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1천400년전 日本이 한반도에서 치른 첫 전쟁

660년 7월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정복시켰지만 전후 처리가 신라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신라 입장에서는 생포한 백제 의자왕을 서라벌(경주)로 압송하여 처형을 해야하는데 당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소정방은 의자왕을 비롯 왕자 및 신하 93명 그리고 1만2천여 백제 요인을 끌고 660년 9월3일 당나라로 떠났다. 신라는 전승국이지만 아무것도 차지 못하고 구경만 해야했다. 당나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제를 신라에 돌려 주지 않고 웅진도독부를 세워 의자왕의 왕자 융으로 하여금 백제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니까 친(親) 당 정권을 세운 것이다. 나아가 지금 공주 취리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나누어 마시며 신라 문무왕, 백제 왕자 융, 그리고 당나라 장군 유인원이 화해와 국경 존중의 맹세를 했다. 신라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으나 어쩔수 없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취리산회맹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결국 백제 땅이 중국(당)의 새로운 영토가 된 것에 일본도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로부터 문화를 고스란히 전수받으며 각별한 친교를 누렸는데 그 백제가 당나라 지배하에 들어 가다니.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일본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어 200개의 많은 성(城) 들이 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부흥운동의 중심지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주류성(周留城), 부흥군을 이끄는 지도자는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 그리고 장군 흑치상지 였으며 이들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을 모셔와 부흥 백제의 상징이 되게 함으로써 더욱 기세를 높였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사를 중국으로 몰아내고 다시 백제왕국을 세울 기회라고 판단하고 663년 8월, 2만7천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그리고 이들 대규모 선단은 금강하구를 통해 사비성(부여)을 향했는데 이것은 강 양편 산과 계곡을 우군이 확보해 주지 않는 한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나당 연합군이 먼저 이 지형지세를 선점했으니 일본군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다 한참 기세가 오르던 부흥군은 내분에 휩싸였다. 주도권 싸움에서 왕족 복신이 승려 출신 도침을 살해하여 부흥군 진영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부흥군의 상징이던 왕자 풍이 도침을 살해한 복신을 죽이고 고구려로 도피했고 부흥군의 최고 장군이던 흑치상지마저 진영을 버리고 당나라 유인원장군에게 항복을 했으니 부흥군은 그야말로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따라서 금강 양안의 안전루트를 확보하지 못한 일본군 2만7천명은 나당 연합군의 협공에 제대로 싸워 보지 못하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8월28일 백강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이것이 한반도 역사상 한일중이 이땅에서 벌인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그 후에도 벌어질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의 신호탄이기도. 오늘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사면초가가 된 우리 입장에서 되새겨 볼 역사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日本式 라면식당이 유죄?

변평섭 1993년 10월 10일, 전북 서해 위도에서 110톤급 여객선 훼리호가 침몰하여 292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있었다. 그 원인으로는 정원초과, 기상예보 무시, 조종미숙, 연료를 아끼기 위한 위험한 항로의 운행 등을 꼽았다. 이와 같은 사고원인들은 그 다음해에 발생한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건에서도 똑같이 지적됐고 2014년 4월의 세월호 침몰에서도 그대로 되풀이 됐다. 특히 세월호나 서해 훼리호, 두 침몰사고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해상사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형 건물화재사건이나 공장의 폭발사고 등도 너무나 똑같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있다. 세월호가 그 큰 여객선의 안전점검을 겨우 13분에 마친 것을 비롯, 모든 사고의 안전 점검이 적당히 눈가림으로 이루어졌고 심지어 검은 거래가 행해졌다는 것, 그리고 사고가 터지면 이성적 접근보다 감정으로 대응하며 허둥대는 것 까지도 그렇다. 6ㆍ25도 마찬가지 미국이 아시아ㆍ태평양 방위선을 말하는 에치슨 라인이 발표되면서 북한의 남침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안일한 평화무드에 잠자고 있었다. 심지어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남침하면 즉시 반격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것이라고 허풍을 떨었고 에치슨 라인에 한국을 포함하는 적극적 외교나 38선의 안전점검도 없었다. 1998년의 IMF사태도 세월호 안전점검 하듯 그렇게 정부의 안일자세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사태는 벌써 시작되었는데 관계자들은 처방을 헛집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MIT교수인 로디거 돈 부시박사는 우리의 IMF사태는 관료의 무능 때문이라고 까지 지적했다. 지금 우린 격한 반일 감정에 깊이 빠져 들고 있다. 반일(反日)이 아니라 극일(克日)이라고 하지만 역시 이성이 아니라 감정적 대응이 앞서고 있다. 극일(克日)은 그야말로 감정이 아니라 냉철한 지혜가 필요하다. 어느 TV의 앵커는 방송중에 자신이 들고 있는 볼펜을 들어보이며 이것은 일제(日製)가 아니라 국산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볼펜은 거의 100% 국산이다. 과거에는 일본에 가면 볼펜을 사서 선물로 나누어 주던 때도 있었으나 이제 우리 국산 볼펜의 기술력이 좋아져 오히려 외국에서 우리 볼펜을 사간다. 심지어 일본식 라면식당에 손님이 없어 울상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라면이 일본것인가? 국민1인당 연간 70개의 라면이 소비될 만큼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 시조는 중국의 납면(拉麵), 이것이 일본에 와서 랍면의 중국 발음이 일본식 라멘이 되었고 면발도 중국것 보다 굵어졌다. 다시 우리나라에 오면서 라면이 되었고 고춧가루를 넣어 매운 맛을 내는 등 한국식 라면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그리고 종주국 중국을 비롯 일본, 미국 등에 연 4억 달러 상당이 수출되고 있을 정도로 세계 라면 업계를 주름 잡고 있다. 이런 우리 라면을 일본식으로 조리를 했다하여 식당을 외면하면 그 피해는 우리 국민이 입는다. 도쿄 올림픽 불참일본 전역의 여행 규제, 우리 청와대와 정부를 조롱하는 듯 미사일을 쏘며 위협하는 북한과 경제협력으로 단숨에 일본을 따라 잡는다는 평화경제, 그리고 죽창이니 경제 임시정부니 하는 등의 비현실적인 주장이나 감성적 언어가 과연 얼마나 극일(克日)에너지가 될 수 있을까? 소재공업의 기술 개발과 육성, 국제외교에서 우위권 확보책 등을 실질적으로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가 극일(克日)의 길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제 경제규모 세계12위 국가답게 사전 점검이 철저하게 이뤄지고 그 전략에 충실한 국가체계가 바로 세워져야 국민 마음이 편해진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연구실에 불을 켜라

세계적인 과학자 뉴튼이 1665년 영국 고향집 뜰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자기 앞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툭 하고 떨어 졌다. 그러나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은 떨어 지지 않았다. 뉴튼은 이 것에 영감을 얻어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 낸 것이 역사적인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뉴튼은 이렇듯 연구에 몰두하면 모든 것을 하나로 집중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에피소드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달걀을 삶는 데 자기 시계를 달걀로 착각하고 냄비에 끓였다는 것. 대전에 있는 대덕연구단지에는 이와 같은 뉴튼의 연구 정신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로 뉴튼의 사과나무가 한 그루가 심겨져 있다. 물론 뉴튼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 영감을 주었던 바로 그 사과 나무다. 그것이 종묘로 이어 저 한국에 오기 까지는 5대가 걸렸다. 우리 과학자들 역시 뉴튼 못지 않은 정신으로 열심히 연구를 하며 오늘의 대한민국 발전의 동력이 되어 왔음도 사실이다. 그런데 점차 우리 연구실의 불이 꺼져 가듯,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보도에 의하면 대덕연구단지 25개 국가 출연 연구기관 중 내년과 올해 사이에 528명의 고급 두뇌들이 정년퇴임을 하게 된다. 문제는 이렇듯 많은 고경력자들의 대거 은퇴로 인한 연구 기능 저하와 그로 인한 국가적 손실을 어떻게 보완하느냐다. 정말 국가적 자산인 이들의 연구 경험과 경륜을 사장시키고 단절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인데 그에 대한 활용 시스템은 없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과학인재관리의 허점을 한국 최초의 항공 우주사 이소연 박사에게서도 뚜렷이 본다. 그는 국민세금 265억원을 들여 2008년 4월 러시아 소유즈호 (로켓 TMA-12)를 타고 우주를 비행하고 왔지만 그가 근무하던 항공우주연을 퇴사했고 미국으로 건너 갔는데 한국국적을 버리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본 후쿠시마 농산물 홍보에 등장, 논란이 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국내에서는 먹튀논쟁이 뜨거웠지만 사실 우리 과학기술정책에도 문제가 있었다. 지구 귀환 4년 동안 우주인 관련 연구 4건, 우주과학논문 30건 등의 실적을 보였지만 무려 235회에 걸친 외부 강연, 90회에 걸친 각종 행사 참석에다 TV등 203회에 걸친 매스컴 출연을 소화했으니 언제 연구실을 지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연구실 불을 끄게 한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인가? 이소연을 강연장이 아닌 연구실을 지키게 했으면 뉴튼의 연구실적 같은 것을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즘 일본이 한국 반도체산업의 핵심 부품수출을 규제를 비롯한 화이트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온 나라가 들 끓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하는 것만으로 위기를 벗어 날 수는 없다. 문제는 소재기술에 등한했던 우리 자신도 돌아 봐야 한다. 일본에 못지 않는 우수한 연구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주52시간 근무제를 반도체 연구기관에는 완화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아니, 연구실에는 밤에도 불이 켜져 있는 게 정상이 아닌가. 연구실에 불을 밝히자. 20명 이상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낸 일본을 이기는 길이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종이 호랑이는 싫다

