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의 도시이야기]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도시를 인간의 정주(定住) 생활의 연장으로 본다면 그 속성은 지극히 일상적이어야 한다. 도시라는 것이 인간 생활의 니즈에 대한 대응과 무리를 이루고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이 모여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면에서 보면, 도시는 슐츠(C.N.Schultz)의 말처럼, 인간과 주변 환경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설정하는 초보적인 단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역사 초기에 나타나는 도시들이 인간이 특정 지역에 머물러 사는데 필요한 공간과 그것들을 이어주는 길들이 모여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면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일상적이다. 주택에서도 잠자는 공간과 식사하는 공간 그리고 이것들을 지원하는 공간이 있듯이 이 당시 도시 또한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이 필요한 만큼 어우러져 있었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임의적이고 일상적인 도로나 시장, 광장 등이 드문드문 도시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도시는 주택이나 건축의 확대판이었으며 이웃 간의 소통도 원시적이지만 지극히 근거리였다. 자연스럽게 주변과의 관계도 필요한 최소한의 의미만을 챙기면 그 뿐이었다. 이때까지 도시는 만들어지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인간과 주변 환경과의 의미 있는 관계는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의미 이외에 의도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획도시의 시작이었다. 신(神)에 대한 종교적 의도나 왕에 대한 정치적 의도가 서서히 도시에 모종의 질서를 부여하기 시작하더니만 도시 간의 전쟁이나 식민지 개척 등에 따른 신속한 이동이나 감시 및 관리 등의 군사적 의도가 도시에 격자형 도로나 정돈된 구획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사르곤 2세 같은 왕이나 제사장들은 그들의 의도대로 도시를 정리하기 시작하였으며 위계와 질서를 표방하면서 장방형의 반듯한 도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도시계획가라 불리는 히포다무스(Hippodamus)가 밀레투스(Miletus/그림) 같은 그리스 반도의 도시에 그리드 패턴의 구획과 직선도로를 적용시켰던 것도 군사적 용이함과 토지의 효율적 이용 및 관리와 감시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었으며 이는 곧 로마의 데쿠마누스와 카르도라는 강력한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적 의도의 계획도시로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종교라는 이데올로기와 원주민 통제라는 의도가 스페인의 식민지 계획도시로 나타나고 있으며 상업적인 효율의 극대화라는 의도가 중세 바스티드(bastide) 같은 계획적 도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근대 이후의 도시 또한 합리와 기능이라는 의도를 내세우면서 직선도로와 바둑판같은 정형적인 도로망 속에 필요한 시설을 용케도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만들어진 도시가 어느 새인가 만든 도시가 되어버린 셈이다. 우리의 일상도 어느새 구획된 번지 내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 몸을 부대끼고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도 그만큼 제한적이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의도(意圖)가 의미(意味)를 이기는 모양이다.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도시에서의 파레토(Pareto) 법칙

파레토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일명 20:80 법칙이라고 부르는 이 이론은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비롯된다는 것으로 이탈리아 경제학자 파레토(Vilfredo Pareto)가 개미의 집단행동 양태를 관찰하다가 알게 된 일종의 가설이다. 일견 비과학적 논리처럼 보이면서도 제법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재미있는 이론이기도 하다. 도시에서의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서도 파레토 법칙이 어느 정도 적용되고 있는 듯하다. 도시가 지니는 80%의 매력과 특징은 도시 내에 존재하는 20% 정도의 중심시설이나 공간이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긴 우리가 어떤 도시를 감상하거나 설명할 때 도시의 모든 시설이나 공간을 들먹거리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사진 폴더에 저장되는 많은 것들은 기념물이나 역사적 건조물 혹은 고층건물로 휘황찬란한 중심가의 도시 풍경 등이 대부분이다. 이것들이 실제로 도시의 중심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특정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도시만의 특징을 결정하는 몇몇 중심시설이나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그다지 반론은 없을 것이다.도시에서의 팔레토적 중심과 주변의 관계는 시기가 앞설수록 그리고 규모가 크지 않을수록 더욱 명쾌하게 나타난다. 선사시대나 고대의 도시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화려한 통치자의 주거나 곡물 창고 혹은 사원 등이 그 마을이나 도시의 중심이었음은 분명하며 이것들이 그 도시의 80%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스 등지에서는 신전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공공시설들이 중심이었으며 중세 도시조차 교회 종탑과 파비스라는 앞뜰만으로도 그 도시의 이미지와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심지어 기독교를 앞세워 세계를 지배하려던 스페인의 식민도시에서조차 위풍당당한 교회와 통치자 행정 공간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 중심이 나머지 원주민의 모든 생활과 산업을 지배하고 있었다. 고작 20% 정도에도 못 미치는 도시 시설이나 공간이 주변의 80%는 물론 그 도시의 색깔과 존재이유를 자연스럽게 대변하고 있던 셈이다. 고대 로마나 근대 이후의 산업도시는 좀 사정이 다르다. 거대 기념물이 도시에 덧칠을 해버린 로마의 수도는 이른바 과잉 중심의 표본이었으며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과 건물이 스스로 중심이기를 자처하는 바람에 오히려 혼란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건물이나 공간 하나하나가 예술적인 로마는 그나마 봐줄만하였다. 빈민들의 로우 하우스를 배경으로 연기를 뿜어대는 근대도시의 산업시설이 고용주의 저택과 함께 도시의 중심이기를 강변할 때부터 20%에도 못 미치는 절대 소수가 도시의 나머지를 책임지려하더니만 요즘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고층건물이나 중심구역 혹은 중심을 가장한 부도심 등이 최고라는 수식어를 등에 업고 여기저기 넘쳐나면서 오히려 80%와 20%가 역전되는 중심 과잉 도시가 되어 버리고 만 느낌이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라도 중심이 되지 못하면 열악함과 미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비참한 열등생이 될지도 모르는 판이다. 너도 나도 중심이기를 원하다보니 20%에 속해있는 개미와 80%에 속해있어야 할 개미들이 다들 당황스러워 하고 있다. 하긴 애꿎은 개미만 탓할 일은 아니다.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도시에서의 랜드마크

