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음악도들의 미래

어린아이에게 음악교육을 시키는 부모들 가운데 아이들이 조금만 잘한다 싶으면 ‘내 아이는 천재적인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조기교육이 필요한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을 가르치는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장래 희망, 재능과는 상관없이 ‘너는 커서 아주 유명한 연주자가 되어야 해’라며 고사리 손을 붙잡고 이름난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극성’에 가까운 ‘정성’으로 음악교육에 열성을 쏟는다. 사실 국내외 훌륭한 연주자들을 눈여겨보면 성공의 뒤에는 부모의 열성적인 뒷받침이 있었다는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연주자란 노력과 열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재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좋은 스승과의 만남, 행운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조화될 때 성취가 가능하다. 그야말로 상상을 뛰어넘는 어렵고도 험난한 길이 아닐 수 없다. 음악교육자의 길인 대학교수나 강사 자리도 음악가의 공급에 비해 수요가 턱없이 모자라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천재도 아니고 재능도 그저 그런 아이에게 음악가의 길을 강요해 중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부모와 학생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레슨비에 미련을 두고 결국에는 음악대학 졸업장이라도 받고 보자는 생각에 대학입시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을 하고 나면 이름난 연주자가 되겠다는 열망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몇 배나 큰 음악시장을 거느린 미국의 경우, 음악도의 10% 정도가 연주자의 길을 택하고 20~30%는 연주도 하면서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며, 30%는 학원이나 집에서 학생들만 가르친다. 나머지는 음악행정가, 음악이론가, 음악기자, 공연기획자, 음악치료사 등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인으로 활동한다. 우리나라서도 아이의 장래는 물론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오직 연주자가 돼야 한다’는 환상에서 깨어나 아이들의 적성과 재능을 제대로 북돋우는 음악교육이 이뤄졌으면 한다. 그런면에서,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리는 제6회 주니어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눈여겨 봤으면 한다. 경기도와 수원시가 공동주최하고,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문화의전당, 주니어 차이콥스키콩쿠르 서울사무국이 공동주관하는 이번 콩쿠르는 재능 있는 어린 음악가들에게 많은 관객들 앞에서 연주력을 선보일 기회를 제공해 주고, 권위 있는 음악가들과 비평가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3개 분야에서 실력을 겨루게 되며, 세계적 규모의 ‘World Tour Type’ 콩쿠르로, 국제적인 권위의 영재 발굴을 위한 영재들의 유일한 등용문이라는 점에서 어린 음악도들이 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경기도내 그것도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이같이 중요한 국제 콩쿠르가 열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으니, 음악 애호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으로 지켜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종합예술학교 부설 예술영재교육원도 지난해 9월 개원했고 지역마다 속속 영재 교육원이 개설되어 일찍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틀을 만들어 주게 된 것도 한편 반가운 일이다. 다만, 재능있는 어린아이들을 발굴해 체계적인 교육을 시킨다는 것 이외에 강요로 아이들이 다듬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큰 모험이라는 점을 부모들은 명심해야 할 듯하다.

영안실 음악회의 추억

몇 해 전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가수 장사익씨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한 무대에 섰던 인연으로 서로 알고 지내던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씨가 소식을 듣고는 문상을 갔다고 한다. 습관대로 악기를 들고 영안실에 들어서자 조문을 받던 상주가 갑자기 덥석 손을 잡고는 난처한 주문을 하더라는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평소 늘 바이올린 소리를 좋아하셨다면서 영전에서 한 곡조 켜달라고 졸랐던 것이다. 혼자되신 어머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는 것이 늘 안타까웠던 차에 이런 부탁을 받고 보니 상주의 심정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악기를 꺼내 ‘타이스의 명상곡’을 연주했고 그 순간 상주뿐만 아니라 다른 문상객들, 그리고 무엇보다 연주자 스스로가 가슴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앞서 소개했던 사연이 머리 속에 또렷이 되살아났고 그와 마찬가지로 아버님 영전에 음악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해졌다. 그래서 경우가 아닌 줄 알면서도 악기를 들고 문상을 온 음악인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흔쾌히 청을 들어주었고 예정에도 없는 음악회가 날마다 이어졌다. 주일이 사이에 끼어 어쩔 수 없이 4일장을 치렀는데, 저녁마다 모두 세 차례의 짧은 연주회가 열렸다. 문상객이 뜸해지는 밤늦은 시간, 힘든 시간을 도와주느라 늦게까지 분주했던 고마운 분들도 잠시 숨을 돌리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문상을 와서 잠시 소찬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조문객들도 음악을 듣느라 대화를 멈추었다. 그리고 이웃 영안실을 지키던 사람들까지 소리가 나는 곳으로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사람들이 둘러 앉아 함께 음악을 들었다. 연주가 시작되고 얼마지 않아 여기 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모두들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더 없이 해맑은 미소가 가득 번졌다. 그렇게 모두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슬픔을 나누었고 그로 말미암아 너나없이 크나큰 위로를 받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일을 기억하며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평생에 그렇게 감동적인 음악을 듣지 못했다는 말들도 있고 그 때 들었던 음악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한다. 무엇보다 선뜻 어려운 청을 들어준 연주자들이 누군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많다. 분명히 그 때 다짐을 했었다. 소중하고 가까운 누군가가 영영 눈을 감거나 혹은 그 누군가의 가족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영안실을 지켜야 하는 날만큼 조촐하지만 뜻 깊은 음악회를 만들어주겠다고 말이다. 주변뿐만 아니라 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이런 생각이 번져간다면 우리 모두 음악이 갖는 참 뜻을 깨닫게 되고 더불어 죽음이 있어 더욱 절실해지는 삶의 의미를 경건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격식을 따지는 듯싶지만 사실은 의식을 가볍게 생각하는 듯하다. 겉치레가 아니라 시간과 여유를 두고 뜻을 새기며 마음을 나누는 그런 예식이 아쉽다. 세상이 아무리 숨 가쁘게 돌아가도 어느 순간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때로는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스려야 숨이 턱에 차서 숨넘어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바로 그 때 음악이 다른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다. 그걸 깨닫게 되면 누구나 음악을 가까이 두고 평생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음악하는 누군가를 찾아서 벗으로 삼으려 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친구로 말미암아 여유를 찾고 위로를 얻고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부디 그렇게 여러분 모두에게 언제나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덕수궁 수난’을 회상하며

군사정권이 시작되던 무렵이었으니까 거의 반세기 전 이야기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도 아니건만 덕수궁이 수난을 당한 적이 있었다. 대체 왜 그랬는지 국민이 영문을 알 겨를도 없이 서울시청 쪽으로 향한 덕수궁 담이 몽땅 헐리고 대신 쇠창살 울타리가 세워진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마치 몽드리앙의 그림을 모방한 듯 창살 군데군데를 노랑, 초록, 빨강색 등의 쇠판대기로 메워 놓았는데 나름대로 미학적(?)인 디자인을 한 셈이었다. 서슬이 퍼랬던 시절이라 국내에서 이렇다할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외국으로부터 빗발치듯 비난이 들어와 결국 이번에는 쇠창살을 헐어내고 담을 도로 쌓는 해프닝을 벌였지만 이 ‘덕수궁 수난’ 사건은 약 1년 이상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을 다시 쌓을 때 이전 헐어냈던 돌들을 보관했다가 다시 사용했는지 지금 알 길이 없다. 내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노년층에도 잊어버린 사람들이 많을 이 사건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누구 앞에선지 모를 창피함이 밀어닥친다. 권력자에 아부하는 ‘문화 장돌뱅이’ 중 하나가 당시 군사정권에 제안했을 터인데 실제 이유는 뭔가 팔아먹자는 수작이었겠지만 겉으로는 “고궁을 대중과 친하게 하자”는 알량한 이유를 내세웠을 것이다. 고궁은 시내 버스를 타고 휙 지나가다가 보았다고 ‘친해지는’ 곳이 아니다. 접근하기 힘들기는 커녕 덕수궁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다.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는 성의만 있다면 고궁은 들끓는 대도시의 일상을 벗어나 가을 같으면 낙엽이라도 밟으면서 호젓이 걸어볼 수 있는 곳이다. 오늘날 덕수궁을 호젓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어디라도 고궁의 맛을 즐기려면 따로 시간을 내어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고궁의 담을 헐어냈던 행위를 한 시대의 무지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서글픔이다. 지금은 그래도 약간 진정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치 조지 오웰의 풍자소설 ‘동물농장’에서 양들이 외치는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는 구호처럼 “벽을 허물자”는 말이 도처에서 들렸었다. 클래식과 대중문화의 벽을 허물자는 뜻인데 있지도 않은 벽이 대체 누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구호는 아직도 어디선가 들리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시민혁명이 없었던 까닭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소수(minority)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듯하다. 현대 시민에게 어느 형태의 소수든 선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덮어두고 소수와 대중은 이미 정해진 계층으로 여겨진다. 독재정권 밑에서 살아온 까닭인지 대중을 기득권자들에게서 소외된 민중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대중문화를 즐기는 계층과 클래식을 즐기는 계층을 기정화하고 예컨대 공연장에서 “소외계층을 위해서는 클래식 공연은 안된다”는 딱한 대중문화 옹호론이 나오는 것이다. 소외계층은 고궁을 찾아서는 안된다는 말과 같다. 나날의 분주함 속에서 잠시 틈을 내어 고궁을 찾아 산책하는 것처럼 클래식이 왜 우리에게 정신의 양식이 되는지 알려주는 일은 거의 없는 반면 마치 대중에게 친절을 베풀듯 대중문화와 클래식을 한 솥에 넣고 끓인 잡탕을 대중에게 제공하면서 ‘열렸다’고 말한다. 클래식이라는 대상이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법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은 마치 고궁에 들어가지 않고 쇠창살 사이로 지나가며 흘낏 보는 사람들처럼 클래식의 참 맛을 느껴보지 못한 채 대중문화 옹호론에 의해 스스로 대접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클래식은 덕수궁처럼 우리의 곁에 가까이 있다. 코앞에 있는 곳에 다가갈 성의가 없는 사람들이 대중을 위한다는 구실로 “벽을 허물자”고 외쳐대는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여기저기서 또 다른 ‘덕수궁 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철거의 배후

