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강남 ‘큰 손’, 세종시를 흔들다

지난 7월22일, 세종시의 상징이 된 중앙 호수공원 광장에서 세종시 착공 10년, 세종시 출범 5년을 기념하는 축하식이 성대하게 개최됐다. 이날 기념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국무총리’에 앞서 세종시민으로 소개되어 박수를 받았고, 이어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만드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인사말을 했다. 이 곳 출신 이해찬 국회의원은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안을 동시에 투표할 텐데 세종시로 국회와 청와대를 이전하는 안을 올리겠다고 했다. 친노 좌장에 노무현 정부에서 실세 국무총리를 지낸 관록 때문에, 그의 이 같은 말은 참석한 세종시민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어 터지는 불꽃놀이는 세종시민들의 마음을 한결 설레게 했다. 이와 같은 세종시의 분위기는 지난 대선 때부터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대선후보 모두가 한결 같이 세종시의 행정수도 완성 또는 국회 분원 이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땅값이 오르고 집값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지 모른다. 금년 상반기 전국 땅값이 평균 1.8% 오른 것에 비해 세종시는 3%나 뛰었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 아파트 분양율도 전국 최고다. 보도에 의하면 전용 면적 98㎡ 아파트가 7억1천만원에 거래됐고, 지난해 12월부터 5개월간 3억6천500만원에 거래가 이뤄졌던 것이 지금은 4억3천300만원에 거래되기도 하고, 세종시에서 가장 비싼 곳으로 알려진 소담동 S아파트는 전용면적 167㎡이 13억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이와 같은 거래 형성은 앞으로 행정자치부와 미래창조과학부, 국회 분원 이전 등이 진행되면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해야할 것은 서울 강남의 ‘큰 손’이 거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는 것이다. 연합뉴스는 최근 한 보도에서 6월2일부터 사흘동안 서울에서 손님들이 몰려와 도램마을 1단지에서만 8채를 사갔다는 한 부동산 중개업자의 말을 소개했다. 또 어떤 아파트는 2014년 6월 분양가가 3억2천만원이었는데 7억원 이상에 거래돼 프리미엄이 3억9천만원, 그러니까 프리미엄이 분양가보다 높은 사태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말 강남 ‘큰 손’은 마이다스의 손인가? 자신이 만지는 것은 모두 황금이 되는 손, 심지어 가족의 몸까지도 손을 대는 순간 황금덩어리로 변하는 손-그 마이다스의 손이 지금 세종시에 나타났다는 것. 최근 강남 ‘큰 손’은 글로벌화되어 채권금리가 높아지고 있는 필리핀 국채에 손을 대는가 하면, 베트남 증시에까지 대거 진출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는 가운데 이제 세종시 부동산에까지 손을 대는 것으로 보인다. 강남의 ‘큰 손’은 더욱 크게 영역을 넓힐 것이라는 게 이곳 부동산 업계의 전망이다. 무엇보다 세종시의 인구가 지금 26만명을 넘어섰지만, 개발이 완료되는 2030년에는 80만명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주택의 수요 역시 대폭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세종시의 문화, 교육, 의료 등 각종 인프라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인구 흡입 효과를 배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문제는 프리미엄이 분양가를 초과할 정도의 부동산 과열과 투기, ‘큰 손’에 의해 시장이 좌우되는 것을 어떻게 막느냐 하는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고종 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는 우리 역사상 가장 외로운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 고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일본의 식민지 굴레에서 비극적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일본에 강제 유학을 가야했고, 원하지도 않는 남자인 대마도 도주의 후예 다케유키와 정략적 결혼을 감수해야 했다. 일본땅 대마도에서 창살 없는 감옥 같은 결혼생활을 하다보니 조발성 치매증을 앓았고 결국 이혼에, 딸까지 죽는 참담함으로 정신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조국이 해방되고 1962년 마침내 귀국했으나 지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쓸쓸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아픈 외로움이 그녀의 영혼을 잔인하게 찢어 놓았을까? 물론 그녀가 임금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테고, 감방에서 외로움을 삭히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 그 운명적 고독은 반드시 남·여,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크든 작든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삶의 동반자가 아닐까? 요즘 친구들끼리 나누는 농담이 있다. “70대에 밥해줄 마누라가 있으면 행복하고, 80대에도 전화하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다.” 80대에 전화 걸려 오는 것이 행복일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나이 먹어가면서 영혼에 짙게 젖어 오는 것은 외로움이기 때문이다. 병이라도 들면 더욱 그렇다. 하나 둘 가까웠던 사람들이 떠나고, 가족들도 뿔뿔이 헤어져 험난한 세상 살다 보니 혈육의 끈은 멀어지는데 이럴 때 전화 한 통화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전부터 관여하던 모임에 나가 젊은 세대들과 어울려 보고 싶지만 그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을 불편해한다. 그러니 어디서 누구와 어울릴까?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이런 휴가철이면 휴양지에 가서 유유자적하련만 그런 형편이 못 되는 대부분의 노인들에게는 삶 자체가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아니, 그렇게 세계여행을 하고 호화 리조트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모를까? 오히려 더 외로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외로움은 두려워해야 할 병일까.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했고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면 외로움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깊은 에너지일 수 있다는 생각도…. 특히 앞의 시에서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린다.’에서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하느님은 언제 외로워 눈물을 흘리셨을까? 나는 가끔 예수님이 언제 가장 외로우셨을까 생각해 본다. 당신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고 있는데, 십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랑하는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어머니 마리아만 눈에 보일 때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절망적인 외로움을 극복함으로써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이루었다. 그렇다고 외로움의 포로가 되자는 것도, 즐기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피하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영혼을 성숙시키는 에너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전화를 기다리는 내 자신임을 어찌 하랴.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세종시와 ‘자전거 타는 국회의원’

유명한 영화감독 빅토리오 데 시카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자전거 도둑’이 첫 상영을 한 1948년쯤만 해도 자전거는 참 귀한 존재였다. 자전거를 가족 생계수단으로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이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 아들과 함께 로마 골목을 누빈다. 그 과정에서 겪는 애환을 통해 영화는 현대인의 물질만능과 도덕적 타락상을 사실적으로 고발한다. 이처럼 가난한 서민들의 생계수단이던 자전거는 이제 도시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가령 우리나라는 자전거가 갖는 교통부담율은 전체교통량의 2.16%에 불과하지만 독일은 10%에 이르고 있으며 가까운 일본은 14%, 그리고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27%를 차지하고 있다. 인근 덴마크, 스웨덴도 비슷하게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우연히도 이처럼 자전거를 많이 타는 나라들의 국민행복지수도 세계적으로 가장 높고, 사회복지도 잘 되어있다. 행복지수가 높고 사회복지가 잘 되어서 자전거를 많이 타는 것인지, 자전거를 많이 타서 행복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모두 다 사실이다. 사실 네덜란드나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거리를 가득 메운 자전거 행렬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는다. 심지어 국회의원들 마저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모습에는 눈을 크게 뜬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번쩍이는 대형 검정 세단에 비서를 거느리고 다니는 모습만 보아온 탓이다. 특히 덴마크 국회의사당 주차장에 가득 세워진 것은 승용차가 아니라 오히려 자전거라는 사실에는 절로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나라도 자전거 타는 국회의원으로 화제가 됐던 사람이 있다. 17대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박찬석씨. 그는 경북대 총장 때도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여 뉴스가 되곤했는데 2005년 국회에 들어와서도 ‘자신은 자전거를 위해 국회에 들어왔다’고 할 정도였다. 아쉽게도 그 이후 자전거 타는 국회의원 이야기는 이어지질 못했다. 하지만 지금 공론화되고 있는 세종시로 국회 분원이 이전된다면 앞으로 세종시에서는 자전거 타는 국회의원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세종시에서는 ‘자전거타기 좋은 도시’를 적극 추진, 52.4%에 달하는 풍부한 녹지공간을 살려 세계 최고의 자전거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어 어디서나 손쉽게 자전거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자전거 타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을 것 아니냐는 것. 특히 정부청사가 있는 신도시는 자전거 교통분담율이 20%에 달할 것으로 보여 북유럽 수준이 된다는 전망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자전거 도로망 확장, 특히 수변공간에 ‘자전거 고속도로’를 설치하게 되면 오히려 북유럽을 능가하는 쾌적한 자전거 천국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세종시의 평탄한 지형과 금강을 끼고 있는 수변도로, 그리고 평균 3㎞의 통행거리 이내에 정부청사는 물론 상업ㆍ공공시설 등 주요시설이 전개돼있다는 점이 모두가 자전거를 이용하기 좋은 인프라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세종시에 있는 정부청사 공무원들의 자전거 이용률이 증가하고 있음이 이런 인프라의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온실가스의 21%가 교통량에서 발생한다는 보고가 있는 만큼 지구를 살리는 환경운동 차원에서도 국회의원들이 자전거 타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대통령 발길 뜸해진 독립기념관

