학교 교육 과정에서 당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으로 계셨던 이기영 박사님의 강의를 2년여 동안 들으면서 불교의 심오함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최근 학계에선 통섭(統攝-通涉)이란 용어가 큰 화두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 인문학과 자연과학, 예술과 과학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영역이라며 통섭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학계의 논쟁이 우리 종교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회자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동양의 대표적 종교 즉 불교에서 열심히 수행의 길을 걷던 중국의 큰 분이셨던 오경웅 박사는 천주교로 오면서 나는 불문에서 씨줄을 얻고 천주교에 와선 날줄을 얻었노라라고 하였듯이 종교의 영성을 여러 종교의 분야에서 찾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젠 여러 종교에서 그 가치와 본받을 면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토속신앙이라든지, 무속신앙을 우리 천주교 신학교에서 한 과목으로 받아들여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비를 통해서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선 절대교의로 받아들입니다. 개신교의 대부분의 종파에서도 똑같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선 삼라만상을 체(體)상(相)용(用)이란 원리로 풀어갑니다. 이기영 박사는 원효대사의 세계관에 대해서 여러 논증을 펴가면서 체상용의 이치를 우리 같은 평범한 구도자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해하기 불가능한 하느님의 속성을 바로 이런 불교의 원리를 통해서 접근하는 학문적 방법을 통해서 동양의 신비와 서양의 종교가 서로 맞닿으면 많은 부분이 쉽게 이해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원리란 하느님은 성부성자성령으로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지만 하나의 본성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교의인데 이런 교의를 이해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라서 그저 믿는 길 밖에 없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마는데, 이 신비를 원효의 체상용의 원리를 원용(援用)할 때 어느 정도 이해의 폭이 좁혀짐을 학창 시절에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기본 속성의 바탕을 갖고 하느님은 사랑 자체로서 유일한 분인데 언제나 아버지아들영으로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관계사귐공동체의 하느님이고 그러기에 삼위일체로서의 속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의 원리를 체상용을 바탕으로 해서 풀어갑니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전달되는 지명스님의 교리산책을 인용한 것입니다. 체(體)-중심적이고 보다 근원적인 것=성부, 상(相)-체는 눈에 잘 보이지 않으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모양=성자 예수그리스도, 용(用)-체가 모양을 통하여, 혹은 물체를 이용하여 작용하는 것=성령 그러므로 체는 만물의 근원이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거기서 상이 나왔으므로 갖가지 작용이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삼라만상의 신비를 불교에서는 보다 깊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되기에 절을 찾아갈 때마다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보다 더 깊은 예의를 드리게 됩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신부

[삶과 종교] 88서울올림픽과 지방자치, 원효대사 그리고 경기일보

경기일보가 독자들에게 첫 모습을 보인 것은 1988년, 88서울올림픽이 열리고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해입니다. 어느새 24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제24회 서울올림픽에 앞서 열린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은 사회주의 진영 국가만 참가하고,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자본주의 진영 국가만 참가한 반쪽의 축제였지만 88서울올림픽에는 양 진영의 국가가 모두 참가했습니다. 때문에 88서울올림픽은 탈냉전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화해의 장이었고, 또한 일촉즉발의 세계적 군사긴장지역인 한반도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평화의 장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가 1991년 러시아(구 소련)에 이어 1992년에는 중국과 잇달아 수교를 하는 등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과 교류와 협력을 시작한 것은 바로 88서울올림픽의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중단됐던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도가 다시 실시되게 된 것은 빼앗긴 국민의 권리를 되찾았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후 비록 3년이 지난 1991년에 지방의회가 구성되고 1995년이 되어서야 자치단체장이 선출되는 등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그 지방자치법은 중앙독점 권력의 분권화와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 지방의 특성화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한국의 새로운 미래전략을 배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경기일보는 화해와 평화, 자치와 분권, 지방화 등의 새로운 역사의 변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고, 이를 반영하듯 지난해 창간 23주년 기념호에서 갈등의 조화에 대한 각별한 다짐이라는 뜻의 어울림 23을 기념표어로 제시했습니다. 각기 다른 소리의 악기가 아우러져 어울림음을 내는 오케스트라처럼, 역동적 협화음의 기능을 살리는 지역사회와 국가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던 어울림 23은 안타깝게도 1년이 지난 지금 만족을 말하기가 어려운 처지입니다. 더욱 고단하고 희망을 찾기가 힘들어지는 서민들의 삶, 더욱 심해진 사회적 갈등, 되풀이되는 권력형 부패와 실망스러운 정치, 남북의 대립 격화 등으로 양심과 지성, 위민의 그 어떤 목소리도 귓등의 바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이 세상이치. 소납은 경기일보가 상황에 굴하지 말고 더욱 힘을 내어서 새벽종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새벽종의 역할에 대해서는 우리의 역사에서 그 지혜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지혜 중의 하나가 원효대사의 화쟁(和諍)사상입니다. 화쟁사상은 극단을 버리고 화(和)와 쟁(諍)의 양면성(不二)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먼저 화쟁사상에서는 세상 모든 것은 일심(一心)에서 비롯되므로 모든 대립적인 이론들은 결국 평등하다고 봅니다. 소납이 경기일보에 원효대사의 화쟁사상을 권하는 이유는 사상적 위대성 말고도 경기도가 원효대사와 각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효대사에 대한 얘기 중에 해골과 물에 얽힌 내용이 있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듯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던 중에 동굴에서 자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몹시 목이 말라 물을 마셨고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놀라서 구역질을 하던 원효는 순간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 이런 줄거리입니다. 이 얘기에서 경기도와의 인연은 동굴의 위치와 연관이 있습니다. 동굴의 위치는 신라가 당나라와 교통하는 중요 항구의 역할을 했던 당항성(黨項城) 인근, 지금으로 보면 평택 포승과 화성 남양 인근입니다. 모쪼록 경기일보가 화해와 평화, 자치와 분권, 지방화 등에 앞장서야 하는 시절 인연과 원효대사와의 지역적 인연을 조화롭게 잘 살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경기일보 가족 여러분의 노고에 경의와 감사를 표하며 사랑과 신뢰를 보내 주시는 애독자 여러분과 함께 보다 큰 역할을 하는 언론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영담 부천 석왕사 주지불교방송 이사장

