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좌우하는 독서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정벌하기 위한 전쟁에서 적진을 향해 말을 타고 가면서도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다고 한다. 이렇게 독서를 즐겼던 나폴레옹은 이 소설을 7번이나 탐독했고, 이 소설이 단순한 로테와 베르테르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낡은 사회의 계급제도와 관습을 가차 없이 폭로함으로써 동시대 독일인의 불행을 전달하고 있는 사랑이야기란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독서의 결과로 나폴레옹은 전쟁의 목표를 단순히 프랑스의 영토를 넓히기 위한 침략전쟁에서 폭정에 시달리는 민중을 해방시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전쟁으로 그 목표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는 침략전쟁을 일삼는 무자비한 장군에서 유럽에 단일 정부를 세우고 동일한 화폐를 사용하게 하여 유럽의 어떤 나라든 어떤 민족이든 간에 유럽 공동체 내에서 바람직한 삶을 누리도록 배려하는 민중을 위한 인문주의적 황제로 바뀌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유럽 통합이라는 그의 뜻은 200년이 지난 21세기에 이르러서 유럽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실천되고 있다.독서는 이렇게 정신세계의 지평을 넓혀주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촉매제이기도 한 것이다. 독서의 이러한 역할을 칼라일은 독서의 영향력 중에서 가장 값진 영향력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행동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칼라일의 주장처럼 독서는 스스로 행동하는 지성을 만드는 원동력임에 틀림없다.그러므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족의 지도자들이나 사상가들은 하나같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독서가 자신과 민족을 지탱하는 힘을 제공한다고 역설했다. 일본의 강점 아래에서 억압받는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내던진 안중근 의사가 단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일 것이다.한 나라의 정신세계를 선도해 가는 사상가나 애국지사들은 독서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미래를 설계하고,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최고경영자들도 독서를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상품을 예측해, 그것을 남보다 먼저 생산하도록 산업체를 독려해 재화를 획득하고 이윤을 극대화한다.이렇게 중요한 독서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감스럽게도 게을리하고 있다. 한국출판 문화 연구소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중 약 30%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성인의 1일 평균 독서 시간은 평일에 31분, 주말에 29분에 불과하다고 한다.독서는 앞에서 열거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 행동하게 하는 기능 이외에도 돈을 버는 수단이란 기능이 첨가되어 그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금의 사회는 지식정보 사회로서, 앨빈 토플러의 주장처럼 지식과 정보가 자본인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지식과 정보가 자본의 역할을 하는 시대에 살면서 지식과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독서를 게을리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 수단을 포기하는 무책임한 태도인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독서를 게을리하는 습관을 하루 빨리 버리고 독서를 생활화하는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독서만이 자신과 민족의 성장을 약속하는 힘을 제공하며, 세계를 경영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엣지’있는 연주자들

모 방송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때문에 요즘 엣지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엣지(edge)있게란 말은 최첨단이면서 색다른 패션감각과 연출로 독특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주라는 뜻이다. 지금과 같은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누구나 혹할 만한 주문이겠지만 무대에 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켜야 하는 연주자들에게는 실로 심각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여성의 경우라면 몰라도 남성 연주자들은 연미복이나 턱시도를 입으면 그만인데 무슨 걱정인가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해외의 유명 연주자들 가운데 파격적인 의상으로 주목을 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을 찾으라면 아무래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당대 최고의 실력과 더불어 그리스의 조각같이 수려한 용모로 여성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그가 몸에 붙는 검은 색 바지 위에 소매와 품이 넉넉하고 잔주름이 잡힌 셔츠를 입고 무대에 등장하면 마치 신화 속의 인물이 나타난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공연의 후반부에는 다른 색상의 셔츠를 갈아입곤 하는데 그 의상이 모두 일본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작품이라고 해서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우리나라에서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연주복을 입는 것으로 주목을 끌고 있지만 우리 연주자들 가운데 패션 감각에서 으뜸을 꼽으라면 단연 지휘자 금난새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검정색이나 짙은 회색 계열의 색상에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적인 수트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부적인 디자인에서 단추와 재봉선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다르면서 꼼꼼하게 마무리 한 특별한 의상이다. 그리고 늘 초록색 계통의 타이에다 같은 색 계통의 소품으로 포인트를 줌으로써 자신만의 시각적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있는 점이야말로 실로 감탄스러울 정도이다.지금까지 무대에서 만난 연주자들 가운데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가장 뚜렷하고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심어준 음악가라면 단연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를 꼽아야 할 것 같다. 눈부시게 밝은 금발과 하얀 피부에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난 용모부터가 여성 팬들을 매료시켰고 초인적인 기교에다 폭발적인 힘이 없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리스트의 난곡들을 어루만지듯이, 혹은 노래하듯이 너무나도 부드럽고 편안하게 풀어헤치는 연주는 청중들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다. 특히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섬세하여 부서지기 쉽지만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고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몸매를 자연스럽게 감싸면서 어깨로부터 떨어지는 선이 부드러운 듯 빈틈이 없었던 검은색 연미복은 눈부신 그의 외모를 더욱 더 돋보이게 했고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드레스 셔츠에 빨간 색 나비 넥타이와 역시 빨간 바탕에 금박 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조끼는 너무나 파격적이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을 때 살짝 올라간 바지 끝단 아래로 살짝 드러난 빨간 양말은 청중들의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했다.물론 눈에 보이는 복장이나 외모가 들리는 음악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그리고 보이는 것 때문에 들리는 것이 달라질 수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들리는 것만큼 보이는 것도 좋다면, 그래서 보기에도, 듣기에도 다 좋은 연주회라면 듣기에만 좋은 연주회보다야 당연히 더 즐거울 수밖에 없다. 옷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이기 전에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싶다.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서 그런 마음을 보이고 싶다면 옷차림부터 신경을 쓰고 가다듬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무대에 나서서 청중들을 대하는 예술가의 입장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번역할 수 없는 것들

서울 시향의 상임지휘자로 있다가 우리나라에서 병사한 러시아 지휘자 마르크 에름레르(Mark Ermler)에게서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다. 푸쉬킨의 작품은 절대로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자 불현듯 러시아어를 배워 내가 이전에 번역으로 읽었던 이 대천재의 작품들을 원어로 읽고 싶어졌다.따지고 보면 모든 번역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고도 한다. 문학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산문의 경우도 외교문서나 국제 계약서 등 문구 하나의 번역에 절대적으로 신경써야 할 일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번역이 없다면 다른 언어권의 문화는 전달되지 못한다. 번역이 많은 뉘앙스를 잃고 의미의 변질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번역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익을 부정할 수 없다.문학작품의 경우처럼 공연에서도 번역문제는 작품전달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또 문학작품에서 시와 산문의 경우가 다르듯이 공연에서도 장르마다 번역의 전달 기능에 차이가 있다. 독일가곡처럼 깊이있는 장르는 아마 푸쉬킨의 번역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독일 서정시를 번역해서 자막으로 내보내 보았자 그 시의 원래 가치를 음악으로 표현한 노래를 이해하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어권 밖에서 하는 독일가곡 리사이틀은 가장 엘리트적인 공연 장르라고 하겠다. 오페라의 경우는 근래 자막기 덕을 많이 보고 있다. 과거에는 오페라 번역이 크나큰 문젯거리였다. 오리지널 언어에 맞춰 작곡된 음악을 그대로 두고 그 음악에 번역문을 맞추려면 음절 수의 문제를 넘어 엄청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번역 불가능의 경우이지만 그래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장르이니 번역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우리나라에서도 약 20년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점점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출연진이나 관객이나 본국인과 외국인이 뒤섞이게 되니 번역 공연의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오페라의 의미 전달에서 텍스트는 사실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자막기는 이 일부의 이해를 도우면서 원모습을 훼손하지 않게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준 케이스다. 연극의 경우는 여전히 번역을 할 수밖에 없다. 가끔 외국 연극단체의 공연도 있고 외국영화를 자막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연극을 자막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페라의 경우와 달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우리나라에서는 최근까지 외국 것의 우리말 번역에 주력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면서 우리 것을 외국에 알려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우리 것의 외국어 번역이 많아지고 있다. 어찌보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가는 속도에 우리 것의 번역에 대한 대책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외국에서 만나는 우리 것에 대한 정보는 가령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여전히 엄청나게 부족하기 때문이다.그런데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는 분명 외국어로 번역하기 좋게 의도적인 문체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 작가 정신이 투철하게 담겨있으면 되니까 이런 스타일을 불순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작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작가들은 아무래도 푸쉬킨처럼 번역 불가능한 경우보다 가치를 인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 문학 작품 중에서 제목까지도 번역하기 힘든 고 이문구의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푸쉬킨이 외국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이문구의 작품을 읽기 위해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우리의 것을 세련된 번역을 통해서 가능한 한 많이 세계에 퍼뜨리는 작업에 힘쓰는 한편으로 문학작품뿐 아니라 우리 문화 전반에서 번역할 수 없는 것들을 계속 만들어 내야만 한다.

