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권력 - 눈물도, 분노도 아니다

이탈리아 피렌체는 르네상스(문예부흥)의 불을 밝힌 역사적인 고도(古都)다. 그 피렌체의 시청 앞 광장에는 매우 뜻깊은 동판이 하나 새겨져 있다. 한때 피렌체를 통치했던 사보나롤라가 정권을 빼앗기고 화형 당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동판이다. ‘군주론’으로 너무나 유명한 마키아벨리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그의 운명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건 1494년 11월 프랑스의 침공이었다. 샤를 8세 국왕이 직접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 점거당한 피렌체는 프랑스의 수탈에 신음했다. 그러나 어느 기존 정치권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산마르코 수도원장으로 있던 사보나롤라 수사는 샤를 8세 프랑스 국왕을 면담했는데 그 감동적인 언변에 설득된 왕은 기꺼이 군대를 철수시키고 피렌체에 대한 수탈도 중지시켰다. 이렇게 되자 하루아침에 군중의 영웅이 된 사보나롤라는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갔다. 그는 수사였지만 ‘개혁’을 권력의 정당성으로 내세우고 교황청에 대해서까지 강한 비판을 가했다. 또 메디치 가문이 장악했던 당시 피렌체 기득권의 부패를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시민들에게도 ‘눈물’로 상징되는 참회를 통한 기독교적 공동선, 그에 기초한 도덕적 개혁을 추구했다. 1494년부터 4년간 계속된 그의 집권 초기에 이와 같은 새로운 ‘공화 정부’, ‘시민 정부’는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언변으로도 안되는 것이 있었다. 그 무렵의 심각한 경제난과 전염병. 수사복을 입고 도덕성 회복을 부르짖었지만 아마추어 정치인, 그 포퓰리즘으로써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항소권마저 주지 않고 5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내려 시민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시민 정부’를 주장한 그가 오히려 시민의 권리를 빼앗는 이율배반-훗날 마키아벨리는 여기에서 누구나 권력을 잡으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는데도 그를 보호해 줄 친위세력은 없었다. 친위세력이라고 믿었던 군중은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또한 쉽게 분노하며 변덕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더욱 사보나롤라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교황청에 맞서 사보나롤라를 옹호하던 피렌체 시민들이 마침내 사보나롤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 이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이 대중이라는 사실도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마침내 사보나롤라는 한 성직자에서 영웅이 되고, 대중의 열렬한 지지 속에 권력까지 잡았다가 1498년 5월 23일, 그를 지지했던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에게 매우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는 ‘말뿐인 예언자는 실패하며, 무장한 예언자는 승리한다’고 생각했다. 즉 성공적인 권력 유지에는 자기의 무장된 친위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울보에게도, 분노한 자에게도 맡겨지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는 권력 유지에는 실패했으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롯 르네상스에 불을 밝히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어쨌든 역사는 늘 반복된다. 그러면서 진화한다. 눈물과 분노가 교차된 광장의 열기, 그 치열했던 탄핵정국이 막을 내리면서 이제 대선정국으로 급속히 바뀌어가고 있다. 과연 누가 권력의 정점에 설 것인가? 여기에서 대선 주자들은 시민의 영웅에서 하루아침에 화형장 연기로 사라진 사보나롤라를 바라보며, 마키아벨리가 한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물론 ‘권력’ 역시 “울보에게도 분노한 자에게도 맡겨지지 않는다”는 것.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대포폰, 대포가 되다

공직에 근무하고 있을 때다. 하루는 출입기자들과의 비공식 대화자리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기관 유치에 대한 언급을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지방뉴스에 필자가 언급한 기관유치 내용이 나의 육성과 함께 보도되었다.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기자들과 대화를 할 때는 누구도 녹음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 목소리가 그대로 나갔는가. 그 뒤에 알고 보니 요즘의 스마트폰은 그런 기능이 다 갖춰져 있어 손쉽게 녹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누구와 대화를 하든 ‘혹시…’하는 생각에서 말조심을 하게 됐다. 스마트폰 아니라 전화를 할 때도 이것이 녹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신경 쓰는 버릇이 생기게 된 것. 참으로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만큼 과학 문명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사생활이 노출되고 감시당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으니 행복일까, 불행일까. 내가 아는 한 기업인은 최근 운전기사를 내보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차 안에 있는 블랙박스 때문이다. 그것은 운행상황만이 아니라 차내에서 하는 전화까지도 다 녹음이 되는데 운전기사가 이것만 들고 나가면 회사가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완전 불신사회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남의 비밀 대화를 엿듣는가, 어떻게 하면 그 도청을 막을 수 있는가, 이렇듯 ‘창’과 ‘방패’가 부딪치는 오늘의 정보 전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제는 사무실이나 의복 등에 도청장치를 하지 않고도 표적의 인물에 적외선 레이저를 발사하여 음파의 변화를 통해 도청을 원격 조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며 500m 밖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977년 미국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소위 ‘박동선 로비사건’ 때 미국 CIA가 우리 청와대를 도청했다는 것이 알려져 외교적 마찰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중요한 대화는 정원을 거닐면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도청기술로는 500m 밖에서도 원격 음성도청이 가능한 만큼 정원 대화도 별 도움이 안 됐을 것이다. 물론 전자금융 거래법에는 불법 도청에 대하여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엄격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분야에서 지능적인 도청이 행해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도청에 대항하여 소위 ‘대포폰’이라는 차명 휴대폰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신무기로 등장한 대포폰은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뿐 아니라 그 보안성 때문에 성매매, 마약, 도박, 보이스피싱 등 사회범죄에까지 파고들고 있으며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도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 탄핵심판 제7차 변론에서 증인으로 나온 전 청와대 비서관이 2013년부터 2014년 12월까지 하루 2~3 차례 자신이 최순실과 대포폰으로 통화한 사실을 인정 한 것. 물론 대포폰의 사용 목적은 도청의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대포폰이 만능일까? 요즘 새롭게 ‘최순실 게이트’에서의 고영태 전화 녹취록이 등장하면서 또 하나의 뇌관이 될 수 있음을 보면 이 첨단 과학의 세대에 숨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심지어 트럼프 미 대통령까지도 껄렁한 음담패설 녹음 파일로 곤욕을 치렀음을 생각하면 누구든 자신이 뱉은 말은 날개를 달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시 옛 속담처럼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무서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판소리 ‘다산 정약용’

개혁의 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 임금이 1800년 6월28일 갑자기 세상을 떠남으로써 다산 정약용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정조 임금의 개혁을 설계한 동반자가 정약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임금의 죽음이 단순한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정약용은 혼란에 빠진다. ‘정조 독살설’은 그 당시 민심을 흉흉하게 할 만큼 심각하게 번져 나갔다. 정조 임금이 앓고 있던 종기(등창)에 대한 처방을 내렸던 인물이 정조와 대립관계에 있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 심의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수은 중독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연훈방’이라는 처방을 내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임종 자리에 출입이 제한된 정순왕후 단 한 사람뿐이고 사관이나 승지마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 의혹을 더욱 키웠다. 정순왕후는 잘 알려진 대로 정조와 정치적으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결국 정조의 죽음은 독살 음모설 속에 세도정치만 강화시키는 ‘역사의 반동’을 가져왔다. 정조의 개혁정치는 물 건너가고, 그를 뒷받침하던 이가환, 정약용 등에게는 정치적 박해가 시작됐으며 천주교 역시 배척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렇듯 ‘역사의 반동’을 보면서 정약용은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이 또한 깊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서 따온 ‘여’는 겨울 냇물을 건넌다는 뜻이고, ‘유’는 주변이 무서워 두리번거리며 살핀다는 뜻. 겨울 냇물은 얼음이 얼어 자칫하면 미끄러져 넘어지게 되거나 얼음이 두껍지 않으면 차가운 물에 빠지기 십상인 것이다. 주위는 온통 당쟁에 눈이 멀어 모함과 모략이 횡행하고 조금만 잘못 보이면 천주교에 연관 지어 끌려가는 세상-겨울 얼어붙은 냇물을 조심스럽게 건너는 것은 물론 주위도 살펴야 하는 세상, 그래서 정약용의 ‘여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속에는 그의 굽힘 없는 가르침이 있다. 그의 아들들에게도 내린 가르침이지만 “문벌과 당파를 척결하라”는 것.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다산’ 보다 ‘여유당’에 더 인간적 공감을 느낀다. 그 정약용의 유적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여유당의 실학박물관에서 지난주 ‘판소리 다산 정약용’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장소인 여유당 바로 뒤에는 정약용의 묘소가 있고 또 봄기운에 푸른빛을 더하고 있는 남한강 물줄기와 마주하고 있어 다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 특히 목민심서가 빛을 본 지 200주년이 되는 해여서 판소리 이상의 깊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정약용 인물 자체가 우리나라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 인물인데다, 판소리 또한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어서 이날의 의미를 증폭시켰다 하겠다. 이 작품은 ‘창작 판소리 열두바탕 추진위원회’가 지난해,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어서 지방의 역량으로도 이와 같은 수준 높고 의미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재현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이날의 송재영 명창(전주대사습 대통령상 수상), 이재영 명창(보성 소리축제 대통령상) 등 쟁쟁한 국악인들의 출연은 공연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가슴에 젖어드는 것은 ‘목민심서’의 정신, 그것에 대한 절절한 아쉬움이다. 이렇게 느끼는 아쉬움은 정약용이 ‘다산’에 ‘여유당’이라는 호를 더했던 상황과 오늘의 정치 현실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18년이라는 긴 세월,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사무쳤던 추악한 당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이브, 뱀의 ‘왜곡 정보’에 추방되다