1970년대 미국인들의 생활 패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음식에는 소금이 많이 들어가 짠맛을 내었고 캐딜락 같은 큰 승용차가 점점 작은 차로 바뀌었다. 심지어 큰 저택을 선호하던 주택 취향도 작은 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무엇이 이렇게 우쭐대던 미국인들을 왜소하게 만들었을까? 사회심리학자들은 그 첫째 이유로 베트남전쟁의 패배를 꼽는다. 10년 동안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젊은이들 5만8천여명이 목숨을 잃고도 맨손으로 무참히 철수하는 모습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곧 이어 벌어진 워터게이트 사건과 닉슨 대통령의 퇴출은 미국인들의 도덕심까지 땅에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미국인들 자존심에 결정타를 가한 사건은 이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 점령되어 40여명의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은 것.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미군 특공대가 1980년 4월 카터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구출작전에 나섰다가 이란의 황량한 사막에서 모래바람 등 예상 못한 장애물로 실패하고 인명손실만 가져 온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속에 영화 슈퍼맨 이라던지 람보 원더우먼 같은 것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허전한 미국인들을 달랬다. 이들 영화 모두가 황당할 만큼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여 적을 박살내는 것들이다. 종이호랑이가 싫다 강한미국을 갈망하는 미국인들의 가슴을 파고 든 것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인들은 강한 미국을 캐치프레이스로 들고 나온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과연 레이건은 확실하게 미국의 안보를 이끌었고 불법 파업에 대한 단호한 조치 등등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아 재선에도 성공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은 1637년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청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한 소위 삼전도의 굴욕 일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얼마 안돼 또 다시 겪은 전란에 백성들 삶은 피폐해 졌고 민족자존심은 송두리째 짓밟힌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론을 내걸고 준비를 해나갔다. 그 당시 국력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게 가능했을까? 그러나 그의 북벌론은 국가안보에 늘 당하기만 했던 백성들에게 큰 정신적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백성들은 일본의 침략에 지쳤고 오랑캐의 침략까지 당하면서 희망을 잃고 있었다. 이럴 때 송시열의 북벌론은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국민들 마음에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지난 주 그와 같은 우려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북한이 5월에 이어 또 미사일을 발사한 것과 우리 영공에서 러시아, 중국, 일본 등 4개국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 등 30대가 뒤엉켜 자칫 큰 위기를 가져 올 뻔한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국방부, 군 당국이 보여 준 자세는 국민들 눈에는 매우 어설프기만 했다. 1983년 9월 러시아는 우리 대한항공 여객기가 그들 영공에 들어 왔다는 것만으로 로켓을 발사, 269명의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러고도 지금껏 사과 한 번 없지 않은가.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못해도 그들 정찰기를 강제착륙까지는 가능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단호한 의지 없이는 안보는 국민을 안심시킬 수 없다. 상황 발표문 하나도 눈치를 보며 북한에 대해서도 할 말 못하는 우리 처지가 참 안쓰럽기만 하다. 호랑이가 되어야지 종이호랑이가 되어 선 안된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임진왜란 때 잡혀간 朝鮮 도공들

17세기까지 유럽은 도자기를 굽는 가마의 온도를 1천200도 이상 높이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1천200~1천400도에서 구워 내는 일본 아리타(有田), 그리고 사츠미에서 생산되어 유럽으로 건너 온 도자기들은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 도자기들은 특히 식기, 접시, 찻잔 등에 예쁜 무늬와 문양까지 그려내니 수요가 폭발적일 수 없었다. 런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는가 하면 당시 유럽과 아시아를 주름잡던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일본 나가사끼에서 무한정 도자기를 수입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팔았다. 따라서 일본은 도자기의 유럽 수출로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고 이 돈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도자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의 도공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때 잡혀간 조선 도공들은 400명이나 되는데 노예상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 사냥을 하듯 일본은 우리 도공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간 것이다. 그리고 영주들은 전리품을 나누어 갖듯, 서로 많은 도공들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들 도공들 중에서도 충남 공주 반포면 학봉리에서 잡혀간 이삼평(李參平)과 전라도에서 잡혀간 심수관이 가장 뛰어난 도공들이었다. 이들이 일본에 오기까지 그들의 밥그릇은 왕대나무 자른 것이나 나무를 잘라 속을 파낸 것 등이었고 사발 같은 도자기로 된 것은 일반화되지 못했다. 조선이나 중국에서 가져간 얼마 안되는 자기류는 높은 신분의 집에서나 사용했던 것. 그러나 이삼평 등이 일본에 가자마자 도요를 만들어 도자기를 구어낸 것은 아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백토가 없었다. 조선에서 가져간 백토가 조금 있었으나 그것은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20년을 흙을 찾는 일에 소비했고 영주들은 전국을 훓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이삼평이 마침내 찾아낸 곳이 사가현에 있는 아리타. 이삼평은 이곳에 도요를 만들고 일본이 그토록 갈망하던 자기를 구어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1616년. 그러니까 1616년은 일본 도자기의 출생년도가 되는 것이다. 이삼평은 잡혀 오기전 계룡산에서 만들던 철화분청사기를 정성들여 세상에 내놓았으며 그 은은하고 질박한 멋스러움에 모두들 탄성을 올렸다. 나아가 그 분청사기에 아름다운 문양을 넣어 유럽인을 매혹시킨 것이다. 이러니 일본인들이 이삼평을 일본 도자기의 신(神)이라는 뜻으로 도신(陶神)이라 불렀고 실제로 그를 신격화하여 신사(神社)까지 만들었다. 정말 이삼평이 시작한 아리타의 도자기 작업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400년 이어 오면서 인구 2만의 이 조그만 도시에 도요가 1천400개나 됐고, 백토를 캐느라 산 하나가 거의 사라질 정도니 짐작이 간다. 그리고 365일 세계 여러나라에서 오는 관광객으로 붐비고 골목 마다 온통 도자기 가게다. 그러니까 일본은 삼국시대, 특히 백제로부터 불교에서부터 천자문과 논어, 옷감 염색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문화로 눈을 떴고 임진왜란 때 잡혀 간 조선 도공들로 하여 명치유신의 큰 혜택을 받았는데 지금에 와서 반도체 핵심기술로 우리의 급소를 찌르는 것은 정말 역사의 배신이 아닐 수 없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보수의 분열과 한풀이

