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장군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한 이다.문신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용력이 출중해 무신으로서 정계에 입문했고 1352년 공민왕 원년에 일어난 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어 3년 후에는 중국에서 홍건적이 원나라에 반기를 들자 원에 침식된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고려 영토 회복에 나섰으며, 남쪽 지방에서의 왜구 격퇴에도 힘을 썼다.이렇듯 원의 지배를 벗어나 고려 후기를 지탱한 무신 중 한명이었으나 위화도회군을 단행하고 기세가 오른 이성계의 막강한 원정군을 막지 못해 도성을 점령당했다. 이후 1388년 고향인 경기도 고봉(現 고양)에 유배된 후 개경으로 소환돼 참수당했다. 당시 그는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 유언을 남겼다. 현재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기슭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문상익은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화성시 송산면의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월26일부터 3월28일까지 홍면 등이 계획한 화성시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홍면의 동생 홍준옥, 장인 김명제, 김교창, 왕광연, 김용준 등과 추적해 돌과 몽둥이로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를 격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잡혀 1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채제공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정조 시대를 대표했던 문신이다. 1743년 23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들어선 그는 젊어서는 사도세자의 후견인이자 세손(정조)의 스승으로, 노년에 이르러서는 삼정승을 역임한 문신으로 역사에 기억되고 있다. 당시 재상들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을 정학으로 여기고 도교, 양명학, 불교, 민간신앙 등을 모두 사이비 취급했다. 하지만 유학에서 강조한 ‘수기치인(자기를 수양한 후에 남을 교화하여야 함)’의 측면에서 볼 때 유교 이외 학문이 선용할 수 있으면 포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여 그가 재상으로 있던 시절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확대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큰 업적은 남다른 식견과 정조 대왕과의 깊은 인연으로 화성의 축성 책임을 맡은 것이다. 성을 축조함에 있어서는 빨리 서두르지 말 것, 화려하게 하지 말 것,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등 3가지의 원칙을 지키며 모든 설계를 경영하고 지휘했다. 현재 그의 업적을 기린 채제공 뇌문비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3-4번지에 위치했다.
조광조는 조선 초ㆍ중기를 대표하는 사림파 문신이다. 1482년 경기도 용인군(현 용인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김굉필 등에게 수학해 사림파의 영수가 됐다. 중종 5년(1510) 29세 때 장원으로 급제 해 8년 후 부제학이 됐다. 이때부터 도학정치를 주창해 조선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일반 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를 지키게 됐다. 아울러 혁신정치 실시와 동시에 중종 반정 당시 공신으로 추대된 103명의 공사 중 78명을 삭훈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인 변화를 우려한 훈구세력의 질시에 따른 기묘사화로 숙청돼 전라도 화순의 능주에 유배된지 한달 여 만에 사약을 받고 1519년 3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현재 경기 평택시 이충동 산 37-1에는 그의 충절을 기린 충의각이 자리해있다.평택시 제공
추사(秋史) 김정희는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예원의 마지막 불꽃같은 존재다.당시 관직에 오를 정도로 학문적인 소양도 출중했지만, 훌륭한 서예가ㆍ실학자ㆍ화가이기도 했다. 묵죽도와 묵란도로 대표되는 작품을 통해 시ㆍ서ㆍ화 일치의 문인취미를 계승한데 이어, 당시 학문 조류인 북학 사상을 본 궤도에 진입시켜 조선 사회의 변화 논리에 힘을 실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말년에 과천에 은거한 그의 이력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현재 과천시 추사로 78(주암동)에는 추사박물관이 위치해 김정희의 삶과 품격 높은 예술, 학문을 엿볼 수 있다. 과천시는 지난 1996년 과천관련 추사 김정희 연구보고서를 발간한 이래 추사를 조명하는 여러 사업을 추진해왔다. 2006년에는 유명한 추사 연구자였던 후지츠카 치카시(1879~1948) 박사가 수집한 방대한 양의 추사관련 자료를 그의 아들 아키나오(1912~2006) 선생이 과천시에 기증하고, 이듬해에는 과지초당과 독우물을 복원하는 등 이 같은 노력이 오늘날의 추사박물관에 이르렀다. 경기도 제공
심훈의 대표작인 상록수의 모델로 알려진 최용신은 1909년에 태어나 두남학교,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협성여자신학교 등을 거쳐 1931년부터 천곡(現 안산)에서 계몽활동을 시작했다. 낮에는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밤에는 성서, 수예, 한글, 재봉 등을 가르쳤고 생계만큼이나 교육도 중요하다는 걸 설파했다. 25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천곡에 묻혔다. 경기도 제공
권율 장군은 조선 경기도 강화부에서 태어난 인물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대표적인 장수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인 1582년(선조 15년)에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을 정도로 젊은 시절 관직에 뜻이 없었다. 관직에 오른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6세의 나이로 경기도의 독왕산성(現 오산)과 행주산성(現 고양)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모두 끝난 1599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한 뒤 그 해 노환으로 사망했다. 당시 조선 임금 선조는 장군의 죽음을 슬퍼해 이틀간 정사를 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제공
