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세종시 건설 10년, 어떻게 진화할까

4ㆍ13 총선거에서 야당이 ‘국회 세종시 이전’을 공약했다가 하루만에 없던 것으로 하고 대신 국회분원으로 선회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국회 이전이 충청도 표를 의식한 표퓰리즘으로 비춰져 다른 지역에서 역효과를 낼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처럼 정치권이 세종시를 ‘선거’라는 프레임으로 보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 범죄사건이 일어났을 때 파출소에 찾아가 신고를 하면 흔히 ‘관할구역’을 따진다. 골목길 하나를 두고도 우리 관할이 아니니 다른 파출소를 가보라고 하기 일쑤다. 범죄 피해자는 이와 같은 ‘관할’을 따지는 고질병 때문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리 저리 헤매다 낭패를 당한다. 경찰만이 아니라 우리 행정조직이 모두 이런 매너리즘에 빠져 발전을 못한다. 정부가 개혁을 외치면서도 아직도 그 칸막이를 헐지 못하고 있는 것. 지금 세종시가 안고 있는 숙제 역시 칸막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올해로 ‘세종시’라는 도시의 이름을 결정하고 일을 시작한지 꼭 10년이 된다. 따라서 세종시를 건설하기 위해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청(행복청)이 출범한 지도 10년. 그런데 국가균형발전을 위하여 탄생한 세종시의 위상이 한낱 수도권의 위성도시, 행정도시의 차원을 넘어 ‘세계 도시건설 역사상 최초의 품격 있고 특화된 도시건설’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정부기관과 자치단체 등이 공유하는데 매우 인색하다. 서울은 ‘서울’이라는 칸막이에 갇혀 세종시를 보려 하고, 정부의 각 부처는 세종시 건설을 건설부와 행정자치부의 업무로만 보려고 한다. 충남과 대전시 충북 등 지방자치단체들은 각자의 행정적 관점에서만 세종시를 보기 때문에 당장 인구가 빠져나가는 등의 손실에 신경을 쓸 뿐 경제, 문화 같은 상생의 열매를 어떻게 창출하느냐 하는 블루 오션에는 소홀하다. 세종시를 귀중한 반려자로 인정하면서 도시행정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제 행복청은 인구 50만으로 향하는 세종시 제 2단계 건설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제 2단계 작업을 진두 지휘하고 있는 이충재 청장은 벤처, 리서치 파크 등 도시 특화를 통해 도시가치를 향상시키고 결과적으로 도시 자족기능을 확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청장은 앞으로 2~3년이 세종시의 자족기능 확충과 미래 경쟁력 확보에 매우 중요한 골든 타임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 전국에서 세종시의 아파트 분양시장이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은 세종시에 대한 부동산 시장의 긍정적 전망을 말해 주는 것이지만 정말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제 세종시는 일반적인 신생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공장 몇 개 유치하는 차원의 자족기능이 아니라, 벤처 육성에서부터 외국인 투자지역 지정과 리서치 파크 조성에 이르기 까지 특화된 도시기능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는 자족기능을 갖춰야 한다. 그동안 도시 디자인 등 경쟁력과 품격있는 도시건설에 심혈을 쏟았고 이미 이 단계에서도 세계 여러나라 도시 관계자들의 견학이 이어지고 있지만 자족기능 이야말로 세종시 발전의 에너지다. 평균연령이 전국에서 제일 젊은 31.8세라는 세종시. 그래서 패기있고 에너지 넘치는 세종시가 이 중요한 골든타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알파고 처럼 도시도 진화해야 한다는 이충재 청장의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링컨이 편집국장에게 쓴 편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로 전국이 뜨거웠던 지난 주, 미국 워싱턴에서는 링컨 대통령 추모식이 거행됐다. 1865년 4월 15일, 링컨이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암살범의 총탄을 맞고 56세로 숨을 거둔지 151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받는 링컨, 특히 노예 해방의 대명사로 세계 역사에 알려졌지만 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애매모호한 면이 많았다. 1861년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는데도 남부를 점령한 북군 사령관들이 노예 해방을 선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부의 불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런 현상에 워싱턴의 한 신문이 왜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을 하면서도 노예 해방을 머뭇거리고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보이며 비판의 기사를 게재했다. 링컨은 즉시 그 신문사의 편집국장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편지를 썼다. 첫째, 자기가 노예해방을 선언하지 않는 것은 연방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도 연방이 유지된다면 이대로 갈 것이다……. 그러니까 링컨은 노예 해방 보다 미국이라는 그의 분열된 조국을 통합하고 유지하는데 대통령으로서 더 무게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노예 해방이 중요하다 해도 그것은 미국 연방의 틀 안에 존재하는 정책의 하나일 뿐이라는 뜻이다. 사실 링컨의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웠을 뿐 더 큰 목적은 연방을 이탈하려는 남부를 하나로 묶어놓는 데 있었다는 주장이다. 면화의 수출 등 유럽과의 무역에서 남부는 자유무역을, 산업지대의 북부는 보호무역을 주장하여 충돌을 빚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남부 900만 인구 중 노예는 0.1%에 불과한 8천명. 이런 가운데 노예 해방을 명분으로 전쟁을 하면서 남부의 노예들이 도망쳐 북군에 입대하는 숫자가 자꾸만 불어났다. 이 때문에 북군의 병력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 끌수록 노예의 탈출은 증가했고 연방제를 무너뜨리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노예제도는 폐지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온 것. 그리하여 마침내 타이밍을 기다린 링컨은 1863년 1월 1일, 의회에서 역사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그해 11월 19일 민주주의의 교과서처럼 되어 있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티스버그 연설을 탄생시킨다. 266개의 단어로 된 링컨의 이 역사적 연설문 원문에 ‘노예 해방’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간결하고 분명한 단어로 ‘살아있는 우리’ 모두가 조국에 바쳐야할 의무만 강조한다.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 세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 역시 미국의 단합, 그것이 링컨에게는 노예 해방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편지를 쓰고, 심지어 탄핵운동까지 벌어진 상황에서도 인내심을 갖고 정적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엄청난 전사자가 속출해도 그 소명에서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목숨까지도 바쳤다. 지금 우리나라는 4ㆍ13 총선 후 일찍이 없던 정치적 분열과 혼란에 빠져있다. 이럴 때 링컨 같은 통합의 지도자가 절실하다는 뜻에서 링컨 이야기를 길게 소개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그 정신이면 우리는 오늘 같은 파행적 분열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링컨 서거 151주년을 보내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고 한다. 인생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말했을까. 마라톤 하면 머리에 스치는 사람이 있다. 이봉주. 충남 천안이 고향인 이봉주의 나이는 올해 만 46세로 불혹을 훌쩍 넘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마흔 한번이나 마라톤을 완주했으니 그가 달린 거리는 지구의 다섯 바퀴에 해당할 만큼 길다. 그러나 그의 신체적 조건은 마라톤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짝발에 평발이라는 것. 뛰는 것 자체가 지옥 같은 슬럼프에 빠져들 때도 그것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면서 마라톤을 해왔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밀고 가는 것, 이것이 그의 강점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이봉주는 국민들에게 금메달의 꿈을 안겨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15km 지점에서 아프리카 선수에 부딪히는 의외의 불상사로 그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완주를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2001년 보스톤 마라톤 출전을 앞두고는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시드니 올림픽의 패배, 아버지의 사망, 그야말로 슬럼프의 연속이었다. ‘시련의 아픔’은 너무나 컸다. 그러나 이봉주는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고 그해 말 후쿠오카 마라톤에 출전하여 2위를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1년 마침내 마라톤대회의 세계적 명문, 보스톤대회에 출전한다. 레이스 중반까지 10여명이 선두를 유지했는데 이봉주는 선두 그룹을 계속 유지해나갔다. 30km 지점부터는 서서히 속도를 높여갔다. ‘심장 파열의 언덕’이라는 최고의 난코스에서는 불과 4명만이 선두를 유지했다. 이봉주는 그들 숨소리가 무척 거칠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저들 모두 지쳐있구나.’ ‘이 때다’하는 판단과 함께 발바닥에 스피드를 가하며 치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버지!’하고 외쳤다. 아버지가 눈앞에서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포기말라!”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쯤 달렸을까. 옆을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봉주 자신만이 1위로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1950년 6ㆍ25 전란 속에서 보스톤 마라톤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을 한 함기용 선수에 이어 50년만에 이봉주 선수가 월계관을 차지해 세계에 그 이름을 날렸다. 손기정과 황영조처럼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28위, 2009년 서울 국제 마라톤에서 14위를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의 막을 내렸다. 서울시청 팀 소속으로 마라톤을 시작한지 20년, 그는 이제 후진 양성에 심혈을 쏟고 있다. 움푹 패인 쌍꺼풀에 전형적인 충청도 사투리의 이봉주가 보여준 것은 어떤 악조건과 역경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올림픽 월계관은 써보지 못했지만 그의 인생을 보람있게 꾸미며 한국 마라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요즘 봄이 되면서 전국 여기저기서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있다. 어떤 대회는 최고 2만명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참가하는 등, 우리나라의 마라톤 인구는 10km와 하프까지 포함하면 약 4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그야말로 마라톤 전성기를 맞고 있다. 마라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경제가 어려운 지금 그 포기하지 않는 정신,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정신도 우리 국민들에게 깊게 퍼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역시 인생은 마라톤이다. 정치도 그렇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새벽의 냉정한 마음’으로 투표장에

