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인 느티나무는 주로 우리나라, 중국, 일본, 시베리아, 유럽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잎은 타원형 혹은 계란형으로 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가 있고 황색의 꽃은 한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피는 일가화(一家花)로 5월에 핀다. 암꽃은 새 가지의 윗부분에, 수꽃은 밑부분에 달려있다. 높이 20m, 둘레 5.63m에 이르는 매우 오래된 나무로 오른쪽에 할아버지 나무, 왼쪽에 할머니 나무 1쌍이 있다. 할아버지 나무가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있어 옛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용궁사에 치성을 드리러 와서 용황각에 있는 약수를 마시고 할아버지 나무에 기원하면 아기를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우성전이 1583년(선조16) 6월1일부터 1584년 8월30일까지 약 15개월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겪은 사실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술한 책이다. 1583년 계미년과 1584년 갑신년의 앞 글자를 하나씩 따와 ‘계갑일록’이라 했다. 이 시기 정국은 동인과 서인 간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됨과 동시에 남인과 북인의 분당 조짐이 보이던 당시 상황을 가장 상세히 기술한 대표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원래 서명은 ‘추연일기’이나 개장하면서 ‘추연선생일기’로 바뀌었다. 문화재청 제공
진오기굿은 망자(亡者)의 영혼을 위로해 저승으로 보내는 망자천도(亡者天道)굿을 말한다. 강화 교동도에서도 망자천도의례인 진오기굿을 전승하고 잇다. 교동 진오기굿은 황해도굿, 경기굿, 서울굿과는 다른 독특한 구성 방식을 보인다. 내림장단 등이 있고 만세받이 장단도 교동 만세받이 장단이라 해 황해도굿 만세받이나 서울굿 만세받이와도 다르다. 교동진오기굿은 14거리로 연행한다. 모든 부정을 물리는 별부정, 신령을 청배하는 부정굿, 칠성신을 청배(請陪)해 인간의 소망을 빌고 공수를 듣는 칠성굿, 남치마에 남쾌자를 걸친 무당이 부채와 방울을 들고 장군신을 청하는 장군거리, 남치마에 별상의대를 입고 진행하는 별상거리, 남치마에 신장의대를 입고 진행하는 신장거리, 남치마에 대감쾌자를 입은 무당이 춤을 추다가 대마루공수를 주는 대감거리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높이 2.54m로, 포천 해룡산(海龍山)의 정상 부근에 동남향으로 서 있는 불상이다. 자연스러운 자세와 비교적 조화로운 신체 비례, 옷주름의 표현 형식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보이나 양감이 줄어들고 세부표현이 정교하지 못한 점 등에서 통일신라 양식을 이은 고려 시대의 불상으로 평가된다. 불상은 비교적 높고 큰 육계(肉〈9AFB〉)를 갖추었으며 둥글고 큰 얼굴에 눈이 크고, 귀가 길게 늘어져 있다. 비교적 좁은 어깨에 걸쳐진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내려오며 가슴에서부터 U자형 주름을 형성하면서 무릎까지 이어지고 있다. 양 팔에서는 계단식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규방다례(閨房茶禮)는 한국 전통차 문화를 복원·계승해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차(茶)문화와 생활예절을 복원·정립한 것이다. 그 유래는 기능보유자인 이귀례 선생이 어릴 적부터 동학운동(東學運動)을 하던 조부(祖父)에게서 차(茶) 예절을 접한 이래 1973년 성균관대학 유학장(儒學長) 유승국 교수에게서 생활 법도와 형식을, 전주 이씨 종친 인천지원장인 이덕유에게서 전주 이씨 제례예법을 전수 받았다. 1974년 다경·다신권·동다송·국조오례의 주자가례 등 각종 문헌과 전통사찰의 다례를 수학했고, 1978년 한국차인회, 1980년 한국 차 문화협회 활동 등으로 한국의 규방다례(閨房茶禮)를 복원·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병조호란 때 순절한 윤계(尹棨, 1603~1636)의 행적을 새긴 비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는 신곡(薪谷)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항전을 준비했고, 휘하의 군병들이 청병(淸兵)에 의해 모두 궤멸되자 남양부 청사에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절했다. 1668년(현종 9)에 읍민들이 윤계의 충의를 기리고자 순절비를 건립했다. 순절비는 사각형의 받침돌에 윗면이 둥근 비신(碑身; 글씨를 새기는 부분)을 세운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이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전액(篆額; 전서체로 비석의 이름을 새긴 부분)은 민유중(閔維重)이 썼다. 세 사람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어서 윤계의 역사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불교의식에 사용하는 노래를 범패라 하고, 춤을 작법, 또는 작법무라 한다. 인천에서의 범패와 작법무는 조선 태조 대왕(1398)이 팔만대장경을 강화 선원사에서 지천사로 옮길 때 이운의식으로 행하면서 처음 행해졌다. 그 후 면면히 이어오다가 1928년부터 약사사, 묘향사, 해광사 등지에서 법회에 범패와 작법무인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등이 추어졌다. 