인류 최초의 남자 아담과 최초의 여자 이브(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알몸으로 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에덴 동산의 평화를 깨뜨린 것이 뱀이다. 뱀은 여자에게 나타나 유혹을 한다.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동산에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라고 말을 바꾸어 여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거짓 정보, 왜곡된 정보로 유혹을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선과 악을 인식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뜻이 ‘하느님처럼’될 것을 두려워 한 하느님의 숨은 뜻이라고 또 한 번 왜곡된 정보를 제공한다. 결국 여자는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원죄를 지었으며 결국 이들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고 만다. 알몸으로 돌아다니던 자신들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면서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린 채…. 어쩌면 인류의 조상은 왜곡된 정보, 허위 정보에 의해 고통을 겪어야 했던 최초의 피해자가 아닐까? 요즘 탄핵 정국과 최순실 게이트가 나라를 뒤덮으면서 허위 정보,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그 피해가 보통 심각한 단계가 아니다. 지난 9일 인천공항에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 부부가 나타났다. 차녀가 살고 있는 케냐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한 때 대선후보 1위를 달릴 만큼 주목을 받았던 반 전총장은 미국 하버드대학의 행정대학원 종신교수로 임명되어 뉴욕에 새 주택을 마련 중이라는 보도도 있다. 그는 짧은 기간 많은 ‘가짜 뉴스’와 ‘왜곡된 정보’에 시달렸다. 완전히 짜깁기한 조상 산소 앞에서의 ‘퇴주잔’ 파문에, 후임 UN 사무총장인 안토니오 구테흐스가 ‘반총장의 대선출마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했다’는 등의 가짜뉴스가 끊임없이 이어진 것이다. 결국 그는 대선 후보를 포기하면서 허위 보도에 ‘인격살해’를 당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링 위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런 가짜 뉴스에 ‘인격살해’를 당한 사람이 어디 반기문뿐이겠는가? 국회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은 서울시장 출마 때 뜬금없이 강남 피부과에서 1억원짜리 피부관리를 받았다는 보도로 선거에 큰 타격을 받았고 결국 ‘인격살해’ 후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물론 그 후 수사를 통해 ‘가짜 뉴스’의 실체가 밝혀져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많은 시간과 정신력을 소모하면서 그것도 선거가 끝난 다음 밝혀지는 ‘억울함’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가? 미국도 사정은 마찬가지. 지난해 대선에서도 이런 가짜 뉴스가 큰 골칫거리로 등장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가짜 뉴스가 그 대표적인 것. 이 가짜 뉴스로 트럼프가 가장 덕을 봤지만 그 실체가 밝혀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문제는 또 있다. 이들 가짜 뉴스의 구성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진짜처럼 포장되고 구성되어 전문가들도 쉽게 가려낼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위 일부 인터넷 언론의 사이비 콘텐츠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등에 업고 그 파급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들이 적발된다 해도 법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데는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도 큰 문제다. ‘IT 강국’답게 가짜뉴스, 왜곡 정보도 바이러스처럼 강하게 번져 가는데, 에덴 동산의 평화를 깨뜨린 간교한 뱀의 ‘왜곡 정보’가 오늘의 우리에게는 또 어떤 불행을 가져올까 걱정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고려 불상, 600년만에 귀국했지만…

고려말 국력이 크게 쇠퇴한 데는 왜구의 잦은 약탈이 큰 몫을 했다. 특히 1376년, 서해안을 따라 침입한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이때는 최영 장군이 지금의 충남 홍산에서 격퇴시킬 수 있었다. 그래도 왜구의 만행은 날로 심해져 1380년(우왕 6년)에는 아지발도라는 두목을 앞세운 채 삼남지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규군처럼 무장하여 남원을 점령한 후 경기 지방으로 진격했는데 황산에서 이를 무찌른 장군이 바로 이성계다. 이성계는 두목 아지발도를 화살 한 발로 이마를 명중시켜 적을 혼란에 빠뜨렸고 단숨에 이들 왜구를 전멸시켰다. 그동안 변방의 장수였던 이성계가 이를 계기로 일약 영웅이 될 수 있었으며 극성스러운 왜구를 피해 고려 수도를 개경에서 철원으로 옮기려던 계획도 백지화시켰다. 어쨌든 고려말은 이렇게 왜구가 삼남지방과 충청도 서부지방을 끊임없이 침탈하여 백성을 불안하게 했다. 1352년부터 1381년까지 충남 서산 일대에 5회에 걸쳐 왜구의 침략이 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때 서산의 부석사에 있는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이 도둑 맞았는데, 이것이 지금껏 대마도의 ‘간논지(觀音寺)’라는 절에 안치되어 왔다. 그런데 이것을 노리고 있던 국내 문화재 전문 절도단이 2012년 10월 대마도에 잠입, 이를 훔쳐 국내로 들여오는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이듬해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서산 부석사는 물론 지역민들이 들고 일어나 불상을 원래 있던 부석사로 돌려달라는 운동을 벌였고 법원에도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전지방법원 민사 12부는 지난달 26일 ‘정부는 부석사에 불상을 인도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비로소 600여 년 만에 왜구에 강탈당했던 불상이 서해 푸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부석사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법원 판결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NHK 등 일본 언론에서 이를 다루기 시작했고,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불상의 반환을 요구하는 한편 유감을 표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 문화재 전문가들도 아무리 부석사 불상이라고 하더라도 ‘약탈됐을 가능성만 있지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는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거기에다 검찰은 법원 판결에 항소를 했고, 법원도 부석사의 안전시설을 이유로 당분간 문화재 보존 전문기관에 보관토록 했다. 이렇게 되니 불상이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리던 부석사 측과 서산 지역민들은 몹시 허탈해 하고 있다. 이웃 일본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까지도 부딪히는 아픔이 너무도 많다. 그 대부분의 아픔은 일방적으로 우리가 피해자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훔쳐간 우리의 불상까지도 법이라는 이름으로 제지를 당해야 하는 처지가 안타깝기만 하다. 지난해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이 25억원의 사재를 털어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를 일본 골동품 상에서 구입, 국립 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일이 있는데 언론에 보도된 그의 말이 인상 깊었다. “수월관음도는 우리가 힘이 없어서 또 우리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해서 일본에 반출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어디 수월관음도뿐이랴. 힘이 없어 일본 땅으로 건너간 무수한 우리 문화재들이 지금 이 순간도 현해탄 건너 고국을 그리워하리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長官, 議員 어디에 있습니까