변화의 목적과 주제를 제 아무리 곱씹어 정의했다 한들, 변화의지는 그 자체가 정체성이 된다. 새로움을 쫓아야만 생존하는 이 불멸의 유전자를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삶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그림자를 죽을 때까지 끌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에둘러 한 말이다. 느닷없이 철학적 명제를 거들먹거리게 된 데에는 삶의 거처로 인식되어온 집들이 순식간에 철거되는 사건들이 다 반사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케케묵은 삶의 처소로 폄하돼 도시재생이란 미명하에 무너져가는 집들이 도처에 널브러져 있어서이다. 언젠가 우리의 육신도 지구의 바닥으로 사라진다는 개연성을 잠재적으로 의식하고 있지만, 순식간이고 무자비하고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집들이 사라진다는 이유가 애먼 속을 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겪어 왔던 터. 아시안 게임 유치한다고, 올림픽 개최한다고, 월드컵 유치한다고, 최근엔 인천도시축전과 2014년 아시안 게임 유치를 위해 도시 전체를 변장시켜야 한다는 망측한 논리의 재현이 안쓰러워 더욱 그렇다. 이러한 변화와 변장의 본질이 일시적이고 일회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무렵에는, 자산적 가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진귀한 역사적 전거들이었다는 회한을 또 다시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도국산 일대와 배다리 그리고 도처를 재개발 지구로 설정해놓은 시행정부의 목적과 의도가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문화향유와 함께 역사적 의미를 세우기 위해 기치를 올렸다고 주장한다면, 다시 한 번 우리의 역사의 뒤란을 되돌아 볼 일이다. 과거를 살리지 않은 채 만들어진 현재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구조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조직이 바로 시행정부이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려온다. 그것이 사회변화에 의한 요구인지 자발적 변화의지와 부의 재 생산구조를 위한 또 다른 모험인지는 정확히 알아낼 길이 없다. 그러나 심리적 요인과 사회적 불균형에 의한 실험적 구조변경이란 측면에서 조망해 본다면 대부분 철거의 일반적인 모습은 비인간적이기 짝이 없다. 가재도구들이 홀랑 뒤집혀진 채 혼돈의 냄새를 풍기는 빈 집에 들어서면 배설의 물리적 욕구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추기고,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으려는 욕구와 운명적으로 맞닥뜨리고 만다. 여기서 발생하는 도시 양극화 현상은 도시개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흙탕물 같다. 시 지정문화재, 국가사적, 근대를 벗어나 자율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부모님 세대들의 마음의 고향, 지난 20세기 생활 문화 공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지난했던 시절 그 가슴 절절한 사연이 배인 공간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굳이 온고지신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 인생의 교과서이자 미래의 청사진으로 손색이 없는 구도심이 마구잡이로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철거되는 우주(집)의 잔재들, 파헤쳐진 도로들, 거리로 지하도로 내몰린 사람들, 고장난 채 버려진 자전거들, 알몸인 채 아무렇게나 유기된 여성들, 읽기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무심으로 버려진 책들, 고쳐 입거나 깨끗하게 빨아 입어도 무방해 보이는 옷가지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버리고 부수고 찢고 목숨을 끊어버리는 이 엄청난 유기적 담보물들이 애당초 이렇게 불량스러웠을까. 철거되어 사라진 집 위로 또 다시 집이 세워지고 있다. 철기 시대를 주름잡던 사람들이 청동기 고인돌 속으로 다시 무덤 삼아 들어갔다고 하는 회귀 본능이라면 모를까, 헌집 위에 또 다시 유예된 헌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 또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집을 짓는, 벼랑 같은 현실감각 너머로 칼날 같은 우화가 번뜩거린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몽땅 다 줄 게. 바벨탑 같은 새 집 한 채만 다오’.

무대 뒷이야기 예술가들 긴장 이렇게 푼다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몇 명의 사람들 앞에 서서 발표라도 할라치면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목소리가 떨리는데, 하물며 무대 위에서 관객을 맞는 예술가들은 수많은 관객 앞에서 실수 없이 기량을 선보여야 하는 부담감으로 더 많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 무대에 서는 일을 밥 먹듯 하는 음악가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랜 시간 무대 활동을 해온 예술가들에게 직접 들어보니, 연주를 앞두고 신인은 물론 소위 대가라 불리는 유명 연주자들도 무대에 나서기 전에 긴장되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란다. 이 때문에 연주자들은 긴장을 풀기 위한 독특한 버릇을 자연히 갖게 되는데 필자가 공연에 관계하면서 보아 온 연주자들 중 기억에 남는 몇몇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목련화’, ‘선구자’, ‘비목’ 등 우리 가곡을 너무도 아름답게 소화해 내기로 유명한 테너 엄정행 선생은 공연 직전 무대 뒤에서 왼손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 사이를 때가 나올 정도로 박박 밀어야만 긴장이 풀린다고 한다. 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이신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선생은 무대감독이나 스태프들에게 수다스럽게 이것저것 묻거나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무대로 나선다. 이와는 정반대로 피아니스트 이혜경 중앙대교수는 누가 옆에서 말을 붙이기가 힘들 정도로 새색시처럼 꼼짝하지 않은 채 눈을 꼭 감고 앉아 긴장을 푼다. 그런가하면 피아니스트 이경숙 연세대교수는 무대에 오르기 전 갑자기 악보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악보를 보고 또 보는 세심한 구석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김광군 경원대교수는 긴장을 푸는 방법으로 옆 사람에게 등을 두드려 달라고 한다. 그것도 보통 두드려서는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되는지 강도를 세게 해달라고 요구해 어떤 때는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야말로 등뼈가 다 부서지는 소리가 나야만 비로소 무대로 뛰어 나간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재미있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무대 공포증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과 달리 부부가 함께 긴장을 푸는 경우도 있다. 오래전 어느 날 무대 뒤에서 갑자기 교회 부흥회를 연상케 하는 통성기도 소리가 울려 퍼져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근원지를 찾아가보니 첼리스트 K씨와 그의 부인이 무릎을 꿇고 “주여!”를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의 모습이 워낙 심각해 보여서 조용히 빠져나왔지만 관객 앞에 서는 일이 정말 쉽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은 어머니의 지극 정성으로 긴장풀기에 나선다. 리허설이 끝난 후 더운 물에 샤워를 해야만 긴장이 풀린다며 곱고 인자하신 모습의 어머니께서 필자에게 안내를 요청했다. 요즘은 시설이 잘 갖춰진 곳도 있지만 당시 분장실에 더운 물이 나올리는 만무했고, 지하식당에서 물을 데워 달라고 부탁해 물을 퍼 나르자는 제안까지 하셨다. 공연장 내에서 이는 사실상 불가능해 근처 목욕탕을 급히 알아봤고, 안내를 해드렸더니 굳이 그 내부를 봐야 맘이 놓이시겠다고 하신다. 목욕 중인 서너명의 아저씨들을 한 편으로 몰아세운 뒤 금녀구역인 그곳을 자상하신(?) 어머니가 두루 살펴보신 해프닝도 있었다. 이런 무대 뒷이야기들을 뒤로한 채 일단 무대에 서면 연주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열정적으로 연주에 심취한다. 그것만 봐도 확실히 그들만의 ‘끼’가 있다고 봐야 할 듯하다.

