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신당' 감상법

친노 성향의 민주당 개혁파 의원 22명이 앞장 선 신당 추진의 종착역을 속단하기는 이르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내 후보 경선 때 이미 점지했던 게 신당이다. 설사, 당장은 안되어도 언젠간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지금 당 대표까지 거명되는 모양이어서 정동영, 김근태 등 이름이 들린다. 궁금한 게 있다. 신당이 어떠한 당이냐는 것이다. 보수정당인지, 진보정당인지, 아니면 지금의 민주당처럼 보수·진보가 뒤섞인 짬뽕정당이 또 되는 것인지 이것을 알 수 없다. 진보정당의 색깔을 자신있게 들고 나서면 신당 창당의 이유는 된다. 개혁은 개혁파 의원들만의 전매 특허품이 아니다. 개혁은 보수 정치인, 보수정당도 한다. 다만 보수세력은 점진적 개혁, 진보세력은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예컨대 국회의원 선서에 걸맞지 않은 캐주얼 차림으로 나서는 무례함이 개혁적인 건 아니란 사실이다. 이런 류의 개혁신당 명분같으면 신당창당의 설득력이 없다. 유행되는 요즘말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다시 헤쳐 모이자는 것 같다. 그건 좋지만 그 코드가 이념 중심이 아니고 사람 중심의 코드여서는 패거리 붕당이지 정당다운 정당은 될 수 없다. 건국 이후 숱한 정당이 사람 따라 권력 따라 명멸하였다. 이에 또 하나 더 보태어 5년 뒤면 깨질지 모를 신당일 것 같으면 아예 만들지 않고, 비록 코드가 덜 맞아도 지금의 민주당으로 가는 게 더 낫다. 이러면서도 신당에 관심을 갖는 건 신당이 범진보정당의 색깔을 분명히 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범보수정당의 출현 또한 가능하다. 쇠꼬리보단 닭대가리 되길 원하는 지금같은 소아병적 풍토의 보수 및 진보 진영의 다당체제에서는 미래가 보이는 정치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신당 출현이 범진보세력을 결집함으로써 보수·진보 양대정당 체제로 가는 정치권 개편의 계기가 되면 한국정치사에 크게 기여하는 대전환의 획을 긋는다. 하지만 현실적 제약에 주춤거리는 신당이 돼서는 역시 아무 의미가 없다. 신당이 내년 4·15총선에서 원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 신당 본연의 순수성이 훼손되는 이질적 합종연횡의 구태 정략이 개재되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헤쳐 모이고자 한다면 어차피 이념상 코드가 안맞는 당내 보수 정치인과는 깨끗이 헤어져야 한다. 당장은 손해가 날지라도 헤어지는 용기가 필요하다. 민주당 구주류로 표현되는 호남 표를 의식하는 신당의 갈지자 걸음은 신당다운 행보가 아니다. 진보세력은 한나라당 안에도 있고 한나라당은 이 점에서 신당 출현을 심히 경계하는 것 같다. 그것은 신당충격이 당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로 인해 자신들 당내 지위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 기왕 신당을 만들려면 한나라당에 그같은 일대 충격을 주어 정치권의 대폭발이 일어나도록 하는 그런 신당이 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민주당도, 한나라당도 그밖의 군소 정당도 모두 없어져 보수 대 진보 양대 산맥의 정당으로 헤쳐모이는 것이 발전적 정치권 개편이다. 만약 이를 위한 신당이 되고자 한다면 영남과 호남을 번갈아 쳐다보는 수서양단의 눈치놀음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또 철새 신당이 아니고 텃새 신당이 되게 할 요량이면 진보정당을 내세우는데 좌고우면할 이유 또한 없다. 신당 추진 세력은 객관적으로 이미 드러난 색깔을 보호색 삼기보다는 공격적 명분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말 그대로 친노 성향의 집단이 추진하는 짬뽕 신당에 그쳐서는 그 수명 역시 임기와 함께하는 단명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신당 작업이 정치사상 찻잔의 미동일 것인지, 빅뱅의 폭풍일 것인지를 두고 보는데에 감상의 초점이 모아진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그에게 좀더 여유를

청와대 주인이 바뀐지 이제 꽉 찬 두달이 된다. 생소해 보인다. 새 주인이 그렇게 해보이기 때문이다. 전에 여덟명의 주인이 있었다. 전 주인들과는 아주 딴판이다. 청와대의 예전 격식에 줄곧 순치돼 온 시각으로는 새 주인의 파탈이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러거나 말거나다. 스타일이 달라졌다. 정부를 구성하는 조각부터가 상상을 넘어섰다. 다른 건 더 말할 게 없다. 다른 그것을 일일이 여기에 옮길 필요는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미 다 아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그는 늘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떤 노여움이 있어 미소를 잃다가도 대개는 애써 이내 되찾는 ‘스마일 대통령’이다. 그것은 자신감인 걸로 보인다. 일찍이 다른 대통령들에겐 들어본 적이 없는 직설적인 표현·투박한 어투 등, 이런 것을 아마 보좌진이 점잖아 보이게 바꾸라고 해도 듣지않는 것으로 아는 소박함 역시 자신감인 것 같다. 적어도 개인적 사심은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보는 그의 확신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판단은 청와대 주인이 되기 전엔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래서 막상 대통령이 되니까 겁이 나서 이젠 듣기 싫은 소릴 못한다고 누가 그러지만 겁날 것도 없고 아첨할 것도 없다. 내가 표를 주지않은 당선자라고 해서 국민의 대통령을 초장부터 뒤 흔드는 것은 길이 아니다. 물론 걱정되는 점도 있고 아직 덜 미더운 점도 없진 않다. 그래서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당기는 역리보다는 발을 내디뎌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순리다. 뭐가 뭔지 가시화되지 않는다지만 그건 성급해도 너무 성급한 ‘빨리빨리병’이다. 이제 겨우 두달되어 정책 조율의 꽃을 피우기에도 시일이 촉박한 정부에 변화의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리다. 누가 집권해도 그런 요술쟁이 같은 정권은 있을 수가 없다. 흔히 오늘 투표하는 4·24 재·보선을 두고 정치적 평가를 말하지만 당치 않다. 세 군데의 국회의원 선거가 원내 과반 의석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투표율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을만큼 심히 낮을 수 있다. 결과에 따라 여당이든 야당이든 당내 충격은 있을 수 있으나, 여당이 이기든 야당이 이기든 그것을 새 정부 평가로 찍어다 붙이는 비약은 편의적 형식 논리다. 정작 일은 이제부터고 앞으로 예상되는 변화는 필연적이며, 변화를 두려워 해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평가는 적어도 1년이 지난 내년 4월총선이 그 시기다. 그 때까지는 여유를 주어야 한다. 공정한 심판은 선수가 기량을 다해 힘껏 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고 또 그럴 충분한 시간을 갖도록 해야 가능하다. 선수의 지엽적 단점을 힐난하길 일삼고 그로 인해 시간을 빼앗아선 누가 선수이든 불공정하다.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책임 또한 막중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권한 행사가 자신의 책임으로 귀납되는 대통령이 자신의 소신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언젠가 여기서 이런 말을 했다. 흐르는 강물의 물줄기를 보면서 더러 거꾸로 맴돌기도 하는 강변의 물을 보지말고 강심의 물을 보라고 했다. 나무 하나 하나를 보고 이러쿵 저러쿵 하기보다는 숲을 보고 말하는 것이 숙련된 비판이다. 정치문화의 발전은 물론 정치하는 이들의 책임이 크지만 이의 사회적 책임도 있다. 옛 청와대 주인들 격식에 눈익은 국민의 눈에 생소해 보이길 자청하는 새 청와대 주인에게 좀 더 여유를 주고 지켜보는 것 또한 사회적 입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중용(中庸)의 힘

