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경기도 광주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를 완성했다. 효종이 죽자 소를 올려 상례를 논했다.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했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보지 않고도 삼공(三公)에 올랐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의 역변이 일어나자 상경해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했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는 이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있다가 1232년(고종 19)에 몽골병이 침입하므로 처인성(지금의 용인)에 피난했는데, 이때 몽골의 원수 사르타이를 활로 쏘아 죽였다. 그 공으로 상장군에 임명됐으나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攝將)에 임명되고, 뒤에 충주산성방호별감(忠州山城防護別監)이 됐다. 그때 몽골군이 쳐들어와 주성(州城)을 포위한 지 70여일이 되어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었을 때, 병사들을 독려하기를 “만일 힘을 다하면 귀천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관노(官奴)의 부적을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 싸워 적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 됐고, 그 밖에 군공을 세운 자들도 관노·백성 할 것 없이 모두 관작이 제수됐다. 1258년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으나, 그 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262년(원종 3)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예부상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조선 말기의 관료·우국지사. 용인 출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해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했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에 임명돼 영국 런던으로 부임했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돼 대영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했다.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자 영국 및 여러 외국과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해 8월 제1차한일협약으로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한국 외교를 위해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했다. 또한 영일동맹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해 음독자살했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조병세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자살하는 이가 속출했다.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용인에 안장될 수 있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조선 말 개화사상가·정치가. 1870년 박규수의 문하에서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 청년들과 해외 문물을 습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됐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됐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귀국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연금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을 집필했다.서양의 근대 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를 주장했다. 역사는 미개화·반개화·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 사관을 제시했다. 그의 개혁론은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이 됐다. 친러내각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계산학교·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해 국민 계몽에 주력하며,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국어문법서인 대한문전을 저술, 간행했다.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에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국권상실 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부했다. 1914년 사망했고, 묘는 하남시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포천 출생. 신소설 작가. 1906년 11월부터 잡지 소년한반도에 소설을 연재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주로 양반가정 여인들의 구속적인 생활을 해방시키려는 의도로 소설을 썼다. 사회단체에 가담해 신학문의 소개와 민중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한때 ‘매일신보’ 등의 언론기관에도 관계하며 30여 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적 성과와 함께 번안·번역을 통한 외국작품의 소개, 그리고 단편적으로 드러난 근대적인 문학관에서 이해조를 주목할 만하다. 자유종(1910)은 봉건제도에 비판을 가한 정치적 개혁의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풍속의 개량 등 개화의식이 두드러져 있다. 형식 면에서는 토론소설로서 새로운 신소설의 양식을 시도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봉건 부패 관료에 대한 비판, 여권신장, 신교육, 개가 문제, 미신타파 등 근대적 의식과 계몽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고대소설의 전통적인 구조를 기본바탕으로 엮어나간 전형적인 신소설들이다. 그의 소설은 구어체의 특징과 인물·성격의 사실적 묘사, 기자 생활에서 오는 보고체 문장 의식 등이 두드러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경기도 수원 출신의 여성 사회사업가. 어려서 평양에 옮겨 살았다. 14세 때 가정을 이뤘다. 그러나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온갖 궂은 삯일을 도맡아 하면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머니마저 여읜 뒤 더욱 근검절약하며 억척스러운 과수로 화장을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불철주야 일을 하여 큰 돈을 모았다. 그 뒤 평양 근교의 광대한 황무지를 사들여 1900년대에 일본인에게 넘기면서 굴지의 평양 갑부가 됐다. 자선사업에 희사할 뜻을 굳혔다. 1908년 첫 공익사업으로 대동군에 돌다리로 새로 부설해 ‘백선교(白善橋)’라 이름하게 됐다. 1919년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1924년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치기로 공식발표한 뒤 당시 30만 원의 거금을 출연하여 평양 일대의 각급학교 지원의 육영사업과 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로 대공회당(大公會堂)을 신축했다. 대동강 옆의 이 웅대한 석조건물은 ‘백선행기념관’이라 하여 평양의 명소로 지목됐다.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조만식과 뜻을 같이해 백선행기념관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86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며 여성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이 엄수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 경기도 파주 출생. 1913년 중국에 망명해 박은식·신채호·정인보 등과 중국혁명가 천궈푸·황줴와 함께 항일단체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했다. 1917년 스웨덴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문제의 의제로 제출해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1919년 무장항쟁노선이 집약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독립운동 지도급인사 39인의 공동서명으로 발표해 영향력을 크게 떨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국체와 정체의 이론정립 및 대외홍보 전반에 걸쳐 주역으로 활약했다.1930년 김구·안창호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독자적 이념체계인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한 정강·정책의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제창했다.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다. 한국독립당의 대외선전 및 임시정부의 이론전개와 외교문제를 거의 전담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에 진출했으나, 6·25전쟁 때 강제 납북됐다.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 후 70년대 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이장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김홍도는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화원이 됐다.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했다.1788년에는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 참여했다. 그 공으로 충청도연풍 현감에 임명돼 1795년까지 봉직했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조희룡의 호산외기와 홍백화의 발문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도석 인물·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50세 이전에는 중국적인 정형 산수를, 이후에는 한국 정서가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를 즐겨 그렸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총애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고려 후기의 명장.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우달치가 됐다.당시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갔다. 이듬해부터 고려가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자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했다.여러 차례 홍건적과 왜군을 무찔렀다. 노구를 이끌고 출정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1388년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密令)으로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일당을 숙청했다. 그해 딸이 우왕의 비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고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했다.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천800여 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했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성계의 막강한 원정군을 막지 못하여 결국 도성을 점령당했다.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 참수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여주 출신. 조선 말기의 의병장.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이를 계기로 의병 활동을 재기, 일부 해산당한 군인과 손을 잡았다. 