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왜 자꾸만 무대로 나오는 거지?’

가끔 방송 연기자들의 NG장면을 TV에서 방영해줘 시청자들을 즐겁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연기자들은 실수를 해도 다시 촬영하면 큰 문제가 없다지만 관객이 있는 무대에서 연주자나 연기자들이 공연 도중 실수를 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것은 물론이겠고 관객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게 된다. 유명 연주자나 연기자들도 무대에서 가끔 실수를 한다. 그래서 실수 없이 완벽한 공연을 선보였을 때 관객들은 많은 박수와 함께 ‘커튼콜’을 요구한다. 참고로 커튼콜은 음악회 뿐 아니라 연극이나 오페라 등에서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이 찬사의 표현으로 ‘브라보’ 등의 환성과 함께 박수를 계속 보내 무대 뒤로 퇴장한 출연자(음악회에서는 지휘자와 협연자)를 다시 무대로 불러내고, 출연자는 이에 화답하는 의미로 무대에 2~3회 반복해서 들락거리며 관객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또 조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한 연주(연기)를 한 경우 관객은 기립박수와 함께 5~6회 이상의 커튼콜을 요구하기도 한다. 커튼콜은 공연 직후 관객이 출연진에게 공연감상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무언의 소통인 것이다. 연극이나 음악회에서는 커튼콜을 몇 번 받았느냐에 따라 공연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출연자는 완벽한 공연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박수부대를 몰고 와 여러 번 억지 커튼콜을 유도하는 웃지 못할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바이올린 신동에서 성인이 된 후 어엿하게 거장의 반열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장(장영주)은 지난 2006년 독일 퀼른에서 열린 공연에서 커튼콜을 무려 12회나 했다. 그런 것을 보면 음악이 인종과 국가 그리고 성별을 뛰어넘는 세계 공통어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동양인 최초로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한 발레리나 강수진은 지난 1993년 존 프랑코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 초연 30주년 기념무대에서 주역무용수로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여 20여 차례의 커튼콜을 받았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관객의 성원이라면 십여 차례 이상의 커튼콜에도 기쁨으로 응한다. 그런데 관객들 가운데는 ‘왜 자꾸만 무대로 나오는 거지?’라며, 한번만 인사를 하면 되지 여러 번 나와 인사를 하느냐고 궁금해하거나 의아해하는 경우가 있다. 커튼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드는 의문일 거다. 커튼콜 후 출연자는 인사 외에 앙코르 연주로 화답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보면 커튼콜도 공연의 연장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자리를 떠서 공연장 밖으로 나가기도 하는 것을 보면, 아직 커튼콜에 대한 인식과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다. 또 가끔은 출연자들도 형식적으로 커튼콜을 행하기도 해 아쉬울 때가 있다. 예술가들은 박수를 먹고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관객의 큰 반응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더욱이 박수는 많이 칠수록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공연 감상 후 인색하지 말고 마음껏 예술가들을 위해 격려와 감사의 박수를 보내주자.

발레 ‘홍등’을 보고

장이모우의 영화 ‘홍등’이 발레로 변신해서 우리 곁을 찾아왔다. 장이모우라면 영화 뿐만 아니라 자금성에서 펼쳐 보인 오페라 ‘투란도트’와 바로 얼마 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베이징 올림픽 개·폐막식까지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풍운아이다. 그런 그가 발레에까지 손을 뻗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영화를 알았던 사람이라면 발레로는 성이 차지 않았을 것이고 발레를 먼저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밋밋하고 싱거웠을 수도 있다. 장르와 장르를 넘나들거나 뒤섞는 ‘크로스오버’나 ‘퓨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근래에 들어 중국이 부쩍 이 일에 재미를 내고 있다. 발레와 서커스를 하나로 묶어 내놓는가 하면 영화와 서커스를 묶는 일도 없지 않다. 포인트 슈즈를 신은 발레리나가 건장한 남성의 머리 위에 서서 아라베스크 동작을 보여주는가 하면 영화 ‘와호장룡’의 대나무 숲 결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서커스 무대를 연출하기도 한다. 대나무처럼 연두색을 띤 밧줄을 수도 없이 매달아 두고는 하늘을 나는 것처럼 그 사이 사이를 재빠르게 누비고 다니면서 검술을 펼치는 것이다. ‘홍등’의 경우는 이 보다 훨씬 더 많은 요소들이 결합하고 있다. 돈 많은 영감의 세 번째 부인으로 첫날밤을 맞이하게 되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저항은 ‘그림자극’의 형태로 묘사되고 이어지는 축하 피로연에서는 ‘경극’이 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보다 작게는 한족의 전통춤 동작을 적용시킨 군무를 찾기도 하고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춤사위들을 폭넓게 활용하려는 의욕을 짐작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는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의 어법들이 시대를 넘나들고 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다. 우리 귀에 익숙한 19세기 조성음악에 20세기 이후 시도되었던 여러 현대음악 기법들이 어우러져 있고 서양 악기를 중심으로 한 오케스트라를 기본으로 필요할 때마다 중국의 전통 악기들이 그 장면에 맞는 음색과 음향을 더해주고 있다. 영화와 발레를 같은 비중으로 취급해서는 영화를 만족시킬 수도 없고 발레를 충족시킬 수도 없다. 영화 ‘홍등’이 ‘아내들과 첩들’이라는 소설을 영화에 맞게 각색한 것처럼 발레 ‘홍등’도 영화 ‘홍등’을 발레에 맞게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기에는 안무를 맡은 왕신펑과 왕유엔유엔의 무게가 장이모우를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베르디가 쉐익스피어의 ‘맥베드’를 오페라로 만들면서 결국 원작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버리지 못한 것처럼 ‘홍등’의 안무자들도 마찬가지 입장이었을 것이다. 베르디 같은 대가가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는 쉐익스피어의 작품을 마음대로 어쩌지 못했는데, 왕신펑과 왕유엔유엔이 살아서 그들과 함께 숨쉬고 있는 장이모우를 거슬렀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멕베드’가 아쉬웠던지 베르디는 쉐익스피어의 다른 걸작 ‘오델로’에 손을 댔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작의 반을 덜어내는 대수술을 감행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소설이나 희곡을 무대나 영상으로 옮기는 것보다 영화를 무대로 옮기는 작업이 훨씬 어렵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영상이 무대보다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뮤지컬의 제왕이라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조차도 헐리우드의 영화 ‘선셋 대로’를 뮤지컬로 만들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원작이 성공작이었을 경우 무대로 옮기는 작업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그래도 발레 ‘홍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전에 없던 도전이자 모험이고 다음 있어야 할 작업에 소중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장이모우의 ‘홍등’이 아니라 중국국립중앙발레단의 ‘홍등’이었으면 한다.