사형 폐지론자는 사형수의 눈물만 보고 말한다. 사람을 생매장해 죽였거나, 떼강도가 가족들 앞에서 성폭행 했거나, 돈에 팔려 여대생의 얼굴을 벌집처럼 총질해 죽인 범행 당시의 야차같은 상황은 외면한다. 사형 존치론자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들의 범죄만 보고 치를 떤다. 종교에 귀의한 사형수가 참회하거나 시신을 연구용으로 내놔 장기는 이식용으로 기증하는 등 다시 인간으로 돌아간 간절한 모습은 외면한다. 원래의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의 구분이 따로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사람에게도 그 비율과 표출이 다를뿐 천사와 악마의 잠재성은 공존한다고 보는 것이 그간 보아온 경험법칙이다. 범죄심리학은 흉악범은 쫓길 수록이 그로 인한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더욱 위악(僞惡)적 행위를 자행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프로이트심리학의 정신분석은 인간에겐 위선(僞善)적 잠재의식이 항상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중용(中庸)은 유교에서 나온 말로 동양의 오랜 전통적 사상이다. 이 것과 저 것과의 중간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게 중용이 아니다. 이 것과 저 것을 다 흡수하여 용해하는 것이 중용사상이다. 칸트는 ‘이성이 인식의 한계를 넘어 추리적 형이상학을 이루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하여 이성의 능력을 비판한 그의 ‘순수이성비판’도 알고보면 중용의 범주다. 고대사회의 동·서양에서 공자(孔子) 아류의 중용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이 비슷하게 나온 것은 흥미롭다. 공자의 중용은 어느쪽에도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中)과 평상심을 뜻하는 ‘용’(庸)의 중용에서 ‘중’은 객관적 대상세계며 ‘용’은 주관적 자아세계로 일체를 형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 역시 그의 윤리학에서 중심사상을 이룬다. 예컨대 덕을 말함에 있어 마땅한 정도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것은 참다운 덕이 아닌 부덕으로 해석하였다. 이즈음 인간들은 예전같지 않은 생활탓인지 세상일에 한쪽으로만 치닫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강한 채 하지만 실은 약하다. 낚시에서 겉보기에는 단단한 끝대를 부러뜨리는 대어가 유연한 끝대엔 견디지 못하고 낚인다. 유연함이 단단함보다 더 강한 것은 탄력성 때문이며 이것이 곧 중용이다. 동·서양에서 비슷하게 제기된 중용사상이 서양에서는 별 볼 일이 없었고 동양에선 전래됐다. 그것은 서양은 개인주의가 강했던데 비해 동양은 집단주의가 강했던 탓이다. 그랬던 게 요즘의 우리들 역시 개인주의가 점차 강해져 중용의 관념이 퇴색해졌다. 이분법의 흑백논리에 치우쳐 내편이 아닌 세상 사람들은 적으로만 보려고 한다. 엊그제 극단적 양극화 현상을 배제하는 ‘반전·반핵 평화를 위한 시민 네트워크’모임이 36개 종교 및 사회단체 인사 등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강문규 지구촌나눔운동 이사장이 “시민운동의 생명은 몰(沒) 권력적·몰 시장적 입장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때만 유효한 것인데도 일부 시민단체들이 실수를 거듭하고 포퓰리즘의 경향에 휩쓸리면서 본연의 위치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중도적 입장에서 시민운동의 중심을 잡아 나가겠다”고 밝힌 것은 시대적 경구다. 시민운동만이 아니다. 이치는 경제활동도 그렇고 정치활동 역시 같다. 개인생활도 마찬가지다. ‘중용지도’는 세상사를 조화하는 근원적 힘이다. 이젠 첫머리에서 예를 든 사형제에 대한 개인적 입장을 답해야할 것 같다. 사형수의 참회도 그렇지만 법원의 오판(誤判)도 있을 수 있다. 집행엔 사면 등으로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나 사회방어의 균형이 깨져선 안된다. 사형제는 선언적 의미로라도 두어야 한다. (완전)폐지는 아직 시기가 아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명분과 실익

부시는 900kg 폭탄 맹폭으로 폐허가 된 지하 18m 벙크의 후세인이 죽었다고 믿을까. 후세인은 과연 죽었나, 아니면 거미줄 같은 지하통로로 이미 도망쳤을까. 그도 아니면 미 CIA의 후세인 소재 제보가 엉터리였을까. 추한 전쟁이다. 침략자와 독재자의 오기 싸움으로 생사람 잡는 게 이라크 전쟁이다. 처음 구실은 후세인이 9·11 뉴욕 테러의 배후 지원자란 것이었다. 대량 살상 무기설은 그 다음 구실이 됐다. 유엔이 사찰단을 내보냈으나 증거를 잡지 못했다. 테러 배후 지원도, 대량 살상 무기도 아무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부시는 그래도 맞다고 우겼다. 유엔이 이라크 공격을 허락하지 않자 굳이 그런 게 뭐 필요하느냐는 식으로 블래어를 데리고 침공에 나섰다. 그러나 공격 구실을 삼은 생화학전 같은 대량 살상 무기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더 다급할 때 써먹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무기가 있다는 부시의 말이 애당초 틀린 것일까. 아무튼 부시의 이라크 침공 구실은 아직 하나도 들어 맞는게 없다. 들어 맞는 말이 없다보니 이제는 이라크 국민의 해방이 눈앞에 왔다고 말한다. 후세인이 악명 높은 독재자인 건 틀림이 없다. 대통령궁도 많아 어느 궁에서는 진짠지 가짠지는 몰라도 금 세면기가 나왔다 하고, 두 아들과 측근을 앞세운 철권정치로 100% 지지율을 조작한 공개투표 등 공포와 최면으로 장기 집권하고 있는 그 또한 희대의 독재자인 것은 맞다. 후세인은 또 떠벌이 허풍쟁이다. 부시와 게임 상대가 안되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맥도 못추고 무너질 줄은 정말 몰랐다. 두더지처럼 땅속에 숨어 텔레비전 쇼의 성전 독려만을 일삼아 국민을 떼주검 속으로 몰아넣은 그는 참으로 치사한 독재자다. 국민을 보호할 자신이 그토록 없으면서 부시의 전쟁을 불러들인 후세인 역시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 독재와 무슨 상관이 있나. 유엔이 나서면 몰라도 독재를 하든 말든 남의 나라 일에 미국이 간섭할 이유는 없다. 부시는 침략군을 해방군으로 둔갑시키려 한다. 친미 이라크 정권을 세우기 앞서 미 군정을 하겠다고 한다. 미국식 정의가 마침내 군사행동으로 노골화한 것은 참으로 우려스런 현상이다. 세계는 벌써부터 부시의 다음 차례 공격 대상을 점치고 있다. 시리아가 대상일 것으로 보는 관측이 있지만 어디든 더는 안된다. 남의 나라를 멋대로 트집 잡다가 불바다로 만들며 쳐들어가 군정을 펴는 것은 날강도 같은 짓이다. 부시는 이라크 국민의 인권을 말하지만 그 자신도 인권 파탄자다. 미국에 밀입국했다가 들켜 해병대로 참전하여 이번에 전사한 외국 청년은 과테말라 젊은이만이 아니다. 미국 시민권을 얻기위해 목숨을 건 밀입국자 참전군인은 허다하다. 미 국민이 아닌 이들의 참전은 시민권을 미끼 삼은 부시의 용병인 것이다. 하지만 부시가 추하긴 해도 그 위세는 당분간 더 지속될 것 같다. 세계질서의 현실이다. 미국은 우리를 이용하려 든다. 우리도 미국을 이용해야 한다. 이것이 미국 쇠락의 미래적 역사관과 현실적 실익의 차이다. 이라크 문제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여도 우리에겐 한반도 평화가 그에 비할 수 없이 더 중요하다

목요칼럼/창호지 문화

일상적으로 쓰고있는 지금의 종이가 양지(洋紙)다. 개화기에 서양서 들어왔다. 그 때까지 일상적으로 쓰인 종이는 한지(韓紙)다. 한지와 양지는 제작 방법부터가 다르다. 한지는 물리적 방법으로 만드는 반면에 양지는 화학적 방법으로 만든다. 그러니깐 주로 펄프같은 식물섬유에 화공약품류 등 충전재를 혼입하여 초조기로 만들어 내는 게 양지다. 용도에 따라 인쇄용지, 필기용지, 포장용지, 잡종지 등으로 분류된다. 이에 비해 한지 제작은 고유의 기법으로 좀 복잡하다. 닥나무 다발을 흐물흐물 하도록 삶아 껍질을 벗긴다. 껍질을 말렸다가 다시 물에 불려 발로 밟은 다음 속껍질만 가려내어 잿물에 서너시간 재차 삶는다. 이윽고 으깨어 짜낸 끈적 끈적한 닥풀뿌리를 고루 풀어 종이를 뜰 발에 걸르면 건조해지는 게 한지다. 한지도 역시 용도에 따라 호칭이 다르다. 창문에 바르면 창호지, 족보나 고서 등의 영인본으로 쓰이면 복사지, 사군자나 화조같은 글씨·그림에 쓰이면 화선지가 된다. 요즘 한지가 보기 귀할 정도로 생산이 줄어든 것은 창호문화가 사라져 수요가 거의 끊긴 탓이다. 창과 문을 일컬어 창호라고 하나 창호가 의미하는 문은 대문이 아닌 크고 작은 방문이다. 창호는 대개가 목재며 띠살창, 격자살창, 빗살창, 숫대살창, 완자창 등 다 헤아리자면 스무가지가 넘는다. 일반의 양가에선 비교적 단순한 띠살창을 많이 썼고 양반의 사대부 집안에서는 완자창 같은 우아한 창호를 선호했다. 또 사대부 집의 방문은 여닫이와 미닫이로 된 이중구조였으나 보통사람들 민가는 그냥 여닫이 하나로 생활하였다. 바로 이 것이다. 문 한 둘의 차이는 기껏 창호지 한 두장의 차이다. 전래 가옥의 창문이나 방문은 이처럼 한지의 종이 한 두장으로 방 안과 방 밖의 경계를 삼았다. 그래도 한지는 보온과 통풍의 역할을 잘 해주었다. 한지는 물리적으로 처리돼 화학적으로 만들어 죽은 종이가 된 양지와는 달리 한지의 종이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창호지문화의 신비로움은 여전히 매력이다. 콘크리트 건물의 철대문에 나무방문으로 꽁꽁 요새화하고도 불안해 하는 이즈음의 주택구조에 비하면 창호지문화는 정말 허술하다. 하지만 한지 한 두장에 불과한 창호지문은 실로 엄청난 그나름의 역할을 다 했다. 예컨대 경세제민(經世濟民), 반정담론(反正談論) 등이 거론된 곳이 창호지 안이다. 운우지정(雲雨之情)도 창호지를 사이에 두고 나누었다. 창호지문화의 특성은 이처럼 개방형이다. 은밀함을 지키는 가운데 누수의 가능성을 선인들은 생활의 지혜로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현 주거문화의 특성은 폐쇄성이다. 철대문, 나무방문, 유리창문 할 것 없이 철저히 닫아건다. 창호지문과는 비교가 안되게 튼튼한 몇겹의 문으로 무장하고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세태가 그만큼 험악해진 탓이다. 이젠 다시 맛볼 수 없게 돼가는 창호지문화에 대한 향수가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점점 폐쇄화하는 심성을 열기위해 창호지문화를 마음의 창문삼아 눈을 크게 떠보고자 한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미국의 敵