[삶과 종교] 반복되는 실수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니다

지금은 자주 하지 못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주 토요일이면 후배 목사님들, 전도사님들과 함께 같은 책을 읽고 요약하고 느낀 점에 대해 나누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이야기가 길어지게 되고 저도 제 나름대로 선배의 입장에서 후배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을 위해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때 했던 이야기입니다. 리더의 입장에서 보면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 회의 시간에 조금씩 늦는다든지, 일 마감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든지, 혹은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고 요령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신경이 쓰이고 속이 상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모습을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잔소리라도 하고 바로잡아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자신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다가 시간 지키는 것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탓에 그런 모습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년전 많이 아프고 난 후부터 이런 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한번 건강이 무너지고 나니 제 의지와는 달리 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어떤 선배 목사님이 목회자 세미나에서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인 세 가지가 있는데 영력, 지력, 체력 그런데 그 중에 제일은 체력입니다 라고 말씀하실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 말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본론으로, 우리의 삶에서 불가항력적인 일들을 만날 수 있고 그런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반복되는 실수는 어느 순간 실수가 아닌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아침 출근 길에 차가 막혀서 한 번 지각할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같은 이유로 지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차가 막힌다면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해서 더 빨리 출발하는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계속 지각이 반복된다면 그에 따른 따끔한 징계가 필요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용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용서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무조건적인 용서는 사람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삶을 바꾸기 위한 것이지 실수와 잘못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반복되는 실수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닌 습관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가슴에 꼭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실수를 방치하면 나쁜 습관이 됩니다. 나쁜 습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게 됩니다. 때문에 실수가 나쁜 습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동시에 좋은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의도적인 좋은 습관은 준비된 사람을 만드는 힘이 됩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은혜를 체험하고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새벽을 사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새벽 예배를 드리고 나면 아침 일과가 시작하기 전까지 2~3시간 정도 여유 시간이 생기는데 보통은 그 시간에 쉬거나 잠을 자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시간을 말씀을 묵상하고 책을 보고, 책을 쓰면서 제 자신의 발전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으로 사용했습니다. 몸이 피곤해서 쉬고 싶거나 자고 싶은 유혹이 들 때에도 꾹 참았습니다. 그렇게 보낸 20년은 저에게 황금 같은 자산이 되었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1년 전부터 아침마다 페이스북에 묵상글을 올리는 습관을 시작했는데, 이 습관을 통해 하루하루 제 삶을 잘 정리하게 되었고 글 쓰는 훈련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습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준비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神 없는 사회

神 없는 사회, 미국 피쳐 대학교에 있는 필 주커먼(Phil Zukerman)교수가 쓴 책(우리 말 번역 마음산책의 김승욱)의 제목입니다. 무신론에 많이 기울어져 있는 두 나라 즉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을 한동안 관찰하면서 직접 대화도 나누면서 흥미로운 분위기를 봅니다. 결론은 신을 믿지 않아도 이들은 더 평화롭고 더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지만 신의 유무에 따른 흐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옛날엔 사물 전체에 대한 다신 적 의미가 담긴 토테미즘이 성행하였는가 하면 현대에 와선 유일신 종교가 진전된 종교로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유럽에서는 정치와 교회가 합동으로 인류에게 종교를 강압적이라 할 만큼 위압감을 갖고 교회를 이끌어 간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가톨릭교회의 위압에 마르틴 루터 신부가 진정한 교회의 쇄신을 외치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름하여 기성교회에 대한 반발이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란 이름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유럽은 신교(기독교)와 구교(가톨릭)의 갈등이 일반 신자들에게 실망을 주다보니 급기야 사상가 니체에 의해서 신은 죽었다고 용감하게 교회와 인류에게 도전장을 내는 사상적 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니체를 무신론으로 분류되는 실존주의 창시자로 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18세기 초에 이르러 미국 신대륙 발견과 독립국가의 건설과 함께 여러 자유로운 사상이 범람하게 되면서 유럽의 복잡한 교회 분위기를 벗어나 계몽주의와 청교도적인 신앙 형태가 미국을 휩쓸게 됩니다. 이런 종교 형태가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미국의 위력과 함께 들어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신교는 민족독립과 계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라크를 향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신의 계시라 해서 무서운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것은 근본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또다시 옛날 유럽의 강경주의 종교와 같은 위력이 미국을 중심으로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911사태는 이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의 무서운 보복 행위가 자행하는 세계의 정세를 보면서 종교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한 리처드 도킨스 같은 학자는 만들어진 신이란 책에서 신이 없어야 행복한 사회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어디를 가나 교회는 부자들과 권력가들의 놀이 마당으로 위세를 드러내고 있고 다소곳한 교회는 성공하지 못한 교회로 무시를 당하는 극심한 자본주의의 행태가 온 사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종교가 사회에 무서운 공해를 만들어 가고 있기에 신 없는 사회가 얼마나 좋을까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혼탁한 종교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이 종교 지도자들임을 세상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차마 용기를 내서 말을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샌 많은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고 생명을 바쳐 세운 아름다운 교회가 현대에 와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42절-47절이 우리가 바라는 지상교회의 모습입니다. 신은 과학적이거나 외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프리즘 스펙트럼에 의해서 체험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을 순수하게 체험토록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할 교회가 신을 더 멀리 밀어내고 있으니, 오히려 신이 없는 사회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과 종교] 정치 ‘중도’와 종교 ‘중도’의 닮음과 다름