전문가의 범람

텔레비전 드라마를 거의 안 보는 내가 몇 년 전 꽤 열심히 본 드라마가 있다. 국내외에서 인기를 모았던 ‘대장금’이다. 평소 먹을 것에 관심이 많다보니 거기 소개되는 음식들이 ‘볼만’했지만 내가 흥미롭게 본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고증이 잘 되었다는 전제하에 그 드라마는 조선시대 궁중의 전문인 양성 시스템을 잘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루는 재료에 대한 정통한 지식을 쌓아야 하고 요리법의 이론과 실기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등 요리사를 기르는 철저한 교육과 훈련이 있다. 그 조직에서 선배는 후배보다 더 실력이 있고 팀장은 확실한 권위를 가진다. 여기에도 시기와 암투, 모략과 음모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윗사람은 아랫사람들의 부조리를 경험과 인덕으로 슬기롭게 누르고 조절해 나간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입은 살아 떠들지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실제로 무엇을 해보라면 전혀 할 줄 모르는 자들이 너무 많다. 더구나 전문성을 옳게 판단하는 풍토가 아니어서 너도 나도 전문인이라고 외치고 나서면 누가 ‘원조 전문인’인지 헷갈리는 수도 있어 위험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병원 사무장 하던 사람이 면허를 위조해 버젓이 의사 행세를 했다는 뉴스도 있었거니와 이러다가는 항공사 임원이 퇴임하기 전에 점보제트기를 조종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야 사람 죽는 것을 보면 확실히 드러나는 일이지만 문화계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 아니라고 우겨대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관객의 눈과 귀를 처참하게 만드는 공연을 하고서도 공연장 로비에 어찌 동원했는지 각계의 유명인사들이 보낸 화환을 즐비하게 늘어놓으면 그만이다. 의사나 조종사처럼 위조라도 해야 할 ‘면허’가 필요한 분야와 달리 문화계는 대학졸업장이 ‘증’ 노릇을 하니 너도나도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는 전혀 상관 없는 분야도 오히려 등록금이나 내고 산 알량한 졸업장이 강력한 ‘자격증’ 노릇을 하니 문제다. ‘대장금’의 무대는 궁중이고 왕을 위한 것이니 그렇게 시스템이 철저했는지 모른다. 오늘날 고객이 왕이 되었으니 고객을 상대로 하는 곳은 그만큼 철저한 직장내 교육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고객’의 개념이 철저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문화계, 특히 공연계는 그러한 전문인 양성 시스템을 만나기 어렵고 하물며 사회와 동떨어진 듯이 여겨지는 일반 학교를 보면 그 교육을 받아 사회에서 써먹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조차 없다. 무대에 서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 객석에 앉은 관객들의 공감으로 이루어져 어느 평론가의 현학적 평보다도 정확하게 나오는 사회라면 ‘증’을 가지고 관객을 속이는 일은 없어진다.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는 프로정신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관객에 판단을 정치에 비유하면 ‘민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민심을 천심으로 알고 겸허히 받아들이며…” 등등의 말들은 하지만 거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사회가 이러하니 프로들을 길러내는 교육 시스템이 철저할 수가 없다. 재주와 운이 잘 맞아떨어져 어린 나이에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인들을 떠받들기는 해도 그렇게 될 만한 사람들을 길러내는 시스템은 허술하기 짝이 없고 하물며 한국에서 길러내 외국에 내보내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꿈을 가진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시 바삐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배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엉성한 시스템에서 기초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외국에서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귀국했을 때는 밀어닥치는 허망함을 느껴야 한다. 장래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겨를이 없이 일단 수능에 생사를 거는 청소년들을 올해도 보면서 이 환경이 언제나 고쳐질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인천 역사자료관을 위한 私辨

문어 다리와 미니 골프장. 너부죽한 양재기에 물 한 가득 받아 놓고 물방개를 풀어놔, 자신이 정한 숫자가 그려진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면 상품을 받아내곤 하였던 물방개장수. 거뭇한 보리 물에 수박 몇 조각 띄워놓고 투명한 호스를 늘어뜨려 컵에 따라 파는 냉차장수 등등의 풍경들이 소년기의 자유공원에 대한 기억들이다. 조악하기 짝이 없던 야조사와 맥아더 동상 뒤편 벚나무 사이 길에서는 검은 교복을 입은 남녀학생들이 알 수 없는 뭔가를 늘 도모하기도 했었다. 햇볕이 직사로 내려 꽂히는 남쪽 등성 한가운데에는 상아색으로 물든 박물관이 근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박물관 정문을 따라 내려앉은 횅댕그렁한 계단에서, 길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바닥의 몸집은 점점 작아져버리고 붉은 벽돌을 두른 담장은 더욱 높아진다는 것을 알았던 시절이었다. 담벼락에 박혀 있던 작은 쪽문과 둔중한 후문은 늘 건장한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소년기의 기억을 어둡게 지배했던 붉은 벽돌담 안에 인천 시장의 관사가 있고 자유공원에 오를 때면 의례히 피해가야 하는 곳이었음이 염두에서 사라진 것은 불과 7년 전의 일이다. 1966년부터 2001년까지 35년간 시장관사로 사용하다가 인천 시민의 품에 안긴 데에는 최기선 시장의 공약에 따른 바도 있었다. 너른 풀밭과 잘 꾸며진 정원수 그리고 기이하게 생긴 바위 등으로 계단을 놓고 단단한 육질을 평탄하게 조탁해 놓은 기단석과 멋스러운 기와집. 철옹성 내지는 아방궁에 견줄 만큼 어린 가슴을 기묘하게 짓누르던 관사가 인천 시민의 발걸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조차 믿기지 않는 사실이 되었다. 그만큼 시장관사는 응봉산에 함께 있는 자유공원과는 판이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자웅동체였다. 그런 공간을 인천 시민에게 되돌려 준다는 발상의 신선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욱 구체적인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 바로 역사자료관이다. 역사자료관의 개관으로 인천의 역사성과 정체성에 목말라 하던 시민의 갈증이 해소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보답하듯 불모의 밭으로 오해를 받았던 인천이란 도시에 엄청난 분량의 역사의 꽃을 틔우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삼십 여권에 달하는 자료집으로 근대 개항도시 인천의 가려진 장막을 거둬냈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나라 근대사의 보물 창고를 물증화시키는 사역을 굳세게 해냈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7년이란 세월을 불철주야 연구에 열성을 발휘한 두 분 강 박사와 인천시의 막대한 지원도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십만 여 인천 시민의 애정어린 발품이 더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항간에 이런 역사자료관을 두고 떠도는 괴 소문이 무성하다 못해 시껍하다. 외국인 방문자 숙소로 만든다든지 한옥 체험을 위한 전시관으로 만든다는 등의 말들이 시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고 한다. 가당치도 않지만 현재 역사자료관은 지리적 접근의 안정감과 장소적 상징성을 무난히 소화해냈을 뿐더러 인천 역사 연구의 사랑방으로 이미 튼실하게 시민 사회에 뿌리를 뻗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남의 목숨도 귀하게 여긴다는 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 마디 더 거들자면 역사자료관이 과거에 시장관사로서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역사자료관은 일제의 한반도 경제침략의 총아로 불렸던 코노 다케노스케(河野竹之助)의 별장이었다. 1891년 인천 미두취인소의 중역을 시작으로 조일양조㈜, 조선신탁㈜, 맹중자동차㈜, 월미도 유원회사, 조선연초㈜의 중역을 한 인물로 1931년 사망하기 전까지 인천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경제 침탈에 앞장서 부를 축적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역사자료관의 현재 위치가 돋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베토벤 바이러스’ 그 속의 에피소드

방송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장안에 화제다. 매회마다 클래식 연주곡과 악기들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고, 현실과는 조금 거리감이 있기는 하나 교향악단의 구성과 실태가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클래식을 가깝게 느껴지도록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클래식은 과거 왕과 귀족이 즐기던 예술 분야였고, 일반 대중들에게 많이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친숙함을 느끼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TV드라마에서 교향악단과 연주자들 그리고 지휘자의 정신세계까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재미있는 소재로 만들어 인기를 끌게 되니 클래식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올라가고 있다. 역시 전파력이 강한 대중매체 중 TV만한 것이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됐다. 교향악단의 경우, 전체 편성 오케스트라가 70~80여명이 넘는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소규모 예술단에 비해 각양각색의 일들이 일어난다. ‘베토벤 바이러스’도 그런 면에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아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준다. 드라마 속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는 허구도 있지만, 실제 교향악단 가운데서는 다양한 징크스를 지닌 사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지방 B교향악단의 경우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연주에 대한 징크스가 있는데 수년전 그 곡을 초연 했을 때 연주를 3일 앞두고 목관파트 남자단원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고, 그 뒤로 또 다시 ‘비창’을 레퍼토리로 하는 연주회를 앞두고 바이올리니스트가 교통사고를 당해 일가족이 사망했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그다음 ‘비창’을 연주하게 될 기회가 생기면 연주 단원들은 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또 K교향악단의 경우는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위해 만들었다는 교향곡 3번 ‘영웅’ 연주를 기피하는 현상이 있다. 이유인즉 연주단 창단 후 베토벤 ‘영웅’교향곡 초연 후 며칠 뒤 제2바이올린 주자 K씨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두번째 연주 후에는 또 다른 바이올린주자 K씨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세 번째 연주 6일 후에는 원로 호른주자인 S씨가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이런 불길한 일이 잇따라 발생하자,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영웅’교향곡을 연주하지 말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S교향악단의 경우는 외국인 지휘자를 초청해 연주를 할 때마다 비가 오는 징크스가 있어 가뭄이 심해지면 우스갯소리로 ‘외국인 연주자를 초청하자’는 말을 하곤 한다. 교향악단이 연주를 통해 보여지는 우아함과 아름다운 선율 뒤에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가 이렇게 산재해 있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극 중 강마에로 분한 탤런트 김영민이 냉철한 노력형 천재로 그려지면서 쏟아내는 언어적 표현이 한몫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교향악단의 뒷모습이 일반인들에게 관심거리가 될 만한 것이다.

