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年末, 점(占)집이 바쁜 것은…

몇년 전 계룡산을 끼고 있는 지역의 시장으로 출마한 A씨가 선거공약으로 만든 책자에 ‘세계 무속인대회’를 개최하겠다는 것을 내놓았다. 계룡산에 무속인들이 많고, 그들이 갖고 있는 인맥에 영향력이 크니까 득표 전략상 그렇게 한 것. 그런데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다. 기독교인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목사들의 영향력이 더 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력한 시장 후보였던 A씨는 이 때문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정치인들 중에는 무속인, 점술인, 역술인들과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부 부처의 차관을 지냈고 3선 의원까지 했던 P씨는 모 역술인을 매우 가까이 했다. 선거때 후보등록을 할 때도 며칠 몇시에 하는 게 좋은지 그 역술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심지어 외국 출장을 갈 때도 그 역술인이 이번에는 안 가는 게 좋다고 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출장을 포기했다. 외국에 나가게 되면 매일 국제전화를 걸어 그날의 운세를 듣고 움직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P씨가 마지막 정치를 포기하고 은퇴를 할 때도 ‘이번에 출마하면 망신을 당한다’는 역술인의 충고 때문이었다니 얼마나 밀접한 관계였는지 알 수 있다. 하긴 우리 궁궐 안에서도 그랬고 특히 무당이 왕이나 중전을 업고 국정을 농단하는 일도 많았다. 영조 임금의 어머니가 바로 무수리였음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결국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극도 무수리 출신 어머니의 콤플렉스가 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조선말 고종임금은 일본에 의해 명성왕후를 시해당한 후, 한동안 무당에 놀아났다. 굿을 하면 죽은 명성왕후가 나타난다 하여 실제로 굿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무당이 춤을 추면서 “전하 중전마마께서 여기 오셨습니다”하면, 고종은 “어디냐”며 두 팔을 벌리고 우왕좌왕했다니 한심할 뿐이다. 이렇듯 과거 궁중의 암투와 권력을 둘러싼 모함에는 곧잘 이와 같은 무수리의 해괴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 형태를 달리할 뿐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연말연시를 맞아 곳곳의 굿집과 점집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계룡산 주변의 이름있는 굿집은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는 시간잡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서울의 대기업 회장등이 굿판을 한 번에 몇천만원에서 억대까지 거금을 내놓는다는 소문도 있다. 특히 지방선거를 앞두고 출마를 꿈꾸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 서민들이 새해를 앞두고 토정비결이나 ‘오늘의 운세’ 등을 보는 것은 심심풀이 애교로 보아줄 수 있지만 이렇듯 거액의 사례금이 거래되는 현상은 개탄할 일이다. 물론 이와 같은 심리는 정치, 경제상황이 항상 불안하고, 특히 높은 실업률과 이직률, 이혼율과 가족갈등, 자녀의 대학진학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확실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이 무엇 하나라도 있는가? 무엇 하나라도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일이 있는가? 서양 속담에 ‘통계학자가 많으면 국민이 배부르고, 점쟁이가 많으면 국민이 배고프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명문대학 출신의 석ㆍ박사들까지 본격적으로 전문 점술가가 되어, 인터넷을 활용하는 기업형 점술사이트를 차린다니 그 ‘점술 시장’이 상상 이상으로 광범위함을 알 수 있다. 반가운 현상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 정치가 국민의 불안을 씻어 주는 ‘예측 가능한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한국 칼국숫집까지 등장한 하노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베트남의 ‘호찌민ㆍ경주 세계문화엑스포’에 보낸 영상축전에서 우리가 과거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을 비추어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했다. 사실 베트남을 찾는 한국인이라면 그런 과거를 한 번쯤은 되씹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도 우리에게 매우 우호적이라는 사실. 얼핏 이해하기 힘들지만 두 나라 정부도 그렇고 국민들도 매우 선의적이다. 거의 하루에 1개의 한국공장이 베트남에 들어서고 있다고 할 만큼 우리 기업의 진출이 활발하고, 한국에 시집 온 베트남 여성은 4만2천명을 넘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거리에는 한국 자동차가 즐비하다. 택시와 버스는 거의가 한국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는 코리아 타운이 생겨날 정도로 백화점과 슈퍼 어디든 한국 상품이 눈에 띄게 많을 뿐 아니라 한국 음식점이 성업을 이루는 걸 보면 친근감이 든다. 특히 한국 특유의 칼국숫집, 설렁탕, 해장국, 떡볶이까지 등장했으니 어쩌면 베트남이 우리와 전쟁을 했다는 생각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내가 하노이에서 만난 베트남 대학생은 “우리가 과거의 덫에서 발이 묶이면 미래를 잃습니다. 미래가 더 소중하죠”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들은 ‘미래’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고, 미래를 위해 한국과의 동반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다. 정말 그들은 과거 전쟁의 상처를 벗어나 미래를 위해 뜨겁게 달리고 있다. 이번에 하노이에 갔을 때 불과 5년 전의 하노이는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지금도 거리에는 오토바이가 강물처럼 넘치지만 5년 전과는 눈에 띄게 그 숫자가 줄고, 그 대신 자동차, 특히 승용차가 부쩍 늘었다. 가는데마다 고층 빌딩 신축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공항과 항구에는 수출물량을 적재한 컨테이너가 빼곡히 쌓여있다. 하노이에서 세계적 관광지 하롱베이로 가는 길 양쪽에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벽돌공장, 레미콘공장 등 건설자재를 생산하는 시설이다. 전에는 이런 것은 보기 힘든 것이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베트남의 석유자원이다. 아시아 6대 석유생산국인 베트남은 매장량이 47억t으로 미래 베트남 경제의 원동력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 밖에도 주요 지하자원 광산을 5천개나 갖고 있는 자원부국. 그래서 10년 전 1인당 국민소득이 715달러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2천164달러로 3배가 불어났는데 이처럼 빠른 성장은 석유 같은 자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언젠가 베트남이 한국을 추월해 오는 강력한 라이벌이 될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 근거로 앞에 말한 자원 외에 국민의 60%가 30대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꼽는다. 베트남은 전쟁 후 일어난 ‘베이비붐’에 더불어 인구증가책을 강력히 추진했기 때문에 7천만 베트남 인구의 두꺼운 벽을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우리나라가 인구감소, 특히 젊은이의 벽이 자꾸만 얇아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마지막으로 그들도 한국인처럼 부지런한 국민성과 억척스럽게 일에 매달리는 근성을 꼽는다. 그 근성 때문에 몽고침략을 물리쳤고 프랑스도 이겼으며 최근에는 미국도 이겼다는 것이다. 이 근성과 자원이 무섭게 돌진하면 언젠가 한국도 추월할 수 있다는 가설. 어쩌면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될지 모른다. 정말 우리는 지금 토끼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하노이의 코리아 - 빛과 그림자