근래 우리나라 정치인들 사이에서 중도주의(中道主義)를 내세우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설 것으로 거론되는 이른바 대선주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래 유행하는 중도주의는 우파(보수)와 좌파(혁신) 중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이념을 나타내는 것이고 더불어 합리와 균형을 강조하는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과 대립적인 이념이라 하더라도 공동체의 이익과 유지를 위해서 수용할 것이 있다면 수용하고, 타협할 것이 있다면 타협한다는 것이니 일단 모양새는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도주의를 박쥐와 양다리 걸치기에 빗대어서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중도주의는 내용적으로 보면 자기 정체성이 없이 시류나 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 행태로서 기회주의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흔히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중도가 유교의 중용(中庸)이나 불교의 중도(中道)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유교에서 중용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고대 중국의 제왕 요순우탕 시대의 정치원리를 가리키기도 하고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가 갖추어야 할 사유와 수양의 방법을 가리키기도 하는 개념입니다. 중용에서 중은 희로애락 등의 감정이 생겨나기 이전이라서 치우치지도 않고 어디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내면의 상태로서 천하의 근본도리(天下之大本)을 뜻하고 용은 항상 변함이 없음(平常), 이미 마음에 자리 잡은 중이 바뀌지 않도록 함(不易日庸) 등을 뜻합니다. 또 중용은 상황에 맞추어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隨時以處中也). 이는 상황에 따라 중심을 바꾸라는 의미가 아니라 천하의 근본도리를 자기중심으로 삼아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뜻입니다. 다음은 불교의 중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중도는 깨달음에 이르고 불국정토를 이루는 바른 길에 대한 제시입니다. 중도의 원리는 쌍차쌍조 또는 차조동시(遮照同時), 이것과 저것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버리면 이것과 저것은 그 본성(本性)대로 불이(不二)임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선입견 또는 편견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볼 것을 강조합니다. 있는 그대로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모든 중생이 미완의 부처이고 세상의 모든 원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이 독자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관관계에 의해서 생성되고 유지되며 소멸되는 연기(緣起)의 원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중용은 차이가 있지만 치우치지 아니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비슷하기로는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중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불교와 유교가 중심과 이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강조하는 반면 정치인들은 중립과 중간 그리고 이에 위치하는 모양새 갖추기를 중요시 한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인이 중립인 태도를 갖고 중간자의 입장에서 정치를 하는 일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중립과 중간이 원칙이 없이 모양새 갖추기에 그친다면 이는 시류와 인기에 편승하는 정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간 우리나라 정치는 고무줄 잣대와 빌 공(空)자 공약으로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다시 이런 실망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주의라는 미사여구에 현혹되거나 유명세와 인기에 막연한 기대를 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자들의 사람 됨됨이는 물론 그간에 보여준 정치적 소신과 경륜, 그리고 업적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지혜가 발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 담 부천 석왕사 주지불교방송 이사장

[삶과 종교] 가장 잘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살다보면 우리가 잘 하는 일과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달라서 고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학창시절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 따로 있는데 잘하지도 못하는 공부 하느라 참 많이 힘들어 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수년 전 미국의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한국에서 리더십 강연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의 목회가 위기를 맞은 것은 교회가 어려울 때가 아니라 한창 교회가 부흥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일했고, 교회는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었답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또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또 하나의 질문이 생겼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두 개의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리스트로 적어놓고 나서 빌 하이벨스 목사님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을 만나는 것이고,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할 때에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가슴은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기존 교인들을 위해 설교를 준비하고, 그들을 심방하고, 상담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리스트를 보면서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기존 교인들을 위한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를 구하고, 자신은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불신자들을 위한 예배 설교자로 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저도 똑같이 해 보았습니다. 당시에 학교 강의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저기에서 강의 요청도 많이 들어오고 늘 수강생도 많은 소위 잘 나가는 스타 강사였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일이 제 가슴을 뛰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의를 하러 교회 사무실을 나올 때면 늘 한숨이 나왔습니다.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바로 교회에서의 사역이었고, 성도를 만날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줄 때 행복했습니다. 나의 기쁨과 에너지가 목회 현장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저는 과감하게 학교 강의를 정리했습니다. 가장 즐거운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그 습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제가 어떤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리스트로 정리해 봅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에 끌려 다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과감하게 그 일들을 정리해 버리고 제가 좋아하는 일들에 집중하는 작업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일을 위해 인생에서 꼭 해야 하는 의무들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많이 누리며 사는 인생은 누군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결정을 내리는 삶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아니 시간 날 때 한번쯤 정리해 보세요. 그리고 결단해 보세요. 그럼 당신은 어느새 가장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행복해 하고 있을 겁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불교와 천주교의 아름다운 동행

