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오디세이] 지나간 오늘, 남겨진 부활

우리는 늘 시간을 나눠 말하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은 깊게 서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과거는 지나갔지만 사라지지 않고 현재는 흘러가지만 붙잡히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를 끌어당긴다. 크리스천 심리학자 댄 알렌더는 말한다. “사람은 과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1885년 4월5일.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부활절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절기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죽음을 넘어 생명이 열렸다는 선언이다. 그날 오후 3시, 헨리 아펜젤러와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동시에 발을 내디딤으로써 조선 땅에 복음이 시작됐다. 그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 심어진 지 141년이 지난 2026년 4월5일 역시 일요일이고 부활절이었다. 같은 날짜 같은 시간 수원특례시기독교총연합회에 속한 교회들이 오후 3시에 한자리에 모여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다. 시간은 흐르면서 그 복음은 열매가 돼 수원 땅에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시간을 맞을 수 있었다.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바뀐다. 기준은 분명하다. 춘분 이후 첫 보름달이 지난 뒤 맞는 첫 번째 일요일이다. 이 기준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해졌다. 달과 태양의 질서 위에 부활의 신앙을 새겨 넣은 결정이었다. 그래서 부활절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시간 속에 새겨진 고백이다. 올해 수원의 교회들은 이 특별한 날짜의 의미를 기억하며 살랑살랑 봄바람에 풍겨오는 꽃향기를 맡으며 함께 걸었다.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화성행궁까지 ‘Let’s go! 수원 새빛, 함께 걸어요!’를 주제로 부활절 퍼레이드가 이어졌고 행궁 광장에서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축제가 열렸다. 봄 햇살 아래 길 위에서 많은 시민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는 작은 선물을 나누고 서로를 향해 미소를 건네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돼 줬다. 그날의 걸음은 단순한 행진이 아니라 시간을 잇는 순례의 여정이었다. 수원은 참 좋은 도시다. 정조대왕의 숨결이 남아 있는 역사와 세계적인 기업 삼성전자와 SK가 뿌리를 둔 도시다. 특히 화성행궁은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지 않고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궁궐 담장 안에는 전통이 흐르고 담장 밖 골목에는 짙은 커피 향이 스며 있다. 그리고 광장은 그 두 시간이 만나는 자리였다. 행사 중 만난 몇몇 외국인 청년은 멀찍이 서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가 말을 건네자 그들은 기꺼이 앞자리에 앉아 끝까지 함께 축제를 즐겼다. 언어는 달랐지만 기쁨은 통했다. 어쩌면 그것이 부활의 힘일지도 모른다. 경계를 넘어 사람을 잇는 힘. 그날은 지나간다. 그 누구도 시간을 멈춰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나간 것은 시간이었지 의미는 아니다. 과거는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빛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 속에서 다시 오늘을 살아간다. 부활은 한번의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오늘을 새롭게 만드는 현재의 일이다.

[삶, 오디세이] 불러주며 함께 살아간다

봄이 되면 산과 들에 다양한 꽃과 새싹이 피어나며 봄을 알려준다. 그래서 봄에는 그저 길만 걸어도 봄의 전령이 전하는 아름다움에 왠지 설레고 즐겁기만 하다. 그리고 봄을 더욱 즐기기 위해 우리의 밥상에도 여러 봄나물과 싱그러운 음식이 올라온다. 봄나물이라는 말만 들어도 입맛이 돋고 식사의 기대감이 커지는 이유도 이처럼 봄에만 즐길 수 있는 제철 음식이 있기 때문이다. 봄나물은 그 이름도 참으로 재밌다. 쓴맛을 낸다고 해서 씀바귀, 냉한 기운을 가져와서 냉이, 어디서든 쑥쑥 자라서 쑥처럼 특별한 의미도 없고 대충 붙인 이름인 듯하지만 이보다 정확하게 그 특징을 전해주는 것도 없다. 그런데 만약 씀바귀, 냉이, 쑥 같은 이름조차 없었다면 이 나물들은 그저 잡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나물로 불리며 밥상에 올라오는 식재료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길가의 잡초로 여겨져 버려지는 경우도 실제로 많다. 필자는 봄이 되면 깨끗이 씻은 민들레 잎을 넣고 끓인 민들레된장국을 좋아한다. 그래서 봄에 손님이 찾아오면 별미로 만들어 드리기도 하는데 예전에 한 외국인 손님이 민들레된장국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먹을 게 없어 잡초를 먹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필자 역시 놀라며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이런 신선한 나물과 새싹도 먹는다고 하니 자기는 태어나 처음 경험하고 민들레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다고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상큼하고 시원한 맛에 반해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며 자기 나라에 돌아가면 민들레가 먹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려주겠다고 했다. 민들레도 그렇지만 아마 냉이, 쑥, 고사리, 미나리도 그들에게는 그저 잡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것들은 나물이며 맛있는 봄의 한 끼를 전해주는 식재료다. 이처럼 한낱 잡초도 다듬고 이름을 붙여 불러주면 나물이 된다. 처음부터 나물이었던 것은 없고 지금도 나물로 불리는 곳에서만 그 역할을 한다. 너무 작고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것이라도 함께하는 이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불러주면 하나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불교에서 우리의 삶을 나타낼 때 태어남(生)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태어난 이후의 행위(行)이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이름이나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며 많은 인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그것을 해나갈 때 비로소 참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고정된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고 행동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존재로서의 자신은 본인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 행위와 역할의 자신을 알아봐 주고 불러줄 때 증명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잡초일지라도 우리에게 나물이듯 자신이 어떻게 불리고 인연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 우리는 서로를 불러주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 오디세이] BTS, 국민 아이돌이라는 덫