지난 주 필자가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머무르면서 그 땅에 남겨진 한국의 ‘빛과 그림자’가 너무도 강한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첫 번째 그림자는 대우그룹이 해체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곳에서는 해체를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그 존재가 살아있는 김우중 전 회장. 그가 지은 대우호텔은 하노이 중심에 자리잡은 18층 높이의 5성급 고급호텔인데 소유주가 바뀌었으나 지금도 ‘대우’라는 이름은 그대로 살아 있다. 특히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대통령, 이명박 전대통령 등 베트남을 방문하는 외국 국가 원수들의 단골 숙소가 되어 그 유명세를 더한다. 김우중 회장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하노이 인근 고급 골프장은 그의 아들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18조원이 넘는 추징금을 못내고 있는데도 은닉자금으로 이런 호화 골프장을 갖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이와 같은 논란에도 하노이에서의 김우중 그림자는 여전한다. 이 그림자 때문에 그는 서울보다 하노이를 은거지로 택한 것일까? 또 하나, 하노이를 넓게 차지하고 있는 한국의 그림자는 ‘랜드마크72’라는 경남기업이 지은 베트남 전체에서 가장 높은 72층 빌딩.(현재 81층 초고층빌딩이 건축중이지만) 거기에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성완종이라는 인물이 있다. 1조 원에 이르는 건축비, 서울 63빌딩의 3.5배가 넘는 크기… 하지만 성완종 경남기업회장은 너무나 무모하게 시작한 ‘랜드마크72’가 금융위기에다 검찰수사에 헤어나질 못한채 201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그가 남긴 쪽지에 적힌 돈 준 정치인들의 명단, 소위 ‘성완종 리스트’는 정가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고 아직도 그 후폭풍은 완전히 깨지지 않은 상태. 이런 비극적 상처를 입고 있는 ‘랜드마크72’는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성황을 이루고 있다. 5성급 호텔이 들어서 있고, 1 ~ 48층은 한국 상사들을 비롯, 외국기업체 사무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특히 2013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복과 베트남 전통의 아오자이 패션쇼에 등장, 논란이 됐던 5층의 컨벤션홀은 각종 이벤트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빛’을 발하는 한국기업도 있고, 그 가능성을 더 하고 있는 기업도 있어 다행이다. 월 600만대의 휴대폰을 생산하고 있는 삼성전자 현지공장(SEV)과 지난해 베트남 사람들에게 초코파이 돌풍을 일으켜 2천억 원의 매출을 올린 오리온제과 그리고 베트남에 새로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알루코 그룹의 현지공장(현대알루미늄비나)가 대표적인 케이스. 특히 새롭게 떠오르는 글로벌기업으로 주목받는 알루코는 고용인원이 5천명이나 되는데다 TV테두리, 휴대폰케이스등 고부가가치의 압출 생산량을 현재의 8만6천t에서 11만3천t 증가할 것으로 보여져 국내 최고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알루미늄 제품의 정상을 달리는 기업. 알루코가 베트남에서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은 한국으로 시집 온 베트남 여성들의 고향방문 지원,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베트남인들을 한국의 유명 병원에 보내 치료케 하는 것, 특히 아직은 한국 처럼 뜨겁지 않은 야구에 대한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 등이 베트남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주 우리의 선동열 국가대표 야구감독등 다수의 야구인들이 하노이에 왔는데 마침 벌어지고 있는 ‘제2회 베트남 하노이 알루코 주니어 야구대회’를 격려했다. 이렇게 알루코는 야구를 통해서도 현지인들과의 또 다른 기업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뜻에서 해외에서의 우리 기업은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이며 ‘경제대사(經濟大使)’가 아닐까? 하노이를 떠나면서 자꾸만 그런 생각을 했다. 변평섭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지방자치의 또 다른 위기

변평섭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높은 몰디브는 남부 인도양 중북부에 위치한 참으로 아름답고 깨끗한 섬이다. 그러나 앞으로 50년 후면 신혼여행은 고사하고 지도상에서 ‘몰디브’라는 이름마저 사라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몰디브뿐 아니라 남태평양의 투발루공화국 역시 9개 섬 가운데 이미 2개 섬이 물 속에 잠겼으며 1만명 주민들은 탈출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바다의 섬만이 아니라 육지의 도시들도 지도상에서 존폐의 기로를 헤매고 있다.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도시로 미국 디트로이트, 그리고 일본의 유바리시를 꼽는다. 우리나라에서도 강원도 태백시가 유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 역사상 도시가 파산선고를 받은 유일한 디트로이트는 한때 자동차산업의 메카로 번영을 누렸다. 물론 미국 자동차 산업이 다시 살아나면서 디트로이트도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일본의 유바리시 역시 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선심성 이벤트로 이름을 떨친 도시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거리의 가로등 불은 꺼지고 공공서비스는 대폭 축소되었으며 연금까지 제대로 지급을 못해 피켓을 든 시위대가 시청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17개이던 초ㆍ중ㆍ고교가 3개로 줄었으며 263명의 시청 공무원은 97명. 그리고 사무실에 난방이 안되어 공무원들이 방한 스키복을 입고 근무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1만6천명이던 인구가 900명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두 도시의 운명이 이렇게 바뀐 것은 그동안 명맥을 유지해 주던 도시의 부가자원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자동차산업과 석탄산업의 지형이 바뀐 것이다. 우리의 태백시도 폐광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계속 줄어, 현재는 시로서 갖추어야 할 인구 5만이 무너져 가까스로 4만명을 웃돌고 있다. 디트로이트, 유바리, 태백시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현재 우리 226개 지방자치, 즉 시ㆍ군 가운데 자체수입으로 소속 공무원들의 봉급을 못 주는 곳이 70여 곳에 이르고 경상남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자체는 1년 예산의 10~30%를 부채가 차지할 만큼 재정이 열악하다. 만약 20년 안에 중앙정부의 대책과 지원이 없으면 30% 상당의 지자체는 파산상태에 들어가고 3천개의 읍ㆍ면ㆍ동 가운데 1천여 곳이 쇠퇴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2040년에는 전남 고흥군의 인구는 0명이 될 것이며 2050년에는 경남 하동을 비롯 몇몇 지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논문도 발표되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박덕흠 의원과 건국대 유종선 교수가 공동 발간한 ‘지방 소멸 현황과 대처방안’에 의하면 충북도내 11개 시ㆍ군 가운데 5개군과 88개 읍ㆍ면ㆍ동이 소멸될 위기에 있다고 경고했다. 충북만이 아니다. 충남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논산, 보령, 금산, 예산, 태안, 부여, 청양, 서천 등 8개 지역이 ‘소멸 위험’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인구는 계속 감소하고 고령화 현상은 빠르게 진행되는 것과 함께 지방자치의 재정자립도는 퇴보하는 오늘의 이 현상은 정말 우리 지방자치의 심각한 위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아이를 낳으면 얼마큼의 보조금을 준다든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얄팍한 이벤트를 가지고 지역성장의 비책이나 되는 듯 제시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이 기회에 통폐합을 비롯한 행정구역의 과감한 개편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광역시의 1개 동과 비슷한 군 단위임에도 교육청, 경찰서 등 있을 기관은 다 있고 높은 직급까지 모두 거느리고 있는데 어떻게 자립을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 봐야 할 때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구두닦이 老人, 세상을 개탄하다

변평섭 우리 동네 우체국 앞 큰 길가에 구두를 수선하는 한 평 짜리 가건물이 있다. 그 안에서 70대 노인 한 분이 열심히 구두를 닦거나 구두 뒤꿈치를 수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 진지하다. 닦은 구두를 작은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은 다음 하얀 종이로 그 위를 덮는다. 그 모습이 너무 정성스럽다.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으면 깨끗이 닦은 손님 구두에 먼지가 묻어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손님 구두에 먼지를 묻혀서는 안된다’는 구두닦이 노인, 그래서 언제나 일거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좀 쉴 시간에는 신문을 펼쳐 들고 큰소리로 읽기도 하는데 특히 노인이 못마땅해 하는 기사는 패륜사건이나 사람의 명예를 함부로 다루는 기사다. 가령 자식이 부모를 살해했다든지, 난잡한 성폭력 같은 것을 너무 자세히 다루어서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것이다. 특히 사이버 언론까지 확대되면서 이와 같은 명예훼손이나 사회적 혐오 기사가 도를 넘고 있음을 개탄한다. 최근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만 해도 ‘닦은 구두에 흰 종이를 덮는 노인’의 눈에는 마뜩잖게 보일 것이다. 하나는 지난 9월 서울 신사역에서 중랑공영차고까지 가는 240번 시내버스에서 아이만 내려놓은 엄마가 소리쳐도 버스기사가 그냥 달렸다는 뉴스다. (물론 아이엄마는 다음정류장에서 내려 아이를 찾았다.) 아이의 엄마가 인터넷에 민원을 제기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은 삽시간에 ‘버스기사가 차를 세우라는 아이 엄마에게 욕설을 했다’는 등, 없는 사실까지 보태져 SNS를 달구었다. 그런데 경찰과 서울시의 조사결과는 어땠는가? CCTV 판독에서 이미 아이엄마가 차를 세워달라고 했을 때는 버스가 차로를 바꿔 차 문을 열 경우 위험한 상황이었으며, 차 안도 시끄러웠고, 운전기사의 욕설도 없었다는 것이다. 뒤늦게 아이 엄마는 버스기사에게 사과를 했지만 이미 버스기사는 부도덕한 인물로 마녀 사냥식 비난을 받았고 그 정신적 고통은 형언할 수가 없는 상태. 못을 빼도 못 자국은 남는 법.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난을 당하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판도 받기 전에 ‘죄인’의 낙인이 찍혀 파김치가 되어 버리는가? 나중에 무죄나 무혐의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최근 21년 전 자살한 가수 김광석씨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의 부인 서모씨가 마녀사냥식 난타를 당했다. 한 인터넷 언론 관계자가 만든 영화 ‘김광석’이 발표되면서 갑자기 부인 서모씨는 친딸의 살인 의혹까지 받아 가며 계속 언론을 타고 있는 것. 심지어 난타의 무대에는 국회의원도 등장하여 의혹의 판을 키웠다. 검찰은 서씨의 출국금지 조치를 했고 마침내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서씨에 대한 수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1월에야 끝난 경찰의 수사는 서씨에 대한 모든 혐의를 ‘무혐의’로 종결 지었다. 서씨는 자신을 그렇게 몰고간 인터넷 언론인에 명예훼손과 손해배상을 신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찢길 대로 찢긴 인격모욕과 억울한 누명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 질까? 다행인 것은 서씨의 경우 마녀사냥의 칼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며 결국 ‘결백’을 밝힌 것이다. 많은 사람의 경우, 범죄의 누명을 쓰고는 견디지 못하여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어느 여학교 선생님이 제자를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조사가 시작되고 언론에 보도되자 결백을 주장하며 죽음을 택했다. 정말 구두를 닦고 그 위에 티끌 하나라도 묻지 않게 흰 종이를 덮는 노인처럼, 인간의 존귀한 명예를 난도질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변평섭 칼럼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牙山이 무너지나, 平澤이 깨지나