고맙다고 할까요, 저는 천주교 신부로서 살아가는데 너무 편파적이거나 절대적인 근본적 사고에서 그런대로 벗어나 있음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삽니다. 저의 집안 어른들 중엔 스님도 계셨고 목사님, 장로님도 계셨기 때문에 한 종교의 고집스러움에서는 많이 벗어난 사고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신학교 생활 내내 여러 학문을 접하면서 개신교의 역사를 목사님들을 통해서 깨우쳐 갈 수 있었는가 하면 불교에 대해서는 너무 훌륭한 학자이신 동국대학교의 불교대학장까지 역임하셨던 이기영 박사님이 불교에 대한 깊은 현의(玄義)에 맛을 들이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에 더욱 타 종교에 대한 거리감은 그리 없는 것 같습니다. 70년대 한창 군사정권과 대립하는 어두운 사회의 분위기에 휘말려 지내고 있을 때 우리 천주교회의 제일 큰 어른이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어느 자리에서 나는 가끔씩 절을 찾곤 하는데 대웅전 부처님 앞에 가서 예를 드리고 조용히 정좌하고 있으면 왜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 오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정작 성당에서 잠심하게 기도를 하고 있으면 온갖 잡념이 좌치(坐馳)가 되어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하신 말씀이 내내 잊혀 지질 않았습니다. 어떤 연유로 그런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걸까 하였는데 한참 후에 법정 스님이 도반들과 불자들에게 귀한 법회를 열곤 하시는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 김 추기경님이 가셔서 가르침을 하신것을 시작으로 법정 스님도 그 화답으로 명동성당에 오셔서 가르침을 주신 귀한 종교 교류의 시작은 우리 종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길상사가 개산(開山)을 준비하면서 귀한 불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관음상입니다. 이 불상은 천주교 신자인 서울대의 조각가인 최종태 교수에게 의탁해서 제작된 것입니다. 이 불상은 이렇게 보면 천주교의 예수님의 모친 성모님의 자태가 자상하게 엿보이고 저렇게 보면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절로 비쳐지는 신기한 상입니다. 이것은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관음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의 큰 인물이셨던 오경웅 박사는 우리 천주교로 들어오면서 나는 불문에서 씨줄을 얻고 천주교에 와선 날줄을 얻었노라고 하면서 불교에 머물렀던 기간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한 것을 봅니다. 그래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유명한 동서의 피안(東西의 彼岸)이란 책에서 소상하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많은 이가 말합니다.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종교는 신은 누구인가? 라는 화두에서 불교와 같은 동양종교에선 인간인 나는 누구인가? 란 질문에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천주교 신부들은 관상이라든지 묵상의 방법을 불교의 참선의 길에서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한국 법조계에서 지금까지도 존경받고 있는 김홍섭 판사의 무상(無常)을 넘어서란 자전적 책에서도 꼭 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영성(靈性)의 대가라고 일컫는 토마스 머튼 신부의 영성은 오히려 우리 천주교보다도 개신교의 신학자들이 더 관심을 갖고 연구하거나 그분의 영성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봅니다. 얼마 전부터 불교에선 예수성탄일에 절 앞에 축하 플래카드를 걸기도 하고 직접 스님들이 성당에 오셔서 축하인사를 나누는가 하면, 우리 성당에서도 석가탄신일에 앞다퉈 성당 정문에 축하 플래카드를 걸기도 하고 때론 인근 절을 찾아가 함께 경축의 예를 드리곤 하는데, 해가 갈수록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동행입니까? 최 재 용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

[삶과 종교] 비난과 염려는 감로수

요즈음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불미스러운 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쉬쉬하며 입단속하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탓에 크게 사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해당 종교의 신자들은 물론이고 국민들까지 크게 실망시킬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얘기까지 들립니다. 특히 최근에는 불교계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과 염려가 태산의 무게와 같습니다.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참회(懺悔)의 말들이 꼬리를 물고 물어 어느새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허물이 있다면 참회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참회가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불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소란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또 하나의 공업(共業)을 짓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나라 선불교의 뿌리가 되시는 혜능스님께서는 참회에 대해 참이란 몸이 다하도록 짓지 않는 것이요, 회란 지난날의 허물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악업(惡業)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부처님 앞에서 말로만 참회를 하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 참회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세상 물론 참회보다 더 좋은 것은 마땅히 지켜야할 계율을 어기지 않고 악업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보(果報, 과거의 인연에서 연유하는 업보)와 다생습기(多生習氣, 윤회하는 동안 몸에 밴 습관)는 쇠줄 같아서 끊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근에 불거진 불교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진정한 참회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렸으면 연연하여 주춤거리지 말고 빨리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참회에는 무릎을 꿇는 것도, 목 놓은 통곡도, 피눈물도, 비장한 언사도 군더더기일 뿐입니다. 불교의 참회는 타종교에서 얘기하는 회개(悔改)와 다릅니다. 회개는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신에게 되돌아감을 의미하지만 참회는 마음속으로만 뉘우치는 것을 넘어서 공개적으로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같이 참회와 회개가 다른 것은 타종교가 신이라는 타력에 의존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종교인데 비해 불교는 자각(自覺), 스스로 깨쳐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회 참회를 할 때에 자신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자신의 알아차림을 검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여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한 허물이 있는지, 기껏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대중에게 검증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서 불신은 오해와 불화의 씨앗입니다. 우리가 상대에 대해 불신하게 되는 경우는 상대의 허물 자체보다도 그 허물을 숨기려하고 변명으로 합리화할 때입니다. 비록 허물이 있어도 공개적으로 솔직히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허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에서 신뢰의 싹이 돋아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허물이 드러나면 그 허물에 대해 이런 저런 소리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최근 스님들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과 염려의 소리가 넘쳐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난과 염려는 나를 해치는 칼이 아니라 죽은 생명까지 살리는 감로수입니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이 피지 않습니다. 전화위복이라는 사자성어도 있고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문제는 참회의 진정성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렸으면 연연하여 주춤거리지 말고 빨리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바로 그 실마리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영 담 부천 석왕사 주지불교방송 이사장