BTS가 4년 만에 완전체로 돌아왔다. 케이팝 최고 그룹이 서울의 심장부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인 광화문 광장에 섰다. 경복궁을 배경으로 무대를 만들고 ‘아리랑’이라는 타이틀 앨범을 들고 왔으며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상을 입은 일곱 청년의 퍼포먼스는 한국인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하며 그 자체로 뭉클한 감동을 전했다. 22일 이후 기록이 쏟아지고 있다. 앨범 발매 하루 만에 400만장 판매, 각종 글로벌 음원 차트 석권, 공연 중계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의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 및 77개국 차트 점령. 이후 이어질 세계 투어에서 들려올 기록들에 대한 기대감도 차오른다. 드디어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강력한 지식재산권(IP)이 끊임없이 이익을 창출해낼 것이다. 군 복무를 성실히 마치고 돌아온 청년들이 몹시 반가웠고 기대됐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재미는 없었다. ‘국민 아이돌’이라는 왕관의 무게가 하도 버거워 공연은 모범청년 이미지의 감옥 안에서 치러진 관제행사처럼 느껴졌다.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고, 언론은 취재 제한에 묶이고, 시민은 검색대를 통과해야 광화문을 지날 수 있었다. “광화문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이 무성했지만 공공 공간의 사유화와 시민 기본권 문제는 이 지면에서 차치하기로 하자. BTS의 성장을 지켜보며 케이팝의 위력을 만방에 떨친 그들의 활약에 기뻐하고 멤버 하나하나의 음악적 성취를 사랑해 온 팬으로서 이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BTS가 ‘국민 아이돌’이라는 덫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는지 고민할 때다. BTS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며 오랫동안 쌓아 올린 모범청년의 이미지는 아이와 부모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병역을 성실히 이행하고, 유엔에서 연설하고, 대통령 특사로 세계를 누비는 사생활은 신뢰를 줬다. 하지만 이러한 성실한 행보는 때로는 지루하다. 비틀스는 청소년 우상에서 반문화의 아이콘으로 변모했다. 프레디 머큐리와 데이비드 보위는 젠더의 경계에 서서 스스로를 해체했다. 켄드릭 라마는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노래한다. 이들의 틀을 깨는 변신에는 논란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음악을 깊이 있게 만들었다. BTS의 음악은 분명 진화해 왔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서사는 여전히 ‘성실하고 선한 청년들’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 프레임이 아티스트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계에 가두는 것일 수 있다. 광화문 공연은 화려했지만 안전했다. 예측 가능한 무대는 진부하다. 국가가 허락한 공간에서, 국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안전하고 성실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연. 이는 팝콘서트라기보다 세련된 국가 홍보에 가까웠다. BTS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창작자로서 그들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진짜 불편한 질문을 던질 때다. 제복을 벗은 자리에서 모범청년의 훈장도 내려놓기 바란다. 불편하고 날카롭고 예측 불가능한 음악, 스스로 선택한 무대 위에서 던지는 도발적인 퍼포먼스, 반전과 평화와 저항을 노래했던 팝아티스트들의 유산을 이어가기, 그것이 지금 BTS가 걸어갈 다음 스텝이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고통을 함께 짊어진다는 건

가톨릭교회는 매년 사순 시기를 보낸다. 사순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는 40일간의 시기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정화와 회개,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 시기에 기도와 단식, 자선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며 부활의 신비를 준비하도록 초대한다. 이 시기 신자들이 특별히 많이 바치는 기도가 ‘십자가의 길’이다.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뒤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과정을 14개의 장면으로 나눠 묵상하는 기도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되새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는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삶의 십자가와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게 하는 기도다. 필자가 신학생 때의 일이다. 사순 시기를 맞아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던 중 제5처에서 깊이 머물게 됐다. 제5처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날의 묵상에서 필자는 조금 다른 장면을 보게 됐다. 시몬이 예수님을 돕는 것이 아니라 거의 초주검이 된 예수님이 오히려 시몬의 십자가를 같이 져 주기 위해 그의 곁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오시는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시몬만이 아니라 필자에게도 다가오셨다. 필자가 삶의 십자가로 인해 지쳐 그동안 걸어온 성소의 길을 멈추려 하고,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넘어져 낙담하고 있을 때 한 인물, 가시관을 쓰고 온 몸은 피투성이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가 필자의 십자가를 같이 져 주기 위해 다가오고 계심을 묵상하게 됐다. ‘내 십자가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냐’며,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며 원망하고 소리치고 있는데 한 인물, 가시관을 쓰고 온 몸은 피투성이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가 어느새 필자 곁으로 다가와 지그시 바라보시며 미소 지어 주셨다. 그분의 미소는 ‘바오로야, 내가 있지 않으냐. 내가 도와주겠다. 바오로 너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나와 함께하면 할 수 있다’는 안심과 확신을 주는 미소였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솟아올랐다. 필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다가오신 분이 계신데 필자의 십자가만큼은 끝까지 짊어지고 걸어가봐야겠다는 새로운 결심이 생겼다. 십자가의 길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 중에 삶의 큰 어려움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넘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돼 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멀리서 말로만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 한가운데로 직접 걸어 들어오시는 분이다. 그리고 조용히 우리 곁에 서서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신다. 우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시어 함께 그 고통을 나누려는 진솔한 태도, 표정, 미소로써 말이다. 우리가 절망에 빠졌을 때, 고통이라는 늪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겸허히 우리 곁을 지키며 십자가의 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려 보기 바란다.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삶의 어둠과 고통이 우리를 짓누를 때마다 우리 곁을 지키는 누군가가 있다면 바로 그가, 고통의 한복판에서 나에게 다가와 희망이 돼 주시는 십자가의 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기 바란다.

[삶, 오디세이] 감사하면 보입니다

요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교회가 하나 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예배 인원이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주차 공간의 필요도 커졌다. 교인들의 편리한 교회 생활을 위해 교회 가까이에 있는 공터를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매입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땅 주인은 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이 왔다. 땅 주인이 먼저 교회에 전화를 한 것이다. 교회가 주일마다 그 땅을 주차장으로 무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다. 1년 52주 가운데 51주는 사용할 수 있지만 1주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그 제안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1년, 2년, 3년 시간이 지나도록 교회는 한 주일을 제외하고 그 주차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교인들 사이에서 작은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한 주일은 사용할 수 없는가”, “특별히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1년 내내 쓰게 해주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교회는 조심스럽게 땅 주인에게 물었다. “왜 한 주일은 사용할 수 없는 건가요.”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래야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는 값을 치르지 않고 선물로 누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 사람은 하루에 약 2만번 숨을 쉰다고 한다.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쉬면서도 값을 치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감사하지도 않는다.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필자는 24년간 살던 일반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집에서의 시간은 참 좋았다. 13년 전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를 따라 아랫마을 하동사람과 윗마을 구례사람들이 어우러져 장을 펼치던 화개장터에서 매실나무 한 그루를 사다 심었다. 봄이 오면 새순이 돋고 열매가 맺히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대문 밖에 심은 벚나무는 해마다 온 동네를 환하게 물들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밝게 해줬다. 대문 안 작은 정원에 심어 둔 라일락 꽃이 피면 그 향기가 얼마나 그윽한지 모른다. 그런데 아파트로 이사 와 보니 또 다른 감사가 있다. 집이 따뜻해서 좋고 조용해서 좋다.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도 좋다. 아침마다 승강기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일도 참 반갑다. 환경이 달라졌을 뿐인데 감사의 이유는 여전히 많다. 필자는 매일 하루를 마무리하며 감사일기를 쓴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보며 좋은 만남과 가슴 벅찼던 순간을 글로 기록한다. 그렇게 하루를 정리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게 된다. 몇 년 동안 감사일기를 쓰다 보니 삶이 풍성해졌다. 마음이 정리되고 시선이 섬세해졌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선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하루도 기적이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 자체는 이미 기적의 연속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숨을 쉬는 것, 사람을 만나고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선물이고 기적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가끔은 우리 삶에도 ‘한 주일’이 필요하다. 잠시 멈춰 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돌아보는 시간 말이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감사하면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평범한 하루가 이미 기적이었다는 것을.