A고등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서 이 학교 여학생이 벤치에 앉아 울고 있었다. 선생님이 다가가 사연을 물었다. 그러자 학생이 말했다. “선생님, 우리 아빠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아빠가 국회의원이 되면 솔직히 나라가 망합니다. 그렇다고 아빠가 떨어지면 우리 집안이 망합니다. 이러니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해줘야 할지 답답했다. 요즘의 ‘덮어놓고 출마하기’ 현상에 대한 풍자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자격도 안되는 사람이 출세욕, 명예욕에 빠져 선거판에 뛰어드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어떻게 국회의원이 되더니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특권이나 누리며 당파의 이익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선거철이 가까워지니 ‘표’를 달라고 뛰어다니는 모습만 본 것이다. 이런 모습만 보아 오던 사람들은 ‘아, 저거 아무나 하겠구나.’하고 용기(?)를 갖고 선거판에 뛰어 드는 것일 게다. 19대 국회를 가장 ‘실패한 국회’라고들 한다.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이 적용된다면 19대 국회는 국민이 낸 세금에서 지불된 세비를 거의 반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즘 선거철을 앞두고 거리에 나붙은 국회의원 예비후보들의 플래카드에는 새로운 정치판을 약속하는 내용들이 많다. ‘나는 국민의 진짜 머슴이 되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들도 금배지를 다는 순간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진짜 일꾼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 속담에 ‘아내로 맞이할 여자를 고를 때와 넥타이를 고를 때는 밤에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인간은 새벽에 가장 이성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은 새벽에 하게 되고, 옛날 어머니들은 새벽 정화수 앞에서 기도했다. 그러나 밤은 인간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흐르게 한다. 밤에는 술도 마시게 되고 토론을 해도 감정에 흐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평생 함께 할 아내를 고르는데 있어 밤에는 자칫 감정적인 선택을 하기 쉽게 된다는 것. 후보자를 고르는데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새벽의 기도’와 같은 ‘이성적인 자세’라고 말하고 싶다. 신랑이 신부를, 신부가 신랑을 고르는 이성적 자세란 그저 달콤한 말에 빠지지 않고 그 약속의 말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를 따져 보는 것이다. 흔히 실현되기 어려운 표퓰리즘은 참으로 위험하다. 당장 듣기에는 달콤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것들이 얼마나 실현되었는가? 실현이 됐다 해도 몇 %나 됐고, 그마저도 국가적으로 얼마나 많은 갈등과 부담을 안겨 주었는가? 그러니 ‘새벽의 냉정한 마음’으로 후보를 골라야 한다. 우리 지역의 숙원사업은 하늘과 땅 사이의 무지개라도 놓아줄 것 같고, 국가의 경제, 안보, 문화 등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것 같은 사람, 그런 전지전능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달콤한 약속에 쉽게 넘어간다. 뿐만 아니라 ‘흑색선전’에 넘어가지 않는다면서 실제로 “누구는 이렇다더라” 하는 식의 흑색선전, SNS상의 그릇된 정보에도 약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와있다. 그 운명의 문을 열고 번영을 누리게 할 일꾼-진정성 있고 애국심 있는 일꾼을 뽑기 위해 ‘새벽의 마음’을 갖자. 정치의 수준은 곧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다. 변평섭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표를 달라는 당신, 참 뻔뻔하다

P군은 힘들게 취업전선을 뛰어다니다 어느 출판사에 인턴사원으로 취업을 했다. 20대 후반의 P군은 대기업이나 공무원의 꿈은 접었지만 그래도 직장을 얻었다는데서 열심히 근무를 했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밤 11시까지 무려 15시간을 일했고 점심은 라면이나 거리에서 떡볶이 등으로 때웠다. 급여일이 되어 경리부장에게 통장 사본을 제출했다. 그러나 경리부장은 좀 더 출판기술을 익혀야 급여가 나간다며 자세한 설명은 피했다. 그래서 P군은 빨리 일을 배워 급여를 타려고 더 열심히 일했다. 일요일도 없었고,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파김치였다. 3개월이 지나서야 급여를 받기 시작했는데 겨우 50만원. 2년이 되어 정규직이 되면서 100만원이 되었다. 이처럼 애처롭게 직장의 끈을 붙잡고 힘들게 사는 젊은이들-그들을 일컬어 ‘열정페이’라고 한다. 직장을 얻었다는 것으로 만족하여 열정만 갖고 일하라. 급여는 묻지도 말며 몸을 불태워 일만 하라는 ‘열정페이’. 어떻게 이들에게 결혼을 하고 집을 마련하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의 질은 고사하고 어떻게 이들에게 아기를 낳으라고 할 수 있을까? 아예 ‘열정페이’도 할 수 없는 청년실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 2월 실업율은 12.5%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백수로 놀고 있는 29세 이하의 젊은이가 56만명이나 된다는 이야기다. 이래서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 삼포시대, 오포시대, 철포시대… 마침내 니트족에 이르기까지 우리 젊은이들의 대화에는 ‘꿈’이 아닌 자조와 냉소의 우울한 신조어들이 가슴에 못을 박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광주광역시에 연간 10만대의 중국 자동차 ‘주룽(九龍)’이 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협약식까지 마쳤다고 한다. ‘주룽’은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생산에 앞서 내년부터 2년 동안 전기 승합차 3천대를 들여와 한국시장에 내놓을 계획. 그냥 승합차가 아니라 ‘전기’로 운행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중국에 가면 거리를 달리는 우리 현대차를 보고 기분 좋아했던 것은 이제 반대로 중국 사람들이 서울 거리를 누비는 중국차를 보고 으쓱할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미 여러 분야에서 중국에 역전패 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인 것이다. 잘 나가던 조선 경기도 심각하다. 조선소가 많은 경남 거제시에는 불경기 여파로 문닫는 식당과 상점들이 매일 늘어나 4개월 동안 1천600곳이나 된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자동차, 철강, 조선… 곳곳에서 험한 파도가 들이치고 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로서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가계 부채는 1천200조라는 기록을 깬지 오래되었고 이자가 높은 제2 금융권에서 빌린 주택담보 가계대출은 100조를 넘었다. 남북문제, 특히 북한 핵문제의 심각성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판을 보면 짜증이 날 뿐이다. 이런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깊은 고민도 없고 이번 413 총선거에서 보여줄 의지는 더더욱 없다. 물론 정당마다 공약이라는 것이 있지만 어떻게 하면 유권자의 귀에 솔깃한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지 진정성 없는 구호의 나열일 뿐이다. 국민을 생각하는 이 시대의 심각한 고민, 특히 길 잃은 젊은이들을 위한 꿈도 없다. 선거를 앞두고 그들이 고민하고 싸운 것은 계파의 공천 전쟁일 뿐, 이런 진정성 있는 토론도 없었고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도 표를 달라며 굽실대는 당신, 참 뻔뻔하다. 변평섭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쇼팽 콩쿠르’ 심사표와 공천심사

