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스포츠 3법과 모두를 위한 스포츠

길었던 팬데믹도 엔데믹을 향해 가고 있다. 코로나19의 터널은 체육계에는 더 어둡고 길게 느껴졌다. 어려운 중에도 베이징 동계올림픽, 카타르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의 투혼은 스포츠를 통한 사회 통합을 경험하게 해줬다. 또 지난해는 우리나라 스포츠법에서 한 획을 긋는 전환점이었다. ‘스포츠 3법’으로 일컬어지는 스포츠기본법, 스포츠클럽법, 체육인복지법 시행 원년이었다. 이제는 국민 모두가 스포츠를 마땅한 권리로 즐길 수 있고, 체육인들은 안정된 환경 속에서 스포츠를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윤석열 정부 110개의 국정과제 중 60번째 과제가 ‘모두를 위한 스포츠, 촘촘한 스포츠 복지 실현’이다. ‘모두를 위한 스포츠’라는 슬로건은 결코 낯설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유네스코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헌장에서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스포츠를 할 권리를 이야기한다. 그런데도 국정과제에서 모두의 스포츠가 이야기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가 평등한 권리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따라서 현장에서 스포츠 3법이 안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줄 제도 개선과 정비가 필요하다. 스포츠 3법 중 스포츠클럽법은 국민의 스포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스포츠클럽의 지원과 진흥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등록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 스포츠클럽으로 등록하도록 하고, 지정 요건을 충족한 지정 스포츠클럽은 정부가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로써 누구나 집 근처 스포츠클럽에서 운동을 즐기고, 전문체육인은 스포츠클럽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선순환 모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또 일상에서 스포츠를 즐기며 재능을 키워 전문선수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정스포츠클럽에서는 전문선수 발굴·육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를 통해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이 상생할 수 있는 스포츠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스포츠와 정치는 분리돼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모두를 위한 스포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스포츠클럽 진흥 기본계획’에 입각한 시행령을 수립해야 하는 지자체장과 지난해 12월 선출된 민선 2기 시·도, 시·군·구체육회장의 협치가 중요한 시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체육계와 정책 관계자들의 ‘꺾이지 않는’ 스포츠 가치에 대한 진심일 것이다. 개인화되고 분열된 시대에 스포츠는 ‘통합’에 가장 좋은 도구이며 스포츠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일상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 체육계도 이제 위축됐던 몸을 풀고 새롭게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길 바란다.

[천자춘추] 성착취 없는 세상, 여가부 존재 이유

2023년 1월1일부터 ‘인신매매 등 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성착취, 노동력 착취를 모두 인신매매로 규정해 금지하는 것이 골자다. 처벌뿐만 아니라 예방과 교육, 피해자 보호와 지원 등을 위한 정부 차원의 책임도 부여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를 비롯해 법무부, 문화체육관광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외교부, 해양수산부, 경찰청 등 여러 정부 부처의 책임이 망라된 법안이며 여성가족부는 다양한 부처의 업무와 기능 등을 총괄하는 책임과 권한을 가진다. 인신매매 중 가장 많이 발생하는 범죄는 젠더 기반 폭력인 성매매 및 성착취다. 여성가족부와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함께 만든 ‘인신매매 등 방지 종합계획안’을 살펴보면 최근 5년(2016~2020년) 동안 발생한 인신매매 범죄 3천233건 중 성매매 및 성착취가 75.7%(2천466건)로 가장 많았다. 2022년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인신매매 실태보고서에서 한국은 20년 만에 1등급에서 2등급으로 하락했다. 하락의 주요 이유는 한국 정부가 인신매매범이 강제로 저지른 불법행위 발생 시 외국인 성매매 가해자를 처벌하는 반면 피해자에게는 적절한 지원을 하지 않거나 추방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 보고서는 인신매매범이 가출아동청소년과 가정폭력 피해자 등을 상대로 술집이나 기타 유흥시설에서 성매매를 시키고 있으며,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해 피해자를 모집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흥업소 운영자나 사채업자에게 진 빚 때문에 성매매에 나서게 하는 것도 강제노동 피해 사례로 언급했다(국민일보 2022년 7월20일자 보도). 인간의 성을 상품화하고 착취하는 성매매는 인간의 존엄성을 흔드는 심각한 폭력이며 범죄행위다. 성매매는 일부 소수의 일탈 문제가 아니다. 사회안전망이 부재한 사회에서 언제든, 모든 계층에 닥칠 수 있는 사회 문제이며 인권의 문제다. 그래서 여성가족부가 필요한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인권을 위협하는 성매매 및 성착취 등의 사회 문제를 해결해 인권을 증진시켜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여성가족부는 존폐 논란에 휩싸여 있다. 여성가족부는 존재해야 한다. 여성가족부 스스로가 ‘여성가족부’를 지켜낼 힘을 결집하고 시민들과 함께 연대해 더욱 견고하게 피해자를 지원하는 등 성착취 없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천자춘추] 붕괴된 소아청소년과 살릴 방안은?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은 요즘 어린이가 아플까 봐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것 같다. 소아청소년과 의료체계 붕괴로 어린이가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등의 보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붕괴된 소아청소년과 의료체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사회 곳곳에서 저마다 주장을 하고 있다. 우선 정부(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6일부터 의료계와 본격적으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론은 ‘의사 증원’, ‘공공의대 설립’, ‘부족한 전공의(레지던트)를 전문의로 대신’ 등과 같은 정책이 소아청소년과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연일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과연 그럴까? 보다 근본적인 방안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얻으려면 건강보험제도 운영 ‘원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건강보험제도의 목적은 의료비보장이기 때문에 건강보험 재정(보험료) 확보 여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민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의료공급체계(의료공급자)의 실존 여부는 정책 수단 측면에서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건강보험 재정 못지 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의과-치과-한방-약국, 의원-병원 등과 같이 의료서비스 제공에 참여한 모든 의료공급자가 제도 참여에 따른 불만(불평등)을 갖지 않게 함으로써 제도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의료공급자 간 건강보험 진료비가 ‘골고루 분배’되도록 하는 것이 건강보험제도 운영 ‘원리’의 하나다. 소아청소년과가 붕괴된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는 것이 낮은 건강보험 수가다. 즉, 현재 소아청소년과에 대한 건강보험 진료비 보상 수준이 건강보험제도에 참여한 다른 의료공급자(진료과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의미다. 소아청소년과에 대한 건강보험 진료비 보상 수준이 낮다는 것은 ‘의료공급자 간 골고루 분배 원리’가 우리나라 제도에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기울어진 분배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조차 안 되고 있다. ‘골고루 분배’가 파악되기 위해서는 의료공급자의 수익(A: 收益·revenue)과 비용(B: 費用·expense) 파악이 선행돼야 한다. 그런데 의료공급자에게 지불되는 진료비(A)를 파악할 수 있는 빅데이터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통계로 나타내는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또 비용(B) 중 40~50%를 차지하는 의사인건비에 대한 실증적인 통계(국민보건의료실태조사)가 너무 단순하다. 따라서 정책적 활용도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심층적이고 다양한 통계 추출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의료공급자(의원급 진료과목별) 간 ‘골고루 분배되는 원리’의 작동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통계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붕괴된 소아청소년과 의료체계를 살릴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천자춘추] 새벽을 여는 환경미화원