[삶, 오디세이] 그렇게 다시 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는 계절의 흐름과 더불어 등장인물이 겪는 윤회의 괴로움과 삶의 반복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시간을 다소 특별하게 바라본다. 현대적 시간의 개념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흐르는 것이 아닌 어떤 현상이나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그에 따라 생겨나는 모습에 의해 시간이 흘러간다고 본다. 그래서 과거-현재-미래를 삼세(三世)라고 하여 이어져 있지만 다른 것으로 여긴다. 과거는 현재의 모습을 이룬 토대이고 현재는 미래를 이룰 토대다. 그리고 각각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이어져 있다. 하지만 과거의 과거도 존재하고 그것이 끝없이 과거로 이어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에는 ‘시작’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존재해야 하기에 불교에서는 ‘무시이래(無始以來)’라고 하여 끝없는 시작(원인)으로 세상이 지금도 이어져 가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제목과 같이 그 봄 뒤에는 다시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항상 찾아오는 듯한 시간과 계절이지만 매 순간이 다르다. 다른 원인에 의해 그 당시의 지금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올해의 이 봄은 작년의 그 봄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이 봄은 올해가 마지막인 봄이기도 하다. 길고 길었던 맹추위가 어느덧 가시고 서서히 봄의 기운이 우리를 감싼다. 세상이 우리에게 봄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산하대지에 온갖 생명이 피어날 때 우리도 함께 피어날 때다. 생명은 태어남에 의한 것이지만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봄날 한 송이의 꽃이 피기 위해서는 땅을 뚫고 나와 서서히 줄기를 일으켜 꽃망울을 터뜨려야 한다. 그 작은 한 송이의 꽃도 자신의 힘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이뤄낸 것이다. 이처럼 작은 움직임이라도 스스로 행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일으켜 세워 삶의 꽃을 피우는 원인이 돼줄 것이다. 불교에서 시작을 설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초월적 존재에 의해 시작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수행)에 의해 어떤 원인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지금의 나를 조금씩 변화시킬 것이고 그 변화는 자신이 바라는 내일의 지금으로 서서히 다가올 것이기에 다름 아닌 자신이 바로 삼세의 원인이며 삼세의 주인공으로 본 것이다. 그렇게 다시 봄이 찾아왔다. 매년 이 시기면 항상 봄이지만 봄을 그렇게만 여긴다면 영원히 진짜 봄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화창한 햇살이 비치고 대지의 모든 생명이 환하게 반기는 이 봄날에 자신의 봄을 스스로 열어 어느 해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만끽하자.

[삶, 오디세이] ‘왕과 사는 남자’ 흥행 이유

2024년 ‘범죄도시4’ 이후 멈춰 섰던 극장가 천만 관객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랜만에 영화계가 들떠 있다.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가 개봉 20일 만에 관객 60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천만 사극의 대명사인 ‘왕의 남자’(2005년)보다 빠르고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속도다. 2024년 ‘파묘’와 ‘범죄도시4’가 만들어 낸 ‘쌍천만 영화’ 이후 침체됐던 한국 영화계에 왕사남은 단순한 흥행작 이상의 의미다. 이 작품이 과연 극장가의 구원자가 될까. 이제 한국 영화계에는 ‘왕’과 ‘남자’가 제목에 결합하면 흥행한다는 공식이 자리 잡은 듯하다. 이 세 작품은 사극의 전형적인 문법이던 비정한 권력 암투나 남성 중심의 힘 대결에서 과감히 탈피한다. 그 대신 역사의 행간에 숨겨진 천민과 소외된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실제 기록 위에 전복적 상상력을 만개시킴으로써 사극의 지평을 새롭게 확장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천민은 절대권력자인 왕과 특별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휴머니티와 공감을 자극한다. 주인공은 유머를 담당하고 이와 대비되는 왕의 고독이 부각돼 감동 스토리가 형성된다. 유머 코드와 감동 코드는 진부하게 들려도 관객몰이에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강력한 흥행 코드다. 베테랑 유해진과 신예 박지훈의 연기 앙상블은 그런 면에서 왕사남의 가장 큰 강점이다. 특히 왕사남은 2005년 신드롬을 형성했던 왕의 남자와 평행이론을 형성한 것처럼 기시감을 자극한다. 절대 권력자인 왕과 그 곁을 지키는 소박한 남자라는 파격적 설정, 왕의 남자 속 연산군과 공길이 예술로 교감했다면 왕사남은 유배된 단종과 그의 마지막을 지킨 마을촌장이 음식으로 교감하며 깊은 정서적 관계를 만들어 간다. 화려하고 세련된 K-푸드가 아니라 소박하고 정갈한 밥이 만들어 내는 정서적 위안, 이것이 진정한 K-푸드의 힘이어서 남녀노소 모두가 공감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영화는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현대적 가치관을 덧입혔다. 모든 것을 가진 고귀한 혈통의 임금도 고꾸라질 수 있다는 냉혈한 사회, 임금과 마을촌장의 관계가 보스와 부하의 갑을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진정한 동료 관계로 구축되는 점, 단종과 엄흥도가 보여주는 혈연을 넘어선 유사 부자 서사 등 출세주의, 갑을 관계, 가족주의 등 기존 관념을 뒤흔드는 점에서 영화는 현대성을 투영한다. 영화 외적인 요소, Z세대를 사로잡은 바이럴도 흥행에 불을 지폈다. 왕사남 속 인물의 묘역을 방문해 리뷰를 남기는 온라인 성지순례 바이럴이 개봉 초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하며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했다. 21세기에는 스크린 외부로 확장된 팬덤의 활약, 즉 영화를 체험하는 팬의 놀이문화가 영화 흥행의 필수요소가 됐다. 영월 관광과 단종 묘역 방문을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시킨 Z세대의 참여형 문화는 콘텐츠 소비가 체험과 연대로 진화했음을 증명한다.