변평섭 지도를 놓고 보면 경기도 평택과 충남 아산은 사람의 위턱과 아래턱처럼 서로 대치를 이루고 있다. 묘하게도 아래턱에 해당되는 충남 아산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와 그를 추모하는 현충사가 있다. 반대로 임진왜란 때 충무공의 강력한 라이벌 관계였던 원균의 묘소는 서로 마주보는 평택에 있다. 속담도 아니면서 가끔 결판을 가려야 할 때,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하는 말도 이들 두 장군의 갈등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는 평택의 일부가 1914년 4월 1일까지는 충남 땅이었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평택군 읍내면, 동면, 서면 등이 경기도로 편입이 된 것. 1973년 충남 아산과 경기도 평택사이의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관할 구역을 두고 양측이 충돌했다. 이때도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하는 말들이 나왔다. 농지확보와 양식어장의 크기가 경계선에 따라 달라지니 싸움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말이 충무공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오히려 1894년 7월, 이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비롯됐을 것이란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왕실경비와 동학군 봉기를 진압한다는 것으로 끌어들인 첫 외국군대는 청나라. 이에 발끈하여 일본군이 뛰어 들었고, 마침내 1894년 7월 25일, 아산만앞에 있는 풍도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와 일본의 전함이 불을 뿜었다. 청군은 임오군란을 진압했던 정여창(鄭汝昌)제독 휘하에 순양함 2척, 포함 1척, 민간상선 1척이 순양함 3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붙은 것이다. 그 무렵 충남 아산에는 청군 3천 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경기도 평택 인근 성환쪽에는 일본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은 아산에 주둔한 청군을 중국 본토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해상봉쇄를 시도했고, 이것이 마침내 ‘풍도해전’(海戰)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해전에서 청나라는 참패를 당했다. 병력 1천1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전함은 모두 불탔으며 일본 측은 1명의 전사자도 없이 완승을 거두었다. 전투는 육지로 전개됐다. 풍도해전 사흘후인 7월 29일, 아산지역에 주둔하던 청국군과 평택쪽에서 내려온 일본군이 지금 국립 종축장(일명 성환목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남의 나라에 와서 허락도 없이 싸움판을 벌인 청ㆍ일, 이때 ‘아산(청국군)이 무너지나, 평택(일본군)이 깨지나’라는 말이 강대국들의 싸움 구경만 해야 하는 우리 백성들 입에서 나왔을 것 아니냐는 것. 정말 우리는 얼마나 무력감에 빠져 있었을까? 결국 일본은 청군을 추격, 그해 9월 15일 벌어진 평양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고, 마지막엔 웨이하이에까지 쫓겨 청군의 항복을 받아 냈으며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鄭汝昌)제독은 패배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지금 우리나라는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들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뜨겁게 부딪치고 있다. 민족의 생사가 걸린 절체절명의 안보문제인데, 사실 우리의 주장대로 ‘운전대’를 잡는데는 한계가 있으며 여기에는 지정학적 운명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요즘 다시 중국 TV에 우리 전지현이 등장했다 해서 좋아할 것도 아니고, 또 언젠가 가혹한 황사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이것이 중국의 패권이다. 이를 막으려는 미국과 일본의 해양세력, 그 가운데 끼어있는 우리는 바둑에서처럼 잘 놓았다는 바둑알이 오히려 자충수(自充手)를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되어줄 수도 있다. 이래저래 우리의 고민이 클 수 밖에 없다.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그런 비극적 패착(敗着)은 다시 없어야 하는데….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멋진 싸움꾼

2015년 4월에 있었던 네팔의 진도 7.8 대지진은 보기 드문 참사였다. 9천명의 사망자, 100만채의 건물 붕괴, 그런데도 그곳 사람들은 밖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네팔을 자주 방문하는 한 언론인에 따르면 70여 개의 학교가 무너졌지만 1년이 다 되도록 1개교도 복구를 못하였고, 국제적으로 많은 지원금과 구호품이 도착했으나 처리를 못하고, 답답할 만큼 논의만 거듭하는데 놀랐다고 한다. 심지어 구호품을 정부가 아닌 집권당인 급진네팔공산당(CPN- Maoist)에서 각 정당별로 배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빨리 구호품을 배정하라든지, 시설을 복구하라고 집단행동이나 관청에 몰려가 항의를 하지도 않았다. 힌두교가 80%가 넘는 나라여서 지진 자체도 그렇고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 그리고 불행이든, 행복이든 모두를 ‘신의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권리, 자기이익을 위해 싸우려 하지 않는 것. 그러니 발전도 없을 수밖에 없는데,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면서도 행복지수는 한국, 일본보다도 높으니 결코 부러울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나라는 너무 잘 싸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좁은 땅덩어리에서 같은 민족끼리 남북으로 갈라져 70년을 대립하고 있고, 국회에서부터 지방의회까지 안 싸우는 날이 없으며 같은 정당 안에서도 파벌이 붙었다 헤어졌다를 거듭한다. 아파트 재개발지역과 노동현장에서도, 방송국에서도 고함소리는 오늘도 계속된다. 조용하게만 느껴지는 법조와 교육현장에서도 그렇고, 트럼프 미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는 현장에서까지 한쪽에서는 성조기를 흔들어 환영하고, 한쪽에서는 성조기에 불을 붙이며 반대를 외치는 나라…. 지구상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하긴 우리의 일상생활이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 그리고 취업과 경제활동 등 치열한 경쟁 속에 하다 보니 모든 것이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한다. 정말, 우리 오늘 하루가 얼마나 싸움판이었던가! 심지어 우리는 운동경기 때 응원을 하거나 수능시험장에 들어가는 학생에게도 ‘싸움’을 뜻하는 ‘화이팅(Fighting)’을 외친다. 우리나라에서나 통할 구호인데도 한국적 감정을 표현할 마땅한 구호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간바레(がんばれ)’처럼 우리도 ‘힘내라’ 할 수 있지만 강하게 와닿지는 않는 것. 하긴 이런 전투적 정신, 그것이 오늘 우리의 발전을 이룩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치열한 싸움 속에서도 ‘금도(襟度)’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권후보로 이명박, 박근혜의 진흙탕 싸움이 한창 고조됐을 때, 일본의 한 언론은 ‘한국의 정치는 인의(仁義)가 없는 싸움’이라는 칼럼을 게재했었다. 그 내용에 인용된 것을 보면 ‘일본인은 신입사원 연수 때 서로 힘내라고 격려하기 때문에 특출한 사람은 없어도 낙오자 역시 없다. 미국인은 다른 사람은 상관 않고 자기 길만 열심히 걷기 때문에 낙오자가 있다. 한국인은 뒤에 오는 사람이 앞에 가는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일본인의 지적이라 불쾌한 이야기이지만 누가 죽어도 저주를 퍼붓고 무슨 일만 터져도 욕설이 도배를 이루는 SNS의 댓글을 보면 소름 끼치는 우리의 정치, 사회, 문화 모든 것에 감염되어 있는 ‘싸움 정신’은 오염될 대로 오염되고 ‘금도’를 잃었다. 우리의 ‘싸움 정신’에 ‘금도’를 되찾을 때 우리는 더욱 가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정말 우리 멋진 싸움꾼이 될 수 없을까? 문득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망명지 미국에서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상투를 한 한국인이 서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것을 보고는 고함을 쳤다. “우리 땅에서 그렇게 싸우고도 모자라 남의 땅에 와서도 싸우는 거요!”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풀뿌리 기초단체와 정당공천제