‘우리가 조선을 강제로 합방하지 않았고, 조선이 원해서 합방을 했다.’ ‘독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 1982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이렇게 왜곡으로 세상에 민낯을 드러냈다. 그들이 아시아를 침략한 것도 ‘침략’이 아니라 아시아 해방을 위한 ‘진출’이라고 표현했고, 그들이 끌고 간 우리 여성들의 위안부 문제 등, 그 심각한 역사 왜곡에 온 국민이 분노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국민적 분노 속에 잉태된 것이 천안에 세워진 독립기념관. 독립정신의 뜻을 기리고, 우리 조상들의 피맺힌 독립 투쟁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설립 위치 역시 3ㆍ1 운동 당시 유관순열사가 소녀의 몸으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무대, 천안 아우내 장터 바로 그 피로 젖은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흑성산 남쪽 양지바른 언덕이다. 건설비는 국민 모금으로 충당했는데, 초등학생들의 고사리 손에서부터 해외에 나가 있는 근로자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열기 속에 490억원이 모아졌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는 몇천억원이 될 거금이었다. 국민의 염원을 담은 독립기념관은 시작 4년만인 1986년 개관 예정이었으나 그해 다음달 4일, 갑작스런 화재로 공사가 지연돼 1년 늦게 1987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역사적인 개관식을 가졌다. 9만여점에 달하는 독립운동 사료(史料)들이 모아졌고, 체험장과 야영장까지 모든 세대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으며 특히 기념관 정면에 세워진 ‘겨레의 탑’은 그 웅비함이 민족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가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것만 같다. 바로 이 ‘겨레의 탑’을 앞에 두고 이 곳에서 해마다 거행되는 3ㆍ1절 기념식이나 8ㆍ15 광복절 기념식은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 깊은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특히 1987년 첫 해의 광복절 기념식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3ㆍ1절이나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그 뜻을 높였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1995년 식목일 행사까지도 이 곳 독립기념관에서 가질 정도로 관심이 컸고, 그해 중국에 가서는 정상회담 때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한 발언 때문에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명박 전대통령 때는 5년 임기중 3ㆍ1절 기념식에 두 번 참석했을 뿐, 그 후부터는 광복절의 대통령 참석은 뚝 끊어졌다. 그러니까 대통령으로서 천안 독립기념관에서의 광복절 기념식 참석은 2004년 노무현 전대통령이 마지막인 셈. 대통령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이 곳을 찾는 입장객도 한 때 연간 300만명에 이르던 열기가 식어가고 있다. 독립기념관 설립 때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더욱 심각해지고 독도에 대한 생떼도 커지고 있는데…. 물론 독립기념관 측도 이 때문에 해외에까지 ‘찾아가는 독립기념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09년 중국 상하이를 비롯해 2014년 하노이와 호치민에 이어 올해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독립운동사 자료전시, 체험활동, 홍보영화 상영 등을 통해 해외교포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 세대에 조국의 얼과 나라사랑 정신을 심어주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초창기 독립기념관에 가졌던 그 열기를 되살리는 길이다. 그래서 올 해 8ㆍ15 광복절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할 것인지가 관심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만약 대통령이 참석한다면 그 자체로 독립기념관이 갖는 민족의 염원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신설 벤처기업부 長官, 중요하다

러시아 사람들은 ‘길을 갈 때 먼 길은 혼자서 가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미국인들은 ‘갔던 길을 다시 가지 마라’고, 독일인들은 ‘또 다른 길이 있는지 생각하고 출발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말이 있다. 이렇듯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을 금기시했고 불안하게 생각했다. 어느 때 그로 하여 무슨 변고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아는 길도 물어가는 것’이 제일 속편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은둔의 문화’를 과감히 떨쳐내고 1960~70년대 경제기적을 이룬 것은 우리 민족의 새로운 길을 찾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과연 어떻게 모두가 금기시했던 외국자본을 과감히 끌어들여,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중화학 공업을 일으켰고 세계시장을 뚫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 경제를 일으키는 것도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정신이 필요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바닥으로 추락하는 미국 경제를 일으킨 것이 벤처기업이었고, 그 중심이 실리콘밸리였듯이 지금 대한민국의 침체에 빠진 경제를 도약시키는 길 역시 제4차 산업혁명, 특히 벤처기업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벤처’는 그 말의 뜻처럼 모험성이 높고 그래서 실패율도 크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웠다면 오늘날 미국의 마이크로 소프트나 애플 같은 세계적 기업이 출현할 수 있었을까. 우리도 서울의 테헤란로가 말해주듯 이 분야에 열정적으로 뛰어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테헤란로의 불이 꺼졌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우리의 벤처산업은 거품과 도산 등 시련을 겪었고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중대한 국면 전환을 위해 몸부림 쳐왔다. 이미 인천의 송도밸리는 주위의 생산시설과 필요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대한민국 벤처의 희망이 되고 있으며 대전시는 지난 대선 당시 ‘대전을 대한민국 실리콘밸리로 육성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으로 한층 고무되어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 역시 벤처산업의 선도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등 지방 곳곳에서 벤처에 대한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함께 문재인 정부에서 중소기업과 벤쳐를 다룰 ‘중소벤처기업부’를 신설하겠다고 나섬으로써 미국의 실리콘밸리 같은 첨단과학산업도시가 곳곳에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것이 새로운 경제 도약과 일자리 창출에 결정적 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않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는 거듭 진화했는데 우리는 옛 모델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실리콘밸리의 중심 축이 IT였으나 이제는 DT(Data Technology)로 옮겨지고 있다. 바둑에 알파고가 등장했고, 드론과 무인자율주행 자동차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으며 산업현장에는 로봇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게다가 거대한 공룡같은 중국과 인도가 총력적으로 벤처산업을 추격해오고 있어 긴장을 풀 수 없다. 연구진의 확보, 자금과 정보의 지원체계, 그리고 주위에 생산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모처럼 불붙은 벤처의 열풍이 장관자리 하나 늘리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문재인 정부에서 야심적으로 시도하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전문성과 함께 새 항로를 개척하려는 뜨거운 열정이 있는 인물이 돼야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서편제’와 한풀이 政治