시다림(尸陀林)에서

인도 중부 왕사성(라즈기르) 북쪽에 있는 숲을 시다림(시타바나尸陀林)이라 부른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달린다의 명사형 시달림으로 자주 쓰는 말의 원형이다. 시다림은 일종의 공동묘지로 사람이 죽으면 이 숲에 내다버리게 되는데, 내다버림을 당한 시신들은 곧 새들의 먹잇감이 되어 일종의 조장(鳥葬) 또는 티벳의 천장(天葬)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장례의 한 형태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공포감과 각종 질병이 창궐하는 아수라 같은 상황이다 보니 인도에서는 기꺼운 수행의 장소로 돼버렸는데 그 말의 씨가 자라나 오늘날 성가시거나 괴로움의 표상으로서 시달린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죽음의 물리적 고통을 주검을 통해 극복하려는 수행자들의 각오에 찬 의미로 재고할 수 있지만, 좀 더 약화된 의미로 시다림을 다시 한 번 뇌까리는 이유는, 인천을 공부하다 보니 문득 사방천지가 공동묘지였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인천이 근대 개항장으로 설정되고 각국 주재원들이 속속 상주했을 당시 불의의 죽음을 맞은 자국민을 현지에 매장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을 것이다. 하여간 1883년 7월 만석동 북성고지 일대에 서양인 매장자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인천이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인을 위한 묘지가 조성됐음을 알려주는 단초가 된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가 1890년에 조선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최초의 매장자인 미국인 선교사 존 W. 헤론이 묻히기 전까지 만석동 외국인 묘지가 7년여간 유일한 외국인 묘지인 것이다. 닥터 알렌의 한국보고서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제물포까지 운구하는데 관에 소금을 채워가는 일도 번거롭지만 거리도 멀다고 기록한 것으로 당시의 매장 상황이 상당히 불편했음을 방증하고 있다.인천이 정식으로 개항하기 전인 1882년, 이미 인천에 입국한 일본인들의 경우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본의 전통적인 화장 풍습에 익숙하지 않은 인천 사람들의 원성과 일본인들만의 묘지의 필요성에 의해 현재 신흥초등학교와 송도중학교 그리고 인천여상을 삼각 구도로 해서 그들만의 묘지와 화장장을 조성하기에 이른다. 이후 율목동 인천시립도서관 북편, 광성고등학교 북편에도 각각 화장장과 묘지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중국인들은 미국 감리회 소속 내리교회와 영국 성공회 교회 사이의 구릉을 의장지라 부르며 멋대로 묘지를 만들었는데, 향후 인천 감리서와의 협약에 따라 인천부내 중심 십리 밖에 묘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현재의 선인학원 재단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부평공동묘지로 옮기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이러한 일련의 조사과정을 거치면서 문득 제 땅이면서 제 땅에 제대로 묻히지 못했던 인천 사람들의 허망함이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막막함으로 가슴팍이 무겁게 짓눌려짐을 느끼게 된다. 조계설정에 따른 이장의 요구는 더욱 답답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몇몇 문학작품에 거론되는 신흥동, 도원동 일부와 신기촌 등이 당시 인천(제물포) 사람들의 최후의 안식처였던 것을 감안할 때, 요즘 인천 전역에서 벌어지는 동시다발적인 행사들과 쉽사리 마음이 섞이질 않고 있다. 집(삶)을 짓기 전 양택을 해야 하고 토대를 단단히 갖추고 난 다음 주변과는 잘 어우러져 지었는가하고 일찍이 임원경제지를 지은 풍석 서유구 선생은 다소곳하게 말씀하신다.도처가 시다림(尸陀林)이다. 물불 안 가리고 앞뒤 안 보고 내치는 망아지처럼 개발과 과시와 향연의 말발굽을 사방팔방에 찍어대는 형국이다. 그러나 그게 다 내 이웃이 한 일이고, 기밀스럽게 모두 나와 사슬처럼 연결된 일이다. 그래서 누웠더라도 옹알이만 할 따름이다. 신 시다림에 앉아 21세기를 보내는 헌 구도자처럼 말이다.

경기도립예술단의 새로운 도약

살다보면 난관(難關)에 봉착하는 순간이 있다. 자신의 키높이 보다 훨씬 높은 뜀틀을 앞에 둔 선수가 도움닫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실력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없게 되고, 손짚기를 하기도 전에 뜀틀벽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 만큼 고지를 향한 목표달성에는 준비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경기도립예술단이 새로운 도약의 시기로 맞고 있는 재단법인화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다.이미 창단 20년차를 맞고 있는 도립극단부터 무용단, 국악단 그리고 10여년을 막 넘긴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까지 경기도를 대표하는 도립예술단은 도민들을 위한 문화예술 창달과 향수권을 보다 확대해 많은 사람이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연간 수백회의 공연을 선보이며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렇듯 예술활동을 하는 이면에는 행정적 절차라는 연결고리가 있어 단원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어려움들이 많았다.현재 도립예술단은 재단법인 경기도문화의전당이 위탁운영하고 있는 형태로 이원화되어 있다. 때문에 조금 더 운신의 폭을 넓혀 활동을 지원하고, 예술단원들에게도 복지를 비롯해 다양한 혜택이 더 주어질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방안으로 도립예술단의 재단법인화의 밑그림 작업을 시작했다.도립예술단원들은 한번 입단하였다고 영구단원 신분을 갖는 것이 아니라 2년에 한번 오디션을 받고 그 평정 결과에 따라 신분유지가 결정된다. 약 3년전 정기평정 때 260여명 중 40여명의 단원이 한꺼번에 해촉되는 상황이 생겼다. 이 때문에 법정공방이 오갔고, 많은 민원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도립예술단 중장기 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 용역을 실시해 장기적으로 볼 때 도립예술단을 위탁 운영하고 있는 경기도문화의전당과 도립예술단이 한 몸체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방향이 제시됐다.예술단 법인화를 준비하면서 단별로 설명회도 하고, 대표자를 뽑아 도 관계자, 도의원들과 간담회도 했으며, 전체 단원들을 모아놓고 대대적인 설명을 통해 이해를 도왔으나, 아직 법인화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는 단원들이 있는 듯해 유감스럽다. 항간에 예술단 법인화 추진이 누구의 치적사업으로 삼기 위한다는 말이 나오고, 전혀 논의되지 않은 정년 연한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인냥 소문이 나기도해 안타까울 따름이다.게다가 법인화가 되면 공공성이 무너지고, 수익창출에만 매달릴 것이라고 염려하는데 그것은 분명 오해이고 기우이다. 지금과 변함없이 예술단의 연주스케줄과 레퍼토리는 예술감독 지휘아래 정해질텐데, 법인화가 됐다고 무엇이 크게 달라지겠는가. 지금보다 예술감독의 책임과 권한에 비중이 더 실리게 될 것이고, 단원들은 평소처럼 예술활동에 몰두하면 된다.도립예술단의 법인화는 누구 개인을 위한 사업이 절대 아니다. 도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지금과 변함없이 공공성을 기본으로 삼고, 행정의 간소화를 통해 예산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다른 국공립 단체들도 운영형태가 재단법인화되고 있는 추세다. 이전에 시행했던 단체들의 좋은 점은 벤치마킹 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점은 충분히 보완하여 도민들에게 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도록 법인화의 방향을 설정한다면 더 없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앞으로도 충분히 기초가 다져지도록 예술단원들의 의견수렴을 비롯해 도와 경기도문화의전당이 협의하여 좋은 대안을 마련하려한다. 법인화로 당장 일자리를 잃거나, 예술단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약속할 수 있다. 다만, 예술단원들은 기량이 더 나아지도록 스스로 연마하는 일을 놓쳐서는 안 된다. 통합을 통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보자.

