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를 빛낸 역사 인물] 이한응(1874∼1905)

조선 말기의 관료·우국지사. 용인 출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해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했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에 임명돼 영국 런던으로 부임했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돼 대영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했다.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자 영국 및 여러 외국과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해 8월 제1차한일협약으로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한국 외교를 위해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했다. 또한 영일동맹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해 음독자살했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조병세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자살하는 이가 속출했다.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용인에 안장될 수 있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경기도를 빛낸 인물] 유길준(1856∼1914)

조선 말 개화사상가·정치가. 1870년 박규수의 문하에서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 청년들과 해외 문물을 습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됐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됐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귀국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연금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을 집필했다.서양의 근대 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를 주장했다. 역사는 미개화·반개화·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 사관을 제시했다. 그의 개혁론은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이 됐다. 친러내각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계산학교·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해 국민 계몽에 주력하며,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국어문법서인 대한문전을 저술, 간행했다.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에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국권상실 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부했다. 1914년 사망했고, 묘는 하남시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경기도를 빛낸 역사 인물] 이해조(1869∼1927)

포천 출생. 신소설 작가. 1906년 11월부터 잡지 소년한반도에 소설을 연재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주로 양반가정 여인들의 구속적인 생활을 해방시키려는 의도로 소설을 썼다. 사회단체에 가담해 신학문의 소개와 민중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한때 ‘매일신보’ 등의 언론기관에도 관계하며 30여 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적 성과와 함께 번안·번역을 통한 외국작품의 소개, 그리고 단편적으로 드러난 근대적인 문학관에서 이해조를 주목할 만하다. 자유종(1910)은 봉건제도에 비판을 가한 정치적 개혁의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풍속의 개량 등 개화의식이 두드러져 있다. 형식 면에서는 토론소설로서 새로운 신소설의 양식을 시도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봉건 부패 관료에 대한 비판, 여권신장, 신교육, 개가 문제, 미신타파 등 근대적 의식과 계몽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고대소설의 전통적인 구조를 기본바탕으로 엮어나간 전형적인 신소설들이다. 그의 소설은 구어체의 특징과 인물·성격의 사실적 묘사, 기자 생활에서 오는 보고체 문장 의식 등이 두드러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경기도를 빛낸 역사 인물] 백선행(1848~1933)

경기도 수원 출신의 여성 사회사업가. 어려서 평양에 옮겨 살았다. 14세 때 가정을 이뤘다. 그러나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온갖 궂은 삯일을 도맡아 하면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머니마저 여읜 뒤 더욱 근검절약하며 억척스러운 과수로 화장을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불철주야 일을 하여 큰 돈을 모았다. 그 뒤 평양 근교의 광대한 황무지를 사들여 1900년대에 일본인에게 넘기면서 굴지의 평양 갑부가 됐다. 자선사업에 희사할 뜻을 굳혔다. 1908년 첫 공익사업으로 대동군에 돌다리로 새로 부설해 ‘백선교(白善橋)’라 이름하게 됐다. 1919년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1924년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치기로 공식발표한 뒤 당시 30만 원의 거금을 출연하여 평양 일대의 각급학교 지원의 육영사업과 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로 대공회당(大公會堂)을 신축했다. 대동강 옆의 이 웅대한 석조건물은 ‘백선행기념관’이라 하여 평양의 명소로 지목됐다.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조만식과 뜻을 같이해 백선행기념관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86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며 여성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이 엄수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경기도를 빛낸 역사 인물] 윤집(1606∼1637)

본관 남원. 조선 후기 문신.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631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 설서가 되었다. 1636년 이조정랑·부교리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했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이때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했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해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소를 올렸다.이 상소문에서 국왕이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했다. 화의 성립후, 청나라 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섰다.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청병이 오히려 감복해 존경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당했다. 오달제·홍익한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제공

[경기도를 빛낸 역사인물] 면암 최익현(1833~1906)

본관 경주. 포천 출생. 185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868년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반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호조참판으로 승진하자 왕의 친정(親政)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며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체포돼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됐다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됐다 석방됐다. 1895년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됐고, 석방된 후에는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ㆍ일본군과 싸웠으나 패전, 체포돼 대마도에 유배됐다.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하다가 굶어죽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이 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제공

[경기도를 빛낸 역사인물] 김육(1580~1658)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1605년(선조 38)에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됐다.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구황촬요와 벽온방 등을 편찬, 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됐다. 이후 여러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중국에 두 차례나 더 다녀왔다.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했다.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했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됐다.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했다. 대동법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효종에게 건의하던 중 죽었다.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다.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업은 자손 대까지 하나의 가업으로 계승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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