JP(김종필 前 국무총리)는 그야말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우리 현대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음모와 배신이 찌들어있는 정치를 하면서 그가 겪은 회한을 말하라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생전에 한 언론에서 재미있는 말을 했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거나 배신한 사람을 이기는 방법은 그 사람보다 오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JP는 그보다 먼저 92세를 일기로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인생은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1952년 그 유명한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했는데 국회에서는 서민호 의원을 조사단장으로 현지에 파견했다. 서 의원은 1903년 전남 고흥 출신으로 미군정(美軍政)하에서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를 거쳐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조사활동 중 현역 육군대위의 암살위협에 갖고 있던 권총을 발사하여 대위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서 의원이 군법회의에 의해 구속됐는데 국회는 정당방위라는 서 의원의 주장을 받아들여 석방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는 국회의 결의를 거부하였고, 서 의원은 4ㆍ19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8년이나 교도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손자가 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첫째 손자의 이름을 치승(治承)이라 했고, 둘째는 치만(治晩)이라 지어 보냈다고 한다. 치승(治承)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을, 치만(治晩) 역시 그 이름의 끝 자를 딴 것으로 이승만을 다스리라는 뜻이다. 그 이름은 그대로 호적에 올렸는지, 그냥 하나의 정치적 결기를 표현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하여 긴 세월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그래서 자신의 정치활동이 중단됐음이 한(恨)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출감 후 5ㆍ6ㆍ7대 국회의원에 내리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을 하고 대통령 후보에까지 올랐다 사퇴하는 등 정치가도를 달렸으나 72세에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만약 8년을 교도소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더 화려한 결과를 가져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 JP의 경우처럼 인간의 운명은 자기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지금 우리 정국(政局)은 벌써 내년 4월의 국회의원 선거로 몰입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내년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중요하고 작금의 정치상황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광화문 광장의 천막 문제로 연일 서울시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우리공화당과 지금 수감 중에 있는 박근혜 前 대통령과의 관계일 것이다. 박근혜 前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고 사법당국에 의해 수형생활을 하고 있지만 선거라는 것이 도덕 교과서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안개처럼 보이는 박근혜-우리공화당의 등식이 확실해지면 보수 지지층이 겹치는 영남권에서 자유 한국당은 의외의 변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바른미래당 역시 보수층과 겹친다. 그래서 더불어민주당이 야당(野黨) 복(福)이 있다고 하는 것일 것이다. 특히 박근혜 前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한 국회의원 지역에는 반드시 공천자를 낼 것이라니 민주당으로서는 속으로 기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광화문 광장과 한(恨), 보수의 분열 그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은 답답할 뿐이다. 한(恨)은 한(恨)일 뿐, 정치의 동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변평섭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日 경제보복… 우리 ‘골키퍼’는 어디 있는가

그러나 또한(but also)이것은 일본인이 일상 생활에서 제일 많이 쓰는 말이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1944년 미국 국무부가 도대체 일본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풀기 위해 당시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1887~1948)에게 연구 용역을 의뢰했었다. 어떻게 폭탄을 안고 비행기를 몰아 미군 함대에 자폭하며 천황 만세!를 외치는가? 또 어떻게 다도(茶道)를 숭상하며 그 은은한 향기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이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고 잔인한 생체실험을 하는가? 이런 일본인에 대해 미국은 본격적으로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연구를 의뢰 받은 베네딕트 교수는 일본을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었지만 인류학적으로 연구 보고서를 냈는데 그 제목이 국화와 칼(Chrysanthemum and the sword)이었다. 이 보고서 속에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그러나, 또한이라고 소개했다. 애매모호함, 이중성, 겉과 속이 다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보고서 제목이 국화와 칼 자체가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 손에는 국화를 들고 있지만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는 모습-국화는 겉 모습(다테마에)이고, 허리의 칼은 속 마음(혼네)라는 것이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이와 같은 일본의 실상(實像)을 경험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오래 동안 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3년, 케네디 전 대통령의 딸 캐럴라인이 주일 대사로 부임해 오면서 일본의 국화와 칼 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케네디 대사가 와카야마현 다이지에서 일본인들이 귀여운 돌고래를 잔인한 방법으로 잡아 그 고기를 즐기는 축제를 보고 일본 정부에 항의를 했다. 와카야마현 다이지 돌고래 사냥은 일본내에서도 제일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케네디대사의 항의를 받고 일본 고유의 전통이라는 이유로 거부했으나 전 세계적으로 일본 돌고래 사냥을 규탄하는 캠페인이 벌어 지자 2015년 이를 중단했다. 일본은 지난주부터 우리 나라에 대한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핵심 소재 3종의 수출 규제에 나섰다. 이렇듯 일본이 수출 규제를 하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고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도 심각하다. 우리 경제 급소를 찌른 것.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처음 있는 경제 충돌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날까? 일본은 한국과의 경제충돌에서 앞으로 전개될 그들의 매뉴얼이 여러 가지로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에 대한 준비없이 일을 당하고만 있다. 그저 답답하다. 강경화 외부장관은 지난 2일 일본 경제 보복에 대해 앞으로 상황을 보면서 후속대책을 연구해야 할 것 같다고 했고 이에 앞서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이것으로는 국민을 안심시킬 수 없음은 물론이다. 왜 우리는 강제징용의 대법원 판결 이후 벌어 질 일본의 대응에 대해 매뉴얼을 만들지 않았을까? 일본에는 한국을 연구하여 먹고 사는 사람이 8천명이나 된다고 하는 데 우리는 과연 얼마 만큼 일본을 알고 있는가? 전에는 우리 외교부에 제네바 사단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FTA등 대외 협상의 베테랑들이 포진하고 있었다는 데 요즘 외교부는 썰렁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지금이라도 국화와 칼을 확실히 파고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무자비하게 돌고래 사냥을 즐기는 그들을 대비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중국, 우리 인삼시장까지 ‘굴기’

1840년 영국과 청나라의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 부터 중국에는 영국 상인들의 아편 거래가 활발했다. 1780년에 1만 상자의 아편이 중국에 들어 왔고 해마다 아편 수요는 늘어나 중국인들을 병들게 했다. 이런 가운데 아편중독을 치료하는 약으로 조선에서 건너 온 홍삼이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엄청난 돈을 벌어 거부가 된 사람이 임상옥(林尙沃)이다. 그는 중국을 왕래하며 주로 인삼을 수출하던 아버지로 하여 1779년 평안도 의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무역을 배우며 성장했다. 그는 부패한 정치권을 교묘하게 이용, 중국에 대한 인삼무역의 독점권을 획득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이권이었다. 한 번은 그가 많은 홍삼을 가지고 중국 베이징에 나타났는데 중국의 거래상들이 일제히 단합하여 임상옥의 홍삼을 비싸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불매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임상옥은 이런 위기 앞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가져 간 홍삼을 베이징 광장에 쌓아놓고 여러분이 우리 홍삼을 사지 않겠다면 할 수 없이 이것을 불태워 버리겠소 하고는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자 중국 상인들은 자기들이 잘못했다며 오히려 값을 올려 홍삼을 삽시간에 사갔다. 그는 이렇게 하여 벌어 들인 엄청난 돈을 조선에 돌아와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사용했고 그 공덕으로 1832년 곽산 군수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부사로 까지 승진시키자 아무리 선행을 했어도 이건 너무하다는 비난이 거세져 결국 해직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거상 임상옥의 스토리는 MBC에서 1977년 드라마로 인기리에 방영된 바 있다. 어쨌든 이렇게 고려 인삼이 중국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휩쓸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 이라 하여 고구려, 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듯 우리 고려인삼을 인정하지 않고 인삼공정을 벌이고 있다. 그만큼 인삼이 점차 세계적 경제가치가 높아 지고 있고 국제시장에서 한국 고려 인삼의 질적 우수성을 추월할 수 없자 대대적인 인삼공정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중국 인삼이 엄청난 물량공세로 시장을 장악하려 하지만 가격에서는 1㎏에 1천위안(한화18만원)으로 한국고려인삼의 10%에 불과하여 경쟁력에서 크게 뒤지고 있다. 그만큼 우리 인삼의 사포닌 성분이 우수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했는지 우리 인삼 종자를 불법으로 확보하여 지린성 장바이산(백두산)에 3년에 걸쳐 대량으로 뿌렸다. 그러고는 한국의 인삼은 밭에서 생산하지만 장바이산 인삼은 무공해 산속에서 생산한다고 선전하는데 2011년에는 133억위안(2조4천억원) 어치를 2013년에는 290억위안 어치를 생산, 세계 시장의 70%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뿐만이 아니라 인삼의 원산지가 백두산 주변이라는 주장을 제기, 2014년 발효된 나고야 의정서에 따라 우리 인삼화장품등 제품에 대한 적절한 이익공유를 요구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어쨌든 이렇듯 중국은 지금 인삼의 세계시장 점유를 위해 인삼공정을 밀어 붙이고 있다. 그 결과 홍콩 시장에서 조차 2009년만 해도 우리 인삼이 26%를 점유했으나 지금은 13%로 반 토막이 나버려 인삼 종주국의 지위가 무너지고 있다. 우리 경제의 기둥인 반도체 시장을 추월하는 이른바 중국의 반도체굴기 (起)가 무섭게 요동치듯, 인삼 시장도 그렇고, 한반도 정세도그렇게 중국은 우리를 흔드는 두려운 이웃이 되고 있다. 이럴 때 중국 상인을 굴복시킨 거상 임상옥 같은 인술이 그립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미군의 첫 오산 전투