프레디 머큐리

전설적인 록 그룹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가 출판됐다. 물론 그의 전기가 세상에 나온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이제야 우리말로 옮겨져 인쇄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동성애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게다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때문에 망설이느라 이렇게 시간이 걸린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는 아직 이런 문제를 너그럽게 포용할 만큼 여유롭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에 결성된 그룹 퀸의 출현은 마치 외계인이 날아온 듯 시대를 초월한 사건이었지만 18세기가 다시 돌아온 듯 고색창연하기도 했다.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절대로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록 음악과 클래식 음악을 하나로 결합시킨 그룹 퀸의 음악 세계는 독특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남성의 음역을 넘어 여성의 음역을 넘나들었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음성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성역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치 바로크 시대의 거세한 남성 가수, 카스트라토의 대명사였던 파리넬리가 다시 태어난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스타가 되려 하지 않았고 전설로 남길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세기의 전설적인 발레리노 누레예프처럼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역시 동성애자였고 마찬가지로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많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음악가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고 대중음악뿐 아니라 유명한 클래식 음악가들 중에도 상당수가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뉴욕에서 음악가로 성공하려면 뛰어난 재능 말고도 다음의 세 가지 조건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는 갖춰야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유태인이든지 아니면 동성애자라야 한다는 것이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동성애자조차 마음이 끌릴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성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유태인이면서 동성애자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현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예술 감독으로 있는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세계 최고의 거장으로 추앙받았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양성애자라는 사실 또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샌프란시스코는 세 사람의 성인 남성 가운데 한 사람이 게이일 정도로 동성애자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모르는 남자 셋이 우연히 나란히 걷다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옆 사람에게 차례로 당신 혹시 동성애자입니까?하고 물었는데 둘 다 아니라고 대답하자 갑자기 그 자리에 서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렇다면 혹시 내가 하고 당황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러고 보니 프레디 머큐리와 루돌프 누레예프와 레너드 번스타인과 제임스 레바인까지 모두 필자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렇다면 혹시 필자도 동성애자가 아닐까?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 동성애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혹시 끝내 이해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이유 때문에 멀리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바라는 바가 있다면 우리가 함께 사는 이 세상이 성적인 취향이든, 신념이든, 사상이든, 단지 누가 또 다른 누구와는 다르다는 그 이유만으로 배척당하고 차별받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도 모두 같은 생각이리라 굳게 믿는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을 실천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퀸의 노래 We Are the Champions를 우리 모두 다 함께 부르며 모든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힘껏 외치고 싶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시간과의 싸움

오래 전 이야기다. 서울의 어느 대형 공연장에서 오페라 공연이 있었다. 새로운 것을 하던 시절이 아니였으니 오페라가 언제쯤 끝나리라는 것을 대부분의 관객들은 알고 있었다. 이 오페라는 휴게시간을 길게 잡아도 3시간 전에 끝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공연은 그렇지 않았다. 서곡은 별로 특이할 게 없이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가며 연주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휴게시간이 있어 그나마 다소 페이스를 찾았던 연주는 후반부에서 더욱 느려져 끝부분에 다가갈수록 거의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혹은 더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관객들이 빠져나갔지만 나는 대체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지켜보았다. 연주는 평균 공연시간을 넘겨 4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끝날 수 있었다. 저녁 7시 반에 시작된 공연이 11시 반 경에야 끝난 것이다. 일생에 드물게 만날 특이한 연주였던 것만은 사실이다.왜 이렇게 되었을까? 간단한 이유에서다. 요즘과 달라 지휘자가 부족하다보니 제작자 측에서 할 줄 안다는 소리만 믿고 지휘를 맡긴 것이다. 이 지휘자는 악보를 읽을 줄 알고 지휘봉을 흔들줄 아는 정도를 지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휘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 지휘자는 아마 음반을 들으면서 연습을 한 것 같다. 음반이야 지휘자와 상관없이 스스로 연주했을 터이고 거기 맞춰 지휘봉을 흔들었으니 문제가 생길 리가 없다. 그리고 나서 이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지휘한 것이다. 한마디로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에 맞추느라 느려지고 오케스트라는 지휘자를 보며 느려지고 서로서로 맞추면서 계속 느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자신의 템포가 느려지는 것을 이 지휘자가 알았다 치더라도 그것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지휘자로서 전혀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아마도 느려진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을 것으로 짐작한다. 관객은 연주가 느려진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을 모를 뿐아니라 관객은 정확하게 느낀다는 철칙은 더더구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저 피상적으로 할 줄 안다는 연주자와 진정한 아티스트의 차이는 이 점에서 드러난다. 즉 진정한 아티스트는 무대에서 연주하며 동시에 분신을 만들어 객석에 내려보낸다. 그리하여 그 분신은 자신의 연주를 관객의 입장에서 보고 들어 다시 연주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연주가 존재하는 이유인 공감이 형성되는 것이다.연주자가 관객에게 신선한 감동과 경이감과 새로운 성찰을 주지 못한다면 존재의 가치조차 없다. 관객이 공연 도중에 지루해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무대와 객석의 위치가 전도된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이끌 뿐아니라 함께 객석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대가 객석보다 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 아닐까?이것은 연주 자체 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문화전달자는 무대와 객석이 가깝듯 일반인들에 가까이 있어야 하지만 무대에 선 사람처럼 일반인들보다 한 발 먼저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문화전달자는 진정한 아티스트처럼 무대에 있되 분신을 만들어 일반인들 틈에 들어가 자신을 볼 줄 알아야한다. 무조건 관객의 입맛에 맞는 것만 연주하는 사람을 관객이 결코 높이 평가하지 못하듯 일반인들에 앞서 이끌 줄 모르는 문화전달자들도 결국에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물리적 시간과 느낌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은 베르그송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아는 사실이다. 한국의 시간은 그 속도가 무섭게 빠르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객석에서 지루한 템포를 느끼고 있는데 연주자는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는 한가한 문화전달자들을 볼 때마다 오래 전에 보았던 그 희한한 오페라 공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과의 싸움은 지휘자만 하는 일이 아니다. /조성진 성남아트센터 예술감독

경건주의보(敬虔注意報)

웃음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은 철학이나 대중 문화적 관점과 달리 매우 기계적이고 단순하다. 그러나 얼굴 근육 15가닥으로 만들어지는 웃음은 때와 장소 또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에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그 의미가 달라져 마치 칠면조처럼 수시로 모습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웃음은 보통 긍정적 측면에서의 웃음과 부정적 측면에서 웃음이 아니라는 의미의 비웃음으로 나뉜다. 긍정적 웃음이 선사하는 건강 지향적이며 포용적인 태도는 개인의 심신과 더불어 건강한 사회를 도모하는데 비해, 부정적 웃음은 공격적이고 자학적인 성질을 바탕에 깔고 있으므로 자칫 공공성을 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사람의 감정을 정리한 희노애락애오욕 칠정론(七情論) 가운데 기쁨 또는 즐거움에 해당하는 웃음을 빗댄 데에는 요즘 우리사회가 도를 넘을 정도로 경건해졌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경제적인 곤란을 겪고 있는 점도 한몫 하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돼 있지 못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적 금융 위기 또한 외환으로 다가와 다중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 전반이 소심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주름지기 시작하면 그 골도 따라 깊어지기 때문이다.전국적 신드롬이라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의 확충과 관광자원의 개발, 엑스포 유치 등등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필자의 기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음이 확인된다. 지리적 특성과 역사성 그리고 상업적 활용가치 등을 놓고 민관학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숙의하는 과정을 곁에서 보면 모두 맞는 말처럼 들리고, 도출해낸 결론대로 실행한다면 모두 성공할 것처럼 뇌세 당하고 만다. 그러나 과거 엑스포 내지는 실험적 문화공간과 관광자원의 개발 등이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 빛나는 값어치를 이어오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1천여 개가 넘는 전국의 축제를 보더라도 이름만 달리했지 대동소이한 정체성에 의구심과 절대다중의 냉소적 시선이 연일 하마평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의 본성을 지닌 삐딱이들의 시선이라고 치부해버려도 될 법하지만, 이른바 먹을거리, 볼거리, 놀거리 등을 놓고 봤을 때 전국적 동일현상이라고 단정 짓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감을 만족케 하는 행사 내용들의 어쩔 수 없음을 탓하는 게 아니다. 각지의 특성을 개성 있게 살린 꺼리들을 폄훼하자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현재를 넘어섰느냐는 것이고 육감마저 감동케 했느냐는 데에 있다. 현재는 찰라에 불과하지만 머나먼 과거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펼쳐질 미래의 담보이기 때문이다. 현재적 웃음의 배후에 본능적으로 육감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묵과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의 사후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기는 습성을 잊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비웃음일 지라도.인천광역시 중구 내의 월미관광특구가 올해로 특구 지정 9년째를 맞고 있다. 월미도권역, 연안부두권역, 동인천과 신포동권역 그리고 자유공원과 함께 북성동 차이나타운 일대를 아우르는 지대한 지역을 관광특구로 지정해 절기별로 꺼리를 만들어 시민들의 오감을 만족케 하려고 부단히 경주하고 있다. 민관학이 결속해 축제 위원회를 구성하고 각종 시설을 늘리고 정비하는 등 잰 걸음으로 현재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그러나 특구 내에 조성된 여러 관광시설들과 구성의 면모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어딘가 모르게 비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근대건축물들은 지나치게 박제화 되어 있고 특구 전체는 모 아니면 윷 격으로 명품화 되어 있다. 단박에 말하면 육감을 억제하는 거대한 경건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서양 중세에 웃음이 통제됐던 것처럼 포르말린 처리돼 도무지 흥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종복 시인향토사학자