올해 21세의 피아니스트 조성진. 그가 한국인 최초로 지난해 폴란드 대통령으로부터 제17회 쇼팽 콩쿠르 1등상을 받을 때 온 국민이 환호했고, 세계 음악인들로 부터는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한국인이라는 게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뒷골목 시궁창 같은 정치싸움만 보던 국민들에게 신선한 산소 같은 뉴스였다. 이제 그는 런던, 뉴욕, 도쿄, 파리 등 세계 무대를 누비며 피아노 건반 위에 뜨거운 혼을 쏟아 붓고 있다. 그런데 최근 지난해 있었던 쇼팽 콩쿠르에서의 채점표가 실명으로 공개되어 또 한번 화제가 되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17명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는데 최고 10점 만점에서 두명의 심사위원이 조성진에게 만점을 주었고 12명의 심사위원은 만점과 다름없는 9점을 주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프랑스 출신 심사위원은 최하위 점수인 1점을 준 사실이 밝혀졌다. 뿐만아니라 다음 라운드 진출이 불가능하다는 ‘NO’의 의견서를 첨부했다. 우리식 표현으로는 ‘부적격’이라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감정적인 점수라는 오해를 받는다. 다행히 최고 점수가 다수였기에 그의 야박한 ‘1점’이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어쨌든 이번 쇼팽 콩쿠르에서의 채점표가 공개된 것은 그만큼 심사의 투명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그런 투명한 평가 때문에 1등의 영광을 차지한 조성진에게 세계 모든 음악 애호가들이 갈채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요즘 한달도 안남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당마다 몸살을 앓고 있다. 엄격한 공천 심사를 통해 후보자를 선정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이의신청, 재심신청이 이어졌고 탈락자들의 반발은 험악한 사태를 연출하고 있다.과연 공천심사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했다면 이런 부작용이 나왔겠는가? 조성진 피아노 채점표에서 보듯 누가 봐도 투명한 잣대를 사용했다면 반발의 여지가 있었을까? 여론조사만 해도 그렇다. 당내 경선용 여론조사가 일부 지역에서 왜곡되거나 조작됐고 심지어 유출까지 됐다하여 검찰의 수사를 받는 상황에 이른다면 그 신뢰성을 어느 정도로 평가해야 할까? 역시 문제는 심사를 하는 잣대의 공정함과 투명성이다. 무게를 다루는 저울, 길이를 재는 잣대가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생활에서 저울이나 잣대가 경상도, 전라도가 제각각이고 서울과 충청도의 쌀가마가 차이가 난다면 그 혼란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 초기부터 조정에서는 백제, 신라를 거치면서 도량형의 각기 다른 단위와 기준을 통일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이 작업은 계속됐다.기준과 단위를 어떻게 공정하게 하는가, 세종대왕은 무려 9년에 걸쳐 이 작업을 했고 그것이 고스란히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주요 임무 중에는 그 지방의 잣대가 정확한가, 저울은 속이지 않는가 살펴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정치의 선진화를 이룩하는 것은 공천심사가 쇼팽 콩쿠르 심사처럼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A가 하면 막말이고 B가 하면 농담’이라던지, ‘C가 하면 비리고 D가 하면 관례’가 되는 식의 심사가 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새겨야할 말은 “以不平平 其平也不平, 불공정한 잣대로 공정한 것을 재면 공정한 것까지 불공정하게 된다”는 열자(列子)의 말씀이다. 변평섭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에서

출신 신분이야 어쨌든 여인으로서 완숙한 장희빈에 비해 인현왕후는 갓 14세의 어린 소녀였다. 그러니 숙종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장희빈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승승장구 벼슬길에 오르던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서인(西人)의 영수이던 우암 송시열과 같은 정치적 노선에 있으면서 숙종 임금과 장희빈 관계에 시비를 걸게 되고 마침내 평안도 선천으로 1차 유배를 가게 된다. 이때가 1687년 숙종 13년. 그의 유배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689년 2월,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의 외딴 섬 노도(櫓島)로 귀양을 가야만 했다. 그 유서 깊은 유배지 남해 노도를 지난 주 그의 광산 김씨 후손들 그리고 국문학을 하는 교수 등과 함께 찾았다. 말이 유배지일 뿐 해상국립공원답게 바다와 섬, 그리고 하늘까지도 참 아름다웠다. 아름드리 동백나무로 둘러싸인 섬,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지중해 바다 보다 더 파란 남쪽 바다…. 이은상 시인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 바다’가 바로 여기가 아닐까. 그러나 막상 내가 320여년전의 김만중이 되어 바위 사이를 거닌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쓸쓸했고 가슴이 아렸다. 아마도 김만중의 가슴속 이런 고독과 아픔으로 최초의 한글 소설 ‘구운몽’의 구상이 실타래처럼 풀려 갔는지 모른다. ‘구운몽’ 자체가 불교에서의 ‘공(空)’-부귀공명이 한밭 봄날의 꿈임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그렇듯 인생만사를 부정하면서 다시 그 부정에서 긍정을 찾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공(空)’의 사념에 저절로 젖어들게 하는 곳이 바로 이 섬이다. 더욱이 김만중은 이곳에서 그의 어머니가 유배생활을 하는 자식을 근심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큰 충격에 빠진다. 특히 어머니는 병자호란에 이어 정축호란 때 남편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유복자가 된 아들 김만중을 키우고 교육시키는데 모든 걸 바친 터라 그 슬픔이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님을 그리면서’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이 매우 감동적이다. ‘오늘 아침 어머님이 그립다는 말 쓰려고 하니/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은 이미 흥건하구나/몇 번이나 붓 끝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 버렸는지…’ 김만중은 이 시를 쓰고서 얼마 안된 1692년, 외로운 유배지 노도의 동백나무 숲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56세.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으로서 대사헌, 대제학 등 최고위직에까지 올라 혁혁한 활동을 했으면서도 결국 유배지에서 짧은 일생을 마쳐야 했던 김만중은 ‘구운몽’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공(空)’의 철학을 남겼다. 이곳 남해에는 김만중 말고도 남구만, 김용, 김구 등 일곱 분의 문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글을 남겼고 고려 때까지 거스르면 정치인, 관료 등 백명 가까운 인물들이 이 곳에서 힘든 유배생활을 했다. 그래서 남해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유배문학관’을 세우고 많은 유품들을 전시, 방문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참으로 잘한 착상이다. 이를 본받아 김만중의 후손들이 그의 선조들 묘소가 있는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에 김만중의 기념관을 마련하겠다는 것. 따라서 남해시에 있는 ‘유배문학관’처럼 ‘김만중 문학관’을 유성에 세우는데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설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결국 문화가 경쟁력이니까. 붉은 해가 바다를 물들이는 낙조에 취해 섬을 떠나는데 김만중이 생전에 남긴 말이 귓가에 스치는 것 같았다. “우리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글로 시문을 쓰는 것은 앵무새와 같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글쎄, 하도 많아서…”

국토부 산하 기관의 A사무관은 업무와 관련된 업체로부터 지난해 무려 14차례 골프접대를 받은 혐의로 징계는 물론 형사처벌까지 받게 되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주말이 아니라 근무시간에, 그리고 부하를 감독해야 할 상급자도 함께 놀아났다는 것이다. 골프를 치면 으레 뒤따르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검찰은 공기업 KT&G 사장을 지낸 민모씨가 중동의 담배업자로부터 4500만원 상당의 시계(파텍필립)를 받은 혐의가 드러나 기소했다. 민 사장은 이렇게 받은 시계를 노조위원장에게 선물로 줬다. 왜 노조위원장에게 그 고가의 시계를 주었을까? 무슨 검은 거래가 있었을까? 시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야기지만 몇 년전 모 재벌회장이 당시 국세청장 J씨에게 30만 달러 뇌물과 함께 4200만원 상당의 시계를 바쳐 충격을 주었다. “어떻게 국세청장이…”하는 놀라움이 컸다. 곳곳에서 썩는 냄새는 이제 비리 불감증지경에 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지난해 9월 17일 국방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한 국회의원이 장명진 방위사업청장에게 “방산 비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때 장 청장은 “글쎄, 하도 많아서…”라고 대답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의 대답은 솔직했지만 국민들은 가슴의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글쎄, 하도 많아서…” 이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원자력 발전소의 부품은 매우 중요해서 완벽한 품질이 생명이다. 만약 불량 부품을 사용하다 사고라도 나면 이건 엄청난 재앙을 가져 온다. 국민의 귀중한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량기자재 납품으로 수십억 원대의 뇌물이 거래돼 한국 수력원자력 관계자 153명이 처벌을 받았다. 임원도 먹고, 부장도 먹고… 주차장에서, 사무실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뇌물을 먹었다. 국민의 생명이 달린 불량 자재 납품대가였다. 이런 자들은 영혼은 고사하고 공직자로서의 양심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었을까? 이근면 인사혁신처장은 최근 공직사회를 잔디밭에 비유하면서 물도 주고 ‘잡초’도 뽑겠다고 했다. 또한 2013년 4월 폐지됐던 검찰의 ‘대검 중수부’ 대신 ‘부패범죄 특별수사단’이 출범했다. ‘잡초’를 뽑아내자면 사정 바람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정치인과 공무원 등 공직비리와 대기업, 그리고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을 주대상으로 하고 있고, 이미 방산비리 수사에서 수사력을 인정 받았던 김기동 검사장이 칼을 잡았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수사실력이 높은 검사와 수사관들이 차출되어 철통같은 체제도 갖추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공직자의 애국심과 양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엄청난 방위산업의 비리에 뇌관을 터트린 김영수 해군 소령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양심선언을 통해 말썽 많은 통영함의 비리를 신고했으나 묵살됐고 군내 ‘부적응자’, ‘배신자’의 낙인이 찍혀 전역 조치 당했다. 당시 해군 참모총장은 공개적으로 김소령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부인하고 인격적 매도를 가했다. 김소령이 조직 내에서 겪어야 했던 고초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사태가 역전돼 보국 훈장 삼일장을 받았으며 참모총장은 구속되고 말았다. 따라서 잔디밭을 잘 가꾸고 잡초를 뽑으려면 김소령과 같은 애국심과 양심있는 공직자가 계속 나와주어야 한다. 반환점을 돈 박근혜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생각할 때 공직기강 확립이야 말로 가장 절실한 과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세종시에 무궁화 꽃이…