모두가 잠든 시간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처럼 한파가 옷 속을 파고드는 날에도 비좁은 골목을 누비며 청소를 담당하는 환경미화원이다. 근무 환경의 특성상 얇은 장갑 하나에 의지하며 각종 쓰레기를 치우다 보면 깨진 유리 등 날카로운 물건에 찔려 다치는 것은 다반사고 각종 유해물질에 노출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량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도 있다. 환경미화원은 사회 기능 유지를 위한 핵심적인 필수 노동자로 지방자치단체의 사무인 생활폐기물 수집·운반 및 처리 업무를 담당한다. 이들은 자치단체 소속이거나 산하 공기업 소속 또는 자치단체에서 민간위탁한 용역업체 소속인데 이 중에서도 특히 민간위탁 용역업체 소속 환경미화원들의 고용조건과 처우가 가장 열악하다. 최근 몇 년간 인천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의 위탁을 받은 일부 업체들의 비리가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 업체들이 환경미화원의 임금을 편법으로 가로챈 방식도 다양한데 급여통장을 두 개 제출받아 하나에는 온전한 임금을 입금해 지방자치단체에 보고자료로 제출하고 다른 통장에는 적은 금액만 입금하는 수법도 있는가 하면 임금명세서에는 급식비가 포함돼 있는 것처럼 기재되지만 실제로는 지급하지 않거나 빵과 우유 정도만 지급하고 남은 금액을 착복하는 형태도 있다. 하지만 실제 이런 비리가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해도 민간위탁업체 소속 환경미화원들이 회사 측의 임금 착복 여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인건비, 피복비 등이 모두 포함된 위탁사업비가 얼마인지 모를 뿐더러 공개를 요구한다고 해도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다. 지난 2019년 정부는 ‘민간위탁 노동자 근로조건 보호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민간위탁 종사자의 근로조건 보호 및 처우를 개선하도록 했다. 이러한 취지와 목적에는 이견이 없지만 이 가이드라인의 가장 아쉬운 점은 현장에서의 ‘자율’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자칫 지방자치단체의 관리 감독이 소홀해질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된 관행을 탈피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환경미화원의 근무조건과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정확한 원가 분석을 통한 대행료 산정 기준을 마련하고 용역근로자 보호지침을 법제화하는 한편 용역업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문제 발생 시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보다 적극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각종 생활쓰레기로 가득 찬 불야성 같던 거리도 아침이면 깨끗한 거리로 변화하는 이유, 새벽을 여는 환경미화원 덕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천자춘추] 하천환경시설, 유지관리가 중요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하천의 이수 기능을 극대화했다. 동시에 고밀도 토지 이용으로 하천의 치수 기능도 대폭 확대됐다. 이에 따라 하천의 이·치수 기능은 빠르게 확대된 반면 환경 기능은 상대적으로 무시되고 약화된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경제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환경의 보전 및 복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는 과밀화된 대도시 주민들의 친수공간 필요성에 관한 욕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울에서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한강종합개발사업 등의 하천정비가 시작됐다. 이후 양재천, 수원천 등을 비롯한 국내 대도시 하천을 필두로 그와 유사한 사업들이 이어졌다. 오염하천정화사업을 시작으로 자연형하천조성사업을 거치면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며 지속된 환경부 생태하천복원사업을 비롯해 최근의 비점오염저감사업, 통합집중형오염지류개선사업, 지역맞춤형 통합하천사업, 그리고 국토교통부의 하천환경정비사업, 행정안전부 소하천정비사업 등 다양한 사업이 국고 보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환경부 소관 사업 예산으로만 보더라도 지난해 말 국회 본회의 의결을 통과한 ‘2023년도 환경부 소관 예산 및 기금운용계획’에 따르면 2022년 4천100억원이던 국가하천정비 예산이 올해엔 전년 대비 10% 증액된 4천510억원으로 배정돼 하천환경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회 승인 과정에서 이른바 ‘쪽지예산’까지 동원될 정도로 치열한 예산 확보 경쟁이 매년 수반되고 있다. 그러나 사후 유지관리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점을 우려해 정부에서는 사후 모니터링과 유지관리계획의 수립 및 이행과 평가를 의무화하는 등의 제도적 노력을 시행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특히 동력비 등 유지관리비가 많이 소요되는 시설의 경우 파손된 기계장치를 방치해 시설물이 무용지물이 되는 사례가 흔하다. 과거 오염하천정화사업이나 자연형하천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된 일부 지자체 하천 둔치의 직접정화시설들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국고보조사업의 신청 단계에서 시행 자치단체의 사후 유지관리비 확보 계획을 최우선 조건으로 검토해야 한다. 또 이에 상응해 정부에서는 설치비뿐만 아니라 유지관리비도 일부 예산을 책정해 일정 기간 지원하도록 지침 변경 및 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불어 그동안 시행된 사업의 시설물 운영 현황에 대한 전수조사를 해 방치되거나 비정상적으로 운영 중인 시설물의 재가동을 위한 유지보수 예산의 확보와 지원을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 협력하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천자춘추] 경기국제공항이 갖는 비전