까다로운 해외음악가, 조건도 가지가지

해외 유명음악가들이 내한공연을 할 때는 매우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내걸곤 하는데 성악가의 경우 그 정도가 심할 때가 많다. 수년전 세계 흑인 3대 성악가로 꼽히는 미모의 소프라노 바바라 헨드릭스가 서울에서 공연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그와 출연계약서 등 공연관련 내용을 팩스로 주고받던 중 매니저로부터 다음과 같은 조건이 붙어 왔다. The artists kindly asks the audience not to interrupt the different song group with applause.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관객들이 연주 중간에 박수를 치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이다. 이를 받아든 순간 왠지 한국관객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또 다른 공연을 위해 내한 했던 소프라노 카티아 리차렐리는 무대 천장에 매달린 마이크를 제거하지 않으면 아예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놔 관계자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계약서에 녹음에 대한 내용이 없는데 몰래 녹음을 하는 게 아니냐며 오해를 한 것이다. 무대직원들은 당황하며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제거해야 했다. 한술 더 떠서 녹음실은 그의 매니저에 의해 공연 내내 점령당하고 말았다.독일의 유명한 메조소프라노 군둘라 야노비츠를 초청했을 때는 공연장 대기실에 백포도주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해 직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당시 환갑의 나이가 다됐던 야노비츠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포도주 한 병을 다 비우고도 조금도 취한 기색 없이 열창으로 관객을 매료시켜 공연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계약서에 따뜻한 수건과 차가운 수건, 생수를 반드시 준비해달라고 요구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었다.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자 무대 뒤쪽 탁자 위에는 식당을 연상케 하듯 따뜻한 수건과 차가운 수건이 가득 쌓이고, 생수병이 나란히 놓이게 됐다. 아무튼 도밍고는 공연 중간중간 들락거리면서 수건으로 손을 닦고 생수를 마시며 긴장을 풀었는데 세계적인 명성만큼이나 특이한 모습이었다.성악가뿐 아니라 지휘자나 협연자 초청공연에서도 유명세 만큼이나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지휘자로 인정받고 있는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인 로린 마젤이 미국 5대 교향악단 가운데 하나인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맡고 있을 때 내한 연주를 했었다.대체로 계약서는 출연료, 일정, 숙식조건 등을 붙여 단조롭게 2~3장이 일반적인 경우인데, 피츠버그 심포니오케스트라의 계약서는 수 십장에 달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지휘자용 승용차는 리무진이어야 하며 운전기사는 영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단원들용 버스는 에어컨과 화장실이 설치돼야 하고 버스마다 통역요원을 1명씩 동승시켜 달라고 했다.심지어 단원들을 버스로 이동시킬 경우 5분 간격으로 차량을 출발 시키되 첫 차와 마지막 차가 20분정도 간격을 두도록 요구했다. 아마도 낙오되는 단원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인 듯 싶었다. 또한 버스로 장거리 이동시 2시간을 초과해서는 안되며 초과할 경우 사전에 단원들과 합의해야 하고 이동 중 1시간 30분이 지나면 꼭 휴식시간을 취한 후 연주를 한다는 것이다.악기에 대한 조건은 더 까다롭다. 교향악단의 악기 화물량은 보통 8t 정도로 4~5t 차량 2~3대가 필요한데 차량마다 20℃ 내외의 온도를 유지하는 장치를 갖추고 보관 창고도 방습 환풍 장치까지 사전에 이야기가 되곤 한다.언젠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공연 시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가 반사판 기능 부실을 이유로 잠시 공연을 중단한 해프닝은 이들의 까다로움을 잘 보여준다. /박인건 경기도문화의전당 사장

작곡가 이흥렬 탄생 100년을 즈음하여

2009년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도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하이든의 서거 200주년라며 난리들이고 멘델스존이 태어난 지 200년이 되었다고 법석들이다. 게다가 헨델이 세상을 떠난 지 250년이 되었다면서 이것 또한 그냥은 지나치기 힘든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이 땅에서 태어나 우리 곁에서 살다 간 작곡가 이흥렬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바로 올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까지 우리 음악계를 이끌어 간 선구자이며 꽃구름 속에와 바위고개를 비롯한 많은 가곡들을 남긴 국민 작곡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남아서 지워지지 않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노래 섬 집 아기를 남기신 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선생이 우러러 보이는 것은 그 후손이 3대에 이르기까지 선대의 위업을 굳건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들 이영조와 이영수가 이미 작곡가로서 우리 음악계를 이끌어가고 있고 이영조의 아들 이철주가 또 그 뒤를 따르고 있다.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로 시작하는 신약성서 마태복음 1장은 언제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얼핏 보기에는 아브라함에서 비롯하여 예수까지 이어지는 한 집안의 족보를 그저 나열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이렇듯 단절 없이 대를 물리면서 완성해간 말씀과 믿음의 역사가 숨어 있는 셈이고 그 우여곡절이야말로 기적이고 희망이며 또한 보람이자 긍지인 것이다. 무엇인가를 지키고 이어간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기도 하다. 중요하다면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힘든 일이라면 피하고 보자는 것이 우리네 심사라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것이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다음에는 아무도 나서질 않는 것이 지금의 세태다. 뜻하는 바가 있어 아비가 자신의 업을 물리려 해도 아들이 이를 따르지 않고 혹시 아들이 아비의 뜻을 받들려고 해도 어미가 이를 가만 두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전통이란 걸 세울 수가 없고 신뢰라는 걸 찾을 수가 없다. 무릇 모든 것이 가정에서 비롯되거늘 가정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사회에서 보일 리가 없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갈등과 대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전통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요즈음 무대에서 살겠다고 고집하는 여식이 무척이나 고민스럽다. 혹시나 그럴까 싶어 함께 공연 보는 재미까지도 포기했었는데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지금에 와서 요지부동의 결심을 굳히고야 말았다. 성악가이셨던 엄친 또한 노래를 하겠다는 아들을 끝내 말리셨다. 그래서 전혀 딴 길을 걷는 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결국은 음악과 그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스스로의 사연이 있기에 망설임 없이 대를 이어가는 집안이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다. 하물며 그것이 한 세대를 넘고 또 한 세대를 더한 대물림이라면 축복과 기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작곡가 이흥렬 선생이 이 땅에 오신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선생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그 아들이, 또 그 손자가 선생의 뒤를 따르고 있다. 바라건대 손자의 아들이,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 손자의 손자까지도 선생의 뒤를 이어갔으면 한다. 그래서 또 한 100년이 지나고 다시 200년이 더 지났을 즈음에 그 집안의 누군가가 탄생 200주년이라고, 아니면 서거 200주년이라고 지구촌이 온통 호들갑을 떨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두 연주회의 교훈