1950년 7월5일 미 제24보병사단 21연대 제1대대의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스미스부대는 북한군을 과소평가하며 오산 죽미령 고개에 진지를 구축했다. 병력도 겨우 406명. 이들이 그렇게 북한군을 무시했던 것은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독일군을 무찌른 역전의 용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예기치 않게 전개됐다. 7월5일 오전 7시 북한군 제4사단 제107기갑연대가 탱크를 앞세워 공격을 개시했는데 비가 내려 미군 측 비행기가 뜰 수 없었고 105㎜ 곡사포와 75㎜ 무반동총으로는 적의 탱크를 막아 내는 데 역부족이었다. 겨우 탱크 2대를 격파한 미군은 오전 10시 오산으로 후퇴했으며 오후 2시에는 북한군 4사단의 주력부대가 물밀듯 공격해 오자 오산도 포기하고 천안으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60명이 전사했고 8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북한군도 120명이 죽었다. 이것이 1950년 6ㆍ25 전쟁에 미군이 이 땅에서 북한군과 벌인 첫 전투였으며 이를 오산 전투 또는 죽미령 전투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첫 전투로서는 너무 큰 손실이었다.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오산-안성에서 적을 격퇴하겠다는 계획이 실패하자 산하 34연대를 천안에 급파하여 또다시 전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을 막지 못하고 연대장 마아틴 대령이 전사하는 불운마저 겪게 된다. 연대장의 전사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딘 소장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 장군에게 대전차포의 긴급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지금 세종시 전동면에 있는 개미고개에 진지를 구축했다. 개미고개는 차령산맥을 가로지르는 분수령이자 경부선 철도와 국도 1호선이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 개미고개 능선에 배치된 미군은 667명이었으며 계곡은 안개가 자욱하여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악조건 속에 적은 포위망을 압축해 왔고 미군은 7월6일부터 7월11일까지 5일간을 버티며 용감하게 싸웠으나 너무나 희생이 커지자 이곳도 포기하고 조치원으로의 후퇴를 단행한다. 이 개미고개 전투에서 미군 667명 중 517명이 목숨을 잃었다. 거의 90%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은 것인데 한국전에서 한 전투를 통해 이렇게 인명 손실을 입은 것은 개미고개 전투가 유일하다. 그러니까 오산 죽미령에서 60명을 포함 불과 1주일 사이에 미군 577명이 희생됨으로써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렇게 큰 희생이 있어 미군은 다시 금강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물론 금강 방어선도 얼마 안 가 무너졌지만 여기서 또 시간을 벌어 6ㆍ25 최후의 전선, 낙동강 방어선이 견고하게 구축될 수 있었다. 그렇게 죽미령 오산 전투-천안 전투-개미고개 전투를 거치면서 견고한 낙동강 방어선이 완성됐고 지원군의 도착, 대전차포를 비롯 강력한 무기의 배치, 공군의 제공권 장악 등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북한군은 계획대로 부산, 제주도까지 손에 넣고 이 나라는 공산치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죽미령과 개미고개에는 고귀한 희생을 치른 미군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그 전투가 있었던 날에는 조촐한 행사가 열린다. 그리고 진혼곡나팔이 울려 퍼지면 머리 숙여 눈을 감는다. 그런데 올해는 6ㆍ25 69주년을 보내는 마음이 무겁기만 한 것은 왜 그럴까?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실세는 있다

조선 초기 세조는 단종을 퇴출하고 왕좌에 오르는 데 명분과 공의를 극복할 측근들이 필요했고 그 대표적 인물이 한명회였으며 이들이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였다. 이 훈구파는 조선 역사를 통해 수없이 등장했고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 때는 훈구파라고 하는 공신이 117명이나 되었으며 이들이 하사 받은 땅이 큰 부를 이루었다. 또한 요직을 독점하는 그야말로 적폐의 대상이었다. 조광조가 이 적폐 청산에 나서 훈구파(공신) 76명의 땅을 회수하고 노비를 몰수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죽음을 당해야 했다. 중종 이후에도 이와 같은 공신이 출현했고 역사에 기여도 했으며 때로는 역사를 후퇴시키기도 했다. 정부수립 후에도 마찬가지다. 5ㆍ16 쿠데타에는 육사 8기생들이, 그리고 군사정부 시절에는 하나회, 심지어 오늘까지도 친노, 친문, 친박, 친이 라는 용어들이 정치무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그 속을 들어가면 진골, 성골 등 신라시대의 골품제도에서 보는 품계가 그들 실세들의 등급이 정해지기도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정반대이던 안희정 충남지사, 이광재 강원지사와 자리를 함께한 일이 있었다. 2010년 9월 부여공주에서 개최된 백제문화제 개막식. 행사가 끝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공교롭게도 이명박 대통령 우측에는 안희정 지사, 좌측에는 이광재 지사가 인사를 하며 반겼다. 그러자 누군가 우 희정, 좌 광재가 됐네요 하고 말해서 웃음이 일었다. 이 두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1등 공신들로 세간에서는 우 희정, 좌 광재로 노 전 대통령의 복심임을 표현했었기 때문이다. 좌 ○○, 우 ○○는 노무현 전 대통령 때만이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 때도 있었다. 그 시절 상도동계하면 김영삼, 동교동계하면 김대중 정치세력을 말했는데 각각 복심이라고 하는 측근들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 공신의 대표격인 김동영, 최형우를 일컬어 좌 동영, 우 형우라고 부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복심들은 특별히 군사정권 시절 혹독한 탄압과 감시를 받으며 결속돼 좌 ○○, 우 ○○ 할 것 없이 가신(家臣)처럼 묶여 있었다. 권노갑, 한회갑, 김옥두, 이용희. 이들은 감시와 투옥을 겪으면서도 동교동을 떠나지 않고 충성심을 발휘했는데 집권을 하고 나서는 비난과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여 2003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동교동계의 해체를 지시하기 까지 했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뿐 아니라 어느 시대든 복심, 가신, 실세, 측근, 주류, 비주류 등 이른바 권력창출을 위한 그룹이 있기 마련이다. 요즘은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행보가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알려 진 데다 국회의장,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그리고 김경수 경남지사 등 전국 지방단체장과 만나며 업무협약을 맺는 등 광폭행보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정당 싱크탱크 책임자가 그렇게 튀는 행보가 없었기에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에게는 어떤 그룹이 있는 지 아직은 뚜렷이 떠오르는 게 없다. 하지만 친박ㆍ비박은 여전히 당의 진로와 정권 창출의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정치에는 정답이 없으며, 싱크탱크 답안대로 해서 정치 잘 한다는 법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홍준표-유시민의 정치 실험