[삶, 오디세이] 이 삶도 통역되나요

주변의 추천으로 한 드라마를 봤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통역’을 매개로 관계를 맺고 오해와 이해를 거쳐 사랑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여주인공의 과거 트라우마와 내면의 또 다른 인격을 통해 인간의 상처와 기억을 깊이 있게 다룬다. 필자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이 어린 시절 불안이 시작됐던 방을 떠나 걸어 나오는 장면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대로 두고 가도 될까?” 그 순간 화면은 흑백으로 바뀌고 여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더듬듯 천천히 걸어간다. 또 다른 인격이 만들어낸 기억들, 그래서 스스로 온전히 기억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를 지나간다. 화려했던 색채는 사라지고 오직 그의 시선과 발걸음만이 남는다. 그 장면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인격이 만든 삶을 지금의 내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 시간은 분명 ‘나’의 삶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는 낯선 타인의 삶처럼 느껴지는 시간. 그것을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충격일까. 그 충격은 생기를 잃은 잿빛처럼 흑백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깊은 여운으로 남은 이유는 여주인공이 그 시간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고 의미를 억지로 덧붙이지도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인다. 그 시간 역시 자신의 일부임을 인정하지만 그 기억이 지금의 자신을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모습은 신앙의 여정과도 닮아 있다. 신앙은 과거를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바라보는 용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빛은 과거를 없애지 않는다. 다만 그 의미를 새롭게 비춰 상처가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이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마음속에 각자의 ‘방’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어떤 이에게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공간일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못한 후회와 불안이 머무는 자리일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색을 잃은 흑백의 기억들이 남아 있다. 그 방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안에 영원히 갇혀 있을 필요도 없다. 여주인공이 그러했듯 우리 역시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그 자리에 두되 그곳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 그것은 외면이 아니라 선택이며 부정이 아니라 통합이다. 그 시간 또한 나의 일부였음을 인정하며 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흑백 같던 시간이 다시 색을 되찾는 순간은 거창한 변화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과거를 직면하겠다는 작은 결심, 내면의 방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오늘의 우리를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삶, 오디세이] 일상의 틈 여는 ‘영화’

하루를 다 살아내고 나면 우리는 불을 끄고 화면을 켠다. 영화관의 어둠이든, 집 안의 작은 스크린이든 그 앞에 앉는 순간만큼은 잠시 가쁜 호흡을 멈출 수 있다. 바쁘게 밀려오던 일정과 생각들이 한 걸음 물러서고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앉는다. 영화는 그렇게 일상의 틈을 연다. 영화의 가장 큰 유익은 삶을 대신 살아준다는 데 있다. 스크린 속 인물의 선택과 실패, 후회와 용서를 지켜보며 우리는 울고 웃는다. 아직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미리 통과하고 언젠가 마주할 감정을 예행연습하듯 건너간다. 영화는 현실에서 도망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필자는 두 주 전에 24년간 살았던 단독주택에서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가 사다리차를 이용해 전문적인 기술로 아파트 4층으로 짐은 옮겨줬지만 집 안 곳곳에는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이삿짐 상자들을 정리하는 것은 오롯이 아내와 필자의 몫이었다. 일주일간 정리해도 버릴 것과 남길 물건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 채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월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짐 정리를 잠시 멈추고 영화 한 편을 보자고 의기투합해 요즘 박스오피스에서 조용히 역주행하고 있는 ‘신의 악단’이라는 영화를 봤다. ‘신의 악단’은 북한 보위부 소속 장교가 외화벌이를 위해 가짠 찬양단을 조직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휴먼 드라마다. 김형협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박시후, 정진운, 태항호, 서동원 등 개성파 배우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헝가리와 몽골 등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북한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며 음악과 유머, 감동을 더해 ‘가짜’ 찬양단이 ‘진짜’ 하모니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렸다. 처음 그들의 이야기는 음악보다 계산에 익숙했고 믿음보다는 형식이었다. 음악은 있었지만 감동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짜로 진짜 찬양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진짜로 변화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우리가 연기하듯 선택한 행동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든다”라며 겉으로 착한 척하는 행동조차 계속 반복되면 실제 인격을 빚어 간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감동이 있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출발선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 찬양단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방향이 맞으면 결국 진짜가 된다는 것이다. 진짜 찬양단이 돼 눈 덮인 산을 오르는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이삿짐 상자들 사이에 숨어 있는 나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처럼 아직 완전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일상 말이다. 빠르게 일상의 시간이 지나가지만 우리는 무엇이 힘든지도 모른 채 다음 일정으로 밀려간다. 새로운 아파트에서는 조금은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르게 정하는 삶이 됐으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오늘도 이어진다

‘연기를 보는 이는 법을 볼 것이며, 법을 보려는 이는 연기를 볼 것이다.’ 불교의 오래된 경전인 중아함경에서 부처님이 자신이 깨달은 법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줄임말로 인연이 생겨나고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법(法)’이란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인연에 의한 것이고 그 인연은 자신과 더불어 생겨나고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난 것에는 그 원인과 더불어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된 작용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법이며 가르침이다. 점차 가족이라는 개념이 옅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나 혼자 사는 것이나 싱글라이프가 젊은 시절에 멋지게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채우며 살아가는 성공한 모습이라 여겨지고 있다. 결혼을 했어도 성격 및 취향이 조금만 다르면 큰 고민없이 이혼이나 돌아온 싱글로 살아가면 된다고 가볍게도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유행은 심지어 방송과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안방에서도 전혀 불편함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모두가 혼자 살거나 돌싱이 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사는 게 힘들어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생활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멈추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처럼 일생의 중요한 결정이 유행과 같이 여겨지고 우리 주변에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면 이는 분명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이고, 지금 분명 사회 문제이기도 하다. 가족의 개념이 옅어진다는 것은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붕괴되면 가장 중요한 자신이 머물 곳이 사라진다. 가족은 자신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중추이기도 하다. 작은 단위의 가족 한 집이 모여 마을이 되고 그 마을이 사회와 나라와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또 가족에 대해 가벼이 여기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없다. 단순히 내가 공부를 잘해서, 능력이 좋아서 이뤄지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 가족의 보살핌과 주변의 배려와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런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까지 그 가족이 존재하고 있기에 자신이 태어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생활이 어렵고 지금의 자신이 부족하더라도 그 뒤에는 언제나 가족이 자신을 받쳐주고 있다. 어제가 지나야 오늘이 오고 오늘이 지나가야 내일이 온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 속에도 이어짐이라는 이치가 담겨 있다. 이처럼 ‘나’ 역시 홀로 존재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 내 속에는 또 다른 나인 가족이 항상 함께 한다. 가족은 바로 나의 이어짐이다. 한 해의 시작을 온 가족과 함께 맞이할 수 있는 설날이 이제 곧 다가온다. 먼저 떠나가신 분도, 지금 함께 있는 분도,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분도, 모든 분들이 가족으로 자신과 함께 오늘을 이어 가고 있다. 이 오늘에 감사하듯 가족의 인연에 자신이 있음을 감사히 느끼는 2월의 하루가 되자.