베토벤 바이러스

요즈음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많은 이야기들이 들리고 있고 더러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이야기가 실제와는 얼마나 가까운 지를 묻는 사람들도 있다. 특별히 지휘자로 등장하는 ‘강마에’라는 인물에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고 더불어 지휘자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흔히들 19세기를 피아니스트의 시대라 하고 20세기를 지휘자의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21세기에 와서는 지휘자의 시대가 저물어간다고들 말하지만 아직도 지휘자를 대신할 만한 그 무엇인가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20세기 클래식 음악에서 지휘자가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대단했었고, 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지휘자에 대한 관심과 선망은 여전한 듯 하다. 지휘자의 역할이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19세기 전에는 관현악단의 책임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음악을 이끌기도 했고 바로크 시대에는 쳄발로 연주자가 지휘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전에도 간혹 필요에 따라 지휘봉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과는 달리 지팡이처럼 긴 막대를 사용했고, 주로 그 끝으로 바닥을 두드려 시작과 끝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19세기 이후에서야 지금과 같은 모습의 지휘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작곡가들이 지휘자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였고 구스타프 말러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음악사에 등장할 만큼 중요한 인물 가운데 최초의 전업 지휘자는 한스 폰 뷜로우였다.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결혼했고 한 때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지만 바그너의 영향으로 전업 지휘자로 나섰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초대 상임지휘자로 부임하였다. 이 악단은 1862년 벤야민 빌제가 만든 빌제 오케스트라로 출발했으나 형편없는 처우에 불만을 가진 단원들이 따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출범하였다. 지금은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전용 홀을 가지고 있어 모든 오케스트라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최초의 보금자리는 롤러스케이트장을 개조해서 만든 공연장이었다. 베를린 필과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빈 필은 창단부터 지금까지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길지 않은 역사에도 세계적인 명 오케스트라와 어깨를 겨루고 있는 오르페오 챔버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없이 악장이 연주를 이끌어 가는 악단으로 유명하다. 음악의 다른 분야와는 달리 처음부터 지휘를 공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초의 전업 지휘자 뷜로우는 피아니스트로 출발해서 지휘자가 되었고 이후 지금까지도 피아니스트 출신의 지휘자가 많은 편이다. 바이올린이나 비올라를 연주하다가 지휘자로 나서는 경우도 흔한 편이지만 현악기 연주자에서 지휘자로 전향한 대표적인 경우라면 토스카니니와 쿠세비츠키를 꼽을 수 있다. 토스카니니는 원래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였고 쿠세비츠키는 당대 최고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다. 피아노와 현악기 뿐만 아니라 관악기와 타악기 연주자들 중에도 지휘자로 나서는 경우가 있는데, 현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타악기 연주자였다. 테너 플라치도 도밍고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처럼 성악가가 지휘자로 나서는 경우도 있고 드물게는 발레리노 출신의 지휘자도 찾을 수 있다. 지휘자는 음악 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가져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케스트라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하고 단원들과 자신의 관계는 물론이고 단원들 상호 간의 관계와 오케스트라 외부와의 원만한 소통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지금처럼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지휘자들의 고뇌도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자, 우리 모두 이 세상의 지휘자들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

해설의 범람

어느 일식집에 들어갔더니 시니어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 주문한 음식에 대한 ‘해설’을 시작한다. 꽤 길어지기에 함께 간 손님과 얘기를 해야하니 그냥 놓고 나가라고 했는데도 무슨 고집인지 계속한다. 성가신 것을 참으며 듣고 있다가 “입 속에 넣으면 쫄깃쫄깃하구요…”하는 바람에 짜증을 내고 말았다. “내 입 속에 들어온 것은 내가 느낄 터이니 제발 나가시오”하고 나서 음식을 먹으려니 맛이 반감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동안 지난 후 음식 해설이 왜 필요한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 분명 손님들이 좋아하리라고 생각해서일 것이고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한 지식을 갖게되면 그 음식이 고급이라는 확인을 하게되고 그러다보면 그것을 먹고 있는 자신이 상류층이라는 확신을 갖게되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내 입 속에서 느끼는 음식 맛조차 ‘개관적 지식’에 의해 ‘증언’되지 않으면 안되는 모양이다. 다시말하면 입에 넣는 음식도 명품이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런 해설을 낳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클래식 음악에 해설을 곁들이는 것이 유행처럼 되고 있다. 클래식 음악은 왠지 어렵게 느껴지는데 해설을 듣고 나면 쉽게 이해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설 전문가도 나오고 가지가지 해설이 범람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드물게 연주되는 작품에 대한 소개라면 나쁠 것 없지만 작품을 감상하는데 과연 필요한 해설인가 의심되는 경우도 많다. 음악대학 강의실에나 어울릴 분석을 해서 감상자의 해골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미인 대회에 해부학 교수가 나와 인체 설명을 하는 것 같다. 텔레비전을 보면 음악이 지금 흐르고 있는데 아랫쪽에 ‘제 1악장 알레그로. 경쾌한 제 1주제가 바이올린으로 시작되면 이어서 목관악기가…’ 어쩌고 하는 스크롤이 계속 지나가 음악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오페라의 경우는 무성영화처럼 변사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오페라 자체를 보는 것보다 해설을 더 즐기는 것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왜 이런 그로테스크한 해설이 범람하는 것일까? 클래식 음악을 명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은 어딘가 드높은 곳에 있어 그것에 친숙해야만 상류층이 된다는 착각 속에 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음악을 듣고 느끼는 것보다 음악에 대한 지식을 필수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21세기에 음악을 듣는데도 계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때 “벽을 허물자”라는 구호가 외쳐지기도 했고 마치 그것을 실천하는 양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의 벽을 허문다는 구실로 성격이 다른 음악들을 한 솥에 넣고 끓이면서 “열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클래식(고전)음악과 오락음악이라면 몰라도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으로 나누는 것도 문제다. 왜냐하면 클래식음악은 근본적으로 대중 지향적이라야 하며 또 대중적인 것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논어나 성경이 고전 중의 고전이므로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공연장 이름에 신주를 모시는 곳을 의미하는 ‘전당’이라는 말을 붙인 것도 한 시대의 의식을 반영한 예라 하겠다. 이런 명품의식이 대중이 클래식 음악에 거리낌없이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음악은 느끼는 것이지 결코 이해하는 것이 아니므로 낯선 음악, 친근한 음악은 있어도 어려운 음악, 쉬운 음악이라는 개념은 없다. 클래식 음악이 얼마든지 대중에게 친숙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명품의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어느정도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설의 난무를 진정시켜야만 한다.