2013년 10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베트남의 보 구엔 지압 장군은 생전에 프랑스와 싸워 이겼고 미국과도 싸워 이긴 그야말로 전쟁 영웅이다. 보잘 것 없는 가난한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세계 최강국의 군대를 물리친 그를 나폴레옹 보다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하고 그래서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무엇이 그를 전쟁 영웅이 되게 했는가에 대해 흔히들 지압 장군의 삼불(三不) 전략을 말한다. 적의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 것.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는 것.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는 것. 이와 같은 차별화된 전략, 틈새 전략은 경영학에서는 니치 (Niche) 또는 니치버스터 (Nichebuster)라는 이름으로 시장을 공격하고 있다. 이렇듯 거대 주류(主流)를 무너뜨릴 만큼 틈새 전략이 가능할 수 있게 된 것은 인터넷과 온라인 시스템이 시장 환경까지 돌변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화점 천국으로 정평 나 있는 일본에서 해마다 문닫는 백화점이 늘어나고 있는데 지난해는 6곳이 문을 닫았다. 심지어 백화점에 가서 자기 취향에 맞는 물건을 고르고 주문을 온라인 쇼핑몰에 하는 등 소비문화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변화에 미국의 대표적 유통기업 울 워스가 파산을 했으며 많은 거대 주류기업들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렇듯 주류에서 사라지는 기업들은 온라인 쇼핑 등 소셜 미디어 환경의 급변과 소비자의 의식 변화에 적응을 못했기 때문이며, 반대로 중국의 알리바바 같이 그 변화를 스스로 일으킨 기업은 신 주류로 세계 무대를 주름잡고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머지않아 드론으로 소포를 배송한다는 보도도 있다. 소비자에게 최단시간내에 주문한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드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변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이와 같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을 못하는 곳이 정치권이다. 10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그 형태, 그 묵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 유튜브, 페이스북 등 SNS 수단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을 정치에 이용하는 데는 아직도 한계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와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의 합동 유튜브 방송 홍카레오가 우리 정치의 새로운 영역, 곧 틈새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는 평을 받고 있다. 홍준표측 홍카콜라의 구독자 수가 30만을 넘긴 것(4일 밤 8시 기점)이나 유시민측 역시 80만 대의 구독자 수가 84만을 넘은 것을 보면 정치 평론가들 말처럼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특히 이들은 국회의원도 아니고 정당의 당직을 맡고 있지도 않은 정치무대의 아웃사이드에 있는 위치다. 그런데도 이같은 성과를 올렸다는 것은 정치의 틈새 전략이 콘텐츠만 좋으면 오히려 정치의 주무대까지 위협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 아닐까. 역시 문제는 이런 틈새 전략에서 국민의 관심을 모으려면 콘텐츠를 어떻게 생산하느냐 일 것이다. 이번 홍준표-유시민의 홍카레오는 보수와 진보의 대표적 입이라는 것과 그 내용 또한 북한 핵문제, 적폐 청산문제, 유시민의 대선출마 여부, 홍준표의 정치재개 여부 등 국민들의 관심을 끌만한 콘텐츠가 많았던 것도 양쪽 모두 남는 장사를 하게 했으나 앞으로도 그런 콘텐츠 생산이 지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이번 홍카레오는 우리의 새로운 틈새 정치의 문을 열었고 두 사람은 이미 그렇게 틈새 정치 실험을 시작했다고 할 것이다. 변평섭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K사무관이 日記를 중단한 것은

4월 강원도 산불로 두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그런데 처음 사망자는 1명으로 발표했다가 나중에 1명이 추가되어 두 명이 되었는데 그 과정이 매끄럽지가 않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에 사는 박모 할머니(71)는 초속 24㎞의 강풍을 타고 산불이 급습할 때 주민들에 대한 대피방송을 듣고 마을회관으로 가다가 강풍에 날아온 지붕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공무원들은 처음에는 개인 부주의에 의한 안전사고로 판단, 화재로 인한 사망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다 어떻게 이것이 산불로 인한 사망자가 아니냐는 여론이 일자 뒤늦게 강원도 재난안전대책본부는 사망자로 인정하기에 이른 것. 공무원들이 안전사고라고 보고한 것은 직접 박모 할머니의 몸에 불길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산불 사망자로 보고했다가 자칫 훗날 감사에 적발될 수 있다. 감사에 적발되면 징계에 회부되고 그것은 신상에 불이익을 가져온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밖에서 무사안일이라고 비난하든 말든 후환이 없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박할머니는 그의 71세 생일을 맞는 날 안타깝게도 장례를 치렀고 유족들은 소정의 장례비와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공무원들의 발을 묶는 것은 감사라는 이름의 저승사자다. 필자가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무할 때 주민의 입장에서 새로운 일을 벌이려 해도 그럴 때마다 직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중에 감사 때 누가 책임질 겁니까? 하는 것이었다. 공연히 일을 벌여서 후환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되는 쪽보다 안 되는 쪽을 택하는 부정적 의식이 체질화돼 있다. 정말 공무원은 감사의 촘촘한 그물에 갇혀 산다. 자치단체의 자체감사가 있고 중앙정부의 감사가 있으며 가장 무서운 감사원 감사가 있다. 이 밖에도 층층마다 감사가 있어 1년 365일 감사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국정감사는 또 얼마나 힘든가. 그러니까 소신껏 일하기 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제일 안전한 것이 된다. 언론에 보도된 국수(국장이 수정 지시), 과수(과장이 수정 지시)하고 공문에 비밀표시를 해둔다는 것도 나중에 후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공무원들의 휴대폰 압수도 잦아지자 휴대폰 관리에도 철저히 해야 한다. 심지어 어떤 공무원은 그동안 써오던 일기도 중단했다. 혹시 압수를 당할 경우 트집 잡힐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무슨 비리나 부정을 저질러서가 아니다. 그 공무수행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 100점도 되고, 정권이 바뀌면 0점도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헌법에 의해 공무원의 신분이 보장되고 정치적 중립도 보장받게 돼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에 비극이 있다. 최근 검찰총장이 웃옷을 벗어 흔들며 옷을 보지 말고 그것을 흔드는 손을 보라고 말한 것은 참 의미가 있는 내용이다. 흔히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 밑에서 환경부장관을 한 이만의씨는 국회에서 4대강 문제로 공격을 받았을 때 환경부 공무원은 영혼이 있다며 4대강 사업에 대한 환경부 공무원들의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후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감사를 무기로 삼아 옷을 흔드는 손이 문제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죽음의 ‘性’접대

멜 깁슨이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1995년 개봉되어 전 세계 영화팬들을 뜨겁게 했다. 잉글랜드 지배아래 있던 스코틀랜드 독립 영웅 월레스와 그의 연인 머론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영화다. 아름다운 머론은 결혼 전 초야(初夜)에 그 지방 영주에게 성접대를 해야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월리스가 그녀를 구출하게 되고 이것이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으로 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옛날 유럽에서는 결혼 전 첫날 밤에 신부를 영주에게 성상납하는 곳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에스키모인들 중에는 손님에게 부인을 성접대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곳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이 난처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구 한말 충남의 어떤 도지사(당시는 도장관이라 함)가 서해안에 있는 안면도를 방문했다. 그리고 육지로 돌아올 즈음 풍랑이 심해서 배를 타지 못하고 면장의 집에서 투숙을 했는데 그날 밤 면장이 자기 애첩을 도지사의 침실에 들게 했다. 성접대를 한 것이다. 이럴 경우 요즘 용어로는 성접대라고 하지만 그때는 객고(客苦)를 풀어 준다고 했다. 여행 중에 피곤한 몸을 풀어 준다는 뜻이다. 지금은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지방에 출장을 가더라고 그곳에서 투숙을 하며 객고를 풀 일이 없지만 과거에는 이런 것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객고에서 출발한 성접대가 여러가지로 진화되면서 국민 정신건강을 좀먹고 사회 부패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 주 구속된 건설업자 윤중천씨의 김학의 전 법무차관 등에 대한 성접대 혐의와 세상을 요란하게 했던 서울 강남의 대형 클럽 버닝썬을 둘러싼 성추문이다. 윤중천씨의 경우 피해 여성이 한 방송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정도로 동물같은 행태가 한 별장에서 벌어졌었고 불면 등 여성들이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수 승리가 비록 구속은 면했지만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으로도 그의 음악을 좋아 했던 많은 팬들을 실망시켰을뿐 아니라 그 화려한 무대 뒤에서는 눈을 가려야 할 만큼 타락한 성(性)의 광기가 펼쳐진 것에 공분을 느낀다. 특히 그가 대표로 있는 엔터테인먼트사에 대한 투자 유치에 성이 등장하는 데는 놀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금 우리 나라는 성도착증에 걸린 환자처럼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 할 것 없이 그 타락의 쓰레기에 함몰하고 있다. 여기에다 SNS를 통해 성 관련 동영상이 무차별적으로 삽시간에 퍼져 청소년의 맑은 영혼까지 병들게 하고 있다. 성경에서 가장 타락하고 음란한 고대 도시로 지목한 소돔과 고모라가 이 땅에 출현되는 건 아닌지 매우 우려스런 지경이다. 기원전 80년 이태리 폼페이가 인근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7m에 이르는 용암이 덮쳐 사라졌다. 이 도시가 1979년부터 지금까지 발굴되고 있는데 그때의 로마제국 생활상태를 거의 온전히 보여 주고 있다. 목욕탕, 공연장, 빵을 만들어 무료로 급식하는 곳, 그리고 사창가 까지. 이곳을 여행한 어떤 사람은 로마가 망한 이유 중에는 공짜 빵 급식과 사창가가 번창할 정도의 성도덕 타락이 아니냐고 했다. 건실했던 로마의 정신이 나태해지고 환락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오늘날처럼 SNS를 타고 성 동영상이 무차별 번지지는 않았을텐데.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아프리카 인질에서 풀려난 女人