작전명 ‘발키리’와 바그너의 ‘발퀴레’

최근에 개봉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작전명 발키리’가 바그너의 망령을 다시 한 번 우리 곁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발키리는 독일어 발퀴레의 영어식 발음이다. 작곡가 바그너가 무려 26년에 걸쳐 작곡한 4부작 음악극 시리즈 ‘니벨룽의 반지’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 바로 ‘발퀴레’이고 신들의 제왕인 보탄과 지혜의 여신 에르다 사이에 태어난 아홉 자매들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들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다니며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용사들의 영혼을 거두어 신들의 성인 발할로 데려가는 임무를 띠고 있다. 바그너의 음악에 열광했던 히틀러는 그 가운데 특히 ‘니벨룽의 반지’를 좋아했기에 극단적인 상황을 대비한 극비 작전의 이름에 발퀴레를 썼던 것이다. 이 작전은 히틀러가 암살당하거나 축출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예비군 동원령이 발동되어 이들이 정부의 주요 기관을 장악함으로써 나치정권을 수호하려는 계획이다. 그러나 히틀러를 제거하기로 모의한 비밀조직은 히틀러의 암살만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오히려 ‘발퀴레 작전’을 역으로 이용해서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을 함께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이 연출한 대작 ‘지옥의 묵시록’에도 ‘발퀴레의 기행’이 등장한다. 미군 헬리콥터들이 평화로운 베트남 마을로 날아가 무차별 공습을 자행하는 잔혹한 상황이지만 이 거장은 오히려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영상으로 역설적인 웅변을 토해내었고 음악이 또한 그 의도를 절묘하게 살려주었다. 사실 ‘발퀴레의 기행’이 이처럼 유명해진 것은 바로 그 때부터였다고 할 만큼 그 장면은 충격적이었고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떠올리게 되는 영화라면 ‘지옥의 묵시록’과 ‘작전명 발키리’ 사이에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 ‘반지의 제왕’이다. 그것을 소유하는 자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한다는 반지의 설정도 그렇지만 그것을 둘러싼 갈등의 구조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증오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했던 영화 속의 골룸은 아무래도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난쟁이 알베리히를 떠올리게 한다. 권력보다 사랑을 쫓아 라인의 황금을 지키는 세 자매에게 차례로 접근해 보지만 결국은 놀림만 당하게 된 난장이 알베리히는 결국 사랑 대신 권력을 얻기 위해 라인의 황금을 훔치게 된다. 일종의 열등감이고 그에 대한 보상심리인 셈이다. 신들의 제왕 보탄이 계약과 법칙을 관장한다는 설정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능의 신이면서도 스스로가 만든 세상의 이치이고 질서이기에 스스로가 어길 수 없다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오히려 관습이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영웅을 만들어 몰락해가는 신들의 세계를 수호해야 하는 고뇌와 몸부림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얻고자 하는 이는 절대 권력의 반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두려움을 모르는 우리 인간들의 영웅 지그프리트는 절대 권력의 반지를 손에 넣고서도 온전한 자유의지로 사랑을 택했고 그로 말미암아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그래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다. 히틀러가 그의 제국과 동일시했던 신들의 보금자리 발할 성은 끝내 불에 타서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신들의 세계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황금반지는 결국 그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은 채 원래 있던 라인 강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네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고 삶인 것이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괴물을 키우자

내가 어려서 읽은 그림(Grimm) 형제 동화 중에 ‘왕자와 부하들’이란 것이 있었다. 어느 아름다운 공주가 계모 여왕의 학대를 받고 감금돼 있다. 타국의 젊은이들이 공주를 구하러 찾아 오지만 나쁜 여왕이 낸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해 목숨을 잃는다. 어느 왕자가 다른 젊은이들처럼 모험을 하러 가는데 도중에 괴물들을 계속 만난다. 이 괴물들은 각기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놈은 눈알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 눈으로 천리를 볼 수 있고, 어떤 놈은 팔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 팔을 한없이 늘릴 수 있다. 또 어떤 놈은 무엇이든지 뱃속에 집어넣을 수가 있다. 왕자는 이런 괴물들을 하나씩 부하로 삼아 소부대를 만들어 나쁜 여왕의 성으로 들어간다. 여왕이 문제를 내는데 가령 ‘없어진 반지를 찾아내라’하면 반지가 호수 속에 있다는 것을 외눈이 금방 알아내고 배불뚝이가 호수물을 몽땅 마셔버리면 외팔이 팔을 길게 늘려 가져온다. 이런 식으로 왕자의 부하들은 무슨 문제든지 척척 해결해 마침내 공주를 구해낸다. 출판된 지 거의 200년이 되는 이 동화가 시사하는 바는 바로 ‘전문성’이다. 괴물은 전문가를 가리키며 왕자는 그 전문가를 적절히 운용하는 사람이다. 그림 형제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얼마 전까지, 혹은 어느 지역에선 지금도 전문가는 괴물처럼 보인다. 실생활에서 이들은 제한된 능력밖에 없고 그 능력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보여 평범한 사회에서는 유용하게 쓰이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이 왕자의 부하들처럼 팀을 구성했을 때는 일반인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들이 팀을 용이하게 구성할 수 있는 이유는 누가 보아도 그들의 능력과 무능력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하며 갑의 무능력이 을의 능력으로 보완되고 다시 갑, 을의 무능력이 병의 능력으로 보완될 수가 있다. 능력과 무능력이 보완되는 접합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들의 조직력은 강력할 수밖에 없다. 이와 정반대의 조직이 관료조직이다. 어찌 보면 한국 역사를 지배해 왔던 것이 강력한 관료조직이고 한국 사회 전반을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이것이다. 교육 자체가 개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대학 공부가 전공을 살리기 보다는 현대판 과거제도에 매달리다보니 일류학교와 유학에만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 사회 구성원들이 ‘괴물’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어디에나 만능하다고 인정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다보니 무능력으로 보일까 겁이나 남에게 묻는 것을 할 줄 모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는 선무당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능력에 따라 팀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열로 만들어진 조직에서 각자의 능력과 무능력이 드러나지 못하니 보완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줄줄이 내려오는 명령대로 뭔가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된다. 대개의 명령은 ‘어딘지 모르는 데 가서 무언지 모르는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이다. 조 직이라면서도 구성원들이 수시로 옮겨다니기 때문에 그저 얽어맨 것일 뿐 위기가 닥치면 삽시간에 우수수 흐트러질 허약한 조직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획일적이기만 했던 한국 사회도 어느덧 전문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경제 대통령’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국가통치자에게까지 전문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 전문성이란 말이 입에 오르내린 지 10여년 정도밖에 안되니 만시지탄은 있지만 전문화되는 속도는 한국의 특징대로 빠른 것 같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세계와의 경쟁 때문일 것이다. 패기있고 민첩한 젊은 인력을 촉수로 이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경험과 감각으로 무장된 강력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무당들을 제거하고 괴물을 키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공주를 빼앗아 올 수가 없다.

이 땅에 ‘어른’ 되기 위하여

근자에 지역의 인물을 기념해 출간된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내용과 선정과정은 차치하더라도 공경하고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을 뽑고 이를 공유하게 됐다는 것은 지역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선정된 분들과 그 후손에게는 특히나 영광된 일이지만, 나아가 지역의 존경받는 어른으로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판치고 고난도의 경쟁과정을 거쳐야만이 생존의 보루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못 배부른 낭만처럼 보이는 ‘어른’에 대한 상서로운 생각이 부지불식 떠오르는 연유이다. 제 눈앞에 놓인 현실적 가치 기준에서 쭉정이 같은 존재로 느껴지는 이 서슬은, 폭압으로 일삼던 시대보다도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내어 어른에 대한 존재감을 무력화시켜버렸다. 풍랑을 헤쳐 나가기도 바쁜 세상에 웬 어른타령이냐 할 만큼 삶의 환경은 대별되게 변했다. 달라진 만큼 변화의 속도 또한 전광석화이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다는 말도 참 말이 돼버렸다. 예의 이렇다보니 이웃집 어른은 물론이고 스승과 부모의 개념도 제 앞가림의 수단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얼치기 탕자를 양산하는 사회상이 심심찮게 거론되기 때문이다. 전국적 신드롬이라 일컬을 만큼 희대의 진풍경이 지난주에 펼쳐졌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이 그것이다. 세태를 반증하듯 그칠 줄 모르는 조문 행렬은 종파와 정파 그리고 지방색을 한낮 관념의 휴지조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궂긴 소식에 따른 애도의 물결과 추도사는 가히 신드롬이라 할 만치 겨울 가뭄에 허덕이던 전 국민의 가슴을 짭조름 적시고 말았던 것이다.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고맙다. 안구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의 후문은 장기기증이라는 단비로 이어졌다. 새삼 ‘어른 됨’이란 막연한 정체성 논란을 마감케 하는 대오각설이었음을 뇌까렸음이다. 풍진 세상을 살아오면서 만연한 이기심에 넌더리도 났을 법한데, 세상을 향해 고마웠다는 말과 마지막 남은 생명의 창마저 익명에게 내어주다니. 한 지아비로서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이제까지 살아온 물리적 공간을 돌이켜 보건데, 나를 누군가에게 건네줄 용기가 선뜻 나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어른’은 ‘어우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어우르다’의 사전적 의미가 복수를 단수로 엮어내는 데에 있다면, 아니 좀 더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남녀가 부부되기 위한 행위로써 ‘어울러’ 어른(한 몸)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물리적인 어른인 셈이다. 그러나 정신적 존재감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오늘날의 ‘어른’은 미래의 걸림돌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렸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전쟁과 경제개발논리에 목숨 걸던 시대를 관통했던 부모세대의 엄격함을, 일찍이 체험한 사오십 대 부모들의 일반화된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후대에게는 도덕적 엄격함과 경제적 가난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 등을 되 물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짐해온 의지가 올곧이 자리 잡기는 커녕 되레 치독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시대의 암울한 ‘어른’ 상을 풀어낼 묘법은 없는가, 하물며 머리 맞대고 협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존재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역의 인물’선정이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소식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배후에 여전히 비인간적, 반민주적 행태들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의 목숨을 업신여기는 것은 양념에 불과하다. 불현듯, 평생을 허허대며 큰 목소리 한번 내지 않고 조용히 꾸짖으시던 ‘어른’ 한 분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네게 아낌없이 사랑을 줬던 것처럼 네 자식, 네 이웃에게도 아낌없이 온정을 베풀 수 있겠느냐? 그게 ‘어른’되는 첫걸음이다.”