우리의 ‘소리’ 문화는 한(恨)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와 ‘에밀레종’ 전설은 ‘소리’라는 주제에 한이 처절하게 녹아있다. ‘서편제’ 영화 속의 유봉(김명곤 분)은 송화(오정해 분)에게 소리를 뽑는 가혹한 훈련을 시킨다. 송화의 판소리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유봉은 만족하지 않고, 그 무엇의 부족함에 가슴을 태운다. 마침내 송화의 두 눈에 청강수를 떨어뜨려 눈을 멀게 한다. 소리를 위해 눈이 먼 그녀는 완벽한 서편제 소리꾼이 된다. 그 목소리에 ‘한’이 젖어든 것이다. 에밀레종 소리에 얽힌 전설 역시 너무 처절하다. 국보 29호인 에밀레종의 공식 이름은 성덕대왕신종. 1200년 전 신라 때 만들어진 이 종은 몇 번을 거듭해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예언자의 계시대로 어린 소녀를 펄펄 끓는 청동 가마에 산 채로 던졌더니 비로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신비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것이다. ‘웅웅…’하는 종소리에는 엄마를 부르는 소녀의 외침이 배어있다는 것이고 그 ‘한의 소리’를 세계가 감탄하고 있으며 이 특별한 음향학적 기술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사실 서편제나 에밀레종과 같은 ‘소리의 한’ 말고도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넓고 깊게 ‘한’이 자리 잡고 있다. 강대국의 끊임없는 외침 속에 살다보니 그렇게 됐고, 모진 가난, 신분사회, 그리고 남녀 차별이 ‘한’을 쌓이게 했다. 정치도 ‘한의 문화’가 갖는 용광로에 녹아 ‘한국적 정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몇일 전 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는 야당과의 국회정상화, 특히 추경 합의가 불발로 끝나자 눈물을 보이며 야당을 ‘국정 발목잡기’라고 비난했다. ‘국정 발목잡기’니 ‘정치 공세’니… 참 익숙한 말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민주당이 발목을 잡고, 국회 선진화법에 묶여 시급한 민생문제가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더니…. 장관들의 인사청문회도 마찬가지. 박근혜 정권 시절,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교회 강연에서의 내용이 친일적이라는 이유로 야당은 총리 인준을 강력히 반대했고, 결국 낙마했다. 사실 그 내용은 상당부분 왜곡된 면이 많았음에도 당시 분위기는 막무가내였다. 그에 앞서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교육부총리로 청문회까지 통과되었으나 지금 교육부총리에 지명된 김상곤 전경기도교육감(당시 전국교수노동조합위원장)으로부터 강력한 사퇴 압력을 받았다. “도덕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학생들의 교육을 지휘감독하고 교수들의 연구를 촉진해야할 교육부총리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 결국 그는 몇일을 버티지 못하고 사퇴했는데, 이번에는 공수가 뒤바뀌어 김상곤 교육부총리 후보자가 역시 똑같은 의혹(논문 표절)으로 야당으로부터 사퇴압력을 받고 있다. 이래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요,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여당 할 때 다르고, 야당 할 때 다르다는 결국 ‘한풀이 정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한풀이 정치’로는 조선왕조의 비극적 당쟁사가 웅변해주듯, 정치의 미래는 없다. 야당이 여당이 되고, 여당이 야당이 돼도 ‘서편제’처럼 멀쩡한 눈에 극약을 넣어 장님을 만들어서까지 ‘한’을 찾는 정치는 이제 끝내야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政治도 농사도 물갈이가 생명이다

농부는 논에 물이 가득한 것을 보면 흐뭇해 한다. 벼농사는 물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논에 물을 가득 담는 것은 잔인(?)한 면도 없지 않다. 논바닥에 잡초가 숨을 못쉬게 공기를 차단하는 것이고 그래서 잡초는 한동안 압사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물을 빼게 되면 논의 흙에 공기가 스며들어 산소가 침투되는 효과를 보게 된다. 이때는 앞서 물을 가득 담았던 것과는 달리 바닥에 실금이 생길 정도로 거의 말라 버리게 내버려 두는데 이쯤에서 벼포기가 17개에서 25개 이상 벌어진다. 그러면 벼의 생육이 억제되고 그대신 여러 영양분이 벼이삭으로 오른다. 잠시 후 다시 논에 신선한 물을 가득 채워 벼를 튼튼하게 만드는데 그래야 웬만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벼가 된다. 그리고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맛있는 알곡을 수확할 가을을 기다린다. 이것이 물갈이다. 이 물갈이가 제대로 잘 이뤄지고 비와 바람, 태양과 조화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 풍작과 흉작이 판가름 난다. 그리고 물갈이가 실패했을 때, 그것을 ‘물갈이 망조(亡兆)’라고 한다. 정권이 바뀌어 물갈이를 하는 것도 논농사의 그것과 같다. 이런 뜻에서 역대 정권중 YS(김영삼 전대통령)시절만큼 속시원한 물갈이는 없었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물갈이에서 YS는 군을 주름잡던 ‘하나회’를 해체하고, 하루아침에 별 50여개가 떨어져 나갔으며 대민업무를 담당하던, 그리하여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되는 부서 70%를 교체시켰다. 전격적으로 단행한 금융실명제는 음산하게 뻗쳐있던 지하경제, 특히 음성적 정치자금을 차단하는 길을 열었다.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 과정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까지 법정에 세웠으니 ‘혁명적’이라는 소리가 나올만 했다. 그러나 YS의 임기가 본격화되면서 인기없는 정부가 되었고 끝내 국가를 IMF의 터널 속에 던진채 막을 내린 것은 왜일까? 논에 물을 빼서 바닥의 흙 속에 신선한 산소가 배어들게 하고 벼포기를 튼튼히, 그리고 포기의 숫자가 불어나게 하는 물갈이의 후속조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논에 물을 댈 수는 있다. 그러나 때를 맞춰 물을 빼고, 다시 물을 채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말하자면 그 물갈이가 국민들 가슴 속에 스며들어야 하고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 특히 낙마하긴 했지만 안경환 법무장관 후보 등에 국민들은 ‘물갈이’를 통해 신선함을 느끼고 있을까? 물갈이가 아니라 같은 이념, 같은 진영으로 채워진 무대의 배우 교체 정도로만 느낄까? 우리가 솔직히 이에 대한 대답을 망설일 때 프랑스에서 날라온 총선 소식은 명쾌한 답변을 제시했다. 올해 40세의 젊은 마크롱 대통령이 만든 ‘레퓌 블리크 앙 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의 압승이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원내의석 0.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566석 중 70%에 가까운 400석 또는 그 이상도 할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승리가 가능했는가? 그것은 마크롱 대통령이 보인 물갈이 솜씨다. 이념이나 진영논리로 장관을 임명하지 않고,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 통합의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국민적 감동을 얻은 것이다. 이 신선한 물갈이에 프랑스 정치를 양분해 온 사회당과 공화당은 무너질 수 밖에…. 우리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비상 걸린 서해 어족자원