부시의 대이라크 단독 개전 선언은 패권주의의 극치다. 유엔의 승인이 없어도 공격하겠다는 것은 ‘패권주의’ 외의 다른 말로는 설명될 수 없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임스 같은 이는 패권주의를 제국주의로까지 빗대어 반미의 세계적 확산은 로마제국의 흥망사를 연상케 한다면서 ‘미국 제국주의’의 몰락 가능성을 예고 했다. ‘선제공격이라는 새 군사 독트린, 대테러전의 확전과 같은 부시 행정부의 과격한 일방주의가 초래한 위기가 장차 제국 해체의 메커니즘이 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미국 법원은 테러와의 전쟁 빌미로 인권 침해를 일삼는 행정부의 독주에 제동을 거는 소신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트라이브 하버드대 법대 교수와 다이큐스 버몬트대 법대 교수 등은 이런 사법부의 조치를 지지하고 나섰다. 백악관은 지난해 7월 ‘세계공보국’을 신설했다. 미외교협회(CFR)가 23개국에서 조사된 반미 감정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판단함에 따라 백악관이 이미지 개선책으로 설치했다. 그러나 ‘미국이 오만하고 위선적이며 타국을 경시한다는 인식이 서유럽으로부터 극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촌에 퍼져있다’는 CFR의 보고서 내용은 여전히 시정되지 않고 있다. 9·11 뉴욕 테러로 훼손된 미국의 자존심을 일거에 회복하려는 부시의 강공 일변도는 되레 미국의 처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세계 40여국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거나 군사기지 사용권을 갖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두드러진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는 부시에 이르러선 ‘내 편을 들지 않으면 적’이라는 방자함을 공공연히 내비치는 지경이 됐다. 그러나 미국이 무서워해야 할 적은 이라크나 북이 아니다. 이라크가 미국의 공격으로 박살이 난다 하여도 지구상에서 미국의 적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레닌의 혁명은 실패한 정치로 끝났지만 마르크스 이론은 아직도 살아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큰 적이다. 퍼거슨 옥스퍼드대 교수는 ‘자본주의의 전형인 미국에서 불평등이 뚜렷이 늘어나고 세계의 상품, 노동, 자본시장이 현저히 통합된 점에서 마르크스 이론은 아직도 유효하다’면서 ‘마르크스는 예언가로는 빗나갔지만 그의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빛을 뿜는다’고 말했다. 공산주의는 이미 끝났다. 중국이나 북이나 쿠바 그리고 베트남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닌 완전히 변질된 수정주의다. 북은 김일성 주의다. 공산주의의 몰락은 인간의 성품을 부정하여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나 마르크스 이론의 망령은 늦어도 금세기 중반이면 ‘신공산주의’를 태동시킬지 모른다. 세계 재편의 이같은 과정은 필연적으로 격동과 혼란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같은 현상은 미국의 오만과 비례한다. 부시같은 사람이 미국을 오래 주도하면 신공산주의의 태동은 더 빨라질 수가 있다. 러시아에서 불고 있는 스탈린 열풍은 바로 이같은 징후의 하나다. 수백만명을 강제 이주 시키고 1천만명 이상을 죽음으로 내몬 독재자를 많은 러시아인들이 전기출간 특집방송 등을 통해 추앙하는 것은 참으로 괴이한 기현상이다. 이런 심각한 현상이 미국을 견제하였던 옛 소련에 대한 향수와 무관하지 않는 것을 부시는 책임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시가 오만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겪는 테러의 공포가 지금같진 않을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말기에 북측과 시도했던 포괄적 협상이 결실됐다면 지금같은 위기는 겪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세계질서의 미국 주도에 이유가 없진 않다. 만약 미국의 힘이 붕괴되면 지구촌은 문명충돌의 심화로 전국시대화 할 가능성이 짙다. 문제는 패권주의 의식이다. 부시는 오만과 독단과 오기를 버리는 것이 진정 세계 평화를 위하고 자국의 번영을 위하는 길임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좀 늦긴했으나 아직도 그리 늦은 것은 아니다.

목요칼럼/강심의 물 줄기를

(인권이라기 보다는) 민권변호사였다. (논리 정연하게 따졌던) 국회 5공 청문회 스타, 그리고 3당 합당 반대 등 정치역정, 패배를 무릅쓰고 우정 부산 선거구를 선택한 총선 출마의 뚝심, 그래도 그가 막상 대통령이 될 줄은 몰랐다. 대선 공식 선거전이 시작되기 전이다. 이 칼럼에서 ‘급진좌파…’라고 했다.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전국에서 벌떼깥은 (전화 또는 인터넷으로) 거친 항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생각을 바꿀 수가 없었다. 생각이 달라진 것은 그가 당선되고 나서다. 이 무렵 비난하는 독자들이 (지금도 있겠지만) 있었다. 아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비쳤다면 유감이지만, 대통령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권력에 비위 맞추고 싶을 만큼 겁먹을 생각은 없다. 개인적 입장에서는 투표 때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대통령이 될 줄은 몰랐지만 될 수도 있겠다고 여겨진 것은 투표일 전이다. 두 아들 며느리 중 큰아들 내외는 표가 갈라지고 둘째 아이 내외는 그에게 다 표가 가는 것으로 감이 잡혔다. (물론 사회적 감도 비슷했다) 당선되고 나서 보인 그의 의지는 여전히 단호했으나 언어는 순화되고 모습은 정중하였다. 전에 볼 수 없이 정리된 영 다른 면모였다. 나는 해방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제헌국회 총선을 죽창 등으로 사람을 마구 죽여가며 반대했던 공산주의자와 맞서 싸운 민족 진영의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빨갱이들의 습격 때문에 집에서 잠을 잘 수 없었고 이래서 가산마저 탕진됐다) 한국민주당 골수였던 선친은 군인이 되어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전쟁의 참화를 체험하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하지만 20대엔 한동안 진보주의자가 되려고 무던히 노력하기도 하다가 결국 나는 오늘날 보수의 입장에 서있다. 얘기가 장황한데는 이유가 있다. 보수주의도 이젠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평양 정권은 전범단체이긴 하나 과거에 집착하여 민족의 진운을 방해해서는 그 역시 죄악이다. 미국을 붙잡아야 하지만 이젠 ‘예스맨’에서 탈피해가며 잡아도 잡는 게 참다운 국익이다. 그는 당선자 시절 ‘좌파 시각은 오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예컨대 고른 성장, 분배 정의가 좌파 논리일 수는 없다. 우파도 마찬가지다. 크게 보아 사회복지 정책의 틀은 모두 이 범주 안에 든다. 세월은 시류다. 흐르는 물은 앞서기를 다투지 않지만 정체를 거부한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알고보면 거역할 수 없는 시류의 대세다. 무엇보다 이 시대는 변화를 갈망한다. 국가사회가 뭔가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새 정부가) 표방하는 개혁과 통합, 이는 모순의 관계이면서 상승의 관계다. 그러므로 정말 어렵다. 역기능이 아닌 순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는 주체든 객체든 (수술의 통증과 같은) 뼈아픈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물론 노무현 정부도 탈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내부 갈등도 있고 실책도 있을 수 있다. 때로는 의혹도 제기될 지 모르겠다. 하지만 강물의 흐름을 보려면 거꾸로 맴돌기도 하는 강변의 물을 보기보다는 강심의 줄기를 보아야 한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잘 하겠다는 사람에게) 일단은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이제 막 출발한 대표 선수에게 필요한 것은 트집이 아니고 응원이다. 지난 대선 이튿날 어느 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전화로 아들이) “어머니! 어머니 뜻대로 안되어 마음 상하시지요?” (어머니) “아니다. 네 뜻대로 된 것을 축하한다” (아들) “축하는요…축하는 5년 뒤에 봐야지요” 이런 대화는 비단 이 집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자신이 간곤했을 때를 생각하면 해답이 나온다. 청와대 주인은 아무나 되나, 그러면서도 어려운 것은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다. 좋은 대통령이 되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목요칼럼/‘흥부型’ 놀부의 광기