악보를 넘기는 ‘다른 손(?)’

피아노 연주회 때 연주자나 무대진행요원도 아니면서 연주자와 비슷한 의상을 입고,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무대 뒤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 물론 공연 스태프도 있겠고, 연주자의 업무보조자도 있겠지만, 그날 연주할 피아니스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바로 ‘페이지 터너(Page Turner)’다. 글자 그대로 ‘쪽(페이지)을 넘기는 사람’인데, 피아니스트를 대신해서 악보를 넘겨주는 보조자 역할을 한다. 피아니스트는 당연히 두 손으로 연주를 하므로 악보를 넘길 ‘다른 손’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페이지 터너’가 맡는다. 무대 뒤에서는 ‘페이지 터너’를 부를 때 속된 말로 남자인 경우 ‘넘돌이’, 여자인 경우는 ‘넘순이’라고 한다. ‘넘돌이’나 ‘넘순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수자격조건으로 피아노 악보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대체로 연주자의 제자나 음대 학생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악보를 대신 넘겨주는 일은 보기보다 쉽지 않다. 대개의 경우 악보의 1마디 정도를 남기고, 연주중인 피아니스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빨리 넘기는 게 요령이다. 때문에 피아니스트와 ‘페이지 터너’는 연습을 통해 서로 호흡을 맞추기도 한다. 간혹 반주를 맡는 피아니스트 가운데 공연에 임박해서 갑자기 ‘페이지 터너’를 공연장 측에 요청해 공연진행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 수년전 흑인이면서 희망과 인권을 노래하는 세계적인 성악가 소프라노 바바라 헨드릭스를 초청한 공연에서 갑자기 연주회 시작 10분 전 반주자인 피아니스트 스테판 세야가 ‘페이지 터너’를 요청해 왔다. 당황한 직원들이 관객 중 피아노 전공자를 찾아 헤매다가 다행히 한국예술종합학교 피아노전공인 모 교수를 만났고, 그의 제자에게 ‘넘돌이’역을 맡겨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이처럼 공연 관계자들은 인맥을 통해 ‘페이지 터너’를 긴급하게 섭외하거나 심지어 일반인 중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학생을 찾아 위기를 넘기곤 하는데 대략 5~10만원 정도의 사례비를 지급한다. 피아노 전공학생들에게는 용돈도 벌고 바로 옆에서 연주를 감상하는 행운까지 얻는다고 볼 때 ‘꿩먹고 알먹고’ 일석이조의 소득일 수도 있겠다. 간혹 ‘페이지 터너’가 당황해서 한 장 넘겨야 할 악보를 두 장 넘기거나, 악보를 넘기려다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재빨리 악보를 주워 피아노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이 이번에는 거꾸로 놓는 바람에 결국 그날의 연주를 망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필자도 오래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선생 그리고 피아니스트 이경숙 선생과 동행해 부산연주회를 갔는데 이경숙 선생이 갑자기 ‘페이지 터너’가 필요하다고 해서 사람을 찾다가 못 찾아 필자가 ‘넘돌이’ 역할을 했다. 그런데 1장을 넘겨야 하는 악보를 모르고 2장을 넘겨서 연주를 망칠 뻔한 일이 있었다. 물론 재빨리 악보를 원위치시켜 위기는 넘겼지만 상당히 긴장된 순간이었다. 오케스트라의 경우 객석에서 볼 때 안쪽에 앉은 단원이 악보담당이다. 우스갯말로, 옆 자리 ‘고참’ 단원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악보를 일부러 빨리 넘기거나 늦게 넘겨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공연을 끝낸 연주자에게 박수를 보낼 때 무대에서 쑥스러워 하는 ‘페이지 터너’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자. 어쩌면 이들의 숨은 역할이 있기에 연주회가 더 빛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빈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

2009년은 작곡가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곳곳에서 열릴 터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연주회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였다. 빈 필은 해마다 요한 시트라우스의 왈츠나 폴카를 중심으로 신년 음악회의 무대를 장식했지만 올해만큼은 하이든의 서거 200주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인지 ‘고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4악장을 연주했고 그것이 전 세계에 위성으로 생방송됐다. 빠른 악장이 느려지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악기를 들고 무대 뒤로 사라지더니 급기야 바이올린 연주자 두 사람만 남게 되지만 그들마저 사라지면서 음악도 끝이 난다. 이 곡이 작곡된 배경을 모르고 방송을 본 사람들은 어리둥절했겠지만 정작 연주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시종 웃는 얼굴들이었다. 하이든 시대의 음악가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그들의 성이나 저택에 머물면서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작곡하거나 연주했다. 하이든을 고용했던 에스테르하치 후작은 여름이면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에 기거하면서 더위를 피했는데 이때는 하이든뿐만 아니라 하이든의 책임 하에 맡겨져 있었던 다른 악사들까지도 함께 가야 했고 그들은 그 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해야 했으니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1772년 여름에는 무슨 일인지 예정되었던 두 달을 채우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도대체 돌아갈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악사들의 불만은 턱밑까지 차오르게 됐다. 물론 하이든은 조심스럽게 후작에게 이런 사정을 전했지만 후작은 오히려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명을 내릴 뿐이었다. 고심 끝에 하이든은 다른 방법으로 후작의 마음을 돌릴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2주 만에 서둘러 완성한 곡이 바로 ‘고별 교향곡’이었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자 악사들은 하나 둘씩 보면대 위의 촛불을 끄고 자리를 떠났고 마지막 두 사람마저 끝내 자리를 뜨면서 음악도 멈추게 된다. 그때서야 하이든의 의도를 알아차린 후작은 당장 떠날 차비를 지시하였고 마침내 그들 모두 기다리는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말년에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치 후작 가문과의 계약이 끝나 자유를 얻게 된다. 후작에게 봉사하던 30여년 세월 동안 하이든의 업적과 명성은 바다 건너 영국에까지 전해졌고 잘로몬이라는 흥행사의 주선으로 영국을 방문한 하이든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영국민들의 거국적인 환영에 놀라게 된다. 영국의 귀족들과 부호들이 비록 하이든에게 경의를 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십분 이해하고 경청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을 즐기기보다는 사교를 위해서, 혹은 남에게 과시하려는 생각에서 연주회장을 찾는 사람들은 그때도 많았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연주회 도중에 조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하이든은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그들을 은근히 골려줄 방법을 생각했다. 느린 2악장을 아주 조용하게 시작하다가 갑자기 팀파니가 가세한 모든 악기들이 동시에 커다란 소리를 내게 했던 것이다. 당연히 객석에서 졸고 있던 수많은 청중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겁을 했을 터지만 결국은 청중들이나 작곡자, 심지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놀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향곡 94번은 그렇게 탄생했다. 누구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역경을 이겼고, 그 시대 다른 누구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늘 성실과 겸손을 잊지 않았던 하이든은 예기치 않은 위기마다 여유와 유머로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하는 2009년, 우리 모두 하이든의 유머를 배워야 할 것 같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공연장의 미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후 세워진 최초의 공연장다운 공연장은 현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서울)시민회관이다. 시민회관이 1961년에 개관되었으니까 그 후 이미 반세기가 되어간다. ‘회관’이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이 건물이 순전히 공연만을 위해 지이진 것은 아니라 하더하도 이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 공연이므로 전쟁이 끝나고 여기서 본격적인 공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2011년 5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해는 공연계 전반에 의미있는 해가 될 것 같다. 지난 50년 우리 주변의 상황이 변한 것을 보면 그에 따라 공연장의 모습이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전국에 대체 몇 개의 공연장이 생겼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숫자가 늘어났고 새로 생길 때마다 이전보다 더 첨단의 장비가 갖추어지는 것 같다. 공연장의 효율성은 다시 따져보아야 할 일이지만 일단 번듯한 면모의 공연장들은 앞으로도 계속 세워지는 추세다. 문제는 공연장이 세워지는 속도만큼 의식이 따라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반세기 전 서울에 시민회관이 생길 때는 철두철미 관주도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도 짙게 남아있던 시절 공연문화로 시민을 위로하는 한편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실생활에 능하지 못한 예술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다시 말하면 공연장의 주체는 아직 관객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은 우리나라에 서구식 공연장이 생겨났던 개화기부터 문제의 씨가 있었다. 일본인을 통해서 도입된 서구식 공연장은 우리에게 서먹서먹하고 낯선 곳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공연장의 규모와 모습은 모두 서양 관객에 의해서 수백년 동안 반죽되고 다듬어진 모습인 것이다.(‘극장’이라는 말의 어원인 그리스어 theatron은 원래 ‘객석’을 의미한다) 반면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 낯선 형태의 건물의 중심은 객석이 아니라 무대일 수밖에 없었다. 반세기 전까지도 여전히 그런 패턴에서 공연장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세계에 유례가 없을만큼 한국은 빠른 속도로 선진국을 향해 달려왔다. 국민의 의식과 생활 패턴도 눈이 어지럽게 달라졌고 마치 가속도가 붙은 듯 변해가고 있다. 이전 무대를 쳐다보던 관객은 무대를 내려다보는 관객으로 변한지 이미 오래다. 공연장 운영자들이 특히 빨리 파악해야 할 점이 이것이다. 그러자면 공연장의 시설이 개선되듯 운영 시스템도 개선되지 않으면 안된다. 진정한 관객이란 공연물을 향유하고 서비스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공연물을 비평할 줄 알고 그에 대한 감상을 표현할 줄 안다면 오히려 진정한 관객이 아니다. 진정한 관객이란 오히려 느끼기만 하고 그 느낌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느낌이 공감대를 형성할 때 그 어느 일류 평론가의 비평보다 더 무섭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공연장 운영자들의 능력이다. 이 점에서는 이론적 분석도 한계가 있고 현란한 논쟁도 소용이 없다. 오직 오랜 경험에서 오는 ‘감각’만이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공연장은 더욱더 전문가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공연장 운영에서 과거처럼 관에서 주도하는 ‘지침’은 이제 적절하지 않다. 공연장은 플라토니즘이 효력을 발하는 곳이 아니다. 공연장은 전쟁터처럼 철저한 ‘현장‘일 뿐이다. 각 지역의 공연장은 이제 “우리 지역 주민의 문화의식을 고취하고…” 어쩌고 하는 고리타분한 말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우리나라 모든 지역의 문화의식은 적어도 잠재적으로 이미 공연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공연장 운영자들이 해야 할 일은 지역 주민을 등에 업고 세계를 향해 뛰는 일이다. 그리고 ‘세계 속의 도시’를 만들기 위하여 피가 튀는 치열한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포시장의 어제 그리고 내일