[삶과종교] 명품 인생으로 사는 법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상표 가운데 버버리(Burberry)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국 장교들이 입었던 코트가 바로 버버리인데 특히 비오는 날 잘 생긴 남자가 이 버버리를 입고 있으면 정말 멋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버버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스타일이 똑같습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소위 명품이라고 부릅니다. 명품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아주 귀하고 값진 물건을 명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명품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무조건 비싸다고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한국의 상표 가운데에서도 비싼 옷이 있습니다. 비싼 신발이 있고 비싼 가방이 있지만 명품이라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습니다. 비싸다고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명품이 될 수 있습니다. 명품을 명품되게 하는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입니다. 명품은 1년을 입고 3년을 들고 10년을 사용해도 그 품질이 한결같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멋있어지고 손 때가 묻을수록 더 정감이 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명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명품은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한다고 합니다. 오래 전 신학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학생들과 함께 중국으로 단기 선교를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일제 시대 선구자를 부르며 독립 운동을 위해 말을 타고 달렸을 영웅들을 떠올렸고, 용정에 들러서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둘러 보았습니다. 그의 시비 앞에서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지식인의 기개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자 몸부림치다 스물 아홉이라는 너무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윤동주 시인. 그의 죽음에 대해 학생들과 안타까워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툭 던졌습니다.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훌륭했던 사람들도 변절했던 역사를 보면 말입니다. 엉뚱해 보이는 그 학생의 말을 들으면서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무조건 축복은 아니구나. 오히려 변치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축복이구나. 래디컬이라는 책을 보며 참 멋진 문장이라고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상급이 되는 순간, 삶은 급진적이 된다. 죽음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의 위협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을 변치 않게 만드는 것, 성실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상급이 되는 삶이 아닐까요? 올 한해는 참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전기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사람들 때문에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다고 그들의 삶이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군가 가지 않으려고 했던 길을 믿음으로 갔던 사람들이고, 그들의 발걸음을 보면서 누군가 그 길을 따라오게 만들었던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인생은 감히 명품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확실한 것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히브리서에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바라보자 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분은 누구보다도 명품 인생을 살았던 분이십니다. 그 분을 바라보면 우리의 인생도 달라집니다. 시선을 바꾸어 보세요! 인생이 달라집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종교] 우리 동네 이야기

저는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서 삽니다. 지금은 새로 건설된 아파트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북향엔 해발 124m의 숙지산이 있고 동쪽으론 수원역으로 가는 큰 길을 넘어서 약 1km 쯤 부턴 비슷한 높이로 수원시 화성을 안고 있는 영산인 팔달산이 우리를 품듯 보이는가 하면 화서 전통 시장이 있어서 서민들이 살기엔 너무 좋은 아늑한 동네입니다. 그리고 우리 집 맞은편엔 서민들 생활의 가장 친근한 경제유통의 역할을 하는 신용협동조합이 있습니다. 또 바른편엔 우리 귀염둥이들이 신나게 놀고 공부도 하면서 꿈을 키우는 초등학교가 있어서 싱그러운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유난히 다른 동네보다 깨끗한 것이 특징입니다. 오래된 주거지역은 대부분 생활쓰레기를 길가에 내어놓기 때문에 환경미화원들이 고생을 제일 많이 합니다. 새로 건설된 아파트나 신도시는 생활 쓰레기 처리가 현대식 시설로 되서 동네가 늘 청결하지만 이곳은 오래된 주거지역이라 대부분 전신주 밑이나 담 옆에 쓰레기를 버려서 보기에 지저분하고 악취도 나곤합니다. 제가 이곳에 이사 온지 6년 가량 되었는데 그땐 생활 쓰레기를 모으는 곳이 무려 여섯 군데나 되었지만 담 밑이나 공터 같은 곳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동네 전체가 다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 군데로 줄어들었는가 하면 분리도 잘 되어 있습니다. 담 옆 작은 화단 등 주차공간도 깔끔해졌습니다. 우리 동네엔 보기 드물게 키가 훤칠하신 70을 갓 넘기신 노신사가 사십니다. 어떤 땐 이른 새벽에 어떤 땐 밤이 깊었는데도 각자 집에서 내어놓은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리해서 재활용하도록 수고하시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존경스럽습니다. 이 분은 얼마 전까지 시의원을 네 번이나 하시고 의장까지 하신, 말 그대로 우리 동네에선 유지 중에 유지로 꼽히시는 분입니다. 지금은 신협 이사장으로 네 번이나 선출되어 열심히 공직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벌써 오래 전에 만인 장학회를 만들어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곤 하셨는데 이번에도 신협에서 나오는 활동비 반을 선뜻 내놓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요새는 어디에나 노령의 어른들이 많이 사십니다. 저도 올해에 70을 넘기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 노인들의 근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큰일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여기저기, 이곳저곳을 찾아보면 틀림없이 우리 노인들이 봉사할 수 있는 일들은 아마도 많을 것입니다. 청소나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을 기본으로 본다면 우리가 사는 마을에서 무엇이든 마을 발전을 위해서 나름대로 보탬이 될 것입니다. 제가 어느 성당에 있을 때 한 대학교에서 총장과 문교부 장관까지 역임하시다 퇴직하신 분이 신도 대표로 계셨는데 이분은 틈만 나면 성당에 와서 청소를 하고 유치원생들을 보살펴주기도 하고 사람들이 시비가 생기면 지혜롭게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때 지역을 위해 큰일을 많이 하셨던 우리 마을의 큰 어른은 올 여름에도 작년에 가꿨던 것 같이 해바라기 등 여러 종류의 꽃을 후미진 곳 손바닥만 한 길옆 화단에 심을 것입니다. 노인들이 많이 사는 곳엔 어떤 모양으로든지 살기 좋은 환경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나라에서 미처 챙기지 못하는 걱정스런 일, 예를 든다면 학교 폭력사건 등도 우리 어른들이 힘을 모으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노인들이시여! 우리의 늙음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원동력이 될 수 있음도 꼭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대리구장