바라춤은 일체의 모든 마장을 끊고 부처님의 정법을 찬탄하는 무용으로 작법무라 한다. 인천 바다의 기상을 담아 힘차고 우렁차며 선이 굵은 것이 특징이며, 호국영령을 위해서도 봉행한 점이 타 지역과 다르다. 구양사에서는 능화스님을 중심으로 매년 현충재를 봉행하며 전승지도에 힘쓰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석남사에서 약 1〈E7B0〉 떨어진 산기슭에 위치한 높이 7m, 너비 6.5m에 달하는 암벽에 새겨진 고려 시대 마애불상이다. 장대한 크기의 상으로 상체에 비해 하반신이 짧고, 신체 굴곡이나 양감이 두드러지지 않아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옷주름 표현에서 특히 통일 신라 불상의 형식을 잘 이어받아 새김이 선명하며 꽤 완성도 있는 상으로 조성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3겹 동심원의 원형 두광(頭光 ; 붓다의 머리에서는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과 신체의 윤곽선을 따라 역시 3줄의 신광(身光 ; 붓다의 신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이 길게 표현됐다. 잎이 넓은 한 겹 연화대좌 위에는 발가락 5개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삼국시대 이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고 고려시대 이후부터는 모든 악기를 조율하는 표준악기이던 대금은 팔음 중 죽부(대나무로 만든 악기)에 속하는 공명악기이며 일명 젓대라고도 한다. 제작과정은 생대나무를 뿌리째 채취해 숯불로 연하게 구워 진을 빼고 대가 갈라지지 않게 묶은 후 1개월간 소금물에 절인다. 이후 음지에서 충분히 건조한 뒤 내공과 지공을 뚫은 후 음정을 확인하고 악기가 터지지 않도록 튼튼한 줄로 묶고 외형을 다듬어 완성한다. 80여cm 길이에 구멍은 10여개다. 문화재청 제공
파주 월롱산 남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 용상사(龍床寺) 대웅전에 봉안됐던 불상이다. 불상은 신체에 비해 큰 장방형 얼굴에,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높은 육계(肉〈9AFB〉)와 이마 위 머리에는 원형의 작은 중앙계주(〈9AFB〉珠)가 표현됐다. 가늘게 뜬 눈은 수평으로 가지런하며 삼각형의 코가 긴 편이다.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졌으며, 귓불이 두툼한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고, 경직된 표정에 간략하게 묘사된 옷주름 표현 등이 특징이다. 문화재청 제공
강화 외포리 곶창굿은 어업을 위주로 하는 정포마을과 농업을 위주로 하는 대정마을 주민들이 농사 가 잘 되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는 등의 마을 번영을 기원하는 도당굿의 하나다. 곶창굿은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대표적인 서해안 풍어제다. 최영 장군처럼 억울하게 죽은 영웅이 무속신이 되듯이 임장군도 무속신이 돼 복수를 하러 중국으로 가면서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아 선원을 배불리 먹였다는 전설과 함께 조기잡이 신으로 모시고 있다. 외포리 곶창굿은 2년이나 3년마다 음력 2월 초에 3일간 하는 것이 전례이지만, 마을 사정에 따라 더 자주하거나 늦춰지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풍어제에서 볼 수 없는 작두타기가 있고, 굿의 순서가 다른 곳의 순서와 달리 먼저 수살맞이를 한 후 우물굿, 당굿으로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문화재청 제공
정무공 오정방, 천파공 오상, 충정공 오두인 등 해주 오씨의 이름난 학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이 위치하는 덕봉마을은 사액서원인 덕봉서원과 오정방 고택, 종친의 무덤이 모여 있어 해주 오씨의 역사를 보여준다. 고택은 덕봉리 입향조 오현경에 의해 1510년에 처음 지었으며, 165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문화재청 제공
정악은 궁정이나 관아 또는 각 지방의 풍류객들이 음악을 즐기려고 모였던 풍류방에서 연주하던 음악을 가리킨다. 대풍류란 즐기기 위한 감상 위주의 관악기 연주라는 뜻으로 궁중음악용 향피리나 정악대금과 같은 관악기가 중심인 음악을 말한다. 기본 대풍류는 향피리 2, 대금, 해금, 장구, 북으로 편성해 있다. 주요 연주곡목으로는 상영산, 중영산, 세영산, 가락털이, 삼현도드리, 염불도드리, 타령, 군악 등의 8곡으로 구성된 표정만방지곡이 있으나, 삼현도드리, 염불도드리, 타령은 무용반주 음악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풍류는 씩씩하고 활기찬 느낌을 주는 전통음악으로 가치가 크지만, 현재는 넓은 무대에서 음악이 연출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소규모 연주는 없어지고 있다.예능보유자인 진철호 선생은 故 김정식 선생에게서 서울의 경제와 다른 인천 지역의 향제 대금정악을 배워 전승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후기의 문신 박세채(朴世采, 1631~1695)를 그린 초상 2점이다. 박세채의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남계(南溪)다. 박세채의 초상은 관복본과 유복본(儒服本)이 전한다. 관복본은 사모의 높이가 높고, 두 손은 소매 안에 넣은 공수자세를 취하고 정면을 향해 앉은 의좌상이다. 단학 흉배를 달고 금박의 품대를 착용했다. 의자에는 표범가죽이 걸쳐져 있다. 두 발은 발 받침대 위에 팔(八)자형으로 올려놓았다. 17세기 말경의 문인 관복초상화의 전형적인 요소다. 