여름 피서철이 되면서 바다의 상어 출현이 관심을 끌고 있다. 제주도 인근 수역에서 자주 목격되어 왔는데 지난해는 동해, 즉 영덕 앞 바다에서 24t 어선에 길이 150cm의 청상아리가 걸렸다. 특히 근래 들어 서해안에까지 백상아리가 목격되는데 이는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온의 상승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백상아리가 수온이 오르는 서해를 출산장소로 택하는 것이고, 바다 생태계의 변화에 따라 동해의 오징어 떼가 서해로 옮겨지며 이를 먹잇감으로 하는 돌고래가 이동하면서 역시 상어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해 바다는 4~8월, 상어의 출현에 해수욕객들의 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 서해는 상어보다 더 무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모 TV방송에서 일부 어부들이 소위 ‘모기장 그물’로 서해의 어족자원을 깡그리 쓸어버리는 뉴스가 있었다. 물론 서해의 우리 어장을 불법적으로 싹쓸이 하는 가장 큰 주범은 중국 어선들이다. 지난 해 우리 해경이 단속한 중국어선의 불법조업 건수가 405건에 달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TV에 나온 불법조업의 주연들은 중국 어선이 아니고 우리 어선들이었다.단속선이 나타나자 도망치는 것도 중국 어선이 아니라 우리 어선이었고, 심지어 고기가 가득 잡힌 그물을 통째로 바다에 버리고 도망치는 어선도 있었다. 이렇게 버려진 그물과 어구들이 바다 속에 가라앉아 해양오염은 물론 항해하는 선박에까지 위험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원래 그물코의 길이는 2.5cm. 그런데 이날 TV에 방영된 그물코는 5mm. 허가된 크기보다 다섯 배나 작게 만들어 어부들은 이것을 ‘모기장 그물’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모기장같이 작은 치어까지 모조리 잡히게 된다. 물론 치어를 잡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그 어린 새끼들까지 싹쓸이하는 바람에 그물에 걸린 치어들이 고기로 보이지 않고 물처럼 출렁거린다.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할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은 서해바다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해는 물론 제주도 인근 수역까지 해양 생태계를 교란시킨다. 그런데도 이들은 어쩌자고 모기장 그물을 사용하는 것일까? 이날 방영된 TV에 그 대답이 나온다. 촘촘한 그물이어서 곤쟁이나 까나리 치어 등 모든 잔고기까지 다 잡아 큰 것은 어판장으로 보내고, 작은 치어들은 그 자리에서 호스로 빨아들여 트럭에 싣고 사료공장으로 직행한다. 그러니까 대답은 돈. 가끔 단속에 걸려도 벌금이 워낙 낮아 실효성이 없고, 그나마 단속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하루에도 수백 t의 어족들이 서해바다에서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우리의 수자원은 날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해수면의 온도 상승으로 해파리 떼의 출몰에 녹조, 적조 현상, 특히 산호초의 백화현상도 심각하다. 산호초의 백화현상은 수온이 30도를 넘으면 발생하는데 그것이 곧 바다 생물의 보금자리, 먹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매우 위협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다 쌍끌이로 대표되는 저인망 어업의 확장 등에 ‘모기장 그물’ 어업까지 밤낮없이 이루어지니 우리 바다는 그저 죽어갈 수밖에 없는가? 물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해마나 수천억원을 들여 치어를 방류하는 등 어족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도 ‘모기장 그물’ 어업 같은 싹쓸이 어업으로는 ‘한강에 돌 던지기’에 불과하다. 하루 빨리 비윤리적이고 반자연적 어업형태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王과 바둑, 알파고와 바둑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로 지능적이고 전략적인 ‘스파이’하면 고구려 스님 도림을 꼽는다. 그는 장수왕 때 고구려를 치려고 열심히 준비중인 백제를 무너뜨리라는 특명을 받고 지금 서울 송파구 풍남토성에 있던 백제 수도로 밀파된다. 도림 스님은 백제의 개로왕이 바둑을 무척 좋아하는 것에 착안, 바둑을 통해 궁궐에 접근하는데 성공했고, 그의 뛰어난 바둑 실력은 곧 개로왕에게 알려져 자주 대국을 벌였다. 대국의 횟수가 늘어나자 왕은 도림 스님이 고구려에서 파견된 스파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를 왕궁에 모시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국사는 돌보지 않고 밤낮 도림과 바둑을 두며 세월을 보냈다. 바로 그가 스파이로 파견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더 나아가 도림은 개로왕으로 하여금 고구려 침공을 포기하게 만들고, 나아가 호화 궁궐을 신축하는 등 필요없는 토목공사에 국력을 쏟게 하였다. 도림은 백제를 이렇게 어지럽혀 놓고 홀연히 고구려로 도망가 장수왕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다. 장수왕은 ‘바로 지금이다’라고 판단, 남침을 감행하여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모두 빼앗았고 백제 개로왕은 지금의 서울시와 구리시 사이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그 아들 문주가 남하하여 공주(웅진성)에 새 도읍을 정하였으니 바둑에 빠진 부왕 때문에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을 얼마나 원망했겠는가. 이렇듯 백제는 임금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바둑을 무척 좋아했다. 얼마나 백제가 바둑을 좋아했는지 의자왕이 왜(倭) 조정의 실력자 후자와라 노가마타리에게 바둑판과 바둑알을 보냈다는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때 백제가 보낸 바둑판의 원목이 스리랑카 산이고, 바둑알도 절반이 상아인 것을 두고 이건 백제의 것이 아니라 중국 것이라는 이견을 내놓은 학자도 있다. 그러나 한국전통문화대학의 이도학 교수는 이미 이 무렵 백제는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해상교류가 활발한 나라였고, 그래서 스리랑카나 태국 등에서 바둑판과 바둑돌의 원자재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해 일본 바둑의 ‘중국설’을 강력히 반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교수는 일본에 전해준 바둑판의 17개 화점 숫자는 중국 바둑판과는 전혀 다르다며 의자왕의 바둑판은 백제 제작이 명백하다고 강조했다. 또 일본에 전해진 바둑판 모서리에 그려진 6마리의 낙타를 두고, 백제에 어떻게 낙타가 있느냐, 이건 중국 것이라고 하는데 이도학교수는 “일본 서기에 백제로부터 낙타를 선물로 받았다는 기록이 두 번이나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며 반박한다. 그러니까 무의식중에 우리들 문화는 얕잡아 보고, 중국 위주의 ‘문화적 사대사상’이 은연중에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닌지 우려하는 것이다. 요즘 중국에서 개최됐던 중국 제1의 바둑왕 커제와 알파고의 치열한 대국이 세계적으로, 특히 한·중·일에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세계 챔피언 5명이 머리를 싸매도 알파고는 꿈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이세돌과의 대결 후에도 알파고는 꾸준히 진화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공지능의 진화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국가대표팀의 한 감독은 알파고의 착점을 보면서 “바둑을 다시 배워야할 것 같다”고 고백했다는 보도를 보고 섬뜩함마저 느꼈다. 중국의 커제 역시 ‘알파고에게 약점이 없었다’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바둑을 통해 인공지능이 던지는 무서운 메시지일 것이다. 약점없는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앞으로의 시대는 행복일까 불행일까. 우리도 제4차 산업혁명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비정규직은 리모컨이 아니다

경기일보 5월16일자의 두 기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깊은 생채기를 끄집어낸 것 같다. 하나는 1면 머릿기사의 ‘우리는 리모컨이 아니다’며 비정규직의 절규를 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연섭 논설위원이 ‘기간제 교사’의 아픔에 대해 쓴 것이다. 정말 우리는 어느 사이에 ‘비정규직’이니 ‘기간제 교사’니 하는 말만 들어도 황사와 미세먼지에 찌든 하늘을 보는 것처럼 시야가 흐려진다. 경기일보 보도에 따르면 경기도 산하 최대 규모 공공기관 이사장이 취임 두달만에 여비서 3명을 교체했는데 그 중에는 단 하루만에 자리를 떠나는 등 보기드문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이들은 모두 비정규직이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여비서들이 사용하는 컴퓨터에서 발견된 문서의 내용이다. ‘이사장 업무사항 고충’이라는 제하의 이 문서에는 주말인데도 운전기사 불러서 사우나를 하고, 사우나 하는 동안 운전기사는 대기하는가 하면 책상 위에 리모컨이 있음에도 비서에게 TV 전원 켜달라, 채널 변경해라, 영문 이메일 워드 작업 요청 후 마음에 안들면 짜증과 고함을 지르고 심지어 원고를 던지거나 찢는다는 것. 우리는 이와 같은 비정규직이 겪고 있는 불평등과 갑질 논란에 대해 익히 보고 들어왔다. 정말 비정규직은 피곤하다. 어떤 노인이 밤늦게 지하철을 탔는데 한 젊은이가 못본 척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이를 깨워 자리를 양보하라고 했고, 그러다보니 가벼운 언쟁이 벌어졌다. 알고 보니 그는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비정규직. 그래서 피곤에 지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지금도 그 젊은이의 고단한 잠을 깨운 것을 매우 미안해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글을 한 신문에 썼다. 기간제 교사가 겪는 불평등의 고충도 심각하다. 단적인 예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2명의 기간제 교사 순직 처리다. 최근에야 순직으로 인정돼 절차를 밟는데 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학생들의 담임선생님이었고,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4층 선실로 내려갔다가 희생을 당했는데도 신분이 정식 교사가 아닌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순직 처리가 되지 못했던 것. 이들이 신분상 겪는 비애는 너무 크다. 심지어 ‘스승의 날’ 행사에서조차 기간제 교사의 가슴에 카네이션 한 송이를 달아 주어야 하느냐 마느냐로 시비가 된 학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어떤 기간제 교사는 아예 휴가를 내고 그 자존심 상하는 현장을 벗어나기도 했다니 참으로 민망스런 우리 교육 현장이다. 이처럼 비정규직 문제, 기간제 교사 문제는 지금 뜨거운 핫이슈가 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몇일도 안돼 인천공항을 방문, 임기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했고 이에 발맞춰 인천공항측이 비정규직 1만명을 모두 정규직화 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일련의 움직임이 그런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그러나 332개 공공기관 중 인천공항처럼 흑자경영을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공공기관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까지 일시에 ‘제로’시대를 열 수는 없다는데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또 전체 교원의 9.4%에 이르는 4만명이 넘는 기간제 교사들의 정규직 전환은 어떻게 할 것인가?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이 두 물줄기를 바로잡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책임자들의 ‘열린 마음’, ‘인간존중’의 정신이 더 시급하다. TV 채널 바꾸는 것까지 시키는 ‘갑질 문화’부터 바뀌어야 한다. 비정규직은 ‘리모컨’이 아니라는 의식개혁이 더 먼저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姦臣과 忠臣