1959년 1월, 알제리 반란으로 야기된 국내 정치의 불안한 상태에서 드골장군은 홀연히 파리에 나타나 헌법을 개정하고 프랑스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장관, 수상의 이름을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바뀌는 상황이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가 했는데, 1968년 5월에는 최악의 정정불안에 휩싸인다.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노동계가 가세한 이 사태는 ‘혁명’ 직전까지 몰고 갔다. 명문 소르본 대학이 포위된 채 최루탄과 투석전이 치열했고, 파리의 대학가 라탱지구에서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이 계속됐다. 1천만명의 노동자가 합류하여 파업까지 벌였으니 그 심각성을 짐작할 만 하다. 그런데 끝장을 봐야 풀릴 것 같은 사태는 2주 만에 조용히 막을 내렸다. 군대가 동원된 것도 아닌데 노동계는 학생들의 주장에 회의를 갖게 됐고, 드골 대통령은 조기 총선을 내걸었으며 급기야 학생들의 시위도 동력을 잃고 강의실로 돌아왔다. 노동자, 학생 모두가 프랑스 사람 특유의 이성으로 돌아간 것이며 2주간의 ‘프랑스 마비’도 풀려나고 말았다. 이듬해 드골은 미련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퐁피두가 대통령을 이어받았다. ‘끝장을 봐야 풀릴 것’ 같은 사태가 2주를 넘기지 않고 조용히 끝났음도 그렇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긴장 속에서도 정부부처나 심지어 지방에서도 전혀 동요없이 일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와 수출입을 하던 한 기업인은 뉴스로 접하는 프랑스 사태에 매우 불안해했으나 관계부처를 방문하면 장관이 바뀌건 말건 상관없이 모든 업무가 정상적으로 처리되는데 크게 놀랐다고 했다. 자연히 그 나라에 대한 신뢰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뿐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도 정권의 바람을 타지 않고 철저하게 운영되는 엘리트 관료제도에 의해 동요없이 국정이 수행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일본을 ‘일본 주식회사’라고할까.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지금 어떤가? 요즘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건강보험료 산정기준 개혁을 다루는 보건복지부와 AI(고병원성 조류독감) 때문에 미국 달걀 수입을 다루는 농수산식품부 밖에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정부의 일 중 이것 말고는 특별히 국민의 시선을 끄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탄핵정국에 최순실게이트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에게 중국은 무역압력으로 갑질을 하고, 일본은 대사 소환, 독도영유권 등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우리 관계부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트럼프 미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에 어쩔 수 없이 우리 현대자동차도 대미투자 카드를 꺼내들고 있는 등 대미 수출전선이 긴박한 상황인데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더욱이 경제대국들의 기업들이 연초부터 세계시장을 숨 가쁘게 뛰고 있는데 우리의 대기업 총수들은 ‘출국금지’ 등으로 발이 묶여있다. 또 내년에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치러야 할 주무 부서인 문화관광체육부는 사상 초유의 장관 구속 등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대국민 사과성명까지 나왔다. 민생을 이구동성으로 부르짖던 국회도 지금 ‘최순실’밖에 보이지 않는다. 뉴스 역시 ‘특검’과 ‘트럼프’로 가득 찰뿐, 약동하는 대한민국의 심장이 느껴지질 않는다. 참으로 답답하다. 그나마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국군 장병들이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고지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토끼만 보이고 호랑이는 없다

일본 사람들은 유별나게 호랑이 가죽을 좋아한다. 웬만큼 지체있는 집안에는 이것이 그 가문의 위엄을 나타내기도 한다. 특히 한국과 만주·러시아 국경에 사는 ‘백두산 호랑이’를 최고로 쳤다. 1931년 일제하에서 제6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가끼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가 온양 ‘신정관(神井館)’이라고 하는 호텔급 여관에서 지방순찰을 마치고 투숙을 할 때였다. 우가끼 총독이 아침에 일어나 정원을 산책하는데 갑자기 한 일본인이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그리고는 보자기를 총독앞에 내놓는 것이 아닌가. 총독이 당황하여 이유를 물으니 보자기 안의 호랑이 가죽을 꺼내며 “함경도에서 구한 것이니 받아 주십시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성환에 광산을 개발하려는데 총독부에서 자금 지원을 해달라고 청탁을 했다. 우가끼 총독은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져, 쾌히 그의 ‘호랑이 가죽’ 뇌물에 굴복하고 말았다. 일제 때 어느 충청도 갑부 역시 백두산 호랑이 가죽을 뇌물로 활용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을 판사로 만들기 위해 일본 총독 야마나시에게 호랑이 가죽을 뇌물성 선물로 주고 뜻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호랑이-그렇게 토템 신앙에서처럼 신성시되고 위엄을 갖춘 백두산 호랑이가 지금은 450마리 정도 러시아, 중국 등 연해주를 중심으로 서식하고 있는데 계속 개체수가 줄어들면서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이런 백두산 호랑이를 중국 정부가 우리나라에 기증한 것은 2011년과 2015년. 한 마리는 경기도 포천 국립수목원에 ‘두만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또 한 마리는 ‘금강이’라는 이름으로 대전의 오월드 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었다. 그러다 이들은 지난주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으로 옮겨졌다. 이곳에 세워진 국내 최대 호랑이 전시장에 방사를 하기 위해서다. 언론은 이를 두고 백두산 호랑이가 100년만에 백두대간에 돌아온 것이라고 크게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한다’는 속담처럼 토끼만 설쳐대던 땅에 주인이 나타나기라도 한 듯. 그렇다. 호랑이는 있어야 한다. 포식동물이라는 맹수로서가 아니라 그와같은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어른, 권위주의가 아니라 말씀과 행실로 권위를 갖고 있는 원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익숙하게 해오던 것, 해야할 말을 양비론으로 피해가면서 ‘중도’를 표방하는 것, 숲 아닌 나무만 보는 것, 그런 어른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국가 미래에 대하여 호랑이 눈에서 뿜어내는 불빛 같은 역할을 해줄 원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백두산 호랑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토끼만 보이는 것을 어쩌랴. 도대체 이 땅에 원로가 있기는 한가. 몇몇 교회에서는 ‘원로 목사’와 ‘담임 목사’와의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 은퇴하는 원로목사가 데려온 후임목사로부터 등을 돌려 빚어지는 불화가 크다. 정치는 원로 정치인들도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 서로들 원로 대접을 않는다. 예술계, 체육계…. 모두가 편가르기로 원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조병옥, 김준엽,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장준하…. 한 시대에 빛이 되어주었던 그 원로들이 그립다. 그래서 백두산 호랑이, 토끼들만 뛰노는 이 땅에 호랑이의 포효를 듣고 싶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설날에 생각하는 ‘제2의 고향’

‘아파트’, ‘제2의 고향’ 등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가수 윤수일씨의 고향은 울산시 장승포. 벌써 그의 나이도 60대 중반을 넘어 원로 가수 축에 들게 되었다. 특히 윤수일씨의 아버지는 주한 미공군 조종사였으나 그냥 귀국해버려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그의 히트곡 ‘제2의 고향’은 남다른 느낌을 준다. ‘사방을 몇바퀴 돌아봐도/보이는 건 싸늘한 콘크리트 빌딩숲/정든 곳 찾아봐도 하나도 없지만/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그는 고향 장승포를 그리워하면서도 제2의 고향이 되어버린 서울을 사랑하며 노래했다. 윤수일씨처럼 고향을 떠나 서울이나 인천, 수원 등 대도시로 나와 살면서 제2의 고향에 마음을 잡고 사는 사람이 참 많다. 우리의 급격한 산업화는 제2의 고향을 양산한 것이다. 요즘은 반대로 서울 등 대도시를 떠나 지방 농촌에 제2의 고향을 만드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특히 인구가 자꾸만 감소하는 지방의 자치단체에서는 인구 유입책으로 농촌의 빈집을 사서 귀농하는 도시인들에게 건물 수리비까지 지원하는 곳도 많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명지대학 유홍준 석좌교수의 고향은 서울이다. 그는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생을 서울에서 살았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훗날 문화재청장도 지냈다. 서울내기 유교수가 오래전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 ‘휴휴당(休休堂)’이라는 집을 지었다. 부여를 제2의 고향으로 삼은 것이다. 부엌 하나에 8평짜리 플라스틱 기와지붕의 ‘휴휴당’은 그 이름에서 느끼듯 ‘다 내려놓고, 쉬고, 또 쉬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돌담길이 제주도를 떠올리게 하는데 유교수의 집도 출입구를 제주도 민가처럼 나무를 걸쳐놓아 더욱 그런 느낌을 자아낸다. 또 주변의 개복숭아 나무, 매실나무, 특히 그가 좋아하는 배롱나무(목백일홍) 등이 어릴 적 외갓집을 찾을 때처럼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그가 이렇게 부여에 ‘휴휴당’을 마련한 데는 역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배경이 됐다. 누적 판매부수 370만권을 기록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집필하면서 전국을 누빌 때 이곳에 끌려 마음을 정한 것. 유홍준교수가 지난달 ‘백제의 향기와 나의 애장품’이라는 타이틀로 자신이 엄선한 100점의 애장품을 공개하는 전시회를 부여문화원에서 열었다. 그 작품들은 유교수가 전국을 답사할 때 수집해 책에 실린 작품과 근대미술의 서화들. 일흔을 바라보는 원로 학자의 모습이 신선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설날이 코앞에 다가오면서 사느라 잊혔던 고향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고향은 어디인가? 오히려 제2의 고향이 ‘고향’이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특히 귀성객 못지않게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이나 대도시로 올라오는 역귀경 숫자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유홍준교수나 가수 윤수일씨처럼 제2의 고향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정치의 타락과 악취에 몸살난 도시인들에게는 그것이 자기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탈출의 길이기도 하고, 거대 소비사회에서 정신없이 달려온 아버지들의 고뇌를 푸는 방법이 된 것도 같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변호사 개업을 거부한 ‘대쪽 검사’