40대의 한국 여성이 아프리카 여행 중에 납치됐다 28일만에 풀려나 귀국 비행기에 올랐을 때 프랑스 파리에서는 마크롱 대통령이 인질 구출을 하다 숨진 특공대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특공대는 프랑스인 2명과 미국, 한국 여성 각 1명 등 4명을 인질로 잡고 있는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테러조직을 급습해 인질들을 모두 구출했으나 이 과정에서 2명의 특공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장례식에 도열한 동료 군인들은 내 어머니 만나거든 용서해 달라 전해 주오라는 군가를 불렀고 군악대도 연주를 멈추고 내 어머니 만나거든을 육성으로 노래했다. 그들 옆에 있던 죽은 병사의 어머니들은 군가를 들으며 흐느꼈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들 앞에서 죽은 병사들을 영웅이라고 찬양한 다음 단호한 어조로 프랑스는 국민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국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크롱 대통령의 말이 우리 가슴에 뜨겁게 와 닿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직도 북한 땅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1만3천명의 국군 포로들에 대한 생각 때문일까? 지난 해 한 TV가 국군 포로로 북한 탄광에서 노동하다 영양실조로 숨진 백모 일병의 유골을 외손자가 가슴에 품고 탈북한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 탈북 청년은 외할아버지가 죽어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다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탈북을 결행했다고 토로했다. 국가가 있어 국민을 지켜 준다는 믿음 그래서 공자는 국가를 다스리고 이끄는 데는 병(兵)이나 식(食)보다 믿음(信)을 첫째로 뽑았는지 모른다. 바로 이 때문에 마크롱 대통령은 직접 아프리카에 특공대 진입을 명령했고 프랑스는 국민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한국 여성은 프랑스 군인의 희생속에서 무사히 풀려 날 수 있었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국민 여론은 싸늘했을까? 무엇보다 여행금지 구역 또는 경고지역을 여행한 때문이다. 대부분의 누리꾼들이 여자 혼자 겁도 없이 위험지역을 다녔다든지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한다는 등의 반응을 보인 것만 봐도 이번 사건에 대한 국민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사건의 댓글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자기 인생만 생각하고 무심코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 모두가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정말 이제 지구촌 시대에서는 지리산 계곡에 무심코 버려진 음료수 빨대 하나가 태평양의 생태계 까지도 교란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는 시대다. 2015년 바다 거북의 콧구멍에 빨대가 박혀 고통 받는 동영상이 보도돼 충격을 준 것이 그런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17년 필리핀에서는 500㎏이나 되는 고래가 죽었는데 뱃속에서 40㎏의 비닐이 쏟아진 사건도 있었다. 어디에서 이런 비닐이 떠내려 왔을까? 비닐에 찍혀 있는 상표들이 대부분 중국, 한국, 일본의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 없이 버려지는 플라스틱 병이 1초에 1천500개나 되며 이것이 점차 바다의 생태계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 여인이 생각없이 자기 취향대로 여행을 하다 군인들이 죽고 세계를 놀라게 하듯, 생각없이하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세계를 움직이는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이 이번 사건의 교훈이라면 교훈이 아닐까?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100년 기업이 없구나

대한민국의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2018년 10월 기준으로 해외이민자가 3만명이나 되는데 이것은 지난 10년 평균치 보다 10% 증가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해 해외이민이 크게 증가했다는 이야기다. 이러다 보니 해외이민 알선업체에 의한 피해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해외이민만 아니라 기업들의 해외 엑소더스 역시 점점 높아 가고 있다. 지난 4월26일 현재 2018년 대ㆍ중ㆍ소기업의 해외직접투자는 478억 달러(한화 55조5천억 원)으로 1980년 통계시작 이후 최고의 수치를 나타냈다. 이렇게 최근 10년간 해외로 빠져나간 돈은 2천196억달러(한화 약 255조 원)에 이르고 있다. 이들 투자는 한때 중국으로 몰렸으나 지금은 베트남이 가장 큰 무대가 되고 있으며 인도를 비롯 라오스 등 다양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FDI)가 높아 가고 있는데 대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우리 기업들이 사업하기 어려운 걸림돌을 치워줘야 한다고 했다. 그 걸림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말 기업인들을 만나면 사업하기에 너무나 많은 걸림돌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세금문제, 노사문제, 규제문제, 반기업적 정서문제 등 옆에서 듣기에도 숨이 막힐 것 같다. 법인세 같은 경우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세율을 낮추는 추세이며 특히 상속세 역시 일본이나 독일처럼 현실적으로 운영돼야지 현재의 65%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65%를 상속세로 내려면 현실적으로 가업승계가 어렵고, 상속을 받은 사람이 세금을 바로 내는게 아니라 경영을 하면서 세금을 내게 하는 등의 유연성을 발휘하자는 소리도 있다. 기업을 포기하고 매각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이와 같은 상속세 문제가 큰 원인이 되는 사례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100년 기업을 육성하기가 쉽지 않다. 오랜 역사를 지닌 기업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의 경제환경이 안정돼 있다는 것을 말한다. 100년은 차치하고 200년 이상 된 기업을 갖고 있는 나라로 일본 3천146개, 독일 837개, 네덜란드 222개, 프랑스 196개, 영국 186개인 것 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100년 이상된 기업의 경우 미국 152개, 일본 45개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두산, 동화약품, 몽고식품 등 7곳으로 재벌닷컴이 발표했고 포보스는 단 2곳으로 발표했다. 7곳이건 2곳이건 우리의 100년 기업이 선진국에 비해 너무 초라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장수기업이 나오지 않는 데는 사회적 환경 뿐 아니라 가족갈등과 같은 원인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우리의 대기업 치고 기업승계 분쟁을 겪지 않는 곳이 드믈 만큼 가족전쟁이 심각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왕자의 난으로 일컬어지는 현대그룹의 2대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간분쟁, 한진 그룹의 2대 상속분쟁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한국가족기업연구소장 김선화박사는 우리 나라 기업의 이와 같은 현실을 지적하면서 100년 기업의 핵심가치를 지키는 것이 장수 기업의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상품이 아니라 명품을 만드는 장인정신, 100년이 가도 늙지 않는 온고지신, 직원이 행복한 인간존중 정신 등 핵심가치를 살려 가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경주 최부자집이 300년 이어가는 비결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세종대왕 “패스트트랙이 뭐냐?”