문화자폐증을 유발하는 도시축제

붕어빵이다. 아니, 만성적 불경기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젖은 깃발 같은 존재감이라면 차라리 ‘황금잉어빵’이라 부르는 게 낫다. 도시민의 허전한 옆구리를 유혹하는 도시축제를 일컫는 말이다. 행사 내용을 면밀히 살펴 참여해 보건데 큰 차이가 없다. 지방 행정부와 의회의 꼭두쇠들의 기나긴 축사가 끝나기 무섭게 연예인들이 몰아닥친다. 두세 시간 정도 개기다 보면 어느덧 불꽃 놀이할 시간. 이런 형식은 전말에 불과하다. 이미 각설이패가 한바탕 허공을 두드렸고 삐에로가 등장했으며, 각종 먹을거리에 노래자랑 등의 전초 행사가 판박이처럼 치러진 이후이다. 축제의 판형이 가히 전국적이다. 산과 물이 다르고 삶의 방식과 지리적 환경 또한 다르건만 축제를 치르는 방식은 거의 ‘황금잉어빵’이다. 축제는 여럿이 함께 누리고 합심해 치성을 올리는 것이라 배웠다. 같은 민족이되 나라를 달리 했던 먼 조상들이 영고니 무천, 동맹 등의 제천행사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축제를 치렀던 것이다. 사족을 달면, 이들 행사의 전반을 꾸려나가는 방식이 신을 맞아들이고(영신), 신과 함께 놀고(오신), 신을 보내는(송신) 것으로 이루어졌는데 한결 같이 대동소이하다. 그 내용의 면면이 ‘삼일 밤낮으로 음주가무고’로 이루어졌음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돼 있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북을 두드리는 행위가 오늘날과 결코 다르지 않다. 고금의 축제를 싸잡아 매도하거나 헐값에 넘기고자 하는 게 아니다. 무엇을 지향하고 왜, 하느냐에 대한 의미를 재고해 보자는 취지에서 능청떨 듯 하는 말이다. 다들 잘 알기 때문에,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언구럭을 부리는 거다. 군부 서슬이 두려웠던 시절에 ‘국풍’이 한강변과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지방화 시대로 전이되면서 지방정부 중심의 각종 ‘문화축제’들이 양산되었다. 글로벌 시대로 집중되면서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고 지방의 독특한 문화자산이 가장 국제적인 문화자산으로 인식되는 단초가 구 단위 행정부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주체의 망실에 있다. 축제를 치러내는 밭은 있는데 정작 꽃이 없는 경우이다. 그러다보니 조화를 심어 놓을 수밖에 없다는 위정자들의 말이 온당히 들린다. 필시 마음이 우러나야 몸이 뒤따르는 데에도 별탈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사람(주민)이 꽃 보다 아름답다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한 이유이다. 우리나라에서 펼쳐지는 천여 개의 다양한 축제 방식들이 ‘전국적 동일 현상’이라는 말에 거슬린다면 별(주민)들에게 직접 물어 볼일이다. 별들의 대답을 가슴으로 들으려 하는 ‘지성’이 있다면 분명히 ‘감천’이 따르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정리하자면 작금의 축제에는 철학이 없다는 데에 있다. 반응기피와 집중력이 결여된 행사위주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충동적이고 자발성이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지만 지방정부가 반복적 집착과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평가이다. 결정적인 것은 축제의 전반이 주민과 소통하지 않는 다는 것에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자폐증상과 다름이 없다. ‘황금잉어빵’이 싫다고, 지방정부의 자금지원 없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자신들만의 마을 축제를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생겨났다. 뻥튀기로 강정을 만들어 나눠먹고 지난 한 해를 돌이켜 기억에 남는 일들을 그림으로 모아 초대형 걸개로 엮어낸다는 것이다. 갓 배운 풍물놀이가 어수룩해도 편부모, 다문화 가족과 함께해 삶의 단절감을 없애자는 취지가 단연 특별나 보인다.

용감한 관객

용감한 관객¶글. 경기도문화의전당 사장 박인건¶¶처음 서양식 레스토랑에 갔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나이프는 오른손, 포크는 왼손을 사용한다는 기본상식을 미리 알고 갔던 전력이 있을 게다. 공연관람을 위해 공연장을 찾을 때도 이처럼 기본예절을 사전에 알고 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을 알아 두지 않아 주변 사람이나 공연 관계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 종종 있는 것이 우리 공연문화계의 현주소다. 클래식연주회의 경우 연주 레퍼토리를 확인하고 그 곡의 작곡가에 대한 정보와 함께 어떤 시대에 무슨 내용을 가지고 음악적인 표현을 했느냐는 점과 연주단에 대해서도 경력과 기량에 대한 정보를 알고 연주를 접하게 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질 뿐 아니라 더 큰 감흥을 얻게 된다. 또한 악장과 악장사이에 박수를 치는 것은 연주자에 대한 실례이므로 한 곡이 완전히 끝났을 때 박수를 보내야하는 상식정도는 알아둬야 한다. 뮤지컬이나 오페라, 연극 역시 작품의 줄거리 정도를 체크하는 노력만 기울여도 훨씬 많은 재미가 있다. 예컨대 차이코프스키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교향곡 6번 ‘비창’의 경우 4악장 말미에 목관악기 바순이 8박자를 조용히 끝내면서 청중들에게도 무언가를 생각할 시간을 갖기를 원하지만 8박자가 채 끝나기 전에 박수를 치며 ‘앙코르’까지 외치는 관객이 있다. ‘비창’은 제목에서 주는 느낌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슬픔을 생각할 수 있도록 ‘앙코르’를 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사전준비가 없었던 관객이 할 수 있는 용감한 행동이다. 공연장은 서비스업으로 안내도우미들이 관람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 보다 편안하게 공연을 관람하고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용감한 관객으로 인해 애태우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필자가 근무했던 서울의 몇몇 공연장과 우리 공연장의 사례만 봐도 시대의 흐름만 조금 변했을 뿐 척박한 객석문화수준이 여전함을 느낄 수 있다. 안내도우미들의 눈에 비춰진 워스트(worst) 관객 사례를 살펴보면, 첫 번째, 과거에는 호출기, 요즘 들어서는 휴대폰을 꺼달라는 안내방송을 무시하고 요란하게 벨소리를 자랑하거나 더불어 몰래 카메라를 소지하고 입장해 플래시까지 터트리며 객석의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용감한 관객. 두 번째, 공연 중간 입장이 불가능한 상항임에도 고위층을 사칭하거나 막무가내로 들여보내 달라고 협박하는 관객. 세 번째, 티켓 구매 숫자보다 더 많은 인원을 입장시켜달라며 떼를 쓰거나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것이라 우기며 무임입장을 하려는 용감한 관객. 네 번째, 공연장 내 음식물 반입 금지사항을 무시하고 음식물을 갖고 입장하거나, 몰래 가지고 들어간 후 공연 중 음식을 먹으며 주변에 불편함을 끼치는 관객. 다섯 번째, 만 7세 이하 어린이 입장불가 규정에 항변하며 자신의 아이는 특별히 영특해서 절대 울거나 방해되지 않는다고 우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되면 공연 중 차를 빼달라는 방송을 요구하는 관객. 여섯 번째, 초대권을 소지하고 와서는 공연은 뒷전이고 좌석이 나쁘다는 등을 이유로 초대권을 현찰로 바꿔달라고 조르는 관객. 마지막으로 껌을 씹으며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공연장을 찾거나 술을 먹고 와 앞좌석 등받이에 발을 올려놓고 코골며 자는 관객 등이 워스트(worst) 관객으로 꼽혔다. 이런 용감한 관객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고 공연 종료 후 수고해준 안내도우미들에게 따뜻한 인사 한마디 나눌 수 있을 때 우리 공연문화는 한 층 성숙해 질 것이다. 박인건 경기도문화의전당 사장