[삶과 종교] 참회가 있는 정치

음력으로 3월은 봄의 절정입니다. 산이며 들이며 도심 곳곳이 온갖 색의 꽃과 연초록 잎으로 반짝입니다. 소납이 있는 절 아래 재래시장 좌판에는 고사리, 취나물, 엄나물, 머위나물 등 봄나물이 그야말로 지천입니다. 춘삼월 호시절이라고, 그래서 봄은 예나 지금이나 희망인가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5년마다 한번씩 이와는 다른 봄을 맞고 있습니다. 자연의 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희망 보다는 실망과 한숨이 더 많이 생기곤 하여 마음이 언짢은 봄, 올해 봄도 그런 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퇴임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이전 대통령들 때와 마찬가지로 권력형 비리문제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일까요? 소납은 자기반성, 즉 참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참회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불교식 수행법입니다.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얘기하는 회개나 고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대부분 항상 남을 탓합니다. 가끔 사과를 하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내용을 보면 자신이 직접 잘못한 것은 없고 권력의 핵심이 아니다보니 잘못을 막지 못해 미안하다는 정도의 이른바 꼬리 자르기 식입니다. 이처럼 그간 우리 정치는 어느 정당을 막론하고 떠나는 자에게 덤터기 씌우기를 반복해 왔고 또 이것이 통했습니다. 그러니 굳이 참회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덤터기 씌우기식 정치가 가능했던 것일까요? 소납은 주권자이자 유권자인 국민들의 망각과 무관심이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현 정부와 여당은 물론 과거 정부와 여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러 사람들이 옷을 바꿔 입고 화장을 고친 채 마치 새로운 인물인 양 자신이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며 속속 대통령 후보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하나같이 상대는 문제가 많으니 나에게 한 번 기회를 달라는 식입니다. 자신에 대한 참회의 말은 듣기가 힘듭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참회는 마음속으로만 뉘우치는 것을 넘어서 남에게 뉘우침을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몸소 중생을 교화하실 당시부터 잘못을 뉘우치는 법을 중요시하여 포살(布薩)과 자자(自恣)라고 불리는 참회법을 행해오고 있습니다. 포살은 구성원들이 15일마다 한자리에 모여서 계율이 적힌 책(戒本)을 외워가며 자신이 지은 잘못의 수를 세고 잘못이 있으면 스스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참회한 후 더 이상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을 큰 스님 앞에서 약속하는 것이고, 자자는 장기간 한 곳에서 머물며 수행하는 안거(安居) 기간의 마지막 날에 서로에게 잘못을 지적해줄 것을 청하고 이에 따라 참회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참회는 잘못을 용서받는, 사(赦)함 받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기 위한, 선업(善業)을 쌓아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참된 용기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과 은폐를 일삼는 사람을 후안무치(厚顔無恥) 또는 파렴치하다 합니다. 우리는 정치인들로부터 국민의 심부름꾼, 국민의 종이 되겠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과 은폐를 일삼는 사람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리가 없고 또 실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상호 신뢰와 진정한 소통은 자신에 대한 참회가 출발점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영담 조계종 총무부장불교방송 이사장

[삶과종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난 4월 11일 제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그동안 참았던 말들을 몇가지 꺼내보고자 합니다. 글의 제목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정도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비겁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선거를 지켜보면서 그리스도인 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있어서 부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마침 선거를 앞둔 시점이라 곳곳에서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습니다. 부산은 제가 살던 곳에서 느끼지 못한 뜨거운 선거 열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선거 유세를 하는데 어느 편에서는 바꿔봅시다 라고 외쳐대고, 다른 한편에서는 나는 박근혜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 것은 바꿔보자, 나는 누구 편이다 라고 외치기만 할뿐 그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떠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더라는 겁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비방하고 나는 누구 편이다 라고만 외치는 모습을 통해 아직은 미성숙한 우리의 정치 문화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건 김용민씨의 막말 파문이었습니다. 교회에 대해 쓴 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지고 나꼼수라는 방송을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수준 이하였습니다. 그들이 지적하는 한국 사회와 교회들의 문제들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말하는 방식이 너무도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조차 상실한 그들의 대화를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조롱하고 세상을 비판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조롱당하고 있는 교회와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조롱당하셨듯이 그들의 대화 가운데 예수님은 조롱당하시고 못 박히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바로 내 모습입니다. 내 안에는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너무도 아름답고 귀한 것들이 있다고 아무리 주장하여도 그러한 모습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빈 항아리에 물을 붓다보면 차고 넘쳐서 밖으로 흐르게 됩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바로 내 안에 차고 넘쳐서 밖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정당을 지지하고, 어떤 위치에서 살아가느냐!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방법인가가 중요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하나님이 용납하시고, 나와 지금은 종교가 달라도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선거가 끝났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찍은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나요? 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 숨쉬는 땅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말로 쏟아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하며 치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외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묵묵히 우리가 잃었던 신뢰의 시간들을 인내하며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선거에서 상대방 비방하고 누구 편이다 라고만 외치는 모습을 통해 아직은 미성숙한 우리의 정치 문화 발견해말로 쏟아낸 상처 쉽게 아물지 않아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하며 치유우리가 잃었던 신뢰의 시간들을 인내하며 살아가야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종교] 그리스도인의 부활신앙