유복본은 동파관(東坡冠)을 쓰고 두 손을 소매 안에 맞잡은 정면형의 입상이다. 도포는 상당히 과장해 그렸다. 여유로운 편복 위로 검은색 끈을 매어 늘어뜨렸다. 신체의 비례나 얼굴과 복식의 채색기법이 완숙하지 못하다. 이런 부분을 두고 초상화에 익숙하지 않은 화가의 그림으로 보기도 한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1711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의 거의 말년에 해당하는 숙종 37년(1711)에 제작한 종으로, 높이 198㎝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해 어깨부분이 돌출했던 입상화문대에서 새롭게 변화시킨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연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만든 돌기 연뢰(蓮蕾)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중국 종 양식을 따른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했다. 이 종은 전통적인 범종 양식을 계승했던 사인비구가 그의 말년에는 이처럼 중국 종 계열을 따른 범종을 제작했다는 점을 밝혀주는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시대에는 70세가 넘는 신하에게 공경의 뜻으로 나라에서 지팡이 장(杖)과 의자 궤(51E0)와 가마 등을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에 따라 왕이 내린 물품이다. 현종 9년(1668) 11월 왕이 당시 원로대신이었던 이경석에게 공경의 뜻으로 내린 궤 1점과 장 4점 그리고 이를 받는 장면을 그린 그림 1점 등 총 6점의 유물이다. 벼슬이 정승까지 올랐어도 70세까지 수를 누린다는 것은 드문 일로 그에 따라 임금이 내린 이 물품은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궤장은 조선 중기 국가에서 운영하던 공전에서 제작된 것으로 그 당시 제작규정과 양식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공예품이며 연회도첩은 당시 풍속도로 회화적 가치가 큰 작품이다. 문화재청 제공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종의 소의경전으로서 대승 불교의 역사 속에서 널리 읽힌 경전으로 화엄경이라고 한다. 그 영향은 화엄종의 범위를 넘어서 선종에까지 크게 미쳤다. 이 경은 불타발다라가 번역한 60권 경전으로 구역화엄경, 육십화엄, 진본화엄경, 진경화엄경이라고도 한다. 전체 34품의 큰 경전으로 각각의 품들이 개별적으로 이뤄진 뒤 유통하다가 후대에 집대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1244년(고려 고종 31년, 갑진)에 대장도감에서 간행한 재조본 고려대장경 판본의 하나이다. 두루마리 형태의 이 책은 중급의 얇은 닥종이에 인쇄했다. 상하 여백부분을 잘라 놓았는데 맨 위의 글자가 잘려나간 부분도 있다. 작은 불상의 복장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질과 인쇄상태로 보아 조선전기의 인쇄본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간행된 동일한 간본은 전하는 것이 매우 드물다. 문화재청 제공
권근(13521409)이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저술한 성리학 입문서로, 전집 단간본과 전후집 합간본의 두 가지가 있다. 권근은 공민왕 17년(1368)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이 커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입학도설(入學圖說)은 전집에 천인심성합일지도 등 26종, 후집에 십이월괘지도 등 14종의 도설이 실려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도설로 평가 받고 있는 천인심성합일지도는 성리학의 중심개념인 태극천명이기음양오행사단칠정 등의 문제를 하나의 도표 속에 요약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와 각각의 특성들을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도설은 후대에 이황과 정지운의 천명도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문화재청 제공
용수사 철조여래좌상은 인천시 서구 석남동에 있는 불상이다. 지난 2014년 4월21일 인천시의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했다. 철조여래좌상은 상호가 원만하고 동체가 균정하며 특히 옷깃 등 의문에 조각이 장식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양식수법을 계승한 조선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철조여래좌상은 묘향산에서 모셨던 것이 이곳으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 현재는 석남동에 있는 용수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중기 문신인 유수(柳綏)의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88㎝, 세로 165.5㎝다. 초상화는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는 전신상으로, 얼굴은 선으로 윤곽을 자연스럽게 묘사해 온화한 성품을 표현했다. 관리들이 쓰는 모자는 높게 만들어 당시의 모자 형태를 반영했고 청록색 관복에 한 마리 학문양의 흉배와 허리띠는 당시의 지위를 나타내준다. 의자에 깔린 호랑이 가죽, 발 받침대 위의 돗자리문양 등에서 영조(재위 17241776) 때 초상화의 양식적 특징을 볼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