정도전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생전 경복궁의 위치와 이름을 제정하고 국가 재정을 총괄해 초창기 조선의 중추적 인물로 맹활약했다. 아울러 비록 이뤄지진 못했지만 재상 중심의 입헌군주제와 흩어진 사병들을 통합해 단일 지휘체계를 확보하고 강력한 요동 정벌을 주장하는 등 시대를 앞서간 이로 평가받기도 한다. 정도전의 후손들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곳에 ‘삼봉집목판’과 사당 ‘문헌사’가 있다. 삼봉기념관에서는 정도전의 일대기와 사상, 생활 등을 알 수 있고, 내부에는 삼봉집목판이 보관돼 그의 정치, 경제, 철학 사상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제공
이고 선생은 본관은 여주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관직을 거부하고 각처에 은둔한 고려 충신 3학사 가운데 한 분이다. 이고 선생의 행적을 ‘조선왕조실록’ 에서 살펴보면 수원에 은거한 절개있는 선비지만, 항간에는 조선시대 당시 관직에 잠시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민생의 안정을 위해 군적 정리를 뒤로 미루자는 상소로 파직됐다고 기록됐다. 그 후 태조 9년(1409) 공안부윤으로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수원에 은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태조가 화공에게 이고가 거처하는 곳을 그리게 했는데, 이때 이고가 거처한 곳은 현재의 팔달산으로 알려져있다. 이고의 묘역은 수원시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됐으며, 장안구 하광교동 산 51-1번지에 위치해 있다. 수원시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나중소 선생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무장투쟁 활동 중 백미는 청산리대첩이었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21일부터 6일 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10여 차례 벌인 전투였다. 1천300명의 독립군은 일본군 1천2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뒀다. 청산리대첩 후 선생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해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선임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는 등 항일투쟁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국가보훈처제공
안승우 선생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화서학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1896년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던 망국적 위기상황에서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를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제천으로 옮겨 이필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선생은 군중 사무를 총괄하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의 직책을 맡았다. 제천의병은 단양으로 진군해 관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뒀다. 1896년 2월 화서학파의 종장인 의암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선생은 전군장을 맡아 의병의 선봉을 이끌었다. 국가보훈처 제공
선생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사위이다. 어려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다. 오영선 선생은 1914년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이동휘가 길림성 나자구에 세운 대전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대전학교가 폐쇄되자 1917년 1월 이동휘와 훈춘의 대황구로 옮겨 북일중학교를 설립, 교사로 재직하면서 항일 구국 인재를 양성했다. 이후 선생은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교육계몽과 무관양성을 위해 노력하였고, 선생이 교육한 많은 학생들이 연해주 등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이끌었다. 선생은 1920년 임시의정원 경기도의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무총리 이동휘의 활동을 보좌키도 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구연영 선생은 경기도연합의진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해 중군장으로 활동하며 백현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광주군 실촌 지역에 세거해온 유력 가문이다. 1895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이 참여한 남한산성의진(이천수창의소)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편성돼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한달 이상 점거해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성세를 크게 떨쳤다.선생은 의진의 중군장이 되어 1896년 1월 18일 백현(이천 널고개)전투를 압승으로로 이끌었다. 을미의병의 쾌거였다. 국가보훈처 제공