[삶, 오디세이] 글로벌 라이프스타일이 된 K-시대극

영상산업이 총체적 위기를 겪고 있는 요즘도 한국 콘텐츠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K’라는 기호는 이제 한국인의 국적성을 넘어 전 세계인이 공유하고 즐기는 하나의 문화적 감각 장치이자 보편적 언어로 진화했다. 과거 한국에서 제작해 해외로 수출하던 일방향 단계를 지나 현재는 타 문화와 융합하고 상호작용하는 이른바 한류 4.0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드라마와 음악에서 시작된 한류 열풍은 여행, 푸드, 패션, 리빙 등 한국인이 즐기는 삶의 방식 전반에 대한 총체적 관심으로 전이됐으며 세계인은 이를 하나의 세련된 라이프스타일 양식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K-시대극’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기호 K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폭군의 셰프’나 현재 방영 중인 ‘은애하는 도적님아’는 이 현상을 잘 보여준다. 현대의 셰프가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해 절대 미각의 폭군을 만난다는 폭군의 셰프는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켰다. 도적이 된 여인과 그녀를 쫓는 조선의 대군이 서로 영혼이 바뀌는 사건 속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를 그리는 은애하는 도적님아는 넷플릭스 공개 3일 만에 ‘대한민국 톱10 시리즈’ 부문 1위에 올랐다. 두 작품은 북미 최대 영화정보 사이트 IMDB와 초대형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Reddit) 게시판에 팬들의 폭발적 시청 소감과 별점 평가를 끌어내며 글로벌 화제를 낳고 있다. 만화적 상상력이 개연성의 문턱을 넘어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적 외피를 입을 때 그 허구성은 오히려 신선한 유희가 된다. 두 작품은 각각 K-푸드와 한복의 탐미적인 미학을 현대적 감각으로 투영하며 시청자의 오감을 매료시킨다. 이렇듯 보편적인 장르 문법 위에 한국 고유의 미감을 영리하게 덧칠한 전략은 로컬을 넘어 글로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연산군을 상기시키는 궁을 배경으로 하며 대체 역사물로서 공식 역사를 뒤집는 재미,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순한 역사 드라마를 넘어 한식, 한옥, 한복, 한약을 조선 역사라는 패키지로 엮어낸 이 드라마들은 한국의 이미지를 현대적이고 매력적으로 융합한 문화 콘텐츠가 됐다. 과거 문화적 거리는 해외시장 진출에 큰 장애물이었으나 이제 한국의 로컬 특수성은 오히려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매력 자산이 됐다. 보편적인 장르적 틀 안에서 한국만의 독특한 색채를 전달하는 방식은 글로벌 시청자에게 문화적 교육 효과까지 창출하고 있다. 결국 한류 4.0의 진정한 완성은 한국적 특수성이 세계의 공통 가치와 만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끌어내는 데 달려 있다. 이처럼 역사적 상상력과 K-미학이 결합한 로맨스 판타지는 일시적으로 즐기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넘어 세계가 한국이라는 고유한 브랜드를 경험하고 열광하게 만드는 세련된 창구가 돼가고 있다. 로컬의 특수성을 보편 장르 문법으로 번역해내는 이러한 시도는 앞으로 한류의 글로벌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삶, 오디세이] 기다림과 용서

2026년 새해가 시작됐다. 많은 이들은 새해를 맞아 새로운 계획과 희망찬 다짐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올해 그동안 쉽게 꺼내 들지 못했던 한 가지 난제를 마주하고자 한다. 사랑이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하게 한다면 용서는 그 관계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닐까. 어느 책에서 용서란 나 자신을 지배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용서를 도덕적 의무나 종교적 요구 이전에 자유를 향한 결단으로 바라보게 한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들고 쉽게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한 사건일 수도 있고 잊히지 않는 기억이나 특정한 사람일 수도 있다. 특히 그 대상은 나 자신보다 타인인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용서는 늘 어렵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도,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받는 일도 자존심을 건드리고 마음을 소모하게 한다. 때로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삶의 어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끝내 자유로워질 수 없다. 분노와 원한을 붙잡은 채 살아간다면 그 어둠은 점점 우리의 삶 전체를 물들이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용서는 상대를 위한 행위라기보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선택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용서해야 할까. 진심이 없는 용서에 의미가 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 분노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말로만 내뱉는 용서는 오히려 용서의 의미를 가볍게 만들 뿐이다. 용서가 되지 않을 때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충분히 시간을 갖자.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그 대상에 더 이상 과도하게 반응하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려보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감정의 바람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때까지 말이다. 힘은 억지로 빼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처럼 용서 역시 그렇지 않을까. 억지로 놓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기다림의 시간 안에서 본인은 이 한 가지를 기억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히 선하고 의로울 때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 안에 단 1%의 선함, 1%의 용서에 대한 가능성만 있어도 그 가능성을 통해 자비를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다. 사도 바오로가 전하듯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부족함과 실패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지는 분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 27)는 말씀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도 은총 안에서는 가능해질 수 있다. 용서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길 위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선택이기도 하다. 그 선택 앞에서 조급해하지 말고 스스로 단죄하지 말며 우리 안의 작은 가능성을 믿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유로워질 것이다. 2026년 새해에는 필자를 비롯해 모두가 자신을 지배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삶 오디세이] 태도는 관계에서 결정된다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태도로 쉽게 평가한다. 태도가 중요하다. ‘친절하다. 무례하다. 냉소적이다. 밝다, 어둡다. 적극적이다. 소극적이다’라는 말은 모두 태도에서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태도가 개인의 의지나 성품이나 교육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은 오래전부터 ‘태도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고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했다. 애착 이론의 창시자 존 볼비는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기본 태도는 어린 시절 맺은 ‘안전한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봤다.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사람은 탐색하고, 도전하고,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관계가 불안정하면 태도는 조심스러움이 아니라 방어가 된다. 이 이론은 교실, 가정, 직장 어디에서나 반복 확인된다. 안전한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은 말투가 낮고 선택이 느리다. 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늘 평가받고 비교당하는 환경에서는 태도가 예민해지고 날이 선다. 그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을 대하는 태도의 결과다. 신약성경 중에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빌립보서의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십니다.”(빌 1:8) 연애편지 마지막 문장으로 적으면 당장이라도 결혼 승낙을 받아낼 수 있을 정도의 애절한 표현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왜 이토록 부드러웠던 것일까. 우리 중에 바울을 만나 본 사람은 없지만 바울이 쓴 성경을 읽어 보면 대체로 바울은 근엄하고 엄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유독 빌립보서에서 발견하는 바울의 모습은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운 모습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목회자의 스타일은 그 교회가 만들어간다. 같은 목사님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인자한 목사님’이라고 하는 반면 어떤 교인은 ‘엄격한 목사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목사님이 이중적인 태도로 교인을 대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의 평가가 다른 것은 목사님과 맺은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였고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근심을 주는 교회였다. 그래서 고린도교서에서 발견하는 바울은 아주 엄격하고 단호한 모습이다. 태도는 관계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태도를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고 “왜 저렇게 행동할까”보다 “저 사람은 지금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건 아닐까” 이 질문을 먼저 해 보자. 신뢰 없는 조직에서 태도는 계산이 되고 의미 없는 일상에서 태도는 무기력이 된다. 태도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태도를 바꾸고 싶다면 훈계보다 관계를, 지적보다 신뢰를 먼저 맺어야 한다. 사람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만 가장 인간다운 태도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새해 목표는 ‘웃으면서 말하기, 먼저 인사하기, 악수할 때 눈을 맞추기’로 좋은 관계로 사람을 만나려 한다.