‘흥부전’은 작자 연대 미상의 조선시대 우의(寓意)소설이다. 아우 흥부는 착하고 형 놀부는 마음씨가 고약하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또 다르다. 흥부는 착하기만 했지 무능한 게으름뱅이다. 놀부는 마음씨가 고약하지만 근검절약하고 의지가 센 생활인이다. 형의 분별력으로 보아선 방구들만 지기 일쑤인 동생이 미덥지 않아 아버지 유산을 나눠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특히 후반기는 상민에 대한 양반의 수탈이 심했던 시기다. 흥부가 다친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얻은 박씨로 인해 졸부가 된 것은 마음씨 착한 상민에게 막연하나마 꿈을 갖게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진다. 반대로 놀부는 마음씨 고약한 양반으로 비유했던 게 ‘흥부전’ 작자의 의도로 해석된다. 현대 사회에선 흥부같은 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다. 일할 생각, 노력할 생각은 않고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흥부형(型)은 설사 마음이 고와도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놀부는 다르다. 동생이 불로소득의 요행으로 얻은 재산가운데 화초장 하나를 얻어 땀을 뻘뻘 흘리며 가져 간 욕심쟁이지만 그것도 의욕이다. 지금도 양반같은 특수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잘된 집안에선 잘되고, 어려운 집안은 역시 어렵긴 하다.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부익빈’하고 ‘빈익부’하는 상대적 사례 역시 우리들 주변에 수두룩하다. 권력 또는 금력 등 부정으로 축재한 이들도 물론 많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지금의 가진 층이 다 부정으로 재산을 모은 것은 아니다. 놀부같은 구두쇠형 근검절약으로 적수성가한 재력가는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있다. 남은 모질도록 노력할 때, 자신은 흥부처럼 게으름만 피우다가 결국 돈없는 불행한 처지를 남이 빼앗아간 탓처럼 남을 저주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무책임이다. 가령,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니고 뭣을 더 잘 하려다가 실패해 도산하는 지경이 되었다 하여도 그것은 남을 탓할 수 없는 자기 책임이다. 어려운 처지가 된 경위가 어떻든 간에 불행한 이웃들에게 사회가 되도록이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물론 당연하다. 하지만 갖지 못한 불행이 마치 사회 탓인양 사회를 저주하는 빗나간 한(恨) 풀이는 심히 위험한 대상이다. 수백명을 죽게하고 다치게 한 대구 지하철 방화참사의 50대 범인 김아무개도 역시 이런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병이 깊어 세상을 비관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신병이 깊은 게 세상 탓일 수는 없다. 이토록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 줄은 그도 미처 몰랐을 것으로 믿고싶다. 그저 깜짝 놀라게만 하고싶었을지 모른다. 무슨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지만 정신없는 것처럼 보일뿐, 정신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어떻든 정신 없는 사람이 아닌 정신있는 사람의 광기, 무작정 세상 탓으로 저주하는 맹목적 광기가 사회를 크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엔 사회정서의 책임 또한 없는 건 아니다. 예컨대 걸핏하면 입으로 쏘아대는 ‘죽인다’는 소리, 그냥 욕지거리로 하는 말이지만 그같은 거친 언어의 남발은 생명 경시 풍조의 그릇된 단면이다. 사회정서가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좀 더 사회순화에 함께 힘써야 할 연대책임이 있다. 하나, 맹목적 저주의 광기는 그들 개별적 책임에 속하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흥부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족을 먹여살릴 생각은 조금도 않은 위인이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사는 공식은 같다. 아무리 어려워도 노력하면 결국 끝이 보이게 마련이다. ‘나는 열권의 책을 놓고 무엇부터 먼저 읽을까 하고 고르는 시간에 남은 열권의 책을 다 읽는다’고 했다. 흥부같은 게으름뱅이에 놀부처럼 남의 호박에 말뚝박는 고약한 마음만 골라보탠 ‘흥부형(型)’ 놀부의 광기가 자제되어 사라지는 게 개인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길이다.

목요컬럼/발밑을 보면 어지럽다

대북비밀송금. 알려진 돈만이 아닐지 모른다. 어떻든 모든 비난이 가능하다. 어떤 조치도 역시 불가하지 않다. 알아야할 것은 알아야 하는 것 또한 맞다. 당장 눈앞의 잣대로 보면 변명이 있을 수 없다. 38선에 의해 분단된지는 58년, 휴전선에 의해 재분단된지는 50년이다. 앞으로 50년 뒤에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지금의 기성사회, 지금의 지도층이 하기에 따라 민족의 진운이 달라진다. 멀리 보아야 한다. 시대는 잣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를 위해 존재하는 잣대의 기준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역사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북진통일을 외치고, 반공·승공을 외치며, 대화의 창구를 다시 꽁꽁 닫아 빗장을 걸 요량이 아니라면 잠시라도 좀 더 멀리 보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햇볕정책은 이자리에서도 적잖게 비판했다. 그러나 지금의 논제는 과거의 과정이 아니고 결과로 드러난 현실이다. 평양 정권은 참으로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이긴 하다. 절대 불변의 원칙(남반부 혁명)에 무한 가변의(전술적) 변칙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은 좌익 타도로 건국하던 시절과는 다르다. 반세기 이상 거친 지금의 상황은 그게 아니다. 6·25 남침전쟁은 수백만의 사상자를 낸 참혹한 비극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전근대적 전쟁이었다. 만약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난다면 남북간에 상상을 초월하는 상전벽해의 대량 파괴속에 시산혈해를 이룬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장담을 못한다. 휴전선 비무장지대(DMZ) 한 곳이 50년만에 뚫려 육로가 트이고 경의선 연결을 앞두고 있다. 이 또한 북의 전술적 의도라 할지라도, 비록 갖다 퍼준 대가라 할지라도 엄청난 역사적 변화다. 뚫린 길이 다시 막혀서는 안되는 민족사적 위업이다. 그러나 이를 굳이 외면하려 든다. 성과는 외면하며 과정만 힐난한다. 그동안 공(돈)들인 것을 생각해서라도 어렵게 일군 기존의 남북관계, DMZ 개통 등은 어떻게든 유지돼야 한다. 뚫린 육로는 평화통일의 길목이다. 이 모든 것을 더 살려 나가야 하는 것이 민족의 미래 지향적 진로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누군인가를 알고 싶다. 부부간에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밝히는데 시기를 선택하는 비밀을 둘 때가 있다. 나라 망신 시켜가며 온갖 소릴 다하는 사람들 얘기 가운데 정말 듣기 거북한 게 있다. 부시가 남북이 가깝게 지내는 것을 싫어 하므로 (남북관계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말은 미국 사람이 아니고는 못할 말이다. 아니 미국 사람 중에도 그렇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다. 미국과 결코 등 돌리기를 싫어하는 우리에게 부시가 정녕 그런 것을 강요한다면 생각을 달리 해볼 수밖에 없다. 부시를 거부하는 것이 미국을 거부하는게 아니라는 판단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은 부시의 책임이다. 우리는 지금 대북, 대미의 삼각관계서 묘한 시점에 서 있다. 이 판에 대북송금을 극단으로 몰아대는 게 과연 이로운지 생각해볼 일이다. 중학교 기차통학하던 시절, 달리는 객차 승강구 난간을 붙잡고 발밑을 보면 어지럽던 게 생각난다. 시야를 멀리 보면 물론 달랐다.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가를 판단해야 한다. 발밑도 봐야할 건 봐야하겠지만, 보다 멀리 보는 큰 틀의 안목을 바라고 싶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표준국민 K씨의 불안

K모씨는 올해 환갑을 맞는다. 35년을 몸 담았던 직장을 얼마전에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자영업을 한다. 열심히 일하고 알뜰히 살면서 저축해 일가족 생활에 큰 걱정은 없다. 그동안 세금 한 푼 탈세할 줄 몰랐고, 남 못할 일 시킨 적도 없다. 부동산 투기란 것도 그에겐 먼 얘기다.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2남2녀의 자녀가 있다. 자식들도 잘 키워 군대를 마친 두 아들은 다 제 몫의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맏아들, 맏딸을 결혼시켜 며느리, 사위를 보았다. 이제 둘째 아들과 둘째 딸을 금명년간에 짝을 지어주는 게 K씨에겐 가장 큰 소망이다. 그는 정치를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차피 자기 생활과는 관계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일만 열심히 할 수 있으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좋든 나쁘든 사람은 어차피 열심히 일해야 먹고 살게 마련이라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렇다고 재미 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운동에도 예능에도 일가견이 있어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긴다. 대인관계도 원만하여 오래 된 친구들이 많다. K씨에겐 더 이상의 욕심이 없다. 그저 단란한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갖는다. 어린시절 못먹고 못살아 고생을 하다가 맨손으로 시작해 60 평생에 이룬 오늘의 가정이야말로 그에겐 성역이다. 세상 걱정이라고는 않던 그가 요즘엔 걱정이 적잖다. 세상이 하도 요란하기 때문이다. K씨는 반미주의자는 아니다. 미군이 철군하면 외국 자본의 이탈, 수출 악화로 나라가 어려울 것도 안다. 국방비 증액으로 재정에 어려움이 있게 되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든 미국을 이용해야 한다고 하지만 부시의 오만에는 치를 떤다. 부시가 걸핏하면 내세우는 고압적 자세도 싫지만, 무엇보다 남북경협을 싫어하는 부시를 K씨는 싫어한다. 부시에게는 북이 이민족 이지만 우리에게는 동족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부시는 루가 상원 외교위원장 말대로 “북에 군사력 사용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K씨는 어떤 형태이든 한반도에서 무력이 사용돼서는 안된다고 믿고있다. 함 아무개라는 국회의원이 미국에 갔다와서 한 말은 정말 이상하다고 그는 말한다. 미 행정부와 의회가 주한미군 철수를 강도높게 언급하면서 남북관계를 재고해야 한다고 한 말이 맞다면,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북을 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K씨는 북을 6·25를 일으킨 전범단체로 규정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에 집착하기 보단 현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아 남북관계의 개선을 긍정적으로 여긴다. 수십, 수백종의 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의 눈엔 남과 북이 따로 비칠지 몰라도 단일민족인 우리의 눈엔 하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상선 대북송금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이 K씨에겐 무척 불안하기만 하다. 비밀송금은 마땅히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그 역시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와서 사법처리하고, 앞으로 전직 대통령마다 법정에 세우는 게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지 궁금해 한다. K씨의 이런저런 상념은 단란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라 안팎으로 널려있는 막된 정치꾼들의 막가는 행위로 행여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지 작금의 조짐이 걱정스런 것이다. K씨는 나라의 이를테면 ‘표준국민’이다. 그리고 이런 표준국민은 K씨 말고도 많다. 정치권에서 좋은 말만 골라가며 하는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라가 안팎으로 몹시 혼란스런 시기다. 국민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정치다. K씨의 불안을 기우로 끝나게 해야 하는 것도 역시 정치다.

목요컬럼/김훈동 예총수원지부장, 그의 다짐?