인천개항장 일대에 근대적인 모습을 갖춘 시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개항의 여파가 비로소 가라앉기 시작한 20세기 초부터였다. 1900년 12월29일 인천부의 인가를 받아 제물포항 부근에 세워진 ‘인천 공동 어시장’이 그것이다. 이 시기는 전국의 육백 여 장터가 전통적인 짝수 날 거르기 방식으로 성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통적인 어촌의 형태를 띤 채 소규모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곳이었는데 외세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외래문물이 쏟아지는 상황 하에서 제물포를 중심으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하는 일대 전환기이기도 했다.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했던 항구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고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그 변화에 맞춰 근대화된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 시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인천 공동 어시장’의 탄생은 시대적인 변화 요구에 발맞춰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지녔던 것이리라. 어쨌든 개항장 일대에 근대적인 시장의 형성은 인천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를 주었고, 근대시대로의 이행이라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탄력을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일본의 조선 침략 거점지 노릇을 담당했던 개항장 일대는 일본인들이 절대다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 내에서 그 위상이 갈수록 높아져 강제 병합 당시 인천의 인구 3만여명 가운데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일본인은 그 세를 넓혀가고 있는 양상이었다. 일본의 강제병합에 따라 인천에 거주하고 있었던 서양 열국의 영사관 및 무역사무소는 차례로 인천을 떠났거나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나마 천여 명의 중국인들만이 빼앗긴 나라의 제 3국인으로서 명맥을 유지한 채 인천 사람으로 동화되어 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신포동에 정식으로 상설시장이 생겨난 것은 1926년 7월1일의 일이다. 당시의 신포동 상권은 그야말로 정치, 경제, 금융, 교육,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관계로 오늘날 말해지는 먹을거리, 놀거리, 볼거리들로 이미 융성하고 있던 시기였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인천의 노인들 입밖에 오르내리는 말 가운데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물건도 신포동에 가면 있고, 좋은 물건을 사려면 신포동으로 가라!’는 말은 당시의 신포동 상권이 어떠했음을 방증하는 단서였다. 신포시장의 처음은 어시장과 푸성귀(야채) 시장으로부터 출발한다. 항구에 가까웠고 일찍이 외래 음식 문화가 발달하게 된 이 지역에 시장이 형성된 것은 자연발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푸성귀 시장의 주역은 대개가 중국인이었으며 인천의 개항과 거의 때를 같이해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은 중국 배와 외국의 상선들에 물과 음식을 납품해 돈을 벌어들였다. 그 때에 강씨, 왕씨 성을 가진 두 농부에 의해 재배된 야채가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외국의 야채가 국내에서 직접적으로 재배되는 일은 불법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신포동 시장에서 야채를 독점적으로 판매했던 사람들은 중국인이었고, 현재 그들의 자손 몇몇은 업태가 바뀌었지만 신포동에서 3~4대를 걸쳐 인천을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시장도 사람처럼 형성과정이 오래고 연륜이 쌓이면 단단한 무게와 기품이 들게 마련이다. 과거의 영화가 언제 있었냐는 듯 한가롭게 장터의 여유를 즐기는 구매 흥정들이 정겨움을 넘어 밉살스럽게 보일 지경에 이르게 되면 볼 장 다 본 사람처럼 어깨가 무거워진다. 어제의 빛바랜 영화가 오늘을 있게 만드는 자화상이라면 당장 꾸려야 할 내일의 희망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인지. 심심한 우려가 겨울 한파를 동반한 채 신포동 재래시장을 한바탕 휩쓸고 있다. 다들 안녕해야 할 텐데.

‘바이올린 연주자의 1초 움직임은 10원?’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경제 한파는 문화예술계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대체적으로 항상 경제가 어렵다고들 해 왔지만 요즘은 IMF 때보다 더하다고 하니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지 짐작하게 한다. 불황이 극심하다지만 연초가 되니 신년음악회를 비롯해 공연들마다 다양한 클래식 연주회를 관객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공연을 통해 연주곡들을 감상하게 되지만, 사실 편성이나 곡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이를 테면 교향악단은 보통 2관 또는 3관, 4관 편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서 편성의 기준은 목관, 금관악기 연주자 수에 따라 구분된다. 예를 들어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 호른, 트럼펫, 트럼본 등의 주자가 2명씩일 때는 2관 편성, 3명씩이면 3관 편성, 4명씩이면 4관 편성이라고 한다. 2관 편성의 경우 단원수는 60명 내외이며 3관은 80명, 4관은 100여명 규모다. 따라서 교향악단은 목관, 금관악기 숫자에 따라 전체 단원수가 결정되는 셈이다. 주로 모차르트나 베토벤 등 고전파의 곡은 2관 편성으로 소화할 수 있지만 브람스 등 낭만파 이후의 교향곡들은 3관 이상으로 편성하는 경우가 많다. 교향악을 감상하기 위해 객석에 앉아있다면, ‘과연, 이렇게 많은 연주자들은 연주 후 받는 공연수당이 얼마나 될까’라는 궁금증을 가질 만하다. 국내 오케스트라 단원의 출연료는 연주형태나 성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1회 공연에 한 사람이 20만~30만원 정도를 받는다. 연주시간은 휴식시간을 포함해 대게 2시간가량이지만 연주자들의 악기 종류나 연주법이 각기 다르니, 그에 따른 시간별 수입을 따져보는 것도 흥미롭다. 오케스트라 중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주자들은 바이올린 파트다. 바이올린 연주법 가운데 ‘트레몰로’는 활을 불과 1~2초 사이에 수차례 움직이는 연주기법이다. 평균 1초에 한 번씩 활을 올렸다 내렸다 한다고 했을 때 연주시간 120분 동안 7천2백번의 활이 오르내리는 셈이다. 따라서 7천200번을 30만원으로 나누면 1초에 약 40원 꼴이지만 보통 연습시간 4회까지 포함하면 활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약 10원을 버는 것이다. 첼로나 비올라 등은 바이올린보다 덜 바쁘게 활을 움직이는데 대략 계산해 보면 1회 움직임에 약 20원 정도를 벌고, 그보다도 조금 덜 바쁜 콘트라베이스는 약 40원 정도를 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악기 파트의 플루트나 오보에, 클라리넷은 한번 불 때마다 약 100원 정도, 관악기 중에서 별로 바쁘지 않은 호른이나 튜바 등은 한 번 불 때마다 몇 백원에서 몇 천원 정도의 몫이 돌아가는 셈이다. 이처럼 시간당 푼돈(?)으로 계산되는 현악, 관악 파트 연주자들과 달리 타악기 주자들은 움직임에 비해 꽤 목돈을 번다. 팀파니는 스틱을 한번 두드릴 때마다, ‘2천원, 3천원…’하고 계산이 되지만 트라이앵글이나 드럼은 ‘2만원, 3만원…’ 한다. 그러나 심벌즈와 큰북은 이보다 훨씬 많은 ‘5만원, 10만원…’ 할 테니 힘 덜 들이고 돈 버는 것 같다. 하지만 타악기 파트에서 잠깐 실수라도 하면 그날 연주회는 완전히 망쳐 버리게 될 정도로 중요해 순간순간 확실한 역할을 해야 한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 필자가 오래 전 공군 군악대에서 군복무 했을 때 한 행사에서 애국가를 연주하는데 딱 한 차례 등장하는 심벌즈가 주자의 실수로 엉뚱한 때 심벌즈가 울리고 말았다. 결국 이날 연주는 우스운 모양이 됐고, 심벌즈 주자는 연주가 끝난 뒤 어떻게 됐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타악기이니 만큼 다른 악기에 비해 손쉽게 일당(?)을 챙긴다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박인건 경기도문화의전당 사장