인간과 마찬가지로 요즘 우리나라 도시에도 성형(成形) 바람이 불고 있다. 도시 내에 산재해 있는 지저분하고 너절한 것들을 개선하고 그럴싸한 건물이나 구조물 등으로 기존의 도시 이미지를 좀 더 예쁘고 보기 좋게 만들겠다는데 딱히 뭐라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성형이 그러하듯 도시에서의 자연미가 조금 없어 보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도시의 성형을 위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랜드마크(landmark)일 것이다. 어떤 곳에 가면 어떤 것이 멋있더라 정도의 가십거리나 어디 가면 꼭 무엇을 보아라 하는 식의 애정 어린 권유도 역시 랜드마크라는 존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도시에서의 랜드마크는 역사상 무수히 존재한다. 선사시대의 고인돌 같은 거석(巨石)들도 훌륭한 랜드마크였으며 고대 바빌론 지역의 지구라트(ziggurat),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혹은 고대 7대 불가사의에 해당하는 휘황찬란한 건축물들은 물론, 금빛 광채를 번쩍이며 언덕 위에 당당하게 서 있던 아크로폴리스 등도 모두 도시의 상징인 동시에 그 도시의 존재이유를 설명해주는 모뉴멘트이자 랜드마크로 기억되고 있다. 로마의 개선문이나 칼럼(column) 같은 이른바 로드 아키텍춰(road architecture)도 전쟁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귀국하는 개선 군대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훌륭한 랜드마크였다. 중세의 기독교적 가치를 표현하는 종탑이나 교회 첨탑을 비롯해 성 마르코 성당 광장<사진> 앞에 치솟은 시계탑(그림) 또한 복잡한 중세 도시에서 당당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랜드마크였음에 틀림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도시에는 그럴듯한 랜드마크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도시 거주민들은 애정과 애증을 동반한 채 도시 내의 존재이유로서 그것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그 수효도 그리 많지 않았다.눈에 잘 띠기 위해서 혹은 그 도시만의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유이기 위해서는 너무 많아도 안될 법이었다. 이른바 적절한 희소성의 랜드마크였다. 그들은 랜드마크를 보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도시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랜드마크의 끝자락에 시선을 보내면서 자신이 움직여야 하는 방향성(orientation)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과 기계와 공장 등으로 도시를 채워나가기 시작한 근대 이후부터는 그다지 볼 만한 랜드마크도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도시 거주민 모두가 공감하는 존재이유로서의 대상을 찾아보기도 어려워졌다. 철골 덩어리의 에펠 탑이나 식민지로부터 약탈해 온 오벨리스크 같은 것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채 치솟아 오르기에 급급하였으며 급기야는 시카고나 맨하턴 같이 엄청난 수의 초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는 높이 무한경쟁 시대를 초래하고 말았다. 높기만 하면 혹은 많기만 하면 능사가 아닌 것을 이 때 알아차려야 했다. 바벨탑이 무너진 것은 단지 기술적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존재이유만으로도 충분한 높이와 의미가 있을진대, 너무 많은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내고 동시에 너무 보여주기에만 급급한 철없는 인간의 행동에 신(神) 조차 용서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도시와 모뉴멘트