김훈동 예총수원지부장, 그의 다짐? 대중예술만이 아니다. 순수예술도 마찬가지다. 관중이 없는 예술은 공허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존립의 기반이 있을 수 없다. 인성의 애환, 즉 인류의 시대적 고락이 담긴 예술이어야 관중이 있다. 다만 평가의 시기는 다를 수가 있다. 극작가 베데킨트는 19세기 후반의 자연주의, 20세기 초반의 신낭만주의 장르를 거부했다. 인습 타파의 기성 도덕관에 항거한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 선구자라는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작곡의 ‘백조의 호수’는 1893년 사후에 비로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태양의 화가’로 불리는 고흐의 정열적 작품은 오늘날 루브르박물관의 백미로 꼽히지만 생전엔 그림을 사는 이가 없어 팔지 못했다. 국내 작가 이상, 화가 이중섭의 작품 역시 사후에 그 천재성이 더욱 빛을 뿜고 있다. 물론 생전에 명성을 떨쳐 사후에도 성가를 누리는 국내외 예술인들 또한 숱하게 많다. 분명한 것은 시기가 어떻든 관중이 없는 예술은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예술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이는 또 무명에서 유명 예술인으로 가는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위대했던 예술인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한 나라의 예술 공간을 형성하는 지역사회 예술 역시 사정은 같다. 백만 수원시민을 관중으로 동반할 수 있는 예술활동의 활성화를 다짐하고 나섰다. 지역사회를 창작 기반으로 삼으면서, 모든 예술 분야의 감각을 지역사회와 접목하겠다고 한다. 예총산하 각 단체의 예술활동에 관중 참여를 어떻게든 유도해 관중이 없는 예술행사는 더 이상 없도록 하겠다고 한다. 수원시 미술전시관을 미술인이 전담하는 미술관으로 승격시켜, 작품을 기업이 구매해 미술관에 영구 임대하는 형식으로 내실을 기해 지역사회 미술의 메카로 만들겠다고 한다. ‘예술인 섭외창구’를 두어 각 기업이나 단체행사 때 연예사회, 악단연주, 음악공연, 작품낭송, 국악명창, 무용발표 등 공연예술 지원으로 비전업 예술인들을 돕겠다고도 한다. 수원예술문화축제를 ‘페스티벌 시티 수원’으로 개칭, 속이 꽉찬 전향적 축제행사로 예술인 저들만의 고독한 잔치가 아닌 신바람 나는 지역사회의 잔치로 승화시키겠다고 한다. ‘예술학교’와 ‘예술감상법강좌’ 등을 공공건물을 이용하여 수시로 개설, 청소년과 기성인들의 예술 소양을 기르겠다고도 한다. 전업 예술인을 위한 예총발전기금 등을 조성하고 수원 지역사회의 유력 인사로 100인의 ‘수원예술발전위원회’를 구성, 지역예술발전의 초석으로 삼겠다고 한다. 각 기관 단체 등에 활발한 로비로 지역예술을 위한 행정적 뒷받침도 얻어내겠다고 한다. 얼마전 유력한 경쟁자와 가진 예총 대의원 투표에서 16 대 14표로 2표를 앞서 뽑힌 김훈동 예총수원지부장의 당찬 신임 포부다. 농협경기지역본부장을 마지막으로 30여년 몸담았던 농협을 떠났다. 지난 총선 땐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문인지 자신은 정치인도 정치꾼도 아님을 강조한다. 대학시절 시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만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시집으로는 ‘우심’(雨心) ‘억새꽃’ 등이 있다. 연부역강한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대부분의 위대한 국내외 예술인들은 지방출신이었다. 시민과 함께 하는 예술의 활성화와 더불어 지역사회 여러 분야의 예술인들이 앞으로 평가받는 두각을 나타낼 계기가 되면 좋겠다. 그의 다짐을 지켜보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정몽준의 '축구.정치' 혼선

대한축구협회는 사단법인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다. 30여 경기종목 단체가 가입된 그 중 일원의 스포츠 단체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취임 이후 한국축구는 그의 재정지원에 힘 입어 괄목할 성장을 보였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으로서 한국 축구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축구의 위상을 드높였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의 한·일 공동 유치에 이어 이룩해 보인 한국축구의 4강 위업은 기적같은 신화를 실증,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토록 월드컵 본선 경기의 단 1승에 목말라 했던 한국축구가 대망의 16강 벽을 넘어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연파하면서 8강을 뚫고 4강 대열에 오르는 파죽지세의 승승장구로 국민은 온통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었다. 지난해 6월은 정말 행복했다. 이 국민적 드라마를 보여준 월드컵 대표선수들 뒤엔 히딩크 감독의 연출이 있었고, 또 그 뒤의 제작자로는 정몽준 회장이 있었다. ‘서명파’들도 정 회장의 공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통령에 출마하려거든 축구협회장 자리를 축구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일부 축구인들의 사퇴촉구 서명운동, 그것은 축구인들의 축구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충정은 불충스런 괘씸죄가 되어 중징계 처분의 철퇴가 내려졌다. 서명운동은 정몽준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치색을 띤 것이었을까.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지지하고 말고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스포츠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한 것뿐이었을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한동안 노무현 당선자와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월드컵 감격 때문이었을까.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는 안정적 변화를 갈망하는 중망이었다. 비록 단일화 작업에 패배한 뒤 노 후보 지지철회 등 갈팡질팡하는 행보를 보이긴 했으나, 한 때 그같은 중망을 받던 그가 축구협회 징계 파문과 무관하지 않은 건 유감이다. 한국축구는 내년 아테네 올림픽 출전이 당장의 과제다. 그리고 3년 뒤엔 독일 월드컵대회가 있다. 한국축구의 4강 수성엔 또 많은 난관이 기다린다. 정몽준 회장의 사퇴 가부에 대해 여기서 이렇다 저렇다하고 말할 개재는 아니다. 축구인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분명한 것은 사퇴촉구 서명인들을 중징계한 것은 정치에 큰 뜻을 품었던 것에 비해 지나치게 옹졸했다는 사실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정몽준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협회 상벌위원회에서 징계를 결정했다손 치더라도 회장이 몰랐을리 없고, 모르지 않았다면 말리는 한편 사퇴 요구를 설득했어야 했다. 지난해 협회 상벌위원회가 내린 중징계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최근 결산이사회가 추인하면서 밝혀지자 이젠 사면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축구인 150여명의 서명을 받은데 앞장선 축구 지도자는 자격정지 3년을 받은 이은성 경기도축구협회 부회장, 이풍길 전 실업축구연맹 부회장 그리고 자격정지 1년을 받은 박이천 부천 정명고 감독 등이다. 이들은 그렇지 않아도 중징계에 불복, 법정 소송을 제기하려 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설단체가 아닌 협회 회장 퇴진 요구에 축구인으로는 거의 사형이나 다름 없는 자격정지 처분이 내려진 것은 징계 사유가 될 수 없는 재량권 남용이란 게 주장의 요지다.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는 곧 미국 스탠퍼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가 있을 모양이다. 대한축구협회 회장도 사실상 기약없이 비어있게 된다. 그의 월드컵 공로가 빛바래지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은 한국축구를 위해서다. 국민통합21 대표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겹친 혼선이 무척 신경 쓰이게 들린다.

목요컬럼/정치미아와 내각제

정치미아와 내각제 이발사가 든 면도칼엔 안도감을 갖는다. 이단이 든 면도칼엔 불안감을 갖는다. 신뢰의 차이다. 면도칼 자체가 정서의 판단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고 그것을 쥔 사람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갖는다. 난데없이 모락모락 나는 내각제 연기가 이를 연상케 한다. 면도칼, 즉 내각제 자체의 제도가 좋거나 나쁘다는 게 아니다. 총선에서 다수당이 정권을 거머쥐는 내각제는 정치의 중심을 국회로 끌어들이는 정당정치의 꽃이다. 또 어느 정당이든 원내 의석의 과반수가 미달하면 연정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정권이 불안하다 철새 정치인의 횡포가 심해질 수도 있다. 대통령중심제의 폐해라 할 권력 집중을 분산하는덴 내각제가 제격이긴 하다. 하나, 성공하지 못한 경험도 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 끝에 채택된 제2공화국의 내각제는 만병통치의 민주주의 처방으로 알았다. 그러나 당시의 민주당 정권은 신·구파로 갈라져 국정은 뒷전이고 싸움질로 영일이 없었다. 장면 정권의 제2공화국은 결국 집권 9개월만에 5·16군사정변으로 붕괴됐다. 근래 있은 한나라당 이규택 총무의 내각제론 제기, 한화갑 민주당 대표의 내각제 화답은 내각제가 정말 좋아서 그러는 것으로 믿기지 않는다. 다만 내각제를 구실 삼을 뿐이다. 김종필 자민련총재의 내각제 구실과 함께하는 정치적 자구책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어떤 형태로든 정치권이 개편될 것은 능히 예견된다. 민주당이 재창당하지 않으면 신당으로 거듭나면서 그 충격이 한나라당까지 파급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헤쳐 모이는 것은 거스릴 수 없는 대세다. 다만 한나라당이 받는 파장은 정당개혁의 성취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지난 대선은 적잖은 정치미아를 냈다. 정치미아들의 합종연횡이 내각제를 내세우는 것은 낡은 수법이다. 인삼 녹용같은 선약도 시기가 있다. 시기를 잘못 맞추면 선약도 독약이 된다. 설 땅이 없게 된 정치인들의 새로운 선택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내각제 거론은 공허하다. 오늘의 자신들 입장은 결과적으로 자초한 자기책임에 속하는 일이다.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이다. 자기책임은 돌아보지 않고 공연히 붓타박만 하는 내각제 거론은 설령 정치세력화한다 해도 큰 메아리가 있을 것같지 않다. 구실에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개선과 병행하는 정당개혁, 실물적 정치개혁의 흐름을 낡은 관념으로 타고 가려하는 배는 또 뒤집히기 마련이다. 그보다는 고해성사와 같은 반성속에 선택의 신념을 떳떳이 밝히는 것이 오히려 당당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잘되면 나의 탓이고 잘못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정당 풍토 또한 이젠 사라져야 한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는 물론 과장된 얘기다. 그런데도 선풍적 인기의 시청률을 나타내는 것은 가기 책임에 비겁하지 않는 사내들의 인간미 때문이다. 정치인도 성패간에 인간미를 보여야 대중의 지지를 받는 단계가 됐다. 내각제 개헌은 물론 앞으로 언젠가는 공론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실패한 정치인일수록이 신뢰회복을 앞세워야 한다. 고통받는 처지일수록이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사가 그러한 것처럼, 시련을 두려워하는 정치인에겐 미래가 없다. 이 시점의 내각제 거론은 신뢰회복도 인내도 시련극복의 의지도 아닌 편의적 논리다. /임양은 주필