[삶, 오디세이] 오늘에서 한 걸음

붉은 태양이 새해를 알리며 2026년 병오년 붉은 말의 해가 힘차게 열렸다. 언제나 새해를 맞이하며 모두가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생기고 나름대로 여러 계획과 목표를 세운다. 매년 비슷한 마음과 목표이지만 이런 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이며 기분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작년 한 해도 분명 새해가 있었고 어느새 연말이 돼 이렇게 또 다른 올해의 새해가 된 것이다. 특히 작년 한 해는 다양한 일들이 있었기에 올해 붉은 말의 새해는 모두에게 조금 더 특별할지 모른다. 붉은 새해의 태양이 무거웠거나 힘들었던 지난 일들을 타 태워주고 힘차게 앞을 향해 내달리는 말의 기상과 같이 올 한 해는 모든 인연이 자신의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나 바라는 일을 원만하게 이루는 시절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말은 잘 달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말이 잘 달릴 수 있는 건 뒤의 땅을 박차고 나와 지금의 땅에 발을 잘 내딛고 다음의 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이 바로 말의 이 모습과 같다. 지나간 어제를 박차고 나와 지금의 오늘에 잘 이르러 다음의 내일을 향해 힘차게 자신이 나아가게 해야 한다. 지난 시간에 어려움과 문제가 있었더라도 지금도 그것에 얽매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지난 일을 지우거나 잊어서도 안 된다. 지난 시간이 바로 오늘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간과 삶에 불만족스럽거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토대인 어제를 반성하고 그를 통해 오늘을 다시 이끌고 나아가야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 수 있다. 숭산 스님의 ‘오직 할 뿐’이라는 가르침과 같이 이제 오늘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오직 해야 한다. 그럼 그것을 하는 자신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불교 선종의 화두가 있다. 어떤 수행과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더라도 마지막 그곳에서는 자신의 한 걸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우리의 새해는 지난 수많은 해의 이어짐이다. 그 이어짐이 오늘의 백천간두를 이루고 있다. 백 척이나 되는 긴 장대의 끝은 매 찰나의 연속에서 계속 길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끝없이 그곳에 매달려 아래만 쳐다보며 두려워하고 있다. 얼마나 높은지 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에서 한 걸음 내딛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오직 그것을 할 수 있는 그 행동이 중요하다. 오늘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잠시 후면 어제이고 내일은 오늘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새해의 여러 마음과 목표는 어느새 지난날의 추억이 돼 버릴 것이다. 올해만큼은 모든 순간의 삶을 살아보자.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 밀도는 자신에 의해 달라진다. 2026년이라는 시간의 장대 끝에서 참된 자신의 의지로 붉은 말과 같이 힘차게 한 걸음 내디뎌 작년의 그 오늘과는 다른 올해의 진짜 이 오늘을 살아가자.

[삶, 오디세이] 저패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

2025년을 마무리하며 올해 최고 흥행 영화 순위를 살펴봤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한국 영화 ‘좀비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영화시장에서 일본 영화가 연간 흥행 1위를 기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작품만 있는 게 아니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 5위에 오르며 일본 애니메이션 두 편이 각각 568만, 342만 관객을 동원해 천만 관객에 육박하는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우리들의 공룡일기’까지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명실공히 저패니메이션 붐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올해에만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이 극장가를 휩쓴 2023년의 경험에서 봤듯이 현재 한국 극장가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장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한국의 젊은 관객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성 팬이 된 현상은 시간은 비싸지고 선택은 더 예민해진 동시대의 조건과 맞닿아 있다. 이들이 극장을 떠난 이유는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라 체험의 부재 때문이다. 2030세대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서사보다 스스로 발견하는 감각을 선호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 지점을 잘 파고든다.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세계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주인공은 목적을 잃고 윤리는 불완전하며 결말은 종종 허무하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체인소 맨: 레제편’의 흥행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목표 없는 주인공, 주변 인물들의 반복되는 배신과 죽음, 더 나빠지는 삶이 영화에 그려진다. 인권과 젠더 감수성의 기준으로 보면 불편한 요소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서사는 젊은 관객에게 묘한 쾌감을 준다.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보상받고, 올바르면 구원받는다는 도식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 대신 폭력과 액션이 터뜨리는 즉각적인 감각이 전면에 놓인다. 이는 청년세대가 느끼는 동시대적 리얼리즘에 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오타쿠의 은신처가 아니다. 2030세대에게 일본은 여행과 대중문화로 이미 친숙하며 팬데믹 시기 OTT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상적 시청 경험이 됐다. 극장에서 이를 극장용 버전으로 다시 보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연속이다. 한국의 극장은 현재의 급격한 변화를 잘못 판단해 왔다. 메시지와 완성도를 강화하면 관객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집에서 눕고, 멈추고, 재생하는 관람 방식은 이미 뉴노멀이 됐다. 이를 밀어낼 힘은 ‘더 나은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경험’에서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대형 스크린과 사운드가 만드는 감각적 밀도, 그리고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 집단적 반응을 만족시킨다. 극장의 표값 논란은 결국 체험의 문제로 환원된다. ‘어쩔수가없다’의 골든글로브 3개 부문 후보지명만으로는 타개하기 어려운 한국영화의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서 체험이 있고 발견이 있으며 참여할 여지가 있는 극장의 재설계가 절실해진 이유다.