동백아가씨

올해로 한국 오페라가 60주년을 맞이했다. 그래서 지난 9월 21일, 서울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서는 우리나라 오페라 관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를 기념하는 심포지움과 갈라 콘서트를 열었다. 1948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에 올랐던 오페라는 베르디의 ‘트라비아타’였다. 당시는 이 작품을 ‘춘희’라고 했고 지금까지도 이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어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오페라 ‘트라비아타’는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의 ‘동백아가씨’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작곡가 베르디는 파리에서 이 소설을 연극으로 만든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오페라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트라비아타’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당시 파리에는 베르디의 연인이자 동반자였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가 살고 있었고 공연차 파리에 들렀던 베르디는 스트레포니와 함께 이 연극을 관람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던 베르디는 양조업자인 안토니오 바레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학업의 기회는 물론 작곡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바레치의 딸 마르가리타와 결혼하였으나 얼마지 않아 자녀와 아내를 차례로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이후 자신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를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살았지만 오랜 동안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는데, 이는 베르디가 죽은 아내와 장인이자 은인인 바레치에 대한 의리,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베르디보다 스트레포니가 결혼을 더 주저했었고, 그것은 자신이 한 때 테너 가수의 정부로 살았다는 오점이 있어 이것의 베르디의 명성에 누가 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에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에서 만난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자유롭고 뜨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들의 눈에 비친 연극 ‘동백 아가씨’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마치 그들의 이야기인 양 마음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뒤마의 소설 ‘동백 아가씨’의 주인공 마르그리트는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쳤던 마리 뒤 프레시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14살에 가출하여 파리로 간 알퐁신 프레시는 마리 뒤 프레시라는 이름으로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았으나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여행 중이었던 뒤마에게 연인의 죽음은 또 한 번의 충격이었고 결국은 마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 마리 뒤 프레시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소설 속의 마르그리트는 동백꽃을 좋아해서 한 달에 25일은 흰색 동백꽃을, 나머지 5일은 붉은색 동백꽃을 머리에 꽂았기 때문에 동백 아가씨로 불렸다. 이 소설이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椿姬’가 되었고 오페라보다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먼저 전해졌기 때문에 나중에 들어온 오페라까지 ‘춘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생각하면 그렇게 부르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한자어 ‘椿’은 사실 동백이 아니라 참죽나무를 일컫는 말이니 그것마저 간과할 문제는 아닌 듯싶다. 한국 오페라 6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에 올랐던 오페라 ‘트라비아타’를 생각해 보았다. 한국 오페라 60주년 심포지움에 이런 가벼운 이야기도 함께 있었더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60년 동안 우리 오페라의 당면 과제는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공연장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공연장이 여기저기 생겨나 개관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데도 처음 들어보는 곳도 많다. 크고 작은 지방 자치단체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도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다. 실제 효율성은 차이가 있겠지만 겉모양은 모두 번듯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관이 주도해 공연장을 새로 지을 때 취지문이 있기 마련인데 기왕에 생겨난 곳을 참조해서인지 대체로 비슷하다. 이를테면, ‘우리 지역 주민들의 문화의식을 제고하고 지역주민의 문화 향유의 수준을 높이며…’ 등의 말들로 나열되기 일쑤인데 이것을 바꿔 말하면 공연장이 생김으로써 그동안 문화 향유에 굶주렸던 지역 주민들에게 기회를 베푸는 것으로 풀이된다. 과연 그 말이 옳은가? 물론 지역에 따라 당연히 그런 결과를 낳겠지만 그것이 주목적으로 표방된다면 공연장의 본질을 모르는 얘기다. 이런 취지는 실은 반세기 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이 생길 때 취지를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온 국민의 몸과 마음이 찢길대로 찢긴 후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때 이런 공연장이 생기면 그 상처를 달래는 큰 효과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런 ‘문화 배급제’를 오늘날에도 실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대단한 시대착오다. 아니 그보다 공연장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직도 정확하게 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연장이란 무엇인가? 공연장은 공연물을 파는 곳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단순명료한 명제가 표명되지 않는 이유는 ‘판다’는 표현이 너무 적나라해서라기보다 공연장 자체의 본질을 몰라서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문화는 상행위와 관계가 없으며 상행위로 인해 상업주의가 된다고 생각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400년 전 베네치아 상인들이 공연물을 팔기 시작하면서 근대 공연 시스템이 생겨났고 바로 상행위로 출발했기 때문에 오늘날 상업주의를 억제할 수 있게 된 파라독스가 확실하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고객(관객)을 위한 공연물을 상품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공연의 민주화, 나아가 대중화를 이끌어 낸 것이며, 고객 만족을 위해 항상 우수한 물건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관객의 심미안이 올라갔다. 그런 과정에서 우수한 작가와 연기자가 만들어졌고 수준 높은 공연이 쌓임으로써 상업주의로 쉽게 흐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공연장은 높아진 제작비를 다른데서 충당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공연이 점점 페스티벌 화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우수한 공연물을 만들어 지역 주민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많은 외지인들이 보게 만드는 것이다. 지역 주민은 외지인에게 객석을 내어주고 그 대신 그들이 흘리고 가는 돈을 챙긴다. 이런 페스티벌의 부가가치 때문에 지역 당국이(경우에 따라 국가까지도)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이다. 공연장은 그 재원이 어디서 나오든 물건을 파는 곳이다. 손님이 즐기는 물건을 파는 곳이라는 점에서 레스토랑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연장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명쾌하게 드러난다. 즉 맛, 영양, 위생, 환경, 서비스, 가격 여섯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앞의 세 조건을 공연장에 적용하면 재미있고 유익하고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 공연을 보러 여행을 떠나는 시대에 ‘지역 주민의 문화의식을…’ 운운 하는 발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멀쩡한 모습으로 세워지는 공연장들이 머지않아 흉물로 바뀔 것은 뻔한 노릇이다. 조성진 성남아트센터 예술감독

通하며 사는가

사람은 대자적 존재다. 익명이든 기명이든 ‘너’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나’다. ‘나’는 ‘너’의 그림자 같은 존재이고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 또한 ‘너’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지 모른다. 곱씹어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곧 ‘대아(大我)’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불변하다. 좀 진부한 감이 들지만, ‘큰 나’는 ‘큰 너’와 동일하며 최종적으로 ‘우리’로 귀결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장황스럽게 글머리를 올려본다. 불통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폭증하고 있다. 인터넷 초강대국으로 불리는 현실에서 밑도 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실상은 상상 이상으로 훨씬 더 절박한 수준에 이른다.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사회 또는 사회 대 사회가 외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인간 대 자연이 이제금 불통의 고리를 맺으려 하고 있어 그 아픔은 더욱 깊어진다. 한낮의 기온이 삼복더위에 버금가는 추석 목전, 재래시장 상인들의 넋두리를 한 귀로 흘려보내듯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대형 할인매장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한술 더 떠서 각종 케이블 방송 판매와 인터넷 판매의 기승으로 재래시장 상인들의 한숨은 끊일 날이 없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의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현재 우리의 살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면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현실의 생채기는 더욱 심각하다. 암(癌)이란 글자를 유심히 살펴본다. 산처럼 겹겹이 쌓인 질병 즉, 어느 무엇이든 간에 소통의 기미가 전혀 없는 첩첩산중 같은 아픔이란 뜻이다. 인체 조직에서 다른 세포조직과 교류하지 못하고 독불장군처럼 거만하게 자신의 배만을 채워 결국 다른 세포 전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치독을 암이라 부른다. 불통의 전형이다. 내면적 가치가 교육되어지지 않고 외형적 가치가 숭앙되는 우리의 현실에서 과연 통(通)은 부재하는 것일까. 만일에 ‘천연기념비’적이란 단어가 허락된다면, 기념비적 단어의 반열에 올려야 할 단어 몇 가지를 수순 없이 떠올려 본다. 양보, 자기희생, 헌신, 손해, 봉사, 적덕(積德), 용서, 이해, 관용, 겸양 등의 단어들이다. 이해 각도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바뀔 소지가 많은 단어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공집합으로서 모아지는 개념은 ‘준다’는 것에 있다. 준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물을 나눈다는 의미와 함께 영혼의 교류를 바란다는 뜻이 내포돼 있는 행태소다. ‘천연기념비’적 단어의 제안은, 현재 그렇지 않다는 것에 있다. 같잖은 말이다. 갖춘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굳이 아닌 말을 어거지로 둘러맨 데에는 불통하며 사는 우리의 현실이 하도 절박해 보여서이다. 사람은 소통하는 존재이다. 삶과 앎을 나눠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 앎 =사람’이 되지 않았던가. 다시 맞는 한가위다. 도시는 점점 몸집을 키워나가고 산과 들과 내는 그만큼 오그라들기 마련이다. 누구나가 이상기온을 말하지만 그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는 접근조차 두려워하고 있다. 재래시장 상인들의 푸념은 더 이상 방관의 대상이 아니고 상업적 논리에 의해 판단되는 우리들의 이웃이 아닌 것이다. 힘 있는 자, 가진 자가 ‘통하기’에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야 할 때이다. 함께 살 수 있는 길은, ‘나’가 ‘너’여야 하고 ‘너’가 진정한 ‘우리’가 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묻는다. 통하며 사는가.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LA(로스앤젤레스)는 한국땅?’