목요칼럼/경기도, '행정의 계량화' 도입을 기대한다

정보화사회의 발빠른 변화는 행정기법의 변혁을 가져온다. 행정의 계량화 역시 이같은 변화의 범주에 든다. 현대적 의미의 조장행정은 근대적 조장행정과는 비할바가 아니다. 행정학에서 새로운 개념정립이 필요할만큼 다양 다량하다. 여기에 행정수요층의 욕구 또한 부단하다. 행정의 계량화는 곧 행정의 객관화다. 종전엔 모호했던 행정의 거시지표와 중간지표, 그리고 현실지표간을 지역 주민이 알기 쉽게 체계화하고 정보화 해준다. 정책 결정에서 집행과정, 그리고 결과를 질적 양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전달한다. 이같은 과정에서 수반되는 통계적 및 시스템적 방법에 의한 분석은 투자의 우선순위, 중복투자 방지, 공공생산성을 드높이게 된다. 경기도가 이같은 행정의 계량화 도입을 밝힌 근래 보도는 신선하다. 건설·산업·환경 등을 비롯한 10개분야 36개 역점 과제에 계량화를 적용, 도민에대한 행정봉사를 한층 더 과학화하는 것이어서 매우 주목된다. 다만 유의할 점이 있다면 행정의 계량화가 정확성과 신속성을 지니긴 하나, 결국 인간의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는 도 공무원들의 판단력, 즉 그만큼 수준이 높아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지표를 예측, 프로그램을 평가하는 능력이 지속적으로 숙련돼야 한다. 특히 행정의 능률성·민주성·경제성·합목적성을 수반해야 하는 광역행정은 더욱 그러하다. 전행정구역의 도시화가 형성된 현대 사회에선 예컨대 교통도로·환경·상하수도·유통 등 이밖의 많은 분야에 행정구역의 경계가 붕괴돼가고 있다. 가령 수도권의 대기오염을 들면 경기도 자체만으로는 효과를 기할 수가 없다. 도내 기초자치단체의 광역행정을 통활하고, 다른 광역자치단체와의 조정 기능을 맡아야 하는 경기도정은 이래서 계량화된 행정의 광역주의가 더 더욱 요청된다. 주민의 자치권 신장과 행정의 효율성 증진을 함께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차기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지방분권의 실체적 구현을 위해서는 행정의 통일성을 높이는 중앙집권 보다는 행정의 민주성을 드높이는 지방정부의 광역행정 우위를 일깨우고자 하는 경기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주판 솜씨가 행정능률을 좌우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컴퓨터행정이 첨단화해가고 있다. 행정장비가 첨단화하면 행정기법 또한 첨단화해야 한다. 아울러 행정의식도 첨단감각을 지녀야 한다. 지방정부를 애써 불신하는 중앙정부 우월의 행정은 아직도 버리지 못한 주판행정의 구시대 의식이다. 거의 무한대로 도전하는 행정의 끊임없는 새로운 기능 접근은 비단 중앙만이 아닌 지방 역시 입장이 같고, 경기도는 지방의 중추의 위치에 서있다. 경기도는 또 이같은 대중앙과 더불어 지역사회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 노력이 필요하다. 상의하달과 하의상달, 즉 조정을 위한·의사결정을 위한·사기앙양 등을 위한 기능으로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 질 때, 행정의 계량화 역시 더욱 빛을 뿜는다. 손학규 지사가 취임한지 반년이 되는 지난 해는 도정파악 및 구상의 기간이었다면 올해는 가동이 본격화되는 첫해로 꼽힌다. 이에 즈음하여 행정의 계량화에 기대하는 것은 그 판단을 돕는 행정의 역동화를 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행정은 생명체다. 건강한 생명체이어야 그 행정 또한 건전하다. 그리고 행정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싱싱한 행정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은 바로 도지사 이하 9급 서기보에 이르는 모든 공무원들이다. 경기도정의 보다 더 차원높은 역동화가 있을 것으로 믿고자 한다.

<목요칼럼>DJ통신 ‘풍운아’의 편한 여생을

2003년이 눈앞에 다가온다.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5년이 다 돼간다. 새해 2월 25일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일이다. 노무현 시대의 여명속에 김대중 시대가 저문다. 만유무상(萬有無常),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이치는 지존한 통치권력의 세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목요칼럼’은 지난 5년 가까이 대통령에게 무던히도 듣기싫은 말을 많이 했다. 곧 야인으로 돌아갈 분에게 더 할 말은 없다. 생각하면 지위가 대통령이기 때문에 두려워 않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다만 두가지는 밝힐 수 있다. 하나는 권력부패다. 친족이나 인척, 측근 관리를 잘못해 그들 개인적 권력부패의 지탄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권 차원의 구조적 정권부패 시각을 부정하는 청와대측 이의를 이해하는데 애써 인색할 이유는 없다. 또 하나는 남북관계다. 칼럼자는 지금도 상호주의에 변함이 없지만 어떻든 첫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평가, 그로 인한 긴장완화에 전보다 도움이 된 사실은 동의한다. 노벨평화상 수상 역시 일부에서 더 이상 희화화하는 것은 민족자존에 대한 거역이라는 판단을 갖는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대통령의 보행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칠때마다 보는 오리 걸음은 거슬리는 말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심히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던 건 독재저항운동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 때 자동차 사고로 위장한 암살에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대가가 평생 고생하고 있는 지금 같은 걸음 걸이의 부자유다. 유신정권 당시엔 망명중이던 일본서 납치당해 마대에 담겨 발동선으로 실려 오면서 현해탄에 수장될뻔 했고, 신군부 땐 내란음모죄로 무고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 등 숱한 사선을 넘기도 했다. 처음 정치 지망생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되고는 부인 차영애 여사가 선거빚에 쪼들리다 못해 자살하는 비운을 맞았고, 재혼한 민주화 동지 이희호 여사와의 가정생활 또한 상당기간 압박과 수난의 세월로 평탄치 못했다. 1961년 강원도 인제 보선에서 가까스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마침 등록하는 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과 더불어 5대에 이은 6·7·8·13·14대 등 6선의원의 오뚝이 정치 역정을 헤치면서, 민주(구)·민중·신민(구)·통일민주·평민·신민·민주당(구)·국민회의 등을 거쳐 1998년 집권할 때까지 야당으로 일관하였다. 최종 공인학교 목포상고 졸업만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박식함은 예컨대 수차에 걸친 옥고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 학문적 탐구의 결실이다. 이같은 초인적 열정으로 인하여 대통령이 되기전 미 에모리대 명예 법학박사 등 국외 명예 법학·정치학박사 5개, 미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사회과학원 명예교수, 영국 케임브리지대 평생연구원, 모스크바대 평생명예교수 등을 고졸 학력으로 위촉받을 수 있었다. ‘김대중전집’12권을 비롯, ‘행동하는 양심으로’‘대중경제론’‘독재와 나의 투쟁’‘김대중 옥중서신’등 저서는 영어와 일어로 출간되기도 했다. 1971년 40대 나이에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추대돼 박정희 후보에게 94만여표 차이로 비록 뜻을 이루진 못했으나 3선개헌을 질타한 그의 사자후는 박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당시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에선 김 후보가 69만6천582표를 얻어 박 후보의 68만7천785표를 6천582표 앞질렀다. 40대에 뜻을 세워 이루지 못한 대권의 꿈을 70대 들어 이룬 풍운아 ‘김대중’, 그도 이제 팔순이 가까워지면서 퇴임을 앞두고 있다. 현대 정치사에서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DJ에게 역시 공과가 없을 수 없다. 역사엔 우연이 없다. 아무리 드라마틱해도 역사엔 필연적 사실로 기록된다. 이런 필연적 사실의 연속이 곧 역사다. 정치인 ‘김대중’과 대통령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당장 퇴임 직후에도 있을 수 있고 훗날 역사가 기록할 수도 있다. 간곤했던 민주화 장정의 수난, 고난했던 집권의 영광도 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두달 남긴 임기를 잘 마무리 짓고 편한 여생을 보내시기 바란다.

목요컬럼/무소유의 대통령으?