송종의 법무장교는 1967년 5월 베트남 전선에서의 복무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올랐다. 몇 시간 후 마침내 그리던 조국 땅이 하늘 아래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록이 아름다워야 할 5월의 산천이 황무지가 아닌가. 그때만 해도 우리 산에는 나무가 없어 그렇게 황량할 정도였다. 그는 결심했다. “내 조국을 푸르게 만들겠다”고. 그래서 평검사로 있을 때나 검찰 고위직에 있을 때도 틈만 나면 충남 논산 양촌에 마련해 둔 벌거숭이 산에 나무를 심었다. 그렇다고 검사로서의 직분에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쪽 검사’로 이름을 날렸고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차장, 장관급의 법제처장 등을 역임하면서 선후배 검사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1998년 법제처장을 끝으로 퇴임할 때 여러 로펌에서 서로 영입하려고 했으나 그는 단호히 변호사 개업을 거절했다. 화려한 간판과 인맥으로 ‘전관예우’의 황금어장과 같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그는 ‘돈벌이에 후배를 이용하는 선배가 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검사는 명예를 먹고 살지 돈 버는 직업은 아니야. 곁불 쬐는 검사는 그만둬야지.” 지금 송종의 씨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벌거숭이산을 가꾸어 만든 시골 밤나무 농장에서 건강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농장 수익금을 모아 ‘천고법치문화재단’을 설립, 국가의 법질서 확립에 기여한 사람을 발굴해 시상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요즘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김영란법’의 주인공 김영란 전 대법관도 비슷한 경우다. 대법관을 퇴임하면 그야말로 전관예우 최고의 조건이다. 그러나 그 역시 변호사 개업을 포기했다. 특히 김영란 전 대법관은 서울법대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여성 대법관에다 ‘소수자의 대법관’으로 불릴 만큼 사법 정의에 투철하여 세인의 관심이 높았다. 변호사 개업만 하면 높은 수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예 김재형, 박상옥 대법관처럼 국회 청문회 단계에서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않겠다고 다짐한 법조인도 있다. 지난주,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사건에 100억원의 부당 수임료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부장판사 출신의 최유정 변호사가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큰 뉴스가 되었다. 잘 나가던 최변호사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돈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인생을 통째로 던져버린 것이다. 공안 검사로 이름을 떨치던 홍만표 전 검사장 역시 돈의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손으로 교도소에 집어넣던 사람들과 함께 수의(囚衣)를 입고 영어의 몸이 되는 기막힌 인생 역전을 겪어야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법조비리에 공분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 가장 큰 적폐로 흔히들 ‘전관예우’, 검찰의 수사권ㆍ기소권 독점, 그리고 너무 큰 법원의 재량권 등을 지적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문제가 아니다. 모두들 그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실제 개혁의 칼을 빼들었을 때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기득권이라는 방어벽을 허물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제도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의식의 개혁이다. 대법관을 지내고도 변호사 개업을 거부하고 ‘곁불 쬐는 검사ㆍ판사’는 옷을 벗어야 하며 ‘후배를 돈벌이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식! 그런 변화의 바람이 법조계에서 일어나길 기대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그는 왜 냉동화물차에서 죽었는가

경기도지사를 지낸 어느 정치인이 오래전 한 사건에 연루되어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그가 크게 실망하고 있을 때, 하루는 제비가 구치소 창틀에 열심히 집을 짓는 것이 아닌가. 그는 매일 제비들이 집을 짓는 모습에서 위안과 희망을 찾았고 얼마 후 자유의 몸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투옥생활에서 책을 읽으며 화초를 가꾸는 것으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희망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는 더 없는 위로요, 에너지다. 그래서 가장 불행한 것은 희망을 잃는 것이라고 한다. 10여 년 전 미국 한 시골역에 정차중이던 냉동 화물차에서 시즈맨이라고 하는 역무원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동료들이 작업을 마치고 차량 안에 시즈맨이 잔업을 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문을 잠그고 퇴근해버려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실제 경찰 조사에서 냉동열차의 온도는 전신이 끊겨 춥지도 않았음이 밝혀졌고 물론 죽음에 이를 상황도 아니었다는 것.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이것이 당시 미국 언론과 사회에 큰 충격이었는데 그 대답은 ‘희망’을 잃은 ‘공포’로 결론지었다. ‘동료들은 다 사라졌고 이제 나는 혼자다. 이 화물차는 냉동칸이기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얼어 죽고 말 것이다.’ 이렇게 그는 절망에 빠졌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국 생명의 에너지를 앗아가고 말았다. 물론 인간의 의지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의지는 무서운 가능성과 폭발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지난 여름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펜싱의 박상영 선수다. 그는 패전 직전에 ‘나는 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다짐하며 결국 역전에 성공,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 후 ‘할 수 있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고 살아가기 힘들어하는 많은 국민들에게 모처럼 IMF 때의 박세리처럼 희망을 주었는데 ‘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혼란 속에 빠지면서 이 구호도 가라앉고 말았다. 이렇듯 정치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할 때 나라의 분위기는 어두워진다. 2017년 새해맞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어느 곳이나 인산인해를 이루었음은 그렇게 ‘희망의 빛’을 바라는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 것이다. 나도 세종시 인근 산으로 해맞이를 갖는데 아쉽게도 구름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우리는 소원을 빌었고 ‘대한민국 만세!’로 끝마무리를 했다. 얼마나 착한 국민인가. 그 대열 속에는 불경기로 폐업의 기로에 있는 자영업자도 있고, 이력서를 수십통 만들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취업준비생, 늙었어도 가족들 생계 때문에 핸들을 놓지 못하는 택시기사 등등 절박한 삶의 현장에서 목마르게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극심한 정치 불신과 냉소, 심각한 경제난, 핵폭탄을 휘두르며 갱 두목처럼 위협하는 북한 김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한 미 트럼프 정부, 학생 수가 줄어들어 많은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하는 ‘인구 절벽’, 3천만 마리가 넘는 닭·오리 매몰 처분에도 멈출 줄 모르는 AI(고병원성 조류독감), 계속 험난한 수출시장, 갈수록 열악한 비정규직 차별…. 마치 소크라테스가 전쟁터에서 돌아왔을 때의 그리스 혼란 상황을 말하는 아포니아(Aponia)를 떠올리게 한다. 배가 좌초되어 앞으로도 뒤로도 꼼짝 못하고 움직이질 못하는 것을 뜻하는 아포니아-그것이 우리 대한민국을 엄습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니 우리 정치인들이여. 제발 국회의사당을 싸움터와 비효율의 담론장으로 만들지 말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십시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2017 통합의 지도자를 고대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46664’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백인 지배 하에서 넬슨 만델라가 반란죄로 27년간 복역을 할 때 가슴에 붙이고 다녔던 죄수 번호였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27년 복역 끝에 대통령이 되어 큰 행사, 이를테면 자선기금 모금을 위한 콘서트에도 ‘46664 콘서트’라고 이름 붙였으며 특히 정치적 행사에 이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통합’과 ‘화해’를 강조하는 의미가 되었다. 심지어 만델라는 국기에 조차 중앙에 Y자를 넣었는데 이 역시 백인과 흑인의 통합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혹독한 흑인 탄압에 고통을 겪었고 27년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음에도 통합과 화해를 외쳤고 그래서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물론 그로 인해 흑인 극단주의자들로부터 큰 저항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만델라는 이렇게 그들을 달랬다.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 정책)는 종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아파르트헤이트’, 즉 흑백분리주의는 남아프리카에서 반인륜적 범죄가 일상화될 만큼 혹독했다. 흑인은 케이프타운을 비롯해 도시에 진입할 수 없었고 공중화장실이나 공원 벤치도 이용할 수 없었으며 인구 9%의 백인이 79.2%의 흑인을 노예처럼 다루었다. 오죽했으면 1954년 FIFA가 남아프리카를 제명해버려 월드컵에도 출전을 못하게 했을까. 이처럼 혹독한 흑백분리 정책을 뒤집은 만델라는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국가의 통합’에서 찾으려 했다. 통합-그것을 국가를 유지하는 최선의 가치로 생각한 것이다. 만델라 대통령 말고도 ‘통합’을 정책의 최고 가치로 내세운 사람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다. 흔히 링컨의 위대함은 노예해방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의 역사는 그가 국가의 ‘통합’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오히려 그는 “나로서는 노예들을 해방시키게 되면 아프리카나 리베리아로 돌려보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고 “만일 내가 한 명의 노예를 풀어주지 않고 우리 연방을 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만일 노예를 풀어주어야 건질 수 있다면 또 그렇게 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니까 링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노예해방이 아니라 분열된 미국의 통합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남북전쟁의 끝, 그 마지막 항복을 할 때 북부군의 그랜트 장군으로 하여금 남부군을 온전히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면서 그들의 장비품도 몰수하지 말고 타고온 말까지 함께 돌아가게 했다. 비록 총을 겨누고 싸웠지만 인간적인 자존심을 배려해 준 것이다. 그렇다. ‘통합’은 독선이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와 자존심을 존중해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최순실 게이트’로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돼 있다. 문제는 이 상태를 정치권이 자기 입맛에 맞는 요리로 접시에 담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마치 임진왜란을 앞두고 일본 정찰에 나섰던 황윤길, 김성일이 그들의 소속 당에 따라 처방이 달랐던 것과 같다. 그 피해는 우리 민족의 씻을 수 없는 한이 되지 않았던가. 이제 이 땅에도 진정 ‘통합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갈등, 노사문제 갈등, 빈부 격차로 인한 금수저 흙수저 갈등, 교육 현장에서의 갈등, 세대간 갈등…. 이것들을 녹일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절실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점점 국제적 고아로 밀려날 것이고 세계사는 대한민국을 몽고처럼 한때 반짝이다 사라진 나라로 기억할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정치판에 상처입고 떠난 U교수에게