연주회들의 프로그램을 보면 으레 그날 연주자의 프로필(학력, 경력)이 나와있다. 개인 연주라면 그러려니 할 터인데 오페라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장르에도 일일이 그것이 요구되는 풍토는 씁쓸한 일이다. 숫자가 많다보니 어느 학교 출신이 얼마나 많은가 자연히 드러나게 되고 그러다보니 고의적으로 특정 학교 출신이 독점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일도 있고, 다시 그러다보니 제작자 측에서 출신학교를 배분해야 할지를 고려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학벌이 즐비한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나는 몇년 전 이틀 연달아 들었던 두 연주회를 떠올리게 된다.둘 다 작은 홀에서 한 연주였는데 앞의 것은 기악, 뒤의 것은 성악이었는데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독주자가 아니라 반주자 얘기다. 앞의 날의 기악 연주자는 상당히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문제는 반주에 있었다. 반주가 독주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지 못하고 소극적인 보조 역할만 하거나 질질 끌려다니면 그것처럼 독주자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 없는데 이날 반주자는 오히려 반대로 독주자를 찍어누르려 하고 있었다. 사운드에 대한 감각이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우당탕퉁탕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댔고 일단 터치가 이러하니 독주자와의 호흡은커녕 템포며 리듬이며 음악성을 따지고 어쩌고 할 차원이 아니었다. 성질 팔팔한 독주자를 만났더라면 연주를 중도에 집어치우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으니 듣고 앉아있던 나는 진땀이 바작바작 나고 조마조마해서 편안히 음악을 감상할 수가 없었다.휴식 시간이 되자 나는 자동적으로 프로그램에 적힌 반주자의 경력을 훑어보았다. 외국 유명 음악학교 출신이다. 아하, 과연! 이 정도 학벌이라야 독주자와 걸맞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학벌이 좋으니 여기저기 바쁘게 다녔을 터이고 그러다보니 연습할 시간이 없었을지도.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이것은 시간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반주자가 연주의 반을 책임져야 한다는 기본적 인식이 안되어 있는 것이다.이튿날 성악 리사이틀의 반주자는 아예 경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에도 경력이 써 있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서울의 어느 음악대학을 오래 전에 졸업했을 뿐이고 외국 음대에서 공부해 본 적이 없으니 어디 강사도 할 기회도 없었다. 시부모와 아이들 뒷바라지하기에도 벅찬 가정주부 노릇만 해왔고 그러다 보니 음악계와는 인맥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 리사이틀의 반주를 맡은 이유는 바로 성악가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음악이 시작된 직후 나는 성악가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부인을 반주자로 썼으리라 지레 짐작한 나의 속된 선입견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반주는 근래에 드물게 들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연주였다. 곡이 바뀔 때마다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노래가 편안히 뛰놀 카페트를 지체 없이 깔아주고 있었다. 노래가 나올 때 함께 부르고 함께 산책하고 함께 명랑한 웃음을 웃었고 노래가 전면에 나와야 할 때는 넌지시 숨었다가 노래가 쉬면 어느 틈에 앞으로 나와 노래를 대신했다. 노래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으면 살짝 옷깃을 뒤로 당겼다가 노래가 약간 게으름을 피우면 팔을 잡아당기며 귀엽게 달렸다.이날 연주를 들으며 나는 볼룸댄서 한 쌍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소 띤 얼굴로 남편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며 춤추는 우아한 부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노래는 반주만큼 잘 하는 것이었나? 반주를 열심히 들었던 까닭에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들이 남편을 비평하지 못하도록 재치를 부리는 것도 아내의 역할 아니던가?학력, 경력을 늘어놓지 않으면 음악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풍토에서 두 연주는 내게 교훈을 주었고 내 안에서 아직 확고하지 못했던 무엇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조성진 성남아트센터 예술감독

지식인의 적덕과 새로운 지역운동

삶의 행태를 상위적 또는 하위개념으로 정의 내리거나, 인간의 노동력을 천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조가 탄생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 일이다. 인류문명의 시원을 대략 7천여년 전 일로 치면, 100여년이라는 수치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대비지수다. 대략적으로 6천900여년가량을 삶의 보편성과 노동력이 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근세시대를 거쳐 근대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물질의 중요도가 높아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신적인 부분이 쇄락했다고는 하지만 전체의 비율로 치자면 아직도 걸음마 수준인 것이 삶의 행태에 대한 전반적 가치판단들이다. 말머리가 무거운 이유는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자각의 우물에 지식인의 역할이 여전히 침잠해 있다는 데에 있다. 선구적인 깨우침을 설파함으로써 인류에게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선사한 과거 지식인들의 수고를 읽다 보니 여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제 논에만 물 대며 입신양명의 끄나풀을 놓지 못하는 각박한 현실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어렵사리 얻은 지식을 지식(智識)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현대 지식인들의 알량함에 치기가 들기 때문이다. 본말로 들어가서 인천시는 10개의 구와 군을 이루고 있는 광역 대도시다. 외형적인 지대함은 서울을 포함해 전국 7대 광역시 가운데서 가장 넒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 가운데 요즘 뜨거운 감자로 주목받는 지역구는 한창 재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는 동구이다. 인천시 동구는 자치구의 틀을 지녔지만 여러모로 낙후돼 최신이라는 첨단증후로부터 비켜난 지역으로 치부되는 곳이다. 첨단증후라고 단적으로 표현한 데에는 첨단증후에 대한 이면성이 삶의 정수리를 위협하는 부분이 일정 정도 있다는 뜻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새 것과 묵음의 복합적인 문제점들이 외형적 갈등과 함께 적나라하게 산재돼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정도가 심각한 수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처음 제기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동구지역에 살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에 대한 몰이해와 역사인식의 부재에 대한 해법을 찾기에 이르는데, 그 방법으로 ‘인천공부’라는 진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어렵지 않게 도출해낸 해법이지만 정석의 풀이과정과 묘법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맨 손으로 지역복지 사업을 수행하는 일꾼들이 팔을 거둬 붙였다지만 제 몫이라고 하기엔 하중이 무거웠던 탓이 컸기 때문이다. 지역 주체는 주민이다. 주민이 정체성과 정주성이 부재하다고 해서 매개자인 지역복지 운동의 일꾼들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와중에 ‘인천의 양심과 지성인의 역할’을 선언한 12명의 소장학자들이 넥타이를 벗어젖히고 선생 노릇을 자처해 주민 앞에 나서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역사, 경제, 생태환경, 종교와 문학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쳐 정점에 이른 엘리트라는 꼬리표를 떼고 ‘이 만큼 성장하게 해준 인천’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 준다는 의지를 모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지대하게 다가오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괄목할 만한 것은 지역복지와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매진해 오던 동구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구체적인 공부를 통해 지역주민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깊이 접근했다는 것이다. 지역의 주체는 주민이라 했다. 이러한 반향을 슬기롭게 받아들인 주민의 의기투합은 무엇보다도 대미를 장식하는 화룡정점에 다를 바 없는 거였다. 대구로 늘어놓기엔 적절치 못한 비유겠지만 일제 강점기에 벌였던 지식인들의 민족 계몽운동이 불현듯 대비가 되었다. 불지불식간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쓴 잉게 숄의 종언이 뇌리에 머무름이 감지되고 있었다. “남을 도와주는 손은 기도하는 입술보다 성스럽다.”

교향악단 지휘자 해프닝

교향악단 지휘자는 상임, 전임, 부지휘자, 객원지휘자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상임지휘자는 교향악단이 연주할 프로그램 구성, 협연자 선정, 단원임명 등 많은 권한을 갖는 실질적인 ‘왕초’다. 전임지휘자나 부지휘자는 상임지휘자가 바쁠 때 대신 지휘를 하거나 1년에 한두 번 정도 정기연주회를 지휘한다. 부지휘자는 주로 교향악단의 연습지휘나 리허설 때 음향을 점검하는 역할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지방교향악단의 경우 부지휘자들은 많지만 이들이 지휘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부지휘자의 기량도 기량이겠지만 상임지휘자들이 별로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객원지휘자들은 교향악단 측에서 특별 초청해 지휘를 맡기는 경우인데 유명한 지휘자이거나 기량이 있는 신예지휘자에게 그 기회가 제공되고 연주단의 훈련을 위해 외국에서 초빙하기도 한다. 그러나 간혹 단원들은 객원지휘자의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일부러 음정박자를 틀리게 해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골탕은 먹은 객원지휘자는 단원들에게 연습을 혹독하게 시키는데 이 때문에 마찰이 생기곤 한다. 오래전 K교향악단이 정기연주회 때 지방 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인 러시아계 외국인 지휘자를 객원으로 초청했다. 그런데 연주회 준비를 하면서 단원들을 호되게 연습시켰다. 이에 당시 교향악단 악장이었던 K씨가 단원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우리를 초등학생으로 아느냐”고 언성을 높이고 그의 지휘를 보이콧했다. 이 바람에 그 객원지휘자는 연주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교향악단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휘자와 악보에 얽힌 해프닝도 재밌다. 지휘자용 악보를 스코어 또는 풀스코어 즉 ‘총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목관, 금관, 현악, 타악기 등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들의 연주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수록해뒀다. 바로크음악의 악보는 대개 10종류 악기의 연주내용이 그려져 있지만 낭만파 이후의 음악에는 한 페이지에 20여가지 악기의 악보가 들어있다. 지휘자는 이런 스코어를 한눈에 보면서 연주자들의 연주상태를 점검해야 하기에 그야말로 탁월한 능력이 요구된다. 요즘 지휘자들 가운데 악보를 보지 않고 40분이 넘는 교향곡 전체를 지휘할 만큼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암보(악보를 외어서 기억함)로 지휘하는 것이 반드시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다. 번스타인을 비롯해 세계적인 지휘자들은 주로 악보를 보면서 지휘한다. 악보를 안 볼 경우 강박관념 때문에 오히려 나쁜 연주가 나온다는 것이 그 이유다. 몇 년 전 재미지휘자 G씨가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선 다음 그대로 한참을 있다가 갑자기 퇴장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관객들이 궁금해 하고 있을 즈음 그는 한손에 악보를 안고 등장해 객석을 향해 높게 들어보였다. 순간 객석에서는 박수가 다시 터졌다. 연주 후 필자가 사정을 물으니 처음에는 악보 없이 연주를 하려고 했으나, 더 좋은 연주를 위해 마음을 바꿨다고 말했다. 창작곡에서 같은 멜로디가 반복될 때 작곡자는 으레 ‘몇 페이지와 같은’이란 표시를 해놓는데 지휘자 L씨는 연주 도중 그 페이지를 찾다가 음악을 놓쳐버려 지휘봉만 뱅뱅 돌렸던 일화가 있다. 또 필자의 은사였던 J교수는 어느 날 연주회에서 바흐의 이중협주곡 순서를 무사히(?) 마친 후 “어, 이거 비발디 스코어였잖아”라고 말해 모두가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있다.