북한 김정은의 제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핵개발의 필요성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머리에 핵무기를 얹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불안한 안보를 미국의 핵우산과 중국의 ‘전략적 우호관계’에만 맡기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느 날 이들 양대국의 입장이 바뀌면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박정희 대통령 때도 비슷한 안보상황에서 극비리에 등장한 것이 ‘핵개발’. 이러한 배경을 소재로 하여, 1993년 김진명 작가에 의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장편 소설이 발표돼 국민적 감동을 몰아 왔었다. 물론 완전한 허구이지만, 핵개발을 시도하는 박정희대통령과 재미 입자물리학자 이휘소박사의 죽음을 연계시킨 사건전개가 매우 긴박감을 일으켰었다. 소설에서 ‘이용우’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시카고대학 이휘소교수는 노벨상 후보로 회자될 정도로 최고 권위자였다. 그런 이박사가 1997년 6월, 미국에서 이해할 수 없는 교통사고로 42세 젊은 나이에 죽게 되는데 한국의 핵개발을 막기 위한 미국의 음모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어쨌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영화로 까지 이어져 국가 안보를 갈망하는 국민적 시그널처럼 되었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그 무렵 무궁화심기 운동이 활발해진 것도 사실이다. 학교 운동장 한구석 또는 관공서 뜰에서나 볼 수 있던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범위를 넓힌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시들해진 ‘무궁화 꽃’ 사랑운동이 대한민국의 행정중심도시가 된 세종시에서 불붙일 준비를 하고 있다.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이 정부청사인근의 5만㎡ 녹지에 무궁화 테마공원을 조성키로 한 것. 우리나라 최대 호수공원으로 꼽히는 중앙 호수공원과, 최근 개관된 대통령 기록관, 디자인이 특출한 세종국립도서관과 함께 무궁화 테마공원이야 말로 세종시의 명물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올 하반기 착공, 2018년 개장하게 되면 전국 최대의 무궁화 공원이 될 뿐 아니라 그 종류 또한 분홍색 계열의 ‘홍단심계’를 비롯 ‘배달계’, ‘아사달계’ 등 200여종이 선보이게 되며 중간 중간에 잔디 마당과 휴식 시설도 마련, 힐링의 올레길 역할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충재 행복청장은 이와 같은 무궁화 동산을 만들게 되면 모든 국민이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나라꽃 ‘무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게 되고 그것은 곧 ‘나라 사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세종시의 관광 명품 중 하나가 될 것이고. 무궁화는 일제 식민지 서절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의 정서 때문에 그 역사를 길게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은 이미 고구려 유민이 지금의 만주 벌판에 세웠던 발해(渤海)의 기록에 나올 만큼, 우리 민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즉, 792년 세상을 떠난 발해의 정효공주의 묘비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는 것이다. “옥 같은 얼굴은 무궁화에 비길 수 있었다…. 그는 남편이 죽자 맹세하였던 마음을 변치 않고 슬픔을 머금으면서 굳게 정조를 지켰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원형백과 ‘발해의 꽃은 무궁화였다’ 참조) 이보다 더 오래된 기록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도, 그리고 일본의 왜서(倭書)에도 우리 민족의 무궁화 사랑이 등장한다. 따라서 세종시에 이처럼 대규모 무궁화 공원을 만드는 것은 역사의 재현을 통해 새로운 도시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영입이면 ‘저승사자’도 좋다?

DJ(김대중 전대통령)의 삼남 홍걸씨가 더민주당에 입당한 것을 계기로 동교동계 인사들과 실랑이가 되고 있다. 여기에 ‘국민의당’도 가세했다. 지난달 24일 ‘국민의당’ 모인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홍걸의 입당은 망한 백제의 부흥운동을 보는 것 같다’고 한 것.그는 김홍걸씨를 앞세워 친노 부흥을 꾀하는 꼴이며 문재인 당시 대표를 백제 부흥운동의 큰 축이었던 복신에 비유, ‘김홍걸을 부여풍처럼 앞세웠다’고 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이 ‘흑치상지’라는 명망있는 장군과 손잡고 처음에는 활발히 전개됐으나 결국 내분으로 실패한 내역을 소개하기도 했다.국민의당 당직자가 왜 백제의 비극적 종말을 현실 정치 상황에 접근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교훈은 곱씹어 볼 만 하다.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의자왕과 왕자 융을 비롯 관료와 군인 등 2만명 상당의 많은 백제인들이 당나라로 잡혀갔다. 그럼에도 의자왕의 종형제되는 복신, 승려 도침, 장군 흑치상지 3인이 중심이 되어 일본에 가있던 왕자 풍을 모셔와 부흥운동을 펼쳤다. 특히 유능한 장군 흑치상지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있는 임존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10일만에 3만명의 병력을 확보하며 사기가 충천했다. 흑치상지와 복신 등이 이끄는 부흥군은 이후에도 2백여 성을 회복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복신과 도침 사이에 반목이 생겨 복신이 도침을 살해했는데, 내분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왕자 풍이 복신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이렇게 지도부의 알력과 내분이 계속되자 금세 ‘잃어버린 백제’를 되찾을 듯한 기세가 꺾이고 왕자 풍은 고구려로 도망갔다. 왕자를 모셔오면 큰 힘이 되리라 믿었던 백제 유민들에게는 큰 실망이었다. 그런가하면 흑치상지는 백제 진영을 버리고 당나라에 항복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창 끝을 자신의 지휘 하에 있던 백제 부흥군을 향해 던지는 엄청난 배신을 저질렀다.당나라로 잡혀갔던 왕자 융은 지금 공주 땅에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꼭두각시 도독이 되었으니 4년에 걸쳐 몸부림치던 백제의 꿈과 희망은 한꺼번에 꺼져 버렸다. 심지어 흑치상지는 당나라에서 최고위직에 올랐으나 오래지않아 모함을 받아 목숨까지 잃었다. 이것이 한때 백제 회복의 황금같은 기회를 놓쳐버린 ‘백제 부흥운동’의 내막이다.어디 이 꼴사나운 모습이 백제에 한정된 것인가.몸 담았던 자기 진영을 버리고 적의 품에 안겨 함께 했던 진영에 창을 던지는 흑치상지 같은 정치 지도자가 없는가?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왕자 풍이 복신을 죽이는 것과 같은 내분으로 ‘나라 되찾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해(自害) 행위를 하는 정치 지도자는 없는가?최근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전대통령을 파는 정치는 쉬운 정치”라며 과거 지도자의 깃발을 들고 완장을 차는 오늘의 정치 풍토를 개탄했다.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며 분연히 일어선 백제 지도자들이 의자왕의 아들을 일본에서 불러 오기까지 했지만 결국 내분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린 역사적 교훈과, 김병준 교수가 지적한 과거 지도자의 깃발을 들고 정치를 하려는 오늘 우리 정치판에 대한 경고는 그래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수호천사가 될지, 저승사자가 될지 가리지 않고 영입 전쟁을 벌이는 여야. 그리고 대통령의 아들들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한국적 정치 후진성은 벗어 던져야할 때가 됐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하지 장군의 충고는 살아있다