그 어딘가에 그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습성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그래서인가. 시간에 대한 흔적은 역사로 기록되며 그 역사의 흔적 안에 제국의 영광은 물론 개인의 소소한 일상까지도 또 다른 흔적으로 퇴적되고 있다. 공간에 대한 흔적은 건축이나 도시를 통해 나타난다. 루소가 도시를 인류의 가래침이라는 함축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것도 아마도 도시 안에 인간의 다양한 흔적들이 산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흔적을 남기는 최종 대상지는 바로 도시인 셈이다. 인간이 도시에 남긴 흔적 가운데 어떤 특별한 의미나 의의가 있는 것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른바 모뉴멘트(monument)라는 것이다. 고대 도시에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세계의 중심을 나타내는 옴파로스 같은 상징적 장소부터 바벨탑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지구랏트, 지역 신을 모시는 그리스 신전 혹은 마우솔레움 같은 개인 영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건축물이 어떤 특정한 목적과 의의를 지닌 채 도시에 남겨진 흔적들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종교이건 신념이건 의식이건 문화이건 혹은 단순한 기념(紀念)이건 관계없이 당당히 도시 내에 나름대로의 의미체로 존재했다.역사적으로 볼 때 모뉴멘트의 천국은 로마(Ancient Rome)였다. 유난히 현실적이었고 실용적이었던 로마인들은 수로 등의 도시 기반시설이나 대목욕탕 등의 공공시설 등으로 도시를 채워나갔으며 데쿠마누스(decumanus)와 카르도(cardo)라는 직교 간선도로 시스템과 전차 이동이 용이한 포장도로 등을 도시에 도입하여 단시간 내에 식민도시 등을 건설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로마가 대제국이 되면서 제국으로서의 위상과 제국의 수장으로서의 황제의 권위를 드높일 시설이 필요했다. 대전차 경기장이나 콜로세움 같은 시설들이 기존의 공공시설과 함께 도시 여기저기에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황제의 이름을 딴 포룸(forum)들이 도시 요지를 점령하면서 새로운 모뉴멘트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그 뿐만이 아니다. 승전을 축하하는 개선문이 화려한 조각을 뽐내며 개선 도로 입구에 당당하게 축조됐으며 도시 내 광장에는 황제의 치적을 기리는 대형 칼럼(column)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모뉴멘트의 종류만 많아진 것이 아니었다. 그 규모나 디자인 또한 거대해지고 화려해졌다. 황제의 빌라(villa)나 궁전은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며 소박한 형태의 초기 포룸 등도 점차 거대해지고 화려해져 기존의 건물을 부셔야만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개선문이나 칼럼 등도 더 높고 화려하게 만들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실용적인 공공시설과 과시적인 대형 건조물 그리고 화려한 모뉴멘트로 가득 찬 이른바 기념비적인 도시가 됐다. 로마인은 역사상 유난히도 흔적을 남기기 좋아했던 민족이었던 셈이다. 그야말로 열심히 도시에 흔적을 만들었던 로마. 제국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이었을까. 지금까지도 제국의 영광과 환희가 여전히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김영훈 대진대교수건축공학과