음악은 언어와 시공을 초월해 서로 공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묘한 마력을 가진 예술분야다. 지난 8월 23일과 24일 양일에 걸쳐 금난새 예술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연주야 말로 우리 교민과 외국인 등 모든 관객을 하나로 만든 가슴 뭉클한 무대였다. 창단 후 10여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전 단원의 해외공연이 처음이었던 이번 연주회를 우리 교민이 100만명이나 거주하고 있다는 LA에서 갖게 돼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LA지역 사정을 들여다 보니 교민이 많다는 이유로 고국에서 유명한 대중가수가 콘서트를 갖거나 소규모 클래식 실내악단의 공연은 있었지만 80여명의 대규모 편성의 교향악단 방문 연주는 LA에서도 처음이었다고 하니 그 사실만으로도 관객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23일 공연을 선보였던 월트디즈니콘서트홀은 세련된 겉모양부터 공연장 내부 구석구석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고, 2천700석의 객석을 가득 매운 채 경기필의 열정적인 연주가 펼쳐졌다. 이날 레퍼토리 중 크로스오버 편곡의 귀재로 손꼽히는 이성환 편곡의 ‘얼의 무궁’은 우리가곡 동심초, 그리운 금강산과 아리랑, 코리아환타지 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 교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앙코르 곡으로 코리아환타지 후반부인 애국가 등이 편곡된 곡을 선사하니 그 감동은 고조를 이뤘다. 교민의 향수를 달래기에 충분했던 감동적인 무대였다. 미국이민 100년사를 돌이켜 보면 해외에서 서양과 동양이라는 거대한 이중문화 속에 동포들의 삶이 어찌 순탄하기만 했을까. 100여년전 태평양을 건너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게일릭호를 타고 온 102명의 한국인이 첫발을 디뎠고,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낯선 땅에 선 이들이 미주이민의 시작이었음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이민역사는 어느덧 100년이 훌쩍 지났고, LA에만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이 100만명이 넘는 거대한 출장도시로 자리잡혀가고 있다. 현지에 가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우리를 안내하던 한국인 가이드는 LA시내로 들어서자 웅장한 외관을 자랑하는 빌딩을 가리키며 한국인 소유가 여기저기라고 분주하게 손을 옮기며 전했고, 마치 자신의 빌딩인냥 자랑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LA에 머무는 일주일여 기간 동안 한국어 상호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한국음식, 서비스사업 등 마치 서울의 어느 동네 한편의 모습과 다를 게 없는 모습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이민의 삶에 지치고 고향의 향수를 달래 주며 21세기 고국의 진정한 문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많은 LA교민들을 보면서 또 하나의 거대한 문화시장으로의 잠재적인 가치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약 1만㎞ 상공을 날아야 닿을 수 있는 먼 곳이지만 공연문화를 실어 나르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임을 문화전도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롤링 스톤스를 아세요?

두 시간 가량의 공연, 그것도 한 가수의 공연이 만약 영화로 만들어지면 흥행이 될까.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반전과 같은 흥미가 없는 콘서트가 아무리 화려한 카메라워크로 담아봤자 변화무쌍함에 젖은 세대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연 DVD로 나온다면 몰라도 극장용 영화로는 무리다. 그런데도 록밴드 롤링 스톤스의 공연이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도 개봉된다. 상영관이 적어 흥행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에 쏠린 일부 팬들의 관심은 만만치 않았다. 감독의 존재가 컸다. 다름 아닌 ‘디파티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작가주의 영화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였기 때문이다. 마틴 스콜세지가 롤링 스톤스의 공연을 만들었다는 점으로, 즉 감독과 배우(?)의 이름으로 시선을 끈 것이다. 두 대가가 엮어낸 영화 ‘샤인 어 라이트’는 덕분에 올해 베를린 국제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롤링 스톤스는 전성기인 1960년대에 비틀스와 경쟁한 막강한 밴드였지만 상큼하고 날씬한 멜로디의 비틀스 음악과 견주었을 때 끈적끈적하고 약간은 지저분한 탓에 대중적 인기로는 비틀스에 밀렸다. 늘 2등 신세였다. 하지만 음악역사에서는 비틀스만큼, 때로 그들 이상의 환대를 받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수식은 ‘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밴드’다. 비틀스 해산 후 당연히 그들은 1등자리에 올랐고 그 뒤로 레드 제플린, 유투 등 무수한 후대의 빅 밴드들이 나타났지만 아직도 그들을 추월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 롤링 스톤스가 보여주는 록의 강렬한 에너지는 그룹의 두 리더인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가 1943년생으로 올 예순 여섯의 노인임을 감안할 때 믿기가 어렵다. 마틴 스콜세지감독은 자신처럼 환갑을 넘긴 올드맨들의 무대가 뿜어내는 활화산 같은 열기에 끌렸다. 1969년 공연을 본 뒤 롤링 스톤스의 광팬이 됐다는 그가 이후 취한 코드는 그 ‘열정’이었다. 음악영화라고 하면 흔히 아티스트의 일대기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아니면 뮤지컬 영화를 가리킨다. 그는 시선을 달리 해 콘서트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접근법을 취했다. 공연을 제대로 보여주면 거기에서 일상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 것이다. 관객들은 노래하는 믹 재거가 군살 하나 없는, 정말이지 목 아래부터는 영락없는 20대 청춘의 몸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동갑인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가 그려내는 무대 동선과 숨길 수 없는 반항기 역시 혀를 차게 한다. 우울하거나 무기력에 빠져 있는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든다. 그 역동성에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행여 나이 먹는 게 두려운 기성세대라면 영화 제목대로 한 줄기 빛이 비춰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노린 게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악기의 솔로연주가 부각되는 순간마다 정확히 카메라를 들이대고 공연 음향도 탁월하다. 내한공연 섭외 1순위긴 하지만 롤링 스톤스가 한국에 오지 않는 한 그들의 공연을 볼 수는 없다. 이런 팬들의 소망을 ‘샤인 어 라이트’가 실현시켜준다. 음악계가 침체에 허우적거리는 현실에서 모처럼 음악이 소재가 아닌 주제로 호령하는 영화를 본다. 영화관 아닌 공연장에 초대받은 느낌이다. 솔직히 후미진 좌석에서 콘서트를 보느니 차라리 이 영화를 보는 게 더 효율적인 ‘공연관람’이다.

문화예술 기부 특례 마련해야

복잡한 이 세상을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고 규제를 한다. 그러다가 지나친 규제가 걸림돌이 되면 다시 풀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규제해서 생기는 사회적 편익이 얼마나 크고,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점이 규제 또는 규제완화 문제 해결의 열쇠이다. 편익에서 비용을 뺀 나머지인 순편익이 큰데도 불구하고 계속 규제를 하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규제수단이 오용되거나 과용되는 사례를 기부금제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기부는 행복을 나누는 것이다. 받아서 행복하고 주어서 더 행복을 느끼는 아름다운 행복나눔이다. 그래서 교육이나 사회복지부분에서 널리 이뤄지고 최근에는 문화예술계에서도 활발하게 권장되고 있다. 기부금 징수의 사회적 비용이 다소 문제된다고 해서 편익조차 무시해버리는 제도 인식을 고쳐야 한다. 이는 규제나 규제완화 본래의 취지를 왜곡하는 정책철학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고 지탄 받는 이른바 준조세가 원흉이다. 국민과 기업에 부담이 되는 준조세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부를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부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리게 되는 행정편의주의적인 조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정부규제의 순기능조차도 크게 벗어난 조치이다. 문화예술 분야의 기부는 준조세나 부담금이 아니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개인이나 기업이 참여하는 자발적인 나눔이다. 더구나 기업들은 마케팅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고 이는 국내외의 흐름이다. 문화예술단체에 기부하면 결국 작품 수준이 높아지고, 입장권 가격을 낮추는데도 기여한다. 기부자들의 이름을 붙인 미술관, 음악당, 도서관 건립에 기여하여 인프라 확충에도 기여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모든 제도의 선진화를 서둘러야 한다. 작지만 강한 나라로 가기 위해 모든 활동 주체가 각자 자리에서 책임 있게 일해야 한다. 정부가 의미를 부여하고 갈래를 타며 방법을 지정하는 규율시대가 아니다. 자율시대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 민간의 자율과 자기책임을 함양하는 것이 국가경영의 바람직한 방향이다. 선진국가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기부금제도에 대한 지나친 규제는 대다수 정직하고 성실한 기부자들을 불신하고 소수 범법자를 보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정직하고 성실한 대다수 기부자를 믿고 소수 범법자를 사후적으로 철저하게 적발하여 처벌하는 사후규제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부 선진국이랄 수 있는 미국에서는 국민의 98%가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기부와 자원봉사가 국가발전의 기반이 되어왔고 앞으로도 더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경우도 토니 불레어 총리가 지금은 ‘더 주는 시대’(Giving More Age)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국가차원에서 기부를 독려하고 있다. 이 모두 다 제도가 편리하게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즐겁게 행복을 기부하는 풍토가 조성된 덕택이다. 가뜩이나 기부풍토가 낮은 우리의 경우는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가가 구석구석에까지 재원을 대거나 보전한다면 국가재정 부담이 과중해질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국가재정 부담이나 보조를 낮추기 위해서라도 단체들의 자율적인 능력을 키워야 한다. 문화예술 기부 특례를 만들어서 기부를 자유롭게 받되 사후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으로 틀을 바꿔야 한다. 실천적인 문화국가의 길은 기부풍토 규제개선과 여건 조성에서 시작하자. 이흥재 전주정보영상진흥원장