나는 경기도의 국제공항이 화옹지구로 오는 것을 찬성한다. 이렇게 호기롭게 단언하는 이유는 오롯이 나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지인들이 겪었던 일화들은 불편함을 넘어 불만의 수준이었다. 배차시간에 따른 버스 예약의 불편함으로 비행기를 놓쳤다는 이야기와 김포, 인천공항까지 가는 동안 유난히 심한 교통체증으로 청주공항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쉽지 않아졌다는 이야기였다. 얼마 전 연말을 기해 제주에 다녀왔다. 김포에서 제주를 가는 것보다 수원에서 김포로 가는 것이 더 번거로운 것을 알기에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김포까지 차를 가지고 가야 했다. 고백하건대 경기국제공항이 화옹지구로 유치됐으면 하는 마음이 조급해진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군공항 이전이 아니라 국제공항 설치가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무슨 까닭인지 반대하는 입장에선 군공항에만 초점을 맞춰 반대를 하는 듯하다. 그들의 주장은 국제공항 유치로 인한 자연생태계 문제라든가 소음 및 환경오염을 이유로 들고 있는데 그것은 지난달 확정된 ‘경기남부국제공항 사전타당성조사’ 용역을 통해 판단하면 된다. 또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혐오시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더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안보를 위해 군공항을 70여년간 지켜왔던 곳의 주민들의 고충에 대해선 수수방관했다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들의 지역만 아니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을 했단 말인가. 더구나 이건 군공항 유치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국제공항으로서 미래의 그 엄청난 경제적 실익과 탄력적 발전의 가능성을 견인하게 되는 일이다. 이동에서의 편리성과 현실성 있는 관광지역으로의 전환이 지역경제의 동력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나처럼 경제적 숫자와 손익계산에 무딘 사람에게도 매력적인 제안이다. 그런 단순한 생각만으로도 국제공항 유치를 지지하는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새로운 공항이 문화예술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 공간이기를 바란다. 여행의 설렘과 고단함을 행복으로 채워주는 지역예술가들의 전시와 공연으로 더 풍성하고 격조 있는 국제공항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지역의 공항이 갖는 비전이야말로 우리가 일궈낸 역사의 한 페이지로, 훗날 손주들 여행길에 자랑이 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천자춘추] 일자리 보전이 우선이다

일자리의 위기가 오고 있다.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 전망을 2.5%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미 많은 기관들이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1%대로 전망하고 있으며 0%대로 예측하는 기관도 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22년 12월 고용동향’에 의하면 고용률(15~64세)은 68.5%로 전년 동월 대비 1.2%포인트 상승했으나 2022년 내내 전년 동월 대비 2% 포인드 상승한 것과 비교하면 낮은 수준이어서 향후 일자리의 어려움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통계자료가 아니어도 우리는 주변의 불 꺼진 상가와 연말 뉴스를 장식하는 희망퇴직 뉴스를 보면서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지속되려면 없어지는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면 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자리가 없어지는 속도가 빠르고 그 양상도 다양해 창출되는 일자리로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4차 산업과 글로벌화의 영향으로 대기업들은 고용 없는 성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산업 트렌드의 변화가 빨라져 개인이 새로운 기술을 익힌다 한들 예전과 같은 평생 고용은 어렵다. 따라서 경기의 어려움에 따라 일자리가 춤을 추면서 점차 연결고리가 약해진다. 새로운 일자리는 새로운 기술혁신을 통해 만들어진다. 인류가 경험한 1차에서 4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늘 일자리 위기론이 나타나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일자리는 늘어났다. 다만 일자리의 형태는 바뀌어 왔으며, 새로운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적응 기간은 상당히 소요됐다. 이것에 따라 국가와 개인의 운명이 바뀌었으며 우리나라는 정보기술(IT) 등을 빠르게 사회적으로 내재화함으로써 오늘날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현재의 글로벌 경제환경을 고려하면 기업들은 전략적으로 당분간 투자를 자제하며 추이를 지켜보는 상황이어서 일자리 역시 주춤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신기술을 통한 창업과 성장을 지원하는 것과 더불어 지역에 맞는 일자리 보전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크게는 대규모 사업장의 일자리 보전을 지원하고 고용 형태 등에서도 계약직보다는 정규직을 권장하는 정책을 통해 사회적 합의와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으로 (가칭)일자리진흥원과 같은 전담 조직을 만들어 복잡한 일자리 문제를 풀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당연히 혁신을 추구해야 하지만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는 시기와 같은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자리 위기에 놓인 마부의 어려움을 이해해야 하며 마부들이 자동차 기술자로 변할 수 있는 시간과 교육을 제공하는 안정된 사회였으면 좋겠다.