“천안 명물 호두과자!” 열차에 오르게 되면 누구나 많이 들어온 소리다. 그렇게 천안은 한반도에 호두과자를 퍼뜨린 모태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 사연이 매우 역설적이다. 천안시 광덕면에 있는 유서 깊은 광덕사에는 천연기념물 398호로 지정받은 호두나무가 있다.이것이 바로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첫 호두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심은 사람이 고려말 대표적인 간신의 하나로 꼽히는 유청신. 비천한 몸으로 출세를 하여 중국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주무르며, 충렬왕과 충선왕의 피나는 부자(父子) 권력 싸움에서도 첨의정승에까지 오르는 등,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잠과 함께 1313년, 충숙왕이 방탕한데다 눈멀고 귀머거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고 원에 모함, 폐위시킬 것을 청원했다. 뿐만아니라 고려를 중국 원나라의 일개 성(省)으로 격하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완용 등 친일파들이 조선의 일본 통치를 주장한 것과 같다. 하지만 원나라의 고려 직접 통치는 고려의 애국적인 충신들로부터 거센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에서 1329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고려에 해를 끼치긴 했으나 뛰어난 공적을 하나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원나라와 한창 왕래를 하던 1290년 호두나무 묘목과 열매를 가져다 이 땅에 심은 것이다. 그래서 천안시는 ‘유청신선생 호두나무 시식지’라는 비석을 이곳에 세우고 그가 남긴 공적을 기리고 있다. 어쨌든 ‘고려 간신전’에 이름을 올린 유청신이지만 그의 손자 유탁(柳濯)에 이르러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할아버지와는 달리 손자 유탁은 대표적인 고려 충신으로 이름이 오르기 때문이다. 유탁은 벼슬이 영의정에 오를 만큼 모든 것이 출중했는데 공민왕이 죽은 노국공주를 너무 못잊어 화려하게 정전을 지으려는 것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공민왕과 추종자들이 계속 회유했지만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처형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역사는 한 뿌리에서 간신과 충신이 나오는 보기드문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그러면 무엇이 할아버지를 간신으로 만들고 손자는 충신이 되게 했을까? 할아버지 유청신도 충숙왕을 폐위시키려 할 때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다. 왕이 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사냥이나 즐기며 방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원나라가 고려를 직접 통치하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 밑바닥에는 나름대로 백성을 위한다는 변명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완용도 어차피 열강에 먹힐 썩은 고목같은 조선이라면 일본에 먹히는 것이 조선 개화에 좋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러니까 간신도 자신이 간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름대로 국가를 위하여 헌신했다고 ‘자기합리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파적 이익, 몸담은 당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것이라고 착각도 하고, 그래서 ‘정치공학적 기술자’가 빛을 보게 된다. 요즘 새 대통령이 국정에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면서 청와대를 비롯 정부 각료 등, 새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고 모든 정당들도 대선 후의 파동을 가라앉히며 새 판을 짜고 있다. 그 판을 짜는데는 정부도, 정당도 문제는 역시 사람이다. 문뜩 공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하루는 증자가 어떻게 해야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바른 말하는 신하 일곱명만 있으면 아무리 무도해도 천하를 잃지 않는다.” 머리좋은 책략가들은 많은데 바른말하는 7명의 충신이 있는지 모르겠다. 박근혜 전대통령의 비극적 말로를 보면 ‘정신칠인’의 뜻을 알 것 같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국회 권력’ 어쩌나

짜장면의 생명력은 참으로 끈질기다. 지금 1970~80대 고령층이 어렸을 때 가장 먹고 싶은 것이 짜장면이었는데, 그 보릿고개 세대를 뛰어넘은 40~50대들도, 그리고 풍요의 세대라 할 20대들에게까지도 여전히 짜장면은 인기다. 왜 그럴까?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자식들 손을 잡고 식당을 드나들며 짜장면을 먹게 했기 때문이다. 맛의 이어받기가 계속된 것. 우리의 남다른 저항정신도 짜장면처럼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독특한 DNA로 형성되었다. 가까이 일제 강점기는 언론, 문화 모든 분야에서 ‘저항’ 그것이 늘 밑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또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동선이었고 가치였다. 자유당 장기집권과 4ㆍ19, 그리고 이어지는 군부정권에 대한 저항과 6월 민주항쟁… 이렇게 켜켜이 쌓인 한국의 특수한 정치상황은 ‘저항’을 큰 자산으로 키워왔다. 그러다 보니 야당은 반대를 해야 하고, 어느 분야든 반대의 목소리가 큰 사람, 큰 조직이 위대하게 보이는 현상까지 빚어졌다. 그래서 2013년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을 지낸 다니엘 튜더 기자는 그의 한 저서에서 한국의 야당은 60~70년대 ‘반대’가 몸에 배어있다고 했다. 특히 짜장면 맛이 그대로 옮겨지듯, 우리의 그 저항의 정치 DNA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곳이 국회다. 당장 국회는 신임 총리의 인준과 장관들의 청문회가 계속될 것이며, 과거 많은 총리 후보자들을 무참히 낙마시킨 전통(?)이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 새 대통령의 정책 추진들이 국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질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오래전 국회의장을 지냈던 K씨와 함께 몇몇 지인들이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자연히 대화는 ‘미래 권력’으로 흘렀다. 누군가는 검찰권력을 이야기했고, 언론 권력, 노동권력, 시민단체 권력 등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국회의장 출신의 K씨는 분명한 어조로 ‘국회 권력’을 주장했다. 과연 미래 권력의 핵심은 국회 권력일까?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국회 권력’의 의미를 실감할 것 같다. 2012년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국회선진화법’을 추진, 여당의 독주를 막고자 했다. 정말 그렇게 하여 만든 선진화법은 정부 여당을 견제하는 효과를 보았지만 정작 자신이 대통령이 되자 선진화법은 자기 발목을 잡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정부조직법 개정 등 자신의 정책 구상이 번번이 벽에 부닥치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선진화법을 탓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 비로소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국회권력의 실체를 느낀 것이다. 이제 막 출범한 문재인 대통령의 새 정부도 피할 수 없이 ‘국회권력’의 실체와 함께 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할 것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의 의석 수는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119석. 선진화법에 구애받지 않고 소신껏 정책을 펴나가는데 필요한 180석에는 61석이 부족하고, 과반수에는 30여 석이 부족하다. 제1야당이 된 자유한국당 역시 107석으로 법안 처리를 독자적으로 추진하려면 다른 야당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정말 절묘한 국회의석 구조를 이루어 누구든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우리 국회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협치와 통합.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끼리 손을 잡는 것은 협치와 통합이 아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 것이 협치요, 통합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고도의 정치테크닉이 필요하고 열린 마음, 열린 정치가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만은 ‘국회선진화법’을 원망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협치와 통합의 정치가 실현되길 기대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1센트 동전의 警句