1970년대 K씨가 충남도지사로 부임했다. 경상도 출신인 그는 부임 다음날 아침, 지사 관사에서 나와 동네 목욕탕에 갔다. 그러나 그는 관사로 돌아올 때 길을 잃어 엉뚱한 곳을 헤맸다. 할수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서야 관사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자기 관사도 못 찾을 만큼 그 지역에 어두웠던 도지사. 지방자치가 시행되지 않았던 때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어느 지방을 잘 아느냐, 모르느냐에 상관없이 중앙정부에서 도지사, 시장, 군수를 마음대로 임명했던 것. 그런데 지금은 지방의 뒷골목까지 잘 아는 것은 물론 중앙 정치무대도 잘 알아야 지방자치단체장에 오를 수 있다. 정당의 공천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시ㆍ군ㆍ구 기초자치단체장 선거는 이 때문에 지역출신 국회의원에 대한 공천헌금 등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몇 년전 영남에서 있었던 일이다. 구청장 공천을 희망하는 지망생에게 지역출신 국회의원이 충성서약을 요구하여 말썽이 됐었는데 그내용이 △C구청장이 되면 P의원의 국회의원 총선을 책임지고 치룰 것 △의원 사무실 운영을 책임질 것 △구정에 관해 주1회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하고 의원의 지시가 있으면 시행할 것 △의원의 사전허락 없이 구청장의 개인적 사조직을 하지말 것 등 이쯤되면 기초자치단체장은 출신 의원의 개인적인 집사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공천대가로 수억원의 금품을 요구 했다가 이를 거절하여 탈락한 경우도 있다. 사실 불법적인‘정치헌금’은 정치개혁의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으나 기초단체의 정당공천제도를 개선하지 않고는 피할수 없는 현실이다. 이렇다보니 기초자치단체장들은 당선 되자마자 의원에 대한 충성이행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하며, 기초의원들은 의원의 지역구 행사가 있으면 의회를 열었어도 현장으로 불려가 의석은 텅비어 버리기 일쑤다. 오죽했으면 어느 지방에서는 시의원들의 세금낭비에 대한 반환운동을 벌이기 까지 했을까. 지방 ‘소통령’이라고 불릴만큼 지역에서의 권한이 막강한 기초단체장들의 계속되는 비리도 많은 정치비용이 드는 ‘정당공천제’와 무관치 않다. 민선 4기의 경우 기초단체장 230명 가운데 15%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비리로 도중하차 해야만 했다. 심지어 지방자치가 실시된 이래 취임한 군수중에 한번도 임기를 채운 사람이 없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초자치단체장의 정당공천제배제를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제기되었으나 아직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특히 쓰레기 처리를 비롯한 환경문제, 교통문제 등 주민생활서비스가 중심이 되는 기초자치단체는 순수한 주민의사가 집합되는 곳이지 왜 여기에 정당의 간판이 필요한가 하는 주장이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 뿐만아니라 평화롭게 살아오던 마을이 군수선거로 패가 갈라지고 분란이 발생하는 일도 없을 것 아니냐는 소리도 높다. 따라서 연방제에 준하는 분권국가를 목표로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을 추진하는 정부 입장에서, 기초단체장만은 정당공천제도를 손질해야 정치개혁의 빛을 발휘할 것이다. 정당공천제가 있는 한 아무리 경선제도를 강화하는 등 개선책을 마련해도 현실적으로 지역국회의원의 파워를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이번 개헌을 계기로 정당공천제배제를 적극 추진했으면 싶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이땅에 펼쳐지는 三國志 계략정치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조조는 황급히 도망치다 진궁이라는 지방수령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러나 진궁은 조조의 수하에 들어가 그를 풀어주고 자신도 함께 조조를 따라 도망친다. 조조와 진궁은 이렇게 같은 동지가 되어 조조의 백부되는 여백사의 집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런데 잠을 자다 칼가는 소리에 잠을 깬 조조는 여백사의 친족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으로 판단, 칼가는 사람에게 달려가 목을 쳤다. 하지만 이것은 조조를 대접하기 위해 돼지를 잡으려고 칼을 가는 것이었다. 뒤늦게 이를 알고 조조는 후회했지만 다시 집을 나와 도망가는데, 출타했다 돌아오는 백부 여백사를 길에서 마주쳤다. 조조는 아무것도 모르고 반가워하는 여백사까지도 죽여버린다. 진궁이 조조에게 묻는다. “여백사는 당신의 백부님이 아니시오? 그런데 왜 죽이시오?” 그러자 조조가 대답한다. “내가 세상을 버리게 할지라도 세상이 나를 버리지는 않게 하겠다” 말하자면 여백사를 살려두면 자기 혈육을 죽인 조조에게 원한을 갖게 되니 아예 후환의 불씨를 없애야 한다는 것. 이것은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지 열 번 읽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식자층에서 평가 받고 있다. 그만큼 삼국지에는 군사는 물론 세상 살아가는 계략이 총동원 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처럼 되어있다. 적을 그럴 듯 하게 속이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거나 자해까지 하는 고육계(苦肉計), 동쪽을 치기 위해 서쪽을 치는 척 하는 양성계, 아름다운 여인을 등장시키는 미인계, 병에 걸린척하여 상대를 교란시키는 사병계(詐病計) 등등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정당한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책과 계략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특히 정치인들이 삼국지식 정략에 빠지고, 건강한 꿈을 가져야 할 젊은이들이 계략을 선호하면 비전 없는 정치, 비전 없는 삶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1996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ㆍ김종필의 소위 DJP연합이라 하여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의 공동정부가 출발했으나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련 국회의석이 17석으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그러자 민주당에서 송석찬, 장재식, 배기선, 송영진 4명의 의원을 자민련에 꾸어주어 겨우 교섭단체를 만드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제갈량의 계책으로 유비와 손권이 동맹을 맺고 적벽전투에서 조조군을 무찌른 것에 비길 수 있는 ‘삼국지’식 정치계책이다. 그래서 우리 정치인들은 삼국지를 교과서나 되듯 걸핏하면 삼국지에 나오는 고사를 곧잘 인용하는데 우려스러운 일이다. 특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에서 ‘협치’라는 이름으로 ‘협치’ 아닌 삼국지식 정략만 무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때 국민의당 연정설이 나오더니 급기야 바른정당과의 통합설, 그리고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통합설 등등 마치 2000년전 삼국지 무대가 이 땅에서 정치공학(政治工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펼쳐지는 것 같아 건강하고 깨끗한 정치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우려스럽기만 하다. 모든 것이 진화하는데 우리 정치만 진화하지 않고 삼국지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피에트로 검사와 ‘깨끗한 손’ 운동

상하 국회의원 945명 가운데 321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고, 619명에게는 국회의원으로서의 면책특권을 정지시킬 것을 요청받았다. 어느 나라 이야기일까? 이렇게 국회가 거의 통째로 부패했음을 보여준 나라, 그건 이태리다. 특히 이태리 범죄의 특징으로 이름난 마피아와의 관련이 제일 심각했다. 이런 가운데 1992년 부패와의 전쟁을 벌이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장한 것이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 당시 42세의 젊은 검사 피에트로는 집권당 거물 국회의원 카라를 구속하는 등 많은 정치인, 기업인, 관리들을 감옥에 보내며 마피아 범죄 소탕에 밤낮없이 질주했다. 미국 영화 ‘대부(代父)’가 말해 주듯 이태리 마피아는 뉴욕을 비롯 세계 주요도시의 마약, 도박장, 호텔, 부동산, 밀수 등을 손에 넣고 온갖 비리를 다 저질렀다. 그래도 국가 수사기관이나 정치권이 그들과의 연결고리 때문에 손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것. 심지어 마피아는 그들 조직에 맞서는 검사, 판사, 정치인들에 대한 살해도 서슴지 않았고 피에트로 검사 역시 그런 암살 위협을 받으면서도 소신껏 밀고 나갔다. 오히려 그는 악명 높던 마피아 두목 살 바트레리나까지도 구속시켰고 이들 거물들에 대한 구속을 집행할 때는 TV로 생중계를 함으로써 한껏 분위기를 높였다. 이렇게 되자 피에트로 검사의 인기는 대단하여 티셔츠나 맥주컵에까지 그의 사진이 등장했고 정부는 그에게 장관직을 제의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이와 같은 검찰의 사정 바람을 ‘마니 폴리테(깨끗한 손)’ 운동이라 불렀다. 사실 이때까지는 정부에서 지하철 공사를 할 때, 1㎞당 800억리라를 책정했으나 ‘깨끗한 손’ 운동이 시작되면서 440억리라로 대폭 삭감됐다. 그러니까 그동안 정부에서 발주하는 공사비가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 국민 세금을 흥청망청 축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에트로 검사가 주축이 된 ‘깨끗한 손’ 운동은 여기까지였다. 너무 지나친 사정 바람은 경제를 위축시켜 10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했고, 대형공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검사들이 나라를 망친다는 원성도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며 사임 압력이 가해졌다. 결국 국민영웅 피에트로 검사는 1994년말 사표를 냈고 ‘깨끗한 손’ 운동은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금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것을 보면 유럽에서 부패척도를 말하는 투명성에서 여전히 이태리는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스웨덴, 스위스 등이 1, 2위를 자랑하고 있다. 왜 이태리는 ‘깨끗한 손’ 운동과 피에트로 같은 젊은 검사들에 의해 순교자적 부패척결이 진행됐음에도 여전히 부패지수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지금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피에트로는 “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는 찾아냈지만 환자 격리와 항체 개발의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고백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부패와의 전쟁을 벌여 획기적인 성과를 올렸음에도 ‘환자 격리’와 ‘항체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고백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환자 격리’는 부패의 상징처럼 되었던 기민당 등 기존 정치권을 무너뜨리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주역들은 여전히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 법보다 친족지연 등을 더 중요시하는 이태리 국민성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같은 반도국가에 국민성도 이태리와 비슷하다는 우리. 고위 공직자 범죄수사처(공수처)의 설치안이 발표되었으나 피에트로 검사의 고백 또한 되씹어 봐야 할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中國의 큰손, 작은손