[천자춘추] 문화의 다양성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는 과거와는 달리 부정적인 인식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이는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다양한 배경 요인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무의식 중에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다문화라는 용어는 문화적 다양성의 가치를 주목하고 장려하는 다문화주의에 기초를 둔 긍정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지만 점차 이주민들과의 차별적인 의미를 저변에 두고 가용하는 의미가 되고 있다. 한 다문화는 이주가정을 배경으로 하는 가족과 자녀들을 대상으로 적용하는 용어로 바뀌면서 당초의 의미가 축소되고 있다. 관련 서적이나 논문 등의 자료에서 대부분 ‘다문화아동’,‘다문화자녀’ 등의 관용어로서 과용되고 있고 심지어 교육현장인 학교에서 학생 이름 대신 ‘다문화학생’으로 호명되기도 하면서 다문화아동과 그 가족들에게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경험하게 하는 용어로 변화했다. 그러나 다문화라는 용어는 단일문화주의에 대한 반성으로서,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복수의 문화, 다양한 문화를 가리킨다.  이미 세계에는 수천년 전부터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다문화 현상은 그저 원래대로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지속적으로 ‘만나고’, ‘부딪치고’, ‘교류하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상이며 전 세계보다는 ‘한 사회 내’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다문화에 대한 개념을 포괄적으로 바라보면 한국 사회는 이주민의 유입에 따른 사회구성원의 변화 경험 이전에 이미 다문화사회에서 살고 있었다. 실제 다문화의 갈등은 민족적 문화의 차이보다 오히려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자원, 권력의 위계 등에서 압도적으로 더 많이 나타난다. 다문화사회를 협의적으로 정의하면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가 성립되는 곳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하위사회집단 간 신념의 상대성을 똑같이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화를 넘어 타인이 경험하고 있는 특수한 문화적 특징을 이해하는 것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미시적인 측면뿐 아니라 사회 정의를 기초로 한 사회 통합 차원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는 다문화의 의미를 다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 사회는 이제 ‘다문화’를 넘어 ‘문화의 다양성’으로 진행돼야 하며 그들이 대한민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문화의 다양성에 관한 다양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 2067년 대한민국의 인구는 3천923만명으로 감소한다. 저출산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문화가족의 수와 외국인의 국내 거주는 늘어나는 추세다. 문화의 다양성에 관한 좋은 정책들은 그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천자춘추] 그깟 개구리 한 마리?

홍은화 수원환경운동센터 사무국장 한 나라의 생물다양성은 종종 그 사회의 건강상태를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수원에 살고 있는 생물종은 조류 122종, 포유류 15종, 양서〈2219〉파충류 19종, 어류 25종, 곤충 1천348종, 식물 1천184종(2019년 수원시 자연환경조사 기준)으로 판단된다. 3년이 지난 지금은 더 많은 지역이 콘크리트화돼 종수나 분포지역이 축소됐을 것이다. 이 중 몇몇 생물은 멸종위기에 처해 있거나 절멸 상태에 놓여 있다. 수원 서쪽 지역에서 농사짓는 농부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많던 개구리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가장 큰 원인은 개구리들이 살 수 있는 서식처가 줄어들었고 농법에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깟 개구리 한 마리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구리류를 일컫는 양서류는 기후위기 속에서 가장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생물종이다. 양서류는 물뭍동물이라 하여 물과 땅, 양쪽에서 사는 생물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가미와 폐로 호흡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과 땅이 모두 건강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또 개구리가 사는 곳은 논지역이 많으며(산간계류에 살고 있는 개구리도 있다) 논에서 개구리가 잘 보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농약과 제초제 때문이다. 물과 땅이 공존하는 습지가 사라지면 그곳을 기반으로 살고 있는 많은 곤충들도 사라진다. 이는 양서류의 먹이원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종합해 보면 농약과 제초제 살포는 사람의 먹거리와도 연관이 있고 곤충들의 서식에도 문제가 된다. 곤충들이 사라지면 수분(受粉)에 문제가 생기고 특정 생물이 대량 발생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양서류의 서식처인 습지가 사라진다는 것은 지구 표면의 기후 시스템에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개구리 한 마리가 잘 살아야 하는 자연환경은 사람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그깟 개구리 한 마리가 잘 살아야 내가 잘 사는 법이고 미래가 보장된다는 의미다. 그러니 그깟 개구리가 아니고 소중한 개구리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천자춘추] 예술을 대하는 자세

5년 임기의 대통령제와 4년 임기의 지방자치제로 운영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지난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많은 곳에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2022년 하반기에는 많은 인사가 교체되는 일을 겪었다. 문화예술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서울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여러 기관장이 교체되고 2023년이 시작된 현재도 여러 기관의 기관장을 선임 중이다. 국립단체를 제외하면 지방자치단체에선 거의 모든 곳이 공개채용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공정한 절차 속에 우수한 인재를 모시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예술단체를 이끌고 있는 시립교향악단이나 합창단 지휘자들도 선거로 단체장이 교체된 경우 자리 보전을 위한 여러 일로 인해 잡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는 예술가의 임기가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아쉬운 일이 종종 벌어지기 때문인데 예술가의 임기가 선거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과거 시립단체를 많이 경험한 예술가들은 정치에 의존하며 자리를 이어 왔고 선거가 끝나면 발 빠르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잘못된 모범을 보였기에 현재도 이를 답습하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국립예술단체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휘자를 비롯한 예술가를 행정가와 비슷하게 공개채용 형식으로 선발한다. 공개채용 절차는 예술가를 행정의 잣대인 학위와 경력만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허위 경력과 학위 부풀리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세계적인 지휘자는 지휘학위가 없다. 국내 합창음악의 지평을 연 거장 역시 지휘학위는 없다. 그럼에도 평가 시스템은 학위가 우선한다. 공정을 앞세우면서 예술을 행정의 잣대로 평가하는 시스템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술가의 자존심을 세워 줄 수 있는 위촉 시스템이 돼야 한다. 예술가를 평가할 자신이 없으면 추천위원회를 구성하든지 단원들이 추천하도록 해 책임 운영을 할 수 있도록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 예술가를 경쟁시키면 그들의 순수성이 없어진다. 지휘자는 명예롭게 포디엄(지휘단)에 세워줄 때 가장 행복한 음악을 들려 줄 것이다. 우리나라도 종신지휘자로 35년의 활동을 마감한 카라얀처럼 존경받는 지휘자가 태어날 환경이 만들어지길 소망한다.