명연주자들이 남기고 간 앙코르의 추억들

지난 4월2일 예술의 전당 음악당에서 있었던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의 연주회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기억될 것 같다. 일찌감치 티켓이 매진되어 팬들의 기대와 성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연주회가 끝나고 앙코르곡만 10곡을 연주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쇼팽의 녹턴으로 시작한 이날의 앙코르 순서는 마지막으로 연주한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까지 모두 1시간40여분이나 경과되었고 그 후로도 사인회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1988년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불렀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무려 165번의 커튼콜을 받음으로써 이 부문 최고의 기록을 세웠지만 소요시간은 1시간7분이었고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이 베를린 데뷔 연주회에서 앙코르곡으로 연주했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1시간30분을 넘지 않았으니 키신이 이번 내한연주회에서 기록한 1시간40여분의 앙코르 시간은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닌 듯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다녀간 거장들의 무대를 하나씩 돌이켜 보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서거 직전 처음이자 마지막 내한연주회를 가졌던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는 앙코르 아닌 앙코르 연주로 우리 청중들의 혼을 쏙 빼놓기도 했다. 청중들이 연주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소품들로 이어진 후반부 순서가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박수와 환호가 끊어지지 않았고 리히테르는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나왔다가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남은 소품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고 그래서 결국은 단 한 곡의 앙코르곡도 연주하지 않았으면서도 마치 여러 곡의 앙코르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 모든 앙코르들 가운데 최고의 감동을 전해준 경우를 꼽으라면 단연 바리톤 셰릴 밀른스의 내한 연주회가 아니었나 싶다. 메트로폴리탄의 간판 가수였던 그는 은퇴를 기념하는 세계 순회공연을 마련하였고 그 일정 중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회를 마친 이 거장에게 앙코르 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어진 광경은 너무나도 뜻밖이었고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잘 빠진 밀른스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박수를 그치지 않는 청중들 앞에 그와는 대조적으로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데다가 머리카락까지 빠져 볼품이 없는 반주자가 악보도 없이 빈손으로 당당하게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뒤를 나타난 밀른스는 전과는 달리 허리를 굽히고 조심스럽게 걸어 나오면서 연신 거들먹거리는 반주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반주자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할 악보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던 일이 드디어 벌어졌다. 반주자가 노래를 하고 밀른스가 반주를 하는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청중을 즐겁게 하려고 몸짓과 표정은 우스꽝스러웠지만 노래와 반주는 그 어느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이 훌륭하고 진지했다. 밀른스의 반주는 그 어느 피아니스트 못지않았고 반주자의 목소리는 그 어떤 테너 가수보다 아름다웠다. 이날 청중들은 음악에 감동하고 뜻하지 않은 해프닝에 더 없이 즐거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랫동안 뭉클했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평생을 함께 동고동락한 음악동료이자 동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이렇게 표현하고자 한 밀른스의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 때문이었다.

오페라와 뮤지컬

얼마 전 나와 친한 어느 분이 오페라와 뮤지컬이 어떻게 다르냐고 내게 물었다. 그런 것 너무 알려하지 말고 그냥 공연을 즐기라고 말해주었는데 퉁명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너무 불친절하지 않았나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성의없이 보이는 대답을 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첫째 개인적으로 나는 모든 것을 실체에 앞서 개념으로 나누는 행위를 지극히 싫어한다. 둘째로 공연의 실무를 하는 사람으로서 공연 자체 이외의 지식을 일반인에게 설명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말하자면 영양학의 설명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데 더 관심이 있다. 또 대개의 경우 지식은 감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오페라와 뮤지컬은 사실 구별하기 힘든 시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뮤지컬 제작에 참여하면서 뮤지컬이 오페라와 여러 가지 점에서 달라 개인적으로 몹시 흥미롭지만 이런 것들은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는 전혀 느껴지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뮤지컬은 전세계 공연무대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장르이고 한국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사회학적 분석까지 필요한 여러 해석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뮤지컬이 오페라의 뒤를 이어 20세기에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만 말하고 싶다. 모든 예술 장르가 그렇지만 특히 관객과 직접 접촉하는 공연은 끊임없이 형태가 변해왔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뮤지컬은 바로 오늘날의 모습일 뿐이다. 나이로 따진다면 실은 뮤지컬에 비해 오페라는 청소년이나 마찬가지다. 오페라는 400여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험관 아기’로 태어났지만 뮤지컬의 뿌리인 ‘악극’은 그 발생의 시점이 아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오페라는 귀족문화요 뮤지컬은 대중문화라고 여긴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되면서 오페라에서 귀족적인 면은 모두 도태되고 말았다.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오페라는 오늘날 영화 산업처럼 관객이 새 작품을 즐기는 대중문화였던 것이다. 오페라하우스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뿌리를 둔 뮤지컬은 그 행위의 장소를 야외까지 포함하고 있었기에 대중성이 오페라보다 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페라가 생명력을 갖게 된 것도 끊임없이 악극의 형태를 흡수해왔기 때문이다. 19세기가 되면서 악극은 자체 극장을 갖게 됐고 오페라와 악극의 퓨전은 끊임없이 지속돼왔다. 오페라 레퍼토리 중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명작 ‘카르멘’은 사실 그 형식의 뿌리를 악극에 두고 있다. 오페라와 악극(오늘날의 뮤지컬)은 점점 가까워져 오늘날 형식상으로는 각기 몹시 다양해서 오페라냐 뮤지컬이냐 구별하기가 어렵게 됐고 굳이 구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뮤지컬이 오페라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비해 상당수의 고전 오페라들에서 과거 뮤지컬의 형식을 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페라와 뮤지컬은 이제 정말 똑같다는 말인가? 분명히 다른 점 한 가지가 있다. 뮤지컬은 목소리를 증폭시키지만 오페라의 목소리는 증폭되지 않은 생음악이라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오페라와 뮤지컬은 성악의 발성이 다르고 그 때문에 공연장도 달라야 한다. 요즈음 오페라 공연에서도 역량이 부족한 성악인을 위해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악습이 있고 또 관객들이 스피커로 나오는 소리에 오염된 나머지 기술적으로 증폭시킨 목소리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수도 많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예술인들의 양심으로 허용해서는 안된다. 영상과 증폭된 음향을 동원해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뮤지컬은 뮤지컬대로 더욱 세련되고 예술성있게 만들어 대중을 즐겁게 해야 하지만 한 편으로 전통 창법을 유지하는 오페라를 육성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순수하게 접촉하는 공연 본래의 생명을 이 장르를 통해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시가 있는 작은 책 길’ 시낭송을 들으며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문화사적 시각에서 살핀 논조 가운데, 손뼉을 치며 탄성을 자아낼 기발한 해석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몇 가지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파리 시민들을 흥분하게 만든 원인이 푸른곰팡이가 핀 빵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공개적인 만담의 교류와 자기표현의 독특한 방식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던 공간으로서 ‘살롱’ 또는 ‘카페’의 역할론이 그것이었다. 오래된 떡이나 빵 등의 유기물에 주로 생겨나 복통과 고열을 유발케 하는 푸른곰팡이 페니실리움은 유익한 세균으로 분류되어 한 때, 만병통치약이라 일컬어졌던 페니실린의 원료로 사용된 이력을 갖는 균사체이다. 시민 사회의 경제와 정치적 만담, 나아가 예술적 표현까지 자유롭게 연출할 수 있었던 카페의 장소성은 프랑스 혁명의 진원지 노릇을 톡톡히 해낼 수 있었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했으며, 시네마토그라피라는 사상 초유의 영화를 카페에서 상영했음도 에둘러 프랑스 혁명의 운명적 배경으로 꼽고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카페 ‘그랑’에서의 영화 상영과 프랑스 혁명과의 시차는 한 세기를 넘나들지만, 특정한 공간에서 말의 씨앗이 뿌려지고 표현이 무르익어 예술이 탄생된다는 논리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먼 역사를 살펴보면 프랑스 혁명의 진원지 구실에 못 미치지만, 이와 흡사한 회합 구조가 반상사회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 문인들과 합석해 시문을 읊고 나누는 조류가 장안에 유행했다는 것과 이를 조정에서 장려했다는 내용이 그렇다. 반상사회가 갖는 특수한 성격으로 봤을 때 저변으로 확대되기는 어려웠을 거라 여기지만, 사람들이 모여 시문의 세계를 나눴다는 것에 논점을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 이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향가나 고려 가요 등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글귀를 꿴다는 것이 아득바득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의 연관성에 배치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이도 역시 따지고 보면 동전의 양면 같은 우리네 삶의 운명적 관계를 긍정적으로 수긍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노동요와 구전돼 전해오는 구비전승의 가치 또한 질박한 삶의 단초를 제시하는 중요한 소통구조였음을 이참에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여하간에, 사람의 생각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일체의 정제된 기능은 가히 본능적이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최선의 방법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인천시 동구 창영동에 소재해 있는 헌책방 ‘아벨’에서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치르는 ‘배다리 시 낭송회’는, 이른바 인문주의의 재생이라는 말줄임표가 숨어 있다. 재생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 이유는, 일찍이 인천이 개항도시로서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이력도 있거니와 노동문학과 카프문학 그리고 한국전쟁을 전후로 르포문학 등이 활기차게 발표되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칠팔십 년대에는 시대현상을 적극적으로 투영하는 일단의 인문주의적 현상들이 시 낭송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다방을 중심으로 다중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의 벽면마다 붙였다 떼기 바쁠 정도로 시 낭송회 및 작품 발표회가 잇따랐었다. 어둡고 모난 시대를 밝히고자 하는 작가적 등신불의 시기였던 것이다. 헌책방 ‘아벨’의 또 다른 이름인 ‘시가 있는 작은 책 길’이 어언 열아홉 번째 시 낭송회를 맞는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들린다. 앞으로도 횟수가 계속 누적돼 지속될수록 마음은 더욱 조려올 것 같다. 각박해진 시대현상의 재생기능 구도로 본격 진입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카페 ‘그랑’은 아니지만 커피와 녹차, 오래된 떡을 내오는 모양새가 더더욱 수상쩍기 때문이다.