열린 도시공간과 건축적 표현

왕권이나 신권 등 절대적 권력이 존재할 경우 도시는 역시 그 위상에 걸맞게 폐쇄적이며 배타적으로 구성된다. 신전이나 왕궁을 거대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도 모자라 이중 성벽인 시타델로 철저하게 중무장하고 왕의 길이나 신전 행렬을 위한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도로까지 가세하여 권력을 칭송한다. 이른바 닫힌 도시 혹은 이분법적(二分法的) 도시 구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반도를 중심으로 생겨난 도시국가(polis) 가운데 하나인 아테네(Athene)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평야가 거의 없고 워낙에 산악지형도 많았던 지리적 이유 때문에 이 나라들은 다른 고대국가와 같은 통일된 왕국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다른 지역과는 격리된 채 독립적으로 그들만의 문화와 정치를 만들어 갔다. 이들의 사회적 요구는 그대로 도시구조에 반영되었다. 유사시 주민의 최후의 보루이자 신을 모시는 공간, 즉 아크로폴리스(acropolis)와 일상적인 생활공간 사이에 시민들이 모여 정치나 사회, 혹은 체육 활동을 하기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버린다. 시민들에게 열려있는 공공시설들이 도시구조 내에 새롭게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자 도시의 삼분법(三分法)이 형성되는 장면이다. 아고라로 통칭되는 공공시설군에는 다양하고 특징적인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다. 신을 위한 의식을 준비하는 장소이자 장로들의 거주지(prytaneion), 정치적 토의를 하기 위한 공간인 민회(agora), 민회를 대표하는 시민이나 귀족들의 모임인 평의회(boule) 등이 대표적인 공공시설이었으며 이밖에 레슬링 등 체육 활동을 위한 경기장(palaestra)과 후일 공연 등을 위한 극장 등이 나머지 공간을 채워나갔다. 이른바 공공시설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이런 시설들은 날씨 좋은 지중해 연안의 시민들의 발걸음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열린 공간이었다.열린 공간, 자연스러워야 한다이것만이 아니다. 스토아(stoa)와 엑세드라(exedra) 같은 건축 공간 또한 열려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랑(柱廊)과 열주(列柱)로 이루어진 스토아는 주로 주랑 내를 거닐면서 담소도 나누고 쇼핑도 하던 일종의 움직임이 있는 동적(動的) 열린 공간이었다. 반면에, 대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같은 주요 도시의 성역에 마련된 엑세드라는 학자와 시인들의 토론 장소나 휴식 및 명상을 위한 장소로 쓰였다. 이른바 시민들이 머무는 정적(靜的)인 열린 공간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정치나 철학 이외에도 자유로운 도시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공공 공간으로 인한 열린 도시의 모습 때문이며, 아고라 이곳저곳에 삼삼오오 짝지어 담소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모습을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열린 도시 공공시설과 건축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위풍당당한 관청 같은 건물 앞에 널찍한 공간 하나 만들어 놓고 시민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이라 굳이 생색을 내지 않아도, 공간 자체가 열려있으면 혹은 그 공간에서 무언가 소통할 이야기 거리가 있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길 일이다. 도시에서의 열린 공간은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자연스러워야 한다.김영훈 대진대 교수건축공학과

시타델(citadel), 도시 경계 속의 또 하나의 경계

시타델(citadel)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나 성채를 뜻하는 말이긴 하나, 도시에서 이 시타델이 갖는 의미는 좀 색다르다. 우선은 그 형태와 위치이다. 시타델은 기본적으로 외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내부에 설치된 또 다른 성벽, 즉 내성(內城)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도시 성벽이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는 근대 이전까지의 도시에서 그 모습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 위치 또한 외부로부터의 접근이 가장 어려운 도시의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아마도 기마전술이나 공성전(攻城戰) 등이 대부분이었던 전쟁에서 성벽 하나가 무너져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조치일 수도 있겠고 혹은 최악의 경우 도시민들이 적으로부터 몸을 피할 최후의 피난처(shelter)로 유보된 지역일 수도 있었을 법이다. 어찌됐건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인 만큼 시타델이라는 존재는 그 도시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지켜야 할 그 무엇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시타델 내부에는 무엇이 존재했을까. 그 내부에는 거의 예외 없이 왕궁이나 신전 등 그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나 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다. 할슈타트(Hallstatt) 신석기 주거군에서조차 마을의 식량 등을 저장하는 창고 혹은 마을 지배자의 주거로 추정되는 지역이 견고하고 촘촘한 기둥과 이중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고대 미케네(Mycenae)나 우르(Ur) 같은 소규모 도시국가는 물론 코르사바드(Khorsabad/그림) 같은 고대 도시, 심지어는 중국의 장안성이나 자금성, 일본의 헤이안쿄(平安京) 등에서도 왕궁이나 신전 등을 포함한 도시 중요 시설이 거의 예외 없이 시타델로 처리되고 있다. 아테네나 오림푸스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언덕 최정상에 위치하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도 역시 그 도시를 수호하는 절대적 존재인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중세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3세기경부터 수많은 건축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던 프랑스의 까르카손(Carcassonne)만 보더라도 당시 절대 권력이었던 봉건 영주의 성채는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시타델 내부에 움츠리고 있다. 도시의 경계가 그 도시의 도시다움이나 정체성 내지는 동질성을 확보하는 한계라고 본다면 경계 속의 경계, 즉 시타델(citadel)의 내부는 그야말로 그 도시의 동질성을 담보하는 본질(本質) 혹은 핵(核)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것이며 그 도시의 존재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식량이건 신(神)이건 황제이건, 시타델 내부의 존재는 도시민이 가끔씩은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지켜야하는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그 존재로 인해 도시나 도시민은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일상과 문화에 전념했을 것이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기 위해 외벽을 쌓았던 도시인들은 다시금 나와 나를 다스리는 혹은 내가 경배하고 섬기는 또 다른 아군을 위해 내벽 쌓기를 허용한 셈이다. 이미 경계도 사라지고 도시의 본질도 변질되어가는 요즘에 비하면 도시에 있어서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존재하던 예전의 도시는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매력적이다. 대진대 교수건축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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