“안철수는 시집 안간 처녀 땐 신선해 보였다. 그러나 그동안 안철수는 두 번, 세 번 시집갔다가 과수가 된 걸레가 돼버렸는데…” 이것은 지난 1월 11일 전국회의원이나 KBS 앵커 출신인 류근찬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쏟아낸 발언이다. 막말 논란이 벌어진 것은 물론 여성비하 발언이라는 반발에까지 부딪치자 류근찬 전의원은 논쟁을 접었다. 하긴 류의원 자신도 지금은 없어진 자유선진당에서 국회의원을 했고 안철수의원과 함께 ‘새천년 민주연합’ 충남도당 공동위원장을 했으며 지금은 박준영 전전남지사가 이끄는 신민당의 공동 부대표로 있다. 복잡한 정치역정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해프닝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안쓰러운 우리 한국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종인 전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선대위원장으로 영입되자 포장은 다르지만 비슷한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전두환의 국보위 시절엔 국보위에 참여하고, 이 당, 저 당에서 네차례나 비례대표를 한 사람. 심지어 박근혜대통령 당선에 역할을 맡았다가 지금 그 대치점에 있는 문재인 진영으로 가 있는 모습, 특히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되기 까지 했는데…. 이와는 별도로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끝없이 계속되며 서로 헐뜯고 물어뜯는 진흙탕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정당도 비누방울처럼 만들어졌다 사라지길 거듭하고 있는데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정당은 무로 14개나 된다. 이 숫자는 우연히도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고서 탄생한 13개 정파 숫자와 비슷하다. 1948년 5ㆍ10 선거를 거쳐 구성한 제헌의회의 정파를 보면 이승만이 총재로 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가 전체의석의 27.5%인 55석을 차지했고 한국민주당이 29석 등이었다. 남한만의 선거에 반대했던 김구는 이승만과 같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부총재였지만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정파와 제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며 매일같이 싸움으로 지새는 상황에서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미점령군 사령관 존. R. 하지 장군이었다. 많은 정파와 싸워야 했던 하지 장군은 특히 이승만과의 관계에서도 엄청 속을 썩여야 했다. 오죽했으면 그는 훗날 한국에서의 미군정 책임자로서 3년을 회고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맡았던 자리 가운데 최악의 직무(worst job)이었다.’고 했을까? 그리고 그는 1948년 8월 24일 해방 후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대한민국의 탄생이 이루어지자 한국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충고를 남겼다. “남한에는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적 정치가들이 있다. 모두 개인적 야심을 버리고 오로지 한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합심 노력해야 한다….”(차상철교수의 ‘이승만과 하지 장군’ 中) 물론 해방의 기쁨 속에 나라를 세운다는 한가지 목표에 모든 지도자들이 합심할 것으로 생각했던 하지로서는 서로의 불신과 증오, 분열과 민족지도자의 암살 등을 보면서 그가 겪어야 했던 3년의 세월은 잘못된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246개의 국회의원 선거구가 모두 사라져버린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해서 그리고 여전히 정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하여 이미 세상을 떠난 하지 장군이 또 다시 한국에 와 이 꼴을 본다면 같은 말을 되풀이할지 모른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적 정치가를 탓하고 개인적 야심을 버리라.”고….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충무공 古宅 등 경매 3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32세 늦깎이로 무과에 급제할 때 까지 살던 충남 아산시 방화산 기슭에는, 그분과 관계된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충무공 고택. 그런데 이 고택이 2009년 3월 경매에 넘어갔었다. 충무공이 말타기, 활쏘기를 하던 터까지 합쳐 경매가가 19억 6천만원. 충무공의 15대 종소 이모씨 죽고 부인 최모씨가 고택을 담보로 7억원을 대출받아 사업을 하다 실패하자, 빛을 갚지 못해 경매에 붙여진 것이다.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개탄하는 소리가 높았고 다행히 충무공의 문중에서 이를 인수하여 사태는 종식되었다. 이처럼 문화재가 경매에 넘겨져 개인이나 기업체에 넘어갈 위기를 겪는 것이 충무공 고택만이 아니다. 지난 달 문화재관리청은 아산 외암민속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의 대학자인 건재 이상익의 고택을 정부에서 매입하기로 하고 36억원을 올해 예산에 긴급 편성했다고 한다. 외암민속마을은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돼 있는데다 건재고택 역시 국가 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33호로 지정된 전통 한옥이고 그 정원 또한 조선시대의 우리 정원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고택이 후손의 빚 때문에 소유권이 200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래저축은행으로 넘어가면서 사건이 벌어졌다. 미래저축은행의 소유주 김찬경 회장은 이 고택에서 정관계 인사를 초청, 여흥을 즐기면서 로비활동을 벌였고 2012년 자신의 저축은행에서 1500억원 불법 대출을 받는가 하면 고객들을 횡령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김회장은 2012년 5월 중국으로 밀항을 시도, 경기도 화성의 한 바닷가에서 배를 타려다 잠복중인 경찰에 체포돼 9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이다. 이 바람에 아산의 건재 고택이 날벼락을 맞아 경매에 넘겨질 신세가 되었는데 다행이 문화재청이 정부 예산으로 매입을 결정한 것이다. 아찔한 경우는 또 있다. 우리 나라 역사상 최고의 개혁학자, 실학자로 존경받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하피첩(霞帖)’ 경매사건이 그것이다. 보물 1683호로 유명한 ‘하피첩’은 다산 선생이 전라도 강진에 유배생활을 하던 1807년에 이루어 진 것. 그러니까 유배를 떠난지 7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에게 부인 홍씨는 시집올 때 입었던 저녁노을처럼 붉은 치마를 보냈는데 이것은 잊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부인의 치마를 받은 다산 정약용은 그것을 잘라 책처럼 만들고 글을 써 아들들에게 보냈다. 인생의 가치, 선비의 몸가짐 등을 수록한 내용. 다산은 그 후에도 10년 더 유배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안타깝게도 1836년 회혼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런데 이처럼 귀중한 사연의 ‘하피첩’이 6.25 전란 때 후손이 분실했고 이것이 2004년에 파지 줍는 할머니에게 넘겨졌다가 다시 중간 과정을 거쳐 결국 경매에 붙여진 것.다행히 개인 손에 넘겨질 뻔한 ‘하피첩’은 지난해 9월 선생의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매입하느냐, 국립 민속박물관으로 가느냐 관심이 높았으나 결국 국립 민속박물관에서 7억 5천만원에 매입을 결정했다. 따라서 그 애틋한 부부의 사랑과 험난한 역사의 숨결이 담긴 ‘하피첩’을 국민 가슴 속으로 돌아왔다.어디 이들 문화재 뿐이겠는가? 심지어 이국땅에서 헤매는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와 역사의 혼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길 갈망할런지 모른다. 정부는 경매시장이나 불법거래로부터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전반적인 계획이 있어야겠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일그러진 골품제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최근 언론에서 5ㆍ16 군사혁명 때 출동 군인들에게 ‘혁명군’ 이라는 완장을 차게 했더니 혁명과업 수행에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군인’에서 ‘혁명군’이라는 또 하나의 특별한 신분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새로 군림한 ‘완장’을 그 막강한 위세로 모든 분야에 파고들었다. 그것이 신분사회가 갖는 매커니즘이다. 필자가 얼마 전 인도에서도 가장 현대문명의 교류가 활발한 뭄바이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우리 일행을 태우고 여러 곳을 돌아다닌 운전기사는 호텔에 도착해서는 일행의 가방을 현관문 앞 까지만 내려주고 쏜살같이 가버렸다. 안내인의 설명은 그가 인도의 카스트 신분제도에서도 ‘불가촉 천민’이기 때문에 호텔에 들어 온 수 없어 그랬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인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쉬드라 등 4계급이 있지만 실제로는 2천378개나 되는 계급사회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계급으로 이뤄진 나라. 이중에서도 100여 개 계급은 ‘불가촉 천민’이다. 일반인과 접촉할 수 없는 이름 그대로 천민. 가령 남의 빨래만 해주는 계급의 ‘도비왈라’ 역시 아버지가 빨래꾼이면 아들도 그것을 대물림해야 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집단촌을 이루고 있다. 뭄바이에서 제일 큰 빨래터 ‘도비가트’는 5천명 이상의 빨래꾼들이 구정물처럼 더러운 물속에서 빨래를 하는데 그렇게 인간 이하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루 종일 일하여 버는 돈은 우리 돈 5천원 정도. 지금도 그 깡마른 체구에 움푹 들어간 눈으로 빨래를 하던 그들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안쓰럽다. 물론 인도는 법으로 카스트제를 무효화시켰다.그러나 법은 법일 뿐 아직도 현실은 그 카스트제가 존재한다. 우리 신라도 골품제라는 신분제의 족쇄가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신분의 상승을 개인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성골, 진골이 완전한 지배계층을 이루었고 진골 아래 6두품에서는 ‘아찬’까지만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의 관직으로 계산하면 사무관 바로 아래, 군대에서는 초급 장교가 아닐까 추리해 본다. 대학자 최치원도 6두품 이어서 중국에 건너가 학문을 닦고 중국 과거시험에도 합격하였지만 신라로 귀국해서는 신분의 벽에 걸려 지배계층에 오르지 못하고 후학을 기르는데 충실했다.최신지, 최승우도 골품제 벽을 넘지 못하자 하나는 왕건에게 또 하나는 견훤에게 넘어가 결국 신라의 운명을 재촉하는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점차 골품제 신분제도가 굳혀가는 것 같다. 지난해 SNS상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던 단어 ‘금수저’ ‘흙수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노조원 역시 같은 조합원이 아니라 ‘귀족노조원’이 있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도 주류 비주류가 있다. 직장 마다 ‘정규직’이 있고 ‘비정규직’이 있으며 그 밑에 ‘일웅직’이 있다. 학생들이 빗자루로 교사를 폭행한 찬밥신세 취급을 받는 기간제 교사도 있다. 이들 비정규직은 신라의 골품제처럼 17계층 가운데 ‘아찬’ 까지만 오를 수 있지만 그것도 치열하게 싸워야 하고 대단한 운이 있어야 한다. 새누리당에서도 친박, 비박이 있고 친박은 다시 진박, 가박 등으로 구분되면서 공천을 앞두고 ‘박심(朴心) 마케팅’이 한창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 신분제도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고 그것이 사회조식을 이끄는 불가피한 힘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신분제도가 골품제처럼 폐쇄적이고 개방되지 않는 데서 오는 역기능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그래서 심각한 것이고 ‘귀족 노조원’이 있어서도, ‘흙수저’가 대물림돼서도 안 되는 것이 결국 그 폐단이 사회의 암 덩어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오늘의 명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야곱의 사다리’