최근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지인을 만났다. 그는 중국의 사드보복으로 공장 가동률이 50%로 뚝 떨어져 심각한 출혈 경영을 하고 있어 인도, 베트남 등으로 공장 이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말이 50%이지 기업을 하는 사람들에겐 뼈를 깎는 아픔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막상 중국에서는 공장을 마음대로 옮기는 게 쉽지도 않아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고도 했다. 그는 중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도 센카쿠열도 영유권 문제로 중국과 갈등을 빚었을 때 3년 가까이 피해를 당했다면서 앞으로 일본 기업이 겪은 보복보다 긴 고통을 각오해야 할 것 같다고 몹시 우울해했다. 그러면서 최근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한 번은 자기 공장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자가 청구서에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여 요구했다. 그래서 왜 갑자기 가격을 높이느냐고 항의하자 업자는 단 한마디를 남기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럼 당신 마음대로 지불하시오” 참으로 황당했고 외국인 기업, 특히 한국기업이라고 이렇게 무시하는가 싶어 불쾌했다고 했다. 지난해 인기있는 모 TV연예프로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국어를 잘하는 젊은 중국인 출연자가 MC의 질문에 “자신을 냉동시켜 필요한 때 인류발전에 공헌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박수가 나온 것은 물론이다. “그럼 몇 년도에 깨어나고 싶으냐?”고 물었고, 젊은 중국인 출연자는 “외국어를 안 배워도 되는 세상이 될 때”라고 대답했다. 웃음이 터졌다. 이어 “그럼 모두가 중국어 하나만 하면 되는거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농담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시청자들 사이에는 ‘저것이 바로 잘못된 중국 중심 문화의 표현’이라고 공격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것을 ‘중화사상’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취임하자마자 러시아에 20억불의 차관을 발표하고, 2015년 9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보잉 여객기 300대를 구매하는 바람에 미국을 놀라게 했다. 그렇게 통 큰 선물을 미국에 안긴 시진핑은 영국에 가서는 영국의 원자력 발전에 11조원이나 되는 투자를 약속했다. 정말 굉장한 선물이다. 독일에 가서도 그렇게 큰 선물 보따리를 풀었고 아프리카 등 어디든 그가 가는 곳에는 선물 보따리가 있었다. 벌써 중국은 미국을 추월한 대국이 된 듯 그렇게 ‘착한 아저씨’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중국이 왜 우리에게는 그렇게 인색한 것일까? 가장 가까운 이웃이 아닌가? 중국에서 100여 개의 마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영업정지를 당하는 등 만신창이가 된 롯데는 더 견디질 못하고 철수를 결정했고, 한국여행 억제로 우리 관광업계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중국의 건국기념일인 ‘국경절’ 연휴가 시작된 지난 10월1일부터 7일까지 매년 20만명 상당의 중국 관광객이 서울을 찾았는데, 올해는 반토막도 안돼 관광수입 2천500억원이 날아가 버렸고, 북새통을 이루던 면세점은 파리를 날렸다. 긴 줄을 서가며 우리 화장품을 싹쓸이하던 요커는 어디 갔는가? 사드배치가 불만이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통제했어야지 왜 그냥 구경만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경제보복인가? (내심 북한의 핵개발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북한의 핵을 제거하면 사드도 필요 없지 않은가? 300대의 보잉 여객기를 구매하고 11조원을 원전 건설에 투자해 주는 그 큰손, 나라에 따라서는 작은손으로 변하는 중국의 이중적 잣대에 대해 천년 세월, 그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우리는 진정 괴롭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신고리 원자력 贊反을 세종대왕께 물으면…

서울대 허성도 명예교수는 우리 역사를 보는 눈을, 왜 조선은 망했느냐?의 자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왕조를 지탱할 수 있었는가?하는 긍정적 관점에서 보자고 말한다. 사실 한 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된 사례는 세계사에 흔하지 않다. 그러면 조선왕조가 이처럼 오래 유지된 힘은 무엇일까? 허 교수는 그 첫째로 ‘민의 수렴’을 꼽았다. 사실 암행어사 제도 역시 민의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고, 조선시대 가장 큰 적폐로 지적받는 당쟁도 처음에는 민의와 명분이 아니었을까? 지금 걸핏하면 여론조사라는 것이 발표되는데 이 역시 이미 조선시대에도 행해졌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종대왕때 농사의 수확량에 대한 세금 책정에 관한 여론조사. 세종대왕은 기존의 세법을 고쳐 1결당 10되의 세금을 일정하게 정함으로써 관리들의 자위적 책정을 배제하자는 것이었는데 그 찬반을 백성에게 물어보게 한 것. 17만2천여 명을 조사한 결과 찬성 9만8천여 명, 반대 7만4천여 명, 그러니까 찬성이 57%나 나왔으니 개정안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조사대상 17만명은 당시 조선의 인구로서는 성인 남자만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전 국민이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5개월이나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당연히 방망이를 두드릴 것이라 기대했던 세종대왕은 의외의 결정을 내린다. 반대 7만4천여 명도 적은 숫자가 아니며 그들에게도 그만한 의견이 있어 반대를 한 것이니 전국적 시행을 보류하고 몇몇 곳을 지정, 시험적으로 시행하는 가운데 문제점이 있는지, 있으면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를 검토 후 전국적으로 실시토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반대했던 사람도, 찬성했던 사람도 모두 흡족하여 승복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백성을 흡족하게 한 세종대왕이야말로 이미 500년 전에 여론 정치, 민의 수렴의 수범을 보였다 할 것이다.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25년)에 한글을 만들고도 반포까지 3년이나 걸린 것 역시 좀 더 시행과정을 거치면서 보완하려는 의도였고, 한글을 만든 목적 자체가 백성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요즘 신고리 원전 56호기의 운명을 결정지을 시민참여단의 최종 설문조사를 둘러싸고 제대로 찬반 의사가 공정하게 수집될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찬반에 대한 기초자료조차 시민참여단에 늦게 전달, 숙지할 시간적 여유가 너무 짧아 부실한 결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것. 공론화위원회는 지난 9월16일 충남 천안에서 시민참여단 478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바 있다. 그러나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울산시민운동본부는 그 478명의 참여단 지역배분 비율을 문제 삼았고, 특히 해당지역 주민의견에 가중치를 주자는 의견까지 나와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고 그 대답은 500년 전 세종대왕이 세제개혁을 둘러싼 찬반 여론을 어떻게 했고, 그 결과를 어떻게 처리했기에 모든 백성이 흡족해했는가를 되돌아 보는데 있을 것이다. 말로만 세종대왕을 위대한 인물이라 떠들고, 그 정신을 본받지 않는 오늘의 우리를 대왕께서는 노하실까 두렵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군번 1번’의 갈등