U교수! 나는 자네가 대학 총장을 지냈지만 ‘총장’보다 ‘U교수’라 부르겠네. 그것이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오랫동안 자네의 꿈이 제자를 가르치는 ‘교수’였기 때문이네. 물론 자네가 대학 총장에 선출됐을 때만 해도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몇 년 전 대통령 선거 때 A후보를 지지 선언하면서 ‘학자의 삶’을 걸어온 자네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네. 그때 자네는 이렇게 말했어. “이러다간 보수가 무너질 것 같아 앉아있을 수 없었다”고. 그래, 거기까지는 좋다고 해. 다행히 A후보가 대통령이 됐고, 그 후 공기업 대표로 임명이 되면서 자네의 ‘지지선언’은 불순하게 되어버렸어. 뿐만아니라 자네의 공기업 노조가 낙하산 인사라며 파업을 하는 바람에 취임식도 못하다가 가까스로 수습되는가 했더니 결국 중도하차하는 모양을 보였으니 친구로서 안타깝지 않은가. 그 무렵 자네 대학과 가까운 곳의 어느 총장은 신당 발기인에 참여하는가 하면, 또 다른 대학 총장은 정계 실력자의 아들을 불러 명예박사 학위를 주는 등 경쟁적으로 꼴불견한 모습을 보였지. 왜 대학 총장들이 이렇게 들떠있었는지 이해를 못하겠더군. ‘권력’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빨대처럼 흡인력을 갖는 것인가. 자네도 그곳 뉴질랜드에서 요즘 뉴스를 통해 들었겠지만 아직도, 아니 갈수록 대한민국은 정치권력의 마력이 대학을 어지럽히고 있네. ‘최순실 게이트’의 한 축을 이루는 안종범교수(전 청와대 정책수석), 김상률교수(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종덕교수(전 문체부 장관), 김종교수(전 문체부 차관) 등등의 면모가 그렇지 않은가. 이들 중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교수도 있고 학교로 돌아간 교수도 있는데 학교로 돌아간 교수들은 학생들이 복직 반대운동을 벌이는 바람에 계속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군. 나는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서 특히 ‘교수님’이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과제물까지 손을 봐줬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분노를 넘어 슬픔을 느꼈네. 어떻게 교수의 품격이 있는데 그럴 수가 있는가. U교수, 자네도 평교수로 있을 때 TV에 얼굴 내밀며 다니는 교수들을 평가절하 했었지. 저렇게 얼굴 알리며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는 학자가 아니라고. 그런데 ‘욕하면서 배운다’고 결국 U교수도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요즘 대선 정국이 무르익어 가면서 벌써 대학가는 이런 정치 바람이 또 다시 불고 있다네. 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의 싱크탱크가 500명의 교수, 전문가로 구성이 되고 다른 대선 주자들도 이런 싱크탱크 구성을 서두르고 있다네. ‘폴리페서’라 불리는 정치 교수들은 여기에 끼지 못하면 무능한 것으로 찍힐까봐 목을 빼고, 학교 경영자들 입장에서는 자기들 학교 교수가 줄 잘 서서 한 자리 하게 되면 학교 발전에 큰 몫을 하게 되니 은근히 바라기도 한다네. 그러니 이런 대학 풍토에서 어떻게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겠는가? U교수. 4ㆍ19 당시 이승만대통령을 하야로 몰고 가고 혁명으로 이끄는데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이 4월 25일 교수들의 시위였음을 잘 알겠지? 백발의 노교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자 사태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지. 그래도 그들 교수들이 장관이나 국회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못 들었네. 이것이 지성과 학자의 행동이 아니겠나? 아수라장이 돼가는 우리 대학을 보며 정치판에 상처를 입고 조국을 떠난 U교수가 생각이 나서 몇자 적었네. 건강하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연탄은 타올라야 한다