[천자춘추] 인구소멸, 사라져 가는 농촌

시골, 아이들이 사라진다. 초등학교는 사라져 가고 읍·면도 소멸돼 간다. 어찌 이리 빨리 풍속이 변할 수 있을까. 적응이 쉽지 않다. 사라져 가는 삶의 풍경들을 이리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지난해 12월 기준 여주시 통계자료에 따르면 그해 태어난 아이가 554명이라고 한다. 사망자 수는 934명이다. 한번 더 비교해 보자. 10년 전 900명대이던 출생아 수가 2022년에는 500명대로 줄어들었다. 상상에 맡기겠다. 우리 지역에는 8개의 면이 있다. 이곳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기 그지없다. 학생 수는 급감하고 폐교가 늘어간다. 아이가 적다 보니 보육 혹은 방과 후 돌봄 체계는 거의 무방비 상태고 아이들 울음소리도 듣기 어렵다. 마을에서는 60대가 청년이요 회관에서는 70대가 막내라고 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20, 30년 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노인들이 자연적으로 사라지면 지역은 소멸이라는 것이다. 즉, 조만간 농촌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지금은 아이들 소리가 사라졌지만 앞으로는 노인들 모습도 보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정말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불러올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저 입으로만 떠들고 남 이야기하듯 흘려보내고 있다.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데 말이다.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실천을 해야 하는데 눈 가림식, 눈에 보이는 대중적 쇼(현금 살포만)에만 급급하다. 알고도 방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더 늦기 전에 바짝 긴장해야 한다. 해결을 위해 우리는 앞으로 인구정책 수립 시 두 가지 방향으로 고민해야 한다. 하나는 인구 수 자체에 대한 정책이다. 저출산 고령화,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고 이제는 대다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데도 방임하고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인구정책. 인구 추이에 따른 정책을 세워야 한다. 인구를 늘리고 줄이고의 정책이 아니라 인구 규모에 따라 수립해야 하는 정책 말이다. 특히 지방은 인구소멸도시라는 용어가 오르내리는 중대한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과 더불어 인구 추이에 맞는 도시정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예산을 잘못 쏟아부으면 결국 미래 세대에 짐이 될 뿐이다. 방법을 어떻게? 해답은 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느냐는 문제일 뿐이다. 정부의 책임과 역할이 크겠지만 민(民)과 언론도 함께 공감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천자춘추]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요즘 표현의 자유 논란이 한창이다. 국회에서 전시하려다 철거당한 ‘굿바이 전 인 서울’에서 비롯된 논란을 말한다. 야권의 전시회가 논란을 일으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7년에도 ‘더러운 잠’이라는 이름의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그림이 국회에 전시된 적이 있었고 당시에도 표현의 자유의 한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이런 논란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침해의 상충에 있다. 해당 전시 그림들의 대상은 대통령 혹은 대통령의 부인으로 이들 모두 ‘공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공인이라 하더라도 어느 선까지 자신의 인격권 침해를 견뎌야 하는지, 이 부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나 이를 국회에 전시하도록 한 야당 의원들은 해당 작품들을 풍자라고 주장하지만 풍자라 하더라도 인격권을 심대히 침해할 경우 이를 표현의 자유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재인 정권 당시를 떠 올려보자. 2019년 12월16일, 신(新)전대협 회원 김모씨가 대학 구내에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검찰로부터 약식 기소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또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비방성 전단지를 돌린 30대를 ‘모욕죄’로 고소한 바 있다. 나중에 고소를 취하하긴 했지만 대통령이 국민을 고소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논란이 됐던 사건이었다. 어찌됐든 분명한 점은 정권에 따라 표현의 자유 범주가 달라져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에 대한 비판, 비난 그리고 풍자를 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고 윤 대통령 내외를 풍자하는 그림을 전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현재의 그림들이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면 과거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풍자나 대자보도 똑같이 표현의 자유라고 봐야 하며, 이럴 경우 해당 사건들을 사법 처리하려 했던 당국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당사자가 되기 때문에 민주당을 비롯한 범야권은 이를 강력히 비난했어야 맞다. 진영 논리에 입각해 표현의 자유를 해석하면 표현의 자유 자체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논란을 계기로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회적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천자춘추] 선택이라는 고정관념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반복되는 선택이다(Life is C(choice) between B(birth) and D(death).”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이다. 나 역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사람들과 대화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아, 그때 뭐 할걸’이다. 자신이 내린 선택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연초가 되면 작년 같은 후회를 하지 않으려고 새로운 답을 찾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문득 ‘선택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주어진 소중한 삶과 인생인데 우리는 왜 맹목적으로 같은 성공을 추구하고, 같은 길을 걸어 가려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에 머물면서 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선택하며 인생을 살아가게 됐다. 비로소 이제야 정말로 내가 원하는 페이지로 내 삶이란 책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최근에도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삶의 큰 변화를 줄 선택을 했다. 그동안 살아온 내 삶과 부딪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이 선택은 분명히 내 삶에 활력을 주었고, 새로운 시야를 얻게 하는 소중한 경험을 제공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반드시 힘든 선택이 더 나은 결과 혹은 과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에 한 유명 강사의 강의를 우연히 접했다. 주제는 ‘선택’이었다. ‘사람에게 좋은 보상을 주는 선택은 대부분 어렵고 힘들지만 반대로 나쁜 보상을 주는 선택은 쉽고 재밌다’는 내용이 요지였다. 처음 들을 때는 정말로 맞는 말이라고 공감했다. 그러나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데 운동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몸이 아프면 아플수록, 운동이 힘들면 힘들수록 ‘어려운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더 어렵고 힘들다고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오히려 심하게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세상에 모든 나쁜 일은 쉽지 않다. 또 쉽고 빠르다고 나쁜 일은 아니다. 강도에게는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는 일이 쉬운 일일 수 있다. 성직자에게는 사람을 돕는 일이 쉬운 일이다. 선택에 옳은 길이 있다고 믿는 함정에 빠지지 말자. 거기에 더해 성공과 실패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본다. 미국 버지니아공대의 비즈니스스쿨인 팸플린경영대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은 하루에 몇초에 한 번꼴로 선택을 내리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 모든 선택에 옳은 정답이 있을까? 하루를 다시 살아도 완벽하게 선택할 수 있을까?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옳은 선택,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정의한 성공에 대한 부담감을 모두 내려놓자. 다만 나를 위한 좋은 선택, 결과보다는 과정이 행복한 새로운 선택을 내려보자.