화려한 무대연주자들의 의상에피소드

교향악단이나 실내악단 등 연주자들이 단체 연주를 할 때 대부분 통일된 연주의상을 입는다. 하지만 이 연주의상 때문에 단원들 사이에는 가끔 난처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보통 연주 전날 악단의 총무들이 단원들에게 무대 리허설은 몇 시이며, 연주 넥타이는 무슨 색을 매야 하며 어떤 옷을 입고 나오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아 낭패를 보는 단원들이 종종 있다. 예컨대 수년전 서울시향의 연주회 때 팀파니 주자인 K씨가 양복을 준비하라는 총무의 이야기를 못 들었는지 연주회날 다른 단원들과 달리 혼자만 턱시도를 입고 솔리스트처럼 연주해야 했다. 결국 그는 연주가 끝난 뒤 감봉을 당하고 말았다. K씨와 같은 경우 대부분 감봉 등의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연주자들의 임기응변 또한 기발하기까지 하다. 보타이를 매야하는 날 모르고 긴 넥타이를 가지고 왔을 때는 줄일대로 줄이고 졸라매서 손쉽게 보타이를 만든다. 와이셔츠를 잊고 와도 역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위기를 넘기곤 한다. 연주시간은 임박해오고 와이셔츠를 구할 곳도 없는 그야말로 난감한 경우 단원들은 러닝셔츠를 뒤로 돌려입고 그 위에 넥타이를 맨다. 물론 관객들로서는 단원들이 러닝셔츠를 돌려입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구별이 쉽지 않다. 언젠가 KBS교향악단원인 L모씨는 연주가 있는 날 모르고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연주가 불과 얼마 남지 않아 단원들이 마음을 졸이며, 그를 바라보는데 잠시 자리를 떴던 그가 히죽히죽 웃으며 나타났다. 그것은 하얀 운동화에 검정 테이프를 줄줄이 붙여 즉석에서 검정구두처럼 만든 일회용이었던 것이다. 결국 순간적인 재치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솔리스트들의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여성 연주자들은 남성들과 달리 연주복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많은 정성을 쏟는다. 대체로 기악연주자들이 연주동작에 지장을 받지 않는 연주복은 선택하는데 반해 성악가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경우가 많다. 여성연주자들은 계절에 따라 2~3벌 정도의 연주복을 갖고 있다. 값은 보통 몇 십만원 에서부터 기천만원까지 다양하다. 오래전 H씨가 지휘하는 코리안 심포니 반주로 열린 ‘신춘 오페라 아리아의 밤’ 공연 때다. 국내 내로라하는 유명 성악인들이 총동원 된 이날 연주회에는 마침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중 잠시 귀국한 소프라노 K씨가 무대에 서게 됐다. 현재는 중견 성악가로 활동 중인 그녀는 오랜만에 고국 팬을 위해 다른 때와 달리 화려한 패티코트를 입고 무대에 나서던 참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걸음을 내딛던 그녀가 갑자기 비명소리와 함께 무대에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그만 화려한 패티코트를 밟아 눈 깜짝할 사이에 넘어지는 아찔함이 연출됐다. 잠시 후 객석에서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누군가 박수를 쳤고 박자를 맞춘 격려의 박수가 객석을 가득 메웠다. 그녀는 관객들의 성원을 받으며 무사히 연주를 마쳤지만 다음날 공연에서는 부은 손목을 감추느라 때 아닌 긴 장갑을 끼어야 했다. 속 모르는 관객들은 색다른 패션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 후로 무대감독은 긴 치마를 입고 나오는 연주자들에게 일일이 “무대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치마 조심 하세요”라는 말을 챙겨야 했다는 후문이다.

아티스트와 매니저

빌리 조엘은 한 때 뉴요커의 정서를 대변하는 가수로 일컬어졌고 앨튼 존, 스티비 원더와 더불어 건반악기를 가장 잘 다루는 싱어 송 라이터로 꼽혔다. 우리에게도 ‘져스트 더 웨이 유 아’를 비롯해서 ‘업타운 걸’, ‘피아노 맨’과 같은 대표곡들로 잘 알려진 팝 아티스트다. 지난해서야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그는 올림픽 체조 경기장을 찾은 많은 팬들에게 여전히 건재한 모습으로 열창을 들려주어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의 히트 곡들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라면 아무래도 ‘어니스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연인을 향해 사랑을 애원하는 연가인 듯도 싶고 실연의 아픔을 노래하는 것도 같지만 뒷부분에 이르러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쏟아내는 외침과 흐느낌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 노우, 아 노-우-’를 푸념하듯이 뇌까린다. 한오백년의 후렴구인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세상이 이렇다는 것쯤은 철들면서 누구나 다 알게 되는 사실인데 이렇게 노래로까지 만든 까닭이 무엇일까? 노래마다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노래에는 좀 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당시 빌리 조엘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당연히 천문학적인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모든 것을 믿고 맡겼던 매니저가 전 재산을 몽땅 가로챘던 것이다. 그 파렴치한 매니저는 남도 아닌 그의 처남이었으니 그렇게 당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빌리 조엘의 불후의 명곡 ‘어니스티’는 바로 그 때 겪었던 절망과 분노, 좌절과 상실을 고스란히 담은 노래다. 아티스트와 매니저의 관계는 사회에서 맺어지는 그 어떤 관계보다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관계다. 그런데 정작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드러나지 않아 우리가 모르고 있는 나머지 대다수 중에는 서로에게 충실하고 서로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경우들이 더 많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더러는 차마 밖으로 드러내지 못해 속으로 감추고 있는 갈등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매니저라는 존재는 자신의 공식적인 활동은 물론이고 금전 문제와 대인관계를 포함하는 사생활까지도 모두 알아야 하고 또 챙겨야 하기 때문에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맡길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혈육관계의 누군가나 배우자가 매니저로 나서거나, 매니저는 아니지만 그 역할을 대신하는 예가 많다. 세계무대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 연주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장영주와 장한나는 부모가 그런 경우이고, 소프라노 신영옥씨는 언니가, 소프라노 조수미씨는 동생이 매니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휘자 정명훈씨와 그의 형 정명근씨의 관계는 이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렇게 부모형제가 매니저의 역할을 하게 되면 서로의 관계가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렇다고 크고 작은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공과 사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 까닭에 갈등의 골이 더 깊어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예도 없지 않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매니지먼트 계약을 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아스코나스 홀트 사의 사장은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늘 ‘자신이 관리하는 아티스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매니저와 아티스트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티스트와 매니저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한번쯤은 되새겨 볼 만한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5월에 생각나는 것