“너에게 묻는다/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뜨거운 사람이었느냐/반쯤 깨진 연탄/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연탄 시인’으로 잘 알려진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에 나오는 한 구절. 연탄의 이러한 ‘뜨거운 존재’가 지금쯤은 활활 타오를 시즌이다. 아직도 연탄은 16만 가구 서민층에게서는 더할 수 없는 겨울 난방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년 같으면 전국적으로 평균 150만장의 연탄이 연탄은행에 기부되어야 하는데 지난달 말 현재 96만장 선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에 비해 36%나 감소한 것이다. 어떤 지방의 경우 연탄은행에 후원금이 바닥나 공장에서 외상으로 연탄을 얻어다 급한 가구에 공급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년 20~25만장의 연탄이 기탁됐는데 올해는 고작 20% 수준도 안 되는 3만5천장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탄 한 장에 500원. 커피 한 잔이면 4~5장을 거뜬히 살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세상 인심이 각박해졌을까?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하는 교수님이 있었다. 물론 첫 번째로 꼽는 것은 경제 불황. 기업이나 개인 모두가 경제 불황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두 번째는 소위 ‘김영란법’으로 통하는 청탁금지법의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는 것. 무조건 기부 행위는 규제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속 편하게 외면해 버린다는 분석이다. 세 번째는 ‘최순실 게이트’로 빚어진 분노와 갈등의 나라 분위기. 이 같은 분위기에서는 ‘선행’이라는 행동이 쉽게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특별한 사람들은 말 한 마디로 검은 뭉칫돈이 왔다갔다하는 판에 우리가 몇 푼 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자괴감이 앞서기 때문이다. 소위 ‘집단 허무주의’. 그래서 해마다 벌이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사랑의 온도탑’이 계속 저조한 것도 이런 사회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목표액 3천588억원의 10%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니 ‘이웃 사랑’마저도 얼어붙은 것인가. 닉슨 미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에 몰렸을 때 미국 사회가 가장 우려한 것도 그것이 법률위반 여부를 떠나 대통령의 거짓말이 사회윤리의 ‘집단 불감증’을 가져오는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는데 우리들이 거짓말 좀 하면 어떠냐는 생각이 자라나는 세대에 독소가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순실게이트는 국민 정신건강을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를 퍼뜨린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오죽하면 분노와 배신, 좌절감으로 고통을 겪는 ‘국민화병’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까?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인기방송인 유재석이 4년째 8만장의 연탄을 기부했다는 보도가 신선하다. 또 인천시 남동구 ‘사마리아인의 식당’에서는 요즘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100여 명의 노인과 노숙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남모르게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저곳에서 오아시스 샘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더욱 많아져야 우리 사회는 살맛 나는 세상, 따뜻한 세상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이렇다 저렇다 해도, 그로 인한 좌절감과 분노가 커도, 연탄 한 장 전하는 우리들 사랑의 불꽃은 더욱 타오르게 하자. 그렇게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맞자. 가난한 사람들의 추위를 녹이자.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정당 평균수명 30개월, 우리 정치의 비극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은 영국의 보수당. 1678년 토리당으로 출발, 청교도 혁명으로 취약해진 왕권을 대체하는 세력으로 시작했으니 338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미국 공화당 역시 162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들 오랜 역사를 지닌 정당들은 많은 위기가 있었음에도 당을 해체하거나 시시때때로 당명을 바꾸지 않고 일관되게 국민 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것. 미국 공화당은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을 당하는 등 당이 위기에 처했었지만 그렇다고 당의 간판을 바꾸지 않았고,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막말 파동으로 당이 분열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선거가 끝나자마자 자신을 공격했던 인사들을 요직에 기용하는 등 단합을 과시했다. 민주당 역시 남부를 대변하면서 노예해방 문제로 링컨 대통령에 패배했지만 변신을 거듭하며 발전해왔다. 1929년 경제공황 때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민주당의 기반을 키웠고 이후 트루먼, 케네디, 존슨 같은 거물 대통령을 배출하는 정당이 되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정당의 수가 굉장히 많으나 수명은 매우 짧다. 194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미소 공동위원회가 제2차 회의를 열었을 때 정당 및 사회단체가 무려 463개나 되었다. 미국도 놀랐고 소련도 놀랐다. 그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국회의원 후보를 낸 정당은 214개이며 당선자를 낸 정당만 해도 83개에 이른다. 이들 정당들의 평균 수명은 2001년까지만 해도 5년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2.6년, 그러니까 30개월 갓난아기 수준이다. 인간 수명은 100세를 바라볼 만큼 계속 늘어나는데 정당 수명은 3년도 못되도록 자꾸만 줄어드는 것이다. 해방과 함께 1945년 한국민주당이 탄생하고 1946년에는 독립총성국민회가, 그리고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끌던 자유당, 1963년의 박정희김종필의 민주공화당 등등이 지금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전통 야당으로 1955년 신익희선생, 조병옥박사가 중심이 되어 창당한 민주당 역시 ‘열린우리’, ‘새정치민주연합’, ‘더민주’ 등 숱하게 간판을 바꿔달며 오늘에 이르렀다. 심지어 ‘민주당’의 상징성에 집착한 ‘더민주당’은 원외 정당으로 의원 1석도 없는 김민석 전의원의 ‘민주당’과 통합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의 정당은 흔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간판이 왔다갔다 하는가 하면, 어제의 적도 없고 오늘의 의리도 없는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된다. 영남과 반영남, 이회창과 반이회창…. 그러더니 요즘은 ‘제3지대’에서 나아가 ‘제4지대’가 출현해 회자되고 있는 등 조만간 핵분열이 일어날 전망이다. 새누리당도 친박, 비박이 서로 갈라져 또 하나의 정당이 출현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정치환경이 인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고 그 인물의 대권전략에 따라 간판이 바뀌어 왔음에 비추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거기에다 우리나라 사람은 같이 외국여행만 다녀와도 친목회를 만들고 같은 띠를 가진 사람과도 모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끼리끼리’ 문화가 강하지 않은가. 같은 분모(分母)만 발견하면 무엇이든 만드는 이 습성이 정치에 개입되니 정치 발전은 늘 비관적이다. ‘대권’이라는 분모를 찾아 현재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29개 정당이 또 어떻게 핵분열을 할지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볼 뿐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임금에게 돌 던진 백성

사실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선조 임금이 제대로 눈을 똑바로 뜨고 국정을 이끌었다면 역사에 없는 7년의 긴 참화에서 나라와 백성이 이토록 피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율곡 이이는 일찍부터 변방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함을 주장했고, 대마도를 군사 기지화하는 등 일본에서조차 그와 같은 신호가 포착됐지만 서자 출신이라는 열등감에 선조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일본의 정정을 살피고 온 황윤길이 올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조짐 보고를 애써 묵살하고 ‘아무 조짐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김성일의 안일한 보고를 채택했다. 전쟁 준비 같은 머리 아픈 문제에는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2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이 흘러갔고 마침내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은 터지고 말았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진격해 오는데도 선조 임금은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막아 주리라는 생각을 했으나 이 역시 오판이었다.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용감히 싸웠으나 무참히 패한 신립장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것이다. 이쯤 되면 선조는 반성을 하고 “내가 나라에 죄를 지었다”고 백성들 앞에 사죄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불과 20일만에 적군이 한양에 다다르자 선조는 4월 29일 한양을 버리고 급하게 피란길에 오른다. 백성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하다. 곧이어 경복궁과 창경궁이 불타고 형조에서는 노비 문서를 찾아내 소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상 4월 30일부터는 임금의 통치권은 마비된 상태.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임금의 피란 행렬에 돌을 던지기까지 했으니 그 절망과 배신감을 짐작할 수 있다. 선조 임금은 그 후 임진왜란 기간에 이순신 장군과의 갈등을 계속한다. 이순신을 억울하게 한양으로 압송하였다가 백의종군케한 선조는 원균이 칠천량(지금의 거제도 인근)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대패하는 급박한 사태가 발생하자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한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선조는 반성할 줄을 몰랐다. 더 나아가 전사에 빛나는 명량해전에서 속시원히 적을 괴멸시킨 보고를 받고도 정1품의 벼슬을 내리지 않고 단순히 ‘사형을 면한다’는 면사첩만 내렸다. 심지어 선조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보고하는 신하에게 “그만 하라”고 짜증을 내면서 엉뚱하게도 중국 때문에 이긴 것 아니냐고 찬물을 끼얹는다. 전란이 끝나고 공훈을 정하는데도 이순신 장군은 목숨까지 바쳐 나라를 구했음에도 1급이 아닌 3급으로 정해졌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을 홀대한 것은 백성들의 신망이 뜨겁게 치솟는 이순신이 마음만 먹으면 임금 자리도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만큼 선조는 국가보다 ‘왕권’에만 집착했다는 뜻일 게다. 어쨌든 이렇게 임진왜란은 끝났다. 그렇다고 나라가 망했는가? 아니다. 아니면 나라가 흥했는가? 아니다. 망하지 않고 흥하지도 않은 7년 전쟁. 그러면서 당시 우리 인구 25%에 해당하는 3백만 명의 목숨을 잃었고 참전 군인 7만 명이 전사했으며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라가 망한 것 이상으로 참담한 고통을 당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하는 것은 그만큼 국가 지도자의 정신이 국가 운명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비단 선조만이 아니다. 또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국가가 처한 현실을 똑바로 꿰뚫어보고 사심 없이 몸을 던지는 지도자, 국민 앞에 솔직히 잘못을 반성도 하고 고백할 줄 아는 지도자를 갖는 것은 국가의 행운이며 그런 지도자를 갖지 못하는 것은 국민의 불행임을 이번 최순실 게이트로 빚어진 대한민국의 위기에서 또 한번 깨달아야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세종시 ‘공무원 왕국’의 어두운 그림자