며칠 전(4월 8일 주일)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의 틀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축일을 감사와 설레는 마음을 갖고 다양한 방법으로 지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결코 우리가 초월적 삶을 추구하는 존재로의 의식 전환이 없이는 받아드릴 수 없는 대사건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논란은 어느 시대에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절체절명의 논쟁거리입니다. 인간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신앙이 사실주의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옛날 구약성서의 이사야서 26장, 에제키엘서 37장, 다니엘서 12장 등에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에 대하여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 부활 신앙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결정적 신앙의 틀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예수의 제자들은 이 부활사건을 믿음의 중심으로 여겼고, 이를 확증하는 사건들, 즉 요한사도만을 제외하고 모든 제자들이 용감하게 순교를 합니다. 라틴어에는 순교자를 martyr(마르띠르)라고 합니다. 이 마르띠르란 의미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확신을 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핵심을 부활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자들 모두는 사도들에 의해서 전래되는 사도신경을 외울 때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습니다라고 힘차게 고백하곤 합니다. 과학자들이 자연의 원리와 진화의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인간이 추구하는 여러 기술을 동원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세상 원리가 1차원에서 11차원까지는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현재 우리가 깨우쳐 아는 것은 고작 3차원의 세계 즉 3D라는 영화의 기술에 머물러 있습니다. 또 한편 물질과 생명의 기본 원소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생명의 기본 원소가 무엇인지 즉, 이를테면 신의 입자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확증이 없는 입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뽕잎을 갉아 먹는 누에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나는데 누에들은 선배들 격인 나비들의 존재 양식과 생활 방식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느껴지는 것이 우주의 이치이건 물질의 원리이건 결국 무(無), 즉 아무것도 아닌 라틴어의 Nihil(니힐)이란 영역에 도달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또 다른 우주로 즉 다중우주로 나아가고 결국엔 무(無)만이 있게(?)되는 결론에 봉착하거나 또 생명체의 원리도 들어가 보면 결국 무(無)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결론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과학의 논리로 풀어 갈 수는 없고 철학적이거나 종교적 원리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하느님만의 영역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다다르게 됩니다. 아마도 내가 아는 세상의 종교 중에 가장 근접한 세상물리를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설득력의 종교는 원효대사의 기실론소의 일심(一心)에서나 아니면 원불교의 공(空)의 원리일 것으로 이해되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신앙을 비롯한 하느님의 신비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장 25절과 루카 10장 21절 참조)그래서 부활신앙을 갖고 사는 신자들은 영원한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현재를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뜻은 아마도 똑똑하다는 것이겠지요.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가 초월적 삶을추구하는 존재로의 의식 전환이 없이는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절체절명의 논쟁거리이다부활신앙을 갖고 사는 신자들은 영원한 세상을 향한끊임없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현재를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 같다.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대리구장

[삶과 종교]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맞는 것

글자나 단어에는 다 그 유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래를 따져가다 보면 옛 사람들의 지혜와 만날 수 있습니다.봄은 한자로는 春(춘), 영어로는 Spring(스프링)입니다.春은 桑(뽕나무 상)자와 日(해 일)자를 합쳐 만든 회의문자입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아 뽕나무의 여린 새 움이 돋아나오는 모양을 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옛날 중국의 대표 무역업자였던 비단장수 왕 서방이 풍성해질 뽕나무 잎을 생각하며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짓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봄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기대를 하게 하는 계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Spring은 원래 돌 틈 사이에서 맑은 물이 퐁퐁 솟아 나오는 옹달샘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솟아나다는 뜻으로 쓰임새가 넓어지면서 새 움이 돋아나오고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뛰쳐나오는 시기, 즉 봄을 나타내는 말로 정착되었습니다. Spring이 용수철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듯이 서양의 봄은 솟아나오는 힘에 강조점을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용수철의 한자표기는 용의 수염을 뜻하는 용수(龍鬚)와 쇠붙이를 뜻하는 철(鐵)을 합쳐 만든 것인데 이처럼 말과 단어가 같은 쓰임새여도 지역마다 만들어진 유래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렇게 보면 한자 春과 영어 Spring은 모두가 자연의 현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그렇다면 우리말 봄에는 어떤 유래가 있을까요? 언어학자들 사이에는 본다(見)라는 동사의 명사형 봄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견해와 불(火)과 옴(來)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비전문가인 소납이 이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의 정서로 볼 때 본다(見)에서 유래를 찾는 견해에 더 공감을 합니다.아무튼 봄의 유래를 본다(見)에서 찾을 경우 우리말 봄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는 春이나 Spring과는 사뭇 달라집니다. 우리말 봄은 대자연에 생기가 도는 그 자체가 봄이 아니라 그 생기를 본인이 스스로 느끼고 볼 때 비로소 봄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春과 Spring이 자연중심이라면 우리말 봄은 사람이 중심이라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포근하고 세상이 연초록으로 빛나도 내 마음이 겨울이면 봄은 그저 겨울일 뿐입니다. 화엄경은 이를 두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세상사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이르고 있습니다. 세계적 사상가로 존경받는 신라 원효대사께서 해골에 담긴 물을 드시고 깨우치신 것도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지금 4월, 독자 여러분은 지금 어떤 봄을 맞고 계십니까?내 마음이 봄이어야 봄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잘 표현한 불교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칩니다. 중국 송나라의 학자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학림옥로(鶴林玉露)라는 책에 실린 무명의 비구니 스님이 지었다는 오도송(悟道頌,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고 지은 시)입니다.盡日尋春不見春 종일토록 봄을 찾아 다녔건만 봄을 보지 못했네. 산으로 들로 짚신이 다 닳도록 헤맸네. 歸來笑拈梅花嗅 돌아와 매화 향기를 웃으며 맡으니 春在枝頭已十分 봄은 가지 끝에 벌써 무르익었네.영담 조계종 총무부장불교방송 이사장