4월 한 달 날씨가 일정치 않아 봄을 만끽하기가 좀 어려웠다. 청소년의 달, 가정의 달인 5월에는 부디 무르익은 봄이 당분간 계속되어 갑자기 여름으로 치닫는 변덕스러운 기후가 아니기를 빌어본다. 요즈음 날씨가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한국은 봄을 비교적 오래 느낄 수 있는 행운의 나라다. 유럽 같으면 3, 4월은 결코 ‘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달이고 그저 5월 한 달만 반짝할 뿐이다. 상대적으로 5월을 기다리고 또 반기는 노래가 서양에 특히 많은 것은 그 까닭이다. 5월5일이 어린이날인 것은 가장 따뜻한 시기를 잡아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버이날과 같은 시기가 되면서 5월이 가정의 달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린이날이 ‘행사’를 넘어 진정으로 어린이와 나아가 청소년의 현재와 장래를 생각하고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논의의 계기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5월에 펼쳐지는 어린이와 청소년 문화행사라는 것들도 마치 성인들이 스트레스를 술로 풀려는 것처럼 일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소년을 위한 공연을 해본 실무자라면 5월이 청소년에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부적절한 달인가를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중간고사가 있으며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청소년은 소위 ‘문화’라는 것을 즐길 여유가 없다. 결국 청소년을 위한 비교적 적절한 시기는 방학 기간인 한여름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청소년을 문화로 이끌려면 일단 ‘해방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초·중·고교에서 행해지는 소위 교양 교육 중에서 특히 짜증나는 것이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을 쓰게 하는 일이다. 외국에서도 이러는 것 같고 내가 어려서도 자주는 아니지만 독후감을 쓴 적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 일제강점기의 교육에도 있었던 것 같다. 글 쓰는 연습으로 그것이 물론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입시지옥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교양서적이라도 독서가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것을 부담 없이 접하는 마음의 여유를 마련해 주는 일, 유익한 것에서 재미와 흥미를 느끼도록 유도하는 일이다. 청소년을 위한 공연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클래식이든 팝음악이든 비보이 댄스든 그저 좋아하는 것을 즐기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도 공연을 강요하는 수업 프로그램이 있다. 공연 티켓을 제시해야 하고 심지어 음악감상문을 쓰게 하는 수업도 있다고 한다. 나아가 클래식의 경우는 감상에 전혀 필요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는 잡동사니 지식들을 외우게 하기도 한다. 이야말로 청소년을 허영으로 이끄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세계 최극빈자의 나라로서 극심한 전쟁후유증을 겪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지금도 외우고 있는 수많은 봄노래가 있었다. 아이들의 찢긴 가슴을 물질로는 아니나마 노래로 달래주려는 어른의 사랑이 이 봄 노래들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오늘날 경제 대국으로 진입한 한국의 청소년들이 과연 나의 어렸을 때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과거에 있던 중학입시는 지금 없지만 대신 초등학교 아이들이 토플공부를 하는 안쓰러운 상황이다. 이러다가 인간의 변종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공포감이 들 때도 있다. 입시지옥에서 아이들을 당장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부분적인 해방감이라도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틈새에 독후감이나 음악감상문 따위의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고 그들이 겪고 있는 각박한 상황과 전혀 다른 세계를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맛있고 영양가 있는 것을 섭취하게 하여 그들이 정신적으로 피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아이들을 달래주려 봄노래를 만든 과거 어른들의 마음이 현재도 있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고 거국적이고 장기적인 프로젝트에 따라 수행되어야 하는 사업이다. 창피하고 민망하고 눈뜨고 보기 힘든 어른들의 행태가 연일 신문, 방송의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미래는 이 상황보다 좀 더 성숙되기를 염원한다면 실마리는 청소년에게밖에는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한자말에 ‘도모지(塗貌紙)’란 말이 있다. 얼굴에 젖은 종이를 한 꺼풀씩 붙이는 행위인데, 일종의 형벌로 사용돼 왔던 것이 변형되어 ‘도무지’란 말로 바뀐 말이다. 사전적 표현이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아주’라고 돼 있듯이 ‘도대체’ 정도로 대용하면 그럴 듯하게 쓸 수 있는 말이지 아닐까 싶다. 요즘 들어서 이런 말을 자주하게 돼 머리말로 옮기게 된 사연은 인천의 모 고등학교에서 새 학기를 맞아 새내기 학습프로그램 가운데 특강 형식을 빌어 ‘인천 문화사랑’ 수업을 해왔다. 수업의 성격상 비교과적일 수밖에 없지만, 학생들의 수업태도는 여느 학과 수업 못지않게 진지했고 성실했다. 그런데 학생들의 인천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부정적 이미지는 오히려 긍정을 낳을 수 있는 조건이라고 자위해 볼 수 있지만, 이런 생각들이 만연해 있을 때에는 불안감이 가슴 쓸어내리듯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도무지’의 출현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앞이 깜깜해 엉킨 실타래조차 풀 수 없는 지경을 두고 하는 말임에 분명했다. 부정은 긍정이 전제된 상태에서 바투 보는 말이다. 긍정이 없는 부정이나 부정이 없는 긍정은, 정체성의 한 몸 되기를 거부하는 편견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인간의 유전적 모순성을 제대로 인식해 왔던 선배제현들의 말씀이 진실에 가까운 충언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하는 말이다. 학생들의 견해는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총체적 문제점을 직관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데에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전국 대도시 가운데 가장 높은 범죄율이 먼저 거론됐다. 열악한 자연 환경과 교육의 질적 낙후 문제 그리고 부모의 어려운 살림살이로 인한 장래에 대한 우려 등이 인천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 요인으로 지목됐던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공감의 벽에 머리를 박았다는 점에서 ‘인천 문화사랑’ 수업은 빵점 가까운 등급이었다고 평가받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수업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잡는 계기가 됐다고 자평해 보았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학생들이 수없이 토해내는 비판과 편견들의 의중에는 미력하나마 대안을 세우고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성세대들이 거품 물듯 게워내는 대안 없는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 풍조를 보기 좋게 들배지기 해버리는 통쾌함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도무지’는 부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절망의 유령은 분명 아니었다. 진흙을 뒤집어 쓴 채 묵묵히 제 뿌리를 키워나가는 연근처럼 얽히고설킨 끝에 지상으로 밀어 올리는 연꽃 같은 메시지였던 거였다. 인천에서 살아간다는 게 연옥 같은 생활일 것이라는 넋두리를 종종 듣게 된다. 고향을 떠나 새 터를 찾아 정을 틔우고, 생면부지 이웃과 띠앗머리 삼고 이삼십 년 동안 살아온 제 2의 고향일진데, 요즘엔 살맛 안 난다고 아우성치는 터잡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재래시장 상인들이 대표적이다. 재개발 지구로 지정돼 그나마 정 붙이고 살았던 터전을 헐값에 떠넘기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멀쩡한 동네를 싹 쓸어 내어 산업도로를 만들겠다는 불합리한 발상도 문제다. 어디 이뿐이겠냐 마는, 인천을 둘러싸고 있는 전반적 기류가 매우 불경스럽다는 데에 갯바닥에 삼배구곡을 해도 속이 풀리지 않을 지경으로 자존심 상할 일들이 가득하기만 하다. 어린 학생들에게 ‘인천 문화사랑’ 수업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가르침을 받았다. 말랑거리는 여린 입술에서 쏘아 붙이는 정의로운 말이 칼끝보다 두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남의 빨래를 하러 갔다가 내 손이 더 희어진 것과 진배없는 이야기다. 아이들의 결론은 이구동성으로 간결했다. 싫다면 안하면 되고, 좋다면 하면 되고, 내 이웃을 주인처럼 모시면 되고, 살기 좋게 하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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