소비에트의 진정한 거장들을 기리며

클래식 음악에서 20세기는 확실히 러시아 연주자들의 시대였다. 악기별로 최고의 연주자들을 나열하다 보면 둘 중의 하나가 러시아 출신이고 그들이 남긴 업적과 후광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로스트로포비치는 20세기 내내 첼로의 제왕이었고 유리 바슈메트는 지금도 여전히 비올라의 지존이다. 그런가 하면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는 벌써부터 세인들을 경악시키면서 트럼펫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을 두고 혹자는 사회주의 소비에트 체제에서나 가능했던 소수 정예의 선발과 가혹한 훈련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비단 그것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고 없는 소비에트 시절의 거장들을 떠올려 보면 연주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특별한 기억을 남긴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어떤 연주회에서든 악보를 펼쳐놓고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더욱이 그 악보를 바로 위에서 비추는 한줄기 조명 말고는 무대나 객석 할 것 없이 일체의 빛을 차단했다. 연주회장 밖에서의 유별난 점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고소공포증이었다. 당연히 비행기 여행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해외로 연주여행을 나갈 때도 육로와 해로를 이용했다고 한다. 땅덩어리가 넓은 러시아를 기차나 자동차로 벗어나려면 꼬박 며칠이 걸리기 마련이었는데, 오지를 여행하다가 날이 저물면 리히테르는 가장 가까운 마을에 숙소를 정하고 예정에도 없는 연주회를 열어 그곳 주민들을 초청하곤 했다. 물론 마땅한 연주회장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피아노가 있고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만 있다면 촛불을 켜고서라도 피아노를 쳤다. 언젠가 시베리아의 어느 외진 곳을 지나다가 밤을 맞은 리히테르는 늘 하던 대로 그곳 주민들을 위한 조촐한 연주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는 그 누구보다 리히테르의 음악에 넋을 잃어버린 한 소년이 있었다. 그날의 감동을 잊지 못한 그 소년은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고 훗날 세계적인 바리톤 가수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드미트리 흐보로브스키이다. 그러고 보면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의 거장들 가운데는 이렇듯 고국산천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연주회를 열었던 음악가들이 많았던 것 같다. 물론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당국의 방침과 지시를 따라 그렇게 하기도 했겠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상당수의 연주자들은 스스로가 원했던 것 같고 심지어는 다른 활동을 줄이거나 없는 시간을 쪼개서 방문연주회에 힘을 쏟았던 경우도 적지 않다. 20세기 중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쌍벽을 이루었던 또 한 사람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코간은 확실히 오이스트라흐와는 대조적이면서 그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오이스트라흐가 군림하던 시대를 살았던 또 한 사람의 바이올리니스트일 뿐이다. 바로 그 오이스트라흐가 심사위원을 맡았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코간이었지만 내성적인 성격과 한 사람의 확실한 선전도구를 필요로 했던 소비에트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늘 오이스트라흐의 그늘에 가려야 했다. 주로 국내 무대에서 활동을 하며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던 코간도 간간이 있었던 해외 연주회에서의 놀라운 성과와 반응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지만 58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빈에서의 연주회를 끝낸 지 불과 며칠 후, 또 다시 홀로 기차에 몸을 실은 코간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2009년 신년 벽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거장들의 따뜻한 음악이 그립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새해를 시작하며

2009년호 열차가 출발한 시점에서 지난해를 돌아본다. 과거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통감한 국민들이 이른바 ‘경제대통령’을 뽑고 모두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 미국에서 시작된 전세계 경제 한파가 밀어닥쳤다. 불안이 불신을 낳고 이어서 새 정부에 대한 국민의 전폭적 지지가 표현되지 않은 채로 어영부영 1년이 지나간 셈이다. 경제 전문가들의 진단과 분석이 무엇이든 ‘살아갈 길’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감은 올해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당연한 듯 피부로 느껴진다. “다사다난했던 작년을 뒤로 하고 올해는 희망찬…” 운운의 평소 신년 각오는 이번에는 적절치 않은 듯하다. 그러면 새해 첫날부터 웅크리고 있어야 하나? 이 상황에서 가장 가치있는 말을 고르라면 “위기를 기회로 삼자”라는 말이다. 이 말이야말로 내년부터는 상황이 좋아지리라는 전문가의 말보다도 더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나아가 용기를 주는 말이다. 어느 분야에서도 이 말은 유용하고 공연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연문화란 상식적으로 판단해보아도 잉여농산물에서 발생한 것이요, 엔터테인먼트는 공연문화의 본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여전히 지배하는 그런 발생학적인 타성을 극복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진지하고 냉철하게 지금까지의 사고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첫째, 공연물은 상품이요, 공연장은 공연물을 파는 곳이라는 인식을 재차 확인해야 한다. 공연물이 팔려야 하는 상품이라는 인식에 도달하면 경제가 어려울 때 나오는 상투적인 요구가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무조건 제작비를 줄였을 때는 팔리지 않는 상품이 나올 확률이 큰 법이다. 더구나 무료공연을 하라는 요구는 배급제를 하라는 뜻인데 그래보았자 영양가 있는 것이 제공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가격대비 고가치의 상품을 만들려는 노력과 연구를 부지런히 해야 할 시점이 지금이다. 전문가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는 이유이다. 둘째, 그와 관련해서 힘써야 할 일이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지나치게 외국 것을 수입하는 데 열을 올렸다. 외국인 연주자뿐아니라 오페라, 뮤지컬 등 대형 공연물도 서슴치 않고 들여온다. 심지어 외국에서 폐기처분하려는 오래된 프로덕션을 들여와 비싼 티켓값을 매겨 파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는 동안 우리나라 예술인들에겐 일자리가 적어지고 경쟁력도 키우지 못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나라 예술인의 잠재력을 빠른 시간에 개발할 수 있고 이미 그런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인프라와 시스템에 투자하지 않아 미개한 상태이다 보니 외국과 충분히 겨룰 수 있는 훌륭한 재능들이 묻혀지는 것이다. 지난해 연말 돌풍같은 연주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베네수엘라 청소년 관현악단과 그들을 이끈 구스타보 두다멜은 모두 베네수엘라 정부의 지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국위선양을 그에 투자한 금액과 비교할 수 있는가? 외국에서 한국을 빛냈다고 하는 예술인들은 모두 개인의 재력과 노력으로 그럴 수 있었다. 유명해지면 그제야 박수치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 국내에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이용해 외국으로 내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 셋째, 그로테스크한 지역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시민이 낸 세금은 우리 시민이 써야 한다”는 식의 바보천치 같은 소리가 여전히 어디선가 들려온다. 심지어 무대에 서는 사람까지 주민등록을 따져야 할 판이다. 그럴 것 없이 차라리 세금을 돌려주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각자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한 도시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도시를 개방하고 가능한 한 많은 외지인이 몰려오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공연문화가 특화해야 한다. 지도상에도 보이지 않은 미미한 도시가 세계로 튀는 일이 신기할 것도 없는 시대이다. 지난해의 당황함을 가라앉히고 위기에 정면으로 맞설 각오를 할 때 문화는 우리를 조금 더 성숙함으로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