인간에게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 재산이다. 더러는 재산을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이가 없지 않다. 누구든 갖고자 하는 노후대책, 자신은 죽어도 자녀들에겐 유산으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사후대책, 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버는 것이 범부들의 인간적 상정이다. 극히 드문 예로 유산 안물려주기운동을 갖는 어느 명사들 모임이 있고, 전 재산을 장학사업이나 사회에 내놓는 독지가들도 있긴 있다.하지만 노력의 대가로 재산을 모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타고난 자연법적 권리의 순수한 욕망이다. 이제 와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더 할 말은 없다. 임기를 불과 68일 남긴 이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저 건강하길 바랄뿐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안타까운 것은 있다.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 환란극복의 각광을 받던 대통령이 처음으로 정치적 곤경에 처했을 적에 이 지면을 통해 고언했던 게 있다. 정치초연, 검찰독립의 제도화를 촉구하면서 전 재산의 사회헌납을 주청했다. 임기 중엔 청와대에서 다 생활해주고, 하야하면 국가에서 여생을 보장하는 마당에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다. 금융자산, 부동산, 아태재단까지 다 내놓으라고 했다. 그 때가 1999년 6월로 기억한다. 대통령이 한창 힘을 지녔던 시절이다. 그 후 수차 고언을 아끼지 않았으나 결국 외면됐다. 대통령 재산의 사회헌납은 개혁 표방에 큰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를 강력히 주청했던 것이다. 예컨대 개혁은 크게는 집단이익을 삭감하거나 박탈하고, 작게는 개인의 밥그릇을 줄이거나 빼앗는 기득권 침해 작업이다. 개혁은 또 모든 국민에게 고통분담이 돌아간다. 개혁을 앞장서 독려하는 대통령부터 그 자신이 뭣을 먼저 내놓고, 또 고통을 스스로 분담해 보이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국민역량을 결집할 도덕성의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패척결도 역시 같다. 대통령부터 재산을 내놓고 부정을 엄단하는 터에 누가 감히 권력형 부패를 꿈꾸었겠는가를 생각해 본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재산을 내놓은 결연한 의지로 부정부패 척결을 말했다면 공적자금을 둘러싼 무성한 비리가 지금같진 않고 두 아들이 비리에 연루되는 불행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유능한 대통령도 모든 국민에게 다 만족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집단이기, 지역이기, 개인불만을 그래도 비교적 잠재울 수 있는 상징성이 곧 재산헌납이다. 사심없이 일하는 대통령상이 담보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에도 국민적 이해를 얻을 수가 있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재산헌납을 하는 결연한 각오를 보였더라면 후계자가 ‘DJ정권 실정 문책’을 외치는 지금같은 임기말의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을 지내면 독신의 성직자에게 재산이 필요없는 것처럼 재산이 굳이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 무소유의 해탈은 곧 이기심과 자만심과 사리사욕의 기속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여기에 파벌이나 측근 또는 부정부패 같은 게 접근할 수는 없다. 대통령쯤 되면 범부로 보지 않는다. 세간엔 범부의 독지가들이 있어 그 소중한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 마당에 범부가 아니여야 할 대통령이 재산에 연연해서는 범부보다 낫다 할 수 없다. 대통령 재산의 헌납을 가리켜 “내 건 내 것이고 나라 건 나라 것”이라며 폄훼한 누구의 말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통령직의 도덕성을 외면하는 소리다. 다음 대통령이 되면 국민을 편히 잘 살게 할 것처럼 서로 다투어 기염을 뿜었지만 그렇게 판단되지 않는다.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무소유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사심없이 일할 대통령이 나오면 그것만으로도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임양은 논설위원

<목요칼럼>遷都說의 경망성, 누구맘대로?

개념의 농간(수사법·말장난)이 너무 심하다. 대통령 집무실(청와대), 중앙부처, 국회의사당을 충청권으로 옮긴다면 이건 수도를 송두리 채 옮기는 것이다. 지금의 서울이 수도가 된것은 1394년(조선 태조3년)이다. 유서깊은 600년여의 수도를 두고 천도(遷都)를 말하면서 ‘행정수도’이전이라고 호도한다. 충청권엔 선심을 쓰면서 수도권의 충격을 줄이려는 기막힌 수사적(修辭的)기법이다. 천도에 5조원이면 된다거니 턱도 없다거니, 임기내에 된다느니 안된다느니 하는 얘기는 구문(舊聞)이다. 1900년 독일 통일 후 이듬해 연방의회가 분단 이전의 수도 베를린을 다시 수도로 결정했으나 아직도 본에서 다 옮기지 못했고, 일본은 14년째 논의 중인 가운데 부정적이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캔버리 천도 18년 동안에 천문학적 수치의 돈을 들인 것 등 외국의 사례 역시 다 알려진 얘기다. 민초가 이사를 가는데도 가족들에게 물으가며 이 궁리 저 궁리를 다 한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도 유분수지, 뚱딴지처럼 수도를 이사한다는 날벼락같은 소린 해도 너무 즉흥적이다. 그저 대통령 살 집 짓고, 종합청사 짓고, 국회의사당만 지어면 수도를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은 단세포적 발상이다. 외국의 사례가 보여준 그 어려움이 그들은 바보여서 그런 어려움을 겪은 건 결코 아니다. 행정수도를 인구 50만에서 100만명 수준으로 조성한다는 것은 도시문제를 잘 모르는 소리다. 행정수도를 선민(選民)도시로 제한할 수는 없는 일, 그러고 보면 거대한 취락도시가 형성돼 충청권으로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한 교통 환경 등 갖가지 후유증이 심각해진다. 서울은 뉴욕 역할을 하고 행정수도는 워싱턴 역할을 한다는 소린 그야말로 역사를 간과한 논리의 비약이다. 서울과 뉴욕, 워싱턴과 행정도시의 대비는 생성 여건이 달라 비교가 불가능하여 말이 안된다. ‘긁어 부스럼 낸다’는 속담이 있다. 천도설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수도권은 국민총생산의 약50%를 차지한다. 전국 중소기업의 46%가 수도권에 있다. 이건 현실이다. 이런 편중이 문제가 된다면 시장원리에 의한 해결을 무리 없이 장기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수도권 지역사회의 삶의 질이 저해받는 사실을 수도권 주민의 입장에서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천도설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수도권 주민이기 때문이기 보단 비록 삶의 질에 기왕 영향을 받아도 국민경제에 긁어 부스럼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판단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 있다. 국민정서다. 유서 깊은 서울을 버리는 천도에 과연 사회정서가 동의하겠느냐는 의문이 충분이 성립된다. 부산이나 목포에서 ‘서울 간다’는 말엔 일체감이 있어도 ‘행정수도 간다’는 말엔 위화감만 갖기 십상이다. 수도 서울은 휴전선과 지척지간이다. 안보상의 문제를 지녔으면서도 그동안 잘 지켜왔다. 이런 수도를 놔두고 하필이면 쫓겨가는 것처럼 남하하는덴 국민감정이 용납하지 않는다. 서울은 통일 한반도의 중핵이다. 장차 통일돼도 서울은 여전히 수도다. 천도를 말하자면 국위가 위축해 보이는 남하보단 진취적 기상을 드러보이는 북상이 훨씬 더 낫고 지리적으로도 합당하다. 그렇지만 남하든 북상이든 수도의 천도는 거론할 일이 아니다. 북상하는 제2의 수도 기능을 앞으로 언젠가는 검토해야 하겠지만 천도자체를 말하는 것은 역사의 거역이다. 수도권 비대화를 들먹이는 천도설은 한 낱 구실에 불과하다. 한반도 통일시의 비대화를 해결할 방법은 당찮은 천도에 있는 게 아니고 북상개발에 있기 때문이다. 국민감정과 사회정서가 용납하지 않는 우격다짐의 천도설을 제기하는데도 막상 당사자인 수도권 지역사회는 입을 다물고 있다. 위세에 가위가 눌린 것인지, 아니면 하도 말같지 않아 대꾸를 안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든 행정수도 이전, 천도설은 가당치 않다.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국기(國基)와 관련한 중대사다.

목요컬럼/당근보다 쓴 약을

“내가 대통령이 되면 국민 여러분 들에게 더 많은 인내와 노력을 요구하겠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치는 당당한 대통령 후보가 없다. 대통령 자리가 무슨 부자 만드는 도깨비 방망이나 요술뭉치인 손오공의 여의봉같지 않은 바에야 혼자 무슨 수로 국민을 다 좋게 해준다는 건지, 턱도 없다. 결국은 국민이 피땀 흘려가며 노력해야 하는데도, 가만히 있기만 해도 잘 살게 해주는 것처럼 하는 말 장난은 선무당같은 헛소리다. 사태처럼 쏟아낸 공약이란 것을 정작 후보들은 다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이 방패를 뚫을 창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 창이 뚫지못할 방패는 없다’는 어느 고사의 장사꾼 말처럼 서로 모순된 내용 투성이기 때문이다. 누구랄 것 없이 다 똑같은 백화점 진열품같은 이런 선거공약을 보고 투표할 유권자가 과연 얼마나 될는지 역시 궁금하다.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선거공약을 내거는 건 물론 당연하지만 원칙적으로 신뢰가 담긴 공약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선거공약 양산으로도 모자라 어느 당이 개인 워크아웃을 3억원까지 늘려 신용불량자를 구제한다는 선거 선심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5천만원의 빚 한도로도 실효가 별로인 지경에 어느 은행이 부실을 떠안고 3억원까지 탕감해 주겠는가 말이다. 선심은 자기네가 쓰고 경영책임은 은행으로 미루는 날치기 선심은 곧 사기다. 선거 때만 되면 나오는 이런 얄팍한 속보이는 소린 이제 제발 그만 둘 때도 됐는데 아직도 한다는 소리가 기껏 이모양이다. 텔레비전 토론이란 걸 보아도 시원치가 않다. 예컨대 핵 관련의 대북정책에서 온건론이나 강경론 할 것 없이 원론적 수준의 그 말이 그 말이다. 대통령 후보다운 경륜은 들려주지 못하고 유권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은 경륜이 있다할 수 없다. 말꼬리 늘어잡기, 흠집내기, 무성영화 변사처럼 청산유수로 말하는 것이 반드시 유능한 후보는 아니다. 오늘날 영국 국민이 자랑스런 영국인으로 단연 톱을 꼽는 윈스턴 처칠이 말을 잘해서 수상을 두번이나 지낸 것은 아니다. ‘제1·2차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지만 말은 오히려 눌변에 가까웠다. 인기영합의 대중주의에 아첨하지 않는 원칙주의의 진실성 추구가 지금까지 영국 국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정치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뽑지 못한 건 국민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정치 지도자가 없었던 이유가 더 크다. 유권자들에게 듣기좋은 말만 일삼는 정치 지도자는 진실성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유능한 대통령도 모든 일을 다 잘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비록 시행착오가 있는 부분이 있어도, 설령 국민 개인적으로는 손해보는 대목이 있어도 승복감이 가는 대통령이야 하고, 이런 대통령은 대통령 자신부터 국민에게 먼저 스스로를 내던지는 도덕성 확립을 입증해 보여야 비로소 가능하다. 지금 우리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은 후보들의 당근이 아니고 쓴 약이다. 유권자들에게 퍼붓는 비굴한 모습이 아니고 소신있는 당당한 모습을 보고싶어 한다. 비굴한 후보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교만해지고, 당당한 후보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겸손해진다. 교만한 대통령은 독선에 사로잡혀 강한것 같지만 리더십을 잃고, 겸손한 대통령은 덕망을 갖추어 약한 것 같지만 강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개혁을 말하지만 개혁은 독점물일 수 없고, 개혁을 거부할 사람은 없다. 개혁은 인간사회의 영원한 과제인 것이다. 다만 이번 대선의 두드러진 특징은 있다. 텔레비전 토론에는 세명의 후보가 나오지만 결국 보혁 대결의 구도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국민 여러분 들에게 더 많은 인내와 노력을 요구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대통령 후보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에 신뢰가 가는 후보는 국민의 인내와 노력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임양은 논설위원

목요컬럼/정치 예술인지? 정치 사기인지?