[삶과 종교]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세상에 의해서 바뀌어지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세상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깜깜한 방에 촛불 하나가 켜지면 방안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촛불 하나 때문에 밝아지는 변화가 생깁니다. 간을 하나도 안 한 국은 싱겁고 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들어가면 맛이 변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같이, 소금과 같이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참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비교적 큰 교회에서 목회하다보니 성도님들이 주례 부탁을 많이 합니다. 전에는 부탁하는 주례를 다 했던 적이 있는데 너무 힘들고 시간에 쫓겨서 나름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일주일에 주례는 한번만 하되, 제일 먼저 부탁하는 분의 주례를 맡는다. 그 원칙에 따라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나름 기준이 생기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주례를 하려고 결혼식에 참석해 보면 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결혼식에 참 많은 하객들이 참석하는데 이분들이 꼭 이 자리에 와야 하는 분들일까? 너무 많은 돈을 들여서 결혼식을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혼식 한번 하는데 몇 억 가까이 든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식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결혼식 전날 아버지에게 불려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불러놓고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너 전도사가 결혼 첫날을 호텔에서 자면. 아직 어린 전도사가 비싼 호텔에서 자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라는 말을 하신 겁니다. 물론 제 나름대로 핑계는 있었습니다. 먼저 결혼했던 형 생각에는 목사인 동생이 첫날 밤을 집에서 자면 다음날 예배 드리고 신혼 여행가는 게 불편할거라고 잡아 준 것이었습니다. 제가 잡아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저 스스로도 불편하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아버지께 꾸중을 듣고 나니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아버님은 꽤 유명한 부흥사였고 성공한 목회자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신 후, 누군가 저에게 와서 틀림없이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있을 거라며 금융감독원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대(?)를 갖고 금융감독원에 찾아갔습니다. 가서 아버님의 이름과 주민 번호를 대고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제 손에 쥐어진 것은 고작 2만4천원 잔고가 남아 있는 통장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다행이었을 것을, 몇 년 후 아버지 친구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살아 생전에 아버지가 돈을 빌린 것이 있다며 달라고 하기에 제가 적지 않은 돈을 갚아야 했던 일도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처음에는 원망도 많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아버지께 받은 가장 큰 유산은 돈이 없는 통장과 빚이었습니다. 목회자는 돈에 욕심을 내면서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아버지는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빈 통장과 빚은 제가 돈에 대해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아가도록 제 삶의 기준이 되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나만의 기준과 이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결혼식도 나만의 이유가 있는 결혼식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까운 목사님은 아들 결혼식을 하면서 일체의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식사 대접도 하지 않고 간단한 간식만 제공했다고 합니다. 대신 어려운 이웃을 위한 모금함을 놓고 꼭 축의금을 내고 싶은 분들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모금에 참여해 달라고 하셨답니다. 나만의 기준과 이유가 있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은 바뀌어집니다.김 병 삼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종교와 정치

요새 우리나라는 선거열풍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최근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하 종자연)에서 정교분리 시민의식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국민의 70%가 종교인 정치참여를 반대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또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종교행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하는데 이것도 많은 이들이 반대하고 절대다수가 성직자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종자연에서 정교유착 어떻게 끊을 것인가? 사랑의 교회 특혜, 국가 조찬기도회가 필요한가 등을 내용으로 심포지엄을 가졌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공직자들이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원칙을 준수하지 않아 사회갈등을 일으키고 있고, 국민의 아픔과 괴로움을 보살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국민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고 신란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 종교인으로서 정치참여를 선언하거나 종교를 선거에 이용하고자 하는 정치인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조사결과로 보면 일반 양식있는 시민들은 종교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때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습니다. 이런 종교의 활동에 대한 반응이 결국은 선교에 급제동이 걸렸습니다. 즉 몇 해 전부터 선교에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 한 것입니다. 각양각색으로 별별 방법을 써가면서 선교를 하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할 뿐입니다. 물론 물질 만능주의와 과학의 사실주의가 팽배해지는데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는 확실히 교회에 대해 냉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천주교회는 젊은 신부들이 주축이 되어 정교유착 보다는 오히려 국가 정책과 현안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열심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따른 사회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천주교회의 내부에선 특히 기성세대는 적극적으로 반대의 의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부들이 미사 때 강론 중에 정치얘기를 하는 것에 질색을 하기도 하고 때론 성당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기도 합니다. 몇 해 전 지방의 최고의 행정직에 있는 천주교 신자가 어떤 정책에서 젊은 신부들과 서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성당 정문마다 그를 비판하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기도 했습니다. 기성세대들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 우리들이 죽을심 잡고 고생을 하면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놨더니 젊은이들은 엉뚱한 것 갖고 트집을 잡아 국가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다고 격분하고 있습니다.천주교회는 오랜 옛날 중세기 때까지 정치권력과 한 통속이 되어 말 그대로 정교유착이 아닌 일체가 되었을 때 십자군의 만행이라든가 지동설 같은 과학적 사실들을 교회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짓을 저지르다 보니 후에 르네상스라는 인본주의와 공산주의를 태동케 하는 역사적 격변을 통해 신자들과 국민들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정치와 권력이란 변질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원성을 향한 교회가 여기에 밀착되다 보면 교회도 덩달아 부패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역사를 뼈아프게 경험한 천주교회는 정치와 유착하는 행위는 조심스러워 하고 오히려 그 반대에서 권력이나 당시의 정권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항운동 사회운동이 해방신학이란 이름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소외계층이나 핍박받는 민중들과 젊은 세대들이 기쁘게 동참을 하게 됩니다. 이번 총선과 대선에서 우리 천주교회의 젊은 신부들이 어떻게 행동을 할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 대중이 교회가 정치권력에 휩쓸리지 않고 고고하게 특히 소외계층의 사람들이 비록 어렵게 살아도 사람대접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최 재 용 신부천주교 수원대리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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