대한민국 육군의 군번 1번은 이형근 예비역 대장이다. 그는 1942년 일본 육사를 졸업했고, 1946년 미군정청에 의해 육군 대위로 임관되면서 군번 1번을 부여받았다. 이때 이형근보다 일본 육사 선배인 채병덕이 군번 1번을 차지하려고 무던 노력을 쏟았다. 이형근에게 1번을 빼앗기자 크게 반발하였으나 미군정청은 그대로 묵살해 두 사람의 감정은 계속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50년 6ㆍ25가 일어났다. 이형근은 제 2사단장으로, 그리고 채병덕은 군번 1번을 빼앗겼으나 참모총장이 되어 북한 인민군의 남침에 맞닥뜨리게 된다. 채병덕은 전략적 요지인 의정부를 포기하지 말고 사수할 것을 이형근 제2사단장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이형근은 탱크 하나 없이 4.2인치 박격포와 무반동총을 갖고 의정부를 사수하라는 것은 자멸이나 마찬가지라고 판단했다. 2사단에 앞서 7사단도 의정부를 사수하기 위해 싸웠지만, 탱크를 앞세워 물밀듯 내려오는 적 앞에 힘없이 무너진 상태였고 전황은 더욱 악화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형근은 채병덕에게 의정부에서 병력을 잃지 말고 한강에 제2전선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 문제로 두 장군은 싸움을 벌였다. 결국 채병덕은 이형근을 사단장직에서 해임해버리고, 최창언 대령으로 하여금 의정부 사수를 명령했으나, 이형근의 판단대로 많은 병력만 잃고 후퇴하고 말았다. ‘군번 1번’의 갈등이 결국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쟁터에서까지 작용하는 것일까?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원균은 치열한 라이벌이었다. 한 번은 전라좌수영 함대가 주축이 되어 승리를 거두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릴 때 원균은 자신도 함께 올리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공동으로 장계 올리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반목이 심해졌다. 그래서 이순신이 삼군 수군통제사로 승진하자 원균의 반발이 커졌고 할 수 없이 원균을 충청병사로 발령, 두 사람을 멀리 떼어 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휘부의 갈등은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를 가져왔다. 선조임금은 그해 이순신으로 하여금 “왜적이 몰려있는 부산진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나타날테니 공격하여 생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6ㆍ25때 의정부 전투에서 이형근이 판단했던 것처럼 ‘부산진 공격’은 적의 간계에 빠지는 것이고 병력을 잃는다며 출병을 거부했다. 화가 난 선조는 어명을 거부한 죄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옥에 가두었으며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했다. 그러나 결국 원균은 이순신의 판단대로 왜군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용감히 싸웠으나 참패를 당하고, 많은 병력과 함선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원균 자신도 전사했으며 외아들 역시 함께 전사했는데 이것이 칠천량 해전이다. 그런데 시대가 흘러 21세기가 되었는데 되풀이돼서는 안 될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송영무 국방부장관과 문정인 안보특보 사이에 북한 핵문제와 군사전력을 둘러싸고 마찰이 빚어지는가 하면, 청와대가 국방장관에게 ‘엄중주의조치’하는 경고까지 나왔다. 이 뉴스를 보는 순간 기뻐할 사람은 북한의 김정은 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전술핵 배치를 하느냐를 둘러싸고도 엇박자가 빚어져 국민들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했다. 정말 무엇이 진실이고, 또 안보의 정답은 무엇인가? 제발 국민을 불안케 하지 말기를 바란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마오쩌둥의 ‘참새잡기’ 운동

변평섭 소록도의 한센인 남성들에게 강제로 정관수술을 시행한 때가 있었다. 일제 때도 그랬고, 해방 후에도 소록도에 거주하는 남성들에게 그렇게 했다. 최근 이들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3천만원의 보상을 받는 판결을 받아냈다. 가족계획이 주요 국가시책이던 1970~80년대에도 정관수술은 ‘강제’는 아니지만 그렇게 권장되었다. 1977년에만 해도 정관수술 목표가 6만명이나 되었는데 이를 위해 공영주택입주 우선권, 새마을 취로사업 우선권 등을 내걸었고 예비군 훈련장에서는 가족계획의 홍보와 함께 정관수술이 행해지기도 했다. 그만큼 정부는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의 하나로 인구증가를 꼽았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슬로건은 ‘하나 낳기’로 변했고, 아이를 많이 거느린 부모는 전셋집도 구하기 힘든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었다. 그 결과 오늘날 저출산이 몰고 온 ‘인구 위기’에 당황하기에 이르렀고, 옥스퍼드 대학 데이빗 콜먼 교수는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소멸 국가 1호는 한국이 될 것”이라고 무섭게 경고했다. 이렇듯 정책 입안자들은 눈앞의 현상만 보고 단말적 처방을 내리기 앞서 멀리 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1958년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대약진 운동’을 전개했다. 사회주의 건설을 가속화하고 농공업 대증산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농업정책에 있어 악명 높은 ‘인민공사’의 설립은 농민을 집단화하고 생산을 공산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또 색다른 운동 하나가 있었는데 곡식을 먹어 치우는 참새를 잡으라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는 참새잡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 1958년 한 해에만 80만 마리를 잡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같은 대대적인 참새잡기 운동은 식량 증산에 기여했을까? 아니다. 참새가 줄어드니 이번에는 메뚜기가 폭발적으로 불어나 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메뚜기의 포식자 참새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 정부는 메뚜기의 천적인 참새잡기 운동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은 ‘참새잡기 운동’에서 보듯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을 생각하지 않는 저액들로 실패를 하고 만다. 제철 증산도 성과주의에 매달리다 보니 선철 30%가 품질 저하로 상품성이 떨어졌고, 심혈을 기울였던 인민공사 역시 무리한 집단화로 결국 농업 파탄을 가져왔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에서 사임하고 만다. 지금 우리는 투기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여론이 갈리고 있다. 여권에서는 부동산 보유세를 들먹이고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이를 검토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동산 보유세에 신중한 경제부총리는 자칫 조세 저항을 가져올 수 있고, 이를 실시할 경우 부동산 경기가 침체된 지역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문제로 제기한다. 탈원전 정책도 그렇다. 당장 산업용 전기요금 개편이 시행될 경우 철강업계는 2015년 보다 3조 5천68억원을 더 부담해야 하는 것으로 보도됐다. 이렇게 하여 전체 산업용 전기요금은 5조가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인데, 과연 탈원전이 본 궤도에 오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문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탈원전을 일본과 중국의 산업계가 은근히 반기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전기요금 등 생산비용 증가로 한국의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 보기 때문일 것이다. 참새를 잡으면 벼 생산량이 늘어날 것으로 오판했던 중국의 실수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왜 지금 박찬호, 박세리인가

충남 공주에는 두 스포츠 영웅을 기리는 시설물이 있다. 박찬호 시립야구장과 공주시민관 광장에 세워진 박세리의 LPGA 투어 US여자오픈대회에서 극적인 우승 장면을 재현한 조형물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은 공주시의 자산이자 대한민국의 자산이다. 73년생인 박찬호와 77년생인 박세리-70년대에 태어난 이들 두 젊은이가 국민들이 어렵고 실의에 빠졌을 때 꿈과 희망, 난관 극복의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2001년 7월 LA다저스 투수 박찬호가 160㎞의 강속구로 10승을 달성했을 때 3만2천여 관중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던 모습, 그리고 그 기립박수에 포효하던 박찬호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이었다.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으로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한국인 첫 투수 박찬호는 그렇게 IMF 3년째를 맞은 우리에게 꿈과 자신감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 무렵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이던 일본의 이치로 선수보다 3배가 많은 연봉을 받기까지 하여 기쁨을 더했다. 이렇게 124승의 신화를 창조한 박찬호가 2014년 공식 은퇴 후 박찬호 장학재단을 운영하며 유소년 야구 육성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데 야구와 관계없는 소년가장에 대한 지원사업도 하고 있다. 특히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중국과 동남아 청소년층에게 한국 야구를 심어주는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어 이른바 야구에서의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하고 있는 활동 중 가장 보람 있는 것은 해마다 공주에 있는 ‘박찬호 야구장’에서 청소년 야구대회를 개최하여 청소년 야구층을 넓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난해에는 당시 마크 W. 리퍼트 주한 美 대사까지 이 대회에 참석하여 시구를 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누구보다 1998년 IMF로 암담하던 시절,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박세리. 아시아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LPGA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박세리는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는 한국의 후배들에게 길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지난 리우 올림픽에서 골프팀 감독으로 현장을 지휘하던 박세리가 금메달을 목에 건 박인비 선수와 서로 끌어안고 흘린 눈물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그에게 가십성 이야기가 나온다 해도 그가 쌓아온 감동적인 공로를 상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골프를 사랑하고, 후배들을 위해 닦아온 길을 더 넓히고 개척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러시아까지 보내 260억 국민 혈세로 한국인 최초 우주인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미국으로 가버린 어느 젊은 여자 과학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어쨌든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현역에서 뛸 때는 주먹을 불끈 쥐고 람보처럼 포효하는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용기와 꿈을 주던 박찬호의 모습이 왜 정치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연장전 6전 6승의 끈질긴 투혼, 물 속에 맨발로 들어가 공을 쳐내던 도전정신을 보여준 박세리. 그 극적이고 감동적인 모습들이 왜 정치권에서는 이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도. 지금 우리는 북한의 핵실험과 계속되는 도발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해하고 있으며 심리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져있다. 이럴 때 이들 선수들이 보여줬던 도전정신, 그 용기를 보여줄 정치 지도자는 없는가?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평택 국제대교 사고와 ‘로마의 다리’