[천자춘추] 우리는 무엇에 갈증을 느끼나?

엊그제 아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한 개인의 삶 또는 일상에 대한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시청하는 내내 몰입하게 만들었다. 프로그램의 무엇이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것일까. 이 프로그램은 너무 무덤덤했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버라이어티하지도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반전(反轉) 또는 어떤 특별한 사건을 통한 긴장감도 없다. 누구에게서나 또 언제든지 접할 수 있는 진짜 일상 속의 이야기를 평범하게 풀어내고 있다. 프로그램의 이런 매력이 우리의 시선뿐만 아니라 관심(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일상, 아니 아침 출근길 15분만 묘사해 보자. 자명종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일어나 헐레벌떡 주차장으로 뛰어간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중삼중 주차돼 있는 차를 헐크가 돼 민다.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지친다. 게다가 이중 주차된 차의 사이드브레이크가 걸려 있고 전화는 받지 않는다. 수차례 시도 끝에 차 주인이 내려와서 차를 빼준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긴장과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15분짜리 드라마! 어떤 드라마도 이보다 스펙터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화면 속의 드라마는 허구이고 가상이지만 방금 경험한 출근길 드라마(?)는 나에게 닥친 현실로서의 긴장이고 위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드라마를 하루 종일 경험하는 현대인은 위에서 언급한 유형의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의 지친 일상을 위로받고자 할 것이다. 그럼 과연 예능 프로그램이나 영화 또는 드라마 등을 통해 현실에서의 긴장감이 해소되고 지친 마음이 치유될 수 있을까? 메스트로비치는 그의 저서 ‘탈감정사회’에서 현대인은 자본주의의 다양한 문화장치(미디어)에 의해 제조된 가짜 감정을 소비하고 있다고 한다. 탈감정사회에서 감정은 나로부터 만들어지고 체현(體現)된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라 감정 제조산업으로부터 생산된 감정을 재연(再演)하고 소비할 뿐이라고 한다. 이 같은 탈감정사회에서 우리는 제조된 외재적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감정에 대한 갈증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마 우리가 이 예능 프로그램에 빠져드는 이유는 이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소비재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있는 감정을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또 프로그램 출연자의 평범한 경험에 우리의 감정을 이입하고 또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누군가와 감정을 동일시할 수 있는 기회가 결여된 현대인이 느끼는 공감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우리 사회가 함께 웃고 울기도 하고, 함께 기뻐하고 아파도 하는 공동체적 공감(共感)이 되살아나길 기대해 본다.

[천자춘추] 길을 잃은 이에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국 고사를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해 보기로 한다. “옛날 중국의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르던 말이 멀리 달아나 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오히려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말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한 필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자 노인은 ‘도리어 화가 될는지 누가 알겠소’라며 불안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인의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걱정하며 위로하자 노인은 ‘이것이 또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며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마을 젊은이들은 싸움터로 불려 나가 대부분 죽었으나 노인의 아들은 말에서 떨어진 후 보행장애인이었기에 전쟁에 나가지 않아 죽음을 면하게 됐다” 복잡다기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갈 길을 모르거나 길을 잃고 방황한다. 앞으로 갈지 뒤로 갈지 방향성을 잃었기에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의 정신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가피하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갈래 중 어느 하나의 길을 선택해 걸어갈 수밖에 없다. 집으로 가는 길, 학교 가는 길, 직장 가는 길처럼 단순하고 목표물의 위치가 뚜렷한 길이 있는가 하면 어느 대학의 어떤 학과를 선택할지, 어떤 직장을 고를지, 어떤 여성이나 남성을 배우자로 골라 결혼할지 등 기로마다 선택해야 하는 인생길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선택하는 길이 최선이거나 최상의 길만은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에 기반한 길도 아니다. 그렇기에 선택한 길을 걸어가다 잘못 들었다 싶어 후회하기도 하고 되돌아가기도 한다. 인생길은 가보지 않은 길이고 내비게이션이 없기에 잘못 선택하기가 쉬워 실패의 위험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먼저 그 길을 선택해 걸어가 본 경험치가 많은 부모나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 현인들이 쓴 책에서 지혜를 구하고 있다. 독불장군은 없다. 혼자서 선택한 길은 길을 잃을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 길을 잃고 헤매기보다 사전에 길을 물어 가는 것이 시간도 절약하고 위험성도 줄이는 길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잘못 선택한 길이 마냥 실패의 길로 인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벼랑 끝을 향해 가는 길만 아니라면 젊어서 잘못 선택한 길은 삶의 경험이 되고 더 커가는 데 자양분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실패를 경험했기에 살피고 고쳐 앞으로 가는 길에서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안전하고 빨리 가는 길이라 믿었던 곧고 넓은 길에서 과속하다 사고로 다치거나 죽을 수 있고 좁고 굽은 길에서 여유와 쉼이라는 위안과 평화를 얻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길로 가거나 길을 잃고 헤맬 때 빨리 인정하고 바른 길로 가도록 궤도를 수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길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 몇 번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기회는 여러 번 있다. 길을 잃거나 잘못 선택해 헤매다 또래보다 조금 늦었다고 실망하고 좌절하기보다 빨리 목표와 목적을 뚜렷이 해 힘차게 일어서 다시 시도해 보는 불굴의 정신과 용기를 갖기를 응원한다.