순발력과 졸속, 종이 한 장 차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장예모 감독이 보여준 개막식은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이 보여준 물량주의나 획일성의 미학, 과시욕 같은 것에 대한 지적은 마땅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근본적 결함을 인정한다 해도 그들의 컨셉트를 비교적 명료하고도 완벽하게 관객에게 전달한 것은 분명 성과로 인정받아야 한다. 공연을 연구하고 평론하는 사람으로서 작품에 대해 더 하고 싶은 말이 왜 없겠는가마는, 나는 딱 한 가지가 부러웠다. 그것은 이번 개막식 공연이 꽤 오랫동안 준비되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 작품이 꽤 오랫동안 기획되고 준비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경기장 바닥을 파서 승강기를 설치하려면 공사 기간만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여러 첨단 장치를 제작하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만 명에 달하는 출연자를 동원하여 연습을 한 기간도, 최소한 8개월에서 10개월은 걸렸을 듯 싶으니, 구성 등 발상단계에서부터 치자면 몇 년의 긴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긴 준비기간을 부러워하는 것은, 분명 나 같은 ‘업계’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에서 행사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빠르고 급하게 사람을 몰아치는 지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주변에서 내로라 하는 국제행사를 치루면서 개막식이나 폐막식 같은 중요한 문화행사에 쓸 작곡을 불과 4~5개월 안에 해내라고 청탁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작곡가가 손을 놓고 그 일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니, 사실 4~5개월의 시간은 스케줄을 조정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갑작스러운 작곡 청탁에 잡혀있던 스케줄들을 무리하게 펑크 내고 없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무리하게 작곡을 진행해야 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 결과는 뻔하다.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작곡의 독창성이나 정교함이 떨어지거나, 연주가 연습 부족으로 엉성해지거나, 둘 다이거나, 어쨌든 질의 저하는 뻔한 일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질은 생각지 않고 일단 펑크 내지 않고 치러내는 것이 당면한 과제가 되어 버린다. 이런 일이 왜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가. 대개 공무원들은 당해 연도의 일로 간주하고, 예산과 집행까지 모두 당해 연도에 해결할 것으로 본다. 연초에 계획 세우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작곡자나 음악감독을 선정하면 몇 달은 후딱 지나가 버린다. 이제 행사는 코앞으로 다가왔고, 엉겁결에 맡은 사람은 질을 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시간에 맞추어 내기에 바쁜 것이다. 나는 뮌헨올림픽 기념 작품으로 독일에 있던 윤이상이 오페라 ‘심청’을 만들 때에 무려 3년의 시간을 투여했다는 이야기를 어느 공무원에겐가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공무원의 말이 걸작이었다. 6개월이면 할 수 있는 일을, 왜 3년씩 주어서 시키냐는 것이다. 이들 공무원에게 속전속결이야말로 최고의 덕목이었고, 그 안에서 작품의 질에 대한 고려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남북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한 지 60년 동안, 우리는 모두 놀랄 만한 압축성장을 보였다는 자랑을 한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질의 문제인 문화를 누락시킨 측면이 있다는 지적을 아니할 수 없다. 문화는 양의 문제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통과 ‘솥옹’

가까운 어른 한 분이 어느 날 이렇게 푸념하신다. “요새처럼 소통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없다. 그런데 정작 세태를 보니, 이 말이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란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다른 일로 그 자리에 있다가 우연히 얻어듣게 된 내게 단번에 ‘필’이 꽂혀왔다. 평소에 그 비슷한 공상을 많이 해오고 있던 탓이리라. 속으로 은근히 장난 끼가 발동하며 불현듯 ‘솥옹’이란 즉흥 조어(造語)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발칙함을 간신히 누르고 나와 가만히 정리해본다. 그래 맞아. 소통(疏通·communication)은 소외(疏外·alienation)와 개념쌍이었지. 현대 지식정보화의 총아 인터넷이 그 소통망을 넓힐수록 자신을 고립된 공간 속에 유폐시키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소외란 ‘주체에서 나온 객체가 주체화하여 거꾸로 원주체를 제약하는 행위’라는 정의 중 제약당한다는 소극적인 측면에 나는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그 소외를 여지없이 증거하는 인터넷의 경우 또한 고립된 공간이란 피동적 이미지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던 참이었고. 그런 탓에 미처 이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터이다. 이건 분명 새로운 개안(開眼)이니 만큼 새로운 조어가 없을 수 없겠다. ‘솥옹’이라. ‘솥’은 뚜껑이 닫혀있고, ‘옹’은 옹기, 옹고집 등으로 역시 앞뒤가 꼭꼭 막힌 것이니, 이 개념에 더 이상 맞는 용어가 어디 있겠는가! 그 참. 우리말이 이 아니 철학적인가! 사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이론’을 내놓았을 때 그 이론의 일면성과 한계는 이미 예비되고 있었다. 일찍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로 소외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대안으로 ‘노동’ 개념을 제시했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인간의 근육과 두뇌와 신경조직을 이용하여 외계의 자연을 바꾸어내고, 그 바뀐 자연으로부터 거꾸로 인간이 되바뀌는 행위’라는 정의를 달고서. 말할 필요도 없이 하버마스의 시대는 유물론이 경제주의로 속류화하고, 노동이 현상적인 물질적 행위로만 축소되어가고 있던 때였다. 그가 이를 알아차리고 물질과 정신, 경제와 이데올로기, 토대와 상부구조의 양면을 구유하는 구원투수로 등장시킨 것이 다름 아닌 ‘언어’이고 ‘소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체계를 온존시키면서 합리적 의사결정에 이르는 절충에 불과할 뿐이었다. 애당초 소외 개념은 소통 이론으로 누더기처럼 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핵심 요소는 ‘상품의 물신성’, ‘주체와 객체의 전도’의 문제였으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궁극,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그것이 전도된 것이라는 명확한 인식과 논증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그 전도된 극단은 필연적인 공황으로 변화의 조건을 만들어낸다고 논증하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뿐, 더 이상의 소통과 영구함은 과제로 남겨졌다. 이 지점에서 이제 다시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를 떠올린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게 되고, 변화하면 소통하게 되며, 소통하면 영구하리니….

또 부는 아바 열풍

새천년에 들어서자마자 음악 인구를 사로잡은 두 왕년의 팝스타가 있다. 하나는 최강의 그룹 비틀즈, 다른 하나는 스웨덴 출신의 아바다. 비틀즈의 앨범 ‘원’은 국내에서도 7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신세대들에게 비틀즈 음악의 각별함을 알렸으며 아바는 뮤지컬 ‘맘마미아’와 함께 위력이 폭발했다. 그 뒤로 비틀즈는 조금 잠잠해졌지만 아바는 지속적인 ‘맘마미아’의 무대 덕분에 열풍이 쉬 가시지 않고 있다. 이제 음악추억의 중심은 1960년대의 비틀즈로부터 1970년대의 아바로 이동한 듯하다. 과거에도 비틀즈 다음으로 위대한 팝스타는 아바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 아바가 올해 다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은 구미에서 막 상영된 영화 ‘맘마미아’ 때문이다. 현재 사운드트랙 앨범도 잘 팔리고 아바의 저 옛날 노래가 다시 인기차트에 오르는 경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흘러간 가수 아바의 노래가 이토록 오랜 인기를 누리는 걸까. 마침 미국의 일간지 ‘유에스에이 투데이’가 아바 열기의 7가지 요인을 꼽았다. 먼저는 당연히 음악. 아바 음악은 두 여성의 고음역 코러스는 말할 것도 없고 음향기술 수준과 곡의 질감이 말해주듯 30년이 더 지난 지금 들어도 전혀 낡게 들리지 않는다. 아바 음악을 주조해낸 두 남자 멤버 베니와 비욘은 그 당시 ‘세월에 부패하지 않는 사운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 바 있다. 두 번째는 이미지. 아바는 음악만이 아니라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부문, 즉 비주얼 측면에도 신경을 썼다. 아바의 두 여성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훤칠한 키에 빼어난 몸매의 소유자였으며 늘 세련되고 예쁜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선보였다. ‘유에스에이 투데이’는 또 다른 요인으로 전 국민이 아바 팬이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 의외로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는 점, 부부였다가 이혼한 독특한 그룹의 내부관계가 주는 호기심을 들었다. 정작 아바의 고국 스웨덴 사람들은 아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옛날 아바가 활동할 때도 스웨덴은 자국의 상징인 볼보자동차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려준 그들을 우상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그들이 너무나 상업적이라는 점을 우려한 비판 세력도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티 집단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히 정리되었다. 아바를 바라보는 스웨덴의 이러한 정서 변화도 한 요인으로 뽑혔다. 어떤 나라 사람들도 아바의 노래 ‘워터루’, ‘하니 하니’, ‘댄싱 퀸’, ‘아이 해브 어 드림’ 등을 줄줄이 꿰니 스웨덴 사람들이 국위 선양에 이바지한 아바의 존재에 자긍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뮤지컬과 이번 영화의 효과가 꼽혔다. 아바의 음악으로 엮은 뮤지컬과 영화가 있다는 것 자체가 다른 가수들은 쉬 누리지 못하는 막강한 화제성이다. 일곱 가지 요인 모두 일리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음악과 이미지다. 음악이 좋지 않다면, 이미지가 호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아무리 다른 요인들이 많아도 소용이 없다. 이것은 지금 신세대 가수들도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아바는 무엇보다 음악을 잘 만들고, 이어서 시대와 소통하는 이미지를 간직해야 사랑을 받는다는 점을 후대에 일깨운다. 지금도 가수들의 역할 모델이 되고 있기에 그들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임진모 칼럼니스트·대중음악평론가