5ㆍ16 거사의 주역이었던 김종필씨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5ㆍ16 전야에 4천500장의 ‘혁명군’ 완장을 급히 제조해 출동 군인들에게 차게 했다고 회고 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긴장 속에 출동한 군인들에게 긍지와 안도감을 줄 심리적 도구가 필요했다는 것이고, 일반군과 구별하기 위해서라는 것. 그 무렵 사병으로 복무하던 필자의 눈에도 완장을 찬 군인들이 위성에서 온 것처럼 높게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며칠 안돼 ‘혁명군’ 완장은 모두 회수되었다. 이렇듯 빨리 회수한 목적은 타 부대와의 위화감 때문. 사실 완장은 전쟁 때 부상병 수송과 치료를 위한 위생병의 적십자 완장, 지진 피해 현장의 구조대원 완장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거부감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제 치열했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면 누가 승자가 되든 그 주변에 완장 부대가 생겨날 것을 우려하는 소리가 많다. 물론 승리의 뒤에는 승리를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공신(功臣) 제도가 있어 개국을 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 또는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을 포상했다.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고 새 왕조의 개국에 결정적 역할을 한 배극렴을 1등 공신으로, 52명을 선정해 토지와 노비 등을 하사했다. 이른바 ‘개국 공신’이었던 것. 이들 공신들에게는 생존시 봉록과 함께 지위를 높여주고 죽은 뒤에는 위호(位號)를 내리는데 그것이 자손대에까지 계승된다. 그래서 그 공신 서열이 불공정할 경우 오히려 큰 화를 불러 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1624년의 ‘이괄의 난’. 이괄은 인조 반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에도 1등 공신이 되지 못하고 김사점, 김유 등에 밀려 2등으로 낼 앉은 것이 계기가 되어 난을 일으켰고, 인조 임금은 난을 피해 충남 공주에까지 피란을 와야 했었다. 이렇듯 ‘공신’에 대한 배려는 자칫 분란을 일으키기 일쑤인데, 5ㆍ16 쿠데타에서도 함께 ‘혁명군’ 완장을 차고 거사에 참여한 군인들끼리 포상의 자리에 따라 내분이 생기곤 했다.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그런 우려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모둔 후보가 한결같이 ‘통합’을 강조한 만큼 ‘완장부대’니 ‘공신’이니 하는 말이 결코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국가적 통합을 깨뜨리는 훼방꾼이기 때문이다. 정말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은 너무나 엄중하다. 계속되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핵 위협에 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 등 안보 상황이 국민적 통합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가 죽고 사는 절박한 생존 문제이기 더욱 그렇다. 출산 절벽, 취업 절벽, 심각한 소득격차, 사상 최악의 가계 부채, 거기에다 초고령화 사회 진입…이것이야 말로 초당적, 초계파적 역량을 총집결하지 않고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다. 미국의 동전 1센트 짜리에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 링컨 초상이 있고, 그 밑면에 ‘E Pluribus Unum’이라는 라틴어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된다”는 뜻. 우리에게도 깊은 메시지가 될 것 같다. 완장도 없고, 공신도 없는-여럿이 모여 하나가 되는 대한민국.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우리나라 화장실의 남성용 변기에도 요즘 들어 파리를 그려 넣은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 파리를 조준하느라 소변의 80%를 밖으로 흘려버리지 않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을 세계적 베스트셀러 ‘넛지(nudge)’의 저자이기도 한 시카고 부스 경제대학원 리처드 탈러 교수가 ‘행동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로 접근했다. 미국 정부의 경제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는 암스테르담 공항 화장실의 파리 모양 스티커 등을 예로 들면서 ‘행동경제학’으로 사람들의 선택 과정을 해석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가령 자동차를 사려고 할 때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선택을 했는데 막판에 타사의 세일 광고나 사은품 따위의 광고 같은 것, 또는 하찮은 편견에 의해 다른 차종으로 바꾸는 것도 그렇게 해석한다. 그는 이것을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이라고 명명했다. 어떤 50대 부부가 국산 영화를 관람하기로 하고 예약까지 했다. 그런데 영화관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그들이 보려는 영화 이야기를 나누다 주연 여배우의 확인되지 않은 스캔들이 화제가 됐다. 그러자 갑자기 부인이 영화를 안보겠다고 선언했다. 부도덕한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보기 싫다는 것. 남편은 ‘영화는 영화이고 여배우의 스캔들은 별개’라며 부인을 설득했지만 결국 예약을 취소하고 엉뚱한 영화를 보아야 했다. 마지막 순간에 선택을 바꾸는, 말하자면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은 모든 사람들이 많은 분야에서 저질렀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번, 또는 수백번 선택과 결정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실수와 시행착오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대통령들이 임기 중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때 마다 나오는 이야기가 “○○바다에 가면 짤린 손가락이 가득 떠다닌다”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그 대통령을 지지하여 찍었던 사람들의 후회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후회하면서도 또 선거 때만 되면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은 되풀이 되어 왔다. 영화를 보러갔던 부부가 편견과 정보 과잉으로 마지막 순간 선택을 바꾸었던 것처럼. 그렇다. 정보화시대에 너무 많은 정보는 우리의 선택을 힘들게 하고 치명적 실수를 범하게도 한다. 과거, 갇혀있던 정보가 이제는 사돈의 팔촌 예금통장은 물론 초등학교 때 병원 다닌 것까지 과잉 공급되고 있으며 여기에다 ‘가짜뉴스’까지 진짜처럼 포장되어 범람하는 바람에 유권자는 곧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SNS상의 지능적이고 악의적인 작전 세력은 ‘선택의 방해꾼’이 되고 있다. “A를 찍으면 X가 대통령이 된다.” “B를 찍으면 X가 대통령이다.” 하찮은 한 줄짜리 이 괴담의 위력은 그 파급력이 대단하다. 유권자들은 너무 혼란스럽다. 사드 문제, 북한 문제에 대립적이던 후보들이 투표일이 가까워지자 색깔을 구별할 수 없게 변색을 하고 있으며 경제문제, 복지 문제까지 헷갈리게 한다. 정말 이제 투표일을 코 앞에 둔 지금, 유권자들을 피곤하게 하는 정황이 너무 심각하다.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이 나오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JP의 침묵

정부 수립 후 초대 상공부 장관이 된 임영신(任永信)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장관이기도 하다. 그는 1년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 1949년 경북 안동에서 실시된 국회의원 출마하여 당선됐다. 임영신은 충남 금산 출신. 금산은 5ㆍ16후 충남에 편입되었지만 그때는 전라북도였다. 이렇듯 호남 사람이면서도 TK의 중심이라고 할 경상도 안동에서 당선된 것이다. 임영신 뿐 아니라 민주당 정권 때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지낸 조재천(曺在千) 역시 전라남도 광양 출신인데도 1954년 대구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그러니까 이때만 해도 망국적인 지역 감정이 없었다는 뜻이다. 지역감정은 소위 ‘3金 정치’를 거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고 호남, 영남, 충청에 기반을 둔 정당들은 이렇듯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성역으로 만들었다. 가령 충청도에서 ‘맹주’ 역할을 한 JP(金鍾泌)는 DJ(金大中)의 호남, YS(金泳三)의 영남처럼 한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 두고 신라·백제 때와 비교하여 ‘후3국 시대’라고도 했고 ‘황금 분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JP가 만들었던 신민주공화당이나 자민련의 공천만 받으면 충청도에서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호남, 영남도 거의 비슷했고 투표 때마다 몰표가 쏟아졌던 것. 그런데 최근 들어 대구에서 민주당의 김부겸 의원이, 전라남도 순천에서 새누리당(지금은 자유한국당) 김정현 의원이 끈질긴 도전 끝에 국회에 진출했다. 콘크리트 바닥과 같이 단단한 지역감정을 뚫는 정치 실험에서 성공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 실험은 이제 상당한 진화를 보이고 있다. JP가 이 뜨거운 대선 정국에서도 침묵하고 있는 것이 그 증표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만 해도 JP의 휠체어를 밀고 TV 화면에 함께 하는 사진이 나오도록 눈치를 보던 후보들이 충청도에 많았다. 더 가까이는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이 귀국하자마자 JP를 방문했고, JP는 반기문씨를 적극 도울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때만 해도 ‘충청 대망론’의 분위기에서 ‘반기문총장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었고, 충청도 맹주로 칭하는 JP의 뜨거운 지원은 날개를 달아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반총장의 대선 포기 선언이 나오자 JP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났다. 물론 그 후에도 몇몇 대선 후보들이 청구동을 찾았지만 그건 의례적인 것이었고, 뜨거운 에너지를 헤집어 찾기는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지역주의에 재미를 보던 선거 풍토가 퇴장하고 있는 것이다. 홍준표, 유승민 후보 등, 그들 정치기반이었던 TK에서 안철수, 문재인 후보에게 밀려 1, 2위 양강구도를 빼앗기는 여론조사도 그렇다. 더불어민주당 경선 때 충남지사 안희정 후보가 그의 안방 충청도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1등의 자리를 내준 것 역시 이제 지역 대결의 시대가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 현상을 무시하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여론이 치고 올라오자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안희정지사의 차출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안지사가 지사직을 그만두고 문재인 캠프로 간다고 해서 얼마나 충청민심을 움직일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역효과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충남 공주 출신인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이 이번 대선에 출마를 선언했다가 슬그머니 포기한 것 역시 충청도에서조차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정치문화도 갈등과 좌절을 되풀이하면서 점점 진화하고 있는 것이며, 이번 5.9 대선은 그래서 안보와 경제를 책임질 진정한 지도자를 선택하는 ‘고뇌의 장’이 될 것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개헌… 제2의 최순실 막는다고?