[천자춘추] 옳고 그름을 가려 행동해야

생각과 말이 삶을 지배한다.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도 달라진다. 한 국가의 품격이나 문화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 살고 있는 국민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 예전에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가치, 민주주의. 요즘은 너무 당연시돼 별로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민주’는 ‘민(民)’이 주인이라는 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보편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기본 이념을 머릿속에 넣고 있다. 하지만 새삼 이 말을 되씹게 되는 것은 요즘의 정치 상황이나 우리들의 삶 속에 퍼져 있는 각종 행동이 과연 우리가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민주라는 가치와 상통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데. 초심을 지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이 크다. 위정자들의 언어와 행동 속에 비치는 모습을 보면 껍데기만 수용하고 내용은 저버린 지 오래인 듯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정부는 과연 국민을 주인으로 받들고 있는가. 지방정부는 시민 혹은 주민을 주인으로 받들고 있는가. 정부나 자치단체는 고사하고, 국민이 선택한 정치가들조차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국민을 주인으로 받들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 과연 정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네 탓만 있고 내 탓이 없다.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이요, 권리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다수결의 원칙을 부정한다. 권리만 추구하지, 책임지는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도 있다. 권력욕에 찌든 지배층,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더러운 입을 통해 배설물을 쏟아 내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은 총체적으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다.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옳은 것이 그른 것이 되고, 잘못된 것이 옳은 것이라며 막무가내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는 고스란히 일반인의 삶 속으로 녹아든다. 고스란히 아이들의 놀이, 문화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정말로 심각하다 아니할 수 없는 지경이다. 미래 국가가 나아갈 방향이 권력욕에 찌들어진 상류층 모리배들에 의해 틀어지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다. 거르고 걸러 국민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자정이 필요하다. 스스로 옳은 것이 옳은 것이요, 그른 것은 그른 것임을 알고 실천하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천자춘추] 대중 수출 위기 속 기회 찾자

2022년 우리나라는 수출액과 무역 규모가 각각 사상 최대인 6천840억달러와 1조4천151억달러를 기록하며 세계 6위의 무역대국으로 도약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 연준의 금리 인상 가속화 등 수많은 대외 악조건하에서 사상 최대인 472억달러의 무역적자도 함께 맞닥뜨려야 했다. 대규모 무역적자의 요인 중 하나로 대중(對中) 무역흑자 급감을 꼽을 수 있다. 지난해 대중 무역흑자 규모는 12억5천만달러로 전년 대비 무려 230억달러 감소했다. 5월부터는 본격적인 대중 무역적자 국면에 돌입했는데 9월을 제외하고 12월까지 매달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 스마트폰 및 반도체 경기 부진 등 일시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미래 신산업 핵심 원료 및 부품에 대한 대중 수입이 급증한 점은 매우 우려스럽다. 전기차 배터리 핵심 부품인 리튬이온 축전지와 수산화리튬은 어느덧 대중 수입 상위 5대 품목으로 자리 잡았는데 중국 수입 의존도가 85% 이상이다.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기록한 와중에 대중 수출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특히 중국의 봉쇄 정책을 겪으며 중국 투자의 불확실성을 실감한 기업 상당수는 중국 현지 공장을 철수시켰다. 또 미국은 중국을 제조 생산기지로 둔 기업에 대해 압박수위를 높이고 있다. 중국이 우리 수출과 무역흑자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무역 구조가 위기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를 내포한다고 했던가. 미국 시장에서 한국산 제품이 중국산을 대체한 덕분에 2022년 대미(對美) 수출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증가했다. 중국에서 철수한 많은 기업이 베트남 진출을 확대한 결과 베트남은 한국의 1위 무역흑자국이 됐다. 우리 수출기업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틈새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지금의 대중 수출 위기는 오히려 중국에 편중된 수출을 다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도내 수출기업에는 해외 전시회가 공급망 재편의 틈새를 활용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지난해 해외 전시회에 참가한 상당수 업체는 중국 기업이 불참하면서 바이어의 관심이 한국 제품으로 대체되는 분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대중 수출 부진에 어려움을 겪는 도내 수출 기업이 해외 전시회로 새로운 시장 개척 기회를 발견하는 2023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천자춘추] 조세체납 확인, 개선 필요하다