15인의 야마가탄

우리로 치면, 강원도내 작은 도시라 할 일본 야마가타 현(山形縣) 야마가타 시에서 손님들이 오셨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부터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로 구성된 모둠 방문객이었다. 대부분이 한국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었으니 인천은 오죽하겠냐마는 한국에 대한 이해와 식견은 여느 방문객과 좀 다른 분위기였다. 인천으로 오기 전, 위안부 할머니들이 기거하고 계신 ‘나눔의 집’을 방문했고 명동과 인사동 그리고 학교시설 등을 이미 섭렵하고 온 터였기에 첫 방문치고는 눈빛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야마가타 현은 야마가타 시를 비롯해 43개의 시정촌(市町村)으로 구성된 인구 126만 여명 규모의 중소자치구역이다. 1억3천여 명에 육박하는 일본 인구 가운데 십분의 일 밖에 안 되는 작은 현(縣)에서, 게다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는 야마가타 시민 15명의 인천방문은 그래서 더 특별난 것이었다. 올해로 세 번째 한국을 방문한다는 다구치(田口忠宣) 씨는 한국방문 첫 해에 무작정 독립기념관을 찾아가 지난 식민지 역사의 잘못된 점을 사과하러 왔다고 밝혔던 일본지리교육연구회 전국위원이기도 했다. 수치상으로 천만 분의 일의 비율에 불과한 이들 방문객의 전면을 살펴보니 교육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분들이었다. 대학교수, 초중고 교사, 퇴직교사 등의 모임인 야마가타 ‘교직원조합’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야마가타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치고 있는 고길희 박사의 간청에 의해 성사된 인천 행이었는데, 생면부지는 말할 것도 없고 생소하기 그지없는 인천의 문화 환경을 단 하루에 설명한다는 게 여간 골머리를 써야 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시발지인 인천역을 일본 요코하마와 비교해 설명했고 차이나타운, 연초제조지, 창고시설, 청·일조계지, 일본은행거리와 각국공원이라 불렸던 자유공원 등 개항 초기 일본인들이 살았던 공간들, 일제강점기에 인천이 어떻게 병참기지로 변해가는 지를 끝으로 단박하게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중국요리는 인천을 찾는 외래 방문객들에게 참으로 매력적인 음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비싸기로 소문난 일본의 중국요리에 넌더리가 난 일본사람이라면 삼분의 일 가격이 채 안되는 요리를 푸짐하고 여유롭게 먹을 수 있는 차이나타운에서의 식사는 가히 환상적인 것이었다. 뱃속이 따듯해지고 일면식이 재차 거듭되면서 국적과 민족의 경계가 슬그머니 녹아내리고 있었다. 명함을 돌리고 사진을 찍고 술잔이 부딪쳐감에 따라 한 시대를 고민해왔던 양국의 이질감은 시나브로 인간문제라는 대전제 속으로 수용되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양국의 역사관계에 대한 오해와 오역의 빗장을 열어젖힐 수 있는 가능성을 공유하게 된 점은 높이살만 했다고 자평해 본다. 엔고의 여파로 비교적 손쉽게 한국 방문의 기회를 갖게 된 일본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말마따나 인사동과 명동 그리고 엔간한 목욕관련 서비스 시설과 간단한 치료시술을 값싸게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일본사람들이 몰려든다고 연일 보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때 아닌 호황을 탓할 필요는 없지만 지나친 경제논리 중심의 이미지즘이 노출된 것은 아닌지 한편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식이 지나치게 강조돼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교육받아왔던 우리 세대의 역사 인식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지난 역사에 대한 이해와 정확한 판단을 통해 소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 또한 우리 세대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즈음 일본 방문객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보기 어려운 인천에 일본 소도시 야마가타 지성인들의 방문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15인의 야마가탄(山形人 Yamagatan)이라 감히 부른다. 국지적 경계와 역사곡해를 뛰어넘어 진실을 찾아 인천을 방문한 ‘교직원조합원’들께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이종복 시인·향토사학자

‘공연, 이렇게 무대에 올려진다!’

거리마다 캐럴이 울리고 곳곳에 성탄과 연말연시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트리 장식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연말이 되니 각 공연장마다 쉴 틈 없이 무대에 공연이 올려지고, 공연기획자들도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대에서 관객에게 보여지는 공연시간은 불과 1시간에서 길게는 3시간 이내지만 한 공연을 위해 공연기획자들은 길게는 몇 년에서부터 짧게는 몇 개월을 보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그 메커니즘을 잠시 들여다보자면, 공연기획에서 첫 수순은 연주자나 단체를 섭외해 계약을 하는 것인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아티스트나 단체는 섭외 자체가 쉽지 않다. 또한 그들은 프로그램을 직접 선택해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 공연기획자들의 속을 태우기도 한다. 출연자의 개런티를 충당할 비용이 허락된다면 스타급 아티스트를 모시는 것만으로도 일단 공연의 절반은 성공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어 공연을 펼쳐 보일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인데, 대형 공연장의 경우 보통 1년 전에 대관신청을 받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날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공연장 정기대관 일정을 관심 있게 봐야 한다. 대관을 신청했다고 100% 받아들여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심의절차를 거쳐야 가능하다. 이를 놓치는 경우 수시대관이라 하여 빈 날짜를 선택할 수 있게 하지만 주요 공연일은 정기대관을 통해 선점이 되므로 서둘러야 좋은 날을 잡을 수 있다. 지금은 간소화 된 공연물 심의 부분도 과거에는 ‘공연윤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이념과 사상 논리를 적용해 공산주의 국가 출신 작곡가의 곡은 연주자체가 불가한 웃지 못 할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 출신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우리가 오케스트라로 듣게 된 것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영상물등급위원회’로 명칭을 바꾼 이곳에서 외국인 연주자나 연출가 등 출연진이 있을 경우 공연추천서를 받아 아티스트의 입국을 돕는다. 공연을 기획하면서 저작권 문제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문학·학술과 예술부문의 창작물은 저작자 사후(死後) 50년까지 그 권리가 보장되기 때문에 연주악보의 경우 사후 50년이 지나지 않은 연주자의 곡은 구입이 불가하고 대여해서만 사용할 수 있으며, 가끔은 저작권협회에 사용료를 지불하기도 한다. 공연 준비 시 서둘러야 하는 것 중 하나가 공연 티켓을 여는 일인데 일반 관객이 표를 구할 수 있도록 티켓판매를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처럼 온라인이 발달한 시대에는 각종 인터넷 예매사이트를 이용하고, 더 많이 외부에 노출될 수 있도록 이미지가 각인될 수 있는 플래시 배너 등을 활용한다. 공연 타이틀이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질수록 판매고를 올리는 데 유리하므로, 부지런히 손품 발품을 팔 수밖에 없다. 또한 홍보포스터, 전단지, 현수막, 언론보도 등 활용할 수 있는 각종 홍보수단과 인맥을 동원해서 공연을 알리고 많은 관람객이 모일 수 있게 한다. 뭐니뭐니해도 입소문 즉 구전마케팅이나, 이미지 광고를 부각시켜 사전에 정보를 주고, 시각적으로 구미가 당기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처럼 공연 하나가 무대에 올려지기까지 공연기획자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공연장의 객석이 꽉 찼을 때 출연자도 그렇겠지만 누구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무대 뒤를 뛰어다니는 공연 기획자들일 것이다. 연말연시 쏟아지는 많은 공연에 관심을 가져보자. 그리고 초대권이 아닌 티켓을 구매하여, 공연문화의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문화발전을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공연기획자들에게 온정을 베풀자.