지금 대한민국 정부 기능의 70%를 갖고 있다는 세종시의 하늘에는 어두운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물론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최순실 게이트’ 때문이다. 최순실에게 어떤 힘이 있기에 이토록 국정을 흐려놓고 있는 것일까? 법륜스님은 최근에 행한 ‘즉문즉설’에서 최순실이 대구-경북의 콘크리트 같은 여당(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을 깨뜨려 버린 걸 보면 대단한 힘이 있다고 하여 사람들을 웃겼다고 한다. 웃픈 패러독스다. 세종시 정부청사-2만명 가까운 공무원들이 모여 살고 있어 일명 ‘공무원 왕국’이라고 일컫는 이곳이 어둡다면 국가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어둠의 시발점은 지난 여름 공무원들이 세종시 거주를 위한 아파트분양권을 불법 전매한 사건을 검찰이 수사하면서 시작되었다. 항간에는 지난 총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야당 후보에게 투표한데 대한 보복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55명의 공무원이 기소되었다. 물론 이것은 우리 공직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보여줬다는 데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여론이었다. 왜냐하면 정부에서 베푼 혜택을 웃돈 수천만원을 받고 전매를 한 후 본인은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1급 상당의 고위직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국가차원의 거대한 투기장이 됐다는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검찰청을 드나들며 조사를 받던 공무원들은 너나없이 몸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고 ‘공무원 왕국’ 세종시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그런 때에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대통령 주변에서는 이런 엄청난 비리가 횡행하는데….’ 투기 혐의로 조사받아야 하는 공무원은 그들 나름대로 그리고 어려움을 참고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 또한 허탈해했다. 특히 ‘최순실 게이트’의 초점과 관련된 업무가 모두 세종 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에 그 허탈함과 분노는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의 설립과정이 초특급으로 이루어진 곳도 이곳 문화체육관광부. 미르재단은 지난 10월 26일 문화체육관광부 김모 주부관이 퇴근시간인 오후 5시 전경련으로부터 법인설립 신청서를 받고 그날 저녁 8시 7분 서류 등록, 담당 과장은 20분만인 오후 8시 27분에 결재를 진행했고, 담당 국장은 다음날 오전 9시 36분 모든 등록 절차를 끝냈다. 국가비상사태도 아닌데 이런 초특급 특혜가 이루어졌으니 공무원들이 느껴야 했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자대학 특례입학을 다루는 곳도 이곳 교육부. 최순실이 마구 흐트러뜨린 경제를 뒤치다꺼리 해야 하는 곳도 이곳의 경제부처. 돈 뜯기고, 죄인 취급당하고, 수사기관 불려 다니고…. 이런 기업인들의 분노와 허탈감을 쓸어 담고 다시 동력을 불어넣어 줘야 할 경제부처이지만 이들 역시 사기를 잃고 있지 않는가? 최순실의 능력(?)은 우리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다. 단적인 예로 최순실이 방위산업에까지 손을 댔다는 뉴스에 삼성물산, 포스코 등 방산업체의 주식을 흔들어 놓았는데 이로 인해 국민연금 같은 경우 지난주 2조원의 낙폭을 보였다. 당분간 증시의 상승세를 가져올 동력은 없다는 전망이고 보면 정말 우리 경제가 걱정이다. 이렇게 초겨울 날씨처럼 스산한 세종시를 더욱 외로운 섬처럼 만드는 것은 이곳의 분위기를 다잡을 주인이 없다는 것. 혼란이 커질수록 높은 사람들은 서울에 있어 국무총리, 부총리, 주요장관들의 얼굴은 보기 힘든 것이다. 총리 자체가 공중에 떠있는 상태-이래서 ‘최순실 게이트’는 세종시의 ‘공무원 왕국’의 열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하루빨리 이곳에 열기를 불어넣는 것-이것이 국정 정상화의 첫 과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女性 대통령들의 수난사

최근 들어 여성 대통령들의 수난이 계속되고 있다. 가까운 대만의 총통 차이잉원(蔡英文)은 취임 6개월도 안되어 ‘하야’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교수 출신으로 이제 갓 60을 맞은 차이잉원 총통은 지난 5월 취임 때 70%에 이르는 지지율로 국민의 신임이 매우 높았다. 그런 그가 왜 짧은 시간에 지지도 30%대로 추락한 것일까? 첫째는 그의 외고집과 리더십. 대만 역시 경제성장이 2%선에 멈춰 섰고 경기가 계속 바닥을 치고 있는데도 총통은 경제문제보다 원주민들의 인심 얻는데 주력하는가 하면 사법원장의 임명에 대한 국민 여론의 악화 등 인사실패가 이어졌다. 둘째는 ‘미국의 안보 동반자’를 내세우며 중국에게는 강경노선을 편 것이다. 심지어 1992년 중국과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의 정치형태를 유지하자는 이른바 ‘92공식’이 사문화되고, 이 때문에 중국이 관광객을 억제시키는 등 경제적 압박을 계속하고 있는 것. 요즘 들어 대만에서는 국민 여론이 악화되면서 그의 외고집과 리더십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필리핀의 아로요 전 대통령의 운명은 더욱 비참하다. 재임기간 중 선거자금 유용과 뇌물수수로 수사를 받아온 그녀는 2011년 1월 18일 몰래 공항을 빠져나와 출국하려다 공항에서 체포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안면 뼈 질환을 치료받기 위해 출국하는 것이라며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게 야구 포수의 마스크 같은 것을 착용했으나 경찰의 눈을 피하지 못 했다. 아로요 역시 사회개혁법안 제정, 곡물보호법 시행 등으로 국민의 지지도가 높았고 특히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조지타운대학 동기동창이며 필리핀 9대 대통령을 지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의 딸이어서 더욱 각광을 받았다. 누구보다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 여성 대통령은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그녀는 통 큰 여성 대통령으로 국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올림픽을 유치했으나 탄핵을 받아 정작 개막식에는 부통령이 참석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지우마 호세프처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여성 정치인도 참 드물다. 사회주의 운동에 심취한 나머지 1960년에는 여성의 몸으로 총을 들고 게릴라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정부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도 했다. 전임 대통령 룰라의 최측근으로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수석장관’을 맡아 브라질 경제를 일으킨 ‘룰라의 기적’을 이끌기도 했다. 그래서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나 불법 비자금 조성, 경기침체, 포퓰리즘과 무능, 실업자 사태 등으로 민심은 등을 돌렸고 전임 대통령의 비리까지 은폐하려다 탄핵을 당해 하야를 해야만 했다. 이들 여성 대통령들과는 대조적으로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찬사를 받는 경우도 있다. ‘영국 병’으로까지 일컬어지던 고질적인 노사문제를 해결하고 영국 경제를 일으킨 ‘철의 여인’ 대처 전 총리. 그리고 EU의 실질적인 대주주로 독일 뿐 아니라 유럽을 이끌고 있는 메르켈 현 총리. 그런데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것은 여성이냐, 남성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과연 그에게 나라를 이끌고 국민을 통합하는 리더십이 있느냐 하는 것이고, 국민들에게 좀 어려워도 경제발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부정부패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위기에 몰린 것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비운의 공식은 예외가 없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정도전과 최순실의 ‘권력 빌리기’

중국 한나라의 고종 유방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 장량(張良, 자는 장자방)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된 정도전(鄭導傳)을 꼽는다. 그런 정도전이 고려말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거부한 죄로 전라도 나주에 있는 회진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였다. 하루는 들녘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밭일을 하는 농부와 말을 건너게 되었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알아보고 ‘힘이 부족함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치기를 좋아한다’고 충고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농부로 태어나 밭을 갈고, 국가에 세금을 내며 처자를 부양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인데 당신들은 백성의 배고픔과 고통을 돌보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그 순간 정도전은 머리에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국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깊은 산골에 사는 어리석어 보이는 백성도 정치가 왜 잘못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으며 그래서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국가와 사직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이 정도전 정치철학의 위대한 핵심인 ‘민본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앙에서의 음흉한 권력투쟁, 음모, 부패, 분파 등등 아무리 치열해도 그것이 백성의 삶과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확신이야말로 그에게 일대 변화를 일으킨다. 농부가 충고해준 대로 ‘민본(民本)’은 힘이 있어야 함도 깨달은 것이다. 정도전은 바로 그 힘을 빌리기 위해 함경도 동북면에서 변방을 지키는 야전사령관으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그는 이성계의 군대가 잘 훈련됐고 질서정연함을 보고 더욱 마음을 굳혀 엉망으로 추락한 고려왕조의 실상을 논하고 새 세상의 문을 열어야 함을 설파해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이성계의 힘을 빌려 조선왕조를 세웠고 미래를 향한 개혁을 이루어 나갔다. 이와 같은 정치공학적 상황을 정도전은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해 중원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고조를 이용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감추어진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나라를 들끓게 하고 있는 이른바 최순실 사건도 대통령의 힘을 빌려 나라를 통치하려고 했던 것일까? 정도전이 그 힘을 빌리기 위해 이성계를 찾아가고 권력의 로드맵을 만들어 준 것과 아버지 최태민 목사로부터 딸 최순실까지 박 대통령을 찾아간 것은 비슷하다. 그러나 정도전은 임금의 힘을 ‘민본’에 썼고 최순실은 자신과 딸을 위해 휘둘렀다. 정도전은 나라를 개혁하는 데 ‘대권’을 차용했고 최순실은 사적 욕심을 채우는 데 대권을 악용했다. 하지만 조선왕조를 세우고 이끌던 정도전이었지만 역시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세도가들이 사병(士兵)을 거느리고 있어 걸핏하면 국기를 문란 시키는 것을 개혁하려고 하자 왕자 이방원(훗날 태종)의 저항에 부딪친 것이다. 뿐만 아니라 1398년 8월 세자를 책봉하는데도 정도전이 자신을 밀지 않고 이복동생 방석을 세우려는 데 앙심을 품은 이방원에 의해 이른바 ‘왕자의 난’에서 제거당하고 만다. 지금 대한민국은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 ‘최순실 게이트’로 매우 험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박대통령 자신이 이미 600여 년 전 정도전이 온몸을 던져 터득한 ‘백성이 주인이고 국가의 존재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사직과 국가가 물거품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민의 마음에서 떠나버린 박대통령에 대한 신뢰는 또 어떻게 얻어야 할지? 이런 질문마저 박대통령은 최순실에게 묻지 말고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책임도 없고, 사표도 없고…