지난 10월 31일 이집트 카이로를 이륙하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러시아 에어버스 A-321 여객기가 비행 23분만에 공중폭발하여 22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결국 이 사건이 IS(이슬람 국가) 소행으로 밝혀지자 가장 분노한 것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그는 즉시 시리아에 IS 주요시설, 특히 그들의 자금줄이 되고 있는 석유 시설을 폭격으로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IS가 손을 들고 말았을까? 아니다. IS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꼴을 보며 분노를 삼켜야 하는 푸틴은 ‘힘의 한계’를 느끼면서 새삼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파리 한 가운데서 IS의 테러로 130명의 사망자와 2백여명의 중상자를 낸 11월 13일의 참사를 겪은 프랑스도 엄청난 규모의 보복을 감행했지만 역시 돌아온 것은 ‘무력감’이다. 어쩌면 2015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나라 안팎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런 무력감을 화산재처럼 뒤집어쓰고 살았는지 모른다. 세월호 침몰 후 1년 8개월, 우리는 무엇을 했고 무엇이 달라졌나? 두 발을 구르며 몸부림쳤지만 오직 ‘무력감’이었다. 지난 봄부터 온 나라를 공포에 몰아 넣었던 메르스 사태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최첨단의 의료시설과 최고의 의료진으로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을 뿐이다. 참으로 해괴한 것은 국회선진화법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배웠는데 정작 민주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에서는 당리당략에 의해 이 카드를 들고 나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이럴 바에야 굳이 다수당이 되어야할 이유가 없다. 정말 이처럼 국민들에게 무력감을 안겨준 것은 일찍이 없었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를 도피처로 삼았을 때 역시 우리의 법과 공권력은 화석에서나 볼 수 있는 유니폼에 불과했다. 가계빚이 1천조에 이르는데다 취업도 하기 전에 신용불량자가 돼버린 20만명의 젊은이들, 그저 길에서라도 어깨가 축쳐진 힘없는 젊은이들을 보면 내가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진다. TV에서 한 젊은이는 19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모두 낙방이었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도 싸움으로 365일을 보내는 우리 국회! 이렇듯 ‘무력감’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말하랴. 도대체 사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큰 선박에는 으레 구명도구와 함께 밧줄로 만든 사다리가 위에서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재난을 당했을 때 이 밧줄 사다리는 선원들에게 큰 희망이 되어준다. 흔히 옛날부터 선박의 ‘밧줄 사다리’를 ‘야곱의 사다리’라고도 불렀다. 구약 성경에 야곱이 형 에사우의 미움을 받고 광야로 도망쳤는데 하루는 돌베개를 베고 자다 꿈을 꾼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모습이 보이면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꿈이었다. 그 후 이 ‘사다리’는 인간의 ‘돌베개’를 베는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구원과 희망을 말해왔고 유명한 화가들의 손을 거쳐 이미지화 되었다. 마침 지난 달,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공주 공산성 발굴 현장에서도 1400년이 넘은 사다리가 나와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참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이 사다리는 큰 행사때 소중하게 쓰여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그렇게 사다리는 방황하는 이들에게 삶의 희망이며 꿈이다. 이제 2016년을 맞아 무력감에서 벗어나도록 정치권이 뼈를 깎는 각오로 젊은 세대에게 사다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황우석, 다시 살아날까

‘세계 최초’, ‘세계 최연소’… 이런 것에 우리는 너무 열광한다. 그래서는 안될 학문에서까지도 그런 병이 있다. 지난 11월 천재 소년으로 잘 알려진 송유근군이 17세 나이로 받게 될 최연소 박사학위가 미국 천문학회로부터 ‘논문 표절’이라는 딱지를 받아 세계적 망신을 당했다. 물론 지도교수의 ‘최연소’ 조급증이 빚어진 것이 큰 원인이었지만 송군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여섯 살에 그 어려운 미적분을 척척 풀고 여덟 살에 대학을 입학한 송군은 지금 상황이야 어쨌든 천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번 논문 ‘편미분방정식’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과학자는 결과를 말할 뿐’이라는 흔들림 없는 자세를 갖고 있다. 지도교수의 논문을 인용하는 처리방식이 잘못되었을 뿐 논문의 본질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다는 뜻인 것 같다. 배아줄기세포 조작으로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음으로써 온갖 수모를 다 뒤집어 쓰고 학계에서 죽은 줄 알았던 황우석 박사 역시 과학자는 결과로 말한다라는 자세로 요즘 다시 동물복제와 줄기세포 연구에 재기를 시작했다. 정말 그를 보는 우리의 눈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그에게도 우리는 너무 조급증을 보인 것 같다. 2004년 노무현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고 3부 요인에 해당하는 경호를 받게 했으며 2005년엔 과학기술부가 제1호 최고 과학자로 선정했다. 그리고 잇단 국제학술지 논문 발표 등 노벨상을 향한 고공행진을 계속하다 배아줄기세포의 논문조작으로 하루 아침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져 부도덕한 사이비과학자로 지탄을 받았다. 그리고 이 조작 사실을 고발했던 류모 교수는 최근까지도 ‘노벨상과 권력에 대한 욕구가 빚은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황우석 박사가 지난 달, 중국 최대 규모의 줄기세포 기업인 보야라이프 그룹이 황우석박사 연구진을 불러들여 세계 최대 동물복제 공장을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2억 위안(한화 359억원)이나 되는 사업비도 중국 측에서 전부 부담하며 공장이 완성되면 연간 도축용 소를 최대 100만개까지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뿐만 아니라 마약 탐지견, 경주마도 생산하게 된다. 돼지고기 위주에서 고급 쇠고기로 입맛을 전환하는 중국인들에게 소의 대량 복제는 그 전망이 밝은 것 같다. 중국 말고도 황우석 박사는 리비아에서도 난치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 연구 등 활동무대를 확보했으나 카다피 정권의 붕괴로 무산된 바 있다. 어쨌든 그의 연구열은 그런 혹독한 비난을 받고도 다시 일어서고 있고, 무엇인가 어떤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몸부림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황 박사의 수암 생명과학연구소는 서울대에서 나온 연구진이 처음 20명에서 지금은 70명으로 크게 늘어났고 그의 연구실적 중 세계가 인정하는 NT-1에 대한 7년간의 법정투쟁에서 승소하는 등 무언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같은 상황 변화를 말해주듯 지난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 때에는 황박사의 문상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참회하겠습니다.” 2006년 1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던 황우석-그로부터 만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도 60대 중반이 되었다. 그 참회와 국민에 대한 죄책감을 보상하는 차원에서라도 다시 일어서는 그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면 우리는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는 결과를 말할 뿐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토정비결을 봐드립니다