연기우 선생은 강화진위대 부교 출신으로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에 격분해 강화진위대 군인들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선생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군대해산 이후 의병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선생의 의진을 비롯한 주요 의병부대는 이인영을 중심으로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했다. 전국 각지에서 경기도 양주로 모여든 연합의진은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과 4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1908년 13도창의대진소가 해산되자 선생은 서울, 경기, 황해지역 의진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임진강을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이후 연기우 의병장에 대해 1911년 가평에서 일제 헌병대와 전투 중 순국했다는 설과 1914년 인제에서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순국했다는 설이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원심창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의협심이 강했던 선생은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됐다. 1924년 일본의 신진 유학생과 함께 흑우회를 재건하고, 1926년 흑색운동사를 설립해 기관지 흑우 등을 간행하였다. 흑색운동사를 흑색전선연맹으로 바꿔 일본의 전국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해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1927년 흑풍회로 개칭, 이듬해 흑우연맹으로 확대ㆍ개편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와 대립해 항일투쟁, 반공산주의 활동과 선전활동, 노동운동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이희승 선생은 1897년 시흥에서 태어났다. 1910년 관립 한성 외국어학교에 입학했으나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학교를 중퇴했다. 이 시기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학습하고 독립사상을 정립했으며 일생동안 우리말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했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이듬해 8월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대학 졸업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조선어와 조선문학을 강의하던 선생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1933년까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이뤄냈으며,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적극적으로 항거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홍원식 선생은 경기도 수원 향남면 제암리에서 출생했다. 선생은 안종후, 김성렬 등과 ‘구국동지회’를 결성해 신교육운동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만세함성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은 3월1일 수원 방화수류정(용두각)에서 시작된 이후 3월26일 송산면 만세시위를 계기로 조직적이고 격렬해졌다. 홍원식 선생과 안종후, 김성렬, 이정근 등이 주도한 발안장터의 1천여 시위군중이 일본인 상점 등을 상대로 거센 투석전을 벌였다. 송산면 만세시위 군중을 저지하기 위해 발포한 순사부장 노구찌가 군중들에 의해 처단됐고 격렬한 시위는 3월31일 발안장터로 이어졌다. 국가보훈처 제공
이종훈 선생은 1856년 경기도 광주 실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1883년 동학에 입도한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과정에서 부상하기 시작, 경기·충청·강원을 망라한 20여 개가 넘는 포를 아우르는 북접 지도자로 성장했다. 이후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하던 시기 박인호 등과 함께 교단 운영에 참여했고 1905년 12월 천도교가 창건되는 과정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중앙교단의 고위 간부직을 역임했다. 선생은 천도교단의 원로로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동학농민전쟁, 3·1운동, 고려혁명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민족 독립을 실현하고자 평생을 매진했던 선생은 1931년 5월2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국가보훈처 제공
선생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태어나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에서 성장했다.선생은 3·1운동 당시에 장년층으로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을 통솔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선생은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인근 주민들에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우정면 주곡리와 석포리 주민들의 선봉에 서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4월3일 군중은 점차 늘어나 1천여명에 이르렀고 시위행렬은 인근 쌍봉산으로 이동해 독립만세를 외쳤다.화성지역의 3·1운동은 어느 지역보다도 격렬했다. 우정면을 비롯한 장안면, 향남면, 팔탄면에서의 시위는 갈수록 격화됐다. 국가보훈처 제공
홍병기 선생은 1869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태어났다. 24세 때인 1892년에 동학에 입교한 선생은 손병희의 휘하에서 무장, 영동, 보은, 음성, 공주 우금치전투 등에 참가했다. 1919년 2월10일경 권동진을 만나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한 선생은 3월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참석해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참석했고 독립선언식 거행 직후 곧 일본관헌에 체포됐다. 선생은 심문을 받을 때 판사가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했다. 경성감옥에서 1921년 11월4일 오전, 동지들과 함께 출소한 선생은 1922년 7월14일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국가보훈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