[삶, 오디세이] 그루터기에서 시작되는 기쁨

한 해를 돌아보면 기쁨이 아닌 다른 감정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웃기보다 울 때가 더 많았고 감사보다 근심과 걱정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만남보다 이별이, 열매보다 상실이 더 가까이 있었다. 그 자리는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그루터기’(이사야 11, 1)와 같다. 잎도 꽃도 열매도 사라진 자리 말이다. 한때 풍성했던 삶의 흔적만 남겨둔 채 베어진 밑동처럼 적막하게 남은 자리 말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제 끝이구나.’ 그리고 그 끝에서 고개를 숙이고 깊은 한숨과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작은, 그러나 전혀 새로운 희망을 건넨다. 그루터기에서 새싹(이사야 11, 1)이 돋아난다고 말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는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신다. 적막한 절망이 드리워져 있던 곳에서, 끝이라 여겨졌던 곳에서 미세한 생명의 싹이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새싹이자 우리의 눈물자리와 같은 그루터기에서 움튼 햇순이다. 그분은 조용히 말씀하신다. ‘네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끝처럼 보이는 이 자리에서 나는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종종 기쁨을 거창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은 새싹 한 줄기의 침묵 같은 기쁨, 아픔 속에서 잔잔히 스며드는 위로의 기쁨이다. 어느새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 힘이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 9, 12).”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기쁨이 완벽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부족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는 은총, 곧 선물임을 알려준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우리의 눈물 앞에 오신 까닭은 우리의 그루터기 같은 마음을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다.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성탄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하는 새로운 구원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세계 곳곳에서 이 노랫말 가사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힘차게 외쳐 부른다.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 기쁨은 멀리 있지 않다. 그루터기 같은 내 삶의 눈물자리 한가운데, 이미 와 계신 그분 안에 있다.

[삶, 오디세이] 기다림의 골든타임

‘골든타임(Golden Time)’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뜻한다. 이 시간을 놓치면 회복이 어렵거나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의료 현장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 말은 응급 상황에서 골든타임을 놓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아침, 테니스 레슨을 마친 뒤 갑작스러운 전신 무력감과 심한 가슴 압박이 찾아왔다. 9년 전 심근경색으로 스텐트 시술을 받았던 경험이 있어 증상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시 운동을 멈추고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골든타임 안에 도착해 긴급 시술을 받을 수 있었고 의료진의 도움으로 무사히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지금도 회복의 골든타임을 잘 지키기 위해 의료진의 조언을 따르며 몸과 생활을 관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골든타임을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삶에는 그와 반대로 속도를 늦춰야 지켜지는 골든타임, 곧 ‘기다림의 골든타임’도 존재한다. 며칠 전 TV 프로그램에서 90년대 음악계를 풍미했던 한 가수의 일화가 소개됐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였던 ‘내 인생은 나의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노래였다. 교육심리학에서는 청소년기의 정서 발달에도 골든타임이 있다고 한다. 이 시기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때로는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청소년의 외침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자기 삶을 찾아가는 과정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지나치게 억압하면 자녀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다시 회복하기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해진다. 성경의 역사 속에도 기다리지 못해 더 큰 것을 잃어버린 이야기들도 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불안과 압박 속에 있었다. 블레셋의 대군을 보며 병사들은 공포에 휩싸여 하나둘 흩어져 버렸고 약속한 시간이 됐는데도 제사를 집례해야 할 사무엘 선지자는 오지 않았다. 사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스스로 제사를 드렸다. 그의 결정은 당시에는 불가피한 행동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로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 됐고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세웠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지킬 수 있었던 골든타임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와 즉각적인 답을 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신속하게 돌아가다 보니 기다림을 하나의 능력으로 보는 시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은 서두를수록 틀어지고, 기다릴수록 더 선명해지는 법이다. 건강에서도, 관계에서도,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서도 기다림이라는 골든타임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 해의 문턱에 선 12월은 우리의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다. 너무 빠르게만 달려오느라 놓친 것이 없는지, 기다려주지 못해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볼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골든타임을 맞고 있는 것이다. 변곡점에 선 이 시간에, 서두름을 잠시 내려놓고 새해를 준비하기 바란다. 기다림을 잘 지킨 사람에게는 더 단단한 내일이 열릴 것이다.

[삶, 오디세이] 업에서 법으로

불교에서 인간의 삶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업’이다. ‘업’의 원어인 ‘Karma’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 있던 통념이다. 일반적으로 ‘행위(行爲)’라고 번역한다. 즉, 업은 우리의 행위(행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서는 업이 사람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한 사람이 태어나면 그의 집안, 성별, 이름 등에 의해 모든 것이 이미 결정돼 있다고 여겼다. 이렇게 업을 차별적이고 부정적으로 사용해 만든 것이 ‘카스트’라는 신분제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카스트 제도는 한 사람의 ‘태어남(출생신분)’에 의해 모든 것이 정해지고 그 태어남은 전생의 업의 결과이기에 이번 생에도 그 업대로 이어진 삶을 살아야 하고 결국 다음 생에도 이번 생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여긴 차별적 신분제도다. 지금 사람들이 이런 카스트에 대해 들으면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불평등한 제도라고 여길 것이다. 그럼 인도인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우리보다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다. 바로 카스트의 불평등이 불평등인지 느낄 수 없고 사회 전반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가르치고 여기게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느껴지지만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점차 그 불평등한 제도 속으로 자신을 서서히 밀어넣어 끝내 그 제도의 일원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2천600년 전 태어난 태자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청년은 그렇게 고정돼 있고 결정된 삶과 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출가해 수행한 끝에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맨 처음 한 것이 바로 사람은 ‘태어남’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에 의해 삶이 만들어진다고 설하였고 그 가르침이 훗날 불교라는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고정적이고 정해진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모든 것은 변하고 노쇠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삶과 힘을 갈구하지만 그런 고민의 순간에도 결국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살아 있는 모든 시간 우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살아감이라는 것이 무엇을 하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르고 놓치는 순간이 많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한순간도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 하는 2025년과 맞이할 수밖에 없는 2026년의 사이를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한 찰나도 허투루 놓치는 시간 없이 모든 일상을 업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법으로 행위하며 이끌고 가는 시간으로 살아가야 한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업이라 해도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법의 자리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내일의 삶이 나타날 것이다. 살아있기에 살아가도록 업이 아닌 법으로 지금을 행위하여 2025년 연말의 오늘을 살아가자.