정부에서는 집주인의 세금 체납으로 인한 임차인의 전세사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국세기본법과 국세징수법의 개정을 마치고 오는 4월1일부터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왜 정부에서는 집주인의 세금 체납으로 인한 전세사기 대책을 연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집주인의 세금 체납이 임차인의 전 재산인 전세보증금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집주인의 조세 채무 중에서도 바로 당해세가 그 주범이다. 당해세는 해당 부동산 자체에 부과되는 것으로 관련 법에 따른 ‘당해세 우선 징수의 원칙’에 의해 경매 또는 공매에 의한 주택의 매각대금에서 전세보증금보다 먼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가져간다. 임차인이 아무 대책도 없이 전세보증금에서 큰 손해를 보거나 한 푼도 건질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다행히 정부에서는 이러한 임차인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몇 가지 미흡한 문제점이 눈에 띈다. 첫째, 반쪽인 국세만 실행됐다는 점이다. 집주인의 조세채권 중 국세와 지방세가 동시에 해결되면 국민의 피해도 빠르게 줄이고 임차인이 안심하고 전세 계약도 할 수 있어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빨리 지방세 관련 법령도 정비돼 임차인이 완벽한 정책적 혜택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둘째, 현재 임차인이 확인할 수 있는 집주인의 세금 체납 사항은 임차인이 주택임대차계약을 체결한 후 임대차계약서를 지참해 확인하도록 한 점이다. 이는 계약의 메커니즘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허점이 있다. 주택임대차계약 체결 전에 집주인의 세금 체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의 보완이 필요하다. 셋째, 현재 집주인의 세금 체납에 관한 확인을 임차인이 국세청과 지방자치단체 등에 발로 뛰어가면서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택임대차계약 체결 전에 임차인이 인터넷 또는 확인 앱 등에 접근해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 보급하거나 전문자격사인 공인중개사에게 인터넷에 의한 전자적 방법으로 확인토록 해 임차인에게 설명하게 하는 등 전환이 필요하다. 또 집주인의 조세 체납 사실을 부동산 등기부에 등재해 국민에게 공시하고, 등기부 등록 날짜를 법정기일로 통일하는 관련 법의 후속적 보완도 필요하다. 정부에서는 국민 편의 위주의 현명한 대책을 마련해 새해에는 더 이상 전세사기 피해를 보는 국민이 나오지 않길 소망한다.

[천자춘추] 새해 유감

새해가 밝았다. 언제나처럼 누구나 한 해의 계획을 세우는 때다. 연말이 됐을 때 연초에 세운 계획이 나름대로 잘 실천됐다며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인생사나 사회사를 돌이켜보면, 일반인들에게 모든 일이 실제 계획대로 진행되는 사례는 많지 않다. 누구나 연초에는 용머리를 그리겠다고 의지를 불태우지만, 연말이 되어 살펴보면 용머리는 온데간데없이 뱀 꼬리만 남아 있기 마련이다. 대부분 계획은 창대했으나 실천 결과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계획에 결과가 뒷받침되지 않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어서 과도한 자책감에 괴로워할 일도 아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또다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필부에게는 계획 있는 삶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과 실천 사이의 차이가 개인이 아닌 정부나 정당에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계획과 실천 사이의 간극은 그 이상의 신뢰의 위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각 정당은 국민통합, 한반도 평화, 경제 성장, 국운 융성 등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창대한 결실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이념 갈등, 지역 갈등, 계층 갈등에서 시작된 우리 사회의 갈등이 다문화 갈등, 젠더 갈등, 세대 갈등으로 갈등의 층을 켜켜이 쌓아 올리고 있는 이른바 복합갈등의 시대이다.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인데, 시원한 해결이 무망하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더욱이 갈등을 어루만지며 통합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할 정치권은 그들 스스로가 오늘도 갈등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아마도 내일이 된다고 달라지지는 않으리라. 말로는 국민통합을 외치면서도 국민을 편 가르고 당 짓기를 반복한다. 팬덤은 결코 민주주의의 양념일 수 없다. 대화와 타협이 민주주의의 원칙이지만, 팬덤은 대화와 타협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상대를 존중하기는커녕 마치 적과 동일시하는 곳에서 타협의 예술은 꽃피울 수 없다. 타협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변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통합, 평화, 정의, 민주주의는 그 의미와 함께 이미 말 자체가 아름답다. 그래서 정치인은 이러한 용어를 입에 달고 산다. 부모가 자녀에게 참된 인간이 되라고 말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지만, 자녀를 참된 인간이 되게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그만큼 말보다 행동, 계획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인은 통합과 평화와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정치인은 필부와는 달리 계획보다 실천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새해가 지난해와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통합되고 평화로우며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천자춘추] 너무 따지지 말고 살자

현대 페미니즘의 선구자는 최초의 ‘페미니즘 선언서’로 알려진 ‘여성의 권리 옹호(1792년)’를 작성한 영국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여성에 대한 차별에 대항하고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조직적인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됐고, 크게 1세대(여성의 참정권), 2세대(사회 모든 분야에서의 평등과 성적 해방 추구), 3세대(계급, 인종 문제 등으로 확대)로 흐름이 전개돼 왔다. 그럼 현 시점에서 왜 남성혐오나 여성혐오 현상이 주로 젊은층에서 발생했을까? 많은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산업 전반에 걸친 정보화와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해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체함으로써 일자리를 빼앗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줄어든 일자리를 두고 경쟁이 격화되다 보니 좋은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이렇게 돈벌이가 시원치 않다 보니 주택을 마련할 여력이 없어 결혼연령도 늦어지고 결혼과 자녀 낳기를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 N포세대로 지칭되는 2030세대의 남성은 학업과 취업 황금기에 군복무를 해야 하는데 그만큼 투입한 시간에 비해 인센티브가 없다 보니 남성들은 군복무를 의무가 아니라 시간적 낭비, 이로 인한 금전적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된다. 그래서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손해를 본다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권과 정부에서는 젠더 갈등을 이용만 할 게 아니라 어떻게 여성들이 용인하는 선에서 인센티브를 줄 것인지를 연구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정책을 하루빨리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젠더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책만으로는 어렵다. 국민 개개인도 젠더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여성이고 자신의 아버지가 남성이다. 또 아내이기도 하고 남편이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가정은 서로 다른 성(性)이 만나 이루는 집합체다. 따라서 여성이 먼저냐 남성이 먼저냐, 아니면 가족이 먼저냐는 관점의 차이임을 인식하고 젠더 갈등의 시각에서 상호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코 극복하지 못할 어젠다는 아니다. 너무 따지지 말고, 너무 뾰족하게 생각하지 말고 상대편 입장에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하고 품어주는 역지사지(易地思之), 화해와 통합의 지혜가 필요하다.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