성폭행을 하고도 모자라 살인까지 한 흉악범이 체포되어 경찰로 압송됐다. 흉악범이 차에서 내리자 마자 기자들이 범인을 에워싸고 질문을 쏟아 낸다. 범행을 인정하십니까? 피해자와 아는 사이였습니까? 소감 한 말씀만 부탁합니다. 우리 기자들은 이렇게 흉악범들에 대해서도 깍듯이 존칭어를 쓴다. 정말 그들의 범행을 생각하면 이런 존칭어를 쓰는게 타당할까 의문이 든다. 심지어 인권이라는 이유로 이름도 실명으로 쓰지 않고 A씨, B씨로 표기하거나 김모, 이모 하는식이다. 마약사범으로 체포된 어느 재벌3세에 대한 질문도 마뜩지 않다. 아버지가 경찰 총장과 베프라고 하셨는데 사실입니까? 경찰 총장은 경찰 간부의 직급을 잘 몰라서 한 실수였다지만 베프는 무슨 뜻인가? 신문과 TV자막에도 베프라고 큰 글씨로 내보내는데 국민 얼마나 그뜻을 이해할까? 검색을 해보니 가장 친한 친구나 사람을 뜻하는 Best Friend의 의미라고 나와 있다. 정작 영어권에서도 없는 말이 우리 나라에서 일상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어디 베프 뿐인가. 국적도 없는 신조어들이 매스콤과 SNS를 도배하고 있는 가운데 올 봄을 강타하고 있는 단어는 아무래도 패스트트랙일 것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 국회가 싸움판이 됐고 국회의장이 병원으로 실려 가는 등 우리 헌정사에 한 페이지 불상사를 기록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 말 같기는 한데 국회를 뒤흔든 사보임이란 무언가? 바른 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는 패스트트랙 관철을 위해 사개특위의 오신환 의원과 권은희 의원을 교체하는 1일2사보임의 초강수를 강행,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 과정에서 육탄전이 벌어진 국회에서는 온갖 욕설이 터져 나왔고 폭력적인 언어가 판을 쳤다. 오죽하면 언론에서 이들의 욕설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XX끼 등 XX를 삽입했을까. 욕설은 물론이고 인신공격의 막말은 옮기기도 민망하다. 이럴 때,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의 검은소와 누렁소의 이야기는 따뜻한 교훈이 될것 같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시골 길을 가다가 검은 소와 누렁소 두 마리를 부리며 밭을 가는 농부에게 물었다. 어느 소가 더 일을 잘 합니까? 그러자 그 농부가 황희 정승의 귀에다 대고 아주 낮은 소리로 누렁 소라고 대답했다. 황희 정승이 무얼 그런걸 가지고 귀에다 속삭이느냐고 핀잔을 주자 농부가 대답했다. 짐승도 나쁘게 하는 말은 싫어합니다. 이때부터 황희 정승은 아무리 낮은 사람에게라도 함부러 말을 하지 않았고 상대방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소통을 이루었고 조선 초기 어수선했던 민심을 순화시켜 나갔다. 어디 황희 정승 뿐이 겠는가. 우리 조상들은 하잘것 없는 들꽃까지도 예쁘고 해학적인 이름을 붙였다. 며느리 밥풀꽃, 처녀 치마, 할미꽃, 달맞이 꽃, 꿩 바람 꽃, 강아지 풀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짐승에게도 말 조심하고, 들꽃에도 예쁜 이름을 붙여 주었던 우리 조상들은 부부간에도 존댓말을 썼고 세계 언어 가운데 존댓말이 가장 발달한 것이 한국어다. 요즘 우리 보습과는 너무 상반된 풍속이었다. 백성들의 소통을 위해 한글까지 만드셨던 세종대왕이 오늘의 우리 국회를 보면 회초리를 드실 것만 같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지금 일본과 영국 왕실에선…

요즘 영국과 일본이 왕실의 경사로 들떠 있다. 영국은 해리 왕자와 메건부부 사이에서 태어날 아기 때문이고, 일본의 왕실은 5월1일 나루 히토(德仁)의 즉위식 때문이다. 영국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애정은 특별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출산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는 메건에 대한 뉴스가 매일 끊이질 않는 것도 그렇다. 아기가 출산하면 영국은 전국이 경축 분위기로 빠져 들고 각종 기념품이 백화점 진열대를 채울 것이다. 일본은 이미 레이와(令和)라는 새 왕의 연호를 선포했고 5월1일 트럼프 미대통령을 비롯 세계 주요 국가의 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식을 거행한다. 일본은 나루히토 즉위를 계기로 새로운 국가 도약을 다짐하고 있고 그래서 제2의 유신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일본의 군국화를 의미하는 것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어쨌든 일본 역시 영국 못지 않게 그들 왕실에 대한 애착이 크다. 사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다. 일본의 천황제 유지를 전제조건으로 항복했고 전범재판에서도 제외시킨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한 일본이 패전했을 때 일왕의 책임을 묻기는커녕 자기들이 왕을 욕보였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이 되고서 전혀 왕정을 복귀하거나 최소한 입헌군주제라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해 지난 9일 국회 도서관에서 있은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중국 상하이(上海)대학 스위안화교수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에서 강력했던 공화파 민주주의 사상 덕분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는 중국만 해도 황제 복위를 주장하는 정치운동이 있었으나 한국에는 그것이 없었다면서 그렇게 주장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왕정복귀이 공감대가 형성되니 못했을까?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는 구한말 우리나라를 네 번이나 방문하여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여행담을 런던과 뉴욕에서 출판까지 했다. 일부 왜곡되고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비숍여사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은 관직의 공공연한 매매. 관료의 부패 등이 심각하게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당시 법부대신이 악명 높은 전과자임에도 임명되었고,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 백성들은 별 관심이 없더라고 했다. 예를 들어 일본군이 행군을 하며 동네 앞을 통과하거나 청국군이 그렇게 해도 농민들은 그냥 논밭에서 일만 하더라는 것이다. 농민들이 일본군이건, 청국군이건 외국 군대 이동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관료들에게 억압과 수탈만 당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라에 애정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비숍여사는 서울 거리의 더러움도 상세히 묘사했다. 그러면서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크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들은 서울과 달리 깨끗하고 질서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이속에서는 조선 관리들의 횡포가 없기 때문이라는 진단가지 내렸다. 만약 비숍여사가 구한말이 아니란 더 거슬러 임진왜란 대 선조임금이 백성과 운명을 함께 하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왜 백성들이 나라를 외면했는지 어 확실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본이 새 왕의 즉위로, 그리고 영국 왕실이 새 아기 출산으로 들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사를 생각해 봤다. 역사는 죽은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오늘의 교훈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기업인의 자화상

나는 최근 가깝게 지내던 친구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그를 잃어버린 충격은 쉽게 가라않지 않고 있다. 그는 기계 부품공장을 40년 넘게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인정받는 기업으로 성장 시켰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고난도 겪어야 했다. 처음 공장을 시작할 때 마당에 아스팔트 포장을 못해 자갈을 깔고 일을 했는데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공장안으로 날라 와 입안에서 모래가 씹힐 정도였다. 오일쇼크 때는 연료를 아끼느라 인근 피혁공장에서 쓰레기로 버린 가죽을 주어다 불을 피우기도 했는데 냄새가 지독하여 그냥 추위를 견디며 작업을 했다. 그래도 기업주와 직원들은 일에 대한 열정 하나로 보람을 갖고 일했다. 뚝심도 있고 직원들과 소통하는 친화력도 있던 그는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미국에도 진출하여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외국에서 수입하던 특수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외국에 수출하는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일벌레 소리를 들을 만큼 일 밖에 몰랐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불운의 그림자가 그를 엄습해 왔다. 사드 사태로 빚어진 중국과의 관계, 자동차 시장의 급격한 환경 변화이런 것이 그를 강하게 압박한 것이다. 오일쇼크도 이겨 냈고, 금융위기, IMF도 헤쳐 왔지만 이번의 찬바람은 너무 버거웠다. 그래도 그는 겉으로 태연했다. 그가 쓰러지기 이틀 전에도 1~2년 견디면 하고 담담해 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뇌출혈이 강타한 것. 스트레스가 몰아친 것일까? 회장님, 사장님, 부장님하고 불리우는 그럴싸한 우리 기업인들 역시, 내 친구를 앗아간 스트레스의 포로에서 풀려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소기업인도, 자영업자도 마찬가지. 지난주 우리는 대한민국의 항공업을 세계수준으로 발전시킨 조양호 회장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그는 8개월동안 18번의 압수수색을 당했고, 포토라인에 선 횟수는 14회나 된다고 한다. 포토라인에 섰을 때 축 늘어진 그의 어깨와 피곤에 지친 그 얼굴, 그런데도 용케 버티어 간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다 가족들의 일탈행위는 세상을 계속 시끄럽게 만들고그리고 그가 미국에서 치료받는 동안 국민연금의 대한항공 주주권행사에 의한 대표이사 박탈은 그 지친 모습에 결정타를 가했을 것이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세상을 떠나자 비로서 언론들은 그가 이룩한 업적들을 띄우기 시작했다. 대한항공을 비행기 77대에서 166대로 키웠고 국제노선 역시 20개국 52곳에서 44개국 124곳으로 확장시켰다던지. 맹자는 인간을 선하게 태어 났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고 순자(荀子)는 반대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게 태어났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합당한 대답은 인간은 온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 아닐까? 기업인도, 정치인도, 심지어 종교인까지도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데 어느 쪽이 그 심성과 영혼을 지배하느냐가 그 인간의 결정판이 될 것이다. 또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A를 나쁜 면만 보는가, 좋은 면을 보는가에 따라 확연히 그 인간의 위치가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균형을 잃고 나쁜 면만 보거나 좋은 면만 보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일까? 특히 기업인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내려온 사(士)ㆍ농(農)ㆍ공(工) ㆍ상(商) 의 의식이 내재돼 있어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1급 요리사가 되려면