지난달 26일 평택시 팽성읍 신대리에 건설 중인 평택 국제대교 교각 상판 4개가 무너져 내린 사고가 있었다. 언론에 보도된 200m가 넘는 상판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는 사진은 ‘이게 어느 후진국 사고가 아닌가?’할 정도로 한심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지만 교량 하부를 지나는 국도 43호선 일부 구간의 교통이 통제되는 등 당분간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2003년 여름, 충남 금산에 내린 폭우로 건설된 지 10년도 안되는 교량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이 교량을 이용하던 차량들은 바로 옆에 있는 50년도 더 된 낡은 다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 낡은 다리는 일본 식민지시대 놓아진 다리다. 어떻게 해서 50년도 더 된 다리는 멀쩡한데 현대식 콘크리트로 산뜻하게 건설한 다리는 10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는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일제 때 다리를 건설한 일본의 건설회사가 금산군청에 공문을 보낸 것이다. 즉, 교량 수명이 다 되었으니 안전조치를 취하라는 것. 공문을 받아든 공무원들은 자기들이 건설한 교량의 내구연한을 일일이 챙기고, 공문까지 보내는 일본 건설사의 ‘사후관리’ 정신에 놀랐다고 했다. 이처럼 자기네 회사가 건설한 공사를 끝까지 확인 관리하는 일본의 기업정신은 본받을 가치가 있다는 감탄도 나왔다. 바로 이런 기업정신 때문에 일본의 잦은 지진에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것 아닐까? 1988년, 현재는 독립했지만 당시 소련 지배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에 진도 6.9의 강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2만5천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 다음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진도 7.1의 강진이 발생하였으나 인명 피해는 70명에 그쳤다. 아르메니아보다 더 큰 지진이었는데 피해는 비교가 안될 만큼 적었다. 이 밖에도 1976년 중국 하베이의 당산(唐山) 지진은 23초 짧은 순간에 24만2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문제는 건물이나 교량을 교과서대로 충실히 시공을 했느냐, 날림으로 했느냐에 따라 피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러시아, 중국, 멕시코 등에서 지진이 발생하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이번에 공사 중 무너진 평택 국제대교가 그냥 그대로 완공되었다면 혹시 모를 지진이 발생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정말 이런 공사일수록 철저한 시공과 감리가 필요하다. 로마제국은 일찍부터 길을 뚫거나 교량을 놓는 것에 철저했다. 당시 도로 건설은 주로 군인들이 했는데 그 구간마다 공사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도로공사에도 시공자의 명예와 연계시킨 것. 뿐만 아니라 로마를 가로지르는 테베레 강에는 25개의 다리가 있는데 대부분 1천년된 것이고 그중에는 2천년된 다리도 있다. 이렇게 오래된 다리이지만 별로 손대지 않고 지금까지 안전하게 이용을 하는 것이다. 서울 한강에서 발생한 1994년 10월의 성수대교 붕괴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대구 지하철화재사건, 그리고 이번의 평택 국제대교 교각 상판 일부 붕괴사건 등 크고 작은 사고로 ‘안전 불감증’에 걸리기 쉬운 우리로서는 로마의 이야기, 지진 이야기, 그리고 일본 건설사들의 성실 시공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파문 일으킨 총리의 ‘세종시’ 발언

육·해·공 3군 본부가 있는 충남 계룡시 부남리, ‘새 도읍지’라는 뜻의 ‘신도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지시로 조선 왕궁 공사를 하며 여기저기 배치했던 주춧돌 94개가 그대로 남아 있다. 돌의 크기나 규모로 보아 태조 이성계가 꿈꾸던 새 왕조의 비전이 얼마나 컸던지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전국에서 동원된 수많은 인부들이 한창 공사를 하던 1394년, 갑자기 공사 중단 조치가 내려졌다. 왜 그랬을까. 태조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던 권중화는 ‘산태극·수태극’의 계룡산 아래에 새 왕조의 터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뒷날 태종이 될 이방원의 신임이 컸던 하륜은 무악(지금의 연세대 일대)을 건의했다. 그러나 태조나 이방원 모두에게 영향력이 컸던 무학대사는 한양(지금의 경복궁 일대)을 추천했다. 계룡산 신도안을 반대하는 무학대사나 하륜의 주장은 가장 중요한 이유로 조운(漕運)을 꼽았다. 전국에서 세금(곡물)을 걷어 운반하기가 어렵다는 것, 즉 교통의 불편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풍수설’이 끼어있는 정치적 파워게임이 작용했다고 보는 면이 크다. 원래 고려 때도 개성을 떠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한양은 李씨 왕조여서 고려의 王씨는 적지가 아니라는 주장에 좌절됐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룡산은 鄭씨의 도읍지이기 때문에 李씨의 왕조가 터를 잡아서는 안된다는 것.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미 이 무렵 정치적 실세로 등장한 왕자 이방원의 계산된 야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계룡산 신도안의 왕궁 공사는 중단되었고 오늘까지 그때의 버려진 주춧돌만 남아있다. 그런데 요즘 세종시를 비롯 충청권에서 행정수도 문제, 특히 내년에 있을 개헌안에 행정수도 이전을 넣는 문제로 논란이 뜨겁다. 이와 같은 불씨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이낙연 국무총리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개헌을 통해 청와대와 국회를 세종시로 옮기는 수도 이전에 대해 다수 국민의 동의를 해주지 않을 것 같다”고 한 발언 때문이다. 특히 이 총리는 “수도는 헌법재판소에서도 관습 헌법이라고 했다”면서 “국민 마음속에 행정기능의 상당 부분이 세종으로 옮겨가는 것까지는 용인하지만, 수도가 옮겨가는 걸 동의해줄까 의문이다”라고도 했다. 이에 대해 이 지역 시민단체들과 여·야 정치인, 그리고 언론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노무현 정권 때 통과된 행정도시를 MB 정권에서 정운찬 총리를 내세워 수정안을 추진, 충청도민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가져왔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한 시민단체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과 당선 이후에도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하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같은 의견을 내놓았는데 새삼 이런 발언을 하는 배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격앙되었다. 현정권이 행정수도에 대한 모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목소리도 있다. 물론 이총리 측은 전혀 다른 의도는 없으며, 절차상 문제를 이야기한 것이라며 발언의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총리의 발언이 이슈화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공사까지 벌이다 취소되었던 도읍지의 역사적 상처를 안고 있고, 최근에는 행정도시를 산업단지로 바꾸려는 수정안에 대해 저항했던 충청도민들은 이 총리의 발언에, 그래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 총리 발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노인들을 슬프게 마오