‘엘 시스테마’와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지난 12월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예술의 전당과 성남아트센터에서 있었던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우리 음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물론 뛰어난 연주가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오케스트라와 관련된 아름다운 이야기가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했기 때문이다. 1975년 베네주엘라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안토니오 아브레우는 불우한 처지에서 방황하는 7명의 청소년들을 자신의 집 지하 주차장에 불러 들여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음악을 배우려는 청소년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더 넓은 장소와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정부와 기업, 국민들의 호응을 호소하고 또 이끌어내면서 오늘날에는 범국가적인 음악교육사업인 ‘엘 시스테마’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2005년 3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 수혜자는 40만명으로 늘어나 있었고 현재는 전국의 200개가 넘는 지역센터에서 두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의 아동, 청소년 25만명이 1만5천명이나 되는 교사들의 지도를 받고 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상이 되는 청소년 모두가 저소득층이거나 학습장애, 혹은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가르치는 교사들은 대부분 ‘엘 시스테마’의 초기 수혜자들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볼리비아 전국에 이렇게 만들어진 어린이 오케스트라는 90여개에 이르고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130여개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오케스트라가 이번에 내한한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이다. 여기서 교육을 받은 더블 베이스 연주자 에딕슨 루이즈는 베를린 필의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우며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이번 내한 공연의 지휘를 맡은 구스타보 두다멜은 26살에 이미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어 내년에 부임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접하면서 모두들 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획기적인 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오래 전 유럽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고 그것이 오늘날 그들이 자랑하는 클래식 음악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콘세르바토리오(conservatori)라고 하면 지금은 당연히 음악을 포함한 여러 예술 장르의 전문교육기관을 일컫는 말로 알고 있지만 이것이 원래는 르네상스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병원에 부설되어 있는 고아원을 지칭하던 이탈리아말 콘세르바토리오(conservatorio)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병원’을 뜻하는 오스페달레(ospedale)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유명한 바로크 시대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가 원장으로 있었던 베네치아의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당시 이런 시설들은 공공의 지원과 더불어 정규적인 일요 연주회의 수익금으로 운영되었는데, 이 음악회를 위해 비발디는 수백곡이 넘는 협주곡을 작곡해야 했고 음악에 재능 있는 원생들을 훈련시켜 그 곡들을 연주해야 했다. 비발디가 지휘하는 소녀원의 성가대와 관현악단의 연주는 곧 베네치아 사람들의 입이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조차 비발디의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관례로 여길 만큼 유명하게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는 자신들의 내한 연주회에 부산에 있는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초청하였다. 사라 장이 협연을 하고 정명훈이 지휘를 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세상의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고 우리 사회는 이런 사례를 널리 확산시키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것 같다. 이탈리아의 콘세르바토리오의 정신이 엘 시스테마로 부활한 것처럼, 그로부터 다시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가 새로운 힘을 얻고 그 뜻과 길이 활짝 열려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자랑이자 긍지로 자리잡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경제위기와 공연문화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유럽에서는 실질적으로 2차세계대전이 끝났다. 종전되고 약 한달 후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한 첫 번째 큰 일은 오페라를 올리는 일이었다. 작품은 자유의 정신을 주제로 한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였고 이때 지휘자였던 요셉 크립스의 증언에 의하면 제1막 앞부분 조용한 4중창에서 출연진, 지휘자, 관객들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전쟁이 끝나자 오페라를 올리는 국민이 또 있을까? 바로 한국민이다. 1953년 휴전이 되고 한달 후는 아니지만 1년 후인 1954년 아직 폭격 맞은 잔해를 서울 시내 도처에서 볼 수 있던 시기에 시공관(현 명동 예술극장)에서 현제명 작곡 오페라 ‘왕자 호동’이 무대에 올랐다. 초등학교 1년생으로 객석에 있었던 나는 이 사건만으로도 한국민이 위대한 문화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도 세계 오페라를 이끄는 대표적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수백년의 오페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페라는 종전 후 그들에게 ‘배급 식량’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전쟁 후 오페라가 공연되었을 때 오페라 역사는 6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3년 동안 처참한 전쟁이 휩쓸고 간 후다. 배고픔이 오스트리아 국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했을 리가 없다. 비록 극장을 찾은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극소수라 하더라도 객석에 앉은 누구에게나 물질적 궁핍은 마찬가지였다. 그 때의 오페라가 무슨 ‘반공 드라마’였다면 신기할 것이 없다. 그런 작품이 아니었기에 스스로 문화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기지 않은 사람이 그 당시 몇이나 되랴! 오페라에 왔던 사람들은 오페라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니었다. 즐거움이 존재할 수 없는 시절이었으니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어찌어찌 자금을 마련해서 무대에 올린 제작진이나 출연진에게는 공연 행위 자체가 자신들이 암담한 현실 속에서 열정과 용기를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의 표현이었다. 그들의 연기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것을 온 마음으로 느끼고 갈채함으로써 그 열정과 용기를 공유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연의 본질이며 이것이 살아나는 한 좋은 음악을 들으며 즐기는 문제는 여타가 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 한파가 몰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 경제 난국은 당분간 계속되리라는 전망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타격을 입는 것은 생업의 현장만이 아니라 소위 엔터테인먼트라는 공연예술도 마찬가지다.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구경은 무슨 구경…”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탓할 수가 없다. 오늘날 같은 때 문화의 각계에서 종사하는 사람은 어떠한 처신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공연처럼 일반인에게 티켓을 팔아야 하고 그들의 직접적 정서와 마주해야 하는 분야는 더욱 그렇다. 약 5년 전 어느 높으신 분이 “경제가 어려우니 문화를 뒷전으로 해야 한다”는 가슴답답한 소리를 했다. 비슷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위의 두 오페라 공연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전쟁 후의 ‘왕자 호동’처럼 문화가 더 첨예해진다는 사실을 그분은 분명 모르고 있었다. 공연에 종사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피델리오’가 ‘빵’이었던 것처럼 물질적 공황이 몰고 올 정신적 공황을 이겨낼 영양과 힘이 되는 ‘정신의 밥’을 찾아 제공하는 일이다. 티켓 값을 일부 낮추는 것도 하나의 도움이 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한가지 참고가 될 일화가 있다. 내가 즐겨 찾는 대중음식점 두 곳이 있다. 두곳 모두 맛있고 값이 저렴해 손님들이 항상 많았다. 재료 값이 한창 오를 때 한 곳은 맛을 유지하기 위해 부득이 값을 올린다고 크게 써붙이고 값을 올렸다. 다른 한 곳은 값을 그대로 두었는데 어느날 맛이 돌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전자의 집은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손님이 바글거린다. 내가 발길을 끊은 후자의 집은 이전과 달리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 성 진 성남아트센터 예술감독

어처구니를 깎으며

십년 전, 절친한 친구의 어머니께서 살림도구 몇 가지를 내게 주셨다. 당신 자녀들이 있음에도 굳이 나에게 주신다는 말씀이었다. 나가야(長屋)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신흥동으로 시집와 50여년을 한 곳에서 살아오신 어머니는 뒤뜰 한 구석에 쌓아둔 살림도구 가운데, 시집올 때 가져왔다는 맷돌과 방자 세숫대야 그리고 다듬잇돌을 가리키며, 당신이 50여년을 오롯이 써 왔던 것이라면서 대뜸 가져가라 하시는 거였다. “네 놈이 이런데 관심이 많지? 네 놈이라면 내 새끼들보다 더 잘 보관해 줄 것 같아서”라는 말씀을 남기시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영면하시고 말았다. 만성적인 불경기의 암울함이 일상에 젖어 있다보니 불현듯 지난 시절 좋은 기억들이 모닥불처럼 살아나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추억으로 다반사 떠오르는 요즘의 단상이다. 친구 어머니의 말마따나 서가의 한 귀퉁이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맷돌과 세숫대야를 볼 때마다 남긴 말씀을 적이 잊을 수 없는 건, 모종의 책임감과 더불어 당대의 지난했던 삶들을 오래오래 기억해주길 바라는 이 시대 어머니들의 당부라는 생각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인천은 근대 개항장을 비롯해 구도심이 한 세기에 사반세기를 더한 세월의 더께가 면면이 묻어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전국 어느 도시를 훑어보아도 인천의 구도심만큼 근대사의 흔적들이 녹록하게 배인 공간은 쉽게 찾을 수 없다. 물론 군산, 목포, 강경, 마산, 부산 등 개항장의 일부가 근대사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인천만큼 역사, 문화적 자산을 풍부히 간직한 곳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 근대건축, 철도, 조계지, 교육, 종교, 간척, 스포츠, 자동차, 화폐, 우정국, 출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삶의 총체성이 집약적으로 형성된 공간이 바로 인천이기 때문이다. 박제됐거나 전리품처럼 몰아넣은 여느 박물관이 아니라 그야말로 평면에 깔린,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란 이야기이다. 그랬던 구도심에 획기적인 변화의 조짐이 급물살 타듯 두드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예촌’ 조성사업이다. 구한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지계확장을 꾀하며 인천 앞바다를 매립했고 그 터전위에 창고들을 세웠는데, 낡고 부식된 창고들을 새롭게 꾸며 ‘예촌’ 즉 미술 문화 공간으로 바꾼다는 계획이었다. ‘예촌’에 대한 시민적 열망이라고 선듯 말하기엔 머쓱했지만 일부 식자층이 기대했던 근대 건축물 활용에 합리적인 수순을 밟는 노력들이 심심찮게 기대되었다. 그러나 운영주체에 대한 논란과 ‘예촌’이란 명칭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사용자와 전체운영의 틀 거리는 오리무중처럼 한 치 앞이 선명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10월31일 자로 준공되었고 운영주체가 인천문화재단으로 결정됐다는 소식, 아울러 ‘예촌’이라 가칭했던 것도 ‘인천 아트 플랫폼’이란 낯선 이름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앞서 시민적 열망이란 말머리를 내세우기 머쓱하다는 표현에 맞게 느닷없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인천 시민 공모자의 대다수가 ‘인천 아트 플랫폼’을 선호했다는 내용이나 ‘중구 미술 문화 공간 활성화 방안’ 연구결과 인천문화재단이 운영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42%가 나왔으므로 운영주체가 결정됐다는 발표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아무래도 시민에 대한 정의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기득권자들에 의한 편향적 결정들이 고스톱 판에서 짜고 치는 듯한 냄새를 떨쳐버릴 수 없음이 더 깊어서인지 이제부터 시민에 대해서는 ‘좀 더 낮아질 수 없는 자’들이라고 정의 내려야겠다. 여하튼 내년 9월에는 창작, 전시, 교육, 커뮤니티 등을 총괄해 레지던스 개념의 예술 공간이 분명히 탄생할 것이라 한다. 멍석도 깔리고 맷돌도 준비됐다고 한다. 근데 어처구니가 없다. 누가 손잡이를 깎고 녹두를 타고 빈대떡을 구울 것인지 깊은 생각에 잠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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