[삶 오디세이] 독립영화의 조용한 반격

극장 산업의 침체는 팬데믹 이후 변화한 관객성과 밀접하다. 팬데믹 동안 OTT에서 장르성이 뚜렷한 콘텐츠를 손쉽게 접한 관객은 더 이상 극장까지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돈과 시간을 들여 외출할 만큼 확신이 드는 작품이 아니라면 발걸음은 집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 클릭 한 번으로 시청을 시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바로 멈춘다. 편리하지만 공허한 풍경이다. 그래서 화제도 빠르게 불붙고 금세 꺼져 버린다. 이 환경을 위기로 보는 시각이 크지만 또 다른 변화를 품고 있다. 극장의 필연적 쇠퇴 속에서도 관객은 더 신중하게 영화를 고르고 더 깊게 작품을 만난다. 유행 따라 소비하던 방식은 힘을 잃고 영화를 하나의 세계로 대하는 시네필의 태도가 새로 부상하고 있다. 2025년은 독립예술영화가 작품성과 관객 동원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만든 해처럼 보인다. 계절마다 시대정신과 실험정신을 품은 영화들이 극장을 지켜냈다. 올해 큰 울림을 준 작품들은 ‘아침바다 갈매기는’(박이웅), ‘여름이 지나가면’(장병기), ‘3670’(박준호), ‘3학년 2학기’(이란희), ‘세계의 주인’(윤가은), ‘사람과 고기’(양종현) 등이다. 이 영화들은 사회적 소수자와 노동계급을 중심에 놓고 현실의 문제를 진지한 리얼리즘으로 응시한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젊은 어부를 위해 침묵을 택하는 괴팍한 노인을 따라간다. 양희경·윤주상 등 중견 배우들의 앙상블, 이주 외국인 여성과 청년 노동자의 삶이 교차하며 바닷가 마을의 비극과 이웃의 연대가 잔향을 남긴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소년들이 겪은 한여름 해프닝을 통해 ‘어른의 규칙 밖’에서 벌어지는 비정함을 보여준다. 10대 소년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3670’은 탈북한 게이 청년이 정체성을 찾아 게인 친구들과 만나다가 고립및 상처와 맞닥뜨리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어디에나 살고 있을 이웃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3학년 2학기’는 특성화고 실습생의 노동 현실을 조용히 파고든다. 대졸 중심의 고용 구조에 가려진 청소년 노동 문제를 진지하게 드러낸다. 올해의 영화로 불릴 만한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다움의 허구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큰 상처를 겪은 여고생이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를 스스로 증명해 내는 기특한 영화다. ‘사람과 고기’는 박근형, 장용, 예수정 등 노년 배우들의 힘으로 빛을 발한다. 평생 열심히 살았으나 고기 한 점 맘 편히 먹지 못하는 노년이 된 이들의 치기 어린 행동은 웃음과 슬픔이 묘하게 섞인 해방감을 안긴다. 이 여섯 편의 영화는 스펙터클보다 인물의 심리와 관계를 좇으며 도파민 소비에 길든 감각을 향해 거꾸로 나아간다. 여백을 남기고 인위적 연출을 줄였으며 절제된 대사와 현장 사운드, 침묵의 리듬을 내세운다. 로컬의 감각도 핵심이다. 지역 소도시, 공장, 학교, 바다, 골목 같은 장소가 익숙하면서도 갇힌 공간처럼 그려지고 그 안에 삶의 무게가 켜켜이 자리 잡는다. 교훈보다 체험과 공감을 중시하는 내러티브다. 천만 관객 영화는 신화가 됐고 중심이 흔들리자 작은 영화들이 균열을 만들고 있다. 한국 영화는 플랫폼 시대에 더 작고, 더 느리고, 더 일상적인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산업은 위축됐지만 감각은 깊어졌고 영화의 폭은 오히려 넓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쇠퇴가 아니라 조용한 반격이다.

[삶, 오디세이] 죽음을 마주하며 배우는 삶

가톨릭교회에는 ‘성월(聖月)’이라는 개념이 있다. 특정한 달에 특별한 지향을 두고 신앙 안에서 기념하는데 11월은 ‘위령성월’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다. 매년 위령성월이 다가올 때마다 필자는 자연스레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을 기억하는 이달은 역설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문하게 된다. 호주 간호사 브로니 웨어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여러 해 동안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돌보며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공통으로 하는 후회를 기록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들에는 ‘돈을 더 벌었어야 했는데’, ‘좋은 집에서 살고 고급 차를 탔어야 했는데’, ‘대통령이 되고 사장이 돼야 했었는데’같이 돈, 물질, 지위에 관한 말이 아니었다. 그가 정리한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다섯 가지 후회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기대했던 삶이 아닌 진정한 나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친구들과 계속 연락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더 행복해지도록 내버려뒀더라면 좋았을 텐데’ 였다. 그는 이 후회들을 단순히 세상에 알리려고 쓰지 않았다. 그는 많은 이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행복이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 글을 썼다. 안락함을 주는 삶의 익숙한 방식과 습관에 갇혀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진정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선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삶은 선택이며 그 선택이 우리의 삶을 이루기에 의식적으로, 현명하고 솔직하게, 진정 자신이 바라는 행복을 잘 선택하라고 힘줘 말한다. 가수 고(故) 신해철씨도 생전에 한 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히 꿈을 이루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꿈이 곧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신은 네가 무슨 꿈을 이루는지보다 네가 행복한지 아닌지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니 꿈을 이룬다는 성공의 결과보다는 자신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꿈과 행복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많은 이들이 꿈과 목표를 향해 달리느라 자신이 진정 바라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상에서 오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행복마저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통으로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며 매일의 선택 속에 있다고 말한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위령성월,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기 바란다. ‘삶의 마지막 순간, 미소 지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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