노무현 정몽준, 정몽준 노무현은 그랬다. 후보 단일화 협상의 축배로 서로 어깨를 감아 술잔을 드는 러브샷을 연출했다. 그러고는 포장마차로 나란히 갔다. 그러나 동상이몽, 오월동주같은 희대의 심야 정치쇼는 그 이튿날 날이 밝으면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론조사방식 유출 공방으로 협상은 물건너간 듯한 험악한 분위기를 보이다가 일단은 다시 봉합됐다.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번 뿐만이 아닐 것이다. 단일화 협상은 첩첩산중일 게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단일화의 성공보단 실패에 대비하는듯 해 보인다. 서로가 상대에게 밀린다는 건 상상도 하지 않는다. 내쪽으로 단일화 되는 전제 속에 결렬되거나 결과에 불복해야 할 경우의 명분 쌓기용으로 뒤집어 보이기 때문이다. 즉 성공은 내가 잘해서 되고 실패는 니가 못해서 됐다는 구실 찾기 퍼즐게임의 냄새가 짙다. 그렇다고 판을 벌이지 않을 수도 없다. 설령 깨질 때 깨지더라도 판을 벌이지 않으면 단일화 거부죄로 표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맘 같아선 당장 치우고 싶어도 서로가 참고 참으며 가는데까지 끌고가는 억지 춘향놀음이 이래서 상영되고 있다. 텔레비전 토론이란 것도 그렇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은 다분히 정치적 절충이다. 선거법상으로는 특정인 낙선을 목적으로 하는 두 후보만의 텔레비전 토론이란 게 위법의 소지가 없지 않으나,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기 어려워 내린 결론의 고민이 그 속에서 묻어난다. 이래서 세번 하겠다는 것이 한번으로 제한된 텔레비전 토론이지만 도대체 뭘 토론하겠다는 건지 궁금하다. 노무현은 진보 정치인인데 비해 정몽준은 보수 정치인이다. 이미 정몽준이나 노무현의 성향이 다 드러나 있는 마당에 토론을 붙여봤자 그게 그것이다. 만약 옷 잘 입고 넥타이 색깔이나 화장에 신경쓰고, 이상한 제스처를 섞어가며 부리는 말 재주의 깜짝쇼 대결이 된다면, 그건 한낱 개그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고 무슨 공약 대결이 된다해도 어설프긴 마찬가지다. 비단 두 후보뿐이 아닌 모든 대선 후보에게 공통된 병폐가 있다. 백화점 진열품같은 공약이다. 아무리 대통령의 권력이 세다하여도 100대공약, 150대공약 같은 걸 보면 어지러워 실소가 터진다. 어느 세월에 무슨 수로 다 해내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YS나 DJ의 전철에 비추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홍문일회’라는 홍문의 잔치가 있다. 항우는 법증의 권고로 유방을 초청, 연회를 베풀면서 죽이려 했으나 유방은 장량의 계교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두 후보의 러브샷 속에 주변의 두 후보 진영은 만면에 웃음과 함께 박수를 터뜨린 그날 심야의 국회 귀빈식당은 비록 잔치는 없었지만 ‘홍문일회’를 연상케 했다. 단일화에 따른 말썽의 소지는 두고 두고 많다. 벌써부터 여론조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느 후보의 녹음으로 추정된 다부진 육성 공세가 핸드폰을 통해 횡행하곤 한다. 여론조사까지 가서 그 결과가 나온다 해도 역시 승복은 의문이다. 이토록 어렵게 보는 후보 단일화의 전망이 부정되려면 그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한다. 성공하면 어느 쪽이든 이회창과 더불어 양강 구도가 되겠지만, 실패로 끝나면 정·노, 노·정은 원수가 되는 가운데 어느 한쪽은 돌이킬 수 없는 더욱 심한 자충수의 치명상을 입는다. 단일화 협상은 야합이라기 보다는 도박이다. 두 후보는 정치사상 초유의 대도박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흐렸다 갰다하는 불연속성 기류의 연속이다. 정치는 협상이며 탁월한 정치협상은 예술이다. 물론 단일화가 된다 해도 대선의 결과는 예측하기 곤란하다. 그렇긴 하나, 실패로 돌아갈 경우엔 협상을 사기극으로 보는 객관적 시각을 면하기가 어렵다. 정치 예술인지, 아니면 정치 사기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임양은 논설위원

목요컬럼/“허물고 짓는다” 盧의 ‘속내’

민주당의 노무현이 “당을 헐고 새로 짓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참말을 말했다. 마침내 속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신당의 계절, 대선을 맞아 또 신당이 속출한다. 정몽준의 국민연합21 창당에 이어 김종필+이인제+이한동=신당설 연막이 피워 오른다. 이른바 중부권 신당론이다. 5년전 대선 땐 이인제의 국민신당, 10년전 대선 땐 정주영의 국민당이 대선용 신당이었다. 실패했다. 하물며 중부권 표방의 미니 신당이 무슨 맥을 쓰겠는가 싶다. 김종필, 이인제, 이한동의 면면은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특히 이인제는 더 한다. 만약 그가 노무현에게 당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섰다라면 오늘의 민주당이나 대선구도는 판세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도 지금은 정치 미아다. 어쩌다가 정치 미아가 된 사람들끼리 미니 신당을 만든들 협상이라는 구실의 흥정거리 밖에 더 달리 될 것 같지 않다. 이런 판에 “당을 헐고 새로 짓겠다”는 노무현의 말은 곱씹어 볼만 하다. 기왕이면 대선 전에 그러고 싶을 것이다. 본인 역시 안되면 대선 후에라도 그러겠다고 했다. 어차피 우파적 중도개혁 정당인 민주당은 급진적 좌파인 노무현의 집이 아니다. 민주당이 발을 못붙이는 PK 지역에서 그가 지역적 박해를 받으면서도 당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다만 DJ를 이념적 사부로 여겼던 관계일 뿐이다. 이제 전략상 DJ 차별화를 내거는 마당에서 노무현은 오목눈이 둥지에 자리를 튼 뻐꾸기의 본색을 나타낼 시기가 된 것이다. 반노·비노파 국회의원들이 스무명 가까이 빠져나가고, 더 나갈 판세인데도 겉으로 태연한 속셈의 연유가 이에 있다. 이나저나 반노·비노는 노무현 당으로 함께 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세상에선 탈당한 국회의원들을 철새라고 비웃고 또 비웃을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도 이유는 있다. 노무현의 급진 좌파 성향은 이 역시 여기에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런 대통령 후보와 당을 함께 할 수 없고, 그런 대통령 후보 또한 갈테면 가라고 한다면 길은 갈라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정당이 오는 12월19일의 투표에서 선택돼 집권할 것인지는 예단하지 않겠다. 기성 정당 아니면 급조 신당이 선택될 것인지는 국민이 판단할 몫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노무현의 민주당은 이미 민주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캠프 핵심엔 벌써 진보 진영이 자리잡고 있다. 보수 간판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당을 허물고) 진보 간판을 새로 다는 (당을 새로 짓는) 시점에선 비진보 정치인은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이다. 거대 보수정당에 버금가는 진보정당을 만든다는 것이 노무현의 꿈이다. 대선 후에 민주당을 허물고 당을 새로 짓는다면 그는 거의 틀림없이 권영길의 민주노동당 등 같은 진보 세력과 합당할 것이다. 사소한 이견차로 합당이 안되면 진보정당 간의 연합으로라도 손 잡을 것이 분명하다. 가족관계의 지난 영향이 당자에게 다 미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에 영향이 불가피하다면 노무현이나 권영길에겐 숙명적 공통점이 발견된다. 노무현의 대 정몽준 단일화 제의는 비단일화 책임의 면피용이다. 민추협 시절 공동의장이던 김영삼, 김대중은 단일화 여망에 서로가 “대통령 선거에 함께 나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수차 호언했다. 그러나 함께 출마했다. 결과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YS와 DJ의 호언은 내가 양보하는 게 아니고 상대가 양보하길 바라는 허풍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노무현과 정몽준, 정몽준과 노무현은 물과 기름의 관계다. 체질이 그러하다. 이들의 단일화론 역시 서로가 바랄 수 없는 상대의 양보를 전제하고 있다. YS는 일찍이 민주당을 가리켜 “망해갈 당”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지금의 민주당이 그런지 아닌지는 여기서 판단할 일은 아니다. 다만 눈 여겨 보이는 것은 “당을 헐고 새로 짓겠다”는 노무현의 속내 드러냄이다. /임양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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