몇 년 전 어느 지방의 군수가 버스터미널 인허가를 둘러싸고 금품을 받은 혐의로 사직당국의 수사를 받았다. 주민들의 신망도 두터웠고 청렴하다는 평이었는데 이와 같은 비리로 수사를 받자 주민들의 충격이 컸다. 그런데 사건의 발화지점은 바로 군수 승용차의 운전기사였다. 운전기사는 군수와 인척 관계였고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관내 여론과 산하 공무원들의 동향을 수시로 보고했다. 말하자면 비공식 정보 채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자 눈치 빠른 업자들과 공무원들이 그 운전기사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주차장 허가에까지 관여해 돈을 받았음이 수사 결과 밝혀졌다. 그뿐 아니라 공무원 인사에도 개입했는데 처음엔 조심스럽게 나돌던 소문이 공공연히 퍼져 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비선 실세가 형성하는 패턴이 군수에 그치지 않고 국회의원, 장관은 물론 청와대에까지 퍼져나간다는데 있다. 한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어느 위치에 올라오기 까지는 ‘집사’처럼 지근거리에서 봉사한 사람도 있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준 사람도 있기 마련. 특히 ‘의리’를 목숨처럼 생각하고, 인정이 많은 한국인들은 자기를 위해 희생하고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박근혜 전대통령과 최순실 사이도 그렇게 출발했으며, YS DJ 정부 때도 민주화 투쟁에서 고난을 겪은 동지들을 보살피는 것을 당연시했다. 이렇듯 개인적 인간관계로 짜여진 베일 속에 공권력이 가려지면 부패 바이러스는 기하급수로 늘어나, 부끄럽게도 우리나라가 국제투명성기구(TI)의 2016년 국가별 부패지수에서 52위를 기록하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아프리카의 가봉, 기니 같은 저개발국만도 못한 부패인식 지수 52위! 그런데 이 부끄러운 고질병을 우리가 분권형 개헌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은 헌법을 개정하여 ‘내각책임제’로 정부형태를 확 바꾸었다. 내각제만 되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됐던 것인데, 그 결과는 9개월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내각제에 의한 장면 정권하에서 한꺼번에 자유가 분출하여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41개이던 신문은 115개로, 기자는 16만명으로 늘어났으며 데모로 아침을 시작하여 데모로 해가 지는 나라가 되었는데 4ㆍ19후 11개월 동안 약 2천회의 데모가 있었으니 짐작할만하다. 심지어 국회 의사당에 시위대가 난입하는 사태까지 있었고, 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을 열자’며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여기에 집권 민주당은 신·구파의 분열로 극심한 파쟁에 휩싸여 경제위기를 헤쳐나갈 동력을 잃고 방황했다. 이와 같은 혼란은 마침내 5ㆍ16 군사 쿠데타의 구실을 주었고, 정치체제는 다시 대통령 중심제의 제3공화국으로 나타났다. 양원제는 단원제로 복귀했으며, 대통령에 긴급명령권이 부여됐고, 이를 바탕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다. 요즘 또다시 탄핵정국을 겪으면서 대통령 중심제의 헌법체제가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어냈고, ‘최순실 국정농단’과 같은 비극을 반복했기 때문에 ‘분권형 개헌’을 하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 분위기로는 개헌을 하면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처럼 당쟁과 파벌이 극심한 정치풍토에서 헌법 개정만으로 가능할까? 오히려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국가의 위기가 극도에 다다랐을 때도 나라는 뒷전이고 당리당략에만 몰두했던 우리 정치 DNA는 역시 제도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개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직자의 인간관계 투명성 회복 운동이다. 이를 위한 국민운동이 특히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전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활절, 석가탄신일을 보내는 봄에 선거까지 겹쳤으니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닐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어떤 정치인이 덜 해로운가

지난해 한 언론사에서 조사한 존경받는 직업 1위가 소방관이었다. 해마다 평균 5명 이상 순직하고, 100명 이상 부상을 입으며,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소방관들을 국민들은 이렇게 존경하는 것이다. 2위는 환경미화원, 3위 의사, 4위 교사…42위에 노조위원장, 그리고 44위에 국회의원. 아니 연봉이 1억4천만원(월급 1천150만원)이나 받고, 온갖 특혜는 다 누리는 국회의원이 소방관은 고사하고 운전사, 동사무소 직원, 환경미화원만큼도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뿐만 아니라 ‘앞으로 10년 후에 사라질 직업’에서도 은행 투자상담사, 스포츠 심판, 부동산 중개인 등이 나열되는데 국회의원은 끄떡없다. 인공지능, 로봇기술 등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제4차 산업혁명 속에서도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 같은 로봇이 국회의원을 대신할 수 없다니 정치혐오증에 걸린 사람들의 실망이 클 것 같다. 사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 가운데는 ‘정치혐오증’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많다. 물론 이 병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 탄핵정국을 겪으면서 더 넓게 전염된 것 같다. ‘그 X이 그X이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렇게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혈압을 높이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그렇게 정치인들을 싸잡아 욕하고 비난해야만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 식견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정치에 대한 절망, 좌절은 신문이나 TV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말이 그 말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것. 하긴 육군 참모총장과 국정원장을 지낸 남재준씨가 무소속으로 대통령 후보에 예비등록을 하면서도 우리 정치 현실에 그런 냉소를 보냈다. ‘주류, 비주류, 친박, 비박, 친노, 비노, 친문, 반문, 이제 정당이냐’는 것이다. 정치 현장에 초년병인 남재준씨가 정치를 비판한 데는 그 나름의 판단이 있을 것이지만, 정치 노년병들까지도 자신이 몸담은 정치 현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가령 자유한국당 이인제 전 경기도지사는 1997년 9월 14일 대통령 경선에 불복해 신한국당을 탈당하면서 ‘3金 시대를 청산’하고 21세기 위대한 한국 건설을 이룩하겠다고 했다. ‘친일 청산’, 권위주의 청산, 군사정권 청산, ‘3金 청산’, 계속 이어지는 청산, 청산…. 그러나 우리 정치 무엇 하나 제대로 청산했는가. 대선후보 중 어떤 후보는 자신의 출마를 ‘국민의 부름에 호응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언제 어떤 국민이 그를 출마하라고 불렀는가? 그래서 국민들은 정치를 혐오하고 그들 말잔치에 냉소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정치를 혐오해서는 안된다. 믿을 수 없고, 교활하고, 부패와 패거리의 이기심, 어제의 말이 오늘 다르고…. 하지만 우리는 정치의 끈을 놓을 수 없으며 그렇게 될 경우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길리건(James Gilligan) 교수가 저술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 보다 해로운가’라는 책에 의하면 유권자들이 정치 혐오에 빠지지만 그러나 어떤 정당이 집권하느냐, 패배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생활 리듬마저 변화를 일으키고, 나아가 자살과 살인 등 범죄에까지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정치가 공기처럼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지배하고 정치를 떠날 수도 없다는 것. 그러니 길리건 교수의 책 제목 그대로 기왕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떤 정치인이 다른 정치인보다 덜 해로운가?’를 마음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정치인을 미워해도 정치혐오증이라는 바이러스에 걸려서는 건강한 민주정치를 기대할 수 없으며 역시 똑똑한 국민이 정치를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삼성동에 홀로 핀 백목련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되던 날, TV에서는 그의 삼성동 자택을 자주 비춰주었다. 그런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정원에 핀 백목련 한 그루. 그 꽃의 이미지도 그렇지만, 박 전 대통령이 구치소로 떠나고 주인 없는 정원에 핀 목련이라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백목련은 그의 어머니 육영수여사가 좋아했던 꽃이다. 그래서 비명에 간 그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사실 이것이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더욱 너나 없는 비극적 가족사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양자로 들어온 이강석은 4ㆍ19때 권총으로 생부모를 사살하고 자신도 죽었다. 경무대(청와대)를 나온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해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고,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들은 아들들의 부정부패로 국민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의 형님 때문에 곤욕을 겪어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고향에서 목숨을 끊었다. 왜 이렇게 청와대만 들어가면 모두 ‘불행한 대통령’으로 전락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청와대의 터가 그렇다고도 하고, 제왕적 대통령제의 헌법을 탓하기도 한다. 사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는 과정이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원래 조선의 군사훈련장이었던 장소에 일제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에 의해 1937년 착공, 1939년에 관저로 지어졌다. 육군 대장 출신의 미나미 총독이 굳이 이 곳을 관저로 택한 것은 조선 왕기(王氣)를 누르려는 저의 때문이라고 하는데, 역대 총독 중 가장 악명 높던 행적을 봐도 그럴법한 이야기다. 특히 그는 우리 국어 말살정책을 추진했고,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 가슴에 일장기를 지운 동아일보를 정간시켰으며 우리 동포의 간도 이주를 강압적으로 추진했던 것.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곳이 좋은 이미지는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진주하자 총독 관저는 사령관 하지 중장의 관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과 함께 관저로 사용했으며 4.19 후 탄생한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은 이미지를 새롭게 하려고 ‘청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도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경복궁의 현 위치가 정혈 자리라면 청와대는 동향으로 지었어야 탈이 없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은 계속 되었다. 한편 이와는 다른 시각도 있다. ‘다시 쓰는 한국 풍수’의 저자 이몽일씨는 새로 개축하여 1991년 완공을 본 현 청와대가 겉보기에는 북악산 지세에 잘 조화되고 기상과 위엄이 있다고 하지만, 집무실 접근이 극히 어렵게 공간이 이루어져 왕의 궁전 같은 감을 준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백악관처럼 ‘일하는 집’으로서의 기능보다 건물 배치와 건물구조의 중압감으로 ‘제왕적 대통령’의 분위기를 축적시키고, 그것은 곧 ‘인(人)의 장막’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해석이 나올 법 하다. 그렇게 분위기는 중요한 것이다. 솔직히 나 역시 어쩌다 청와대에 들릴 경우, 그런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제’ 개헌도 좋지만 그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제왕적 분위기’에 빠지게 되는 청와대의 구조도 생각해 볼 문제다. 아예 청와대를 옮기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일하는 대통령의 집’으로 설계도 하고….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세종시와 대통령 선거