우리나라 최고의 셰프(요리사ㆍ주방장)로 알려진 A씨가 TV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제가 최고의 셰프가 된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손님이 남긴 식탁의 음식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은 손님이 잘 드셨는데 어떤 것은 그대로 있거나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왜 이 음식을 남겼을까. 레시피(재료)가 나쁜 것이었을까? 덜 익혔거나 향료를 너무 약하게 한 것일까? 하고 나의 요리 방법을 되돌아보는 것이죠. 1980년대 우리나라에 들어 온 미국의 월마트, 프랑스의 까르프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글로벌 백화점이다. 월마트는 1987년까지만 해도 연간 140억 원의 수익을 올렸고 전국에 16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월마트는 점점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2004년에는 거꾸로 36억 원 손실을 입는 등 점차 경영난을 겪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까르프도 마찬 가지였다. 마침내 이들 두 거인들은 중국에 집중하겠다는 명분으로 매장을 정리하고 한국을 떠났다. 월마트와 까르프가 진출한 나라에서 재미를 못 보고 철수한 경우는 한국뿐이다. 그러니 세계적 관심사가 됐고 파이낸셜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언론들은 한국 재벌 기업을 탓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한국 소비자의 정서에 융합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언론도 있었다. 물론 한국인들의 소비문화가 독특하고 까다롭다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언론은 한국내의 부적응과 경영실패는 한국인의 취향과 정서를 정밀분석하지 못한 데서 비롯 됐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창고형 매장 운영 스타일을 고집하지 말고 한국 소비자 정서에 맞추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매장의 조명을 한국인들의 취향에 맞추고 프랑스에서 온 직원이 배장을 관리하지 말라고 했다. 반대로 내가 잘 가는 어떤 중국식당은 바로 이와 같은 한국인의 취향을 살려 영업을 잘하고 있다. 중국 음식의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춰 깍두기를 내놓은 것이다. 기름진 중국 음식을 먹다 새콤하고 칼칼한 깍두기를 입에 넣어 아삭아삭 씹는 맛에 손님들은 이집을 자주 찾는 것이다. 원래 중국 음식이 세계 어느 곳이든 성공하는 이유도 이처럼 현지인들의 음식 취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월마트나 까르프가 한국에서 짐을 싸고 떠난 것은 중국 식당처럼 소비자의 입맛, 소비자의 정서, 요즘 유행하는 눈높이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지난주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국회 청문회를 보면서 변하지 않는 우리 정치 셰프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봄은 활짝 찾아 왔는데 우리들 식탁에는 어제도, 오늘도 신맛의 묵은 김치뿐이다. 이렇게도 국민들의 입맛을 외면하고 끼리끼리 음식만 내놓으니까 국민들로부터 점점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판사 업무량이 너무 많아 과부하가 걸린다고 야단인데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1천200회가 넘는 주식거래가 도마에 오르자 청문회에서 판사가 주업이냐. 주식투자가 주업이냐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자기가 소유한 주식의 투자 회사와 관련된 재판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법관윤리강령의 중요 핵심인데 어떻게 이 기본적인 양식마저 저버릴 수 있었을까? 1급 요리사가 되려면 손님이 외면한 요리, 그 요리가 왜 그대로 접시에 남아 있는지를 냉철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왜 월마트와 까르프가 철수했는지도. 변평섭 칼럼니스트

[변평섭 칼럼] 권력자의 골프 치는 법

나폴레옹은 포커를 좋아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도 전투가 없는 날에는 참모들과 포커 내기를 했다. 그런데 한번은 포커를 하다 나폴레옹이 카드 하나를 소매 속에 숨겨 두었다가 불리해 지면 슬쩍 사용하는 것이 부하들에게 들켰다. 아니 장군께서는 한 장을 더 갖고 계시는데 위반입니다하고 한 참모가 항의하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장군이잖나... 지난주 트럼프 미 대통령의 골프 매너가 엉망이라고 골프 칼럼니스트 릭 라일리가 폭로해서 화제가 됐다. 심지어 그의 골프 실력은 사기라고 까지 극언을 했다. 예를 들어 골프 규칙에서 생명처럼 여기는 것이 공을 건드리지 않는 것 (No Toch)인데 트럼프는 공이 나쁜 자리에 떨어지면 발로 차서 좋은 곳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축구 황제 펠레에 비유했다. 규칙을 위반하고 축구하듯 공을 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을 물에 빠뜨리고도 빠지지 않았다며 뻔뻔스럽게 물가에서 샷을 한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함께 치는 사람의 공이 자기보다 좋은 위치에 떨어지면 감쪽같이 그 공을 발로 차서 나쁜 곳으로 보내고는 시치미를 뗀다. 오래전 우리나라 국무총리를 역임한 K씨도 골프를 즐겼다. 그 실력도 싱글소리를 들을 정도다. 그런데 그와 골프를 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샷을 잘못했을 때 수행원이 얼른 주머니에서 새 공을 놓아 주더라는 것이다. 그린에서 홀에 공을 넣을 때도 공을 집어 좋은 위치에 놓고 퍼팅을 하는데 그게 어디 싱글 실력이냐고 했다. 5ㆍ16후 어떤 정보부장은 기업 총수들을 불러 골프를 치는데 돈 내기로 유명했다. 그 당시 1점에 백만원을 걸었으나 골프가 끝날 즈음에는 몇 천만원 까지도 그의 손에 들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긴 점수가 정정당당하게 게임 룰을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자기 공은 트럼프 대통령처럼 터치를 하고 심지어 상대방 공이 풀숲에 들어가면 친절하게도 공을 찾아 주는 척하며 발로 밟아 나뭇잎이나 흙으로 묻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공을 잃어 버려 벌점을 받게 되고 돈도 많이 잃는다. 그런데 이처럼 권력에 취해 있으면 골프 룰이 자기 멋대로 변질돼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 권력자들의 잘못 된 플레이를 보고도 아무도 그것을 말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를 친 누구도 그의 벗어난 룰을 말하지 않았고 옆에서 골프채를 메고 다니는 캐디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우리의 K전 국무총리나 정보부장도 그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권좌에서 실각했을 때 비로소 이야기가 퍼졌다. 오히려 그 권력자가 공을 잘못 치면 다시 하시죠 하거나 위치를 바꿔서 치세요 하고 위법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러고도 권력자와 어깨를 나란히 골프를 쳤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감격스럽게만 생각하는 것. 이런 골프는 골프장 뿐 아니라 우리 정치, 사회, 종교, 교육모든 분야에서 일어 나고 있다. 3천500만원 포르셰가 어때서? 집 3채가 무슨 문제인가? 자기 자녀는 외국어 고등학교에 보내 놓고 외고 폐지를 주장하는가 하면, 오늘 20대들의 지지가 떨어진 것은 과거 교육이 잘못 됐기 때문이라는 등, 지금 이 순간도 변칙 골프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굿 샷!하고 변칙에 박수를 치는 플레이어가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