볼리비아 같은 남미 국가 중에는 원주민들의 토착 미신행위가 깊게 뿌리박고 있어 쉽게 없어지질 않는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큰 집을 지을 때 희생제물로 사람을 산채로 땅 속에 묻고 일을 시작한다고 한다. 거기에 제물로 묻힐 사람은 병들거나 늙은 사람이 아니라 젊고 잘 생긴 남자라야 한다는 것.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지난 달, 세자녀와 어머니가 얼굴에 복면을 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가까운 지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여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얼마못가 이것이 무속인의 사주를 받고 행해진 자작극임이 밝혀져 또 한번 충격을 주었다. 무속인은 그렇게 해야 남편을 죽을 수밖에 없는 악운에서 구하게 된다고 사주한 것이다. 요즘 신문이든 잡지든 ‘오늘의 운세’ 또는 ‘이달의 운세’가 게재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나이에도 신문마다 그날의 운수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신문의 운세에는 오늘은 목(木)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손재수가 있다 하고, 어떤 신문의 운세는 목(木)씨 성을 만나면 큰 기회가 올 수도 있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부산의 한 야산에서 ‘사람살리라’는 여자의 비명을 듣고 경찰과 구조대원들이 출동했는데 범인(?)을 잡고보니 취업난에 고민하던 여성들이 그렇게하면 취업이 된다는 미신을 믿고 저지른 해프닝이었다. 경제사정이 어렵고 특히 젊은이들의 취업난이 심각한 현실을 고려할 때 그 간절한 마음이 이런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내년의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빚어지는 각종 형태의 무속행위다. ‘출마를 할까?’ ‘출마하면 당선될까?’ ‘어느 정당, 어느 쪽에 줄을 설까?’ 그에 대한 대답을 자신의 정치신념이나 그동안 닦아온 공덕에 의지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무속인이나 사주팔자를 보는 직업적 운명 감정가에 묻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하라는대로 굿을 할 수도 있고 돈을 바칠 수도 있다. 연말이 되면서 새해의 운을 보는 토정비결이 크게 번지고 있다. 토정비결을 만든 사람은 충남 보령에서 1517년 태어난 이지함 선생이다. 그는 나이 56세가 넘어 경기도 포천 현감으로 벼슬길에 나섰으나 가는 곳 마다 무리한 빈민구제사업을 벌여 상하에 갈등을 빚었다. 특히 그는 오래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임을 경고하는 등 미래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잘 알려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런 통찰력 때문에 백성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듣고자 했다. 그만큼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은 미래에 대한 갈증을 그에게서 풀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지함은 일일이 사람을 만나기가 번거로워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토정비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지함의 이름을 빌려 만든 책이지 이지함이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실 그는 나라의 부강을 위해 이미 그 시대에 해외통상을 주장했고 자원개발을 제창한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비결 따위로 백성을 계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지함 선생은 오늘 자신에게 찾아와 토정비결의 운을 묻는 정치인이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먼저 국민의 신뢰를 받으시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길은 당신 마음에 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KAIST에 온 ‘산타할아버지’

경기도 의정부시에 살고 있는 70대의 노부부가 지난 11월 16일 대전에 있는 KAIST를 찾아왔다. 강성모 총장을 만나 자신이 갖고 있는 부동산 75억원 상당을 KAIST에 유증하는 약정서를 전달했다. 유증(遺贈)이란 재산을 자식들에게 상속하지 않고 전부 무상으로 기증한다는 것. 이처럼 감동적인 쾌거를 거행한 이승웅, 조정자씨 노부부는 헤진 신발과 허름한 차림으로 사람들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이들은 그렇게 검소하게 살면서 재산을 모은 것이다. “추운 겨울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목에 순대국밥 식당에서 나오는 냄새가 몹시도 구미를 당겼지만 그걸 이기며 살았다”는 이씨는 신발도 몇 번을 꿰매어 신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다. 이들 부부는 이런 생활로 서울과 의정부에 부동산을 마련했는데 이번에 모두 KAIST에 기증한 것이다. 특별히 KAIST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과학기술의 인재를 기르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즉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들 노부부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한 과학기술-사실 이것이야 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끈 가장 큰 동력이면서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하다는 명견(明見)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위협적으로 도전받고 있는 것도 과학기술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과연 5년후에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우리의 제품이 압도하고 있을까? 우리의 자동차가 중국 거리에서 활보할 수 있을까? IT와 TV, 조선에서도 그럴까? 여기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게 우리 주변 환경이다. 그 가장 위협적인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이미 스마트폰에서 ‘화웨이(華爲)’가 우리 삼성의 갤럭시를 앞섰고 유조선을 비롯 조선 분야에서도 우리를 앞지르려 하고 있다. 더욱 두려운 것은 IT 분야다. 중국은 이 분야에 예산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있고 이미 유인 우주선을 성공시킨 기술을 발전시켜 항공산업에도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가 앞서가던 과학기술 분야에서 이제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추월을 시작했고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변변한 자원없이 과학기술에 의해 먹고 살았던 우리가 이렇게 뒤쳐지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들 노부부는 그래서 그 큰 재산을 사회복지시설이나 공공시설에 기증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이 나라의 과학기술 인재를 기르는 것이라 판단하고 그 요람인 KAIST를 찾은 것이 아닐까? 대기업가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평범한 서민의 가슴에서 그런 고민이 솟구쳤음은 참으로 박수를 보낼 일이다. KAIST는 이들 부부에게 신발을 한 켤레씩 선물하여 박수를 받았는데 그 밑바닥에는 더 뜨거운 감동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 KAIST로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찾아온 산타할아버지였다. KAIST는 TV드라마로 국민적 관심을 모은 적도 있지만 의정부 노부부가 전재산을 기증할 정도로 변함없이 국민적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만큼 KAIST가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중심에 서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 국제조사기관의 발표에 의하면 아시아에서 1위 일본 도쿄대에 이어 KAIST가 8위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미래요 희망이다. 의정부 노부부 뿐아니라 지금까지도 KAIST를 위해 재산을 내놓는 미담이 자주 있었지만 앞으로도 이런 기부 행렬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것이 곧 우리 미래의 희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공무원의 나라 ‘세종시’