광역연합의 문화정책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서 이뤄지는 정책마찰이 적지 않다고 본다. 지방자치제도에서 국가 협력이 어느 수준까지 이뤄져야 할 것인가. 지방자치단체 사이에서 자기지역만 챙기는 이른바 지역이기주의를 두고만 볼 것인가. 수직적 계층과 수평적 행정구역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지방자치 성숙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정치 합리성을 보여줄 지 모르지만 경제 합리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문화시설과 행사에서 불거지는 문화정책 문제는 오래되었다. 서비스의 질이 결코 높아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에 우리는 지방자치제도의 결함을 말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자치단체 차원의 재정난, 고령화된 지역, 복지나 문화사업의 지방분권화, 행정서비스 수준에 대한 기대가 헝클어진 채 아직도 실험 중인 지방자치제도를 끙끙대면서 떠받들고 있다는 점이다. 재정자립 수준이 높건 낮건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매칭 그랜트 때문에 정작 문화시설이 필요한 재정빈곤의 자치단체는 영원한 문화후진지역으로 남게 된다. 행정권역별 시설 세우기 경쟁 때문에 공간거리 몇 ㎞ 안에 유사문화시설이 몰려있어도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광역연합이 수평적 자치협력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광역연합의 문화정책이 절실하다.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를 오래 전에 본 적이 있다. 일본 오이타현의 미에쵸(三重町)를 비롯한 6개 쵸와 2개 촌이 오노(大野)광역연합을 만들어 문화시설 공동마련 공동운영을 추진했던 것이다. 재정이 바닥을 기던 자치단체가 광역연합으로 활기를 모색하고 개별 자치단체로서는 엄두도 못 내던 종합문화센터를 500억원을 마련해 건설한 10년 전의 이야기이다. 당시 정책의 취지는 ‘연대와 협조에 의한 경제권’, ‘정이 듬뿍 담긴 복지사회’였다. 홋가이도의 경우 우타시나이시와 인근 4개쵸가 소라치중부광역연합을 결성했다. 운용결과 예산절감, 지역이기주의 불식, 고품질의 행정서비스를 펼치는 등 공존·공생·공진하는 윈윈게임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물론 이 경우에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지방자치 정신의 퇴색이라는 명분논쟁이다. 보다 실제적인 문제로서 운용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소재 문제가 생겨난다. 그래서 차라리 대형 사업마다 광역연합을 만드느니 합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도 실감 있게 나온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자. 지방자치는 재정적 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책임소재는 사전에 충분히 가닥 지을 수 있으며, 합병이 쉬울 것 같으면 이런 방법이 나왔겠는가. 이것도 유일한 답은 아니다. 수직적 분권문제는 현행 조세제도와 분권계층에서라면 계약제 정신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본다. 프랑스의 경우 중앙과 지방은 조율하고 서로 활동지원 역할의 강화라는 입장을 바닥에 깔고 추진한다. 이를 위해 지역문화협의회를 만들고 정부와 자치단체간의 협력 틀을 마련하여 공동투자·교차투자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획일적 매칭 그랜트는 재정수준과 사업성격을 감안하여 신축적으로 적용하고, 재정자립이 높은 지역은 역매칭제도를 강화하되 중앙의 비율을 신축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무늬만 적용되는 정치적 무게로 기울어져 세월만 보내고 있는 지방자치. 이러한 제도에서 지역문화 경영은 색깔이 서로 조화롭지 못한 무지개일 뿐이다.

에너지 덜 쓰는 ㅁ보고 싶다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하고, 무엇보다도 비싼 물가가 부담이 되어 집에서 이리저리 허리띠를 졸라매 보았다. 남편이 켜놓은 전등을 따라다니며 끄고, 웬만한 전기 코드를 뽑았다. 우리 집은 경기도 이천의 시골마을이라 에어컨을 쓰지 않으니 전기는 적게 쓴다. 단 버스가 잘 닿지 않는 외진 동네라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 힘드니, 어쩔 수 없이 승용차를 이용하되 가장 연비가 좋은 디젤 승용차를 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이다.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에너지 절약의 의지는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흡족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에너지 위기 때마다 가정의 생활 에너지를 줄이라고만 닦달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무엇보다도 에너지를 많이 쓰도록 되어 있는 사회,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는 사회의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도대체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대도시의 화려한 전광판이나 광고를 포기하기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렇게 화려한 광고들은 서로 경쟁을 하면서 점점 화려해지고, 그 결과 에너지는 점점 많이 쓸 수밖에 없도록 변화해간다. 하지만 기업이 광고 효과를 포기하면서 그 에너지를 줄일 수 있을까. 이것은 이 사회 모두의 결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나는 축제를 볼 때에도 그런 생각이 든다. 축제 역시 매우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다. 축제의 분위기를 띄우고 사람을 끌어 모으기 위해 밤에는 늘 불야성처럼 불을 켜놓아야 한다. 밤에 가수라도 부르려면, 그 행사를 위해 특별히 발전차를 부르기도 한다. 유명 가수가 나올수록 무대는 화려해지고 조명과 앰프의 용량은 올라간다. 그야말로 기름 먹는 하마이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건물 신축이다. 축제의 질을 높이는 지름길은 프로그램을 잘 고안하고 운용하는 좋은 인력을 많이 고용하는 것인데도, 마치 건물이 모든 것을 해주는 양 예ㅁㅊ산을 멋진 건물을 짓는 데에 퍼붓는다. 그런 건물은 대개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고 크고, 축제가 끝나면 나머지 기나긴 시간 그 건물은 활용도가 매우 떨어진 상태에서 냉난방을 비롯한 엄청난 유지비만 잡아먹는 애물단지가 된다. 집안살림이라면 이런 비효율적 지출은 하지 않으련만, 주민 세금으로 주민에게 폼나는 건물 하나 세워 과시하는 이러한 낭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한다. 이렇게 높은 에너지 소모가 불가피해지는 것은, 우리가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것이 좋은 것, 기쁜 것, 기분 좋은 것, 행복한 것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불빛을 기분 나쁜 것, 찜찜한 것, 정신없는 것으로 느낀다면 그런 행사를 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일반 대중이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행사의 주최자는 많은 대중을 모으기 위해 에너지를 많이 쓰는 프로그램과 홍보방식을 택하게 된다. 거대한 시설이나 화려한 불빛, 한꺼번에 엄청난 대중이 모여 북적거리면서 에너지를 팍팍 써대는 것보다, 작은 규모로 인간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면서 하는, 좀더 인간적인 규모와 질의 축제는 할 수 없는 것일까? 화려한 치장을 싹 걷어내고, 대신 잘 훈련된 교사가 관중 서너 명에 한 명씩 따라붙어 무언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축제라면, 일자리를 늘리면서 에너지 낭비는 줄이는 축제가 될 터인데 말이다. 우리 머릿속에 아직도 이런 것을 초라하고 창피한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한, 우리의 축제와 생활은 결코 에너지 낭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영미 대중예술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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