“대선에서 재미 좀 봤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한 요인의 하나로 행정수도 문제를 거론하면서 덧붙인 말이다. ‘행정수도’ 공약으로 충청도 표를 몰아갈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노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열세를 만회하고 충청도에서 돌풍을 일으킨 데는 행정수도 공약이 큰 몫을 했다. 처음 공약을 발표했을 때 중앙의 언론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1면에 취급하는 신문도 드물었고, 다뤄봤자 1단 기사로 취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충청권은 요동을 쳤다. 여론조사에서 지지도 15%로 이회창 후보의 절반에 머물렀던 그의 지지도는 급상승했고, 마침내 정몽준과의 단일화에도 성공하여 대선을 승리로 마감했으니 행정수도 공약에 재미를 봤다는 말은 솔직한 표현이기도 하다. 요즘 다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각 당 후보들이 세종시를 공약화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처럼 선거에서 재미 좀 보자는 것일까? 그래서 충청권의 표심을 자극하자는 것일까? 물론 그런 저의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번 대선에서의 세종시 문제는 그 차원을 넘어서는 것 같다. 세종시 착공 10년, 정부청사 세종시 이전 5년의 대차대조표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국가적 차원에서 외면할 수 없다는데 뜻을 모으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핵심은 국가운영시스템의 비효율과 예산의 낭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다. 사실 지금의 어정쩡한 상태로는 문제 해결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총리 공관과 집무실은 거의 비어있고, 장차관은 국회에 출석하느라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 정부청사가 아닌가. 그러니 간부급 공무원들도 어쩔 수 없이 서울 출장 중이며, 경제 관련 부처가 70%나 몰려있는 세종시인데 경제 관련 회의는 거의 서울에서 열리는 이 모순을 그냥 방치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오는 세종시 관련 대선공약의 핵심은 국회를 세종시로 이전하자는 것이고, 최소한 국회 분원이라도 설치하여 공무원들의 서울 출장을 억제함으로써 행정력 낭비를 막자는 것. 물론 후보에 따라서는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안을 병행, 아예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겠다고 공약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러나 하드웨어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세종시를 행정수도다운 품격 높은 도시로 만드느냐에 대한 대안도 담겨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5년 가까이 세종시 건설에 투신해 온 이충재 행복도시건설청장의 일관된 주장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도시도 정치처럼 ‘포용’과 ‘특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자전거 인프라를 구축하여 대중교통 수송 분담률 목표치 70% 중 20%를 자전거가 차지하게 하며, 국내 최초로 주택은 물론 편의시설 기반시설 등에까지 태양광과 같은 신생에너지와 패시브(passive) 공법이 적용된 대단위 ‘제로 에너지 타운’을 조성해 새로운 도시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 그 구체적인 예다. 이밖에도 어린이박물관, 유아 숲체험공원,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무장애 설계(barrier free) 등 문화 인프라를 확충하고 도시의 품격을 위해 52.4%에 달하는 국내 도시 최고의 녹지공간과 문화시설을 연계시켜 ‘행복문화 녹지벨트’도 구축하자는 것. 이렇게 하여 세종시 도시 설계와 시스템을 세계에 수출할 수 있고, 세종시를 보러 오는 관광객이 넘쳐날 때 비로소 세종시는 성공적인 행정수도, 콘크리트 아파트 숲이 아니라 인간의 숨결이 느껴지는 품격 높은 문화도시가 될 수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이와 같은 세종시의 꿈이 한층 실현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변평섭 칼럼] ‘풀뿌리’ 살리는 大選을

‘거시기’ 하면 어떤 특정 이름이나 사물, 사건 등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을 때 쓰는 사투리다. 때로는 민망한 육체의 어느 부분을 표현할 때도 ‘거시기’라는 말을 쓴다. 흔히 호남지방 사투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수년전 영화 ‘황산벌’이 나오면서 ‘거시기’란 말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 작은 불만이 충청도 지방에서 생겼다. 불만인즉슨 ‘황산벌’은 지금 충남 논산지방인데 충청도 사투리가 나와야지 호남 사투리냐는 것이다. 물론 백제가 충청도 뿐 아니라 전라도, 경기도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니 병사들의 호남사투리도 나옴직하다. 이뿐만 아니라 TV 드라마에서 부잣집 가정부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배우를 등장시키는 일이 흔한데, 이때도 ‘왜 가정부는 꼭 충청도냐?’며 불평들이 나온다. 서울 사람들 머릿속에는 이처럼 지방 사람들을 ‘평가절하’하는 편견이 꽉 차있다는 오해를 산다. 또 서울에서 지방에 가는 것을 ‘내려간다’하고,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것을 ‘올라간다’고 하는 것, 이 역시 지방하대라는 것이다. 지방자치를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데에도 그런 의식을 느낀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풀뿌리 민주주의의 전면 부활’을 내세웠을 때 ‘풀뿌리’는 신선한 정치용어로 국민들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사실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을 설명하는데 있어 이처럼 참여 민주주의를 나타낼 실감나는 어휘는 없다. 그러나 사무비율이 7대 3으로 중앙정부가 장악하고 있고,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 역시 8대2라는 구조 속에 지방자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주민들이 알게 되면서, ‘풀뿌리’의 이미지 역시 가뭄에 시들어버린 잡초의 뿌리로 전락했다. 도대체 8대 2의 돈주머니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도 모자라 복지정책의 소요예산 상당 부분을 지방정부로 떠넘기게 되니 지방의 재정자립도는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2016년 우리 지방재정 자립도가 35.9%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래도 처음 지방자치가 실시되던 1995년에는 62.5%에 이르던 자립도가 2013년에는 52.3%로 줄어들고, 이제 35.9%까지 떨어졌으니 ‘풀뿌리’ 예찬론은 창고 속에 들어가야 할 형편. 이렇게 허약한 지방의 재정자립도는 서울, 울산 등 몇 곳을 빼고는 중앙정부가 움켜쥐고 있는 곳간에 목을 매야할 지경인 것이다. 가령 어느 지방 정부가 지역에 맞는 사업을 하려해도 중앙정부로부터 매칭 펀드(matching fund)의 규제를 받는다. 중앙에서 소요예산을 주되, 일부는 지방예산에서 확보하여 사업을 추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방의 가난한 재정으로는 그 일부도 감당을 못해 중앙에서 주겠다는 돈을 ‘울며 겨자 먹기’로 되돌려주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가운데 이번 대선에 나서려는 사람들이 지방자치의 발전을 내세우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특히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제는 대통령뿐 아니라 중앙정부의 권한도 지방정부에 분산시켜야 할 시점에 와있다. 7대 3의 사무비율, 8대 2의 국세지방세 비율, 그리고 중앙에서 틀어쥐고 있는 인사권 등…. 풀뿌리를 고사시키는 국가권력구조의 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한다. 어떤 대선주자는 아예 이번 기회에 이와 같은 지방분권 강화를 헌법에 명시하자는 주장도 하고 있다. 건강한 정치발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방을 가볍게 여기는 중앙 중심의 의식부터 바꿔야 한다. 변평섭 세종시 전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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