세종시의 한 중국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 부처의 6급 직원이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같은 부서의 서기관 역시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6급 직원이 얼른 일어나 상급자인 서기관에 가서 인사를 했다. 자연히 부인도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런데 두 가정의 중학생 아들이 모두 같은 반 친구여서 서로들 아는척을 했다. 두 가정은 각기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6급 직원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상급자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저자세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거기다 엄마까지…. 또 서기관의 아들은 그런 속에서 우쭐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사실 공무원이 대부분인 세종시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한 포털사이트에 세종시가 마치 이런 복잡한 구조의 계급사회로 갈등을 빚는 것처럼 문제를 다루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말단 9급에서 장차관에 이르기까지 9개 부처 2만명 상당의 공무원이 어깨를 부딪치며 살고 있는 세종시에서는 의외(?)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 공직사회도 사무실 안과 밖의 자기 위치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성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제일 민감한 곳이 학교의 엄마들 모임인데 여기서도 ‘계장 사모님’, ‘과장 사모님’하는 식의 지위가 아니라 엄마의 동등한 자격으로 활동하고 있음은 다행이다. 문제는 이런 자리에서 삐딱한 사시(斜視)를 가진 사람들이 이야깃 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가령 앞에서 이야기한 중국 식당의 경우 상급자를 만났을 때, 그 가족에까지도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로 보지 않고 ‘계급사회’의 현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과장시켜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개 아버지는 아부를 잘한다”고 퍼뜨리면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병폐가 된다.마찬가지로 학교 엄마들 모임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과장 부인을 두고 학교에서까지 과장 행세를 한다고 힐란하면 정말 어떻게 되겠는가? 몇 년전 군부대가 밀집한 A지역의 심각한 문제는 바로 아빠의 계급과 관계된 것이었다. 학교 친구끼리도 ‘우리 아빠는 소령이야’하면 ‘우리 아빠는 중령인데….’하는 식의 말싸움이 자주 발생했고 그 가운데 하사관의 자녀들은 많은 열등감을 안아야 했다. 심지어 부인들까지도 계급대로 어울린다고 했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은 빠르게도 이 군부대 밀집지역의 그와 같은 현상을 불식시키고 있고 각자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추세다. 흔히 사회에서 말썽이 되고 있는 ‘갑질’의 악폐가 오히려 계급이 세분화되어 있는 공직사회에서는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 물론 국가 사회에서 계급은 어느 조직이든 없을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갈등도 있기 마련. 그래서 ‘금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사람’ 또는 ‘흙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사람’ 하는 심장을 찌르는 ‘불공정’의 세태를 개탄하는 소리도 높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동류의 계급사회-이를테면 세종시의 공무원 사회에서는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그것을 잘 조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같은 대한민국 땅이라 해도 서울 명동의 땅값, 제주도의 땅값, 그리고 세종시의 땅값이 그 역할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을 서로 인정하듯, 그 직급의 상하를 떠나 서로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中國은 中國, 美國은 美國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은 지난 9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시애틀의 보잉사에 들러 비행기 300대(3백억불)를 구매했다. 미국이 중국의 통 큰 구매에 놀란 것은 물론이다. 더 나아가 이번에는 미국 농민들이 생산한 콩을 1천3백만톤이나 사겠다고 했다. 시가 53억불. 이 통 큰 중국 주석은 한달이 못돼 영국을 방문하여 또 그런 통 큰 모습을 보여주었다. 50조원이나 되는 경제교류에 영국은 그에게 레드 카펫을 깔아주었고,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타보지 못한 황금마차를 타고 엘리자베스 여왕과 나란히 버킹엄궁으로 갔다. 이 같은 모습에 가장 배 아파할 나라는 전통적으로 영국과 가장 가까운 미국일 것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그러나 돈 앞에는 냉혹한 것이 국제사회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중국의 국내 시장이 세계 시장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한 지도 오래됐다. 또한 중국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자 세계 커피 시장이 요동을 쳤다. 전통적으로 중국 사람은 차를 즐겨 마셨고 그 역사도 4천년이나 된다. 그런데 중국의 젊은이들이 커피 맛에 길들여지면서 아예 스타벅스 같은 커피 회사가 중국 차의 최대 생산지 운남성에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대단한 변화다. 지난 여름 우리나라가 메르스 전염병으로 중국 관광객이 발길을 끊게 되자 우리 내수시장이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가. 이번에는 중국이 35년 만에 ‘한 자녀’ 정책을 폐기한다는 발표에 분유, 기저귀, 유제품의 세계 시장이 활짝 웃고 있고 특히 우리나라의 관련 주식들이 어떤 것은 하루에 주가가 10.55% 급등하는 것도 있었다.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에서 매년 5백만명 상당의 신생아가 추가 탄생을 하게 되면 중국의 유아 산업이 올해 보다 58% 커진 3조196억위안에 달할 것이고, 이에 편승해 우리나라의 남아도는 우유 문제를 비롯 유아용품 수출에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지난주 한중일 정상회담 참석차 방한한 리커창 총리의 한국산 쌀과 삼계탕 수출 장벽의 완화 조치는 우리의 쌀 문제와 인삼 농가, 양계 농가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업계는 고무되어 있다. 언제부터 중국이 이렇게 거인이 되었을까? 70년대, 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을 여행하던 일본, 한국 사람들은 문짝도 없는 남녀공용 화장실, 수준 이하의 공항, 때가 꼬질하게 낀 택시를 비웃었으며 그리고 술집과 음식점에서는 우쭐한 자세로 만원짜리 지폐를 종업원 팁으로 펑펑 뿌리지 않았던가? 우리의 많은 기업들은 싼 인건비에 중국에 공장을 짓고 생산품을 현지에 팔아 재미도 봤는데 이제 그런 시절은 옛날 이야기가 되고 있다. 이렇게 지금은 중국의 경기지수가 우리 경제에 웃음을 주기도 하고 눈물을 주기도 한다. 일본, 미국, 그리고 EU까지도 제쳐버린 중국과의 무역규모. 남북문제에서 그나마 북한에 압력을 줄 수 있는 이웃도 중국이다. 정말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단군이래, 우리 조상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5천년을 평화와 문화를 공유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으로 부딪치고 고민하여 오늘에 마주한 중국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우리의 안보와 자유민주체제를 수호한 혈맹이고 중국은 피할 수 없는 이웃이라는 이 엄연한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어느쪽에 서야 하는가? ‘중국은 중국’이고, ‘미국은 미국’이라는 어찌보면 단순 논리의 해답을 쓸 수밖에 없는 정말 이것이 우리가 갖는 지정학적 숙명이고 이 숙명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이어질 것임이 안타깝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女性 장관 1호

이달 20일이면 우리나라 여성장관 1호였고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인 임영신(任永信) 박사 38주기를 맞는다. 그의 고향 충남 금산을 비롯 올해도 몇몇 관련 단체에서 조촐한 기념행사가 마련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 그리고 한때 친일논쟁까지 불러일으킨 그의 생애는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먼저 구한말의 두터운 여성차별을 싸워야할 목표로 정했다. 여자는 학교에 가서도 안되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되는 상황. 심지어 그 아버지는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음에도 딸을 학교에 보내는 걸 거부했다. 그래서 임영신이 처음으로 결단을 내린 것은 아버지를 상대로 단식 투쟁을 벌인 것이고, 마침내 전주에 있는 지금의 여자고등학교와 같은 기전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성공한다. 기독교 계통의 여학교인데도 당시 학생들은 얼굴을 가리는 ‘쓰개치마’라는 것을 뒤집어 쓰고 다녀야 했다. 임영신은 이 역시 여성차별이라 생각하고 전교생을 움직여 ‘쓰개치마’ 거부운동을 벌였고 1916년에는 이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여학생들의 ‘쓰개치마’ 착용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여성해방운동에 어느정도 자신감을 얻은 임영신은 그 다음 항일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돌렸다. 조회때 일본 국가 안부르기, 교실에 걸려있는 일왕의 눈에 구멍내기, 그리고 마침내 31 운동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감옥에서 극심한 신체적 고통을 겪고 3년 6개월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때 그는 스스로 ‘나는 한국의 잔다르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1923년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를 운명적으로 만나 독립운동 동지가 된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 미국 언론사에 일본을 규탄하는 글을 보내고 독립운동 조직을 확산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가 얼마나 이승만박사와 호흡을 같이 했는가는 그의 호를 ‘승당(承當)’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승(承)’은 이승만의 이름 가운데 자이고 ‘당(當)’은 이승만의 집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초대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 여성장관 1호가 된 것이다.그때의 각료 명단에 여성인 그의 이름이 들어가자 세상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충격을 주었다. 지금은 여성 대통령까지 나왔지만 그때는 그랬다. 장관이 되기 앞서 임영신은 해방과 함께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 총재가 되어 이승만의 건국 작업을 도왔는데 이 역시 우리나라 여성 당수 1호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탁월한 영어 실력과 정치 수완으로 UN에 파견돼 대한민국을 승인받는다든지 625때 UN의 지원을 받는 등 눈부신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 귀국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지키기 위한 일제와의 어쩔 수 없는 제한된 협력이 친일로 매도되기도 했다. 또한 결혼의 실패, 이승만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갈등, 두 번에 걸친 부통령 출마 실패, 상공부 장관 시절 독직 혐의로 수사를 받고 결국 무죄로 끝났지만 ‘여성 임영신’이 겪어야 했던 아픈 상처도 많았다. 이런 것을은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상처들이어서 연민을 느끼게 한다. 임영신, 그는 자신의 결심대로 ‘한국의 잔다르크’가 되지 못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한 건 분명한 것 같다. 그의 38주기를 맞아 느끼는 소회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