가물치의 암컷은 새끼를 수천 마리 낳는데 그 산고 때문에 시력을 잃어버려 먹잇감을 찾지 못한다. 그러면 부화된 새끼들이 스스로 어미의 입 속으로 들어가 먹이가 되어 준다. 그래서 수천 마리의 새끼가 부화돼도 실제로 생존율은 10%가 안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까마귀에게서도 볼 수 있다. 까마귀는 가족들이 무리를 이루는데 늙어 힘이 없는 까마귀에게 젊은 까마귀들이 먹이를 물어다 입에 넣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까마귀의 효성을 옛 사람들은 교훈으로 삼았다. 까마귀는 어미에 뿐 아니라 같은 형제끼리도 우애가 좋아 서로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렇듯 동물에게도 일정 부분 ‘효’의 의식이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1975)는 생전에 한국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한국인의 효 사상, 가족제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 토인비는 감동한 나머지 눈물까지 보이며 ‘한국이 인류사회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 있다면 효 사상이다. 효는 인류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라고 격찬했다. 토인비뿐 아니라 ‘25시’ 작가로 유명한 게오르규도 197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효 중심 전통문화가 체계화되지 않으면 인류는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처럼 효는 우리 한국인의 정신적 핵심 가치였다. 그리하여 송강 정철은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지나간 후면 애닯아 어찌하리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하고 읊었다. 그러나 지금 세계가 부러워하고 높이 평가하던 효 사상과 가족제도는 그 가치가 크게 훼손되어 있다. 심지어 가족제도는 붕괴됐고 효는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높다. 이제 늙으면 ‘까마귀’나 ‘가물치’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여 요양원으로 가야할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의 일부 의원이 ‘인성교육진흥법’ 개정안을 준비하다 대한노인회를 비롯, 곳곳에서 반발에 부딪혔고 다행히 지금은 서랍 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된 것을 보면, 현행 ‘인성교육진흥법’ 2조에 ‘핵심가치·덕목은 인성교육의 목표가 되는 것으로, 예·효·정직·존중·배려·소통·협동 등의 마음가짐이나 사람됨과 관련되는 핵심적인 가치 또는 덕목을 말한다’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효’를 인성 덕목에서 제외하려 했다는 것. 충효교육을 연상케 할 정도로 지나치게 전통적 가치를 우선하고 있다는 것이 제외 이유다. 물론 우리 인성교육에서 유럽이나 일본인들의 장점으로 내세우는 배려, 소통 등의 덕목이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어 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인성교육은 글로벌시대 시민의식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효를 ‘예’의 범위 속에 포함시킨다는 발상은 자칫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소홀히 취급할 수 있는 우려가 있다. 따라서 대한노인회가 밝힌 바와 같이 ‘효는 정신적 가치로 더욱 계승·유지·발전돼야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지금 우리는 출산율 저하의 심각한 사태에 직면해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65세 이상 노인 460만명 중 72%가 노후대책 없는 딱한 처지에 있으며 노인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슬픈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이 역시 효 문화의 실종이 오늘의 사태를 불러왔음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더 이상 노인들을 슬프게 하지 말자.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中國, 의정부에 세운 ‘안중근 동상’은

변평섭 1637년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남한산성에서 인조 임금은 세자와 조정 대신 5백명을 거느리고 청나라 태종 앞에 이마를 세 번 땅에 닿는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행했다. 그러나 한 쪽에서는 항복을 반대하는 세 사람의 신하가 통곡하며 흐느꼈다. 윤집, 오달제, 홍익한. 역사는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기록하고 있다. 청 태종은 철군하면서 이들 삼학사를 세자와 함께 인질로 끌고 가 심양에 유폐시켰다. 그러나 삼학사가 그곳에 가서도 협박과 고문에 굴하지 않자, 청 태종은 이들을 처형했다. 청 태종은 그러면서도 마음으로는 조선에서 잡혀 온 삼학사의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글을 써 비석을 세우게 하고 삼학사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게 했다. ‘태산처럼 크고 북두칠성처럼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불행히도 이 비는 1960년대 ‘홍위병의 난’ 때 파괴됐다가 지금은 가까스로 복원돼 발해대학 교정 한 쪽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최근 1909년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통쾌하게 저격하던 모습을 재현한 동상이 경기도 의정부시에 세워져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상이 만들어진 계기가 시진핑 중국 주석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6월 하얼빈 만남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당시 시진핑 주석이 안중근 의사의 동상 제작을 지시했는데, 청 태종이 처형한 우리 삼학사들의 위대한 정신을 기렸던 것처럼 그도 역시 안의사의 불타는 독립정신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동상을 만든 ‘차하일’ 학회는 민간단체이지만 중국 정부의 싱크탱크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어서 더욱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동상을 보는 순간, 안중근 의사의 부릅뜬 눈과 꽉 다문 입, 권총을 꺼내려는 오른팔의 힘찬 꺾임, 하얼빈 벌판에서 불어오는 북풍에 휘날리는 외투 자락… 결연한 독립정신에 대한 경외가 느껴진다. 이 동상은 중국 하얼빈에 세워졌고 똑같은 모양의 동상이 지난 5월 인천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도 이제야 공식 발표되고 의정부역 광장 근린공원에 세워지게 된 것. 사드 문제로 인한 중국과의 냉기류 등이 공개를 지연시킨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이 안의사 동상에 신경을 쓰는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일본의 침략에 시달리며 엄청난 고통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겨누는 안의사의 결연한 모습은 13억 중국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고 그래서 우리나라와 역사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드 문제로 빚어진 중국의 경제 보복은 너무 동떨어진 발상이다. 불과 380여 년 전 우리 ‘삼학사’의 절개를 기리는 비를 세운 것처럼, 그리고 이번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운 것처럼, 한국이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이 지구상 어느 민족보다 강한 자존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중국은 알고 있다. 그런데 중국이 북한 미사일 방어를 위한 사드 때문에 한국을 찾고 싶어 하는 관광객의 발길을 끊어버리고, TV에서 한류의 프로그램을 지우며 중국 진출 한국기업에 보복을 가하는 것은 대국답지도 않고 한국과 역사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도 역행하는 것이다. 부디 의정부시에 안의사 동상이 세워지는 것을 계기로 중국은 우리의 좋은 이웃으로 다가오길 바란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議員인지, 회사원인지…

미국 최고의 극작가로 이름을 날린 밀러의 대표작은 아무래도 ‘세일즈맨의 죽음’일 것이다. 주인공 윌리는 30년 넘게 회사원으로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왔다. 회사에 공헌했다는 자부심도 지니고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하면서 30년 세일즈맨 삶의 참담한 붕괴를 겪게 된다.결국 그는 낙오자 생활을 하고 있는 두 아들에게 보험금을 남겨주기 위해 자동차를 과속으로 질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와 같은 세일즈맨의 죽음에 대해 동정을 금할 수 없지만, 또 한편으로 숭고한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지난달 자유한국당 여의도연구원이 개최한 토론회에서 발표에 나선 한 정치인이 “과거엔 초·재선 의원들이 정풍운동도 했는데 지금은 국회의원직을 즐기는 사람들만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회의원인지 회사원인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나온다”고 요즘의 정치 상황을 개탄했다. 말하자면 국회의원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회사원(세일즈맨) 같다는 뜻이다. 순간 떠오르는 것이 세일즈맨이 어때서냐는 물음이다.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윌리가 아니더라도 오늘 우리의 회사원들은 치열하게 살고 있다. 윌리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해고 통보가 날아올지 몰라도 그 순간까지 가정을 희생하면서 회사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국회의원 가운데 이처럼 눈물겨운 희생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말 우리 국회의원들, 특권의 늪에서만 살지 말고 맨발 벗은 샐러리맨의 밑바닥 길을 뛰어야 한다. 물론 과거 국회의원들의 소위 ‘정풍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주목받은 것으로는 1979년 10ㆍ26후 민주공화당 박찬종, 오유방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벌인 권력형 부정부패 척결, 정당의 민주화운동 등이 그것. 지난해에도 한 국회 예비후보가 정풍운동을 들고 나왔었는데 그 내용이 관심을 끌었다. 반값 세비, 국회의원 공항 귀빈실 이용 반대, 선수(選數) 우선주의 폐지 등이 그것이었다. 하는 일에 비해 세비가 너무 과다하여 국민들에게 괴리감을 주고 있고, 능력에 상관없이 국회 직책을 다선의원 중심으로 짜여 지는 것도 폐지하자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자유한국당 재선의원들이 지난 7ㆍ3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박 2선 후퇴’ 등을 들고 나왔지만 대세를 이루지는 못했다. 왜 이들의 정풍운동이 불길처럼 타오르지 못하고 쉽게 사그라지는 걸까? 누구나 정풍운동에 대해 이의가 없다. 국회의원의 특권을 내려놓자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는가? 65세만 넘으면 평생 월 120만원의 연금을 준다면 모두 고개를 돌릴 것이다. 청주에 물난리가 났는데도 외유를 떠난 한 지방의원은 “왜 국회의원의 외유는 문제 삼지 않고 지방의원만 가지고 시비냐?”고 항변했다. 이처럼 국회의원의 특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바로잡자는 횃불은 쉽게 꺼지는 것일까? 한마디로 관건은 누가 그 운동을 주도하느냐 하는 것이다. 국회가 한다면 초·재선급이 아니라 중진급 의원이 나서야 한다. 정파를 떠나 정치적 이해관계 없이, 역사에 남을 일을 한다는 사명의식을 가진 인물이 ‘정풍’의 깃발을 들면 국민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국회개혁-국민들은 고대하고 있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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