1970년 3월31일 오전 7시 21분, 129명의 승객을 태우고 하네다 공항을 이륙하여 후쿠오카로 향하던 보잉 727 일본항공(JAL) ‘요도호(ょピ)’는 승객을 가장한 ‘적군파(赤軍派)’ 7명에 의해 납치되었다. 납치범들은 권총으로 조종사를 위협, 북한의 평양으로 갈 것을 강요했다. 조종사는 우리의 김포공항에 착륙하면서 마치 평양공항에 도착한 것처럼 작전을 꾸몄다. 김포공항측도 그렇게 위장전술을 폈으나 ‘적군파’들은 곧 눈치를 채고 평양으로 가지 않으면 승객을 차례로 죽이겠다고 날뛰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일본 운수성(교통부) 정무차관 야마무라 신지로. 그는 대담하게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납치범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래도 대화에 진전이 없자 정무차관은 “내가 인질이 될테니 승객들을 풀어 달라”고 비장한 제안을 했다. 납치범들은 예상치 못한 ‘인질 자청’에 어쩔 수 없이 승객들을 풀어주고 정무차관만 인질로 잡은 채 김포공항을 이륙, 북으로 향했다. 이 뉴스는 일본 뿐 아니라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자신의 몸을 던져 자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공직자의 자세가 그만큼 감동적이었던 것. 우리나라에도 최근 이처럼 자신의 몸을 던져 인명을 구한 교사가 있어 큰 감동을 주었다. 강원도 동해 묵호고 A교사. 교사생활 2년차의 젊은 A교사는 지난 15일 경부고속도로 관광버스 화재 참사 당시 불길 속에서도 자신의 승용차에 부상자 4명을 태워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구해주었다. 당연히 그에게는 ‘의인’의 칭호와 함께 5천만원의 상금이 전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A교사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상금을 거절했다. 5천만원이라면 학교 선생님으로서는 큰 돈이 아닐 수 없는데도 그는 극구 사양했다. 뿐만아니라 많은 언론기관에서 그의 선행 소식에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이 역시 거절했다. 학생들의 수업을 빼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교사가 있어 그래도 우리 교육에 희망이 있구나 하는 감동을 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들에게서는 눈을 부비고 귀를 기울여도 이런 감동적인 뉴스는 전해오지 않는다. 누가 책임을 지고 몸을 던졌다든지 사표를 냈다는 뉴스도 없다. 국민안전처는 7월 5일 밤 8시 33분 울산 앞바다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17분이 지나서야 ‘재난문자’를 발송했다. 그나마 날짜를 잘못 표기해 6분 뒤 수정문자를 발송해야 했다. 9월 12일 밤 지진에서도 긴급 재난문자는 지진발생 10분이 지나서야 늑장 발송됐다. 일본의 경우 지진이 발생하기 전 긴급 재난문자가 먼저 발송되거나 최소한 3초를 넘기지 않는데, IT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체통이 말이 아니다. 이 때문에 겪어야 했던 국민들의 혼란과 피해는 또 어떠했는가? 그래도 관계관 하나 책임지고 사표를 던졌다든지, 문책을 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다. 물류대란을 일으키고 수출에 막대한 피해를 준 한진해운 사태에 대해서도 책임지고 물러나는 장차관 하나 없다. 생각해보자. 수출품과 화물을 실은 50여척의 배가 항구에 입항을 못하고 한량없이 공해 상에 떠있어야 하는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몸을 던져 뛰어들 장차관이 있었던가. 경제상황의 악화, 노사문제…. 하지만 책임도 안지고, 사표도 안쓰는 우리 공직 풍토가 만성화 되어가기에 새삼 스스로 ‘나를 인질로 잡으라’며 납치범들에게 몸을 던진 ‘요도호 사건’의 야마무라 신지로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 그리고 불길 속에 인명을 구하고도 상금을 거절한 묵호의 젊은 교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세종시에 있는 대통령 기록관

서울의 ‘자하문’은 ‘창의문’의 애칭이다. 그 자하문 밖에서는 가끔 궁궐의 사관들이 한 뭉치의 한지를 갖고 나와 흐르는 물에 먹물을 씻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임금들의 행적을 빠짐없이 기록한 사관들이 그것을 모두 정리한 뒤 초본을 가져다 물에 담가 씻어내는 것이다. 먹으로 쓴 글씨여서 물에 담그면 잘 지워졌다. 이것을 궁궐에서는 세초(洗草)라 했다. 이렇듯 세초를 하는 것은 혹시 초본이 돌아다녀 왕의 기밀사항이 유출되지 않을까 하는 것과, 당시에는 귀했던 종이를 다시 재활용하는 뜻이 있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유네스코는 일찍이 실록의 가치를 인정하고 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사실 우리 조선왕국이 500년을 버티어 온 것은 임금도 보거나 손댈 수 없는 실록의 정신이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얼마나 조선 실록을 소중하게 생각했는가는 행여 화재나 전란으로 소실됐을 경우를 생각해서 강화도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 등 여러 곳에 분산 보관한 것만으로도 짐작이 간다. 사실 임진왜란 때에 많은 실록이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전주에 보관 중이던 실록만은 이곳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깊이 숨기는 바람에 전후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의 기록 보관에 대한 남다른 집념으로 정부청사 이전에 맞춰 지난해 5월14일 세종시 어진동에 대통령기록관을 준공했다. 지하 2층, 지상 4층의 유리상자 처럼 특별나게 설계된 대통령 기록관은 1천94억원이라는 예산이 투입되었는데 점점 입소문이 퍼지면서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17대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대통령들이 타던 무개차, 방탄차, 리무진이 전시돼있고 1992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노태우 대통령에 선물한 화채 그릇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이 받은 선물들도 볼 수 있다. 체험 공간의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면 청와대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을 갖는데 특히 디지털로 역대 대통령 위에 스크린을 올리면 취임식부터 재임시절의 활동 모습까지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주요 기록물도 접할 수 있다. (그림 참조) 기록물을 보면 정부 수립후의 숨가쁜 면모를 느끼게 된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범석 장군이 국무총리였고 조봉암은 그 후 사상범으로 몰려 사형 당했다. 또한 1949년 6월 6ㆍ25 전쟁 1년 전 농지개혁을 실시한 자료도 있다. ‘한 가구당 최대 농지소유면적을 3정보로 하고 그 이상은 정부가 유상 매수하여 다시 농민에게 유상 분배한다’ 등등…. 이렇게 건국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이 겪어야 했던 역사의 굽이굽이를 대통령 기록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대통령 선거가 1년여로 다가오면서 대권주자들의 여론조사 결과가 언론에 보도되고 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들 잠룡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우선 먼저 이곳 대통령 기록관에 와서 앞서간 대통령들의 모습, 그 역사적 역할을 온 몸으로 느끼고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질문을 던져보라는 것이다. “과연 나는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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