뒤이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이구재가 해산 군인 80명을 포함한 500명의 의병을 모집, 그를 찾아와 총대장이 될 것을 요청했다. 9월에는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의병은 순수한 애국 단체이니 열강은 이를 국제법상의 전쟁 단체로 인정해 적극 도와줄 것을 바란다는 관동창의대장 이름의 격문을 전달했다. 13도 의병장들의 연합전략회의 결과 원수부13도총대장에 추대되어, 전병력을 24진으로 하는 13도의병연합부대를 편성했다. 의병부대는 서로 기일을 정하고 서울 동대문 밖에 모여서 대오를 정비한 뒤 일거에 서울을 공략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진격을 개시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장례를 마쳤다. 여러 차례 의병들이 재기할 것을 권유했으나, 아버지의 3년상 뒤 다시 13도의 창의군을 일으켜 일본인을 소탕하겠다고 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9년 6월 7일 일본 헌병에게 잡혀 경성감옥에서 죽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농촌운동가. 협성여자신학교에 재학하면서 농촌계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했다. 1931년 학교를 중퇴하고 농촌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심,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교육을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정식 교사(校舍)를 지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촌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뿐만 아니라 산술·보건 및 농촌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기술, 애국심과 자립심을 북돋우는 의식계몽 등에 힘을 기울였다.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에 유학했으나 신병으로 귀국하였고, 샘골에서 휴양하면서 농촌교육을 계속 전개하다가 병사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 여주인공 채영신은 최용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최용신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순교자적인 활동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된 후 여러 관직을 경험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돼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다. 남원에서 천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전주로 들어오려는 왜군을 맞아 황진과 함께 싸웠다. 도성 수복을 위해 수원 독성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행주산성을 택했다. 맹렬한 공격을 받아 성이 함락될 위기에 직면했으나,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승리를 거뒀다. 이것이 행주대첩이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됐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8세부터 시를 짓고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안산(安山)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다.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69세에 정조(正祖) 어진 제작의 감독을 맡았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은 영·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51세 때 영조가 신하들에게 그를 보호하여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이른 일을 계기로 강세황이 오랫동안 절필(絶筆)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진정한 문인화, 격조 높은 수묵화에 도달하기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경기도 용인에서 자랐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15세 때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됐다.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했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됐다. 서울에 돌아와 활발한 전교활동을 폈다.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됐다.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됐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됐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했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본관 남원. 조선 후기 문신.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631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 설서가 되었다. 1636년 이조정랑·부교리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했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이때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했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해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소를 올렸다.이 상소문에서 국왕이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했다. 화의 성립후, 청나라 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섰다.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청병이 오히려 감복해 존경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당했다. 오달제·홍익한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제공
본관 경주. 포천 출생. 185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868년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반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호조참판으로 승진하자 왕의 친정(親政)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며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체포돼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됐다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됐다 석방됐다. 1895년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됐고, 석방된 후에는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ㆍ일본군과 싸웠으나 패전, 체포돼 대마도에 유배됐다.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하다가 굶어죽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이 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제공
조선 전기의 무신. 1460년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했다. 1467년 명을 받아 포천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했고,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에 참가했다. 1468년에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으며, 이어 병조판서에 발탁됐다. 그러나 신숙주·한명회 등 원상 세력에 의해 구성군·강순 등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 세력이 제거될 때 강희맹이 한계희에게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말한 것을, 예종이 알아 해직됐다. 그가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해 능지처사당했다. 그 뒤 1818년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직이 복구됐다. 어릴 때 권람의 딸이 귀신의 장난으로 죽게된 것을 남이가 귀신을 물리치고 살려준 것이 인연이 돼그녀를 아내로 맞았다는 일화가 있다. 묘는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1605년(선조 38)에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됐다.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구황촬요와 벽온방 등을 편찬, 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됐다. 이후 여러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중국에 두 차례나 더 다녀왔다.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했다.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했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됐다.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했다. 대동법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효종에게 건의하던 중 죽었다.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다.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업은 자손 대까지 하나의 가업으로 계승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이덕형은 어려서부터 침착했으며 재주가 뛰어났다. 이항복과 교류하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80년(선조 13) 급제해 이정립·이항복과 함께 ‘경진 삼이(庚辰三李)’로 불렸다. 1590년 왜의 사신을 반송(伴送)하여 동래까지 내려갔으며, 이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 등을 부산포에서 전송했다. 그 후 직제학에 임명되었고, 동부승지와 이조참의,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했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광해군(光海君)을 세우도록 했다. 전란 중 명나라로 가서 파병을 성사시켰다. 통제사 이순신이 하옥되자 죄가 없음을 밝혀 구원하려 노력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애썼다. 대마도 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영창 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이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당했다. 저서로 한음문고가 있다. 문고의 내용 중 대부분이 임진왜란과 관련한 것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나혜석은 1896년 수원시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해 화가로서 공부를 시작했다. 나혜석은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단편 소설 경희·정순 등을 발표해 문학적 감수성을 드러냈다. 1920년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했다. 서울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고, 남편인 김우영을 따라 중국 둥베이로 이주했다. 1921년 3월 나혜석은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 유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해 성공했다. 이후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조선 미술 전람회에 출품해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28년에는 대표작 나부를 발표했다. 이후 유럽 여행에서 김우영의 친구였던 천도교 신파 수장 최린과의 불륜으로 결혼 생활은 파경을 맞이했다. 이후 나혜석은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매진, 그 결과 1931년 제10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했다. 아들 김선이 폐렴으로 죽자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 아래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1948년 생을 마감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